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1969년~1973년까지 추진한 정책과 1986년~2005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추진한 석탄산업 구조조정 정책이다.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1986년부터 시작한 정책을 말한다.1980년대 중반부터 발생한 사회구조적 변화로 석탄 수요가 감소될 것이 예상되자 1986년 1월에 「석탄개발임시조치법」, 「석탄광업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 「석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 3법을 통합하여 「석탄산업법」 을 제정, 후속 조치로 동력자원부 산하에 1986년 9월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설립 준비 사무국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석탄산업의 연착륙을 꾀하였지만 1988 서울 올림픽을 위시하여 대기환경 개선을 목표로 도시가스 사업자들의 설비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나치게 과도하게 설정한 바람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폐광신청이 접수되면서 광업으로 번성하였던 도시들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경제적인 타격을 입고 쇠퇴하였다. 폐광지역은 30년 이상 불황이 이어지며 보조금 및 합법적인 도박장에 경제를 의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 배경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기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主炭從油)라는 글자로 설명할 수 있었다.[1] 즉 연탄을 비롯한 석탄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고 석유를 보조 에너지원으로 하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 왔다. 석유는 비싸게 수입해야 했고, 석탄은 무연탄 중심이지만 탄광도 적지 않고 매장량도 자급자족을 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대에는 산림황폐화가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연탄으로 대체하면 나무를 베는 양이 줄어들어 녹화사업에 도움이 될수 있었다. 정부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국민의 에너지인 석탄 채굴을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1988년이 되면 1963년의 세 배 가까운 채굴량을 기록하게 되었다.단순히 채굴만을 독려하는 것이 아닌 수송에도 신경을 썼다. 산업선으로 불리는 중앙선, 영동선, 태백선, 문경선, 가은선 등의 신설과 선로 개량 및 전철화 등의 개량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는 늘 겨울만 되면 연탄 대란이 나곤 할 정도였으니 정부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석탄을 채굴하는 광부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매일 해야 했으며 탄광촌의 생활 인프라도 결코 좋지 않았지만 그만큼 급여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정선군의 사북, 고한 지역과 태백 지역에서는 속된 말로 지나가던 개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해당 지역의 경제도 활성화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1만원이 수표대용으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는것을 생각하면 해당 지역에서 현금 만져본 업자나 업주들이 많았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강원도 탄광 지역이 잘 나가던 때의 대표적인 유산이 EEC 전동차로서 상대적으로 요금이 비쌌던 무궁화호 등급임에도, 일반실은 통일호 수준의 시트였음에도 불만은 나올지언정 수요는 꾸준했다.[2]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유가가 안정되고 석탄광산이 심부화[3]되어 국내산 무연탄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국민소득의 증가로 청정연료의 수요가 증가하며 대단지 아파트의 건설이 시작되는 등의 사회구조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에 에너지 정책이 석유와 천연가스를 포함한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석탄에 비해 석유는 취급도 쉽고 열량도 높았으며 환경 오염도 적으며 일산화탄소 중독 위험도 한결 낮았다. 이미 그 전부터 가정에서는 취사용으로 연탄 대신 석유풍로(곤로)를 더욱 선호하여 연탄은 난방 및 산업용 연료로서 역할이 점차 줄고 있었으며, 실제로 1986년부터 무연탄의 수요가 처음으로 감소[4]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탄을 겨울철 연료로 썼던 특성상 겨울철만 되면 스모그로 몸살을 앓았는데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로 환경 개선에 관심을 두던 정부 입장에서도 주유종탄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가 채산성이 낮은 탄광의 폐광을 유도하고 장기가행탄광을 선정하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3. 