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아프리카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1. 오요 알라핀
오요 제국 국장 | |
관련 칭호 | 오요 알라핀[1] |
작위 요구자 | 라미디 아데예미 3세 |
전임자 | 아데니란 아데예미 2세 |
계승 실패 원인 | 1896년 제국 멸망 |
오요 제국은 오늘날 나이지리아 오요 주의 전신이며, 요루바계 국가였다. 현재 라미디 아데예미 3세가 명목상의 오요 제국 알라핀 칭호를 쓰고 있다.
2.1.2. 베닌 오바
베닌 왕국 국기[2] | |
관련 칭호 | 베닌 오바[3] |
작위 요구자 | 에우아레 2세 |
계승 실패 원인 | 1897년 왕국 멸망 |
베닌 왕국은 지금의 나이지리아 남부 에도 주에 있었던 나라로, '오바' 라는 명칭의 군주를 섬겼다. 공식적으로는 멸망한 상태이지만 베닌 왕국 오바 칭호는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에우아레 2세가 명목상의 베닌 왕국 오바 칭호를 쓰고 있다. 참고로 현대 베냉 공화국은 이 나라에서 국명을 따왔으나, 옛 베닌 왕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다.[4]
2.1.3. 소코토 술탄
관련 칭호 | 소코토 술탄 칼리프 |
작위 요구자 | 사아두 아부바카르 |
계승 실패 원인 | 1903년 술탄국 멸망 |
1903년에 소코토 술탄국(소코토 칼리프국)[5]이 멸망한 뒤에도 명목상의 술탄위는 나이지리아 소코토 주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현재 사아두 아부바카르가 명목상의 술탄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 칭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코토 술탄국의 술탄은 무려 칼리프를 자칭하고 있었다.
물론 진짜로 정통성 있는 칼리프였던 오스만 제국의 황제도 현재 칼리프라는 사실이 부인되고 있는 판국에 서아프리카의 군소 부족국가의 군주가 자칭하는 칼리프위가 공인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래서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의 칼리프 문단에 소코토의 술탄은 없는 것이다.[6]
2.2. 남서아프리카 영주
관련 칭호 | 독일 황제(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남서아프리카 영주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독일 제국 멸망 1919년 동아프리카 상실 |
지금의 나미비아에 해당하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남아프리카 연방에 편입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독일계 국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으므로,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은 공식적으로 통치권 요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통치권 요구자가 된다.
2.3.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1. 로베두족 모자지
관련 칭호 | 로베두족 모자지[7] 비의 여왕[8] |
작위 요구자 | 마살라나보 |
전임자 | 마코보 |
계승 실패 원인 | 혈통 관련 결격사유로 인한 모자지위 계승 불가 남성 왕족의 모자지위 계승 허용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수민족인 로베두족은 모자지라는 명칭의 군주를 섬기는데, 모자지는 모계 세습제라서 오로지 여성, 그것도 평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여성 왕족만이 그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 그러나 마코보 사후로 평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여계 여성 혈통이 단절되어버리는 바람에 누가 모자지의 자리를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 한때 로베두족의 모자지는 공석인 상태였다. 마코보의 딸인 마살라나보 공주가 승계를 기다렸으나 아버지가 평민이라서 평민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논란이 생겼다.
남성 왕족이 모자지를 계승하는 방법의 경우 모자지는 모계 세습이자 비의 여왕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으로 인해 주요 관광자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한때 남아공 당국에서 받아주지 않는 상태였으나, 결국 남아공 당국이 방침을 바꾸어 남성 모자지가 즉위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마살라나보는 계속 모자지위 요구자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살라나보가 2024년 4월에 여왕 대관식을 치를 예정이란 뉴스가 나왔다.# 만약 진짜로 즉위한다면 남성 왕족이 모자지위 요구자가 된다.
2.3.2. 줄루 국왕
관련 칭호 | 줄루 국왕 |
작위 요구자 | 미수줄루 줄루 |
전임자 | 즈웰리티니 줄루 |
계승 실패 원인 | 1879년 왕국 멸망 |
줄루 왕국은 지속적인 정복전쟁으로 남아프리카의 패권국가가 되어 줄루 제국으로도 불린다. 1879년에 줄루 전쟁에서 영국군에 패한 줄루 왕국은 그대로 멸망한 채 법적으로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명목상의 왕만을 배출하고 있다. 현 왕위 요구자는 미수줄루 줄루다.
