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ériel de 75mm Mle 1897 |
[Clearfix]
1. 개요
1897년식 75mm 야포 발포 영상 |
대전 당시 운용 영상 | 분해 및 구조 |
2. 제원
3. 역사
1890년에 프랑스 제3 공화국 군부는 독일 제국의 신형 야포 정보를 입수한다. 설계자 콘라드 하우스너(Konrad Haussner)가 개발한 유압과 기압 메커니즘을 활용한 주퇴복좌기가 설계되었고, 크루프에서 이 메커니즘을 채택한 야포를 개발중이라는 것이었다.[2] 당시 야포는 가장 중요한 전술 병기였기에 프랑스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1891년부터 신형 야포를 개발 시작했다. 처음에는 57mm 구경에서 시작했지만 곧이어 75mm 구경으로 옮겨갔다. 1896년에 개발 완료하고, 1897년에 제식화한다.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야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이유는 여러 선진적인 요소들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유기압식 주퇴복좌기를 사용하여 포탄 발사시의 반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분당 발사속도를 10발 이상으로 올렸다. 또한 발사 후 표적을 새로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전장식 야포는 물론이거니와, 새로 개발된 후장식 야포조차 표적을 조준하면 분당 2발 발사가 고작이었다. 발사시의 반동으로 인해 야포가 대폭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대포의 위치 자체가 바뀌어버려 발사 후 새로 목표를 조준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퇴복좌기의 작동이 묘사된 일러스트 |
제식명인 "Canon de 75 modèle 1897"에서 직잠할 수 있듯이, 19세기식 포병교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아군 보병의 돌격을 포병이 직사로 엄호하며 적군 보병 진형의 격파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는 M1897에게 일장일단의 효과를 가져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벨기에 방면에서 독일군의 진격 저지와 프랑스군의 후퇴 엄호하는 임무에서는 큰 효용을 보였다. 19세기식 선형진을 짜고 공격해오는 독일군에게 포탄의 비를 퍼부어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고, 마른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반면 이후의 참호전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참호를 건설한 독일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앙각과 포탄 위력이 낮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주로 대포병 사격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전과는 매우 판이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환경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프랑스는 Canon de 155 L modèle 1877/14 Schneider 같은 야포를 배치하게 되고 이들은 현대 155mm 곡사포의 시초가 된다.
생산은 1897년부터 시작하여 1940년에 종료되었다고 추정되며 총 생산문수는 21,000문에 이른다. 사용된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파생형이 등장했는데, 기본인 야포형뿐 아니라 전차포 모델, 대공포 모델도 등장했다. 영국군은 1915년부터 대공포 모델을 수입하여 영국제 대공포가 개발될 때까지 사용했다.
생샤몽 |
1938-1940 개량형 |
4. 실전
4.1. 프랑스 식민제국 식민지 내 작전
4.2. 의화단 운동
4.3. 제1차 세계 대전
4.4.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4.5. 제2차 리프 전쟁
4.6. 스페인 내전
4.7. 중일전쟁
4.8. 제2차 세계 대전
5. 해외 운용
개발 국가인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 미국, 영국, 폴란드, 일본, 나치 독일, 스페인, 그리스 등의 여러 국가들이 두루 즐겨 사용했다.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의 승리 후 독일은 이 포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대전차포로 개량했다. 개조 수량은 3712문. 동부전선에서 PaK 40이 대량배치될 때까지 운용했고, 그 이후에는 대서양 방벽 등의 방어진지로 재배치하여 종전시까지 운용하거나 동맹국들에게 매각했다. 그래서 고폭탄도 재생산되었다.
7,5cm PaK 97/38(f) |
핀란드군은 보유한 M1897 야포를 독일과 동일한 형식의 대전차포로 개수하여 전쟁 내내 운용했다. 전후에도 장기간 예비치장물자로 보관하다가 1986년에 퇴역했다.
미군은 이 포를 프렌치 75라 부르며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애용했다. 전간기에도 계속 사용하다가, 전차포 버전으로 75mm 전차포 M2–M6를 개발하여 M3 리 전차의 주포로 사용했으며 이후 M4 셔먼에도 조금 더 장포신화하여 성능이 강화된 M3 전차포로 운용했고 M3 GMC 대전차자주포의 주포이자 장포신화 개수 최종 개량형인 75mm M1897A4 대전차포로 탑재해 운용했으며, 견인식 대전차포로는 활용하지 않았다. 미군 포병의 경우 전간기 동안 이 M1897A4 버전을 사단포병용으로 계속 사용하다 2차대전 참전 직전인 1941년에 개발된 [M2 / M101 계열 105mm 곡사포|M101 105mm 곡사포]]를 장비하면서 1943년이 되면 완전히 사용을 종료한다.
