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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돌프 히틀러
독소 불가침조약[1] |
바르바로사 작전[2] |
바그라티온 작전[3] |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나치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대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스탈린 또한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던 것은 마찬가지라서 결국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나치당의 세가 커지고 있는데도 단일대오를 짜는데 실패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히틀러가 일개 군소정당 리더에서 반대파를 축출하며 총통이 되는 과정인 보면서, 스탈린은 히틀러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 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 독재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이언 커쇼 등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히틀러의 사상에 따르면 슬라브인은 모래알같이 미개한 민족들이라서 자기들끼리 모여 국가를 이룰 수 없는데 스탈린은 비록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을 쓰긴 했어도 슬라브인들을 규합하여 현대국가같은 것은 건설하긴 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범주라는 것(...).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계속된 패전과 점점 목이 더욱 조여지는 상황에 맛이 간 히틀러는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말하기도 했고,[4] 정적의 정치적 생명과 명예를 극한까지 말살하는 모스크바 재판에 아주 큰 감명을 받아 "우리에게도 비신스키가 필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5]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때 모스크바식으로 피고인들을 조진 인물이 전직 공산당원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였다. 반면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 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봤지, 히틀러 그 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역으로 이념이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고 깡패식으로 백주대낮에 정적들을 린치해서 죽이는 스타일에 감명을 받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 라이벌이었고 행적도 비슷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스탈린은 붉은 파쇼라는 비난을 받았고, 히틀러도 집권 이전에는 나치당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보수우익에게는 극좌파로, 공산당 같은 극좌익에서는 정신나간 민족주의 극우로 조롱을 받았다. 냉전 이후에는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등이 주도하여 히틀러와 스탈린을 폭압적인 일당 경찰독재국가라는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로 분류하면서 두 독재자는 서로를 미워하지만 결국 서로랑 똑같았던 자들로 분류되곤 했다. 다만 이러한 전체주의 이론은 냉전 때 소련을 적성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보수 세력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옹호하려는 성격도 있었기에 현재는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그리고 둘이 취한 수단의 유사성은 있어도 체제의 본질은 달랐으며 둘의 개인적인 성격 또한 완전히 달랐다. 일단 학력도 변변찮고 스스로 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지도 못했던 히틀러와 달리[6] 스탈린은 그 자신이 소수민족 문제의 전문가였으며 독자적인 사상까지도 창안할 수 있었을 정도로 두뇌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통치 기술 면에 있어서는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훨씬 치밀했다. 일반 행정만 봐도, 스탈린은 스스로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행정에 일자무식이라 2인자들인 괴링, 괴벨스, 힘러, 보어만 같은 자신의 부하에게 행정을 방치해 가뜩이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독일의 여러 문제점을 증폭했다.[7]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당내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한 뒤 대숙청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철저한 관료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책의 세부사항에까지 치밀하게 적용했다.
또 둘의 차이는 전쟁 측면에서도 나타나는데, 히틀러가 배짱으로 정면돌파를 지르고 보는 성향이 강했다면,[8] 스탈린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만사를 철저하게 계산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는 많은데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든가, 미국의 경고에 홋카이도 반분 계획을 물렸다거나, 한국 전쟁을 허락 받으러 온 김일성을 48차례나 내쫓고 한국전쟁 개입조차도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간접적으로 수행했다.[9]
여담으로 스탈린과 히틀러가 직접 만난 적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없었으나 한때 같은 도시에 머문 적은 있었다. 1913년 빈에서 스탈린이 기거할 때 히틀러도 거기 있었던 것. 심지어 그때는 티토, 트로츠키도 빈에 살았다.[10] 둘 다 막장 아버지의 영향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인간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유사하다.
