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사카모토 츠츠미 일가족. 좌측이 사카모토 츠츠미, 이 사람이 안고 있는 가운데 아기가 장남 사카모토 타츠히코(坂本龍彦), 우측의 여성이 아내 사카모토 사토코(坂本都子).출처[1] |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유효한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습니다. 두려움도 있었고, 아무래도 자신의 온 힘을 쏟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정말 사카모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사카모토 씨 사건이나 마츠모토 사린 사건에 대한 사실 관계가 보도될 때마다, 도대체 경찰은 여태 뭘 했나 싶습니다. 옴진리교 못지않게 경찰에 대해서도 격한 분노를 느낍니다.
미카미 마사유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시민,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미카미 마사유키,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시민,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예를 들면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이 실종됐을 때, 카나가와 현 지방경찰청이 좀더 적극적으로 조사를 했다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런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잘라내 버렸습니다. 사유를 묻자, 그런 것을 방송하면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신문과 잡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와다 요시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사망 피해자 와다 에이지의 아내,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와다 요시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사망 피해자 와다 에이지의 아내, 《언더그라운드》 르포 중에서
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Sakamoto Family Murder
1. 개요
1989년에 옴진리교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던 변호사 사카모토 츠츠미와 그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 방송 언론사가 ‘취재원에 대한 기밀 엄수’라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떤 참변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옴진리교 내부에서만 저지르던 살인 행각을 밖에서도 행한 첫 사건(#)이다. 이렇게 저지른 살인 행각의 첫 희생자가 바로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와 사카모토 사토코(坂本都子)와 한살배기 아기였던 사카모토 타츠히코(坂本竜彦) 3인 가족이다.2. 옴진리교와 사카모토
1987년 창설된 옴진리교에 빠진 사람들이 소재는커녕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성 저널리스트 에가와 쇼코(江川昭子)는 '딸이 옴진리교에 빠져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고 이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을 주변 인물 중에서 찾았는데, 이때 나타난 사람이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사카모토 츠츠미(坂本堤)였다.사카모토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2] 관련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는 변호사였다. 옴진리교 신자의 친지들로부터 의뢰를 접수한 사카모토는 옴진리교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옴진리교는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을 세우고 각종 인터뷰에 출연하며 옴진리교를 공격했다. 옴진리교는 대응책이랍시고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横浜法律事務所)'에 항의 전화와 항의문을 보내자는 운동을 하고 삐라를 뿌렸지만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평판만 더 높여 줄 뿐이었다. 옴진리교는 사카모토를 견제하려 했지만 역으로 사카모토 변호사의 평판만 더 높여 주기만 하였으니 옴진리교의 처세술이 상당히 어리석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TBS 테레비는 1989년 10월 27일에 방영할 옴진리교 특집 방송을 위해 특집 방송 취재반(사회정보국, 이하 취재반)은 26일 아침에 옴진리교를 열심히 공격하는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를 인터뷰했다. 같은 날 낮에 취재반은 다시 '보도국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후지산의 옴진리교 도장을 방문해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초능력(?) 시연을 취재하였다. 보도국의 인터뷰를 마치고 취재반에서도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옴진리교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취재반은 묻지도 않았는데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를 교주의 초능력 시연 장면과 함께 방영한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촬영한 영상을 방영 전 옴진리교 측에 우선 보여주겠다고 제안하며 인터뷰를 따내고자 회유를 시도했다.
당일 밤 늦은 시각에 옴진리교 간부 3명이 TBS로 찾아와 방영 전에 변호사의 인터뷰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방송을 불허하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TBS측은 옴진리교에 인터뷰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때 방문자들 중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紀代秀)는 비디오에 있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적 정보를 상세히 메모하였다. 방송국이 인터뷰를 보여준 뒤에도 교단이 강하게 항의한 탓에 결국 옴진리교 특집 방송은 결방됐다. 동시 방영하고자 했으므로 당연히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도 묻히고 말았다.
