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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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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년 전후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가울라니티스 베싸이다
(בית צידה / beth-tsaida)[1]
사망 67년 / 68년 (향년 65~67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초대 교황
33년 4월 1일 ~ 67년 6월 29일 (34년 89일)
사인 역십자가
종교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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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표기 히브리어 (시몬 바르요나) שמעון בר יונה
(케파) כיפא
(베드로) פטרוס
그리스어 Πέτρος }}}}}}}}}

1. 개요2. 이름3. 성경에서의 묘사4. 말년에 대한 전승5. '베드로가 여기 있다'
5.1. 정말 그의 무덤인가?5.2. 무덤에 대한 기타 사항
6. 기타7.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2]
-요한의 복음서 21장 15절(공동번역)
예수 그리스도12사도 중 첫 번째 사도이자, 예수 사후 1세대 교회를 지도한 인물이다. 또 다른 사도로 전해지는 사도 안드레아스의 형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중요성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보며, 개신교에서도 교황들이 베드로를 '계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베드로가 1세대 교회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도였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신약 성경과 복음서에서 비중이 큰 인물로, 특히 복음서에서 계속하여 이름이 명시되어 언급되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다. 나오는 횟수도 사도들 중 가장 많은데, 사도행전만 해도 사도 바오로를 제외하면 베드로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비유된 당사자이다.

신약에 반영된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들이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바울로가 전해준 전승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 열두 제자, 500명의 교우, 야고보, 기타 사도순으로 발현하였다.(1고린 15장)
    • 바울로가 창설한 이방계 교회를 위해 저술한 루가 복음서-사도행전의 저자는 (넓은 뉘앙스의 단어인) '사도'를 12제자에게로 한정하고 이들의 대표로 베드로를 묘사한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바울로를 베드로와 평행 인물로 그리는데, 이 두 책이 바울로가 창설한 교회들을 독자로 염두에 뒀음을 감안하면 강조점은 "베드로만큼이나 엄청난 바울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로마 지역의 이방계 교회에서 저술된 마르코 복음서는 (제자들의 부족함을 강조하긴 하지만) 베드로를 제자들의 대표 인물로 그린다.
  •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계 교회에서 저술된 마태오 복음서는 베드로를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으로 그린다.(마태오 16장)
  • 유대계 교회에 속하지만 독특한 성격이 강한 요한계 전승에선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제자단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로 묘사한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계 전승 집단과 관련됨을 고려하면 서술 의도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만큼이나 엄청나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곧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들이,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중요성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황권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해석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초대 교회의 최중요 핵심 인물에 속한다는 건 성서학계에서 이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들, 정확히는 '할례받은 사람들'의 사도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로와 대비된다.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 중에 하나다.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며, 정교회 역시 역대 로마 교황들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한다.[3] 축일은 사도 바울로와 같이 6월 29일이다. 반드시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대체적인 일반인들의 인지도도 이스카리옷 유다 다음으로 높은 편이다.

상징물은 열쇠.[4] 이유는 후술할 마태오 복음서의 내용 때문인데, 물론 다른 상징물도 많지만 열쇠는 성 베드로만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회화나 조각 등에서 열쇠를 들고 있는 성인이 있다면 100이면 100 성 베드로이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의 광장 역시 열쇠 구멍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초대 교황이기 때문에 삼중관과도 연관이 있기는 한데, 삼중관은 교황 출신 성인들의 공통된 상징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파일:D41o1Ng.jpg
성 베드로, 바스코 페르난데스[5], 1506년, 패널에 유채, 그랑 바스코 미술관, 비제우

성격이나 행적, 그리고 전승에서의 최후를 보면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다 스승이 으뜸으로 꼽은 제자였으며[6] 스승과의 친분또한 두터웠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거칠고 성급하고 솔직했다. 둘 다 섬기던 스승을 위해 싸웠던 적이 있으며, 둘 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2. 이름

본명은 아람어로 시몬 바르요나(ܫܡܥܘܢ ܒܪܗ ܕܝܘܢܐ، שמעון בר יונה)이며, 요나의 아들[7](ܒܪܗ ܕܝܘܢܐ، בר יונה) 시몬(ܫܡܥܘܢ، שמעון)이라는 뜻이다. 요한의 복음서 21장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예수는 그에게 "바위"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케파(ܟܐܦܐ، כיפא)'를 호칭으로 주었다. 이 호칭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페트로스(Πέτρος)가 되며 라틴어로 옮기면 페트루스(Petrus)가 된다. 그래서 언어 고증을 살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시종일관 베드로를 '케파'로 부른다. 서구권에서도 드물지만 이 단어가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인 케파 블랑코(Kepa Blanco González)레알 마드리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골키퍼인 케파 아리사발라가(Kepa Arrizabalaga Revuelta)가 있다.

눈여겨볼 점은, '케파'(베드로)라는 이 호칭을 받은 것이 단순한 개명(改名)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케파"도 "베드로"도 당시엔 인명으로 쓰인 바가 없으며, 여기엔 메시아(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직함이었다.[8]
시몬이 베드로라고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호칭이었다 ... 나아가 '케파스(Kefas)'라는 이름이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은 그것이 단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고유한 이름은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José Antonio Sayés, 《교회론》La Iglesia de Cristo, 윤주현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8, p.690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 예수의 세속적 풀 네임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이(메시아) 예수'라는 의미이듯이, '시몬 베드로' 역시도 시몬의 풀 네임이 아니라 '바위(케파)'라는 직함을 시몬이 받았음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이름은 다양하게 쓰이는데 영어의 피터(Peter), 독일어의 페터(Peter), 프랑스어의 피에르(Pierre), 스페인어의 페드로(Pedro), 이탈리아어의 피에트로(Pietro)나 피에로(Piero), 러시아어의 표트르(Пётр), 체코의 페트르(Petr), 아랍어 부트루스(بطرس) 등.[9] 언어에 따라서는 원형에 가까운 페트로도 쓰인다.[10] 한편 여성형 이름은 페트라인데, 베드로와 달리 큰 변화 없이 전래되었다.

