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1:34:32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총선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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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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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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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발표 영상
{{{#!wiki style="margin: -7px -12px"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
}}}
투표율 60.6% ▲ 3.4%p
선거 결과
파일: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열린우리당 152석
121석 한나라당}}}
<rowcolor=#580009,#cfa547>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비율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
129석 23석 152석 50.83%
[[한나라당|
한나라당
]]
100석 21석 121석 40.46%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
2석 8석 10석 3.34%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
5석 4석 9석 3.01%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
4석 0석 4석 1.33%
[[국민통합21|
국민통합21
]]
1석 0석 1석 0.33%
[[무소속(정치)|
무소속
]]
2석 - 2석 0.66%
1. 개요2. 선거 과정
2.1. 정치적 배경2.2. 선거구 획정
3. 출구조사4. 개표 결과
4.1. 지역구
4.1.1.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4.2. 비례대표
5. 결과 분석
5.1. 지역별 분석
5.1.1. 수도권5.1.2. 충청권5.1.3. 호남권5.1.4. 대경권(TK)5.1.5. 부울경권(PK)5.1.6. 강원도5.1.7. 제주도
5.2. 총론적 분석
5.2.1. 민주당계 정당의 표분산5.2.2.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은 왜 탄핵을 했는가?5.2.3. 엇갈린 운명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5.2.4. 자민련의 몰락, 양강 구도의 형성5.2.5. 민주노동당의 선전, 진보정당의 첫 원내 진출
6. 국회의원7. 여담
7.1.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

[clearfix]

1. 개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KBS가 정리한 영상[1]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 4월 15일[2]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60.6%였다.[3] 인물과 정당의 교차 투표를 가능하게 한 1인 2표제가 최초 도입된 국회의원 선거이기도 하다.[4][5]

노무현 대통령이 소속된 '미니 여당'이던 열린우리당[6] 단독 과반 승리를 거두며 선거 직전에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를 강행한 것에 대한 심판의 민심을 보여주었다.

2. 선거 과정

2.1. 정치적 배경

총선을 앞두고 당시 한국 정계는 복잡한 정계개편 과정을 겪고 있었다. 여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새천년민주당 탈당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진영 분열이 일어났고, 야권은 한나라당불법 대선 자금 수수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며 민심의 지탄을 받아 어느 정당이라고 딱히 선거에서 유리할게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이런 심리적 초조함이 겹쳐져서인지, 기어코 선거 실시 한달여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민련은 제16대 국회에서 합심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는 사건을 터뜨리고 만다. (관련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 가결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직무행사가 불능된 상태에서 고건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하에 선거가 치러진다.

열린우리당은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을 따라잡았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근소한 차이지만 한나라당도 제치고 1위가 되는 등 최소한 총선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는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거기다 잘하면 제1당도 차지할지 모른다는 희망섞인 전망이 나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새천년민주당은 아직 입당도 안한 대통령의 친 열린우리당 발언을[7] 가지고 선거법과 선거 공정 위반으로 탄핵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선거 한달 전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정작 3월 가결된 탄핵 과정을 보면 소수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다수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밀어내고 힘의 논리로 탄핵결의안을 처리하는 그야말로 다수의 횡포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17대 총선 선거판 자체가 말 그대로 탄핵 선거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걸 막기 위해 격렬하게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저지했지만, 끝내 숫자 싸움에서 밀리며[8] 탄핵소추안 통과를 막지 못했고, 열린우리당 의원 전원이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국민들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는 영상이 나가자 더욱 열린우리당을 향한 동정 여론이 강해졌다.

그리고 탄핵 반대여론이 70%에 달하는 (MBC 조사) 여론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한나라당의 두 배 이상을 따돌리며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이 되고 만다.[9] 여기에 마지막에 개헌을 노리고 합류한 자민련은 가장 강력한 벼락을 맞았다. 토론회에서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노회찬 후보가 자민련 측 참석 패널의 공격을 받자 "가만히 좀 계십시오. 지금 자민련 상대할 시간 없습니다. 자민련은 어차피 선거 끝나면 없어질 당 아닙니까"라고 데꿀멍시켰을 정도. 여담으로 이때쯤부터 노회찬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에서 촌철살인이 섞인 해학적인 형식의 토론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지역구별 여론조사를 보면 수도권과 호남, 충청은 물론이고 당시 한나라당의 절대 우세 지역으로 손꼽히던 강남 3구와 TK에서조차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한나라당 후보에게 우세를 보이거나 접전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나라당은 최악의 경우 50석 안팎의 대참패가 예상된다는 설레발도 나올 정도였다. 물론 지역 기반을 생각하면 꽤 나간 설레발이었다.

하여튼 이런 불리한 구도 속에서 한나라당은 당시 박근혜가 주도한 천막당사 선거운동을 펼치며 선거 막판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때 1당 독재를 막아달라는 의미로 노란색과 파란색이 균형을 이루는 일명 시소 TV광고가 나오기도 했고, 아예 대놓고 잘못했으니 봐달라고 사정하는 일명 회초리 광고도 유명했다. 심지어 당 내부에선 김정일과 박근혜가 만나는 남북정상회담삘의 광고까지 고려했다고 하니(실제로 2002년에 16대 대선을 앞두고 개인적으로 만났다) 당시의 급박함을 알 수 있다.[10] 여기에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어감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11] 선거판이 막판에 갈수록 요동쳤다. 이 여파로 정동영은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했는데, 어쨌든 이 노인폄하 발언이 탄핵 역풍을 다소 잠잠해지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당시 한나라당은 정동영의 발언 덕분에 대참패의 위기를 벗어날 단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2004년 4월 15일 선거가 치러졌다.

2.2. 선거구 획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선거구/대한민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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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획정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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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석수를 감소시켰던 것을 4년만에 원상복귀했다.

3. 출구조사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정당 파일:KBS 로고.svg - 파일:SBS 로고.svg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172 (K: 142~188 / S: 157~182) 155~171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01 (K: 87~129 / S: 92~114) 101~115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11 (K: 11석 모두 확실 / S: 9~12) 9~12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9 (K: 7~9 / S: 7~13) 7~11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3 (K: 3~4 / S: 2~7) 3~6

[[국민통합21|
파일:국민통합21 흰색 로고타입.svg
]]
1[12] 2~4[13]


[[무소속(정치)|
무소속
]]
2(1~4)
당시 KBS와 SBS는 공동 출구조사[14]를 진행했는데, 두 방송사는 같은 조사를 가지고도 오차 범위를 다르게 잡았다. 표에서 괄호 안의 수치를 보면 알겠지만 KBS는 범위를 말도 안되게 넓게 잡아서 틀릴래야 틀릴 수 없었지만 거의 의미 없는 예측이 되어버렸고 SBS는 최대-최소 의석 차이를 평범하게 20석 내외로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예측에 실패했다.(열린우리당 최소치 -5석, 한나라당 최대치 +7석)
MBC 출구조사 영상
위 영상은 MBC 출구조사[15] 영상. 단독 출구조사를 실시했던 MBC는 경합지역 1, 2위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17대 총선에서 KBS-SBS 출구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출구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인) 총 19개 지역.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
17대 총선에서 MBC 출구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출구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인) 총 7개 지역. 단, 이를 KBS-SBS보다 출구조사가 잘 되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MBC는 KBS-SBS 출구조사와 달리 경합지역 1, 2위 후보의 순위와 득표율을 발표하지 않았는데,[18] MBC 단독 출구조사를 맡았던 코리아리서치센터 관계자가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경합지역에서 무려 12곳을 틀려 KBS-SBS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참고자료[19]
16대 총선에 이어 여당 의석 과다 예측을 했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개표 결과 172석에서 152석으로 줄었으며,[20] 실제 개표에서 바뀐 의석 중 1석 자민련을 제외한 18석은 모두 한나라당이 가져가며 101석에서 121석으로 크게 늘었다.[21] 여당과 제1야당 의석 수 차이가 71석 → 31석으로 바뀌었으니 예측치 분석이 엉망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빗나간 지역이 유독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수도권의 경우 아무래도 득표 격차가 다른 지역에 비해 좁을 수 밖에 없으니 오류가 날 확률이 더 높은건 사실이지만, 해당 선거에선 그 정도가 심한 편이긴 했다. 출구조사대로라면 한나라당은 서울 48석 중 8석, 경기 49석 중 10석, 인천 12석 중 0석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얻었겠지만[22] 뚜껑을 열어보니 각각 16석, 14석, 3석을 얻어 한나라당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의 결과가 되었다.

