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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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제3대 당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 Martin Bormann | |
본명 | 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Martin Ludwig Bormann |
출생 | 1900년 6월 17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겔레벤 (現 독일 작센안할트주 베겔레벤) | |
사망 | 1945년 5월 2일 (향년 44세)[1] |
나치 독일 베를린 (現 독일 베를린) | |
약력 | 제3대 나치당 장관[2] |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2일 | |
계급 | 돌격대 상급지도자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
정당 | |
신체 | 170cm |
학력 | 농업고등학교 (참전자 혜택으로 조기졸업 처리)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무신론)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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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헤스의 부하로 총통비서(Sekretär des Führers)가 되어서 히틀러의 사생활과 축재를 처리해주고, 히틀러[6]의 즉흥적이고 갑작스러운 지시사항을 문서화하는 일을 맡아하면서 급격히 떠올랐다. 상관이던 헤스의 실각후 히틀러를 대리하여 나치당 운영을 담당했다. 나치 후반기로 가면서 헤르만 괴링이나 하인리히 힘러보다도 더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고, 잠재적 후계자로서 이들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전시에는 나치당만 아니라 정부, 군에까지 개입하여 히틀러 다음으로 권력이 쎘던 인물이다. 다만 직접적인 권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히틀러의 성향을 잘 이용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사안을 히틀러에게 접하기 못하게 중간에서 방해를 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
그러나 나치가 멸망한 베를린 포위전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생존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유골이 발견되었고, 현재는 베를린의 전투 막바지에 총통 벙커를 나와 소련군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유골이 보어만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생존설이 다시 피어났었으나 가족을 통해 유전자 감식으로 보어만의 유골임이 입증되면서 베를린 탈출 중 죽었다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히틀러 나치정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데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진다. 괴링처럼 공식 2인자도 아니고 힘러나 괴벨스에 비하면 언론에 보도가 덜 된 비선이기 때문인 듯.[7]
인지도는 다른 나치 고관들에 비해 밀리지만, 여러 차례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전쟁범죄자이며, 심지어 자유군단 시절엔 살인까지 직접 저지른 악인이었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0년 6월 17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서 집배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18세로 독일 제국군 육군에 지원, 포병연대에서 장교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실전을 겪어본 일 없이 전역 후 부동산 관리인이 되었고, 전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Freikorps)에 가입했다.이후 1924년 루돌프 회스[8]와 함께 자유군단에 있던 "배신자"를 처단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갔다. 이후 1927년 정식으로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당 간부인 발터 부흐의 딸 게르다 부흐와 결혼해서 히틀러를 만났다. 발터 부흐는 전과자 출신인 마르틴 보어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딸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1929년 보어만의 결혼증인을 서 주었고, 이후 보어만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가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나치당이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자, 히틀러의 가신인 보어만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 권력자가 되었다. 그 결과 1933년 10월에는 나치당 전국지휘자(Reichsleiter) 18인 중의 1인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제국의회(Reichstag) 의원이 되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개인 비서로 일함과 동시에 히틀러 개인 재산의 관리업무를 맡으면서 점차 실권을 틀어쥐었다. 무능한 헤스는 음모론에 빠져서 요상한 짓이나 하던 별볼일 없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총통부 내에서 히틀러의 신임은 진작부터 보어만으로 넘어갔다.[9]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보어만[정면사진] |
2.2. 나치 정권의 숨은 실세
왼쪽부터 아돌프 히틀러 퓌러, 한스 라머스 SS대장, 보어만 SS대장이다. |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1941년 5월, 부총통[15]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비행기를 몰고 영국에 착륙하여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하려는 기행을 벌이다가 영국 당국에 체포된 일이 발생하였다.[16] 물론 헤스의 비서였던 보어만도 거기에 가담했던 것으로 의심을 샀는데, 보어만은 그 특유의 순발력으로 의심에서 빨리 벗어났다.[17]
그 후 보어만은 헤스의 기행으로 공석이 된 당의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으며, 결국 이 자리를 노리던 여러 유력인사들(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알베르트 슈페어 등등)과의 복잡한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당의장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보어만은 헤스가 갖고 있던 부총통 자리까지 넘겨 받으려 했지만,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고참당원들이 보어만의 부총통 계승을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보어만은 부총통의 이름을 바꾼, 제국장관(Reichsminister)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4월 12일에는 '총통 비서'의 직위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2인자 권력을 손에 넣게 된 보어만은 니트 생활의 히틀러가 꺼리는 서류작업을 처리하면서 호가호위를 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사실상 자신의 명령을 히틀러의 이름으로 내리게 되었기 때문.
