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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트 체임벌린 | 윌트 체임벌린 | 윌트 체임벌린 | 윌트 체임벌린 | 윌트 체임벌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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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nd : 1999-2000 · 2000-01 · 2002-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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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샤킬 오닐 | |
헌액 연도 |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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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킬 오닐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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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BFC7 [[올랜도 매직|올랜도 매직]] 등번호 32번}}} | |||||||||||||||||||||||||||||||||||||||||||||||||||||||||||||||||
오티스 스미스 (1989~1992) | → | 샤킬 오닐 (1992~1996) | → | 제레미 리처드슨 (2008~2009) | ||||||||||||||||||||||||||||||||||||||||||||||||||||||||||||||
C.J. 왓슨 (2016~2017) | → | 샤킬 오닐 | → | 영구 결번 |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34번 | ||||||||||||||||||||||||||||||||||||||||||||||||||||||||||||||||||
조지 린치 (1995~1996) | → | 샤킬 오닐 (1996~2004) | → | 영구 결번 | ||||||||||||||||||||||||||||||||||||||||||||||||||||||||||||||
마이애미 히트 등번호 32번 | ||||||||||||||||||||||||||||||||||||||||||||||||||||||||||||||||||
타이론 힐 (2003) | → | 샤킬 오닐 (2004~2008) | → | 미켈 글라드네스 (2011~2012) | ||||||||||||||||||||||||||||||||||||||||||||||||||||||||||||||
제임스 에니스 3세 (2014~2015) | → | 샤킬 오닐 | → | 영구 결번 | ||||||||||||||||||||||||||||||||||||||||||||||||||||||||||||||
피닉스 선즈 등번호 32번 | ||||||||||||||||||||||||||||||||||||||||||||||||||||||||||||||||||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2002~2006) | → | 샤킬 오닐 (2008~2009) | → | 테일러 그리핀 (2009~2010) |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번호 33번 | ||||||||||||||||||||||||||||||||||||||||||||||||||||||||||||||||||
데빈 브라운 (2007~2008) | → | 샤킬 오닐 (2009~2010) | → | 알론조 지 (2010~2014) | ||||||||||||||||||||||||||||||||||||||||||||||||||||||||||||||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36번 | ||||||||||||||||||||||||||||||||||||||||||||||||||||||||||||||||||
창단 | → | 샤킬 오닐 (2010~2011) | → | 마커스 스마트 (2014~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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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31006F><colcolor=#fdbb3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34 | |
마이애미 히트 No. 32 | |
올랜도 매직 No. 32 | |
샤킬 러숀 오닐 Shaquille Rashaun O'Neal, Ed. D.[2] | |
출생 | 1972년 3월 6일 ([age(1972-03-06)]세) |
뉴저지 주 뉴어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일반전공학부[3] (인문학[4] / 학사) 피닉스 대학교 (경영학 / 석사) 배리 대학교 (교육학 / 박사) |
신장 | 216cm (7' 1")[5] |
체중 | 168kg (370 lbs)[6] |
윙스팬 | 231cm (7' 7") |
후원사 | 리복 |
포지션 | 센터 |
드래프트 |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올랜도 매직 지명 |
소속 팀 | 올랜도 매직 (1992~1996)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6~2004) 마이애미 히트 (2004~2008) 피닉스 선즈 (2008~200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9~2010) 보스턴 셀틱스 (2010~2011) |
등번호 | 32번 - 올랜도 / 마이애미 / 피닉스 34번 - 레이커스 33번 - 클리블랜드 36번 - 보스턴 13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가족 | |
SNS |
[clearfix]
1. 개요
별명이자 애칭인 샤크(Shaq)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린다. 본인 스스로는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선수라는 의미에서 MDE(Most Dominant Ever)라 칭하며, 자칭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대개 수긍하는 편. 또 다른 별명으로 빅 아리스토텔레스도 있고, 자칭 타칭 진짜 슈퍼맨이라고도 불린다. 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캐스터 칙 헌은 오닐을 빅 펠라(Big Fella)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12]
한국에서는 애칭을 딴 '흑상어'와 더불어 그 육중한 몸집과 파워 탓에 '공룡센터'라는 별칭으로도 자주 불렸으며,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4대 센터 중 한 명으로 일컫어진다.[13]
농구 광팬이 아닌 일반인 기준으로도 인지도가 세계적으로 굉장히 높은 선수다. 한국에선 래리 버드, 매직 존슨[14] - 마이클 조던으로 이어지던 NBA 간판스타 계보를 이은 인물이다. 마지막 승부 이후 터진 한국의 농구열풍 당시 NBA 최정점을 달리던 선수였던 조던이 농구를 떠난 과거의 베테랑 포지션이었다면 오닐은 그를 대체할 최고의 슈퍼스타였고, 두 선수를 스폰하던 나이키와 리복이 유일하게 맞다이가 가능하던, 심지어는 오닐의 리복이 더 잘나가던 시기였다.[15]
2. 생애
1972년생으로 조셉 토니와 어머니 루실 오닐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셉 토니는 지튼 홀 대학에서 농구 장학금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농구에는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지만, 다른 게 막장이었다. 약물 복용에 전과까지 있었고, 오닐이 신생아였던 1973년에 마약 소지죄로 감옥에 갔다. 그 사이 어머니인 루실 오닐은 군인인 필립 해리슨과 재혼했고, 조셉 토니는 출소 후 오닐에 대한 친권을 포기한다. 이후 오닐은 조셉 토니와의 어떠한 만남과 대화도 거부하며, 흥미조차 가지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오닐의 농구재능 하나만큼은 한때 대학으로부터 농구 장학금 제안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선수였던 토니에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오닐의 양부가 된 해리슨은 성심성의껏 오닐을 아들로써 양육한다.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각보다 마초 문화가 강하고, 거기에 해리슨은 미국에서도 마초적인 문화가 가장 강한 집단인 군인이었기에 그의 양육은 가끔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엄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정이 없는 학대에 불과했다면 그 오닐이 나중에 해리슨을 "내 아버지인 위대한 (great) 필 해리슨"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거나 자신의 랩 노래에서 '내 아버지는 필이야' 라고 강조할 리가 없다.[16]
실질적 아버지인 필립 해리슨이 독일에서 근무한 덕에 유년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적이 있다. 일화로 군인들과 같이 농구를 하는데 당시 이미 2m에 가까운 신장을 가졌던 오닐이 너무 잘하자 한 군인이 "너 계급이 뭐냐?" 물었더니 "중학생이에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2.1. NBA 이전
(이 영상은 국내의 농구 잡지인 rookie 창간호에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비디오 테잎과 동일하다.)
고등학생때 이미 괴물 센터로 활약해 소속팀을 2년 동안 68승 1패의 먼치킨 팀으로 만들고 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으며 루이지애나 주립대에 진학하고 나서는 1991년과 1992년에 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뽑히고 올 아메리칸 중 한 명으로 지명되는 등 최고의 기대주로 손꼽혔다. 오닐이 1992 드래프트에서 1픽을 가지고 있던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면서 전설이 시작됐다.
3. 선수 경력
커리어 대부분을 한 팀에서 보낸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하고는 달리 팀을 여러번 옮기며 다사다난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모습은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모제스 말론[17], 디시전쇼 이후의 르브론 제임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18]3.1. 올랜도 매직
루키 시즌 올랜도 매직의 성적을 전년의 21승에서 41승으로 끌어올렸으며 23.4득점 13.9 리바운드 3.5 블록을 기록해 루키 시즌에 올스타전 주전으로 선발되는 위엄을 과시했고 그 시즌 신인상을 차지한다.[19]
이듬해 마이클 조던이 야구 하러 떠난 사이 오닐은 득점왕 경쟁에 뛰어들며 두 시즌 만에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로 떠오르는 경악스러운 포스를 자랑했다. 경쟁 상대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몰아받으며 71득점을 기록해 득점왕은 로빈슨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아무튼 1993 드래프트 직후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된 다음 올랜도 매직에서 데뷔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신생팀이던 올랜도를 신흥 강팀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에서도 NBA 붐이 막 일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닐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다.[20]
첫 플레이오프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만나 시리즈 스코어 0-3으로 탈락했다.[21]
오닐의 상승세는 3년차에도 거침없었다. 지난 시즌에 실패했던 득점왕 타이틀 획득에 성공하고 올랜도 매직을 57승 25패로 동부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보스턴을 3-1로 격파, 2라운드에서 마이클 조던이 갓 복귀한 시카고를 4-2로 꺾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에게 4-3으로 승리하면서 설욕까지 완료한다.
파이널 상대는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끌던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 로키츠였는데, 사실 당시에는 늙은 6시드[22]였던 로키츠보다는 젊고 에너지 넘치는 매직이 이길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닐은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리즈 평균 28.0득점 12.5리바운드로 최선을 다했으나 더 괴물같았던 올라주원의 퍼포먼스[23]와 휴스턴의 관록 앞에 0-4로 스윕당하고 말았다. 오닐이 이 시기를 회상하기를, 마이클 조던을 꺾은 이후 너무 빨리 축배를 든 것이 독이 됐다고 한다.[24] 이런 활약상에 그 때 당시 위대한 50인의 NBA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되지만 그 때 반응들은 너무 시기상조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25]
1995-96 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초반에 결장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60승 22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72승의 시카고 불스. 결국 시카고에 0-4로 탈탈 털리고 만다.[26][27] 이후 앤퍼니 하더웨이에게 더 호의적인 구단과의 불화와 악담을 계속하던 지역 언론 때문에 올랜도 매직을 버리고 7년 $121M 계약을 맺으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24년 2월 13일, 그의 번호 32번은 매직 최초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여담으로 영구결번식에는 그의 은사였던 브라이언 힐 감독을 비롯해 닉 앤더슨, 데니스 스캇, 앤퍼니 하더웨이 등의 레전드들도 함께했다.
3.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초기에는 유타 재즈의 칼 말론&존 스탁턴 듀오[28]나 팀 던컨을 얻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밀렸으나 명장 필 잭슨의 지도 및 코비 브라이언트가 정상급 슈팅 가드로 성장하며 오닐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하킴 올라주원 등이 내리막길을 걷는 반면 경험이 쌓이고 몸을 불린 오닐이 리그의 지배자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9-00 시즌은 오닐의 선수생활 중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7승 15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뒤 득점왕, 올스타전 MVP 그리고 정규시즌 MVP를 모두 차지했는데[29], 이 과정에서 MVP 투표 121표 중 120표를 싹쓸이[30]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이어 플레이오프에서는 새크라멘토, 피닉스, 포틀랜드를 차례로 꺾은 뒤 노장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와의 2000 NBA 파이널에서 평균 38.0득점 16.7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61%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시리즈 스코어 4-2를 만들며 첫 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고 파이널 MVP까지 수상하면서 시즌을 완벽하게 마쳤다.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포틀랜드, 새크라멘토, 샌안토니오를 모조리 스윕해버리는 위엄을 과시했다. 이후 열린 2001 NBA 파이널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앨런 아이버슨이 투혼을 불태우며 첫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줬지만 오닐과 코비 원투펀치는 이후 무자비하게 4연승을 거두며 두 번째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다.[31]
이듬해 200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던 새크라멘토 킹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다시 파이널에 진출한다.[32] 2002 NBA 파이널에서 만난 제이슨 키드가 이끌던 뉴저지 네츠의 양민 골밑부대는 오닐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며 3연패에 성공했다. 2000년대 초 오닐은 1990년대 마이클 조던의 뒤를 잇는 말그대로 대마왕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티팬들을 무수하게 양산한 시기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기에 NBA 시청을 끊었다는 반응이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다.[33][34]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오닐의 장기집권은 영원할 줄 알았지만 오닐은 발가락 부상 때문에 수술을 받고 오닐 본인은 이 때를 기점으로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레이커스 왕조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사실 레이커스 왕조가 3연패를 끝으로 무너진 것은 오닐의 기량 하락보다는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갈등 문제가 장기집권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코비는 결코 팀 내 2인자 자리에서 만족할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닐과 코비 사이의 권력다툼은 점점 심해져갔다. 사실 둘이 힘을 합치면 3-peat을 넘어서 과거 1960년대 보스턴 셀틱스만 달성했던 4-peat 이상의 성과를 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둘에게는 본인이 메인이 되어서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오닐이 골밑을 흔들다가 수비가 견고해지면 코비 쪽으로 가거나 혹은 코비 쪽에서 흔들고, 난사하다 안 되면 오닐 쪽으로 가는 등 당시 레이커스에게 팀 플레이란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코비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인 로버트 오리나 데릭 피셔 등은 정상적인 자신들의 포지션보다는 오닐과 코비를 받쳐주기도 바빴다. 오닐 아니면 코비라는 극단적인 전술이니 타 팀들은 파훼법을 찾기가 쉬워지니 점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35]
여튼 오닐과 코비의 레이커스는 4-peat를 노렸지만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점점 전설의 파워 포워드가 되어가는 팀 던컨과 현역 마지막 시즌을 맞이한 데이비드 로빈슨, 당시에는 기복이 있었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그래도 팀에 잘 적응하였던 토니 파커와 마누 지노빌리가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꺾이고 만다. 오프 시즌에 오닐은 우승을 위한 염가계약을 맺으라고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을 꼬드겨 그 유명한 전당포 라인업을 만들지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재계약 협상에서 잡음이 일고, 코비는 덴버에서 성추문에 휘말리며 팀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다.[36]
그 와중에도 휴스턴, 샌안토니오, 미네소타를 격파하며 어찌어찌 파이널에는 진출했지만 래리 브라운 감독의 디트로이트에게 1-4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만다. 당연히 여론은 최악이 되었으며 코비와의 파워게임[37]에서 패배한 오닐은 카론 버틀러, 라마 오돔, 브라이언 그랜트와 트레이드되어 마이애미 히트로 향한다.
3.3. 마이애미 히트
마이애미 히트에 온 오닐은 우승을 안겨주겠다고 장담한다. 발가락 부상 이후 전성기가 끝나 과거 같은 영향력은 더이상 아니었으나 마이애미 이적 첫 시즌에도 평균 22.9득점 10.4리바운드를 달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전 시즌 동부 4위였던 소속팀을 59승 23패로 동부 1위 겸 전체 2위로 이끌며 2004-05 시즌 MVP 투표에서 피닉스 선즈의 스티브 내시를 턱밑까지 추격했다.[38]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재회하였으나 상대 센터 벤 월러스, 베테랑 엘든 켐벨 등의 분전에 밀려 아쉬운 성적을 남겼고, 팀도 7차전 끝에 패배했다.
그래도 MVP 2위 성적을 바탕으로 5년 $100M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 연장계약에는 뒷얘기가 있는데 레이커스와 오닐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돈 때문이었다. 오닐은 1996년에 7년계약을 맺으며 레이커스로 왔고 2000년에 3년 연장하며 (마지막 1년은 선수 옵션) 2005-06 시즌까지 계약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0대가 넘어가고 부상이 잦아지던 오닐은 2003-04 시즌 도중 연장계약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문제는 당시 규정으로 (맥스계약 도중) 가능한 최대기간인 3년 연장계약을 할 경우 오닐에게 지급할 액수가 3년간 약 1억 500만 달러에서 1억 15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었다는 것. 오닐의 연봉은 1996-97 시즌부터 매년 액수가 올라가 2005-06 시즌에는 3천6십만 달러를 받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34세가 된 오닐에게 연평균 3000만 달러 이상을 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선택이었다. 레이커스가 오닐을 포기하게 된 것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는데, 오닐을 잡기 위해선 지출하는 기존의 금액은 그럴만 하다고 쳐도 노장 오닐에게 저 돈을 지불해야했기 때문.[39] 반면 오닐은 그 높은 자존심 때문에 코비에 이은 2인자로 여겨지기 싫어했고, 이 때문에 연봉/팀내 입지에서 확실한 넘버원이란 걸 확인받고 싶어한 것이다.