4. 개표 결과

파일: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파일:South_Korean_Legislative_Election_2004_districts.svg.png

4.1. 지역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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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지역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 국민통합21 무소속 <colbgcolor=#eeeeee,#2d2f34> 합계
<color#222> 서울 16 0 32 0 0 0 0 48
<color#222> 인천 3 0 9 0 0 0 0 12
<color#222> 경기 14 0 35 0 0 0 0 49
강원 6 0 2 0 0 0 0 8
<color#222> 대전 0 0 6 0 0 0 0 6
<color#222> 충남 1 0 5 4 0 0 0 10
<color#222> 충북 0 0 8 0 0 0 0 8
<color#222> 광주 0 0 7 0 0 0 0 7
<color#222> 전남 0 5 7 0 0 0 1 13
<color#222> 전북 0 0 11 0 0 0 0 11
대구 12 0 0 0 0 0 0 12
경북 14 0 0 0 0 0 1 15
부산 17 0 1 0 0 0 0 18
울산 3 0 1 0 1 1 0 6
경남 14 0 2 0 1 0 0 17
<color#222> 제주 0 0 3 0 0 0 0 3
전국 100 5 129 4 2 1 2 243

4.1.1.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정당 득표수 의석
득표율
[include(틀:열린우리당)] 8,957,665 129석
41.99%
[include(틀:한나라당)] 8,083,609 100석
37.9%
[include(틀:새천년민주당)] 1,698,368 5석
7.96%
[include(틀:무소속)] 972,954 2석
4.56%
[include(틀:민주노동당)] 920,229 2석
4.31%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569,083 4석
2.67%
[include(틀:국민통합21)] 63,989 1석
0.3%
[include(틀:녹색사회민주당)] 37,789 -
0.18%
[include(틀:한국기독당(2004년))] 8,267 -
0.04%
[include(틀:사회당(1998년))] 8,004 -
0.04%
[include(틀:민주국민당(2000년))] 4,347 -
0.02%
[include(틀:노년권익보호당)] 2,582 -
0.01%
[include(틀:민주공화당(2000년))] 2,405 -
0.01%
[include(틀:가자희망2080)] 1,253 -
0.01%
[include(틀:구국총연합)] 226 -
0.00%
선거인 수 35,596,497 투표율
60.63%
투표 수 21,581,550
무효표 수 250,780

4.2.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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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 대표
정당 득표 수 득표율 당선인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7,613,660 35.77 21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510,178 7.09 4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8,145,814 38.27 23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600,462 2.82 0

[[국민통합21|
파일:국민통합21 흰색 로고타입.svg
]]
119,746 0.56 0

파일:가자희망2080.png
31,501 0.15 0


[[민주공화당(1997년)|
파일:민주공화당2000 글자.png
]]
24,360 0.11 0

파일:구국총연합.png
9,330 0.04 0

[[한국기독당(2004년)|
파일:한국기독당2004.png
]]
228,837 1.08 0

파일:노년권익보호당.png
37,084 0.17 0


파일:녹색사회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103,845 0.49 0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2,774,061 13.03 8

파일:민주화합당.png
39,785 0.19 0


파일:사회당 1998년 글자.svg
47,311 0.22 0
총합 21,285,984 100% 56

5. 결과 분석

5.1. 지역별 분석

5.1.1. 수도권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76석 0석 0석 33석 0석
비례대표[A] 38.59% (3,954,974) 7.04% (721,531) 13.14% (1,346,626) 35.58% (3,646,045) 2.05% (210,369)
종합[B] 범진보 범보수
76석 / 58.77% (6,023,131) 33석 / 37.63% (3,856,414)

수도권의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압승, 한나라당의 텃밭 보존, 새천년민주당의 제대로 된 참패로 요약된다.

열린우리당은 서울에선 32석, 경기도에선 35석, 인천에선 9석을 얻어내며 그야말로 압승을 거두었다. 특히 인천의 중-동-옹진군, 남구 갑/을에서 이긴 것은 더욱더 값진 성과였다. 다만 서울의 종로구와 강동구 갑에서 석패하고, 강남3구에선 송파 병을 제외하고 모두 한나라당에 패배했다.

한나라당은 탄핵의 역풍 속에서도 서초, 강남, 송파, 분당, 용산, 양천 등 보수 텃밭을 수성하는데에만 간신히 성공했다. 특히 서울에선 16석을 얻어서 예상 외의 선방을 했는데, 종로구, 동대문구 을, 강동구 갑, 영등포구 갑/을 등에서 근소하게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선방에 영향을 주었다. 경기도에서도 일산, 안양, 용인 등 신도시 위주에서 승리했지만 인천에선 고작 3석만 건지는 데 그졌고 인천 중-동-옹진, 남구 갑/을에서 패한 것이 뼈 아픈 수도권 대참사 결과를 낳았다.

5.1.2. 충청권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19석 0석 0석 1석 4석
비례대표[A] 41.08% (835,140) 2.65% (53,963) 11.47% (233,105) 24.52% (498,533) 15.27% (310,421)
종합[B] 범진보 범보수
19석 / 55.20% (1,122,208) 5석 / 39.79% (808,954)

사실상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게 된 계기다. 대전, 충북 전역을 싹쓸이했고[27], 충남에서도 10석 중 5석을 차지하면서 가장 많은 당선자를 냈다.

자민련은 대부분의 텃밭을 잃고 참패했다. 이전부터 이탈 조짐이 있던 충북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민련의 세가 강한 대전에서조차 1석도 배출하지 못했다. 심지어 비례대표에서는 한나라당에게도 밀린 3위를 기록한 것이 뼈아팠다. 불과 2년 전, 자민련의 몰락이 가속화되던 시기에도 대전 40%, 충북 33%, 충남 66% 득표라는 성적을 거뒀던 것에 비해 고작 15%밖에 득표하지 못했다.[28] 그나마 충남에선 4석으로 꽤 성과를 냈는데 부여-청양에서 2배 차이로 압승하고, 당진군에서 단 9표 차이로 신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홍성-예산에서만 10% 격차로 이겼다.

5.1.3. 호남권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25석 5석 0석 0석 0석
비례대표[A] 54.27% (1,308,898) 25.35% (611,523) 11.45% (270,069) 2.77% (66,746) 0.81% (19,472)
종합[B] 범진보 범보수
30석 / 91.07% (2,196,490) 1석[무소속] / 3.58% (86,218)

새천년민주당의 잔혹사 새천년민주당은 광주, 전북에선 싹쓸이 패배를 당했고, 전남에서만 겨우 생존했다.[32]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긴 5석에선 담양-곡성-장성 지역구를 제외하면 비교적 넉넉한 격차로 이겼다는 점이다.