덧붙이자면 로망스어에서는 아직도 고전 그리스어라틴어로 물려받은 원래의 이란 뜻의 단어와 형태적으로 유사하다. 이탈리아어의 Pietra(돌)-Pietro(피에트로)가 대표적. 영어에도 이는 남아있는데, 암석을 뜻하는 접두 petro-로 사용된다. 석화(petrification), 암석학(petrology), 석유(petroleum) 등이 그 예[11]이다. 우리말의 한자어 돌 석 자와 비슷한 느낌의 위상이다.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역대 교황들이 교황명을 선택할 때, 요한이나 바오로 같은 사도들의 이름은 자주 고르면서도 유독 베드로만은 고르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베드로를 고르면 안 된다는 금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도와는 달리 예수가 직접 지어준 이름인 데다가 초대 교황이라는 상징성도 있어서 감히 고를 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로부터 이름을 받기 전에 가지고 있던 시몬 역시 지금도 서양권에서 인명으로 많이 사용된다. 영어권 인명인 사이먼의 어원이 히브리어 인명인 시몬이다. 프랑스어로 시몽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있다. 하필이면 이름 받기 전 이름과 이름 받은 후 이름이 모두 있다.

과거 가톨릭에서는 "베드루" 라고 표기되었다.

3. 성경에서의 묘사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어부였다. 그래서 기존에는 하층민이었을 것이라 설이 지배적이었다가, 시대가 흘러 당시 갈릴래아 호수의 어업이 돈이 되는 고부가 산업이라 중산층이며 교육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현대에도 어업은 힘들지만 운만 따라주면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나름 고부가 산업이다. 베드로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토대로 베드로가 부유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근거가 미약해 학자들의 비주류 의견 정도. 또한 그 집터라는 것도 진짜 베드로의 집터라는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가난하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연설을 듣고 놀라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베드로의 인상이 무식해 보여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대체로 고대로 갈수록 '외적인 아름다움 = 내적인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좋은 연설을 하는 바람에 놀랐던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에게 천국열쇠를 건네받았다고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12]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파일:external/i0.wp.com/12-Keys.jpg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암브로지오 부온비키노, 성 베드로 대성당 파사드
천국의 열쇠와 관한 내용은 가톨릭 교황의 권위와, 종교 개혁 시대의 사도 전승 논쟁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므로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rowcolor=#000>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13]
18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19δώσω σοι τὰς κλεῖδα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ὃ ἐὰν δή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δεδε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ὃ ἐὰν λύ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λελυ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14]
18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18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은 이 내용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천국 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지며, 여러 전승에서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진 문지기로 등장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부활과 승천 후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의 교황들에게 맡겨진 직무는 여기서 근거한다.