격무에 신경쓰기 싫어하는 히틀러 자신도 성실하게 보이는 보어만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고, 보어만 자신도 아첨에 상당히 능해서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히틀러는 행정에 대해 무능을 뛰어넘어 무관심했다. 히틀러는 엄격한 서류작업보다 순간적인 영감이나 우연히 한 한마디 말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 좋은 의미로 발휘하는 예술가 스타일이었고, 보어만은 히틀러가 혼잣말처럼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기록했다가 그걸 반영했다. 그리고 야행성이었던 히틀러가 아침에 잠자리에 들면 보어만은 그날 히틀러에게 보고할 일과를 자기 생각대로 요약해서 깨어난 히틀러에게 10분여 내로 요약해서 보고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정보와 사고마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그냥 끄덕끄덕이나 '음 좋아.' 한 마디 한 걸 수십 장의 문서로 만들고, 나치당 및 국방군 이하 행정부서에까지 시시콜콜한 지시까지를 내리니 누가 총통인지 모를 지경까지 되었다.
한편 그 와중에도 정적들을 교묘한 수법으로 히틀러에게서 멀어지게 했는데, 가방끈이 짧고 의심이 많은 히틀러를 대신해서 보고서나 언론기사 또는 떠도는 풍문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의심 많은 히틀러의 망상에 맞춰 해석 가공하고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파묻어 버리는 재주를 많이 보였다. 덕분에 나치당은 물론 국방군이나 다른 행정부처에서조차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임은 여전해서 누가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보어만 까면 체제의 적' 드립을 치니 다들 보어만을 뒤에서나 욕할 뿐이었다. 자신도 이런 처지를 아는지 믿을 건 히틀러의 신임뿐이라 (자신이 그랬던 거처럼 잠시라도 누가 자리를 꿰찰까봐) 휴가도 안 가고 히틀러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히틀러의 모든 식사자리에 동석하면서 히틀러에게 아첨하기 위해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금주 흉내를 내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고기와 술을 먹었다고 한다. 악의 성실성이라는 부분이 여지 없이 발휘되는 인물이 보어만인데,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했던 행적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했던 행적을 포함하면 하루를 48시간으로 살았나라는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이 때문에 보어만과 관련해서 수시로 나오는 발언들이 보어만이 잠깐의 짜투리 시간만 생기면 토막잠을 잤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많은 독재자 혹은 그 독재자를 조종하는 실세들은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사소한 것 하나도 자신이 직접 챙기려다 보니 자연적으로 격무에 시달리는 신세를 자초하게 되는데, 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전쟁에 신경쓰는 동안 내치는 모두 보어만이 맡아서 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당시의 보어만을 "실질적인 독일의 지도자"로 보기도 한다.
특히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이후에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정부, 당, 군의 최고 책임자가 참석하는 '3인 위원회'를 만들게 했다. 이 멤버는 정부의 한스 라머스, 군의 빌헬름 카이텔, 당의 보어만으로 이뤄졌다. 라머스와 카이텔은 실권이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였으므로, '3인 위원회'는 보어만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되었다. 이 3인위는 보어만의 야심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어만과 히틀러 후계자리를 경쟁했던 괴링, 힘러, 괴벨스, 슈페어 등과 보어만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이들은 합심하여 보어만과 대결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도 경계했기에, 보어만의 권력은 점점 더 커져갔다.
