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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칭호 표기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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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현황3. 쟁점
3.1. '황제'와 '왕'의 격에 관한 문제
3.1.1. 일본 역사에서의 '천황'에 대한 '왕' 칭호 사용
3.2.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3.2.1. 다른 식민지 지배국들과의 비교에 대하여3.2.2. 구 추축국 일본의 과거사와 언론의 '황제' 인식에 대하여3.2.3. "황제에서 왕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3.3. 외교 석상 및 의전에서의 호칭 문제3.4. 언론의 방송 보도상 용어로써의 '일왕'과 관련하여
3.4.1. 영문 기사의 'Emperor' 번역에 관련하여3.4.2. 일본 황실 궁중용어 표기에 관련하여3.4.3. 중국의 한국 '총통' 표기와 비교하여
3.4.3.1. 김대중 전 대통령 "일왕 표기는 열등감의 표현" 발언과 관련하여
3.4.4. 민주 공화정의 시민으로서의 '천황' 인식에 관련하여3.4.5. 정부의 공식 입장과 언론 보도 및 대중의 인식 사이에서
4. 결론5. 보충: 학술 용어로서의 '천황' 사용에 대하여

1. 개요

'\[팩트체크\] "우리도 일본 천황이라 부르는 게 원칙"? 따져보니'
JTBC 뉴스룸 2019. 8. 21. 보도

일본의 군주인 천황칭호를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대한민국 내의 정치, 언론 및 사회적 쟁점과 사례를 다루는 문서.

2. 현황

본 항목을 읽기에 앞서 천황 항목의 한국과의 관계를 한 번 읽고 오는 것을 권한다.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천황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천황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천황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의 대마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 표기는 '천황'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도 일본의 덴노를 천황이라고 불렀고,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한동안은 '일왕' 등이 사용되었으나,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2]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1945년 01월 01일 ~1999년 12월 31일까지 데이터베이스로 검색해 보면 수치만 가지고 볼 때 일왕(日王)이 1778건, 천황은 1,500건, 일황(日皇)은 762건, '왜황'은 22건이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일황(日皇)'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여 오다 1988년부터 1989년[3] 사이를 기점으로 '일왕'이라고 표기해 부르고 있다.(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한편 북한에서는 일본의 왕조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였던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

3. 쟁점

3.1. '황제'와 '왕'의 격에 관한 문제

일왕이란 표현은 일종의 신문 용어다. 1980년대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과 재일동포 지문날인 강요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천황을 격하시켜 일왕으로 표기했다. 대통령은 천황이라 부르는데 신문과 방송은 꼬박꼬박 일왕으로 바꾸어 쓴 게 20년이 넘었다.
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2008년 4월 24일자 오피니언 '일왕과 천황'에서#
본보 역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한다. 예외적으로 직접 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이라고 돼 있거나 ‘천황제’를 설명할 때만 천황으로 쓴다. 그러나 ‘큰 나라 미국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작은 나라 한국도 대통령인 게 말이 되느냐’며 일본의 극우 언론이 한국은 ‘소통령’이라고 한다면…. 불쾌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도 ‘천황’을 일왕으로 낮춰 부르니까.
동아일보[4]

한국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천황에 대해서는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심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 즉 문자 그대로 한자를 뜻풀이해 '하늘의 황제'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어서 거부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중국에서 비롯된 황제 칭호가 '왕중왕'의 의미나 '신의 대리자', 하늘의 아들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황은 대리자도 아닌 아예 '하늘의 황제' 그 자체라는 뜻의 칭호에서부터 너무 과장이 심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황제는 영토가 넓은 나라의 군주의 이미지가 있으며, 민족주의적 감정과 더불어 일본이 매우 넓은 영토를 갖는 나라는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천황을 '황제'라 인식하지 않는 편이다. 그 밖에도 미디어물, 영화, 게임 등에서 큰 영토를 가지고 수많은 민족, 문화를 아우르는 국가의 수장에 대해선 대부분 '황제'라고 칭한 것 또한 이러한 호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높였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영화, 게임 등에서 등장하는 황제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는 방법 등으로 드넒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의 출신들이고 이러한 미디어물 게임 속의 황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보기엔 천황과 이를 떠받드는 일본에 대해 나라도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 황제를 칭하는 자뻑질로 보인다는 것이다.[5]

아울러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왕' 즉 '일본 국왕' 표기가 한국인의 편협한 민족주의와 과거사 컴플렉스의 발로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논리는 황제를 왕이라 부르는 것이 일종의 '격하'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왕이라는 호칭에 천자로부터 분봉되는 제후왕으로서의 의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독립국 군주로서의 왕도 엄연히 존재하는데, 천황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감정적인 비하이고 격하이며 왕은 비하하는 호칭이라고 한다면 다른 국가의 '왕'이라고 불리는 군주들도 똑같이 '황제'라고 높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조건 비하니까 말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왕'이라는 호칭이 비칭이고 격하라고 주장하며 '천황' 호칭을 내세우는 논자들은 일본 천황만을 '천황'이라고 부르며 띄워 주고 그 외의 국가들은 모두 '왕'이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것이 된다. [6]

일단 실제 역사는 게임과 미디어물과 다르게 황제/왕 칭호를 쓰는 것은 단순한 영토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은 말기에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겨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 남부의 몇몇 공국들을 가진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했으나, 황제(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라는 직함만큼은 유럽 세계에서 엄연히 유지되었고, 이는 왕도 마찬가지여서 대영 제국처럼 소국으로 출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주변 여러 민족을 복속시킨 뒤에도 황제라고 칭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왕(King) 칭호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천황/일왕 표기에 관련한 논점을 논할 경우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례로 가져다 "동로마도 영토가 줄었지만 황제 직함은 유지했는데 일본은 왜 천황이 아니라 일왕으로 부르느냐"라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비교 대상 자체를 잘못 가져온 억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동로마 즉 로마가 구미권에서는 '세계' 그 자체였고[7] 그 로마의 황제가 곧 세계의 황제로 간주되었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3세기에 야마토 왕권이 수립되고 그 통합된 왕권의 수장인 히미코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이래 1,700년의 세월 속에서 일본 왕 즉 덴노는 단 한 번도 동남,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8]활동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활동하지 못했다"가 맞다. 당장 자국 안에서도 이름만 '덴노'라고 달고 있을 뿐 제대로 된 통치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판인데 국외에 눈 돌릴 여가가 있을 리가 있나? 이걸 가지고 "일본 열도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제후국이었던 한반도만큼 크지 않아, 대놓고 황제가 쓰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평하며 일본을 과도하게 띄울 필요도 와 역시 일본 대단해 식으로 감탄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애초에 일본의 국왕인 덴노가 이웃한 중국이나 조선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위협을 느끼고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대단한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니들 멋대로 살아라 식으로 내버려둔 것에 가깝다. 당장 한반도의 고구려는 중국 역대 왕조에 꼬박꼬박 조공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하며 왕조가 바뀔 때마다 알아서 사신 보내 책봉을 받았지만 전연이나 북주에 이어 통일 왕조인 수나라당나라자국의 국력을 쏟아부은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며 어떻게든 정복하려고 애썼고, 만주의 여진족금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황제 칭호는 고사하고 조선이나 명나라, 일본과 달리 통합된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부족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조선이나 명나라는 "여진족이 1만 명이 뭉치면 결코 감당해내기 어렵다"며 이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예방전쟁을 벌이고 틈만 나면 힘을 꺾어 놓으려 애썼다.] 그저 변방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9]

덴노는 일본이라는 열도 안에서나 '유일무이한 황제'였지, 일본 열도가 세계 그 자체인 것도 아니고[10] 그 일본 열도의 지배자인 덴노가 세계의 황제였던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후술하겠지만 덴노에게는 실권이 있었던 시기가 거의 없다시피 해도 무방하다. 당장 덴노케가 '만세일계'라는 이름으로 자랑하는 왕통조차 역사적으로는 게이타이 오키미(繼體大王, 재위 507~531)[11] 중국이나 한반도 삼국처럼 세 번은 왕조가 바뀌었다는 이른바 '삼왕조교체설'이 일본 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으며, 다이카 개신(645년) 이후 3백 년 뒤에는 외척 후지와라 씨의 셋칸정치가 시작되면서 덴노는 실권을 잃었다. 덴노의 친아버지로써 셋칸을 무력화시키고 권력을 황실로 되돌렸다는 인세이(院政)조차도 그 말기에는 헤이케(平家)가 거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다시피 했고, 이어서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덴노의 조정은 통치의 자율성 자체를 아예 잃어버리고 왕위 계승 문제마저도 막부에 의해 '관리'되는 처지로 전락한 뒤로는 '일본의 유일무이한 임금, 위대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권위를 빼고는 실권도 재력도 없는 상태로 7백 년을 이어졌다. 게이타이 오키미가 재위했던 6세기 이후로 덴노케의 피는 1400년 넘게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계사의 최장수 왕조라는 타이틀은 매길 수 있겠지만, 덴노가 실권을 가지고 국정을 주도했던 시기는 다이카 개신을 기준으로 잡아도 메이지 유신 직전의 '왕정복고의 대호령(1868.1.3)'에 이르기까지 기껏해야 4백여 년에 지나지 않으며, 그 메이지 유신조차도 실권은 조슈, 사쓰마 등 이른바 '웅번(雄藩)' 출신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있었지, 덴노가 모든 것을 명령하고 실행하며 '만기친람'하는 정권은 아니었다.

또한 황제/왕 칭호가 영토 크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지, 황제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동양만큼은 아니어도 서양에서도 엄연히 명분상 자격 요건이 존재했다. 그것은 동양에서는 '천명(天命)'이라고도 하고 '대의명분'이라고도, '정통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아무 나라나 너도 나도 황제를 자칭하면서 의미가 바래서 그렇지, 서양에서도 '황제'는 세계에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황제' 칭호 사용에 있어서는 '로마 제국의 후계자' 또는 '교회로부터의 인정'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으며, 이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대개는 앞에서 언급한 대영 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한 것처럼[12] 자칭 내지 참칭 취급을 당했다. [13] 유럽의 이러한 '황제' 자격 요건은 유럽 안에서 엄격하게 적용되었고, 때문에 영토에 상관없이 애초에 '로마 황제'로서 로마 그 자체에다 기독교 교회의 인정까지 두루 갖춘 '정통 of 정통' 황제였던 동로마는 영토가 줄어들든 말든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유럽에서 '황제'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이라는 그들의 문명권 바깥으로 넘어가면 오스만 튀르크술탄이나 러시아짜르[14] 또는 중국의 천자처럼 "황제? 그러든지 말든지..." 정도로 치고 넘어갔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15] 구미권에서 일본 천황을 직역해서 'Emperor of Heaven'이 아닌 'Japanese Emperor'라고 번역하는 것에는 이러한 '유럽'과 '유럽 외부 세계'에 대한 구미권의 인식도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아무리 자국의 덴노를 Emperor라 부르며 구미권을 향해 Emperor라 불러 달라고 떠들어 봐야, 유럽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덴노나 그냥 유럽 안에서 힘 좀 있다고 으스대는 고만고만한 '왕'(또는 '자칭 황제')들과 다를 바 없었고, 더 나아가 유럽이라는 자신들의 문명 세계에 속하지 않은 '제3세계'의 장외적인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외왕내제. 어차피 유럽 세계의 관점에서는 Japanese Emperor라고 부를 때에 유럽의 역사에서와 같은 Emperor[16]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근세 유럽의 '황제'를 자처했던 고만고만한 국가들과 같은 참칭 정도로 간주되는데, '일본 왕'이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17]

황제라는 단어만큼이나 '왕'이라는 단어 역시 충분히 오해를 사고 있는 단어인데, 왕은 흔히 황제보다 아래이며 황제에게 분봉된 제후왕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애초에 황제라는 용어가 진시황에 의해 등장하기 전에 황제 즉 '천자'는 왕이었다. 중국의 경우 여러 농민반란의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유명한 진승의 경우에도 세력을 갖춘 뒤에 스스로를 초왕(楚王)이라고 칭했고, 항우가 진 왕조를 부정하고 초나라의 후손인 의제를 옹립해 부활을 선언할 초기에도 의제는 '왕'으로 초 회왕(楚懷王)이라 불렸으며, 항우나 유방도 이후 회왕이 '의제'가 된 뒤에 봉해진 제후왕의 한 명이었다. 패자(覇者)처럼 강제적인 무력(폭력)을 포함한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해서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성격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을 포함한 '덕망'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하는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왕자(王者)라는 개념어에 담긴 의미가 한대 이후 중국 사회에서 2천 년 넘게 위상을 누렸던 유교의 지위만큼이나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엄연히 통용되었던 정치, 사회 이념이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관념어를 쉽게 버릴 수 없었다.[18]

아무리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맹자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고는 해도[19] 엄연히 중앙인 교토의 구게들은 공자나 맹자 등 유교 경전을 주요 소양으로 익혔을 뿐 아니라[20] 유교의 왕자와 비슷하게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상인 전륜성왕의 존재도 있었으므로[21] 일본의 천황 역시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금륜왕'으로 여겨져 '왕'이나 '왕법'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개념어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적 군주와 관련해서는 십선지왕(十善之王) 또는 십선지군(十善之君)이라는 말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십선(十善) 즉 열 가지 선행을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국왕을 달리 불러서 '십선지군' 또는 '십선지왕'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천황가를 소개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는 일본의 황실입니다"(世界最古の王家は日本の皇室)라고 쓴다면, 이 문장에서 일본의 황실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도 비하나 격하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사적으로 이 문장에서 '왕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군주의 일가'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고 '왕'이 천황 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군주국의 헌법상 수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왕'이라는 말도 '영국 왕'이나 '태국 왕'과 마찬가지로 군주국의 헌법상 수장이라는 의미로 보다 중립적인 인식을 위한 '거리두기' 표현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기에 마냥 비하라고 보긴 어렵다. 중립적인 인식을 위한 거리두기에 대해서는 후술.

3.1.1. 일본 역사에서의 '천황'에 대한 '왕' 칭호 사용

또한 일본 국왕이라는 칭호가 무조건적인 비하이고 격하라고만 보기 어려운 것이 이미 전근대, 그것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도 일본에서도 천황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왕'이 함께 쓰였다는 점이다. 중국 제도를 복붙해서 천황이라는 칭호를 도입한[22] 그 이후에도 자국의 군주를 가리킬 때에 '왕'이라는 말도 같이 사용하였으며 '일본국왕'이라고 하면 엄연히 교토에 머무는 덴노(천황)여야 한다는 인식이 전근대까지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 자국 내에서 자국의 군주를 높이는 칭호로서 '왕'이 사용되었다면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조건적인 격하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우선 헤이안 시대에 천황이 거주하는 수도 헤이안쿄 즉 지금의 교토는 '왕성(王城)' 즉 '왕이 머무는 성'[23]이라고도 불렸다. 헤이안 시대에 헤이안쿄의 동북쪽 히에이 산에 세워진 사찰 도지(東寺)는 '왕성진호(王城鎮護)'의 역할이 맡겨져 있었고#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헤이케의 무장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教経)[24]는 당시 왕성 제일의 강궁 정병(王城一の強弓精兵)이라고 불렸다.[25]

또한 일본의 고전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나 「태평기(太平記)」, 공식 법령집 「다이호령」(大宝令)이나 「요로령」(養老令), 구게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나 「신황정통기」(神皇正統紀), 그리고 「쇼토쿠 태자 전력」(聖徳太子伝暦) 등, 일본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기록들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夫王家之為王家, 在佛法之擁護, 佛法之為佛法, 任王家之歸依. 又云佛云神, 保護天下, 其誓是同, 譬猶牛二角, 鳥之雙翅而已.
무릇 왕가가 왕가임은 불법(佛法)의 보우하심 때문이요, 불법이 불법임은 왕가가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또한 '부처'니 '신'이니 하지만 천하를 보호하리라 하신 그 맹서는 다 같았으니, 비유하면 소의 두 뿔이요, 새의 두 날개일 따름이다.
『헤이안 유문』(平安遺文) 3837호 문서 「지쇼 2년 6월 기이 국 대전법원 중도해안」(治承二年六月紀伊国大伝法院衆徒解案)
九州之地者, 一人之有也、王命之外、何施私威.
구주[26] 땅은 한 사람의 것이라. 왕명 이외에[27] 그 누가 사사로이 위엄을 부리겠는가?
호겐(保元) 원년(1156년) 윤9월 18일(양력 11월 2일)에 발호된 이른바 '호겐 신제' 7개조의 제1조 첫머리에서
"저는 왕실을 위하여 생각하고 있으니, 임금(君)에게 변이 생기면, 그것을 사심없이 제 일처럼 여깁니다. 이는 스케노하치로 히로쓰네[28]를 죽인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히로쓰네는 도고쿠의 유력자로 요리토모가 거병하여 임금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적으로 히로쓰네를 아군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히로쓰네는 공적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도대체 요리토모 그놈은 무슨 까닭으로 왕실만을 그리 볼썽사납게 챙기는가? 그냥 반도(坂東)에서 지내면 될 것을 누가 멋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운운하며 모반할 마음을 품었던 자입니다. 이런 자를 노토(가신)로 둔다면 요리토모까지도 신불의 가호를 잃게 될 것이라 여겨 죽여 버린 것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인에게, 구칸쇼(愚管抄)
국왕은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일본국에서는 국왕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神代) 이후로 정한 관습이다.
지엔(慈圓)[29] 저 구칸쇼[30] 제7권
その先祖を尋ぬれば桓武天皇第五の皇子、一品式部卿葛原親王九代の後胤、讃岐守正盛が孫、刑部卿忠盛朝臣の嫡男なり。かの親王の御子、高見王、無官無位にして失せ給ひぬ。その御子、高望王の時、初めて平の姓を賜はつて、上総介に成り給ひしより、たちまちに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その子鎮守府将軍良望、後には國香と改む。國香より正盛に至る六代は、諸国の受領たりしかども、殿上の仙籍をば未だ赦されず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31]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32]의 9대(代)[33]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34] 마사모리(正盛)[35]의 손자요[36], 형부경(刑部卿)[37] 다다모리(忠盛)[38] 아손(朝臣)[39]의 적남(嫡男)[40]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 하여 세상을 떠나셨더라.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41]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同廿日、法皇の宣命にて、四宮、閑院殿にて位につかせ給ふ。摂政はもとの摂政近衛殿かはらせ給はず。頭や蔵人なしおきて、人々退出せられけり。三宮(さんのみや)の御(おん)めのと泣きかなしみ、後悔すれども甲斐ぞなき。「天に二つの日なし、国に二人の王なし」と申せども、平家の悪行によッてこそ、京田舎に二人の王はましましけれ。
[42] 20일, 법황의 선명으로 시노미야(四の宮)가 간인도노(閑院殿)에서 즉위하시게 되었다. 셋쇼(摂政)는 옛 셋쇼인 고노에 님(近衛殿)으로 변함이 없었다. 토(頭)[43]나 구란도를 임명함에 있어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산노미야(三の宮)의 유모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시고 후회하셨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44] 하였거늘, 헤이케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교토와 시골에 두 사람의 왕이 계시게 된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 권8 나토라(名虎)#[45]
天下将乱時、妖霊星と云悪星下て災を成すといへり。而も天王寺は是仏法最初の霊地にて、聖徳太子自日本一州の未来記を留給へり。されば彼媚者が天王寺の妖霊星と歌ひけるこそ怪しけれ。如何様天王寺辺より天下の動乱出来て、国家敗亡しぬと覚ゆ。哀国主徳を治め、武家仁を施して消妖謀を被致よかし。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때, 요령성(妖霊星)[46]이라 하는 악성이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다 하였다. 더구나 덴노지(天王寺)는 바로 불법이 처음 일어난 영험한 땅인데, 쇼토쿠 태자께서 몸소 일본 한 주의 미래기(未来記)[47]를 남기셨다. 그렇다 하면 그 미혹하는 자가 '덴노지의 요령성'이라 노래한 것도 괴이한 일이다. 실로 덴노지 주변으로부터 천하의 동란이 일어나 국가가 패망할 것을 깨우치려 함이다. 이제 국주(国主)[48]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후지와라노 나카노리(藤原仲範)의 발언, 《태평기》 권5 '사가미 뉴도가 덴가쿠와 투견에 빠진 일(相摸入道弄田楽並闘犬事)' 중에서[49]
王家之恥, 何事如之哉? 天下静謐, 尤雖可悦, 一朝之恥辱, 又不可不歎
왕가의 수치가 어디 이와 같은 것이 있으랴? 천하가 평온해짐이야 매우 기쁜 일이라 하나, 하루 아침의 치욕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겐코 원년(1331년) 별기 10월 1일조[50]
우리 나라는 왕종(王種)이 바뀐 적은 없지만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치세의 연수가 짧아지고 (황위가) 직계로 전해지지 않는 예를 여러 곳에서 기술하였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51] 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중권, 제52대/제29세 사가 덴노
왕위를 떠나 석문(釈門)에 들어간 예는 지금까지도 많이 있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중권, 제59대/제34세 우다 덴노
호겐, 헤이지의 난 이래로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무용(武用)이 중시되고 왕위(王位)가 경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태평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명분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이 문란해진 탓이리라. 헤이지의 난 이후 잠시 정국이 진정되었지만, 천황과 상황의 사이가 나빠졌다. 니조 천황의 외삼촌인 다이나곤 쓰네무네【훗날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대신, 대장까지 되었다.】와 천황의 유모의 아들인 벳토 고레카타 등이 고시라카와 상황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상황은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이들을 체포하고 유배보내 버렸다. 이후 기요모리는 천하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고 이윽고 다이조다이진이 되었다. 그 자식들도 대신, 대장이 되었으며 게다가 형제까지 나란히 좌우에서 대장에 올랐다.【니조인 치세에 있었던 사항뿐 아니라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도 여기에 다 같이 기술하였다.】 천하의 구니의 절반 이상이나 헤이케 가령으로 만들고 많은 관위를 일족과 그 가신들이 독점하니, 왕가의 권위는 없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제78대 니조인(順徳院)[52]
요리토모는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폐제(廃帝)[53]

메이지 유신 직전의 근세인 에도 막부만 놓고 보더라도 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에는 승정(僧正)의 임명 규정을 정하는 14조에 「국왕」(国王)이라는 문언(文言)이 보이는데,
僧正【大、正、權】、門跡院家可守先例。至平民者、器用卓抜之仁希有雖任之、可爲准僧正也。但、國王大臣之師範者各別事。
승정(僧正)【대(大)、정(正)、권(權)】과 몬제키(門跡), 인케(院家)는 선례를 지킴이 가하다. 평민에 이르는 자까지 그 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질 만큼 인하여 찾아 보기 드문 자로 임명하되 승정에 준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다만 국왕 대신의 사범(師範) 되는 자는 별개의 일로 한다.