정교회 역시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사도 전승을 잇는 모든 주교들 중 으뜸임은 인정한다. 이를 '명예 수위권'이라 부르긴 하지만, 로마 바깥의 교구에 대한 결정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The bishop of Rome would be, by ancient custom, the “first” of the world’s bishops and of the regional patriarchs. His “primacy of honor” would mean, as it meant in the early Church, not simply honorific precedence but the authority to make real decisions, appropriate to the contexts in which he is acting.
[로마 주교의 권한은 고대 관습이 그러했듯이 세계 주교들과 지역 총대주교들의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의 "명예 수위권"은 단지 존경적인 수위가 아니라 실재로 결정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활동하는 맥락에 고유한 것이다. -고대 교회가 의미하둣이-]
The North American Orthodox-Catholic Theological Consultation, 「Steps towards a Reunited Church: A Sketch of an Orthodox-Catholic Vision for the Future」, 2010-10-02, 제7항 a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교황권의 근거로 보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반석'이 여기서 베드로를 의미하고 베드로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걸 교리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 데 비해 여기의 '반석'(페트라)은 여성형 일반 명사로서 '바윗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증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15] 견해이다.[16]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17] 즉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18]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19]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20]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21]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호크마 주석》
Rock(Aram. Kēphā).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 On building on a rock, or from a rock, cf. Isa li 1 ff.; Matt vii 24 f. Peter as Rock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future community (cf. I will build). Jesus, not quoting the OT, here uses Aramaic, not Hebrew, and so uses the only Aramaic word which would serve his purpose.
In this view of the backgrond of vs. 19, one must dismiss as confessional interpretation any attempt to see this rock as meaning the faith, or the Messianic confession, of Peter. To deny the pre-eminent posotion of Peter among the disciples or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s a denial of the evidences. Cf. in this gospel x 2, xiv 28-31, xv 15.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cf. Gal ii 11 ff.).
[바위(아람어. Kēphā).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바위 위에, 혹은 바위로부터 건설을 하는 것에서 (cf. 이사 51,1 ff.; 마태 7,24 f.) 바위로서의 베드로는 미래 공동체의 기반이 될 것이다(cf. 내가 ... 세울 터). 예수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그렇게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유일한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19절을 볼 때는 어떠한 교파적 해석도 떨쳐버려야만 한다. 이 바위가 베드로의 믿음라느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느니 하는 시도를 떨쳐버려아만 한다. 베드로가 제자단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가진 탁월한 포지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Cf. 마르 10,2; 14,28-31; 15,15.)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cf. 갈라 2,11 ff.).]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베드로'라는 직함 자체이다. 통상 이것이 '시몬이 베드로로 개명되었다'고 인식되지만, Albright와 Mann이 지적했듯이 '베드로'는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이 사람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아람어 케파이든 희랍어 페트로스이든 인명(人名)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몬이 베드로로 개명한 게 아니라 시몬이 '베드로'라는 직함을 받은 것이며, 이는 마치 예수에게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직함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시몬과 예수의 말이 상호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시몬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응답한다: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sy ei ho christos]
너는 그리스도이다직역
그러자 예수는 '시몬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규정한다:
σὺ εἶ Πέτρος
[sy ei Petros]
너는 베드로이다직역
곧, 시몬이 예수에게 '너는 그리스도이다'라고 고백하고, 즉시 예수가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예수에게는 '기름 부음 받은 이'의 직함이 시몬에게는 '바위'의 직함이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바울로는 시몬을 '케파'라고 부르는데(1고린 1,12; 3,22; 9,5; 15,5; 갈라 2,9; 2,11; 2,14) 희랍어 '페트로스'와 아람어 '케파'가 초기 교회에서 모두 쓰인 것은, '베드로'가 '개명된 새 이름'이 아니라 '미스터 바위'로 이해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모두 쓰이는 건 인명(人名)이 아니라 별명이나 직함이기 때문이다.(예: 메시아아람어 - 그리스도희랍어)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1세대 교회의 신앙 고백문에서도 베드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rowcolor=#000> 고린토 전서 15장 3-5절
3παρέδωκα γὰρ ὑμῖν ἐν πρώτοις, ὃ καὶ παρέλαβον, 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4καὶ ὅτι ἐτάφη 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ᾳ τῇ τρίτῃ κατὰ τὰς γραφὰς 5καὶ ὅτι ὤφθη Κηφᾷ εἶτα τοῖς δώδεκα·[22]
3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4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5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200주년 신약 개신교 새번역
고린토 전서 15장에서 바울로는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을 언급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초기 교회의 정식화된 신앙 고백이라고 본다. 즉, 바울로가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도 교회에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라는 발현 정식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루가 복음서에서도 이런 인식을 볼 수 있는데, 루가 복음서의 발현 기사에서는
ㄱ. 여자들에게의 천사 발현 (24,1-8)
ㄴ. 베드로의 빈 무덤 확인 (24,9-12)
ㄷ.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의 예수 발현 (24,13-35)
ㄹ. 11제자에게의 예수 발현 (24,36-53)
순으로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런데 ㄷ 말미의 34절에서, 약간 뜬금없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rowcolor=#000> 루가 복음서 24장 34절
ὄντως ἠγέρθη ὁ κύριος καὶ ὤφθη Σίμωνι.[23]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루가 복음서의 다른 발현 보도와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 문구는, 바울로의 경우와 유사하게 초대 교회의 짤막한 발현 정식이다. 여기에서도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도들보다는 왠지 신비성이 떨어지고 세속적이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는 베드로가 이례적으로 사도들 중에서 복음서의 서술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사도인데, 위에 등장한 신앙 고백같이 좋은 이야기는 딱히 등장하지 않고 대체로 부족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도라는 것 자체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 군중들이 돌아가는 동안 예수는 제자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했는데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저어 가다 밤이 되자 거센 역풍이 불고 물결이 거칠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물 위를 걸어 이쪽으로 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유령인 줄 알고 떨지만 그는 예수였고 다들 안심하라고 이른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이시라면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해 주시라고 청하고, 예수가 승낙하자 처음에는 성공하지만 몇 걸음 걷다 거친 비바람에 겁을 먹자마자 머리까지 쑥 빠지고 만다. 베드로가 어푸어푸거리면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는 즉시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도로 서게 하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라고 질책하였다.[24]그리고 예수와 베드로가 함께 배에 타자 바람은 거짓말같이 그쳐 잠잠해졌다.
  •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죽으러 출두하는 것을 막다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질타를 듣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수난을 당하여야 된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대경실색하며 "주님 안 됩니다." 하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수난을 당한다는 말을 접하고 뜯어말리려 드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만, 세속의 관점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일을 판단하려 드는 것에 대해 스승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질타를 얻어 들은 것이다. 게다가 원문상 베드로와 예수가 각각 사용한 희랍어 동사인 ἐπιτιμᾶν(epitiman)는 '비난하다' 정도의 굉장히 강한 표현이다. 즉 베드로가 예수에게 그래선 안 된다고 비난하고(epitiman)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비난하는(epitiman) 장면인 것이다.# 물론 이는 복음서가 특별히 베드로 개인을 속물로 묘사하려 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 알려지고 유명한 제자인 베드로의 속물적 인품과 약점을 통해서 제자단 전체의 속물적 인품과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25] 따라서 "베드로가 이렇게 비판받으니 그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감상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현대 성서 주석학의 연구 성과를 반대로 오독한 것이며, 오히려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신약 저자들에게 당연했기에,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이 부각된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야말로 현대 주석학에 부합한다. 즉 마르코 복음서, 더 나아가서 신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베드로의 약점들은 그가 대표하는 '교회'의 약점이다. 그렇기에, 앵커바이블 주석에선, 마태 16,21-23을 해설하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Peter spoke for the rest in confessing Jesus as Messiah, and here he is their spokesman in protecting the need for the Messiah to suffer and to die.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같은 책, p.200
  • 예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뒤 배신을 때린 일. 이후엔 회개하여 이것은 용서받은 것으로 친다고 하지만, 하여튼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매우 중요하며 굉장히 유명한 대목이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너는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26]까지 나를 3번이나 부정할 것이다." 하고 예언하였다. 그날 밤 예수는 체포당했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그대로 도망쳤다.[27] 그리고 베드로의 얼굴을 사람들이 알아보자 예수가 누군지도 모른다며 계속 부정했고, 심지어 마지막 3번째에는 "내가 예수랑 정말 아는 사이면 난 천벌을 받을 거다!"라고까지 하는데,[28] 부정하자마자 바로 새벽닭이 울었다.[29] 베드로는 그 순간 예수의 예언이 떠올라서 대성통곡을 했다. 이후로는 고향인 갈릴래아 호숫가로 돌아가서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다시 어부 노릇을 하며 지낸다.[30]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다시 베드로에게 나타나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고 아침 식사를 함께 한다. 식사가 끝난 뒤 기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이렇게 묻는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31] 베드로는 물론 "사랑합니다!"를 외쳤지만, 예수는 그 질문을 일부러 3번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의 행동의 의도를 깨닫고는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32] 흡족해한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33]라고 대답하며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사실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쓰인 "사랑"은 그리스어 원서에서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엔 단순한 용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요한 복음서 문서 참고.