2.3. 패전과 최후
전쟁 말기의 보어만과 관료, 장군들[18] |
1945년 4월 22일에는 "총통께서는 현재 신경쇠약상태이시니 대신 그대가 지휘를 맡으라"고 괴링에게 무전을 보냈는데, 이것은 보어만이 정적제거를 위해서 취한 함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괴링은 23일, 히틀러에게 지휘권을 요구하다가 히틀러에게 반역죄를 선고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물론 실행할 사람이 없어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 외에 하인리히 힘러가 외국과 협상하고 있다는 내용의 라디오 전파를 히틀러에게 들려주어서 힘러를 실각시킨 것 또한 마르틴 보어만이 한 짓이었다.
그러나 침략해 온 독일군을 역관광시키며 독일로 쳐들어 온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했고(베를린 전투)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보어만도 총통방공호의 쥐새끼 신세였다. 그래도 보어만은 끝까지 히틀러의 옆을 지키며 히틀러의 구두 명령을 공식 명령으로 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히틀러가 자살을 결심하자, 보어만은 괴벨스, 크렙스와 함께 히틀러의 유언장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5월 2일 독일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전날인 5월 1일 밤, 보어만은 히틀러의 유언장 사본을 지참하고 몇몇 나치 인사들과 총통방공호를 나와 탈출을 시도했다.
그 후로 보어만의 행방은 1972년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보어만과 함께 탈출했던 히틀러유겐트 지도자 아르투어 악스만의 증언에 따르면, 도망치는 과정에서 보어만과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슈툼페거[19]가 소련군의 포격에 의해 부상을 당했고 악스만은 그들과 헤어져서 도망치다가 소련군을 마주쳐서 다시 돌아오다가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달빛으로 인해 시신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에, 악스만은 그들이 보어만과 슈툼페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급박한 탈출과정이었기에 확실히 사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어쨌든 이날 이후 살아있는 보어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운명에 대해 여러 설이 나돌았다. 남미로 탈출해서 나치 재건을 꾀한다거나 또는 원래 소련 스파이였기 때문에 소련으로 사라졌다는 풍문도 돌았다.[20] 또 아돌프 아이히만은 보어만은 남미에 살아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연합국뿐만 아니라 후의 서독 정부도 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했으나 그의 행적은 끝내 묘연했다.
그가 궐석한 가운데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다만 궐석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살아있을 경우 변호에 의해 감형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를 달았다.
그러다 1963년에 한 민간인의 새로운 증언이 나왔는데, 종전 직후 소련군이 현 베를린역 근처에서 두 명의 시체를 묻도록 시켰는데 그 중 한명은 국방군 군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명의 유품에서 SS 의사의 신분증이 나왔다는 것이다. 서독 정부는 이 증언과 앞선 악스만의 증언에 의거, 보어만과 슈툼페거의 시신일 거라는 판단 하에 해당 장소에 발굴 작업을 펼쳤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못했다.
이후 시간이 흐른 1972년, 위의 발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철도 공사를 하던 도중 두 유골이 발견되고 치아와 골격 일부를 조사해 보니 각각 보어만과 슈툼페거의 시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두 유골의 치아에 청산가리 캡슐의 흔적인 유리 조각이 발견되었고 특히 하나가 보어만의 치아와 신장, 골격적인 특징, 이마의 상처 부위와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보어만의 친지 중 한 명의 협조 하에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가 진행된 결과 이 유골이 보어만의 것으로 확정되었다. #
이를 종합하면 보어만은 베를린을 빠져나가다가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부상이 심한 상황에서 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의사 슈툼페거와 함께 독약으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소련군이 발견했으나, 그들은 시체가 나치의 주요인사인 보어만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대로 민간인을 시켜 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후에도 유골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근거로는 베를린 전투 당시에는 수십만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매장되었기에 그 속에서 보어만의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며, 대표적인 것으로 뼈에 묻어있던 흙이 유골이 발견된 지역의 흙이 아니라고 하면서,[21] 딴곳에 묻혔다가 이장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다. 또 보어만의 유골 치아에서 발견된 아말감은 전후 치과치료에서 행해진 흔적이기에 인골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DNA검사를 통해 유골이 보어만의 것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고 함께 탈출했던 악스만과 인부의 증언과도 위치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때문에 음모론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 보어만의 유해는, 1999년 네오나치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독일 정부에 의해 화장되어 발트해에 뿌려졌다.
