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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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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제 성장
2.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2.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이룩한 공업화2.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3. 제2차 세계 대전과 외교 분야
3.1.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3.2. 외교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3.3. 넓어진 국토
4. 종교 정책5. 결론
5.1. 긍정적 입장과 평가5.2. 부정적 입장과 평가5.3. 현대 러시아의 평가5.4.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5.5. 대한민국북한의 평가

1. 개요

소련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평가하는 문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이자 공포정치의 극한을 보여준 인물인 동시에, 소련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이끌고 국가를 초강대국으로 건설한 공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보통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인물은 스탈린을 제외하고도 어느 정도 있고, 독재자들 중에서도 공적을 세운 면이 명백히 있기에 공과가 갈리는 인물 역시 어느 정도 있으나, 스탈린처럼 공과 모두가 극단적으로 큰 인물은 거의 없다.[1] 이는 그가 아직까지도 인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악명이 자자하며 무수한 과오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당대 유일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서 국가를 다시 세웠다고 할 정도로 큰 업적을 여러가지 남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단 스탈린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의 전시 지도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을 패퇴시키고 소련과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과, 집권기에 소련을 기존의 2류 강대국이 아닌 명실공히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사 이래 최강의 라이벌 관계로 손꼽히는 아돌프 히틀러, 공산주의 독재자로 자주 비교되는 마오쩌둥과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총통나치 독일을 패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독일을 완전히 말아먹었고, 주석은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키고도 자국의 공업화에 실패하고 중국퇴보시켰다. 반면, 스탈린은 커다란 피바람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대가로 소련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스탈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조차도 스탈린이 소련이라는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일색인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지도자로서 긍정적인 평가가 존재하나 자국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인 마오쩌둥과 달리 스탈린은 아직까지도 평가가 정리되지 않고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혼재한다.

공산주의 국가들 특유의 서류 통계상으로만 나타나는 발전, 왜곡 및 사실 은폐 등의 문제 등을 생각하여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비슷한 성과조작이 벌어진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소련의 발전은 분명히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 쪽 통계에서도 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련에서는 주로 인민들의 대우나 식량 쪽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지, 마오쩌둥의 중국처럼 성과를 부풀려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소련의 발전상은 당대 경제력과 산업력에서 세계 2~3위를 찍었던 나치 독일과 치른, 독소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역에서 입증되었다.[2] 만약 소련의 발전이 서류상에서나 벌어진 일이었다면 미국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소련을 초강대국 취급하고 여러 면에서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3]

그러나 악행 역시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저질렀다. 익히 알려진 대숙청, 굴라크, 카틴 학살,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직접적인 학살 말고도 인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며, 일당 독재와 자신의 결정에 반발할 수 없게 하는 각종 제도화된 수단을 보편화했다. 다만 스탈린이 그것들을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전임 지도자들이 그런 수단들을 먼저 개발하고 사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밀경찰, 수용소 등을 확실하게 제도화하고 일당 독재 체제를 체계화했으며 심지어 전세계의 공산주의 정권들에게 그 방식을 퍼트린 것은 단연 스탈린의 책임이다.

참고로 트로츠키주의 계열에서도 그런 수단들이 필요했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그것을 정도 이상으로 엄청나게 오남용했기에 비판받는다. 딱히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닌 좌파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제도적인 감시, 억압, 탄압, 정치적 테러리즘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시대부터 있어왔지만, 그러한 폭력이 공공연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은밀하게 자행된 것은 스탈린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레닌 시대에는 이러한 탄압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 역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밤 사이에 누군가 사라지면, 다음날부터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행동하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극도로 잔인한 감시 체제를 이용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인독재정으로 공산주의 특유의 인민독재를 변질시킨 것이 그의 가시적인 악행 이상으로 가장 큰 과오이다.

단순히 공과가 병존하는 독재자 자체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공, 혹은 과 중 한 쪽의 비중만 높아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큰 틀의 평가가 잡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스탈린처럼 공과 과가 모두 극단적으로 큰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사망한 이후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관점에 따라 의견이 매우 심하게 갈린다. 학계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소련을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지도자이자, 가장 굳건한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학살자로 명암이 교차하는 인물 정도의 총평이 정립되었다. 고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찬사와 잔혹한 독재자라는 비판이 공존한다는 점에서는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박정희하고도 유사하다.[4]

2. 경제 성장

2.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총독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중략)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1931년 2월 4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 당시 스탈린의 연설.[5]
"러시아인이 전차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1933년 노동절, 스탈린의 연설.
히틀러: "만약 누군가 나한테 소련이 3만 5천대의 탱크로 무장할 수 있다고 말해줬더라면 그 사람보고 미쳤다고 했을 거요."
(중략)
만네르하임: "우리는 소련을 20년, 아니 25년간이나 마음대로 무장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습니다."
- 아돌프 히틀러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의 비밀대화 중.

하여간 결과만 보면 낙후한 봉건사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스탈린은 생산력을 늘리는 게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이런 생산력 증가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소련은 대공황 시기를 지나자 서구 열강에 필적하는 공업국으로 성장했다.[6]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7]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 그리고 장제스 치하 중국[8], 아타튀르크 치하 터키공화국에서도 벌어진[9] 일이었지만, 소련은 규모, 범위, 강도에서 독일, 일본, 중국, 터키를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도 공업화는 추진되었지만 귀족 지주들이 농노라는 인력과 토지라는 땅을 독차지한 덕에 경제개발은 미지근했고 결국 계속 낙후된 농업 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절대 권력으로 귀족 지주들을 숙청하고 토지들을 몰수해 농업집산화를 이루어내면서 막대한 인력과 토지를 고스란히 흡수해 이러한 자산들을 중공업 부문으로도 전환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체포 후 길어야 이틀, 심지어는 오전에 체포당해 정오에 처형당한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암암리에 지원해준 훨씬 편한 전용 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세르게이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리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인 레프 란다우[10]는 서슬퍼렇던 대숙청 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11]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다른 위협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하던 스탈린이 직접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며 이후 1945년까지 독일과 엎치락뒤치락했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어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제국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로 세계 5강에 꼭 드는 나라였다.[12] 그럼에도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제국은 그 덩치와 국력을 가졌어도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는 일선 병력 수십 만명에게 쥐어 줄 소총과 탄약조차 부족했고[13] 우월한 공업 생산력을 지닌 독일 제국에게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률은 90%에 육박했으며 20세기 들어서도 문맹률이 크게 줄지 않아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문맹률이 75%에 달했다. 허나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4]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개한 공업화 덕분에 1950년대 소련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인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복지정책이 실행되었다. 특히나 실업률이 많이 낮아져 고용률 면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독소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그가 사망한 19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8%,[15]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16] 이후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다.[17][18]

1930년대에 스탈린이 진행한 소련의 공업화 정책은 또 다른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하르코프와 같은 서부 지역에 위치한 소련의 주요 군수공장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독일군의 공습이 닿지 않는 우랄 산맥으로 성공적으로 이전시켰고 그 덕에 우랄열차공장과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와 같이 우랄산맥 인근에 있는 공장들을 가동하여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등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물론 1941년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 이후 렌드리스라 하여 미국이 소련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한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소련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에 성공적으로 헌신했고, 그 수치는 주목할만 했는데,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5,000대의 항공기와 1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19]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대량 군수물자 생산은 1930년대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가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도 비슷하게 미얀마의 버마 로드를 통해 미국의 렌드리스를 받긴 했지만 중국의 자체 공업 기반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군을 지연시키는 것을 넘어 반격해 섬멸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반면, 스탈린의 소련은 그야말로 총력전 체제를 몸소 실현시키며 그동안 마련한 막대한 군수공업지대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금방 회복시키고 성장시키면서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바그라티온 작전에서 거둔 대승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소련은 스탈린이 이루어낸 신화적인 공업화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또한 스탈린 덕분에 항공업도 꽤 많이 성공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피스톤 운동을 하는 엔진피스톤 프로펠러 비행기Li-2, Il-12, Il-14 수송기여객기항공기였다. 당시 스탈린 밀어붙이기식으로 경제개발 및 공업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서기장이었기에 이 피스톤 운동을 하는 항공기들의 도움으로 먼 데까지 편하고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을 정도로 항공기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최초의 제트 여객기TU-104 제트비행기에 비해서 이 항공기들은 인원수도 적고, 프로펠러 비행기라 엄청난 소음과 더불어 굉장히 높이 올라가기는 힘들었고 또 TU-104보다는 덜 빨랐다.[20] 따라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경우 경유를 적어도 6번을 해야 했었고 무려 수십시간을 비행해야 했으며, 이 시간은 충분히 더 늘어날 수 있었다.

