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e008b><colcolor=#fff> 삼풍그룹 창업주 이준 李鐏|Lee Joon | |
출생 | 1922년 10월 22일 |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現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 |
사망 | 2003년 10월 4일[1] (향년 80세)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차병원 | |
본관 | 전의 이씨[2] |
가족 | 배우자 조현옥, 슬하 3남 1녀 |
약력 | 동경산업 대표 삼풍건설산업 대표이사 회장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
종교 | 개신교(순복음)[3] |
직업 | 기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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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풍건설산업 창업주이며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주범이기도 하다.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 및 부작위로 의한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려워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와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어 경합범이 되어 최대 형량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2. 생애
1922년 10월 22일[4],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現 양주시 양주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만주군 관련 친일 경력이 있다고 한다.[5] 1941년 중국 베이징에 있던 천주교계 대학인 보인대학(補仁大學)에 입학하여 1943년까지 다녔다.[6] 1963년에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2.1. 백화점 건설 이전
만주 생활 시절에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6.25 전쟁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고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요원으로 근무했다. 그 외에 뛰어난 사교술로 주한미군 등 외교사절단과 인맥을 쌓아 1946년 한중교역 사장, 1962년 국제과학문화연구소 공사관리소장[7]을 지냈다. 42세였던 1963년에 미군 군납 건설과 전기공사업을 주로 하는 동경산업을 설립했고 1967년 상호를 삼풍건설산업으로 바꾸면서 건설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당시 백화점 사업이 한창일 때였으며 이준회장은 자신의 소유 부지와 인맥을 통해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원래 아파트 건설 용도였던 삼풍백화점 부지를 서울시로부터 백화점 부지로 용도변경[8]하여 백화점 사업에 진출할 토대를 만들었다.2.2. 백화점 건설 이후
군과 중정 근무 시절 쌓아 온 인맥들을 활용해 당시로서는 굵직한 공사였던 서울 중구 을지로 삼풍상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청계천 평화시장 공사를 따내고 70년대에는 부동산 투자에 눈을 돌려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9] 이후 강남 개발로 눈을 돌려 1974년 서울특별시 성동구[10] 서초동에 57,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주한미군 하사관 숙소 및 음식점 등 미군 주택단지를 조성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1975년 해외건설업 면허를 따 중동에도 진출했으나 장남의 사망과 중동 붐 퇴조로 1983년 들어 해외건설업 면허를 반납하고 주택건설업에 집중했다. 1987년에는 서초동 주한미군 타운을 철거하고 그 부지에 삼풍백화점과 삼풍아파트를 함께 건설해서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11] 이에 따라 삼풍건설산업도 건설부문 및 백화점부문 2개로 개편했다.이 광고 23초쯤에 나오는 어린이는 당시 아역배우였던 김민정이다.[12] |
1990년 당시의 광고(CF)에 쓰인 음악은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정신(The Olympic Spirit)" 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링크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에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에 개장한 백화점으로, 당시 전국 2위 규모를 가진 단일 매장으로 기록될 정도로[13] 현재 롯데월드 건물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규모인 단일 쇼핑몰로서는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하였고[14] 콘크리트와 유리의 조화로 디자인된 건물 외관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게다가 호화 쇼핑몰의 콘셉트으로 출발한 삼풍백화점은 당시로서는 각종 고급 수입품과 명품들을 주로 진열 및 판매함으로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명성을 날리던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끌어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건설 당시부터 원 설계와 달리 기둥의 폭을 줄여[15] 철근 등 자재를 작게 투입하는 등 부실하게 시공되었으며, 부실한 상태로 완공된 후에도 옥상 냉각탑 이전, 롤러스케이트장을 불법적으로 식당으로 변경, 지하주차장 확장을 위해 기둥과 벽 철거 등 돈만 벌기 위한 사주의 안전 불감증과 사고를 예고해 주는 건물의 균열 등을 감추어 큰 사고를 유발했다.