2. 베니토 무솔리니
스탈린과 무솔리니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반공주의를 원칙으로 삼았기에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마찬가지로 소련과는 물과 기름같은 존재였으나, 사실 무솔리니는 1924년 2월 7일에 소련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방국가 지도자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교를 튼 장본인이기도 했다.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근본적으로 미국식 자본주의에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소련과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황 시기에도 서방의 자본주의 사회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반면에 소련은 여전히 급속한 경제성장을 기록했던 점도 무솔리니가 소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소련 측 또한 언론을 동원해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무솔리니 정권을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나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스탈린과 무솔리니의 관계는 1930년대에 이르러 크게 개선되었는데, 1933년 5월 6일에는 서로 경제협정을 맺어 소련은 이탈리아에 석탄과 석유 등의 원자재를, 이탈리아는 소련에 항공기 · 자동차 · 선박 등을 판매했다. 그해 9월 2일에는 이탈리아-소련 간의 불가침 조약까지 채결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의 주이탈리아 대사였던 블라디미르 포템킨이 이탈리아의 외무차관 풀비오 소비치에게 초대장을 보내 이탈리아의 육군 · 해군 대표단이 2주 동안 소련을 방문하는가하면,[11] 소련의 전함 3척이 이탈리아 나폴리를 방문하는 등 양국간에 상당한 우호가 다져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후 소련의 뒷통수를 수차례 때렸는데,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위해 의용군을 가장한 사단 단위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노골적으로 지원을 퍼주어 스탈린의 분노를 산 것이 대표적이다.[12] 무솔리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방공 협정에도 가입하였으며, 겨울전쟁 당시에는 핀란드를 위해 전투기와 소총을 지원하기도 했다. 결국 스탈린과 무솔리니의 관계는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할 당시 무솔리니가 병력을 보내 독일군을 지원하면서 완전히 파탄났다.
3. 윈스턴 처칠
루스벨트도 지적했듯 처칠은 전후에도 떠오르는 미소의 도전을 뿌리치고 구 대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고 싶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자이자 자본주의의 신봉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처칠이, 각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강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친하게 지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게다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영국으로서는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늘 그래왔듯이 안보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 자명한 소련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견제해야 했으며, 이는 제2전선 문제나 자유 폴란드의 전후 처리, 독일 분할 문제 등의 사안을 두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의심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합스부르크 왕가 제국의 복고를 비롯하여 구질서 회복을 외치기도 했지만 구(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자기 배당금으로 받아야 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가진 미국조차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쇠퇴해 가는 대영제국의 힘만으로 소련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처칠은 제3제국의 항복 후에 잔존 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뒤통수를 벌이기에는 미국이 매우 소극적이고,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 건 매우 여론이 안 좋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영국군 참모부가 유럽 전선에 전개된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에 비해 3배 많아서 이기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려 취소했다.[13] 처칠의 반소 정책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과, 결정적으로 처칠 자신이 종전 직후에 실각하면서, 처칠과 스탈린의 대결은 스탈린의 판정승으로 돌아갔다.
4.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얄타 회담에서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은 연합국의 세 주축인 미국, 소련, 영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시의 전략적 결정 및 전후처리를 위해 여러 차례 회동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루스벨트는 파시즘에 대해서는 강경했던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화적이었고, 때문에 전쟁 중에 이루어진 몇 차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상반되는 이념에 비해서 다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라는 불편한 동맹국 지도자의 호의를 이용할 능력과 의도가 충분한 자였고, 국제연합이나 자유선거 등 미국의 다소 이상적인 전후 구상에 장단을 맞추어주는 대신[14]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나치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대거 소모한 소련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본과 공업력이 건재한 데다 렌드리스를 통해 사실상 연합군의 전쟁 물자를 대부분 책임진 미국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루스벨트 안티들에겐 전후 냉전의 주도권을 내줄 뻔한 실책이자 스탈린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이건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적어도 2차 세계 대전 후기까지는 미소 양강 체제에 대한 대비보다 우선 추축국을 패퇴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당면 과제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서구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루스벨트는 미국-영국-소련 사이의 삼파전을 예상했기에 영국을 협력할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경쟁해야 할 상대로 보았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가 미소 양강체계로 재편성되었다는 것 역시 결과론적인 이야기로써, 2차대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차대전 이전 양대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패권을 포기하려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고, 도리어 전후 식민지를 재확보하여 자신들의 패권을 재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동맹국이 아닌) 미소 양국과 동등한 열강의 입지를 가지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루즈벨트 자신도 이에 대해 '나치에 의해 쑥대밭이 된 유럽 국가들이 아직도 식민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국주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탄했던 것. 