1989년 10월 31일, 옴진리교의 간부 하야카와 키요히데와 고문변호사 아오야마 요시노부(青山吉伸)는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를 방문해 소송을 회피할 목적으로 사카모토와 교섭하려 했다. 하지만 옴진리교 때문에 평판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 측의 논리적 허점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옴진리교 교단 전체에 고소크리를 먹이겠다고 본격적으로 총칼을 빼들었다.
교단 간부들은 아사하라에게 "교섭할 여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보고했다.
말 그대로 관광당해 자승자박을 자초한 꼴이 된 옴진리교는 어쩔 줄을 몰랐고,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사카모토를 어떻게 해칠지 고심했다. 논의 끝에 결국 사카모토를 살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옴진리교 신자인 한 변호사를 통해 사카모토의 주소도 손에 넣었다.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가족 참살 사건은 이렇게 해서 터진 것이다. 이때 사카모토와 그의 가족, 주위의 변호사들, 옴진리교 피해 대책 관계자들, 시민들이 TBS 비디오 문제[3]를 빨리 파악했더라면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잔인하게 참살당하는 범죄는 일어나지 못했을 테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사카모토 이후 옴진리교 피해자 대책 변호인단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한 타키모토 타로(滝本太郎) 변호사도 사카모토처럼 독극물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당했을 때에는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이 경찰 등 사법기관과 중앙정부, 지방정부 전체에게 도움받아 일본 전국 각지로 분산 대피해서 사카모토 변호사 때처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4]
3. 살해
1989년 11월 3일, 하시모토 사토루(端本悟)[5], 의사였던 나카가와 토모마사(中川智正), 옴진리교의 수석 과학자 무라이 히데오(村井秀夫)[6], 오카사키 카즈아키(岡崎一明) 등 옴진리교 간부 6명은 요코하마시의 한 전철역에서 사카모토가 귀가할 때 납치해 염화 칼륨을 주사해 죽이려 했지만 이 날은 공휴일인 문화의 날이었고 사카모토의 사무소도 당연히 휴일이었다. 결국 교주 아사하라의 지시에 따라 11월 4일 새벽 3시 경 사카모토의 집에 침입했다. 그들은 사카모토와 그의 아내를 구타한 뒤 염화 칼륨을 주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주사로 사망했으나 사카모토는 곧바로 죽지 않아 결국 목졸라 죽였다. 한 살배기 아들 역시 염화 칼륨[7]을 주사한 뒤 천으로 얼굴을 덮어 질식사시켰다. 범인들은 3명의 시신을 드럼통에 집어넣은 뒤 세 곳의 외딴 시골 지역에 분산해서 암매장하였다. 사카모토 츠츠미는 니가타현에, 아내 사토코는 도야마현에, 타츠히코는 나가노현에 묻었다. 만일 시신이 발견되더라도 경찰이 이 3건의 암매장을 서로 연관짓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4. 사건 수사, 결과
사카모토가 실종되자 이 사건을 명백히 조사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료 변호사들과 사카모토의 부모 모두 사카모토 일가족이 옴진리교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사명감 같은 건 다 갖다버린 일본 경찰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행한 뒤 시체가 발견되지 않자 곧 수사를 종결해 버렸다. 이후 시체가 발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재수색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현장에서 옴진리교 간부만 착용하는 배지가 발견되었는데도 경찰은 이를 무시했다. 옴진리교도 이 사실이 보도되자 갑자기 이 배지를 대량 생산하고는 '그것은 옴진리교의 신도 모두가 다는 배지고 교단에서 그 배지를 엄청나게 만들어 퍼트렸는데 그 중 하나가 어쩌다 사카모토의 집에 있던 것'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발뺌을 했다. 그러나 상식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사실 사카모토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가 자유법조단(自由法曹団)[8] 소속이었음이 일본 경찰이 사건을 형식적으로만 수사한 가장 큰 이유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논픽션 르포 〈언더그라운드〉에 실린 동료 나카무라 유지 변호사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에는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았다. 노동사건 이외 사건도 많이 처리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노동 사건 등을 많이 처리했던 터라 '특수한' 법률 사무소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졌는데, 경찰 관계자들은 '그 사무소는 원래 그런 곳이다.' 라고 하면서 일본공산당 계열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특히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는 1986년 11월에 도쿄도 마치다시에서 발각된 일본공산당 간부 도청사건, 1986년 12월에 발생한 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인재센터' 탄압 사건(国労横浜人活弾圧事件)[9]으로 가나가와현 지방경찰청과 정면으로 충돌한 이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국철 노동조합 요코하마 '인재센터' 탄압 사건은 사카모토가 직접 맡았다. 이 알력이 가라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참살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반공주의가 강한 일본 경찰에게 일본공산당과 관계된 변호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좌익 계열 법률 사무소 소속 변호사가 당한 살인사건이니 신경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건 살인사건을 방관한다는 것은 도저히 경찰이 할 짓이라고 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게다가 피해자 중에는 고작 한 살짜리 아기도 있었다.