백화점과 함께 지어진 삼풍아파트 역시 1986년 분양 당시 최고 10 : 1의 경쟁률을 보였고 당시로는 한국 최고 분양가를 기록하는 등 화제를 뿌렸으며 삼풍백화점 붕괴 전까지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압구정 한양아파트 다음으로 강남구/서초구 지역에서 인기 좋고 집값도 높은 아파트 단지 중 하나였다. 숲을 연상시키는 나무가 가득한 단지 내 도로와 명문 강남 8학군 소재, 주변에 고급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을 비롯해 법원/검찰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등 당시 서울의 주요 랜드마크들이 즐비한 데다 32평, 45평, 46평, 56평, 57평, 58평 등 중대형 평수로만 구성된 대단지로 당시로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16] 삼풍아파트는 정상적으로 건축되어서 21세기에도 건재하다. 비교를 한다면 지금의 도곡동 타워팰리스나 삼성동 아이파크의 폭발적인 인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
아파트와 백화점으로 돈을 쓸어모으며 모 기업인 삼풍그룹도 그 규모 또한 대단하게도 당당히 대기업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실제 삼풍그룹의 총 자산 규모는 당시 액수로 4,000억 원대[17]로 추정될 정도로 대단했으며 추가 지점 없이 단일매장으로서도 독보적인 매출을 자랑한 데다 강남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 경제 고도성장기 바람을 타고 우후죽순으로 지어진 아무 백화점하고 비교하기가 매우 힘들며 만약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지 않고 계속 사업을 했었다면 현재의 롯데쇼핑이나 신세계와 견줄 만한 쇼핑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을 것이란 의견까지 있을 정도이다.[18]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재벌 수장의 반열로 성장하게 된 이준은 더욱더 물질만능주의자로 변했다. 한편 붕괴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협회 회의 등 대외활동에 잘 나서지 않아 업계 입장에선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그러다가 1995년 6월 29일, 결국 백화점은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이는 참사 발생 이틀 후 서초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더 자세한 것은 후술.
참고로 대검찰청, 그러니까 붕괴 사고가 발생한 삼풍백화점 맞은 편에서 소환 조사를 받았다.
2.3. 백화점 붕괴 이후
사고 이후 7년 6개월 동안 복역한 뒤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솜방망이 아니냐 싶을 정도의 형량이지만, 엄연히 살인죄가 아닌 과실치사죄를 적용받은 것을 명심해야 하며, 이 시절 과실치사죄로서는 오히려 최대한 가중처벌받은 것이다. 출소 당시 만 80세를 6개월 넘긴 고령이었기에[19]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당뇨병과 고혈압이 심해진 데다 수감 생활 과정에서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신장병까지 얻는 바람에 출소하자마자 자유의 몸이 되어 집에 가게 된 것이 아니라 병원에 입원했다. 건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나빴는지 병원에서도 투석기를 달고 살았고, 나중에는 신장 기능까지 약해져 거의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는 절친한 선후배들이나 또래 동료들은 나이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또한 사고의 여파로 재산은 한 푼도 남김없이 모두 압류된 상태였고, 몰지각한 언행으로 인해 지인들도 모두 떠나 버려서 소수의 가족들만이 남아 있었다. 부실공사를 해서 돈을 아끼려다가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전재산과 지인까지 사실상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거기다 후손들도 본인의 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살지도 못하고 해외로 나가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20] 결국 이준은 빈곤하고 병에 찌든 상태로 세월을 보내다가 같은 해 10월 4일에 병마 끝에 사망하는 그야말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그래도 한참 늦었지만 죽기 직전에는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자각은 했는지 자신은 죄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며 장례식은 본인의 유언대로 가족장으로만 치러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백화점 잔해 안에서 죽을 뻔했던 큰며느리[21]매몰 뒤 14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구조됐다.]도 참석했다.[22] 결국 가족들이 시신 인수를 했지만, 무덤은 직계들끼리만 아는 곳에 매장했을 가능성이 크다.[23]
3. 비판
3.1. 적반하장스러운 반응