예를 들어 나름 연합국의 한 축으로 활약한 영국은 둘째치고 2차대전으로 스타일 왕창 구긴 프랑스조차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 바밀레케 전쟁, 거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끼어든 수에즈 전쟁 등에 이르기까지 50년대 내내, 심지어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식민지를 재확보하려는(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연히 '대영제국'과 '위대한 프랑스',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동맹체제의 한 구성국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세계 정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열강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15] 결국 2차대전 후반기 (및 대전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 및 행보와 그에 따른 루즈벨트의 대처를 20세기 후반~21세기의 기준, 즉 연이은 식민지 전쟁 이후 두 국가가 미국을 수장으로 한 서방 동맹에 종속된다는 처지를 받아들이게 된 이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유럽의 제국주의는 어차피 몰락해가던 것 아니냐'고 보는 관점도 있지만, 이런 관점은 이미 일어난 현상과 그 결과는 상수로 보고, '다른 행동을 했었다면 얻을 수 있었으리라 기대되는 결과'만을 변수로 보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구 식민열강의 식민지 재확보(및 패권 재확립) 시도가 실패한 원인의 상당부분이 미소 양대 열강의 견제에 있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구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하고 대신 소련을 견제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면 견제력이 약해진 만큼 영국 등의 식민제국들이 다시 열강의 입지를 되찾는 시도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아직 미성숙한 소련보다는 기존 서방국들의 영향력을 조정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았고, 이것은 루스벨트뿐 아니라 그렇게나 공산주의를 경계했다는 처칠도 해당되는 일이다.[16]
게다가 루스벨트가 전후의 소련을 어떻게 대할지 자체가 루스벨트의 급사로 오리무중에 빠져버려서 루스벨트가 친소적이었다는 공화당 강경파 일각의 드립이 나오게 된 것이지, 당장 키신저만 해도 루스벨트는 오히려 스탈린을 이용해먹은 정황이 있으며 그가 살았으면 어떤 냉전 질서가 구축되었을지, 그가 스탈린을 상대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후임인 트루먼은 딱히 소련에 호의적이지도 않았다.[17]
사실 루스벨트는 소련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등 제3세계 국가들에도 나름 온정적인 편이었으며, 이는 세계 제1강국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먼저 손을 뻗어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루스벨트가 단순히 스탈린에게 양보만 한 것은 아니라,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약속을 받아냈으며 이는 사실 2천만 명 넘게 희생한 소련을 다시 큰 희생이 요구되는 다른 전쟁으로 끌어들인 외교적 소득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몰락작전이 다소 간과되지만, 원폭 개발 이전에는 미국이 일본 본토 점령 과정에서 거의 100만이 넘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중립 조약을 체결한 소련을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유럽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몰락해가던 서구 제국주의를 공산주의보다 더욱 경계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어수룩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루스벨트를 제외한 미국 정계는 당연히 영국보다 소련을 훨씬 경계했는데 이를 루스벨트가 묵과했다. 또한 정치인은 결과로서 말하기 때문에 결과론도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처칠이나 후임 트루먼이 보인 반공주의 태도를 상기할 때 결과적으로 루스벨트의 지나친 대소 양보는 아쉬움이 남고 분명 정치인으로서 저지른 실책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5. 해리 S. 트루먼
포츠담 회담에서 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어리벙벙하고 무능력해 보였고, 그와 친했고 사적으로 존경한 루스벨트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고까운 존재였다. 물론 트루먼은 빠르게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직위에 적응했고, 반공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홋카이도 상륙 및 반분 계획을 가차없이 거절했으며 리비아를 소련 보호령으로 할양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이는 안티들에게 공산당 첩자라고 비난받는 루스벨트의 친소 정책보다는 훨씬 강경한 것이며 이 때문에 트루먼을 방문했던 몰로토프는 트루먼의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 때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의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트루먼의 미국을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전쟁으로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했던 상황에서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 당시 대륙에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바다에서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최남단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온 후 한반도의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미국과의 세계 대전을 고려하진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 수 없이 공군을 파견하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을 썼으며, 미국 또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소련이 참전한 것을 눈치채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등 서로가 조심했다.
