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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획/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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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전쟁 이전
2.1. 한미원조협정에 따른 의무조항(제2조)2.2. 경제 안정을 위한 8원칙2.3. 정부 발표 6대 정책과제2.4. 산업 부흥 5개년 계획2.5. 부처별 5개년 계획
3. 경제 부흥 5개년 계획
3.1. 한국경제 부흥 계획서안3.2.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3.3. 네이산 경제 재건 계획3.4. 타스카 원조 계획3.5. 종합부흥물동계획 재원 조달3.6. 합동경제위원회 협약3.7. 경제 부흥 5개년 계획
4. 부처별 N개년계획
4.1. 수출 진흥 5개년 계획4.2. 기타
5. 경제 개발 3개년 계획6.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6.1.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6.1.1. 장면 내각의 시안6.1.2. 종합 경제 재건 계획안6.1.3. 경제기획원의 계획안6.1.4. 1차 계획 보완계획안
6.2.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6.3.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6.4.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6.5. 제5차 경제 사회 개발 계획6.6. 제6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6.7. 제7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
6.7.1. 신경제 5개년 계획

[clearfix]

1. 개요

한국의 경제는 1963년부터 고도성장을 개시하였다. 1962년 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1963년 9.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해마다 약간의 증감은 있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이전까지 연평균 9%를 뛰어넘는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전형적인 농업 후진국이[1] 제조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산업이 고루 발달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상전벽해의 변화가 이루어져 한 세대만에 라디오 보급사회에서 마이카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는 세계경제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단히 성공적인 성과였다.

이 같은 과정은 각 정부 동안 큰 틀에서의 계획을 구상하여 자본을 조달하고 산업과 기업을 육성한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8 ~ 1959년 1년 8개월 동안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 ~ 1962)을 구상하여 자립경제의 노선 추구, 차관 도입,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한 한일경제협력등의 수단과 공업화에 따른 총량적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단순 방식과 수단에 지나지 않던 경제 계획에서 국내 최초로 체계적인 경제 계획안을 작성했으나 4.19 혁명으로 인해 미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후 5개년 계획 시리즈의 첫 계획인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시안은 4.19 혁명 이후 출범한 경제제일주의를 국시로 삼은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민주당 신파, 장면 내각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 주도로 설계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토대로 공업화라는 목표 아래 경제학자, 민간 기업인, 미국 측 경제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자립경제의 노선 추구, 차관 도입, 대일국교정상화를 통한 한일경제협력은 이전 이승만 정부의 계획과 동일했으나, 불균형 발전 전략이 최초로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전과 같이 대미원조에 의존적인 내수 위주의 공업화에 따른 계획의 틀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계획안 또한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는데, 5.16 쿠데타로 박정희 소장을 위시로 한 군부가 권력을 탈취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후 50년대 초부터 계획만 무성했고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했던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 군부가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실행함으로써,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본격적인 경제 계획이 추진된다.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 이후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큰 틀에서 5년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을 추진하였고 이는 IMF 사태 이전까지 7차에 걸쳐 약 35년(1962~1997년) 동안 이어진다.

1차 계획(1962~1966)은 이승만 정부의 경제 개발 3개년 계획과 장면 내각의 시안에서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몇 가지 차이가 존재했다. 이전보다 중투자와 1차 생산품의 수출 진흥에 더욱 비중을 두어, 종합제철소 건설 및 관련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으며, 또 단순히 무역불균형 해소가 아닌 이로 인한 개발에 필요한 외자의 동원을 기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출의 진흥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당시 경제 개발 계획 예산 마련을 위해 막대한 내자 동원이 필요했기에 1962년 6월, 미국 경제고문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 과정에 있어 미국과 마찰이 생겨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종합제철소 계획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곧바로 백지화 되었다.[2]

이후 1963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경공업 공산품 수출 진흥으로 수출제일주의를 통해 활로를 찾은 박정희 정부는 1964년 2월, 수출주도전략을 중점으로 한 새로운 보완 계획안을 발표하였고, 제1차 경제 개발 보완 계획안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당시 7.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목표치 5%를 초과하였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에서 $126로 증가하였다.

2차 계획(1967 ~ 1971)부터는 1차 계획의 성공을 바탕으로 쌓인 데이터로 보다 전문적인 기법이 도입되어 수립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강조되면서 국가 차원의 중화학 인프라 투자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차 개발 계획 당시 미국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던 포스코의 건설이 추진되었고, 미국은 경제적 실효성을 근거로 차관 제공을 불허했으나 결국 대일청구금으로 외자를 대체해 건립하였다.

3차 계획(1972 ~ 1976)부터는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으며 1, 2차 계획의 연이은 성공으로 재정자립이 가능해지며 한국 정부는 이때부터 미국 및 외국기관의 자문 없이 독단적으로 경제 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3]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베트남 철수와 닉슨 독트린에 의한 안보 위기, 1973년 제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유가 급등이 일으킨 전세계 경제 불황 속에서도 수출 수입의 급증과 중동 건설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고, 목표치를 초과한 고도 성장을 기록하며 최초로 외신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북한과 본격적으로 경제 분야에서 큰 차이를 벌리게 된 것도 이 시점이며, 1977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일본에 이어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한 나라가 된다.

제4차 계획(1977 ~ 1981)부터는 교육, 사회 복지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면서 <경제 사회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점차 민간의 참여도 포함시키 시작했다.[4] 3차 계획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화학공업화가 지속되며 국가 주도의 대규모 중화학 인프라 건설과 투자가 지속되며 70년대 동안 중화학공업화는 수출구조 및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이어갔으나, 7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 물가의 폭등, 국제수지의 악화, 중복·과잉 투자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의 타격으로 1980년에는 -1.6%의 한국전쟁 이래 사상 첫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5차 계획(1982 ~ 1986)부터는 5개년 계획은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으로 불렸으며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을 위시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집권한 후 김재익 수석의 주도로 이전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화에서 벗어나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개입보다는 시장의 조정 위주의 경제계획을 실시했다. 민간에 자원배분에 있어 정부의 통제를 줄였고, 물가안정을 위해 긴축적 재정·금융정책과 각종 금융과 공기업의 민영화를 시행하는 한편 중화학 위주 개별산업 지원에서 기능별 지원으로 산업정책의 전환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6차 계획(1987 ~ 1991)에서도 김재익 수석이 추진한 5차 계획의 대부분의 기조는 이어졌으며, 이러한 계획의 추진으로 물가와 경제가 안정과 함께 산업의 경쟁력 회복으로 국제수지가 개선되는 가운데 맞은 3저 호황으로 고도성장을 가속화했다. 이후 1990년대에 이르면 소득 수준도 명실상부 상위 중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한다.

