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프로 입단 이전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4. 메이저리그 포스팅5. 텍사스 레인저스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7. FA8. 시카고 컵스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0. 국가대표 경력11. 연도별 성적
1. 개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 우완 투수 다르빗슈 유의 선수 경력을 담은 문서.2. 프로 입단 이전
다르빗슈 유의 아버지인 파르사드 다르비시세파트(Farsad Darvishsefat)는 이란 테헤란에서 관광회사를 운영하던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77년, 17세 때 미국으로 유학보내져 매사츄세츠주 버크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축구선수를 꿈꾸었으나 프로선수가 될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르빗슈 유의 운동신경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한다. 다르빗슈의 아버지와 일본 출신의 어머니는 플로리다 주립 대학 유학 중에 서로 만나게 되었다. 다르빗슈의 아버지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2년 일본에 와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그냥 일본에 눌러 앉게 되었다. 가르치던 아이들을 두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 또한 전통을 중시하고 연장자를 존중하는 등 이란과 일본 문화의 공통점이 많아서 미국보다 일본에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파르사드 다르비시세파트는 현재 미국 국적자이며 일본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오사카부에서 태어난 다르빗슈 유는 부모에 의해 페르시아적 가치관과 일본식 가치관을 함께 교육받으며 양육되었다고 한다. 3살이 됐을 때 축구공과 야구공 중 야구공을 먼저 집은 것을 계기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다르빗슈는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고 영어만 할 줄 알았다. 아이스하키와 야구를 병행중 아이스하키가 너무 힘들어 야구로 취미를 굳히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해 중학교 시절에는 팀을 세계대회 3위까지 끌고 가는 저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50여개 고교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왔으나 결국 센다이의 토호쿠 고교로 진학했다. 많은 제안들이 들어왔었지만 토호쿠 고교 자체가 스포츠 명문이자 특히 치바 츠요시, 사토 마사오, 오이카와 미키오, 사사키 카즈히로 등을 배출한 야구 대명문이었고 결정적으로 집안 상황이 토호쿠 고교를 선택하게 했다고 한다.
190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속구는 평균 147km/h를 찍으며 초고교급 신인의 등장을 알렸다. 2학년 봄, 여름과 3학년 봄, 여름 총 4회 팀을 고시엔까지 끌고오는 중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다르빗슈가 2학년이였던 2003년 여름 고시엔에서는 등번호 1번을 달고 도호쿠 고교를 결승까지 진출시키는 활약을 펼쳤지만 이바라키현의 조소 학원에게 4대 2로 지며 동북 비원의 우승을 이루지는 못했고, 시합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2004년, 3학년 봄 고시엔에서 구마모토 공고를 상대로 고교야구 사상 12번째이자 10년 만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해 고교야구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토호쿠 고교는 8강에서 그해 센바츠 우승교인 사이비 고교한테 9회초까지 6 대 2 4점차로 앞서갔으나 9회말에 5점을 내주며 6 대 7로 대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허나 현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1] 당시에는 나쁜 사생활이나 자기 관리 때문에 성적이나 잠재력에 비해 데뷔 당시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리그를 지배했던 NPB 시절의 다르빗슈 |
NPB를 완벽히 압도했던, 순수 스탯 한정으로는 다르빗슈의 리즈 시절이다. 물론 이후 MLB에서는 리그의 수준이 NPB에 비하면 훨씬 높아진 탓에 리그를 압도하는 성적을 내기가 훨씬 어려워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NPB 시절의 다르빗슈는 다른 에이스급 투수들에 비해도 아예 차원이 다른 성적을 기록했다.[2]
3.1. 2005 시즌
5승 5패에 3.53의 ERA로 고졸 신인 치고는 그런대로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3]하지만 신인상 투표에서는 단 1표밖에 받지 못하며 3위에 그쳤다. 이 해 신인상 2위가 중고 신인왕 후보였던 나카무라 타케야[4], 1위를 차지하여 신인상을 받은 선수는 사회인야구 출신의[5] 쿠보 야스토모였다.[6]
3.2. 2006 시즌
그러나 약점이었던 사생활 문제를 해결했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였으며, 엄청난 연습을 통해 기량을 발전시킨 끝에 2006년 후반기부터 포텐이 폭발, 리그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아울러 데뷔한지 얼마 안 되어 프로 커리어 통산 유일한 우승을 경험했다.[7]
3.3. 2007~2008 시즌
첫 풀타임 시즌인 2007년엔 사와무라상, 골든 글러브, 퍼시픽 리그 MVP를 싹쓸이했고, 이후로 5년 연속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NPB의 절대자, 지배자라는 칭호[8]와 함께 리그를 완벽히 씹어먹었다. 다르빗슈의 NPB 마지막 5년은 NPB 역사상 손꼽히는 임팩트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대 KBO에 류현진이 있었다면 NPB에는 다르빗슈가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의 초특급 에이스였다.다르빗슈가 NPB를 막 씹어먹던 시절엔 마쓰자카 다이스케[9]와 비교가 자주 됐었는데, 마쓰자카가 은퇴하고 다르빗슈가 커리어 말년을 보내는 중인 현재는 마쓰자카가 한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1점대 ERA를 5년 연속으로 기록하고 커리어 전체 조정 ERA(평균자책점)가 마쓰자카의 커리어하이 1시즌 조정 ERA보다 좋은 등 비교 자체가 다르빗슈에게 실례인 수준이 되었다. 게다가 평균 8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마쓰자카의 최대 강점이라는 이닝 이터의 측면에서도 우위에 섰다.[10] 다르빗슈는 NPB 시절엔 거의 밥 먹듯이 완투를 한데다가 8이닝도 웬만해선 넘겼고, 7이닝 미만 경기는 그야말로 연례 행사였을 정도였는데, 그 해에 가장 심하게 털린 경기 정도를 제외하면 보기 힘들었다.
다르빗슈가 투고타저 시대라서 득을 봤다는 의견도 있으나, 2000년대 중반 퍼시픽리그에서 래빗볼 시대가 가고 투고타저로 접어들 쯤에도 마쓰자카는 1점대 ERA을 한번도 기록하지 못했다. 실제 2006년 퍼시픽 리그의 리그 평균 ERA가 3.63이었을 때 마쓰자카의 ERA는 2.16에 불과했던데 반해, 2007년~2010년 리그 평균 ERA가 3.57~4.03으로 2006년도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준이었을 때 다르빗슈는 전부 1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었다. 자세한 자료는 참고바람. 당시 투고타저였던건 맞지만 리그 상황을 고려해도 이미 다른 투수들을 아득히 상회하는 경지였다. 그나마 다르빗슈에게 조금이라도 비빌 수 있는 후대의 NPB 투수로는 메이저 진출 전까지 3년 연속 1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고 24승 무패 시즌을 완성한 다나카 마사히로 혹은 3년 연속 1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고 투수 4관왕을 기록하며 사와무라 상과 퍼시픽 리그 MVP를 휩쓴 야마모토 요시노부 뿐이다. 그런데 이 둘마저도 리그를 지배했고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건 자명하지만 다르빗슈처럼 무려 5년을 무지막지한 이닝을 먹어가면서 해먹은 건 아니기에 어떤 면에서는 다르빗슈가 이 둘보다도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기록을 세웠음에도 사와무라 상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심사위원들이 "자넨 젋잖아. 내년 이후에도 받을수 있으니까 뺏다.(君は若い分、来年以降もとれるしから外したよ)"라는 이유로 선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 참고.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사와무라 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3.4. 2009 시즌
이런 정신나간 활약 속에 두 번째 MVP를 차지한 2009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에서 프로 6년 차에 3억 3천만 엔의 연봉으로 연봉 3억 엔을 돌파하며 최연소 연봉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는 스즈키 이치로보다도 빠른 페이스였다.3.5. 2010 시즌
그리고 2010년에도 여전한 활약속에 2011 시즌 연봉은 5억 엔을 받으며 일본 프로야구 연봉 최고액을 받았다.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타선인 닛폰햄의 타선[11]이 다르빗슈가 각성한 2007년부터 다르빗슈의 등판 경기에서만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는 탓에 지독할 정도로 승운이 없었다. 그 덕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의심할 여지없는 리그 No.1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승수 때문에 사와무라상은 2008년에는 이와쿠마 히사시[12]에게, 2009년에는 와쿠이 히데아키에게, 2010년에는 마에다 겐타에게, 2011년에는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내주었다. 매년 200이닝 내외에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해도 타자들이 다르빗슈의 승을 챙겨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압권은 2009시즌으로 7이닝 3실점 패배, 8이닝 3실점 패배, 9이닝 3실점 완투패배 등 3실점 이상만 하면 무조건 패전 투수의 멍에를 썼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한 시즌이 바로 2008년과 2011년이었다. 2008년의 자세한 등판 일지가 보고 싶다면 이 쪽으로.
다만 일본 최고의 투수가 된지라 2007년부터 쉼 없이 국가대표에 차출된 탓에 무리한 스케줄 때문에 잔부상에 시달렸다. 팀에서도 말로는 관리를 해준다면서도 다르빗슈가 필요하면 무리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굴렸던 편이었다. 사실 다르빗슈 본인 스스로도 고집이 강한 편인지라 자기가 등판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등판하고 한 번 등판하면 웬만하면 계속 던지려는, 스스로 무리하는 경향도 있었다.
- 1. 2008 시즌 전 베이징 올림픽 예선에 참가했다가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닌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다.
- 2. 2008 시즌 중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팀을 떠나기 전 마지막 경기에서 8이닝 165구 완투라는 살인적인 혹사를 당한 후 베이징 올림픽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 3. 2009 시즌은 1.20~1.30의 미친듯한 ERA를 보여주며 리그를 지배하다 올스타전에서 강습 타구에 강타당해 손가락 골절을 당한 이후에도 팀 사정상 그대로 출전을 강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정도의 ERA를 유지하다 독감에 걸렸음에도 출전해 대난타당해 평균자책점이 상승했다.
- 4. 골절, 독감 이후 푹 쉬어야함에도 불구하고 2009년 일본시리즈에 다르빗슈를 투입, 부상을 더욱 악화시켜 2010시즌 초반 골골거리는 상태에서 스탯을 많이 까먹었다.
그러면서도 닛폰햄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포스팅 비용을 노리고 다르빗슈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팀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를 마냥 나쁘게 볼 수 없는게 닛폰햄 같이 재력이 부족한 지방 구단은 다르빗슈에게 지급하는 연봉 부담 또한 엄청나기 때문이다. 참고로 닛폰햄 연봉 총액이 약 25억 엔이었는데 그중에서 1/5인 5억엔을 다르빗슈 1명이 받았다.