일본 경찰은 결국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이 살인사건에도 연루된 간부들이 체포되고 이들 중 오카사키가 범행을 자백한 뒤에야 재수사에 착수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6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1995년 9월, 각각 나가노현과 니가타현과 토야마현의 암매장지에서 사카모토 일가의 시신이 발견됐다. 한국어 위키백과 사카모토 변호사 가족 참살사건 문서에 따르면 사카모토 츠츠미는 니가타현 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츠시)의 산 속에, 아내 사카모토 사토코는 토야마현 우오즈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 옆 산길에, 장남 사카모토 타츠히코는 나가노현 오마치시의 히나타야마 산속에 암매장되었다고 한다.[10] 이후 재판을 거쳐 나카가와 등 실행범들과 사건을 지시한 장본인인 아사하라 쇼쿄 등 6명은 전원 사형 선고를 받고 2018년 7월 옴진리교 재판이 마무리된 이후 몇 달 뒤 처형되었다. 다만 이 사건만으로 사형이 내려진 것은 아니고 이들 대부분이 다른 살인행각에도 연루되었다. 이걸 다 고려해서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당장 주동자 나카가와만 해도 무려 25명을 죽였다. 그러나 범인 중 한 사람인 무라이는 1995년 4월 23일, 언론 취재진 앞에서 재일 한국인 폭력단원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村井秀夫刺殺事件[11]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과 함께 옴진리교의 악행을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엄청난 사건이다.[12] 애초에 1995년 3월 사린가스 살포 사건은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사카모토 살인사건 등으로 경찰의 의혹이 옴진리교에 집중되자 테러를 일으키면 수사망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테러 사건을 계기로 감춰둔 살인 사건들까지 모조리 드러나는 꼴이 되었다.
- 주범 - 나카가와 토모마사(中川智正) - 2011년 11월 18일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13]
- 주범 - 하야카와 키요히데(早川紀代秀) - 2009년 7월 17일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14]
- 주범 - 니이미 토모미츠(新実智光) - 2010년 1월 19일 사형 확정 - 2018년 7월 6일 사형 집행[15]
- 주범 - 오카자키 카즈아키(岡﨑一明) - 2005년 4월 7일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 집행
- 주범 - 하시모토 사토루(端本悟) - 2007년 10월 사형 확정 - 2018년 7월 26일 사형 집행
5. 의혹
일각에서는 사건 수사가 제대로 된 게 맞는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아래층에 살던 사람이 우연히 사건 직전인 새벽에 깨어나 “사카모토상”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 후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정작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시간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는 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 변호사의 집 대문이 열려 있었다는 점, 나중에 확인해 보니 집에서 밥공기 3개가 사라진 것 등의 의혹이 남았다.이 때문에 사카모토의 아버지는 경찰이 발표한 범행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살해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옴진리교 교인 외에 다른 숨겨진 협력자가 있는데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6. 기타
사카모토의 법률 사무소는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의 변호사들이 많은 자유법조단 소속이었고 이들은 일본공산당과 함께 사형 폐지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카모토도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사카모토의 동료 변호사였던 타키모토 변호사는 사형제를 찬성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위에 밝혔듯이 그 또한 옴진리교에 맞서다가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자신의 만화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추리를 실었던 만화작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살해 위협에 시달린 일이 있었다.[16]