7차 계획(1992 ~ 1997)부터는 민간 부문이 크게 성장함에 따라 총량적 목표를 구체화하여 정부가 양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수단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기존 5개년 계획의 방식에서 벗어나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사회의 제도 정비 및 개선 방향의 목표와 과제를 제시하는 위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제계획보다는 장기적인 경제적 목표와 중점과제에 가까워지며 이전보다 중요성이 점차 떨어졌으며, 이와 같은 방향성으로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7차 계획은 신경제 5개년 계획(1993 ~ 1997)으로 새로 수립되어 이어졌다. 관련설명 파일다운로드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그리고 기록으로 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참고하면 좋다.

이러한 부류의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N개년 계획은 1920년대 구소련이 최초로 강력한 중화학공업화를 내걸면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국제적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1930년대 일본 제국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주의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5개년 계획을 모델로 만주국의 산업 개발 계획을 입안하였다.[5] 그리고 이것이 전후 일본에서 다시 살아났고, 한국을 포함 아시아의 여러 저개발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6]

이 중 한국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서 1차 계획부터 ~ 7차 계획에 걸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약 30여년 동안 국제사회의 원조로 연명하던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하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열악한 민간 시장과 자본의 발달 상태에서 5개년 계획을 통해 정부 주도의 자본 조달과 지원으로 추진한 경제개발은 급속한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는데 큰 요인으로 평가된다.

다만 지난 30여년간 성공적이였던 국가 주도형 5개년 계획 제도와 실행에 부작용이 있었다는 것도 후에 명확히 드러났는데, 경제가 성장하며 차츰차츰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자원 배분의 중심이 옮겨져 갔지만 이전 정부 주도의 5개년 계획 추진에 따른 자원 배분 조달로 대마불사와 같은 국가의 특혜적인 지원을 경험하고 성장한 기업들은 1990년대 후반 경제 수준이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한 이후에도 이전 1960 ~ 70년대 폭발적인 양적 성장이 진행 중이던 산업화 시기처럼 여전히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갔다. 이는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금융시장은 이전의 관치금융같이 여전히 이를 뒷받침 해주었으며 이렇게 지속된 기업과 금융의 부실화는 1997년 IMF 사태를 야기한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후 2000년대 동안 경제 수준이 명실상부 선진국 수준으로 진입하자 이러한 정부 주도의 5개년 개발전략은 대부분 시장주도형으로 바뀌었고 결국 국민의 정부부터 더 이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박정희 정부부터 문민정부까지 이어진 7차에 걸친 5개년 계획 제도와 함께 한국의 경제계획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 한국전쟁 이전

2.1. 한미원조협정에 따른 의무조항(제2조)

1. 예산 절감을 통한 재정수지의 균형, 통화량 억제와 공사 여신을 통제하는 등 재정안정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2. 외환 및 대외무역을 국가 통제하에 두고, 대미공정환율을 조속히 제정하는 동시에 외화 획득을 위한 수출산업을 육성한다.
3. 종래의 양곡수집제 및 식량배급제를 비롯한 주요 물자에 대한 생산, 수집, 분배 업무를 계속 실시한다.
4.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자유로운 투자 및 무역 활동을 보장한다.

2.2. 경제 안정을 위한 8원칙

1. 정부 지출 삭감을 통한 가능한 균형예산 확보
2. 통화 및 여신의 강력 통제
3. 외국 무역의 통제
4. 공정환율의 조기 결정
5. 양곡수집 및 배급정책 계속
6. 외화 획득을 위한 수출산업 진흥
7. 외국무역상의 한국 내 자유 활동 및 외국자본 도입 허용
8. 국공유기업이나 정부 재산의 운영 효율의 극대화 또는 민간에의 불하

2.3. 정부 발표 6대 정책과제

1. 식량 증산
2. 생필품 자급자족
3. 동력원 개발
4. 지하자원 및 수산자원 적극 개발
5. 교통 및 통신의 급속한 복구
6. 황폐한 산림의 복구

2.4. 산업 부흥 5개년 계획

1. 민수공업품의 자급자족
2. 수출공업 진흥
3. 중공업 육성
1940년대 제1공화국 기획처는 위 세가지를 목표로 설정하고, 한국 사상 최초의 종합적 중기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제의 파행적 경제 구조 청산 및 전력원의 적극적 개발 추진과 위한원조 등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종합물동계획 물동계획등을 수립한다.

2.5. 부처별 5개년 계획

각 부처별 농업증산 3개년 계획, 석탄생산 5개년 계획. 소금생산 5개년 계획, 수산업 5개년 계획 등이 추진되었다.

3. 경제 부흥 5개년 계획

3.1. 한국경제 부흥 계획서안

1950년 6월 25일 북한대한민국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그해 7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 수행을 위해 긴급조치를 발동, 50억 달러 증세, 물자 국방 우선 할당 및 재고품 징발, 군사비 100억달러 증액 등을 골자로 하는 6개항 특별교서를 발표하였고, 같은 달 유엔은 대한 민간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7], 이를위해 국제연합 주한민사처(UNCACK[8])와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9])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대신 같은 달 26일 한국은 대구에서 유엔군 경비 지출에 관한 한미협정을 체결해 1954년 6월까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통해 약 234억환을 유엔군에 대여해주었다. 한국경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50년 12월 경이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연기되어, 1951년 7월 10일 한국 전쟁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그해 8월부터 전황이 교착에 빠진 뒤부터 재개되었다. 1952년 1월 정기국회가 개회되자 허정 국무총리는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 등과 긴밀히 협조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 통일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기획부를 통해 5개년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며, 이날 연설에서 언급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비료공장 설치 및 토지개량사업에 의한 식량 증산

2. 섬유공업 및 화학공업 부흥에 의한 생필품 확보

3. 전기시설의 복구

4. 광산 및 수산 등의 개발 복구에 의한 수출산업 진흥

5. 항만, 운수, 통신, 토목 시설의 복구, 건설

6. 보건후생 구호시설의 복구 및 확대

7. 공공건조물 및 일반주택의 건설

-경향신문 1952년 1월 18일자 1면
이 계획은 제1공화국 기획처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현재로서는 전쟁 수행에 최대한 기여하고, 최대한의 자급을 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필수불가결한 일부 필수품의 부족량을 수입하는 동시에, 수출량을 단시일 내에 증대시킬 수 있는 물자 생산을 도모, 시설 복구와 신설 및 사업 확장 실현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를 토대로 국제연합 주한민사처(UNCACKUN),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 등과 한국 경제에 대한 논의에 착수한다.

