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선장 이준석 | |
<colbgcolor=#000000><colcolor=#ff0> | |
출생 | 1945년 11월 12일 ([age(1945-11-12)]세) |
경상북도 칠곡군[1] | |
직업 | 前 선장 |
범죄 | 업무상과실선박매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선박 선원법 위반 해양환경관리법 위반 |
신분 | 기결수 (2015년 11월 12일 ~) |
형량 | 무기징역 |
현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순천교도소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前) 선장.청해진해운 소속으로 세월호의 선장이었으나 현재는 세월호 참사의 주범으로 1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미필적 고의 및 부작위[2]에 의한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는 대형 인명 사고의 책임자가 부작위범으로서 살인죄를 적용받은 최초의 판례로서 이후의 인명사고에 대한 법 적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의미 있는 판결이라 할 수 있다.
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전
1945년 11월 12일[3][4]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으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과거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 및 방송 출연 그리고 기자의 취재 결과 드러난 바에 따르면 20대에 선원 생활을 시작해 32세였던 1977년에 외항선 선원이 됐고 17년간 외항선을 탄 뒤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다시 20년간 근무했다. 2004년 제주투데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선원이 되어 처음으로 탔던 원목선이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복되어 일본 항공자위대 헬기에 구조되었다고 한다. 그때 구조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경력 30년의 베테랑 선장으로서 알려져 2010년에 OBS에서 출연한 방송분에서[5] 말했다.그를 아는 주변인 또는 뱃사람들은 뱃사람치고는 몰개성하고 눈에 띄는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했으며 청해진해운 전 직원에 따르면 윗사람 지시에 토를 달지 않는 예스맨이었을 거라고 한다.[6]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물이지만 도덕적인 판단력의 부재가 각종 시스템의 부재와 함께 더 큰 화를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청해진해운 오하마나 호에서 1등 항해사로 근무하던 2011년 4월 6일 기관실 고장으로 배가 표류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430명을 포함한 승객 648명이 5시간 동안 정전된 배 안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이때도 상황을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만을 내렸던 것으로 알려졌다.[7] 회항 이후 그 어떤 징계조치도 받지 않았으며 사고 직후인 8일에는 오히려 해당 여객선의 선장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 기사
3.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의 행적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본 선장이 아닌 대리땜빵 선장으로 알려졌으나 세월호의 전신인 나미노우에마루를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 한국으로 몰고 온 게 바로 그이며 6개월간 초대 선장으로 근무하기로 했다. 사고 당시의 본 선장인 신보식은 이후 입사하여 인수인계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대리선장이라곤 하지만 직능상 배 자체에 서툰 것은 아니며 청해진해운 소속의 다른 배인 오하마나호에서도 본 선장 부재시 대리 선장으로서 근무했다.세월호 사고 당시 본래 선장이었던 신보식이 휴가를 내면서 대리 선장으로 세월호를 운항하였는데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면서 3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수장시킨 희대의 살인마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주 기초적이고 간단한 퇴선 명령, 그러니까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으니 얼른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서 탈출하세요" 이 한 마디만 했어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받았겠지만 지금처럼 희대의 살인마 취급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배가 뒤집히는 와중에도 안내방송은 '그냥 제자리에 있으세요'의 반복이었다. 차라리 방송을 안 했더라면 다수의 승객이 살기 위해 알아서 탈출하기라도 했을 것이고 방송을 제대로 했더라면 거의 모든 승객이 탈출해 구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수온은 약 12도로,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면 6시간 가량 버틸 수 있는 온도였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가상 탈출 시뮬레이터를 돌렸는데 탈출 명령을 내렸다면 아무리 최악의 가정을 해도 최소한 90% 이상의 승객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결과들이 나왔다. 심지어 몇몇의 예측 모델에 따르면 전원 생존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한다.