프롤로그: 1969년~1973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대한민국은 1960~70년대에 주탄종유 정책에 따라서 석탄을 주 에너지원으로 삼았으나, 석탄은 대체로 주산지(탄광)와 소비지(도시)의 거리가 멀고 에너지 효율 대비 부피가 커 수송 수단, 특히 철도에 많은 부담을 주는 약점이 있었다.[5] 탄광은 서해안이나 남부에도 있기는 했으나 주로 강원도, 그리고 강원도와 인접한 충북 및 경북 지역에서 채굴되고 있어 이 지역의 철도 수송 능력은 겨울이 다가오면 그야말로 수송 여력 0 수준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더군다나 이들 지역은 험한 지형 문제로 철도 수송 능력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어졌고 개량 역시 쉽지 않았다.[6] 죽어라 탄광에서 석탄을 캐도 이미 부하가 있는대로 걸린 철도가 이를 전부 소화해내지 못했다.이렇게 철도 수송 능력이 만성적인 한계를 겪고 기습적인 한파까지 겹치면서 1965년 가을부터 1967년 봄까지 '연탄파동'을 호되게 겪어야 했다. 이에 정부는 연료 공급선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석탄광업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 제1조에 '석탄광업의 합리화' 라는 문구를 명시하여 석탄의 수요와 수급을 조절하고 어느 정도 수요를 유류로 전환하고자 했다. 먼저 관공서의 난방연료를 유류로 대체하고 감천, 마산, 당인리 등의 무연탄 발전소의 연료를 벙커C유로 전환토록 하거나 다방, 목욕탕, 미장원/이발소, 여관 등의 연탄 사용을 금지하고 유류 사용을 의무화하기도 했다. 정부는 석유를 이용한 난방 기구의 개발과 판매 역시 촉진하는 정책을 함께 시행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탄종유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것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채탄과 수송 능력의 한계에 따른 석탄의 공급 부족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석유의 소비량을 늘려 석탄 수요를 억제하자는 것에 불과했다. 또한 이 정책 역시 1973년에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석유 소비를 쥐어 짜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에 당시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이 직후 정부에서도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을 일부 전철화 개통을 하며 탄광과 수도권을 잇는 석탄 수송 여건이 어느 정도 개선되어 다시 석탄 중심의 연료 정책으로 되돌아 갔다.
4. 진행
1988년 기준 347개에 달하던 대한민국의 탄광은 이후 정부의 압박 속에 속속 폐광되어 2024년 기준 단 3개만 남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동쪽에는 삼척시 끝자락에서 서쪽으로는 보령시에 이르던 탄광은 대부분 폐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부도 그냥 폐광만 시키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에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수행하던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국광해관리공단을 세워 폐광의 광해 문제 등 환경 문제를 최소화하고 채굴한 석탄의 품질 유지 및 보조금 지급 등의 사업을 펼쳤다. 물론 강제로 쫓아낸 것은 아니며 폐광 비용의 일부 지원 및 광해방지 책임을 정부가 떠안는 식으로 폐광을 유도하였다.또한 그야말로 경제가 풍비박산이 날 처지에 놓인 폐광 지역의 경제 유지를 위해 먼저 1980년대 초부터 시행하던 광산지역 종합개발 사업을 2차에 걸쳐 마무리하여 해당 지역의 생활 인프라를 개선하였다. 이와 함께 석탄산업법을 1991년에 또 개정하면서 폐광 지역의 진흥사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탄광지역 진흥사업을 시작하여 관광과 공업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이 정책은 해당 지역의 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데다 대규모 산업 유치를 위한 부지와 인력 모두 공급이 어려워 사실상 실패하였다.
폐광 후 닥친 급격한 지역 경제 추락을 막지 못한 정부는 결국 1995년에 발생한 사북 3.3사태[7] 등 실직 광부와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고민 끝에 대규모 리조트 개발을 위해 각종 인허가 과정을 생략하고 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게 한 '폐광지역개발지원에관한특별법'을 제정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허용하지 않았던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 설립도 포함되어 있는데, 해당 지역으로 고한, 사북 지역이 선정되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강원랜드다. 강원랜드는 해당 지역(정선군)에 각종 세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오픈 다음해인 2001년부터 수익의 일부를 폐광지역개발기금으로 내 해당 기금으로 폐광 지역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특별법은 결국 특정 지역 한정으로, 그것도 언 발의 오줌누기에 불과하였기에 나머지 지역에서는 불만이 계속 쌓여 갔고 1999년 12월에는 태백시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정부를 압박했다. 정부는 후속 대책으로 탄광지역개발사업을 시작하여 인프라와 관광지와 산업단지 개발 지원을 시작하였다. 그 이외에도 석탄 가격 관련 지원금도 감소분만큼을 정부가 추가 보조하기로 하였다.
