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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대입제도 변화를 예고했을 당시 중3이었던 학생들(주로 1983년-1984년)을 일컫는 말. 사실 이들은 세대라고 부르기에는 2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통상 N세대로 불렸고, 2024년 기준으로 40대 초반이다. 넓게 보면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1983년~1985년생을 말한다.이해찬은 1998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체벌제한조치를 취했고,[1] 또한 고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대입제도를 마련해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자율학습과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다.[2] 그리하여 이때를 계기로 강제로 하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모습이 없어지기 시작했다.[3]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이 재임하던 1999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학생들부터 대입제도를 바꾸려고 했기에, 200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4]들(02학번)이 이해찬 1세대, 2003년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5]들(03학번)이 이해찬 2세대가 된다. 그 다음인 1985년생(2001년 고교 입학생)을 이해찬 3세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1세대와 2세대에 비해서 잘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말로는 "2002 새 학교 문화 창조' 혹은 '새 학교 문화 창조"라고도 불리운다. '새 학교 문화 창조' 1세대가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새 학교 문화(?)가 자리잡아갔다.
2. 의도는 좋았다
교육부의 방침으로 학생들은 보다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습했으나 문제는, 본격 도입된 수시 전형[6]으로도 특기 하나만 잘 하면 대학에 가는 제도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해찬 1세대가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전 몇 년과 비교했을 때 가장 어렵게 출제됨으로써 학생들의 점수가 폭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소위 불수능으로 인해, 수학능력시험 끝나기 무섭게 혼돈의 카오스가 눈앞에 펄쳐졌다. 논술준비고 면접이고 뭐고 당장 원서를 넣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다가 원서를 넣어야 될지 모르겠는 상황이 닥쳤다. 수능 성적이 좋든 망쳤든간에 그 해 수능을 봤던 모든 학생들이 말이다. 이 때 수능은 400점 만점이었는데 모의고사 대비 100점 넘게 떨어진 학생들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런 학생들이 자살을 했다거나, 자살 소동을 피웠다 거나 하는 말이 꽤 많이 오고 갔다.[7] 원서를 쓰기 위한 모든 자료 및 데이터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정말로 현실에서 펄쳐졌고, 결국 학생들은 혼돈의 상황 속에서 안전을 추구하며 하향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결과로 일어난 하향지원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2011 수능이나 2017 수능처럼 자기가 평범한 수능에서 갈 수 있는 라인보다 한두 단계 떨어진 정도면 그러려니 해도, 서울대가 인원이 남아돌 정도의 미친 하향지원이었다.[8] 수능점수 때문에 너무 쓸 데가 없어서 미친 척하고 서울대를 넣었는데 인원미달로 합격통지서를 받은 놈이 있다는 소문[9]이 돌 정도로 하향지원이 심각했다.
상당수 학생들이 미래의 진로에 큰 혼선을 빚었고, 입학 후 자신이 왜 여기 와야 했는지 모르겠다는 동기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하향지원한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재수생의 길로 들어서거나 일단 학교 써 놓고 편입학을 알아 보는 사람도 많았다. 남자같은 경우 그냥 군대 간 케이스도 많았다. 심지어는 당시 서울대 수시 합격자의 수능 커트라인은 340점 정도였는데, 그동안 서울대로 원서를 내온 학생들은 380~390점대 이상으로 점수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서울대 등 명문대에 갈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 단지 남들 점수 하락 폭 만큼만 점수가 떨어졌을 뿐인데 불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어떤 교사도 이런 결과를 예상 못 했기에, 수시에 합격하고 놀던 학생들은 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로 인한 여파는 2003년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이 뒤 몇년간 수능은 재수생들의 강세였는데, 특기 한가지만 잘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분위기 아래 공부한 것은 당시의 고등학생들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발표될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 중에서는 교육부의 그 말만 믿고 상대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느슨하게 공부를 시켰는데, 후에 입시정책 등을 알아보니 그게 아니라서 뒤통수를 맞은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2002년도 수능 이후 몇 년간 수능 본 학생들은 해놓은 공부가 없는 데 해야 될 공부는 자비심없이 많아지는 상황이 닥쳤다. 게다가 이 뒤 수능들의 난이도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2.1. 수능 실력 저하로 이어진 학력 저하 의혹
이 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난이도 조절 실패와 더불어 소위 '이해찬 세대'들의 학력저하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 때 수능 점수의 큰 특징이 재수생 강세였는데, 그 이유가 어려운 수능이라서 이런 특징이 나타났다. 재수생 강세 근거를 들어본다면 2001학년도의 물수능이 나름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수능의 난이도는 1990년대 후반부터 쉬워지긴 했지만 2001학년도 수능은 이전보다도 유례없이 쉬워서 만점자가 66명씩이나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수능이 쉽게 나오면 최상위권에서 변별력이 적어지는, 즉 누가 실수를 적게하느냐 싸움이 되어버리는 요소가 커진다. 또한 실수 안하기 싸움 요소가 커졌다고 해서 누가 잘하냐가 무의미 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점자 66명을 제외하고는[10] 0.1점 차이로 심지어 0.01점 차이로 갈리기 때문이다.[11] 또한 절대평가도 아니고 상대평가이니 내가 높은 점수가 나오면 남도 대체로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은 대학을 간 소위 최상위 실력에 실수 많이하는 성격들이 대거 반수를 선택, 2002년 수능에 응시했다. 특히 2002년 수능은 난이도가 크게 올라 이런 부류의 학생들에게 유리했으니 재수생 강세가 될 수밖에. 그리고 여담이지만 최상위권들은 만약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쉽게 출제되는 경향이여도 어려운 문제도 푸는 경우도 있다.그렇다면 그 다음 논의로 "재수생 강세 현상이 2002학번 때 유달리 심했는가?"하는 문제점이 나오는데, 수능 난이도와 점수분포가 해마다 다르므로 연도별 재수생과 고3의 점수 격차는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다. 결국, 이해찬 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학력격차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는 마땅히 찾기 힘든 실정이다. 때에는 쉬운 수능이 정착한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라 재수생들도 쉬운 수능이 익숙해진 상태여서 2002 수능은 재수생 혹은 그 이상에게도 근래 최고 어려운 수능이었다. 하지만, 재수생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렵게 공부한 사람들도 있던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이 세대는 고등학교 선생님[12]들 조차 공부 안 하는 녀석들이 왔다고 기피했던 세대였다.
이해찬 세대가 그 전후 세대보다 의미있게 대학성적이 떨어졌다거나 각종 고시, 입사시험에서 뒤 떨어진다거나 하는 통계는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정도로 능력이나 역량이 출중한 학생들은 진작에 특기 잘 찾아서 대학 잘 갔기 때문이다. 이해찬 세대의 피해자들은 소위 말하는 '헛똑똑이'들이다.