2.4. 다호메이 국왕
관련 칭호 | 다호메이 국왕 |
작위 요구자 | 다흐 사그바드조우 글렐레 |
전임자 | 다흐 데드잘라그니 아골리-아그보 |
계승 실패 원인 | 1904년 왕국 멸망 |
다호메이 왕국은 지금의 베냉 남부에 있었던 국가다. 16세기 말에 다호메이 왕국이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수많은 노예들을 팔았는데[9] 이는 베냉이 유럽인들에게 '노예 해안' 으로 불리는 것의 유래가 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는 다흐 사그바드조우 글렐레다.
2.5. 동아프리카 영주
관련 칭호 | 독일 황제(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동아프리카 영주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독일 제국 멸망 1919년 동아프리카 상실 |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협상국의 식민지로 바뀌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독일계 국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으므로,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은 공식적으로 통치권 요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통치권 요구자가 된다.
2.6. 르완다 국왕
관련 칭호 | 르완다 국왕 |
작위 요구자 | 에마뉘엘 부샤이자 |
전임자 | 기욤 부샤이자 |
계승 실패 원인 | 1959년 왕정 붕괴 |
원래 르완다는 옛날에도 여러 왕국이 존재하긴 했으나,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지배하면서 이곳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을 억누르고자, 투치족 출신을 르완다의 왕으로 옹립하고 괴뢰정부인 르완다 왕국을 설립했다. 그러나 1959년에 벨기에로부터 르완다 왕국이 독립하자, 그동안의 억압 때문에 폭발한 후투족이 왕실을 폐위하여 국외로 내쫓아버리고 공화국을 선언했다.[10] 지금도 왕가의 후손들은 왕실의 복권과 르완다로의 귀환을 요구하지만, 정부와 국민들 모두가 이런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2.7. 리비아
리비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7.1. 리비아 국왕
관련 칭호 | 리비아 국왕 | |
작위 요구자 | 모하메드 엘 세누시 | 이드리스 빈 압둘라 알 세누시 |
계승 실패 원인 | 1969년 왕국 멸망 |
리비아 왕국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터키 순방을 하던 도중에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수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이드리스 1세는 그대로 망명자 겸 왕위 요구자 신세가 되었다. 이드리스 1세는 자녀들이 모두 요절하여 본인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현재 리비아 왕실의 방계 후손인 모하메드 엘 세누시와 이드리스 빈 압둘라 알 세누시가 명목상의 리비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서로 다투는 중이다.
2.7.2. 카다드파 부족장
관련 칭호 | 카다드파 부족장 리비아 혁명평의회 의장 리비아 전인민회의 서기 |
작위 요구자 |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 |
전임자 | 무아마르 카다피 |
계승 실패 원인 | 2011년 카다피 정권 붕괴로 부족 몰락 |
카다드파 부족은 지금의 리비아 땅에서 살아가던 베르베르인 부족들 중 하나였으며, 무아마르 카다피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리비아의 독재자가 되면서 카다드파 부족의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부족장이기도 했던 카다피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아 승승장구하였으나, 2011년에 제1차 리비아 내전으로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카다피 정권 시절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 처참하게 몰락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지도자 자리와 카다드파 부족의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이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11], 사이프 알이슬람이 카다드파 부족의 부족장위 요구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등재 기준에 따라 사이프는 카다드파 부족장위 요구자로만 인정되고, 다른 직위의 세습 요구자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현재까지도 카다드파 부족의 세력이 건재하다면 여기에 등재될 이유가 없었겠지만,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면서 카다드파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신세가 되었을뿐더러 사이프 알이슬람이 2017년에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구 카다피 정권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만큼의 권력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에 카다드파 부족은 사실상 해체에 가까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어서 부족장위 요구자로 간주한다.
2.8. 말리 만사
관련 칭호 | 말리 만사[12] | |
작위 요구자 | 살리프 케이타 | 모디보 케이타 |
계승 실패 원인 | 1670년 제국 멸망 |
말리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만딩고족이 세운 국가다. 현재 살리프 케이타와 모디보 케이타가 말리 제국 만사위 요구자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는 중이다.