5. 결과
고작 수 년만에 대부분의 탄광을 폐광시킨 결과 탄광촌으로 부흥하던 해당 지역의 경제는 회복불가의 심각한 추락을 맞았다. 탄광이 위치하던 대부분의 지역이 경제 침체를 겪었지만 특히 탄광의 대다수가 밀집해 있던 영월군, 정선군, 태백시, 삼척시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 가운데서도 정선과 태백의 경제는 회복의 회 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태백시는 인구수로 본다면 인구 10만명대로 강원도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인구 규모에서 소규모 군 수준까지 줄어들 정도로 인구 유출을 겪었다. 1995년 사북 시위와 1999년 태백 시위가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태백시는 여전히 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번 승격한 시를 통째로 군으로 전환한 사례가 없고 이렇게 했을 때 뻔하게 예상될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거는 시도를 하지 못할 뿐, 이미 인구는 군에서 시로 승격할 때의 최소 인구 조건인 5만명 이하로 떨어졌다.[8][9][10] 그 이외에도 대형 탄광을 갖고 있던 문경시 등도 적지 않은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다.정책 하나 때문에 그야말로 지역 경제가 순식간에 괴멸되는 모습을 본 정부는 나름대로 다양한 경제 살리기 대책을 내놓았으나 대부분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요 탄광이 밀집한 지역들 치고 교통이 편리하고 우수한 인력 확보가 쉬운 지역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인데 대부분이 산악 지대에 가까운 곳에 대규모 시장이 될만한 도시도 없다. 탄광촌이 밀집한 지역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시와 원주시는 인구는 30만명 안팍의 수준인지라 특정시조차 되지 못하는 수준이고 나머지 지역의 경우에는 수도권 위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촌향도 현상이 수십년간 휩쓸고 다녔기 때문에 인력수급이 이미 난항을 겪었다. 이미 이 시절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와서 썼을 정도였다. 당연히 공장을 유치하려고 해도 입지니 인력수급이니 어려움이 있을수밖에 없고 관광 진흥을 하려고 해도 역시 주요 수요처인 대도시에서 너무나 거리가 멀어 사람들이 많이 찾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지금까지 안고 있으며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 정선이나 태백을 가려면 승용차, 시외버스, 무궁화호(정선아리랑열차), ITX-마음 정도가 선택지인데 이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ITX-마음이다.[11] 그러나 ITX 마음은 왕복 1회만 다니니[12] 그 다음으로 빠른 열차는 일반열차 최하위 등급인 무궁화호다. 이렇게 주요 시장(수요처)에서 거리가 멀고 접근성도 좋지 않으니 관광도, 공장도 쉽게 유치하기 어렵다. 정부의 정상적인 생산업, 관광산업 유치 노력은 대부분 실패하였으며, 정선군은 카지노의 고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그 수입 + 약간의 지역 관광 수입에 의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에 가장 환경이 좋은 하이원리조트의 최대 문제점이 수도권과의 거리라고 할 정도이니 지리적인 약점이 관광 진흥 등 경제 부흥에 얼마나 불리한지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으로 인해 관광도시로 변모한 보령시[13]와 광주광역시의 위성도시라는 점을 내세워 인구감소를 어느정도 상쇄한 화순군은 그나마 그러한 충격이 덜했다. 물론 두 곳 다 남포선의 폐선과 화순선의 운행중단은 피하지 못했다. 화순군은 너릿재터널이 생긴 이후 광주의 거주기능을 분산했고, 문경시는 성남시에 있던 국군체육부대가 위례신도시 개발로, 대구광역시에 있던 화원운전면허시험장이 각각 문경시로 이전하고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한 이후 그나마 탄광촌 이미지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2시간대로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관광수입과 농산물 판매수익으로 지역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철도 동호인 입장에서도 씁쓸한 결과를 남겼다. 가은선의 폐선과 문경선의 동결[14]이 이 정책의 영향이기 때문. 두 철도 모두 일제강점기가 아닌 산업선으로서 정부 수립 이후 건설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철도 노선이었는데, 이들은 어디까지나 채굴된 석탄의 수송을 위한 화물 중심의 철도였으며 그것을 빼면 그야말로 오지 노선에 불과했으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탄광이 폐광된 이후에는 존재 가치를 크게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화력 발전소 역시 연료를 무연탄에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유연탄 또는 LNG로 전환하는 경우가 늘면서 무연탄 운송용 노선들도 폐선되었는데, 서천화력선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석탄의 수요와 공급 밸런스면에서도 이 정책은 문제를 드러냈다. 이 정책을 수립할 당시에만 해도 정부에서는 연탄이 급격히 다른 연료로 대체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어느 정도 이 판단은 옳았다. 