그런데 히트 이적 후 상황이 달라진다. 오닐은 코비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드웨인 웨이드에게 호의적이었고, 알아서 '이 팀은 웨이드의 팀이다'라고 할 정도로 유한 태도를 보였다. 위에 언급한대로 2005-06 시즌 3000만 달러를 받게 되어있던 오닐은 2005-06 오프 시즌 당시 이 옵션을 포기하고 히트와 1억달러/5년 계약을 맺는다. 이 액수는 당시 그가 받을 수 있는 최대액수보다 상당히 삭감된 액수이며, 심지어 다른 팀과 일체의 접촉도 하지 않고 히트와 바로 계약한 것이다. 물론 플로리다는 주세가 다른 주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다른 팀과 더 많은 액수로 계약하는 것보다 이득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 당시 오닐 정도 위상이면 맥스계약을 요구할 만 했으며, 이미 보장된 3천만 달러를 포기한 것만 해도 꽤나 팀을 배려한 선택이었다.[40]
다음 시즌에는 오른쪽 발목부상으로 18경기를 결장하고, 감독이 팻 라일리로 바뀐 후 출장시간을 제한받으며 스탯은 많이 낮아졌어도 개의치 않아했다.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마이애미의 떠오르는 샛별 드웨인 웨이드를 보좌해 조역으로서 네 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계속 부상을 입으며 하락세를 겪다가 2008년 2월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된다.
사실상 오닐의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마이애미 시절까지였고 그 이후에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한 저니맨 행보를 보이게 된다.
3.4. 저니맨이 된 말년
2007-08 시즌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출장도 못해보고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 탈락하면서 이제는 퇴물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오닐은 뛰어난 피닉스 의료진의 힘을 받고 스티브 내시의 지원에 힘입어 2008-09 시즌에 폼을 약간 회복, 2009 올스타전에서 악연이 많았던 코비와 오랜만에 같은 팀에서 뛰었고, 공동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면서 올-NBA 서드 팀에도 들었다. 하지만 팀은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피닉스는 연봉 문제 때문에 오닐을 트레이드시킨다. 사실 피닉스 시절은 오닐이 올 NBA팀과 올스타에 선정된게 마지막일 정도로 오닐 최후의 불꽃이었다고 평가하는 팬들이 많다.
오닐의 다음 행선지는 청년가장 르브론 제임스가 혼자 애쓰고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클리블랜드는 2009년 동부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인사이드를 털렸던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는 이를 막기 위해 오닐을 영입했다. 오닐은 클리블랜드에 오면서 '킹에게 반지를'("Win a ring for the king") 이라 선언했으나 어느덧 리그 최고령이 된 그에게 큰 힘은 없었고, 2라운드에서 폴 피어스-케빈 가넷-레이 앨런으로 구성된 BIG 3의 보스턴 셀틱스에게 2-4로 걸려 탈락한다.[41] 르브론은 이후 디시전 쇼를 벌인 다음 마이애미 히트로 떠나고 오닐은 자유 계약 신분이 된다.
코비의 5번째 우승에 자극 받았던 건지 오닐은 베테랑 미니멈 계약으로 보스턴 셀틱스와 2년 계약을 맺고 마지막으로 파이널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여러 부상 때문에 37경기만 출장했고 커리어 로우를 기록, 플레이오프에서도 두 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2011년 6월, 현역 은퇴선언을 하면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보스턴 셀틱스 시절의 오닐은 많은 이야깃거리는 없지만, 심판에게 뭐라고 한 소리 했다가 3만 5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어 라커룸에서 Whhhhhy Whhhhhy Kevin[42] Whhhhhy라며 명장면을 남겼다. 이 장면은 샥틴 어 풀의 오프닝으로도 활용되었다. 억울한 샤킬 오닐[43]
2013년 4월 2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레전드 제리 웨스트, 필 잭슨과 수많은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면서도 그답게 유쾌한 영구결번식이 열렸다.
2023년 2월 13일, 올랜도 매직에서도 실질적인 첫 영구결번이 되었고, 오닐의 32번 저지를 영구결번하였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4회 (2000-2002, 2006) NBA 파이널 MVP 3회 (2000-2002) NBA 정규시즌 MVP (2000) 올-NBA 퍼스트 팀 8회 (1998, 2000-2006) 올-NBA 세컨드 팀 2회 (1995, 1999) 올-NBA 서드 팀 4회 (1994, 1996-1997, 2009) NBA 올스타 15회 (1993-1998, 2000-2007, 2009) NBA 올스타전 MVP 3회 (2000, 2004, 2009)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2000-2001, 2003) NBA 올해의 신인상 (1993)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3) NBA 득점왕 2회 (1995, 2000) 1994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캐나다 금메달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MVP (1994)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6) |
5. 플레이 스타일
2000년대 초반 NBA를 지배한 정통파 센터였다. 압도적인 스탯과 성적뿐만 아니라 세 번의 파이널 MVP는 오닐이 리그를 지배해 왔음을 증명한다.[4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한 뒤에는 올랜도 시절보다도 몸을 키워 파워를 증량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스피드와[45][46] 유연함에 여러 기술들까지 탑재해, 원숙해진 개인공격력은 물론이고 골밑에서 3점 라인까지 커버하는 시야와 패스능력으로 리그의 지배자가 된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가진 연습에서 마이클 조던과 1:1로 농구 하는 장면에서는 가드같은 스피드로 드리블을 하고 가볍게 스핀무브를 해서 조던을 농락하기도 했다.
키가 216에 체중은 140kg을 상회[47]하는 파워로 상대 빅맨이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에다, 점프력은 버티컬 70에 손은 솥뚜껑만한 소도둑이 그 축복받은 신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니, 수비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했다. 다만 안그래도 거대한 몸을 레이커스 이적 후 더 불리면서 무릎과 발가락이 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레이커스 전성기 이후 오닐의 커리어를 계속 괴롭혔다.[48][49]
나이가 들면서는 체력적인 문제로 출장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전성기 때는 체력 또한 괴물급으로 경기당 출장시간이 35~40분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쁘냐? 오닐은 NBA 역사에 손꼽힐만큼 BQ(농구 지능)가 높은 빅맨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장점인 힘과 높이를 지능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막아도 막아도 대책이 안서는 오닐을 위해 핵어샤크(Hack-a-Shaq)라는 전술이 등장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공잡으면 무조건 파울해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어차피 못 막는 거 오닐의 유일한 약점이자 심각한 약점인 자유투를 물고 늘어지자는 작전이다.[50] 이로 인해 통산 자유투 시도 개수가 11252개로 통산 NBA 4위를 기록하고 있다.[51] 자유투를 뺀다면 빅맨으로서는 그야말로 완전체라고 볼 수 있다.
5.1. 공격
5.1.1. 인사이드 장악력과 득점력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로우 포스트에서 전성기 오닐의 장악력은 역대 최고를 다툰다.[52][53] 인사이드의 오닐에게 볼이 투입될 경우 기본적으로 2, 3명의 수비수가 견제를 했다. 올랜도 시절부터 이런 더블팀, 트리플 팀을 기본으로 끌고 다니면서 페인트존을 초토화시켰고, 2000년대 초반 레이커스의 쓰리핏 시절에는 그런 파워를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더 불리면서, 진정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 팀마다, 특히 오닐과 자주 만나는 서부 컨퍼런스 팀들은 최소한 몸빵으로라도 오닐의 공격을 버텨줄 센터를 수급하는 게 발등의 불이었다.[54][55] 막말로 오닐과 같은 아주 좁은 로포스트 위주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만으로 NBA에서 이정도로 성공한 센터는 없고[56] 중장거리 슈팅이 센터의 필수항목으로 자리잡게 된 현대에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닐은 늘 그랬듯이 상대팀들의 골밑을 때려부쉈고, 그만큼 집중적인 견제 및 파울, 핵 어 샤크 작전 등을 당해야했다.[57]이미 LSU 재학중 공식 경기에서 골대를 한 번 부숴먹은 오닐이지만, 루키 시절 올랜도 매직에 있을 때 시합 중 골대를 부순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것도 두 번이나...[58] 과거 오닐의 스폰서였던 리복에서 이걸 가지고 오닐의 시그니처 신발인 샤크 어택을 홍보할 때 많이 써먹었다. 오닐이 골대 박살내는 영상. 중간에 연습경기등이 있긴 하지만, 공식 경기에서 오닐이 골대를 박살낸건 LSU시절까지 포함해 3번이고 NBA에선 2건이다.
오닐이 저지른 저 두 건의 사건때문에 NBA에서는 모든 구장에 예비 골대를 상비할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신설했으며, 골대 자체도 절대 망가지지 않게 하중 규격을 상향했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는 백보드 부서지는 것 외에는 골대 자체가 주저앉는 정도는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59]
BROKEN BACKBOARDS/1
부숴버린 골대/1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오죽하면 중계방송 중에 나오는 선수 스탯에 저 기록이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었다.(!!!)부숴버린 골대/1
NBA팀의 주전 센터라면 당연히 큰 키와 긴 팔을 가졌지만 이는 상대 수비수도 마찬가지인데다가 골밑은 평균적으로 2m 중후반에서 2m 10cm 이상에 110kg~120kg의 무지막지한 떡대의 덩치들이 좁은 공간에 집중되어 부대끼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골밑에서만 공격하면 체력소모가 극심한 데다 부상위험도 높다. 그런데 오닐은 이미 대학교때부터 같은 키의 센터들보다 최소 18kg이상은[60] 더 나가는 몸무게에서 나오는 똥파워로 골밑을 눌러버렸고, 데뷔때부터 NBA에서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골 밑 싸움에서 매번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덩치와 운동능력,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기술이, 그리고 뛰어난 재치와 시야라는 조합으로 상대 골밑진영을 이리저리 공략하니 수비하는 상대 입장에선 파울 말고는 확실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오닐의 가장 큰 무기는 물론 포스트업.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힘, 탁월한 센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위치를 잡는데 능했으며,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절대 밀려나지 않았다. 발이 느린 편이라 재빨리 움직여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대신 앞을 가로막는 수비수들을 그냥 힘으로 밀어내며 자리를 잡았다.[61] 또한 시야가 좋아서 별로다 싶으면 바로 킥아웃 패스해주고 다시 자리를 잡고 볼을 요구하는 센스도 있었다. 일단 로우포스트에서 자리를 잡으면 백다운해서 골밑까지 간 다음 훅 슛/골밑 슛/덩크로 마무리하거나 턴어라운드해서 페이더웨이 한손 슛으로 마무리하는 능력도 있었다. 오닐의 경우 포스트업에서 백다운으로 가는 빈도수가 많았으며, 그 위력도 워낙 대단했다.
오닐이 포스트업만 잘했던 것은 아니다. 오닐은 당시 센터기준 상당한 볼핸들링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페이스업 상태에서 돌파해들어가는 능력도 괜찮았다. 일단 돌파를 하면 그는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훅으로 마무리하거나[62] 바로 골밑까지 가서 마무리하곤 했다. 안그래도 몇 체급은 위인 오닐이 가속 붙은상태로 달려오면 보통 사람은 공포부터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2대 2 공격에서 픽앤팝은 슛거리가 짧아 당연히 불가능, 픽앤롤은 선호도 하지 않고 잘 하지도 못했다.
오닐은 재빠른 스핀무브로 돌파해들어가는 플레이도 위력적이었다. 스피드 자체도 있지만 이게 정말 무서운 이유가 상대 수비수는 오닐의 무게를 버티느라 죽을 힘을 다해 밀고 있는데 반대쪽으로 돌아버리면 금방 뚫리기 때문이다. 오닐 특유의 센스로 붙힌 별칭은 "Black tornado". 스핀무브를 이용한 돌파나 백도어 플레이 등 다양한 연계플레이가 있는데, 200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막판에 포틀랜드를 상대로 날린 쐐기 득점이 바로 오닐의 스핀무브에 이은 골밑 컷+코비 브라이언트의 앨리웁 패스로 나온 그림같은 앨리웁 덩크였다. 스핀무브 자체가 시그니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상당히 능숙해서 백다운+스핀무브 후 펌프페이크+덩크 콤보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기술 자체도 완성도가 높지만 이걸 NBA에서 가장 무겁고 강력한 오닐이 하면 그 파워에 수비수가 나가떨어진다. 역대급 수비수이지만 4대센터 중 가장 가벼웠던 로빈슨이 아주 제대로 당해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저 강력한 스핀무브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덩치에 비해, 아니 그냥 운동능력이 대단히 좋았다. 점프력은 레이커스 초창기만 해도 거의 림 근처까지 머리가 갈 정도로 높았으며, 스피드는 느린 편이었지만 순간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300파운드를 훨씬 넘는 선수치고 체력도 좋아서 풀타임으로 뛰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그와 덩치가 비슷한 선수들(야오밍 등)이 체력적 문제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저 덩치로 평범한 7푸터만큼 오래 뛰어준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1990년대 센터들은 2020년대의 센터들에 비해 롱2를 회피하고 3점 슛을 거의 쏘지 않는 대신 공격에서 중거리 샷의 비중이 높았다. 이는 1990년대 센터들 뿐 아니라 농구의 여명기 때부터 계속된 것으로[63] 당시 센터들은 슈팅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20피트 밖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드물어 골밑~중거리에서 많은 득점을 하곤 했다. 그래서 각 팀의 센터들이 로우포스트 바로 바깥~엘보[64] 부근 지역에서 포스트업 자세를 취하고 패스를 받는 것이 당시 모든 팀의 기본 공격 세팅이었다. 오늘날의 센터들이 확률 높은 골밑 슛 아니면 기대 득점이 높은 3점 슛을 선호하고 향상된 슈팅 능력을 바탕으로 간간이 롱2도 던지는 대신, 미드레인지는 버리다시피 하는 것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던 것.
오닐은 평균 30득점에 육박하는 득점원치고는 특이하게 공격범위가 매우 좁았는데,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범위가 끽해야 10피트(3미터) 정도까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덩크, 레이업, 뱅크샷 범위에서 벗어난 거리에서 슛 시도 자체는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 거리에서는 손목 스냅을 제대로 쓰지 못해 다른 센터들처럼 점퍼를 쏘지 못했기에 베이비훅이나 특유의 '어깨로 밀어 던지는' 점퍼를 던졌고 성공률도 40%대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샷메커니즘으로는 자유투 라인 거리(약 4.2m) 정도에 이르게 되면 적중률이 급락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동시대 정상급 센터들인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등에 비해 3m를 넘어가는 미드레인지 샷의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그러다보니 종종 3점 슛을 시도해서 성공한 저들과 다르게 오닐은 3점 슛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고 커리어 동안 딱 1개를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시간에 쫒겨 던지긴 했어도 무려 롱쓰리 버저비터였다.#[65]
5.1.2. 그 밖의 장점
본인이 마무리하는 빈도수가 많았지만 패스능력이 좋아 자기에게 수비가 몰릴 때 킥아웃해주는 데도 능했다. 이로 인해 슬래셔 선수와도 슈터 선수와도 조합이 좋았는데, 코비 브라이언트와 뛸 때에는 코비가 돌파해서 수비를 끌어온 다음에 오닐에게 빼주거나, 오닐이 수비를 끌어온 다음 생겨난 공간을 코비가 돌파해오는 조합을 보였다. 물론 코트 밖에서 문제였지만.슈터의 경우 올랜도/레이커스에서 모두 호흡을 맞춘 베테랑 가드 브라이언 쇼가 찰떡궁합이었는데, 쇼는 받아먹기 외에도 오닐의 입맛에 딱 맞는 엔트리패스를 넣어주는 가드이기도 했다. 엔트리 패스의 경우는 앤퍼니 하더웨이도 오닐이 좋았다고 방송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 올랜도에서 호흡을 맞춘 '3D' 데니스 스콧도 궁합이 잘 맞는 선수였고, 이 세 선수는 오닐과 사이도 원만한지라 은퇴 후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66]
주요 공격옵션까진 아니었지만 가끔 페이스업으로 드리블 돌파를 할 때도 있었다. 오닐의 드리블과 볼핸들링은 1990년대에 데뷔한 센터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며, 한쪽 골대에서 반대쪽 골대까지 단독 드리블을 하다가 깨끗한 스핀무브로 수비수를 제치고 덩크를 꽂아넣기도 했다. 다만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페이스업을 자주하진 않았다. 워낙에 포스트업 옵션이 강력하기도 하고.