3.2.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1952년 5월, UN군 사령부와 대한민국은 한국에 대한 실태 파악 및 원조 제공을 위해,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이른바 마이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휴전 후 부흥계획은 기정되었다.

3.3. 네이산 경제 재건 계획

UN의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위촉으로서 미국 Nathan 협회에서 작성한 제1차 경제부흥 5개년 계획안(1953.4. ~ 1957.8.)이다. 경제적 자립, 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경제안정책을 추구를 목표로 한다. 경제 안정을 위한 통화재정책 및 신용정책 근본적인 제도개편, 단일환율제도 현실화 등의 주요 정책을 담고 있으며, 5개년간 19.29억 달러[10]를 투자해, 연평균 8.1% 성장을 계획하였다.

3.4. 타스카 원조 계획

1953년 4월, 대한원조 지침 수립을 위한 미국 정부의 사전조사 작업으로서의 미국 Tasca 사절단이 발표한 한국의 재정적자 보전과 종합경제부흥3개년계획안(1954~ 1956)이다. 자립경제 달성, 경제 안정 및 무역수지 균형 추구를 목표로 한다. 재정수지 균형, 금융신용정책에 대한 효율적 관리, 합리적 물가 및 외환체계의 유지 등에 대한 정책을 담고 있으며, 한국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구하고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3개년간 8.83억 달러가 투자되어야 한다고 보고하는 한편, 한국에 종합부흥 3개년 계획 수립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7월 24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긴급 경제원조 2억 달러를 의회에 주문하였고, 1953년 7월 30일 상원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2억달러가 대외활동본부(FOA[11])를 통해 한국에 할당되었다.

3.5. 종합부흥물동계획 재원 조달

대통령 이승만은, 미 의회가 2억 달러를 허가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1953년 7월 31일 13개 부처에게 각각의 사용계획서 작성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8월 16일 국무회의는 이것과 한국민간구호처(CRIK[12]) 5800만 달러에 대한 사용계획서를 종합하여 6.25억 달러의 요청을 선별했는데,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8200만 달러(32%), 원면, 생고무, 비료, 건축 재료 등 시설 복구 및 산업 육성에 필요한 원재료 조달에 7900만 달러(31%), 10만톤 규모의 질산암모늄(초안)비료 공장[13], 20만톤 규모의 시멘트 공장[14], 12만C/S 규모의 판유리공장[15] 등 제조업 공장 건설에 2800만 달러(11%), 전력 확충에 2400만 달러(9%), 문화·교육에 1900만 달러(7%), 농림수산업에 1300만 달러(5%), 석탄 및 광업에 860만 달러(3%)를 책정하였다. 이러한 원조자금에 의한 경제재건계획의 기본 방침은 1953년 10월 종합부흥계획으로 이어지게 되며 개략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총 2억 5800만 달러
사회간접자본
(32%, 8200만 달러)
철도(49%)
항만·도로(43%)
통신(6%)
창고(2%)
원재료
(31%, 7900만 달러)
기간산업
(28%, 7350만 달러)
제조업(38%)
전력(33%)
1차산업(29%)
문화시설
(9%, 2300만 달러)
문교(83%)
방송(8.5%)
기타(8.5%)
기간산업
(7350만달러)
전력(33%) 화학비료공장(16%) 광업(12%) 농림업(11%)
수산업(7%) 시멘트공장(6%) 연초공장(5%) 섬유공장(4%)
철강공장(3%) 판초자공장(1%) 자동차수리공장(1%)

이에 미국은 1953년 8월19일 원조금액을 6억 2,800만으로 증액하였고, 1953년 9월 8일 부흥계획합동경제위원회에서 심의 등을 통해, 이를 기준으로 한 24쪽의 한국경제 부흥계획서가 마련되었다. 또 1953년 9월1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은 40여개국의 갹출을 통해 7000만 달러를 확보, 한국민간구호처(CRICK) 자금을 포함 1억 3000만 달러 상당의 UN원조를 확정하여 1954년 4월 12일 부흥계획에 계상되었다.

3.6. 합동경제위원회 협약

1953년 12월, 이른바 백우드 협정이 체결되어 원조 물자 구매권이 한국에 이관되었으며 대신 시장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원조 물자를 한국 가격보다 조금이라도 낮게 판매하지 못하도록 명시되었다. 또한, 한국민간구호계획(CRIK),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 대외활동본부(FOA) 등이 합동경제위원회(CEB)로 일원화되었다.

3.7. 경제 부흥 5개년 계획

한국 자유당 정권 기획처에서 작성한 5개년 계획(1954. ~ 1958.)으로 자립경제 확립을 목표로 하며 자유경제체제에서 사회공공투자에 집중적 지원을 하는 방식의 간접적 조정 정책을 담고 있다. 다만 이 계획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보다 앞서 북한에서 경제개발이 이루어졌고, 국가 단위 경제개발은 공산주의 국가나 하는 것이라며 이승만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4. 부처별 N개년계획

4.1. 수출 진흥 5개년 계획

수출주도산업화전략은 성과가 당시로서 구매력이 높았던 몇몇 선진국의 경제 동향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미 미국 진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3번의 하강기를 겪었는데, 하나는 1948년 연말부터 1950년 봄까지 이어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전쟁 종료 직후에 경험한 것이었는데, 수출진흥계획이 마련될 1957년 무렵에 세번째의 하강기가 찾아왔다. 1957년 상반기 네덜란드에 이어 그해 하반기부터, 미국[16], 서독[17], 프랑스[18], 이탈리아[19], 일본[20], 캐나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일제히 1년 이상 경제 후퇴를 경험했고, 영국[21]마저 1958년 하반기부터 1년간 후퇴한 것이다. 이에 수출 실적은 목표치에 한참 못미쳤다. 그러나 이 공황을 분수령으로 세계경제는 1974년까지 18여년간 유례없는 장기 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4.2. 기타