2.9. 부룬디 국왕
관련 칭호 | 부룬디 국왕 |
작위 요구자 | 로자 폴라 이리바기자 므왐부차 |
전임자 | 므왐부차 4세 |
후임자 | 레미 이리바기자 |
계승 실패 원인 | 1966년 쿠데타로 인해 왕정 폐지 |
르완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왕실이 폐지된 케이스지만, 부룬디는 후투족이 대다수인 르완다와는 달리, 투치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고, 왕실 역시 투치족이라서 국민들로부터 왕실이 어느 정도 인정은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쪽도 결국 벨기에가 식민지배를 위해 앉혀놓은 이들임은 틀림없어서 역시 왕실에 대한 인기가 그리 높지는 않았고, 때문에 독립 후에도 왕자가 암살당하는 등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가, 끝내 1966년에 쿠데타로 인해 왕실이 축출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2.10. 서아프리카 영주
관련 칭호 | 독일 황제(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서아프리카 영주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독일 제국 멸망 1919년 서아프리카 상실 |
독일령 서아프리카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협상국의 식민지로 바뀌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독일계 국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으므로,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가문은 공식적으로 통치권 요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통치권 요구자가 된다.
2.11. 스페인
스페인령 북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1.1. 세우타 영주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포르투갈 국왕 알가르브 국왕 세우타 영주 |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후임자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6년 스페인에 완전히 합병 |
세우타가 스페인령이 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의 동군연합이 되면서부터였으며, 스페인이 세우타를 지배하기 전에는 포르투갈 왕국이 세우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브라간사 왕조의 독립국가가 된 후에도 세우타만큼은 여전히 스페인령으로 남았는데, 이미 카스티야인이 세우타로 많이 이주한 뒤였기 때문이다. 다만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세우타 지배 자체가 포르투갈 왕족계 후손 자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세우타의 문장과 깃발은 각각 포르투갈 국장과 리스본 깃발을 닮은 모습이라서 여전히 포르투갈령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 세우타가 완전히 스페인의 일부가 된 것은 스페인이 동군연합을 폐지하고 스페인 왕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로서 중앙집권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1716년이었는데 이 때 스페인은 보르본 왕조였으므로,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도미닉이 세우타의 단독 영주위 요구자라고 볼 수 있다.
2.11.2. 카나리아 제도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카나리아 제도 국왕 |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카를로스주의)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13] | (자유주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
전임자 | 하비에르[14]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15]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6] | 카를로스 마리아 알폰소 마르셀로 | 알퐁스 2세[A][B]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하이메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 |
카나리아 제도가 스페인에 정복되어 스페인 영토가 된 후부터 스페인의 역대 국왕들은 스페인 국왕 칭호와 별개로 카나리아 제도 국왕 칭호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의 왕위 요구자들은 자연스럽게 카나리아 제도의 왕위 요구자도 겸하게 된다.
2.12. 아샨티 아샨티헤네
관련 칭호 | 아샨티 아샨티헤네[19] |
작위 요구자 | 오툼포 나나 오세이 투투 2세 |
계승 실패 원인 | 1902년 제국 멸망 1957년 가나 수립 |
오늘날 가나의 전신인 아샨티 제국은 노예 무역을 통해 크게 번성했으나, 4번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 끝에 결국 패전하여 1902년에 멸망했다. 가나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현재 오툼포 나나 오세이 투투 2세가 군주로 군림하고 있으나, 애초에 가나가 공식적으로 공화국인 만큼 왕위 요구자로 봐도 무방하다. 작위 요구자/유럽 문서에 있는 루마니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알바니아 왕국의 왕위 요구자처럼 자국의 경제사정 때문에 공식적인 왕정복고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케이스라고 봐야 할 듯싶다.