이전까지는 "메이저 리그는커녕 일본 내 다른 팀도 싫다"며 닛폰햄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고 닛폰햄 구단주도 재정 문제에도 불구하고 연봉 10억 엔을 주더라고 잡겠다라며 뻥카를 쳤지만,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에는 다르빗슈도 메이저 리그에 관심이 있는 것이 확실해졌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찾아 2011 시즌이 끝난 뒤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3.6. 2011 시즌
등판일지 |
시즌 시작 전부터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대적인 벌크업을 통한 구속 증가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시범경기에서부터 평균 150km/h의 구속을 선보였다. 그러나 지난인 2010 시즌에 비해 3~4km/h가 증가한 구속에 흥분한 듯 경기 초반부터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속구를 뿌려댔고 결국 그 점이 페이스 조절 실패로 이어지며 시즌 개막전인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서 7이닝 7실점으로 대난타당했다. 경기 초반부터 150km/h 중반대의 강속구로 상대타선을 윽박질렀지만 그로 인해 경기 중반부부터 140km/h대로 구속이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결국 홈런을 허용할때의 구속은 147km/h로 정작 필요할 때 강속구를 쓰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그렇지만 그 경기 이후 자신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페이스 배분에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이며 이후 전경기(27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 피칭을 선보이는 등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리그를 지배하는 괴물 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중후반까지만 해도 강력한 3관왕 후보였지만, 시즌 막판 팀 타선의 침묵속에 승수를 쌓지 못하며 20승 및 다승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그래도 성적 자체는 시즌 총 28시합 28선발 10완투 232이닝 18승 6패 ERA 1.44 276탈삼진이라는 MLB 진출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이었다.
다만 이 시즌들어 급작스런 벌크업의 여파인지 커맨드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패스트볼 커맨드가 절정이던 2009년에 비해 흐트려졌다는 말이 나왔는데, 2012년 시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 시절 최고 커맨드였다는 2009년 또한 커맨드 자체가 우수한 것이라기보다는 리그 수준을 완전히 능가하는 압도적인 구위로 정면승부를 걸어 그렇게 보였다는 게 중평이었다.
4. 메이저리그 포스팅
2011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 FA 시장에 좋은 선발투수라고 해봐야 C.J. 윌슨, 마크 벌리 정도가 고작인 사정상 다르빗슈의 포스팅은 큰 관심을 모았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텍사스 레인저스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으며 뉴욕 양키스, 시카고 컵스 등 많은 팀들이 입찰에 참가했다.그런데 초기에 다르빗슈 측에서 요구하는 연봉이 너무 큰 금액(최소 2,000만 달러, 약 230억원)이라서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난색을 표했다. 당시 기준으로 이 정도 연봉을 받는 이들은 요한 산타나, 로이 할러데이, 클리프 리, CC 사바시아 등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십수년을 뛰면서 검증된 에이스 투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포스팅이 마무리되었고 복수의 구단이 우선 협상권을 얻게 되었는데, 대체로 텍사스 레인저스 or 토론토 블루제이스일 가능성이 제일 크고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or 시애틀 매리너스일수도 있다는 예측이 있었다. 시카고 컵스도 포함된 게 분명하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토론토 구단의 한 관계자는 구단주 그룹인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측에서 '금액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다르빗슈를 꼭 잡아라'라는 명을 내렸다고 넌지시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의외로 큰 손이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는 참여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하며 뉴욕 양키스는 참여했다 안했다 이야기가 엇갈렸는데, 우선 협상권 가능성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면 그냥 찔러본 수준이다.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던 시카고 컵스가 느닷없이 포스팅에 참여한 것은 의외라는 반응들이 많았다. 포스팅 금액은 비공개이지만, 적어도 마쓰자카의 입찰액인 5,111만 1,111달러 11센트보다는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또한 다르빗슈의 연봉은 스토브리그의 상급 FA 투수들인 C.J. 윌슨과 마크 벌리가 기준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이 영입한 윌슨은 5년간 $77.5M, 마이애미 말린스가 영입한 벌리는 4년간 5,800만 달러이다. 즉 1,450-1,500만 달러 수준이라는 것. 초년에 1,500만 달러로 시작해서 다년 계약으로 $20M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텍사스 레인저스가 낙찰자로 발표되었다! 포스팅 금액은 마쓰자카를 조금 넘는 5,170만 달러였다. 발표 전에는 가장 많은 금액을 써넣은 구단이 최소 4,000만 달러 ~ 최대 5,000만 달러를 베팅한 토론토이고 컵스도 상당한 금액을 써넣었지만 토론토에는 미치지 못해서 2위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는 텍사스와 토론토의 입찰액 차이는 꽤 커서 텍사스가 무난히 승리했다고 한다.그리고 한달여간의 교섭 끝에 한국시각으로 2012년 1월 19일 오전 7시(데드라인 정각)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6년 6,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13] 당초 연봉 2천만을 말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내려온 금액이며, 또한 특이한 점은 양자간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계약기간 문제를 첫 5년간 사이 영 상 수상이 있을 경우 5년차 이후 FA를 선언할 수 있다는 옵트아웃 조항으로 합의를 했다. 일단은 텍사스의 승리로 돌아간 것으로 보여 텍사스 팬들은 벌써부터 사이 영급 에이스로 기대하거나 절망했다.
이 포스팅과 계약 협상의 결과 MLB 역대 가장 비싼 우완 1위에 랭크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 대형 우완투수들이 줄줄이 FA가 되거나 계약을 갱신하면서 이 기록은 얼마 가지 못했다.[14]
여담으로 다르빗슈의 포스팅 금액 5170만 달러는 포스팅 시스템이 두번이나 개정된 지금까지도 역대 1위의 포스팅 금액이며, 현 규정으로는 최소 $333M의 계약[15]을 체결해야 갱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다.
5. 텍사스 레인저스
5.1. 2012 시즌
2012 베이스볼 아메리카 유망주 순위 4위였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팀의 간판타자였던 조시 해밀턴도 입단식에 참여했다. 193cm, 109kg의 거구인 해밀턴에 하드웨어 상으로는 전혀 꿀리지 않았다.
2011년 일본 시절부터 꾸준히 지적되던 패스트볼 커맨드가 스프링캠프부터 발목을 잡으면서, 예상외로 어려운 시작을 보이던 다르빗슈의 2012년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을 돌아보면 아시아 수준에서는 다르빗슈의 잠재력을 다 끌어내는 게 불가능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 시절 구속, 구위, 커맨드, 제구력 등 투수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투수로서 완성형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것은 다르빗슈의 구위를 제대로 공략할 수 없는 아시아 야구 레벨에서의 이야기일뿐 그것을 공략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16]에서 다르빗슈는 구위 및 스터프는 좋지만 커맨드를 비롯한 종합적 완성도는 크게 떨어지는 미완의 원석이었다.
5⅔이닝 5실점 5탈삼진으로 데뷔전을 가졌다.
모든 구질이 플러스 피치[17]로 평가받으며 한창 무너지던 시즌 중반에도 피안타율과 탈삼진율은 메이저리그 최상위일 정도로 구위는 위력적이었지만, 포심 패스트볼의 커맨드 및 제구의 문제로 시즌 중반부터 완전히 무너졌다. 아예 스트라이크를 못 집어넣는 수준일 정도.
그렇지만 8월 중순부터 반등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세가지 요인이 가장 컸다.
1. 이전까지 다르빗슈의 투구 스타일을 손보려던 마이크 매덕스 투수코치와 전임 포수대신 등장한 지오바니 소토가 다르빗슈 본연의 투구 스타일을 존중해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18]
2. 커맨드가 불가능에 가까운 포심 패스트볼 및 활용도가 적은 구질의 구사비율을 떨어트리고 투심 패스트볼 및 커터같이 통하는 구질의 비중을 급격히 끌어올린 것
3. 데이빗 프라이스의 투구모습을 보며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시정한 것[19]
이런 요인들을 통해 시즌 막판부터는 위력적인 구위를 적재적소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된 다르빗슈는 막강한 모습을 선보였다.
결국 16승 ERA 3.90, 221탈삼진 등 상당한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을 마쳤다. 시즌 막판 대호투로 팀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2012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에 선발로 등판해 6⅔이닝 3실점 2자책점의 호투를 펼쳤으나, 주포 조시 해밀턴을 비롯한 팀 타선이 침묵을 지키며 팀은 1:5로 패배하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신인치고 상당히 훌륭한 성적이기에 다른 시즌이었다면 신인왕도 노려볼 법 했지만, 강력한 MVP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활약을 보인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마이크 트라웃의 존재로 빛이 바랬다.
결과적으로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까지도 무언가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던 다르빗슈 개인에게는 처음으로 "제구가 안된다", "커맨드가 안된다",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등 좌절감과 회의감을 잔뜩 안겨준 첫 시즌이었지만, 주변의 충고와 노력을 통해 다음 시즌에 대한 희망 또한 확인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5.2. 2013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5.3. 2014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1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5.4. 2015 시즌
6살 연상인 전 레슬링 세계 챔피언 출신 야마모토 세이코와 사실상 재혼하여 아이까지 가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그리고 3월 6일 한 여성이 야마모토 세이코와 소식이 알려지기 전 다르빗슈가 자신과 깊은 관계였다는 카더라성 소식도 나왔다.3월 5일 시범경기에서 1이닝만 던지고 삼두근 통증으로 교체되어 MRI 촬영을 가졌는데 ## Jesse Sanchez의 트위터 소식에 따르면 토미존 수술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되었다. 하필 시범경기가 시작되며 정규시즌이 거의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터져나와 그 자신과 텍사스 레인저스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일.
3월 11일 2차 검진도 수술권유를 받아 3차 검진이 남았다지만 사실상 수술은 확정적. 구단은 다르빗슈의 팔에 보험을 들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지만 당장 선발에 공백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상.
3월 17일 수술이 공식적으로 확정.
5.5. 2016 시즌
부상을 극복하고 5~6월 쯤에 복귀한다는 기사가 났다. 또한 투구폼을 조금 수정한 것이 확인되었다. 첫 마이너 재활등판에서 97마일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상황 ## 이후 두 번째 마이너 재활등판에서 98마일 2개, 97마일 7개를 던졌다! 수술 이후 구속 증가 케이스가 드물게 있는데 다르빗슈 또한 이 케이스가 된 상황? 팬들의 기대가 점점 더 증폭되고 있다.드디어 5월 2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전에 등판하여 5이닝 동안 7K 1자책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가장 빠른 공은 98마일을 찍었다.
7월 1일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로 출전. 4⅓닝 동안 2실점 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7월 22일 캔자스시티 로얄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등판. 6이닝 동안 11개의 탈삼진으로 여전한 탈삼진 능력을 보여줬으나 3실점하며 패전이 되었다.
8월 24일 신시내티 레즈전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쳤다! 그것도 센터필드를 넘어가는 밀어친 400피트 이상의 홈런. 프로데뷔 이후로도 첫 홈런 1호 홈런 메이저리그 통산 3번째 안타, 개인통산 2타점!(닛폰햄~텍사스)
10월 7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2016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 등판했는데 초반엔 트로이 툴로위츠키에게 허용한 피홈런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막아내다가 5회들어 케빈 필라, 에제키엘 카레라 그리고 에드윈 엔카나시온에게 솔로 홈런 3방을 허용하면서 무너졌다. 결국 5이닝 5실점 4피홈런 4탈삼진 1볼넷을 기록하고선 강판되었고 팀도 13개의 안타를 치고도 3점밖에 얻지 못하는 공격력을 보여준 끝에 2연패를 당하며 벼랑끝에 몰리게 되었다.
5.6. 2017 시즌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역시 조국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대표팀 합류를 고사하였다. 지난 시즌 부상으로 한해 농사를 날려먹었기에 시즌 직전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아랍계 국적자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행정명령 때문에 이란 국적자인 아버지가 아들의 텍사스 경기 직관을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났다. # 물론 다르빗슈 본인은 일본 국적을 선택했기 때문에 큰 지장은 없다.