탈출하는 이준석 선장 |
게다가 배의 최고책임자인 선장으로서 주의 및 보조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출항시 안개로 인한 출발 지연으로 평소 1등 항해사가 운항하는 구간인 맹골수도 지역[8]을 항해사 경력이 이제 겨우 1년이 채 되지 않은 신참 항해사 박한결(3등 항해사, 女)에게 맡겨 놓고 잠들어 선장으로서 책무가 소홀했다.[9] 게다가 조타수(오용석 55, 男)는 전에도 급선회로 사고를 낼 뻔한 실수를 저질렀고 다른 선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정규 선장인 신씨가 주시하던 인물이었는데 결국 잠재적 위험 구간을 이 두 사람에게 맡겨 버린 선장의 무관심과 방기는 사고 원인 제공과 그 크기를 확대시킨 원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본디 선장은 유사시 마지막까지 선박을 지키며 배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내리는 것이 선박 승무원은 물론 일반인도 다 알고 있는 상식인데 그는 세월호에서 1호로 탈출하여 전 국민의 분노를 산 데다 탈출 시 팬티 차림으로 구조되는 모습이 영상에 찍혀 전국에 방송되어 망신을 당했다.[10] 게다가 구조 후에는 동료들과 싸우는 모습, 자신은 일반 승무원이라고 하며 선장임을 부인하는 모습이 기사화되어 책임자로서 무능력한 모습이 드러나며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세월호에서 구조되었을 때 인터뷰를 했는데 상태가 상태인지라 사고 당시 음주 상태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돈 말리는 장면을 목격한 당시 의사도 불그스름한 얼굴빛 등으로 미루어 음주 상태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한 바 있다. 나중에 음주 측정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없었다고 하는데 꽤 시간이 흐른 뒤에 한 측정이다. 음주 의혹 제기 후에 과거 행적을 확인해 보니 2008년에 술판을 벌여 유병언으로부터 직접 감봉 조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11]
한편 탈출 중 부상 당해 쓰러져 있는 조리원 2명과 마주쳤는데 이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무시하고 장애물 뛰어넘듯 지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 조리원 2명은 실종 상태였다가 결국 조리원 중 1명인 김모씨가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으로 인해 검찰에서는 살인 혐의의 적용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했는데 직접적인 고의성이 너무나 짙은 행태였기 때문이다. 기관장 박씨는 "조리원들까지 어떻게 신경 쓰느냐"며 해경 보트에 올라탔다고 한다.[12]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합동수사본부의 심문 결과 이준석을 위시한 그 일당이 제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어 신분을 위장한 것은 해양경찰이 퇴선을 허락하지 않고 배에 남아있으라고 할까봐, 즉 구조 순위에 밀릴까봐였다고 한다. 결국 옷 갈아입을 시간은 있었고 승객들 구조에 쓸 시간은 1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선원이라서 구조 순위에 밀리는 건 그렇다 쳐도 역시 승객이 몰려나와 혼잡해져서 탈출할 시간이 없을까봐 퇴선 방송을 하지 않았던 고의성도 있다. 방송 기기를 잘못 다뤄 고장난 것으로 오인해 알리지 못했다고 진술했으나 선원 한 사람이 한 번만 시도해 보고 다른 선원들은 재차 시도하지 않은 것도 역시나 고의성을 입증한다.
이들은 탈출 순간에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 했다며 합수부 조사에서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13] 하지만 그렇게 애꿎은 학생들의 목숨을 담보로 생존했어도 전국민의 맹비난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게 생겼으니 결국 생존을 위했던 판단으로 인해 안 살아남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4. 재판에서의 행적
2014년 6월 10일에 광주지법에서 첫 공판이 벌어졌다.
그는 국선변호인을 쓰는 대신 5월 20일 서울에서 사선변호인을 선임했다. # 그러나 사선변호인은 5월 23일자로 사임했으며 3등 항해사 박 씨의 사선변호인도 사임했다. 철저히 변호인 입장에서의 이해 관계만 생각해도 득이 없는데 그다지 동정의 여지도 없고 거액의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승소 확률은 매우 낮으며 승소하면 국민한테 욕을 먹고 패소하면 자기 경력에 손상이 간다. 이로써 15인의 피고인 중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광주지방법원에서 배정한 국선변호인 6명이 나누어 맡게 되었다. 이후 3등 항해사 박 씨의 가족이 변호인선임계를 추가로 제출하였으나 새로 선정된 변호인도 재차 사임계를 제출하였다.