  • 보건 재건 5개년계획(보건부, 1952년 8월 17일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구에 제출)
  • 방직공업 5개년계획(상공부, 1952년 12월 23일 수립)
  • 감자류 증산 5개년계획(농림부)
  • 면 증산 및 수요 5개년계획(농림부&상공부, 1953년 9월 11일 수립)
  • 철도 5개년 건설계획(교통부, 1953년 4월 25일 수립) : 서울시내 지하철도 건설 착공 결정 등
  • 전원개발 3개년계획(상공부, 1953년 10월 2일 수립) : 평균출력 22만㎾ 목표
  • 산금 3개년계획(상공부, 1954년 1월 14일 수립) : 생산계획 20톤, 자금 47억 5,800만원 계상
  • 치수 5개년계획(내무부)
  • 의무교육 6년 계획 (문교부, 1953년 10월 10일 수립) : 1953∼1959
  • 1백만 호 주택건축 10개년계획(부흥부, 1955년 4월 15일 책정)
  • 유연탄 도입 5개년계획(상공부, 1955년 7월 3일 성안)
  • 산금 촉진 5개년계획(상공부, 1955년 10월 12일 성안) : 연 생산 30톤 목표
  • 폐선 대체 5개년계획(해무청, 1956년 1월 7일 수립)
  • 농지개혁 5개년계획(농림부, 1956년 3월 29일 성안) : 67만 정보 관개시설 개선
  • 탄광시추 5개년계획(상공부, 1956년 5월 23일 수립) : 소요자금 환화 26억 8,400만 환, 외화 650만 달러
  • 공장 및 광산 생산시설 5개년계획(상공부, 1956년 8월 13일 수립)
  • 대한중공업 및 삼화제철의 5개년 종합시설계획(상공부, 1956년 8월 29일 수립)
  • 수출 5개년계획(상공부, 1956년 8월 31일 성안)
  • 수출 6개년계획(상공부, 1956년 9월 14일 책정) : 1961년 목표액 1,202만 4천 달러
  • 제1차 조선계획 발표(해무부, 1956년 11월 13일 발표) : 제7회 산업부흥 국채 재원
  • 개간 및 개척사업 5개년계획(농림부 1956년 11월 19일 수립)
  • 견직물수출 5개년계획(상공부, 1956년 12월 6일 수립)
  • 탄전종합개발 10개년계획(상공부, 1957년 5월 17일 요청) : 경제조정관실에 자금 요청·총 소요 외자액 6,039만 7,500 달러
  • 수리사업 3개년계획(농림부, 1957년 7월 10일 수립) : 1958∼1960, 총 소요경비 697억 환
  • 자급비료증산 5개년계획(1957년 8월 19일 수립)
  • 유외곡도입 5개년계획(농림부, 1957년 9월 5일 작성)
  • 촌락개발 5개년계획(1957년 10월 28일, 한국과 미국이 합의)
  • 농지개량 5개년계획(농림부, 1957년 11월 11일 수립) : 1958∼1962
  • 잠업증산 5개년계획(농림부, 1957년 11월 25일 발표) : 2억 5천만 주 목표
  • 농업증산 5개년계획(농림부, 1957년 12월 27일 채택)
  • 석재개발 8개년 계획(상공부, 1959년 4월 8일 수립)
  • 특용작물 증산 3개년계획(농림부, 1959년 5월 23일 수립)
  • 사방사업 8개년 계획(농림부, 1959년 6월 19일 수립)
  • 공공시설 5개년 계획(내무부, 1959년 6월 20일 수립) : 278억환 규모
  • 제주도 개발 5개년계획(농림부)
  • 종합탄전개발 7개년계획 수립(상공부, 1959년 2월 10일 수립)
  • 조선 5개년 계획(해무청, 1959년 4월 2일 수립)
  • 병적 정비 5개년계획(국방부, 1959년 1월 27일 수립) : 본적지 중심제 채택 등
  • 농경지확충 5개년계획(농림부, 1960년 2월 8일) : 논 65,900정보와 밭 38,700정보 개간

이 자료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가져왔다.

5. 경제 개발 3개년 계획

이승만 정부 시기 1958년 3월부터 1958년 5월 까지 1년 8개월간 작성되었고, 원래 이 계획은 처음에는 7개년 계획으로 작성했으나 계획의 시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하고 전반기에 해당하는 3개년 계획을 먼저 수립하기로 결정하여 작성되었다.

이 계획안은 국내 최초로 정부 부처에서 체계적으로 작성한 경제 계획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전 경제부흥계획에서는 총량적인 분석 없이 부문 및 투자를 중심으로 단순히 작성되었는데 이승만 정부의 경제 개발 3개년 계획부터 총량적인 목표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 정책수단 등을 포함하는 세부 계획이 부문계획과 함께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국내 최초의 경제 계획이라고 칭할 수도 있다.

이 계획의 실행기간은 1960~1962년이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허나 이 시기 추구하였던 핵심적인 자립경제 노선과, 외자 동원을 위한 차관 도입의 증대 등의 기본적인 방침은 이후 장면 내각의 시안까지 이어져 박정희 정부의 제 1차 경제개발 계획안의 기반이 되었다. 물론 수출의 진흥책도 이전과 같이 계획안에 존재했지만, 하지만 아직까지 제1차 산업 제품의 수출이 전체의 88%를 차지하는등 이 시기 수출의 의미는 당시 무역수지 불균형 해소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수출을 통한 공업화라는 인식이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6.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년 1차 계획부터 1992년 7차 계획까지 1960 ~ 1990년대 동안 추진된 경제계획의 방식 또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경제 계획을 일컬을때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던 본 문단의 제 N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들을 가리킨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97년 IMF 사태 이전 30여년 동안 한국의 역대 정부들이 모두 5년 주기로 새로 수립하고 추진한 일종의 경제계획 방식이지만, 한편으로 특정 계획으로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지칭할때는 7차까지의 계획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 아닌 국가 주도의 관치경제의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 정부 동안 추진한 1차 계획 ~ 4차 계획까지만 한정지어 명목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22]