5.1.4. 대경권(TK)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0석 0석 0석 26석 0석
비례대표[A] 22.23% (522,295) 1.25% (29,289) 11.59% (272,293) 59.03% (1,386,969) 0.96% (22,493)
종합[B] 범진보 범보수
0석 / 35.07% (823,877) 27석[무소속] / 59.99% (1,409,462)

한나라당의 대승, 열린우리당이 가장 부진했던 지역구다. 당연히 대구에서도 2배 이상 격차로 졌고, 경북의 일부 지역구에선 열린우리당졌잘싸가 있었지만, 한나라당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5.1.5. 부울경권(PK)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4석 0석 2석 34석 0석
비례대표[A] 32.12% (1,162,870) 1.62% (58,644) 14.58% (527,772) 46.21% (1,673,019) 0.73% (26,218)
종합[B] 범진보 범보수
6석 / 48.32% (1,749,286) 35석[기타정당포함] / 46.94% (1,699,237)

겉으로는 한나라당의 압승.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부산광역시에서 선전했으며, 울산광역시경상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일단 열린우리당은 부산에선 16대 총선 때보단 득표율이 2배 이상 올랐지만, 불과 1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다만 영도구(김정길), 남구 을(박재호), 북구·강서구 갑(이철), 북구·강서구 을(정진우), 해운대구·기장군 갑(최인호), 사상구(정윤재)에선 40%대 득표율을 내서 상당히 성과를 냈다. 어찌 보면 부산광역시에도 노무현 탄핵으로 인하여 한나라당에 대하여 상당히 비토가 많았다는 뜻이다.[39]

울산에선 울주군에서 강길부가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는 3당 합당 이후 울산 울주군에서 유일하게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당선된 사례다. 물론 강길부는 참여정부 말기에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으로 갔다.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와 창원시 을(現 창원시 성산구)에서 당선자를 냄으로써 세력을 지키는 데엔 성공했지만, 울산 동구에선 정몽준이 출마해서 겨우 23%를 내는데 그쳐서 참패했고, 경남 마산시 을(現 창원시 마산회원구), 거제시와 부산 영도구에선 애매하게 높은 득표율이 나와서 어부지리로 한나라당이 당선되게 만들었다. 다만 21대 총선의 정의당 - 민주당보다도 성향 격차가 더 컸기에[40] 단일화가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참작될 만 하다.

5.1.6. 강원도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2석 0석 0석 6석 0석
비례대표[A] 38.13% (252,922) 3.50% (23,222) 12.80% (84,909) 40.63% (269,533) 1.33% (8,854)
종합[B] 범진보 범보수
2석 / 54.43% (361,053) 6석 / 41.96% (278,387)

열린우리당은 춘천시와 철화양인에서 아쉽게 석패함으로써 한나라당에게 과반을 허용하고 말았다.

5.1.7. 제주도

구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역구 3석 0석 0석 0석 0석
비례대표[A] 46.00% (108,725) 5.08% (12,006) 14.08% (33,287) 30.81% (72,815) 1.11% (2,635)
종합[B] 범진보 범보수
3석 / 65.16% (154,018) 0석 / 31.92% (75,450)

전통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에 유리한 지역인 제주도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무난하게 전 의석을 가져갔다.

5.2. 총론적 분석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45]
진보정당 10석 민주당계 161석 보수정당 128석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국민통합21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10석 152석 9석 1석 5석 122석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나 확보하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집권여당이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46] 민주당계 정당 입장에서도 민주화 이후 최초의 과반 달성이었다. 다만 선거 초반 탄핵 역풍을 타고 최대 200석 이상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언론의 설레발이 나오고,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최대 170~180석대는 확보할 것이라는 예상이[47] 나왔던 것에 비해 실제 결과는 다소 아쉬운 감이 있는 신승이었는데, 상술했듯 선거 며칠전 터진 정동영 전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노인층 이탈이 컸다는 분석이 많았다.[48] 비례대표 선거 결과에서도 보이듯 민주개혁계 정당표가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민주노동당으로 뿔뿔이 갈린 탓도 한 몫 한듯.

한나라당은 박근혜 조차 80 ~ 100석 정도만 차지해도 좋겠다고 말할 지경이었던 당초 예상보단 많이 선전했다는 평. 121석으로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는 의석수를 기록하며 의석감소가 생각보다 덜했다.[49] 세부적으론 전통적인 한나라당의 약세 지역인 호남은 물론이고 충청도제주도에서도 참패하며 털렸지만, 기존 텃밭이던 경상도만큼은 사수하는데 성공했고[50], 수도권[51]과 강원도 지역에서도 생각보다 선전했다.[52] 전체 득표율도 16대 총선 때와 비교하면 39%에서 37.9%(지역구), 35.8%(비례대표)로 소폭의 하락세로 나름 선방했다.

반면에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은 말 그대로 폭망했다.[53] 지지기반인 전라남도[54]충청남도[55]에서 지역구 5석, 4석을 힘겹게 확보하긴 했지만, 비례대표 득표율에선 민주노동당한테조차 밀리며 원내 교섭단체도 못 만들 정도로 과거에 비해 처참한 군소정당 신세로 쪼그라들고 만다. 특히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56]이었던 김종필은 자민련이 득표 3%에 미달해 낙선하고 이 충격으로 길었던 정치 생활을 끝내고 정계에서 은퇴한다.[57] 그리고 그 빈자리는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이었던 노회찬 전 의원이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에선 울산과 경남 1석씩을 얻으며 총 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지만, 비례대표에서 무려 277만여표, 13%라는 정당 지지율을 얻으며 8석을 챙겨 총 10석으로 원내 3당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외 정몽준 전 의원의 국민통합21울산광역시 동구에서 1석을 얻지만, 당은 얼마 안 가 사라진다.[58] 참고로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 및 그 협력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와 가족들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특이한 곳으로, 정몽준이 유리할 수밖에 없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한국노총계의 녹색사민당도 출마한 선거였지만, 1% 득표에도 못 미치는 쓴 맛을 맛보았다. 또한 가까스로 1% 넘긴 기독당도 기독교계 정당의 힘을 보여주었다.

5.2.1. 민주당계 정당의 표분산

사실 간과하기 쉬워서 그렇지 열린우리당의 예상보다 못한 저조한 성적[59]에는 민주당계 정당의 표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갈렸고,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정치를 이끌 진보측 대안정당으로 일어난 점이 컸다. 실제 꽤 많은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이 낙선했는데, 특히 서울특별시가 심했다.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16석씩이나 건진 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표 분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당시 민주당계 정당 및 진보정당의 표 분산으로 다른 후보가 당선된 선거구는 다음과 같다.
  • 우리당 + 민주당 + 민주노동당 (한나라 -2)

이를 모두 반영하면 한나라당은 무려 29석을 손해 봐서 100석에도 미달하고, 자민련은 4석에서 3석으로 한 석 줄어든다. 물론 단일화가 된다고 해서 그 표가 모두 단일화 후보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득표수로 보아선 분산 효과가 엄청났다는 것.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 승리에 묻혀서 그렇지 이때 한나라당이 얻은 어부지리는 엄청났다. 탄핵 사태를 불러온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가 결과론적으론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특히 서울의 경우 열린우리당+민주당 후보의 표를 합칠 경우 한나라당은 겨우 6개 선거구에서밖에 못 이겼는데, 그 6개 중에서도 원희룡이 있는 양천구 갑을 제외하면 다 강남3구 지역이니 전멸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3석을 건졌던 인천광역시조차도 우리당, 민주당, 민노당까지 합칠 경우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전멸이다. 또한 강원도에서는 무려 8석 중에 6석을 가져가서, 여기서도 제1당이 되었을 것이다.