18세기 후반에 성립된 금중병공가제법도의 주석서 『게이초 공가제법도 주석 전』(慶長公家諸法度註釈全)에는 국왕이란 「천자(天子, 즉 천황) ・ 쇼군」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1617년에 막부의 자문을 맡았던 승려 이신 스덴(以心崇伝)[54]은 조선에서 보내 온 국서에 도쿠가와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 미나모토 아무개」(日本国源某)로 칭하고 「왕」을 쓰지 않았는데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권역인 조선의 입장에서 보아 일본의 왕은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책봉을 받은 왕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왕(이 경우는 천황)과 조선의 왕은 국서의 교환을 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55] 여기서 왕은 대중국 관계에서 조공-책봉의 형태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중국 입장에서 보아) 제후왕을 의미하는 왕이 아니라 군주국의 주권을 가진 통치자를 가리키는 의미로써의 왕으로 쓰였으며, 일본에서도 천황을 가리켜 왕으로, 즉 제후왕으로써의 왕이 아니라 '한 독립된 주권국가의 군주로서의 왕으로 보는 인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일본 학계에서도 전근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고 부른 전례를 이미 당대의 기록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56] 여기에서 쓰인 왕은 엄연히 중국의 책봉을 받은 조공국 군주로서의 왕이 아니라 당당한 독립국의 군주로서의 왕이었다. 일본 천황의 계보를 설명하는 저술도 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처럼 황(皇)자를 써서 제목을 붙인 책도 있는가 하면,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林鵞峰)의 일본왕대일람(日本王代一覧, 1634년)처럼 왕(王)자를 사용한 책도 존재한다.

에도 시대 중기에 아라이 하쿠세키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있었던 논쟁도 주목할 만한데, 대조선 외교에 있어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대군에서 일본국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에 대해 쓰시마 후추 번의 아메노모리 호슈는 '왕'이라는 단어에 가즈사나 히타치 같은 지역이나 방위[57] 명칭을 붙인다면 가즈사의 왕 또는 동쪽의 왕 식으로 그 지역에서나 행세하는 자칭 왕으로 허용해 줄 수 있지만,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일본의 왕'이라는 뜻이 되어[58]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며 하쿠세키가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 하쿠세키는 쇼군이 대조선 외교에서 칭하는 '일본국대군'이라는 칭호에서 '대군'은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59]를 부르는 말인데 일본의 쇼군이 그럼 조선 국왕의 아들이란 소리냐며 엄연히 일본국왕으로 불러서 조선국왕과 격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에도 왕은 제후국의 군주라는 해석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아메노모리 호슈는 막부의 쇼군은 엄연히 일본이라는 '왕국'의 정당한 주권자인 천황 즉 '왕'으로부터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무력으로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며 일본에서 '일본국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엄연히 교토의 천황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일본에서도 '일본국왕=천황'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쿠세키 실각 뒤에 다시 '일본국대군'으로 칭호가 돌아갔으며[60] 이후 일본국대군은 일본의 개항 이후에까지도 쇼군의 칭호로 쓰였다. 그리고 막부가 사라진 뒤에는 비공식적으로 덴노를 가리키는 칭호로도 '일본국 대군'이 사용된다.

또한 미토학에서 비롯되어 막부 말기 서양 세력에 맞서 천황을 일본의 '국부'로까지 격상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해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의 대표적 슬로건이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역시 '존왕(尊王)'의 대상 즉 왕을 '일본의 천황'으로 지목하였다. 존왕양이는 이후 글자 하나만 바꾸어 존황양이(尊皇攘夷)로 바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왕'이라는 단어나 왕이라는 단어 안에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의미가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에도 막부 말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행한 뒤에 메이지 천황게이오 3년(1868년) 1월 3일 에도 막부와 기존의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삼직(三職)[61]의 설치로 천황이 중심이 되는 새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선언 역시 황정복고(皇政復古)나 제정복고(帝政復古)가 아니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옛 막부군과 충돌하던 시기에도 신정부군, 즉 덴노의 명을 따르는 군대를 가리켜 흔히 알려진 '황군(皇軍)'이 아니라 '왕사(王師)'라고 불렀다. [62] 흔히 알려진 '황군'이라는 단어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퍼뜨린 것으로 전거가 없는[63] 신조어라[64] 기행으로 여겨졌던 것이며, 메이지 유신 뒤에도 신정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군을 '황군'이 아닌 중국의 고전에서 유구하게 '황제의 군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던[65] 용어인 '왕사'를 써서 불렀다. 소메자키 노부후사(染崎延房)[66] 와 죠오노 사이기쿠(條野採菊)[67]메이지 6년(1873)에 쓴 『근세기문(近世紀聞)』에서 무진전쟁을 두고
[ruby(奧羽,ruby=オウ)]の [ruby(藩,ruby=ハン)][ruby(王,ruby=ワウ)][ruby(師,ruby=シ)]に [ruby(抵抗,ruby=テイコウ)]なしつるも
의 번들[68]왕사에 저항 없이 포박되도록

라고 해서, 옛 막부를 지지하며 신정부에 저항하던 무쓰 아이즈와 데와 쇼나이 및 에치고 여러 번들이 모인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대한 추토령(追討令)을 받은 신정부군을 두고 '왕사'라고 적었으니 메이지 유신 뒤에도 왕사가 '천황의 군대'란 뜻으로 쓰였고, '덴노'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떤 거부감이나 '비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이미 일본 자국에서도 천황을, 심지어 천황 본인마저도(!) '왕'이라고 부른 전례가 몇 번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덴노의 자리와 그 일족, 나아가 덴노 자체를 가리켜 '왕' 혹은 '왕가', '왕위'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을 격하나 비하라고는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천황'/'황'이라는 말은 굳이 '국왕/왕'과 구별되어 어느 쪽이 격이 더 높거나 낮다는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며 평상시에 어느 한쪽만 쓰거나 어느 한쪽은 불경하다고 쓰지 않거나 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일본 중세만 한정하더라도 일본이라는 왕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가 특별히 '천황'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천황을 가리켜 '국왕', '미카도(帝)', '슈조(主上)' 등을 써서 불러도 문제가 없었다. '국왕'은 현실에 존재하는 직위로써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드러내는 말이었고, 그 사람에 대해 위엄을 더하는 표현법으로써 '천황'이라는 말이 쓰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금중병공가제법도' 및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보아도 그러한 인식은 근세,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도 별 변화가 없었다.

혹자는 일본에서 사용한 왕은 독립국가의 군주로써의 왕이고 조선에서 사용한 왕은 중국의 제후국으로써의 왕이니 다르다고 주장하려 하는데, 이는 애초에 조선에서 사용한 왕이라는 칭호를 중국의 제후국의 왕으로써만 단정짓고 획일화하려는 것뿐이며,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단견일 뿐이다. 조선이 제후국을 자처하면서 중국의 제후국 제도에 맞춰 국가 통치기구를 조직했다고는 해도 역대 국왕들에게 올리는 묘호를 비롯해서 일부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하던 외왕내제식 제도나 '성상(聖上)' 등의 용어가 온존하며 쓰이고 있었다. '주상'뿐 아니라# 일본에서 덴노를 가리킬 때 '국왕'과 함께 사용했던 용어 가운데 일부는 조선에서도 버젓이 잘만 썼던 것이며, 고다이고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일본 전국 각지에 내린 명령서를 가리키는 '윤지(綸旨)'라는 용어는 조선에서도 국왕의 명령서라는 의미로 일본과 거의 똑같이 쓰였다. 심지어 조선 후기가 되면 중국에서 황제의 사망을 가리킬 때 쓰던 붕어(천붕),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성지(聖旨) 역시 조선에서 국왕의 죽음, 또는 국왕의 명령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의 국왕이 표면적으로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했다고 해서 조선에서 자국의 군주를 가리켜 국왕으로 부른 것을 단순히 중국의 제후국으로써의 지위라는 의미로 국왕으로 불렀다는 한 가지 해석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왕이냐 황제냐, 또는 '왕'의 용법이 독립국의 군주냐 제후국의 작위냐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조선의 국왕이 중국의 제후국을 외부적으로 자처할 망정 내부의 용어는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섞어서 썼다는 것은 조선 군주의 공식 명칭은 대왕이고 일본 군주의 공식 명칭은 덴노라는 점 이상으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외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의 국왕으로 자처했느냐 제후국의 번왕으로 자처했느냐의 문제보다는 국가 원수로써 그 통치권을 어느 정도까지 행사했으며 그 군주의 지배를 받는 인민들이 군주와 그의 왕권을 어떻게 인식했느냐가 조선 국왕의 성격(독립국의 군주냐 제후국의 번왕이냐)을 논함에 있어서 왕이니 황제니 하는 '공식적' 칭호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얘기다.

애초에 이름이 실제와 다른 사례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얼마든지 있다. 금나라북송을 멸망시킨 뒤에 제나라라는 괴뢰 정권을 세워서 유예를 그 제나라의 '황제'로 세웠고, 일본 제국은 만주를 점령한 뒤에 옛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기오로 푸이(선통제)를 데려다 그들이 만주에 세운 괴뢰 국가 만주국의 '황제'로 세웠다. 금나라나 일본 제국이나 모두 유예와 푸이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금나라나 일본 제국이 그 '황제'들을 자국의 황제, 덴노와 동급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대한제국에 그랬던 것처럼 만주를 점령하고 일단 겉으로만 독립국인 친일 괴뢰 정권을 세운 뒤에 차츰 흡수해 나갈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 입으로 '황제'라고 부른 이들을 자신들의 황제, 덴노와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이걸 두고 "어쨌든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렀으니까 격하한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코미디일 뿐이다.

3.2.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3.2.1. 다른 식민지 지배국들과의 비교에 대하여

한일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을사늑약경술국치로 시작해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에 걸친 한국의 일제 식민 통치 시기와 그 식민 통치 시기를 전후해 벌어졌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그로 인해 야기된 각종 사회적, 경제적[69] 그리고 문화적 마찰과 탄압에 관한 문제들이다. 한국 외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국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동남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난징대학살로 대표되는 중국이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을 잃었던 미국, 심지어 한때는 일본과 유일하게 교류하는 구미 국가였던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다.[70]

천황 표기를 지지하며 '일왕’ 표기는 단순히 격하이고 폄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한국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나라들도 많은데 그들은 '일본 황제(천황)'를 '왕' 이라고 격하해 부르지 않는다며 '러시아 황제'니 '독일 황제' 같은 표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쓰면서 일본 황제만은 부득부득 '일왕'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알량한 자격지심과 민족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한다.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도 수많은 잔학 행위와 해악을 저질렀는데[71] '일본 제국주의는 해악을 저질렀으므로 그 상징을 천황이라 부를 수 없다'고 한다면, 러시아 황제(차르) 또한 노왕으로, 독일 황제(카이저) 또한 독왕으로 격하해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지이다.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한국 대통령을 소통령(…)이라고 억지로 비하하지는 않지 않느냐, 그러면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당태종도 수양 또는 당태으로 불러야 하는 거냐는 매일경제 노원명 기자 같은 논자도 있다. #

일단 영국 제국주의는 혐성국 밈이 부각될 만큼 충분히 잔혹하였으며, 벨기에는 '손목국' 이라는 멸칭이 나올 정도로 레오폴드 2세콩고 자유국 내 잔학 행위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도 비난받을 정도였는데 영국 왕은 영국 공작으로, 벨기에 왕은 벨기에 공작으로[72] 격하해 부를 것이냐, 미국은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냉전 시기에는 반공을 목표로 독재 정권을 쿠데타로 만들도록 후원했다. 그럼 미국 대통령은 소통령으로 격하할 것이냐, 중화인민공화국티베트, 위구르, 홍콩 등에서 압제를 벌이고 있으니 '중국 주석'은 '말석'으로 격하해 부를 것이냐, 독재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대통령은 어떻게 할 거냐 등 별의 별 문제를 제기하며 이런 이들도 있는데 왜 일본 천황만 집어서 일왕으로 격하해서 부르느냐, 그러면서 교황의 원어는 Papa이고 군주 또는 황제라는 의미 자체가 전혀 없는데 한국인들은 Papa를 '황제'로 격상(?)시키는 건 웃긴 일 아니냐며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왕' 표기는 한국인들의 '몰지각'한 컴플렉스이고 과거사 열등감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로 디시인사이드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지나치게 비판을 위한 비판이고 끌어오기이며,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것은 천황 비하를 위한 감정적인 표현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논점 이탈의 오류일 뿐이다. 영국이나 벨기에가 일본 정도로 무리하게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얽힌 과거사를 미화하거나 감추기, 덮어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미국은 자국 건국 직후부터의 서부 개척 과정에서 1억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수많은 흑인 노예를 혹사시키면서 농장을 경영했으며 근현대까지 인종차별이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자국 내에서 자행되었다는 것과, 자국이 제3세계에서 벌인 외교적 실책들을 일본 정도로 숨기거나 왜곡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놓고 대중에 공개하고 가르치며 이에 대한 학계와 언론, 대중의 대정부 비판도 버젓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교황 역시도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몇 명의 교황이 대를 물려가며 "과거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많은 범죄들에 대해 사죄한다"는 목소리를 냈다.[73] 이러한 나라들을 들먹이면서 일본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건 비하 표현이라고 열을 올리는 것은 근거를 잘못 끌어와 무리하게 일대일로 대비시켜 빗대려는 논리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국가의 사례를 끌어다 천황/일왕 비하 표현을 운운하기 전에 이들 국가가 자행한 범죄에 대해서 각국이 표면적으로라도 어떤 조처를 했고 일본과는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분석이 일절 빠져 있는 것은 물론, 그 나라들과 피식민지국 사이의 관계가 한일관계 설명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21세기 현재 유럽의 군주정 국가 가운데 자국 군주를 '황제'라고 칭하는 나라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74]

"국왕은 자신의 왕국에서는 황제다"라는 어느 프랑스 국왕(출처 필요)이나 18세기 나폴레옹의 칭제(稱帝)는 단순히 왕이 황제보다 낮아서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로마 황제의 자격 조건은 힘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바티칸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거나, '정통 of 정통'인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했고 프랑스는 이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국왕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강점하고 에티오피아 황제를 칭한 것을 구미 열강이 부정하고 이탈리아 국왕으로만 부른 것은 에티오피아 제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지 국왕/황제 칭호의 존비 문제를 논하기에는 적절한 사례가 아니다. 오스만 튀르크술탄 메흐메트 2세동로마를 멸망(1453.5.29)시킨 뒤에 아예 "로마를 차지한 내가 바로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Kaiser-y-Rum)다"라고 했는데, 이걸 주장하자고 러시아의 짜르처럼 메흐메트 2세 자신의 먼 조상뻘인 오르한 1세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공주(포르피로게니투스) 테오도라와 혼인한 적이 있다는 것까지 가져다 붙였다. # 당연히 로마 황제가 구미권에서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라는 직함을 '이교도' 따위에게 허용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메흐메트 2세 사후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들은 로마 황제를 자처하려 하지도 않았다.

일각에서는 "황제 칭호가 국왕 칭호와 동등하다면 굳이 칭제를 할 이유가 없는데 칭제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은 황제 칭호 자체를 국왕보다 격을 높게 쳐 주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하지만, 왕과 황제의 칭호를 '격'을 다르게 보았다고 해도 그 칭호를 대하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이 완벽하게 달랐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칭제를 하겠답시고 굳이 '영국 왕'을 '영국 황제'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영국 내의 여러 식민지 가운데 하나였던 인도를 제국으로 격상시켜 '인도 제국 황제'라는 지위를 새로 만들고 그걸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여왕의 자리에서 동시에 겸칭을 하는 식으로 칭제를 한다는 것은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사례였고[75] 영국 국내의 여론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대하던 조선인들처럼 '우리 임금께서 왕에서 황제로 등극하셨다'며 왕에서 황제로 직함이 격상되었다고 경하하는 게 아니라 "저게 뭔 뻘짓이야?"라는 비아냥이었다. 동양권과 서양권의 사례가 완벽하게 1:1로 동치되는 것도 아니어서 적절한 사례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왕과 황제의 격이 다르다고 하면서도 왕에서 황제로 레벨업하는 게 아니라 어디의 왕이면서 다른 어디의 황제도 겸한다는, 또는 1공국의 대공과 2왕국의 국왕 지위를 일국의 왕태후가 한꺼번에 겸무하고, 일국의 황제인 동시에 한 지역의 백작도 겸한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지역을 어떻게 동양과 동치시켜 보고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언급되었듯 왕이라는 존재가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격하로 볼 수는 없고, 그런 점에서 소통령 운운하는 예시를 들고 나와서 천황 표기를 주장하고 일왕 표기를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교 대상도 예시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11년공화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황제 제도 자체를 없애 버리고 황제라는 단어나 그 개념이 말 그대로 역사 속의 유물이 되어버린 나라와[76] 서구식 근대화를 거쳐 근대 국가로 도약한 이후에도 엄연히 그 용어 및 개념, 관련 제도가 온존할 뿐 아니라 그걸 앞세워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불법 침략과 강제 병합을 벌인 과거사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나라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 같은 표현은 전혀 거리낌 없이 쓰면서 일본 황제만은 부득부득 '일왕'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은 알량한 자격지심과 민족적 감정에 불과하다는 일각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짜르나 독일의 카이저도 중국의 천자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역사 교과서 속 존재일 뿐이다.

물론 저들 국가들이 완벽하게 과거사 청산을 끝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 피지배국에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지불한 바 없으며,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알제리 식민지배에 프랑스의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보수 우파 세력에서 "대선 후보 자격 없다"고 반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벨기에는 2020년대까지 '위대한 망각' 이라고 콩고에서의 잔학행위를 '왕 개인 책임'이라고 떠넘기고 아무런 반성도, 교육도 없다가 2022년에야 유감은 표하되 배상은 않겠다고 하는 판국이다.

하지만 이 점을 가지고 "일본은 제국주의 청산을 '비교적' 잘 한 편에 속한다"[77]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저만큼도 안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천황이라는 칭호를 정당화할 근거도, 일본 국왕(일왕)이라는 칭호가 자격지심이니 열등감이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할 근거도 될 수 없다. "쟤들은 더했는데 왜 얘만 갖고 뭐라고 하냐"라는 전형적인 피장파장의 오류, 논점 이탈의 오류라는 얘기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마구 끌어다 한일관계를 설명하면서 일본을 '비교적 식민지배 청산을 잘했다'고 두둔하려고 봐야 부질없는 것이, 첫째로 한일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일대일로 매칭되기는 어려운 사례들을 가져와서 일대일로 매칭시켜 봐야 의미가 없다. 둘째로 한국과 일본의 일대일 관계에 있어서 한국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주체'로서 존재하는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식민 국가들, 그리고 벨기에와 콩고 양국간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최종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주도하고 결정할 책임은 그들 직접적 당사국에 있고, 한국은 그들의 문제와 관련해 어디까지나 제3자다. 세계적인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발언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원론적인 책임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그것을 위해 '어느 국가의 정부가 주도해서 타국에 외교적인 지지와 동조를 호소하고 촉구할 권리'와 '제3자의 입장에서 국가와 국가간 문제에 어떤 형태로든 실제적인 개입을 시도하려는 실력 행사'를 헷갈려서는 곤란하다.

