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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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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지역의 역사로 간주하기 어려운 두 대륙 이상이 연관된 기록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노벨상에서 수학 부문이 제외된 이유: 알프레드 노벨이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용으로 이용되어 많은 살상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노벨상을 제정했을 때, 수학 부문이 유독 제외되어있던 것이 제정 당시부터 숱한 의문을 낳았다. 한때는 그 이유로 스웨덴의 수학자인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1]가 노벨과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않았다는 뚜렷한 근거도 없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미타그레플레르가 노벨상 위원회에 직접 가담하여 수상자 선정에 참여했던 사실이 밝혀져서 부정되었다. 2024년까지 알프레드 노벨이 당시 노벨상 부문[2]을 선정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고, 선정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수학 부문이 굳이 제외된 이유는 영원한 미스터리가 되었다[3].
- 대항해시대 시기 포르투갈의 탐험사: 15세기의 포르투갈은 옆 나라인 스페인과 함께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 나라였지만, 심각한 정도로 당대의 탐험가들의 생몰년도나 그들의 탐험 기록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적다. 심지어는 생몰년도와 탐험 과정이 정확하게 알려져있는 바스쿠 다 가마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조차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던 중에, 아프리카를 경유해서 아메리카를 탐험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만큼[4], 항해 과정에 대해 의문점이 제기되는 실정이다[5]. 이는 1755년에 있었던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항해 기록을 보관해둔 기록보관소가 파괴되어서, 관련 기록들이 영구히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포르투갈의 탐험사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 바다 민족: 청동기 시대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장낸 장본인들[6]. 일단 그리스인,[7] 시칠리아 원주민,[8] 블레셋인[9] 등으로 구성된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이지만,[10]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 왜 이집트, 미케네, 아시리아 등의 지중해의 강대국들과 충돌을 빚어가면서까지 민족 대이동을 벌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11]
- 벨라 사건: 1973년에 남인도양의 공해상에서 의문의 섬광이 목격된 사건으로[12],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과 함께 냉전을 대표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이 섬광의 정체에 대해서 미국의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벨라 위성이 운석이 지구 표면에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을 인공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지만, 2018년에 호주 정부가 당시에 도축된 양고기에서 허용 수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되었음을 보고한 자료를 공개하면서 핵실험에 의해 섬광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섬광이 실제 핵실험에 의한 것이 맞다고 하면 그 당사자로 유력시되는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13]와 이스라엘 정부지만[14], 이들이 추진한 핵개발과 의문의 섬광이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이며[15], 섬광 자체도 자연적인 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에 대해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 위 디오니시우스: 서기 1세기 경에 사도 바울로의 제자였던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16]라고 자칭한 정체불명의 기독교 신학자로, 교부 철학 최후의 학자이자 훗날의 스콜라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학자로서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 문헌 기록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위 디오니시우스는 1세기 경의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인 5, 6세기 경의 사람이었음이 밝혀져서 그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17]. 일단 주류 역사학계는 그를 시리아 출신의 신학자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이전까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전부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혔던데 반해, 위 디오니시우스는 무엇때문에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겼는지가 분명치가 않아서 이에 대한 의문점도 상당하다[18].
- 정화의 대원정
- 도달한 지역: 관련 기록이 상당수 소실되면서 정화가 이끈 명나라의 대함대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가 불분명해졌다. 호주나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지만,[19] 우선 명나라의 함대가 동아프리카까지 도달한 것은 입증되었다.
- 함선의 규모: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는 정화의 대원정에 동원된 함선들이 17,000톤에 달하는 엄청난 배수량을 자랑했다고 알려졌지만, 목재 자체가 가진 한계로 인해 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낭설의 근거가 된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의 너비 44장, 폭 18장이라는 기록은 당대의 과장으로 여겨지며[20], 이에 따라 대만 해양대학 교수인 수밍양은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하이교통대학의 교수였던 신원어우는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공정학원의 교수인 탕즈바는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추정하였다. # 일단, 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코뿔소나 기린을 실어왔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당대의 조선 기술을 감안했을때 유례없이 거대한 선박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당대의 일반적인 선박과 유사한 크기의 함선이었다고 추정되어서, 정화의 대원정에 동원된 함선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1].