무려 40석을 차지하는 부산경남권에서도 열린우리당은 고작 4석밖에 못 얻었는데, 만약 반한나라 연대가 이루어졌다면 6석을 더 얻어서 10석으로 20대 총선과 버금가는 의석을 만들고, 낙동강 벨트는 더 빨리 형성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의창구(창원시 갑), 울산광역시 중구, 남구 을, 영도구는 3당합당 이후 비민정계 정당이 한 번도 못 이긴 곳[60]이였다. 이렇게 결과가 뒤집힌 지역은 노동계 지지세가 강한 지역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실제 선거에선 지역구 의석을 2석 획득한 민주노동당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을 것이다.

비례대표 득표율과 지역구 의석 수를 비교한다면, 표분산 효과가 더욱 적나라한데,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비례 득표율 합은 46.70%[61]로 한나라당 46.21%를 넘어섰다. 하지만 지역구에선 한나라당 34석, 열린우리당 4석, 민주노동당 2석이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다만, 위와 같이 두 당의 표를 단순 합산하는 것은 현실상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저렇게 표를 많이 얻은 것은 양당에 대한 비판과 참신함을 인정받아서였으며, 열린우리당 역시 호남 이미지를 탈색하며 중도보수표를 상당히 얻어온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과 선거 연대를 하는 실현 가능성은 당시 선거에서 매우 희박했는데, 일단 새천년민주당인 경우는 탄핵의 당사자였기에 열린우리당과 단일화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이고,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한나라당-열린우리당과 다른 진보의 적자로 보고 있는데다, 2021년 현재의 정의당 - 더불어민주당보다도 성향 격차가 더 컸기에 단일화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살아난 보수 정치인들 중에선 유독 거물급들이 많았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당장 이재오(서울 은평 을), 정두언(서울 서대문 을), 홍준표(서울 동대문 을), 황우여(인천 연수), 김기춘(경남 거제), 김형오(부산 영도), 안상수(경기 의왕/과천), 전재희(경기 광명 을) 같은 경우 지역 거물들임에도 이 선거에서 하마터면 줄줄이 낙선할 뻔 했다. 다만 이 와중에도 심재철이나[62] 원희룡, 김문수는 너끈히 과반 득표를 하고, 자민련의 이인제도 안정적으로 별 탈 없이 당선되는 등 지역구를 잘 관리한 덕을 본 의원들도 일부는 있었다.

그나마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다행은 민주당계 지지자들 사이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의 표 분산은 엄청 심하게 일어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새천년민주당이 이때 선전했다면 열린우리당은 과반 얻기도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63] 실제 당을 박차고 먼저 나간건 열린우리당 쪽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새천년민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열린우리당 후보들은 어찌됐든 분열의 원죄가 있기에 표 분산을 이유로 민주당 후보 사퇴를 압박할 정당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지지자들이 알아서 다수는 우리당 쪽으로 뭉쳐주며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5.2.2.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은 왜 탄핵을 했는가?

일단 이 선거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전국단위 선거였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여당에 허니문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사실 당시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으나,[64] 일단은 취임한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더 지켜보자는 여론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젊은 피로 인식되던 86세대가 전면으로 나선 신 여당에 대한 기대감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실제로 선거가 다가올수록 여당의 지지율이 상승하던 상황이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은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천년민주당 쪽의 상황이 심각했는데, 가만히 있다가는 3당으로 전락할 것이 유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남에서는 DJ의 영향력도 있고 해서 비교적 우위에 있었으나 비호남, 그 중에서도 주요 인사들이 열린우리당으로 많이 빠져나간 수도권에서는 탄핵 이전에도 이미 고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65] 민주당 입장에서 3당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민주당계 정당의 주도권 싸움에서 열린우리당에게 패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당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또한 이대로 가다가는 1당 사수도 어렵겠다는 비관적 예측이 나오기 시작했고[66] 결국 판을 뒤집을 만한 승부수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결국 두 당이 연합하여 탄핵안 소추를 가결시키게 된다.

문제는 지지층 결집을 위해 감행한 정치적 승부수가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탄핵안 통과 당일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탄핵의 정당성을 강조함은 물론이요, 탄핵으로 인해 지지층이 오히려 더 결집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통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이 (특히 대통령을 당선시킨 새천년민주당에서) 심했을 뿐더러, 이런 국회의 강한 반감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향후 여론의 지지와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67] 그렇기에 선거를 고작 한 달 앞두고 탄핵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대착각이었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은 모든 논란을 묻어버리고 17대 총선을 탄핵심판 선거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층 결집은커녕, 지지층이 붕괴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특히 지지층 붕괴는 열린우리당과 지역기반(호남 및 수도권) 및 지지세대(20~40대)를 공유하고 있던 새천년민주당에 치명타였다. 한나라당은 그래도 영남이라는 굳건한 지역기반과 정동영의 노인 비하 발언으로 인한 지지층 재결집 덕에 새천년민주당만큼의 괴멸은 당하지 않았다.

결과론적이지만 선거전략으로서의 탄핵은 치명적인 실수였던 셈. 탄핵이 지나치게 정략적이고 선거 목적이라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도 분명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 위반이 탄핵의 주된 사유였고, 이는 헌법재판소에서도 위법사항이 맞다고 인정은 했지만, 아직 입당도 안한 대통령이 사실상 자당 지지해달라는 말 한마디했다고 바로 탄핵으로 가는 것을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임기 2년차를 시작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탄핵까지 하며 여기에 탄핵안 통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장석 점거 농성을 하다가 야당의원과 국회 경위들에게 하나둘 끌려나가며 절규하는 모습은 대중의 동정심 + 야당연합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5.2.3. 엇갈린 운명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똑같이 탄핵을 주도했지만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은 너무나 판이했다.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제1야당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사회생한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노동당한테까지 밀리며 아예 존재감조차 희미한 의석 9석의 제3야당, 군소정당으로 몰락했다. 이러한 상반된 결과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영남, 장년층 기반의 한나라당과 호남, 청년층 기반의 새천년민주당

두 당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탄핵 후 3월 말엽까지는 한나라당도 영남, 장년층이라는 지지층이 개박살나긴 마찬가지였으나 본격적으로 총선정국으로 전환되면서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인해 지지층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나라당이 처음 탄핵안을 통과시키면서 기대한 지지층의 대대적 결집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은 있었지만 의석수 50~60석 내외의 정당으로 몰락할 뻔한 상황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때문에 열린우리당에게 절반이나 뺏길 우려까지 나오던 TK 의석을 무소속에게 1석 내준 걸 제외하면 모두 사수해냈고, PK에서도 부산 1석, 경남 3석, 울산 3석만을 다른 정당에게 내주며 선전했다. 부산의 1석은 무소속 박종웅 후보 덕분에 한나라당 표가 분산된 탓이 컸고,[68] 경남의 3석 중 2석은 김해시로, 노 대통령의 고향 버프를 꽤 받았다.[69] 남은 1석은 창원의 성산구였는데, 이 지역은 출마한 후보가 민노당 권영길 후보로 지난 대선 때 꽤 화제를 모으며 전국구 네임드가 된 덕이 컸다.[70] 울산의 3석 중에서도 1석은 88년 이래 지역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정몽준 후보였으니 울산에서 잃은 의석은 실질적으로는 2석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동영의 막말 파문 이후 영남과 강남3구 등 보수 강세 지역들의 장노년층 표가 대대적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부터 보수 강세지역에 속하는 통영시·고성군, 밀양시·창녕군, 의령군·함안군·합천군에서도 열린우리당 후보가 40%를 얻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남권에서도 간신히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지만[71], 소선거구제의 특성과 영남(68석), 특히 부산경남의 의석수(41석)를 생각해 보면, 사실상 기사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새천년민주당은 최대 지지기반인 호남을 송두리채 빼앗겼다. 전라북도광주광역시에서는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전라남도 13석 중에서도 5석에 그치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72] 영남을 지켜 기본적인 의석을 바탕에 깔았던 한나라당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호남 외 지역구에서는 단 1석도 못 얻었다. 탄핵 역풍으로 인해 비호남 지역의 민주당계 지지자들이 대부분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호남 다음가는 민주당이 약간 우세한 지역인 서울의 결과만 봐도 처참했다.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대부분의 후보들이 선거비 반액 보전의 기준인 10%에도 못미치는 한 자리수 득표에 그쳤다. 지역 구청장까지 역임한 용산 선거구 성장현 후보가 8%대 득표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 예전부터 지역구 관리를 열심히 했거나 이름이 높았던 몇몇 후보들이 선전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추미애[73](광진구 을, 30.08%) 말고는 30%대 득표자도 없으며, 20%대로 기준을 낮춰도 함승희(노원구 갑, 26.72%), 김민석(영등포구 갑, 20.88%), 김성순(송파구 병, 25.14%) 3명이 전부였다.