2.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이룩한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그 대가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중공업 위주 발전이라는 선택의 대가로 인한 농업 관련 산업의 약화와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농민 여러분, 부자 되시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21]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22][23]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24]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25]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26]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27]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를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1932년~33년 기근은 절정에 달해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였다. 1937년 소련의 공식 인구 집계는 1억 5,600만명이었는데 경악한 담당자 쿠르만은 사망자, 군인, 탈소련자들의 통계를 갖다붙혀 1억 6,830만으로 허위보고했다. 그리고 그 조작된 자료를 보고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서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 8,800만명이 넘어야 되는데 2,000만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28]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500만명 이상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다.[29]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자주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재앙의 최초 신호는 소련 경제에서 가장 불우한 부문인 농업으로부터 왔다. 소련 농촌은 불균형한 경제 정책과 늘어나는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부담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체제 하에서 농업은 침체되었고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축산업의 상황은 특히 나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로 보아도 1953년 초 전국의 가축 두수는 1939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이는 1928년보다 3분의 1이 더 적은 수였다. 1953년의 돼지 수는 1928년과 동일했다. 전국의 농촌에서 모스크바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외침 중의 일부는 스탈린의 귀에까지 닿았다. 1952년 10월과 11월에 접수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된 편지 중에는 소련의 다양한 지역에서 집단 농장의 고초를 토로한 불만들이 담겨 있다. 수의사인 홀로도프는 사실상 무보수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복돋을 동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농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호밀 수확량이 보잘 것 없습니다. 추수 과정에서 막대한 낭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자는 어느 정도 수확되었지만, 과연 감자 수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 감자를 캡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평소 임금의 50퍼센트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 일에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에 감자를 빠짐없이 캐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맨 위에 있는 것들만 대충 걷어낼 뿐입니다. 이제 축산업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창피스럽습니다 연간 우유 생산량은 사료를 먹인 젖소 한 마리당 1,200~1,400리터를 넘기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우스울 뿐입니다. 이는 보통 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양입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 「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03p~504p
불만이 만연한 근본 원인은 소련의 낮은 생활수준이었다. 집단화로 생산성이 심하게 저하된 농업은 위기와 침체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스탈린 정부는 1931년~1933년과 1946년~1947년처럼 국토의 상당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특정 지역이 기근이나 식량 곤란을 겪고 있음을 매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가장 호시절에도 평균 식사량이 빈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빵과 감자에 의존해 살았다. 스탈린 사망 직전에 소련 시민은 주로 밀가루 음식(주로 빵) 약 500g, 소량의 곡물, 감자 약 400~600g, 우유나 유제품 약 200~400g을 소비했다. 이 식품들이 전형적인 식단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 이외의 식품, 특히 고기는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었다. 일인당 육류 및 육가공품 소비량은 하루 평균 40~70g, 지방(동물성, 식물성 기름, 마가린, 돼지비계) 소비량은 15~20g이었고 여기에 설탕 몇 티스푼과 약간의 생선을 더하면 끝이었다. 평균적인 시민은 달걀을 6일마다 1개꼴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식단은 수용소 수감자의 표준 식단과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통계국에서 산출한 기관인데 이 기관은 항상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착색했을 가능성이 높다.[30][31][32][33]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4p
공산품의 공급 사정 역시 마찬가지로 나빴다. 공장에서 제조한 물건의 가격은 전통적으로 특별히 높게 매겨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물건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 1952년에 가죽 신발을 구입할 수 있는 농민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가장 간단한 신발과 옷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5p
소련 인민의 고난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공업과 농업 부문의 지극히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 물질적 보상 체계가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작업장에는 폭압이 만연했다. 노예 노동은 물론 굴라크 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행해졌지만, 자유롭다고 하는 산업 및 농업 노동자들도 흔히 강압적인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다. 일부 산업의 작업장, 특히 가장 임금이 낮고 위험한 곳에서는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작업이 수행되었다. 동원을 회피할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의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부터 1952년까지 약 1700만 명이 지각, 근무지 근무이탈, 동원 회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 작업장 규율 위반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소련 노동자들의 이타적 열정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한 선전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한다.
올레그 흘레브뉴크의「스탈린」(삼인출판사-유나영 분 옮김) 546p
1930년대처럼 스탈린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빵 부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된 '파괴자들'과 '투기꾼들'을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크렘린 지도자에게는 전시에 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비축했던 엄청난 '전략적' 곡물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 곡물을 소비용으로 방출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 외국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금 1500톤도 국고로 갖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나중에 스탈린이 금의 매각을 금지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국제연합의 국제부흥국이 러시아에 보내려 한 식량 지원도 마다했다.[34]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소련 식량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산업 재건과 재무장에 돈을 쓰기 위해 소련 인민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을 피폐화하는 전전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농민들에게 물린 세금은 30% 증가했고, 1950년까지 150% 급증했다. 국가는 또 소련 인민들로부터 빌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몰수한 수십억 루블에 이른 전쟁 공채를 상환하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새로운 재건 공채가 생존을 우해 발버둥치는 시민들에게 강요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163p~164p
베리야가 체포된 후 흐루쇼프는 재빨리 지휘자의 자리로 진입했다. 하지만 말렌코프가 눈에 잘 띄는 직책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후계자로 계속 여겼다. 1953년 8월 8일 최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하면서 말렌코프는 '향후 2-3년' 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급진적으로 개선시킬 깜짝 놀랄 만한 몇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1928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는 군산복합체와 기계제작 부문을 희생하고 농업 및 소비재 관련 경제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키기로 약속했다. 말렌코프는 또 농가와 개인 부속지의 크기를 늘릴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농업 세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조치들은 1년 내에 농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거의 배가시켰다. 심각한 식량 문제가 계속 소련을 괴롭혔으나, 적어도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재산세를 모면하기 위해 과수원을 줄이고 소를 도살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시장에 다시 팔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러시아 전역의 무지크[35]들이 농촌의 밀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그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등, 레닌 이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블라디슬라프 M.주보크의 「실패한 제국」(아카넷-김남섭 분 옮김) 241p

이렇듯 집단농장에 종속된 농민들에게 지불되는 극도로 낮은 수매가로는 국가에 생산물이 모조리 몰수되었다는 뜻이다. 농촌을 착취함으로써 중공업과 무기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고 공업부문 또한 무보수 강제노동이 만연하여 스탈린식 산업화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죽은 즉시 오랫동안 과제로 남아있던 경제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축산물에 대한 수매가를 인상하고 농민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농민들의 숨이 트였고 농업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삽질로 인해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0~22%,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36]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37]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38][39]

어쨌든, 스탈린 시대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되었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딸리는 경제력으로 미국과 군비 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 부문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국가가 퇴보할 정도는 아니었다.[40][41]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42]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당시 소련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다.[43] 또한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잡아, 일반적인 인민대중에게도 안정적인 연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괜히 냉전시대 서구 좌파들이 스탈린을 찬양했던 건 아니다.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높으신 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사기업을 비롯한 민간 주체에게 혁신을 고무할 인센티브 체계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스탈린 시대의 소련은 국가권력이 사회의 각종 자원을 동원해서 더 효율적인 생산단위에 때려박으면 성장하는 요소투입형 경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전후복구까지 끝나자 소련은 이미 고도화된 도시경제였고, 혁신과 창조적 파괴, 생산성 향상이 아니면 성장을 유지할 수가 없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바로 자본가(=기업가)가 사리사욕을 원동력으로 삼아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혁신을 선도한다. 하지만 계획경제적 인센티브를 제외한 효과적 혁신수단을 갖추지 못한 소련은 비효율만 양산했다. 인민들에게 정치권력과 거래로 준 것이나 다름 없던 복지제도는 점점 더 과중한 압박으로 소련 체제를 내리눌렀다. 이를 극복하고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고, 소련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차차 둔화되었다. 문제가 계속 쌓여만 가자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안드로포프 집권기에 들어서서는 성과급 제도를 강화했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업가정신이 부재한 관료집단의 한계는 명확했다.