어디까지나 연탄은 저소득층의 연료로만 생각했던 것. 그렇지만 석탄이나 가스, 전기 등 다른 에너지가 연탄의 수요 전체를 대체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유가의 급격한 변동은 기름이나 가스를 때던 사람들이 연탄을 다시 쓰게 만들었다. 저소득층의 연료로서 연탄의 포지션은 여전하며 유가의 인상으로 농어업용이나 숙박업소용으로 화목 보일러와 함께 연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레트로 열풍을 타고 연탄구이 식당도 늘어 연탄의 수요는 어느 수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연탄 가격을 현실화하여(즉 가격 인상을 통하여) 수요를 억제하고자 했으나 연탄이 저소득층 등 서민의 대표연료라는 점 때문에 생각만큼 가격을 현실화하지는 못했고 여기에 발전용 무연탄 수요까지 겹치며 공급이 수요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문제가 벌어졌다. 정부 비축 석탄을 풀어 수요를 채우려 했으나 그 역시 한계가 있어 결국 무연탄을 수입하여 수요를 맞춰야 했다. 발전용 석탄은 2000년대 하반기부터 서서히 무연탄 발전소를 유연탄 또는 LPG/LNG 발전소로 전환시키고 있어 국내 무연탄 수요의 적지 않은 수를 차지하는 발전용 무연탄 수요는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경우 현재 국내의 무연탄 생산 능력도 다시 수요를 초과할 수 있어 얼마 남지 않은 탄광도 폐광하겠다고 할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다.
이처럼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의 폐기나 근본적인 변화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연탄 수요를 늘려 탄광, 그리고 연탄 소비자들에게 지원금을 더 주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또한 국내의 탄광 대다수가 이미 수입 무연탄이나 다른 연료에 비해 채산성이 맞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인 이상 석유의 고갈 또는 전세계적인 석유의 무기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석탄 중심의 에너지 정책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 역시 분명하다. 석유는 전반적인 가격 인상으로 꾸준히 신규 유전 개발이 이뤄지고 있어 더 이상 '30년이면 고갈' 운운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으며, 석유 무기화 사태는 아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전체가 똘똘 뭉쳐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면 들 것이기에 무기화 사태가 발생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현재의 주유종탄 정책을 폐기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 정책을 폐기하려 든다면 환경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하기도 하고.
그나마 이렇게 꾸준히 이어오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다시 2021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바로 대한석탄공사 산하 탄광의 전면 폐광 선언. 대한석탄공사는 2024년까지 장성, 도계, 화순탄광을 폐광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미세먼지 저감 및 저탄소 산업 육성이며 서서히 채굴량 및 인원을 줄이며 폐광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
예정대로 폐광이 이뤄질 경우 이미 박살난대로 박살난 태백시의 GDP는 추가적으로 25% 감소가 예상되고 있는 상황. 이에 대해 해당 지자체, 강원도, 정부는 신산업 육성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지만 여론은 극히 부정적이다. 위에서 기재한 바와 같이 이미 1990년대 초 대폐광 시대 이후에도 동일한 산업 육성 계획을 시행했으나 전부 실패한 전례가 있기 때문.
그렇게 화순, 장성탄광은 각기 2023년, 2024년에 폐광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도계탄광도 2025년에 폐광될 예정이다.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탄광은 상덕, 은복 이렇게 두곳만 남게 되고, 공기업인 대한석탄공사도 더이상 운영할 탄광이 없어 문을 닫게 된다. 폐지 이후로는 폐광 후 광해 문제나 광산업 종사자 생계지원 등을 담당하는 한국광해광업공단으로 잔여 업무가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1] 하단에서도 서술하는 바와 같이 1970년대 초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 정책에 가변성이 있었다. 연탄파동을 호되게 겪고 난 1970년대 초에는 일시적으로 석유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 실제로 관료나 언론이 주유종탄이냐 주탄종유냐를 가지고 꽤 옥신각신하였다.[2] 사실 이 시기 무궁화호 일반실의 좌석은 통일호 일반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선풍기가 달렸던 일부 통일호와 달리 무궁화호에는 전량 에어컨이 달렸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아는 무궁화호의 리클라이닝 좌석은 90년대 제작된 무궁화호 장대형 객차부터 장착되기 시작한 것이고, 7, 80년대에는 새마을호 같은 최고급 열차에나 장착되는 호화 좌석이었다. EEC 전동차에는 리클라이닝 좌석이 장착된 특실이 있었다.