2. 박근혜로 대동단결 한나라당, 옥새파동 분열의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의 경우 그래도 비교적 조기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6차 전당대회는 탄핵과 별개로 최병렬 대표의 사퇴로 인해 3월 18일에 치러지기로 예고되어 있었지만, 탄핵으로 인해 이 전당대회는 그야말로 당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당대회는 5일 뒤로 연기되어 23일에 치러졌는데, 여기서 한나라당은 당 원내총무로서 탄핵에 앞장섰던 홍사덕 말고 지도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박근혜를 당 대표에 취임시킨다.

이 선택은 사실상 국민들에게 탄핵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천막당사, 반성하는 CF 등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총선에서 단일대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탄핵 이전부터 지속된 당내 갈등이 계속되어 막장으로 가고 있었다. 신당파가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으로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동교동 중심의 구주류와 추미애 중심의 개혁파가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탄핵 이후 이 갈등은 더더욱 심각해져서 당대표 조순형의 공천장과 선거대책위원장 추미애의 공천장이 같이 선관위에 제출되는 개막장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개혁파에 속한 당직자가 몰래 당 직인을 빼돌려서 추미애 측에 건네줘 이뤄진 사건으로 구 주류는 기겁하여 허겁지겁 새로운 직인을 만들고 직인변경신청서를 선관위에 제출해 기존 직인과, 이 직인이 찍힌 추미애측의 공천장을 무력화시켰다. [74]

이런 상황에서 당대표 조순형은 느닷없이 지역감정을 타파하겠다며 대구광역시에 출마해버린다. 당을 선거대책위원장인 추미애에게 맡기고 본인은 사실상 도망가버린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덕분에 추미애는 당을 살리겠답시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광주에서 사죄의 3보1배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엔 차라리 그 시간에 본인 선거구에서 유세를 했으면 본인은 생존하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있었다. 여담으로, 추미애 전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한게 자신의 정치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었다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다만, 추미애 전 의원은 적극적인 탄핵 찬성파는 아니었고 당론에 휩쓸려버린것에 가까웠으며 퇴근 도중 만난 기자들에게 탄핵 반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5.2.4. 자민련의 몰락, 양강 구도의 형성

1995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세운 자유민주연합15대 총선에서 충청권의 압도적 지지와 영남 지역의 반민자-비민주 정서에 힘 입어 무려 50석을 차지하면서 통일국민당에 뒤이어 3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자민련과 새정치국민회의는 DJP연합을 결성에 정권을 교체하였고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등 자민련은 한나라당새정치국민회의 사이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 수준의 위세를 가질 수 있었다.[75][76]

이러한 점 덕분에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133석과, 새천년민주당 115석에 자민련은 한참 밀리는 17석을 얻는데 그치며 교섭단체마저 무너졌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에 여전히 김대중김종필의 연립 정부가 유지되고 있었고 새천년민주당의 의석 꿔주기[77]로 어찌어찌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법적으로는 양당제에 가까웠지만 삼김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한나라당=경상도, 새천년민주당=전라도, 자민련=충청도라는 지역분할구도의 영향으로 사실상 3당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번 17대 총선은 달랐다. 가장 먼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미 은퇴하고 삼김 중 김종필 혼자만 정계에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이미 새천년민주당과의 분열로 의석이 반토막 나있었기에 김대중과 달리 자민련의 도움이 필요없었다. 즉, 자민련이 더 이상 연립 정부 구성을 통해 정권을 잡을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한나라당에서 김영삼이 물러나고 이회창이 총재가 되면서 자민련이 주장하던 원조보수론이 더 이상 TK지역과 보수 세력에게 먹히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8년, DJP연합이 시작되면서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이는 자민련이 김대중 정부 5년을 거치며 충청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기반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입지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정통보수론은 이미 한나라당에 밀렸고 연립 정부 구성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의 민주계 분열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새로운 제 3지대로는 민주노동당이 떠오르던 상황이었다. 자민련이 믿을 것은 오직 충청도의 민심 하나 뿐이었지만 출구조사에서 충청도마저 열린우리당에 크게 밀리며 참패가 예고되었다. 출구조사에서 자민련은 KBS 3~4석, SBS 2~7석, MBC 3~6석이 예상되었고 최종적으로 4석을 얻으며 결과가 들어맞았다. 하지만 이는 자민련이 선거 전략을 잘못 짠 것과 탄핵 대선의 영향으로 자민련이 봉쇄조항 3%를 넘기지 못한 탓이었다.[78] 당시 자민련은 비례대표 1번으로 김종필이 나섰는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김종필은 충청도에서는 아직까지 어느 정도 지지가 남아있었지만 그 외 지역의 지지는 대부분 잃은 상태였다. 따라서 충청도 이외의 지역에서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을 당선시키려고 자민련에게 투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발상이다. 차라리 김종필이 당시 경합으로 예측되던 서산-태안이나 아산 선거구에 지역구 출마를 했더라면 훨씬 당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고 자민련은 비례대표에서 3% 득표를 넘지 못해도 지역구 5석을 얻어 봉쇄조항을 넘을 수 있었다. 만약 실제로 성립되었다면 자민련은 지역구 5석 + 비례대표 2석으로 출구조사에서 최대치라고 기록되었던 7석까지는 얻을 수 있었다. 물론 7석이라는 수치도 높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과 새천년민주당의 9석과 거의 비슷한 수치고[79] 적어도 김종필의 정계은퇴가 4년 더 늦춰져 자민련이 공중분해되어 처참히 소멸되는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김종필도 9선으로 정계은퇴를 하게 되며 "10선 의원" 달성에는 실패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자민련은 탄핵 대선의 영향과 선거 전략 실패로 김종필 정계 은퇴라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약 10년간 제3당으로써 영향을 행사했던 자민련은 급속히 무너져 소멸된다. 김종필의 정계 은퇴와 자민련의 몰락으로 삼김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당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만이 남아 양강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80]