소련은 전통적으로 계획경제적 인센티브제에 기반하여 경제성장을 했다. 사기업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련에는 인센티브제가 정착되었고, 소련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먼저 소련의 경제성장과정을 보면 채찍과 당근이라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특히 스탈린의 경우 목표량을 초과생산한 동무에는 막대한 포상과 훈장 그리고 혜택을 부여했고, 그러지 않은 동무에게는 징계처벌을 하였다. 생산량이나 근태, 업무실적이 급격히 낮은 경우에는 심한 경우 숙청당했다. 그래서 대충대충 일한다고 해도 봉급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소련이 망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련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말이나 러시아와 구공산권 국가에서 살면서 경험한 것에 의하면 소련권 사람들이 일은 열심히 한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잘한다는 게 문제이다. 이런 직업관을 표현하는 단적인 일화가 있는데, 한 남자가 소련 말에 놀러갔는데 한 사람은 땅을 파고 한 사람은 그 판 땅을 메꾸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였다. 모든 목표치는 당관료의 손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필요한 물자의 양을 책상에서 결재하면 이 문서가 하달되어 공장에서 해당물자를 생산한다. 자유경제시장처럼 사기업이 마음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목표치를 달성하면 해당 공장과 사기업은 충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니 공장도 딱 그 목표치만 생산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수요량을 예측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정 물자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치에 따른 인센티브제도는 인센티브는 늘어나는데 막상 생산력이 떨어지는 막장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중앙당의 생산량 통제를 폐기하는 방법이었다.[44] 생산량 통제의 폐지는 당연히 인센티브제도의 폐지로 들어섰다. 중앙당은 각자 공장이 알아서 생산해서 벌어드린 수익으로 인센티브를 받으라고 했다. 당연히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치가 없으니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직접 수익을 내라는데 어떻게 수익을 내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생산량에 있었다. 수십년 간 중앙당이 정해준 목표치만 달성한 기업과 공장에서 알아서 생산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산하겠는가? 수요를 알지도 모르고, 돈을 번다는 개념도 없다보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과거의 생산량을 목표치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센티브도 없으니 의욕은 떨어지고 목표치만 생산하다보니 결국 생산력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자는 적고, 거기에다가 국영상점에다가 헐값에 납품하는 것보다 시장에 파는 것이 몇배 이상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눈치가 재빠르게 돌아가던 기업들이나 업자들은 물자들을 시장에 팔며 이득을 얻는 쪽을 택했다. 그야말로 이것의 악순환이 빅뱅을 일으켜 소련 말 물가폭등을 유발시킨 것이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율 생산, 시장 납품 체계와 인센티브 폐지를 도입했으나 급격하게 이루어진 변화는 소련의 전통적인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 동안만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 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 시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며 많은 러시아인들이 저임금 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으니, 이들은 적어도 삶의 질 측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2.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급진적인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45] 이게 꼭 소련만 그런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46] 위키피디아에 있는 영국의 농업 혁명을 보면 알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조선 농민들 역시 저가로 수탈의 고통을 겪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 노동자들이 풍부한 농산물을 누리면서 잘먹고 잘산 것도 아니지만. #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47]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48]를 야기했으나, 당시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절대 망상이 아니었다.[49]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패하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50]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51] 실제로 1920년대에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붉은 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이 때 이루어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농업을 초토화하는 동시에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올인한 투자가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페레스로이카 이후 재발견된 부하린을 지지하는 시각에선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중농을 때려잡는 바람에 급격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고 오히려 이 같은 식량문제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했던 당시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하린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이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급격한 중화학공업추진은 결국 식량문제를 안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부하린식으로 추진했더라도 스탈린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수준의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부하린도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하기도 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은 하되 급격하게는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급격한 공업화로 인하여 가축생산의 공급은 50%가 감소하였으며 곡물생산은 기대보다도 적었다. 부양인구가 줄었으므로 공업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유입은 산업자본 성장을 저해하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간 인민이 필요보다 약 1900만명 이상 이주해버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1920년대 말에 소련경제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남용했다는 것이고, 만일 대안의 정책들이 채택 되었더라면 좀더 큰 산출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자본이 더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레닌은 네프에 대해 국가를 다시 자립하게 만들기 위해 시장에 임시로 양보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했다. 1927년 농가의 절반이 농업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네프의 성공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 결과로 생산성이 꾸준히 상승했다.1926년에 이르러 1913년 수준의 농업 생산량이 회복됐고 1920년대 중반의 수확량은 러시아 농업의 황금기였던 1900년대 당시보다 17퍼센트나 높았다. 레닌이 기획했던 것처럼 네프가 지속됐더라면 그것은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소련 경제는 농업부문의 활황에 힘입어 1921년과 1928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네프는 농업 집단화를 통해 중단됐다. 농업 집단화는 소련을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었고 수백만 명의 농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 올랜도 파이지스(조준래 분 옮김)의「혁명의 러시아1891~1991」(어크로스, 2017, pp.205~210)

이런 식으로 닥치고 일단 밀어붙이는 스탈린식 국가주도형 경제정책, 민주집중제의 '집중'을 강화하는 관료제의 강화는 후세의 좌파들에게도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의 소련의 국가성격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따라 현재의 좌파들의 정파가 갈리기도 한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의 급진좌파 중 하나인 노동자연대등이 주장하는 이 관점은 소련 관료제는 하나의 자본으로서 노동자에게 작용했고, 국제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소련은 엄연히 그 일부였기에 세계공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붕괴는 계획경제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 자본주의로의 이행일 뿐이라는 것이 그 입장이다. 한편 아나키즘이나 평의회 공산주의 등의 일부 분파는 스탈린 이전 레닌 집권기부터 소련의 붕괴까지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 보기도 한다.

그 다음 주장으로는 스탈린의 정책들을 레닌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스탈린주의자(PD)들 대다수가 가진 입장이기도 하다. 레닌 집권 이후부터 소련의 붕괴까지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이었다는 입장이고, 소련 붕괴 이후도 소련의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닐지 몰라도 사회주의에 근접한 복지국가라는 인식을 가진다.

비주류적인 주장으로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 있다. 노동자국가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 국가를 말한다. 즉 한 사회의 권력이 자본과 지배계급에 존재하는지, 혹은 노동계급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노동자국가 여부가 갈린다. 스탈린 이후의 소련은 이러한 노동자국가의 틀은 가졌지만 스탈린에 의한 중앙에의 집권, 사업장과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관료제로 대체해 버린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국가'는 분명히 아니라는 입장이 '변질된 노동자국가론'이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수성 및 발전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53]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보는 의견이 주류이다. 트로츠키가 노농적군을 건설해 1919년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해냈듯이 스탈린은 군대를 뒷받침할 산업을 재편해서 1941년에 소련을 구해내었다. 그의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전지구의 상당부분을 공산화시키지도 못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승리하지 못하고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54] 트로츠키주의 측에서는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차이점만을 부각해 설명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농민을 갈아넣는 중공업화, 군사력의 확대 및 확충 모두 트로츠키의 정책이었다.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축출 이후 스탈린에게 적대하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자 도리어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55] 이는 그것이 트로츠키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농민을 갈아넣어 만든 자본과 전국적 징집으로 만든 군대로 승리한 전쟁실질적 최고사령관이 바로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트로츠키는 허망하게 축출된 토론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레닌 생전에 소련의 실질적 2인자였다. 그런 트로츠키는 포용력이 없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실각했지만, 스탈린은 아무리 잔인하고 혹독할지언정 정치적으로 승리한 다음 계획에만 그친 트로츠키의 중공업화를 실제로 이룩해내어 소련이 맞이한 가장 위협적인 적을 격퇴해내었고 이는 트로츠키의 군사적 성공에 결코 꿇리지 않는다.

중공업화를 반대한 부하린과 중공업화를 점진적으로 효율적으로 진행하자고 한 트로츠키 모두 1920년대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탈린은 세 명중 가장 강경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몰로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정도까지 유럽에서 전면전, 총력전을 벌일 수 있을 계획으로 산업화를 추진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까지 이 구상에서 시작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15년짜리 계획이 된다. 그것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 1927~1929년에 시작한 계획이었다.[56] 그렇다는 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욕과 별개로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말로 소련의 공업국가화, 군사대국화를 1920년대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고 실행에 옮겼다는 결론이 된다.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무능하지 않았고 각자의 비전과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1928년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농업국가인 소련을 15년만에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보유한 국가로 만들 추진력을 가진 게 스탈린이었다. 당대의 평가가 어땠는지,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이 소련을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의 논의에 대해선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결과만 본다면 스탈린은 소련의 구원자였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외교 분야

3.1.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

소련은 독소전쟁 초반 몇 달만에 수백만의 군대와 모스크바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잃고 마는데 그 원인 중에는 스탈린이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1930년대 말에 군대 내에서의 대숙청으로 쓸만한 지휘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과, 수많은 사전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나치 독일의 침공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무리한 사수명령으로 많은 병력을 포위섬멸작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57]

하지만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세묜 티모셴코 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무기대여법 지원을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실행해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전 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 능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은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실전에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 단, 불필요한 간섭을 줄인 것이지, 여러 장치를 통해 장교단을 철저히 휘어잡고 있었다.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 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서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한 점이 독소전쟁의 승리를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중략)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 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 1940년 4월 회의 중 스탈린의 발언 #
포병덕후로도 유명하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대전에 대한 통찰이 탄탄한 근거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뭘 더 제공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눈은 있었던 듯하다.[58][59]

이외에도 다포탑 전차를 철저히 배격하고 경전차와 기병전차, 나중에는 T-34를 비롯한 중형전차를 대거 생산하여 붉은 군대는 1940년대 일찍이부터 수천대의 전차를 갖추게 되었고, 보병용 자동화기의 채용을 밀어붙여서 그리고리 쿨리크가 중단해버린 PPD 기관단총의 생산을 재개하고 SVT-40 200만 정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보병의 1/3을 SVT-40으로 무장시키거나, 공수부대를 당대의 모든 국가중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굴리기 시작하기도 했으며[60] 실패했긴 하지만 탄띠로 급탄하는 DS-39 공랭식 경기관총을 개발해 채용하기도 했다. 기계화 이론가인 투하쳅스키, 야키르, 예고로프우보레비치 등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붉은 군대의 기계화에도 신경을 써서 소련의 기술 때문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GAZ-60 하프트랙 장갑차를 일찍이 채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술에서야 I-180 전투기가 외면당하고 VI-100(후일 Pe-2가 되는) 중전투기가 급강하 폭격기가 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다른 많은 나라도 항공기술에서는 삽질을 많이 했으므로 스탈린만의 문제라 볼 순 없다.

