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 스트레이독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문호 스트레이독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efd88f>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 Fyodor Dostoevsky | |||
본명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 ||
출생 | 1821년 11월 11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사망 | 1881년 2월 9일 (향년 59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efd88f> 묘소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 | |
신체 | 169cm |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 (졸업) | ||
주제 | 심리학, 철학, 기독교 | ||
사조 | 리얼리즘 | ||
활동 | 1846년 ~ 1880년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 : 테오도로스) | ||
부모 |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 (1787~1839)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1800~1837) | ||
배우자 |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 (1857년 ~ 1864년, 사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 (1867년 ~ 1881년) | ||
자녀 | 장녀 소피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1868~1868) 차녀 류보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1] (1869~1926) 장남 표도르 표도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71~1922) 차남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75~1878)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efd88f> 한국어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 |
일본어 | フョードル・ミハイロヴィチ・ドストエフスキー | ||
중국어 | 費奧多爾·米哈伊洛維奇·陀思妥耶夫斯基 | ||
러시아어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Ѳедоръ Миха́йловичъ Достое́вскій | ||
영어 |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 ||
히브리어 | פיודור מיכאילוביץ' דוסטויבסקי | ||
아랍어 | فيودور ميخايلوفيتش دوستويفسكي | ||
그리스어 | Φιόντορ Μιχάηλοβιτς Ντοστογιέφσκι | ||
조지아어 | თეოდორ დოსტოევსკი | }}}}}}}}} |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러시아의 소설가.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작품 목록
3.1. 중 · 장편
제목 | 발간년도 |
<colbgcolor=#fff,#1f2023>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 <colbgcolor=#fff,#1f2023> 1846년 |
분신 Двойник | 1846년 |
여주인[2] Хозяйка | 1847년 |
네또츠카 네즈바노바[3] 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 | 1849년 |
아저씨의 꿈 Дядюшкин сон | 1859년 |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 1859년 |
상처받은 사람들 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ённые[4] | 1861년 |
죽음의 집의 기록 Записки из Мёртвого дома | 1862년 |
지하로부터의 수기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 1864년 |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 1866년 |
노름꾼 Игрок | 1867년 |
백치 Идиот | 1869년 |
영원한 남편 Вечный муж | 1870년 |
악령 Бесы | 1872년 |
미성년 Подросток | 1875년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5]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 1880년 |
3.2. 단편
제목 | 발간년도 |
<colbgcolor=#fff,#1f2023> 쁘로하르친 씨 Господин Прохарчин | <colbgcolor=#fff,#1f2023> 1846년 |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Роман в девяти письмах | 1847년 |
빼째르부르크 연대기 Петербургская летопись | |
질투하는 남편 Ревнивый муж | 1848년 |
남의 아내 Чужая жена | |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ужая жена и муж под кроватью[6] | |
약한 마음 Слабое сердце | |
뽈준꼬프 Polzunkov | |
정직한 도둑 Честный вор | |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Ёлка и свадьба | |
백야 Белые ночи | |
꼬마 영웅 Маленький герой | 1849년 |
악몽같은 이야기 Скверный анекдот | 1862년 |
악어 Крокодил | 1865년 |
보보크[7] Бобок | 1873년 |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Мальчик у Христа на ёлке | 1876년 |
백 살의 노파 Столетняя | |
농부 마레이 Мужик Марей | |
온순한 여자 Кроткая | |
우스운 사람의 꿈 Сон смешного человека | 1877년 |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대인관계
비록 본인은 감추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작가의 개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자신에 비견되는 천재성을 지닌 후배는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하면서 여유로운 창작을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은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원고료로 먹고 살아야 했으니.
톨스토이도 도스토옙스키를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8]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다만 톨스토이가 죽기 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던 것은 맞다. 임종 몇 주 전,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했고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에 불평을 했지만 꾸준히 읽으려고 했고, 그가 죽던 해 10월 28일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비롯한 책 2권을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이며[9],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 라고 말한다.
참고로 두 사람은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있긴 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옙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사후에 도스토옙스키의 아내 안나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옙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10]
또한 당대의 또 다른 대문호 투르게네프와의 관계도 굉장히 나빴다. 하긴 서민 출신에 러시아빠인 도스토옙스키 눈에 좋은 집안 출신의 유럽빠(특히 프랑스빠) 투르게네프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에서 유럽에 갔다와서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거들먹거리는 겉멋만 든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며 줄기차게 깠다. 악령에는 소설가 카르마지노프라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대놓고 디스하며 이는 명백한 투르게네프의 패러디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생활난에 시달리던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투르게네프에게 와서 돈 좀 빌려달라고 징징거리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투르게네프는 그리도 자신을 욕하던 주제에 굶어죽을 것처럼 비굴하게 100루블을 빌려달라고 온 도스토옙스키에게 별다른 말 없이 50루블를 빌려줬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그 돈의 상당수를 도박으로 아낌없이 날렸다.