또한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과거사에서 기인한 컴플렉스이고 열등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는 "우리는 이미 과거와 달리 21세기 중견강국이고 일본에 버금갈 만한 선진국으로 충분히 발돋움했기에 과거사 콤플렉스, 열등감에 얽매여 굳이 일본 천황을 '일왕'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승전국인데 무슨 배상금이 필요하냐"라는 호기 어린 한 마디로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중국 대륙에서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배상 문제를 상큼하게 정리해 버린[78] 마오쩌둥의 발언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피차 누가 승전국이고 누가 패전국이든, 누가 선진국이고 누가 후진국이고 간에 상관없이 사과는 사과고 배상은 배상인데, 이겼으니 보상이 필요없다(또한 졌으니 보상해야 한다)는 말과 '이만큼 성장했는데 아직도 과거에 매여 찌질거리느냐'는 핀잔은 '사과'와 '배상' 여부가 어떤 승패 여부와 관련이 있고 뭔가 그걸 받는 입장에서의 열등감 같은 걸 갖다 붙여서 열등감을 씻으려고 사과와 배상에 매달리는 거 아니냐고 보는 일본 우익의 논리와도 닿아 있고, 동시에 피해자에게 "아직도 옛날 일 가지고 속 좁게 꿍해 있냐", (배상 문제를 포기한 중국이나 대만의 경우를 들며) "너희만 식민지배 당했냐"며 비웃는 가해자의 논리와도 닿아 있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이걸 무조건적으로 논점 이탈의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애초에 배상과 사과는 다른 문제로 배상이 제대로 된다고 해서 과거사에 대한 사과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말 백 번 양보해서 한국이 대한민국 제3공화국한일국교정상화 때처럼 대일 배상 청구권을 정부 차원에서 포기하고 그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정부 권력으로 찍어눌러서 덮어둔다고 한들, 일본 정부가 자신들이 저지른 제국주의 식민 모국, 전쟁 범죄 가해국으로서 피해국 및 그 피해 주민들에 대한 책임 인정이나 사과, 반성을 제대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대만이나 중국이 일본의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한 보상 문제를 "승전국이니 배상은 필요없다"고 자국 인민들의 여론은 무시한 채로 단칼에 무위로 돌렸음에도, 일본은 정부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거나[79]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20년 가까이 여전히 이어가 한국인의 감정을 대놓고 건드리며##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며 행사하는 우익 기업과 그 후원을 받는 이영훈, 존 마크 램지어 같은 어용 학자나 민간단체들이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이나[80] 난징대학살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왜곡, 부정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여론전을 벌여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과거 식민지 피해국은 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국 추축국이었던 미국의 심기까지[81] 벅벅 긁고 있는 판이다. 배상 여부를 떠나서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인정, 사과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이걸 마냥 친일적인 논자들의 주장처럼 '컴플렉스'니 '열등감'이니 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3.2.2. 구 추축국 일본의 과거사와 언론의 '황제' 인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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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과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 식민지 지배의 가해국일 뿐 아니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책임이 존재하는 엄연한 구 추축국이다. 그리고 추축국 일본 제국 육해군의 최고 통수권자였던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은 현재 진행형으로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바로 지금의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쇼와 덴노)이다.

한국에서의 일왕 표기 등장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 총리 시기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에서는 천황/덴노로 표기했고 이에 대해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후 급격해진 일본의 우경화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항의 표시로 추정하는 식자도 있는데, 그 이전이라고 '일왕'이라고 표기한 기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82] 한국 언론에서 천황을 처음으로 '일왕'이라고 부른 것은 동아일보이다. [83][84]

앞에서 서울신문 황성기 논설위원이 말한,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른바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은 1981년에 처음 불거졌는데, 해당 기사가 한국에서 한창 보도중이던 1981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에서는 여전히 '일황'이라는 호칭이 버젓이 쓰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 천황을 가리켜 가장 많이 쓴 호칭 가운데 하나인 '일황'은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이 처음 한국에 보도된 1981년이나, 해당 사건이 거의 매듭짓게 된 1990년이나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에 대한 지문 날인을 의무화한 것에 대한 1천 명 규모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체포된 관련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1984년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던 전두환한국 대통령으로써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해 히로히토 당시 덴노를 네 차례 만났던 해이기도 한데# 일황이라는 표기는 이 1984년에 특히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과연 황성기 서울신문 논설위원의 주장처럼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이 한국에서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평가가 적절한 것인가 의문이 들게 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일왕'을 검색해 보면 드문드문 '천황'이나 '일황'보다 훨씬 적은 빈도수로 등장하던 '일왕'이 별안간 히로히토의 위독함을 전하는 기사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폭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는 '일왕' 표기의 등장이 단순한 피해의식이나 컴플렉스, 또는 모종의 정치 세력에 의한 선동 같은 것이 아니며 쇼와 천황 및 그의 치세에 대한 평가, 나아가 과거 일본의 '전범 국가'라는 어두운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지금이야 아키히토 상황과 나루히토 천황의 개념 행보로 인해서 천황에 대해 이른바 '이미지 세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일왕 히로히토 즉 쇼와 천황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쇼와 천황이나 일본 제국의 과거 전쟁 범죄에 대한 분노나 증오의 감정은 구미권이라고 해서 아시아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것은 한국의 일부 친일적인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열등감이나 피해의식, 모종의 정치세력에 의한 선동이라고 치부할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한국에게 있어 역사상 최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1910.8.29~1945.8.15)는 구미권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과 제2차 세계대전(1939.9.1~1945.9.2)이 모두 겹치는 시기로, 그 최악의 시대와 최악의 사건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던 세대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권과 구미권 모두에 버젓이 살아 있었다.

즉 히로히토(쇼와 덴노)가 엄연히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범이자 전쟁 책임이 있음에도 미국과의 사법 거래로 재판 회부는커녕 어떠한 처벌도 없이 자리보전하고 천수 누리고 곱게 간 것[85] 그리고 엄연히 과거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 가해자라고 할 히로히토의 죽음에 그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대한민국 정부가 조문을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86]이 한국 국내에서 천황/일왕 표기의 변화 과정에서 함께 벌어졌던 것이다.

3.2.3. "황제에서 왕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하지만 쇼와 덴노와 관련된 한일 양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생각해도 문제는 남는다. 일왕 히로히토, 즉 쇼와 덴노는 1989년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한국의 언론, 방송 보도 및 신문지면상에서 1950~1980년대 내내 버젓이 일황(日皇)이라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와 덴노의 전쟁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생전에나 사망 직전에나 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비판과 죽음에 대한 야유, 조소가 구미 각국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은 앞에서 소개된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해방(1945) 직후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쇼와 덴노가 사망하기까지 거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황'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에는 한반도 전역에 식민지 지배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있었고, 제3공화국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해서도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질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면 많았지[87]그랬다간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그날로 총부리를 북한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돌려 버리겠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제3공화국 이전에 이미 이승만 당시에도 이대로 일본하고 살벌하게만 지낼 거냐, 뭔가 관계 개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주장이 없지 않아서 3대 대선 때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신익희진보당의 후보 조봉암 모두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일본 지도자와의 회담할 용의가 있다"며 이승만을 향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피차간의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승만은 3대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뒤 1956년 5월 26일 국내 기자단이 '이번 선거를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번 선거 결과로 보아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라고 발언한다. 본인이 친일청산을 가로막고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선례를 남긴 사람이면서 '한일국교 정상화'를 외치는 상대 후보를 두고 '친일하는 사람' 운운 것은 분명히 이율배반이 틀림없지만, 이렇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살아 있었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결코 적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을 생각해도 그런 시절에 '일황'이라는 칭호가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점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말 쇼와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일각에서는 '열등감'으로 부르는)만으로 '일왕' 표기가 등장하게 되었느냐는 의문의 근거가 되기 충분한 것이다. 쇼와 덴노와 관련한 한일 양국의 어두운 과거사만큼이나 한국 언론에서 일왕 히로히토, 쇼와 덴노나 그와 관련한 일본의 역사에 대한 한국 언론의 가치 판단 및 평가의 기준을 고민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일왕 표기를 비방하는 혹자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한국처럼 그 나라와의 과거사 문제를 이유로 그 군주의 칭호를 한 단계 내리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식민 지배 수탈의 과거사와 가해국 군주의 격을 바꾸는 것에 무슨 연결성이 있느냐는 반문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 언론이 외국 군주에 보도에서 표기를 변경(황제→왕)하게 된 사례가 일본만 있었던 것은 아님을 당시의 언론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단순히 과거사 문제나 감정적인 열등감과 관련없는 다른 해석이 관여했을 여지가 생긴다. 그 해석이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는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일본이라는 나라 하나만 보고 족치자는 감정만 무턱대고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 지면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브리튼, 즉 대영 제국의 국왕은 영국과 아일랜드 두 왕국의 국왕이자 인도 제국 황제를 겸하는 존재로써[88] 식민지 조선의 언론에서 줄곧 '영국 황제'라고 불렸다. 서반아(에스파냐)와 애급(이집트), 시암(태국) 역시 그 국왕을 '황제'라고 칭하는, 또는 양자를 섞어 칭하는 것이 식민지 조선의 신문 지면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외교 석상에서도 모두 황제가 아닌 '국왕'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영국은 일본보다 30년 앞서 '황제'가 '왕'으로 지면상에서의 호칭이 바뀌었는데, 한국의 언론 지면에서 '영국 황제'로 불린 마지막 인물은 영국령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했던 조지 6세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영국황제'를 검색해 보면 모두 476건, '영황제'는 173건, 심지어 '일황/일왕'과 같은 형태의 줄임말인 '영제'도 167건, '영황'도 22건이 검색되는데, 중복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1952년까지 한국의 신문지면 보도에서 영국 국왕을 가리켜 영국 국왕을 '황제'라 칭하며, 1953년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왕을 '영국 황제'라고 부르는 사례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1950년에서 1960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조지 6세가 서거하고 그 딸인 엘리자베스가 새롭게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1952년의 일이다.[89]

조지 6세는 식민지 조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일본의 조선 지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오히려 일본 제국이 포함된 추축국에 반대되는 진영에 서 있었던 국가의 수반이므로 한국 언론이 조지 6세를 기점으로 영국의 국왕을 황제에서 왕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을 영국에 대한 감정적인 격하라고는 볼 수 없다. 눈여겨볼 점은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을 비롯한 영국의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해 사라지고 그 영국령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했던 조지 6세가 살아생전에는 일단 한국의 언론에서 영국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지 6세 이후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때부터 한국의 언론 지면에서 영국의 국왕을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만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도 제국의 소멸하면서 영국이 더 이상 '황제'라는 칭호에 비벼 볼 '껀덕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음에도 조지 6세는 1952년에 사망할 때까지 줄곧 한국의 신문지면에서 여전히 '영국황제' 또는 '영황제'라고 불렸고, 조지 6세의 서거를 마지막으로 한국의 신문 지면이 더 이상 영국의 국왕을 '황제'라고 지칭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 역시 천황/일왕 표기와 관련하여 그러한 호칭 변경이 막연한 반일감정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일본을 근대 국가로 도약하게 한 계기인 메이지 유신은 쉽게 말해서 근대화라는 이름의 '서구화'였다. 덴노를 대하는 시각에 있어서 동양적인 개념의 '천자'로써뿐 아니라 서구적인 개념에서의 'Emperor'로써도 규정짓는 작업이 수반된 사건이라는 의미다. "일본은 만세일계의 덴노가 통치한다"고 규정한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로 대표되는 덴노의 서구적 '황제(Emperor)'로써의 지위 확립은 폐불훼석 및 신토 국교화 같은 '동양적인' 왕권 강화 개념만큼이나 프로이센식 덴노의 국가원수 및 군 통수권자라는 서구적인 개념 역시 중시되었고, 서구의 입장에서 제3세계인 동양의 수많은 고만고만한 '국왕' 또는 '자칭 황제'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90] 덴노에게 서구의 'Emperor'와 같은 이미지를 씌우고 대내외적으로 현창하는 작업이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루어졌다. 일왕 히로히토, 즉 쇼와 덴노는 막부 말기의 동란을 거쳐 왕정복고의 대호령과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성립된 근대적인 '일본 제국'의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써 즉위했고,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함께 태평양 전쟁을 벌여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신나게 식민지 점령, 개척에 수반하는 전쟁범죄를 자행하다 원폭을 제대로 두 방이나 거하게 얻어맞고 버틸 수가 없게 되자 '옥음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일본 제국의 '패망'을 선언했고, 전설상의 진무 덴노 이래의 덴노의 '아라히토가미'(살아있는 신)로써의 신성성을 부정했으며, 덴노가 최고 통수권자로 있었던 일본 제국의 군대는 모조리 해체되어 국가로서의 일본이 더 이상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군대의 보유 및 타국과의 교전권 일체를 영구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이 새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내외에 천명되었다. 쇼와 덴노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긴 역사에서는 '124대 임금'일지 몰라도 서구와 같은 의미로써의 '근대 국가'로 성립된 일본 제국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황제'이기도 한 것이다.

쇼와 덴노는 일본의 왕사(王史)의 측면에서 메이지 덴노의 이른바 '왕정복고의 대호령' 및 '메이지 유신(1868)'으로 선포되어 1945년 8월 15일 패망하기까지 존재했던 근대 '일본 제국'의 황실전범에 따라 즉위하고 재위한 마지막 군주이고, 패망 이후의 일본은 더 이상 메이지 유신으로 선포되었던 그것과 같은 '일본 제국'이 아니게 되었다. 쇼와 덴노는 그런 점에서 이후 차례로 덴노로 즉위한 아들 아키히토나 손자 나루히토와는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일본 왕가의 '분기점'적인 존재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국의 역사에서는 몰라도 식민지 모국으로써 성립된 '대영 제국'에 있어서는 '마지막 황제'였던 조지 6세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식민지 인도 제국이 독립하고 대영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일단 옛 대영 제국의 일부였던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써 조지 6세는 죽는 순간까지 그의 대에 한정해서는 그대로 '황제'라고 불렀고 그의 죽음으로 식민지를 경영하던 '대영 제국'은 존재의 종언을 고했다는 의미로 한국의 언론이 엘리자베스 2세 때부터 영국의 국왕을 '황제'가 아닌 '왕'으로 보도하게 된 것처럼, 쇼와 덴노 역시 '패망한 옛 일본 제국의 황제'로써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황'으로서 황제의 직함으로 불렸지만 그의 죽음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되어 태평양 전쟁의 패망으로 '정치적'으로 사라진 '일본 제국'이 '존재'의 의미로써도 역사의 유물이 되었음을 대중에 알기 쉽게 직설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태국의 국왕 역시 식민지 조선의 언론 지면에서는 '섬라황제(暹羅皇帝)'[91]라고 불렸다가[92] 1932년부터 '섬라국왕' 또는 '섬라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1932년 당시의 시암(타이)의 군주는 쁘라차띠뽁(라마 7세)였다. 1932년에 시암 즉 타이에서는 쁠랙 피분송크람 등이 주도하는 '시암 혁명'이라고 불리는 군사정변이 일어났는데, 수코타이 왕국으로부터 694년을 이어온 왕정이 절대군주정에서 영국식 입헌군주정으로 바뀌고, 동시에 '시암'이라는 국호가 현대 한국에서는 '태국'으로 번역되는 '타이(ไทย / Thai)'로 바뀐 것이 이때의 일인 만큼[93] 태국의 근현대사를 논함에 있어서 시암 혁명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한데, 이 시암 혁명을 계기로 당시 섬라 즉 시암의 황제였던 라마 7세 쁘라차띠뽁은 망명지 런던에서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영국식 입헌군주제 수용을 받아들였고, 1935년 퇴위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해 한국의 언론 지면에서 '섬라황제'라는 칭호가 사라진다.

물론 태국의 왕정이 아예 사라져서 공화정이 수립된 것도 아니고 왕조가 다른 혈통으로 교체된 것도 아니었음에도 1932년의 시암 혁명, 라마 7세 쁘라차띠뽁의 퇴위와 시암(타이)의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이, 황제 자신이 스스로 쿠데타측의 요구대로 절대왕정이 아닌 입헌군주제를 선택하여 시암 황제에서 퇴위하겠다고 선포한 사건을 두고 당시의 언론은 시암(타이)의 왕사에 있어서 일종의 '전환기'인 동시에 시암의 국왕을 언론지면상에서 '황제'로 호칭할 요건에 어떤 '변동'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1932년의 시암 혁명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의 언론 지면에서는 시암 즉 태국(타이)의 국왕을 '섬라황제'에서 '섬라국왕' 또는 '태국 국왕'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94]

에스파냐 역시 1931년까지 신문지면에서 '서반아황제' 즉 에스파냐 황제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는데, 검색해 보면 '서반아국왕'(26건)이나 '서반아왕'(23건)보다 조금 더 많다(40건).[95] 그러다 1931년 이후로 '서반아황제'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것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931년 4월 16일 에스파냐 각지에서의 공화제 전환 요구에 의해 에스파냐를 떠났던 알폰소 13세가 퇴위하면서 에스파냐의 왕정은 아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에스파냐 제2공화정). 이후 에스파냐에 왕정복고가 실현된 것은 1960년의 일로, '서반아황제'라고 부르던 이전과는 달리 왕정복고 이후의 에스파냐 국왕은 그냥 왕이라고만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왕정복고 이전과 이후의 에스파냐의 왕실을 대함에 있어 단순 격하나 비하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 부여'가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에스파냐 왕정을 가리키는 '왕정'과 '제정'은 모두 똑같이 2건이 검색되고 있다.

이집트의 국왕을 가리키는 '애급황제'라는 칭호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5건이 보인다. 1924년과 1928년, 그리고 1935년에 '애급황제'라고 부른 것이 확인되며, 이미 1922년부터 등장하는 '애급국왕'보다는 출연 시점도 늦고 빈도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애급왕으로 표기한 것은 82건으로, 단순한 당대의 정치적 사건 보도뿐만 아니라 투탕카멘 왕의 무덤 발굴 같은 고고학적인 소재나 이집트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애급왕' 또는 '애급국왕'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1922년에 처음 근대적인 의미의 왕정이 재등장했고[96] 1953년에 왕정이 아예 폐지되었다.

이탈리아도 '이태리황제'라 불린 것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하면 79건이고# '이황제'로 검색하면 25건이 나오며, 그 상한선도 1940년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태리국왕'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에 주로 집중해서 등장하고 있으며, 비중도 44건으로# '이태리황제'(79건)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도 않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영유를 선언한 것은 1936년의 일이지만 이미 1920년에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이태리황제' 또는 '이황(伊皇)'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에티오피아 영유와 상관없이 외국 군주에 대한 존칭으로 '황제'로 불러준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의 언론 지면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황제' 칭호가 '왕'으로 변동된 경우들을 살펴보면 1) 섬라(타이)나 에스파냐처럼 언론상 지면에서 '황제'로 칭할 자격 요건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판단될 만한 사건[97]이 있었을 경우이고[98][99] 2) 그러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체제에서 보유했던 칭호는 사건 발생 뒤에 바로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고 영국처럼 당사자 1대(代)의 생존시에 한해서 유지된다는[100] 모종의 암묵적 법칙이 존재하고 있음을 짚어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쇼와 덴노는 죽기 직전까지는 '일황'으로써 일본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는 유지하되[101] 일본국 쇼와 덴노 1대를 마지막으로 이후의 한국의 언론 지면에서 일본국 국왕들은 타이나 에스파냐와 마찬가지로 '국왕'으로의 표기 변경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러한 과거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맞서 싸운 네덜란드, 호주, 미국, 중화민국 등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구 연합국 국가들은 그러한 과거사 때문에 황제를 왕으로 격하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지만 덴노라고 잘만 부른다"며 "일제의 전쟁범죄 및 과거사가 문제라면 당연히 천황으로 표기하는것에 예송논쟁을 일삼지 않고, 상술한 네덜란드영국처럼 조문을 거부하거나 규탄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반박도 하자면 가능은 하겠지만,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과거사를 대하는 방법론의 문제이지 덴노/일왕 칭호 어느 한쪽이 맞냐 그르냐의 가치판단과는 다른 이야기다. 거듭 강조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고/하지 않았다고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는/그래서는 안 된다는 어떤 강제성은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는데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으니 우리는 뒤떨어진다" 운운하는 것부터가 쓸데없는 자국 폄하일 뿐이다.