5.1.3. 최대 약점인 자유투
공격에서 유일한 단점은 자유투.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2.5%로,[67] 빅맨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좋은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자유투 연습을 엄청나게 시켰는데도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오닐은 손이 매우 큰 편으로 농구공에 나뉘어진 칸을 기준으로 3칸을 잡을 수준인데 큰 손이 자유투에 불리하고, 자연스럽게 스냅을 줄 수가 없어서 공을 손가락 위에 얹어서 밀어 던지는 수준이었는데, 당연히 슛 메커니즘 상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다.똑같이 손이 큰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 카와이 레너드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8할 중반대인 걸 보면 그냥 못던지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저들은 역대 최고수준의 미드레인지를 자랑할 정도로 중거리 구간에서의 슈팅을 극한까지 단련한 선수들이라 태생이 골밑 득점원인 오닐의 비교대상으로 적절치 않다. 기계와도 같은 극도의 반복 연습으로 유명한 레너드조차 본인 스스로 손이 너무 큰 나머지 슛감이 일정하지 않다고 말할 정도이니, 너무나 큰 손이 슈팅과 자유투에 불리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손목을 다쳐 스냅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도 한 몫했다. 물론 아무리 그럼에도 50퍼 초반대의 성공률은 너무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오닐의 자유투 성공률은 거의 늘 자신의 야투 성공률보다 낮았기 때문에[68]오닐이 공을 잡으면 슛을 하기도 전에 먼저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다. 심지어 팀파울에 걸린 상황에서는 공을 잡지도 않은 오닐에게 고의로 파울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이런 작전을 가리키는 핵어샤크(Hack-a-Shaq)라는 신규용어까지 생겨났다. 디안드레 조던 등과 같이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에게 고의로 파울을 해서 자유투를 강제시키는 소위 '핵어' 작전의 시초였던 것.[69][70][71]
여담으로 손목스냅이 안 좋은 오닐에게 NBA 레전드 릭 배리가 했던 것처럼 언더핸드로 던져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커리어 내내 있었지만, 오닐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bvj_EuiKQY 그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지루하다(It's boring)"라며 "난 그런 것을 하기에는 너무 쿨하다.(I'm too cool for that)"라며 "난 릭에게 그렇게 쏘느니 차라리 0%를 쏘고 말겠다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언더핸드가 더 효과적이라고 입증되었단 말에 대해선 "두어명이 잘했다고 입증된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72] 오닐은 이에 대해 "신이 날 겸손하게 하려고 이렇게 만든 것 같다"면서 자기가 재능으로 따지면 조던이나 체임벌린보다 더 뛰어나기에 이런 약점으로 겸손하게 만든 것 같다고.[73]
5.2. 수비
수비도 맨투맨 수비는 굉장히 뛰어났다. 높이/파워/운동능력을 겸비한 수비수인지라 그 누구도 오닐 위로 쉽게 득점을 하지 못했으며, 기동성과 장거리 슛을 모두 특급으로 갖춘 디르크 노비츠키에게 외곽에서 붙어 괴롭힐 정도로 뛰어났다.[74] 키와 점프력, 키에 비해서도 굉장히 긴 팔 덕분에 블록도 뛰어났으며 이 덕분에 커리어 내내 인유어페이스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다만 인유어페이스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꼭 자랑할 것만은 아닌 게, 오닐은 굴욕을 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그런 일을 당할 것 같으면 그냥 피해버리거나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2004-05 시즌 당시 결별한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첫 맞대결에서 코비가 돌파를 해 덩크를 하려고 하자 파울로 끊어버린 게 대표적.
그는 기본적으로 능력에 비해 비교적 수비에 들이는 노력이 현저히 적은 선수였으며, 그가 수비수로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는 이것도 한 몫했다. 아이러니하게 오닐이 수비수로 가장 뛰어났던 시절은 기동성 측면에서 최전성기였던 루키 시즌이었다. 루키 시즌의 오닐은 138kg의 거구임에도 어지간한 당대 파워 포워드 수준의 스피드와 민첩함을 자랑했지만[75], 레이커스에선 안그래도 강한 파워를 더욱 늘리기 위해 공식 147kg, 비공식 153kg까지 체중을 불리며 스피드는 유의미하게 떨어졌기 때문.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세 차례 오를 정도로 수준급 수비수긴 했지만, 이건 사실 2000년대 초반에 1990년대를 주름잡은 센터들의 공백를 메울 신예들이 많이 없어서 엘리트 센터들이 일시적으로 씨가 말랐던게 크다. 2000-01 시즌에는 벤 월러스가 성장하기 전이었고 2002-03 시즌에는 디켐베 무톰보가 노화와 부상으로 30경기도 못 뛰었다. 1990년대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센터 부문은 정말 빡셌는데,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가 모두 1990년대에 수비왕을 차지하고 그 밑에 패트릭 유잉도 다른 시대였다면 수비왕도 노려볼 정도라 수비의 달인인 알론조 모닝이 이들이 거의 전부 노쇠하고 난 1998-99 시즌에서야 데뷔 7년만에 처음으로 올-디펜시브 팀에 올랐다. 실제로 무톰보가 수비왕을 차지하고도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으로 밀린 시즌이 있을 정도였다. 즉, 1990년대에 센터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이라도 오르려면 사실상 수비왕급 수비력이 필요했다. 다만 1999-00 시즌에는 수비왕 투표에서 2위를 할 정도로 정말 잘했다. 레이커스 이적 이후 몇년간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탈락하며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던 오닐은 이때 부임한 감독 필 잭슨의 체제 하에 살도 빼고, 수비에서도 온 힘을 다하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했다.[76]
축복받은 체격을 앞세운 맨투맨 수비에는 능했지만 가드와 콤비를 이루는 픽앤롤 등의 다양한 2대 2 전술을 쓰는 팀 상대로는 느린 발과 설렁설렁한 리커버리때문에 약점을 보였고[77], 레이커스 이적후 1997년, 1998년 2년 연속으로 픽앤롤 달인들인 존 스탁턴, 칼 말론의 유타 재즈에게 탈탈 털렸다. 필 잭슨이 들어온 이후에 팀 수비 전술을 다시 만들고 나서야 우승을 거둘 정도. 물론 이것도 그나마 나아졌다는 거지 오닐은 평생 좋은 2대 2 수비수가 되진 못했다. 느린 발 때문에 외곽에서 거의 쓸모가 없어 가드에게 붙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픽 이후 매번 골밑으로 뒷걸음치곤 했는데, 스탁턴과 말론처럼 두 선수 모두 슈팅력과 돌파력을 겸비한 공격수를 상대할 경우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오픈 찬스가 생긴다.[78]
"오닐이 현대농구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와 관련해 그를 로우포스트에서 막을 수 있는 빅맨이 현대농구에 없다는 것은 명확하지만, 반대로 현대농구 수비 트렌드에 가장 안 맞는 수비수가 오닐이기도 하다. 오닐은 수비력이 뛰어났지만 기본적으로 수비범위가 좁았으며 스위치 수비나 헤지, 리커버리에서 굉장히 약했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에는 빅맨들이 로우포스트 공격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이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79] 예를 들어 공격범위가 넓고 공격기술이 다양한 하킴 올라주원의 경우에도 픽앤롤이나 픽앤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로우포스트에서 볼을 잡고 공격하는 경우가 주옵션이었다. 칼 말론의 공격을 오닐이 유독 못 막았던 이유가 그는 1대 1보다 2대 2 공격을 주로 하는 선수였기 때문.
이처럼 만약 오닐이 2020년대에 뛴다면 저 점은 큰 문제가 된다. 현대농구에서는 로우포스트에서 정직하게 몸으로 부딫히며 밀고 들어가는 빅맨이 오히려 소수이기 때문이다.[80] 즉 오닐의 수비 스타일 자체가 말론같이 기동력+슈팅력을 겸비해서 2대 2 농구를 하는 빅맨들에게 약했는데, 현대농구엔 말론같은 선수들이 넘쳐난다. 최근 몇년간 올-NBA 팀 센터 포지션에 오른 니콜라 요키치, 조엘 엠비드, 루디 고베어, 앤서니 데이비스, 칼앤서니 타운스 중 어차피 팀에서 주요 공격옵션이 아닌 고베어를 제외하곤 전부 2대 2농구가 가능하고 공격범위가 매우 넓은 선수들이다. 저들은 슈팅력만 보면 롱2까지였던 말론보다도 더욱 길다.
물론 모든 레전드들이 그렇듯이 이들의 플레이 스타일은 각 시대에 맞게 진화한 결과이다. 오닐이 농구를 배우던 시절에 빅맨은 로우포스트에서 붙는 것이 당연시되었기에 오닐은 로우포스트 공략에 맞게 플레이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요즘 선수였다면 벌크를 다소 줄이더라도 기동력을 살리고, 2대 2 수비력을 키웠을 확률이 높다. 또한 기본적으로 오닐은 시대를 불문하고 같은 빅맨들조차 1대1 매치업이 어려울 정도의 로우포스트 존재감을 자랑하던 선수였기에, 그를 기용하는 팀에선 수비에서 핸디캡을 감안하고 이를 보완할 인사이드 파트너를 붙혀주는 식의 기용을 할 수 있다. 설령 트렌드에 안 맞는다고 해도 워낙 막강한 위력을 지녔기에 전성기 아이버슨처럼 다소 변칙적인 로스터 운영으로 기용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선수였다.
6. 예능감
진지한 외모와 우락부락한 덩치와는 달리 예능에 재능이 있다. 르브론 제임스,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댄스 비법을 전수해 주는 영상이 있다. <무서운 영화> 시리즈에도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음반을 내기도 하는 등 유쾌하다. 본인은 스스로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거인 아리스토텔레스(The Big Aristotle)"라고 불러달라고 한 적이 있다. NBA에서 가장 엔터테이너적 마인드와 상품성이 풍부한 스타. 프로스포츠가 시작한 이래, 리그를 지배할 정도의 파괴력을 갖춘 스타 선수는 그 실력 자체가 상품성이기 때문에 철저한 자기관리와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상품성을 갖추는 것이 보통이고 그를 통해 지금까지도 프로스포츠 역사에 남을 상품성의 사나이 마이클 조던이 NBA에 있었기 때문에 리그의 the one은 어느정도 진중하고 미디어와 적절한 긴장구도를 유지하고, 마케팅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샤킬 오닐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드문 케이스다.본인 별명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 별명도 멋있게 잘 지어준다. 대표적으로 마이애미 시절 팀 동료였던 드웨인 웨이드의 별명 'The Flash'. 폴 피어스의 별명인 'The Truth'나 팀 던컨의 'The Big Fundamental'[81] 등의 별명도 오닐이 지어 주었다.[82] 코비 브라이언트에게도 'Showboat'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썩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어서 그런지 잘 쓰이지 않았다.
올스타전 같은 축제에도 가장 필요한 스타라고 평가받는다. 2008 올스타전에서는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는데, 한 번 포인트 가드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오닐을 마크하는 선수는 드와이트 하워드. 그만큼 관중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명예경찰이다. 실제로 용의자를 쫓아가서 잡아본 적도 있다고. 또 훈훈한 미담도 있는데 친어머니에 의해 5살이라는 나이에 인신매매단에게 팔리고 성매매를 하게 된 샤니아라는 소녀의 장례식 비용도 다 부담해줬다. 이외에도 경찰 채용 광고에 나오기도 하고, 경찰 살인범 추적을 위한 현상금을 기부하고, 경찰 장례식에 사적으로 유감을 표하는 등 미국 경찰에 대한 활발한 관심과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미국 경찰관들 사이에서 오닐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요새는 트위터에 빠져있는 것 같다. 글이 자주 올라온다.
2010년 12월 보스턴으로 이적 후 보스턴 오케스트라에서 명예 지휘자로 활약했다. 역대 지휘자 중 최장신으로 기록되었지만 타코 폴이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엔터테이너 기질 때문에 그의 커리어가 더 위대해지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상술한대로 저런 경박한 개그캐가 세계관 최강자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가 있기도 했었고, 그때문에 여러 팀을 옮겨다닌 결과를 낳기도 했으니까. 미국의 스포츠 블로그이자 팟캐스트인 그랜트랜드를 공동진행하는 잘렌 로즈의 경우 "만약 오닐이 코비와 같은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면 리그는 멸망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실제로 두 선수가 레이커스에서 틀어지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농구라는 게임을 대하는 시각의 차이가 작용했는데, 코비는 오닐의 '외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레이커스 시절 감독이었던 필 잭슨 또한 '오닐은 10년 연속 MVP를 거머쥘 능력이 있는 선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어야 했다.'라며 아쉬운 평을 남겼을 정도이다.
오닐이 이러한 엔터테이너 기질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신의 능력에 자신만만했던 오닐은, 마케팅 수업에서 교수에게 마이클 조던같은 선수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과제로 제출했지만, "네가 노력파고 당돌한건 이해 하지만, NBA에서 거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라는 평과 함께 낙제점을 받게 되었다.[83] 이후 그런 혹평을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광고들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중, 슈퍼볼 XXI의 버드라이트 광고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 후반의 해당 브랜드의 마스코트로써 인기를 얻은 불테리어 스퍼즈 맥켄지 (Spuds MacKenzie)를 보고, "이 개가 아무것도 안 하지만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스타덤에 올랐는데, 나도 재미있는 성격을 충분히 살리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다짐을 한 후, 자신의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캐릭터를 대중에게 열심히 어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선수 시절에나 은퇴 이후에나 이어졌고, 수많은 영상매체들과 광고들에 출연하면서 크게 성공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대본이 있으면 그 내용에다 자신의 캐릭터를 적절히 버무려 큰 성공으로 이끌기에, 여러 광고주들과 마케팅 업체들에게 호평을 받고있다. 홍보하는 제품들도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제품들만 선택하는데, 예를 들어 스마트 홈 업체인 ring은 창업자와 함께 광고를 찍었고, 크리스피 크림은 100여개의 매장들을 보유하면서 홍보 이벤트에 나서기도 한다. 아예 애틀랜타에서 여러 기업들의 대표들과 향후의 홍보 어젠다를 정하는 샤크 서밋을 매년 열기도 한다.
7. 미디어믹스?
