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5:15:55

정진석(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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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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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브뤼기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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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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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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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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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스테파노 정진석 니콜라오 염수정 안드레아 유흥식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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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청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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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니콜라오
鄭鎭奭
Nicolas Cheong Jin-seok | Nicolaus Ziong Jinsok}}}
사제급 추기경
파일:정진석 추기경.jpg
출생 1931년 12월 7일
경기도 경성부 수표정
(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사망 2021년 4월 27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바티칸|]][[틀:국기|]][[틀:국기|]] (복수국적)
재임기간 제2대 청주교구장
1970년 10월 3일 ~ 1998년 6월 28일
제12대 서울대교구장
1998년 6월 29일 ~ 2012년 6월 25일
제10대 평양교구장 서리
1998년 6월 29일 ~ 2012년 6월 25일
추기경[1]
2006년 3월 24일 ~ 2021년 4월 27일 (15년 3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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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B0039><colcolor=#fff> 사제수품일 1961년 3월 18일
주교임명일 1970년 10월 3일
2006년 3월 24일 추기경 임명
장례미사 2021년 5월 1일
안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용인공원묘원
학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명예학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신학 / 학사)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법학 / 석사)
본관 동래 정씨[2]
파일:attachment/jjsnicolas02.jpg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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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가계2.2. 신학교 입학2.3. 성직자로서의 삶
2.3.1. 청주교구장 시절2.3.2. 서울대교구장 시절. 그리고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추기경
2.4. 학자로서의 삶2.5. 원로사목자로서2.6. 건강 악화로 입원치료2.7. 사망
3. 논란 및 비판
3.1. 김대중 토마스 모어 봉성체 요청 거부3.2. 금전 착복에 대하여 제기된 의문3.3. 전종훈 시몬 신부 안식년 인사 발령 논란3.4. 2010년 4대강 정비 사업 관련 발언 파문3.5. 명동성당 재개발과 4대강 사업 빅딜 의혹
4. 기타
4.1. 젊은 시절의 일화들4.2. 젊은 '한국인' '교구장' 주교4.3. 최장기 교구장 재임4.4. 은퇴 시점이 만 80세를 넘긴 이유4.5. 장기기증과 각막기증 서약4.6.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4.7.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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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2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좌 착좌
제2대 천주교 청주교구장, 제12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제9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봉직했던 한국 가톨릭 성직자이다.

2. 생애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회고록 '추기경 정진석'

2.1. 출생과 가계

1931년 12월 7일, 경기도 경성부 수표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그 당시에는 진짜 보기 드문 무매독자로 태어났다. 정진석 추기경의 모친 전주 이씨 이복순(李福順) 루시아 여사(1909. 3. 5 ~ 1996)[3]는 태몽으로 머리에 주교관(Mitra)을 쓰고 손에 지팡이를 든 어느 청년이 "어머니, 저 주교 됐어요."하고 말하는 꿈을 꿨다고 한다. 1998년 가톨릭신문 보도

그의 부친인 정원모(鄭元謨, 1909. 10. 9 ~ ?) 갈리스도는 1909년 10월 9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장흥고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1927년 4월 여순공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1년이 못 되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거주하였다. 1931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공산청년부 조직원이 되었으며, 학생부 책임비서로서 노동절 기념행사를 위한 격문을 배포하였다가 그해 5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6월경에는 용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 1934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파일:정원모(1931년).jpg
1931년 조선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검거된 정진석의 부친 정원모의 사진.
좌측·중간 : 1931년 6월 15일, 경성부 용산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우측 : 1931년 7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5년 출옥 후 간도로 건너가 1937년 8월부터 동아일보 도문(圖們)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부친과 함께 함경남도 원산부로 가서 건어물을 판매하는 개인사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1944년 12월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다. 갖은 고문을 겪고 1945년 여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그해 9월 월북하여 줄곧 북한 정부의 산업관계 행정부서에서 '흑색금속'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과장 직을 역임했으며, 정진석의 큰아버지 정윤모(鄭允謨, 1904. 5. 27 ~ 1981. 2. 20)씨 등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서울 점령 직후에는 '시찰대' 명목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친·인척들을 만나 자신이 "북한의 따발총을 개발하는 데에 여러 가지로 기여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1953년 5월 화학건설공업성 화학공업국장, 1955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차관급에 상응하는 화학공업성 부상(副相)에까지 올랐으나, 이후 1957년 5월 시멘트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고 1959년 공직 박탈, 즉 숙청되었다. 아마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 빨치산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1956년 있었던 8월 종파사건 이후 숙청 행렬을 피해가지 못한 듯 보인다.#

이러한 가정사는 정진석 추기경이 2006년 추기경으로 서임되기 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정 추기경이 젊을 시절 한국 사회에서는, 본인은 전혀 그런 성향이 없다 하더라도 가까운 가족이 월북을 하게 되면 (심지어 억울하게 납북을 당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연좌제가 적용되어 사회생활에서 대단히 큰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다. 정 추기경은 31년생이고 아버지가 1935년도 간도로 건너가서 활동하고 광복 후 월북해버렸으므로 불과 3-4세 무렵에 실질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상태로 자라났다. 가족들도 정 추기경이 받을 사회적 불이익을 염려하여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만 알려주었고,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1996년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정 추기경은 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성인이 되고 호적 초본을 떼다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정 추기경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006년 2월 28일 프레시안에서 최초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서울대교구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아버지가 정원모 씨가 맞다고 확인하였고 정 추기경 역시 이 보도가 사실이라며, 3월 8일 동아일보에서 소설가 최인호와의 대담을 통하여 본인이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경위, 아버지에 대한 느낌, 평양대교구장 서리로서 갖는 생각 등을 담담하게 술회하였다.

2.2. 신학교 입학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장래희망이던 그는 경성부 계성국민학교중앙중학교[4]를 거쳐 1950년 6월[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발생한 6.25 전쟁은 그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6], 결국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6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을 보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7], 그 사건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의 흑역사로 기록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8] 당시 생존자 중 하나였다.