- 항해의 목적: 이런 대규모 항해를 기획한 목적도 불분명하다. 한때는 건문제의 실종과 엮어서 그의 행방을 찾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주류 학계에서는 설령 그런 목적이 있다고해도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보며, 일반적으로는 영락제의 단순한 과시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해적에 대한 토벌[22], 조선이나 일본, 몽골 등의 동북아시아 국가들로만 제한되어있던 외교 정책에 대한 외연 확장이 목적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스터리
- 노르망디의 한국인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에 의해 체포된 독일 국방군 육군 동방대대 소속의 한 동아시아인계 병사로, 미국의 역사학자인 스티븐 앰브로스[23]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언급해 논란이 일었다.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 많은 가설을 제안했는데, 나치 독일에 의해 포섭된 반공주의 성향 소련인들을 모아 만든 러시아 해방군 소속이거나,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대대 소속이라는 설이 있으며, 그 출신 성분도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징집된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재차 독일 국방군에 징집된 한국인 병사라는 설, 처음부터 소련군 소속이었던 고려인이나 기타 동아시아인계[24] 병사라는 설이 있다. 이 병사의 최후도 불분명하여,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이송된 뒤에 그곳으로 귀화하고 정착했다는 설, 전쟁 직후에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설[25], 소련으로 되돌려보내진 후에 굴라그에 수감되었다는 설 등의 여러 이설이 있다.
- 루거우차오 사건 :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지만 사건의 원인이 된 총성과 일본군 병사의 실종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총성에 관해서 당대에 일본 측은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주장하고 중국 측은 '총소리는 일본 쪽에서 났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였던지라 현재까지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그나마 일본의 전쟁 명분 생성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명확한 해설은 없다. 또 일본군 병사의 실종의 경우 그 실종된 20분동안 무슨 일을 했었는지가 사건 당시의 조사 부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사건 이후로는 그냥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그랬다는 것이 진상이라는 소문이 퍼져있다.
- 안네 프랑크 가족을 밀고한 자: 이웃들도 그 행방을 몰랐을 정도로 감쪽같이 숨는 데 성공했던 안네 프랑크의 가족들이 발각된 원인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밀고에 의해 발각되었을 가능성으로는 안네 가족들을 돕던 미프 히스의 친척이 안네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밀고했다는 설과[26] 똑같은 동기로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의 부하 직원이 밀고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밀고가 아니라, 우연히 나치 독일군의 수색에 걸려들었다는 설도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기의 바티칸: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교황인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각지의 신부와 주교, 수도자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피해 교회로 달아나는 이들[27]을 숨겨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은 있었고, 연합국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전쟁의 피해를 입은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한 기록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이는 연합국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한 뒤의 기록으로, 그 이전에 바티칸이 파시스트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 등의 추축국을 대상으로 무슨 입장을 취했는가가 의문에 싸여있다. 이 시기에 대하여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로 죽어가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성소수자들을 외면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심지어 아예 바티칸과 가톨릭 교회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추축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드물다. 비오 12세 본인이 남긴 기록들은 비오 12세의 유언에 따라 친구이자 비서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28]가 모조리 소각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비오 12세 재위 기간 중 작성된 공식 외교 문서에 대한 봉인이 9년 앞당겨 해제되었으나 문서의 양이 워낙 방대해 해답을 찾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 커셔 폭격: 커셔 폭격이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26일, 헝가리 왕국 커셔(현 슬로바키아 코시체)에 신원미상의 폭격기 3대가 폭격을 가한 사건이다. 폭격 직후 이 사건의 주범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헝가리군 관계자들이 폭격에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이며, 이에 따라 폭격의 주범은 소련 공군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림에 따라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정계가 군부 중심의 참전파와 총리 중심의 중립파로 두쪽이 나서 5일간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그러나 폭탄이 소련제라는 것을 빼면 도대체 정확한 범인이 누구인지 발생 이후 8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아서 소련의 의도적 폭격이다/소련의 오폭이다/독일이 헝가리를 참전시키려고 한 짓이다/헝가리가 독소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다/루마니아가 북트란실바니아를 되찾기 위해 한 짓이다/슬로바키아가 남슬로바키아를 되찾으려 한 짓이다/체코나 유고슬로비아 파르티잔이 벌인 짓이다. 라는 주장들만 허다하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 히로시마의 그림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된 스미토모 은행 히로시마 지점 앞 계단에 사람이 앉아 있던 흔적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남겨졌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른 아침 시간에 왜 은행 문 앞에 나와 있었는지 추측할 길이 없다.