데뷔 초기의 인터뷰에서, "나의 꿈은 NBA 챔피언, 아카데미상, 에미상"이라고 할 정도로, 농구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의 레이커스 이적에 대해,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적하여 연예활동을 좀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다.총 다섯 장의 랩 음반을 내기도 하였는데, NBA에 데뷔하기도 전인 1993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haq Diesel'은 두 곡을 빌보드 싱글차트 50위에 안에 올렸고, 한때 빌보드 앨범판매 순위 25위까지 오르며 100만장을 넘게 팔만큼 성공했다. 이후 우탱 클랜의 멤버들과 교류가 두드러지는 2집 'Shaq Fu-Da Return'(1994), 'You can`t STOP the REIGN'(1996)등을 발표하지만, 데뷔 앨범만큼의 성공은 없었고, 2000년대 초반 이후엔 두드러지는 음악활동은 없다. 1994년 발표된 명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앨범 'Jook Joint'의 수록곡 'Stomp', 1995년 발표된 마이클 잭슨의 앨범 'HIStory'의 수록곡 '2 Bad'에서도 구수한 랩을 들려준다. 가장 유명한 힙합 작업물을 꼽으라면 역시 그의 별명을 차용한 단체곡 Men of Steel.[84]
영화에 여럿 나왔지만 그다지 평가는 좋지 않다.[85] 1995년 국내에 비디오로 발매될 때에는 '샤킬 오닐의 NBA 챔프'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블루칩스에 출연하였다. 대학농구 리쿠르트(신입생 발탁)의 추악한 이면을 들춘 영화에서 그는 유망주 농구 선수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이후 올랜도 시절 동료가 되는 앤퍼니 하더웨이가 출연하기도 하며, 실제로 이 영화 촬영 과정에서 두 사람은 많이 가까워져, 이후 1993 드래프트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닉 놀테의 연기도 좋다. 더불어 이 영화 감독은 다름아닌 윌리엄 프리드킨이다! 3500만 달러로 제작했으나 북미 흥행은 2300만 달러에 그치며 실패했다.
1996년에 주연으로 나온 '카잠'은 자타공인 최악영화로 악명을 떨쳤던 바 있다. 평단의 평은 '자기 자유투 실력만큼이나 형편없는 연기력을 보여줬다'라고 했다. 그래서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에서 만든 '최악의 조합'으로 '샤킬 오닐의 부업'을 꼽기도 했다. 이 영화의 개봉 무렵 올랜도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했는데, 친정팀인 올랜도 원정경기 도중 올랜도의 팬 두 사람이 '올랜도에서 네 녀석 영화를 본건 우리 둘 뿐이다ㅋㅋㅋ'라는 피켓을 들고 골려먹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Nostalgia Critic이 다룬 적도 있다. 그나마 2천만 달러로 만들어서 북미에서 1890만 달러를 벌며 망해도 너무 쫄딱 망하진 않았다.(흥행에서)
1997년 DC 코믹스의 영웅 캐릭터인 스틸의 실사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적이 있다.[86]
이후 무서운 영화 4에서 카메오로 나온다든지[87][88] 조역으로 종종 나오고 있다. 최신작은 애덤 샌들러의 2013년작으로 7월 12일 개봉한 Grown Ups 2에서 조연으로 나온다. 또한 2014년 개봉한 레고 무비에 피규어 및 목소리로 출연하였다.
샤킬 오닐 필모그래피 (영화 한정) | ||
샤킬 오닐의 NBA 챔프 | 1994 | Neon 역 |
카잠 | 1996 | 카잠 역 |
스틸 | 1997 | 존 헨리 아이언스/스틸 역 |
Good Burger | 1997 | 본인 역(카메오) |
Freddy Got Fingered | 2001 | 본인 역(카메오) |
The Wash | 2001 | 노만 역 |
무서운 영화 4 | 2006 | 본인 역(카메오) |
로마에서 생긴 일 | 2009 | 본인 역(카메오) |
잭 앤 질 | 2011 | 본인 역(카메오) |
Thunderstruk | 2012 | 본인 역(카메오) |
레고 무비 | 2014 | 본인 역(목소리) |
블렌디드 | 2014 | Doug 역 |
엉클 드류 | 2018 | 빅 펠라 역 |
격투기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격투기 수련도 꽤나 오래 했었다. UFC가 지금만큼의 인기를 끌지못하던 암흑기에도 꼬박꼬박 대회장을 찾아 관람하였고, 심지어 UFC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이애미 연고의 팀으로 이적했을 때는 UFC 경기장이 너무 멀어 찾아가기 힘들다며 마이애미에서도 UFC 대회를 열어줄 것을 주최측에 요구하기도 하였다.[89] 이런 모습 덕분에 게임 UFC 언디스퓨티드 2010에 게스트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WWE RAW 관람 중 쇼 후반부에 빅 쇼와 대립하는 장면을 만들기도 했고[90] 선수 말년에 종종 최홍만에게 도발을 한다든지[91] UFC에서 브록 레스너와 붙고 싶다든지 하는 얘기를 해왔다. 그리고 WWE는 은퇴 후 자유의 몸이 된 오닐을 놓치지 않고 빅 쇼와의 경기를 추진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에서 몇년간 소식이 없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레슬매니아 32 앙드레 더 자이언트 추모 배틀로얄 경기에서 깜짝 등장하였다.
오닐의 인기가 전성기에 달했을 때 그 인기에 편승한 게임도 나왔는데, '샥 푸'라는 게임 이다. 16비트 게임기로 나온 대전 격투 게임이지만, 세계 역사상 최악의 대전액션게임이라는 평가도 종종 받는 희대의 쓰레기 게임. AVGN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리뷰한 바가 있다. 오닐이 멋지게 쿵푸 포즈를 잡고 있는 표지가 인상적인 이 게임은 섀크의 인기를 믿고 안일하게 만들어 너무 많이 찍어낸 나머지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후일의 영화 엄복동 같은 느낌으로 못 만든 게임을 조롱하는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밈이 또 인기가 있어서 밈의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까지 제작되었다. 섀크로서는 그렇게까지 나쁜 추억은 아니었는지, 후속작에도 흔쾌히 초상권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션캡쳐와 홍보 영상에도 출연했다. 물론 후속작도 2018 최악의 게임 중 하나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망했다.
스타급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특정 선수를 주제로 한 NBA 홈 비디오 시리즈가 오닐 버전으로도 몇개 출시되었는데, 이 중 맨 처음으로 나온 <샤크 어택 - 인 유어 페이스>라는 비디오테잎은 1994년 월간 루키 창간호 특별부록으로 한글 자막판이 증정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원래 이 비디오가 나온 시기가 오닐이 막 NBA에 입성한 1992년인 탓에 수록 내용이 NBA에서 활약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시피하고[92] 대학시절 활약을 찔끔 보여주는 수준이며, 대부분의 내용은 오닐의 일상과 주변인들의 인터뷰, 그리고 오닐의 랩 배우기 등으로 채워져있다. 그런데 정작 루키 부록으로 현지화된 버전은 비디오 제목 자체가 <NBA 슈퍼스타즈 비디오 샤킬 오닐>인데다 케이스에도 올랜도 유니폼을 입고 멋진 덩크를 꽂는 오닐의 모습이 나와있었기에, 오닐이 NBA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비디오를 재생했다가 낚인 걸 알고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오닐 팬들마저도 이 비디오만큼은 드럽게 재미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궁금한 사람은 직접 보자.
1993년에 펩시 광고에 출연했는데, 길거리 농구를 하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다가 펩시를 찾는데 아이스박스가 텅 비어 실망한 상태에 펩시 병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 얻어 마시려고 하니까 꼬마아이가 '꿈도 꾸지 마요' 하며 거부하자 오닐의 멋쩍은 표정이 일품인 내용이다. 이 광고는 국내에도 방영되었는데 오닐과 아이의 목소리는 더빙이 되었다.
2018년에는 디스커버리 채널의 연례 편성 중 하나인 "Shark Week"의 30주년 특집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름하야 "Shaq Does Shark Week"
방영 전 광고
(Shaq Week인 줄 알고 승락했는데, 알고보니 Shark Week였다'고 드립을 친다.)
한편 본편 촬영 중에는, 상어 케이지에 들어간 채 잠수한 오닐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상어들 중, 약간 몸집이 작은 상어 한 마리가 케이지의 창살 틈새로 난입하는 돌발 사태를 겪기도 했다.
2021년 3월에는 올 엘리트 레슬링 AEW 다이너마이트 더 크로스로즈 특집에 출연해 제이드 카길과 팀을 이뤄 코디 로즈 & 레드 벨벳을 상대로 2:2 혼성 태그팀 경기에 참가했다. 제이드 카길이란 신인 선수를 소개하는 역할로 출발해 상대 팀 코디 로즈의 아내 브랜디 로즈에게 물을 맞고, 경기 당일엔 2020년에 타계한 브로디 리의 오마주를 비롯해 파워 밤과 테이블 2개를 박살내는 장면까지 선보였다.
8. 밈
이 탈취제 광고에서 귀엽게 몸을 흔드는 게 밈이 되었다.
이후 샤크 혼자 나오는 것보다 고양이와 함께 나오도록 편집된 버전이 인기를 끌었다. #
8.1. Shaq face
유튜브의 유명한 요리 예능 프로그램 First We Feast에 나와 핫 윙을 먹고 웃긴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 웃기는 바람에 밈이 되어버렸다..
8.2. Sleepling shaq
보통 두 칸으로 나눠져 상단의 'I sleep'과 하단의 'Real shit'으로 알려져 있는 밈이다. 상단에는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을, 하단에는 절대로 무시하거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한다. 더해서 세세하게 나누고 싶다면 세 번째 칸에 Ascended와 네 번째 칸에 WOKE를 추가하기도 한다.[93] 예시들.9. 농구화
아마츄어 시절부터 엄청난 유망주로 당대 농구화 시장에서 주가가 높던 리복과 계약, 루키 시즌부터 시그니처 시리즈로 그 유명한 샤크어택 시리즈가 발매됐다. 아무래도 투박하고 묵직한 빅맨 시그니처 농구화는 상품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리복 샤크어택 시리즈는 빅맨 시그니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고 잘 팔리던 농구화였다. 서두에도 언급했듯, 전성기 시절 에어조던 시리즈와도 맞다이가 가능했던 시그니처. 에어조던의 상징이 점프맨 로고라면, 샤크어택의 상징은 덩크맨 로고.시리즈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빅맨 시그니처답게 발목을 완전히 감싸는 높은 하이탑 디자인, 그리고 리복이 자랑하는 인스타 펌프로 인한 사용자의 발에 맞춘 완벽한 핏팅감. 그리고 그 거구의 샤킬 오닐을 받쳐준 절대적인 쿠셔닝 (다만 헥사라이트 쿠셔닝 특성상 푹신하지는 않고 단단한 하드 쿠셔닝이다).
유명한 시리즈로는 샤크어택1, 샤크어택4, 샤크노시스가 있다.
샤크어택1은 시리즈 최초인데도 불구하고 이후 발매되는 2,3보다 완성도가 높고 인지도도 압도적이다. 인스타 펌프, 카본 플레이트. 쿠셔닝 테크놀로지는 따로 없다.
샤크어택4는 상어이빨을 형상화한 듯한 디자인과, 총과 비슷한 디자인의 펌프 주입기가 따로 있어서 센세이션했던 신발. 펌프 주입기가 따로 있었지만 여러번 누를 필요없이 한번에 펌프가 채워져서 편리했다. 다만 최근 레트로 모델은 권총모양의 주입기가 없어지고 단순한 모양의 펌프 주입기로 변경되어 많은 원성을 자아냈다. 네오프렌 안감과 발목 스트랩, 펌프로 인해 핏팅감은 시리즈 최고 수준. 인스타 펌프, 헥사라이트 쿠셔닝.
특히 한국에서는 같은 시즌 발매됐던 에어조던8과 함께 90년대 고가 농구화의 상징적인 신발.
샤크노시스는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샤킬 오닐 본인도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 당시 리복이 밀던 뫼비우스 디자인 중의 하나로서 독특한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이다. 카본 플레이트와 인스타 펌프, 헥사라이트까지 스펙도 시리즈 최고 수준. 다만 최근 레트로 모델에서는 인스타 펌프를 아예 빼버리고(!) 발목높이도 확 깎아버려서 아예 다른 신발로 만들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덕분에 샤크노시스 원판의 중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중.
샤크노시스 이후로는 리복의 농구화가 너무 고가라고 생각하여 4000만 달러(468억원 상당)을 포기하고 리복과의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로고를 붙여서 자체 브랜드로 시그니처 농구화를 제작, 20달러 미만의 착한 가격으로 가난한 어린이들과 학생들도 시그니처 농구화를 신을 수 있도록 했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스테판 마베리와 같은 마인드. 한 어머니가 농구화가 비싸다고 샤킬 오닐에게 항의하자 그날 당장 계약을 해지하고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비록 리복 시절에 비해 기능은 아쉽고 (그래도 샤킬 오닐이 직접 신던 신발인만큼 쿠셔닝만큼은 절대적이었다) 디자인도 어디선가 본듯한 카피캣 디자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샤킬 오닐 자신의 상품성 덕분에 큰 돈을 벌었다고.
은퇴 이후에는 리복과 다시 비즈니스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2020년대부터는 리복의 농구화 부문 사장을 맡고있다. 참고로 부사장은 앨런 아이버슨.
10. 여담
- 은퇴 후에는 SHAQ 샤킬 오닐 최고의 대결 - 스타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ex. 알버트 푸홀스, 마이클 펠프스)과 대결을 펼치고 있다.[94]
- NBA Open Court라는 시즌제 예능 겸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 중이다. 그런데 썩 좋은 패널은 아닌 것이 자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조건 끼어든다. 실제로 그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단 오닐은 애널리스트로는 좋은 목소리가 아니다. 과거 패널에 있었던 크리스 웨버나 같이 진행하는 케니 스미스와 달리 상당한 중저음이기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곰이 웅얼거리는 것 같다"고 까기도 한다. 또 상당히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둘과 달리 아직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내공이 부족하고 진지하지 못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점은 차차 개선되는 중. 더 심각한 문제는 현대 농구에 대한 공부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까는 팀들이 있는데 사실 그 팀의 경기를 거의 안 보는 것 같다는 지적이 많으며, 똑같은 뜬구름 잡는 얘기도 많이 한다.[95][96]
- 위에 언급된 샥틴 어 풀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가 현 NBA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났는데, 원래 이 프로는 작가들이 영상과 대사는 전부 준비하고 오닐은 이 대본을 맛깔스럽게 읽기만 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작가진이 엉뚱한 대본을 전달하는 바람에 오닐이 즉석에서 멘트를 준비해야 했는데, 해당 영상에 나오는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보면서 "아 저 선수가 이런 바보짓하고 있네요"라고 해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웃으며 넘어갔지만 현역 해설가이자 분석가가 스타급 선수들을 제외한 선수들의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건 은근히 심각한 문제다. 그래도 최근에 개선된 것 같으며 그의 특유의 목소리는 대체 불가라 몇벛 오닐이 빠졌을 때 '오닐이 없으니 확실히 다르다' 하고 아쉬움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특유의 "저베일 맥기" 의 외침을 대체 불가수준.
- 방송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 문제는 자기가 무시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점이다. 찰스 바클리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자신이 놀림감이 되더라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닐은 장난식으로라도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꼴을 못 본다. 남들은, 특히 까마득한 선배인 패트릭 유잉이나 데이빗 로빈슨에게도 바베큐 치킨 드립을 치면서 자기 힘이나 실력을 무시하면 정색하고 부정한다. NBA슈퍼스타들이 자존심이 센 편이긴 하지만, 바클리나 다른 선수들은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웃을 때는 그냥 웃는데 오닐은 웃다가도 자기를 무시한다 싶으면 정색하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적이 여러 번 있다. 바클리와 아웅다웅할 때 바클리가 당하는 기믹이 대부분인 것도, 바클리는 이런 식의 까임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지만 오닐은 절대 못 넘긴다는 것이다. 오닐이 자진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건 본인이 사전에 짜놓은 꽁트를 할 때 뿐이다.
