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4 11:23:30

시카고 항구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시카고 항구 폭발.jpg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4. 유사 사고

1. 개요

Port Chicago Disaster

1944년 7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카고 항구[1]에서 있었던 폭발 사고.

2. 사고 당시

시카고 항구는 샌 프란시스코에서 약 48km 떨어진 항구로, 매어 아일랜드(Mare Island)의 탄약고로 무기를 수송할 때 주로 쓰였다. 인근에 작은 마을 하나 있던 것을 빼면 인구 밀집 지역이 없고, 산업지대도 없기에 혹여나 큰 사고가 있어도 문제가 적었기 때문이다. 1944년 여름엔 시설이 확장되어 동시에 배 2척이 물품을 적재할 수 있게 됐다. 탄약과 무기를 적재할 땐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대가 배치됐다.

당시 항구에서는 SS Quinault Victory호와 SS.E.A Bryan호에 실린 물품을 내리고 있었다. 두 배에 실린 물품은 4,600톤 사량의 폭약과 폭탄, 폭뢰, 그리고 각종 탄약이었다. 여기에 더해 인근 기동차들에도 400톤 가량의 폭약이 실린 상태였다. 물건 옮기는 작업에 320명 정도의 인부가 동원됐다.

오후 10시 18분, 대형 폭발이 수차례 일어났다. 폭발로 한 밤중에 강한 섬광이 보였는데, 저 멀리 네바다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강력했다. 폭발로 시카고 항구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2마일 가까이 연기가 뒤덮여졌다. 9000피트 위를 지나던 항공기는 폭발로 날아온 파편에 맞을 뻔 했다. 인근 마을의 우리창이 전부 깨졌고, 주민들은 파편을 피해 달아났다. SS.E.A Bryan호는 폭발로 아예 산산조각 나버렸다.

폭발로 인한 피해 사례 중에는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보고될 정도였다.

사고로 320명이 사망 했다. 사망자 중 3분의 2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무려 2차 세계 대전 때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15%가 이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 원인은 인재였다. 사람이 부족하단 이유로 훈련이 덜 된 사람도 무기 수송에 썼고, 일을 빨리 처리한다고 안전규정도 안 지킨 채 진행했다. 수송하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나누고 누가 더 빨리 일을 처리하나 경쟁시킬 정도로 일을 위험하게 처리했다. 이에 항의한 군인들도 많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 하는 바람에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3. 사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후 매일 아일랜드로 재발령났다.

얼마 안가 다시 무기를 수송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나, 여전히 훈련을 덜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출신 해병 중 258명은 무기 수송을 거부했다. 거부한 이들 중 208명에겐 불복종 혐의로 처벌이 있었고, 남은 50명은 일반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44년 10월 열린 재판에서 징역 8년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2년 뒤 풀려났다.

1994년, 당시 재판에서 내려진 가혹한 처벌에 인종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됐다. 1999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50명 중 3명만 살아있었는데, 그 중 프레디 믹스(Freddie Meeks)가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사면받았다.

사고 인근 지역에 사고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4. 유사 사고


[1] 이름이 시카고 항구지만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곳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