3.3. 외교 석상 및 의전에서의 호칭 문제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상대국의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상대국에서 쓰는 호칭대로 불러주는 것이 맞다'가 꼽힌다. "상대국의 군주를 호칭할 때에는 상대국 스스로 자국의 군주를 자칭하는 표현에 기반하여 지위상의 위계를 떠나서 일본이 천황을 황제(Emperor)으로 자칭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그렇게 칭해야 한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상대국에서 쓰는 호칭으로 불러주는 장소에 대한 문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반박이 제기된다. 이미 한국 정부 차원의 외교 석상에서는 제대로 일본의 요청대로 '덴노'라고 불러 주고 있고## 학문적 공정성과 연구방법상의 합리성이 강제되는 학술 대회의 학술 연구에서도 일본의 덴노는 '천황'으로 불린다. 그밖에 역사적으로 빈도가 낮고 영향력이 미미해 중요도가 낮고 의무교육에서도 세세하게 다룰 필요 없는 경우도 학술 대회에서 학술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후술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혹은 공적 기관에서 부르는 공식 칭호라고 그걸 외교 관련 관공서 및 부서나 학술기관이 아닌 일반 대중, 언론에까지 강요하고 그걸 가지고 편을 갈라야 할 이유도 그럴 명분도 없다. 당연히 상대국의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상대국에서 쓰는 호칭대로 불러주는 것이 맞고 그걸 격상이나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우호와 협력을 추구하는 외교 석상에서, 동시에 학문적 정밀함과 공정성, 연구방법상의 합리성이 요구되고 강조되는 학술 대회에서의 이야기이고, 국가간 외교 문제나 학술적인 문제에 직접 관여할 일도, 그런 문제에 대해 굳이 세세하게 파고 들 일도 거의 없다시피한 '비전문가'가 대부분일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까지 그것을 강제하면서 "덴노라고 불러야지 일왕이라고 불러? 사람이 언제까지 열등감에 쩔어서 말이야"라고 떠드는 것은 삐딱하게 말하면 지적 허영에 가깝다. [102]

또한 외교 석상에서 상대국에서 부르는 국가원수의 호칭이 자국에서 부르는 외교상의 칭호와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고, 외교 석상에서의 호칭이 언론이나 여론 감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룩셈부르크의 경우 국체는 황제국도 왕국도 아닌 공국(公國)으로 국가원수가 '대공'이지만 한국의 외교 석상에서, 그리고 이를 보도하는 정책브리핑 등의 대한민국 공식 보도 전자정부 누리집이나# 한국의 일반 언론은 룩셈부르크 대공을 '대공'으로 부르면서도 정작 대공의 아들은 '공자(公子)'가 아니라 '왕세자(王世子)'라고 부르고 있다. #[103] 아버지는 대공인데 아들이 왕세자인 뭔가 언밸런스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데, 일본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나# 일본 언론은 한 술 더 떠서 '룩셈부르크 황태자(ルクセンブルク皇太子)'라고 부른다.# 나무위키에도 '대공세자'로 표현하고 있으니 어째 한국이나 일본 모두 언론이 나무위키보다도 룩셈부르크를 더 챙겨 주는 셈(...)이다.

'천황을 왕으로 부르는 것은 감정적인 격하이고 열등감'이라는 일각의 주장대로 천황 표기를 주장하면서 '왕이 황제보다 낮다'는, '상대국에서 저들이 부르는 용어대로 언론이나 대중도 똑같이 불러줘야 맞다'고 하는 논리를 룩셈부르크에 적용하고 그대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보도에까지 허용하게 되면 영국(국왕)이나 일본(일왕) 같은 다른 군주국보다 룩셈부르크(공국)가 어째 격이 낮은 듯한 뉘앙스로 보이기 쉽다.[104] 동시에 룩셈부르크의 기욤 왕세자는 일본(황태자)보다 한국(왕세자)에서 언론으로부터 하대를 받는 셈이 된다. 룩셈부르크가 한일관계처럼 이가 갈리는 과거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벨기에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참전국인 나라에서 온 그 국가 수반의 후계자를 일본에서는 '황태자'라고 부르고 한국에서 '왕세자'라고 부르는 상황을 들어 왕보다 황제가 높으니 황제를 왕으로 부르는 건 반일감정이고 열등감이다라는 논리를 적용하면 "한국 정부는 자기네들 위험할 때에 참전해서 도와준 나라에 대해서 어째서 일본보다 대우가 박하네? 일본에서는 황태자라고 높여 부르는 사람을 한국은 왕세자라고 부르네?"라는 비웃음을 룩셈부르크 정부나 국민들에게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한국전쟁 참전국이 룩셈부르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룩셈부르크 공자를 한국의 언론 보도에서 왕세자라고 격을 '높여서(?)' 불러 주는데 영국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영국인들 중에 누가 한국인들에게 물어도 할 말이 없다.[105] 룩셈부르크도 영국도 외교 차원에서, 혹은 언론 보도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언론 보도상에 있어서 왕이면 왕이고 황제면 황제, 대공이면 대공이라고 불러야 하고 그 외에는 무조건적인 격하, 비하이다 이런 제재도 규정도 없기 때문이다. 기욤이 룩셈부르크 안에서는 한국의 왕세자와 같은 국본(國本)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왕세자'라는 알기 쉬운 단어를 쓴 것이고, 황태자가 없는 일본에서 나루히토 덴노의 동생이자 고시(皇嗣)인 후미히토를 정식 황태제도 아니고 그럼에도 왕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용어 대신 '왕세제'로 써서 표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3.4. 언론의 방송 보도상 용어로써의 '일왕'과 관련하여

3.4.1. 영문 기사의 'Emperor' 번역에 관련하여

국내 언론의 경우, 일본 황실 구성원 호칭에 대한 통일된 원칙은 없는지[106] '천황'을 '일왕'으로 부름과 동시에 '황태자' 역시 '왕세자'로 현지화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皇太子'를 유지하고선 '고타이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는가 하면(#[107]), '일왕'의 장남 '황태자'라는 괴이한(?) 서술도 있는 형편이다(#). 차라리 왕태자로 썼다면 모를까... 또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더라도 그 언론의 영문기사에선 서양에서의 번역에 맞춰 '일본 황제(Japanese Emperor)'로 표기하며[108] 이는 외국 독자들의 편의를 감안한 번역이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외신에서도 Emperor라고 표기한다는 점이나, 한국 언론이 굳이 '일왕'이라 표기하면서도 영문기사에서는 'Emperor'라고 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며 외신의 표기에 맞춰서 한국 언론도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외국 독자들의 편의를 감안해서 'Emperor'라는 번역으로 따라가는 것이고 국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기사에서까지 외신에서 '황제'라고 부르니 우리도 '황제'라고 불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 역시도 언론의 자유의 영역일 뿐이다.

구미권에서 덴노를 Emperor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첨언해 두자면 처음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이라는 왕국에서 정작 '왕'인 덴노는 종교적[109] 권위 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정치 실권은 엄연히 왕이 임명한 '장군'인 쇼군이 쥐고 있는 상황을 유럽 세계에 소개하면서 유럽의 당시 현실에 빗대어 덴노를 로마 교황, 쇼군을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비유해 설명했다.[110]
파일:日本王国図.png
1676년 이전에 제작된 일본왕국도(Royaume du Iapon). 프랑스예수회 선교사로 역사학이나 지리학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진 필립 브리에(Philippe Briet, 1601–1668)가 제작한 것이다. 일본을 제국(Empire)이 아닌 왕국(Royaume)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나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Ocean Oriental)'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111]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보다 중국[112]에 먼저 들어가서 전도한 경험이 있다 보니 일본과 중국의 국력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 수준일 뿐 아니라, 일본에서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고 칭해 봐야 결국 자국 내에서의 자칭이지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는 일본이 자국 군주를 덴노(천황)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건 뭐 병신도 아니고ㅋㅋ" 하고 코웃음을 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1577년 일본에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 주앙 호드리게스 추주(João “Tçuzu” Rodrigues)[113]1620년에 쓴 자신의 저서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 Arte Breve da Lingoa Iapoa)에서 중국 사람에게 일본의 덴노가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는 얘기를 하자 코웃음을 치며 "아니 밑에 제후로 거느리고 있는 왕도 하나 없는 것들이 황제는 무슨 얼어 죽을 황제래냐ㅋㅋ"라고 비웃더라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일본의 국왕은 황제에 상당하는 이름을 여러 가지 쓰고 있으나, 중국인들은 이를 비웃는다. 그 이유는 중국의 국왕(황제)은 중국 안팎에 왕의 칭호를 가진 자 여럿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황제'이지만, 일본의 국왕은 그와 같은 왕을 거느리고 있지 않으니까 그저 국왕이지 황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주앙 로드리게스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 덴노의 존재를 뻔히 인지하면서도 일본에서 무력을 가진 무사들의 집정자, 다이묘들의 총지배자인 쇼군 내지는 자신들에게 사신을 보낼 정도의 힘을 가진 실력자를 '일본 국왕'으로 간주하고 그를 외교 관계의 대상자로 삼았던 것처럼, 유럽의 입장에서도 '이교도'에 껍데기뿐인 권위 말고는 아무 실권도 없는 덴노보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정치, 군사적 실력을 가진 쇼군을 일본의 실질적인 '국왕(국가원수)'으로 간주하고 그를 일본의 '대표자'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에도 막부 말기 주일 미국 공사 타운젠드 해리스(Townsend Harris)는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Emperor of Japan' 앞으로 보낸 친서를 교토의 덴노가 아닌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

심지어 덴노가 아닌 쇼군을 가리켜 Emperor로 부르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일본을 통일하고 셋쇼 간파쿠에 취임해 여러 다이묘들을 휘하에 거느린 도요토미 히데요시[114]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를 가리켜 '황제 태합 전하(Emperor Taiko sama)'라고 부른 것이다. # [115] 즉 구미권에서 처음 일본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했던 'Emperor'는 동양에서와 같은 유일무이한 절대군주로서의 '황제'라는 의미보다는 '종교적 권위만 있을 뿐 실권은 없는 지도자' 덴노와 대비되는 '실권을 가진 세속의 정치, 군사 지배자' 쇼군이 한 나라 안에서 공존하는 일본의 상황을 강조하고자 사용되었던 셈이다. 이 무렵 덴노를 가리켜 번역할 때에 사용된 용어는 '미카도'(Mikado of Japan)였다.[116]

3.4.2. 일본 황실 궁중용어 표기에 관련하여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게 되면 일본 황실은 왕실, 황후는 왕비, 황태자는 왕세자가 되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도 덩달아 바뀌어야 하고 여기서 혼선이 야기된다는 점이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따로 친왕과 왕 등 각각의 작위가 황실전범[117]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천황을 지칭할 때 '일왕'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118] 여기에 '친왕/내친왕[119]', '왕/여왕[120]' 같은 일본 황실 용어들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난감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천황 표기르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왕'이라는 표현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를 대체할 경우 일본 극우파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를 외친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 언론들은 "일본 극우파들이 '일왕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 주체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특히 일본인일 경우엔 일왕이란 표기는 영 어색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표현상의 문제이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개인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다.[121]

다만 현대 한국인 관점으로는 일본 황실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거나 관심이 없는 이상에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친왕 문서에 보듯, 왕 작위의 개념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왕'이라고 하면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 천황(황제)과 왕을 황족 내부에서의 위계에 따른 호칭으로 보기보다는 일단, 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나라의 수장에 대한 칭호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 군주가 여럿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이 한국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바꾸는 게 언어 소통 면에서 명확하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한 한국어로 그대로 음차할 수 있는 일본 천황과 황족 작위들을 '왕'이나 '왕세자' 등으로 현지화하는 것이 언어의 경제성과 사회성을 모두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황실을 설명할 때에 천황과 황후, 황태자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언론에서 굳이 일일이 다룰 일이 거의 없는데 중요도도 인지도도 없고 언론 노출도 별로 없는 인물을 위해서 굳이 고유명사 표기를 따로 도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경제성, 사회성 모두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122] 친왕이라는 용어는 현직 천황의 친자식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자식과 그 아들들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천황의 딸을 가리키는 내친왕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는 아예 쓰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123] 차라리 히사히토 '왕손'이나 아이코 '공주'라는 표기가 히사히토 '친왕'이라는 고유명사 표기보다 더욱 쉽게 와 닿을 뿐 아니라# 고유명사 표기의 경우 전근대에는 천황이 정실 황후뿐 아니라 측실이나 궁녀로부터도 자식을 얻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러한 경우 정실 소생이냐 아니냐 또는 친왕선하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나아가 승려로써 출가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친왕/왕/법친왕 또는 내친왕/여왕으로 구별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일단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천황이 양위하는 경우 양위한 천황을 상황이라고 부르게 되지만, 여기서 또 출가하면 법황(法皇)이라고 부르는 용어가 따로 있고, 나아가 양위하고 출가까지 한 천황이 인세이를 행하는 경우까지 있고 인세이를 행하는 천황을 '치천의 군'이니 '인(院)'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보니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특수한 일본 역사에서의 복잡한 전개 및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천황/상황/법황/원정 등의 용어 사용은 불가피하며 필수적인 것이지만, 적어도 근현대 언론 보도에는 그럴 우려가 없다. 아키히토는 나루히토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치천의 군'도 아니고 승려로써 출가한 '법황'도 아니며, 현대 일본의 종친 중에도 승려로 출가한 '법친왕'은 없다.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는 것은 감정적인 격하일 뿐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평화주의자' 나루히토는 '천황'이고 '극우' 후미히토는 '대군'이라고 부르느냐고 따지기도 하는데, 한국 언론에서는 나루히토가 태자가 되기 전까지는 후미히토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대군도 군도 아니라 일괄적으로 그냥 '왕자'였다. 여기에는 격하나 비하 어떤 의미도 없고 '공주'처럼 그냥 '왕의 아들'이라는 관계 설명의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124] 애초에 대군/군도 공주/옹주처럼 왕의 적자냐 서자냐를 구분하는 건데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그런 걸 구분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후미히토의 지위는 굳이 일본 현지 표현을 존중하자면 그냥 '친왕'이 아니고 '황사(皇嗣)'로 불려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황사'라는 용어가 생소하다 못해 거의 사장된 상태인 것은 물론, 일본에서도 확정된 계승자의 지위로 정립된 게 아니라 후미히토라는 인물이 이러한 지위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범 속 용어를 가져다 편의상 붙인 말이다. 그냥 왕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므로 한국 언론도 그 점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표현하고자 '황사'로서의 후미히토의 지위를 굳이 전근대의 용어인 '왕세제'로 치환해서 부른 것뿐이다.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이 왜곡된다는 우려도 학술 용어로써 천황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의 이야기지,[125] 학술 용어가 아닌 단순 언론 보도나 일반 대중의 일상 생활속 담론의 경우에는 천황 호칭에 딸린 무수한 일본 황실전범 속 고유명사 호칭들의 왜곡 문제를 우려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천황을 일왕으로 부른다면 왕(王)이 들어가는 일본의 여러 관직이나[126] 세습친왕가들은 어떻게 번역해야 하느냐"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학술 대회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나 외교 석상의 의전상 호칭에까지 일왕 칭호를 고집하는 연구자는 학계에 없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일본사를 공부하는 경우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파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시라카와 백왕가가 무엇이고 세습친왕가가 무엇인지, 왜 그런 가문이 일본에서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속사정을 일반 대중이 특별히 교양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 아니고서야 일일이 알 일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학문적 연구를 주목적으로 하는 학술 대회나 교양 서적이 아니고는 그다지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알 일이 없다. 무엇보다 시라카와 백왕가도 세습친왕가도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 패망 이후를 전후해서 모두 사라져 현대 일본에서는 모두 존재하지 않고 교과서나 학술대회 같은 곳에서나 언급되는 역사의 유물일 뿐이다.

한국에서 세계사를 그렇게 깊게 공부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고, 자국 안에서조차 자국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역사가 아니면 전문가 아닌 이상에는 자세히 모르는 경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동서고금 막론해 널리고 널렸다. 은징가 여왕, 사가 왕, 메넬리크 2세[127], 에밀리오 아기날도, 쁠랙 피분송크람, 이디 아민, 폴 포트, 게오르기 말렌코프, 레흐 바웬사 같은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해서 자신들의 지역이나 관련 열강에게나 영향을 미쳤지, 세계 정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비주류'이고, 역덕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아는 사람이나 일상에서 언급할 사람도, 그럴 일도 별로 없다. 일본의 역사만 해도 "지금의 일본의 형성을 연구함에 있어서 구구한 과거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고, 딱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만 알고 있어도 그것만으로도 '일본 역사를 잘 안다'고 하기 충분하다"는 말이 나이토 코난(内藤湖南) 같은 일본 사학계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나온 판이다. 일본을 넘어 한국, 나아가 전세계구급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다는 센고쿠 시대, 막부 말기조차 관련 역사를 전문적으로 파고 사는 연구자를 제외하면 소위 '역덕'이 아니고서야 속속들이 그 역사적 사건의 전개와 내막, 등장 다이묘들의 이름을 세세히 꿰고 아는 사람이 드문 판인데, 센고쿠 시대 무장이나 에도 막부와도 관련이 크게 없는 시라카와 햐쿠오케가 무엇이고 세습친왕가가 무엇인지 관련해서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논문을 작성, 발표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그걸 일일이 다 알고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고 일상에서 언급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3.4.3. 중국의 한국 '총통' 표기와 비교하여

중국의 경우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천황/일왕 호칭 논쟁과 견줄 만한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한국을 포함해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의 국가원수는 대부분 공식 표기가 '대통령(大統領)'이고[128][129] 한국 역시도 국가원수를 대통령이라 공식 칭호이자 직함으로 정하고 있지만, 중국은 그런 걸 쿨하게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대통령'이 아니라 굳이 '총통(总统)'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세계의 다른 공화제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한국에서는 미국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러시아 대통령(Президент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독일 대통령(Bundespräsiden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라고 표기되는 지위가 중국 언론에서는 각각 '美利坚合众国总统', '俄罗斯联邦总统', '德國聯邦總統'인 것이다. 즉 '한국 대통령'은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한국 총통'이다.

2013년 한중정상회담 때에도 인민일보 등 중국 언론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가리켜 '한국 총통'이라고 번역했지 '한국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지 않았고#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총통'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고 총통 하면 히틀러부터 먼저 떠올리는지라 한국인들은 한국 대통령이 무슨 독재자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현행 중국어 위키나# 바이두 백과에서도# 심지어 외신의 중국어 번역에서도# 그러한 '한국(대한민국) 총통' 표기는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대만도 이 점에서 차이는 없다. [130]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 당시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 대선 당시 충남 지역 선거 유세를 앞두고

묘하게도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단어는 '대통령'이나 '원수'에 비해 훨씬 '독재자'의 이미지가 강한 뉘앙스의 단어로 쓰인다. ## 아무래도 당시 총통이라 소개되던 이들, 한국인들이 접한 '총통'들이 나치 독일의 '히총통' 아돌프 히틀러나, 36년 동안 에스파냐를 독재 통치했던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 그리고 1949년국부천대 이후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대만(자유중국)의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은 '종신총통' 장제스까지.[131]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7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132]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을 두고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웃기게도 그때 한국 안에 신민당도 그렇고 공화당도 그렇고 '대통령'이나 '총통'이나 똑같이 미국에서도 쓰는 그 'President'의 이역(異譯)인 줄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지, 공화당에서도 "박정희가 당선되어도 총통제를 시행할 일은 없다"고 항변할 정도였다.