6. 샤를 드골
7. 마오쩌둥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 |
공산주의 원조국이자 전후 양강으로 떠오른 소련의 위세 때문에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교황이었고 각국의 공산주의자는 아무리 자국에서 독재를 펼쳐도 스탈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는 중국에서 황제 이상의 권력을 누렸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혁명관의 차이를 보였으며,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게 보여도 혁명 노선을 둘러싸고 둘은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소련 및 소련이 조종하는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건립 직후부터 중국국민당을 원조했다. 중국국민당은 원래 남방으로 도피해온 쑨원의 개인 사조직에 가까웠으나, 소련 및 코민테른이 제국주의의 포위망을 돌파할 동맹자로 국민당을 선택함에 따라서 소련의 전폭적인 정치군사적인 지원으로 혁명정당으로 탈바꿈하며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고 북벌을 성공시키고 중국을 느슨하게나마 부분 통일하였다. 당시 갓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해 이중당적을 갖고 국민당에 협력한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세력확대를 경계한데다가, 국민당내 공산당 세력을 경계하던 자본가들과 해외 열강들은 장제스를 부추켜 북벌 도중인 1927년 4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장제스의 배신으로 공산당은 70% 이상의 당원이 학살당한다. 장제스의 이런 기습에 코민테른과 공산당은 어쩔 줄 모르고 몇달간 우왕좌왕했고, 장제스는 난징에 정부를 세우고 국민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런 장제스의 움직임에 겨우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통해 러시아의 예를 쫓아 도시폭동을 일으키라고 중국공산당에 지령하였고, 저우언라이에게는 8월에 난창 폭동, 난창폭동이 실패한 이후에는 12월에게 리리싼에게 지령하여 광저우 폭동등의 여러 봉기를 일으키지만, 모두 진압되고 중국공산당은 수많은 당원을 잃는다.
마오쩌둥도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자신의 고향에서 가까운 창사에서 9월 추수폭동을 일으키지만, 역시 진압된다. 마오쩌둥은 코민테른의 전략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그동안 자신이 내세웠던 농촌중심의 혁명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가 농촌을 근거로한 게릴라전을 펴면서 점령지를 넓혀간다. 이는 사실 코민테른의 지원이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개시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소련과의 연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만든 해방구에 코민테른과 연줄이 있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도피해 오면서 오히려 마오쩌둥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마오쩌둥은 자기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는 스탈린이나 코민테른이 굉장히 불쾌했겠지만, 코민테른, 실제로는 코민테른을 조종하는 스탈린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따랐으며, 소련을 "사상의 조국"으로, 스탈린을 "사상적 교황"으로 여겼다. 이러한 코민테른이나 소련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코민테른으로부터 반혁명 수정주의자 집단으로 찍히는 순간 1920~1930년대 모든 공산당원들의 적으로 찍히는 것은 물론이요 활동할 역량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는 판이었다. 실제로 초기 중공 지도자인 천두슈는 스탈린이 규정한 "이단"인 트로츠키주의자로 찍히면서 당에서 제명되고, 결과적으로 중국 혁명사에서 비중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마오쩌둥의 해방구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라는 국가로 선언하지만, 마오쩌둥은 명목상의 주석에 올랐을 뿐, 실제로는 코민테른(실제로는 스탈린)이 파견한 28인의 볼셰비키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군사작전을 세웠다.[18] 하지만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오토 브라운이 지휘한 제5차 초공작전에서 괴별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중국 공산당내에서 코민테른 추종세력은 거의 입김이 사라지고, 다시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떠오른다. 결국 대장정 중반 시점부터 마오쩌둥은 소련의 영향력을 점점 중국 공산당 내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 옌안해방구 시절이 되면 마오쩌둥은 당내 정풍운동을 주도하여 코민테른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든지, 아니면 실각하든지 택일하도록 강요했고, 이들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왕밍같은 사람은 당에서 비주류로 찍혀 결국 실권에서 멀어진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차마 스탈린주의자라고 매도할 수 없어서 국공내전 이전에는 "극좌 모험주의자", 집권후에는 "우파 투항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 뿐이므로 이런 규정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가졌던 불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스탈린대로 자신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농촌을 근거로 유격전을 하자는 마오쩌둥을 "마가린(사이비) 사회주의자"라고 매도했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항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중일전쟁 끝날 때까지 오히려 장제스와 더 친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의 배신자로 극렬히 비판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국공내전 말기까지 중공의 완승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중공을 전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현대판 남북조 시대를 원했는지,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에게 장제스와 휴전하라며 권고하기도 했다. 