정 추기경이 6.25 전쟁 때 미군 통역병으로 근무하던 중 부산광역시에서 김영식 베드로 신부(1909~1963.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만나 고아원 운영을 3년 동안 도왔는데, 이것이 정 추기경의 사제성소가 되었고 이후 신학교 입학을 확실하게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정 추기경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어머니 이복순 루치아 여사의 간곡한 부탁 덕분에 당시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로부터 신학교 입학을 허용(관면)받았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2.3. 성직자로서의 삶

사제수품 후, 중림동 약현성당 보좌신부로 시작하여 1968년 로마 성 우르바노 대학원에 유학, 2년 뒤 같은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2.3.1. 청주교구장 시절


귀국 직후인 1970년, 만 38세의 나이로 천주교 청주교구의 제2대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주교 서품식의 주례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맡았다. 노 대주교는 과거 정 추기경의 세례성사와 사제 서품식도 집전한 바 있다.[9]

그는 28년 동안 청주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사목을 수행하였다. 그가 교구장에 착좌할 당시 청주교구는 미국인 사제가 19명이었던 반면, 한국인 사제는 6명에 불과했다. 이에 그는 '교구의 한국인 사제를 100명까지 늘리겠다'고 결심했고, 훗날 청주교구장을 떠날 시점에는 청주교구의 한국인 사제가 106명으로 늘어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정 추기경은 이를 하느님의 도움 덕분이라고 회고하였다.

또한 청주교구장 시절 오웅진 사도 요한 신부를 물심양면 도와 꽃동네의 창립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오웅진 신부는 2021년 5월 1일 정 추기경의 장례미사에도 참석했다.

2.3.2. 서울대교구장 시절. 그리고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추기경

만 66세였던 1998년 6월 29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후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착좌하면서 28년만에 본인의 고향인 서울 명동성당으로 다시 돌아온다.

2002년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상실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에 새 추기경이 필요하다"고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이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 2월 22일 만 74세의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동년 3월 24일 정식으로 서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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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은, 교회법 제401조 1항에 의한 교구장 주교의 통상 은퇴 연령이 75세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정진석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이 발표되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이제야 다리를 뻗고 맘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이 얘기는 후에 김수환 추기경이 죽은 2009년 장례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강론에서 다시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김수환 추기경이 오랜시간 새 추기경의 탄생을 염원해왔던 것이다.

서울대교구장으로서 교구 살림을 챙기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강남의 하이닉스 반도체 사옥을 구입한 후 임대로 전환하여 임대수익을 벌여들였고, 서울성모병원을 새로 지었으며, '미사예물공유제도'라는 서울대교구만 시행하는 독특한 제도도 만들어 교구가 윤택해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독단적이고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갈등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납골당 사업에 관심을 보여 태릉성당에 납골 시설을 조성하였는데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하였고 봉헌미사 집전을 위해 방문한 정진석 추기경이 탑승한 차량에 주민들이 계란을 투척하기도 하였다.(YTN뉴스) 또한 교계 안팎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주교좌 명동성당의 재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교구청 건물의 신축과 상업시설을 조성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지만, 원로신부들로부터 '왜 성당 재개발로 성역을 훼손하려 하느냐'는 비판 발언을 듣는 등 교구장으로서의 위신만 실추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재임하던 중 2010년 12월 4대강 사업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입장과 상반된 주장을 언론에 표명했다가 교계 내의 극심한 반발을 맞게 되었고, 원로사제 25명으로부터 교구장직에서의 사퇴를 촉구받기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후술.

2011년 중순에 접어들면서 정진석 추기경의 사임이 확실시된다는 관측이 언론 보도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정 추기경이 그해 12월이 되면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이 없어지기 때문에 나온 관측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5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정진석 추기경의 사임 신청을 받아들이고 후임 서울대교구장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이자 총대리인 염수정 안드레아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동년 6월 25일 염수정 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과 함께 은퇴했다. 이렇게 하여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 27년 9개월, 서울대교구장 13년 10개월, 도합 41년 7개월의 교구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2021년까지의 한국 천주교 모든 주교들 중 교구장 재임 기간으로는 최장기 재임 기록을 세웠다.

한편, 추기경직은 교황과 마찬가지로 한 번 서임된 다음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한다. 물론 서울대교구장 사임 시점에서 이미 만 80세를 넘었기 때문에 교황 선출권(콘클라베 참여권)은 소멸된 상태였다.

2.4. 학자로서의 삶

교회법 분야에서 한국 천주교의 손꼽히는 권위자이며, 가톨릭 『교회법전』 전집의 번역과 『교회법 해설』(2002년 전집 완간, 2020년 개정판 출간) 집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진석 추기경의 대표적 업적이다.

추기경 정진석 (41)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사제 수품 후 1년에 1권씩 집필한 '주님의 작가'

신학생 시절부터 50권이 넘는 저서들을 번역 및 출간했다. 신부가 되기 전, 부제 시절, '만일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알기만 하다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대구대교구 박도식 도미니코 부제와 "사제품을 받으면, 1년에 1번씩 교리와 관련된 책을 펴내자"라는 약속을 하였고, 두 사람은 그 약속을 지켰다. 박 신부는 2003년 죽기 전까지 <천주교와 개신교>[10], <천주교 교리>, <혜숙이와 박 신부>, <결혼성소와 수도성소> 등 수없이 많은 책들을 썼다. (<추기경 정진석> 참고) 정 추기경이 일생 동안 꾸준히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던 배경 가운데 하나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직을 떠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매년 1권씩 저서를 발간했으며, 건강 악화로 입원하기 이전인 2020년에는 무려 2권을 발간하였다.

그의 유작은 6.25 전쟁 당시 미 육군의 군종 사제로 활동한 에밀 카폰 신부의 전기 개정판 번역이다. 이 책은 과거 정 추기경이 신학생 시절인 1956년에 처음 국내에 번역했고, 사망 2개월 후인 2021년 6월에 출간되었다.

2.5. 원로사목자로서

청주교구 꽃동네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2015년 꽃동네에서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센터'를 완공하였을 때 방문하여 기념미사를 주례하였다.