6월 23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전을 앞두고 상대 선발 다나카 마사히로와 맞대결로 미국 현지와 일본에서도 상당한 빅매치로 주목 받았다. 결과는 다르빗슈 7이닝 2피안타 0볼넷 10탈삼진 무실점, 다나카 8이닝 3피안타 2볼넷 9탈삼진 무실점으로 그야말로 만화에서 나올법한 명품 투수전을 보여주며 야구팬들의 눈을 호강시켰다. 경기는 연장에서 1:2로 양키스가 승리했다.다르빗슈와 다나카 투구 모음
개막전부터 꾸준히 로테이션을 소화했지만, 승운도 잘 안따르고 본인도 기복있는 모습을 보이며 트레이드 전 시점까지 6승 9패 방어율 4.01을 기록했다. 특히 트레이드 전 마지막 등판이었던 마이애미전에서는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3 2/3이닝 10실점으로 무너졌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이래 최다 실점. 사실 6월까지는 3.11이라는 훌륭한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이었으나. 7월에 대량 실점을 하면서(7월 ERA 7점대) 평균자책점이 폭등했다.
그리고 결국 트레이드 데드라인 시점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반대급부는 거포 유망주 윌리 칼훈을 포함한 유망주 패키지 3명. 이 트레이드가 결정되자 다르빗슈 본인은 "난 (텍사스로) 다시 안 돌아옴" 이라고 농담조로 한 마디를 던졌고, 이로 인해 텍사스 레인저스의 팬들에게 비수를 제대로 꽂아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농담을 던진 직후 “텍사스가 낮은 조건을 제시하면 돌아오기 어렵다. 여러 팀과 이야기할 생각이라서 아직 FA 계약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
레인저스를 떠나면서 레인저스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신문광고를 게재했다.#
지난 2012년부터 5년하고도 7개월 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팬 여러분들, 팀메이트들, 스태프들 그리고 그 밖에 저를 지지해준 모든 분들이 안 계셨다면, 일본에서 건너온 저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만 레인저스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10실점을 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네요. "다르빗슈는 삼진만을 신경쓴다"라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삼진을 신경썼을 지 모르지만, 팬분들, 팀, 팀메이트들, 그리고 팀 스태프들은 항상 저의 최우선순위였습니다. 모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길! 다르빗슈 유 |
다저스에서의 첫 등판은 8월 4일 뉴욕 메츠 원정에서 이뤄질 예정. 유니폼 번호는 닛폰햄 때부터 달던 11번 대신 21번을 달았는데, 11번을 로건 포사이드[가 달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번호 중 적당히 골랐다고. 참고로 21번은 잭 그레인키가 다저스 시절부터 달았던 번호다.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에 대해 2017년 월드 시리즈 당시에 김형준 위원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이 트레이드를 원래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였다고 한다.[20] 그런데 레인저스 구단은 이를 보고 "난 너네 잘 되는 꼴 못 봄"하면서 애스트로스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고 다저스에게 데드라인 직전에 헐값에 팔아넘기게 된 거라고.
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6.1. 2017 시즌
8월 4일 뉴욕 메츠와의 선발 등판에서 7이닝동안 3피안타 1사사구 10K 무실점의 호투로 다저스이적 첫 등판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팀도 6:0으로 승리를 거두며 자신은 시즌 7승째를 챙겼다. 그러나 그 이후 등판들은 8월 10일 애리조나 상대로 5이닝 5피안타(1피홈런) 10K 2실점, 1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상대 6이닝 8피안타(3피홈런) 2K 3실점, 10일 DL 후 27일 밀워키 브루어스 상대로 5이닝 6피안타(1피홈런) 7K 3실점, 9월 2일 더블헤더 1차전으로 인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더블헤더 2차전에서 3이닝 8피안타(1피홈런) 5K 5실점이라는 등판을 기록하여 다저스 이적 후 5경기 선발 등판 26이닝 30피안타(6피홈런) 10볼넷 34K 13실점 피안타율 .291 WHIP 1.54 ERA 4.50 2승 2패가 된다.9월 8일 콜로라도 로키스와 홈경기 2차전에 등판하여 1회에 솔로 홈런을 맞지만 4회까지 순항했다. 그러나 5회초 빅이닝을 내주며 재역전을 허용하고 4⅓이닝 5실점을 기록하며 강판당했고, 패전한다.
이후에는 투구폼을 찾은 것인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원정 마지막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하면서 위닝시리즈를 결정지었으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5⅓이닝 1실점으로 경기를 마감한 데에 이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다시 한 번 7이닝 1실점으로 호투, 자신의 페이스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정규시즌을 마감한 이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2017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서는 5이닝 1실점 7탈삼진으로 경기를 마감하면서 팀도 2017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올려놓고 자신은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후 시카고 컵스와의 2017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도 컵스타선을 6⅓이닝 6피안타 1실점으로 묶으면서 승리를 거뒀다. 이후 시리즈 스코어 4-1로 다저스가 NLCS마저도 꺾으면서 생애 첫 월드 시리즈의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9일간 푹 쉬고 등판한 2017년 월드 시리즈 3차전, 생애 첫 월드 시리즈 등판 경기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와르르 무너지며 4실점을 얻어맞고 고작 1⅔이닝만에 조기강판 당하며 굴욕을 당했다.[21] 조기강판 이후 율리에스키 구리엘의 인종차별 제스처 사건에까지 엮이면서 말 그대로 굴욕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렸던 하루.[22] 이후 다르빗슈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며 대인배 인증을 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여기엔 당신과 나 모두 포함된다. 오늘 있었던 일은 옳지 않았다. 하지만 난 우리가 이로부터 그를 비난하기보다, 배우는 것에 공을 들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이로부터 뭔가를 얻어갈 수 있다면, 인류에게 큰 발걸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멋진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분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유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난 여러분의 큰 사랑을 믿는다.
No one is perfect. That includes both you and I. What he had done today isn’t right, but I believe we should put our effort into learning rather than to accuse him. If we can take something from this, that is a giant step for mankind. Since we are living in such a wonderful world, let’s stay positive and move forward instead of focusing on anger. I’m counting on everyone’s big love.
경기 종료후 인터뷰 중.
No one is perfect. That includes both you and I. What he had done today isn’t right, but I believe we should put our effort into learning rather than to accuse him. If we can take something from this, that is a giant step for mankind. Since we are living in such a wonderful world, let’s stay positive and move forward instead of focusing on anger. I’m counting on everyone’s big love.
경기 종료후 인터뷰 중.
이 인터뷰가 있었던지 며칠 후, 월드 시리즈 6차전을 앞두고 구리엘 본인이 다저스 라커룸에까지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자 다르빗슈 또한 그 사과 영상이면 되었다고 구리엘을 용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면모와는 별개로 11월 1일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1⅔이닝 3피안타(1피홈런) 5실점(4자책)으로 또 두들겨맞으며 조기강판당했고, 결국 팀이 패배하며 우승을 결정적으로 무산시킨 원흉이 됐다. 월드시리즈 두 경기 합산기록이 3⅓이닝에 평균자책점 21.60이란 참혹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클리프 리의 재판을 보던 모습.[23] 또 본인의 FA 계약을 앞두고 던진 경기였다보니 FA 계약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24]
SI가 휴스턴 타자와의 인터뷰를 전했는데,휴스턴 선수들은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다르빗슈의 셋 포지션에서 공을 만지는 모습에서 구종을 파악하였고 여기에 맞춰서 대응을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기사 하지만 2년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사인 훔치기 논란이 터졌고, 이후 대다수의 팬들은 사실 투구 습관 노출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사인을 훔쳐놓고 뻔뻔하게 둘러댄 것으로 여기고 있다.[25]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역대 최초 선발투수가 2이닝도 못 채우고 2게임 연속 대량실점하며 강판당한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등 워낙 제대로 역적질을 해서인지 몰라도 다저스 언론에서 다르빗슈는 단순히 금지어가 아니라 조롱 소재로 쓰이고 있다. 그 예로 야스마니 그랜달이 2018년 포스트 시즌에서 결정적인 삽질들을 저지르자 '다르빗슈가 마스크 썼다.'며 조롱하는 등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2019년 11월 12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사인 훔치기 논란 기사가 터졌다. 이번 기사는 단순한 의혹 제기를 넘어 2017년까지 휴스턴에서 뛰었던 투수 마이크 파이어스와 익명의 증언자 3명의 증언을 기반으로 했다. 다르빗슈 유가 슬라이더를 읽혀 무너지면서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쳐야 했던 다저스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도 “투구습관을 잡는데 능한 선수들도 다르빗슈의 투구습관을 잡아내지 못했다”라며 사인 훔치기 의혹과 연관성을 암시했다. 팬들도 그동안 몰라서 미안했다며 다르빗슈의 SNS에 사과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다르빗슈 본인은 상대팀의 사인 훔치기보다는 자신이 못해서 털린 거라고 자책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벌인 치팅의 최대 피해자로 여겨지고 있다. 토미 존 수술을 받은 것을 빼면 잘 이어나가던 커리어에 큰 오점을 남긴 것도 모자라 투구 습관이 노출됐다는 뻔뻔한 거짓말에 속아 아무 문제 없는 멀쩡한 투구폼을 억지로 뜯어고쳐야 했다.[26] 결국 투구폼을 뜯어 고친 첫해였던 2018년은 폭망, 2019년에도 전반기는 영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후반기부터 부활, 2020년 타르 의혹이 있다지만 다시 맹활약하며 1선발급의 기량을 되찾기까지 1시즌 반이라는 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7. FA
예정대로 시즌 종료 후 FA가 되었다. 월드 시리즈가 끝난 뒤 다저스 구단과 다저스 팬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다.물론 다저스 팬덤의 반응은 굉장히 싸늘하며, LA 지역 언론들도 한결같이 '다저스에 남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기사 FA로 풀린 선수들 중에 이름있는 선발급 투수들이 많지 않고 다르빗슈가 그동안 기록이 좋은 만큼 당장 연봉이 깎일거라고 보는 매체는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2018년까지 큰 돈을 투자하기에 사정이 좋지 않은 다저스에 남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낮았던 것이 사실.[27] 그 와중에 휴스턴 애스트로스나 미네소타 트윈스,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까지 링크가 되었다. 이 중 5년의 계약을 제시한 팀은 밀워키 브루어스였다고 한다.특히 시카고 컵스와는 구단 관계자와 연말부터 미팅을 하는 등 강하게 연결됐다.다르빗슈는 자기 트윗을 통해 접근한 미스테리 팀 중 한명이 다저스라고 흘렸는데, 이에 대해 다저스 팬덤은 대체적으로 그 상황에서 눈치 없게 SNS나 하고 앉아있냐면서 정신을 못 차렸다는 반응이 지역을 불문하고 많은 편이다. SNS 때문에 선수 본인의 이미지를 스스로 까먹는 또다른 케이스가 될지도.[28]
이후 각 기자들의 소식에 따르면 1월 말 이내에 행선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스프링 캠프를 일주일 가량 남긴 2월 10일 컵스와 6년 126m에 계약했다. 텍사스와는 서로 큰 관심이 있었으나, 정작 팀은 오퍼조차 하지 못했고, 했다 해도 $75m조차 보장해주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양키스 역시 관심은 있었으나 사치세 때문에 패스. 가장 적극적이었던 미네소타는 최소 5년 $100m을 준비했지만, 6년 이상은 원치 않았고, 옵트아웃 조항 삽입도 꺼렸다고 한다. 다저스도 오퍼를 넣었으나 컵스의 조건에 살짝 못 미쳤고, 밀워키도 5년 $100m을 제안하긴 했는데 이는 지구 라이벌 컵스가 더 높은 값을 부르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고 한다.한때 썰이 나왔던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피츠버그와의 트레이드로 게릿 콜을 데려오면서 일찌감치 제외된 모양새.