중국청년보 1949년 국공내전 도중 난징이 함락되자 소련 대사관을 광저우로 이전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영미의 정보 입수를 위한 전략적인 행동이었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오쩌둥은 소련에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하자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전보다 많은 거액의 차관을 제공, 기술고문을 파견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1949년 마오쩌둥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높이며 태세를 전환하였다. 다만 처음에는 마오를 경계하며 만나지 않아 마오쩌둥이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마오쩌둥은 스탈린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스탈린의 지시 하에서 소련은 여러가지 선진 기술을 중국에 전수했고, 중국은 열심히 이를 배웠다. 예를 들어 1949년에는 중국은 프롭기도 못 만들었으나, 1955년이 되면 제트기인 MiG-17을 수백기나 제작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는 공짜는 아니었다. 소련은 기술이전의 댓가는 식량으로 톡톡히 챙겼고, 중국은 대약진운동에서 엄청난 아사자가 발생하는 와중에서도 계속 식량으로 대금을 결제해야할 정도였지만, 기술 이전 자체가 우방국에 대한 엄청난 호의는 맞기 때문에 마오쩌둥이나 중국 지도부는 이를 고맙게 생각했다. 스탈린 생전에는 중국은 동유럽 위성국처럼 소련에 고분고분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감히 비판을 할 수 없었으나, 스탈린이 사망하고 집권한 흐루쇼프와 결별하면서 중국은 소련의 꼬붕노릇을 하던 방침을 폐기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스탈린 사후에 쓴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차이를 이유삼아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급격한 산업화로 독소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처리를 둘러싼 미국과의 흥정에서 유리하게 패를 가져감으로써 세계의 반을 적화시킨 공로는 마오쩌둥도 인정했기 때문에, 니키타 흐루쇼프처럼 스탈린을 아예 "악당"이나 "사회주의 배신자"라고 격하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스탈린을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남겼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이런 평가를 덩샤오핑이 훗날 한편으로는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과오라고 비난하며 청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공적을 인정하면서 써먹었다.[19][20] 중소 관계가 최악이었던[21]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도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는 선두에 나왔을 정도였다. 비록 그 시점에 저 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8. 장제스
스탈린은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과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 사이에서 계속 양다리를 걸쳤다. 먼저 레닌과 쑨원 시절부터 시작한 중국국민당과 소련의 합작 및 국공합작은 스탈린 시절에도 계속되었고, 장제스군의 중핵을 이루던 장교들은 소련이 지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길러낸 인재들었다.이렇게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성공시키고 중국을 거의 통일하게 되지만 국민당의 중핵을 이루는 자산계급들은 공산주의와는 체질상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갈등이 일어났다. 스탈린에게 있어도 장제스는 어디까지나 중국 공산혁명의 1단계 장애물인 군벌들을 제거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고 스탈린은 공공연하게 장제스를 레몬이라고 교시하면서 그가 즙을 낼 수 있는 동안은(군벌들과 싸우는 동안은) 버려선 안 되지만 즙을 다 짜내면 그 뒤론 얄짤 없다고 선을 그었다.
1920년대 중후반 내내 첨예해지던 국공갈등 및 국민당 내부의 좌우파 갈등은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에서 정점을 찍게 되며,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독자적 난징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스탈린은 한동안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연대를 유지하라고 교시하였으나 국공결렬이 발생, 중국에 파견된 소련 고문들은 모두 소련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스탈린은 공산당에게 더 이상 국민당 명의를 쓰지 말고 중국 공산당 명의로 총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하여 중국 공산당은 난창 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일으키지만 성공할리가 없어 가뜩이나 큰 타격을 입은 공산당의 역량을 계속 날려먹었고, 이걸 다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오류로 뒤집어씌워 취추바이 등을 숙청하였다. 한편 국민당은 1927년 광저우 폭동 때 입수한 소련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소련을 폭동의 배후로 지목하고 소련과의 단교를 선언했지만 만주에는 소련 영사관이 남아있는 등 사실상의 외교관계는 유지하였다.