미국나 독일 같은 구미권이야 아예 언어 체계 자체가 다르니 그렇다 쳐도 일단 한자 문화권을 공유하는 한국에 대해서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기대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을 것을 굳이 자기네 한자 표기대로 바꾸는 중국의 사례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한국내 일각의 주장처럼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일왕이 아닌 '천황'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맞다면, 마찬가지로 총통이나 대통령이나 어차피 'president'의 번역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총통'이라는 표기에 대해서 아무래도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있는 만큼, 미국 등 구미권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단 같은 동아시아권 국가로써 한국에 대해서는 '총통'이라고 부르기보다 한국에서 부르는 대로 '대통령'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맞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일단 일본 언론에서는 '총통'과 '대통령'을 분리해서 쓰고 있다. ##

또한 "민주당계 정당이 편집증적 친일 성향, 혹은 친중 성향이 있어서[133] 일본 천황은 일왕이라고 비하해서 표기하면서 중국 주석은 말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134]는 것이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근거라면, 마찬가지로 한국의 공식 표기인 '대통령'을 놔두고 '총통' 번역을 고집하는 중국에 대해서도 "총통이라고 부르는 건 듣기 뭐하니까, 우리 정부와 언론이 중국의 국가수반을 중국에서 부르는 대로 '주석'이라고 부르듯 중국에서도 우리가 부르는 대로 '총통'보다는 '대통령'이라고 표기해 달라"고 중국에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 총통이나 대통령이나 어차피 한 단어를 다르게 번역한 거고 총통에 대해서 독재자라는 뉘앙스를 갖는 것은 지나치게 과거사에 얽매인 오해이다, 중국이 우리 국가원수를 총통으로 부르든 대통령이라 부르든 민주 공화국인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반론이 나오기 충분하다. 그런 시점에서 천황이나 일왕이나 어차피 군주에 대한 호칭인데 무슨 상관이냐 라는 반론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한국 대통령을 굳이 '총통'으로 번역하는 것을 두고는 중립적이고 동등한 입지에서의 병행에 가까운 것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입장이 어떻든, 중립적이든 동등한 입지든 일차적으로 당장 그 대상자인 한국인들이 '한국 총통' 표기를 독재자 이미지가 겹쳐서 불쾌하고[135]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판인데[136] 그걸 중립적이네 동등한 입지네 말할 수는 없으며, '일왕'이라는 표기를 무조건 격하이고 폄하라며 일본에서의 표기대로 천황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한중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표기하는 대로 중국도 상호주의에 따라 '총통'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불러 줘야 마땅하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걸 "중국인들은 대통령이라는 말 가지고 한국인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발끈하지도 않고 한국인들이 그걸 가지고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지도 않거든?"[137]이라는 말은 몰상식한 단순 비교 내지 쓸데 없는 자국 폄하에 불과하다.
3.4.3.1. 김대중 전 대통령 "일왕 표기는 열등감의 표현" 발언과 관련하여
한국외국어대 임대근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총통'이라는 한자어 자체는 대통령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고 둘 다 '공화제를 채택한 국가의 원수'를 가리킨다. 이것이 한국에서 1971년 제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를 두고 "이번에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를 시행할 것이다"라고 비난한 것이 널리 회자되면서 총통을 '막강한 권한을 가진 독재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임 교수의 지적이다. 한 마디로 김대중이 박정희를 두고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할 때 '총통'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독재자를 가리키는 말로 쓴 게 발단이라는 것. #

'천황' 표기만이 옳고 일왕 표기는 열등감의 발로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들은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령인 김대중도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나온다. # 하지만 "김대중이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이라고 말했으니까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의 발로다"라는 명제는 분명하게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이자 사람에 호소하는 오류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김대중이 총통이라는 단어를 독재자라는 의미로 사용했으니 총통이라는 말은 독재자를 가리키는 말이 맞다"라는 역명제도 충분히 성립될 것이다. 애초에 정치인의 발언은 그 자체가 어떤 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 김대중이 '총통'을 독재자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총통이 독재자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명제가 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138] 김대중이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이라고 발언했다는 것이 일각에서 말하는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등감의 발로'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정치인의 발언이 그 사안에 대한 참과 거짓 또는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다른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현충일 기념사에서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결집 과정에서 약산 김원봉조선의용대가 편입"된 점을 언급하고 이어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이 광복 후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 것은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으로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언급하는데 북한 정권 수립 공로자인 김원봉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북한 정권에 대한 찬양이라는 혹평을 들었고# 2023년윤석열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에서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삼일절 기념사임에도 일본의 잘못을 충분히 지적하지 않은 것은 물론 조선의 잘못 외에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을 거론하지 않아 균형감을 잃었다는 학계의 비판을 들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광복군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원봉이나 조선의용대를 언급한 것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고통받았던 과거' 운운한 것에 대한 언론의 비판점은 각자가 국가원수로써 그 사안을 어떻게 바라 보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토대하는 어떤 국정철학을 가지고 국정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이 우선이지, 문재인(윤석열)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 말이 맞다 혹은 그게 아니라고 했으니 그 말은 틀렸다라는 식으로 그 말을 어떤 사안의 참 혹은 거짓 또는 선악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발언은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발언의 화자와 발언 대상, 발언 장소 역시 고려하고 판단해야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덴노 아키히토를 '천황 폐하(덴노 헤이카)'라고 부른 것은 '1998년 10월 7일 일본 국빈 방문 첫날의 일이었고, 김대중은 그날 만찬에서 일본의 과거사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고, 훗날의 육성 발언에서 "일본 사람은 자기들이 천황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그대로 불러주면 된다. 왜 우리가 따로 이름을 붙이는가. 잘못된 일종의 열등감이다. 외교적으로도 결례다."라고 말했는데, 김대중의 발언은 단순히 천황/일왕 호칭의 열등감이다 아니다 문제를 재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의 과거사로 인해 상처받았던 피해를 극복했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국가 수반으로써의 '자신감의 피력'으로 해석해야 좀 더 적절하다. [139][140] 적어도 그 발언 자체를 가지고 김대중도 일왕이라 부르는 건 열등감의 표현 운운했으니 일왕이라고 부르는 건 열등감의 표현이 맞다 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3.4.4. 민주 공화정의 시민으로서의 '천황' 인식에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외국 군주의 호칭에 대해 불필요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을 폈다. 한 마디로 "쟤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든 말든 당당한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만 아니면 그만 아니냐"라는 것.

하지만 천황이라는 존재가 엄연히 과거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 전쟁의 기치로 활용되었고 패전 뒤에도 일본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전쟁 책임을 져야 할 천황은 미국과의 '사법 거래' 비슷하게 처벌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이는 다시 생각할 문제이다. 일본 정부가 '천황'을 앞세워 자행했던 그 부정적인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고 반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141] 모를까, 2023년 현재진행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의 우경화는 결코 과거의 일도 외국의 일도 아니며, 그 천황을 내세웠던 일본 제국 자체가 현대 대한민국이 1919년 임정 수립 이래 헌장에 명기하고 현대 헌법 조문 제1조에 명기할 정도로 자부하는 민주 공화정을 위협하는 한 축의 중심이었다. 박훈 교수 말처럼 '쟤들이 뭐라고 부르든 어떠냐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만 아니면 그만이지'라고 속 편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저 칼럼을 기고하고 두 달 뒤에 일본 나고야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에 우익들이 훼방을 놓았고# 박훈 교수 본인도 1년 전 서울경제에 기고했던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에서는 정작 '일왕'이라고 표기했다. #

한편 일본의 전 아사히 신문 기자였던 칼럼니스트 나리카와 아야는 2021년 한국기자협회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에 천황 관련 기사를 쓸 때 천황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고 '무슨 실례냐'며 항의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경험담을 전한 바 있다.#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의 언론에서는 천황 관련 보도에서 "천황이 백신을 접종했다"가 아니라 "천황 폐하께서 백신을 접종하셨다" 하는 식으로 명사뿐 아니라 동사에까지 높임말을 쓴다는 것이다.[142] 아사히 신문은 예외적으로 동사까지는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143]

단순히 자국의 국왕에게 '천황'이니 '금상 폐하'니 하고 부르는 것을 넘어서 부르거나, 그 천황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그냥 백신 접종했다고 적지 않고 "금상 폐하 부부께서 백신 접종을 하셨다"라고 그 행동거지까지 높여 쓴다는 건 당연히 한국인들의 기준에서는 과거 군부 독재 시절 대통령을 두고 깍듯이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던 어용 언론들의 행태나 북한 노동신문 보도를 상기시키는 해괴한 짓거리고, 한국뿐 아니라 웬만큼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나라의 가치판단 기준으로도 열에 아홉은 '뭐야 이거?' 하는 식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이런 보도를 하는 언론사의 입장에서야 이런 해괴한 표현마저도 '언론의 자유'이고[144] 한국 언론도 아닌 외국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에 그 표현의 사용과 수위까지 일일이 한국 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 [145][146]
어떤 사안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그 사안이 옳고 그르고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박훈 교수의 말처럼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일본의 군주를 일왕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천황이라고 부르면 어떠냐"라는 논리는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라서 천황이라 부르든 일왕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황이라는 칭호 및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에 있어서 일본의 언론이나 사회 일각에서 보이는 언행들에 담긴 천황관(觀)이 결코 용납이 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타국의 문화나 사회 여론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지만, 그 여론이 어떠한 감정과 어떠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파악하지 않은 채로 맹목적으로 존중할 수는 없다.

"상대국의 군주 호칭은 상대국에서 부르고 불러 달라고 하는 대로 불러주는 게 맞다"라는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기 힘든 이유가 이것이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일왕 표기에 대한 '한국인의 편집증적 반일감정'만을 말할 뿐 '천황'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일본의 언론 매체나 저널리즘 및 그에 반영되어 있는 일본 정부의 천황관, 나아가 그러한 언론 보도를 대하고 평가하는 일본인들의 천황관이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는 '천황'이라는 용어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이 '천황'이라는 용어를 한국 언론이 사용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시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을 조금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천황 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맹점이다.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하이고 비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이런 식의 보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일본이라는 사회가 인식하고 체감하는 '천황'에 대한 인식의 발로와 결을 같이하면서 나온 것이라면, 그걸 '민주 공화국' 한국 사회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고, 어디까지 용인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도 제기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147] 즉 언론 차원에서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은 처음부터 뭔가 격하나 비하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도 아니지만, 언론사로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위한 '거리두기'를 위해서라도 보다 적절한 태도라는 반박이 존재하는 것이다.[148]

3.4.5. 정부의 공식 입장과 언론 보도 및 대중의 인식 사이에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 '천황'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등 정권을 가리지 않고 외교석상에서 일본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감정적인 컴플렉스의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 가운데 하나가 한국 정부에서 외교 석상에서는 공식적으로 천황 표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며 "일왕 표기는 반일감정에 편승하려는 특정 정치 집단의 정치적 의도이고 한국인들의 일방적 반일감정에서 나온 열등감으로 격하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고 대한민국 정부가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고 내세우며, 외교 석상에서 정부가 천황으로 부른다는데 왜 언론이나 시민들이 일왕으로 부르느냐고 문제삼는다.

하지만 일본 왕/일왕 표기를 주장하는(혹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그런 말은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방송 용어로서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도 학계에서 학술 용어로써의 '천황'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대일 외교석상에서 천황 표기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일본 내에서도 자국의 천황을 '왕'이라고 불렀고 그걸 '격하'나 '비하'라고 여기지 않은 사례들이 있는 이상 "지들끼리도 왕이라고 부른 전례가 몇 번이나 있는데 그게 왜 비하라는 거냐?"라는 반론을 제기할 근거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거니와, 국가 권력을 집행하는 정부 기관이나 공신력을 갖춘(그리고 그럴 의무가 강제되는) 학술 단체가 아니고 제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가치판단을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방송 언론이나 이러한 여러 문제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대중의 입장에서 천황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 자체에 대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이고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기 때문이다.[149]

말 좀 험하게 보태면 공석도 아니고 공신력 있다 평가되는 기관이 아닌 개인이 '왜황'이라고 부르든 '쪽바리 군주'라고 부르든, 뒤집어서 인터넷에서 익명의 누군가 혹은 게시판에서 독립운동가 폄하 발언이나 위안부 왜곡 발언이 나와도 그것마저도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헌법으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본인들에게 닥칠 후폭풍이나 발언 자체의 가부 논쟁 및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란 및 비판, 나아가 그로 인해 발언자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곱게 파묻히는 결말을 본인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모든 패널티에 대한 각오를 하고서라도 뇌 필터를 거치든 말든 자기한테 달린 입으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뭐 꼴리는 대로 떠들고 다니겠다는데야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발언의 법리적 시시비비를 가려[150] 법으로 규정된 만큼의 패널티를 가하고, 또는 곱게 사회적으로 파묻어 줄지언정 발언하는 행위 자체를 무언가 법적으로 제재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매일경제가 평가하는 1989년 재일교포 지문 날인 사건 이전에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실린 당시 신문들을 보면 오히려 언론이 '천황'이나 '일황'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일반 시민이 기고글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151] '천황'이라는 단어 사용을 굴종적인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용어로 여겨 불쾌함을 표하는 의견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1998년 당시 한국 정부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외교 관례에 따라 일왕이 아니라 천황으로 부르기로 결정했지만, 동아일보의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천황이라는 표현 자체를 '시대 착오적'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의견이 62.8%로 우세했고, 천황으로 부르자는 대답은 19.7%였다. # 참고로 "대등한 나라끼리는 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며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지한 이들 가운데는 조선일보이규태도 있었다.# 원윤수 당시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도 1998년 동아일보 기고에서 '천황' 표기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정부가 이러한 입장을 표명했으니 언론이나 대중도 그러한 정부의 입장을 보조해서 거기에 맞춰야만 한다는 주장은 자칫 언론이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어용' 언론으로 전락할 위험성, 나아가 전체주의(파시즘)로 변질될 위험성도 내포한다. 국가 또는 범국가적 기관[152]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해서 그것을 꼭 언론이나 시민들이 무조건 그 표현만 사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하는 식의 어떤 강제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153] 한 국가의 군주에 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코로나19오염수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발견되고 발발한 지역인 중국의 우한의 지명을 따서 우한 폐렴이라는 용어가 언론에서 쓰였고, WHO는 특정 국가나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표기하는 것은 자칫 그 국가 및 지역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들어[154] '코로나19'라고 부르는 것을 권장했고 한국 정부 역시 그렇게 불렀지만# 그것을 각국의 언론이나 개인 SNS까지 강제한 것은 아니었고## '코로나19'와 '우한 폐렴'을 섞어 쓰는 언론은 많았으며# 조선일보매일경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한 폐렴', '우한 코로나'라는 용어를 사설에서 자주 사용해[155] 저널리즘 관련 지적을 들었다. [156][157] 이것 역시도 그들 언론사로써는 '언론의 자유'의 영역일 뿐이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언론의 본령이자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나 신뢰도를 저버린다는 것도 그들 언론사가 감당할 '책임'이자 '업보'이다.

요컨대 천황이라는 표현이 국가, 정부 차원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해서 그것을 방송이나 저널리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천황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거나 일왕이라는 표현은 쓸데없는 자격지심의 발로 또는 특정 정당의 선동일 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며, 오히려 국가, 정부 차원의 용어라는 이유만으로 외교 석상이나 학술 대회 등이 아닌 방송 보도나 저널리즘, 나아가 일반 대중에게까지 그것을 강제하기는 어렵고 이 또한 전 항목에서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자유에 맡길 문제이다.[158] 국가의 공식 호칭이나 용어라고 해서 언론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강제성은 현행 대한민국의 법률 어디에도 없으며, "공식 명칭을 천황으로 정하고 있는데도 굳이 일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쓸데없는 자격지심의 발로 또는 특정 정당의 선동일 뿐"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여담으로 일본은 외국 국왕들의 사망 소식도 일본 정부 내각에서만 공식적으로 붕어(崩御)라고 하지 시중 언론에서는 붕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표현인 사거(死去)를 주로 쓴다. [159] 2016년 10월 13일라마 9세가 사망했을 때에 태국 궁내청 문서나 비공식 일본어역에서는 '붕어'라고 했지만, 대사관 사이트에서는 '서거'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2022년 9월 8일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의 언론 대부분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을 '서거(逝去)'로 표현했는데, 일본 궁내청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을 자국의 덴노의 그것과 같은 '붕어'로 표현하고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서도 '여왕 폐하'라 불렀지만# 일본의 4대 일간지 즉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마이니치, 그리고 아사히 모두 일본 궁내청에서 사용한 '붕어'라는 표현 말고도 '사거'라는 표현을 써서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보도한 것이다. (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마이니치)(아사히) 일본의 언론 보도가 궁내청의 공식 용어처럼 '붕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붕어라는 표현 하나만을 사용해 보도하고 그렇지 않은 보도는 '일방적인 폄하' 내지 '열등감'으로 인식하는 여론은 확인되지 않았다. 가나가와 현립 박물관처럼 아예 '돌아가셨다(亡くなりました)'라는 표현으로 갈무리해 전한 경우도 확인된다. #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석 달 뒤인 12월 31일에 베네딕토 16세가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일본 외무성은 베네딕토 16세의 사망을 '붕어'로 표현했지만# BBC바티칸 뉴스의 일본어판은 모두 '사거', '귀천(歸天)' 또는 '서거'라는 용어를 썼다.

1989년 쇼와 덴노의 사망에 대해서도 당시 NHK는 '붕어하셨습니다(崩御あらせられました)'라는 말과 '돌아가셨습니다(お亡くなりになりました)'라는 말을 병행해서 표기했는데# 쇼와 덴노가 워낙 오래 재위했다 보니 붕어라는 말을 일본 안에서도 쓸 일이 없어서 '붕어가 뭐야?'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고... 11년 뒤인 2000년고준 황태후가 사망했을 때는 요미우리와 산케이를 빼고는 그냥 '서거(ご逝去)'라고만 썼다. 일본 현지에서조차 왕실의 죽음을 편집증적으로 '붕어'라는 말로만 표현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하이고 격하다 라는 식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4. 결론

천황(덴노)라는 칭호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용어이자 한국 정부의 외교석상에서의 공식 칭호로, 학술 대회나 외교 석상에서 학술적인 견지 및 외교적 수사로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본 국왕(일왕)이라는 칭호 역시 엄연히 역사성이 존재하는 용어로 언론 및 방송상 제3자의 입장에서 일체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객관적인 용어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황이라는 칭호가 친일적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며, 일왕이라는 칭호도 반일적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요약하면 일본 천황이라는 호칭만이 정식이고 일왕(일본 국왕/일본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하이자 비하라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메이지 이후에 정립된 것이고 일본의 역사에서는 그 군주를 가리켜 '천황'이라고 부르든 '왕'이라고 부르든 그 어느 쪽도 딱히 '비하'나 '격하'의 표현은 결코 아니었으며, 일각의 주장처럼 '천황'이라고 부른다고 무조건 친일파라는 식의 일방적인 평가만큼이나[160]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의 어두운 역사를 들먹이며 "쟤들은 더했는데 왜 여기만 뭐라고 하냐? 열등감 쩌네"라고 몰아붙이는 논리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특정 정치 집단의 편집증적인 반일 의식의 발로라거나 식민 지배의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국수주의적 표현이라고만 딱 잘라 몰아붙일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5. 보충: 학술 용어로서의 '천황' 사용에 대하여

한국어 말뭉치 물결21 코퍼스# 상에 '천황'을 입력해 보면 '천황'의 용례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일본의 천황뿐 아니라 치우천황이나 지리산 천황봉 혹은 고사성어 파천황 등도 중복되어 있으며, 시사 방송뿐 아니라 천황이라는 존재와 지위의 역사성을 추적한 학술 교양 서적에 대한 서평 기사도 공존하고 있다.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카이저', '차르'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된 동아시아사는 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한반도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도 일본에게 '조공'했다는 일본서기 식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함이며 일본서기 자체가 가려 볼 점이 많다는 전제가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우리가 중국의 황제를 인정해서 황제라 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 이집트 파라오애급의 애왕이라고 표기하지 않듯[161] 천황도 일왕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표기하고, 대신 그들이 천황이라 하든, 황제라 하든, 파라오라 하든, 카이저라 하든 우리는 으로 인식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즉 한자 뜻에 얽매이지 말고 현지에서 쓰는 고유명사로서 보자는 취지이다.

천황이나 일왕이 아니라 '일본 군주'와 같이 한국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반 명사 ‘군주’로 통일하자는 의견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영국 여왕 등 현대에도 군주정이 남아 있을 경우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군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제 작위가 대공인 모나코 등 소국 군주도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군주라 부르기 때문이다.

한편 책에서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왕'을 사용하는 책들도 있다. 일례로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에서는 천황을 사용했지만 Go Go 카카오프렌즈에서는 일왕을 사용했다.