이처럼 고집이 세서 말도 안 듣고, 열받으면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고, 치기심에 한 말도 잘 지키지 못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듯 딱히 잘나거나 우월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하여 제자들 중의 으뜸이자, 제자단 및 교회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1세기에도, '미스터 바위'라는 이 이상한 별명의 사도는 교회에서 매우 유명하고 존경받는 리더였다. 그리고 성경은 이미 잘 알려지고 유명한 베드로라는 사도에게, 속물적 모습과 영웅적 면모가 공존하는 교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제자단도, 21세기의 교회도, 마치 베드로처럼 속물적 모습과 영웅의 면모가 공존하는 매우 복합적인 공동체이다. 지상의 교회는 완덕(完德)에 도달한 사람만 있는 무균실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예수는 지상의 교회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 그러니까 죄인들의 공동체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속물적인 죄인들의 공동체야말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1고린 11,26) "부활을 선포"(사도 4,2)하는 자리이다. 성경 역시도 근본적으로 교회의 문헌이기에, 지상에 남아있는 것은 사실 교회의 메시아 고백(마태 16,16)과 교회의 부활 목격 증언(1고린 15,5) 뿐이다. 교회의 모습이 때로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우습고 졸렬하고 속물적으로 보이더라도, 이 교회야말로 메시아 고백과 부활 선포를 간직한 공동체이다. 이 교회를 그리스도인은 '믿어야' 한다.[34] 실상 토마스의 불신(요한 20,24-29)도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증언'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과 함께 스승을 배신한 속물적이고 졸렬하고 우스운 형제들을 단지 불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신을 그리스도는 마치 자신에 대한 불신인 것처럼 꾸짖는다.(요한 20,29)

성경 속 베드로는 교회가 가진 이 양면성을 하나의 인격에서 모조리 보여주고 있다. 메시아의 의미를 몰랐지만(마태 16,22) 스승이 메시아라는 고백은 이 무지한 제자에게서 나왔다.(마태 16,16) 절대 스승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마태 26,33), 막상 스승이 잡히자 관계를 부인했다.(마태 26,70)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는 발현한 스승을 처음엔 못 알아봤지만(요한 21,4) 동료 제자가 알려주자 그 자리에서 호수에 뛰어들어 무려 200페퀴스(약 100m)를 헤엄쳐 스승에게 다가간다.(요한 21,7-8)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이 양면적인 제자가 일어나 복음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사도 2,14-36) 이 속물적이고 졸렬하고 우스운 제자의 선포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다고(마태 16,17) 믿을 때 교회가 현존하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의 성격은 엄밀히 따지면 성격이 급하고 감정에 솔직한 것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예수가 스스로의 죽음을 예언하자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류를 하였으며, 또한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는 두려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도주를 하였다가 죄책감 때문에 오열을 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 21장에서, 예수가 사랑하냐고 반복해서 묻자 슬퍼하였다는 대목과, 예수의 바로 옆에서 계속 사랑과 용서에 관한 말을 계속 들었음에도 예수가 잡혀가게 되자 스스로의 감정을 못 이기고 칼부터 꺼내서 병사의 귀를 싹둑 잘라버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 여러모로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대비되는 인물이다.

이처럼 얼핏 봤을때는 소시민적이고 다혈질인 이미지가 있지만, 예수님의 12사도 중 제1사도로서 그가 일으킨 기적은 수없이 많다. 특히 유명한 일은 사도행전 3장[35]에서 성전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일어나게 한 기적과, 5장[36]에서 재산을 판 돈의 일부만 바치고선 전부를 바쳤다는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하나니아스와 사피라[37]) 부부의 죄를 밝혀낸 사건이다.[38]

사실 기적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 베드로의 입지는 상당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 제자들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였고, 예수의 사후 초기 그리스도교 전파에 있어 전체 교회의 리더 급 역할을 도맡아 했다. 베드로와 교황직의 관련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논쟁은 민감한 사안이지만, 베드로가 1세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건 이견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특히 이방인 신자와 율법에 관한 당대의 논쟁에서, 베드로는 양쪽 입장(예루살렘 교회 vs 바울)의 가운데에 끼어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욕먹기 쉬운 중도파 역할을 수행했다. 신약 성경 속 베드로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 요한, 바울, 안티오키아 교회와 각각 모두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베드로가 왜 초기 교회에서 중요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의 안티오키아 사건도,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하면 중도파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 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uege, 분도출판사, 2008. 160쪽

할례 문제로 이민족 그리스도교 입교자들과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간에 교리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민족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여 그리스도교 전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당시 많은 비유대인들이 유대교에 호감을 느꼈으나, 할례가 부담스러워서 개종은 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외국인'으로 지냈다. 이는 할례가 단순한 수술이 아니라, 유대교의 복잡한 의식과 율법을 모두 지킨다는 서약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베드로 또한 원래 할례 문제에서는 유대인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로 코르넬리오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하고, 세례를 베푼 경험을 생각하며, 율법의 규례를 부과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음행, 목매인 것이나 짐승의 생피 등 최소한의 율법만을 지키게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할례 문제로 바오로에게 대놓고 공개 디스를 먹기도 했다. 바오로에게 공개 디스를 먹은 이 사건이 단순히 베드로의 외식이라기보다 이때 접한 자들이 야고보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진('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유명한 그)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갈 2:12) 율법에 엄격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었기 이방인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며 이를 책망받을까 봐 두려워한 듯하다. 이것은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있어서는 거침이 없었던 바울로와, 대조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비유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와의 화합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신중한 중도파 베드로의 성향 차이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보편 서간'으로 분류되는 베드로 1서, 베드로 2서의 필자가 사도 베드로를 자칭하고 있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사도 베드로가 저자가 맞다고 인정하지만 초대 교회부터 저자에 대한 논란은 쭉 지속되었다.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두 책 모두에 대해서 베드로의 친저성을 조심스럽게 본다. 그나마 베드로 1서의 경우, 베드로가 저술했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현대 주석학자들도 있지만,[39] 베드로 2서는 내용이 유다서에 의존적인 등의 이유로 신약 성경 중 가장 늦은 2세기 초중반에나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4. 말년에 대한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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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안니발레 카라치, 1601~1602년,
패널에 유채, 77.4 × 56.3 cm, 런던 영국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베드로의 십자가형, 벤투라 살림베니, 1604년
가톨릭 교회의 전승과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네로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지목하여 개시된 그리스도교 학살 시기인 64년 또는 67년에 사형을 받아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순교하였다.[40] 이때 "나는 그분과 똑같이 죽을 자격이 없다"면서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하여 실제로 그렇게 순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거꾸로 된 십자가는 초대 교황을 상징하는 또 다른 십자가로도 쓰이는데, 근대부터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창작자들에 의해 이것이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이는 경우가 잦다.[41] 그 때문에 교황이 역십자와 함께 찍힌 사진이 떡밥용으로 나돌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역십자, 쿠오 바디스 문서 참고.