6.1.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6.1.1. 장면 내각의 시안

한국 사상 최초로 불균형성장론[23]을 채택하고 계량적 기법을 도입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부흥부의 새 명칭인 건설부의 이름으로 발표된 시안이었으나, 장면 내각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장면 내각의 정책적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24] 이는 균형성장모델을 전제로 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노동력을 주요 생산요소로 하는 후진국에 어울리지 않으며 계획보다는 전망에 가깝다고 비판을 가하며 만들어졌다. Charles Jr Wolf 박사가 The Oregon Advisory Group in Korea (1961)를 통해 도움을 주었고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여 만들어졌으며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것과 군사정권의 계획을 비교한 200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군사정권이 7.1%의 성장률을 목표로 잡은 까닭은 군사정부 수립 후 상당히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장면 내각의 목표인 6.1%보다 더 높은 수치를 부르기 위한 방편이었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2월 9일 추가경정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실업자의 가동과 농촌 소득의 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사회자본의 증대를 연결하는 국토건설계획이 또한 그 조속한 실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미잉여 농산물을 주로 한 400억환의 재원으로 연인원 약 4천 500만명을 동원하여 치산, 치수 등 공공사업을 하는 것이며, 한편 소양강 댐, 춘천강 댐, 남강 댐 등을 건설하는 것도 동 계획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장면의 경제계획은 근본적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가 조만간 끊길 것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소비재 위주의 성장이란 점에서는 1962년 발표한 1차 경제 5개년 계획과 큰 틀에서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1964년 보완계획안 이후 수출주도산업화로 전략으로 치중되고부터는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6.1.2. 종합 경제 재건 계획안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경제기획원을 설립하였다. 유사한 조직의 설립은 민주당 정부에 의해서도 경제개발부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집권 두 달 만에 강력한 기능의 경제기획원을 설립한 것은 "기아선상에 헤매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재건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혁명공약에 달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제기획원장은 내각에서 제2의 서열이었고 나중에는 부총리[25]를 겸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이전 정부의 비슷한 조직인 "부흥부" 장관의 서열은 제7위였다. 경제기획원장은 국무총리에 다음가는 부총리 서열에 속하는 직함으로 정부의 모든 경제 관련 부처를 총괄하였다.경제기획원은 개발계획의 수립 정부 예산의 편성 외자와 기술 도입을 핵심 기능하였고 재무부의 반발에도 예산편성권까지 옮겼다.이로써 이 권한으로 각 부처의 업무를 개발계획에 따라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었고 외자와 기술도입을 심사 및 허가하는 권한도 주어졌다.경제기획원의 이러한 높은 위상은 박정희 정부가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였음을 보여준다.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유원식을 중심으로 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종합기획의원회에서 기존의 계획을 참고해 내놓은 안이다. 장기적으로는 2차 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되, 단기적으로는 1차산업 상품 수출에 주력하여 외화를 충당하려는 모습을 보였다.[26]

6.1.3. 경제기획원의 계획안

1962년 ~ 1966년

원조 8억달러 이상, 차관 5억달러 이상 도입[27]
연평균 경제성장률 7.9%
연평균 수출증가율 43.6%
연평균 수입증가율 17.8%[28]

1962년 최종적으로 발표된 계획이며, 일반적으로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이 계획안을 가리킨다.

기준연도를 바꾸게 되면서 장면정부가 계획한 안보다 높은 연간 성장률율 7.1%대로 책정했다. 따라서 군부는 종합 경제재건 계획안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데 역점을 두고 검토 및 수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영농자금을 늘리고(경제기획원 결정), 1차연도의 재정 투융자를 1차산업에 집중시킴으로써 1차산품 목표 생산을 증액하는 한편 2차산업, 3차산업분은 삭감하였다(최고회의 결정). 2차산업 내에서는 국토건설사업 자금과 펄프공장 등에 대한 재정투융자를 조선업 육성,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돌렸다(중앙경제위원회 심의 결과).

이 계획을 실현하고자 지하자금을 확보하려고 한 목적하에 실행한 화폐개혁금융 및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었으며 1962년, 1963년에는 흉년이 드는 등 실패로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1차산업은 부진한 반면, 경공업 수출은 목표치를 상회하였고 이 덕분에 계획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1950년대 중반 수출액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지만, 1960년 한해 수출의 34%(천만불)가 공산품이었는데 이는 1953년도 15%(오백칠십만불), 1955년도 25%(사백오십만불)에 비하면 비중으로 보나 양적으로보나 상당히 성장한 것이었다. 이는 민간부문에서 예상치 못한 공산품 수출의 호조로 1963년 9.2%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음에도 경제계획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것으로 1961년 2억 달러에서 63년 9월에 1억 달러로 감소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외환위기였으며, 수출산업공업화로 개편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1964년 수정을 가하여 보완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고, 보완계획안의 추진 기간 동안 수출주도산업화로 노선을 변경하여, 본격적인 한국 경제의 방향성 설정과 함께 고도 성장이 지속된다.

6.1.4. 1차 계획 보완계획안

1964년 ~ 1966년

1964년 2월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으로 발표되었으며,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목표 성장률을 7.1%에서 5%로 하향 조정하고 1963년 외환고유고의 고갈로 인해 재정안정성이 크게 흔들리자 그에 대한 긴축안에 따라 투자 규모를 대폭 감축한 것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측 고문단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적 실효성의 이유로 기존 제1차 계획의 주요한 기간산업 건설계획의 규모가 줄어들거나 폐지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종합제철소계획을 들 수 있다. 허나 이렇게 폐기된 기간산업들은 향후 2차 계획이 재차 추진되어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보완계획안이 추진된 시기 경제 노선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는 이전의 수입대체산업화에 입각한 내수 위주의 계획들과 달리 본격적으로 수출주도산업화 전략이 지배적인 전략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보호 무역과 대외 개방의 복선형 전략을 바탕으로 국내산업은 금융과 관세로 보호하며 경쟁력이 일정한 수준으로 향상되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적용되며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64년 상공부의 주도로 수출진흥종합시책을 수립하며, 이전 수입대체산업화에 따른 내수 소비재 계획에 따라 평가절상한 원화가치로 원조의 증대를 위해 계속해져 이어져온 고정환율제를 환율을 시장의 자유에 맞긴 유동적인 변동환율제로 바꾸어 130원/1달러 환율을 260원/1달러 환율로 대폭 평가절하해 수출 상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린 것도 수출증대를 이끄는 큰 역할을 했다. 하여간 수출 신장세는 정권을 상당히 고무시켰으며 1964년 수출 1억달러 달성을 기념해서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지정하면서 본격적인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전면에 등장한다.[29]