5.2.5. 민주노동당의 선전, 진보정당의 첫 원내 진출

과반 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 탄핵 사태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은 한나라당 모두 할 말은 있는 선거였지만, 사실 17대 총선 당시 가장 센세이셔널했던 이슈는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의 첫 원내 진출이었다. 민주노총이 주축이 된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멀게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독자후보 백기완 출마부터, 가까이는 국민승리21까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해 왔으나 유서 깊은 사표론과 국민 정서상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현실 정치에 있어선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당[81] 등 선거 패배 이후 강제해산되거나 흐지부지되었던 과거의 진보정당들과는 다르게, 1997년의 국민승리21에 뿌리를 두고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제16대 총선의 원내 진출 실패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비록 적지만 의미있는 숫자의 지방의원을 배출해 낸 민주노동당은 같은 해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을 후보로 내세우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2003년 대통령 탄핵 사태 역시 양당 모두와 거리를 두며 비판하던 민주노동당에게 불리할 것은 없었고, 1인 1표 선거제 위헌 판결로 인해 도입된 1인 2표 비례대표제 역시 민주노동당에게는 새로이 얻은 날개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들은 권영길, 조승수의 두 지역구 당선과 더불어 277만여 표에 육박하는 13.03%의 정당 득표로 8석의 비례대표를 획득, 순식간에 원외 정당에서 원내 3당의 자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MBC-엠비존 패널조사 교차투표 양상
열린우리당 후보 투표자[82]의 정당투표 (단위: %)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기타
74.0% 19.0% 3.0% 4.0%
한나라당 후보 투표자[83]의 정당투표 (단위: %)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기타
79.0% 11.0% 5.0% 5.0%
새천년민주당 후보 투표자[84]의 정당투표 (단위: %)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기타
64.0% 17.0% 11.0% 8.0%
민주노동당 후보 투표자[85]의 정당투표 (단위: %)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기타
74.0% 17.0% 6.0% 3.0%
이때 MBC 선택 개표방송에서 출구조사[86]와 별개로 여론조사 기관 엠비존에 의뢰해 유권자 2,751명을 상대로 선거 80일 전부터 당일까지 총 7차례 휴대전화 패널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중 지역구를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19%가 민주노동당에 정당투표를 했는데 아무래도 지역구는 당선 경쟁력이 있는 열린우리당 후보를 찍고 정당투표는 노선이 선명한 민노당에 찍는 사표방지 심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출처

17대 총선 당시 비례대표 의원으로 원내에 첫 진출한 심상정(비례 1번)과 노회찬(비례 8번)은 후일 한국의 진보정치를 상징하는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며, 민주노동당 역시 이후 통합진보당계 정당(정의당진보당)과 진보신당계 정당(노동당)의 모체가 된다.

6. 국회의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7대 국회의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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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총선이 끝나고 약 1달 후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심판을 내리게 되는데, 노 대통령의 일부 발언이 위법한 것은 인정되지만 탄핵될 정도의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하며 탄핵 기각 판결을 내렸다. 상세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문서 참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무소속 당선자가 가장 적었던 선거였다.[87] 명단이라곤 경상북도 문경시·예천군에서 당선된 신국환 의원과 전남 나주시·화순군 선거구에서 당선된 최인기 의원 단 2명 뿐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때 무소속으로 당선된 두 의원은 서울대 법대 동문(신 의원이 3년 선배)에 고시(행시 4회) 동기라는 인연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후 국민통합21정몽준 의원이 당선 뒤 당을 해체하면서 무소속 국회의원은 3명이 되었다. 참고로 경북 문경시·예천군의 무소속 당선자 신국환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과거 자유민주연합으로 지역에서 3번(총선 2회, 재보궐 1회) 출마했던 경력이 있었는데, 자유민주연합이 공중분해되면서 2005년 10월 창당된 국민중심당 공동대표가 되었다가 2007년 탈당, 중도개혁통합신당(대통합민주신당의 전신)에 합류 후 정계를 은퇴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다음 총선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에서는 무려 25명의 무소속 당선자가 나와 민주화 이후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자 최대를 기록했다.

17대 총선에서 1위와 2위간 격차가 1000표차 미만으로 나왔던 지역구는 총 10곳이다.

열린우리당 안티 진영에선 이후 이 당시 탄핵 역풍의 영향으로 대거 당선된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들을 탄돌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전라남도 지역은 당시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그야말로 진검승부를 벌인 선거판이었다. 결과는 7:5로 열린우리당 승. 사족으로, 목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호남의 대표 정치인인 김대중동명이인김대중 전 목포시의회 의장[89]을 공천했으나, 낙선했다.[90] DJ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천년민주당은 자신들의 보스격인 DJ에게 지지를 바랬지만, DJ는 중립을 지키며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을 외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를 보이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대북송금특검 논란으로 참여정부와 사이가 어정쩡해 있던 상황에서 측근들을 외면하는 대신 화합을 도모한 셈이었다. 실제 사망 직전까지 했던 얘기도 절대 당 내에서 (영호남) 분열하지 말고 단합하라는 메시지였다.[91]

이 선거 이후 13년 뒤 똑같이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때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 중 무려 6명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92][93] 물론 한국에선 국회의원이나 시장 등 다양한 정계 경력을 쌓다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사실 엄청 특이한 상황까진 아니다.



윤민석이 작곡한 투표부대송. 당시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플래시는 바른손이 제작했다. 가사에 당시의 인터넷 유행어였던 아햏햏 코드도 들어가 있다.[94]

주5일 근무제도가 전면 도입됨에 따라 전국단위 선거를 목요일이 아닌 수요일에 치르도록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이 선거가 목요일에 치러진 마지막 전국단위 선거가 되었다.

이 선거부터 달라진 점은 군단위 도시들은 단독 선거구를 구성하지 않고 인근 지역들과 합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여군은 제16대 국회까지는 단독 선거구였으나, 제17대 국회부터는 가까운 여러 지역들과 합구하고 있고, 다른 지역들의 군단위 지역들도 다 마찬가지다. 다만 당진군과 청원군만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근 지역과 합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당진군은 18대 총선까지 단독 선거구를 유지하다가 19대 총선을 앞두고 로 승격하면서 선거구명도 '당진군'에서 '당진시'로 변경되었다. 또한 청원군은 19대 총선까지 단독 선거구를 유지하다가 2014년에 청주시와 청원군간의 통합이 성사되면서 20대 총선의 선거구 조정과정을 통해 선거구명이 ‘청주시 청원구‘로 변경되었다. 이리하여 제20대 국회부터 대도시 내에 있는 지역구들[95]을 제외하고 도 내의 군단위 단독 선거구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7.1.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이 허가되면서 16대 총선부터 시작된 낙천, 낙선 운동은 이번 선거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2004년 총선시민연대는 2월 5일 1차 낙천, 낙선 운동을 발표하였다. 1차 기준에 따르면 총 66명이 낙천, 낙선 대상자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이 되면서 탄핵 참여자들은 모두 낙선 대상자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시민단체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일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특히 새천년민주당 김상현 전 의원 같은 경우엔 본인이 직접 시민단체에 방문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자신을 구태 정치인으로 몰아간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낙선 운동은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이후 다시 비판 기능을 내세운 시민단체들이 여당 정책에 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광범위한 낙천, 낙선 운동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지게 된다.