이 사건은 이후 일본의 여러 창작매체에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출현 → 그에 대항하는 민완 변호사 → 변호사와 가족에 대한 교단의 테러"로 이어지는 일종의 클리셰가 자리잡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 번역된 작품으로는 원한 해결 사무소와 20세기 소년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소년"에서는 유키지의 변호사 친구 세츠코인데, 친구 집단에 대해 피해자들과 대응하다가 테러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꽤 고생하는 걸로 나온다. 또 위의 배지 관련 에피소드는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 사건부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교단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이쪽은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악명 높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마피아였는데, 마피아 검거에 앞장서던 검인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가 마피아의 자동차 폭탄 테러로 사망한 것.[17] 그 뒤 지오반니의 친구이던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검사가 마피아와의 싸움을 계속하자 파올로마저 폭탄 테러로 살해했다. 이 사건은 마피아의 본거지인 시칠리아 시민들까지 격분하게 만들어 마피아 검거 운동이 크게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종 후인 1990년 2월에 한국의 한겨레에서 이 소식이 보도되었는데, 이미 이때부터 옴진리교의 수상한 행적이 드러났다. 다만 여기서는 옴진리교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고, 아사하라 쇼코가 이끄는 이단으로 나왔다.
2018년 4월 1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악마를 믿었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에 대해 방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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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이전 성은 "오오야마(大山)"였고 릿쿄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한 후 사카모토 법률 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결혼하였다.[2] 문선명이 교주로 있는 그 통일교가 맞다.[3]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TBS가 이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가 옴진리교를 비판하고 적대하며 신자들을 탈퇴시켜 데리고 나오기까지 한 것도 옴진리교와 정면 충돌하는 사유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TBS가 일본 방송 언론계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저지르는 바람에 비틀어지면서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4] 일본어 위키백과[5] 와세다대학 재학 중 옴진리교에 심취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옴진리교에 접근했다가 본인도 해당 사이비 종교에 빠져 범죄자로 전락하였다.[6] 최종 학력은 이학 석사. 이 자는 1995년 4월 23일 재일교포 출신 야쿠자 조직원인 서유행(徐裕行)에게 칼로 살해당했다. 사실상 인과응보인 셈. 그리고 이 사건은 1985년 도요타상사 사건과 함께 일본 내에서 범죄자의 인권 문제와 방관자 효과에 대한 예시로 회자되고 있다.[7] 염화칼륨은 심장 수술, 약물주사형 등에서 심정지액으로 쓰인다.[8] 창립 멤버 중에 후세 다쓰지도 있다.[9] 일본 국철에서 요코하마시의 다카시마역(高島駅)에 이른바 '요코하마 인재 활용 센터'라는 것을 두고 국철 노동조합원들을 이곳으로 이동 발령내렸는데 여기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던 노조원 5명을 대상으로 폭력 사건을 날조해서 면직, 정직 등 징계 처분을 내린 사건이다. 2004년 2월 24일, 징계가 위법, 무효임을 인정받고 전원 복직되었다. 참고 링크[10] 이 일본 방송은 아들 타츠히코의 사체를 나가노현 오마치시의 히나타야마 산 속에서 찾았다는 뉴스 속보다.[11] 다만 이 때 죽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게, 그나마 사린가스 테러범들 중에는 무기징역을 받은 자들도 나왔지만 이 사건 실행범들은 전원 사형이었다.[12] 다만 옴진리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옴진리교가 저지른 사건들은 어느 하나 전세계를 발칵 뒤집은 흉악범죄사건이 아닌 것이 없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고 싶다면 미국 국무부가 옴진리교를 테러집단 명단에 등재한것 을 보자. 옴진리교 문서에도 적혀 있다.[13] 집행지는 히로시마 구치소[14] 집행지는 후쿠오카 구치소[15] 집행지는 오사카 구치소[16] 일본어 위키백과, 한국어 위키백과[17] 재밌게도 팔코네 역시 공산당 지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