6월 10일 첫 재판에서는 예상대로 국선변호인을 통해 자신에게 적용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이(살인죄 성립 여부)는 이 재판에서의 핵심 쟁점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된 반응이었으나 문제는 "부상을 입었지만 (자기는) 구조 활동 조치를 다 했고 조타실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했다"[14]면서 자기는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15]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 자기는 5박 6일짜리 임시 선장이라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으며 구조는 해경 몫이라며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16]
사실 변호인이 진짜 피고인을 위한다면 미필적 고의 살인 혐의 부분에 대해서만 다투고 나머지는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식으로 나갈 텐데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처럼 보인 듯도 하다. 그는 재판 중 내내 쏟아지는 유가족들의 시선과 얼굴을 보여 달라는 요구가 부담스러웠는지 변호인을 방패 삼아 몸을 숨겼다고 한다. # 그런데 재판을 하는 와중에 졸리다면서 잤다.
2014년 6월 27일의 JTBC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가 대형 참사로 이어진 가장 직접적 원인인 안내 방송 대기 지시를 그가 두 번에 걸쳐 2등 항해사에게 직접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 퇴선 명령도 내렸다고 주장했는데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전에는 1등 항해사가 실세여서 당시 지휘는 1항사가 맡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산지원에서 열린 공판에서는 사고 당시 조타실에 있던 필리핀인 부부의 증언에 따라서 긴급 상황에 대한 지시 및 대처를 묻는 다른 선원들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못 한 채 봉대만 잡고 앉았다 일어서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고 8월 12일 증인으로 나온 123정의 당시 출동 해경은 (선장인지 누군지 몰랐던) 그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 '빠져나오는 데는 동작이 빨랐다'고 증언했다.
결국 2014년 10월 27일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관련 기사
그러나 1심에서는 살인죄를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살인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고 나머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36년을 선고하였으며 검찰은 재판을 다시 받겠다며 항소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피고인도 형량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일단 2심에서는 살인죄를 인정했지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라고 판단하여 사형에서 형량을 한 등급 내려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나머지 승조원들은 그 책임이 크지 않다고 하여 징역 1년 6개월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되어 전원 상고 기각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판결문 전문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해당 판결문에서(관련 기사) "승객 등의 구조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선장으로서, 퇴선 명령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선내 대기 상태에 있는 승객 등의 사망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인명구조를 위한 조치를 지휘·통제할 수 있는 법률상·사실상 유일한 권한을 가진 지위에 있었다"고 한 뒤 "승객들이 익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내버려둔 채 먼저 퇴선한 것은 선장의 역할을 의식적이고 전면적으로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씨의 부작위는 작위에 의한 살인의 실행 행위와 동등한 법적 가치가 있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 선장이 적절한 구조 조치나 퇴선 지시 없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빠져나간 것은 변명의 여지 없이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며 그 중에서도 고의적인 살인과 동급의 악질 범죄라는 것을 대법원에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판례는 앞으로 선장이 선박 사고시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못박은 것에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5. 구형에 관하여
2014년에 세월호의 전말이 알려진 후 분노한 전 국민의 증오와 원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선장이라는 대표성 때문에 언론과 인터뷰했던 비번 조타수 한 명을 제외하면 얼굴과 이름이 모두 노출된 유일한 인물이다. 검찰에서는 이들에게 각각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해양 인명사고에 대해 살인죄로 기소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엄청난 법정 공방이 예상되었다.재판 이전 단계에서 검찰이 그에게 적용했던 혐의는 다음과 같다. 해양환경관리법 위반, 수난구호법 위반(도주시 특가법에 따라 가중처벌), 업무상 과실치사상, 선원법 위반, 업무상 과실선박매몰죄 등이 적용되었으나 탈출 지시를 고의로 방치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유기치사, (부작위 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적용도 검토했다. 결국 살인죄를 적용한다고 한다. # 사안의 중대성 및 국민 감정의 격앙 등으로 적용 가능한 법률의 최고형을 선고 받고 남은 생은 교도소에서 마감할 확률이 높아졌다. 사실 그 편이 본인의 신상에도 안전하다. 만약 출소 등으로 사회에 있었으면 보복을 당하거나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사회적 매장을 당하고 얼굴조차 못 들고 다닐 확률이 더 높다.[17]
선장은 바지이고 1등 항해사 또는 정규직인 기관장이 실세였다거나 오너의 명령이 없으면 자기 판단을 할 수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서 그에게만 비판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것은 가혹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선장은 법적으로 배의 최고 책임자이고 비상시 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한다는 건 법적 의무 이전에 도의적 상식에 속하며 게다가 재판 결과를 봐도 그가 일을 주도했음은 명백하다.[18] 재발 방지와 국민 정서를 위해서라도 법정 최고형은 피하기 힘들어졌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과 사실상 다를 것이 없는 징역 36년[19]을 선고했는데 이는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무거운 처벌이다.[20]
2심에서는 살인죄 등 검찰이 요구한 혐의를 대체로 인정하긴 했으나 무기징역을 선고했는데 그가 승객들을 죽일 직접적 고의가 전혀 없었고 단지 퇴선 방송 없이 도망간 비겁자로서 그 결과가 승객들의 사망으로 이어졌을 뿐 흉악 범죄자는 절대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선고 가능한 최고형을 때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21][22]
법 질서에 관한 논의는 그에 대한 설명을 벗어나므로 국민정서법 문서 참조.