3. 전쟁 범죄
유대인 "절멸"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금지하는 보어만의 명령서. 그가 홀로코스트에 깊게 관여했다는 결정적 증거 중 하나가 되었다.# |
- 1941년, 뉘른베르크 법의 효력을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 지역으로까지 확대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또한 폴란드 총독부에게 폴란드인과 유대인의 '사소한 범죄'에 대해서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 1942년, 반제 회의의 결론을 바탕으로 제정된 법령에 서명을 해 절멸수용소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1943년에는 추가 개정을 통해 아돌프 아이히만과 게슈타포에게 유대인에 대한 최종해결책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 에리히 코흐의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서의 가혹한 통치를 지지하고 권한을 부여했던 자가 바로 마르틴 보어만이었다.
- 국민돌격대를 소집해 자국민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책임자도 마르틴 보어만이었다.
- 그는 사실상 2인자가 된 이후부터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홀로코스트에 관한 직보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사실상 홀로코스트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전부 보어만이 거머쥔 채 그가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4. 기타
-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반기독교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교회를 탄압했고, "나치즘과 교회는 양립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장남인 마르틴 아돌프가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 장남은 아버지에 대해 신이 판단할 문제라며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 다른 나치 고관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 학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폴란드에 있는 슬라브인도 하등인간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노예화하거나 학살하려고 했다.
- 당 간부 및 국방군 상부의 관계자들은 그가 히틀러에게는 굽신거리는 한편 부하나 타 부서 인사들에게는 안하무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였다. 인간성이 좋지 않아 모든 나치 인사들이 싫어할 정도였으며 겉으로 친한 척하다가 뒷통수치는 걸로 유명했다.
- 헤르만 괴링은 그가 어찌나 싫었는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만약 히틀러가 좀 더 빨리 죽어 내가 총통이 되었더라면 가장 먼저 보어만을 제거했을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게다가 히틀러 사무실의 여비서들을 시도 때도 없이 성적으로 건드려서 모든 이들이 역겨워했다.[22] 이러니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 내부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아서 '총통을 고립시킨 문지기', '속을 알 수 없는 가장 악질적인 인물'이라고 병사들이 씹어댈 정도였다.
- 아내 게르다 보어만(1909~1946)[23]과는 사이가 좋았던지 자식을 무려 10명이나 낳았다. 그러나 보어만은 아내 이외에도 애인이 많았기에 게르다가 모든 자식들의 친모는 아니었을 것이라고도 의심받았다. 아내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여배우와 바람 피는 걸 용인시키고 일부다처제에 찬성하게 만드는 요상한 짓을 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의 비서들과도 관계를 가졌고 심지어 애인을 집에 데려와서 부인과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다고. 그런데도 매사에 순종적인 부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다.
- 보어만의 동생이던 알베르트 보어만(1902~1989)도 히틀러의 비서로 일했고, 형과 똑같이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형과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고 한다. 전후에는 로트(Roth)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1949년에 자수하면서 6개월의 노동형을 선고받은 뒤 만기복역으로 출소되었다. 권력의 수준도 형에게 밀렸고 무엇보다도 형과 달리 전쟁범죄에 깊게 가담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도 거부했으며 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형을 깊이 증오했다고 한다. 생전에도 마르틴과 알베르트는 같은 방에 있어도 서로 한 마디도 섞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 패전 후 보어만의 아내와 자식들은 티롤로 탈출했다. 그러나 아내 게르다가 1946년에 암으로 사망해 보어만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 아이들 가운데 장남 마르틴 보어만 2세(Martin Adolf Bormann, 1930~2013)는 우여곡절 끝에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2013년에 세상을 떴다.