스탈린과 장제스는 광저우 폭동 이후 약 몇 년간 결별하게 되고, 당시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거의 인질이 되지만 양국의 이해는 다시 맞아떨어져서 1930년대 초 다시 수교는 이어진다. 장징궈는 1937년 국공합작이 재개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소련은 정부대 정부 관계에서는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지만, 소련공산당은 코민테른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소련은 국공합작 시절보다는 적었지만 군사고문과 군사원조도 계속 보내고 있었다. 중국으로 파견되는 군사고문은 소련군의 출세코스였다.
서안 사건 이래로 국공합작이 개시되자 스탈린은 일본과 싸우는 장제스를 도왔고 공군 파일럿들을 파견했다가 일본이 항의하자 소련으로 철수시켰다.[22]
국공내전 당시에도 스탈린은 철저히 양다리를 걸쳤다. 국공내전 초기에는 장제스가 우세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돕지는 않았고 다만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만주군에서 압수한 무기를 공산군에 넘기거나 혹은 소련 군정에 설치된 북한을 인민해방군이 통과하게 해주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은 끝까지 국공내전의 양상을 살피다가 1949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공산군에 함락되고 나서야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하지만 소련은 대만에 남은 장제스 정권을 유용한 도구로 생각하여 1960년대까지 소련과 대만의 비밀 접촉은 이어졌다.
9. 김일성
스탈린 생전에 김일성은 절대권력자가 아닌 스탈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애당초 자국의 내전에서 승리해 자력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23]이나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유고에서 반나치 지도자로 명망을 떨쳤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조차 스탈린의 권위를 거역하지 못했는데[24] 소련의 힘으로 지도자가 된데다 그토록 호언장담했던 통일마저도 미숙한 처리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겪은 김일성 따위가 스탈린 상대로 뭘 어쩔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비유하자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고용된 비정규직 지국장이라면 스탈린은 세계 경제 반을 지배하는 대기업 회장인 관계로,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 김일성은 스탈린의 눈치를 항상 살폈다.6.25 전쟁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던 김일성은 오직 스탈린을 어려워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을 성가시게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나 무려 48번이나 거절당했다. 김일성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전쟁을 무조건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말을 만들어냈고, 결국 애치슨 라인을 열심히 설명해서 스탈린에게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설명한 다음에야 간신히 전쟁을 허락받았다. 참고로 스탈린은 김일성이 열심히 떠들어댄 애치슨 라인을 애초에 믿지 않았고 케임브리지 5인조가 스탈린에게 바친 미국 국무부의 대외 외교방침 문서를 믿었다.
그런 와중에 김일성은 스탈린 면전에서 날강도 수준의 원조를 부탁했고, 스탈린은 짧게 "알았다."라고만 대답하고 절차를 거쳐서 어느 정도는 들어줬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대놓고 "요사이 살이 좀 많이 찐 거 같다."라고 하거나, "남조선 군대가 무섭지 않은가?"라면서 망신을 주는 등, 아주 불쾌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김일성은 싫은 내색한번 하지 못하고 굽신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았어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김일성에게 소련군 중에서 육군은 아예 내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공군만 지원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지원 없이 가만 있었다. 심지어 남한의 북진으로 북한이 시종일관 수세에 몰리고 있는 와중에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겼다.