즉, 사형 구형이라는 법적인 처벌 자체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사건에서 보여준 비도덕적인 모습으로부터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앞으로의 과실 방지를 위한 교훈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이준석 外 선박 직원들이 외면한 수많은 목숨, 사건 이후에 보여준 모습을 보면 사형 따위로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희생자와 유족들의 참담함은 물론 한국 사회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은 셈이다.
대법원 판결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甲이 이준석이다.
6. 세월호의 원래 선장은?
세월호 선장이 그로 알려져 있지만 세월호를 원래부터 운항했던 담당 선장은 그가 아니라 신보식이라는 사람이었다. 원래는 사고 당시에도 세월호를 운항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사고 전에 개인적인 사유로 휴가를 가는 바람에 그에게 세월호 직무 대리를 승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신씨도 세월호의 무리한 개조 때문에 더 이상 배를 운항하기 어려웠다고 신씨의 부인이 대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신씨가 배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세월호 사고와 무관하지는 않다. 신씨는 세월호가 지난 1년간 139번 불법 과적을 할 때 단 한 번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내부고발자에 대해 한국 경찰이 얼마나 보호를 빈약하게 하는지, 그리고 내부의 비리를 비판하지만 막상 내부고발자가 나오면 비난하는 모순적인 사회상을 고려하면 이는 비판하기도 어려우며 실제로 고발했더라도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벌금형으로 끝내고 애먼 선장만 실직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따지고 보면 신씨가 내부고발을 안 한 것도 아닌데 경찰 신고는 아니더라도 관계자에게 이미 이 일을 말했다. # 관행처럼 굳어진 비리를 선장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뜯어고치기는 매우 어렵다.
이는 사실상 체계의 문제다. 수익성을 위한 불법 개조 및 과적을 행한 회사와 이를 묵인한 해수부 마피아를 비롯한 정부 기관의 책임이 가장 크다.[23] 그러나 검찰은 원래 선장 신씨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주요 혐의는 안전교육 등의 미실시와 과적, 부실고박 등의 방치 등이다. 세월호 사고가 세월호 사태라고 부를 만큼 커다란 재앙이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이 있다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러 차례 배의 복원성 문제 등을 경고했음에도 사측에서 묵살당한 면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특히 신씨는 배를 사 온 그대로 운행해야지 왜 개조를 하냐며 강하게 따졌으나 청해진 해운측에서 "너 자꾸 그딴 소리 떠들면 해고한다"고 윽박을 지르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세월호의 운항을 거부했다.
신씨는 법정에서 여러 번 배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묵살당했고 회사 방침에 따르지 않으면 해고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실정이었다고 증언했으며[24] 이준석과 서로 진짜 선장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다만 실질적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희생자들을 외면하여 실질적인 피해를 만들어낸 그에 비하면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
결국 피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점과 어떻게든 세월호를 정상적으로 운항하려고 노력한 의지가 정상 참작되어서인지 신 선장은 금고 2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는데 이는 세월호 사고에 연루된 사람 중 유일하게 실형을 선고받지 않은 것이다. 한편 세월호의 선주를 맡은 김한식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되었다.
