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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시리즈 최강자
KBO 리그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 우승 구단이자 준우승이 없는 구단이다. 일단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그 방법이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이든, 정규 시즌 상대전적이 열세였던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압도적 우세로 역제압해버리든 간에 어떤 방법으로든 우승했다. 한국시리즈 11연승을 달리고 있으며 현재까지 한국시리즈 승률 100%다. 개별 경기로만 따져도 59전 44승 2무 13패 승률 0.772(역대 팀 중 1위)로 4경기 하면 1경기만 지는 수준으로 압도적 승률을 보여주고 있다.한국시리즈 불패 기록이 오히려 선수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신호도 있다. 양현종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한국시리즈 전승불패 대기록을 우리가 잘못해 깨버릴까 불안해 선수들이 더욱 긴장하게 된다고 한다.
팀 컬러는 창단 초기부터 이어온 끈끈한 팀워크[1], 원년부터 활약한 구단 초대 에이스 '원자탄' 이상윤부터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등으로 이어지는 막강 투수진과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또는 김종모)이 중심타선에 위치한 장타력 중심의 KKK타선의 조화로[2] 우승을 경험했고, 선동열의 일본 진출과 이종범의 입단 이후부터는 투수에 중점을 두는 투수 위주의 팀으로 흘러가고 있다.
2. 한국시리즈를 빼면 한없이 약해지는 가을야구
한국시리즈에서는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적의 팀이지만 이상하게 한국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 특히 KBO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힘을 못 쓴다. 1989년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30년이 넘게 한국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를 승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KBO 플레이오프에서는 1987년과 1989년에 승리한 이후 4번의 플레이오프에서 모두 업셋 당했으며, 통산 4회 진출한 KBO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정규리그에서 3위가 됐건 4위가 됐건 전부 상위 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했다. 통산 3번 진출한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상위 시리즈에 나간 적이 없다.[3] 때문에 11승 무패의 압도적인 한국시리즈 전적을 포함해도 통산 포스트시즌 시리즈 전적은 13승 11패에 그치며(승률 0.540), 바꿔서 말하면 한국시리즈를 제외하면 통산 2승 11패(승률 0.154)로 압살당했다는 소리가 된다.페넌트 레이스 2위는 꽤 있다. 1989년, 1990년, 1992년, 2002년, 2003년에 2위를 기록했다. 이 중에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년도는 업셋 우승을 한 1989년이 유일하다. 이후로는 전부 플레이오프 탈락. 1989년에는 페넌트 레이스를 2위로 마감해서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스윕했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페넌트 레이스 1위 빙그레 이글스를 4승 1패로 꺾고 KBO 최초로 한국시리즈 4연패에 성공했다. 1990년에는 시즌 막판까지 LG 트윈스[4]와 선두 경쟁을 하다[5] 뒤집히면서 분위기가 꺾였고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당했다. 선동열이 어깨부상으로 빠진 199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와 만났는데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했고 2002년에도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했다. 이듬해에는 창단 4년차이던 SK 와이번스에 스윕당했다.