일본의 사극을 보면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 말기까지 해당 시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에서 덴노를 가리킬 때에는 거의 대부분이 '미카도(御門)'나 '슈조(주상)', '오카미(大君)' 아니면 '~~테이(帝)'라고 부르지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라고 곧장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담으로 NHK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2012년)의 경우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극중에서 천황가를 가리켜 왕가(王家)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 내부에서도 "천황가인데 왜 왕가라고 낮춰서 부르느냐"고 말이 나올 만큼 어메이징한 일이었다. [162] 담당자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게 학술적 견지를 따른 거였다. 당시 다카하시 마사아키와 함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시대 고증을 맡은 혼고 가즈토(本郷和人)[163]의 저서 <수수께끼 다이라노 기요모리(謎とき平清盛)> 62~64쪽에 소개되어 있는 일화를 보면
<ドラマ・平清盛>では、天皇や上皇の家を「王家」と称します。ですが、今までの大河ドラマでは、天皇家とか皇室とかの語を用い、王家とはいわなかった。どうして今回は新しい呼び方を取り入れるのか。
先ず押さえておかねばならぬのは、当時の言葉の使い方です。
そこで調べてみると、天皇家も皇室も王家も、使われていない、が正解です。当時は天皇や上皇や皇太子や女院などをひとまとめにして「ファミリー」として考える、ということをしなかった。
ある研究者の整理(「<王家>をめぐる学説史」歴史評論2011年8月号)によると、王家という語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第1章(3)でふれた黒田俊雄氏の権門体制論からのようです。
その後、西洋史の影響を受けて、日本の歴史学でも「王権」の分析が盛んになりました。戦前のように、日本の天皇は他国に例を見ない唯一無二の存在である、というのではなく、天皇を国の頂点に君臨する王と捉える。そうすると自ずと他国との対照・比較の視点が開け、東アジアの中の日本、世界の中の日本を考える際にも有用である。ですので、現在の学界では、王家という呼び方が確実に市民権を得ているのです。そこで時代考証の判断として、学問的な見地から、「王家」の語の採用を提案しました。
(번역) <드라마 다이라노 키요모리>에서는 천황이나 상황의 집안을 '왕가'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하드라마에서는 천황가라든가 황실이라든가 하는 말을 사용했지 왕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번에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는가.
먼저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시의 언어 사용법입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천황가'도 '황실'도 '왕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가 정답입니다.[164] 당시에는 천황이나 상황이나 황태자나 궁녀 등을 한데 묶어 '패밀리'로 생각한다, 는 게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165]의 정리(<왕가>를 둘러싼 학설사> 역사평론 2011년 8월호)[166]에 따르면 왕가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 것은 제1장(3)에서 언급된 구로다 토시오(黒田俊雄)의 권문체제론(權門體制論)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서양사의 영향을 받아 일본 역사학에서도 왕권 분석이 활발해졌습니다. 전쟁 전처럼 일본 천황은 타국에 유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천황을 국가의 정상에 군림하는 '왕'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의 대조·비교의 시점이 열려 동아시아 속의 일본, 세계 속의 일본을 생각할 때에도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왕가'라는 호칭이 확실히 시민권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고증의 판단으로 학문적 견지에서 '왕가'라는 단어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인세이'를 포함한 일본의 중세사를 연구함에 있어 '왕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 혼고 가즈토의 책에 나온 이 구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이란 쉽게 말해서 중세 일본이라는 나라는 군주 즉 '왕가'를 국가의 핵심에 두면서도 '섭가'와 '무가' 등 여러 '권문(權門)'[167]이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하며 국가권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국가관으로, 현대 일본 중세사 연구에 있어서는 거의 정론이 되어 있다.[168]