- 사실 패널로서 여러 문제점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웃기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크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기가 무시당하면 정색하면서 남들을 놀릴 때는 상대 반응이 어떻든 무시하고 계속 자기 할말을 한다. 샥틴 어 풀 항목에서 나오듯이 샥틴 어 풀에 나오는 것에 대해 맥기 본인이 싫다며 그만 좀 내보내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무시하고 계속 내보내면서 비웃었다. 그래놓고 맥기가 비난을 하자 오히려 맥기를 무시하면서 자기 때문에 맥기가 유명해졌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농구선수가 전국적으로 바보 취급당하며 조리돌림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인터넷에서 인기 좀 많다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저베일 맥기 항목에도 나왔듯이 이런 점은 맥기의 선수 가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이다.
- 그래도 찰스 바클리와 주제에 대한 의견충돌로 아웅다웅하면서 개그로 방송분량을 확보중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해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발언으로 드림팀에 대한 떡밥이 나왔을 때 드림팀1의 레전드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정도는 바비큐 치킨이나 머스터드 바른 치킨너겟으로 만들어 얼마든지 해치워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 날의 주제는 원조 드림팀과 2012년 드림팀 중 어디가 더 강한지였는데, 오닐은 뜬금없이 자신이 소속됐던 1994년 드림팀이 제일 강하다고 주장했으며 1996년 드림팀이 1992년 드림팀을 이긴다는 등 자신의 드림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97] 또 오닐이 자주 까는 사람은 자신을 제치고 백투백 MVP를 따낸 스티브 내시. 내시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자신을 제치고 상을 가져갔다며 항상 까댄다.[98]
- 사실 오닐이 유잉을 정말 얕보는 건 아니고, 그는 데뷔 이전부터 유잉을 존경했으며 은퇴 후에는 종종 유잉에 대해 "my idol"라고 지칭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대학시절까지 33번를 택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99] 오닐은 젊은 시절 유잉에게 끊임없이 도발한 것에 대해 "그가 최고라는 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외에도 하킴 올라주원의 경우 오닐 본인이 올랜도 시절 파이널에서 4:0으로 털린 경험이 있어서 까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1로 무너뜨린 마이클 조던에게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오닐은 하킴이나 조던처럼 본인을 직접 꺾은 선수라던지, 야오밍처럼 본인이 맞수로 인정하는 선수에게는 존중있는 태도를 보이는 편이다.
- 내시 관련해서 뒷 얘기가 있는데, 이 항목에도 언급된 "Shaq vs"의 아이디어는 원래 내시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닐이 2008년 2월에 이를 듣고 내시와의 상의 없이 자기의 리얼리티 쇼로 만들었다고 한다.[100] 그러나 오닐 본인은 2008년 8월에 올림픽을 보던 도중에 아이디어가 생각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내시는 오닐이 동료들에게 "Shaq vs"의 아이디어를 알려주자 "네가 나한테서 훔쳐간 아이디어 얘기하는 거야?"라고 받아쳤다고. 결국 내시는 법적 대응을 하려고 했으나,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쇼의 executive producer 직함과 보상이 주어졌다고 한다. 다만 내시 본인은 이런 보도 내용을 부인했지만, 오닐이 방송에 나와 항상 내시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을 하는 걸 보면 둘의 사이가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 TNT 방송 도중 방정을 떨다 나뒹굴어 합성짤이 많이 돌았다. 케니 스미스가 언제나하는 코너의 장난이었는데 이 날 갑자기 뭐에 발이 걸렸는지... 사실 오닐은 대체적으로 몸개그에 특화되어 있다. 찰스 바클리와 3점 슛 내기를 하고 이기자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든가 바클리와 케니 스미스의 장난에 나무를 맞고 쓰러진다든다. 실제 입담보다는 몸개그가 더 반응이 좋다. 지금은 입담도 많이 나아졌다.
- 현재는 NBA 주관 방송사 TNT의 포스트게임쇼인 Inside the NBA에 패널로 고정출연하며 어이없거나 웃긴 플레이를 한 선수들을 보여주는 Shaqtin' A Fool 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2015년 7월 20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시카고 불스 선수 각각 5명[101]을 선정한 다음 "우리 팀이 시카고 불스 팀을 50차로 이길 듯. 님들 생각은 어떠함?"이라며 어그로를 끌었다. 참고로 팬들은 압둘자바-오닐이라는 더블포스트의 위력 덕분에 레이커스 팀이 유리하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 피펜은 이에 "님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에 우승한 횟수보다 우리 시카고 불스가 우승한 횟수가 2배 더 많은건 팩트인듯?" 이라는 식으로 발끈했는데, 오닐은 "내가 님이 파이널 경기 뛰는 걸 대부분 봤는데 잘하긴 함. 근데 사실 조던이 대부분 다 하지 않았나? 심지어 스티브 커나 론 하퍼가 님보다 더 인정받아야 한다고 봄. 난 1인자였고 님은 2인자ㅋ"라며 다시 답장을 날렸다.
조던의 경우 얼마 뒤 본인의 농구캠프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냥 큰 의미 없이 한 말 같습니다. 토론거리입니다. 결코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니까요. 제 생각엔 우리가 그들을 박살 냈을 것 같습니다. 오닐은 그들이 우리를 박살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여러분이 결정하세요. 그냥 토론거리일 뿐입니다.[102]"라고 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천하의 조던이 직접 한 말이라 그런지 오닐은 이후 별다른 코멘트를 달지 않았지만 뜬금없이 얼마 후에 홍콩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 아니라) 줄리어스 어빙"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사실 저 인터뷰도 기자가 르브론 제임스와 마이클 조던을 비교하는 질문을 던진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고(당연히 조던 손을 들어줬다), 전체적인 맥락상 조던을 저격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빙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발언에 더 가깝다.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앙숙이었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소액 주주가 되며 경영진에 합류하기도 했다.[103]
- 의외로 몸이 유연해서 (선수 시절에도 큰 덩치에 비하면 유연했다) 춤을 잘 춘다. 실제 올스타전에서 르브론 제임스, 드와이트 하워드와 댄스 배틀까지 한 적이 있다. 댄스 자체는 셋 다 비슷했는데 가장 재미있게 춘 건 역시 오닐이었다.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1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2012년 배리 대학교에서 교육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로스쿨에 재학중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운동선수로서 최정점을 누리고 은퇴 후 학업에서도 큰 성취를 이뤄낸 점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 발이 엄청나게 크다. 선수시절에는 385mm를 신었고 현재는 410mm를 신고 있다고 한다. 원래 일반인보다 키가 큰 농구선수들은 발도 크기 마련이지만 오닐의 발은 비슷한 키의 다른 선수들보다도 더 크다.[104]
- 2016 덩크 콘테스트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여기서 그는 또다시 예능감을 주체하지 못하는데...예선 2차시도에서 애런 고든과 잭 라빈이 고난이도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두 명 모두에게 9점을 선사하여 콘테스트를 지켜보던 모두를 어이상실로 이끌었다...[105][106]
- 2018년 영화 엉클 드류(Uncle Drew)에 주연 중 하나로 출연하였다. 오래 전 엉클 드류에게 여자친구를 NTR당했던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선수 시절을 연상시키는 깨알같은 개그들이 몇 있다. 1) 오닐에게 얻어맞은 엉클 드류가 "자네가 처음 넣은 자유투(free throw)구먼" 하는 장면. 2) 동네 여고생 팀과 게임하면서 동료들과 리듬이 잘 안 맞자 "패스 좀 하라고, 코비"라고 일갈하는 장면.
- 하킴 올라주원처럼 자신의 시그니처 신발을 어린아이들이 부담없이 신을 수 있도록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게 했다.# 그의 상업성과 스타성, 실력을 고려해봤을 때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라바 볼이 론조 볼의 시그니처 신발을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런칭했을 때 이에 대해 비판했던 적이 있다.
- 2016년엔 베어 그릴스와 함께 Running wild with bear grylls에 나와 야생을 체험했다. 가면서 나무를 모조리 부수고 가는 게 압권.
- 야니스 아데토쿤보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듯 하다. 자신의 별명인 '슈퍼맨'을 아데토쿤보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한 적도 있고, 같은 나이 대 본인보다 더 뛰어나고 했을 정도.
- 1986년부터 DJ로써 활동했으며 현재도 'DJ DIESEL' 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다. 덥스텝을 주로 틀며 Tomorrowland 2019 메인스테이지에도 등장하였다.
- 명센터이자 오닐이 고등학교를 나온 샌안토니오 지역의 영웅 데이비드 로빈슨과의 악연이 있다. 이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오닐의 두 번째 올스타전인 1994 올스타전 당시 서부 빅맨들로부터 집중수비를 당해 처참한 활약을 했는데, 이때 그는 후반기에 샌안토니오와 붙은 경기에서 (복수하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로빈슨에게 판정패한 오닐과 샌안토니오 선수들 사이에서 약간 신경전이 있었다.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로빈슨은 오닐을 그리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고,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어린 오닐에 대해서만 묻는 기자들에게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오닐은 인터뷰 도중 로빈슨에게 인유어페이스를 먹이는 사진이 담긴 자기 농구카드를 내보이거나, 로빈슨을 깔아뭉개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오닐은 그 이유에 대해 "로빈슨이 샌안토니오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내가 어렸을 때 사인을 해달라는 요구에 무례하게 대했다"고 여러차례 밝히고 자서전에도 썼는데, 두 선수가 모두 은퇴한 이후 오닐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로빈슨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던 그가 만들어내 퍼뜨린 거짓이었던 것이다.[107][108] 사실 둘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이 주장에 대해 로빈슨이 물었을 때 오닐이 "미안... 거짓말이야"라고 인정했는데 몇년 뒤 펴낸 자서전에 쓴 것이다. 로빈슨은 대인배스럽게 몇년간 계속되는 오닐의 거짓말에 대해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고, 오닐이 거짓임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한 이후 이에 대해 묻자 "그 친구는 원래 엔터테이너 아니냐"며 웃어넘겼다. 여기에 더불어 후에 오닐은 로빈슨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실제 고등학교때 로빈슨을 만난적이 있으며 그가 플레이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며 자신이 굉장히 농구를 잘한다고 자부했는데 데이비드 로빈슨을 보고 "저 선수 진짜 잘한다" 라고 느꼈으며 절치부심하게 해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하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Fj0fMceXhH4 항상 오닐은 자존심이 굉장히 쎈 선수라 예능에서 많이 과장하는 편이기도 하며 방어의식이 강한 사람이라 저리 나온 것뿐 실제 로빈슨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09] 2023년 자 모란트의 두번째 총기류와 관련된 논란이 일어날때 NBA 슈퍼스타들은 누군가의 롤 모델이라면서 로빈슨이 자신의 롤 모델중 하나였다는걸 다시 한번 언급한다.
- 영화계에 케빈 베이컨 지수가 있듯이 NBA에는 샤킬 오닐 지수라는 것이 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파이널에 올라간 팀원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은[110] 오닐의 커리어 중 어느 시점에서 그와 함께 한솥밥을 먹은 팀원이었다는 것. 이 기록의 시작은 오닐이 데뷔하기도 전인 그렉 카이트부터 시작해서[111] 2020 파이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팀원들이 꼭 유명했다는건 아니고 오닐이 데뷔하던 시점에 벤치에서 은퇴하기 직전이거나 오닐이 은퇴하는 시점에 같은 팀 메이트였던 동료들을 포함한다. 이것이 가능한게 나름 오닐이 꽤나 오랫동안 NBA에서 뛰었다는 점과 동시에 말년에 오닐이 저니맨으로 이팀 저팀을 왔다갔다 한 경력이 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밀워키 벅스와 피닉스 선즈가 2021 파이널에 진출함으로 드디어 이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113] 아무래도 오닐이 은퇴한지도 꽤 지났고 그와 같이 뛴 동료들도 대부분은 은퇴했기에 더 기록이 이어지기 힘들것 같아보였는데 뜬금없이 2022-23에 덴버와 마이애미가 파이널이 진출함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114]
- 과거 야오밍에게 인종차별적 농담을 했다가 사과한 적이 있다. 한 방송사와 인터뷰 중 야오밍에 관한 인터뷰를 받자 "야오밍에게 '칭총양와아소'라고 전해달라"는 말을 했다. 이후 오닐이 인종차별자라는 언론 보도들이 나오자 오닐은 "내 발언으로 분노를 느낀 분들에게 사과한다. 그러나 내가 동양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 나는 늘 농담을 즐기고, 때론 나쁜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로인해 감정을 상한 분들에게 정중히 사과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에 대해 야오밍은 "오닐이 농담한 것으로 믿는다. 중국어는 어려워서 나도 어릴 적에 배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만 많은 아시아인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대응했다. 현재는 서로 사석에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로 알려진다.[115]
- 마이클 조던의 시대부터 활약하였고 이후 코비 브라이언트와도 한 시대에 활약한 동시에 같은 팀 동료이기도 하였으며, 팀 던컨과는 서부 컨퍼런스에서 플레이오프 진출과 파이널 진출을 위해 경쟁하였고, 르브론 제임스가 등장한 이후에도 활동했으니 NBA를 대표하는 아이콘들과 나란히 한 시대에 뛴 몇 안되는 선수이다. 그 외에도 앨런 아이버슨과도 같이 정규시즌과 2001 파이널에서 상대팀으로 상대를 했고, 드웨인 웨이드와도 마이애미 시절 팀 동료였고, 스티브 내시와도 피닉스 시절 팀 동료로 같이 활동했고, 말년에 간 보스턴 셀틱스의 BIG 3로 잘 알려진 폴 피어스, 케빈 가넷, 레이 앨런과도 보스턴 시절 한솥밥을 먹었다. 심지어 케빈 듀란트가 데뷔한 이후에도 4년 정도 더 뛰었고, 스테판 커리가 데뷔한 이후에도 2년 정도 더뛰었다.[116]
- Top War: Battle Game과 콜라보를 하면서 탑워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 유명 보디빌더 크리스 범스테드와 친분이 있다.
- 마이애미에서 피닉스로 이적했을 때, 텅 빈 아파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서 월마트에 쇼핑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TV 4~5대, 랩탑, 프린터, 겉옷과 속옷을 포함한 온갖 생활용품을 다 질렀더니 7만 달러가 나왔다고. 그런데 신용카드가 결제가 안 돼서 아니 나 돈 있는데 하고 어버버거리고 있으려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고객센터에서 "고객님의 카드가 도난당한 것 같습니다!"라면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고. 본인이라고 해명하니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아니, 왜 월마트에서 7만 달러나 쓰시는 거예요!"라는 고함이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에는 카드 회사가 제한을 풀어줘서 쇼핑을 마치고 귀가했다고.
11. 한국 예능 출연
2015년 8월 12일에 예능프로그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 출연 예정 기사가 떴다. 그리고 서인천고등학교 편에서 진짜 출연했다. 기사 교복까지 특수제작해서 출연했는데, 몸집과 존재감이 정말 거대하다.[118] 농구게임에서 농구 골대를 부술 뻔한 피지컬을 보여줬다.
샤킬 오닐 본인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스타로 주목받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구가 유럽 및 아메리카, 필리핀이나 중국 등 전 세계적인 스포츠고 농구계에서 전 세계적인 인지도로 따졌을 때 이런 전설적인 농구 선수가 종편 예능에 나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학교 PD가 샤킬 오닐을 섭외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기사 원본 그리고 2년 뒤 스테판 커리가 무한도전 3점 커리에 나왔다.
오닐은 레이커스 이적 후인 1997년에도 리복주간으로 잠실 롯데월드에 내한했던 적이 있고 당시 3천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다만 이때는 대단히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었다.