- 장남인 마르틴 보어만 2세 외에도 나머지 자식들은 일제(1931~1958), 에렌가르트(1931~1931)[24], 이름가르트(1933~), 루돌프(1934~), 하인리히 휴고(1936~), 에바 우테(1938~), 게르다(1940~), 프레드 하르무르트(1942~), 폴커(1943~1946)가 있으며, 요절한 일제, 에렌가르트, 폴커와 2013년 사망한 장남 마르틴 아돌프를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 히틀러의 여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보어만이 히틀러를 방문하고 잘 지냈던 친절한 폴란드인 부부를 쫓아내 버리려고 하자 융에는 용기를 내어 이를 히틀러에게 알렸고 히틀러는 흥분하면서 보어만을 따로 불러 꾸짖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리고 보어만과 식사를 할 때 '은퇴 후에 원하는 것은 총통에게 하사받은 조용한 시골 농장을 운영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삶'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알베르트 보어만의 모습 |
5. 어록
사랑하는 그대에게, 남자는 여러 여자를 둘 수 있지만 여자는 한 남자만을 섬길 수 있소. 만일 내 뒤에서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이 들키는 날에는 나는 이성을 잃고 당신에게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오.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자신의 새 연인에게 보낸 편지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자신의 새 연인에게 보낸 편지
친애하는 나의 부인, 그녀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남자.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소. 만야도 곧 승낙할거요. 난 참으로 행운아인 것 같소. 두 번이나 결혼하다니 정말로 행복하오. 당신도 축하해주리라 믿겠소.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 노력하리라.
새로운 애인 만야 베렌스를 사귀고 난 뒤 자신의 부인 게르다에게 보낸 편지
새로운 애인 만야 베렌스를 사귀고 난 뒤 자신의 부인 게르다에게 보낸 편지
비록 죽어가는 사자일지라도 마지막 발길질은 매서운 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보어만의 장남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이 안부를 묻는 편지에 답장한 내용
보어만의 장남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이 안부를 묻는 편지에 답장한 내용
죽을 때 까지 충성을 다해 퓌러와 함께 싸울 것이다.
패망 직전 자신의 일기에 적은 글귀
패망 직전 자신의 일기에 적은 글귀
6. 매체에서
일본만화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히틀러 암살을 사주한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히틀러가 발광해서 심복인 자신에게도 독설을 퍼부어대자 열이 받쳐있는 상황이었는데, 히틀러가 후계자로 자기가 아니라 카를 되니츠를 지명하자 히틀러의 비밀이었던 그의 유대인 혈통을 알고 있던 악역 아세틸렌 램프에게 "이 벙커에는 유대인이 한 명 있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라면서 히틀러의 암살을 지시한다. 램프는 막 자살하려던 히틀러를 찾아가 명예롭게 자살하도록 내버려두라는 히틀러를 굳이 총으로 사살한 뒤 자살한 것처럼 꾸며두고 도주한다.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는 바스터즈 부대의 목표 중 하나로 언급된다. 후반부 극장 씬에서 히틀러, 괴벨스 등의 나치 고관대작들과 영화를 보러 왔다가 싸그리 끔살 당한다.
”힘러 저 거만한 녀석...“
영화 다운폴에서는 그 유명한 히틀러의 분노 장면에서 뒷짐을 지고 말없이 괴벨스 옆에 서있는 남성으로 등장한다. 사실 영화 전반에 걸쳐 방공호에 계속 있었던 나치 고관인데도 존재감이 없어, 특히 두드러지는 장면은 괴링의 전보를 히틀러에게 전달하면서 괴링이 배신한 것이라고 꼬드기는 장면, 그리고 슈페어가 히틀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방공호에 찾아왔을 때 슈페어에게 히틀러가 베를린에 남지 않고 탈출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 뿐이다.#[25] 이후 방공호 거주자들이 소련군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려고 출발하기 직전 불안한 얼굴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장면을 끝으로[26] 작중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단편집 '솔저 블루'에서는 베를린을 탈출한 후 아르헨티나 정부와 교섭하여 아르헨티나의 벨트너-555라는 비밀 구역에서 네오나치 군대를 거느리고 전 세계에 분쟁을 조장하는 흑막으로 암약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주인공 솔저 블루 3인이 그를 암살하러 잠입하나... 보어만은 다 죽어가는 노인네 신세였고 모든 흑막은 히틀러의 정신을 옮겨담은 슈퍼컴퓨터 히틀러 2세였다. 보어만은 주인공에게 제발 자기를 죽여달라고 애원하여 죽임을 당하고, 히틀러 2세도 주인공이 폭파시켜 버린다.