구로다 토시오는 이 권문체제론을 주장하면서 '천황가'나 '황실'이라는 용어는 근대 일본 국가권력에 의해서 사용된 용어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근대에 성립한 용어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모종의 선입견, 이데올로기 등 사고상의 제약을 줄 수 있다[169] 보았기에 그러한 기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중세 당시에 실제로 자주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는 '왕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창한 것이다.[170] 쉽게 말해 '천황가'니 '황실'이라는 용어가 엄연히 천황가에 비등하게(혹은 그 이상으로) 중세 일본 역사 전개의 중추를 차지했던 섭가나 무가를[171] 단순히 천황가나 황실에 부속된 곁가지이고 독립성이 없었다고 여겨지게 함으로써 일본 역사를 지나치게 천황 중심으로만 이해해 버리는 착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구로다의 지적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덴노의 지배 권력을 쇼군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왕권'으로 표현하며 근현대 이후로 덴노에 대한 학술 연구에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늘어났는데, '왕권'이나 '왕가', '왕조'라는 용어 역시 일본 학계에서는 타국의 왕정 국가에 대한 서술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에 있어 덴노의 군주정을 다루면서 진작에 사용한 용어였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화 작품에 그러한 학계의 견지가 반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 도산 안창호가 임종하기 전,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당시 천황이던 메이지 덴노를 유언으로 나무란 사례가 있다.[2] 참여정부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3] 쇼와 덴노가 사망한 해이다. 기존에는 1989년 재일동포 지문 날인 파동 이후에 반일 감정이 상당히 격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왕이라는 명칭이 주류를 점하게 되었다고 여겨져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후술.[4] 여담으로 한국에서 '일왕'이라는 표기를 해방 뒤에 가장 먼저 사용한 언론이 동아일보다.[5] 이와 같은 미디어물과 게임, 소설에 익숙해진 일부 사람들이 이런 식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댄 것이 대한제국의 황제 선포.[6] 사실 상대국의 군주를 호칭할 때에는 표현에 담긴 지위상의 위계를 넘어서 상대국에서 칭하는 표현에 기반하는지라 일본에서 덴노로 부르는 것이 다른 군주들보다 일본을 우대하려는 의도라고만 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으며, 한국의 외교 석상에서 '덴노'라고 칭하는 것 역시 그런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언론 및 대중의 일왕 표기와 사용을 두고 "'일본 천황을 천황으로 칭하고 나머지 왕을 왕으로 부르는 것을 일본만을 칭송하고 나머지 국가를 싸그리 비하하는 의미'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며 '일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왕-황제 호칭 간의 위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했다"는 주장이야말로 왕-황제 호칭간의 위계에 대한 몰이해라고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외교 석상이나 학술 대회 같은 공석이 아닌 이상 일본의 덴노를 천황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친일적인 현창이 되지도 않고,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일적인 격하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7] 정치 제도나 권력뿐 아니라 법률, 종교,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로마는 구미권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그 자체였다. 동아시아에서 중화 문명의 영향을 크든 적든 받지 않은 나라를 찾기 어렵듯이, 구미권에서 로마 문명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지역은 찾아보기 어렵다.[8] 이것도 주도적인 위치로[9] 차라리 동아시아에서 동로마 제국과 비슷한 국가를 찾자면 중국에서 진나라 이전에 존재했던 주나라(동주)와 더 가까우며, 이것도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여전히 힘이 건재해서 한때는 서로마령 수복까지도 실현에 옮길 뻔했고 그것이 실패하고 주요 속주들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건재하며 지역 강국이자 문화적 종주국의 위상을 유지했던 동로마가 형편은 주나라보다 더 나을 지경이었으므로 단순 1대 1 비교는 어려울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어쨌든 중국 안에서 '천자' 대접은 받았고 멸망한 뒤에도 그 의례나 문물 제도를 정리한 서적들이 유교 경전으로 통용되어 동아시아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표본으로 칭송받았으니, 일본과는 애초에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10] 일본이 한국사의 왕조와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그들만의 세계관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들 어디까지나 그들 내부의 사정이었다. 일본이 남만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국가와 교역하게 되어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어느 정도 탈피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고, 일본의 세계관에서 중국은 (적어도 청일전쟁 전까지는) 엄연히 세계의 중심이자 문명의 전범이었으며,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에서 온 통신사 신유한에게 조선인들이 일본을 두고 '왜(倭)'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보기 언짢다고 했다가 신유한으로부터 "당신들도 우리를 부를 때 '당인(唐人)', 당인 이러잖나. 우리가 무슨 중국 짝퉁도 아닌데"라고 반문을 듣고 "우리도 중화의 문물을 숭상해서 좋고 훌륭한 것은 모두 가라(唐)라고 붙여서 부릅니다. 조선인들은 중화를 숭상해서 본받고자 한다면서 중화를 닮았다는 말에 뭐하러 불편해 하십니까"라고 반문한 바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취급해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던 인식이 있었기에 충분히 조선에 대한 모멸적인 발언이었지만, 외교상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임기응변의 변론이었고 신유한도 이에 대해 납득한 것은 실제로 당시 일본 역시 중국의 문물에 대해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전범이자 전례로 인식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아메노모리 호슈 본인은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중재할 줄 알았던 그 시대 일본의 몇 안 되는 지성인이었다).[11] 일본에서 '덴노'라는 칭호는 덴무 덴노가 처음 사용했고, 그 이전에는 '오키미(大王)'라고 불렸다.[12] 이후 프로이센에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가 시집을 갔는데, 이후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칭호 문제가 촉발되었던 것. 마침 영국인도를 완전히 장악하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의 타이틀을 겸하여서 칭호 문제를 무마했다. 이건 영국 안에서도 "뭔 뻘짓이냐" 소리를 듣는 무리수였다.[13] 조선이 독립국을 선포하면서 곧바로 '황제'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대군주를 칭하고 영국 등 구미권 국가들의 왕을 '대군주'라 부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군주 항목 참조.[14] 동유럽은 구미권에서 '유럽'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 변방 지대였다. 이러한 구미권의 동유럽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 소설 드라큘라이다.[15] 호사카 유지는 방송 용어로서는 일왕(일본 국왕)을 지지하는 동시에 학술대회에서의 학술 용어, 그리고 국가와 국가간의 외교 석상에서 천황(덴노) 호칭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16] '로마 황제의 후계자' 내지 '기독교 교회의 인정을 받은 자'. 일본 덴노는 당연히(...) 기독교 교회의 인정도 받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의 후계자는 더더욱 아니고, 그나마 동로마 멸망 뒤에 그 수도를 점령하고 옛 동로마 황제가 맡았던 '정교회의 세속적 보호자'를 계승한다고 자처했던 오스만 튀르크나 까마득한 선대가 동로마 제국과 인척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내세워 제3의 로마로 정교회의 세속적 보호자를 자처했던 제정 러시아보다도 유럽인의 기준에서 'Emperor'의 자격 요건이 까마득히 멀다.[17] 전근대 구미권에서는 자신들의 문명 세계에 속하지 않은 외적인 존재들과 그 세계에서 '황제'라 불리는 존재들을 결코 자신들이 부르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황제'와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잉카아즈텍 역시 '제국'이었고 '황제'로 불렸지만 그들이 구미권으로부터 온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봐도 짐작할 수 있다.[18] 혹자는 "왕조, 왕가, 왕사 등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황제한테 썼던 단어들이고 여기에서의 왕은 그냥 군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일본의 천황을 국왕이라 부른다면 중국의 황제도 왕이라고 칭한 기록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며 "겨우 왕(王)자를 몇 번 쓴다고 국왕이라고 단정짓게 되면 중국의 명 왕조, 청 왕조 등도 전부 국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는데, 본질은 덴노, 혹은 황제의 자리에 있는 존재를 왕이라고 부른다고 그것을 당사자나 당시 사회가 격하나 비하로 인식했느냐, 덴노라는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황제라는 용어로 불러야만 하고 그렇지 않고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하다 하는 인식이 있었는가 여부에 대한 것이고, 적어도 덴노라는 존재를 논함에 있어서 덴노를 '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특별히 어느 한쪽을 격하나 비하로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포인트이며, 후술할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의 논쟁처럼 '겨우 왕 자 몇 번 썼다고' 하는 식으로 넘겨버릴 만큼 '왕'이라는 단어가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왕을 사용하면 군주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이고 조선이 왕을 사용하면 중국의 제후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라는 주장 역시 일방적인 단견에 불과하다.[19] 맹자가 제시한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가 "왕이라도 정치 엉망으로 하면 하늘과 백성의 의사에 따라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떤 의미로 맹자가 일본사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에도 막부 말기에 막부를 쓰러뜨리고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이른바 '유신지사'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는 요시다 쇼인의 주요 저술이 맹자에 대한 강의록인 《강맹차기(講孟箚記)》였으니까 말이다.[20] 일본의 연호 가운데 무로마치 시대의 엔토쿠(延徳, 1489~1491)는 맹자의 開延道徳에서 따온 것이다.[21] 불경에서는 '데와 푸트라'라고 해서 도솔천에 사는 천인들을 천자(天子)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22]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이 쓰이기 전에 그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는 오키미(大王) 또는 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오오키미(治天下大王)였다. 애초에 천황이라는 호칭 자체가 중국 당의 고종과 그 황후 무씨가 각기 '천황', '천후'라고 스스로를 높인 칭호를 베껴 온 것이다.[23] 여기서 '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황이다.[24]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생 노리모리의 아들로 기요모리에게는 조카가 된다.[25] '왕성'이라는 말은 현대 일본에서도 교토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자주 애용되곤 한다. #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막부 말기 교토를 배경으로 하는 왕성의 수호자(王城の護衛者)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26] 여기서 구주는 일본 규슈가 아니라 '전 국토'라는 의미를 담은 관용어이다.[27] 여기서 '한 사람' 그리고 '왕'이 일본의 국왕 즉 덴노를 가리키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28]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上總介廣常). 보소(房總) 지역의 호족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했을 때 그를 따랐지만 이후에 요리토모에게 의심받아 피살된다.[29] 13세기의 승려이다.[30] 구칸쇼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 아라이 하쿠세키의 독사여론과 함께 일본의 3대 사론서로 꼽히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31] 옛날 일본은 친왕의 품계와 관직 품계가 따로 있었다. 이건 친왕 품계다. 식부경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조판서와 예조판서의 겸직쯤에 해당한다. 인사+의전 등을 담당했다.[32] 카즈라와라, 카즈라바라 등이라고도 읽으며 기타 읽기례도 더 있다.[33] 달리 말해 카즈라하라 친왕의 8대 손이라는 소리다. 1대, 2대, 3대...를 셀 때는 시조가 1대가 되므로 당연히 대수에 시조가 포함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손(代孫)은 시조를 제외하고 세고, 시조를 포함하려면 세손(世孫)을 쓰는 것이 널리 퍼진 관습이다. 그러니까 9를 살리고 싶으면 9세손이라고 해야 혼란이 적다(가장 인구가 많은 김해 김씨 기준 대/세와 세손은 같은 숫자를 쓴다). 그러나 각 집안 족보마다 원칙이 다르기도 하며, 지금의 원칙과 고문헌상 원칙이 또 별개인 경우도 있다. 많이들 헷갈리는 부분이다.[34] 사누키는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지금의 카가와 현 일대의 옛 이름. 카미는 4등관으로 구성되는 지방관의 최고 지위 즉 태수를 말한다. 때문에 사누키노카미를 '사누키 태수'로 번역하기도 한다.[35] 키요모리가 아니라 이 사람이 친왕 8대손이고, 칸무 천황 9대손이다.[36] 타다모리가 아니라 키요모리를 가리킨다.[37] 형조판서 비슷하다. 법무부장관 격.[38] 카즈라하라 친왕 9대손, 칸무 천황 10대손, 사누키 태수 마사모리의 아들. 카즈라하라 친왕의 후손은 관직을 잘 얻지 못하고 몇 대 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그러다 키요모리의 아버지인 타다모리 때 황실에 발탁되어 중앙으로 재진출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 내 묘사에 따르면 인품도 되고 능력도 되고 기지도 뛰어나고 풍류도 겸비해서 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지만, 눈깔이 사시에 출신이 천하다(...)며 중앙 귀족들의 온갖 인신공격과 시기를 받는다. 그래도 점잖게 넘기는데 아들 키요모리는 그러지 못해서나 같아도 그러지 못하겠다비극의 발단이 된다.[39] 카바네의 하나인데 지체 높은 신하의 경칭이라 보면 된다.[40] 즉 키요모리는 칸무 천황 11대손이다.[41] 여기서 왕씨의 '씨'는 문맥상 특정 성씨인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씨족' 다시 말해 왕가 나아가 천황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천황의 자손으로 성(가바네)를 받지 않은 자. 율령제에서 2세 이하 5세 이상의 황윤을 가리키며 '~~왕'이라고 불린 황족(天皇の子孫で、姓を与えられてないもの。律令制で、2世以下5世以上の皇胤こういん。「…王」とよばれる皇族)"이라는 뜻으로 설명된다.[42] 8월.[43] 구란도노토(蔵人頭).[44] 중국의 고전인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나오는 "하늘에 두 해는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天無二日, 土無二王)"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순(삼황오제) 항목 참조.[45] 잇따른 각지에서의 반헤이케 거병과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죽음으로 수세에 몰린 헤이케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격 앞에 결국 교토를 떠나 서쪽으로 낙향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헤이케는 안토쿠 천황과 모리사다 친왕 형제, 그리고 삼종신기까지 모조리 챙겨 교토를 빠져나갔다. 천황의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은 물론 새로운 천황의 즉위에 필요한 삼종신기까지 없는 상태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은 다카쿠라 천황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 쪽인 시노미야를 삼종신기도 없이 새로운 천황으로 지명해 즉위하게 했다. 해당 헤이케 이야기는 그러한 상황을 들며 헤이케를 비판한 대목이다.[46] 일본어로는 요레보시(ようれぼし). 반요 야샤히메에서 나온 그 요령성 맞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혜성(살별)의 출몰은 동서양 모두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47] 《태평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장차 일본의 미래를 예언한 글을 남겼고 거기에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고다이고 덴노의 왕정복고 또한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 미래기를 토대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정당화하였다고 나온다.[48] 국왕(国王)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국주와 국왕, 어느 쪽이든 '무가'와 구별하여 덴노를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다.[49] 사가미 뉴도라는 건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타카토키를 말한다. 《태평기》에서 타카토키는 덴가쿠와 투견에 빠져 사는 무능한 암군으로 그려져 있는데, 하루는 타카토키가 술에 취해서 자신의 방에서 평소처럼 덴가쿠에 몰두하는데, 어디선가 열 명 정도의 덴가쿠 광대패가 나타나 타카토키와 어울려 함께 덴가쿠를 추었다. 그때 바깥에 있던 어느 시녀가 타카토키의 방에서 "덴노지에 요령성 보이네(天王寺のや妖霊星を見ばや)"라는 노래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몰래 타카토키의 방을 엿보았는데, 타카토키 주위에서 덴가쿠를 추는 광대들이 한 명도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이 없고 입이 튀어나오거나 눈이 찢어진 등 야마부시(山伏) 즉 텐구의 모습을 한 요괴들이 타카토키 주위에 몰려들어 춤을 추고 있었다. 시녀가 급히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람들이 와 보니 타카토키만 혼자 술에 취해 잠들어 있고 타카토키 주위에 무수히 많은 새의 발자국 같은 것들만 잔뜩 찍혀 있었다. 이 괴이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카노리가 저렇게 말했다는 것이 《태평기》 해당 대목의 줄거리이다. 나카노리는 당시 조정의 형부소보(刑部少輔) 관직을 맡고 있던 유학자였다.[50] 제95대 하나조노 천황이 쓴 자필 일기이다. 막부 타도를 꾀하여 고다이고 천황이 일으킨 이른바 '겐코의 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히에이 산으로 대피했던 고다이고 천황이 결국 막부에 체포되어 '머리는 빗질도 하지 못해 풀어헤치고 평복에 장막 하나 달랑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쓴 것으로, 천황 자신이 자신의 일가를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51] 남북조 시대 남조의 구게로, 무장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이다. 이 사람은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에서 남조를 열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자 황자들을 데리고 오슈에서 친북조파 무장들에 대한 회유 공작에 나서기도 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무라카미 천황을 태자 시절부터 보좌하면서 사실상 남조를 거의 혼자서 지탱하다시피 했던 굉장히 유능한 인물이었다.[52] 신황정통기에서는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덴노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인(院)이라고만 부르는데,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그 전까지는 드문드문 붙여지던 일본 천황에 대한 '시호'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초에 후대에 이르러 양위한 상왕이 실제 국정을 맡아 행하게 되면서 덴노는 태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기도 하고.[53] 조큐의 난 이후에 막부에 의해 폐위되었고 시호가 붙여진 것은 메이지 시대의 일이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당대에는 그냥 '폐제'라고만 불렸다.[54] 교토 난젠지(南禅寺)의 곤치인(金地院)에 머물렀다 해서 곤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이라고도 한다. 사원제법도(寺院諸法度) ・ 무가제법도 ・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로 대표되는 에도 막부의 법률 입안과 외교, 종교 통제를 일선에서 맡았고(기리시탄 단속을 위한 단가 제도도 이 사람이 고안했다) 명의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와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의 흑의재상(黒衣宰相)이라고 불린 인물이다.[55] 곤치인 스덴은 후술할 하쿠세키처럼 혐한적인 면도 있어서 쇼군이 조선에 보내는 국서 형식을 그에게 자문했을 때 "고려(조선)는 일본보다 낮은 개같은 나라(戌國)이기 때문에 일본의 왕이 고려 왕과 동등하게 '왕'을 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국왕' 칭호를 반대했다고도 한다(요시노 마코토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쉽게 말해 "덴노나 쇼군께서 저 개 같은 조선 것들 왕하고 똑같이 노는 거 아닙니다."라는 취지랄까. 1617년 일본에 온 조선 통신사(정사-오윤겸/부사-박재)가 쇼군 히데타다의 답서에 '일본국 미나모토노 히데타다'라고 쓴 것이 대등외교에 맞지 않는다며 '일본국왕'으로 바꿔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쇼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일본국왕'이라고 쓰나?"라고 대답했다고(이경직 《부상록》). 이것도 가만 생각하면 스덴 역시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불릴 수 없다(='일본국왕'은 덴노 뿐이다)"라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스덴이 제정에 관여한 금중병공가제법도에서도 덴노와 쇼군을 '국왕'으로 불렀음을 감안하면 거의 확실하다.[56] 대표적으로 구로다 토시오나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등.[57]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58] 왕이 제후의 작위로 쓰이던 중국 왕조에서 그 왕조의 이름을 왕이라는 봉작에 붙여 주었던 적이 있는지(한의 황제가 한의 제후왕을 '한왕'으로 봉해준다던가 하는) 생각해 보자.[59] 일본으로 치면 친왕이다. 일본은 정비 즉 중궁의 소생이 아니어도 덴노가 인정하면 친왕이 될 수 있었다.[60] 사실 쇼군으로써도 일본국왕이라는 칭호가 마냥 달갑지도 않았던 것이, 쇼군이 '왕'이 되고 덴노가 '황제'가 되어 황제-(제후)왕의 구도가 성립될 경우, 일본이라는 왕국의 진정한 천자(황제)인 덴노가 행사해야 할 국정 운영권을 쇼군이 덴노로부터 횡령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고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권신들과 같은 존재임을 쇼군 스스로가 천하에 폭로하는 꼴이었고, '왕'이 '황제'보다 낮고 '일본국왕'인 쇼군이 '일본 황제' 덴노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정치를 신하가 멋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돌려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 존왕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권위가 높아지는 대신 반대로 위태롭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일본국왕'이라는 호칭 안에 들어있었던 셈이다.[61] 오다 노부나가 항목에서 나오는 삼직 즉 태정대신, 세이이타이쇼군, 관백이 아니라 총재(総裁), 의정(議定), 참여(参与)를 말한다.[62] 『세 천황 이야기』(야스다 히로시 지음, 하종문·이애숙 옮김, 2009, 역사비평사) 참고[63] 굳이 찾자면 일본서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미이쿠사(みいくさ) 또는 스메라미이쿠사(すめらみいくさ)란 일본어를 한자의 뜻을 빌려 적은 것이지 한자의 소리로 읽은 게 아니다.[64] 한문은 무지성으로 휘황찬란하게 쓴다고 멋진 게 아니고 근거를 갖춰서 써야 격식에 맞는다고 여긴다.[65] 이미 상나라에서 갑골문에도 나올 정도니 역사가 거의 3천 년을 넘어간다.[66] 분세이 원년(1818년) - 1886년(메이지 19년) 9월 27일. 쓰시마 후추 번 출신으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활동했던 언론인이자 통속소설 작가로, 덴포 연간에 다메나가 슌스이의 제자로 들어가 문인으로 활동해서 '2대 슌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메자키는 1873년에 조선국세견전도(朝鮮國細見全圖)라는 지도를 작성하는데, 해당 지도에서는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우산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독도=다케시마'설의 반박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67] 덴포 3년(1832년) 음력 9월 24일 - 1902년(메이지 35년) 양력 1월 24일. 소메자키와 마찬가지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문인이자 저널리스트로, 나무위키에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만화 캐릭터로 항목이 작성되어 있다.[68] 오우에쓰 열번동맹을 가리킨다.[69]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학자들도 일본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일본 본국과 차별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결코 온전하거나 정상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한계도 뚜렷했음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70] '종군위안부'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는 한국이나 중국 등 동북아, 동남아 여성들은 물론 심지어 네덜란드 여성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심지어 일본이 패망한 뒤에 만주에 남아 있던 일본 여성들 가운데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살당하거나, 그들을 만주까지 데리고 온 '개척단' 간부들에게 내몰려 구소련군, 중국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접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지에서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거나,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도 성접대 사실이 알려져 결혼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한국이나 중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성노예 과거가 밝혀져 고향에서 당했던 멸시와 차별을 일본 여성들도 똑같이 겪은 셈이다. #[71] 전제군주국가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과 같은 끔찍한 민중 탄압을 저지른 악행의 주체이며, 독일 제국 또한 영, 불만큼 영토가 넓지 않았을 뿐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적 침탈, 폭력을 저지른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72] 공작은 왕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로 간주된다[73] '교황'이란 칭호도 가톨릭 교계 안에서 "너무 권위적인 표현 아니냐"며 교황보다는 다소 수위가 낮은 교종(敎宗)으로 낮추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실제로 '교종'이라고 지칭해 부르는 언론도 존재한다. #[74] 이 대목에 대해서 "그런 논리대로라면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으면 국왕이고 사죄와 반성을 하면 황제라는 거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본 설명은 한국이 덴노를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감정적인 열등감의 발로라고 전제하면서 '외국은 더했는데 왜 외국도 똑같이 낮춰서(?) 불러야지' 식으로 우격다짐으로 반문할 사람들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일왕 표기와 관련해서 한국 언론이 덴노를 일왕으로 부르는 것은 감정적인 열등감의 발로라는 답정너식 전제는 해당 문제를 다룸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으며, 후술하겠지만 일왕 표기는 일본의 사죄나 반성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보다 더 복잡한 해석이 얽혀 있는 문제이다.[75] 굳이 비유하자면 조선이나 베트남이 몽골이나 만주, 혹은 중국 강남에 괴뢰 국가를 세운 뒤에 그 국가의 황제를 겸하면서도 조선 국왕 또는 월남 국왕이라는 칭호는 버젓이 유지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76] 이 점은 쿠데타로 사라진 에티오피아 제국이나 유럽의 다른 고만고만한 '황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학문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술 대회에서가 아니고야 국가와 국가 사이의 외교가 이루어지는 외교 석상에서, 혹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에서 그러한 유럽의 고만고만한 황제국들에 대해 다루고 언급할 일이 없다.[77]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에 독립 축하금을 지불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반성 명목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지불하였으며,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로 또 10억 엔의 배상을 지불하려 시도했다는 점이 근거로 꼽히지만,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배상 포기'를 말함으로써 그와 관련한 여파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이란 것도 정작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정부가 독단적으로 강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 더욱이 아베 정권 이후의 일본의 우경화나 그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아도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처를 '비교적 잘한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2024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78] 온 중국,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 바다가 되어 항의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공에서 통할 리가 없었다. 물론 난징 대학살의 피해국이었던 대만도 일본으로부터 사실상 배상을 포기한 바가 있으며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으로부터 갓 상임이사국 자리를 뺏어 온 입장에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수교국을 늘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대만과 단교할 뿐만 아니라 배상금까지 물어주면서 중국과 수교한다는 것은 일본의 국내정치에 상당한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배상금을 포기한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결정이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은 전혀 도외시한 채로 국가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졌고, 동시에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나 제대로 된 반성 하나 수반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러한 현상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79] 심지어 그걸 분명하게 반대하고 거부하는 천황에게까지 권할 정도다.## 2023년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한국의 파트너다"라고 말한 바로 그날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하기우다 고이치 정무조사회장을 비롯한 자민당 각료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 기시다 총리는 참배는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마사카키(공물)를 보냈다. # 한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지만# 한국은 대통령이 일본에게 '일본은 한국의 파트너'라고 말한 바로 그날 일본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되었으며, 이것만으로도 '일본은 과거사 청산을 잘한 축에 속한다'는 일부 친일적인 논자들의 일본을 두둔하려는 주장은 근거가 떨어진다. ##[80] 램지어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왜곡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가짜 뉴스 유포)마저도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이자 정당방위"라고 왜곡했고(<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 일본의 아사히 신문 기자 출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램지어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여 쓴 책이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원제: 關東大震災「虐殺否定」の眞相 ハ-バ-ド大學敎授の論據を檢證する)이며, 2023년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81] 진주만 공습의 총지휘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오가사와라 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가 모두 합사되어 신으로 대접받고 있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이런 곳을 일본 정부의 각료들이 대놓고 참배하고 공물을 바치며 그곳에 합사된 옛 전범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짓거리를 일본 천황에게까지 권하는 꼴이 미국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보자.[82] 예를 들면 경향신문 1950년 1월 8일자동아일보 1954년 2월 7일자 등.[83] 日王處斷(일왕처단)을要求(요구)(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자) 본문은 천황으로 쓰면서도 큰제목을 일왕으로 썼으며, 이후 기사도 같다.[84] 천왕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데, 실제 역사에 엄연히 ‘천왕’이라는 단어를 군주 명칭으로 사용했던 태평천국이 존재하다 보니 쓰이지 않는다.[85] 무솔리니는 분노한 이탈리아 군중에게 맞아 죽어 시체가 내걸렸고,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이 둘에 비하면 정말 히로히토는 곱게 사망했다.[86] 이러한 논쟁은 전범으로 전쟁 책임이 있는 인물이 국가간 사법 거래를 통해 책임에서 빠져나가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던 역사의 부조리함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으며, 결코 일본의 식민지 피해 당사국이었던 한국 정부나 한국 사람들의 쓸데없는 자격지심, 컴플렉스 내지 특정 정치 세력의 소위 '반일 선동'에 의한 것만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87] 당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부터가 지독한 반일주의자였다. 반민특위를 억지해산시키고 친일 청산을 가로막은 것과 별개로, 6.25 전쟁으로 부산까지 쫓기듯 내려오게 된 상황에서도 '일본군도 UN군에 포함시켜 북한군과 맞서게 하자'는 미군측 주장에[88] 애초에 디즈레일리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황제' 칭호를 올릴 때에는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인도의 황제'로 영국 본토까지 모두 포함시키려고 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반대가 하도 많아서 인도만 남긴 거지.[89] 엘리자베스 2세를 '여황'이라고 부른 것이 조선일보 1955년 4월 23일자 기사에서 확인되기는 하지만 # 이후로 한국의 언론은 줄곧 영국의 국왕을 '황제'가 아닌 '왕'으로 부르고 있다. 참고로 영국의 국왕도 '일왕' 표기의 줄임 방식처럼 '영왕(英王)'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지만 1995년 이후로는 '영왕' 표기가 사라진다. 대체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을 지칭할 때 으레 '영왕'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보니 혼동될 소지가 있어서 '영국 국왕'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90] 당연하지만 이러한 서구 입장의 '동양의 수많은 고만고만한 국왕 또는 자칭 황제'라는 말에는 중국의 천자도 포함되어 있다.[91] 태국의 옛 이름이 시암이다. 한문으로는 섬라국/섬라곡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보인다.[92] '일왕'처럼 줄여서 '섬황'이라고 부르는 표기도 있었다. # 동아일보 1922년 5월 6일자 2면 기사[93] 다만 국호 자체는 1939년에 개칭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이 시암 혁명의 주도자였던 쁠랙 피분송크람이다. 한국에서 '섬라곡국' 즉 섬라의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의 일이니 이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거의 8백여 년을 대외적으로 사용해 온 국호였다.[94] '태왕(泰王)'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있었는데 1995년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95] '서반아제'까지 포함시키면 41건이 된다. #[96] 카이로를 수도로 삼았던 맘루크 왕조의 멸망(1517년)을 기준으로 하면 4백년 만이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망(기원전 30년) 때를 기준으로 잡으면 거의 천 년이나 지나서의 일이다.[97] 대체로 그 자격 요건의 변동에 있어서 황제로 불릴 만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주앙 호드리게스와 만났던 중국인들의 반응처럼 내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의 주필을 지내기도 했던 장지연대한제국 수립 선포 당시 기고한 글 중에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여진을 가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탐라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명실공히 '제국'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식민지' 취급을 당한 함경남북도제주도민들에게 장지연의 이 말은 당연히 지역차별주의적 헛소리이고 현대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지만, 장지연의 말을 빌리면 일본 역시도 북쪽으로는 에조치(홋카이도)를 가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류큐(오키나와)를 가지고 있으니 명실공히 제국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게 되며 '일본 제국'은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지 일본 제국 같은 서구적인 의미의 제국과는 거리가 있을 뿐이지.