이후 컵스 스프링캠프장 기자회견에서 '구단 측에서 성실하게 협상에 임해줘서 믿음을 줬다.'라며 컵스 이적 배경을 밝혔으며,한편으로는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적합한 월드시리즈 진출권 팀이어서 컵스로 왔다고 밝혔다.기사.등번호는 일본 시절부터 썼던 번호인 11번을 다시 쓰게 됐다.[29]
2019년 11월 개인 유튜브로 FA 당시 비화를 털어놨다.해외야구 갤러리 유저가 정리한 내용오퍼 규모 및 컵스와의 계약 과정을 털어놨는데 계약 마지막 단계에서 테오 엡스타인 단장이 메일로 환영 영상을 보냈는데 마지막에 리글리 필드 야간 경기에서 아나운서가 'WS 7차전 선발 다르빗슈'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어서 아내와 함께 보다가 감동했다고 한다.
8. 시카고 컵스
8.1. 2018 시즌
시카고 컵스에서는 FA로 팀을 떠난 제이크 아리에타를 대신할 전망이다. 그러나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시즌 첫 등판부터 제대로 털리면서 시작이 좋지만은 않다. 두 번째 경기인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는 홈런을 한 방 맞긴 했지만 6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보여주며 반등을 하는가 했으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다시 털렸고 네 번째 경기인 콜로라도 로키스 원정경기에서는 4회까지 잘 하다가 5회 한 이닝만에 5실점을 하면서 4.2이닝 5실점 강판. 4경기 기록이 2패에 평균자책점이 6.86으로 밀워키전을 제외하면 모두 5회도 못채우고 강판되는 장면을 연출하며 심히 저조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FA로 팀을 떠난 제이크 아리에타가 필라델피아로 가서 첫 경기를 제외하고는 호투를 보여주고 있는터라 컵스 팬들을 더 쓰리게 만들고 있다. 자칫하면 테오 엡스타인이 2011년에 보스턴에서 일으켰던 벨트레 거르고 크로포드가 컵스에서 또 반복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이후 다행히 4월 27일 밀워키와의 홈경기에서 6이닝 8탈삼진 1실점(비자책) 호투를 보여주면서 반등의 기미를 보여줬지만, 5월 3일 콜로라도 로키스 홈경기에서는 또다시 4⅓이닝 7피안타(3피홈런) 3볼넷 8탈삼진 5실점(4자책점)을 기록하였다. 팀은 11대 2로 대패.
5월 3일 기준으로 0승 3패 ERA 6.00의 최악의 성적[30]을 내면서 강성하기로 알아주는 컵스 팬덤에서는 벌써부터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다.[31] 이후 5월 7일에 급기야는 10일자 부상자 명단[32]에 등재되었는데, 등재 사유가 다른 것도 아닌 인플루엔자. 이후 10일 DL을 다 채우고 16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 등판했는데 4이닝 1실점으로 잘 막다가 종아리 경련으로 또 강판했다. 다르빗슈 본인은 어떤 비난도 다 달게 받겠다곤 하지만, 5월 16일까지 아직도 0승에 머무르면서 당연히 컵스 팬들의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하필 다르빗슈를 택하며 필리스로 보낸 아리에타는 구속저하의 우려를 뒤로 하고 2점대 ERA로 순항중이라 달빛은 더 까인다. 해외야구 갤러리에서는 과거 텍사스 선배였던 박찬호와 너무 행보가 유사하다며 찬호빗슈, 달찬호라고 깐다.
이후 5월 20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경기에서 1회에만 40구 가량을 던지며 꾸역투를 펼쳤지만 6이닝 2피안타 3볼넷 1실점으로 오랜만에 밥값을 하며 드디어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그런데 5월 26일 다르빗슈가 오른팔 삼두근 건염으로 24일(현지 날짜)부터 10일 DL에 올라 6월 3일 쯤에야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소식이 나오며 시즌 두 번째 DL에 오른다.
이후에 복귀를 준비한다고 알려졌으나 6월 27일 다저스 원정에서 캐치볼을 하다가 5분만에 중단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야구 외적으로도 컵스 팬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다르빗슈는 현재 시카고 교외 에반스톤 시 미시간호수변에 살고 있는데, 시 당국에 보안과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자택 앞마당에 게이트를 설치하고, 경계를 따라 1.8m 높이 울타리를 설치하고 싶다 특별 승인을 요청해 이웃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시 조례상에서는 교통량이 많은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 주탁 앞마당에 울타리 설치를 불허하며, 뒷마당 울타리는 높이가 1.2m를 넘지 않게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다르빗슈가 이미 자택 측면 뒷마당에 임시 철제 울타리를 쳐놓았음이 알려지자 주민들이 시 규제 당국에 화나 항의 이메일이 빗발치고 있다. 그나마 온건히 말하는 사람도 그는 유명인이니 염려를 이해하지만 이웃 주민들 거주지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호수 조망권도 중요하다고 반발한다. 이외에 사람들은 에반스톤에 살려면 에반스톤 생활 방식을 따라야지 싫다면 큰 게이트가 있는 서부 교외로 이사가면 지역사회 구성원임을 생각할 필요없이 원하는 보호장치를 찾을 거라 꼬집었다.
이미 에반스톤 보존위원회와 건축규제위원화는 6월에 표결로 시 조례에 예외는 없다고 판결했으나 다르빗슈는 이의를 제기해 재심의에 들어간 상태다.
8월 19일 싱글A에서 재활등판을 했으나 부상으로 1이닝만에 강판했다. 만약 진짜 부상이면 올시즌 복귀는 요원한 수준이었는데 결국 8월 21일 검진결과 삼두근 염좌가 재발하고 추가로 팔꿈치 피로골절도 발견되면서 전치 6주가 나와 시즌 아웃이 확정되었다. 이쯤 되면 자택에 울타리 설치한 게 선견지명일 수준이다.
표면적으로는 감독과 동료는 다르빗슈를 지지해주고 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실언을 했을 때도 감독은 팀은 다르빗슈를 돕고 있다며 감싸줬다. 시즌 아웃에 대해서는 대단히 실망스럽지만, 피로골절을 미리 알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필요한 부위만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다르빗슈와 정반대로 컵스는 무난하게 가을 야구를 준비하면서 다르빗슈의 존재감이 지워졌다.
8.2. 2019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19년 문서 참고하십시오.8.3. 2020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2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9.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컵스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전담 포수인 빅터 카라티니는 다르빗슈가 떠났다며 작별 인사를 SNS에 남겼는데, 다르빗슈는 너도 나랑 같이 간다는 답변으로 받아쳤다.[33]
9.1. 2021 시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개막전 선발로 내정되었다. 배터리는 위의 너도 나랑 같이 간다의 주인공 카라티니. 경기내용은 1회 1실점 이후 무실점으로 잘 막다가 5회에만 홈런 2방을 맞고 4⅔이닝 8피안타 2피홈런 4실점으로 싸고 강판됐다. 이후 7회말 팀이 역전하며 다르빗슈는 ND.이후 경기들에서는 팀이 기대한 1선발의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5월 17일 홈경기에서는 파드리스 선수로서 첫 번째 안타를 2루타로 6회말에 기록했다. 마운드에서는 7이닝 무실점 10K 괴력투를 펼쳤다.
6월 21일, 메이저리그 데뷔 197경기만에 1500탈삼진을 잡아내어 랜디 존슨의 종전 기록인 206경기를 9경기 단축했다.
메이저리그 후반기에는 총 3경기 정도 잘 던지기도 하였으나 나머지 경기에서 크게 무너지면서 후반기 등판 경기 총계 방어율이 6.16에 달할 정도로 최악의 부진을 겪는 중이다.
무엇보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는데 9월 IL을 갔다 온 후에 다시 허리 부상으로 IL을 갔으며 시즌이 끝나기 2주전에 시즌아웃을 선언했다.
전반기에는 올스타전에도 출전하면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나, 후반기의 부진으로 결국 최종 방어율 4.22, 본인의 풀타임 시즌 중 처음으로 200탈삼진을 달성하지 못하는 등 2018년 다음으로 나쁜 시즌을 보냈다.
9.2. 2022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2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9.3. 2023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2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9.4. 2024 시즌
자세한 내용은 다르빗슈 유/선수 경력/202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9.5. 2025 시즌
10. 국가대표 경력
다르빗슈는 WBC[34] 같은 메이저 국가 대항전에 잘 출전하지 않은 탓에 프로 선수로서 출전한 국가대표 경력은 생각보다 적다. 마쓰자카 다이스케와의 직접적인 비교에서도 선수 개인으로서는 다르빗슈 유가 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국대 커리어는 마쓰자카의 우세라는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이다.[35]다르빗슈 유가 프로 선수로서 출전한 국가 대표 경기는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와 2008 베이징 올림픽 그리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2023 WBC에는 참가를 확정지었는데, 이는 무려 14년 만의 국가대표 복귀로, 일본 팀은 오타니 쇼헤이와 함께 MLB 1선발을 얻게 되는 호재를 맞이했다.
10.1.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먼저, 다르빗슈가 프로 선수로서 처음으로 나선 국가대표 경기는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이다. 이 대회는 베이징 올림픽 직행 진출 티켓이 걸린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이기도 했다. 당해년도에 다르빗슈 유는 그간 모아왔던 원기옥을 터트리며 포텐이 폭발했고 그야말로 기량이 만개했다. 이 해에 기록적인 한 해를 보내며 다르빗슈 유는 12월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나서는 일본 국가대표팀에 당당히 선발된다. 당시 대회에서 일본은 첫 경기였던 중국과, 한국을 잡아내며 마지막 경기인 대만과의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다르빗슈 유는 처음 예상과 달리 두 경기에서 나서지 않다가[36]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직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다. 여차해서 선발로서 경기를 망쳐 대만에 경기를 내주면, 한국과 2승 1패 동률이 되어 득실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었다. 당시는 예선 1위만이 본선에 직행했기 때문에 3승 무패로 대회를 마무리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이 중요한 경기에 다르빗슈 유는 리그에서 보여주던 괴물같은 모습을 재현해내며 대만 타자들을 곤란하게 하였다.- 팀 타자들이 1회에 선취점을 따내기는 했지만 이후 6회까지 침묵하며, 1:0의 불안한 리드가 계속되었다. 다르빗슈 유도 데드볼로 출루시키거나 볼넷을 내주는 등 한때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아낸다. 하지만, 1:0으로 앞서고 있던 6회말 투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3번 타자 펑정민에게 안타를 내준 뒤, 1-3 카운트에서 4번 타자 천진펑[37]에게 실투를 던지게 되었고 천진펑이 이를 놓치지 않고 밀어쳐서 역전 투런 홈런[38]을 내주고 만다. 아무래도 당시 대만의 홈이었던지라, 원정이기에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며 프로 첫 국가대표 경기에 올림픽 직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에서 1:0 불안한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실투가 나온 것으로 사료된다. 그 실투를 상대 4번 타자가 놓치지 않았던 것. 그래도 다르빗슈 유는 후속 타자를 아웃 처리하여 이닝을 잘 끝냈다. 7회초에는 일본 타선이 대 폭발하며 대거 6점을 뽑아 7:2로 재역전 하였고, 7회말 다르빗슈 유는 다시 마운드에 올라 잘 마무리 하여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고 이후 8회에는 후지카와 큐지로 교체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9회초에는 아라이 다카히로의 홈런 등으로 일본은 3점을 추가하였고, 9회말은 우에하라 고지가 삼자범퇴로 잘 처리하며 10:2로 경기가 종료. 다르빗슈 유는 첫 국가대표 경기에서 선발 승을 올리며 승리 투수가 된다.