3.2. 외교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

또한 스탈린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얄타 회담에서 얻어낸 외교 승리이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병마와 친소 유화적 성향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 내 세력 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단숨에 제압하며 한반도 북쪽의 38선까지 진출했다. 미국과 합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했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이에 나치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자면, 소련은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나 결국 응분의 대가를 차지했다.
파일:Cold_War_Map_1959.png
스탈린은 1922년부터 1952년까지 30년이라는 재임 기간 동안, 유럽의 촌동네 취급 받았던 러시아를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다투는 초강대국 소련으로 탈바꿈 시켜놓았다. 미-소 경쟁이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지 오래인 지금 시점에서야 별게 아닐 수 있어보이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열강의 철저한 말석 취급, 내지는 가끔 열강 취급도 받지 못할 정도로 유럽에서 낙후되어 있던 동네였다. 소련은 영국, 프랑스 등 쟁쟁한 제국주의 열강들을 비집고 국가를 발전시켜 나간 끝에 제2세계의 맹주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의 스탈린은 인류라는 종족의 정점에 올랐다고도 평할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는 대항점에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대통령 해먹은 루즈벨트를 제외하곤 '짧은 임기'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한계상 국가 전체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인 스탈린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3.3. 넓어진 국토

스탈린의 소련은 단순히 동유럽과 극동의 공산주의 위성국 확대에 그치지 않았고 자국의 영토도 상당히 넓혔다. 우선 동유럽에서 발트 3국을 점령했고 독소전의 전리품인 칼리닌그라드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패전으로 빼앗긴 커즌 선 이동의 구 폴란드 동부 지역을 합병했으며 핀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지로부터도 영토를 빼앗아 벌충했다. 게다가 극동에서도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남사할린을 회복했고 북태평양의 요지인 쿠릴 열도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는 주변 적성국에 영토 손실을 강요하는 동시에 소련의 상대적인 체급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세부적으로 보더라도 스탈린이 새로 차지한 영토는 하나같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발트 3국과 핀란드 카렐리야의 획득으로 스탈린은 소련 본토, 특히 제정 러시아의 고도이자 소련 제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잠재 전선에 멀리 떨어뜨렸고 핀란드의 제2의 도시였던 비보르크(핀란드명 비푸리)까지 빼앗는 성과를 얻었다.

또한 커즌 선 이동의 폴란드령을 도로 차지하며 1920년대 폴소전쟁의 패배를 완벽히 앙갚았음은 물론,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제2의 도시였던 르비우(폴란드명 르부프)를 소련령에 귀속했다. 대신 새로 위성국으로 편입된 공산 폴란드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동독오데르-나이세 선을 강요하여 그 이동의 영토를 폴란드에 보상 격으로 내주면서 동유럽 내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 동프로이센의 주도이자 유서 깊은 도시인 칼리닌그라드(독일명 쾨니히스베르크)를 차지하며 독일사의 고도와 발트해의 부동항을 소련령으로 만들었다.

극동에서도 짧은 참전 기간 치고는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는데 러일전쟁 패전으로 넘어간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은 물론 전략적 요충지인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까지 점령했다. 특히 본래 일본령이었던 북방4도까지 점유하며 러일전쟁의 패전을 완전히 되갚았고 사할린과 쿠릴의 온전한 점유를 통해 사실상 오호츠크 해 내의 통제권을 획득했으며 북태평양에서 입지를 다졌다. 물론 스탈린의 최종 목표였던 루모이-쿠시로 선 북단의 홋카이도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소련으로서는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짧은 참전 기간을 고려하면 이 정도로도 혁혁한 성과였다.

이렇듯 스탈린 시대 소련은 2,000 ~ 2,700만의 인명을 대가로 동서 양면에서 여러 위성국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자국도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그 안에는 칼리닌그라드, 르비우, 비보르크와 같은 적성국의 고도이자 주요 도시도 포함되었다. 스탈린 시대를 거치며 소련은 더 넓고 지정학적으로 더 영향력 있는 국가로 재탄생했다.

4. 종교 정책

  • 이 챕터의 내용은 고려대 노어노문과 석영중 교수의 <러시아정교 -역사 신학 문학>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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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이콘은 독소전쟁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 니코노바(Матрона Дими́триевна Ни́конова, 1881/1885~1952)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마트로나는 툴라 주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선천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었으나 소녀 시절부터 예언을 하거나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이사와 동료들이나 친척들이 사는 여러 집을 옮겨다니며 은거하는 생활을 이어갔고 한참 정교회를 열심히 때려잡고 있던 소련 당국의 눈을 피해 지하로 숨은 정교회 신자들은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그녀에 의지하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당국은 마트로나를 잡기 위해 지하교회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시베리아로 추방하거나 굴라크에 처넣었지만 그들 중 한 명도 마트로나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공산당원들까지 마트로나를 찾아오는 지경에 이른다. 마트로나는 1999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독소전쟁이 터지고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해오는 암울한 전황에 절망한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버리고 동쪽으로 후퇴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마트로나의 예언이 영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비밀리에 그녀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자 마트로나는 스탈린에게 "당신이 모스크바를 사수하는 한 소련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스탈린은 그녀의 말을 따라 모스크바 사수를 선언했고 예언 그대로 소련은 독소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그리고 신앙의 위력을 실감한 스탈린은 이후 정교회에 대한 탄압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고 한다.

스탈린부터 정교회 신학교 출신이긴 하나,유럽에서 가난한집 수재들은 신학교가 학비가 면제되기에 진학하는 일은 흔했다. 스탈린은 신학교 시절 일치감치 공산주의자로서 훗날 공산주의 이론서적도 여러 권 펴낸다.

앞서 레닌시절 러시아 정교회는 박멸수준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우선 러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정교회의 지위가 법적으로 박탈되며 교회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총대주교 제도를 용인해주긴 했지만 신학교는 폐쇄되어야 했고, 적백내전당시 초법적으로 교회에 대한 약탈과 사제 살해등이 이어졌다. 특히나 1918년 키에프 수좌 대주교를 비롯하여 주교 교구사제 부제 수도자 평신도등 1만 2천명이 집단 살해되고 교회와 수도원은 약탈당했다. 내전이 끝난후 볼셰비키 지도부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는데, 레닌은 직접적인 교회에 폭력을 선호했고 트로츠키는 교회 내부를 분열시킨다음 장악하는 방법을 썼다. 1922년 신경제정책 이후에 교회에 침투한 볼셰비키 추종자들이 교회의 반혁명적 행태를 항의하며 소련정부 체제를 찬양하고, 교회를 장악하려 했는데 이를 반대한 총대주교는 체포 구금 당했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석방되나 1925년에 사망했고 17년간 총대주교좌는 공석이었다. 물론 교회에 침투한 '진보'들이 교회 탄압과 성직자 처형과 추방을 긍정한것은 아니나 무신론을 표방한 공산주의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 공산당에서도 교회를 용인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스탈린 시기인 1929년부터 1930년 말까지는 이미 교회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200~300여 개를 제외한 모든곳이 폐쇄 당했고 4만 명의 사제와, 비슷한 수의 수도자와 수녀, 수백만의 신도들이 추방내지 유배, 처형당했다. 어용화된 기존 교회를 대체하여 상당수의 신자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신학교 출신이라서 정교회의 본질과 러시아 민중의 전통적 신앙심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만큼 그의 교회 탄압은 전례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기존의 공산당 종교 정책에서 정치 깡패 노릇을 했던 무신론자 연맹을 1929년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으로 개창하여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부수고 이콘을 불태우며 교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앞에 있는 스탈린 이콘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생존을 위해 굴욕적으로 제작한것으로 진지하게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존한 건 아니다. 공산당에선 실제로 정교회에서 거의 유일한 자체수입인 양초 판매 수익을 끊기 위해 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이콘과 성물 십자가 때려부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종종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은 전투적 무신론자 협회 운동은 "무신론을 통해서 공산주의로, 종교와의 전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같은 호전적인 구호로 미화 되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무신론자 동맹은 러시아를 무종교 국가에서 반종교 국가로 만들라는 지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무신론의 수도로 만들자는 계획까지 세웠다.

한때 러시아 정교회에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적 성원을 받아 만드려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스탈린의 계획에 따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고 부지는 '소비에트 인민대궁전'으로 마개조할 예정이었으나 2차대전 때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철골을 뜯어가자 미완성 상태로 방치된다.

2차 대전은 러시아 정교회에 숨돌릴 틈을 주었다. 다만 스탈린은 종교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 전반에 걸쳐 완화책을 쓴것이지 특별히 종교정책을 유화적으로 한게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탄압이 완화된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면 그동안 러시아 역사와 밀접한 정교회를 끌어들어야 하는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다. 1943년 교회의 지지를 공식 요청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이 2차 대전 승리를 위해 믿음의 힘을 믿을리는 없고 그해 12월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 만나기로 약정이 되었는데 영국 성공회 주교단이 소련교회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숙원이던 17년간 공석이던 총대주교 선출을 승인하고 사제 석방, 교회 신학교 복구도 승인했다. 이과정에서 총대주교는 스탈린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정교회는 소련과의 굴욕적인 밀월관계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교회 탄압을 그만둔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무신론자 그룹과 유사한 즈나니에(Znanie) 협회를 창설했는데 이번엔 과학자와 교수집단들을 이용하여 종교를 무지몽매로 몰아가는 전략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수뇌부는 전쟁 직후 그리구 전후 잠시 동안은 외국 귀빈이나 단체가 방문시 스탈린 동무와 함께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세계 청소년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공산당에 포섭된 정교회의 어용 사제 평신도들에게 환대받은 멕시코 기자단들은 "소비에트 정부와 국민들 덕분에 종교는 이 나라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술회 할 정도였다. 마치 1930년대 서구 좌파에서 소련을 지구상 최초의 남녀 평등 실현, 노동자의 천국으로 묘사한 선전에 낚인 것과 같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절 다시 정교회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탄압당한다. 반정부 성향 사제는 암살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되어 사라지고, 수도자들은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강제수감 되었으며, 정교회 신자 개인은 직장에서 진급과 급여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 같은 탄압은 브레즈네프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도 소련 공산당은 그 동안 여러번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로 끝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박멸 정책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존의 반 종교 정책을 전환하진 않았으나 소련 내부에서도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여 슬라브 민족주의와 러시아 역사 문화 부흥이라는 목적으로 교회 탄압의 수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동물농장에서는 큰까마귀 모지스에 대한 돼지들의 대접 변화로 패러디되었다.