[98] 섬라황제가 섬라국왕, 나아가 태국 왕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에서 그 변동의 중요한 계기로 꼽을 만한 사건은 시암 혁명이라는 타이의 쿠데타 및 입헌군주정 전환이라는 정치, 왕사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전 체제와의 '단절'까지도 운위될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변동이 있었고, 일본황제는 다 아는 것처럼 1945년 8월 15일의 항복선언으로 패망한 뒤 GHQ의 보호국 신세를 거쳐 기존 메이지 이래의 대일본제국헌법으로 다스리는 '일본 제국'이 아닌 일본국헌법을 사용하는 '일본국'으로 전환되었다. 둘 다 에스파냐와는 달리 왕정 자체에 변동이나 폐지가 있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국체에 가히 '혁명'이라 불릴 만한 대변혁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99]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되었던 일본 제국이 과연 입헌군주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대일본제국헌법만 가지고 본다면 프로이센 헌법(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하여 외견적으로만 입헌주의를 내세울 뿐 실상은 덴노의 불가침적 절대 권위를 규정한 것이 일본 제국이었다. '천황대권'이라는 이름으로 의회의 간섭도 받지 않고 민권마저도 침해할 수 있는 특권을 법률로써 국왕인 덴노에게 몰아줬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입헌군주제가 결코 아니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모태가 되었던 프로이센 헌법조차도 "행정권 모두와 입법권 일부가 국왕에게 속하고 사법권은 오직 법에만 복종"토록 규정하여 권력의 분립 및 사법권 독립의 원칙을 법률로 명백히 천명했지만, 대일본제국헌법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행정권뿐 아니라 입법권, 사법권이 모두 전적으로 덴노에게 속함을 선언한다는 점에서 입헌군주국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일본이 완벽하게 서구의 그것과 같은 입헌군주제로 거듭나는 것은 태평양 전쟁으로 깔끔하게 패망한 뒤 대일본제국헌법이 일본국헌법으로 개정, 대체된 뒤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물론 1947년의 일본국헌법 제정을 기점으로 일본의 천황제가 대일본제국헌법의 그것으로부터 완벽하게 환골탈태했는지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글쎄다'라는 소극적인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김창록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100] 조지 1세 때에 이르러 빅토리아 여왕 때에 수립된 인도 제국과 그 인도 제국의 '황제'는 영국 국왕의 직함에서 사라졌지만, 조지 1세 본인은 서거 직전까지 '식민지 인도 제국 황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영국 황제'로 불렸던 것이 그 예이다.[101]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왕 히로히토, 쇼와 덴노는 메이지 이후 성립된 구황실전범에 따라 즉위했고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통치되던 일본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그의 아들 아키히토와 손자 나루히토는 모두 신황실전범에 따라 즉위하고 일본국헌법에 따라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로써' 일본 통합의 상징으로 역할하고 있다.[102] 엔지니어나 의료계 종사자, 과학자나 수학자들이 그들의 직장 또는 세미나에서 쓰는 전문 용어를 일상 생활에서까지 가져와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조차도 그게 당사자가 원하지 않거나 발화 당시의 상황에서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상황과도 안 맞는데도 이건 이렇게 불러야 된다, 저건 그렇게 부르는 건 틀렸다 식으로 일일이 지적해 봐야 안물안궁 취급을 받는 판인데, 아무리 한국과 가장 연이 깊고 서로간의 상관관계도 밀접한 나라의 국왕이라고 한들 현실 정치에 나서지도 않아 그 칭호가 천황이든 일왕이든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고, 나아가 그 이름이 뭔지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일일이 알고 싶다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자기가 사는 동네 동장이나 구청장, 파출소장 이름이나 직급조차도 관심 없으면 모르는 게 사람인데.[103] 룩셈부르크 대공의 아들을 '왕세자'라고 부른 건 이미 박정희 정권 때부터의 일인데, 기욤의 아버지 앙리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한 달 전에 방한했을 때 한국 언론에서 '황태자'라고 부른 보도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볼 수 있어서 # 언제 어떤 계기로 왕세자로 부르게 된 건지는 애매하다. 1984년에 최규하 국정자문위원회 의장과 접견할 때에도 이미 룩셈부르크 대공자는 한국에서 '왕세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104] 아무리 "상대국의 군주를 호칭할 때에는 상대국 스스로 자국의 군주를 자칭하는 표현에 기반한다. 표현의 지위상의 위계를 떠나서 일본이 천황을 황제(Emperor)으로 자칭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그렇게 칭해야지, 일본을 우대하려는 의도에서만 비롯된 주장으로 치부할 수 없다"며 "일본 천황을 천황으로 칭하고 나머지 왕을 왕으로 부르는 것을 일본만을 칭송하고 나머지 국가를 싸그리 비하하는 의미'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며 '일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우며, 오히려 이런 주장이 도리어 왕-황제 호칭 간의 위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했다"고 주장해도, 언론 보도를 접하는 대중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덴노라는 외국 군주의 황제/왕 칭호를 다루는 항목에서 학술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 채널도 아닌 나무위키 같은 메이저 언론이나 공공기관, 공인 학술단체에 비해 공신력이 훨씬 떨어지는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 '황제가 왕보다 높다(왕이 황제보다 낮다)'느니 하는 관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덴노를 덴노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상대국이 불러 달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지 격하나 격상의 의미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현실에서는 쉽게 통용되지 않음을 암시한다.[105] 아무리 호칭이 그 나라에서 불러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고 격하나 격상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고 주장한들 모두가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렇게 납득할 만큼 관련 사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도 않다는 얘기다.[106] 사실 천황이냐 일왕이냐 문제에 대해 통일이 안 되어 있으니 이런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기는 한데, 후술하듯 언론사마다 논조의 차이가 생기는 것 역시도 '언론의 자유'의 영역이다.[107] 해당 기사에선 '상황', '상황후', '황사' 등도 모두 '상왕', '상왕비', '왕사'로 일률 조정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上皇', '上皇后', '皇嗣'로 해 두고선 각각에 '조코', '조코고', '고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었다. 한자 표기를 사실상 일본식 호칭 전용으로만 쓴 셈이다.[108] 예제 1예제 2[109] 덴노는 일본 신토의 최고 사제이기도 하다. 예수회의 입장에서는 신토나 불교나 모두 '혐오스런 이교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110] 앞에서 언급한, 일본의 천황가를 진무 덴노부터 오기마치 덴노까지 소개한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의 저술 《일본왕대일람》의 경우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 아이작 티트싱(Isaac Titsingh)에 의해 거쳐 유럽에 전해졌고 1834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는데, 프랑스어 번역 제목이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즉 '일본의 역대 황제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왕'이라고 쓴 제목이 프랑스에 전해져서는 '황제'로 번역된 흥미로운 사례다.[111] 다만 이 지도에서는 태평양을 중국해(Mer de la Chine)라고 쓰고 있어서, '동해' 운운한 것은 한국에서 쓰는 '동해'라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동양(Orient)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썼다는 지적이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 한국에서 동해라 부르는 바다를 '일본해'라고 부르는 것이 17세기에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 충분하다.[112] 당시에는 명나라.[113] 1561~1634. 중국 이름은 육약한(陸若漢). 이 사람은 일본-포르투갈의 나가사키 교역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했다는 이유로 1604년 일본에서 쫓겨나 마카오로 왔는데, 1628년부터 1632년까지 청과의 전쟁에서 명을 지원한 포르투갈군의 통역을 맡아 그 공로로 숭정제로부터 예수회 선교사로는 최초로 포상을 받았다. 로드리게스는 자신이 일본에 체류했던 1577년부터 1604년까지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전도와 그리스도교 교회 상황을 쓴 《일본교회사》(Historia da Igreja de Iapam)도 집필했으며, 일본어에도 뛰어났다. 또한 1631년 명에 온 조선의 사신 정두원에게 망원경자명종 등 서양에서 가져온 신문물을 전해 준 사람이 이 사람이다.[114]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닌 셋쇼 간파쿠가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항목 참조. 어차피 군사적 실권자라는 점은 쇼군이나 다를 바가 없긴 했다.[115] 서양에서 황제라는 말인 Emperor가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군단 사령관'이라는 뜻에서 시작했으니만큼 군사 실권자인 쇼군에게 Emperor라고 부르는 것은 어찌 보면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다.[116] 일본인들의 천황 숭배 의식을 가리키는 구미권의 미카도이즘(Mikadoism)이라는 용어의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아서 설리반이 이 제목으로 오페라창작했는데 일본에서는 이 오페라가 덴노를 비하했다고 반발이 일기도 했다. #[117] 심지어 한국에서는 이것도 왕실전범이라고 하기도 한다.[118] 일왕이라는 표현은 자칫 일본인들이 자기네 군주를 격하해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한자문화권인데다가 날 일(日) 다음에 임금 왕(王)자가 붙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물론 천황이라고 쓴 책들도 많고 나무위키나 위키백과 등 인터넷 자료에서도 천황이라고 부르므로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오해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고 애초에 일왕은 '일본 (국)왕'의 줄임말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유명사는 아니다. 미국 군대를 '미군'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과 같은 용법이다.(현지 표기도 United States Armed Forces 이지 U. S. Armed Forces 같은 줄임말이 아니다.) 공수처의 정식 명칭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고 그걸 편의상 줄여서 '공수처'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보도가 한국인을 위주로 작성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119] 천황의 손자/손녀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다.[120] 천황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121] 경향신문의 박용채 기자는 2008년 당시 일본 왕실에서 한창 벌어지던 나루히토 당시 태자와 일본 왕실(정확히는 궁내청 안의 우익 세력) 사이의 알력을 보도하면서, 기사 전체상에서는 '일왕', '왕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기사 안에서 거론하는 하케다 신고 궁내청 장관 등 일본측 인사나 일본측 언론의 발언, 보도를 따옴표 처리로 전하면서는 '폐하', '황태자', '천황'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살리는 센스를 발휘한 바 있다. 본 기사 안에서 박용채 기자가 사용한 '주상'과 '동궁'은 일본 공식 매체 및 언론에서 버젓이 천황과 황태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는 용어다. #[122] 와닿지 않는다면 현재 천황의 작은 할아버지아들부인을 한국 언론이 언급할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자. 워낙 가십거리를 많이 날리고 다녀 언론에 자주 오르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본 황실 인사들에 대해 한국 언론이 세세히 보도할 일도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123] 중국에서도 내친왕이라는 용어는 공주라는 용어에 밀려 완벽하게 사장됐다.[124] 천황을 'Emperor'라고 쓰는 구미권에서는 친왕을 'Prince'로 부르는데, Prince에는 '왕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작위로서의 왕도 Prince로 번역된다. 예를 들어 팔왕의 난의 주역들은 모두 엄연한 일자왕 혹은 이자왕들이지만 영어로는 War of the Eight Princes라고 칭한다. 이는 서유럽 역시 King of OOO는 독립국가의 군주로, King ‘in’ OOO는 외공내왕 정도로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왕(King)이 통치하는 나라는 대부분이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화제국의 번왕이나 친왕처럼 제국의 속국으로서의 왕국은 보헤미아 왕국 등 사례가 몇 없다.[125] 일왕이라는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도 학술 용어로써의 천황이라는 호칭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외교석상에서의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후술.[126] 율령제하의 일본에서 2관 8성중 하나이고 국가 제사를 담당하던 신기관의 장관인 신기백을 세습하던 가문인 시라카와 백왕가(白川伯王家) 가문은 현직 신기백에 한해 '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권리를 누렸다.[127]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외할아버지이고, 에티오피아의 중흥군주이다.[128] 물론 이것도 한국이나 일본 안에서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는 하다.[129] 한국의 사학자 전우용은 일왕 표기를 비하, 격하라고 보는 주장에 대해 '중세적 사고방식'이라며 'President'라는 영어를 '대통령'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에서였고, 그 의식 자체에 미국의 President를 일본의 덴노(Japanese Emperor)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이런 의도를 가지고 호칭을 문제삼을 거면 '대통령'이라는 호칭부터 문제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 혹자는 이러한 전우용의 발언까지도 "이런 걸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람들이 '일왕' 표기를 격하 표현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왕은 천황의 다른 표기일 뿐'이라는 중립적이고, 비하 의도 없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반론할 이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우기지만,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하려고 드니까 니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맞다라는 식의 말은 기본적인 논리마저 결여되어 있는 우기기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는 뒤집어 말하면 천황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진짜 의도가 "쟤들이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선진국이고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쟤들이 부르는 표현을 존중하자"라는 표현상의 이유가 아니라는 걸 굳이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을 듣기에도 충분하다.[130] 참고로 중화권은 아돌프 히틀러의 직책인 퓌러를 '원수'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한국어 문장에서 '대통령에서 총통으로 바뀌었다'는 중국어에서는 '총통에서 원수로 바뀌었다'라고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대통령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미 총통을 두고 있기 때문. '총통'과 달리 '원수'는 한국어에서 독재자라는 이미지는 지니고 있지 않다.[131] 물론 현재의 대만 총통제는 결코 독재국가의 그것은 아니지만, 국부천대 이후 '총통' 장제스가 대만에서 벌인 행위는 명백한 1인 종신독재이자 반민주적 폭거였으며, 한국에서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부른 것과 달리 그 시절의 대만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장제스가 사망하고도 21년이나 지난 1996년에야 대만에서는 총통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국민당에 의한 1당 독재가 막을 내렸고# 이는 한국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이루어진 9차 개헌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전환하고 9년 뒤의 일이다. 9차 개헌으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기 3개월 전인 1987년 10월에야 대만에서는 장제스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풀지 않았던 계엄령이 38년만에 그의 아들에 의해 해제됐다.[132] 박정희는 제5대, 제6대 대통령을 연임했다.[133] 천황 표기를 옹호하는 이들은 으레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격하일 뿐이며 그 배후에 민주당계 정당의 반일 선동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134] 한국에서는 한때 임정의 수반도 사용했던 '주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놈에 의해 굉장히 안 좋은 이미지로 박혀 있어서 '주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좋은 의도가 되기는 어렵다.[135]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두산백과에서도 # 총통은 '독재적 지위'라고 설명된다.[136]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 별명 나는 듣기 싫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걸 "좋은 의미로 부르는 건데 왜 화를 내냐? 속 좁게"라고 반문하는 거나 다름없다.[137] 한국에서 자국의 국가원수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총통'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감정적인' 대응은 전혀 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138]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대중이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 '총통'은 분명하게 독재자들의 그것과 흡사한 행보를 보인 자들이 쓰는 호칭이었다. 김대중의 총통 발언도 총통이 독재자라고 어떤 가치 판단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박정희가 장기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총통이라는 당시 장기집권을 하고 있던 외국의 사례를 가져다 설명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하면 아귀가 맞는다는 얘기다.[139] 동시에 김대중은 한일 양국이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려면 한국만큼이나 일본 또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가 필요하고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도 빠뜨리지 않고 있음을 중앙일보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이 과거사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통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나란히 가야 한다는 점을 정치인이자 대한민국 행정부 수반으로써 외교 석상에서 언급한 것이다. 네덜란드 국왕 모자가 일본의 국왕 부자 앞에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우리는 과거 어두운 국치의 기억을 결코 피해갈 수는 없으며 잊어서도 안 된다"고 한 것처럼, 덴노를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열등감이라는 가치 판단에 더불어 일본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역시도 빠뜨릴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히 짚고 있는 것이 된다.[140] 바로 다음날(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채택한 11개 항의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총리로써는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국가를 특정하여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おわび)를 했습니다.”라고 발언했는데# 이 '사죄(おわび)'라는 일본어도 우리말로는 '사죄'로 번역되었지만 일본어 뉘앙스에서는 단순히 '사과' 정도의 말이고, 중앙일보는 일본 총리가 한국을 적시해 피해에 대해 사죄하기는 처음이었다고 해석한다.[141] 천황이야 아키히토-나루히토 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전쟁으로 피해 입었던 아시아 국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엄연히 현실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본 내각과 정부의 수반이 그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천황이 백날 천날 사죄의 발언과 행보를 보인들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142] 일본어를 조금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일본어의 존댓말 구조란 게 인칭이나 지칭 대상에 따라서도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143] 나리카와 아야는 이미 2018년 중앙일보 정현목 기자와의 대담에서도, 아직 나이 많은 일본 사람들 중에는 천황의 사진을 집에 걸어 두고, 천황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라거나 천황과 황족을 부를 때 뒤에 '폐하'나 '전하'를 붙이지 않는 것은 결례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6년 일본 영공을 지나면서 히로히토 당시 천황에게 "폐하, 본인은 아름다운 귀국의 영공을 통과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대신해 폐하께 정중한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은 1984년 본인의 귀국 방문시 폐하와의 만남을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이 기회를 빌어 폐하의 건안과 귀 황실과 귀 국민의 무궁한 번영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깍듯이 히로히토를 '폐하'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리카와는 놀라워하면서 "일본을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영공을 지나면서 뭐하러 그런 메시지를 보냈단 말이냐? 속국도 아니고"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44] 전임 대통령(당시 후보)의 방송 출연을 두고 "형광등 백 개를 켜 놓은 아우라"라는 굳이 안 써도 될 낯 뜨거운 표현을 사용해 빈축을 샀던 한국의 언론도 있었다. #[145]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일본의 어느 언론이 보도했다면 그것 자체는 분명히 '역사 왜곡'이 틀림없으며, 한국에서는 그러한 일본의 언론 보도에 대해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언론사나 시민 사회가 나서서 실제 사실 관계를 들어가며 '팩트체크' 형식으로 반박하고 정정 보도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외에 한국 정부가 그런 보도를 한 일본 언론사 자체에 대한 비난이나 그 언론사에 대한 폐쇄를 요구할 수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에서 침략자라고 불러도 일본 정부에서는 똑같이 '팩트체크' 형식으로 반박 내지 한국 정부에 '유감'을 표명하고 정정 보도를 요구하는 것 외에 그런 보도를 한 한국의 언론사 자체를 정부 차원에서 부정하거나 폐쇄를 요구하지 못한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도 그건 명백하게 '언론 자유'의 영역을 건드리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146] 첨언해 두자면 현대에는 '방종'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언론사들의 편향적인 왜곡 보도, 눈가리고 아웅 식의 특정 세력 편들기(혹은 무조건 까기) 기사의 남발과 그걸 '언론의 자유'를 들이대며 면피하려는 작태가 문제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 운운하며 왜곡, 편향 기사를 남발하는 그런 언론을 아예 폐쇄 내지 언론사 폭발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제재하지 않더라도 그 언론의 보도가 왜곡임을 독자인 대중이 인지하고 언론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대중 신뢰도'를 실추시켜서 공개적으로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목숨만 붙여놓았지 사회적으로는 아주 매장시켜 버리는 우회적이면서도 더 확실한 '처단' 방법이 이미 여러 가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조선일보는 언론사로서 편향적인 일부 특정 성향의 고정 구독층이나 사회적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좇선일보'라는 멸칭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며 2019년 이래 여러 기관의 통계조사에서 꾸준히 불신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이미 언론으로서의 신뢰도는 바닥을 기는, 한 마디로 언론으로서는 죽은 좀비나 다름없는 처참한 지경이다. #######[147] 일본에서 사용되는 표기를 존중해서 천황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까짓것 일본 정부와 언론에서 천황을 '금상 폐하'라고 부르고 '천황 폐하께서 ~~하셨다'고 인물뿐 아니라 그 인물의 행동거지에까지 일일이 높임말을 쓰는 것처럼 한국 언론도 '천황 폐하께서 ○○하셨다'라고 그 존대 표현까지 그대로 존중해서 반영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다분히 냉소적인 반응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148]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준에서 자신과 가까운 이를 타자화(삼인칭화)해서 부르며 보다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추구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후세 다쓰지의 장남인 후세 간지가 아버지에 대한 평전 '나는 양심을 믿는다'를 쓰면서 굳이 '아버지'로 부르지 않고 'F씨'라고 타자화한 호칭을 써서 부르고# 문성근도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공석에서 지칭할 때 굳이 아버지가 아니라 '문 목사'라고 거리를 둔 호칭으로 부르는데, 그 이유를 "나한테는 아버지지만 세상에서는 문 목사로 통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라기보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사회적 인상이 더욱 강하기에 나도 후자를 따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149] 천황 표기만이 옳고 일왕 표기는 열등감에서 나온 격하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지속적으로 "상대국에서 황제라고 부르고 또 불러달라고 하는데도 국왕이라 부른다는 것은 상대국의 주장을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진 셈"이라느니 하지만 그 상대국에서 황제라고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대상이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일왕 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덴노라고 부르는 것 혹은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어떤 감정적(즉 덴노라고 불러야 정당하고 일왕이라고 부르면 감정적 폄하라고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부여하려 하지 않으며, 학술 대회에서 그리고 외교 석상에서 덴노(천황)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부정하지 않는다.[150] 예를 들면 명예훼손이라든가 허위 사실 유포라든가.[151] 조선일보 1982년 8월 15일/동아일보 1984년 8월 28일[152] 예를 들면 UN 산하의 국제 기구인 WHO 같은.[153] 뒤집어서 말하면 국가 또는 범국가적 기관에서 권고한다고 해서 따라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형법의 명예훼손이나 국가보안법에 대해 유엔 특별조사관이 나서서 대한민국에 이들 법조항을 폐지할 것을 (국가보안법의 경우는 1992년부터) 줄기차게 권고해오고 있지만, 대한민국 법무부는 대한민국 안보상 가장 큰 위협인 북한의 존재를 들어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54] 사실 해당 용어에는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발발을 전후해서 보이던 여러 가지 문제적 행보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다.[155] 심지어 WHO의 공식명칭 결정 및 한국기자협회의 코로나19 보도준칙 발표(2020.2.21)가 난 뒤에도 이랬다. 2020년 3월 1일자 KBS 1TV ‘저널리즘 토크쇼 J’에 따르면 제작진이 조선일보에 우한코로나 명칭을 고수하는 이유를 문의하자, “해당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2월말 대구경북지역 확진자 폭발로 후술하는 '대구코로나' 명칭 문제가 불거지자 대부분의 보수언론 기사에서 그제야 '우한'이 사라졌지만, 이때조차도 조선일보는 "'우한 폐렴'이 혐오라면 '대구 코로나'는 더 큰 혐오… 지금 중요한 건 위생"이라는 칼럼을 게시하면서 혐오표현을 비판해 놓고 자신들은 그 이후에도 4월 초까지 우한 폐렴, 우한 코로나 명칭을 지속하여 사용하였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똑같은 기사라도 한국독자를 대상으로 한 한글판에선 우한코로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어판에선 Coronavirus로 쓰고 있었다. ##[156] 박주현(2020) '언론의 이념성향에 따른 ‘코로나19’ 보도 프레임 비교 연구' <한국언론학보>64권 4호 및 김활빈(2022) '지역 이슈로서 코로나19 뉴스 프레임에 관한 연구: 〈조선일보〉. 〈한겨레〉, 〈매일신문〉의 사설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61집 제3호, 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157] 심지어 대구 경북 지역 언론인 매일신문은 과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대적으로 확산 일로를 걷기 전인 1월에 해당 질병을 '우한 폐렴'이라고 쓰는 것은 특정 지역에 대한 낙인효과의 우려가 있으니 되도록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쓰라는 정부 권고에 대해 "우한폐렴 왜 안돼? "메르스도 신종 코로나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우한폐렴이라는 말이 우한이라는 지역이나 우한 사람들을 혐오하는 효과를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는 주장은 많은데 딱히 근거가 없다."며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어디서'라는 지명과 '무엇이'라는 전염병의 주요 증상을 묶은 하나의 정보로 인식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너무 생각이 많은 게 아닐까. 오히려 우한이라는 지역이나 우한 사람들을 혐오하는 현상은 누군가 바이러스 숙주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고 병을 퍼뜨려서라거나 또 누군가 우한에서 왔다거나(또는 다녀왔다거나) 등의 정보를 삐딱하게 접하며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라는 논지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후 대구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코로나19가 발발하면서 "TK 코로나라는 명칭은 지역 차별이고 낙인효과다"라는 푸념이 나왔다. # 어떤 의미로 매일신문으로써는 본인들이 했던 말을 제대로 돌려받은 셈이지만.[158] 당연히 그에 수반되는 책임 역시 각자의 몫이라는 전제가 따른다.[159] 웃긴 건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가 자살하자 일본 언론은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히 총통 훙거(薨去)'라고 보도했다. 덴노의 죽음을 '붕어'라 하고 왕족이나 고위 대신의 죽음을 '훙거/훙서'라고 표현하는 동아시아 전통상 엄연히 독립국인(...) 독일의 총통 히틀러가 쇼와 덴노보다 한 층 격이 강등당한 셈인데(...) 일본과 같은 아시아인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는 생각하지 않던 인종차별주의자 히틀러가 죽으면서 이걸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160]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왕' 표기를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천황' 칭호의 학술적인 차원의 사용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 이들이 많으며, 특히 헤이케 이야기 같은 일본의 고전 번역에 있어서까지 '천황' 칭호를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굳이 '천황 폐하'라는 용어를 들먹이는 인간들도 없는 건 아니다.[161]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이나 근현대(1995년) 신문에서도 이집트 국왕을 '애급왕'/'애왕'으로 표기한 전례가 존재한다.[162] 일본 참의원 총무위원회에서 NHK에 배정할 예산을 심의할 때 가타야마 사쓰키(片山さつき) 참의원 의원이 참고인으로 출석한 NHK 회장 마쓰모토 마사유키(松本正之)에게 한 질문에도 "우리나라에서 이 왕가라는 호칭이 헤이안 시대에 일반적이었다는 역사 교육에 어느 정도 합의된 바가 전혀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 국민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런 판단을 하셨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여기에 대해 마쓰모토는 "전문가에 따르면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기에 걸친 중세사 연구의 역사, 학술적 분야에서는 당시 정치의 중심에 있던 법황을 중심으로 하는 '집안'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왕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라고 답변했다. #(138/140, 320 참조) 당시 혼고 가즈토나# 이소 도모아키 프로그램 수석 프로듀서 역시 모두 '왕가'라는 표현은 결코 천황가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週刊ポスト2012年2月3日号)라고 일본 언론에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 이때 데인 경험인지 2022년 같은 시대를 다룬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서는 '왕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163] 도쿄대 사학과 교수로 전공은 일본 중세사. 한국에는 그의 저서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 -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신과 음모>가 2022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일본에서 새로운 연호 레이와(令和)가 선포되었을 때, "令에는 '명령'이라는 뜻이 있는데 꼭 '평화롭게 지내라'라고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것 같다."라고 이 레이와 연호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일본에서 국회의원이 세습 비슷하게 대물림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원래 일본인들은 세습을 좋아했다"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과거제 같은 것도 없었고 섬나라 특성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치열한 경쟁보다는 출생으로 모든 게 납득되는 세습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씁쓸하게 지적한 적도 있다. # 혼고 가즈토는 일본의 역사탐정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해 일본사를 설명하거나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같은 일본사를 소재로 다룬 만화 작품에서 해당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 및 해설을 써 주거나 하는 등으로 일본사의 대중적 홍보에도 힘쓰고 있다. 일본의 총선거를 일본 중세사나 전국시대에 비교하여 분석하는 글을 기고하거나, 방송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AKB48의 엄청난 팬이시란다.[164] 정확하게 말하면 '천황가'라고 쓰나 '왕가'라고 쓰나 어느 쪽이든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가라고 쓴 것이 꼭 사실에 맞다고도 할 수 없지만, 천황가라고 쓰는 것도 사실에 맞는 건 아니라는 얘기.[165] 다카마쓰 모모카(高松百香)[166] <「王家」をめぐる学説史> 『歴史評論』 2011年8月号 #[167] 이 '권문'은 한국사의 권문세족이라는 용어에도 나오는 그 권문인데, 한국에서와는 달리 구로다 토시오는 이 권문에 '왕가' 즉 천황과 상황의 가문들까지도 포함시킨다. 이는 천황이라는 '군주'가 정점에 군림하면서 '문신 권문'인 공가들이나 '무사 권문'인 무가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또한 공가나 무가는 무조건적으로 천황에게 복종하면서)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천황 역시도 공가나 무가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진 한 '축'으로서 기능하면서 이들 '축'이 서로 융합하고 견제하기를 반복하며 일본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68] 물론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두 개의 왕권론(二つの王権論)을 제시한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두 개의 왕권론은 덴노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를 각각 하나의 '왕권'으로 간주한다.[169] 황실이라는 용어 자체는 이미 고대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도 나온다. 구로다의 이 주장은 이전까지는 왕으로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으로 고치면서 천황 용어만을 쓰도록 했다는 게 아니라, 그전까지는 '천황'이라고 부르든 '왕'이라고 부르든 이중 어느 한쪽이 경칭이라거나 격하라거나 하는 인식이 없었던 것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만이 높이는 칭호이고 왕이라는 칭호는 낮추는 칭호라는 인식을 메이지 신정부라는 국가 권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립시키고 대중에 프로파간다로 퍼뜨렸다는 것이다.[170] 구로다 토시오 '중세 천황제의 기본적 성격', 1977.[171]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일본 역사는 결코 군주인 천황이 주도해서 뭔가를 운영하거나 결단한 역사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일본이라는 '왕국'의 역사에서 군주의 역사는 조선과 같은 군약신강을 넘어서 그냥 군주가 셋칸 혹은 쇼군의 권력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어서 연명하는 구조로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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