이날 기록은 7이닝 3피안타 6탈삼진 4사사구(3볼넷 1사구) 2실점 ERA 2.57로 리그에서 보여주던 괴물 투수의 명성에 걸맞은 기대만큼의 피칭은 아니었지만 어린 투수가 중요한 경기 그것도 본인 커리어 최초의 국가대표 경기에서 불안한 리드 속에서도 2실점만으로 마운드를 잘 지켜주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일본 언론의 반응이었다. 다르빗슈 유의 호투와 팀 타자들의 호조로 쉽게 대만을 꺾고 일본은 올림픽 직행을 확정짓게 된다. 그러나, 8개월 뒤 정작 올림픽 본선에서는 대참사가 일어나며 일본 팬들과 언론이 난리나게 된다.
10.2. 2008 베이징 올림픽
그 다음해(2008년)에 다르빗슈 유는 개막전 1:0 완봉승을 포함 승승장구 하며 전년도 이상의 페이스로 승리를 쌓아올리면서 시즌 전반기부터 최다승,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라쿠텐 골든 이글스의 각성한 투수 이와쿠마 히사시와 타이틀 경쟁을 펼쳤다.[39] 다르빗슈 유는 엄청난 모습과 성적으로 당연히 베이징 올림픽에 선발 되었고, 올림픽이 열리기 전인 7월 17일까지 11승을 올리는 등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반기 마지막 등판인 7월 24일 지바 롯데와의 경기에서 165개의 완투에도 불구하고 만루 홈런을 허용하는 등 5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살인적인 혹사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다르빗슈의 컨디션 난조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베이징에 건너가자마자, 일본은 첫 경기인 쿠바와의 경기에 다르빗슈 유를 선발로 내보낸다. 하지만, 다르빗슈 유는 리그 마지막 경기의 혹사 이후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대표팀 일정을 소화하다 베이징에 넘어가는 바람에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리그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던 다르빗슈 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4이닝 4실점 패전 투수가 된다. 그래도 당시 경기를 자세히 보면 5회 전까지는 2실점만 하며 일본 타자들이 2점을 뽑아준 덕에 2:2 동점으로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막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5회 때 프레데릭 세페다[40]에게 볼넷을 내준 후, 후속 타자 알렉세이 벨[41]에게 2루타를 맞고 노아웃 2,3루 위기 상황에서 승계주자를 남겨두고 마운드에서 강판 되었다. 이후 올라온 투수는 나루세 요시히사[42]. 하지만, 나루세의 분식회계로 인해 승계주자들이 모조리 홈을 밟으며 다르빗슈는 4자책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에 일본 투수들은 더 이상 점수를 내주지 않고 실점 없이 8회말까지 마무리 하였으나, 6회 초부터 9회초까지 일본 타자들은 별 힘을 못 쓰며 4대 2, 5회말의 스코어 그대로 경기를 패배하고 만다. 이로 인해, 다르빗슈 유는 4이닝 4실점 패전 투수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다르빗슈 유는 이 패배에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이 경기 직후 트레이드 마크였던 장발 머리에서 탈피하여 삭발해버린다. [43]
- 이 컨디션 난조와 대회 첫 경기 패전투수라는 이유 때문에 다르빗슈 유는 이후 대회 내내 중용받지 못하였다. 미국과의 마지막 예선전 져주기 게임의 선발 투수로 나서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1이닝 패전처리 등 핵심 자원으로 뛰지는 못하고 팀도 부진하고 역대급 참사 경기들을 펼치며 대회를 노메달로 마무리하였다. [44] 이 져주기 게임에서 다르빗슈 유는 2이닝 동안 삼진을 세개나 솎아내고 삼자범퇴로 호투하였으나 이는 양팀의 타자들이 쿠바를 피하고 우리나라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지려고 타격 의사를 보이지 않았던 덕택도 있다. 이 덕에 다르빗슈는 2이닝 무피안타 3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을 기록했다.
- 이후에는 중용받지 못하다가, 다르빗슈 유의 대회 마지막 등판인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앞선 투수들인 와다 츠요시와 카와카미 겐신이 각각 4실점 하는 바람에 8:4의 더블 스코어로 점수차가 벌어진 8회말에 패전처리를 위해 등판했다. 원 아웃 까지 잡아내고 이후 후속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었는데, 이 때 와일드 피치가 두 번이나 나오면서 원 아웃 3루의 위기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후속 타자를 삼진처리 하고 누상의 주자를 아웃시켜 간신히 무실점하며 1이닝 무실점으로 그나마 대회 마지막 유종의 미는 거뒀다. 이날 경기의 기록은 1이닝 1피안타 1탈삼진 1볼넷 무실점이었고, 베이징 대회에서 최종 성적은 7이닝 8피안타 10탈삼진 6사사구(5볼넷 1사구) 4실점 ERA 5.14로 리그 내에서의 모습과 항간의 기대와 다른 개인으로서도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팀도 노메달로 대회를 마감하게 된다.
대회 직후 일본 여론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대회 후 특별기획 프로까지 편성해 일본의 참패 원인과 이에 대한 언론인들, 그리고 원로 야구인들과의 대담까지 방송하는 등 여론이 뒤집어졌다. 다르빗슈도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와세 히토키와 G.G.사토의 베이징에서의 모습이 워낙 악명 높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출전한 자국선수들 거의 대부분을 세차게 비판했다. 특히, 장훈은 일본 선수들의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으니 당연한 결과라며 TV 방송에서 세차게 일갈했다. 심지어 이때, 한국 대표팀은 선수촌의 2인 1실을 사용한데 비해서 일본대표팀은 최고급 호텔에서 1인 1실을 사용했다는 것이 보도되자 여론에 불이 붙었다.[45] 게다가 다르빗슈 유와 와쿠이 히데아키가 경기 전날에 밤새 비디오 게임을 했다는 확인 되지 않은 썰까지 나와 다르빗슈는 더 욕을 먹었다.
성적 상으로도 당시 일본 대표팀의 베이징 올림픽 대회 기간 총 팀 방어율은 2.54였던 반면, 다르빗슈 개인의 방어율은 ERA 5.14로 매우 부진하였다.[46] 여담으로, 일본의 베이징 올림픽 대회 기간 팀 방어율은 2.54로 그를 상회하는 이와세 히토키(대회 기간 동안 ERA 13.75), 다르빗슈 유(ERA 5.14), 카와카미 겐신(ERA 4.70) 그리고 와다 츠요시(ERA 4.82)까지 모조리 강도높은 비판을 받았다.[47] 이 대회에서 일본이 내준 실점이 총 28점이고 그 중 이 네명이 내준 실점은 24점이다. 총 10명의 투수 중 4명이 86%의 실점을 담당한 셈. 이 네 선수가 소화한 이닝은 총 28⅔이닝으로 일본 팀의 베이징 총 이닝 수인 78이닝의 비율로는 36% 가량이다. 즉, 등판 횟수의 36%밖에 차지하지 않았으나 실점은 86%나 내준 셈. 반대로 얘기하면 나머지 6명의 투수들은 64%나 마운드를 책임지고 고작 14%의 실점밖에 하지 않았다[48]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넷이 비교적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주로 등판했다는 것도 감안은 해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 라이벌 국가와의 경기에서 성과를 원하는 라이트 팬에게 그러한 이해를 바라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이와세 히토키를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 투수는 당시 대표팀에서 다르빗슈였고 그 때문에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대회 첫경기 패전 투수, 져주기 게임 덕에 ERA 5.14마저도 세탁된 스탯 이라는 이유로 다르빗슈는 넷상에서도 겁나게 까였다. 이 때문에, 다르빗슈 유가 국내용 투수 아니냐며 2ch에서 까이는 등 다르빗슈 유는 국제대회에서 약하다는 이미지가 쌓였다. 심지어, 이후 NPB 리그 후반기에 5번의 경기에서 5승 0패, 평균자책점 1.29, WHIP 0.66의 리그의 지배자같은 모습을 보이며 국제전에서 약하고 국내전에서만 잘한다는 이미지도 쌓이고 말았다.
이에 다르빗슈 유는 일일이 대응을 하지는 않았고 다음해 WBC 에서 복수하겠다는 말만 남긴채 이를 갈았다. 실제로, 그는 한국과의 준결승전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있었지만, 예상 외로 준결승 직전 져주기 게임에나 선발로 나오고, 한국과의 준결승 전은 출전도 못해보고 동메달 결정전에서야 패전처리로 투입되어 억울한 면도 있다. 첫 경기 쿠바전은 리그 마지막 경기 혹사의 여파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여서 정상 참작될 필요도 있는데다가 예선 5경기를 내내 휴식을 취해 힘을 비축해둔 상태였지만 호시노감독은 그를 중용하지도 않았다. 즉, 쿠바전의 부진을 만회할 이렇다 할 출전 기회를 못 받은 것도 이 대회 부진으로 보이는 이유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다르빗슈 유 입장만을 고려해서 서술된 핑계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팀 입장은 다르다. 야구선수는 성적으로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부진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첫 경기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였기에 단판 단판이 모두 중요한 국제대회에서 큰 경기(ex: 준결승전 or 동메달 결정전) 선발을 맡기기에는 모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적 자체도 3경기 ERA 5.14면 사실상 팀 입장에서는 패전 처리로 등판 시킬 수 밖에 없는 성적이다. 또, 본인이 감독이라면 준결승전과 동메달 결정전 이전 2경기 ERA 6.00의 투수를 선발로 내보낼 수 있겠는가? 당대회에서 검증되지 않은 투수를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맡길 수 있는 감독은 욕을 먹기 위해 환장한 감독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일례로, 2021년 KBO의 평균 팀 방어율이 4.44이다. ERA 5.14면 리그에서도 평균 이하의 투수가 되고 심지어 국제대회에서는 팀에 마이너스 존재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2008 베이징 대회 내내 팀의 방어율 기록을 보면 캐나다의 팀 방어율은 2.29, 쿠바의 경우 2.51, 한국의 경우 2.52, 일본은 2.54였다. 국제대회에서는 한경기 한경기가 매우 중요하고 특히 비슷한 수준의 국가가 맞붙을 때는 총력을 다하기 때문에 접전 상황이 많다. 이렇기에 평균 자책점이 리그 기록에 비해 매우 낮은 것.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짧은 대회 기간 동안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이는 투수를 중용해 실점을 최소화하여 이길 가능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 국제대회다.[49]
베이징에서 다르빗슈의 성적은 리그에서조차 부진한 성적이라 욕먹어도 할 말 없는 수준의 기록인데, 국제대회 심지어 한 대회에서 성적이 저랬으니 감독이 중용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셈. 실제, 대회 기간 내내 부진한 이와세 히토키를 계속 중용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한 호시노 센이치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르빗슈 유를 써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짧은 대회 기간 동안 좋은 컨디션을 보이는 투수를 등판시켜 실점을 최소화하여 게임을 이길 가능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 국제대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와세 히토키나 다르빗슈 유보다는 대회 기간 좋은 모습을 보이던 나루세 요시히사나 우에하라 고지, 후지카와 큐지[50]를 중용했어야 한다. 물론, 본인이야 첫 경기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기회조차 못 받았다고 항변할 수는 있으나 국제대회는 모험을 하는 곳이 아니라 확실한 용병술로 무장해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대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51]
10.3.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하지만, 베이징을 갔다 온 이후 다르빗슈 유는 5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2개의 완투를 포함한 5승 0패, 평균자책점 1.29, WHIP 0.66이라는 호투를 보이며 전반기 마지막 경기의 부진을 씻어내고 2년 연속 200이닝 이상 1점대 방어율이라는 먼치킨 수준의 성적을 내버린다. 이 덕에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대표로 선발된다. 당시 대표팀 감독 하라 타츠노리는 대회 시작 전 부터 일찌감치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와쿠마 히사시와 더불어 다르빗슈 유를 선발 3인방으로 낙점하였다. 중요 경기 선발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와쿠마 히사시가 독차지 했지만, 다르빗슈 유는 선발과 마무리 불펜 등 모든 보직에서 전천후 활약을 하며 일본의 2연패를 이끌었다.* 다르빗슈 유는 일본의 첫 경기인 중국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4이닝 무피안타 3탈삼진 1볼넷 무실점으로 단 한타자만 빼고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팀은 무라타 슈이치의 2점 홈런을 앞세워 4:0 승리하였고 다르빗슈는 승리를 기록한다.