- 존 왈터 윌콕스 주니어 소장의 최후: 1942년 3월 26일 미국 해군은 전함 워싱턴, 항공모함 와스프, 중순양함 위치토와 터스컬루사,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진 제38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영국 스캐파플로 항에 파견한다. 이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존 왈터 윌콕스 주니어 소장이 포틀랜드 항을 출항한지 하루만에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구축함 윌슨이 실종된 윌콕스 소장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인양에는 실패했고, 3월 27일 시신 수색을 종료하고 로버트 칼라일 기펜 소장이 윌콕스 소장을 대신하여 함대를 지휘하였다. 윌콕스 소장의 사망 원인은 폭풍이 치던 밤에 갑판에 서있던 소장을 보았다는 터스컬루사의 수병의 증언으로 악천후에 의한 실족사로 추정되지만, 자살설, 심장발작으로 인한 실족사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어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 수리가오 해전에서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단독으로 돌입한 이유: 1944년 10월 24일 수리가오 해전에서 당초 일본군의 계획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함대와 시마 기요히데 중장의 함대가 함께 수리가오 해협으로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리다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본대가 팔라완 해협에서 미군 잠수함 다터와 데이스의 공격을 받아 기함인 아타고가 격침당해 원래 계획한 시간에 맞춰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때 니시무라 소장은 구리다 중장으로부터 후퇴나 속도를 늦추라는 명령을 받지 못해 당초 계획보다 4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린다. 당연히 함께 돌입해야 할 시마 함대는 아직 도착도 못한 상황에 니시무라 소장은 독단적으로 수리가오 해협에 돌입해 버린다. 니시무라 함대는 전 함이 7척이었는데, 수리가오 해협을 지키고 있던 미군의 제시 바렛 올렌도르프 소장의 함대는 전함만 7척으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으로 니시무라 함대를 궤멸시켜 버린다. 니시무라 소장은 전사하고 구축함 시구레와 대파당한 중순양함 모가미만이 간신히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니시무라 소장이 무슨 이유로 시마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수리가오 해협으로 돌입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일본군이 그나마 미군에게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 야전을[29] 하기 위해서라거나, 니시무라와 시마가 서로 성격 차이로 사이가 나빴던데다가, 구리다 중장의 지휘를 받는 니시무라 소장과 달리 시마 중장은 미카와 군이치 중장의 지휘를 받아 지휘 체계가 서로 달라서 생긴 문제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연료가 부족해서 어쩔수 없이 돌입했다는 설이 부각되고 있다. 어찌됐든 니시무라 소장의 단독 돌입의 이유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1] 복소해석학의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인 미타그레플레르 정리로 유명하다.[2] 알프레드 노벨이 생전에 지정한 노벨상 부문은 노벨평화상,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문학상인데, 전부 그의 유언장에서 지정받은 분야들이다. 허나, 문제의 이 유언장에는 저 부문들을 무슨 이유로 지정했는지까지는 전혀 쓰여있지않고, 뜬금없이 저 분야에 대해서 업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고만 되어있다. 참고로, 노벨경제학상은 1969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노벨의 유언과 상관없이 제정한 상이다.[3] 수학자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수학자인 존 내시와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있다.[4] 후배 탐험가인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에 오늘날의 브라질 해안 지역에 상륙하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업적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포르투갈 왕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바스쿠 다 가마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혹은 알려지지않은 다른 탐험가들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하여 해당 대륙의 존재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카브랄의 탐사 결과에 대해 태연작약한 반응을 보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구대륙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정작 자신이 탐험한 곳을 인도나 아시아 어디쯤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 건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3년에 같은 지역을 재탐사한 뒤의 일이다. 더 이상한 것은 1498년에 이미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먼저 브라질에 도달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도 포르투갈 측이 매우 조용했다. 그래서 실제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은 바스코 다 가마가 아닐까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5] 우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실제로 브라질에 도달한 적이 있는데, 위의 각주에서 선술한 카브랄의 탐사 당시에 그의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6] 일단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년대 쯤에 처음 기록이 등장해서 기원전 1100년대에 이집트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남긴 "더 이상 바다 민족이란 없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역사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최소 6세기 동안이나,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라서 '단번에'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낸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다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이들의 존재가 지중해 일대의 국가들에게 상당히 충공깽스럽게 받아들여진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패망하기까지 했으므로 그 후로도 6세기 동안은 바다 민족 출신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거나, 이들의 침략을 무척 두려워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올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슷한 이미지인 바이킹이나 몽골인들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각각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그리고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실제로 서유럽 및 동유럽, 남유럽의 수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내내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첫 등장 시에 이들을 보고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고대에는 이런 바이킹과 몽골인들의 역할을 바다 민족이 했다고 볼 수 있다.