쿠오 바디스라는 경구로 유명한 말년의 베드로에 관한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베드로는 신자들의 권유로 탄압을 피해 로마에서 빠져나와 도망가려 했었다. 로마를 벗어나던 중 베드로는 자기와 정반대 방향, 즉 로마로 가는 예수의 환영을 보게 되고 깜짝 놀란 베드로는 예수에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대답하자[42] 베드로는 큰 깨달음을 얻고 부끄러움에 통곡한다. 그리고, 목숨에 연연했던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면서 스스로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자수를 하고 역십자에 매달려 순교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훗날 베드로의 유해가 묻힌 성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위 일화는 폴란드의 소설가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년 5월 5일 ~ 1916년 11월 15일)가 쓴 소설 《쿠오 바디스(Quo vadis. Powieść z czasów Nerona, 1895)》를 통해 유명해진 것으로, 실제로 성경 본문[43]에는 등장하지 않고, 외경인 '베드로 행전'의 일화로서 베드로의 로마 선교는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도행전이나 신약 정경 내의 여러 편지들에서 로마 체류 증거가 발견되는 바오로와는 달리 베드로의 로마 순교에 대해서는 일부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부정하기도 한다. 일단 신약 정경 내에는 베드로의 후기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사도행전 후반부는 거의 바오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기도 하고, 바오로 서간이나 베드로 서간에서도 '바빌론'이라는 간접적인 비유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대 교부들은 베드로의 로마 전도를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개신교에서도 이에 대한 동의가 증가하고 있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 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5. '베드로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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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세워진 대리석 성상, 1840년 베드로 청동 성상, 아르놀포 디 캄비오, 13세기
순교한 후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에 묻혔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무덤이 위치한 언덕이 가톨릭의 총본산이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과 내부에 각각 대리석청동으로 제작된 베드로의 성상이 서 있다. 특히 캄비오의 베드로 청동상은 오랜 세월 순례자들이 성상의 발을 만지고 입을 맞추면서 발가락이 모두 닳아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초대 교황으로 여기기 때문에 축일인 6월 29일에는 교황관만툼을 입히는 의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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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유해로 알려진 것 중 왼쪽 손목뼈와 손바닥뼈.
1세기에 사망한 60대 중반의 남자로 추정된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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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무덤 앞에 서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검은색 부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베드로 사도의 성유해이다.
이곳 지하에 베드로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다는 전승은 2,000년 넘게 이어져,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당시 교황 율리오 2세는 옛 성당에 있던 베드로의 무덤을 성당 내의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건축 책임자 도나토 브라만테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하고, 절대 옮기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성 베드로 성당 지하에 내려가면 '베드로 무덤 성당'이라고 하는 소성전이 나온다. 일반 관람객은 들어갈 수 없고, 로마 가톨릭 사제가 교황청에 정식으로 요청하면 이 소성당에서 일행과 함께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초대 교황의 무덤 성당인 만큼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전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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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서 발견된 무덤에 새겨진 그리스어 'Petros eni'(베드로가 여기 있다).

베드로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은 1939년 교황 비오 1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할 때 중앙 제대 밑 갈라진 벽 틈에서 발견됐다. 그 무덤에는 150년경에 만든 천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 벽에는 그리스어로 "Petros eni", 즉 "베드로가 여기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9년 8월 이 무덤을 본격적으로 발굴했다. 발굴된 유골은 금실로 수놓은 자주색 천에 정성스레 싸여 있었다. 조사 결과 유골은 1세기경 골격이 큰 60대 중반 남자의 뼈로 밝혀졌다. 참고로 베드로는 60대 후반의 나이로 순교했다고 한다. 1950년 12월 23일 비오 12세는 발다키노(천개) 아래의 지하실 공간에서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고, 1968년 6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여기서 발견된 유골이 베드로의 유해로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한 후 그다음 날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매장했다. 2013년 11월 24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2013년 신앙의 해 폐막 미사에서 베드로의 유골을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2019년 6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성유해가 담겨진 성해함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바르톨로메오스 1세에게 선물하였다. 기사 베드로 사도의 유해가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의 수위권을 상징하고, 로마 주교인 교황과 동방의 총대주교들 간의 불화 역시 이 수위권 문제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에, 이 기증에 대해서 교회 일치를 위한 상징적이고 상당한 의미를 지닌 진전이라는 평이 있다. [44]

5.1. 정말 그의 무덤인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는 베드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순교한 직후 로마의 공동묘지였던 네크로폴리스에 묻혔고, 베드로 대성당은 그 네크로폴리스 위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어딘가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베드로의 무덤으로 발표된 '그 무덤'이 정말 베드로의 무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베드로가 순교했을 당시에는 그의 추종자였던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혹한 박해를 피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지내는 형편이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베드로의 무덤에 당당하게 베드로 이름의 비석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의 주인이 베드로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베드로의 무덤을 비석조차 세우지 않은 무명묘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권위는 막강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비밀리에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추모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접 베드로를 매장했던 장본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네크로폴리스의 수많은 무명의 무덤 중에서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 시기 동안 세대를 걸쳐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승되어 왔다.

로마의 박해 시기가 지나고, 그리스도인임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자,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그동안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은밀하게 전해 내려온 비밀이었기 때문에, 막상 공식적으로 베드로의 무덤을 인정하려니, 너무 많은 '베드로의 무덤'이 생겨난 것이다. 베드로의 무덤에 대한 논쟁은 가이우라는 로마의 사제가 네크로폴리스의 한 무덤 옆에 이곳이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내용의 푯말을 세우면서 종식이 되었으며, 그 무덤이 현재 교황이 인정한 베드로의 무덤이다.