필립 K. 딕의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뒤를 이어서 제3제국의 제2대 총통이 된다.[27]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고 만다. 사실 작품 초반부에 걸쳐서 마르틴 보어만 총통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계속해서 나온다. 마르틴 보어만이 사망하게 되면서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28],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등이 총통의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승자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
왼쪽부터 마르틴 보어만, 요제프 멩겔레, 하인츠 골드풋, 그리고 기타 쌍십자당 장교 순이다. |
DC 코믹스에서는 전쟁 이후 남미로 도피하여 제3라이히의 부활을 위해 워싱턴에 독가스 폭탄을 떨어뜨릴 준비를 하나, 남미의 거점에서 배트맨과 싸우던 중 충격으로 탑승하려던 항공기가 폭발하여 사망한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정치력 15%를 추가하는 정치고문으로 나온다.[29] 루돌프 헤스가 보어만과 동일한 효과에 공군 생산에도 보너스를 주기에 성능 자체는 보어만이 딸리지만 루돌프 헤스는 중간에 영국 가다가 체포돼서 못 쓰게 되기에 공군이 안 중요하다면 보어만이 낫다.
위 게임의 나치독일이 승리한 대체역사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 에서는 독일 보수파의 대표 인물으로 총통이 되면 각종 문제로 폐허가 된 나치 독일을 조금씩 보수해나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겉으로만 해결할 뿐 실질적으로는 하나도 해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최후에는 권력 장악에만 열을 올리다가 끝내는 나라를 지탱하던 사람들까지 숙청해버리고 나치 독일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 때문에 플레이어들에게는 사실 슬라브인이라 나치 독일을 사보타주 하는게 아니냐며 보르만스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어있다.
블러드 플러스에서는 디바의 슈발리에로 나온다. 마르틴 보르먼 문서 참고.
[1] 1970년대까지는 정확한 사망일자가 불명이었으나, 이후 유골이 발견되고, 이 위치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부합함이 알려졌기 때문에 괴벨스가 자살한 다음날인 5월 2일 새벽에 사망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2] Parteiminister; 직역하면 당 장관이며, 실제로는 당수를 일컫는 말이다. 당을 내각 부처처럼 취급하는 나치 독일의 일당 독재를 느낄 수 있는 명칭. 이 당 장관이라는 표현은 히틀러의 유언장에서 자신의 퓌러 직책을 이전처럼 국가대통령(Reichspräsident), 국가총리(Reichskanzler), 당수(Parteiminister)로 다시 나누며 나타난 표현이다. 나치당의 당수직 명칭은 독일 노동자당 시기부터 드렉슬러 시기까지는 의장(Vorsitzender), 히틀러 시기에는 잘 알려진 퓌러(Führer), 보어만 시기에는 당 장관(Parteiminister)이었다.[3] Parteikanzlei, 영어로는 Party Chancellery, 부총통으로 번역되기도 한다.[4] The Brown Eminence. 바로 위 사진에도 나와있듯이 언제나 갈색 제복만 입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으로,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 막후에서 권력의 실세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의 별명이었던 The Red Eminence를 풍자한 것이다. 실제로 말년의 히틀러는 보어만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들을 정도로 그의 말에 휘둘렸다.[5] 아예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 자에 대해 나치의 라스푸틴이라는 명칭을 붙였다.[6] 원래 좀 괴팍하고 니트적인 성격이라 공식적인 문서로 행정을 지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7]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톰 크루즈가 히틀러한테 가서 발키리 작전에 대해 결제를 받으려고 할 때 히틀러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5명 있었다. 괴벨스, 힘러, 괴링, 카이텔은 알아보더라도 갈색 제복 입은 사람은 '엥? 누구지? 엑스트라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정도로 인지도가 없는 '비공식 실세'가 마르틴 보어만이었다.[8] 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 되는 인물이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와는 다른 인물.[9] 이는 헤스의 굉장히 독특한 성향에 기인한 바도 크다. 일례로 헤스는 히틀러와 측근들의 점심식사 때에 자신만의 음식을 들고오다가 히틀러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히틀러는 총통관저의 음식을 같이 들기를 권했는데 헤스가 우주의 기운이 담겼다는 이유로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따로 먹기를 고집하자 그럴 거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헤스에 대해서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보어만을 통해서 헤스의 일에 간섭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신임은 진작부터 보어만으로 넘어가 있었다.[정면사진]
