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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산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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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천99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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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5,363명 이상
부상 30명 이상
포로 98명 이상
투항 3,000명 이상

1. 개요2. 배경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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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에서 1965년에 시작하여 18년 동안 태국 공산당의 지속된 게릴라 전쟁이다.

1983년 태국 공산당이 반란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2. 배경

1961년 파테트라오의 소규모 집단이 태국 북부를 침공했다. 파테트라오의 점령 지역에서 지역 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한 무장 투쟁과 테러 전술에 초점을 맞춰 훈련했다. 1962년부터 350명의 태국인들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으로 보내져 훈련을 받았고 라오스로부터 최신 미국제 장비까지 입수했다. 그렇게 훈련과 지원을 받은 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전인 무장 투쟁을 벌였다.

3. 전개

미국 해병대는 1962년 7월 태국에 도착했다. 이 군대의 목적은 CIA로부터 훈련 받은 반공 민병대와 태국 경찰을 보강해 전쟁을 벌이고, 인근의 라오스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와 1961년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한 태국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막 임무를 마친 전직 CIA 외교관 존 퓨리포이를 태국으로 파견해 작전을 감독하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야전 원수가 이끄는 군부가 집권할 수 있게 만들도록 했다.
워싱턴 불렛 p.81~82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 해병대가 주둔하게 된 것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1961년 ~ 1965년 사이에 17건의 정치적 암살을 감행했다. 1965년 태국 보안군과의 교전이 일어났고, 1966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태국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1966년 4월치앙라이 주에서 군대와의 충돌이 일어나, 태국군 16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966년 상반기 동안에만 무장세력에 의해 45명의 보안요원이 죽고 65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72년 1월 태국 정부는 6주 동안 12,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200명의 무장세력을 사살했다. 작전 중 태국군의 30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했다. 1972년 말에는 육군, 경찰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있는 2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베트남과 유사한 방식의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전으로 태국 시민들의 공포심이 고조된 가운데 군대와 경찰은 좌익 시위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1979년 태국 공산당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과 베트남, 양측의 지원을 모두 받고있던 태국 공산당의 친베트남파는 분리되었고, 1980년 반란이 크게 감소하였다. 1983년 태국 공산당이 반란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내전이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