스탈린과 소련 시대 반(反) 종교, 반(反) 기독교 정책에 대해선 다음도 참조 바람.

5. 결론

5.1. 긍정적 입장과 평가

레닌 생존 시 스탈린은 차리즘과 싸웠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후에는 그는 1917년 혁명의 길을 닦기 위한 투쟁에 참가했으며, 10월 혁명 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하기 위해 싸웠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을 이끌고, 내부 및 외부의 적들과 단호히 투쟁했으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호하고 공고히 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노선을 떠받쳤으며, 사회주의적 변화와 사회주의의 건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 소비에트 군대를 이끌고, 불요불굴의 격렬한 싸움을 하여 반 파시스트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이끌었다. 스탈린은 다양한 종류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레닌주의의 적들인 트로츠키파들, 지노비에프파들, 부하린파들과 다른 부르주아의 앞잡이들에 맞서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방어하고 발전시켰다. 스탈린은 불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들인 많은 이론적인 저작들을 집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스탈린은 전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견지하면서, 중국인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인민들의 혁명적인 투쟁을 크게 돕는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소비에트 당과 정부를 지도하였다. 스탈린은 그 투쟁을 지도하면서, 역사의 흐름에서 전면에 서 있었고,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반동세력들의 타협할 수 없는 적이었다.
스탈린 문제에 대하여 1963년 중국 인민일보

2008년 러시아 국영 TV 채널과 러시아 역사 연구소가 진행한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3위에 올랐으며, 특히 소련의 정치가들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62][63] 2006년에 진행된 또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 가량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29%에 불과했다.[☆] 2007년에 러시아의 10대 청소년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다른 투표에서도 절반 이상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46%는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견해를 부정했다.[65]

현재 러시아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꺼려왔음에도,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종종 표명하고는 했다. 일례로, 푸틴은 1937년의 대숙청을 '공포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도 "타국이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소련과의 단절을 선언한 일부 러시아 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소련과 러시아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또한, 푸틴 집권기에 개정된 러시아 교과서에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봉착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의 부상을 유도했으며,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부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 경제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불어닥쳤고, 러시아인들이 그에 대해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는 러시아인들을 부유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다수를 빈곤하게 하고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켰으며, 러시아의 국력까지 크게 쪼그라들게 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나라가 그나마 정상적인 꼴은 갖추게 되었지만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부패한 지배층이 부를 거머쥐고 있고,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독재와 잔혹함보다는 승리와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을 경험한 노년 및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청년들에게까지 스탈린은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던 시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67] 전쟁 승리와 경제 발전, 어느 하나만 달성해도 추앙받기 마련인데, 이 둘을 세계 규모로 달성해버렸으니 업적만 놓고 봤을 때는 그야말로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변질시키거나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런 실정과 악행을 넘어, 끝내 조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공산주의를 전세계로 확장했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된 평가이다.

또한 절대권력을 가진 독재자치고는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했다는 부분도 긍정적인 점이다. 후처인 나데즈다가 사망한 이후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개인적으로 사치도 별로 부리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비판적인 학자들도 그가 권력 자체에 대한 욕망 외에 물질적인 풍요나 사치에는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는 해석을 내리는 편이다.

5.2. 부정적 입장과 평가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면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이 악한이라는 표지는 그가 마음대로 도덕을 전복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선이 악이 되었고, 악이 선으로 둔갑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 모든 진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사람이였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68]
아버지는 더이상 없지만, 아버지의 그늘은 아직도 우리 곁에 드리워져 우리에게 자주 명령하며, 우리는 아직도 자주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중, 1967년)
사이코패스와 스탈린을 연결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도구로 쓴다. 이런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입니다.
권일용#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늬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단단하다...' 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때문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리는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빨치산 연락병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바의 증언. 뒤의 성은 증언자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잘라냈다. 그의 남편 바네치카는 전쟁 발발 직후 스몰렌스크에서 독일에 포로로 잡혀 죽을 고생을 하다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독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이 돌아오자 공식적으로 현역 복귀하여 여러 차례 수훈을 받았다. 그러나 종전 직후 그의 포로 이력을 문제삼은 NKVD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7년간 시베리아의 콜리마 굴라그에 수용되었다. 그동안 아내 발렌티나와 그의 아들은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전쟁 전 교사였던 발렌티나는 자신들에게 지워진 부당한 평가로 인해 직업을 잃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날라야 했다.[69]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대의 라이벌인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가장 자주 언급되며, 소련의 초강대국화와 경제개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집권기 극악한 학정을 저질렀다. 그는 스탈린주의와 관료제로 소련을 초강대국화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대숙청, 카틴 학살, 홀로도모르 등의 대학살을 저질렀으며 소련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비견되는 역사상 최악의 권위주의 국가로 운영했던 데다가 그의 유산들이 인류의 절반 가량을 장기간의 고통 속에 빠트렸다는 점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타국에서는 히틀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상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 중 하나라는 평가가 가장 일반적이다. 전례가 없는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공적을 널리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로 불린다는 점에서 그가 집권기간동안 얼마나 권위주의적이고 악랄한 통치를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여러 창작물이나 매체에서는 악랄한 독재자 이미지의 전형으로 히틀러와 더불어 스탈린이 제시된다. 폴 포트의 사망 당시 그를 풍자하는 만평에서조차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지옥에서 불타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스탈린은 방법이 어찌되었든 자국을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렸는데, 자국을 완전히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폴 포트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스탈린의 악명과 그가 역사에 남긴 상흔은 엄청나다. 홀로도모르, 대숙청, 굴라그 건설, 독소전쟁 당시 인명 갈아넣기 등 하나만 저질러도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을 만한 짓을 수차례 저질렀으며 라이벌인 나치 독일마냥 국가 전체를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하고 반대파들이나 반대파로 의심되는 이들을 마치 고장난 부품을 폐기하듯 숙청했기에 인권적 면에서는 유대인 등 특정 계층을 지구상에서 말살하려 했던 히틀러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이를 넘어 '인명의 경시' 내지 '국민의 도구화'의 관점에서는 스탈린을 따라올 독재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70]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71]

이외에도 대다수의 러시아 진보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서 한 동안 스탈린이 묻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멸칭까지 나올 정도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을 네 권 썼는데, 스베틀라나는 책에서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으며,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을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72],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했다. [73]

심지어 스탈린 치하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에서 스탈린의 이름은 사실상 말해서는 안 될 자 취급을 받았다. 당 차원에서 스탈린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지만, 대조국전쟁이나 경제발전에 대한 업적들을 제외하면 결코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재임기에 수상을 지닌 알렉세이 코시긴 역시 이 시절을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으며, 안드로포프 역시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렇듯 소련의 국가적인 입장조차도 스탈린을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국가적 쇠퇴와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민중을 탄압했던 스탈린이 되려 공산주의의 아이콘이자 조국의 수호자로 찬양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뒤로 집권한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로니, 안드로포프는 겉으로는 전임에 비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스탈린을 평가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흐루쇼프가 독선적이고 도전적인 통치를 일삼다가 실각한 것도,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브레즈네프가 차기 지도자로 집권한 것도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정치를 공산당 스스로가 어떻게든 막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수슬로프나 그로미코등을 비롯한 온건파들과 우스티노프, 안드로포프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이 좀 다르긴 했지만 공산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같은 관료계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 수행과 공업화에서만큼은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했지만, 결코 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레닌을 아직도 존경하고, 스탈린은 소련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며 비판했고,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5.3. 현대 러시아의 평가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입장은 크게 유사 이래 최대의 적격퇴해 승리하고 조국초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지도자수많은 인민을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로 나뉘지만,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시대 갑작스런 개방으로 인한 혼란과 정권의 실책, 그로 인한 경제적 추락과 빈곤 문제가 대두되고 이 탓에 소련의 향수가 강화되어 전반적으로 스탈린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적어도 러시아 역사에서 스탈린 치하 소련이 가장 경제성장률이 높았고, 체제에 순응하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인민들이 누리기 시작한 시기가 스탈린 집권기였던 점도 스탈린에 대한 향수를 갖게된 중요한 원인이다.[74] 이는 러시아 자체가 명목상 민주주의 체제이나 실상은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은 독재국가인 것이 한 몫한다. 그의 숙청은 많은 러시아인들을 죽이긴 했으나, 러시아에게 스탈린이란 만년 유럽의 샌드백 신세였다가 가끔씩 선전하는 러시아미국과 세계를 양분할 수 있는 초강대국으로 이끌고,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에서 통쾌한 승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한 국가적인 승리를 곱씹어보는 것은 러시아인들에게 아직도 유쾌한 추억팔이다.[75] 그렇기에 좌우할 것 없이 러시아의 가장 대중적인 영웅은 스탈린이다.

최근 들어 상당히 심해진 경제난 탓에 일어난 반푸틴주의와 공산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간간히 볼 수 있다. #

2021년 5월 러시아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뛰어난 러시아인'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스탈린이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블라디미르 레닌, 3위는 알렉산드르 푸시킨.