보다못한 투르게네프의 지인들이 "쓰레기같은 놈에게 왜 돈을 빌려주냐?"며 분노 어린 반응을 보이자 투르게네프는 "막상 내 욕 해놓고 돈 급하면 또 나에게 와서 오만상으로 빌어대잖아? 난 그거 보는 재미로 빌려주는 거지. 그리고 저 작자는 그 굴욕감을 글로 나를 욕하면서 씻으니 뭐 서로가 각자 피해보는 게 없잖아."라고 대꾸했다.
사실 젊은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는 투르게네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가 처음 문단에 들어섰을 때, 투르게네프를 보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인들 중 한순간에 친해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투르게네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1845년 11월 16일에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형에게 쓴 편지에는 투르게네프에 대한 그의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형님,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 그에게 반했습니다. 시인이고, 수재이고, 귀족이고, 미남이고, 부유하고, 똑똑하고 교양도 있고, 나이는 25살입니다. 신이 그에게 주시지 않은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서 교육받아 품성도 올곧기 그지없고 훌륭합니다.
그래도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사흘 전 알렉산드르 푸시킨에 대한 연설회장에서 투르게네프와 극적으로 화해하며 서로간에 나쁜 감정을 깨끗이 정리했고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가 참가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죽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6. 어록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죽음이다.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곁의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괴로움과 번민은 위대한 자각과 심오한 심정의 소유자에겐 언제나 필연적인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이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고 눈물로 그것을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 이 땅을 꾸준히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라.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이 사랑의 열광과 환희를 맛보아라. 네 기쁨의 눈물로 이 땅을 적시기도 하며 너의 그 눈물을 또한 사랑하라.
자기에게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에게 한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7. 여담
- 이오시프 스탈린은 젊은 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위대한 심리학자로 여겼다. 그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책에는 그가 작품을 읽으면서 적은 여백에 광범한 기록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분석해왔다. 푸틴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을 다룬 사극을 2010년에 방영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도스토옙스키(드라마) 문서 참고하십시오.
- 도서 갤러리와 독서 마이너 갤러리[11]에서는 도끼 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한국 문학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외국 문학 커뮤니티에서도 인기 작가 중 한 명이다. 4chan의 문학 게시판인 /lit/에서는 도스토옙스키 관련 글이 하루에 하나 이상은 무조건 올라온다.
- 2005년에 바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기존에 쓰이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도스토옙스키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
- 러시아의 극우 정치인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는 수형자였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를 예로 들며, 러시아의 문화 역량이 쇠퇴한 것은 사람들이 너무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궤변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국민들을 감옥에 가두면 고난과 역경을 딛고 러시아의 문화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물론 이를 듣고 있는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정치인들은 폭소했다.
- 열린책들 등의 출판사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한다.
- 도전 골든벨 2002년 2월 춘천여자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 로베르 브레송은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두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브레송의 1969년작 '온순한 여인'은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온순한 여인'을 원작으로 했고, 1971년작 '몽상가의 나흘밤'은 단편 '백야'를 원작으로 했다.
[1] 영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류보프 도스토옙스카야는 에메(Aimée/Эме)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류보프는 러시아어, 에메는 프랑스어이며 둘 다 '사랑'을 어원으로 하는 이름이다.[2] 한국에선 단편 모음집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에 실려있다. 열린책들 기준[3] 미완성작[4] 영어로 하면 Humiliated and Insulted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모욕당한 그리고 굴욕당한'이 되겠다.gg[5] 본래 3부작 장편으로 기획된 소설집으로 제3의 인물인 화자가 주인공 알렉세이를 추억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1부작은 알렉세이가 수도자에서 환속하는 프롤로그이고 알렉세이가 본격 혁명가로 발걸음하는 2부는 본편으로 정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집이 되었다.[6] '남의 아내'와 '질투하는 남편'을 합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서 개작한 단편[7] 이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쓰여진 단편들은 전부 도스토옙스키가 쓴 「작가의 일기」라는 연재 일기의 부분으로 발표된다.[8] 1880년 9월 26일, 톨스토이는 평론가 니콜라이 스트라코프에게 편지를 보내 "<죽음의 집의 기록>은 푸쉬킨의 작품을 포함하여 새로운 모든 문학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썼다.[9] 카츄샤가 네흘류도프 집안에 살았던 시절, 그와 더불어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탐독했다고. 그러나 카츄샤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더 좋아했다고 나온다.[10] 안나 그리고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11] 이곳에서는 갤주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작가다. 작가 인기 투표에서 1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