[1] 당시는 탄핵 소추 정국이었기 때문에 뉴스에서도 중립성에 만전을 기울였다.[2] 참고로 선거일 당일이 으레 선거가 치러지는 수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인데, 이는 당해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선거일이 국회의원 임기만료일전 50일 이후 첫 번째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개정되었기 때문. 이전의 총선들은 하나같이 목요일이었다.[3] 투표율이 저조했던 2000년대 총선/지선들 중 가장 양호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후술한 것처럼 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4] 이전까진 1인 1표제였고,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했다.[5] 지방선거까지 확대하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의원 선거에서 먼저 실시했다.[6]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신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후 여당의 큰 분열로 여당이 두 동강나는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 성향의 탈당파인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래서 미니 여당이 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열린우리당 문서 참조.[7]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고 말했다.[8] 참고로 이땐 동물국회가 여전하던 시절이라서 유시민 전 의원은 울며불며 저항하다 결국엔 동료 의원들에게 끌려나갔다. 이해찬 전 의원도 양팔을 붙잡히며 끌려나갔다. 물론 결과론적으론 이런 모습들이 방송을 타며 국민들에게 내가 뽑은 대통령 왜 니들이 맘대로 탄핵하냐는 식의 대대적인 동정심 유발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9] 손석희 당시 앵커가 한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될걸 알았으면서도 야권은 왜 탄핵을 추진했냐는 의도로 물은 것이지만, 사실 정확한 발언은 "그렇다면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였다. 이때 야권이 이런 위험부담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탄핵을 강행했는지는 후술 내용 참조.[10] 그러나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일종의 쇼라고 볼 수 있는게, 이 천막당사를 차린 옛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자리(현 서울국제금융센터 자리)의 50일간 임대료는 무려 4,200만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열린우리당의 여의도 당사 건물의 월 임대료는 2,500만원이었다. 즉, 하루 임대료를 계산하면 한나라당 천막 당사의 임대료가 열린우리당 당사 임대료보다 근소하게 높았다.[11] 이때 부산 서구에 출마했던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선거운동을 도저히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선발대로 나간 선거운동원들이 민심이 난리가 나 말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 다급하게 전했지만 그래도 설마하는 마음에 연설을 시작했는데, 날아오는 배추와 욕설, 물세례까지 받고는 중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개별적으로 명함을 돌리고 있으니 "난 60대야!"라면서 면전에서 명함을 찢어버리는 사람, "아비도 모르는 XX새끼!"라면서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자기 부모를 화나게 했다며 지지할 수 없다고 외면했다. 결국 시장 바닥에 아내와 같이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빌어야 했다. 결국 그는 낙선하고 그 뒤 정계를 은퇴했다.(출처: <너무 다른, 너무 같은 두 남자 이야기>)[12] 1석이 확실이었으며 SBS는 기타/무소속으로 분류했다.[13] 국민통합21을 기타/무소속으로 포함.[14] 지난 16대 총선보다 선거구를 40여개 늘려 120개 경합 선거구에서 현장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나머지 선거구는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또 하나의 선거구당 투표소를 6개에서 12개로 늘려 표본의 크기를 늘려 오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 지난 16대 총선보다 선거구가 40여개 늘어난 120여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25만명을 대상으로 현장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 나머지 선거구는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16] 김두관 의원(전 경남지사)의 동생이다. 당시 총선에서 두 형제가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은 고향이자 남해군수를 지낸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현역의원 박희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17] 최종 개표 결과 9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1988년 소선거구제 부활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역대 두번째로 1, 2위 표차가 적었던 지역구. 1위는 16대 총선 경기 광주의 3표차. 하지만, 자민련 최종 결과가 지역구 4석, 비례 0석으로 폭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묻혀버렸다.[18] 1, 2위 후보 간 득표율차만 발표했다.[19] 해당 자료에서는 경합지역 예측 오류 예시로 인천 중·동·옹진(서상섭한광원)이 언급되며, 개표방송 중 자막을 보면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정우택김종률)도 1,2위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20] 지역구 -19, 비례대표 -1.[21] 지역구 +18, 비례대표 +2.[22] 재미있게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거둔 수도권 성적(서울8+경기7+인천1석)과 비슷하다.[A] 비례대표 득표율의 합이 100%가 안 되는 이유는 군소정당 표와 무효표를 집계에 제외했기 때문.[B] 지역구 의석 수 / 비례대표 득표율.[A] [B] [27] 대전 전역을 다시 싹쓸이하는 데는 이로부터 16년이 지나서였다.[28] 자민련의 후신인 자유선진당이 최소 30% 득표를 항상 넘겼으니 정말 말그대로의 참패였다.[A] [B] [무소속] [32] 아무래도 전남은 김대중의 영향력이 호남에서 제일 강했기 때문이다.[A] [B] [무소속] 포함.[A] [B] [기타정당포함] 정몽준 후보가 국민통합21 소속으로 울산 동구에서 당선되었다.[39] 참고로 외적인 결과는 16년 후에 치른 선거 결과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이때와 달리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기본적인 득표율이 많이 오른 상황이다.[40] 굳이 비유를 하자면 진보당과 더불어민주당 격차라 보면 된다.[A] [B] [A] [B] [45] 무소속의 경우 보수계 2석.[46] 1990년대 국회의 경우 여당이 과반을 달성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선거 이후 합당, 의원 영입, 연정구성을 통해서 합종연횡으로 달성한 것이고 선거에서는 예외없이 여소야대로 나왔다.[47] 물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와는 다르게 범위를 넒게 표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의미가 없는 KBS 조사(142 - 188석)를 뺀 나머지 조사는 여전히 빗나갔다는 게 함정이었다. MBC 조사는 155 - 171석, SBS 조사는 157 - 182석으로 나왔다.[48] 다만 노인 폄하 발언은 한나라당 고정표들이 남에게 이야기 할 명분일 뿐, 노인 발언이 없었어도 한나라당 고정투표층은 한나라당 찍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단, 부울경 한정으로는 어느 정도 사실인 게 총선 때 의령군·산청군·합천군, 통영시·고성군에서도 열린우리당이 40% 이상 득표했기 때문이다.[49] 후에 이어진 재보궐선거로 최대 130석까지 의석 수를 늘리게 된다.[50] 부산 사하구 을, 경남 김해시 갑/, 창원시 을(성산구), 울산 북구, 울주군을 빼고 다 싹쓸이 했다.[51] 송파구 병을 제외한 강남3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기타 지역들도 당초 여당이 싹쓸이 할 것이라는 전망과는 다르게 상당수 지역구들에서 선방하며 의석을 지켜냈다.[52] 특히 강원도의 경우 16대 총선에선 민주당이 달랑 1당만을 차지했는데, 도리어 여당에 더 유리한 국면이었던 17대 총선에서는 여권 분열에 힘입어 한나라당이 경합지에서 선전하며 6석이나 확보해 1당이 되었다.[53] 심지어 훗날 더불어민주당 2대 대표가 되는 추미애마저도 이 선거에서 낙선했을 정도였다.[54] 광주광역시전라북도는 모두 열린우리당이 차지했다.[55] 대전광역시충청북도는 모두 열린우리당이 차지했다.[56] 이 시점에서 비례대표 남녀 비율은 50%만 채우면 되었다. 그래서 자민련은 상위순번 대부분을 남성으로, 하위순번 대부분을 여성으로 채워 50대50을 맞췄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이후 선거법이 다시 개정되어서 지금은 '비례대표의 홀수번호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되어 있다.[57] 참고로 이때 김종필이 9선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최다선이었다.[58] 그 해 3월에 정당법이 지구당에서 시도당 제도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국민통합21은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여 최종적으로 9월에 해산되었다.[59] 과반 이상의 확보가 처음이라 상당한 강세를 보였다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여론조사 예측에선 열린우리당이 155석에서 180석, 최대는 200석까지 확보하리라고 보는 결과도 있었기에 절대치론 승리였지만, 상대적으론 예상보다 못한 기대치의 성적이었다. #, #.[60] 특히 영도구에서는 김정길 후보가 김형오 후보에게 단 3%밖에 안 밀렸는데, 이것은 당시 영도구에서 치른 총선 중 역대 최저 득표율차였다.