소련은 세계 대전을 우려해 공군의 참전조차 감추었지만, 미국도 이를 인지했다. 하지만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인민재판을 통한 학살로 인하여 점령지의 민심을 잃고 있다는 소련군 보고를 듣고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왜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본인도 대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는 하나 적어도 스탈린은 내부가 안정된 상태에서 정적들을 제거했지만, 김일성은 아직 전쟁중인 땅에서 새로 편입된 국민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였고,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인성보다도 무능함에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내치지 않은 것은 적어도 북한에서 김일성만큼 복종하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외무장관이었던 박헌영도 스탈린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탈린은 박헌영같은 인텔리는 라이벌이었던 트로츠키처럼 먹물 들어서 자기 말 안 들을 거라고 판단해서 박헌영을 버리고 오히려 박헌영 숙청에 일조했다. 김일성의 아부실력이 박헌영보다 나으면서도 김일성이 자신에게 반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습게도 김일성은 죽기 1년 전인 1993년 10월, 1차 북핵위기 문제 때문에 북한을 방문한 미국측 대표단과 식사를 하던 중, 누군가가 스탈린이 남침을 부추겼냐는 질문을 받자 "스탈린은 내 친구요. 그가 편안히 쉬도록 놔둡시다."라고 말했다.출처 생전에는 스탈린에게 아부나 떨며 철저하게 졸개 노릇을 하여 북한의 정권을 잡은 주제에 스탈린의 사후에는 그를 친구라 지칭한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스탈린과는 나이차가 34세라 거의 아들뻘이 될 정도로 한참 어렸고, 지도자로서의 역량이나 사회주의자로서의 짬밥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등한 인물이니 더욱 황당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10. 호찌민
호치민과 스탈린의 관계는 생각보다 가깝지 못했다. 호치민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모스크바에서 유학 및 코민테른 활동을 했었지만, 스탈린과의 접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은 프랑스령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호치민과 스탈린이 직접적으로 큰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과정에서였다. 당시 스탈린은 호치민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이 미국의 OSS하고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950년 초 중국과 가까워진 호치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게 되었는데, 흐루쇼프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무례하고, 화를 돋우는” 태도로 호치민을 상대했다. 사실 스탈린은 서방에서 인정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부를 1947년에 공식적으로 합법 정부로 인정했던 데에 반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0년 1월 30일이 되어서였다. 스탈린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공식 발표를 했고,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베트민에 대한 물자지원 및 원조를 했다.
[1] "신혼 생활이 얼마나 오래 갈지 궁금한가?" 1939년에 미국의 신문사 워싱턴 스타에서 출판한 만평이다.[2] 히틀러: "용서하시게 동무. 놓치긴 너무 아까운 기회인걸 어쩌겠나?". 스탈린이 떨어트리는 문서는 독소 불가침조약이다. 영미권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와 비슷한 의미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걸 등에 칼을 꽂는다라고 말한다. 1941년 6월 23일 영국 데일리 메일에서 출판한 만평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바로 다음날에 출판된거다.[3]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합동 공세라는 몽둥이를 들고) : "눈물 좀 아끼라고, 아돌프, 그건 그냥 맛보기니까 말이야.". 히틀러 : (스탈린에게 얻어터지며) "아악! 이 살인마야! 아악!!"[4]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5]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6] 흔히들 파시즘의 창시자가 히틀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파시즘을 이념화하고 체계적인 기틀을 세운 것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7]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8] 전쟁 시절을 빼고, 주데텐란트를 합병한 건이나 안슐루스, 폴란드 침공만 봐도 히틀러가 얼마나 정세에 모험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간기에 히틀러가 이웃 국가를 상대로 했던 것 중 그 어느것도 정상적인 회담을 거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오직 대공황의 여파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 그에 따라 불거진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 폐기, 재군비 선언 등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형국을 이어갔고, 결국 폴란드 침공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인내심을 건드려, 아직 전쟁 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9] 물론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전쟁협조를 했기는 했지만 중국처럼 대대적으로 군대를 내보낸 수준은 아니었다. 당장 소련이 전쟁으로 인구의 15%, 그것도 대부분 전후복구에 꼭 필요한 20~40대 남성들의 상당수를 손실한 상태에서 동유럽 각 국가들에 상당수의 군대를 파견보낸 데다가, 전후복구작업으로 막대한 인력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에 북한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중공 정권에 북한 문제를 외주로 맡겼다. 