* 이후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하다가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 한일전에서 8회에 등판하여 박기혁에게 볼넷, 이종욱에게 안타를 맞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고영민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1이닝 무실점으로 마무리 하였다. 이 날 경기 기록은 1이닝 1피안타 3탈삼진[52] 1볼넷 무실점 이었다.
* 이후, 2라운드 초반 쿠바와의 첫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하다가 한국과의 2라운드 승자조경기에 선발로 낙점되어 출전한다. 하지만, 지금 까지 대회 내내 무실점으로 잘 막아왔던 다르빗슈 유는 이 경기에서 1회부터 이용규와 이진영 등에게 안타를 내준데다가 수비까지 도와주지 않으며 1회에만 3실점(2자책)을 하게 되고, 이후에는 제 컨디션을 찾아 5회까지 더 이상 실점을 하지않고 마운드를 내려오게 되지만 일본 타자들이 봉중근과 윤석민, 임창용에게 틀어 막히면서 1득점 밖에 해주지 못해 팀이 4:1로 패하여 패전투수가 된다. 이 경기의 부진때문에, 다르빗슈 유는 이후 중요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하지는 못하고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와쿠마 히사시가 중요경기 선발을 독차지하여 이 둘이 내려간 이후 등판하는 불펜이나 마무리 투수로 보직이 변경된다.
* 이 경기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4강전에서 팀이 9:4로 앞선 상황 9회초에 마지막 투수로 나와 2사 2루의 위기를 맞게 되지만 실점 없이 경기를 끝낸다. 이날 1이닝 1피안타 2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전 경기의 부진을 씻은 좋은 투구 내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을 앞두게 되었다.
- 결승전에는 당일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의 호조[53]로 8회까지 3:2 앞선 채로 마무리 하였고 마지막 9회말 일본의 수비를 세이브 상황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오른 마무리 투수는 후지카와 큐지[54]가 아닌 바로 다르빗슈 유. 대회 처음으로 세이브 상황에 경기에 들어선 다르빗슈 유는 첫 타자 정근우를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아내며 돌려세우고 쉽게 원 아웃을 잡았다. 하지만, 이후 김현수와 김태균에게 연속 볼넷을 헌납하며 스코어링 포지션을 공짜로 내주고 원 아웃 1,2루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그래도 다음 타자인 추신수를 큰 낙차의 커브로 삼진을 잡아내 돌려세우며 한숨 돌리게 되고 드디어 우승까지 단 한개의 아웃 카운트를 남기게 된다. 이후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이범호. 이범호는 1구 종 변화구를 참아내고 2구 빠른 직구 스트라이크를 치지 않으며 1-1 카운트가 된다. 그 다음 3구인 슬라이더가 가운데 몰렸는데 이를 이범호가 놓치지 않으며 좌전 1타점 적시타를 작렬시킨다. 이 때문에, 스코어는 3:3 동점이 되었고 다르빗슈 유는 블론 세이브를 기록한다. 하지만, 후속타자인 고영민을 삼진으로 잡아내고[55] 3탈삼진으로 더 이상 실점하지 않으면서 이닝을 끝낸다. 그리고 10회초 스즈키 이치로의 2타점 적시 2루타로 5:3으로 일본이 앞선 상황에서 다르빗슈 유는 이번에는 승리 투수 조건을 갖춘 채 10회말 마운드에 올라선다. 하지만, 선두 타자인 강민호를 볼넷으로 내보내는 등 여전히 불안하였다. 불펜에는 후지카와 큐지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은 교체를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다르빗슈 유를 마운드에서 던지게 하였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다르빗슈 유는 대타 최정을 삼진, 이용규를 중견수 플라이, 정근우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헹가래 투수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날은 2이닝 1피안타 5탈삼진 3볼넷 1실점을 기록하였고, 헹가래 투수가 되는 기쁨과 함께 팀의 WBC 2연패에 일조한다.
결론적으로,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13이닝 7피안타 20탈삼진 4실점(3자책)[56] ERA 2.08, WHIP 1.00의 성적을 남겼다. 지표 상으로는 상당히 좋아보이지만, 피칭 내용을 살펴보면 중요한 경기에서 1패 1블론세이브를 기록하며 지표에 비해 그닥 알토란 같은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매니 라미레스나 켄 그리피 주니어 등과 같은 메이저 리그의 간판 타자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등 그의 피칭 자체는 좋은 인상을 남겼고 팀은 우승을 하였기에 다르빗슈 유의 2022년 현재 마지막 국대 커리어가 2009 WBC 대회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2022년 12월 6일 2023 WBC에 참가 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내년이면 37세가 되는 다르빗슈는 사실상 2023 WBC가 진짜로 마지막 국대 커리어로 끝나는 게 유력하다
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다르빗슈 유의 피칭이 2022년 현재까지도 그의 국대 커리어 마지막 모습이 될 뻔했지만 내년 2023 WBC에서 은퇴전 마지막 국대 커리어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9 WBC 이후로 2011년까지는 프로 1군 선수가 출전하는 메이저 대회가 개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시안 게임도 일본은 아마추어를 내보내므로 프로인 다르빗슈가 나갈 일은 없었다. 게다가, MLB를 건너간 2012년 이후 개최된 메이저 대회인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구단 차출 거부나 시즌 준비 등의 이유로 고사하였다.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는 애초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뛰지도 않았지만, 다르빗슈 유 본인도 프리미어 12 같이 시즌이 끝나고 12월에 대회를 열게 되면 선수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비판[57]하는 등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기에 차출이 가능했더라도 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상술한 대회들에 참가를 안한데다가, 2015 WBSC 프리미어 12나 2019 WBSC 프리미어 12, 2020 도쿄 올림픽/야구 등에는 메이저 리그 소속 선수들이 참가 자체를 안하여 다르빗슈 유는 2009년 이후 국가대표 경력이 단절된 상태였지만 2023 WBC에 참가하기로 결정해 나이 상 이 대회가 마지막 국가대표 참가가 유력하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NPB 리그 내에서는 신화를 써내려간 전성기의 그였지만, 그 때[58] 프로 선수로서 출전하여 남긴 국가대표 통산 성적은 27이닝 18피안타 36탈삼진 13볼넷 2사구 15사사구 10실점(9자책) ERA 3.00[59]로 그에 살짝 못미친다. 거기다 선발 승은 올림픽 예선에서 단 한번만 기록하고 이후에는 강팀을 상대로는 기록도 못하다가[60] 아마 최강 쿠바를 상대로 올림픽에서 패배, 메이저가 차출된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선발로 1패, 마무리로 블론 세이브도 기록하는 등 영 기대에 못미치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5년 연속 선발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다르빗슈 유의 리그내 성적과 위상 그리고 이름 값에 비해 국가 대표로서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는 평이 일본 내에서도 지배적이다. 그나마도 2009 WBC 마지막 결승전 경기에서 거둔 1승도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의 승리를 블론으로 날리고 본인이 거둔 구원 승이라 그 의미가 조금은 퇴색된다.
그래도 이 1승이 빛바란 1승일지라도 일본의 WBC 2연패를 마무리한 1승이라 일본 라이트 팬에게는 국대에서의 다르빗슈 유가 좋게 기억되는 편이다. 더군다나, 직전년도 2008년 베이징에서의 부진으로 언론과 야구 팬들의 집중 포화를 맞았던 다르빗슈는 이 마지막 헹가래 투수의 임팩트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실제 기록상 다르빗슈는 국제전에서 자국 리그인 NPB에서보다 성적이 안좋았는데도, 이 마지막 대회에서의 좋은 모습 덕인지 2009 WBC 대회 이후에는 다르빗슈 국제전에 관한 여론이 급반전. 그의 국제대회 활약이 기록에 비해 의외로 상당히 좋게 평가 받는 편이다. 물론, 통산 성적이 27이닝 36탈삼진에 k/9가 무려 12.0으로. 어찌 됐든 그다운 모습을 국제전에서 보여줬다고는 할 수 있는 정도니. 마쓰자카 다이스케와의 국대 커리어의 직접적인 비교에서는 밀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성적으로 리그에서처럼 국대에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해 아쉽다는 정도이지 못 던졌다고 폄하할 만큼의 성적은 아니었다. 다만, 중요 경기에서 꽤나 부진한 모습을 보인점이나 베이징에서 나사빠진 모습을 보인게 흠이라면 흠이다.
10.4. 2023 WBC
2023 WBC |
<rowcolor=#d9bb46> 경기 | 선발 | 이닝 | WHIP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피홈런 | 실점 | 자책점 | 사사구 | 탈삼진 | 상세 |
3 | 1 | 6 | 1.33 | 6.00 | 1 | 0 | 1 | 0 | 7 | 3 | 5 | 4 | 1 | 2 | 1승 1홀드 |
대회를 앞두고 다르빗슈는 이번 WBC를 앞두고 결의를 다진 대표팀 분위기에 너무 큰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닌 우리가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이다.라며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현지 시각 2월 18일, 미야자키 캠프에서 몸을 풀었으며 사사키 로키는 이에 대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대표팀에서의 지위도 달라졌는데 2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잇대에 참여했던 2009 WBC와는 달리 이번에는 대표팀의 최고참으로써 대회에 임하게 되었다.
다르빗슈 본인도 이를 인지하듯 야마모토 요시노부나 사사키 로키 등의 젊은 투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중이며 대표팀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우다가와 유키를 살뜰히 챙겨주는 등 팀 케미스트리 면에서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대표팀 합류 후 2월 21일 연습 투구에서 무라카미 무네타카에게 센터 전광판을 때리는 대형 홈런을 헌납했다.영상
3월 2일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주니치 드래건스 타자들을 상대했고 3이닝 3피안타 2볼넷 1탈삼진 2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오타니 쇼헤이가 1라운드 1차전 중국전에 선발 등판이 확정됨에 따라 다르빗슈는 3월 10일 도쿄 돔에서 열리는 WBC 1라운드 2차전 한일전에 선발 등판이 확정되며 김광현과 맞붙게 되었다.