12. 관련 문서
[1] FIBA 세계선수권 MVP[2] 실제로 마이애미에 있는 Barry University에서 인적자원 개발전문 분야 교육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3] General Studies[4] 부전공은 정치학 (Political Science)[5] 현역시절 공식 신장. 맨발 키는 샤크 본인이 6' 11.75" 정도라고 밝힌 바 있다.[6] 드래프트 당시 133kg, 전성기 시절 154kg.[7] 이혼하긴 했으나 여전히 사이가 좋고 자녀도 공동양육중이다.[8] 2022년 NBA 드래프트에서 미지명되었으나 LA 레이커스와 투웨이 계약을 맺었다.[9] 2021년 기준 유니온 그로브 하이 스쿨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10] 6명의 자녀외에 사생아가 있다는 루머가 있어 TNT 패널로 함께 출연하는 찰스 바클리가 이를 농담소재로 써먹곤 한다. 어디까지나 웃자고 하는 소리로 샤크 본인은 6명외에 다른 자녀는 없다고 직접 밝혔다.[11] 조 펄크스, 조지 마이칸,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조던, 그리고 샤킬 오닐이다.[12] 사실 '빅 펠라'는 말 그대로 덩치 좋은 선수란 뜻으로, 오닐 뿐 아니라 웬만한 빅맨들은 해설자들로부터 이렇게 불려본 적이 있다. 야오밍도 초창기 오닐을 상대할 때 딸리는 웨이트와 파워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 시 죽어라 달렸는데 이를 두고 휴스턴 해설자들이 "The big fella running the floor!"하고 감탄했다.[13] 원래는 1984 드래프트 1순위 하킴 올라주원, 1985 드래프트 1순위 패트릭 유잉, 1987 드래프트 1순위 데이비드 로빈슨과 더불어 1986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된 브래드 도허티가 4대 센터였다. 그러나 도허티가 부상으로 8시즌만에 은퇴를 하고, 1992 드래프트 1순위 오닐이 리그에 충격과 공포를 몰고 등장하면서 새로운 4대 센터가 된 것이다. 올라주원, 유잉과는 나이 차이가 10년이나 난다. 그만큼 오닐의 데뷔가 엄청났다는 뜻이다. 다만 4대 센터란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는 용어이다. 당연하지만 2000년대를 주름잡은 슈팅 가드들을 일컫는 6성 슈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MVP를 수상하거나 수상에 근접해본 적이 있는 오닐,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과는 달리 도허티는 훌륭한 선수긴 했지만 올-NBA 서드 팀에 딱 한 번(쉽게 말하면 해당 시즌의 센터들 중 세 번째로 좋은 활약을 했다는 뜻이다) 오른 게 다여서 다른 선수들과는 수준차이가 많이 난다. 그것도 오닐이 데뷔하기 직전인 91-92시즌이라 올라주원의 로키츠가 감독이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42승으로 삐끗한 틈을 타 한 시즌 간신히 선정된 것이다.[14] 사실 매직은 에이즈(정확히는 HIV) 감염으로 인해 한국에서 더 유명해진 감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에이즈는 암보다 더 무서운 - 걸리면 그냥 죽는 병으로 인식되었고, 미국의 유명한 운동선수가 그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크게 이슈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정말 극히 드문 병이었고 그 감염 과정에 대한 편견(특히나 유교 그 자체였던 한국분위기에선 더더욱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학수준의 한계로 그 오해와 공포도 컸던 시절이었다.[15] 결정적으로 당시 유행하던 3:3 길거리 농구 문화를 스폰하던 브랜드가 바로 리복이었다. 리복은 후에 크로스핏이 부흥할 때 크로스핏 스폰 브랜드로도 이름을 떨쳤다. 90년대 농구판에서 샤크를 등에 업고 전통의 강호 아디다스와 나이키를 꺾은 신흥강자 리복의 이미지였지만 실제 브랜드의 역사는 130년(1895년 설립으로 무려 19세기부터 시작된 브랜드다!)이 다 된 오래된 브랜드로 아디다스(1949)와 나이키(1964)한테는 현재는 2배, 30년 전으로 치면 3배의 역사를 가진 할아버지뻘 쯤 되는 브랜드다.[16] 그의 고정 프로인 Inside the NBA나 Open Court에 보면 패트릭 유잉과 해리슨에 대한 존경심이 종종 튀어나오며, 특히 해리슨을 지칭할 때는 꼭 내 아버지, 위대한을 붙여서 지칭한다. 여담이지만 야오밍의 다큐멘터리인 A Year of Yao를 보면 해리슨이 야오와 오닐이 붙는 첫 경기를 보러 자동차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왔다면서 "진짜 센터 둘(Two REAL centers)이 붙는 걸 보러 왔다"고 한다. 두 선수는 경기 후 상대방의 아버지 (야오는 어머니도)와 포옹을 나눈다.[17] 다만 모제스 말론은 전성기 시절부터 대부분 팀의 의지로 트래이드되었지만 (한창 때이던 휴스턴, 필리, 워싱턴 이적 모두 타의로 이뤄진 것) 오닐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이적했다는 것이 다르다. 1996년에 점점 커가는 앤퍼니 하더웨이와 팀내 에이스 자리를 두고 약간 불편한 관계가 되자 (다만 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때문에 은퇴 이후에도 앤퍼니를 많이 칭찬하는 편) 이전부터 자신이 관심 있는 엔터테인먼트 활동도 할겸 FA 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옮겼고, 코비와는 에이스 역할+성폭행 혐의 사건 당시 코비의 실언+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둘이 몇년 간 서로의 성질을 긁는 바람에 거의 원수 사이가 되어 이후 마이애미로 옮길 때는 트래이드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 본인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둘은 경기 전 악수와 포옹을 할 때 거의 의무적으로 눈도 안 마주치고 했으며, 몇년 뒤가 되어서야 서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2009 올스타전 공동 MVP가 되어 서로 웃고 떠들고 했으니 앙금을 많은 부분 떨쳐버린 듯) 하락세가 시작된 이후 피닉스와 캐브스 이적은 팀의 의지, 마지막 보스턴 이적은 자유계약으로 자기 의지.[18] 어찌보면 트렌드를 앞서간 선수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전까지 NBA에서 MVP급 선수들은 웬만해선 팀을 안 옮기는 것이 추세였다. 옮기더라도 전성기가 지난 후에 옮기거나(1996-97 시즌 휴스턴 빅3), 누가봐도 옮겨야 될만큼 상황이 답이 없을 때(피닉스로 간 바클리, 보스턴으로 간 가넷)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자발적으로 팀을 옮긴 거물급은 거의 없었다. MVP급 실력을 지닌 선수가 팀전력도 우승후보급인데다가 프랜차이즈도 나쁘지 않은데 두 번이나 팀을 자발적으로 옮긴 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다.(특히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2010년대부터 선수들이 프랜차이즈에 대한 loyalty를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커리어나 삶 위주로 거물급들도 자유롭게 옮기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는데, 오닐은 1972년생임에도 이런 모습을 벌써 보여준 것.[19] 여담이지만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고 MVP 투표에서 7위에 올랐음에도 올-NBA 서드 팀에도 오르지 못한다. NBA는 해마다 리그 최고의 가드 2명, 포워드 2명, 센터 1명을 올-NBA 퍼스트 팀으로 선정하고, 그 다음 다섯 명을 올-NBA 세컨드 팀, 그 다음을 올-NBA 서드 팀에 선정한다. 보통 이 정도 성적을 거두면 올-NBA 팀은 아주 무난하다는 걸 감안하면 1990년대 센터 포지션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듬해에는 더 심했는데 MVP 투표 상위 5명 중 4명이 센터여서 패트릭 유잉은 MVP 투표 5위에 오르고도 올-NBA 서드 팀에도 못 올랐다. 참고로 이해 유잉의 성적은 24.5점 11.2리바운드 2.7블록에 팀은 동부 2위였다.(승률로는 1위 애틀랜타 호크스와 동률) 비록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4대 센터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20] 다만 이 인기는 올랜도 시절 한정이며 레이커스 이적 후 쓰리핏을 달성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안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게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안티가 아니라 혼자서 너무 압도적인 플레이를 펼쳐 매 시즌 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NBA를 재미없고 시시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생긴 안티들로, 어찌 보면 오닐의 위엄이라고 할 수 있다.[21] 여담이지만 이때 올스타전에서 2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득점왕 직전까지 가는 등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던 오닐이 좀 아니꼬았던 건지, 당시 그가 득점을 하려고 하면 하킴 올라주원, 칼 말론, 찰스 바클리, 데이비드 로빈슨 등 서부의 슈퍼스타 빅맨들이 달려들어 블록을 하거나 득달같이 파울을 해버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닐은 동부에서 두 번째로 많은 26분이나 뛰고 슛을 12개나 시도해 고작 2개밖에 못 넣고 자유투를 11개 던져 4개 성공해 고작 8점에 그쳤다(참고로 그와 주로 매치업된 올라주원은 개인파울을 네 개나 했지만 블록을 다섯 개나 했다.). 그의 백업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24분 뛰고 20점을 기록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짜증이 난 건지 경기 종료 몇분전에 수비가 좀 느슨해지자 림을 쥐어뜯을 기세로 어마어마한 파워의 슬램덩크를 두 차례 꽂아넣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올스타전은 지금처럼 단순한 이벤트전이 아닌 선수들의 자존심 싸움 측면이 강했기에 일어난 해프닝.[22] 우승팀 중 최저 시드[23] 32.8득점 11.5리바운드[24] 컨파가 끝난 직후 파이널을 준비해야 할 팀이 하면 안되는 짓들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덕분에 올라주원과 로키츠에게 패배한 경험은 오닐에게 '너무 일찍 마음이 들떠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25] 샤킬 오닐은 NBA 선수들 중에서도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그런 오닐이 나중에 회상하기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시기상조였다'' 라고 할 정도였다.[26] 사실 이때 정규 시즌 성적 차이만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해설진은 "Many consider this to be the two best teams in the NBA(많은 이들이 이 두 팀이 NBA 최고의 두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고, 시카고 선수들도 "올해 내내 올랜도를 '이겨야할 팀'으로 겨냥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골밑이 허약한 (주전센터 룩 롱리는 당시 29개팀 주전 들 중 최하위수준이며, 데니스 로드맨은 리바운드는 뛰어나지만 신장이 작았다.) 시카고 불스 입장에서는 오닐에다 올스타급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까지 버티고 있는 올랜도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게다가 외곽은 시카고가 유리했지만, 이 팀에는 조던조차 부담스럽게 여길 만한 떠오르는 슈퍼스타 앤퍼니 하더웨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1차전에서 호레이스 그랜트가 부상으로 물러나고 데니스 로드맨의 기습적인 수비에 오닐이 부담을 느끼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39점차 안드로메다 관광을 타버리고, 결국 나머지 시리즈 역시 내주고 만다.[27] 여담이지만 이처럼 오닐은 스윕(한 경기도 못 이기고 시리즈에서 전패하는 것)당할 전력이 아님에도 스윕당한 적이 많았는데 이 점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도 1986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 연속 스윕당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팀이 플레이오프에 턱걸이로 올라가는 반면 상대가 역대급 강팀이었고 패배하는 과정에서 역대급 활약을 펼쳤다. 반면 오닐은 이때처럼 본인의 팀도 우승후보이거나, 1995년 플레이오프처럼 오히려 본인의 팀이 전력상 우세라고 평가받거나(1995 NBA 파이널 당시 휴스턴은 겨우 정규 시즌 서부 6위인데다가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올랜도에게 있었고, 전력상 올랜도가 앞선다고 전문가들이 평했다.), 2007년 플레이오프에서처럼 동부 4-5위의 대결이었을 때도 스윕당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실제로 오닐은 승부근성이 꽤나 강하긴 하지만, 마이클 조던이나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역대급 선수와 같은 독기는 없었기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감독 필 잭슨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가 농구에만 독하게 집중했다면 10번은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중요한 것은 스윕 그 자체가 아니라 스윕당할 전력이 아니었는데 한 번 밀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1995년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는 더 강한 전력에도 1차전을 패한 이후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팀이 전력에 비해 모자라는 실력을 보이면 그 팀의 에이스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팀이 잘하면 에이스에게 공을 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28] 1997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 재즈에게 4-1로 패한 다음 1998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스윕까지 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한 오닐은 화장실 거울을 깨부수고 문짝까지 뜯어내며 난리를 치자 제리 웨스트 단장이 그걸 보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파이널 진출을 8번이나 한 끝에 겨우 첫 우승을 했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놀란 오닐은 "8번이요?"라고 반문한 뒤 조용해졌다고 한다. (2016 NBA 파이널 2차전을 앞두고 NBA TV에서 제리 웨스트를 인터뷰했는데 이때 옆에서 오닐이 밝힌 이야기다)[29] 이 과정에서 61득점 23리바운드로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60-20을 달성하는 경이로운 경기도 있었다.[30] 기자 1명이 앨런 아이버슨에게 투표했다. 훌륭한 팀원들 없이 혼자의 힘으로 팀을 이끈 공로를 높이 샀다는 것이 그 이유.디켐베 무톰보:...? 훗날 2012-13 시즌 MVP 투표에서도 1표가 카멜로 앤서니에게 가는 바람에 르브론 제임스가 만장일치로 MVP에 선정되는데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후 이 전인미답의 고지는 2015-16 시즌 스테판 커리가 달성한다.[31] 1차전 44득점을 넣고도 졌으나 2차전에서 거의 쿼드러플 더블(28득점 20리바운드 9어시스트 8블록)을 달성할 뻔하기도 했다.[32] 나중에 승부조작 스캔들로 구속된 팀 도너히 심판은 이 시리즈 6차전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실제로 석연찮은 판정들 때문에 말이 많았다.[33] 마이클 조던은 1990년대에 쓰리핏 두 번에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시대의 지배자였음에도 이런 반응까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우아하고 멋진 플레이로 타팀 팬들에게도 일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던 조던과 달리 오닐의 플레이 스타일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팀들의 골밑을 깡그리 때려부수는 식이었기에 타팀 팬들에게 더욱 밉보인 감이 컸다.[34] 사실 레이커스 시절 오닐은 대중적인 인기가 마이클 조던이나 동시대 코비 브라이언트, 후대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폭발적으로 많은 선수는 아니었다. 농구특성상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따돌리는 저런 선수들보다 우직하게 골밑으로 밀고 들어가는 정통 빅맨들은 인기가 비교적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느린 속도로 속공 참여가 적은 오닐이 팀의 중심이 되면 페이스가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본인의 플레이스타일도 상당히 단조로운 편이다.(확률높은 공격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올스타전에서는 다양한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팀의 승리 하나가 매우 중요한 정규시즌이나 플레이오프에선 로우포스트에 자리잡은 뒤 하는 포스트업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90년대에 다른 센터들이 건재했고 인기원톱인 마이클 조던이 있어 오닐은 특이한 캐릭터성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이런 스타일이 지속된 레이커스 시절엔 농구화 판매 부진을 겪기도 했다. 