3. 최저학력의 진실
3.1. 배경
여기에서는 이해찬의 교육정책이 등장하고 이해찬 1세대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1999년경 상황을 다룬다.3.1.1. 정보 사회에 걸맞은 인재상 논의
이 당시 한국 사회는 정보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 있었다. 1990년대에 컴퓨터가 사무용품은 물론 가정용품으로도 점차 보급되었고, 특히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의 국민PC로 완연히 대중화되었다. 인터넷도 ADSL의 보급으로 속도가 느리면서도 요금도 비싼 PC통신을 대체하여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새롭게 도래할 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에 어떤 인재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다.이 논의의 핵심은 '박학다식한 인재'와 '한 분야에 특출한 천재'에 대한 논의였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어지간한 정보는 다 검색해서 찾아낼 수 있는데, 과거처럼 모든 것을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이 과연 좋냐는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 빌 게이츠 등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서는 왜 탄생하지 못하냐는 문제가 종종 제기되곤 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대체로 쓸모 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는 한 가지 확실히 잘 아는 전문가가 더 좋다는 분위기였다.[13]
3.1.2. 수능과 학교 교과서의 괴리
당시 수능은 지금 수능체제와 달리 통합교과적 문제가 상당히 많이 출제되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까지의 수능은 통합 사고를 요구하는 시험이었다. 비록 5차 교육과정에 비해 많은 과목이 각 계열 수능 필수 과목에서 제외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리탐구2 영역에서는 통합교과적 문제가 꾸준히 출제되고 있었고, 수리탐구1 영역에서는 단원간의 통합 문제가 출제되곤 했다.문제는 교과서가 여전히 각 단원, 각 과목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통합 사고를 요하는 내용이나 연습 문제 같은 것은 그 당시 교과서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교과서 중심으로만 진행되는 공교육만으로는 수능 준비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대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막상 수능시험에서 학교에서는 보지도 못한 통합교과 문제와 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접하니 수능 시험 점수가 잘 나오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수능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었고[14] 사교육을 통해 수능 준비를 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일선 학교 현장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정규 교과 과정 진도를 빠르게 진행한 후, 3학년 2학기부터는 오직 수능 대비 문제집을 교재로 수능 준비를 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수능 대비 문제집을 보조교재로 사용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했다.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가 학교 시험과는 시험 치르는 방법부터 달랐고, 통합적 사고라는 것이 몇 개월 바짝 공부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통합교과 문제는 교과서를 사용한 정규 교과 과정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유형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학교 수업으로는 수능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이었다.[15]
3.1.3. 수능 사교육 시장의 성장과 공교육 불신 문제
수능과 학교 교과서의 괴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고, 학교 교과서 중심의 공교육 시스템에서는 수능을 제대로 준비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 교과서에는 수능에서 요구하는 통합교과형 내용, 통합적 사고와 관련된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3학년 2학기까지 교과서대로 진도를 나갈 경우, 수능 준비는 아예 하지도 못 하고 수능을 봐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3학년 1학기까지 모든 진도를 다 끝낸 후 3학년 2학기에는 오직 수능 준비만 시킨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또 존재했다. 예를 들어서 수리탐구2에서 국사와 한국지리의 통합교과형 문제는 어떤 과목에서 담당해야 하고 누가 담당해서 가르쳐야 하는가?더욱이 수능은 답만 맞추면 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풀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수능에서 확률 문제가 출제된다면 경우의 수를 모조리 다 그려서 풀어도 되고 정해진 공식을 이용해서 풀어도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 공교육에서는 경우의 수를 모조리 다 그려서 풀었다고 한다면 일단 틀렸다고 간주하며 정형화된 방식으로 풀 것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이런 경우에는 이런 공식을 써서 풀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수능에 맞는 사고를 하려면 기존 공교육에서 요구하는 경직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유연한 관점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데 공교육 교과서 구성 자체가 이와는 전혀 안 맞았다. 이런 문제는 이 당시까지 여전히 공교육 시스템에서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수능이 여러 차례 실시되면서 사교육 시장에서는 수능 문제 스타일에 대한 연구가 계속 활발히 이루어졌고, 수능 사교육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기존 공교육 시스템으로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수능 대비가 제대로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수능 준비를 사교육에 크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러자 학부모들은 사교육비 부담 문제로 수능에 대해 불만이 꽤 있었다. 사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가정에서는 야간자율학습을 거부하고[16] 그 시간에 사교육을 받게 하고,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는 자식을 야간자율학습에 참여시키는 교육에서의 부의 불평등 모습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더 큰 문제는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공교육에 대한 불신 풍조가 점점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 당시 입시는 사실상 수능 성적이 모든 것을 결정할 때였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수능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사교육에 의존해야 수능 준비가 되던 상황이었으니 공교육과 학교 교사에 대한 불만, 더 나아가 경시 풍조는 날이 갈 수록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자 공교육과 사교육의 대립이 날이 갈 수록 심해져갔다. 모두가 불만을 갖고 있었고, 수능 사교육 부담은 크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공교육 불신 문제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교실 붕괴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3.1.4. 총점 위주의 입시 제도
2001년도 대학교 입시까지만 해도 많은 대학교가 총점 위주의 입시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2001학년도 입시까지만 해도 총점이 성적표에 기재됐기도 했거니와, 그리고 이해찬 1세대에 해당하는 2002년도 대학교 입시에서는 비록 총점은 성적표에 기재가 안됐지만 사실상 총점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5개 영역 반영 입시 제도를 운영하는 대학들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특정 영역 점수만 반영하는 대학 입시가 보편화된 것은 2003년도 대학교 입시부터다. 물론 2003학년도 입시에도 5개 영역 반영 입시제도가 적지는 않았다.총점 위주의 입시제도에서는 통합교과적인 문제가 출제되던 상황에서 특정 과목을 고등학생 수준에서 독보적으로 잘 하고 특정 과목이 취약한 학생이 두루두루 적당히 아는 학생보다 수능 성적이 낮게 나온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수리탐구2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이과생들은 암기할 것이 많은 국사와 지문에서 미묘한 차이를 찾아내야 하는 윤리, 문과생들은 수학이나 다름없는 물리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었다. 설령 자기가 잘 아는 과목이라 해도 자기가 취약한 과목과 통합교과 유형 문제가 나온다면? 당연히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총점 위주 입시제도에서 위의 두 사항이 겹쳐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자원이 낭비된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학생들의 불만도 상당했다. 의사가 되고 싶은 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환자 치료에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언제 발생했는지 외워야 했다. 왜냐하면 총점 위주 입시제도라 일단 고득점을 해야 원하는 의대에 진학할 수 있으니까. 국어 교사가 되고 싶은 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국어 교육에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이 몇 초 후에 땅에 떨어질지 계산해야 했다. 왜냐하면 총점 위주 입시제도라 일단 고득점을 해야 원하는 국어교육과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3.1.5. 학생 인권 문제