7. 논란
7.1. 살인죄 인정 여부
법 집행에 관한 원칙 혹은 법학적 해석과 국민의 법 감정은 자주 충돌하는데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서도 관련 공무원, 건설사 중 어느 한쪽에 책임을 전적으로 묻기가 어려웠다는 이유로 법원에서는 과실범의 공동정범이란 죄목을 동원하여 이들을 모조리 처벌했다. 이는 해당 문서에 서술된 대로 법적 해석의 부분에서 논란이 있긴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측도 당시 국민의 법 감정상 충분히 이해는 가능하고 다만 좀 더 치밀한 법적 논리를 적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정도였다. 실제로 살인자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측에서도 그에 대해선 배를 몰 자세는커녕 마음가짐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작자라는 데에는 이견을 내놓지 않으며 그런 인간이 배를 몰고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앞장서서 도망을 친 결과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희생해야만 했다.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등 본인의 손으로 직접 사람의 목숨을 끊어야만 살인죄가 성립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확정적 고의범만이 아닌 작위 의무가 있는 부진정부작위에 의한 미필적 고의범은 형법상 당연히 인정되는 결과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형법에서나 당연히 인정되는 것이다. 선장에게는 승객을 구조해야 할 법적 작위 의무가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선장이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살인범'이 당연하다. 실제로 특가법 상 유기도주치사죄의 도입 취지도 이것과 같다. 악용이고 자시고 현대 형법상 이 점을 부정하는 국가는 없다.
위 문단에서는 도망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선례가 전세계적으로 희박하다고 하는데 당장 세월호 사고로부터 2년 전에 일어난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 당시의 선장 프란체스코 스케티노도 그와 똑같이 살인죄가 인정(합계 16년의 형량 중 살인죄로 인정받은 게 5년)되어 실형을 받았다. 1심에서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도망자라서가 아니라 2등 항해사에게 승객을 퇴선시키라고 지시했던 점을 인정해[25] 미필적 고의까지는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고 상고심에서 살인죄를 인정한 것은 '퇴선 명령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없고 있었다 해도 이에 수반한 퇴선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형법 제18조에는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세월호의 총책임자로서 사고 원인을 제공했으며 여객선 선장은 승객들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면 안 된다는 선원법에 명시된 의무도 어겼다. 판례 역시 "이 선장은 승선 경험이 풍부한 선장으로 자신의 명령에 따라 대기 중인 승객들이 익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선실에 대기하도록 내버려둔 채 먼저 퇴선했다."고 판시했으며 '이 선장의 부작위는 작위에 의한 살인의 실행 행위와 동등한 법적 가치가 있다'고 판시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오마이뉴스에서는 이상한 기사가 나왔는데 요지는 참사에 도의적 책임 혹은 늑장 대처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정부의 몫까지 사주(社主) 및 실무 책임자에게 떠넘기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기사의 저자는 송경동 시인으로 과거 용접공으로 일했던 경력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 사고로 죽을 뻔했던 경험담을 세월호 사건과 엮어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이다. 그러나 법에 무지한 일반인이 되는 대로 쓴 글일 뿐이다. 용접공에게는 사고 발생 시 동료 용접공을 구해야 할 작위의무가 없다. 설령 동료의 위험을 못 본 체 하고 도망치더라도 도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살인죄가 적용되진 않는다.
이 기사를 알기 쉽게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밥을 안 줘서 굶겨 죽인 사건[26]을 보고 나도 소말리아 아이들이 굶어죽는 걸 못 본 척 했으니 무엇이 다르냐, 처벌하지 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기사에서는 '나와 이준석 선장은 무엇이 다를까'라고 묻는데 한 마디로 답할 수 있다. 법적으로 보증인적 지위가 있냐 없느냐의 차이다. 책임을 질 정부의 몫은 정부가 따로 책임질 일이고 선장이 저지른 일은 선장이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송 씨의 글은 세월호 참사 생존자들에게 심각한 모욕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승객 신분으로 선장의 무책임 때문에 생명의 위기를 겪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게 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이나 (특히 생존 학생의 경우) 수많은 친구들을 잃었는데 송 씨가 용접공 시절 하마터면 동료를 잃을 뻔했던 자신의 상황을 선의의 피해자인 참사 생존자들이 아니라 책임을 저버린 총책임자인 그의 상황에 빗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8. 여담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래 왔듯 전국의 수많은 동명이인 이준석들이 피해를 보았다. 이준석은 흔한 이름이라서[27] 당시 개명 신청이 엄청나게 속출했다고 한다.기독교복음침례회[28]의 신도라며 당시 이 선장 및 승무원들 상당수가 구원파로 구원파의 교리로 인해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기독교복음침례회 쪽은 기자회견을 통해 침례 여부와 십일조 여부를 사례로 들어 교인이 아니라고 부인했고(정정보도) 당시 승객을 먼저 대피시키다가 사망한 승무원과 승객을 구하다가 의식 불명 상태로 구조된 직원만이 구원파 신도였으며 언론에 보도되었던 교리들도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져 추후에 정정보도된 적이 있다. 정정보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날이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날과 딱 하루 차이났는데 선원들과 승객들을 지휘하면서 배에서 끝까지 남아 최후를 맞이한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의 대표적 사례인 RMS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 비교당했으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영향으로 인해 이후부터는 4월 15일에 타이타닉 영화를 방송에 내보내지 않게 되었다.