10.4.1. 3월 10일: 한국전 (홈) [승리]
<rowcolor=#D9BB46> 승/패 | 이닝 | 탈삼진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실점 | 자책점 | 하이라이트 |
승 | 3 | 1 | 3 | 1 | 1 | 3 | 2 | # |
2회초 투구에서는 박병호를 풀카운트에서 주무기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 김현수를 1루 땅볼, 박건우를 우익수 플라이로 2회 역시 3타자로 마무리했다.
3회초 들어 강백호에게 좌중간 2루타[61]를 내주더니 양의지에게 좌월 투런포를 내주며 실점했다. 최정을 중견수 플라이, 토미 에드먼을 우익수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내며 안정을 찾는 듯 보였으나 김하성을 3루수 실책으로 2루 출루시켰고 이정후에게 적시타를 내주며 비자책 실점까지 기록했다. 이어 제구 난조로 박병호에게 사구를 내주며 위기가 계속되었으나 김현수를 좌익수 플라이로 막아내며 더이상의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최종 3이닝 1탈삼진 3피안타 1피홈런 1사사구 3실점 2자책을 기록하고 4회초 투구부터 이마나가 쇼타로 교체되며 경기를 마쳤다.
다행히 뒤에 나온 이마나가 쇼타, 마쓰이 유키, 우다가와 유키, 타카하시 히로토 등 후배 투수들이 모두 준수한 투구를 했고, 일본 타선이 한국의 투수진을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스코어 13:4로 콜드 게임에 단 1점이 모잘랐을 정도의 대승을 거두며 다르빗슈는 이날 일본 투수들 가운데 제일 부진한 투구를 보였음에도 승리 투수가 되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동료 김하성과의 첫 번째 타석, 두 번째 타석 승부.
상술된 것처럼, 09 WBC까지 세 번의 국가대표에서 모두 리그에서만 못한 모습을 보여줬고 그 징크스는 2023년 WBC 1라운드 첫경기까지 유효함을 알 수 있는 경기였다. 이를 탈피해서 2라운드부터는 좋은 모습으로 본인의 마지막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칠 수 있을지도 관건.
10.4.2. 3월 16일: 이탈리아전 (홈) [구원 등판]
일본이 B조 1위로 8강에 진출하며 3월 16일에 열리는 WBC 2라운드 8강전에서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다. 선발 투수는 오타니 쇼헤이로 예고된 상태이며 다르빗슈는 이날 불펜으로 출격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13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비롯한 부진한 후배들을 위해 "야구보다 인생이 더 중요하다."며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rowcolor=#D9BB46> 승/패 | 이닝 | 탈삼진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실점 | 자책점 | 하이라이트 |
ND | 2 | 1 | 2 | 1 | 0 | 1 | 1 | # |
일본이 7회말 공격에서 2점을 더 보태며 9:2로 앞선 8회초 상황에서도 등판했고, 첫 타자 니키 로페즈를 우익수 라인드라이브 아웃으로 잡아낸 이후 도미닉 플레처에게 좌중간 솔로포를 헌납했다.# 이후 브렛 설리반에게도 안타를 내줬으나 비니 파스콴티노를 병살로 잡아내며 8회초 투구를 마쳤다. 9회초에는 오타 타이세이로 교체되며 다르빗슈는 이날 최종 2이닝 2피안타 1피홈런 무사사구 1탈삼진 1실점으로 투구를 마쳤다.
10.4.3. 3월 21일: 미국전 (홈) [구원 등판] [홀드]
<rowcolor=#D9BB46> 승/패 | 이닝 | 탈삼진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실점 | 자책점 | 하이라이트 |
홀 | 1 | 0 | 2 | 1 | 0 | 1 | 1 | # |
여담으로 다르빗슈의 다소 부진한 투구 덕에 이번 대회 최고의 명장면인 9회 말 2아웃 1점차에서 오타니 쇼헤이와 마이크 트라웃의 맞대결이 성사될 수 있었다.
10.4.4. 총평
사실 성적만 보면 이름값에 맞지 않게 부진했다고 볼 수 있다. 본인도 30대 후반의 나이로 대표팀 최고령 선수이거니와, 대회동안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 국가대표일수도 있는 본 대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그러나 메이저리거 신분임에 불구 초기부터 캠프에 참가하여 베테랑으로서 젊은 선수들의 연습을 직접 도와주고, 회식 등 대표팀의 적응에 도움을 주며, 자신이 상대해본 수많은 메이저리거의 특징을 직접 알려주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본 국가 대표팀의 활약에 도움을 주었고 마지막엔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기분좋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점에 관해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은 다르빗슈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경의를 표했다.
11. 연도별 성적
11.1. NPB
다르빗슈 유의 역대 NP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ERA+ | WAR |
2005 | 닛폰햄 | 14 | 5 | 5 | 0 | 0 | 94.1 | 3.53 | 97 | 7 | 48 | 3 | 52 | 1.54 | 114 | 2.1 |
2006 | 25 | 12 | 5 | 0 | 1 | 149.2 | 2.89 | 128 | 12 | 64 | 6 | 115 | 1.28 | 122 | 3.1 | |
2007 | 26 | 15 | 5 | 0 | 0 | 207.2 | 1.82 | 123 | 9 | 49 | 13 | 210 | 0.83 | 196 | 8.2 | |
2008 | 25 | 16 | 4 | 0 | 0 | 200.2 | 1.88 | 136 | 11 | 44 | 9 | 208 | 0.90 | 213 | 9.1 | |
2009 | 23 | 15 | 5 | 0 | 0 | 182 | 1.73 | 118 | 9 | 45 | 6 | 167 | 0.90 | 227 | 9 | |
2010 | 26 | 12 | 8 | 0 | 0 | 202 | 1.78 | 158 | 5 | 47 | 7 | 222 | 1.02 | 222 | 8.6 | |
2011 | 28 | 18 | 6 | 0 | 0 | 232 | 1.44 | 156 | 5 | 36 | 6 | 276 | 0.83 | 204 | 9.4 | |
NPB 통산 (7시즌) | 167 | 93 | 38 | 0 | 1 | 1268.1 | 1.99 | 916 | 58 | 333 | 50 | 1238 | 0.98 | 185 | 49.7 |
다르빗슈 유의 역대 NPB 포스트시즌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결과 | |
2006 | 닛폰햄 | 3 | 2 | 1 | 0 | 0 | 22.1 | 1.61 | 20 | 0 | 10 | 3 | 23 | 1.34 | NS 우승 | |
2007 | 4 | 3 | 1 | 0 | 0 | 31.2 | 1.42 | 19 | 0 | 7 | 1 | 34 | 0.82 | NS 패배 | ||
2008 | 2 | 2 | 0 | 0 | 0 | 18 | 0.00 | 12 | 0 | 5 | 0 | 20 | 0.94 | CS Final 탈락 | ||
2009 | 1 | 1 | 0 | 0 | 0 | 6 | 3.00 | 7 | 1 | 0 | 0 | 7 | 1.17 | NS 패배 | ||
2011 | 1 | 0 | 0 | 0 | 0 | 7 | 1.29 | 4 | 0 | 0 | 0 | 7 | 0.57 | CS First 탈락 | ||
NPB 통산 (5시즌) | 11 | 8 | 2 | 0 | 0 | 85 | 1.27 | 62 | 1 | 22 | 4 | 99 | 0.99 | NS 1승 2패 1CS2 1CS1 |
11.2. MLB
다르빗슈 유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12 | TEX | 29 | 16 | 9 | 0 | 0 | 191⅓ | 3.90 | 156 | 14 | 89 | 10 | 221 | 1.280 | 112 | 4.7 | 3.5 |
2013 | 32 | 13 | 9 | 0 | 0 | 209⅔ | 2.83 | 145 | 26 | 80 | 8 | 277 | 1.073 | 145 | 4.6 | 5.6 | |
2014 | 22 | 10 | 7 | 0 | 0 | 144⅓ | 3.06 | 133 | 13 | 49 | 2 | 182 | 1.261 | 130 | 3.5 | 3.5 | |
2015 | MLB 기록 없음 | ||||||||||||||||
2016 | 17 | 7 | 5 | 0 | 0 | 100⅓ | 3.41 | 81 | 12 | 31 | 3 | 132 | 1.116 | 134 | 2.8 | 2.5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17 | TEX/LAD | 31 | 10 | 12 | 0 | 0 | 186⅔ | 3.86 | 159 | 27 | 58 | 6 | 209 | 1.163 | 118 | 3.7 | 4.0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18 | CHC | 8 | 1 | 3 | 0 | 0 | 40 | 4.95 | 36 | 7 | 21 | 4 | 49 | 1.425 | 87 | 0.2 | -0.1 |
2019 | 31 | 6 | 8 | 0 | 0 | 178⅔ | 3.98 | 140 | 33 | 56 | 11 | 229 | 1.097 | 112 | 2.6 | 3.0 | |
2020 | 12 | 8 | 3 | 0 | 0 | 76 | 2.01 | 59 | 5 | 14 | 2 | 93 | 0.961 | 220 | 2.8 | 2.8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21 | SD | 30 | 8 | 11 | 0 | 0 | 166⅓ | 4.22 | 138 | 28 | 44 | 8 | 199 | 1.094 | 93 | 2.8 | 1.4 |
2022 | 30 | 16 | 8 | 0 | 0 | 194⅔ | 3.10 | 148 | 22 | 37 | 12 | 197 | 0.950 | 122 | 4.2 | 4.6 | |
2023 | 24 | 8 | 10 | 0 | 0 | 136⅓ | 4.56 | 134 | 18 | 43 | 8 | 141 | 1.298 | 93 | 2.5 | 0.7 | |
2024 | 16 | 7 | 3 | 0 | 0 | 81⅔ | 3.31 | 65 | 12 | 22 | 3 | 78 | 1.065 | 125 | 1.1 | 2.0 | |
MLB 통산 (12시즌) | 282 | 110 | 88 | 0 | 0 | 1706 | 3.58 | 1394 | 217 | 544 | 77 | 2007 | 1.136 | 118 | 35.6 | 33.0 |
[1] 현재 다르빗슈는 메이저리그 투수들 중 가장 워크에식이 뛰어난 편으로 평가받는다.[2] 대충 비교하자면 일본에서 다르빗슈는 오타니 쇼헤이, 야마모토 요시노부보다 더 잘했다. 물론 오타니는 투타겸업 선수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3] 일본은 아무리 초고교급 선수라 하더라도 프로 입단 1년차부터 1군에서 활약하는 케이스가 드물기 때문에 저 정도 성적을 1년차에 기록하는 것도 쉽지 않다.[4] 80경기 타율 .262 22홈런 57타점.[5]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동갑.[6] 121.1이닝 10승 3패 ERA 3.40[7] 2007, 2009년엔 일본시리즈 준우승, MLB 진출 후에도 2017년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쳤다. 국가대표 무대에선 WBC에서 2회 우승했다.[8] 듣고 보면 과장된 별명 같지만 NPB 통산 성적을 보고 오면 알 수 있듯, 이 말이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9] 마쓰자카는 2006년까지 일본에서 뛰고 2007년 메이저리그 진출했는데, 다르빗슈는 2006년 데뷔, 2007년부터 각성했다. 원래 야구팬들에게 동시대가 아닌 선수간의 비교는 오랜 전통.[10] 참고로 2015시즌 에스밀 로저스의 완투율이 40% 정도에 경기당 이닝수는 7.5 정도이다. 그런데 다르빗슈는 이걸 넘는 이닝소화를 5년간 꾸준히 했다. 물론, NPB는 6선발체제로 어지간한 선발 투수들이 120구 가까이 던지고 이닝도 더 많이 먹는다.[11] 다만, 2008년의 경우에는 예외. 거의 모든 타격 지표가 양대 리그를 통틀어 밑에서 2등 수준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팀 리그 순위는 2위였지만 당해년도 퍼시픽리그 득점지원률 꼴찌가 2.57의 니혼햄 소속 라이언 글린이었다. 다르빗슈 유의 경우 득점지원률은 대략, 3.51. 참고로 당해년도 퍼시픽리그 득점지원률 1위는 5.66의 이와쿠마 히사시였다.[12] 특히, 이 해는 수상에 논란이 있었는데 당시 논란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쪽으로.