이해찬의 교육정책 및 이해찬 세대에 대해서 지나치게 성적에만 집중해 보는 경향이 만연해 있지만, 이해찬의 교육정책에는 학생 인권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1990년대 당시에는 오랜기간 이어져온 군사독재의 영향이 남아있어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폭력에 관대했고, 구타 및 인권 침해가 만연해 있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가혹행위와 병영부조리의 온상이었고,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을 구타했다는 이야기를 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17] 쪼인트(정강이 차기), 따귀 정도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던 폭력 행위였다. 대학교에서는 선배들이 후배들을 집합시켜 체벌과 구타를 가하고 군기를 잡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8] 그야말로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거의 없었던 사회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학교도 마찬가지였고, 이 때문에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체벌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체벌여부는 각 학교와 반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미친개, 또라이, 독사, 게슈타포, 안기부’ 등의 은어로 불리는 교사들이 보통 각 학교마다 몇명이 있기 마련이었고, 이 때문에 운 안 좋거나, 분위기가 엄격한 학교에 다니면 학창 시절 내내 별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교사에게 맞고 다녔다는 증언도 종종 있기도 했다. 현재도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은어로 불리는 교사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현재의 의미와 저 당시의 의미는 아예 다르다. 저 당시에는 자주, 그리고 지독하게 체벌을 가하는 교사들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특히 남학교에서, 그리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저런 별명으로 불리는 교사들이 여럿 존재했다. 이 당시 교사의 몽둥이 또한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흔했다. 당구 큐대는 흔했고, 마포걸레 자루, 쇠파이프, 야구 배트, 각목, 하키채, 죽도, 골프채 등 크고 아름다운 것을 사용하는 교사도 여럿이었다. 도구가 없어도 뺨을 때리는건 흔했다. 그렇다면 학생들에 대한 심각한 체벌이 단지 남교사에 의해 일어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교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여자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자들도 존재하기도 했다.
기합 역시 별별 종류의 기합이 흔히 이루어졌다. 원산폭격[19], 한강철교[20], 통구이[21], 투명의자[22], 운동장 축구골대 선착순 왕복, 오리걸음, 책상위에 무릎꿇고 있기 등 현재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할 기합이 흔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학교, 군대, 교도소가 가혹행위를 공유하던 것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체벌이 고등학교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중학교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평준화 지역이라 지역 명문고 진학에 혈안이 된 중학교에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리고 사립 남자 중학교의 경우에는 체벌량과 체벌강도가 고등학교보다도 심한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에서도 종종 이런 체벌을 볼수 있었다.
그나마 여학교에서는 체벌의 강도가 약하기는 했지만, 여학교에는 당시 교복이 계절 불문하고 치마만 있을 뿐인데[23] 회초리로 피멍이 들도록 종아리를 때리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1990년대에도 법적으로 학생에 대한 교사의 구타가 허용된 건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 중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국민학교나 중학교까지만 나온 저학력자인 경우가 많았고,[24] 교사는 학부모에 비해 평균적으로 고학력자였기 때문에 교사라고 하면 어느정도 배운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또한 이 당시의 학부모들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지 못해서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방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때문이라도 어느정도 아니꼬와도 자녀들을 돌봐줄 정도의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봐준면이 강했다. 그래서 '교사의 체벌은 사랑의 매'라는 인식이 상당히 광범위하고 뿌리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교사의 이런 체벌을 경찰에 신고해도 적당히 무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 이전에 신고한 학생에 대해 '신고한 학생이 뭔가 엄청나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교사가 학생을 그토록 때렸을 거다', '오죽했으면 교사가 학생을 인간 되라고 그렇게 때렸겠냐'라고 보는 시각이 상당했다. 경찰에 교사가 자신을 체벌했다고 신고하는 것 자체를 패륜에 맞먹는 것이라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았던 때였다. 그리고 신고하는 순간 교사들에게 찍히는 뒷감당 역시 만연했다. 부모들 역시 자식이 신체적으로 상해를 입는 수준이 아니라면 체벌에 대해 네가 잘못했으니, 혹은 공부를 못하니 혼나는 거 아니냐며 학교와 교사측을 두둔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경찰들도 보통은 학생이 잘못해서 맞은거지라고 하고 학교와 교사를 두둔했다.
여기에 고등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강제적인 아침자율학습과 야간자율학습에 참가해야 했다.[25] 이러다보니 고등학생은 새벽 일찍 등교하고, 밤 늦게 하교하는 것 즉, 취침시간 빼고는 모두 학교에서 보내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쉽게 말해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것. 게다가 방학에도 전교생이 보충수업에 참여해 오전에 수업받고 오후에 강제로 자율학습해서[26] 저녁 내지 밤에 귀가해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고3을 중심으로 토요일[27], 일요일에도 강제 자율 학습을 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이 당시에도 정상으로 여기지는 않아서 언론에서도 나라망신이라면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하기라도 하면, 대학이라도 가겠지, 좋은 직장에 가겠지, 무시 안당하겟지라는 학부모의 막연한 기대심리때문에 수고를 감수하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물론 1990년대 말 이래로 IMF 외환위기와 그 영향으로 취업문이 확 좁아졌기 때문에 대학을 나온 졸업생들도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도 찾아나설수밖에 없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교육계의 분위기와 학부모의 기대심리가 변하는데에는 오랜시간이 흘러야 했다.
3.2. 실제
3.2.1. 1999년
이해찬은 1999년에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고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대입제도를 마련해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학생 인권을 위해 체벌에 대한 가이드를 정했다. 학생 체벌에는 일정 크기 이하의 몽둥이만을 이용하고, 과도하게 체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지금 들으면 우스운 말이지만 일선 교사들은 체벌에 대한 가이드로 인해 아노미 현상을 겪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구타와 체벌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통제했는데, 이해찬이 제시한 가이드는 지금껏 사용해왔던 구타와 체벌에 비해 위력이 약해도 한참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교사들은 학생 지도에 상당한 애를 먹게 되었다. 체벌을 아예 금지하지 못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 이 시기에는 학생에 대한 교사의 체벌에 대해 '필요악'으로 보는 시선이 전사회적으로 상당히 강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폭력에 둔감한 사회였기도 하고 말이다.