2017년에는 꽃동네에서 꽃동네낙원묘지 내에 무연고 노숙인 사망자들을 위한 유골 봉안시설을 건립하며 봉안당의 이름을 '추기경 정진석 센터'로 명명하였고 정진석 추기경이 직접 방문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2018년에는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한 지 68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수여 배경에는 최창락한국은행 총재가 서울대에 보낸 추천서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졸업식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정진석 추기경 대신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허영엽 마티아[11] 신부가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2018년 8월 15일, 정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추기경 정진석>이 출판되었다.

2020년 7월 정 추기경의 모교인 중앙고등학교에 특별서가를 조성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이하여 59번째 저서인 <참 신앙의 진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존 오브라이언 신부의 <억만인의 신앙>이라는 책을 정 추기경이 새로 편역한 것이며, 정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기 이전인 1960년 처음으로 편역하였다. 정 추기경은 사제서품식에서 땅바닥에 엎드려서 성인호칭기도를 할 때 '한국에 가톨릭 신자 수가 늘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진정으로 바쳤었다고 한다. 존 오브라이언 신부가 이 책을 처음 편찬하였을 때 신자 수가 늘었는데, 정 추기경은 자신이 쓴 번역판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2.6. 건강 악화로 입원치료

2021년 2월 28일 정진석 추기경이 최근 건강 악화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진석 추기경은 과거 지병[12]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저술활동을 이어왔으나 지난해부터 건강 문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고 2월 21일 몸에 많은 통증을 느껴 주변의 권고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추기경은 병세가 위중한 상태이며 서울대교구 측에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다고 밝혔다.정진석 추기경 입원 기사 정 추기경은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던 2006년에는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서약하였으며, 지난 2018년에는 노환으로 맞게 되는 자신의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다면서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였다.[13] 2월 25일 서울대교구염수정 추기경은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께서 병환이 위중하여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십니다."라는 공문을 전달하여 정 추기경의 입원소식을 전하였고, 병세가 위중한 정 추기경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14]

2021년 3월 1일, 정 추기경이 오전 8시 40분 사망했다는오보가 나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정 추기경의 사망에 대한 긴장감은 최고에 달했었는데, 당시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들과 사제들은 "정 추기경이 임종에 임박했다"는 의료진의 호출을 받고 병실로 달려가 정 추기경의 침대 주위에서 임종기도를 바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SNS에서는 "정 추기경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추모 메시지가 떠돌고 있었다. 또한 정 추기경의 출신 본당인 명동성당에서는 전면에 휘장이 걸리고 성당 내부에는 유리관을 준비한 상태였다. 임종기도를 바친 지 1시간이 지났을 때쯤 정 추기경의 떨어졌던 혈압, 맥박 등 수치가 점차 올라갔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염 추기경과 사제들은 겨우 교구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정 추기경의 혈압, 호흡, 맥박 등 수치들이 점차 좋아지면서 상태가 호전되었고, 정 추기경은 "천국의 문턱에 다녀왔다"면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준 신자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관련기사

3월 3일에는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마티아 신부가 페이스북을 통해 1주 전 정진석 추기경의 입원 과정,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으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았으며,[15] 병상에서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3월 18일 회경축(사제수품 60주년)을 맞이하였으며[16] 정 추기경의 건강상태는 음식 섭취를 준비할 정도로 크게 호전되었다고 서울대교구 측이 전하였다. 한 서울대교구 관계자가 정 추기경을 찾아갔는데, 잠에서 깬 정 추기경이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의료진들도 정 추기경의 병세 호전은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관련기사.

2.7. 사망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건강 악화로 입원치료를 받아 온 정 추기경은 한때 고비를 넘기고 건강 상태가 호전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상태가 다시 악화되면서 결국 입원 2개월 만인 4월 27일 22시 15분, 향년 89세로 서울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 사망 당시 주위에는 서울대교구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들과 서울대교구 사제들 그리고 수녀들이 배석해 있었으며, 정 추기경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사망 직후 정 추기경의 서약에 따라 안구 적출이 진행되었다.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례를 따라 빈소도 명동대성당에 마련되며, 장례는 5일장으로 거행될 예정이다. 입관은 4월 30일 오후 5시, 장례미사는 5월 1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되며 주교단이 집전한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사망 때처럼 장례미사가 교황장으로 격상되지는 않았다. 장지는 선배 사제인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그리고 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김옥균 바오로 주교가 안장된 천주교용인공원묘원(모현읍 오산로 154-62[17]) 성직자 묘역이다.

정 추기경의 시신이 명동성당에 도착, 유리관으로 옮겨지면서 거행되었다.

장례 첫날인 28일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반인의 조문을 받았으며, 추모미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 시간마다 문화관 2층 꼬스트홀에서 집전되었다. 연도는 허용되나 80명만 착석할 수 있었다.

입관식 당시 정 추기경의 관은 정 추기경의 손에 쥐어진 묵주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장품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사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28일 정진석 추기경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

주교단에서는 전 제주교구강우일 베드로 주교, 군종교구서상범 티토 주교, 의정부교구이기헌 베드로 주교, 전 춘천교구김운회 루카 주교, 광주대교구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등이 정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수원교구이용훈 마티아 주교도 '정진석 추기경님을 기리며'라는 추도사를 발표하였다.

정치권에선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박병석 국회의장,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많이들 조문을 왔다. 다른 종교로는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소강석 목사,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대주교, 천도교 송범두 교령, 원불교 오도철 교무,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성공회 한국관구장서울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 한국이슬람교 이주화 이맘, NCCK 총무 이홍정 목사 등이 조문을 왔다. 28일 조문 명단, 29일 조문 명단, 30일 조문 명단.

하관예식 안장 이후 추모미사는 5월 3일 10시에 명동성당에서 염수정 안드레아 교구장이 집전하며, 11시에는 장지에서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가 드린다.

정 추기경의 각막은 전문가들이 살펴본 결과 증여가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고령으로 인하여 증여가 어렵다면 실험, 연구용으로 사용해달라"는 정 추기경의 생전 뜻에 따라 각막은 연구용 및 실험용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관련 기사.