과연 '그 무덤'이 베드로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황이 '그 무덤'을 베드로의 무덤으로 인정한 것은 엄밀한 검증이 부족했던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반가톨릭파의 주장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회의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바티칸 내부의 명망 높은 사제들이며, 바티칸의 신학 대학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하여 전 세계에서 유학 온 사제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이러한 수업은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것에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서 존중하여야 한다'로 결론을 낸다고 한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발굴에 참여한 마르게리타 과르두치 같은 고고학자들은 '유해가 베드로의 것인지에 대한 것과 무관하게, 이 무덤은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던 베드로의 무덤이 맞다'고 생각하며, 사제들은 고고학자들이 무관하다고 퉁친 부분인 '유해가 베드로의 것이 맞는가'에 더 무게를 두어서 유해가 베드로의 것이냐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역시 공식적으로는 베드로의 무덤을 공표하였지만, 이것은 엄밀한 고고학적 발표가 아닌 믿음의 천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베드로의 유해일 수도 있지만 아니다고 볼 개연성 또한 타당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결정된 무덤의 유골의 성별이나 나이가 베드로의 순교한 시점의 나이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45]

5.2. 무덤에 대한 기타 사항

잘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원래 베드로가 매장되어 있던 곳을 볼 수 있는 투어도 존재한다. 바티칸 발굴 사무소로 신청서를 작성하면 투어를 할 수 있는데 현재도 발굴 중인 바티칸 네크로폴리스를 관람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발굴 현장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고 대단히 습한 환경이다. 그러나 투어가 끝날 때는 교황들의 지하 무덤 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와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보안 검색대의 긴 줄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투어를 보다 보면 베드로의 무덤은 작은 틈새로만 보이는데 이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으로 발굴 시 위쪽에서 팠기 때문에 옆쪽에서 추가적으로 구멍을 내면 붕괴 위험이 있어 발굴을 중지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는 지하 네크로폴리스 발굴의 흑역사와 관련이 있다. 처음 비오 12세가 임명한 발굴 총책임자였던 루트비히 카스 신부는 고고학에는 문외한이었고 고고학 박사 학위를 딴 지 2년 된 안토니오 페루아 신부가 발굴을 지휘했다. 그러나 페루아 신부는 무작정 발굴에 착수해 베드로의 무덤이 있으리라 추정한 곳까지 파 내려갔으나 베드로의 무덤은 없었다. 그리고 페루아 신부는 결국 베드로의 유해를 찾을 수 없음을 선언하고 판 내용물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카스 신부는 페루아 신부가 판 흙더미에 유물이 있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보관해두었다. 마르게리타 과르두치 같은 고고학자들은 추가 연구를 통해 버린 흙더미에서 가이우스의 벽과 베드로의 유해를 찾았고, 바오로 6세는 이것이 베드로의 유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페루아 신부는 꾸준히 이것이 동물 뼈일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해 공식적 인가는 받지 못했다. 이 유해가 진실된 사도 베드로의 유해로 선포된 것은 이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제대 밑 무덤의 유골이 1세기경의 유골임이 밝혀져 사도 바오로의 유해의 진실성이 입증된 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이다.

현재까지도 파 버린 무덤을 원상 복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기타

간과하기 쉽지만 베드로가 기혼자였다는 서술이 성경에 분명히 등장한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내용이 있고,[46] 고린토 1서에서도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9:5.공동번역)"라고 서술되어있다. 다만 예수를 만나기 전에 결혼한 것이고, 오히려 그 당시에는 성인이 되고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가끔 일부는 그것을 문제 삼긴 한다. 그러나 성직자의 독신제는 가톨릭 역사에서도 처음부터 있었던게 아니라 먼 훗날에 생긴 것이며, 가톨릭 내부에서도 믿을 교리(도그마, 신덕 도리)가 아니라 예법이므로 별문제는 없다.[47]

이스라엘에서는 틸라피아를 베드로 물고기(St.Peter's fish)라고 부른다.

북한을 세운 김일성의 부모는 개신교의 일파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48] 신자였는데 김일성의 어머니 이름은 베드로에서 따온 강반석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그리스도교와 연을 끊었고 북한을 세운 뒤 주체사상을 만들어 다른 종교, 사상을 박해했는데 박해 대상에 그리스도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체사상 문서에도 나오듯이, 주체사상 내용에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왜곡해서 차용했다는 흔적이 나타나는데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등 여러 곳에서 독재에 유용한 부분들을 뽑아 썼고 심지어 공산주의 이념조차도 몇 개를 뽑아 썼을 뿐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독재자라고 까인다.[49]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점 때문에 베드로는 또한 어부의 수호성인이다. 장 콕토가 빌프랑슈에서 어부들을 위해 예배당 건물을 재정비했을 때 베드로의 벽화를 그려 넣었던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독일에서는 낚시 중 월척을 낚았을 때 Petri Heil!이라고 하는데, Petri는 Petrus의 소유격이다. 즉 직역하면 '베드로 만세'라는 뜻.

예수를 3번씩이나 부인하고 경멸하기까지 한 일(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때문에 가롯 유다만큼은 아니지만 배신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다만 베드로가 성질이 급하다는 것 때문에 다른 제자와는 달리 예수의 제자인 게 눈에 잘 뜨인 데다가 다시 예수를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금 예수 앞에 세워진 것과 달리 가롯 유다는 배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때문인지 국내에서는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는 사람, 자기 주관 없는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바른정당 탈당사태황영철 의원[50]이 하루에 3번씩이나 잔류 및 복당 여부를 번복하자 황베드로라며 까였다. 이재명김성태를 세 번 모른다고 하자 조선일보에서 '정치계 베드로'라고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진지하게 경멸조로 배신자를 묘사할 때 쓰이는 유다[51]와는 달리 베드로의 배신은 인간의 원초적인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 최후가 유다와 같은 수치심으로인한 자살이 아닌 순교한 것까지 묶어 생각해 보면 그 나약하던 베드로가 신앙의 힘으로 결국 인간이 가진 원초적 나약함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순교자가 되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긍정적인 예시로 여겨진다.

이 일화는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예수'혹은 '그리스도교'관련 유머 코드로도 자주 활용된다. 주로 예수와 관련된 글이 올라오면 "베드로야 내가 XX해야 믿겠느냐" 같은 레퍼토리로 댓글을 다는 식. 때문에 가끔 이런 유머 코드에선 예수가 온갖 개드립을 늘어놓는 것에 정색하고 태클을 거는 진지충 겸 의심병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영-미어권의 피터, 불어권의 피에르[52], 스페인어권의 페드로, 독일-스칸디나비아어권의 페터, 슬라브어권의 표트르 등의 이름은 모두 성 베드로로부터 유래된 이름 등등 12사도와 더불어 유럽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다.