반면, 이제 갓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해찬 1세대 고등학생들 입장에서는, 중학생보다 평균 체격이 커진만큼 맷집도 성장했으리라 믿고 마음껏 후려패는 고교 교사를 상상하며 진학을 했으나, 중학생 때보다 체벌이 덜해지면서 보다 자유로운 학교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또한 강제 야간 자율학습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오후 4~5시가 되면 거리로 고등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당시 대체적으로 고등학교의 기조가 1학년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고 2,3학년은 기존 하던 대로 한다는 주의로, 당시 고2~3들도 야자를 빼려 할 경우 재제 대상이었다. 2,3학년 선배들이 밤늦게 까지 야간자율학습 할 때 1학년은 4~5시에 하교한 셈
정부는 꾸준히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무시험 대학 전형'으로 바꾼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언론 모두 '하나만 잘 하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분위기를 계속 조성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이해찬 1세대 학생들이 대학에 갈 만한 특기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
이해찬 1세대부터 내신 평가에 '수행평가' 영역이 추가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교사 재량에 따라 실기평가라든가 수행평가를 실시해 성적에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의무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체능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만을 이용해 성적을 매기고 있었다. 이해찬 1세대부터는 수행평가가 내신 산정에서 필수요소로 자리잡았다.[28] 다만 수행평가는 남들 만큼만 하면 거의 만점이나 한두점 아래를 받을 수 있기에 큰 부담은 없었고 귀찮은 숙제가 늘어난 정도였다.
입시에서 내신 반영 방법은 '수우미양가'에 따른 절대평가 방식이 대세가 되고 있었다. 이 흐름을 읽은 발빠른 학교들은 이해찬 1세대에 한해 점수를 마구 퍼주기 시작했다. 여기에 수행평가가 악용되기도 했다. 교사가 실수로 중간고사 문제를 어렵게 출제해 학생들 점수가 매우 낮게 나오면 중간고사 비율을 낮추고 수행평가 비중을 높여서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남발해 중간고사의 낮은 점수를 보전해주는 식이었다. 한편 대세를 눈치채지 못한 학교의 교사들은 여전히 과거와 마찬가지로 시험 문제를 마음껏 어렵게 출제했고, 이런 학교에 다닌 이해찬 1세대 학생들의 고등학교 1학년 내신 성적은 안 좋은 편이었다.
3.2.2. 2000년
대세에 늦게 따라간 학교들도 내신 퍼주기에 돌입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노는 분위기라 해도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하면 학생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분위기가 잡히곤 했다. 그러나 이때는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내신 퍼주기에 혈안이 된 상태라 시험 기간이 다가와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안 잡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어차피 시험 문제는 엄청나게 쉽게 나올 것이고, 그나마도 기출문제를 아예 학교에서 나눠주는 경우도 흔했다. '수'를 획득하는 게 목표라면 시험 전날 적당히 벼락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러한 내신 퍼주기는 몇년 후 고교 내신이 상대평가로 바뀐 원인이 되었다.이해 실시된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수능 역사상 최악의 물수능이었다. 이 수능 시험지를 구해서 풀어본 이해찬 1세대 학생들은 자신감을 갖는다.
그리고 2000년도 당시를 보면 당시 고3은 기존대로 하자는 주의로, 당시 고3들도 야자를 빼려 할 경우 재제 대상이었다. 고1, 고2 는 오후 4~5시에 하교했었다.
3.2.3. 2001년
그렇게 정부가 '하나만 잘 하면 된다'고 홍보하며 제시한 수시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에서 드디어 이해찬 1세대는 본인들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부가 조성한 분위기와 달리 수시로 갈 수 있는 자리는 전체 정원중 30% 정도였다. 예체능이나 컴퓨터 특기자 등 원래부터 특기를 살려서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던 사람 말고는 진짜 뛰어난 무언가가 없다면 결국 국영수 위주의 기존 공부를 해야 대학진학에 유리했던것이다.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정시에서 수능 총점을 반영하는 대학교가 줄어들고 특정 영역을 반영하는 대학교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이과는 수리탐구2 영역 중 사회탐구를 제외하고, 문과는 수리탐구2 영역 중 과학탐구를 제외하는 식이었다.
뒤늦게 대학교 진학하는 방법은 기존공부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해찬 1세대 중 여러 학생들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나마 학습 부담을 줄여보고자 목표 대학을 총점 반영이 아닌 일부 영역 반영인 '타겟형 전략'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교사들은 다시 한 번 멘붕. 과거에는 총점 반영 위주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학생들은 모든 과목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수능에서 일부 영역만 반영하는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비반영 영역을 손놓아버린다. 중상위권 학생들조차 자신의 수업때 다른 과목을 공부하고 자기 과목은 아예 손놓아버리는 모습을 본 교사들은 가히 충격을 받았다. 물론 모든 학생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때는 총점 반영 대학도 많이 있었고, 우리나라 대학 입시는 점수에 따른 강제 배정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대학교가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총점 반영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중상위권 학생들이 예체능도 아니고 주요 과목에서 손놓아버리는 모습은 일선 교사를 넘어 교육계 사람들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에는 더 가속화되었다.
내신 점수가 되는 학생들은 2학기 수시 모집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2학기 수시 전형은 수능 최저 등급 조건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해는 수시 모집이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에 수능 최저 등급 조건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서울대에서 요구한 수시 최저 등급 조건이 수능 총점 기준 2등급이었다. 결과적으로 서울대를 포함, 서울 주요 대학들은 정시 입시 등급컷보다 낮은 수능 총점 기준 등급을 필수로 내걸었지만 이를 충족시키지 못해 탈락한 학생들이 꽤 있었다.
수능에 올인해야 하는 이해찬 1세대는 당연히 엄청나게 많았다. 정부의 홍보와 달리 수시 모집으로 진학하는 경우는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그 특정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수능에 올인해야만 했다. 더욱이 '내신 퍼주기'라는 대세를 뒤늦게 따라간 학교의 학생들은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능 성적이 더욱 절박했다.
하지만 이해찬의 교육 정책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던 교육부는 이 해에도 그 전 해와 마찬가지로 모의고사 실시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이해찬 1세대는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고등학교간에, 그리고 막장 고딩들에 의해 모의고사가 실시되려고 하면 교육부에 신고가 이루어졌고, 이러면 모의고사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일부 참여희망자만 따로 뽑아 휴일에 실시하는 등 파행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최악의 불수능'과 전체 집단 기준 문과는 무려 98.2점, 이과는 91.3점 폭락이었다.
이는 명백한 정책 잘못이었다.
3.2.4. 문제점
가장 먼저 당시 이해찬 1세대가 보다 자유롭고 풀어진 분위기, 공부에 너무 얽매지 않은 분위기에서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정말 무슨 유전적으로 공부에 관심이 없거나 지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정부가 대놓고 '하나만 잘 하면 대학교 갈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마치 공부를 못해도 뭐든 간에 하나만 잘 하면 괜찮은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는 환상을 계속 심어주었다.내신 퍼주기로 인한 교실 붕괴 문제는 이해찬 1세대가 2학년이 되던 2000년이 되면 모든 학교가 다 겪는 현상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래도 몇몇 특정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2000년부터는 이렇게 내신퍼주기를 안 하는 학교가 오히려 별종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해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치하고 있었다.