[7] 미케네 문명외에도 오늘날의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라코니아 지방 주민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인을 말한다.[8] 뒷날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의 먼 친척뻘되는 민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와 시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틀에서는 전부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나, 어군 수준에서 분류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9] 성경에도 나오는 민족들이며, 다윗 왕의 즉위와도 관련있는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으로 추정되지만, 세부적으로 어느 어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나, 당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인과 동계이거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온 그리스인 이민자들이라고 추정된다.[10] 바다 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인들(히타이트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다.)과 에트루리아인의 조상격인 민족인 티레니아인도 있다.[11] 바이킹의 경우와 같이 원거리 무역 활동이나 용병 활동을 동반한 일종의 해적 행위가 목적이었다는 설과 중세 초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외적의 침입이나 기후환경의 변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목숨을 건 대이동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12] 미국 정부가 타국의 핵실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발사한 벨라 위성에 의해 감지되었기 때문에, 벨라 사건이라고 한다.[13]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곳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속령인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가 있다.[14] 알다시피 이 시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벌어지고 있었기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경제 제재를 벌이고 국교를 단교한 바 있다. 그래서 남아공 정부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바 있다. 따라서 훗날F. W. 더클레르크와 넬슨 만델라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할 때,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때 개발한 핵무기를 모조리 폐기했다.[15] 이 섬광 자체가 핵실험에 의한 것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그 범인으로 지목되는 또다른 나라가 프랑스다.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500~600 km 정도 떨어진 곳에 프랑스의 속령인 케르겔렌 제도가 있으며, 훨씬 뒤인 1995년에도 프랑스는 자국의 다른 식민지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한 전적이 있다.[16] 바울로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17] 그래서 가짜 디오니시우스라는 뜻으로 위(僞) 디오니시우스라고 불린다.[18] 5세기에서 6세기는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될 만큼 제국 내 종교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라서, 굳이 기독교 신학자나 성직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19] 아메리카는 몰라도, 호주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유럽인의 도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해 온 바가 있어서 퀸즐랜드 주에서는 이들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농업이 시도되기도 했고, 말루쿠 제도와 뉴기니 섬 서부의 원주민들도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그러니 명나라의 함대가 호주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중국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20] 애초에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부터가 1597년에 저술된 소설이며, 학술 서적이 아니다.[21] 물론 중요 물품을 수송할 기함만 특별히 거대하게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22] 실제로 정화의 대원정 초기에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에 의해, 오늘날의 베트남 앞바다에서 활동하던 한족 해적인 진조의가 토벌된 사례가 있다.[23]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이 된 역사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24] 타타르족이나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등[25] 스티븐 앰브로스가 제안한 가설이다.[26] 안네 프랑크 일가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안네 프랑크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던지라, 전쟁 전만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일가가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자, 그들의 막대한 돈을 노린 이들이 꽤 있었다.[27]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나, 공산주의자나, 프리메이슨 단원, 성소수자 및 반(反) 나치 운동가들도 여럿 있었다.[28] 한때 '여교황'(La Papess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을 만큼, 비오 12세의 치세에서 바티칸의 실권자였다. 이는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 생긴 신경쇠약이 나날이 악화되어서,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의 행정 실무는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황으로서 종교 관련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해야 할 행정 처리를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대행하였는데, 문제는 수녀는 사제가 아닌 수도자이기 때문에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29]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 견시요원의 초인적인 능력과 산소 어뢰의 위력으로 야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보섬 해전.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숙련된 견시요원들이 죽어나갔고, 미군의 레이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야전에서도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