1965년 1월 정부는 연두교서에서 수출을 경제의 생명으로 표방하며 공식적으로 수출주도산업화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이와 같은 수출의 폭발적인 성장세가 이룩한 고도 경제성장으로 보완계획안이 종료된 1966년에 이르면 비현실적인 수치라고 비판받아 결국 보완계획안에서 5%로 하향조정했었던 처음의 연평균 7.1%의 성장을 뛰어넘어 7.9%로 초과 달성했다.

6.2.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7년 ~ 1971년

지침 작성 1964.10 ~ 1965.3
부문계획 작성 1965.4 ~ 1965.12
종합조정단계 1966.1 ~ 1966.6
계획 확정 및 계획서 발간 1966.7 ~ 1966.8

공공/상업 차관 23억달러 도입
연평균 경제성장률 9.6%
연평균 수출증가율 33.7%
연평균 수입증가율 27.3%

제2차 계획은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부터 이전 1차 계획의 성공으로 쌓인 데이터로 전문적인 기법이 도입되어, 더욱 정교해졌으며 정부 관계부처 장관를 포함한 국내 전문가와 미국과 서독의 고문단을 포함한 외국고문단의 자문과 지원 속에서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제2차 계획은 1966년 6월에 시안이 완성되었고 7월에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8월에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최종 결정되었다.

서독에 대한 광부, 간호사 파견, 1965년 한일수교로 인한 독립 축하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기반을 다지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30]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한 미국의 지원 등을 시작으로 한국은 5년간 공공차관, 상업차관을 본격적으로 들여오며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5년간 총 22억 달러를 조달하였으며 그 규모는 다음과 같다. 1967년 2억 달러, 1968년 3억 달러, 1969년 5억 달러, 1970년 신규 5억 달러, 1971년 6억 달러 이상.[31]

1968년 경인고속도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는 등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고 시멘트공장, 비료공장 등을 연달아 짓는 등 수입대체를 가속화하여 과잉 생산분을 농촌에 투하하는 것을 계기로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국내 총투자율은 16%가 늘어나 목표치에 거의 근접하게 되었고 1960년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에 이르러 불과 10여년만에 한국 경제의 몸집은 두배로 불어났으며 1969년에 1인당 GDP에서 북한을 추월하였다.

1차 2차 모두 미국의 자문이 있었다. 3차부터 미국의 자문 없이 실행하였다. 프레이저 보고서 181p

6.3.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2년 ~ 1976년

지침 작성 1969.2 ~ 1969.11
부문계획 작성 1969.12 ~ 1970.5
종합조정단계 1970.6 ~ 1971.1
계획 확정 및 계획서 작성 1970.2 ~ 1971.7

공공/상업 차관 54억달러 도입
연평균 경제성장률 9.2%
연평균 수출증가율 48.5%
연평균 수입증가율 29.7%

제 3차 계획의 특징은 제 1차, 2차 걸친 경제계획 수립 경험이 축적되며 외국고문단의 자문이 대폭 감소한 최초의 한국화된 경제 계획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국내적인 수립 과정의 변화로는 정부 내에서는 1960년대 경제에 있어 지배적이었던 경제기획원 중심에서 정부의 다른 부처의 참여가 확대되면서 경제 계획의 수립에 있어 역할의 분권화 과정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3차 계획부터는 국가 차원의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포스코를 비롯하여 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을 견인하는 중공업등에 대한 집중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수요와 산업연관효과를 고려하여 6개 핵심 부문을 순차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1971년 수출 규모는 1964년에 비해 10배 늘어나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월남 특수 종료 및 1차 오일쇼크,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8.3 사채 동결 조치, 유신선포와 뒤이은 긴급조치 등으로 이를 무마하고, 베이비붐 세대 특수에 따른 노동력 및 미일의 원조를 바탕으로한 과다투자를 실시함으로써 경공업 수출 증가 둔화 속에서 제철이나 조선, 자동차제조 등 노동 집약형, 조립가공형 중화학 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은행의 실전 연습을 박탈함으로써 이후 한국의 전형적인 금융 부실을 초래하였고, 아울러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독주, 독점을 막지 못하고 문제점을 방관하거나 8.3 사채 동결 따위의 편법을 동원함으로써 기형적인 경제를 물려주어 결국 이는 정부 본래 의도와 달리 한국 경제의 병목과 97년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적 비용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2]

1972년 들어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경공업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 합판, 신발, 가발 등의 품목들이었는데 이 같은 수익이 별로 남지 않는 품목들로서는 성장 동력의 전망이 분명치 않았다. 이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당시 경제담당 수석 비서관에게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원철은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었다고 대답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73년 6월에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해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해, 1981년까지 전체 공업비중에서 중공업비중을 51%로 늘리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발표하였다.

주철, 강철, 기계, 조선업, 화학산업혁명이래 선진국이 독점해온 산업으로 막대한 자본 투입과 수많은 기술인력을 양성해야 진출 가능한 분야이다.[33] 한때 열강이었던 스페인도 진출하지 못했었고, 중국도 마오쩌둥의 지시하에 무한정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도전하다 파국을 초래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모험적인 투자인 만큼 자칫하면 한국경제가 단번에 파산 할수 있는 도박성이 짙은 전략이었다.[34]

그러나 1974년 원유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한 오일 쇼크가 발생해 물가상승률이 8배 이상 치솟고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해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았다. 노동집약 건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연간 수출증가율도 40%를 경신했다.