제일 문제가 된 부분은 모의고사 금지였다. 이것은 완벽한 정책의 실패였고, 실제로 2002학년도 대학 입시에서는 그 전에 비해 두드러지게 재수생 강세 현상이 나타났다.
위의 '배경'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수능은 교과서 중심으로 진행되는 학교 정규 수업으로는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시험 방식 자체가 다르고, 통합교과 문제와 통합사고를 요구하는 문제는 교과서에 없었으니까. 수능 스타일의 시험 및 시험 문제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모의고사다. 학교에서는 수능과 내신의 괴리를 모의고사를 통해 채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 많은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실시한 후에 수능 특강처럼 모의고사 문제를 설명하고 복습시키는 식으로 수능 준비를 시키곤 했다. 그런데 이를 전면금지시켰으니 현역들이 수능 준비를 하기 위한 선택지는 사교육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사 입장에서도 수능 문제집을 이용해 수능 준비를 시키기는 하나 학생들에게 직접 모의고사를 치러보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지도를 하는 것에 비해 효과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몇 년째 수능 난이도가 계속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와서는 심지어 수능 대비 문제집 난이도조차 낮아져버렸다!
그나마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너무 지나치게 쉽게 출제되고 심지어 역배점 논란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모의고사 전면금지로 인한 엄청난 부작용이 얼레벌레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수능은 워낙 쉬워서 이해찬 1세대가 고등학교 2학년때 중상위권 학생이 풀면 400점 만점에 300점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 하면 수학 같은 경우 아직 안 배워서 아예 건드리지도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점수가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난이도를 과격하게 높이면서 모의고사 전면금지로 인한 부작용이 확실히 드러났다. 이 해 수능에서 재수생 강세는 이해찬 1세대들이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 항변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재수생들은 사교육을 이용해 수능 준비를 하며 모의고사를 여러 번 치며 수능 스타일 문제에 적응을 꽤 한 상태였다. 반면 현역은 모의고사 전면금지로 수능 스타일 문제에 적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당연했고, 여기에 이들이 시중에서 구해서 보던 문제집조차 난이도가 너무 낮아져 있었다. 여기에 일선 공교육 현장에서는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지나치게 쉽게 출제되었기 때문에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어렵게 출제되기는 하겠지만 2000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는 어쨌든 쉽게 나올 거라 예측하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끊임없이 하나만 잘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강조했으며, 그 당시 교사 기준에서 학생 통제할 방법도 없애고 공부시킬 방법도 없애버렸는데 설마 이런 애들이 감당 못하게 끔찍하게 어렵게 내겠냐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쉬운 수능'이라는 큰 기조 하에서 약간의 난이도 상승 - 총점 평균 약 10~20점 정도의 하락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완벽히 빗나갔다.
3.3. 이해찬 1세대가 유독 유명한 이유
이해찬 1세대는 '단군이래 최저학력'으로 아직까지도 상당히 알려진 편이다. 수험생들이 자신들에 대해 최대한 비참하고 불쌍한 정책의 희생자라고 비관하는 모습, 그리고 학생들의 학력이 낮아진다는 비난은 세대를 막론하고 등장하는 모습이다.사실 고등학생들 학력이 어떤지, 실제 고등학생들이 공부하는지 노는지 일반인들은 별 관심없다. 고등학생 및 그 가족과 고교생 대상 교육계 종사자들에게나 관심있는 주제일 뿐이다.
이해찬 세대에서도 유독 '이해찬 1세대', 그리고 '단군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수식어가 널리 알려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해찬 1세대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서는 강제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29][30]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새벽에 등교해서 밤늦게 귀가하니 일반인들이 해가 떠있는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는 고등학생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은 1998년까지 하늘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는 고등학생을 보면 자연스럽게 '공부를 포기한 고등학생'으로 간주하곤 했다.
그러나 1999년 이해찬 1세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강제 야간 자율학습이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인들은 하늘에 해가 떠 있는데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등학생을 많이 목격하게 되었다. 이런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이들을 공부 안 하는 고등학생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0년에는 더더욱 많이 목격되었다.[31] 그 다음해인 2001년에는 더더욱 더 많이... 그리고 2022년인 현재는 더더욱 그러하다.[32] 그리고 이해찬 1세대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강제 야간 자율학습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많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도시락을 2개씩 쌌던 풍습도 이해찬 1세대를 계기로 사라졌다.
여기에 위의 배경 항목에 나와 있듯 이해찬의 학생들에 대한 체벌 지침으로 인해 일선 현장의 교사들은 1999년에 학생 지도에서 아노미 현상을 극심히 겪었다. 고등학교 1학년 담당 교사들 중 '못해 먹겠다', '교권이 무너진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교사들이 적지 않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반인들은 이해찬 1세대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99년 기준으로 고교 교사들은 고3에 대해서는 '너희들은 고3이다. 입시 준비해야 한다'로 학생들을 통제했고, 고2에 대해서는 '너희는 내년에 입시를 쳐야 한다. 특차는 내년이 끝이다'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1에 대해서는 마땅히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에게는 대입 이야기를 해봐야 어차피 2년 후의 일이라 와닿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교사들이 고1에 대해서는 방치를 한 감도 없지 않다.