위의 영상은 1995년 7월 4일 자 뉴스데스크 보도 영상이다. 사실 이 망언은 앞에 '여보쇼'도 붙여서 인용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흔히 알려진 '여보쇼'는 다른 데서 편집해 따 온 것. 해당 발언은 사람과 물건을 동일시하는 면모로 더욱 비판을 받았다.[24]실제로 불법 증축을 명한 장본인은 바로 이준 본인인데다 설사 자신의 말대로 사장[25]이 부실공사를 주도하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고 경영자로서 피해자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나 도의적인 반성의 모습은커녕 오히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오리발 내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부실공사를 철저하게 막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체크하는 습관[26]을 보이던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27], 망치를 들고 부실공사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던 이순목 우방그룹 창업주와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 억울한 입장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회사 건물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저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될 막말인데, 이 작자는 자신이 실제로 원인제공자인 주제에 이런 미친 말을 막 퍼붓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였다. 따지자면 피해자들은 상당수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게 아니라도 중상을 당했으니 병원에 가서 큰 수술 및 치료를 받아야 하므로 이 쪽도 재산을 잃는데, 이 작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못해서 잃는 것이니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지만, 피해자들은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 거고, 그보단 내 재산이 먼저지 따위의 발언을 했으니 그야말로 망언이 아닐 수가 없다. 게다가 좀 거칠게 말하자면 재산은 다시 되찾을 수라도 있지 목숨은 잃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는가? 하다못해 이 작자는 붕괴할 조짐이 이전에 충분히 감지했음에도 경제적 피해로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시킨 정신이 나가고 무대포스런 작자였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기 재산을 잃는 게 싫으면 애초에 재산을 잃을 짓거리들[28]을 애초에 하지를 말았어야 하는데,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미래의 어마어마한 손해[29]를 감수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천하가 다 보는 앞에서 몰상식한 말을 내뱉었으니 웬만한 흉악범만큼 더더욱 욕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발언이 사람도 죽고 다치지만 재산도 망가진다가 아니라 재산이 망가지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죽고 다쳤다로 반대 발언이 되었다면 과연 이 자가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30] 챙겨온 귀중한 재산들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탐험대 전원을 무사귀환을 시키려고 노력했고 끝내 무사생환시키는 데 성공한 어니스트 섀클턴이 하늘나라에서 이 장면을 지켜봤다면 통탄했을 것이다.
더불어서 기자들이 명색이 최고 책임자인데 할 말이 없느냐고 힐난하자 "그거는 알고 싶거든 사장한테 물어보셔!"(영상 1분 14초)라고 답하는 회피 행위까지 보였다.[31]
이러한 이준의 막가파스런 태도에 전 국민은 격노했고[32] 심지어 뉴스의 기자나 아나운서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이례적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낸 보도를 했을 정도였다.[33] 꼬꼬무2에 출연한 문세윤과 강승윤마저 이준의 망언에 기가 몹시 차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내심 속으로 심히 분노하는 반응이었다.
결국 이준의 망언은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더불어서 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이준의 행위까지 전세계까지 중계되면서 나라 망신 한 번 제대로 당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같으면 설사 회장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도의적인 책임을 스스로 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34] 미국, 유럽,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도 저런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감방에 쳐 넣어도 모자란다고 비난했다. 특히 이 문단의 첫번째 영상(MBC 뉴스데스크)에서 나오는 더스틴 브리지스라는 미국인은 미국에서라면 최고형을 받아 여러 해 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이준을 비난했다.
3.2. 인성
1995년 7월 1일 자 매일경제 5면에 따르면 성격이 매우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서 변화하는 유통환경에 적응을 못 하고 부하 직원들이 항명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물은 부실하게 지어 놓고 풍수지리에 심취해서 자기 사무실 구조도 바꿀 정도였다.[35]그의 썩은 인성은 차남인 이한상도 물려받았는지 독선적인 경영으로[36] 부하직원들과 갈등을 빚었고 동생인 이한창[37]과도 경영 문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38]
4. 가족
- 부인: 조현옥[39] (1926 ~ 생사 불명[40])
- 장남: 이한웅 (1950[족보상] ~ 1977[42][43])
- 며느리: 추경영[44](1950 ~ )
- 손녀: 이혜진 (1972 ~ )
- 손녀: 이혜성 (1974 ~ )
- 차남: 이한상 (1953 ~ )
- 삼남: 이한창 (1957 ~ )
- 장녀: 이경희 (1959 ~ )