사망 2개월 후인 2021년 6월, 정진석 추기경의 병상에서의 마지막 육성이 공개되었다.#

3. 논란 및 비판

우파에 치우친 듯한 행적을 보인 탓에 비판도 많다. 후임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의 경우도 같은 이유로 비판을 받았었다. 사실 이러한 가톨릭 주교들의 정치적인 문제는 좌편향의 행적을 보이는 강우일 베드로 주교, 이용훈 마티아 주교,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정반대로 적용이 된다. 결국 중도 성향 가톨릭 성직자들의 힘이 약하다는 게 대한민국 가톨릭계의 문제점인 셈이다.

3.1. 김대중 토마스 모어 봉성체 요청 거부

1980년 광주항쟁으로 전두환 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대중(토마스 모어)의 가족들이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주교에게 봉성체(奉聖體)[18]를 여러 차례 청했다. 그러나 정 주교는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가톨릭 교회 지도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김대중의 가족들은 "그러한 교회와 사목자에 대해 늘 깊은 회의와 불신이 남아 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 후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사실을 놓고 대통령의 비서관들이 "어떻게 사목자가 이럴 수 있습니까? 감옥에 있을 땐 기도방문을 거절하고 대통령이 되니 청와대에 와서 점심식사에 응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고 말하며, 이러한 정진석 추기경의 이중적 행태에 대해 질타했다고 한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정 추기경의 이러한 행태를 크게 비판하였다.관련기사[19]

사목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 병자성사야고보서 5장 14절에 기반한 사제의 의무로서, 이러한 의무에 대해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안중근 토마스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고 거부하여 천주교 내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십 년에 걸쳐 암묵적인 배교자 취급을 당하며 묻히게 만든 원인이 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3.2. 금전 착복에 대하여 제기된 의문

정진석 추기경은 돈을 밝힌다는 비판과 교구 기관의 재산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착복한다는 의혹이 좌파 세력에서 제기되었으나, 후술된 것처럼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다.

대표적으로 성 황석두 루카 외방 선교 형제회 소속 신성국 노엘 신부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소속 오웅진 사도 요한 신부와 함께 권력과 금력을 향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한 적도 있었다. 정진석 추기경이 청주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998년 청주리라병원(後 청주성모병원) 인수를 강행하면서[20] '사재를 다 털었다'며 10억 원을 내놓았으나 정 대주교가 서울대교구로 떠난 뒤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통장에서 무려 20억 원[21]이 나왔고, 다른 통장에서도 상당액이 드러났으며, 1년 뒤인 1999년에도 '전 재산이다' 라며 5억 원을 꽃동네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는데 이러한 돈의 출처에 대해 밝혀달라는 것이 탄원서의 내용이었다. 해당 기사.

다른 건 의혹으로 치더라도 정 추기경이 꽃동네 관련 후원금으로 내놓은 사재만 15억 원인데, 과거 김수환 추기경의 월급이 200만 원이었고[22] 보통 신부들은 월 100만 원 남짓의 활동비를 받아 살아가는데(물론 사이드로 들어오는 수입-영명축일물적예물,휴가비,거마비,출장미사,세례,첫영성체,차량축복식,혼인미사주례 등등 수고비 형식으로 봉투를 챙겨드린다-이 꽤 된다. 주교 이상이면 견진성사때마다 받는 봉투만 모아도...) 월 100만 원을 한 푼도 안 쓰고 10년을 모아야 1억 2천, 10억을 넘기 위해선 한 푼도 안 쓰고 100년 가까이 저축을 해야 하는데, 이는 도저히 저축만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닌 것은 맞다. 물론 재테크나 주식 등 건전한 방법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는데, 사제의 경우 청빈한 삶이 권장이 되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23] 그러나 주교라는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로서 지나치게 돈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정진석 추기경이 평소에는 워낙 검소한 이미지가 강했던 터라 이러한 의혹은 카더라에서 끝나고 결국 크게 이슈화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24][25]

3.3. 전종훈 시몬 신부 안식년 인사 발령 논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도왔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전종훈 시몬 신부에게 기존 인사 관행에서 어긋난 보복성 인사 발령 조치를 내려 논란이 되었다. 기사.

삼성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를 정의구현사제단이 보호하자, 정 추기경은 전종훈 신부를 1차 소환하였다. 이어 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촛불 시국미사를 봉헌하자, 정 추기경은 전 신부를 재차 소환하여 해외로 나갈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전 신부가 이를 거부하자 안식년 발령을 내린 것이 인사발령의 내막이었다. 천주교 교구사제는 통상 10년에 한 차례 1년 간의 안식년을 지내게 되는데, 전종훈 신부의 경우 이보다 앞선 7년 전인 2001년도에 안식년을 지낸 바 있었다. 또한 수락산성당으로 통상 짧으면 4년 길면 5년의 임기를 지내게 되는 본당 주임신부에 발령된 지 1년 반만에 전 신부는 사목 직위에서 해임되어 안식년 발령을 받게 되어, 정 추기경의 징계성 의도가 다분한 인사조치임이 확실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안식년 인사 발령 조치로 사제를 사목 일선에서 배제한 것도 모자라, 정진석 추기경은 이후 전종훈 신부에게 3년이나 연속해[26] 안식년을 내려 교구장의 지나친 인사 전횡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 추기경이 사제단 대표의 손발을 묶어 신부들의 사회 참여 의지를 박멸시키려 한다'는 교계 안팎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기사 1, 기사 2. 현재 전종훈 시몬 신부는 일선 사목에서 물러나 은퇴하여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로 있다.