물론 당시 그의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지 우람한 외견에 비해 뛰어난 예능과 엔터테이너성도 크게 가지고 있어서 당대 최고의 인기선수 중 하나이긴 했다. 당장 리복이 나이키와 나름 대등했던 것도 오닐이 모델이였던 시기였다.[35] 쓰리핏 첫 번째 시즌에는 그나마 샬럿 호네츠에서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던 베테랑 포워드 글렌 라이스가 시즌 평균 15득점 정도 올려주면서 오닐, 코비의 뒤를 받쳐줬으나 그 이후엔 오닐, 코비가 도합 55점 정도 합작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데릭 피셔가 간신히 10득점 정도를 올릴 뿐 죄다 한자리수 평득이었다. 원투펀치가 엄청나게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원투펀치와 팀 내 다른 선수들의 공격비중이 차이나는 팀은 당대 우승경쟁 팀 중에선 없었다.[36] 이때 코비의 멘트는 더 가관이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나도 오닐처럼 돈으로 입막음했어야 하냐는 식으로 말을 해 팬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인터뷰한 것은 아니고 경찰 취조 과정 도중 이렇게 얘기한 것이 세어나가 기사화된 것이다. 물론 어찌되었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망언이라 훗날 코비가 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고, 2008년에 코비의 레이커스가 파이널 패배 후 오닐이 파티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할 때 "코비 때문에 내가 이혼당했다"고 디스하기도 했다.[37] 정확히 말하면 오닐과 코비 둘 다 2인자가 되기는 거부했고, 두 선수 모두에게 맥시멈 계약을 주기는 힘들었던 (오닐의 경우 맥시멈을 줄경우 연평균 3000만 달러에 가까웠고, 이때 그는 삭감을 거부했다. 근데 정작 마이애미 히트에 가니까 약간 삭감된 금액에 계약했다.) 레이커스가 더 젊은 코비를 택한 것이다. 특히 이때 레이커스 프런트는 필 잭슨 감독과의 갈등도 있었는데, 오닐은 "날 잡으려면 무조건 잭슨 잡아라"라고 공언한 판이라, 잭슨까지 동시에 잡아야될 상황이었다. 결국 레이커스 프런트는 잭슨과 오닐을 포기하고 코비 위주로 팀을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 둘을 보내고 맞이한 2004-05 시즌이 34승 48패를 하면서 11년만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잭슨 감독을 연평균 1000만 달러가 넘는 초거대 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모셔온다. 그리고 그 잭슨은 2007-08 시즌 레이커스를 오랜만에 파이널에 진출시키고, 이후 2008-09 시즌과 2009-10 시즌 백투백 우승을 다시 레이커스에 안겨준다.[38] 전직 농구선수들이 모여 노가리를 까는 Open Court란 프로에서 최근에 오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4-05 시즌 당시 내시는 진짜 MVP가 아니라 동정심으로 탄 MVP(sympathy vote)" 자기가 너무 크고 강해서 매년 탈 수 없으니 준 거라고. 원래 오닐이 떠벌이 이미지가 있지만 이 멘트에 대해서는 미국이건 한국이건 팬들 반응이 매우 안 좋다. 사실 당시 내시는 플레이오프도 못 오르던 팀을 전체 1위로 이끈 대활약을 펼쳤는데 그걸 '동정심'으로 폄훼하니... 게다가 매년 탈 수 없느니 뭐니 할 수도 없는 게 그는 MVP를 평생 한 번 수상했다.[39] 실제로 오닐은 2005-06 시즌까지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나 이때부터 하락세가 시작되어 이후 2008-09 시즌 올-NBA 서드 팀 1회 선정에 그친다.[40] 오닐같은 노장의 경우 계약기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조금 삭감해서 장기계약을 맺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레이커스의 경우 코비가 오닐과 더불어 필 잭슨 감독과도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필 잭슨파였던 오닐이 코비 말고 자기 편을 들라고 사실상 엄포를 놓은 것이지 저 나이에 평균 3000만 달러 이상으로 다년계약은 어딜 가도 힘들다. 즉 5년/1억 달러 자체는 어느 정도 삭감은 해주었을지언정 엄청나게 디스카운트된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선수옵션으로 보장된 3000만 달러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배려인데, 당시 히트는 오닐에게 이를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댈러스 매버릭스는 오닐의 레이커스 시절 말기부터 노골적으로 오닐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으며, 괴짜 억만장자 마크 큐반은 얼마든지 지갑을 풀 의향이 있는 인물이었다. 즉 2004-05 오프 시즌 당시 MVP급이었던 오닐은 히트를 선택해준 것이라, 옵션 포기를 강요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저 정도 배려를 할 만큼 오닐이 히트와 웨이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41] 만약 이 때 클리블랜드 파이널에 진출했다면 오닐의 친정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되어 코비와는 서로 상대팀으로 대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클리블랜드가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42] 케빈 가넷[43]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평생 번 돈이 억달러를 훌쩍 넘어가는 오닐 입장에서 그렇게 큰 돈도 아니었고, 선수들이랑 웃으면서 장난치는 모습이긴 하다.[44] 단, 그 몸을 유지하느라 정규 시즌에는 결장이 잦아서, MVP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1번밖에 없다. 그럼에도 단기전에서 3번의 파이널 MVP라는 것은 오닐이 우승팀의 진짜 에이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널 MVP도 1번 받는 것도 어렵지만 정규 시즌 MVP도 1번 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닐이 정규 시즌도 매우 잘했던 선수로 볼 수 있다.[45]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운동능력이 NBA 평균수치는 가볍게 상회한다고 한다.[46] NBA는 프로필 업데이트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체중 변화가 잦은 선수들은 정확한 체중이 반영되지 않는다. 오닐은 드래프트 당시 293파운드(133kg), 95년쯤 올랜도에서 303파운드, 레이커스 이적 당시 312파운드(141.5kg), 이후 첫 우승 직전 325파운드(147kg)으로 업데이트되어 커리어 내내 이 정도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오닐 본인이 밝힌 그의 몸무게는 루키 시즌 당시 285파운드, 레이커스에서 첫 우승 당시 345파운드, 두번째 우승 당시 385파운드, 세번째 우승 당시엔 415파운드이다. 이 수치가 맞다면 그는 NBA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400파운드를 넘긴 선수가 된다. 다만 다른 영상에선 본인이 두번째 우승 당시 365파운드, 세번째 우승 당시엔 395파운드였다고 밝혔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불명이다. 오닐은 본인에 대해 다소 과장해 얘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 확실한 것은 히트 이적 당시에 대해선 일관적으로 고강도 훈련을 통해 325파운드로 감량했다고 밝히고 있다.[47] 그럼에도 체지방률은 10%를 밑돈다. 그야말로 근육덩어리.[48] 엄지 발가락의 경우 어마어마한 스피드의 퍼스트 스텝 → 스핀무브 등으로 이어지는 피벗 플레이에 의해 망가졌다는 설이 있다.[49] 그나마 레이커스 이후 마이애미 시절은 본인이 조연으로서의 역할도 수용하면서 주전으로서 팀의 사상 첫번째 우승에 기여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과 노쇠화가 심해지고 이후 피닉스 선즈 시절에는 그나마 부상 치료 등을 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되고 3rd 팀에도 선정되었지만 그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시절과 보스턴 셀틱스 시절에는 노쇠화와 부상이 더욱 심해져 소속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50] 기대와는 달리 오닐에게는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51] 성공 개수는 5935개로 통산 22위이다. 13818개를 시도한 칼 말론이 통산 1위(말론은 또한 성공 개수도 9787개로 통산 1위이다).[52] 당장 기동형 빅맨들이 유행하는 현시대에도 오닐이 통할 거라는 견해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동력이고 뭐고 초월적인 오닐의 골밑 존재감에 상대팀도 어쩔 수 없이 맞대응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53] 더구나 오닐은 저 체구와 힘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체구에 나오는 운동신경과 기동력은 대단했으며 더구나 빅맨으로서 드리블 능력도 뛰어났으며 또한 BQ도 뛰어나 시야가 넓어 빈 공간에 동료에게도 잘 찔러 넣어줬다.[54] 대표적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이미 전성기가 끝난 패트릭 유잉을 영입한 것을 꼽을 수 있다.[55] 샤킬 오닐의 거구가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에 대해 Open Court에서 아이재아 토마스가 밝힌 일화로, 오닐이 올랜도에서 뛰던 당시 토마스 본인은 페니 하더웨이를 막고 있고 오닐은 '(빌 레임비어나 제임스 에드워즈가 아닌) 존 샐리같은 좀 작은 친구(somebody small)'가 막고 있었다고 한다. (샐리는 211cm의 장신이지만 호리호리한 편이라 빅맨치고 체구가 큰 편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샤크에게 볼이 투입되면 더블팀을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샤크를 안 막고 있잖아!"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수비수가 샤크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56] 자주 비교되는 고대 센터 윌트 체임벌린도 페이드어웨이와 긴 윙스팬을 필두로 한 특유의 플릭샷이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로우 포스트에서만 활동하면서 리그 최상급 선수급의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는 아무리 좋게 쳐도 드와이트 하워드뿐인데, 그가 오닐에 못 미치는 선수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워드는 리그 탑을 다투는 운동능력에 의존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센터로서 기본기가 부족했는데 이런 선수들이 전성기에는 리그에서 빛나던 선수였다가 전성기에서 내려오거나 부상을 당해서 운동능력이 하락하게 되면 빛을 잃게 된다. 샤크는 운동능력과 피지컬이 뛰어났음에도 BQ라든지 센터로서의 기본기가 아주 뛰어난 선수였다. 운동능력이 하락한 이후에도 NBA를 주름잡았던 건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57] 그 와중에 2001-02 시즌 시카고 불스전에선 분노가 폭발해 상대 센터 브래드 밀러에게 주먹을 휘둘러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58] 더 충격적인 건 저 두 사건은 각각 1993년 2월 7일, 4월 13일 두 달만에 두 개의 골대를 박살냈다![59] 정확히 말하면 덩크 슛 항목에 설명되어 있듯이 오닐의 백보드 파괴 사건은 그의 루키 시즌 두 번 일어났다. 첫번째로는 뉴져지 네츠와의 경기에서 구식 백보드를 아예 박살냈으며, 두번째는 피닉스 선즈와 경기에서 92-93시즌 개장한 아메리카 웨스트 아레나의 신식 충격흡수형 골대(breakaway rim)가 흡수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충격을 줘서 주저앉힌 것이다. 이후 93 오프시즌에 NBA 전체적으로 골대보강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후론 오닐 본인도 백보드를 파괴하진 못했다.[60] 이것도 상당히 보수적인 수치. 18kg이면 파운드로 40파운드 정도 됐는데, 오닐은 데뷔 당시 이미 300파운드 언저리의 무게였고, 당시 NBA센터들은 대부분 250파운드 언저리였다. 즉, NBA센터들과 비교해도 대략 22.5kg 이상 더 무거웠는데, 전반적으로 더 가벼운 대학 센터들은 비교도 안 되었다.[61] 이것때문에 90년대 말 ~ 2000년대 초중반까지 각 팀에는 샤크한테 힘으로 버텨낼 수 있는 덩어리 센터들이 한명씩은 있었다. 물론 후술하듯 샤크는 단순히 힘만 쎈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62] 그의 우상인 유잉의 주특기 중 하나가 바로 돌파에 이은 러닝점프훅이었다.[63] 카림 압둘자바, 빌 월튼,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시, 랄프 샘슨 등 1970년대 ~ 1980년대 센터부터 패트릭 유잉,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블라디 디박, 알론조 모닝, 릭 스미츠 등 득점 좀 한다는 센터들은 모두 중거리 슛에 능했다. 중거리 슛 옵션이 거의 없는 스타급 센터는 오닐같은 예외적인 제한다면 디켐베 무톰보나 벤 월러스처럼 공격가담률 자체가 낮은 수비형 선수들이었다. 가장 샤크와 비슷한 타입인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자유투 성공률이 샤크와 맞먹을정도로 순수 슈팅능력 자체는 굉장히 구린 편이었지만, 나름 주무기였던 페이드어웨이에서 보여지듯 적어도 샤크보단 슈팅 레인지가 길었다.[64] 페인트존의 자유투 던지는 쪽 모서리[65] 물론 일반인들도 쏠 수 있는 3점 슛을 NBA선수인 오닐이 못 쏘는 건 아니고, 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다. 스튜디오에서 준비하고 쏘면 괜찮게 들어갈 정도. https://www.youtube.com/watch?v=le2D7dqeV5A 그러나 보다시피 슛폼과 릴리스가 투박해서 "적당히 잘하는 일반인 수준"에 불과해 NBA에서 통할만한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실제로 1995 올스타전 당시 장난삼아 3점 슛을 던져 에어볼이 나왔는데, 재밌는건 바로 다음 공격권에서 마치 응수하듯 하킴 올라주원이 3점 슛을 던져 적중시켰다. 어쩌다 찬스가 난 것도 아니고 올라주원이 대놓고 3점 라인 밖에서 기다리다 패스받아 쏜 것을 보면 확실히 의도를 갖고 한 것. 마브 앨버트 해설자가 "넌 할 수 없지만 난 할 수 있지롱~(You can't do it, but I can from downtown)"이라고 표현한게 정확하다.[66] 브라이언 쇼는 오닐이 인간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하나였고, 아웃사이더였던 코비와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코비-샤크 갈등이 극에 달한 2003년에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2003-04시즌 초반에 코비는 ESPN의 짐 그레이와 인터뷰를 통해 샤크를 강도 높게 디스했는데, 직후에 코비를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오닐과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당시 막 은퇴하고 스카우트로 일하던 쇼가 투입되기도 했다. 이때 같이 투입된 것이 호레이스 그랜트와 칼 말론이었는데, 오닐이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칠까봐 나머지 팀원 중 가장 힘이 센 둘이 동원된 것. 당시 코비가 주장한 것은 오닐의 컨디션 관리를 못한다는 것은 물론 팀이 지면 다른 동료들 탓만 한다, 오닐이 몸상태가 엉망인게 들통날까봐 부상이 심한 척한다 등 상당히 민감한 내용이었는데, 심지어 그레이는 인터뷰가 그대로 나가면 자신과 샤크간 관계가 박살날 것을 우려해 일부 내용을 덜어냈다고 한다.[67] 가장 자유투 성공률이 높았던 시즌은 2002-03 시즌의 62.2%.[68] NBA 통산 야투 성공률 58.3%, 자유투 성공률 52.7% / 대학(LSU) 시절 통산 야투성공률 61%, 자유투 성공률 57.5%[69] 다만 오닐에게 가해진 핵어 작전은 그 가공할 득점력과 위력을 어떻게든 반감시켜보려는 의도가 강했던 반면 이후의 핵어 작전은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들을 벤치로 내보내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 오닐 외에 핵어 작전을 당할 정도로 자유투가 좋지 않은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공격력이 약한 대신 수비력이 좋기 때문이다. 벤 월러스, 드와이트 하워드, 디안드레 조던, 벤 시몬스 등. 이런 선수들을 코트 위에서 내려보냄으로써 상대의 수비를 약화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되는 것이다.[70] 사실 오닐처럼 자유투가 좋지 않은데 공격력이 좋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NBA 역사 전체를 따져보아도 윌트 체임벌린 정도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 오닐이나 체임벌린처럼 타고난 신체조건이 엄청난 경우에는 슛이 없거나 약해도 탁월한 공격력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슛이 없다면 수비를 뚫어내지 못해서 받아먹기만 하는 선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하킴 올라주원 등 공격력이 뛰어난 센터들은 아무리 못해도 70%는 넣어주고, 현역 센터 최고봉인 니콜라 요키치와 조엘 엠비드는 넉넉히 80%를 넘는 자유투 슈터이다.[71] 결국 핵어 작전이 경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하여 현재는 쿼터 종료 2분 이내인 상황에서 공이 없는 선수에게 파울을 하면 자유투와 공격권을 같이 내주도록 규칙이 개정되었다.