한국 가톨릭 사제들의 세례명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53] 다만 베드로라는 세례명 자체가 약간 유행이 지난 느낌이라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아서 젊은 신부들 중에는 베드로가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다.[54]

7. 대중 매체에서

보통 영화애니메이션 등의 매체에서는 이상하게도 약간 살집 있는 체형에 중년 이상의 나이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예수가 꽃미남으로 나오는 것과는 딴판이다.[55] 아무래도 성경상에서 그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묘사하다 보니, 그만큼이나 익숙하고 친숙한 사도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그런 듯하다. 물론 위에서도 강조했듯이 이는 성경이 베드로 개인에게 악감정을 품은 게 아니라, 수제자 베드로가 가진 인간적 약점들을 초대 교회가 '교회의 자화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세기에나 21세기에나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에게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편안한 인물인 셈.

매체에서는 예수에게 천국의 열쇠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주로 천국의 문지기 이미지로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사도들 중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한 성깔 하는 데다 인간적인 면모도 겸비한 탓인 듯. 사후 세계에 관한 종교 유머에서는 단골 등장인물인데 특히 천국의 문을 지키고 있다가 악인이 얼쩡거리면 "너 같은 답이 없는 죄인이 어딜 감히 천국에 기어 들어와!!" 식으로 불호령을 내리는 건 거의 클리셰급. 그리고 이러다 역관광을 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천국 문 앞에서 퇴짜를 놓고 있는데 예수가 나타나 천국에 들여보낸다거나, 죄인을 지옥으로 쫓아냈더만 그 죄인이 지옥에서 난동을 부려서 베드로까지 처지가 곤란해진다든가.[56]

콜드플레이(Coldplay)의 노래 Viva la Vida 중에선 'St.Peter won't call my name'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성 베드로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즉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를 맡았던 오마 샤리프가 베드로 역을 맡은 2005년작《성 베드로(San Pietro)》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다룬 대표적인 영화다. 오마 샤리프는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는데, 이 영화에 출연함을 계기로 알 카에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퇴마록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만 언급된다. 세계관의 특성상 가톨릭계 성인들은 죄다 영능력자인데 베드로는 예수의 대제자 보정을 받아서 그 중에서도 엄청난 능력자였다고 묘사된다. 무려 시몬 마구스를 발라버렸다. 시몬 마구스가 퇴마록 세계관에 끼친 엄청난 직접적 영향을 생각하면 과연 대단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물론 시몬 마구스의 엄청난 능력에 베드로 역시 항상 성령이 함께함에도 불구하고 몹시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세인트 영멘에서는 훤칠한 키에 수염난 곱슬머리 청년으로 나름 미화되어 나온다. 성격은 세월이 지나서 많이 부드러워진 모양인지 예수(세인트☆영멘)와 동생인 안드레아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하고 농담도 잘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반영한 듯 한 성깔 할 때도 있다.[57] 그래도 기본적으로 유들유들하고 능청맞게 나온다.[58] 수능 에피소드에서는 분명 순교도 했는데 성인 시성이 되지 못해 우울해하는 잔 다르크를 위로하기 위해 초대 교황인 본인이 후배들을 까면서 자작 성인상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비중이 적다. 배신자인 이스카리옷 유다는 해당 작품의 진주인공이고, 열심당원 시몬은 본인의 이름을 딴 단독 넘버가 있는데 베드로는 체포된 예수를 구하려 하는 장면과 예수를 세 번 부정하는 장면, 마리아와 부르는 듀엣곡 정도가 전부라서. 그래도 나머지 아홉 사도들에 비하면 그럭저럭 눈에 띄는 편.