우크라전 이후 반서방 분위기를 타고 러시아 공산당 주도로 스탈린 동상이 여럿 세워지고 있다. 러시아 전역에 있는 스탈린 동상 중 9%만이 소련 시절 물건이다.#

5.4.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국가들에서는 스탈린의 민족 억압책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한 민족 구성원의 변동으로 인해서 소련 해체 후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가볍게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간의 현지인과 러시아인의 갈등에서 시작해서 심하게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에 전쟁까지 터진 경우도 있고 영토분쟁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스탈린을 비판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만큼은 높이 평가한다. 독소전쟁 초기 동유럽 국가들은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이유 불문의 잔혹한 학살뿐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이유로 스탈린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2010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대기근과 대량 학살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을 기소한 적도 있었다.[76] 뿐만 아니라 2010년 봄에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하니 민족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77]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탈린이 히틀러 보다 더 악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아르메니아도 스탈린에게 심하게 탄압받아서[78][79]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8%가 '스탈린과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한 반면, 72% 가량은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80]

스탈린의 고향조지아에서는 평가가 갈린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로도 스탈린 동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손꼽힌데다가 1990년대에 소련시절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면서 스탈린 동상이 수십여개씩 세워졌을 정도로 긍정적인 기류가 분명하 있고, 조지아의 한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81]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조지아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겼으나, 스탈린 기념관과 동상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조지아군 병사가 자신의 스탈린 문신을 보여주자 러시아 병사는 그를 바로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까지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아 입장에서 스탈린은 소련 시절 조지아 탄압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인물이기에, 일단 조지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스탈린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특히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급증하면서, 고리시 시청 앞에 있던 그의 동상[82]을 2010년 철거했다.출처

5.5. 대한민국북한의 평가

제1세계를 대표하는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김씨 3대, 마오쩌둥,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83], 이디 아민, 폴 포트 수준으로 평가가 좋지 않을 정도로 다른 서방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인식된다. 특히 한국과 관련되어서는 남북분단을 야기하고 소련군정을 통해 북한 정권의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으며, 1950년 6.25 전쟁소련북한에 밀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하였고 남침을 지지한 북한 정권 탄생의 장본인이자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6.25 전쟁의 원흉이자 전범, 즉 대한민국에 큰 상처를 남긴 역사 속의 죄인으로 평가받는다.[84] 그나마 입이 떡 벌이질 정도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국가 단위의 삽질로 인한 중국의 발전 저하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된 마오쩌둥과 달리 이쪽은 객관적으로 국가의 지도자로써는 인명을 갈아넣기는 했지만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국가 경영에 손에 꼽게 성공하여 냉전 체제를 장기화시킨 장본인이기에 객관적으로는 공과가 갈리는 독재자일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전무하다.[85] 현재 한국군의 주적론에 나오는 6.25 전쟁 주역 중에도 당연히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포함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군사정권기 인물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 중공업 위주의 개발독재자로써 절대권력을 쥐고 산업화를 밀어붙였다는 점, 그 와중에 국가의 건국이념[86]을 왜곡하고 인권탄압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모두 그렇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진영에서 지지세가 강한 박정희의 경우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업적과 과오, 그리고 그 격차가 뚜렷한 것이 모두 스탈린과 유사한 평가를 받으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현대에는 대체로 보수주의 진영의 인물들이다. 물론 큰 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세세하게 살펴보자면 몇 가지 차이점도 있다. 첫째, 스탈린 시대 소련은 국영기업 위주였고 소련 정부가 세부적인 방향성을 일일히 통제하며 산업화를 이뤘던 반면, 박정희 시대 한국의 산업화는 민간기업이 이끌었고 정부는 각 산업 분야들이 겹치지 않게 큰 틀을 잡아주는 중재자 역할만을 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체제는 공산주의보다는 일본 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87] 둘째, 소련에는 막대한 영토와 자원이 있었고 따라서 내수경제에 중심을 두고 자급자족을 추구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했기에 수출중심경제를 방향성으로 삼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제한된 품목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셋째, 두 정부 모두 현대 공화정 국가에서는 드물게 정적에 대한 사법살인을 일삼으며 절대권력을 구축했지만,[88] 민간에 대한 통제는 박정희 시대, 심지어 유신정권에서도 스탈린 시대 소련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건했고,[89] 실제 인구대비 희생자의 수도 압도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또한 박정희는 일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를 한 케이스라 유신 이전 제3공화국에서는 선거로 당선된 민선 대통령이었지만, 스탈린은 태생부터 독재국가인 소련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른 적이 없다.[90] 그럼에도 두 정권이 큰 틀에서 유사한 모양새를 보인 것은 사실이고,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의 체제를 개발동원체제라 평하며, 비스마르크 정권과 스탈린 체제가 박정희 정부와 같은 성격의 체제라고 평가했다. 사실 이러한 특징은 후발주자로 시작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당장 이웃나라들 중 대만장제스 정권이나 중국덩샤오핑 정권도 세부적인 정책은 좀 달랐을지언정 역시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으며, 일본 제국메이지 유신 이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 급속한 국가개혁을 거쳐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었다. 이런 류의 독재자들은 근본을 따지고 보면 프랑스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로마 공화국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이며, 각론은 시대, 체제, 문화에 따라 다를지언정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초법적 권력을 휘둘러 빠른 개혁을 성취하고, 그에 따르는 민중의 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절대권력을 유지한다"는 개념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또한 지금도 폴 카가메제3세계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의 좌파, 운동권 내에서도 이오시프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별로 중요한 떡밥이 아니다. 애초에 스탈린주의 자체부터 극단적으로 전체주의적이었을 뿐더러 스탈린의 통치 역시 극도로 폭압적이었기에 근본적으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시작한 운동권과 양립할 수 없다.[91] 운동권 자체도 한물간 마당에 스탈린 타령할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또한 스탈린의 공과를 논할만한 역량을 갖춘 운동권이 소수일 정도로 운동판이 위축되기도 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스탈린에 대한 논의를 굳이 하는 운동권은 운동권 내에서도 현실과 괴리된 고담준론을 좋아하는 좌파 오타쿠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스탈린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스탈린에 대한 공과에 대해서 긍정하건 부정하건 간에 대부분의 운동 단위들은 스탈린에 대해서 비판적인 접근을 취한다. 그 이유로는 오늘날 소련이 붕괴해버린 점에서 소련의 주요 지도자인 스탈린 역시 비판의 대상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스탈린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의 소련 인민의 죽음과 숙청, 경직되어 버린 사회분위기 등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의 불가피성의 여부를 떠나서 스탈린의 책임이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완전히 면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탈린시기 소련의 위기의 극복과 소련 생산력의 획기적 전환에 공7과3으로 소련을 반석에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고 평가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3의 부정적 영향이 소련 붕괴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 엥겔스까지는 대부분의 운동권 단위들이 공통적으로 따르지만 심지어 레닌을 포함해서 그 후의 공산주의 사상가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각각의 운동단위들이 다른 스텐스를 가지고 있고 이런 스텐스 차이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 역시 포함되어 있다. 즉 단위마다 그 평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단위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가 대표적이다. 그렇지 않은 단위들은 아예 관심없거나 레닌에서 딱 끊거나, 아니면 트로츠키를 레닌의 후계자로 간주하고 트로츠키주의 노선을 따른다. 국내에서 나름 규모가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자 연대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반혁명의 화신 혹은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이는 토니 클리프가 추구한 국가자본주의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반면에 아고라 출판사와 연관이 있는 볼셰비키 그룹의 경우 트로츠키가 주장한 것 처럼, 스탈린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를 만들었다고 한다.[92]

북한에서는 해방자이자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와주었던 영웅으로 손꼽혔으며, 김일성을 북한 주석자리에 앉히고 지금의 북한을 세우게 하였던 간접적인 인물로서 남한과 달리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40~50년대의 북한에선 집집마다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는 것이 흔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 김일성의 1인 우상화가 진행되면서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거나 스탈린의 저서를 잘 읽지 않게 됐다.[93] 다만 스탈린 사후 이후 지금까지도 경제 개발, 중공업 육성, 독소전쟁 승리 등 스탈린의 성과는 높이 평가받는다.

레닌 사후 스탈린 시절 공업화의 성공과 이를 통한 파시즘의 격퇴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점들을 강조한다. 반면에 스탈린의 지도체제에 대해 한계가 있었다고도 지적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체사상에서 내세우는 수령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스탈린이 수령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에 흐루쇼프와 같은 수정주의자들이 생겨났고, 결국 사회주의의 해체로 이어졌다 평가하는 것.

