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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수광성공(壽光成公) 鄭沖 | 정충 | |||
시호 | 성공(成公) | ||
작위 | 수광후(壽光侯) → 수광공(壽光公) | ||
최종직위 | 태부(太傅)[1] | ||
성씨 | 정(鄭) | ||
휘 | 충(沖) | ||
자 | 문화(文和) | ||
생몰기간 | ?년 ~ 274년에 1월 11일 | ||
고향 | 사주(司州) 형양군(滎陽郡) 개봉현(開封縣)[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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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년 10월 ~ 263년 12월 19일 | |||
서진의 태부 | |||
265년 12월 ~ 274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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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와 서진의 관료이며 자는 문화(文和)로 사례 형양군 개봉현 사람.2. 생애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탁월한 지조를 세워 욕심이 적었으며, 경서를 애독해 유학과 백가의 학설을 넓게 구했다고 하며, 자태와 인망에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담백함으로 자신을 지켰을 뿐 향리에 이름을 구하지 않았기에 주군에서 오랫동안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고 한다.조비가 태자가 되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발탁해 정충을 문학으로 임명했다가 승진해서 상서령이 되었다가 지방으로 나가 진류태수가 되었으며, 유학자의 예스럽고 아담한 덕이 있어 직무에는 재주나 남의 잘못을 이해해 감싸주면서 일을 능히 처리하는 것에는 명성이 없었지만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은 필요에 맞게만 할 뿐 자산을 불리지 않아 세상에서 정충을 무겁게 여겼다. 대장군 조상이 그를 천거해 종사중랑에 임명했다가 산기상시, 광록훈이 되었으며, 251년에 사공이 되었다.
조모가 서경을 강의할 때에 이르자 경서를 들고 친히 수업해 시중 정소동과 함께 상을 받았다가 얼마 후에 사도가 되었으며, 260년에 조환이 즉위하자 태보에 임명되어 사도, 사공, 태위 위에 있으면서 수광후에 봉해졌다. 정충은 지위가 재상과 같았지만 세상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으며, 사마소가 당시에 보정의 지위에 있어 폭을 평정하자 가충, 양호 등에게 예의, 율령 등 제정하게 하자 그들은 정충에게 자문을 구한 이후에 시행했다.
265년에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의 의사를 할 때 정충이 책서를 받들었으며,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태부로 임명되면서 작위를 올려 수광후에서 수광공이 되었다. 얼마 후 사례 이희, 중승 후사광, 태보 낭릉공 하증, 태위 임회공 순의 등과 함께 각기 질병이 있어 면직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모두 불허했으며, 사무를 처리하지 않고 사직을 청했지만 사마염이 완곡한 말로 조서를 내리면서 사자를 보내 타이르게 했다.
또 다시 굳게 사양해 초선인수를 바쳤지만 조서를 보내 불허했다고 하며, 273년에 표를 올려 관직을 그만두고 수광공으로 있다가 274년에 1월 11일에 죽었다. 사마염이 조당에서 태부로 추증하면서 비기(고관용 관목재), 조복, 상의 한 벌, 금전 30만, 포 100필을 내리면서 시호를 성(成)이라 했으며, 함녕 연간[3]에는 관리가 정충과 안평왕 사마부 등 12인은 모두 태상에 비명이 있으니 종묘로 배향할 것을 주청했다.
일찍이 손옹, 조희, 순의, 하안 등과 함께 논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석 중에서 훌륭한 것을 모아 그 성명을 기록해 그들의 뜻에 따라 합당하지 못한 부분을 모두 고쳐 논어집해라고 했다. 정충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정휘가 그 뒤를 이어 평원내사에 이르렀다고 하며, 정휘가 죽자 그 아들인 정간이 뒤를 이었다.
세설신어에서는 가충이 율령을 제정할 때 양호와 함께 상담했는데, 정충이 고요[4]처럼 엄정하고 명석한 뜻은 저처럼 우둔한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양호가 주상의 뜻은 조금이나 넓고 윤택함을 더하게 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자 정충은 자신의 뜻을 밝혔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 시리즈/장수(ㅈ)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삼국전투기
이름이 충이라 벌레로 나온다.(...) 처음 등장한 전투외편 8-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뛰어나진 않지만 뭐든지 평균 이상으로 해내는 헤비워커라고 설명됐다.전투외편 8편에서 처음 등장. 이전 삼공이었던 태위 등애와 사도 종회가 둘 다 현장에 나가 있었던지라 실무는 그 동안 사공이었던 자기 혼자 다 했다며 설움을 토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이후 사마소가 촉이 없어진 김에 국가 전반의 시스템을 정비하고자 할 때 태보 정충의 지휘 하에 순의, 가충 등이 총동원되어 일했다고 묘사되었다. 위가 망하고 진으로 왕조가 교체된 후에는 태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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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증된 관직이다.[2] 후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사례(司隷) 하남윤(河南尹) 형양도위(滎陽都尉) 개봉현(開封縣)이다.[3] 399 ~ 401년이다.[4] 순 임금의 신하로 법률과 형벌을 관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