3. 포수 기근
현재는 강민호의 이탈 이후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롯데의 안방이 크게 부각되면서 묻히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포수 포지션이야말로 해태 시절부터 구단 역사 내내 약점이었다. 현역인 양의지, 강민호나 은퇴한 이만수, 김동수, 박경완처럼 통산 WAR 50 이상을 찍은 최고의 포수는 고사하고 16인 장채근이 통산 WAR이 가장 높은 포수다.[6] 고작 반년 있었던 박동원을 제외하고는 공격형 포수라고 부를만한 선수가 없었다. 우승시즌이었던 2017년에도 어느정도 수비가 보장되는 포수를 영입하기 위해 충격의 노수광 ↔ 김민식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박동원을 반년만에 놓치자 류지혁을 넘기고 25억 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주고 김태군을 영입했다. 아무리 봐도 오버페이란 말이 많지만, 이 팀의 포수난의 엄청 심각하단 사실을 고려하면 25억은 어쩔 수 없었단 평가다.신범수가 KIA의 거물 포수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심어줬지만, 많은 팬들과 기자들의 설레발로 끝났고 결국 2024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SG 랜더스로 떠났다. 그나마 2024년부터 한준수가 괜찮은 수비력과 강한 좋은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어 팬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는 있다. 워낙 전방위에 걸쳐 포수 유망주 설레발이 심했던 팀이라 이번에는 진짜로 포수 잔혹사를 끊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4. 여름 불방망이
7 ~ 8월 기간에 팀의 타격 능력이 급상승하는 이상한 일을 겪고 있다. 잠깐 그러는 것도 아니고 팀 순위에 상관없이 매 시즌마다 계속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낸다. 단순 착각이 아닌게, 이미 KIA 팀 내부에서도 그간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러한 현상이 실제로 있음을 파악한 상태라고 한다. 설마했으나 이범호 감독의 예상대로 7월이 되자 타자들이 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2024년에도 7-8월 불방망이 현상이 유효하게 적중했다. #5. 고마워요 한화
한화 이글스에서 기량을 펼치지 못 하던 선수가 KIA에만 오면 갑자기 포텐셜을 터뜨려 엄청난 재능의 선수로 돌변하는 일이 자주 있다. 오죽하면 '한화는 KIA의 또 다른 2군', '호남팜 말고도 한화팜'이란 소리도 있다. 한화 팬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 우리가 사기만 당하는 거 같다고 KIA랑 트레이드도 하지 말자는 볼멘소리도 자주 나온다.송은범의 보상 선수로 한화에서 KIA로 이적한 임기영은 6이닝은 거뜬하게 먹는 리그 최강 4선발 에이스가 되어 KIA의 2017년 우승을 견인했다. 2군을 전전하던 김도현도 트레이드를 통해 KIA에 오자 4·5선발 투수로 각성해 KIA의 정규시즌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변우혁도 2할을 치던 타자가 트레이드로 KIA에 오니 3할을 치는 타자로 성장했다. '노토바이'라는 별명으로 KIA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리드오프 노수광도 당연히 한화에서 넘어온 선수이며, 신종길과 오준혁, 김다원, 한승택도 KIA로 넘어온 다음 기량이 발전해 주전을 뛰었다.
[1] 프로 원년부터 15명도 안 되는 초미니 선수단을 가지고 4위에 올랐던 것은 강력한 팀워크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김일권 등 초창기 핵심 선수들 다수가 같은 학교 출신 선후배였던 점이 강력한 팀워크의 기반이었다. 또 기아로 인수되기 전까지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큰 분란 없이 팀이 잘 굴러간 것 역시 팀워크와 타이거즈 특유의 정신력이 든든한 기반이 됐다는 해석도 있다.[2] KKK포 외에도 '김씨 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김일권부터 시작해서 앞서 언급된 김준환,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등에 1980년대 중반까지는 포수에 김무종까지 앉아있는 등 유독 해태 라인업에 김씨 성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감독마저 김씨(김응용)였다.[3] 세 번 다 시즌 5위 자격으로 WC 결정전에 나갔는데 역대 WC 결정전 사례를 봐도 5위가 4위를 뒤집고 올라간 업셋 사례는 2024년 와일드카드 결정전 딱 한 번 있다. 그래도 KIA가 처음으로 와일드카드에서 1승이라도 해본 5위이고, 이후에도 키움과 kt 밖에 없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4] 당시 LG는 시즌 초반 한때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가 중반부터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결국 1위로 페넌트 레이스를 마쳤다.[5] 타이거즈와 LG의 라이벌 의식은 1990년 8월 26일 잠실야구장 패싸움 사건 이후로 견고해지기 시작했다.[6] 2위는 11인 김상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