그 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딱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백화점 A동 지하 1층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다 붕괴 사고로 매몰 뒤 14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추경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추경영씨는 이준의 죽은 장남 이한웅의 아내, 즉 이준의 맏며느리였던 것이다.[45] #, #
추경영의 남편 이한웅은 1977년[46]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 근무하다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47] 요절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추경영은 이한웅과에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이준의 손녀들) 때문에 이준의 집안에 남았고 이준은 삼풍백화점에 조그마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한 개 내 주었는데 이때 붕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48] 백화점이 무너질 때 이준을 비롯한 임원들은 백화점 B동에서 건물의 보수를 위한 긴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추경영의 입장 때문에 국민들은 더더욱 분개했고 이준과 기업은 더더욱 욕을 먹었다. 당시 추경영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이준의 손녀들을 키우는 입장이었고 때문에 도의적이나 하다 못해 법적으로도 업무상 사고로 죽은 남편 이한웅의 재산과 지위(주식)를 상속받아서 삼풍그룹 내에서 이사나 부사장급의 임원인 줄 알았으나 이준은 며느리와 손녀들 명의로 백화점 내에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달랑 내주고[49] 며느리와 손주를 진짜로 버렸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더더욱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추경영은 구조 당시 초기 생존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이준의 큰며느리라는 것이 알려지고서는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하고 이준 일가의 일원으로서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이준 일당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전했다. 게다가 구조 후에 인터뷰를 할 때도 사고현장에서 자기와 함께 있다 사고를 함께 당한 여직원[50]까지 걱정했고 여직원도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신했던 이준 일당과 달리 추경영은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붕괴 조짐을 전혀 모른 채 백화점에서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케이스임에도 막장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를 하고 다녔기에 실질적인 여론은 씁쓸한 동정 또는 안타깝게 바라보는 현실에 가까웠고 아울러 당시 이준의 삼풍그룹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집단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5. 기타
붕괴 당시 본인만 살려고 먼저 밖으로 도망쳤다는 최초의 보도로 인해 루머가 돌았으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당시 이준과 경영진은 건물 백화점 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던 이유는 본인이 머물던 회의실이 A동이 아니라 B동에 있었는데 무너진 A동과 달리 B동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51] 물론 건물 골조 약화에 결정적 원인제공을 한 사람이 이준 본인이었던만큼, 미리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는 면죄부가 되기도 불가능하지만...연예인 신현준이 이준 회장의 손자라는 헛소문이 있었으나 이준의 자녀들은 전부 1950년대생이기에 1968년생인 신현준의 부모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이준 회장의 여동생이나 친척 일가가 신현준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과거 신현준과 관련된 언론 기사(특히 여성지) 중에 신현준이 삼풍백화점 회장 일가와 친척 관계라는 기사는 있다.[52] 1990년대 초/중반 신현준에 대한 기사가 실린 잡지에선 대놓고 삼풍백화점 회장 아들이라고 기재되기도 했다. 물론 여느 잡지가 다 그렇듯이 저런 것들도 믿을 만한 것은 별로 못 된다. 특히나 당대의 연예잡지들은 연예인들의 가십거리를 사실확인 안 하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마구 찍어내던 시절이라 더더욱.
반면 그 작자가 붕괴 이전 소유했던 숭의학원에선 의외로 평판이 나쁘진 않았다. 삼풍백화점과는 달리 숭의학원[53]은 제대로 경영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숭의학원만 운영하거나 무리한 욕심을 부려 가며 삼풍백화점을 부실하게 건설하지만 않았더라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이준 또한 지금처럼 존재 자체가 흑역사 취급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6. 관련 문서