정부는 계속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예시로 드는 것은 공부와 상관없는 것을 잘 해도 전공과 어떤 연관이 있다면 그 학과에 진학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교사고 학생이고 이해찬 1세대에 적용될 입시에 대해 감도 못 잡는 상태가 무려 2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전은 일반인들에게 이해찬 1세대는 공부를 안 한다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은 내신 퍼주기로 인한 교실 붕괴였다. 정도가 하도 심각해서 종종 보도되곤 했다. 뉴스 내용에 보도되는 실태는 사람들에게 '저런 문제로 시험치는 애들이 공부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어?'라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수능은 통합교과 문제와 통합사고적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모의고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막연히라도 알고 있었다. 모의고사 전면금지가 알려지면서 '그러면 수능 준비 어떻게 해?'라는 의문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그리고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는 전 해 수능에 비해 사상 초유의 점수 대폭락이었다. 마치 불경기 주식 하락장처럼 수능 평균 점수 하락폭 및 1등급 커트라인 점수는 새로운 뉴스가 나올 때마다 계속 떨어졌고, 이는 수능 성적표가 배포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수능 성적표가 배표된 날 이 예상 점수들은 바닥을 찍었다. 실제 수능 평균 점수 하락폭과 1등급 커트라인 점수는 각종 기사를 통해 보도되던 추정치보다 더 낮았다. 이로써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 '이해찬 1세대 = 단군이래 최저학력'이라고 확실히 각인되고 만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던 이해찬 1세대의 모습은 왠지 공부를 못 할 것 같았는데, 수능 점수가 실제로 전년도에 비해 무섭게 폭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해찬 1세대는 수능 총점 반영 입시제도가 아직 보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33] 타격이 컸지만, 다음해인 2003학년도 입시부터는 특정 영억 점수 반영 입시제도가 보편화되면서 수리탐구2 영역에 대한 학습량이 줄어들어 고3 수험생과 일선 학교 교사들이 그나마 대책을 세우고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다. 만약 이해찬 2세대가 대학 입시를 치를 때도 수능 총점 반영 입시제도가 보편적이었다면 이해찬 1세대와 더불어 입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이해찬 2세대 또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이해찬 2세대부터는 특정 영역 점수 반영 입시제도가 보편화되면서 문과는 수리탐구2 과학탐구, 이과는 수리탐구2 사회탐구를 빠르게 포기하고 그 시간을 다른 영역 공부에 쏟아붓는 식으로 대응해 타격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이해찬 2세대 입시에서도 사실상 총점 반영 역할을 하는 5개 영역 반영을 하는 곳도 아직은 상당히 있었다.[34] 이러한 이유로 이해찬 1세대와 그 이후 이해찬 세대들의 이해찬 세대에 대한 서술 및 당시에 대한 회고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실제로 이해찬 1세대 대학교 현역 입학생들 중에는 다음해 입학한 이해찬 2세대 후배들의 입시 준비 경험 중 과탐/사탐을 완전히 버리고 입시 준비했다는 말에 정말 인생 풀배팅 도박 올인에 가깝게 입시 준비했다고 여기는 일이 꽤 있었다.[35] 그래서 뭉뚱그려서 '이해찬 세대'라고 하기 보다는 정확히 '이해찬 1세대'라고 한정지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36]
4. 이해찬이 남긴 것들
기성언론, 교사들, 그리고 일방적으로 그런 주장만 들어온 학부모나 학생[37]의 인식하는 "단군이래 최저학력"은 지나치게 축약돼서 제대로 된 내막을 전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현재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이해찬 세대들이 기초 맞춤법에서 최저점을 받는 점이라던지.이해찬의 정책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당시의 정책이 삽질만은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일단, 옛 본고사 시절과는 달리 시험과 경시대회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전문성과 창의성을 배양하는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서울대학교에 가는 1%만을 위해 나머지 99%가 좌절하는 이른바 "최상위권을 위한 교육"보다는, 제각기 다른 특기를 가진 학생들에게 다양한 진로를 열어주는 교육이 더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는 있었다. 다만 그 잘한다는 기준이 학생들 생각보다 한참 높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연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안도 미키 정도는 돼야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뜻했으니까. 그리고 김연아급의 실력이 있어도 결국 외국어를 못 하면 답이 없는데 코치의 훈련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해찬 세대의 교훈은 진짜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길이었음을 상기시켜준 것이었다.
물론 인서울과 지잡대의 간극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까닭이 유독 이해찬 세대에서만 기인하는 문제점은 아니다. 이러한 양극화는 특정 세대의 부진이 아니라, 김영삼 정권 시절에 시행한 대학 설립 자유화가 더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인원제한에도 대학생이 되면 대기업 취업이나 사회적인 출세가 쉬워진다는 이유로 입시경쟁이 과열화되어가자 대학정원을 늘린것이지만, 그 부작용으로 지잡대라고 불러지는 어중이 떠중이 대학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그 결과로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수험생들의 1/3만 진학할 수있던 대학교를 성적이 중위권, 혹은 중하위권인 학생들도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었지만, 이러한 대학진학률 상승과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단순히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취업에 메리트가 있던 시대는 지나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자연히 '대학 진학'보다는 '어떤 대학'이냐를 지상과제로 삼기 시작했다.[38] 이처럼 개개인의 능력보다[39] 명문대학 출신 졸업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병폐개선을 선행하지 않고서야, 정책의 실패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중이던 시절 지방에 사실상 무조건적으로 부실대학 설립을 남발한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해찬 이외의 다른 교육부 장관의 책임도 있다.
이해찬 시절의 정책으로 수능 영역별 반영 덕에 상대적으로 수험 부담이 경감되기는 했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정작 성실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불이익을 본다는 역차별 논란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농어촌은 교육여건이 매우 낙후되어 있는 까닭에 특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언론의 비판은 크게 두가지 논조를 띄었는데, 첫째, 학력저하로 신입생들이 대학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수능의 변별력을 강화해야한다는 것. 둘째, 특목고 학생들이 내신의 과도한 반영으로 말미암아 대학 진학에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나름대로 당위성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대학의 서열화'를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40]
이해찬 시절의 정책이 취지상으로나마 '성적보다 특기를 존중하는 입시'를 표방했던 점에서는 의의를 삼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정책이 갖는 한계는 명확하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이 역시도 결국 '입시'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탓에, '학업 위주의 입시' 대신 '특기가 포함된 입시'로 바꿔놓았을 뿐이라는 비판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특기만 가지고 대학에 들어 갈 수 있는 학생 자체가 적었다. 그 탓에 사실상 특기는 입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군다나 수능 문제의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모의고사보다 전체 평균이 60점 가량 하락하였고, 특히 중상위권 학생들의 타격이 심하여 수능이 끝나기 무섭게 혼돈의 도가니탕.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입시제도에 피해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린 셈이다.
게다가 '성적보다 특기를 존중하는 입시'를 표방했지만 이후 입시 전형의 변화를 살펴보면 오히려 '특기도 필요한 입시'가 되어버려서 고교생들이 스펙 관리를 위해 사교육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논술 또한 마찬가지로, 정시에서 논술 비중이 줄어든 것은 이해찬이 의도해서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해찬 세대들이 고3으로 대학 입시를 치를 때 이해찬의 의도와는 반대로 수능이 꾸준히 어렵게 출제되어 변별력을 가졌기 때문에 각 대학들이 정시에서 논술 비중을 정부와 대립해가며 무리하게 높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정시에서 논술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은 이해찬 정책의 긍정적 결과로 보기 매우 어렵다. 참고로 이해찬은 쉬운 수능을 주장했으며, 그 결과의 정점은 초특급 물수능인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었다. 더욱이 수시에서는 논술이 중요해져서 논술에 대한 사교육 의존도가 꾸준히 높아져만 갔다. 이런 문제점이 누적되다 한 번에 대폭발한 것이 바로 2008년도 수능등급제 사태다. 결과적으로는 정책시행 이후 온갖 영역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인 사교육이 범람했고 소득별 학력격차도 벌어졌다.참고자료.