3.4. 2010년 4대강 정비 사업 관련 발언 파문

2010년 12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에 대한 비판과 4대강 사업 관련 발언을 하였다. 기존의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4대강 사업 반대 결정을 한 것은 '자연 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는 우려였지 모든 주교들이 4대강 사업이라는 특정 정치사안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표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에 12월 10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유례없이 강도 높은 수위로 비판하고, 이어 원로사제들이 정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직 사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한국 가톨릭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교계 안팎으로 상당한 문제가 되었다.추가 참고기사

비판 측에서 가장 문제삼은 것은 정 추기경의 독단적인 언행이었다. 4대강 사업 반대는 다름 아닌 <전체주교회의>에서 토론 끝에 결정된 것이다. 주교회의에서 의결하는 모든 내용은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일치, 즉 '공동 합의'에 따라 의결되는 것이다. 아무리 추기경이고 대주교라도 의견 교환없는 독자적인 반대는 안 되는 것이다. 정 추기경의 이러한 언행을 교회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본 원로 사제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가톨릭뉴스 참고기사

또한 비판 입장을 주도한 전체 주교회의 소속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정 추기경의 발언을 부정하고 다시 한 번 4대강 사업 반대입장임을 명백히 확인하였다. 또한 대구대교구 소속 정홍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의 지시로 평화방송에서 입막음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여 파문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정 추기경을 비난한 명분이 "한국 천주교 최고 의결기구인 주교회의의 입장에 대한 추기경의 불순명"으로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수 있는 껀덕지를 제공했다.[27]

가톨릭 외부의 사람들이 볼 때는 4대강에 대한 교내의 정치적 입장차이가 아니라 '불일치'와 '불순명'이 논쟁의 핵심이 되는 것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인데, 사실 가톨릭은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며 통일성, 일치, 위계서열, 순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교단이다. 가톨릭의 몇몇 사제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사제들이 사회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부분과는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가톨릭 사제들이 그러는 건 거의 언론에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톨릭의 보수성은 꼭 긍정적인 것도, 꼭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2가지 모두 가능하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신부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조용히 묻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는 점은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만, 이 사안의 경우에는 일반 사회조직에서도 지켜져야 할 민주적 합의와 그 합의에 따라 결정된 규칙에 대한 준수의 문제를 어긴 것이라서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불순명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것은 비종교인들이 보기에 좀 권위적이거나 낯설 수 있는데,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

다만 비판측은 주교회의와 주교단을 혼동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
오늘날 주교회의(conferentia episcoporum)의 교도권적인 가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중략)
한편, 교황은 1998년 5월 21일 이 문제에 관해 Apostolos suos라는 자의 교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주교회의의 유익함과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면서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교도권적 가치에 대해 묻고 있다. 주교회의는 그 이면에 개별적인 지역적인 공의회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교황은 분명히 언급하길, 주교회의가 결코 주교단의 실현은 아니며 주교적인 호의와 친교의 영의 실현이라고 말한다(Apos.suos). 한편, 교황은 이 주교회의들의 존재가 자기 교구 내에서 개별 주교들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n.7).
사실, 모든 주교들이 자신의 머리인 교황과 일치함으로써 주교단을 형성하게 되며, 그런 한에서 교회 내에서 충만한 최고 권력의 주체를 이룬다. 또한 교황은 교회 내에서 최고 권력의 주체이다.
교구 주교들은 개별 교회에 대해 단체적이 아닌 개인적인 책임을 가지며(n.10), 개별 교회들 또는 그룹으로 모인 교회들의 범위 안에는 단체적 행위를 위한 공간이 없다. 그러므로 개별 교회들의 모임에 있어서 단체적 영(靈)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n.12) 합의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한편, 보편 교회는 개별 교회들의 연합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개별 교회에 선행하는 실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교단은 개별 교회들에 대해 주교들이 갖는 권한들의 종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 이전에 각각의 주교들이 참여하는 실재로서, 주교들이 단체적으로 그리고 교황을 머리로 해서 일치되지 않는다면 전체 교회에 대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의 합의성은 오직 주교단(collegium episcoporum)에만 해당된다(n.12).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José Antonio Sayés), 《교회론》(La Iglesia de Cristo), 윤주현 옮김, 가톨릭출판사, 개정판 411-413쪽

요컨대, 주교회의는 결코 주교단이 아니며, 주교회의가 개별 주교에게 순명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애초 정 추기경의 발언이 주교회의와 충돌하는지도 따로 검증되어야 하지만.

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제로 일관한 정 추기경 측은 2010년 12월 23일 발표한 신년메시지에서 흑백논리를 배제하자고 하였다. 한국 가톨릭이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어떤 정치사안에 대해서도 찬성이나 반대와는 무관하며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은 신자들 개개인의 양심에 맡기겠다는 것.

1년여 후, 파문 이전에 제출된 상태였던 정진석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사임 신청을 2012년 5월 10일 교황청이 수락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이미 콘클라베 참여 제한 연령인 80세를 넘긴 상황이었으며, 모든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75세 즈음 교황에게 사표를 제출하는 관례가 있다.[28] 모양새는 나쁘지 않게 잘 갈무리한 셈이다.

이 갈등에 언론과 정치인들까지 가세(…)하여 볼썽사나운 추태가 크게 벌어질 뻔하기도 하였으나, 당사자인 가톨릭 교회 대부분은 주님 성탄 대축일을 무탈히 치르는 등 계속 평정을 유지한 덕분에 논란이 커지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히 일견 '보수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추기경이 된 이후에 용산 철거 화재 사건, 서울시 뉴타운 재개발에서 소외받는 시민들이 있다는 걸 문제삼으며 "우리 사회는 입법기관 종사자들에게 특권도 부여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이 대우를 받는 만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지 의문"이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정운찬 총리가 "4대강 반대하는 주교회의 좀 잘 달래 달라"고 찾아갔어도, "천안함 사건이나 잘 처리하시라"고 완곡히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주교회의에서 4대강을 생명보호 교리를 근거를 들어 반대하기로 의견 일치를 본 상황이었으므로, 정진석 추기경이 뭘 해보려고 했어도 힘들었을 것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끝까지 주교회의에서 4대강이 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다고 했지, 반대는 안 했다고 주장했으며 결과에 대한 판단은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3.5. 명동성당 재개발과 4대강 사업 빅딜 의혹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해 반대하는 주교회의 입장과 상반되게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입장을 내비친 정진석 추기경의 행태에 대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과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을 서로 맞바꿨다는 빅딜설이 제기되었다.#1 #2 #3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은 정진석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재임기간 중 추진한 핵심사업으로, 일각에 의하면 추기경이 '퇴임하기 전 서울대교구에 큰 선물을 하나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도부터로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심의회의에서는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에 대한 6차례의 심의에서 역사적 가치의 훼손과 연약한 지반, 주변 경관 파괴 등의 이유로 모두 부결 방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교구에서 당초 13층에서 1개층을 줄인 12층 건물(42m) 신축 등의 수정안을 제출하였고, 극비리에 열린 문화재위 근대분과 회의는 명동성당 재개발에 대해 반대토론도 없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결론을 내려 재개발 수정안을 한달음에 통과시켰다. 이같이 허가가 나자 정진석 추기경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기자간담회에서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에 화답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은 명동성당 재개발과 관련해 문화재 전문가,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을 잇따라 불러 면담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건축계에 따르면 문화재청 국장과 근대문화재과장, 사무관, 전문위원 등이 들어가 청와대 관계자와 재개발 여론, 통과 전망, 대책 등을 논의하였고[29] 서울대교구 관계자도 시민사회수석실 종교 담당과 수차례 만나면서 교단 내 재개발 반대 여론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했다.