[11] 해외까지 고려하면 수백만부가 더 팔렸다.[12] 1942년부터 히틀러의 타자수로 일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에바 브라운이 같은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13] 보어만은 에바 브라운을 '마님' 모시는 돌쇠처럼 모셨지만, 정작 브라운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보어만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보어만 역시 에바 브라운을 현실감각이 없다고 사석에서 비웃었지만, 둘 다 서로 받아먹을 건 사양 않고 다 받았다.[14] 독일 공영방송 ARD에서 <히틀러의 재산>(Hitler's Money)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여기에 이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2014년에는 스위스 비밀계좌에 히틀러 비자금 6조원이 숨겨져 있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히틀러, 현재 가치 6조원 스위스 은행에 은닉”.[15] 부총통이라고 해서 별다른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치당 내에서만 총통의 대리인일 뿐이고 그마저도 진작부터 실권이 없었다.[16] 헤스는 자신이 영국과 평화협정을 성사시키면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히틀러의 승인없이 영국으로 Bf110을 타고 갔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17] 실제로 1941년 5월 11일 10시 경에 루돌프 헤스의 부관 두 명이 히틀러가 머물고 있던 오바잘츠베르크의 대기실로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즉시 히틀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때 그들은 히틀러에게 전하는 그의 상관 루돌프 헤스의 편지를 갖고 있었다. 그 두 명의 부관을 들어가게 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슈페어가 증언하기를 그때 문 너머에서 갑자기 신경질적인 절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남겨놓은 편지로 정황을 파악한 히틀러는 굉장히 분노했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헤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사형시키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때 히틀러는 그의 측근을 불러서 "보어만을 불러들여! 보어만은 어디있는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보어만을 찾았는데, 몇 분 뒤에 보어만은 비행기를 타고 사라져버린 루돌프 헤스를 비판하며 자신의 상관에 대해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어댐으로써 자신은 헤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항변하는 데 성공했다.[18] 맨 왼쪽부터 친위대 여단지도자 베르너 나우만, 발터 풍크(나우만과 괴벨스 사이에서 보인다), 요제프 괴벨스,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보어만,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이다.[19] 히틀러의 자살 직전, 총통 벙커에 남아있던 인물들에게, 히틀러의 명령으로 자살용 독약을 지급한 사람이다.[20] 독일군의 소련정보 전문가이자 서독 시절 정보국장을 역임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보어만은 소련 스파이가 확실하며, 그가 전후에 소련에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자기 회고록에 남겼다. #[21]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노란 모래흙인데 뼈에 묻어있던 흙은 붉은 진흙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2] 괴링도 약물중독 등으로 인해 당 내에서 평판이 안 좋기는 했지만 힘러와는 친했고, 사별한 전 아내나 재혼한 아내 모두에게 잘 대하는 것 자체는 모두 인정하였다.[23] 나치당 최고징계위 의장이었던 발터 부흐(1883~1949)의 장녀였다. 할아버지는 바덴고등법원 참사의장이었던 헤르만 부흐였으니, 나름 명문가에서 태어난 여자였다.[24] 일제와 쌍둥이다.[25] 이때 슈페어는 대꾸 한마디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다. 대부분의 나치 고위 인사들과 최소 원만한 관계는 유지했던 슈페어조차 보어만만큼은 혐오했다는 사실의 고증인 듯.[26] 사실 그도 잠깐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괴벨스가 중도에 말을 끊는다. 괴벨스도 보어만을 싫어했다는 것을 반영한 고증인 셈.[27] 초대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매독과 치매로 인해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28] 원래 역사에서는 1943년에 암살 당했지만, 이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암살을 모면하고 살아남았으며 하인리히 힘러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29] 정치력 15%를 추가하는 '조용한 일꾼' 특성을 가지고 있다.