B-25 미첼 폭격기의 기수에 M3 대전차포를 개수한 M4 대전차포를(B-25G), 그리고 이를 경량화한 M5 대전차포를(B-25H) 장착하여 건쉽으로 활용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G형은 420대, H형은 약 1000대가 생산되었다. 75mm M5포는 개량을 거쳐 M6라는 제식 명칭으로 M24 채피에 장착되었다.
해당 75mm M3 ~ M6 전차포는 종전 때까지 같은 체급인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모든 파생형을 표준 교전 거리 내에서 여유있게 격파할 수 있었고, 속사 능력과 고폭탄 화력이 우수하여[4] 보병이나 비장갑차량, 벙커 등을 상대하는 데에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태생이 야포였기에 1km 이상의 장거리 저격전에서는 탄속이 낮은데다가[5] 포탄의 위력 감소가 심각한데다, 이후 모습을 드러내는 독일 국방군의 6호 전차 티거와 5호 전차 판터에게는 이빨이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 포탄 좀 받아쓰겠다고 같은 규격의 탄환을 쓰는 QF 75mm 포를 개발해서 전차포를 거의 통일했던 영국군도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대전차전보다 대보병전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무기였음은 틀림없다.
일본군은 1차 세계대전후 이 포의 개량형을 라이센스 생산하여 90식 75mm 야포로 사용하였다. 90식 야포를 개조하여 개발된 3식 전차포는 1식 포전차 호니와 3식 치누 중전차의 주포로 활용되었다. 다만 당시 공업능력의 한계로 동일한 계열의 주포를 사용하던 미국보다는 성능이 뒤떨어졌다.
6. 기타
프렌치 75라는 칵테일은 이 대포에서 따온 이름이다.7. 미디어
- Gates of Hell - 독일군 대전차포로 PaK 97/38이 등장한다. 보병에게 고폭탄 공격도 유용하고 HEAT 발사로 T-34나 셔먼 차체정면도 뚫을 수 있다.
- 스틸 디비전 시리즈 - 일부 독일/헝가리/리투아니아/폴란드/루마니아 사단의 곡사포로 M1897 원본이 등장하며 핀란드/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의 대전차포로 PaK 97/38이 등장한다. 2편 기준 M1897은 8km까지 곡사포격이 가능하며 철갑탄은 관통력 60mm로 경차량만 잡을 수 있다. 곡사화력과 명중률도 매우 구린 편이라 그냥 1.5km까지 직사로 쏴서 보병과 중화기를 제압하는 것이 낫다. PaK 97/38의 HEAT은 90mm 관통력으로 연합군 중형전차들을 잡을 수 있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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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가 개발한 군사 장비들은 현대적인 개념을 확립하거나 개념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물건들이 꽤나 많다.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뾰족한 탄환, 철모, 전차의 회전 포탑, 대포의 구조 등이다. 보불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보복주의에 일신해 독일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군사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다양한 군사장비들이 고안, 개발됐다. 여담으로 박격포의 60-81-120mm 구경과 곡사포의 75-105-155mm 구경도 프랑스가 고안한 것이다.[2] 정작 크루프에서는 개발 도중에 유기압 메커니즘의 내구성 문제와 메커니즘 내부의 유체가 새어나오는 결함 때문에 이 메커니즘을 채택 거부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주요 전투마다 일본군을 상대로 연패했는데 러일전쟁의 전투양상은 부정기적인 조우전이 다수였고 이러한 환경에선 소총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였고, 러시아 제국군의 규모가 전군을 투입하다시피한 일본군과 달리 국경수비대급 전력에 불과했기 때문. 당시 러시아군의 개인화기는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었지만 총사령관이었던 크로파트킨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군의 제식소총이었던 30년식 보병총과 비교해 명중률이 떨어졌다고 한다.[4] 별로 주목받지 않는 사실이지만, 2차대전 당시 고폭탄은 설계의 한계로 인해 작약량과 위력이 탄속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해당 75mm 포는 야포 기반이라서 필요한 작약량을 확보하면서도 탄속도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4호 전차처럼 단포신/장포신 주포를 떼었다 붙였다 하며 파생형을 만드는 삽질을 할 필요가 없었다. 후기형 셔먼이 사용한 76mm M1 전차포의 고폭탄 역시 작약이 75mm 고폭탄의 2/3에 그쳤다.[5] M61 APCBC 포탄의 탄속이 618m/s로, 소련의 MD-5 신관을 사용하는 BR-350A탄의 662m/s나, 주적인 4호 전차 장포신형의 Pzgr.39 탄의 750m/s보다 턱없이 부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