2.13. 알제리 번왕
오스만령 알제리 문장 | |
관련 칭호 | 오스만 황제(파디샤) 술탄 칼리프 알제리 번왕 |
작위 요구자 | 하룬 오스만오을루[20] |
전임자 | 뒨다르 알리 오스만오을루 |
계승 실패 원인 | 1830년 프랑스에 합병 |
알제리는 1516년에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 되었다. 당시 알제리는 오스만 제국 황제를 국가원수로 모셨고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으며, 알제리의 바르바리 해적도 이를 기점으로 오스만 제국 황실의 빽에 힘입어 더욱 활발히 노략질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프랑스가 알제리를 자국에 합병하면서 바르바리 해적이 완전히 토벌되고 오스만 제국 황제 또한 번국 알제리의 국가원수로 군림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던 시절의 자치권을 상실한 채 프랑스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받았다.
2.14. 에티오피아 황제
관련 칭호 | 에티오피아 황제(느구서 너거스트) | |
작위 요구자 | (하일레 셀라시에의 후손)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 | (이야수 5세의 후손) 지르마 요한느스 이야수 |
전임자 | 하일레 셀라시에 2세 | 리즈 요한느스 이야수 |
후임자 | 아바베 | 리즈 카에로드 지르마 |
계승 실패 원인 | 1916년 이야수 5세 폐위(이야수 5세의 후손) 1975년 제국 멸망 |
이른바 '솔로몬의 후예'로 아프리카에서 몇 안되는 문화 국가로 촉망받던 에티오피아였는데 1974년 멩기스투의 군부 쿠데타로 제정이 붕괴되고 1970년대 왕정이 폐지된 직후 론 놀, 폴 포트, 행삼린 정권 시기의 캄보디아나 친소련 공산당 정권과 탈레반 정권 시기의 아프가니스탄과 큰 차이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오늘날에서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취약점이야 어떻든 나름 명군이었다고 인식되며[21][22] 현재 그의 손자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가 명목상의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위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하일레 셀라시에의 쿠데타로 폐위된 이야수 5세의 손자 지르마 요한느스 이야수도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위를 요구하고 있다. 공산당의 학정과 이후로도 계속되는 가난으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하일레 셀라시에 치세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를 지지하지만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의 무슬림들은 이야수 5세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믿는 에티오피아 대다수 국민들은 반대로 이야수 5세에게 실망했지만) 이야수 5세의 손자인 지르마 요한느스 이야수를 지지한다.
2.15. 이집트 국왕
관련 칭호 | 이집트 국왕 |
작위 요구자 | 푸아드 2세 |
전임자 | 파루크 1세 |
후임자 | 모하메드 알리 |
계승 실패 원인 | 1953년 왕국 멸망 |
이집트 왕국의 마지막 국왕 푸아드 2세는 생후 6개월 만에 왕위에 올라 11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현재 그의 장남인 모하메드 알리가 명목상의 왕세자다. 참고로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는 유럽계인 알바니아인 혈통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이며 군주의 칭호가 파라오였던 마지막 왕조이기도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또한 유럽계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건너온 그리스계였는데, 메흐메드 알리 왕조의 시조인 메흐메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출신이다! 그에 따라 이집트는 파라오 칭호를 쓴 마지막 왕조와 이집트 역사 전체의 마지막 왕조 모두 비록 민족은 각각 다르지만 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마케도니아에서 건너온 이민족의 왕조인 나라다.
2.16. 잔지바르 술탄
관련 칭호 | 무스카트-오만 술탄[23] 잔지바르 술탄 |
작위 요구자 | 잠시드 빈 압둘라[24] |
전임자 | 압둘라 빈 할리파[25] |
후임자 | 사이드 알리 빈 잠시드[26] |
계승 실패 원인 | 1964년 군주제 폐지, 탕가니카와 합병 |
잔지바르[27]는 본래 오만 제국의 식민지였고, 수도인 잔지바르 시티가 동아프리카 최고의 무역 도시로 거듭나면서 오만이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했다.[28] 하지만, 이내 독일이 쳐들어와서 잔지바르 전체가 독일의 식민지가 되면서, 독자적인 왕실이 옹립되었다.[29]
잔지바르인들은 아랍인 기득권층의 지배가 너무나도 가혹했던 탓에, 독일의 식민지배에 대해 나름 만족하긴 했으나[30], 이내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헬골란트 섬[31]과 이곳을 맞교환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잔지바르에게 통수를 치자, 분노한 잔지바르 왕실이 마침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려고 시도하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32] 이것이 고작 38분만에 종결된 전쟁으로 유명한 영국-잔지바르 전쟁으로, 당대 최강대국인 영국의 해군에게 그야말로 개발살난 잔지바르 측은 그대로 데꿀멍하고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로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그대로 조용히 사나 싶었으나, 1963년에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내부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하자는 여론이 일었다.[33] 결국, 1964년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잔지바르 술탄국의 술탄이던 잠시드 빈 압둘라는 축출되고 잔지바르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마침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공화국이 된 탕가니카[34]와의 합병을 결의해서 탄자니아를 출범시켰다.