[1] 보통 독재자의 공, 과 모두가 극단적으로 큰 역사적 사례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수하르토, 무아마르 카다피 정도가 스탈린과 비슷한 사례로 여겨지나, 이들은 공, 과 모두 스탈린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스탈린은 역사적인 인권탄압과 학살, 인명 경시, 그의 유산들이 인류의 절반 가량을 장기간의 고통 속에 빠트린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나치 격퇴와 양대 초강대국 건설이라는 20세기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업적을 세웠기에 이런 평가가 나온 것이다. 죽인 사람의 수가 아닌 폭정의 질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역시 스탈린과 비견되나 이쪽도 공과 모두가 스탈린보다 작으며, 당대 기준으로도 심한 폭정은 저지르지 않았던 덩샤오핑(다만 이쪽은 민간인을 학살한 과오가 있다)과 박정희,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은 리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2] 전쟁, 특히 총력전은 한 국가의 군사력뿐 아니라 행정력, 과학기술력, 외교력,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중공업력, 전쟁지속을 위한 경제력, 전시배급을 위한 경공업력 등 그야말로 모든 국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소련이 나치 독일처럼 강력한 선진 공업국가의 기습공격을 받고도 버텨내고 역전승까지 거두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당대 소련이 저러한 다종다양한 분야들에서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류 조작으로 없는 공장을 만들어낼 순 있어도 없는 공장에서 실제 적군과 맞서 싸울 전차를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만약 소련의 발전상이 통계 왜곡에 의한 것이었다면 실제 전쟁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것도 이런 부분이기도 했고.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3] 물론 현대적 기법이 적용된 통계나 추산에서 볼 때, 심지어 소련의 최전성기라던 1980년에도 소련은 미국 국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건 건 사실이긴 하다. 또한 현실주의자인 스탈린은 소련의 국력을 의도적으로 과대포장하여 새로운 전쟁만은 회피하길 원하는 미국에게 양보를 얻어내려 했으며, 이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블러핑이 있었더라도, 당대 소련이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어떤 국가보다도 강력했으며 심지어 현대 러시아보다도 훨씬 탄탄한 경제, 산업구조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4] 리콴유는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은 매우 온건한 독재를 했기에 스탈린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5] 정확히 10년 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10년 간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 덕에 나치 독일과 맞서 싸워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6] 사실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스탈린이 소련을 '미국에 필적하는' 공업국가로 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명백히 과장이다. 스탈린 시절 소련은 잘 나갔을 때도 경제력이 미국의 1/4 ~ 1/3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1944년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결정했던 브레튼우즈 회의 때도 소련이 딱히 반대하지 못했다. 다만 소련이 진정으로 미국과 필적할 만한 초강대국으로 부각된 시점을 보통 소련이 최초로 비대칭 전력을 보유하는데 성공한 시기, 즉 RDS-1 실험 성공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RDS-1 실험은 스탈린이 아직 집권하던 1949년에 일어난 일이다.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스탈린이 소련을 미국에 필적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7] 특히 중화학 공업 분야.[8] 당시 장제스도 경제와 공업화 면에서 큰 성과를 누리며 "난징 10년"이라는 불리는 짧은 황금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인해 그 황금기는 무참히 박살났다.[9] 아타튀르크는 급격한 서구화와 공업화를 이루어내 현재에도 터키의 국부로 존경받는다.[10] 196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11] 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12]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 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 게 1870년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 중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13] 이런 문제점은 1차 세계 대전보다 10년 먼저 겪었던 러일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당시 러시아는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먼 극동으로 파견된 러시아 군인들한테 줄 총탄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부족할 만큼 공업 생산력이 취약해서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14]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 바가 없었다. 스탈린 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최고의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최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 제국이 아니었다.[15]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 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 ~ 2만 달러였다.[16]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 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강대국 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 대전 이후 19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 성장률이 높았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17] 가령 김일성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소련과 달리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18] 한국도 박정희만주국에서 근무하였고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도 소련의 스탈린식 경제개발을 본떠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한국은 성공적으로 경제개발을 이루었다는 차이가 있다.[19] 스탈린 강철권력 p.714~15를 참조[20] 당시 Li-2, Il-12, Il-14 비행기들은 시속 3~400km로 나는 비행기들이었다. 이는 KTX, HEMU-430X, 삽산, CRH고속기차들과 똑같은 속도이다. 반면에 TU-104는 속도가 무려 시속 약 1000km이다! 이는 무려 Li-2, Il-12, Il-14 비행기들의 시속에 비해 무려 약 3배가 넘거나 가깝다![21]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22] 네프만(NEPman)/쿨라크[23]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얼마나 가난했으면(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24]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25]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26]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27]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28]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29]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30] 이후로 소련인들의 식사량은 풍족해져서 1960년대에는 매일같이 고기를 먹는 나라가 되었지만 1990년대에 경제가 막장화되는 바람에 고기 소비량이 크게 줄고 빵이나 감자로 끼니를 대강 때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스탈린때의 식단을 다시 재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31]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내용이지만,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기준 1년 1인당 소련의 육류 소비량은 최소 40kg이었고, 1970,80년대 소련의 평균 저숙련 노동자 임금(약 200루블)으로는 쇠고기(1kg당 약 2루블)의 거의 100kg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적어도 1960년대부터는 소련사람들도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즐겼다는 것이다. 이 기준이 감이 안온다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이 1년 1인당 육류 소비량이 51.4kg이었고, 중국이 47kg 그리고 일본이 35.6kg임을 생각하면 된다.[32] 반면 안드레이 란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근이 덮쳤을 때도 최소 1주일에 한번은 소련 사람들이 고기를 섭취했다고 주장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흐르쇼프 통치하의 소비생활[33] 하지만 흘레브뉵의 이런 주장은 다소 악의적인 측면도 강하다. 스탈린 시절 소비재는 1차 5개년 계획 도중 하락했지만, 그 이후 실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말 소비재의 생산량은 80% 증가했으며, 1910년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이 2,100 칼로리였다면 네프 시기에는 2,500 칼로리(kcal)로 상승했다. 비록 1차 5개년 계획(1928~1932) 시기에 1일당 칼로리 섭취량은 혁명 이전 시기의 수준으로 하락했지만, (1929년: 2,030 칼로리, 1932년: 2,022 칼로리) 하루당 칼로리 섭취량은 1930년 말엽에 2,900 칼로리로 증가했다. 1인당 칼로리의 섭취량이 2,000칼로리를 다소 웃도는 수준에서 10년 이내에 3,000 칼로리에 거의 도달할 정도로 성장세를 이룩한 것은 녹색혁명 당시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된다. 가령, 인도에서 1961~63년 당시 1인당 칼로리 섭취량과 1991년의 칼로리 섭취량은 제자리걸음에 있었고, 1988년~1990년에 2,229 칼로리로 상승했을 뿐이었다. 파키스탄에서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같은 시기에 1,802 칼로리에서 2,280칼로리로 증가했다. 인도네시아만이 이들 국가들에 비해 현저한 성장을 거둘 수 있었는데, 1960년대 당시 1816칼로리에서 1990년대 초반에 2,605칼로리로 증가했지만, 이조차도 소련과 다르게 10년이 아니라 30년이 소요됐을 정도다. 즉, 스탈린 시절 소련의 소비재 성장률은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지만, 흘레브뉵은 스탈린 정권에 대해 까기 바빠서 이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맥락적 생략을 보였다. 참고 자료는(Michael Kubi, «Die Sowjetdemokratie und Stalin: Theorie und Praxis in der Sowjetunion 1917-1953», 2008, p.116)을 참조[34]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 대한 일부 지원은 허용했지만[35] 러시아어로 농부, 촌놈을 뜻하는 단어[36]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그 해 러시아 농사가 흉작크리가 겹쳐서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37]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38] 다만 이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소련의 경우 미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농업하기 좋은 풍부한 곡창지대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나라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다.[39] 사실 소련의 밀 생산량은 세계 1위였지만 가축 사료용으로 밀을 썼기 때문에 밀을 수입했다.[40] 사실 한국에서는 공산국가 가운데 북한이 제일 유명하여 북한과 자주 비교를 하기는 하나, 사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이상할 정도로 막장이 된거다. 소련은 물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심지어 북한조차도 소련이 건재했던 시기에는 그런 대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41] 무엇보다 로마노프 왕조 말기 부터 시작된 답없던 러시아의 형편상 정상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불가능했고, 결론은 스탈린의 냉혹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방식밖에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42]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43] 현재 이러한 무상의료를 그럭저럭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쿠바외에는 없다. 당연하지만 그 무상의료의 질은 여타 선진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44] 참고로 자유경제체제는 옐친이 들여온 것이지 고르바초프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날 하루아침에 폐지 이런식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45]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이렇게 생각하며,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이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46]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19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47] 브리태니커에 "Disguised unemployment"를 검색해도 나오지만, 전근대 농촌의 경작지들에서는 사실상 일손이 남아도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 이들까지 해당 경작지에 소속된 농민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식적으론 실업자가 아니지만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는 인구가 많고 이를 한자어로는 "위장실업"이라 한다.