[3] 한반도의 탄광은 탄층이 매우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 갱도 개설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이에 대규모 기계 채굴이 어려워 생산단가가 높다.[4] 민수용(연탄용만을 지칭하며 관련 통계 정의 상 산업용 및 발전용을 제외한 값이다.) 소비는 1987년부터 감소하였다.[5] 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괴탄 또는 분탄 형태로 소비지인 도시 주변으로 철도로 수송된 뒤 주변 연탄 공장에서 연탄이나 조개탄 형태로 가공하여 가정과 공장에 공급되었다. 그래서 철도 수송 능력의 제한이 석탄 공급의 제한 = 연탄 공급의 제한으로 작용했고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냥 대란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6] 영동선에서 인클라인이 사라진 것이 1963년, 영주-동해간 전철화가 완료된 시기는 세상이 석탄을 그리 필요로 하지 않도록 바뀐 1997년이었으며, 스위치백은 2012년에서야 폐지되었다. 그나마 태백선의 전철화가 1974년에 완료되어 수송 능력을 높였지만 두 구간 모두 복선화는 아예 꿈 조차 꾸지 않고 있다. 이들을 수도권으로 이어주는 중앙선은 그나마 1973년에 일부 전철화를 하였으나 연탄 파동이 휩쓸던 1960년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며, 전 구간의 전철화와 복선화는 아직도 공사 진행중인 실정이다.[7] 1980년의 노동쟁의 사북사건과는 다른 사건.[8] 무려 신안군(38,102명, 태백시는 37,997명) 인구보다 적다. 같은 강원자치도로 좁힌다 해도 평창군(40,387명) 인구보다 적다.[9] '한번 승격한 시를 군으로 떨어트릴 법적 근거가 없어서 태백시가 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있기는 하나, 이는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행정구역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위는 법률을 통해 결정되므로 국회에서 "태백시를 <폐지> 하고"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태백군을 <설치>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하면 된다. 이는 모든 종류의 행정구역 개편과 같은 절차이고, 특별히 시를 군으로 전환하는 경우에 대해서만 법적 근거가 없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군→시 전환을 <승격> 이라고 부르고 시→군 전환은 격하 라고 여기는 대중의 인식이 있기는 하나, 일단 법적으로 보면 시·군·구는 서로 동격의 행정구역(지방자치단체)이지 어느 한쪽이 더 상위의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고, 행정단위의 승격이나 격하라는 법적 개념도 없다. 단지 기존의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새로운 행정단위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행정구역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 뿐이다.[10] 따라서 이 "속설"을 진지하게 따져보자면, 일단 '시'는 번화한 도회, '군'은 시골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군→시 전환을 좋은 것(=승격)으로, 시→군 전환을 안 좋은 것(=격하)라고 여기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군→시 전환에는 인구수나 인구중 도심지역 거주자 비율과 같은 일종의 '기준'이나 '지침'이 있어 그것을 충족하면 자연스럽게 '시의 조건을 갖춘 XX군을 시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데 비해 사람들이 별로 바라지도 않고, 그런 사례도 거의 발생한 적이 없는 시→군 전환에는 이런 기준이나 지침이 없기에 의견이 제기되기도 어렵고, 설령 의견이 제기되더라도 관행적인 기준이 없기에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당장 국회에서 시→군 전환이 논의된다고 하면, 타 지역구 국회의원이 남의 지역 행정구역 문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 태백시 지역(21대 총선 기준이라면 동해시·태백시·삼척시·정선군 선거구)의 국회의원이 "태백시는 이제 시에 어울리지 않으니 군으로 전환합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대 시→군 전환을 격하로 보는 사회 분위기에서 정말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이 이런 법안을 주장하면 지역 주민들이 그 국회의원을 다시 뽑아주고 싶겠는가?[11] 이것마저도 원래 2027년 도입을 강원특별자치도가 손실보전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2023년에 앞당겨서 운행하는것이다.[12] 청량리→동해 1191(17:08),동해→청량리 1192(07:43)[13] 관광 이외에 보령시의 경제를 지탱하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자동차 산업이다. 보령미션을 만드는 GM 한국사업장 보령공장이 여기 있기 때문. 지방 도시에서는 여러 중소 협력사와 묶이는 대기업의 공장 하나가 갖는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당장 같은 회사의 자동차 생산 공장 하나가 폐쇄되면서 지역 경제가 치명상을 입은 군산시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이외에는 국내 최대의 화력 발전소인 보령화력발전소가 나름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14] 이쪽은 중부내륙선이 연결될 예정이라 폐선은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