[61] 우리당 32.12% + 민노당 14.58%. PK지역은 민노당의 홈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전국 권역들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62] 하지만 16년 뒤 심재철도 21대 총선에서 상대는 다름 아닌 20대 비례대표 초선인 이재정 후보에게 큰 표차로 밀려 낙선하여 결국 처음으로 쓴 맛을 경험하였다.[63] 참고로 20대 총선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과 달리, 열린우리당은 친노 및 신 호남계 포함 당시 기준 소장파 인사들이 구 호남계가 주류던 원 소속당 새천년민주당을 뛰쳐나가 만든 정당이었다. 안철수와 호남계가 뛰쳐나가 만든 국민의당과 대비되는 점이다. 다만 열린우리당은 현직 대통령이 같이 움직였고, 새천년민주당의 보스격인 DJ도 이를 묵인해주며 사실상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차이가 있었다.[64] 2003년 말-2004년 초 실시된 여론조사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0%대 정도였다.[65] 실제로 호남에서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 접전이 펼쳐진 곳이 꽤 많았고, 이 지역들은 탄핵 사태가 없었다면 민주당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수도권 등에서는 적지 않은 지역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고작 한 자리수 득표율에 그쳤는데, 이는 탄핵 역풍 이전에 애초에 인물경쟁력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많이 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66] 사실 한나라당의 경우 영남 등 지역기반이 워낙 강고해서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도 100석 이상은 획득하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애초에 한나라당이 염려하던 상황도 수도권에서의 부진으로 2당으로 내려앉는 것이었지, 민주당처럼 50석조차 장담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탄핵이 없었다면, 대략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1당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새천년민주당은 4-50석 내외의 3당, 그리고 자민련과 민주노동당이 비슷한 정도의 의석(7-9석 정도)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67] 당시 국민 여론은 탄핵 반대가 60~70% 수준이었다.[68] 이렇게 해서 당선된 인물이 이후 이 지역구(사하구)에서 현재까지 5선을 내리 하고 있는 조경태 의원이다. 이후 20대에선 보수정당으로 넘어가면서 이 지역구는 보수정당으로 환원됐다.[69] 당시 김해는 경남의 정당비례득표에서 유일하게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앞선 곳이었다. 이후 김해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탈환했으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갑 지역구를 뺏겼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을 지역구마저 뺏기면서 민주당 낙동강 벨트의 희망이 된다. 게다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민주당에 65%의 지지를 보내는 등 완전히 민주당 텃밭화된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도 갑과 을 모두 민주당 승리.[70] 이후 노회찬여영국이 이를 물려받았으나, 21대 영남에서의 보수정당 결집과 민주당의 표가르기로 다시 보수 정당이 탈환한다.[71] 대경권에서는 30%를 넘는 곳이 고령군·성주군·칠곡군, 구미시 을, 영주시, 포항시 남구·울릉군 밖에 없었던 반면, 부경권은 마산시 갑(현 창원시 마산합포구)나, 진해구, 울산광역시 동구를 제외하면, 열린우리당 혹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기본으로 30% 넘게 받았다.[72] 전남은 김대중의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73] 출생은 대구시 내당1동에서 했다.[74] 참고로 김무성옥새런 이후에 치른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완패했다. 그나마 텃밭인 영남권에서는 새누리당이 우세하긴 했지만, 그것도 대구에서 2석, 부울경에서는 무려 10석을 빼앗겼다.[75] 삼김시대는 1960년대부터 형성되었지만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박정희, 전두환의 존재로 인해 권력을 크게 잡을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의 힘이 4당 가운데 가장 컸다. 따라서 삼김의 세력이 1, 2, 3당을 모두 독차지하여 3개 세력이 맞붙은 것은 삼김시대의 끝물인 1995년부터 2002년 정도가 전부다.[76] 따라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상대적으로 김영삼, 김대중보다 약했음에도 비슷한 수준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가장 강력한 세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세력은 서로 비슷했기에 김종필은 둘보다는 약하지만 승리의 추를 한 쪽으로 기울이는 것은 가능한 캐스팅보터로써의 힘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77] 2001년 8월, DJP연합이 깨지기 전까지 새천년민주당에서 자민련에 의원 4명을 빌려주었다.[78] 당시 출구조사를 보면 자민련은 김종필의 예전 지역구였던 부여-청양과 보령-서천 선거구는 압승이 예상되었고 이인제가 논산-계룡-금산에서 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외에는 당진군과 서산-태안, 아산 선거구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였고 비례대표는 봉쇄조항 3%에 미달로 예측되었다.[79] 자민련이 비례대표를 얻는데 성공했다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의석 수가 1석씩 줄어들게 된다.[80] 이후 양강구도는 2016년 국민의당20대 총선에서 38석을 얻기 전까지 한 번도 깨지지 않는다. 자유선진당이나 통합진보당처럼 어느 정도 선전한 정당도 있었지만 자민련의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으며 국민의당마저 2년도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되어 사실상 소멸했음 감안하면 여전히 자민련 정도의 영향력을 보여준 3당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81] 20대 국회의 동명 진보정당과는 다른 정당이다.[82] 791명.[83] 518명.[84] 126명.[85] 114명.[86] 이때는 방송3사가 따로따로 출구조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100여개 경합 지역구에서만 선거 당일 투표소 출구조사를 실시하고 나머지 지역구는 선거 전날과 당일 전화조사를 실시했다. 물론 비례대표 예측을 감안하여 경합 지역구에서도 전화조사를 병행하긴 했지만, 출구조사 보다는 표본의 크기부터가 다르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편이어서 실제로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지역구 뿐만 아니라 전국구 득표율을 맞추지 못 한 적이 있다. 다만 16대 총선까지만 해도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따로 뽑는 1인 2표 제 이전이었다는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87] 이 기록은 20년 뒤 22대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자가 0명 나오면서 비로소 깨지게 된다. 또한 22대 총선은 민주화 이후 뿐 아니라 정당추천제로 무소속 후보의 출마 자체가 금지되었던 6, 7, 8대 총선과 타이기록으로 헌정 이래 무소속 당선자가 가장 적게 나온 선거이기도 하다. 수학적인 논리를 생각한다면 이후로도 22대 총선의 무소속 당선자 최소 배출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인다.[88] 역대 총선에서 두 번째로 적은 격차가 난 지역구[89] 훗날 전라남도교육감이 된다.[90] 당시 목포의 현역 의원부터가 DJ의 장남이었다. 다만 김홍일 의원은 17대에는 비례대표로 선회.[91] 다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다시 합당하고 DJ가 서거한 이후 당 내 갈등이 곪아가다가 20대 총선 목전에 안철수와 호남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민주당계 정당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다시 둘로 갈라서게 된다. 물론 직계는 규모상 아무래도 더불어민주당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때 국민의당 쪽으로 간 인사들은 바른미래당과의 합당, 그리고 분열 과정에서 민생당에 결집했고, 이들은 21대 총선에서 원외 정당으로 전락하면서 철저하게 몰락한다. 이후 민생당에 남아 있던 호남계 인사들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으로 각자 흩어진다.[92] 자유한국당 홍준표(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동대문구 을에서 당선), 바른정당 유승민(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 1년 후 동구 을 당선자였던 박창달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1년만에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그 자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비례대표 의원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변신), 정의당 심상정(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 늘푸른한국당 이재오(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은평구 을에서 당선), 국민대통합당 장성민(17대 총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금천구에서 낙선), 한국국민당 이경희(17대 총선 당시 무소속, 동대문구 갑에서 낙선).[93] 특히 19대 대선 주요 후보들 가운데에는 문재인, 안철수 2명만 2010년대 들어서야 정계에 진출하게 되어 이 문서에 해당하지 않는다.[94] '주침야활 햏자는 도움 청하여', '모조리 방법하자'[95] 달성군, 울주군, 기장군. 다만 기장군도 인구가 적었던 옛날에는 인근의 해운대구와 같은 선거구였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인구 증가로 독립하여 단독 선거구 체제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