[1] 81세 생일을 18일 남기고 사망했다.[2] 대사성공파 형조정랑공파 29세 "교(敎)"자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족보명 이교준(李敎鐏).(족보)[3] 1995년 7월 1일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이 회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건설을 맡았고 한경직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준의 아들이자 백화점 사장이었던 이한상 대표도 역시 같은 오순절교회 신자다. 현재는 몽골로 건너가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사진의 산소 앞 비석에는 크리스천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시와 요한복음 11장 25~26절의 성경 구절이 있다. 장례식도 자연히 개신교식으로 진행되었다.[4] KBS 9시 뉴스 1995년 8월 4일 방송분에서 그가 소유했던 신당동 자택과 주민등록번호가 공개되었는데, 당연하지만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던 90년대였으니 주민번호나 주거지가 공개된 것이다. 인터넷도 거의 없던 시절이기도 하고. 21세기라면 범죄자의 인권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다. 앞번호가 221022(1922년 10월 22일 출생)였다. 시대상 음력 생일일 확률이 높은데, 음력 1922년 10월 22일은 양력 1922년 12월 10일이다.[5] 일설에 의하면 일본 첩자질을 했다고도 한다. 정확히는 당시 친일 밀정들의 본거지였던 일본의 북경영사관에서 일했다는 설이 있다. #[6] 보인대학은 국공내전 이후 대만에서 복교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공산화 이후 대륙에 남은 학생 및 교직원과 장서 등의 재산은 중국정법대학으로 통합되었다.[7] 실질적으로 중앙정보부 산하조직[8] 용도변경은 하늘의 별따기였으니 서울시 공무원에 대한 로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9] 이런 이준의 이력은 전 SBS 대하드라마《자이언트》의 조필연이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 다만 조필연의 악랄한 수준의 행각(청부살인, 비리 등)은 이준 회장에서 따 온 것은 아니다.[10] 그러니까 강남구를 거쳐서 서초구가 생기기 전이다.[11] 사실 삼풍아파트는 삼풍건설산업이 지은 단지가 아니다. 현대건설과 우성건설이 공동으로 지은 것이다. 삼풍백화점은 본래 우성건설이 짓던 건물이었으나 삼풍 측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시공을 포기했고 결국 삼풍건설산업이 부실공사를 단행하여 완공시켜버렸다.[12] 지금도 무난하게 활동하고 있다.[13] 단일매장 규모 1위는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이었다. 이 롯데 본점의 규모는 90년대 초반 규모 측정 당시 구관 바로 옆에 새 건물로 지어진 신관이 구관과 내부까지 완전히 이어 붙여진 상태에서 파악한 규모다. 따라서 별도의 증축이나 확장 없이 처음부터 단 하나의 건축물로 설계된 단일 매장 규모로서는 삼풍백화점이 사실상 1위인 셈이다.[14] 오픈 당시에는 위 사진처럼 하얀색으로 도색했다가 1994년 초에 분홍색으로 재도색했다.[15] 붕괴 전 삼풍백화점을 가 봤던 윤종신은 그때는 기둥이 없어서 주변 시야가 넓게 탁 트인 삼풍백화점이 좋았었다며 붕괴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정말 섬뜩하다며 그때를 회상했다.[16] 강남, 서초 지역 아파트 중 테헤란로 이북의 아파트들은 이미 1981~1982년에 분양이 끝났다. 당시 강남 최고의 아파트로 인정받았던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압구정 한양아파트도 1980년대 후반에는 지은 지 1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그런 이유로 서초동에 새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은 대단한 인기 몰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지금은 상당한 부촌이며 인기 거주지인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54]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압구정동, 서초동 일대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17] 1995년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500원 전후였으니 2020년대 액수로 환산하면 최소 1조 원 이상으로 이 정도 규모면 백화점 기업으로서는 당시 잘나갔다는 그랜드백화점을 능가할 정도의 규모.[18] 당시 삼풍백화점 매출이 하루에 수억 원일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아서 백화점 붕괴사고 직후에 돌아온 억대 어음들도 모두 결제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듬해 1996년에 삼풍그룹이 도산했으나 4,000억 원대의 자산을 서울시가 몰수해 경매로 모두 처분하여 삼풍그룹 부채 탕감과 희생자, 부상자들 및 백화점 입점주들의 피해 보상금으로 썼다.[19] 사실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극초반에는 아들 이한상 사장만 구속시키고 이준은 72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불구속 수사할 것이며 재판에서도 집행유예가 나와서 수감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그러나 이준의 혐의가 워낙 명백하고 죄질도 상당히 중한 탓에 고령임에도 구속되었고, 고령이란 점도 참작되지 않고 오히려 죄질 때문에 가중처벌 받을대로 가중처벌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것. 이 시절의 72세는 지금의 80 ~ 90대 느낌이었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환갑 지나면 노인 대접받았다.[20] 이준 일가도 아닌 조남호 당시 서초구청장이 삼풍 측으로부터 부실공사를 위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만으로(결국엔 무혐의로 결론) 삼풍백화점 유족들에게 얻어터져 옷이 나체 상태로 뜯기고 눈도 실명 직전에 장기 입원을 해야만 했다. 그 정도로 삼풍백화점 비리 관련자들에 대한 삼풍백화점 유족들과 국민들의 증오가 하늘을 찌를 정도이니 비록 인터넷 시대 이전 사건인데다 붕괴 이전 대외 활동을 거의 안 해 얼굴이 잘 팔리지 않았던 이준 일가도 한 번 얼굴이 팔려버린 이상 한국에서는 평생 발 들이고 살기 어려워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마치 아돌프 히틀러의 방계 후손들이 미국에서 성씨를 바꾸고 숨어 살듯이 말이다.