사실 이런 정부와 밀당은 한국 가톨릭 역사를 이해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대한민국 가톨릭은 역사적으로 정권[30]과 지속적으로 딜을 해왔으며, 그 딜의 궁극적인 포커스는 항상 교세 확장 및 가톨릭 신앙 수호에 맞춰져 있었다. 유명한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 반공 시절[31]은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도 대한민국 가톨릭의 기본적인 방침은 정치적 양다리였으며 한국 가톨릭 교회 잇속챙기기였다. 가톨릭 교회는 '김대중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노기남 주교 같은 가톨릭 상층부가 정권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고 이효상 및 거물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을 통해서 부동산 및 각종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정진석 추기경의 이 빅딜[32]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는 무엇보다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앙의 수호가 먼저인 종교단체이며 사회적, 정치단체가 아니다. 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당시 서울대교구 사학법인 이사장 및 주교회의의 사학법 반대인데, 이 때 민주당 계열은 자기네 편인줄 알았던 가톨릭이 강경하게 반대하자 충격을 먹었다. 한국 가톨릭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가톨릭 사업과 재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학교와 그에 딸린 부동산인데, 정부가 사학법을 통해서 교회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공식 사과와 사학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을 요구했고, 그리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 않는다면 사학법 불복종 운동을 하겠다며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원하는 걸 받아 내었고, 명동성당의 재개발도 결국 마무리가 되었다.

4. 기타

4.1. 젊은 시절의 일화들

어린 시절에 유물론무신론에 흔들린 적이 있었는데, 1947년 17살 때 윤형중 마태오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6주간 했던 사순 시기 특강을 듣고 확고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 # 윤 신부는 1934년 불과 32세의 나이로《천주교요리문답》 편찬에 참여하고 《상해천주교요리》를 편찬했으며, <가톨릭 청년>의 발행인을 비롯해 천주교회 언론, 출판 부문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 가톨릭의 대표적 지성인이다. 윤형중 신부 관련 설명

1961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림동 약현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했을 때 생긴 별명이 하나 있는데 바로 "눈깔나와"(…). 약현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재임 중, 한 어린이가 정진석 추기경에게 "신부님 이름이 뭐야?"라고 묻자 정진석 추기경이 "니콜라오(니꼴라오)"라고 말했는데, "니꼴라오"라는 발음이 "눈깔나와"와 비슷하게 들렸는지 그 어린이가 눈깔나와…?'라고 했다고 한다(…).

4.2. 젊은 '한국인' '교구장' 주교

정진석 신부는 1970년 10월 3일 주교품을 받고 같은 날 청주교구장에 착좌하였다. 이때의 정진석 주교의 나이는 38년 10개월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로서는 최연소이며,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한국인으로 '대목구장' 주교나 '보좌' 주교가 아닌 교구장 주교로서 최연소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정진석 추기경이 현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가톨릭 계열 언론이나 교구에서 이를 착각하여 '최연소 주교'라는 표현으로 정진석 주교를 설명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123456

이러한 오류는 정진석 추기경 사망 당시까지도 계속되었고 123 가톨릭 교회로부터 정보를 받아 작성된 여러 일반 언론 기사들12345678도 '최연소 한국인 교구장 주교'라고 써야 할 것을 한국인 교구장이라는 말을 빼먹고 '최연소 주교'라고 보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가톨릭 계열의 언론사의 기자들나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이 보도자료 작성 과정에서 당사자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에 관한 사실 확인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이래 1970년까지의 한국 천주교 주교 수는 40명이 채 되지 않으며, 그중 한국인 주교 수는 정진석 주교 제외 12명뿐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그 주교들의 출생일과 주교 수품일만 비교해보면 누가 최연소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간단한 내용인데도, 교계 기자들이 확인에 소홀한 것은 비판의 소지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서울대교구장 시절의 정진석 대주교는 평양교구장 서리도 겸하였는데, 바로 아래에 언급된 홍용호 주교가 바로 그 평양교구의 전신인 평양대목구의 대목구장 주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교계 언론 보도의 오류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다행히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이를 바로잡는 보도를 하였다. # 다만 이 바로잡는 보도와 관련하여 페레올 주교를 최연소라고 하는 또 다른 실수를 했다. 상세한 것은 아래에 기술한다.
먼저 정진석 추기경의 주교 수품일인 1970년 10월 3일 기준으로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라고 불릴 수 있는 주교는 아래와 같다. 자세한 것은 주교 문서의 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 문단 참조.
  • 초대 인천교구나길모 주교: 한국 천주교에 소속되었던 한국인/외국인 주교 통틀어 최연소 주교를 기록하였으며, 이 기록은 2021년 4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1926년 12월 7일 출생인 나길모 주교는 만 34세 9개월인 1961년 8월 24일에 주교가 되었으므로12 나길모 주교가 페레올 주교에 비해 근소한 차이로 최연소 주교이다.
  • 전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한국인 최연소 주교이다. 홍 주교의 주교 수품일이 1943년1과 1944년12으로 문헌마다 달리 기록되긴 했지만, 1944년을 선택하더라도 이는 만 37세에 해당하므로 정진석 추기경의 주교 수품 때의 나이인 만 38세보다 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래의 주교들은, 비록 최연소 기록을 달성하지는 않았더라도, 1970년 정진석 주교보다 젊은 나이에 주교품을 받은 이들이다.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792년 2월 12일 출생. 만 37세 4개월인 1829년 6월 29일에 주교가 되었다12.
  •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1808년 12월 27일에 태어나서 만 35세 4일인 12월 31일에 주교가 되었다12. 다만, 나길모 주교가 만 34세 9개월에 주교로 성성되었으므로, 페레올 주교는 최연소 주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위 서울대교구 보도 자료의 언급은 오류이다!
  • 제8대 조선대목구장-경성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대주교: 1854년 3월 8일 출생. 만 36세 6개월인 1890년 9월 21일에 주교가 되었다12.
  • 초대 대구대목구장 플로리아노 드망즈 주교: 1875년 4월 25일에 태어나서 만 36세를 갓 넘긴 1911년 5월 2일(또는 6월 11일)에 주교가 되었다12.