정부는 국내 금리를 그보다 낮게 설정하여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를 실시함으로써 왕성한 기업 설립과 투자를 유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빚을 더 많이 들여옴으로써 부실경영을 주도했다. 1977년 갚지 못한 차관이 68억 달러나(원리금 43억, 이자 22억) 남은 상황에서 3년간 73억불을 새로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차관을 많이 도입한 것은 자원이 없는 한국이 막대한 자본 투입이 필요한 중공업을 육성중이었기에 불가피했던 것이다. 대외 채무액으로 산업을 육성해 수출을 하여 외화를 벌어 공업이 고도화되고 채무가 늘어나는 순환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중공업에 있어서는 장기적인 투자보다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해 기계시설 도입승인제, 수입규제 등 기계공업 촉진을 지속적으로 도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그 결과 선진국의 기피 업종, 노동집약적 중공업, 조립 가공업 위주로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한국형 도급 구조, 조선업 문제 등 이것이 후일 한국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세계 일류의 제품을 만들면서도 미국과 일본에 기술적으로 상당히 의존하는 까닭에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한국처럼 수출주도 전략으로 경제를 일으킨 일본(패전 이후 국민소득이 백불도 못되었다), 독일과 극명하게 차이나는 부분 중 하나다.[35]

포항-울산-부산을 잇는 남동 임해 공업 지역에 중화학 공업을 집중하듯이 하면서 지역 간 격차도 심화되었다는 비판도 주로 이 시기부터다.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있었지만 이를 노동집약적 중공업의 중동 건설 진출로 1970년대 말부터는 서울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고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들을 하나로 통합한 부가가치세를 신설하였다.

6.4.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1977년 ~ 1981년

지침 작성 1974.6 ~ 1975.1
부문계획 작성 1975.1 ~ 1975.5
종합조정단계 1975.6 ~ 1975.12
계획 확정 및 계획서 발간 1976.1 ~ 1976.6

공공/상업 차관 73억달러 도입
연평균 경제성장률 5.8%
연평균 수출증가율 22.5%
연평균 수입증가율 24.4%

경제계획을 수립하는 절차는 정형화되어 제3차 계획의 수립과정과 차이는 미미했지만 민간부문의 참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작성지침과 부문 계획의 수립단계부터 학계, 산업계, 노동단체, 언론계 등 광범한 민간 단체의 참여 하에 수립되었다. 계획이 확정된 이후에도 1976년 경제정책협의회를 개최하여 민간부문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1974.6 ~ 1975.5 약 1년 동안 지침과 부문계획이 작성되었고, 1975.6 ~ 1975.12 반년간 종합조정을 걸쳐 1976.6 확정되어 최종 발간되었다.
1차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후퇴 국면은 1975년 여름 최저점에 도달하고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해 3분기부터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수출도 예상 밖의 신장을 보이고 농업생산도 풍작을 이뤄 국내 경제 활동이 상향 추세를 지속함으로써 한국경제는 다시 고도성장 궤도에 복귀도었다.중화학공업의 수출 증대,중동으로부터의 건설 수익 국내의 왕성한 투자와 소비의 폭발적 증가들이 어우러져 사상 최대의 호황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경제기획원은 이에 고무되어 1976년 하반기 경제 전망 및 대책을 수립해 경제성장률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경제기획원,재무부,통화 당국이 합세해 과속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었어야 했는데 유신 체제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고도성장을 내세우고 있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결과적으로 1976년~78년 경이적인 고속성장이 계속되었다. 이 같은 경기과열로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표면화되면서 수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덕우[36]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삼성경제연구소, 170p~171p
1977년 수출 100억 불 계획을 조기 달성했다. 이는 부진한 경공업에 비해 꾸준히 성장한 중공업의 영향이 컸다. 이해 총수출의 35%를 중화학공업이 차지하였는데, 중화학 공업 생산액이 최초로 제조업 총 생산액의 과반이 된 해이자 제조업 수출의 40%를 최초로 넘긴 해이기도 하다. 그 결과 1980년 수출상품은 총수출 28.6%를 차지하고 있는 부동의 1위 섬유류(1970년엔 전제수출의 40%이상이 섬유류였다)에 이어 11.4%의 전자제품, 10.6%의 철강제품, 3.5%의 선박이 각각 2위, 3위, 5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이 캐시카우를 통해 끊임없이 산업구조를 고도화 하였음을 보여준다. 70년대 중공업 화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제조업 성장률은 연간 20%에 달하여 1979년 전체 제조업 비중에서 중공업 비중은 54%가 되었고 그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48%에 달하여 이같은 변화는 기존 선진강대국들이 50년~100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70년대 경제성장이 국민 전체에 잘 뿌려진 증거로, 노동소득분배율은 오일쇼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급락 없이 10년 만에 10% 증가하였고# 가계저축률은 71년 대비 5.5배나 증가한 15.8%로 증가했으며[다만] 이것을 넘어서게 된 것은 7년이나 지난 1986년이었다.# 설비투자증가율은 연평균 23%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였다.# 살림살이가 이전에 비해 나아졌느냐는 여론조사에서 87%가 긍정하였다#

1962년[38]~1981년[39]까지 1973년[40]을 제외하면 높은 물가 상승률을 보였는데[41]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인플레이션에서 나오듯이 자본과 저축이 빈약해 국토개발과 산업확충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찍어 투입해야 했던것이다.[42]

이러한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설비투자가 과잉투자가 되어 부실기업 정리 및 재고처리를 단행하여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던 시점에 하필 2차석유파동이 터져 1980년 경제성장률을 최초로 집계한 1954년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과 (-1.7%) 30%라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해 한국경제가 폭망하는 위기감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최규하 정부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주도하의 경제정책 전반을 민간경제를 자율성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며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6.5. 제5차 경제 사회 개발 계획

1982년 ~ 1986년

지침 작성 1979.4 ~ 1980.8
부문계획 작성 1980.9 ~ 1980.12
종합조정 1981.1 ~ 1981.3
계획 확정 및 계획서 작성 1981.3 ~ 1981.8

전두환 정부

6.6. 제6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

1987년 ~ 1991년

지침 작성 1985.4 ~ 1985.8
부문계획 작성 1985.8 ~ 1986.4
종합조정 1986.5 ~ 1986.8
계획 확정 및 계획서 작성 1986.9 ~ 1986.12

전두환 정부[43] ~ 노태우 정부[44]