2.17. 중앙아프리카 황제
관련 칭호 | 중앙아프리카 황제 |
작위 요구자 | 장 베델 보카사 2세 |
전임자 | 장 베델 보카사 |
후임자 | 마틴 코타 |
계승 실패 원인 | 1979년 황실 및 정권 붕괴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가 자칭한 작위이다.
원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당시부터 공화국이었는데, 이를 보카사가 무너뜨리고 10년 넘게 대통령 노릇을 하다가 1976년에 갑자기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35]
이는 알바니아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다가 스스로 왕으로 즉위한 조구 1세랑 같아 보였지만, 적어도 조구는 제멋대로 왕이 된 대신 유럽 최빈국이던 알바니아의 근대화에 힘써서 냉전 이후에 나라가 급속도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한 것과 달리,[36], 보카사는 유송의 후폐제와 비견될 정도로 악랄한 폭군이었다.
보카사 1세는 1977년에 프랑스의 지원금까지 횡령하여 1년 국가예산의 1/3 정도인 1200억 원(2022년 기준)을 들여 초호화 대관식을 연 것도 모자라 철도도 없고 의사도 12명밖에 없는 빈국의 국고에서 횡령한 돈으로 프랑스에 6개의 별장을 짓는 호화 생활을 누렸고, 심지어 1979년에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학생 교복을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의 거액으로 학생들에게 강매하게 하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며 400명 이상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황제 본인이 감옥까지 찾아가 수감된 학생들을 직접 때려죽였다.
덕분에 보카사 1세의 뒤를 봐주던 프랑스가 그와 함께 덩달아서 국제 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받자, 결국 보카사의 후원자 노릇을 포기한 프랑스는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전임자인 다비드 다코를 다시 대통령에 등극시킨 후 그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영토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불법으로 자칭한 작위에서 폐위된 보카사 1세는 처참하게 몰락하여 1996년에 허름한 집에서 지병으로 죽었고, 그 아들인 장 베델 보카사 2세가 아버지의 제위를 계승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누구도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
장 베델 보카사 2세는 현재 미혼인 관계로 자식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끝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의 동생인 마틴 코타가 명목상의 중앙아프리카 황제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다.
2.18. 콩고 마니콩고
관련 칭호 | 마니콩고[37] |
직위 요구자 | 이브 은징가 음벰바 |
계승 실패 원인 | 1914년 왕국 멸망 |
콩고 왕국[38] 멸망 후 콩고의 마지막 마니콩고였던 마뉘엘 3세는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로 망명하여 192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자녀들이 모두 요절하여 그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마니콩고위 요구권은 방계로 넘어갔다. 현재 이브 은징가 음벰바가 명목상의 콩고 왕국 마니콩고 칭호를 쓰고 있다.
2.19. 튀니지 국왕
관련 칭호 | 튀니지 국왕 |
작위 요구자 | 무하마드 알 후사인 |
계승 실패 원인 | 1957년 왕정 폐지 |
1957년 튀니지 의회는 국왕 무함마드 8세 알 아민을 축출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무함마드 8세 알 아민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탓에 현재는 방계에서 왕위 요구자를 대대로 배출하고 있으며, 현 왕위 요구자는 무하마드 알 후사인이다.