한편 정진석 추기경의 주교 수품 때로부터 2년 뒤인 1972년에는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신부가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성성되었다. 홍용호 주교의 주교 수품일의 정확한 년도가 1944년이라면, 이문희 보좌주교가 2021년 4월 기준 역대 모든 한국인 주교들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주교품을 받은 것이 된다.

4.3. 최장기 교구장 재임

바로 앞 문단에서 다룬 최연소 주교 여부와 달리, 의외로 이 내용은 언론사들이 그다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다. 정진석 추기경의 두 교구의 교구장 재임 기간 총합은 한국 천주교 역대 모든 주교들의 교구장 재임 기간 중 최장기가 된다. 청주교구장 재임 기간이 1970년 10월 3일부터 1998년 6월 28일까지 27년 9개월이며, 서울대교구장 재임 기간이 1998년 6월 29일부터 2012년 5월 10일까지 13년 10개월로, 주교 수품일부터 은퇴일까지의 총 기간 무려 41년 7개월에 달한다.

다만 대목구장 재임 기간까지 비교한다면 뮈텔 대주교의 재임 기간이 최장기가 된다. 뮈텔 대주교는 1890년 9월 21일부터 1933년 1월 22일 사망시까지 총 42년 4개월간 조선대목구-경성대목구 대목구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단일 교구의 교구장 주교 최장기 재임 기록은 인천교구의 나길모 주교가 보유하고 있다. 나길모 주교는 교구장으로서의 사목 기간은 40년 1일이며, 인천대목구 시절까지 포함하면 40년 8개월이다.

4.4. 은퇴 시점이 만 80세를 넘긴 이유

교회법상 교구장 주교의 통상 은퇴 연령은 만 75세 전후이며, 이 연령이 되면 주교는 교황청에 퇴임 및 후임자 서품을 청원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정진석 추기경은 만 80세를 넘긴 2012년에 서울대교구장을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정 추기경을 임기 5년의 교황청 성좌조직재무심의 추기경 평의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교구장 임기도 함께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 추기경은 만 75세가 되던 2006년 12월 교황청에 사임청원을 한 적이 있는데, 정 추기경보다 4살 위였던 베네딕토 16세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나이면 다 나가야 하는 건가?"라는 답변을 내놓으며 정 추기경의 사임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33]

이렇듯 무려 80세에 은퇴하다 보니, 일반 사제들도 은퇴 후에나 맞이하는 사제수품 50주년 행사(금경축)를 현직에서 활동하는 중에 맞이하기도 했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은퇴를 하면서 건강상의 문제도 생기게 되었는데 교구장에서 물러나기 2~3년전에는 뇌졸중 증세로 몇차례 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며, 신체 왼쪽 부분에서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 추기경은 이 시점부터 거동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입당시 제단에 올라갈때도 스스로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여 옆의 복사나 신부의 도움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고, 주교관 역시 스스로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미사 집전시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4.5. 장기기증과 각막기증 서약

정진석 추기경이 생전에 뇌사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서약하게 된 것은, 정 추기경의 모친 이복순 루시아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한다. 정 추기경의 모친 이 루시아 여사는 사망 당시 '죽어서도 좋은일을 할 수 있다'라며 안구를 기증하였는데, 모친의 이러한 모습을 본 정 추기경은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모친의 안구 수술이 진행 중일때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수술을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평생을 남에게 나누면서 살았던 모친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4.6.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

정 추기경은 건강관리를 위하여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는데, 이는 정 추기경이 신학생 시절부터 유지해 왔던 것이다. 정 추기경의 규칙적인 생활은 교구장 은퇴 후에도 건강이 한창 좋았을 때까지는 유지했다고 한다. 정 추기경은 은퇴 후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 살았는데, 평소 새벽 5시에 기상하여 2시간 정도를 자신의 저술 활동에 할애하였고 이후 7시부터 8시까지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등 신학생 시절의 규칙적인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한 정 추기경은 오후 시간에는 건강관리를 위하여 매일 1시간씩 신학교 전체를 걸었는데, 중간에 신학교 방문객들과 마주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4.7. 그 외

국문학자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정광 교수와는 사촌 관계이다. 관련 기사.