[13] 위 포스팅 금액은 전소속 구단인 닛폰햄이 이적료 형식으로 가져가고, 이 연봉 계약이 다르빗슈의 것이다.[14] 이후 맷 케인 6년 $1억 2,750만 달러, 잭 그레인키 6년 1억 4,700만 달러, 펠릭스 에르난데스 7년 1억 7,500만 달러, 저스틴 벌랜더 7년 1억 8,000만 달러 등 어마어마한 계약이 쏟아져 나왔다. 벌랜더 이후로는 근 시일 안에 이 계약을 뛰어넘을만한 대형 우완 투수가 시장에 나오지 않고 있다가 잭 그레인키가 옵트아웃을 행사하면서 6년 2억 650만 달러로 다시 갱신했다. 그리고 2020년에는 3억 2,400만 달러 우완 게릿 콜이 나왔다.[15] 이렇게 계약을 체결할 경우 5182만 5000달러의 포스팅 금액을 받는다.[16] 다르빗슈 본인도 데뷔전 후 인터뷰에서 일본리그에 뛰는 용병타자들은 AAA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용병타자들이 홈런 20~40개씩을 때려내왔다.[17] 포심 제외, 사실 다르빗슈의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고, 그외 스플리터, 슬로우 커브, 커터 등 좋은 구위를 보여주는데 정작 포심은 다르빗슈가 던지는 모든 구종 중 가장 떨어지는 스터프를 보여준다.[18] 본래 마이크 매덕스 투수코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되어있으나 정작 다르빗슈는 매덕스 코치가 초반부터 자신의 스타일에 손대려한 점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매덕스 코치는 다르빗슈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었고 이에 다르빗슈는 메이저리그 투수코치로서의 프라이드가 있었을텐데 자신을 존중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19] 프라이스는 축이 되는 오른쪽 발가락이 5개 전부 지면에 닿아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고 몸을 지탱해줄 수 있었지만 다르빗슈의 경우에는 축이 되는 왼발 중 새끼 발가락만이 지면에 닿는 모습이 되어 부드러운 일본 야구장의 마운드와 달리 딱딱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는 밸런스의 무너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후 신체에 무리가 갔는지 은근히 잔부상을 달고 다녔다.[20] 심지어 조건도 다저스보다 애스트로스가 훨씬 좋았다고 한다.[21] 심지어 마에다 겐타는 다르빗슈 다음으로 올라와서 무실점까지 했다.[22] 이후 다저스의 선수단은 4차전을 앞두고 모두 다르빗슈에게 모여 "너를 위해 꼭 이겨줄게" 라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4차전은 다저스의 6-2 승리. #[23] 2010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까지는 압도적이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두 번이나 무너지고 클린칭을 당한 것이 유사하다. 클리프 리는 1차전과 5차전에서 무너진 것이 다르다.[24] 분노한 다저스 팬덤에서는 해시태그에 '#F***YU'를 만들었으며, 'LA타임스' 빌 샤킨 기자는 자신의 SNS에 "클레이튼 커쇼가 구원등판해 4이닝을 던졌다. 이는 다르빗슈가 두 경기에서 던진 이닝보다 많다"라며 조롱했다. 심지어 1년 후 다저스의 마무리인 켄리 잰슨은 팀의 가을 야구 확정 인터뷰 때 다르빗슈를 돌려깠다.[25] 실제로 다르빗슈는 디비전, 챔피언십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모두 호투했었고 휴스턴 상대로만 처참한 성적을 냈다. 다른 팀 타자들이라고 투구 습관 못 잡는 것도 아닌데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을 뛰면서 투구 습관 문제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던 선수임을 생각해보면 더욱 휴스턴이 부정행위를 저질렀음을 확신할 수 있다.[26] 투구 습관 지적을 받은 이후인 2018년에 이중키킹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부진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27] 2018년의 다저스는 사치세 리셋 직전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네드 콜레티 단장 시절부터 누적된 부채 관련 페널티 이슈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 있다. 이는 2017년에 내부 FA 단속을 하는 과정에서 리셋 해가 늦어진 점도 있기 때문.[28] 전술한 대로 다저스가 진지하게 비딩을 할 가능성은 사치세 이슈 때문에라도 낮은 걸 알면서도 저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더 까인 점도 있다.[29] 제이크 아리에타의 인터뷰에 따르면 컵스의 테오 엡스타인 사장이 계약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 계약을 할 거냐, 떠날거냐를 물어본 후 아리에타가 거절하자 다음 날 바로 다르빗슈와 계약했다고 한다.[30] 게다가 이 평균자책점도 밀워키 브루어스전을 제외하면 9.50까지 올라간다.[31] 심지어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박찬호를 뛰어 넘는 아시아 최악의 먹튀라고 취급하는 상황이다.[32] 날짜는 5월 5일로 소급 적용.[33] 그리고 빅터 카라티니는 2021 시즌 4월 9일 경기에서 조 머스그로브와 호흡을 맞춰 샌디에이고 구단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웠다.[34]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등.[35] 그도 그럴 것이 마쓰자카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2회 WBC의 MVP를 싹쓸이한다. 게다가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모두 출전하는 등 마쓰자카는 국대 단골이었다.[36] 원래는 일본 내에서도 한국전의 선발로 예상되었다. 이때문에, 한국언론도 괴물이라 불리는 류현진도 출전해 한일 괴물 투수들의 선발 맞대결을 기대하였고 우리나라의 국대 4번 붙박이 김동주도 "다르빗슈 유 실투를 놓치지 않겠다."며 각오를 다졌으나 예상과 달리 한국은 다르빗슈 유가 나오지 않은 일본에게 4:3으로 석패했고 다르빗슈 유는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바람에 이는 모두 설레발이 되었다.[37] 2007년 당시 천진펑은 LA 다저스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진작에 2006년부터 대만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던 중이었다.[38] 당시의 경기 영상[39] 이 두 투수는 2008년 시즌 마지막까지 사와무라상을 놓고 경쟁하는데 사와무라상은 투수 부문 3관왕의 이와쿠마가 쟁취하게 된다.[40] 이 선수는 나중에 NPB에 진출하기도 한다.[41]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에 의해 영입되어 MLB 무대로 진출한다.[42]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한일전 선발 투수기도 했다. 그 경기에서 고영민에게 선제 솔로 홈런을 맞았던 투수. 이후 한국과의 인연은, 베이징 올림픽 한국과의 준결승 경기에서 불펜으로서 등판한 것이 전부.[43] 이와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당시 대표팀 막내였던 다나카 마사히로도 다르빗슈 유의 강요에 의해 삭발을 하였으며 인터뷰에서 "다르빗슈 유가 저를 길동무 삼았습니다"라고 발언하여 좌중을 폭소케 했다. 이 다르빗슈 유에 영향을 받았는지 가와사키 무네노리와 아베 신노스케도 같이 삭발에 동참을 하는 등 다부진 결의를 보이며 이후 대회에 임하였다.[44] 다르빗슈는 한국과의 준결승 전에서 접전 상황인 8회에 불펜으로 등판할 뻔 하였으나, 전화기 고장 이슈와 이와세 히토키의 불질 때문에 불발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 대회에서 한일전은 두 번이 있었으나 이 두 개의 경기 모두 다르빗슈는 출전하지 못했다. 즉, 다르빗슈 유와 한국과의 만남은 한국 언론의 기대와는 달리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까지 성사되지 못한 셈이다.[45]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수준의 환경에서 지낸 건 몇몇 국가의 축구대표팀과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정도였다.[46] 사실, 리그내에서 5점대 방어율 투수여도 평범이하의 투수로 팀에서 분류되기 십상인데 접전이 많은 국제대회에서 5점대 방어율은 팀에 마이너스 존재나 마찬가지다.[47] 당연하게도 이 넷 중에서도 이와세가 압도적으로 수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이와세의 베이징에서의 기록은 0승 3패 10실점에 평균자책점은 자그마치 13.75인데, 일본 팀의 총 전적이 4승 5패에 총 실점은 28점이다. 즉, 이와세는 혼자서 팀 총 실점의 ⅓ 이상을 이와세 혼자서 내준셈. 이 때문에, 한국 이름을 표기하는 식으로 イ・ワセ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부여받았으며 준결승전 플라이볼 캐칭 실수를 시전한 G.G.사토와 함께 죽도록 까였다.[48] 나머지 4점의 실점은 스기우치 도시야가 1실점, 후지카와 큐지가 1실점, 와쿠이 히데아키가 2실점했다. 이 후지카와의 실점은 그 유명한 이진영의 동점타이다.[49] 이를 통해 좋은 성적을 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같은 대회(베이징 올림픽)의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이다. 예선 첫경기 미국전부터 3실점, 이후 일본전 마무리로 올라와 방화하며 1실점하며 평균자책점 99.9가 되어 속꽉남이라는 별명을 얻어버린 한기주를 이후 경기에서는 중용하지 않았다.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졌던 대만전에나 출전시켰고 이후 중요한 경기였던 4강전과 결승전은 당시 대회에서 컨디션이 좋던 윤석민과 정대현을 마무리로 투입하였다.[50] 당시, 베이징에서 이진영에 내준 동점타 임팩트 때문에 잘 모르는 사실이나 후지카와는 한국과의 준결승 이전에 3경기 3이닝 퍼펙트 무실점으로 대회 기간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후지카와가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허용한 자책점은 그거 딱 한개다.[51]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08 베이징에서 호시노 센이치의 용병술이 뛰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52] 고영민뿐 아니라, 박경완과 이범호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아웃카운트 세개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53] 7⅔이닝 4피안타 6탈삼진 2볼넷 2실점[54] 전년도 한신의 마무리 투수로서 8승 1패 38세이브에 평균자책점이 무려 0.67이었다. 당시 대회에서도 4경기 동안 무실점이었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지만, 결승전에 하라 타츠노리 감독은 후지카와가 아닌 다르빗슈 유를 선택한다.[55] 사실 한국 입장에서는 여기서 경기를 끝냈어야 했다. 이미 불펜의 과부하가 심각해서 낼 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56] 여담으로, 4실점 모두 한국에게 내준 것이다.[57] 당시 비판 내용[58]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와 2008 베이징 올림픽 그리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총 세개의 대회.[59] 2007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직전 호주 대표팀과의 평가전(4이닝 1실점)과 2009 WBC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1⅔이닝 동안 1실점)까지 포함하면 국제 경기 통산 11경기 32⅔이닝 동안 12실점(11자책) ERA 3.07 기록.[60] 비교적 약체인 중국을 상대로 2009 WBC에서 다르빗슈는 1승을 올리기는 한다.[61] 강백호는 어제 참극에도 불구하고 또 2루에서 세레머니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