[72] 그런데 사실 언더핸드가 더 효과적인 슈팅법인 것은 맞다. 정상적인 폼으로 쏘면 스핀이 두 번 정도 들어가는데, 언더핸드의 경우 양손으로 스핀을 먹이기 때문에 3, 4번 정도 들어가는데, 스핀이 많이 들어가면 조금 빗나가더라도 림을 맞고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림이 10피트에 있기 때문에 포물선을 그리며 들어가야 하는데 아래에서 던지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게 높은 포물선을 그리게 된다. 실제로 윌트 체임벌린 역시 한 시즌동안 언더핸드로 던져 자유투 성공률이 10.9%나 올라갔는데, 체임벌린 역시 폼이 안 난다는 이유로 한 시즌만에 버렸다.[73] 오닐 본인은 조던이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항상 인정한다.[74] 물론 노비츠키는 오닐을 압도하는 스피드가 있었지만, 빅맨이라 제쳐내는데 한계가 있었으며 파워 자체가 너무 차이나서 힘들어했다.[75] '당대'로 한정짓는 이유는 4번 포지션의 트렌드 변화로 인해 현대농구의 파워 포워드는 오닐 시대의 파워 포워드보다 작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파워 포워드들이 센터화를 겪었다면 현대의 파워 포워드들은 스몰 포워드화가 되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76] 필 잭슨이나 코비 등이 오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오닐의 이때 활약은 뭔가 크게 실력이 늘은 것도 아니었다. 성실하게 몸관리하며 뛰어줬다는 것만으로 역대급 시즌을 보낸 것이다. 이렇게 몇년씩 할 수 있는 선수가 안 하니 동료나 감독 입장에선 아쉬운 것.[77] 해당 영상은 말년인 캐브스 시절이라 기동력이 더욱 떨어진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닐의 수비는 페인트존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다.[78]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스윕당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당시 레이커스는 골밑의 오닐 외에도 올스타 가드 듀오 에디 존스와 닉 반 엑셀, 벤치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는 공격팀이었기 때문에 절대 스윕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주전 파워 포워드가 수비가 그리 뛰어나지 못하고 파워가 약한 로버트 오리. 오리는 말론의 파워를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닐이 말론에게 붙을 때도 많았는데(유타는 반대로 센터의 공격력이 약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오닐은 말론의 피지컬은 감당가능했지만 2대 2 플레이는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1997년 주전이었고 이 시즌에 벤치로 내려온 엘든 켐벨은 발이 너무 느렸다.[79] 물론 당시에도 케빈 가넷처럼 기동력이 있는 빅맨들은 있었지만, 당연히 오닐은 저런 선수들을 외곽까지 따라다니지 않았다.[80] 물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오닐이 말론을 못 막은 것처럼 말론 역시 (파워는 대등해도) 키가 크고 로우포스트에서 최강자였던 오닐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진 못해서 서로 못 막는 구도였지 오닐이 말론에게 호구잡힌 것은 아니었다.(말론에게 진짜 호구잡힌 것은 파워가 현격히 딸렸던 샌안토니오 트윈타워였다) 그러나 오닐의 경우 체력 소모가 심한 1대 1 공격을 하면서 점수를 쥐어짜는 것이고, 말론은 재즈의 모션 오펜스가 부드럽게 돌아가면서 하는 공격이기에 개인득점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팀공격이 더 부드럽게 흘러간 것이다. 실제로 98서부 파이널 스탯을 보면 득점 자체는 오닐 31점, 말론 30점이지만, 재즈는 팀야투율이 51.4%에 달하는 반면, 레이커스는 39.9%에 불과했다. 오닐에게 줄 점수는 주더라도 지나치게 어그로가 끌리지 않게 함으로서 팀공격을 뻑뻑하게 한 것.[81] 나중에 이 별명은 미디어 등을 거치면서 'Mr. Fundamental'로 살짝 바뀌었다.[82] 오닐이 수비수를 스핀무브로 제칠 때 브라이언 쇼가 띄어준 랍 패스를 앨리웁으로 연결하는 콤비 플레이를 Shaw-Shaq Redemp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일화들을 보면 오닐의 어휘구사력 감각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엿볼 수 있다.[83] 당시 마이클 조던, 래리 버드, 매직 존슨 등의 선수들이 여러 광고들에 출연하며 하늘을 치솟는 인기를 찍고있었던 반면, 윌트 체임벌린 같이 체급이나 키가 상위권을 찍는 거인들은, 공격적인 이미지에 의해 그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체임벌린도 "누구도 골리앗을 응원하지 않는다" 라는 발언을 한것처럼, 당시 대다수의 거인 스타들은 신체적 특징 외에는 개성이 부족하여 호감도를 올리기가 어려웠다.[84] 피쳐링부터 아이스 큐브에 B-리얼에 피터 건즈에 KRS-One이다.[85] 사실 영화에 나온 농구선수들 중에서 평이 좋은 경우는 정말 드물다. 농구를 다룬 영화를 제외하고, 배역을 꽤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은 것은 레이 앨런, 사망유희의 카림 압둘자바나 나쁜 녀석들의 존 샐리 정도이고, 장 클로드 반담과 함께 더블팀의 주연을 맡은 데니스 로드맨이나 스페이스 잼의 마이클 조던 그리고 본문의 샤킬 오닐 등은 재앙이 따로 없었다.[86] 여기서 자유투가 몇 번 나오는데 대부분 실패하지만, 마지막에 수류탄을 자유투로 성공시킨다.[87] 포스터에도 나오지만, 초반에 잠깐 나오는 역할이다. 돌로 자유투를 던지는데, 상당히 낮은 성공률을 보여준다.[88] 쏘우 1을 패러디하여 본인과 의사라는 사람이 둘이 함께 납치당해서 깨어나서는 발이 쇠사슬로 묶인 것을 보고 상당히 당황하다가 살인마의 목소리를 듣고는 "코비?" 라고 대뜸 물어보는 게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상당히 웃긴 장면.[89] 이 때문인지 훗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촬영 때 추성훈을 알아보았다. 추성훈이 자신을 UFC 선수라 소개하자 깜짝 놀라며 다시 한 번 이름을 물었고, 추성훈이 자신의 일본 이름과 별명 '섹시야마'를 말해주자 그제서야 알아보며 포옹한다.[90] 빅쇼와 샤크가 경기 전 나란히 서서 기싸움(stare down)을 하는데 샤크가 장신으로 유명한 빅쇼를 내려다보고 빅쇼가 육중한 체격으로 유명한 샤크를 늘씬하게 보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빅쇼가 샤크에게 '말라깽이(slim)"이라고 도발하자 샤크는 "뚱땡이(fat boy)"라고 응수하는 것도 포인트. 여담으로 당시 빅쇼의 프로필 신장은 7피트2인치로 샤크보다 1인치 컸는데, 영상으로 보면 샤크가 약간이지만 명백히 더 크고 해설자도 폭소하며 "샤크는 엄청나게 크네요!(Shaq is huge!)"라고 멘트를 한다. 빅쇼는 훗날 자신의 키가 7피트 정도라고 했는데, 샤크의 7피트1인치 키가 착화신장이란 걸 감안하면 빅쇼 역시 착화신장으로 보인다.[91] 한국에 오면 가장 만나보고 싶은 인물로 최홍만을 꼽았고 그와 격투기 경기를 해보고 싶어했다. 최홍만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자신에게 영상편지로 도발한 오닐에게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여 역시 영상편지로 컴온, 농구만 했던 놈, 단숨에 때려눕혀 버린다며 답장했으나 자금 문제로 협의가 잘 되지 않아 실제로 경기가 성사되지는 않았다.[92] 비디오가 끝날 무렵 올랜도 웜업재킷을 입고 경기전 몸풀기 레이업을 하는 장면을 한 컷 보여준게 전부이다.[93] 보통은 Ascended 이상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94] 일부 에피소드는 "샤킬 오닐의 무한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엠스플에서도 방송했었다.[95] 포스트업 빅맨 칭송, 요새 농구는 픽앤롤 농구야, 드와잇 하워드는 나처럼 28-15을 해야 돼 등...[96] 사실 모든 패널이 전문적인 분석을 할 필요는 없으며, 전직 NBA선수들을 이런 쇼에 섭외하는 이유도 이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게 주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 농구에 대한 지식 부재가 일반적으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같은 패널인 바클리만 해도 현대 농구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까지 큰 편은 아니다. 오닐의 문제는 현역 시절부터 지속된 자신감의 연장선으로, 자신과 스타일이 다른 현역 빅맨들에 대한 폄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오닐은 현대 빅맨에 대해 존중하다가도 별 이유 없이 폄훼하는 경우가 많은데, 3번째 MVP를 수상한 니콜라 요키치의 면전에서 "네가 리그 최고의 선수지만 셰이 길저스알렉산더가 수상했어야 했다"고 하며 갑분싸를 만든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이에 대해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겠다"고 해 또 반감을 샀다. 이처럼 자신만의 생각을 고집할 뿐 아니라 대한 비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역시 패널로서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게 되는 요소인데, 아래 언급된 맥기 케이스처럼 자신을 비판하면 인신공격에 가깝게 대응하는 경우도 잦다.[97] 같이 1996년 드림팀에서 뛴 레지 밀러를 대동하는 건 덤. 정작 둘 다 뛴 바클리는 1992년 드림팀 쪽에 손을 들어줬는데, 그런 바클리가 어지간히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98] 절반은 농담조이긴 하지만 매번 나오니까 패널들도 '아 좀 그만'을 외친다. 내시 그리고 오닐과 한솥밥을 먹었던 그랜트 힐이 오죽하면 '이러니까 우리가 피닉스에서 우승을 못했지. 너가 그렇게 자기팀 포인트 가드를 싫어하니까.'라고 한탄하는 게 포인트.(셋이 한팀에 뛰었다)[99] 매직 입단시 이걸 포기한 이유가 당시 33번을 달고 있건 선수가 돈을 요구해서라고 한다.[100] https://www.webcitation.org/5uImWLTL2[101]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팀에는 매직 존슨, 코비 브라이언트, 엘진 베일러, 카림 압둘자바 그리고 본인을 꼽았고, 시카고 불스 팀에는 데릭 로즈,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호레이스 그랜트를 꼽았다. 여담으로 1970~1980년대 NBA에 해박한 팬들 중에서 "시카고에 아티스 길모어라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있는데 왜 그랜트를 넣었냐"고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102] I just felt like he was just talking. It’s a debate. The thing is that we would never know. I think we would have killed them. He thinks they would have killed us. You guys decide. It’s just a debate.[103] 오닐은 새크라멘토 킹스를 새크라멘토 퀸즈라며 대차게 디스했던 적이 있다. Open Court에서 크리스 웨버가 나와있는데 대놓고 깠다. 물론 이때의 말투는 농담조였다.[104] 오닐이 사이즈 23을 신는다. 그보다 큰 야오밍, 그보다 약간 작은 디안드레 조던이 사이즈 18을 신는다. 손도 발도 엄청나게 커서, 그 손 크기로 유명한 카와이 레너드보다 약간 더 크다. 물론 이건 201cm밖에 안되면서 오닐같은 덩치랑 거의 비슷한 카와이가 더 놀라운 거지만... 하승진이 오닐은 430mm를 신는다 라고 언급한 걸로 봐선 40cm가 넘는건 확실한듯.[105] 미식축구 선수인 오델 베컴 주니어는 트위터로 "저건 10점이라고!"를 외쳤고, 농구광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도 어이가 없어 손사래를 치는 장면이 잡혔다. 함께 심사를 했던 매직 존슨, 조지 거빈, 디켐베 무톰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오닐의 점수를 보자마자 바로 폭소를 터트렸다.[106] 그래도 뒷말은 별로 없던 것이, 오닐이 9점을 준 이유가 두 명 모두 덩크를 한 번에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 덩크 콘테스트에선 어떤 덩크를 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기대감이 더 크기 때문에, 한 번에 성공시키는 것이 반응이 좋다. 편파를 한 것도 아니고 두 명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심사했다. 엄격한 기준에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고든과 라빈은 이후 파이널에서 단 한 차례도 실수하지 않았고, 오닐은 10점으로 화답했다. 그 덕에 2016 덩크 콘테스트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덩크 콘테스트로 기억되고 있다.[107] 애초에 무리가 있던 주장인 것이, 로빈슨은 1987 드래프티이지만 군 복무 탓에 1989년이 되어서야 샌안토니오에 합류했고 그가 루키 시즌을 보내던 1989, 1990년에 오닐은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 1학년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오닐이 로빈슨과 만났을 순 있겠지만 당시 그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톱급 아마추어라 '사인 요청하는 어린 팬'이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닐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고등학생 때, 그 전에는 13살 때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는데 전자라면 로빈슨은 군 복무 중이거나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었고 후자라면(1985년 아니면 1986년 초) 당연히 대학 시절이다.[108] 사실 당시에도 로빈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주장이긴 했다. 로빈슨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바른 생활 사나이로, 선수생활 내내 스캔들 하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선수였다. 당연히 팬서비스에도 인색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 팬의 사인 요구에 무례하게 대응했다는 게 너무 로빈슨답지 않았기 때문.[109] 오닐의 또 다른 롤모델인 유잉에 대해서도 선수생활 내내 디스를 했는데, 사실 좋은 모습은 아니며 해당 선수들의 팬들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그나마 유잉에 대해선 이빨만 털었지, 로빈슨에게는 몇년 동안이나 '어린 팬을 무시했다'는 오명을 씌운 것이다. 로빈슨이 대인배라 웃으며 넘어간 것이지...[110] 본인 자신도 포함[111] 1984 파이널 보스턴 셀틱스[112] 르브론 제임스, 대니 그린, 라존 론도, 유도니스 하슬렘[113] 양팀에서 파이널에 진출해본 선수는 두 팀 통틀어 제이 크라우더가 유일하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크리스 폴을 포함해서 양팀 선수들은 크라우더를 제외하고는 파이널 경험이 전무하다.[114] 제프 그린은 오닐의 마지막 해에 같이 보스턴에서 뛰었고, 유도니스 하슬렘은 마이애미에서 함께 뛰었다.[115] 사실 오닐의 성격 자체가 주목받길 좋아하는데다가 굉장히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개그를 위해 이런저런 무리수를 던지곤 하는데, 만약에 자신이 존중하지 않는 상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면 본인이 기분 나빠하는 성향이 있다. 저베일 맥기에 대해서도 샥틴 어 풀에 여러차례 출연시키며 놀려댄 것에 대해 맥기가 하지 말라고 부탁했음에도 계속 놀려먹었는데, 이에 대해 맥기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오닐이 사과는 커녕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 적이 있다. 야오밍은 워낙 겸손한 성격이라 오닐의 놀리는 것에 대해 관대하게 받아들였고, 오닐에 대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데다가 야오밍 자체가 오닐이 인정하는 실력자이기 때문에 무난하게 친한 관계가 된 것. 사실 이건 그냥 야오밍이 대인배인 것이다. 실제로 야오밍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나쁜 얘기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116] 듀란트는 2007년 드래프트, 커리는 2009년 드래프트고 오닐은 2010-11년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117] https://www.tiktok.com/@ddanguri_no1/video/7256384437959576833[118] 61회는 아예 샤킬 오닐 특집이 되었다. 뉴저지에서 학교를 다닌 한승연, 체육계 대선배를 맞이한 신수지가 팬심을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
분류
- 미국의 남자 농구 선수
- 미국 남배우
- 미국의 남성 래퍼
- 미국 남가수
- NBA MVP
- NBA 파이널 MVP
- NBA 신인왕 수상자
- NBA 올스타전 MVP
- FIBA 농구 월드컵 MVP
- 뉴어크(뉴저지 주) 출신 인물
- 1972년 출생
- 1992년 데뷔
- 2011년 은퇴
- NBA 영구결번 선수
- 센터(농구)
- 올랜도 매직/은퇴, 이적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은퇴, 이적
- 마이애미 히트/은퇴, 이적
- 피닉스 선즈/은퇴, 이적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은퇴, 이적
- 보스턴 셀틱스/은퇴, 이적
- 미국의 올림픽 농구 메달리스트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농구 메달리스트
- 아프리카계 미국인
- 인터넷 밈/농구 선수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