이해찬이 남긴 것 중 좋게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학생들의 수능 준비 학습 부담을 줄여주었다는 점이다. 수능 총점 반영 입시제도 중심에서 특정 영역 점수 반영 입시제도로 바꿈으로써 수리탐구2 영역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과생이 국사, 윤리로 머리를 잡아뜯고 문과생이 물리, 화학 때문에 머리를 움켜쥐며 절망하는 일은 이해찬 2세대 - 200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사라졌다.[41][42] 이때도 역시 수능에 응시하면 제2외국어 영역을 제외한 모든 영역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특정 영역 점수 반영 입시제도가 확실히 안착하면서 이과생이 사탐영역에, 문과생이 과탐영역에 목매달고 공부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아예 없어졌다.
두 번째는 학생 인권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이해찬 세대의 학력논란 때문에 이해찬 세대와 이해찬의 교육정책에서 학생 인권 향상에 대한 부분은 지나치게 간과되는 경향이 있지, 학생 인권 개선이 오히려 크고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간 심각한 수준으로 자행되던 학생 체벌과 구타에 대해 지침을 내려 구타와 체벌을 크게 줄였기 때문이다. 지역별, 학교별로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때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학생 인권 개선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해찬 세대 이후로도 한 동안 체벌과 두발단속은 만연해있었으며, 대다수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지게 된것은 2010년대 중반이 되어서부터였지만, 적어도 이전시기보다는 체벌이 줄어들고, 1990년대에 비해 두발제한이 완화되었다는 점[43]은 업적이라 할 수는 있다.
5. 이해찬의 해명
그는 정책통임을 자임하면서 교육부 장관 시절 개혁을 업적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많은 이해찬 세대가 “우리 같은 피해자를 만든 것이 업적이냐. 절대 대통령은 안 된다”고 난리다. 이 전 총리는 최근 언론 인터뷰 등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방향이 옳았다” “수능 내신 면접을 다양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는데 언론이 특기 하나 있거나 한 과목만 잘하면 대학에 간다고 잘못 보도했다” “공부 못 했던 일부의 넋두리고, 학력 저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 '이해찬 세대'와 화해하시죠 (2007.07.18, 한국일보)
- '이해찬 세대'와 화해하시죠 (2007.07.18, 한국일보)
6. 일본의 경우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유토리 세대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전인적인 교육을 실현하자는 취지 하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인데, 물론 이 경우도 취지는 좋았으나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한국과 같은 극심한 입시 혼란은 없었으나 대신 필수과목에 대한 이수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심지어 일본어에서 필수인 한자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학생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고 하며 정서적으로도 이른바 잇쇼켄메이라는 장인정신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들의 통념을 충족하지 못하여 "권리만 알고 의무는 모른다", "직접적인 대화를 꺼리고 휴대기기에만 의존한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모른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 사회마냥 튀는 것에 관대하거나 이성적인 토론을 중시하는 쪽으로 사회 흐름이 변한 것도 아니다.다만, 이해찬 세대는 고작 3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아 당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중반 태생 및 그 부모들을 제외하면 영향이 미미한 것에 비해, 유토리 교육은 이보다 몇 배는 훨씬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 2010년이 들어서야 겨우 반발에 밀려서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아직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또한, 유토리 세대란 단어의 의미까지도 보다 확장되어서, 흔히 한국에서 쓰이는 초딩이라는 비아냥처럼 기초 문법도 모른다거나 기본 상식이 부족하거나 하는 상대에게 '너 유토리 세대라서 가방끈 짧지?'하는 식으로 많이 쓰인다.
이해찬 세대와 유토리 세대는 어감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해찬 세대는 "시대를 잘못 만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수험생들이 불쌍하고 딱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만 유토리 세대는 "당국에서 방임해주니까 좋다고 놀더니만 결국 국가경쟁력은 국가경쟁력대로 떨어졌네, 꼴 좋다"고 보는 조롱조의 뉘앙스가 훨씬 강하다. 실제로 일본 웹상에서 유토리라는 표현은 멍청이라는 말과 동급이다. 이해찬 세대는 정책적 혼선으로 인해 험하게 구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자기발전 및 미래에 대한 진취성을 잃지는 않았고 이해찬 세대가 유토리 세대에 비하면 '찰나'였던 것이 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번역물에서는 유토리 세대를 그대로 유토리라 표기하는 경우와 이해찬 세대라고 옮겨 놓은 경우가 반반이다. 다만, 이 번역은 당연히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토리와 이해찬 세대의 뜻은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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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그 이전에도 과도하게 체벌하지 말아야된다는 지시가 여러번 있었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효율성을 이유로 대다수가 무시되었다. 이해찬이 유명한것은 체벌제한을 적용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 당초에는 중학교에서도 시행되던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까지 폐지하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려 하였으나 교육계의 반발에 부딪혀서 실현되지는 못했다.[3] 2000년대 들어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부활한 학교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4] 일반적으로 1983년생이며, 1999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5] 1984년생이며, 2000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6] 수시전형 혹은 그와 유사한 제도는 1997년 김영삼 때 생겼고, 2002학번 때에 본격적으로 정형화되어 시행되었다. 포항공대는 도입 첫 해인 1997년 부터 서울대는 1998년부터 이미 현재의 수시제도와 유사한, 학생부 위주의 고교장추천전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서울대 60년사" 참조) 연세대 역시 2001학년도 입시계획에서 수시모집으로 정원의 30퍼센트를 뽑는다고 명시하고 있었다.[7] 남자 같은 경우 졸업식에 안 나오거나 소식이 끊기면 자살한건지 군대 간건지 몰랐다.[8] 당시 미등록률이 13.4%였다고 한다. 정상적이라면 미등록률 0%는 물론이고, 가고 싶어도 경쟁자들이 너무 강하고 많아서 못 갔을 텐데 말이다.[9] 2002년 당시 서울대는 정시 최저학력요건(총점 1등급 혹은 총점 2등급 중 2개 영역 이상 백분위 97 이상)이 있어 설사 미달이 나도 그 이하 성적은 붙을 수 없었다. 미친듯한 하향지원으로 인해서 '쓸 수는 있지만 평소라면 붙을 수 없는 다소 낮은 성적'으로도 붙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몇몇 서울대 학과는 지원자가 너무 없어서 심각한 문제가 됐었다.