[48]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여 취재한 바에 따르면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약 70만) 정도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출처-'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49] 트로츠키도 군비 확충을 위한 공업화를 구상하기는 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무지막지한 것은 아니었지만.[50] 혁명 직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에 기본적인 무기인 소총조차 모자라 한때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38식 소총을 대거 사와야 했다.[51]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물론 독일군과의 교환비로 치면 소련군이 거의 항상 열세였기에 아주 부당한 평가는 아니지만 말이다.[출처] Testing Early Soviet Economic Altematives", Slavic Review, Surnmer 1991, pp.251-267., 1920년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부하린적 대안의 문제, 권희영[53] 트로츠키는 국방상으로써 '전시지도자'였고 내정에서는 유능했느냐의 문제와 별개로 대숙청 못지않은 적색 테러를 일삼았다. 특히 적뿐만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정치성향상 아군이 될 수 있는 좌익공산주의자와 무정부 공산주의를 직접 많이 때려잡았다.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이 대표적인 예. 트로츠키가 채 잡아 죽이지 못한 수병반란 생존자들이 후일 트로츠키가 축출될 때 트로츠키의 편을 들은 황당한 일화가 있는데, 이는 소련의 권력층 내에서 어쨌든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비슷한 거라도 실현하려 했던 게 트로츠키였기 때문이다.[54] 트로츠키는 1920년대만 해도 강경한 중공업화론자였고 방식에 따른 차이만 있었다. 트로츠키파의 주요 경제학자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괜히 스탈린의 중공업정책에 감명받아 스탈린파로 전향한 게 아니다.[55] 물론 이들은 대숙청때 전부 죽었다.[56] 실제로 1927년에는 소련-영국 단교로 인해 적백내전 제2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소련 내에 퍼져있었고, 중국 혁명의 실패로 아군이 사라진것 또한 심각한 문제로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실각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57] 관련서적 :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존 루카치 저), "세계사 최대의 전투"(앤드루 나고르스키 저)[58] 러일전쟁은 독일군의 화력교리를 답습한 일본군의 화력주의에 의해 패배한 전쟁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은 엘랑 비탈을 대표로 하는 이 시절까지 남아 있던 백병주의를 화력으로 완전히 눌러버린 전쟁이었다. 특히 1차대전의 동부전선은 양측이 수십년전의 구식 화포까지 긁어 모아 상대방에게 화력을 쏟아부으며 적백내전에서는 기병과 타챤카 등이 훗날의 장갑차, 전차의 역할을 맡아 빠르게 기동하며 화력을 쏟아붓는 양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양상 속에서 신생 소련군의 장교들 역시 기동과 화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투하쳅스키가 요구한 수만대의 전차와 비행기 역시 이러한 양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볼 수 있다. 투하쳅스키를 숙청 했음에도 어쨌든 그 요구를 실현 시킨 것을 보면 최소한 투하쳅스키가 상상한 것의 요점을 파악할 군사적인 안목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59] 다만 러일전쟁 무렵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완공되기 전이어서, 러시아가 본국에서 먼 극동에까지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 어려웠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완공되었다.[60] 이전에도 미국에서 공수부대의 원안이 나오거나 무솔리니, 괴링 등이 시도하긴 했으나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용적이고 제대로 된 공수부대의 시작은 대부분이 소련군으로 인정한다. 물론 소련 공수부대도 매우 시행착오가 많았다. 초기 공수부대는 아예 비행기 기체 날개 위에 매달려 있다가(...) 낙하하기도 했다.[61]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레프 트로츠키와 같은 유대인이다. 그리고 그가 쓴 트로츠키 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악하고 교활한 스탈린이 착한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 암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특기할만 하다. 심지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한 니키타 흐루쇼프도 스탈린의 공업화가 없었으면 소련은 압살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62] <스탈린, 러시아인들의 영원한 우상> 심지어 러시아 공산당은 스탈린이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했을 정도이다.[63] 1위는 노브고로드 대공 알렉산드르 넵스키, 2위는 러시아 제국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 그 외에도 나머지 9명의 명단을 보면 그 결과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단이다. 4위부터 순위대로 알렉산드르 푸시킨,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를 벌였어도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65] <러시아 청년들: 스탈린에는 긍정적, 이민자들은 나가야: 설문조사(Russian youth: Stalin good, migrants must go: poll)>[☆] [67] <스탈린시대 러시아는 존중 받았다>[68] 인민의 행복, 정의, 인권은 물론 올바른 선악 관념까지 팽개치고 철저히 자신의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기준으로 펼친 스탈린의 억압적 철혈 통치를 비판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스탈린과는 반대노선을 달리며 자유주의적 개혁을 한 인물이었다.[69]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07-508p[70] <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의 옹호자들을 비난하다(Medvedev blasts Stalin defenders)>[71] 다만, 메드베데프는 당선 직후 푸틴에게 통수권을 넘겨받으면서 72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남겼는데, 이는 스탈린의 대숙청 직전이던 1936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치 독일 시절부터 통수권 위임식이 시작된 독일에서 만일 총리가 비슷한 전통의 기념 운운한다면 세계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생각하라.[72] 스탈린 장남의 아들로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했던 것. 만약 장남 야코프가 살아있었다면 야코프와 함께 아버지를 디스했을 것이라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스탈린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소송을 제기한것을 보면...(물론 야코프랑 예브게니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그리고 야코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스탈린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이 아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관계가 소원해 보였지만, 둘이 부모자식으로써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주코프에게 비밀리 명령을 하달하고, 아들도 아버지를 위해 적에게 투항해서 편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포로로 살다가 죽은것을 보면 알 수 있다.[73] <스탈린 손자, 조부 명예훼손 소송 패소>[74] <왜 러시아는 여전히 스탈린을 사랑하는가(Why Russia Still Loves Stalin)>[75] 인민들의 삶의 질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한 국력만 따진다면 러시아의 최전성기는 누가 뭐래도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 집권기의 소련이라는 이유다. 비슷한 경우로, 반공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논리로 러시아 제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나마 그 시기가 최소한 러시아 주류에 한해서는 보기 드물게 중산층이란게 형성될 정도로 최소한의 낙수,부의 분배가 됐던 시기이다.[76] <우크라이나 법원, 대기근 제노사이드에 대해 볼셰비키의 죄를 묻다(Ukraine court finds Bolsheviks guilty of Holodomor genocide)>[77] <우크라이나, 스탈린에 비판적인 입장 고수(Ukraine stands by its view of Stalin as villain)>[78]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한 것은 덤이고 심지어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영토를 아제르바이잔에게 멋대로 줘 버리고 아르메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했다.오죽하면 위키백과에 단독 항목이 있다. 그러다 보니 친러 성향이면서도 스탈린을 싫어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결국 이는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79] 스탈린도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회복할 겸 이런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들의 불만을 의식해서 튀르키예를 침략해서 튀르키예 동북부 영토를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게 배분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해보기도 했지만, 겨울전쟁에서의 부진에다가 튀르키예가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국이 되는 바람에 명분을 잃어 없던일로 처리했다.[80] <스탈린을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들(Democrats who love stalin)>[81] <스탈린 닮아서 행복한 사나이>[82] 흐루쇼프가 주요지역의 스탈린 동상을 대부분 철거시켰을 때에도 이 동상만큼은 스탈린에 우호적인 지역민심을 고려해서 특별히 존치를 허락했다.[83] 인지도는 낮지만, 악행의 질은 같이 언급된 독재자들 못지않다.[84] 물론 6.25 전쟁에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스탈린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라는 의견도 많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전쟁 요구를 승인해준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은 미국과의 전쟁을 우려해서 한때 71번이나 남침하는 것을 기각시키는 등 김일성을 말리기는 했고 개입도 중국과 북한의 징징거림에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조종사들을 투입하는 선에서 그친만큼 스탈린보다는 김일성과 모택동의 책임이 더욱 크다. 그러나 이 스탈린 원흉설은 한국에서 좌우 이념 할 것 없이 통용된다.[85] 묘하게 펑더화이와 유사한데, 그쪽은 객관적으로는 명장이자 덕장으로 불리나 하필 6.25 전쟁 당시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덕에 한국인들로부터 평생까임권을 얻어냈다.. 물론 덕장인 펑더화이를 이오시프 스탈린같은 극악한 독재자에 비유하는 것은 그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86] 소련의 경우 공산주의를 표방했으나 좌파 파시즘에 가까운 형태로 왜곡되었고, 대한민국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비자유민주주의권위주의 독재 체제를 오갔다.[87] 다만 박정희가 영향을 받았다는 일본제국(사실상 만주국)의 경제개발 정책 자체가 사실 스탈린의 경제 개발정책을 모방한 것이라, 결론적으로는 박정희의 정책은 스탈린의 영향을 받은 게 맞다.[88] 사실 이들을 제외하면 사법살인 위주로 정적을 탄압하는 독재국가는 스탈린의 영향을 받은 공산화 초기의 동유럽과 이란, 이집트 등 몇몇 이슬람권 국가 정도밖에 없다.[89] 사실 박정희 정권은 당대 세계의 독재정권 중에서는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물론 이는 한국이 유신 이전까지는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유사한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볼 여지도 있다는 것과 유신 시기에는 히틀러, 스탈린마저 기절초풍할 수준의 개막장 독재자들이 세계적으로 판을 치던 상황이란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러나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참고로 박정희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피노체트도 학정의 수위로만 보면 인명 학살 비율의 압도적 차이로 인하여 스탈린보다 온건하다고 여겨진다.[90] 단, 공정하게 평하자면 적어도 스탈린 집권 중기 이후로는 선거를 했더라도 스탈린이 지지받았을 확률이 매우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후진국을 20년 만에 세계 제2의 공업대국으로 만들고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승전한다면 어지간한 민주국가에서도 경쟁자 없이 압도적 지지율로 재선할 테니.[91] 다만, 일부 운동권이 스탈린과 다를 바 없는 독재정권인 북한에 동정적이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서 비판받기도 한다. 다만 이쪽은 북한의 독재체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좌익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북한에 대한 옹호라 조금 결이 다르다. 물론 어느쪽이든 현 북한의 인권 실태를 감안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92] 사회주의 국가이기는 하나, 관료 계급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의미다.[93] 북한의 국영출판사인 조선로동당 출판사에선 스탈린 선집을 1964년에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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