[21] 추경영(전주시 출신이며, 추계 추씨이다.), 1950년 생으로 사고 당시 45세. 그마저도 자력으로 대피하여 바로 구조된 것이 아니고[22] 이준 회장 본인도 며느리를 아꼈던 모양이라 구조 소식을 듣고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청문회장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며 눈물을 보였다고... 그러나 후술하듯 남편을 잃은 큰며느리에게 회장인 그가 챙겨준 거라고는 고작 삼풍백화점의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가 전부였다. 때문에 '큰며느리를 아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고 이준 본인한테 유리한 쪽으로 언론플레이를 하려던 부분이 있다. 청문회에서 눈물을 보인 모습 역시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제스처가 아닌가 심히 의심스럽다. 다만 아이스크림 가게 자체는 제법 흑자였던 덕분에 며느리와 손주 일가가 생활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때문에 "아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더라도 냉대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23] 실제로 정치적인 이유로 죽거나 흉악범이 사형 혹은 감옥에서 죽으면 가족들이 시신을 인수하지만, 이미 죽은 자를 주제로 괜히 떠들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직계 가족끼리만 위치를 공유하여 간단하게 제사만 지내고 이름 없이 매장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당연히 제3자는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24] 이와 함께 사전에 보고를 받았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보고는 사장이 있어서 그한테 보고를 따로 받고 나는 회장으로써 1주일에 한번씩 회의만 참석한다. 그것도 하나의 관리 문제로써 내가 담배꽁초 청소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고받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직후에 뉴스 기자들의 유가족들에게 사죄를 해야하지 않냐는 질문에 '입이 열개여도 할말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문제는 그 태도가 여론에 떠밀려서 마지못해 사죄하는 눈빛이였다는 거다.[25] 그래봐야 그 문제의 사장이 바로 이준 회장의 차남 이한상이다. 이래하나 저래하나 도의적 책임에서는 이준도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26] 그렇게 지어진 포스텍은 2017년 포항 지진에도 끄떡없었다. 더군다나 포스텍은 내진설계 기준 같은 것도 없던 1986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2017년 지진에도 피해 하나 없이 멀쩡했던 것이다. 참고로 잘못 조여진 볼트에는 전부 하나하나 표시를 했는데, 그렇게 잡아낸 볼트의 수만 무려 400개였다.[27] 이뿐만 아니라 그는 70% 가량 지어진 공장 건물을 시찰하던 중 건축 상태가 불량하자 땜질하겠다는 아랫사람의 말에 땜질하면 나중에 큰 사고 난다는 걸 모르냐며 당장 폭파 시키라고 지시해 다이너마이트 발파로 70%나 지은 건물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싹 다 다시 짓게 한 사람이다. 애초에 엄청난 무게의 장비들을 쓰는 철강 공장이니 '부실공사=재난' 공식이 당연하지만...[28] 삼풍백화점 졸속 건립 및 건물의 내구도를 저하시키는 증•개축과 당장의 비용 절감을 위해 건물의 내구도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던 제반 행위들.[29] 삼풍백화점 붕괴 및 그로 인한 삼풍그룹 도산, 그리고 관련 (하청업체 포함) 근로자들의 실직.[30] 하지만 해당 내용은 당시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기반한 부분도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준 회장 등 경영진이 붕괴 14분 전 붕괴 사실을 인지하고 일제히 건물 밖으로 긴급하게 대피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검찰 조사 및 청문회 내용에 따르면 이준 외 경영진은 백화점이 무너질 때까지도 백화점 건물 내에서 계속 보수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으며,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붕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 임원진의 회의장은 무너진 A동이 아닌 B동에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사실이 이들이 도주를 하진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와 언론 모두 붕괴 사실을 알고 이들만 먼저 미리 빠져나갔다고 잘못 이야기하며 일제히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비난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준이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하여 잘못은 사라지지도 않는데다 1차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추호도 달라지지 않는다. 애당초 붕괴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단순 보수를 위해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대유감, 삼풍>을 보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31] 그래서 어떤 형사는 "지존파도 이러지는 않았다!"