[10] 2001학년도 수능 응시인원이 85만명이였으니 만점자는 비율로 따져봤을 때 0.007% 밖에 안된다.[11] 지금은 소수점이 없어졌지만 당시만해도 소수점이 있었다[12] 각 고등학교마다 고3을 전담마크 하던 선생님들이 알아서 1,2 학년으로 도망가 다른 선생님들한테 폭탄돌리기를 시전한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13] 사실 이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진행중이다.[14] 사실 이 부분은 수능 포기라기 보다는 대학입시 자체를 포기한 경우가 더 많다고 봐야하는 것도 있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대학 입시의 관문인 수능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때문이다[15] 물론 이 부분은 일점이라도 더 또는 일등이라도 더 올려야 되는 입시 경쟁의 현실상 그럴수 밖에 없기도 하다[16] 물론 이건 부유한 집의 자녀들한테는 강제 야간자율학습을 열외시켜준 일종의 편애행위가 반영된것이기도 하다.[17] 세진 컴퓨터가 뉴스에 나온 예였고, 직장 상사가 본인도 불편함에도 군기잡기용으로 하급 직원들을 일부러 야근시킨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18] 물론 학교에 따라, 그리고 한 학교에서도 학과나 동아리 동문회 각종 모임에 따라 다르기는 했다.[19] 머리와 두 발로 엎드리는 체벌[20] 일렬로 엎드리게 해서 뒷사람 어깨에 두 발을 올리게 하는 체벌[21] 누운 상태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펴서 45도 각도로 드는 체벌. 엎드려 뻗쳐의 반대 개념이다.[22] 아무 것도 기대지 않고 서 있는 자세에서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취한 후 다리를 거의 90도로 굽히고 서 있게 하는 체벌[23] 지금은 여학생도 본인이 원하면 교복 바지를 입을 수 있게 하는 학교도 많다. 다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을 걸쳐 교복을 재도입했을 때는 여학생이 따로 체육복을 입는게 아니라면 바지를 입는 것을 상정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교복자율화 시대에도 바지착용을 금지해서 단속했던 여학교들이 많았었기 때문이었고, 이것이 교복재도입기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문제제기는 있었지만 당장 바가지 문제와 재질문제도 제대로 해결안되는 판에 바지를 입는다느니 안입는다느니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24] 1940~60년대 초반생들이 그 당시의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였는데, 한국에서 중학교 진학이 대중화된것은 1970년대 초반, 고등학교 진학이 대중화된것은 1970년대 중후반의 일이었다.[25] 게다가 그 당시 명문고 진학에 혈안이 된 일부 사립중학교에서도 야간자율학습이 실시되기도 했다(물론 고등학교에 비하면 별로 없었고 끝나는 시각도 이르긴 했다.).[26] 오후 자율학습 즉 오자라도 불리운다. 야자의 방학 버전.[27] 이 때는 놀토도 없어서 매주 토요일에도 오전에는 정규수업이 있었다. 물론 이 때도 오후, 야간에 자율학습을 시켰다.[28] 이로 인해 2002학년도 대학 입시에서는 재수생에게까지 비교내신을 적용하는 대학이 많이 있었다.[29] 지금도 일부 기성세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30] 실제로 이 시기까지는 6시 대에 등교하는 고등학교가 많았고 야자까지 심한 학교는 24시 즈음에야 마쳤다.[31] 이때 고2까지도 확대되었기 때문이다.[32] 물론 현재는 나와서 학원이나 독서실, 집으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으니 밖에 나와 있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한다고 보긴 힘들다.[33] 물론 2002학년도 입시부터 수능 성적표에는 총점이 기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5개 영역 합산이 사실상 총점 역할을 했다고 볼수 있다.[34] 그나마 천만다행인 이유는 사실상 '수능=입시'이던 시절, 2001년도 수능은 물수능으로 난리났고, 2002년도 수능은 이해찬 1세대로 난리나서 2년 연속 고3 수험생들의 대학교 입시가 사실상 엉망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나마 수습된 것이 2003년도 입시다.[35] 이해찬 1세대 중에 과탐/사탐을 완전히 버리고 입시 준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는 수능 5개 영역 반영 입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본인이 목표했던 대학보다 형편없이 낮은 대학교로 진학하거나 재수해야 하는 차선책 전혀 없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에 가까웠다.[36] 실제로 이해찬1세대들은 자신들의 입시 경험에 대해서는 바로 아랫세대인 이해찬 2세대보다 바로 윗세대인 2001년도 수능을 치르고 입학한 선배들과 말이 더 잘 통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실제 당시 대학교 입시를 보면 이해찬 1세대가 겪은 입시제도는 이해찬 2세대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바로 위인 01학번이 겪은 입시제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01학번이 겪은 입시제도에서 특차가 빠지고 내신에서 모든 과목에 수행평가가 존재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01학번이 겪은 입시제도와 사실상 똑같다. 그나마 수행평가도 선택사항에서 의무사항으로 바뀐 거고 이해찬 1세대가 경험한 수행평가란 기존에 해오던 숙제, 쪽지시험이 이름만 바뀐 정도였기 때문에 '특차' 그리고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강제 유무 여부만 다르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여부는 학교마다 또는 담임마다 그리고 학생 마다 차이가 있었기는 했지만[37] 특히 상위권 학생들. 이들이 훗날 인터넷이나 다른 곳에서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나 교육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계급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곳이라던가.[38] 사실 어떤 대학이냐는 그 전에도 그랬다. 지방대가려면 가지도 말라는 말은 1980~90년대 초반에도 있었고, 이 당시에도 SKY에 집착하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 학교임원들은 많았고, 자기네 학교 학생이 SKY나 지거국급 대학에 진학하면 자랑스럽게 현수막을 내거는 등 띄어주는 분위기는 이 당시가 훨씬 심했고, 밀어주는 현상도 매우 심해서 사기꾼들도 학력을 사칭했던것은 있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대학에 갈수있는 사람이 수험생의 1/3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지방대를 졸업하더라도 대기업이나 중견기업, 공무원에 취직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뿐이었다.(하물며 상고를 졸업하면 직급이 낮아도 은행원도 할 수있던것이 당대의 상황이었다.)[39] 물론 그 능력마져도 스펙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갇혀있는게 현실이기는 하다[40] 수험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인정하고 들어 갈 수 밖에 없다. 학교별 난이도 및 경쟁이 다른 상황에서 학업성취 평가의 공평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내신때문에 불리해 진게 문제였다. 당장의 대학 서열이 가지는 속성때문에 누구나 소위 상위권대학으로 진학하려 하지, 정책따라 손해 감수하면서 차후 불리해질 진학을 하고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수험생은 실험용 쥐가 아니다.[41] 이해찬 세대라고 하면 이해찬 1세대만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2] 덤으로 문과 교육과정에서 미적분을 제외한 것도 원래 이 시기에 일찍 시행할 예정이었다.[43] 2000년 두발자유화가 이슈화되면서, 대다수 중고등학교에서 두발규제가 완회되었다. 물론 두발규제가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그 기준은 1982년 두발자유화 조치와 비슷한 수준으로 길이 규제를 좀 푼 정도였다.[44] 문재인 정부 들어 교육부에서 일제고사를 대책 없이 폐지시켜 학생들의 기초학력 미달에 일조하였음에도 책임을 학부모와 기간제 교사 기용으로 전가하기 급급하여 교육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