[11] 해외까지 고려하면 수백만부가 더 팔렸다.[12] 1942년부터 히틀러의 타자수로 일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에바 브라운이 같은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13] 보어만은 에바 브라운을 '마님' 모시는 돌쇠처럼 모셨지만, 정작 브라운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보어만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보어만 역시 에바 브라운을 현실감각이 없다고 사석에서 비웃었지만, 둘 다 서로 받아먹을 건 사양 않고 다 받았다.[14] 독일 공영방송 ARD에서 <히틀러의 재산>(Hitler's Money)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여기에 이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2014년에는 스위스 비밀계좌에 히틀러 비자금 6조원이 숨겨져 있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히틀러, 현재 가치 6조원 스위스 은행에 은닉”.[15] 부총통이라고 해서 별다른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치당 내에서만 총통의 대리인일 뿐이고 그마저도 진작부터 실권이 없었다.[16] 헤스는 자신이 영국과 평화협정을 성사시키면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히틀러의 승인없이 영국으로 Bf110을 타고 갔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17] 실제로 1941년 5월 11일 10시 경에 루돌프 헤스의 부관 두 명이 히틀러가 머물고 있던 오바잘츠베르크의 대기실로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즉시 히틀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때 그들은 히틀러에게 전하는 그의 상관 루돌프 헤스의 편지를 갖고 있었다. 그 두 명의 부관을 들어가게 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슈페어가 증언하기를 그때 문 너머에서 갑자기 신경질적인 절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남겨놓은 편지로 정황을 파악한 히틀러는 굉장히 분노했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헤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사형시키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때 히틀러는 그의 측근을 불러서 "보어만을 불러들여! 보어만은 어디있는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보어만을 찾았는데, 몇 분 뒤에 보어만은 비행기를 타고 사라져버린 루돌프 헤스를 비판하며 자신의 상관에 대해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어댐으로써 자신은 헤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항변하는 데 성공했다.[18] 맨 왼쪽부터 친위대 여단지도자 베르너 나우만, 발터 풍크(나우만과 괴벨스 사이에서 보인다), 요제프 괴벨스,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보어만,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이다.[19] 히틀러의 자살 직전, 총통 벙커에 남아있던 인물들에게, 히틀러의 명령으로 자살용 독약을 지급한 사람이다.[20] 독일군의 소련정보 전문가이자 서독 시절 정보국장을 역임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보어만은 소련 스파이가 확실하며, 그가 전후에 소련에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자기 회고록에 남겼다. #[21]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노란 모래흙인데 뼈에 묻어있던 흙은 붉은 진흙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2] 괴링도 약물중독 등으로 인해 당 내에서 평판이 안 좋기는 했지만 힘러와는 친했고, 사별한 전 아내나 재혼한 아내 모두에게 잘 대하는 것 자체는 모두 인정하였다.[23] 나치당 최고징계위 의장이었던 발터 부흐(1883~1949)의 장녀였다. 할아버지는 바덴고등법원 참사의장이었던 헤르만 부흐였으니, 나름 명문가에서 태어난 여자였다.[24] 일제와 쌍둥이다.[25] 이때 슈페어는 대꾸 한마디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다. 대부분의 나치 고위 인사들과 최소 원만한 관계는 유지했던 슈페어조차 보어만만큼은 혐오했다는 사실의 고증인 듯.[26] 사실 그도 잠깐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괴벨스가 중도에 말을 끊는다. 괴벨스도 보어만을 싫어했다는 것을 반영한 고증인 셈.[27] 초대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매독과 치매로 인해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28] 원래 역사에서는 1943년에 암살 당했지만, 이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암살을 모면하고 살아남았으며 하인리히 힘러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29] 정치력 15%를 추가하는 '조용한 일꾼' 특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