[1] 공동번역 성서에서의 표기는 '베싸이다', 천주교 새번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벳사이다',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에서의 표기는 '벳새다'이다.[2] 원문(UBS GNT5):"Ὅτε οὖν ἠρίστησαν λέγει τῷ Σίμωνι Πέτρῳ ὁ Ἰησοῦς, Σίμων Ἰωάννου, ἀγαπᾷς με πλέον τούτων; λέγει αὐτῷ, Ναὶ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ῶ σε. λέγει αὐτῷ, Βόσκε τὰ ἀρνία μου."[3] 정교회는 가톨릭의 사도 전래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며, 교황의 수위권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할 뿐이다. 현재 세계 정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베드로의 형제인 사도 안드레아의 후계자로 간주된다.[4] 그냥 열쇠도 아니고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다. 어디에서든 잠근다면 천국의 문은 잠길 것이고, 어디에서도 풀어내면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5] 그랑 바스코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6] 물론 자로의 경우에는 정말 우수한 제자였기 때문이라면 베드로의 경우에는 정확한 이유는 등장하지 않아 여러 신학적인 해석이 존재한다. 베드로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지식하고(예수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위 좌석이 아닌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니 그걸 그대로 실천했다), 물론 후에 배반했으나 충직했던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 아람어 바르(בר‎‎)는 '~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12사도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역시 '톨마이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르톨마이(בר תלמי‎‎)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덧붙여 장폴 사르트르가 쓴 희곡 작품인 《바리오나(Bariona)》의 어원이기도 하다.[8]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9] 이 이름의 유명인으로는 전 UN 사무총장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있다.[10] 이를테면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Петро Порошенко)몰도바의 전 대통령인 페트루 루친스키(Petru Lucinschi)가 있다.[11]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나오는 동작 그만 주문인 '페트리피쿠스 토탈루스(Petrificus Totalus)' 역시 마찬가지이다.[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3] 원문은 Nestle-Aalnd 28판을 사용했다. 이하 같다.[14] 18kagō de soi legō hoti sy ei Petros, kai epi tautēi tēi petrāi oikodomēsō mou tēn ekklēsian kai pylai hāidou ou katischysousin autēs, 19dōsō soi tas kleidas tēs basileias tōn ouranōn, kai ho ean dēsēis epi tēs gēs estai dedemenon en tois ouranois, kai ho ean lysēis epi tēs gēs estai lelymenon en tois ouranois.[15] 베드로전서 2:5-8[16] 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17] H.M. Riggle, J. Gibbons[18] 고린도전서 3:11[19] 갈라디아서 2:9; 에베소서 2:29; 베드로전서 2:5[20] 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21] Bruce, Plummer[22] 3paredōka gar hymīn en prōtois, ho kai parelabon, hoti Christos apethanen hyper tōn hamartiōn hēmōn kata tas graphas 4kai hoti etaphē kai hoti egēgertai tēi hēmerāi tēi tritēi kata tas graphas 5kai hoti ōphthē Kēphā&i eita tois dōdeka·[23] ontōs ēgerthē ho kyrios kai ōphthē Simōni.[24]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그 이야기에서는 실은 베드로가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걸 보고는 자기도 걷고 싶다고 여겨 걸어보았는데 걷고 보니 교만심이 생겨서 그만 물에 빠져버렸고 결국 예수가 구해줘야 했다. 그 후 베드로가 예수에게 자신은 왜 물에 빠졌던 것이냐고 여쭙자 예수가 베드로를 질책했다는 이야기다.[25]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공관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파스카 전(前)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베드로(마태 16,22 및 병행구), 마리아(루카 2,48), 야고보(마르 3,21) 등 존경받고 유명한 교회 인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언급한다.[26] 혹은 첫닭이 울기 전.[27] 도망치기 전 예수가 막 체포당했을 때 칼을 꺼내서 예수를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랐다고 한다. 이에 예수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제지시키고 잘린 종의 귀를 다시 복구시켜 준다.[28] 개역개정판에서는 저주라는 표현까지 나온다.[29] 종종 성당 옥상 지붕 끝에 십자가가 아닌 수탉 조형물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던 날 베드로의 행동과 연결된 동물이 닭이기 때문이다. 닭은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정과 회개를 상징한다. 이를 교회의 상징으로 지정한게 교황 레오 4세이다.[30] 다만 요한복음의 서술이 있긴해도 예루살렘에서 약170km 떨어진 갈릴리호 북부까지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른 제자들과 합류하는 걸 감안하면 실질적인 어부일은 못 했다고 보는게 맞다. 그게 아니면 예수 부활이후에 고기 잡으러 갔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31] 예전에 베드로가 예수를 3번 부인하거나 배신했던 문제는 일절 들먹이지 않았다. 옛 잘못을 다시 언급하며 질책하지 않았던 것이다.[32] 정확하게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내 양들을 돌보아라'를 세 번 반복한다.[33] 즉, 예수가 떠난 뒷일을 부탁한다는 의미.[34]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사도신경에는 둘 다 "교회를 믿나이다"라는 고백 문구가 들어간다. 비록 '교회을 믿는다'와 '그리스도를 믿는다'가 똑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35] 사도행전 3장 2~10절.[36] 사도행전 5장 1~12절.[37] 가톨릭 성경과 공동번역 성서에선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개역개정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표기한다.[38] 사도행전에 따르면 둘은 베드로에 의해 죄가 드러난 직후 급사했다.[39] 가령 엘레나 보세티Elena Bosetti는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40] 네로는 본인에게 몰리는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인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지만 로마시민들은 저 황제 놈의 잔악한 욕구에 불쌍한 사람만 죽어나가네. 저렇게 과잉반응하거 보니까 진짜 황제가 불 지르고 구경한 게 맞는것 같은데라고 반응하며 그리스도교인들을 동정했다고 한다.[41] 그리스도교의 상징은 십자가, 따라서 그 상징을 뒤집으면 반그리스도교라는 매우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악마 등이 등장하는 오컬트 영화에서 벽에 걸린 십자가가 뒤집어지는 장면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십자는 베드로의 십자가로서 버젓이 사용된다.[42] 이 구절을 "네가 나의 어린양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고 하니까 (로마군에게 박해당하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을 위해서)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간다." 라는 의미로 의역하기도 한다.[43] 가톨릭 교회에서 정식 성격으로 인정하는 책들인 정경[44] 성인 공경과 성유물 공경 문화가 있는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성인의 유해 일부를 다른 지역에 나눠주거나 수여하는 행위는 역사가 깊고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당장 한국 천주교만 해도 전국 각지의 많은 성당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같은 조선 시대 순교 성인들의 유해 일부를 모시고 있으며, 이를 보편교회의 역사성과 유대를 드러내는 표지로 삼는다. 다만 다른 성인도 아니고 동방 교회에 맞서 서방 교회에서 그 상징성이 대단한 베드로의 성해를 정교회에 넘겨버린 것이 일부 전통 가톨릭교도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45] 진짜 베드로의 유해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같은 시대의 나이가 같은 사람일수도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이다.[46] 성경에서 열병에 걸렸다고 나온다.[47] 오해가 아주 많지만, 가톨릭교회 스스로도 성직자 독신은 교리로 보지 않으며, 다만 가톨릭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부분집합인 ‘라틴’ 가톨릭 교회의 '예법'으로 본다.(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Presbyterorum Ordinis 제16항) 그러므로 동방 가톨릭의 경우 기혼자가 사제품을 받는 것을 인정한다. 대신 사제가 되고 나서 그 후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8] 한국에서는 이단으로 분류된다.[49] 탈북 후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탈북민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굉장히 친숙하다고 하는 발언이 자주 나온다. 가짜 아버지(김일성/김정일)에게 속았다가 진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게 되어서 너무 좋다는 발언도 보인다. 주체사상의 북한이나 그리스도교 양쪽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발언.[50] 그리고 이 사람은 국회 입성 이후 정치자금법을 위반 사실이 적발되어서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51] 서구권에서 Judas라는 표현은 욕설에 가까운 모욕이다. 한국에서 이완용 같은 놈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52] 불어로 대문자로 시작하는 Pierre 는 남성 이름이지만 소문자로 써서 (la) pierre 라고 하면 바위, 돌을 뜻하는 일반 명사이다.[53] 천주교에는 대표적으로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현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주교가 있다. 성공회에는 현 서울교구장 이경호 주교도 베드로를 쓴다. 2위는 나자렛의 성 요셉.[54] 20세기 후반만 해도 유명한 성인 위주로 거기서 거기인 세례명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성인들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55] 참고로 말하자면, 베드로의 구체적인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공생활을 묘사하는 예술 작품에서도 이미 반삭의 늙은이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56] 공산주의 유머 소련 편에서는 스탈린보고 천국에 올 수 없다며 지옥에 보내자 악마들이 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온다.[57] 잭 오 랜턴휴대폰 소설 줄거리를 베껴서 자신을 속인 걸 알자 불같이 화를 냈다.[58] 천국의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쵸파 모양으로 복제 키를 만들어둬서 다행이라고 헤실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요한 물건 보관함에 넣어둔 걸 깜빡한 것. 이걸 보면서 예수가 부활했을 때의 놀람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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