정진석 추기경은 생전 인품이 너그러운 성직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염수정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면 정진석 추기경은 교구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회고하였다. 또한 염 추기경은 정 추기경의 장례미사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 돌아가셨을 때 '의지하고 기댈 곳이 없어서 마음이 허전하다'고 하시던 정 추기경의 말씀을 깊이 동감하게 되었고, 나도 정 추기경을 마음속으로 많이 의지하였고,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하였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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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교구 루르드의 성모 무염시태 본당 명의사제[2] 문익공파(文翼公派) 31세 진(鎭) 수(秀) 항렬.족보[3] 이희선(李熙旋)의 딸이다.[4]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인 6년제 구제중학교 과정으로, 중앙중학교중앙고등학교 41회 졸업생에 해당된다. 2006년 6월 모교에 방문해 강연을 하였으며, 2008년 7월 개교 1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였다.[5] 원래 신학기 시작은 4월이었는데 미군정 하에 미국식 학제에 따라 9월로 바뀌었다가, 이것을 다시 원상회복하는 과정에서 이 해에만 6월에 입학했다.[6] 사제 대신에 일반 사회인으로 진출했더라면 월북자인 부친을 둔 그가 연좌제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니, 결국 가톨릭 성직자라는 또 다른 진로에서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이라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7] 자신의 은신처에 같이 숨어 있던 육촌 동생을 폭격으로 바로 옆에서 잃었다. 그의 세례명이 미카엘이었는데, 그가 죽은 바로 다음 날이 추석이요, 그 다음 날이 성 미카엘 축일이었다.[8] 당시 동네 친구와 같이 행군했는데, 입대하기 전 어머니의 재봉틀을 판 돈으로 철조망 근처에서 김밥이나 떡 등을 먹으면서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9] 천주교 7성사세례성사, 성체성사(첫영성체), 견진성사, 고해성사, 성품성사를 모두 명동성당에서 받았다고 본인이 직접 말하였다. 이후에는 서울대교구장 은퇴 미사, 그리고 사망에 따른 장례미사까지 명동성당에서 거행하게 되었다.[10] 가벼운 문답대화형식의 對개신교 천주교 호교론서로 유명하다.[11] 오랜시간 정 추기경의 비서역할을 해왔으며, 2009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정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추기경 정진석>의 저자이다. 2021년 현재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정진석 추기경의 사망 당시 브리핑에서 정 추기경의 사망 소식도 역시 공식 발표하였다.[12] 정 추기경은 혈전으로 아스피린을 복용해왔으며,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절인 2010년에는 뇌일혈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었던, 이력이 있다. 관련 기사.[13] 이는 전임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비슷한 케이스이다.[14] 염 추기경은 28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기원미사에서 입원한 정진석 추기경이 문병을 온 자신에게 "나 지금 천국 문 앞에 와 있어"(…)라고 3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했다고 신자들에게 전했다.[15]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는 "하느님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16] 서품 동기로 유봉준 토마스 신부, 김득권 굴리엘모 신부, 김병도 프란치스코 몬시뇰(2021년 3월 24일 사망)이 있다.[17] 지번: 오산리 325-4[18] 가톨릭에서 병자나 감옥에 수감된 이에게 사제가 찾아가서 기도하고 성체를 모셔주는 예식.[19] 사실 정의구현사제단은 그 전부터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염수정 추기경을 정치적인 문제로 꾸준히 공격적으로 비판해왔다.[20] 병원 인수 자금 조달의 내막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었는데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할 꽃동네 후원금 중 100여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자금이 병원 인수 대금으로 불법 유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1] 20여억 원을 자기 몫으로 챙겨갔다가 후임 청주교구장봉훈 가브리엘 주교의 항의로 서울대교구에서 정 추기경 대신 변제해줬다는 말도 있다.[22] 다만 이 200만원이라는 게 현재 기준 200만원을 생각하면 곤란하며,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보단 훨씬 가치가 큰 돈이다. 그러나 주교쯤 되면 과로사로 천국 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업무량이 살인적이기 때문에 이게 노동량에 비해 많은 금액이라 보긴 힘들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주위에 베풀었다고 한다.[23] 청빈 서약은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수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사제가 될 때는 정결과 순명만 서약한다. 정진석 추기경은 수도회 소속 수도사제가 아니라 교구 소속 사제 출신이어서 청빈 서약을 한 적은 없기는 하다.[24] 단, 정 추기경의 이러한 검소한 이미지가 꼭 금전 착복을 하지 않았다는 일반화로 이어질 수는 없다. 고 박정희 대통령도 개인적으로는 검소했다는 평판이 있으나 사실상의 비공식적인 사재라고 할 수 있는 정수장학회육영재단의 설립은 갈취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개인의 검소함이 꼭 그 사람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인물상이 '금주, 금연, 채식주의자에 동물애호가이며', '월트 디즈니찰리 채플린 풍자극을 즐겨보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한', '소시민 출신의',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 아이러니함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5] 사망 후 통장 잔고는 8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교구에서 주는 돈 외에도 정 추기경의 경우 6.25 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라 약간의 수당이 추가적으로 지급되었다고. 건강 악화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후 서울 명동밥집에는 무려 1,000만원을 기부하였고, 죽은 뒤 남은 돈은 전부 장례식을 도운 인원들을 위해 쓰거나 기부되었다. 결국 정 추기경의 금전 착복 혐의는 의혹 수준에서 끝나고,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 것은 나오지 않고 마무리된 셈.[26] 천주교 관계자들도 '1년은 이해할 만하지만 2년은 심하고, 3년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27] 박홍 루카 신부만 하더라도, 아무리 정치적으로 물의를 일으켜도 그는 예수회 소속 수도사제서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상당한 엘리트인데다가, 기본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소속 수도회에 순명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28] 정진석 추기경이 2006년 당시 대주교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을 때도 정년에 가까운 만 74세였다. 또한 정진석 추기경은 만 75세가 되던 그해 12월에 교황청에 사임청원을 하였던 적이 있었으나 베네딕토 16세가 정진석 추기경을 임기 5년의 교황청 성좌조직재무심의 추기경 평의회 위원으로 임명함에 따라 교구장 임기가 5년이 더 연장되었고, 결국 교황 선출권을 상실한 만 80세가 되어서야 교구장에서 사임하였다. 이는 만 77세인 현 서울대교구염수정 추기경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29] 참석했던 문화재청 관계자는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야단을 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30]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포함이다(…)[31] 한국에서 가톨릭이 좌파랑 많이 엮이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인데, 가톨릭은 기본적으로 반공이다. 1949년 비오 12세의 반(反) 공산주의 교령을 참조하자.[32] 사실이라는 전재 아래에[33] 교황은 정년이 없는 종신 임기이다. 즉 자진 사임을 하지 않는 이상 사망 직전까지 임기를 유지한다.[34] 염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시절인 2002년부터 2012년까지 교구장이었던 정 추기경을 보좌하였으며, 정 추기경이 은퇴한 이후로도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주교관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등 오랜시간 정 추기경을 근거리에서 모셔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