6.7. 제7차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

1992년 ~ 1996년

지침작성 1990.6 ~ 1990.10
부문계획 작성 1990.11 ~ 1991.6
종합조정 1991.7 ~ 1991.10
계획 확정 및 계획서 작성 1991.11 ~ 1991.12

노태우 정부[45] ~ 문민정부[46]

6.7.1. 신경제 5개년 계획

1993년 ~ 1997년

문민정부

원래는 1992년에 수립된 제7차 경제 개발 계획을 이행해야 했으나 문민정부가 새롭게 들어서면서 기존의 계획은 전면 수정되고, 계획 종료를 '96년에서 '97년으로 연기하였다. 이후 '97년에 새로운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려 했으나 갑자기 불어닥친 1997년 외환 위기 사태에 의해 중단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국민의 대부분이 궁핍해 세금이 걷히지 않아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2] 하지만 제2차 계획 기간 동안 국내외적 반발 속에서도 다시 추진되어 건설되었고,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쳐 한국 철강산업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3] 실제로 중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한 70년대 제 3, 4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 동안 박정희 정부미국의 조언과 자문 없이 독단적인 노선을 걸었으며, 이는 프레이저 보고서에서도 교차검증된다 (70년대 들어 수립된) 3/4차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의 자문이 없었으며, AID의 공헌도 미약했다고 기술하였다.(The Korean Government formulated its Third and Fourth Five-Year Plans with virtually no U.S. advisory assistance, and the AID contribu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se plans was minor, 181페이지.[4] 대표적으로 1977년 김종인 박사를 중심으로 서강학파의 대학 교수들이 제안한 의료보험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최초로 도입되었다.[5] 이것을 주도한 것이 기시 노부스케 산업부 차관이었다. 기시는 2차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으로 군수공업을 지휘했고, 전후에 일본 총리로 경제재건과 한일국교정상화를 주도했다.[6] 세부적인 계획과 실행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 여러 후발주자들이 경제계획을 작성하여 추진했다.[7] 1950년 10월부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함[8]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 UNCACK[9]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10] 실제로는 경상가로 따질 경우 비군사적 원조에 한해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약 18억달러 이상이 국내에 들어왔으며, 1960년도 약 2.5억달러가 들어옴으로써 20.5억달러 이상이 경제적 지원으로서 도입되었다.[11] 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ECA-MAS의 후신으로, 1955년 7월 군사적 원조는 국방성으로, 비군사적 원조는 국무성 산하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됨에 따라 폐지되었다[12] Civil Relief in Korea[13] 이후의 충주비료공장[14] 이후의 문경시멘트공장[15] 이후의 인천판유리공장[16]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12.6%[17]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8.5%[18]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5.3%[19]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4%[20]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3.8%[21] 1960년도 전세계 수입의 10.9%[22] 이와 같은 맥락으로 현 한국사 고등교육과정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대부분 박정희 정부의 키워드로만 언급되고 있다.[23] 여기서 말하는 불균형성장론은 모든 산업을 고루 발전시키지 않고, 대신 먼저 발전시켜야 할 산업을 선별한 뒤 그것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이론을 말한다. 이에 따라 비료, 시멘트, 철강, 정유, 전력 부문 개발이 최우선 순위에 들게 되었다.[24] 박태균,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시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25] 이때부터 경제기획원장은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바뀐다.[26] 향후 5년간의 공산품 수출은 장면 내각의 안보다 총 1.3배 늘렸으나 연평균 증가율은 장면 내각의 것과 비슷하게 20% 후반대였다. 반면 농림축산물은 2.5배, 수산물과 광산물은 각각 1.65배 이상으로 장면 내각의 총수출 계획보다 높게 잡아 연평균 증가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대신, 국민 총자본에서 2차산업의 비중을 10% 늘려 장기적인 투자를 강화하였는데 정부 3 민간 7의 비율의 1400억 원을 설정하였다. 이는 국민 총자본의 42%에 해당하는 것으로 액수로 따지면 장면 내각의 안보다 35% 늘어난 것이다.[27] 매일경제 66년 3월 24일 11면[28] 본 문서의 이 세 수치는 이대근, 한국무역론 : 한국경제 선진화의 길 제2판 248쪽에서 발췌함[29] 수출의 날은 이후 무역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11년 무역규모 1조 달러 달성을 기념하면서 12월 5일로 변경하였다.[30] 이 크라우드 펀딩에는 걸프정유, 칼텍스 사 등이 응했다.[31] 전경련. 한국경제정책사 참고, 이시기 5년간 도입된 차관은 미국 공공차관, 상업차관 각각 4.5억불, 일본 공공차관 1.8억불, 상업차관 3.5억불이 전체의 2/3을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주로 서독, 프랑스, 영국 등에서 도입되었다.[32] 박영구, 구조변동과 중화학공업화.[33]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단계가 필요한 만큼 기본적인 수요를 받쳐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가 7,000만 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34] 실제로 동시대에 중공업화 전략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나라가 많았다. 브라질과 루마니아, 멕시코, 알제리 등이 대표적이며,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 등도 원자재값 상승으로 기존에 육성한 중공업도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대적으로 구조조정해서 실업문제를 야기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기업들이 해외진출로 벌어들인 외화와 해외노동자들의 대규모 송금으로 손실을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35] 다만, 한국을 이들과 온전히 비교하는 건 불가다. 근대 정부를 오랜시간 직접 운영해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서 기인하는 인적자원, 경험적 지식의 차이, 남침으로 산업시설의 절반을 잃는 바람에 십년 늦게 출발해 유례없는 황금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측면은 간과할 수 없다.[36] 4차 5개년 계획을 추진중이었던 1974년~78년 경제기획원장을 맡았다.[다만]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1978년보다 1.8% 하락하였다.[38] 1차 5개년 계획 발표[39] 제4차 5개년 계획 종료[40] 물가 상승률이 3.2%였다.[41] 오일쇼크가 터진 1974년~75년에 25% 1979년~81년에는 18%~29%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42] 이를 개발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43] 1987년 1월 1일 ~ 1988년 2월 24일[44] 1988년 2월 25일 ~ 1991년 12월 31일[45] 1992년 1월 1일 ~ 1993년 2월 24일[46] 1993년 2월 25일 ~ 1996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