20여 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때는 선장이 최후까지 배에 남아 있다가 숨진 채로 발견되었던 것과 비교되어 더 비판을 받았다.[29]
역시 20년 전 1994년 대한항공 20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때 기장, 부기장이 먼저 퀵으로 튀었다. 물론 이쪽은 사망자가 없었지만 기장과 부기장이 튀었다는 점에서 이 작자의 행적과 같다. 그래도 이쪽은 화재를 대비해 안내방송도 했고 탈출 슬라이드를 열고서 승무원들에게 승객들을 대피시키라는 지시는 하고 튀었다. 비록 맨 먼저 튀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피 후 곧바로 비행기가 폭발했으니 조종사들도 위험했던 건 마찬가지다.
2014년 9월 30일 신안군 홍도 유람선이 좌초되는 일이 있었는데 본 사건에서는 빠른 구조 지시로 30분 만에 선내 인원 전원이 구출되었고 선장도 전원 탈출을 확인한 후 최후의 순간에 탈출하면서 사망자 0명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게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침몰 사고는 우선 승객들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한 후 승무원들이 끝까지 수습을 하다가 배와 함께 하거나 끝끝내 수습할 방법이 없음이 확실해지고 나서 승무원 퇴선 명령을 내리고 탈출한다는 점에서[30] 자기들이 제일 먼저 승객을 놔두고 탈출해 버린 당시 세월호 선원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으며 역으로 세월호 사건 이전에 이런 사례가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굳이 엄벌주의로 가지 않아도 승객을 버릴 승무원은 거의 없다는 것도 확인 가능하다.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처럼 선장이 도망치는 바람에 배에 탔던 승객들이 희생을 치른 경우가 있다. 다행히 대형 참사까지는 가지 않았다.
세월호 7시간과 관련되어 친박 세력들이 여전히 옹호하는 박근혜와 달리 그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떤 정치인에게도 옹호받지 못하게 되었다. 친박 등 극우 세력들의 입장에선 인명피해를 더욱 키움으로써 세월호 7시간 논란도 더욱 커지게 만들어 의도치 않게나마 박근혜의 몰락에 기여한 원수이면서 동시에 박근혜를 실드 치기 위한 좋은 희생양이며 진보 진영과 중도 진영, 그리고 온건 보수 진영의 입장에선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가족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안겨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 중 이준석계의 입장에서는 이준석이라는 이름을 매우 부끄럽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느 쪽 진영이 정권을 잡더라도 그가 훗날 특별사면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특별사면이 되더라도 가장 일러야 2034년 4월(이준석 88세)이 되어야 하며 1심 판결인 징역 36년 선고가 대법원 판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법적으로 살인죄가 아닌 것과는 별개로 가석방 신청 자체가 불가능해져서 이론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할 예정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자신이 처해진 무기징역이든 1심 판결이었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바뀌어 없던 일이 된 징역 36년이든 간에 그의 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가혹한 형벌인 셈이다.
2024년 3월, 목사와의 면회에서 이준석이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말할 수가 없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눈물이 나온다."라며, 옥중 심경을 밝혔다.# 본인도 부끄러운 건 아는 건지, 아니면 직접적인 보복이 두려운건지 "내가 그분들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냐. 얼굴을 차마 내가 볼 수가 없다."라는 심경을 목사가 대신 전달하면서 유족들에게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나 당시 11년전 대구지하철 최상열 기관사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기관사도 중앙로역에 도착하자 화재로 전력이 엉망상태가 되자 마스콘키를 뽑고 도망쳐 승객들이 대부분 사망했던 점이 비슷했다.(먼저 들어온 1079호 최정환 기관사는 화재 직후 잔류승객이 있는지 확인 후 탈출해 해당 전동차는 피해가 적었다.)