[1] 알라핀은 오요 제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다.[2] 국기의 그림이 꽤 흠좀무한 편인데, 한 남자가 맞은 편의 남자의 목을 자르는 그림이다(...).[3] 오바는 베닌 왕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다.[4] 지금의 베냉은 멸망한 다호메이 왕국의 영토에 세워진 나라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사례가 또 있는데, 그게 가나다. 현대 가나 공화국은 중세 서아프리카의 강대국인 가나 왕국에서 국명을 따왔으나, 정작 가나 왕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옛 말리 제국과 아샨티 제국 영토에 세워진 나라다.[5] 나이지리아 북서부에 있는 소코토 주의 전신이다.[6] 칼리프위는 수니파 무슬림들 사이에서 혈연에 따른 세습으로 이어졌고, 가장 최근에 이 지위를 가졌던 이들이 바로 오스만 제국 황실 가문이었다. 그래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같이 오스만 황가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칼리프를 자칭한다고 해서 칼리프위 요구자가 되지 않는다. 파키스탄에 있는 분파인 아흐마디야파에도 칼리프가 있지만, 이 직위도 혈연에 따라 세습되는 작위로서 이미 선점한 가문이 있다. 그러니, 이슬람의 어느 분파든지 간에, 이들 두 가문 이외의 사람이 갑툭튀해서 칼리프위를 주장한다고, 합법적인 칼리프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론 본 문단에 나온 소코토 술탄국 술탄의 경우처럼 정통성 있는 칼리프가 아니라도 군주의 칭호가 칼리프였던 특정 국가 군주위의 요구자라면 칼리프위 요구자로 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진짜 칼리프위 요구자가 아니라 그저 자칭 칼리프였던 군주의 통치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7] 모자지는 로베두족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이다.[8] 모자지를 가리키는 또다른 명칭이다.[9] 주로 지금의 베냉 북부 출신 노예들이었다.[10] 애초에 르완다 왕국 자체가 벨기에의 괴뢰정부가 기원인지라, 왕실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11] 카다피의 장남 무함마드는 카다피의 다른 아들들과 달리 카다피의 부인으로 흔히 유명한 사피야가 아니라 그녀 이전에 카다피의 부인이었던 여성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카다피 정권과 카다드파 부족의 후계구도에서 멀어졌다.[12] 만사는 마닌카어 단어인데 술탄을 뜻하는 단어인지 황제를 뜻하는 단어인지 논란이 있다고 한다. 일단 말리 본토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만사라는 단어를 황제(에 해당하는 언어별 명칭)로 번역하고 있다.[13]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14]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15]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16]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A] [B] [19] 아샨티헤네는 튀어(아칸어)로 지배자를 뜻하는 단어다.[20]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성이 없었으나 1932년 튀르키예의 성씨법 제정 이후로 편의상 오스만 1세의(Osman) 자손(Oğul의 3인칭 한정형인 oğlu)'이라는 의미로 오스만오을루(Osmanoğlu)라는 성을 쓰고 있다.[21] 하일레 셀라시에 치하의 에티오피아는 통념과는 달리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나, 황제가 어떻게든 나라를 최빈국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경제 발전에 힘을 썼다. 근데 하필이면, 극심한 가뭄이 닥쳐서 에티오피아의 농업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바람에 가뜩이나 열악하던 경제가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경제 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셀라시에였지만 그런 그도 말년에는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여 온 국민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는 멩기스투가 쿠데타를 일으킬 좋은 명분이 되었고, 셀라시에는 그대로 권좌에서 내쫓기고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멩기스투 본인은 하일레 셀라시에와 달리 폭정은 폭정대로 저지르고 무능함은 무능함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오늘날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하일레 실라시에 치세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22] 그러나, 독설가로 유명한 오리아나 팔라치 기자는 "그래봤자 당신도 결국은 독재자에 불과합니다."라고 돌직구를 날려서 극대노한 하일레 셀라시에가 "이 미친 여자를 당장 끌어내라!"라는 식으로 방방 뛰게 만들었다.[23] 오만 제국의 정식 국명이 무스카트-오만 술탄국이었다.[24] 잔지바르 최후의 술탄이다.[25] 잠시드 빈 압둘라의 아버지다.[26] 잠시드 빈 압둘라의 장남이다.[27] 전설적인 록밴드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가 바로 잔지바르에서 살던 인도계 조로아스터교 신자의 후손이었다. 바로 이 잔지바르 술탄국이 폐지되는 와중에 비(非) 흑인계 주민들에 대한 제노사이드가 벌어지자 이를 피해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28] 한국사로 치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던 와중에 수도를 서울로 옮겨버린 셈이다.