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지존파도 자신의 행위는 부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 중 김기환, 김현양 등을 제외한 이들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32]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으로 엄청났고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며 단체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애초에 무려 500명 이상을 죽인 거나 다름없는데다 징역으로도 고작 7년밖에 선고시키지 못했던만큼 이 정도의 분노가 안 일어나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33] 21세기 들어서는 뉴스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라 앵커들이 종종 사견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20세기까지 방송계는 매우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자랑했으며, 특히 뉴스의 앵커들은 사견은 커녕 스타일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었던 매우 딱딱하고 보수적이던 시기였다. 그 앵커의 짬밥과는 상관없이 언론계 분위기가 다 그랬다. 그런 시기에 기자가 저 정도로 사견이 들어갔다는 것은 이준의 인성과 언행이 그만큼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34] 실제로 일본의 문화 특성상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문제는 그게 너무 심해서 무슨 큰 사건이 터지면 할복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경영진이나 지도부 중 누군가는 도의적인 책임으로 인해 자살해야 했다. 거기다 이런 식의 죽음을 은연중에 강요받는 자는 오너 일가나 지도부 일가가 아닌 중간급 간부가 등떠밀려 죽는다. 거기다 이런 것도 케바케여서 도호쿠 대지진 때 도쿄전력 경영진은 적반하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35] 사실 한국 기업인들이 풍수 같은 미신을 많이 믿는데 특히 건설업계 쪽에서 그런 성향이 강하다.[36] 붕괴 즈음에는 이준이 건강이 나빠져서 이한상이 사실상 경영을 맡았다.[37] 이준의 3남[38] 특히 부실공사 문제로 엄청 싸웠는데, 실제로 이한창이 "아버지!! 차라리 땜질 식 보수공사라도 해요!!!"라고 고함을 쳤을 정도였다.[39] 함안 조씨 조우래(趙友來)의 딸이다.[40] 사망했다면 2003년 이후.[족보상] 1947년생.[42] 1975년 설이 있다.[43]
묘비에는 全義李公漢雄之墓(전의이공한웅지묘)"라고 써져 있다.[44] 추계 추씨 설과 양지 추씨 설이 있다.[45] 이때도 인터뷰 당시 가족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렸다.[46] 19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출처는 매일경제신문.[47] 이 때 이한웅과 아내 추경영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48] 당시 직원과 함께 가게에 있었고 마침 손님에게 주문을 받은 참이었는지 밀크셰이크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람이 위에서 내려오는 걸 느꼈고 곧이어 천장이 내려 덮치는걸 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보 없이 당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49] 그래도 이 아이스크림 가게는 알짜로 유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재산을 일부라도 제대로 상속해 준 것도 아니고 달랑 점포 하나 내어 주고 무관심하게 지낸 것은 진심으로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상 생색내기나 마찬가지였던 것.[50] 인터뷰에서 '우리 아가씨' 라고 칭하던 사람이다.[51] 청문회에 따르면 삼풍의 경영진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52] 1995년 9월 여성잡지 '퀸', 1996년 3월 월간 여성동아, 1996년 8월 여성잡지 'FEEL'에 기재되어 있다.[53] 숭의여자대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초등학교
묘비에는 全義李公漢雄之墓(전의이공한웅지묘)"라고 써져 있다.[44] 추계 추씨 설과 양지 추씨 설이 있다.[45] 이때도 인터뷰 당시 가족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렸다.[46] 19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출처는 매일경제신문.[47] 이 때 이한웅과 아내 추경영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48] 당시 직원과 함께 가게에 있었고 마침 손님에게 주문을 받은 참이었는지 밀크셰이크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람이 위에서 내려오는 걸 느꼈고 곧이어 천장이 내려 덮치는걸 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보 없이 당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49] 그래도 이 아이스크림 가게는 알짜로 유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재산을 일부라도 제대로 상속해 준 것도 아니고 달랑 점포 하나 내어 주고 무관심하게 지낸 것은 진심으로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상 생색내기나 마찬가지였던 것.[50] 인터뷰에서 '우리 아가씨' 라고 칭하던 사람이다.[51] 청문회에 따르면 삼풍의 경영진은 붕괴 바로 직전까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52] 1995년 9월 여성잡지 '퀸', 1996년 3월 월간 여성동아, 1996년 8월 여성잡지 'FEEL'에 기재되어 있다.[53] 숭의여자대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초등학교
[54] 즉, 테헤란로 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