만약에 이준석이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을 내리고 승객들을 대피시키려고 노력하는 등 선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노력을 한 후에 구조되었다면 미필적 고의 및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아니라 업무상과실치사죄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업무상과실치사죄의 최대 형량은 금고 5년이라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었더라도[31]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일으킨 이준처럼 경합범이 되더라도 최대 형량인 징역 7년 6개월만 받았을 수 있다.[32] 그랬다면 이준석은 현재 진작에 출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준석을 그럴 수 있는 기회는 본인 스스로 날려버렸으니 자업자득이다.
9. 관련 문서
[1] 이준석 선장의 고향은 JTBC의 취재 결과 경상북도 칠곡군으로 확인되었는데(출처) 확인 전까지 일베저장소에 의해 전라남도 강진군 혹은 부산광역시(영남치곤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높은 편이고 호남인의 비중이 적지 않아 비하 대상이 된다.)로 날조되어 기사화되기도 하였다.[2] 세월호 승무원과 승객들을 살해의 직접적 고의를 갖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선장으로서의 의무, 즉 승객과 승무원들의 죽음의 위험을 방지해야 할 의무를 가진 자에게 인정되는 작위의무를 방기하여 승객들을 결과적으로 죽게 한 죄. 이 사건에서 최초로 적용됐다.[3] 생존자 명단 160번이다.[4] 공교롭게도 그의 칠순에 무기징역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5] 해당 방송 당시 운항하던 배는 오하마나호였다고 한다.[6] 이 기사에서도 이준석 선장이 "그날 아침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 '안개가 걷힌 뒤 가자'는 내부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왜 출항을 강행했나?" 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선장이라도 나 혼자 출항을 결정할 순 없다. 나도 직원이다. 회사가 시키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선장이지만 거기서 밥벌이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고 답하여 사실상 자신이 예스맨임을 시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승객들을 놔두고 가장 먼저 탈출한 걸 보면 예스맨이 된 것 자체가 철저히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자신의 윗사람에게는 절대복종하면서도 자신이 안전을 책임져줘야 할 약자(승객)들에게는 냉혹했다는 점에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7] 물론 침몰이 아닌 표류 중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의외로 도움이 된다. 동력만 잃은 상태일 뿐 배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괜히 야단법석을 떨며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으므로. 하지만 선장은 그 때 승객들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8] 선박이 항해할 때 반드시 위험 구역을 특정 항해사가 항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위험한 항로는 선장이 직접 항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객선의 경우 일정표에 따라 정시 운항을 하기 때문에 매 항차 항해사들이 동일한 구간을 운항하는 탓에 맹골수도가 1등 항해사가 운항하는 구간이 된 것이지 사규정에 언급되어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1등 항해사가 맹골수도 구간을 항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9] 3등 항해사였기 때문에 1년이면 실무적으로는 2등 항해사로서의 진급을 앞두고 있을 수도 있다. 신참이라는 건 단지 육상의 기준일 뿐 해상 직원으로서는 신참이 아니다. '항해사'의 항해술만 따지자면 3등 항해사라고 해서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비상 상황에서 제대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피할 수는 없다.[10] 관련 뉴스. 조타실은 일반인 출입 금지인데도 침몰시 중년 여성과 필리핀 여가수가 조타실에 있는 게 목격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침몰 시 성매매를 통해 성관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산 바 있다. 다만 이 보도는 너무 카더라식의 보도이며 필리핀 가수는 "부부"이고 평소 선원들과 친하게 지내다 사고 당일 가까이에 있던 조타실로 급히 피난 온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다른 기사에서 이 부부가 승무원들이 전혀 승객 구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11] 돈을 말리고 있었고 그 돈을 선원이 들어와서 뺏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순간에 고스톱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도박판 도중에 사고가 나서 그 말리고 있던 돈의 소유권이 불분명해서 뺏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추태다.[12] 나머지 2명은 다행히 사무장 양대홍씨가 도와주어 구조되었다.[13] 물론 사람이 모두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선처를 호소하는 것도 웬만한 사건에서는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상황을 지휘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다.[14]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준석 본인이 부상당한 조리원 2명을 탈출시키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채 도망쳤으므로 빼도박도 못하는 거짓말이다.[15] 이러한 말은 후술할 내용처럼 이준석 본인이 임시 선장이라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한 말과 모순된다. 자신이 선장으로서 책임을 다했다는 말과 자신이 임시 선장이라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말은 애초에 각각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과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라서 이 두 가지 말을 그대로 이어서 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모순이다.