미국 역시 다 알고 있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겨우 몇 년밖에 안 지난 상황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동맹국도 소련과 상황이 크게 달랐던 건 아닌지라 세계 대전으로 번지기 싫어서 대충 눈감았다.[10] 물론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고, 20세기 초반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써 당대 유럽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일종의 국제도시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등 당시에는 불온하게 여겨지던 사상들에 대해서도 '명목상으로는 엄금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심하게 탄압하지 않고 느슨하게 집행하는' 소위 '슐람페라이'(schlamperei)적 관행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국의 사상가나 정치활동가, 특히 망명객들이 많이 머무르는 도시였던 것이다. 히틀러가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 자체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히틀러로써는 오스트리아와 빈의 이러한 '국제주의적'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11] 공군 대표단은 이탈로 발보의 반대 때문에 소련에 파견되지 못했다.[12] 사실 스탈린과 히틀러 마저도 스페인 내전에는 간접적으로만 개입했으나, 무솔리니는 직접적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사정이 썩 좋지 못했음에도 무솔리니는 스페인 파병을 억지로 밀어붙였다.[13] 이 언싱커블 작전은 1990년대 비밀이 해제되면서 수면에 나왔지만, 소련은 당시에 이미 첩보망을 동원해 이런 처칠의 의도를 대충 알고 있었다. 스탈린 자신도 처칠을 매우 안 좋게 생각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14] 이후 동유럽에서의 자유선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철의 장막 너머에는 죄다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그나마 국제연합은 6.25 전쟁 등 강대국간 삐걱거림이 존재하긴 했으나, 어찌저찌 돌아가긴 했다.[15]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는 무조건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우기던 강경파들보다 훨씬 더 이상적인 판단이 가능하던 샤를 드골은 더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세계정세의 변화를 인정하고, 대신 핵개발을 통해 미국 중심의 안보체계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 국방 노선을 위대한 프랑스(=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이류 강대국이 아닌, 독자적으로 세계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국가)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 노선은 핵무기뿐 아니라 미라주 시리즈나 라팔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독자적 무기 개발 노선으로 21세기 현재까지 나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16] 이러다보니 처칠 본인도 말년에 후회했듯이, 공산주의 콤플렉스로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을 용인하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한다.[17] 사실 이 점 때문에 스탈린이 더 반서방적으로 틀어진 점도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친서방 기조가 유지되는 가운데 스탈린이 죽었다면 이후 소련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상대적 탈권위주의 흐름을 생각해볼 때 잘만 구슬렸으면 진짜 동유럽에서 수십 년은 일찍 자유선거가 치러졌을지도 모를 일.[18] 천두슈가 당을 이끌던 중국공산당 초기(1920년대 초반)에는 코민테른의 재정 지원이 절대적이었지만 (위에서도 나오지만 이는 광저우시절의 국민당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이 게릴라전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절은 천만 정도의 인구를 보유하던 장시성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금을 걷을 정도였기 때문에 스스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1930년대)에는 소련도 경제개발 와중에 외화가 부족한데다가, 외교적 고립을 부를 수 있어서 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성립 초기와는 달리 해외 혁명활동에 대한 지원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영역은 해안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소련이 지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19] 덩샤오핑 역시 스탈린에 대해서 중국에 모질게 굴었지만 어쨌거나 큰 도움을 준 인물로 높이 평가했으며 반면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약에 쓸려고 해도 쓸모가 없던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덩샤오핑과 그런대로 괜찮은 인터뷰 분위기를 유지했던 오리아나 팔라치와 덩샤오핑이 격하게 충돌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었는데 팔라치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한 것은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다고 주장하자 덩샤오핑은 손사레를 치면서 서로 의식화교육하지 말자면서 같은 주제로 계속 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20] 이 표현은 훗날 한국에서도 자주 쓰인다. 문재인도 박정희를 평가할 때 공칠과삼이라는 말을 써먹었다.#[21]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22] 이렇게 소련 파일럿들이 송환되면서 장제스는 플라잉 타이거즈를 조직했다.[23] 티토와 달리 이쪽은 스탈린에게 반항은커녕 싫은 소리 한 번을 못했다.[24] 티토는 이래라저래라 해대는 스탈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스탈린도 티토를 반동주의자, 수정주의자라며 까댔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스탈린 결별으로 단교하여 제3세계 국가가 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 중단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