[29] 다만, 이 왕실은 기존 왕실의 분가라서 잔지바르인들에게는 사정이 달라졌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오만 왕실에서 잔지바르의 왕실이 분가된 이유도 오만의 왕위를 둔 계승 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다만, 잔지바르가 동아프리카의 경제 중심지라서, 이곳을 잃은 오만 제국의 본가는 차츰 몰락하기 시작했고, 그 상태로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경제력에서 잔지바르에 있는 분가에게 밀렸다.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였던 셈이다.[30] 물론, 독일의 지배도 결코 온정적인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 잔지바르가 완전 독립을 이루고 탕가니카와 합병해 탄자니아 공화국을 출범시킨 뒤에 반독일 정서가 급속도로 퍼졌다. 그 이유인즉슨, 과거 독일 제국 시절에 독일군이 대대적인 학살을 벌인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오늘날까지 독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탄자니아 정부의 사과 요구도 무시하고 있어서 지금도 이곳에선 독일 정부와 독일 수상인 앙겔라 메르켈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다. 어디까지나 독일의 지배는 오만의 지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였을 뿐이다.[31] 독일 앞바다에 있는 섬인데, 당시에 불던 게르만 민족주의 때문에 민족의 성지들 중 하나로 여겨지던 헬골란트 섬을 영국이 반환하기로 하자, 당시 독일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32] 노예제 문제 때문에 왕실 내부에 분열이 생겼는데, 영국이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하무드 빈 무함마드를 새로운 술탄으로 옹립하려하자, 당시 술탄이자 노예제 유지론자이던 할리드 빈 바르가시가 이에 반발하여 선전포고를 했다.[33] 독립한 뒤에도 인구 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흑인계가 소수의 아랍인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원인이었다.[34] 탕가니카는 독립 직후로는 영연방 입헌군주제였으나, 독립한 지 1년 만에 당시 탕가니카의 대통령이었던 줄리어스 니에레레에 의해 입헌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35]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나라나, 전제군주제 시절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나라에서는 '대통령=선출된 왕' 정도로 단순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조차 정말로 대통령이나 대통령과 동급의 국가원수 직위를 대놓고 군주의 작위로 전환한 사례는 거의 없다. 적어도 20세기 이후부터는 보카사의 경우를 제외하면, 알바니아의 조구 1세와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고작이다. 하다못해 당장 조롱의 의미로 김씨 왕조라고 부르는 북한의 김정은조차 대놓고 군주제를 선포하지는 않았다.[36] 조구 1세는 제멋대로 왕을 자칭한 독재자치고는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우선 이슬람교가 대세인데다 부족국가로서의 전통이 남아있던 알바니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나타날 것을 우려해서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펴는 한편, 왕명을 이슬람 삘 나는 본명 아흐메트 대신 성씨인 조구에서 따온 '조구 1세'로 정했으며, 본인이 이슬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태생의 가톨릭 신자와 결혼을 하기도 했다. 또 그때까지 화폐 개념이 없던 알바니아에서 역대 최초로 독자적인 화폐인 레크화를 발행하고 유통시켜서 안정적으로 화폐 경제를 구축하는 한편, 도로 등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구축하고 공업을 육성함으로서 알바니아 경제가 발전할 기반을 닦았다. 이것이 공산주의 국가 시절을 거쳐서 오늘날의 알바니아 공화국의 경제가 서서히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도 알바니아인들은 조구 1세를 성군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그의 동상까지 수도인 티라나에 세워놓았다. 심지어 조구 1세의 장남이었던 레카 1세는 1997년에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왕정복고를 시도한 적도 있었으며, 이후로도 손자 레카 2세 등도 알바니아 정부에서 일하고 있다.[37] 콩고 왕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이다.[38] 상당히 의외로 콩고 왕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초의 기독교 국가다. 그 이전까지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은 이슬람교 일색이어서 콩고 왕국, 그리고 마다가스카르에 위치해있던 메리나 왕국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콩고 왕국의 국교는 가톨릭으로, 콩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군주인 마니콩고 은징가 음벰바가 포르투갈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에 자국을 방문한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