[16] 만약 이준석의 이러한 말이 옳은 말이라면 애초에 임시 선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사소한 명령조차 내릴 권한이 없으면 임시로도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자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이준석이 철저한 예스맨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17] 극단적인 사례로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직후 결정적인 과오를 저지른 항공관제사 페테르 닐센이 유가족의 보복으로 살해당했던 사례가 있다.[18] 그러지 않았으면 애시당초 법정 최고형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장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당시에도 조직의 보스라는 이유로 사건을 주도하지도 않았는데 법정 최고형을 때리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19] 2050년 출소. 이때 이준석의 나이는 살아있다면 105세다.[20] 세월호 사건 이후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이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옵티머스 사태의 김재현과 조주빈 말고는 없다.[21]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는 부족하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한국 법은 피해자가 입은 피해 및 국민적 분노 외에 행위 자체의 악성 역시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보통이며 여기에 가해자인 이준석이 어차피 20여 년만 복역해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 거의 확실할 정도로(2014년 기준 69세) 고령인 점 등이 이런 판결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22] 다만 비판도 존재하는데 자신이 보호해야 할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점에서 유기치사는 판례가 있고 또한 적용에 별 문제가 없지만 살인죄는 사람을 죽인다는 직접적 고의가 있거나 이 행위를 하면 죽을 게 확실한데 그래도 상관 없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어야 한다. 이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유죄 판결이 있긴 했으나 이 경우도 사실상 직접적 고의에 가까웠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준석은 누가 봐도 살인의 직접적 고의는 없었고(재판에서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퇴선 방송을 하지 않고 도망간 것이 미필적 고의로 인정된 것인데 과연 승객들을 100% 사망으로 이어지게 할 만한 사안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23] 물론 책임 소재와는 별도로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라도 무죄로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실제로 합수부가 신 선장에 대해 사법 처리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섣불리 사법 처리를 하기도 힘든 게, 이 경우 합수부와 해운사가 책임을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가 힘들다.[24] 실제로 과거와 달리 선주사의 이익 창출 추구로 인해서 선장의 선박의 안전에 대한 권한이 상충되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한 선박의 선장도 근로계약에 의거하여 선주(고용주)에게 고용된 피고용인이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거와 달리 선주(고용주)에 의한 해고 및 징계에 대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고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선장에게 돌리기 때문에 선장이라는 직책이 과거만큼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준석처럼 극단적인 인간 쓰레기 선장이 아닌 이상 선주를 먼저 질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25] 최소한의 퇴선 조치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마저 없었으면 1심에서도 무조건 살인죄 확정이었다.[26] 부모에게는 자식에게 보호 의무에 의한 보증인적 작위 의무가 인정되므로 칼로 찌르거나 목을 조르지 않고 자식을 굶겨 죽일 경우에도 살인죄가 인정된다. 선장의 경우에는 승객에 대해 안전 의무에 의한 보증인적 작위 의무가 인정되므로 살인죄가 인정된다. 즉, 이 두 경우는 같은 법리가 적용된다.[27] 당장 정치인인 이준석이 있다. 실제로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추미애가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를 범죄자 이준석에 비유해 엮인 적도 있다.[28] 구원파 중 권신찬-유병언 계열이다.[29] 페리호가 어찌할 틈도 없을 정도로 급격히 뒤집혀서 운명을 같이 한 거긴 하지만 시신 발견 장소가 통신실, 즉 침몰하고 있다는 통신을 보내려고 했다는 점을 보면 이준석과는 비교 불가능하다. 페리호보다 그나마 비교가 쉬운 대상은 돌고래호 전복 사고 때의 선장이었는데 본인이 탈출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선 명령 및 구조 요청을 하다가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30] 타이타닉 호처럼 다른 승무원들에게 살 길을 찾아라면서 탈출을 지시한 뒤 선장 본인은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다.[31]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사망자수는 실제 세월호 참사로 죽은(미수습자 포함) 304명보다는 당연히 적었을 것이다.[32] 이준도 당시에는 미필적 고의 및 부작위로 의한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려워 업무상과실치사죄와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어 경합범이 되어 최대 형량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 받은 것이다.[33] 진짜로 빤스만 입고 빤스런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