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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
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
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 |
1. 개요
미국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북아프리카,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던 미합중국 육군과 미합중국 해군 등의 인원이 합동으로 구성된 첩보기관이자 특수작전부대이다. 여기서 복무했던 많은 이들이 훗날 육군 특전사(그린베레)와 CIA(중앙정보국)의 창설 멤버가 된다. 오늘날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으로 여겨진다.2. 한국과의 관계
맨아랫줄 가운데가 이범석이다. |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는 미 육군성과의 교섭을 통해 한국 청년 100여명을 OSS에 입대케 하고자 하였다.
19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바움(Rosenbaum) 중위 및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E. V. Rostow)와 중국내 한인 항일 게릴라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고[1] 1942년 10월 10일, 육군전략처 처장인 육군 소장 빌 도노반 장군이나 실무자 프레스톤 굿펠로우 대령은 한미 협동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구미위원부를 정당한 단체로 승인할 수 있다며[2] 다음과 같은 공동계획을 제시하였는데,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고 일본과 한국을 자유자재로 통행할 수 있는 한국어·일본어에 능통한 약 100명의 한국 청년들을 동원하여 훈련시킨 후, 일본과 한국 등지에 낙하산으로 침투케 하여 게릴라 작전을 펴는 한편, 국내 지하운동가와 연락을 취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A]
그러나 미국내에 거주하는 2세, 3세 청년 중에 이러한 어학 실력을 갖춘 사람을 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구미위원부는 적격자를 찾기 위해 비밀리에 미국의 동부·서부·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로 요원을 급파하였다. 다행히 약 100명의 적격 청년들이 선발되어 워싱턴 D.C.에 집합하였고 이들에게 간략한 예비 훈련을 시킨 다음 미 육군전략처로 인계하였다.[A]
또 이승만은 재미 한인 청년들로 하여금 '한인 자유부대'를 창설하여 대일 전쟁에 동원하고 광복군을 미군에 통합시켜 대일 전쟁에 투입하자는 내용을 OSS에 제안하기도 했다.[5]
1942년 12월 7일, 이승만은 이와 관련하여 전쟁발발 1주년을 맞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올해 12월 7일을 기하여 미 국방성의 대일항쟁 계획의 일부로 한국 청년을 훈련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소수의 병력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일본을 적멸시키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입니다.[6]
육군전략처는 이들에 대하여 어학실력 심사, 사상 검토, 신체 검사 등을 엄격하게 실시한 후, 산중(山中)으로 인솔해 가 게릴라 전법을 훈련시켰다. 훈련을 마친 이들은 중국에서 동일한 훈련을 받은 교포 청년들과 합류하여 작전개시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의 패색이 뚜렷해지자 당초 계획했던 북중국(北中國)에서 한국에 침투시킬 작전이 와해되고 태평양 도서(島嶼) 방위작전에 투입되고 말았다.[A]
결국 한국 출신 OSS 대원들은 한국에 투입되는 작전에 참여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으나 후일에 종전이 되자 미군정에 배치되어 여러가지 임무 수행에 나섰다. 이 때 한국 출신 OSS 대원 중에는 장기영 전 체신부 장관, 이순용 전 내무부 장관, 김길준 하지 중장 보좌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A]
장준하나 김우전[9], 정운수[10] 같은 광복군들이 OSS에서 훈련을 받았다. 광복군 장군인 백파 김학규나 철기 이범석이 소개 시켜줬다고 한다. #
광복군 창설 70주년에서도 나오듯이, 광복 후 국내 진공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김우전은 OSS에서 부대 파견에 큰 힘을 쏟았다. #
3. 기타
- 1992년에 안두희가 OSS 중령이 김구 암살을 지시하고 나중에는 장택상이 사주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안두희가 워낙 증언을 자주 바꿔서 믿기는 힘들다. OSS는 1945년 9월에 해체되었고, 장택상은 1948년 11월에 영국 대사에 임명됐는데 거절하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리고 권총 테러를 당해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당시 특무대장인 김창룡이 시켰다는데, 김창룡은 당시 소령이었고 특무대장은 1951년에 되었다. 아들 김신은 어떻게 당시 소령인 김창룡이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고 비판했다(...)
- 호찌민과 인연이 깊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11]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이 선택은 결국 훗날 큰 화를 부르게 된다.
[1]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1996, 중앙일보사, p. 242-247[2] 다만 OSS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한 임시정부 내부의 분파주의와 임시정부 외의 여타의 단체들에 대한 대표성 의문 등으로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는 현실적으로 수권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기류는 해방 직전까지 이어가 그 시기 작성된 OSS의 보고서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과 해방 한국을 맡을 능력이 부재하다는 설명들로 가득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군정의 한국 통치 등에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ㅡ한국 분단사 자료집 II 34쪽, 신복룡(편), 한국분단보고서(상) 43-44쪽, 신복룡,김원덕 (역)[A]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 新太陽社, p.246[A] [5] 하지만 미국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몇 년 후인 1945년 냅코작전과 한반도 침투 작전인 독수리작전에 따라 한인 청년 70여 명을 비밀리에 모집해 특공대원으로 훈련시켰다.[6]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 新太陽社, p.269-270[A] [A] [9] 광복회 회장을 지냄. 1944년에 일본군 탈영 뒤 광복군 입대[10] OSS 훈련 후 미합중국 공군 소위로 임관[11] 사실 호찌민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8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그러나 스파이로 오인받아 1943년 9월까지 중국에 있는 감옥에서 생활했고, 미국 또한 동남아시아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1945년이 되어서야 서로 협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