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 |||
등장인물 / 조선 (1부 · 2부) | 설정 (입신체비) | 개변된 역사 / 조선 | 웹툰 |
1. 개요
근육조선의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가상인물은 ★ 표시.
2. 1부
2.1. 조선
자세한 내용은 근육조선/등장인물/조선/1부 문서 참고하십시오.2.2. 명/만주/몽골
- 정통제
원역사에서처럼 몽골에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맞는다. 에센 타이시가 급박하게 후퇴한 이후 태상황이 되어 돌아오는데, 원 역사와 달리 자신의 실책을 부끄러워하고, 황제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별궁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 경태제가 후계자를 잃은 상태에서 병사한 이후 아들인 영덕제의 섭정으로 사실상 황제의 자리에 복귀한다. 이전과 달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번에는 황실에서만 살아서 실질적인 정책에 대해서 잘 모름 + 어중간한 위민정신 + 토목의 변 이후 주변 공신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요동 정책을 망쳐 버린다. 농업 위주로 굴러가던 요동에 갑자기 10만 명이 넘는 상인과 공인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해본 적도 없는 농사와 개간에 시달리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주하거나 도적이 되어 버린다. 원 역사보다는 오래 살지만 과로로 죽는다.
- 왕진
명나라 초기를 뒤흔든 환관이자 간신으로 조공품목으로 온 석감을 보고 크게 좋아한다. 명의 환관은 고환은 물론 음경까지 완전히 잘라내기 때문에 소변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고, 이 때문에 항상 몸에 오줌 지린내가 배는 문제가 있어 향석감에 환장하는 반응을 보인 것. 때문에 명 순회를 떠나는 수양대군에게 최고급 수레를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해 극진한 대접을 해 주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를 봐 준다. 이후 조선이 보총을 조공품목으로 바치자 보총의 생산과 훈련과정에 개입해 어마어마한 부정을 취했으나 결국 실제 역사대로 토목의 변 와중 장수 번충에게 살해당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원래는 철퇴로 사망했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사태의 원흉이 된 비누로 팼다는 것 정도. 토목의 변 이후 그의 버려진 시신에서 뜯어온 두개골은 정통제가 변소 속에 던졌다. 이후 그의 일가가 멸족되고 축적한 재산들은 모조리 몰수되었는데, 어찌나 부를 축적했는지 몰수한 재산을 처분하는 것 만으로도 황실 예산 부족이 한동안이나마 해결될 정도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은자 한냥이라는 금액 탓에 환관으로 팔려갔고, 고자가 되었기 때문에 부와 재산에 집착하며 사내다움이라는 것에 있어 콤플렉스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작중 벌이는 행적들도 이러한 점에서 기인한 면모가 많다.
- 경태제
토목의 변이 끝나고 정통제가 책임을 지고 태상황이 되어 물러난 뒤 즉위한 황제. 왕진과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망쳐놓은 나라 꼴을 어떻게든 되살리기 위해 몰수한 왕진의 재산을 처분하면서 예산을 확보하고, 북방 민족의 통제력을 상실하자 굳이 되찾으려 하지 않고 조선에게 영토를 하사하며 동시에 남아있는 몽골이나 여진과 같은 북방 민족에 대한 관리 책임도 떠넘긴다. 토목의 변에서 두각을 드러낸 조선을 은근히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황태자가 병사해서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병약한 몸 때문에 그만 붕어하고 만다.
- 영덕제
정통제의 아들이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붕어한 경태제의 후임 황제. 원래 역사의 성화제다. 즉위 당시 8살인지라 태상황 정통제가 섭정이 되었고 시간이 흘러 정통제가 승하한 뒤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조선에 대해서는 상국을 잊지않고 충실한 조공을 보내는 충직한 번국이라 생각해 상당한 호감을 표하고 있다. 경인년에 조선의 영의정이자 자신의 외조부뻘 되는 한확이 일본의 정세를 고하자 대노하여 백규를 파견, 조선의 큐슈 정벌에 아낌없이 지원을 보낸다. 이후 조선이 큐슈를 바치고 백규가 자신의 실책을 밝히면서까지 홍윤성의 맹활약을 보고하자 매우 흡족해하며 그에게 직책을 하사하는 장계를 보내고 홍윤성도 뛸듯이 기뻐한다. 큐슈에서도 이전의 북방 야인에 대한 정책처럼 지역 토호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식으로 통치하고자 하는데, 인구밀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오히려 지역의 통제가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스트레스에 미쳐버린 홍윤성은 분쟁을 일으키는 일본인을 공평하게 모두 죽이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야 만다.
- 백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경인년 전쟁 당시 명에서 파견한 감찰관. 조선군의 강성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고 이후 홍윤성의 부대에 합류한다. 당시 홍윤성의 부대는 호시탐탐 침입을 시도하는 시노비를 찾기위해 군영 주변의 거수자를 닥치는대로 수하하는 등 철통같은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다고 야간 경비를 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을 내린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시노비들이 백규를 암살하려 하지만 다행히 홍윤성이 들어와 살아남고, 가벼운 경증에 시달리게 된다. 홍윤성도 결과적으로는 실책을 저지른 것이 되어 극심한 스트레스로 폭주하는데, 근방의 일본군을 모조리 갈아버리는 홍윤성을 보고 경탄하는 마음 반, 자기때문에 피해를 본 것에 대한 미안함 반으로 황제에게 보고할 장계에 홍윤성의 활약상을 상세히 작성하는 것은 물론 황제의 어전에서 당시 자신의 실책을 고백한다. 결과적으로 이 장계를 보고 감탄한 영덕제가 홍윤성에게 직접 직책을 하사하게 되었고 홍윤성의 은인이 될...뻔 했지만 그가 발령된 지역인 큐슈에 영덕제가 마구잡이로 관직을 뿌려서 요동만큼은 아니더라도 통제가 상실된 탓에 홍윤성을 또다른 지옥으로 몰고 가버렸다.
- 아이신기오로 충샨
조선과 몽골, 명 사이에서 정치적 줄다리기를 하는 교활한 인물. 셋 모두에게 어중간하게 잘못된 정보를 넘겨 주면서, 몽골과 조선 중 누가 이기든 패자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몽골이 조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 충샨이 조선의 뒤통수를 쳐 여진이 조선의 영향권에서 독립하는 것이었으나, 반대로 몽골이 명을 박살내고 조선에게 깨지면서 계획이 모조리 틀어지게 된다. 결국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명이 요동에 주민을 이주시키며 요동이 여진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여진은 조선에 완전히 흡수되는 운명을 맞는다. 충샨의 부족은 몽골의 뒤통수를 쳐서 어느 정도 이득을 얻긴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조선에 귀부하는 게 늦어진데다[1] 배신자로 낙인찍혀 여기저기 치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 귀부하여 원동산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선조인 충샨이 조선에 귀부함으로써 청나라의 건국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충샨의 3남이었던 누르하치의 직계 조상은 요절하고, 그나마 가까운 친척은 호주 개척단에서 광부 노릇을 하고 있다.
- 에센 타이시
오이라트의 지도자로, 능력은 출중하지만 황금씨족(칭기즈 칸의 직계 후예)이 아니라 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 토목의 변으로 명군을 대패시키고 정통제를 포로로 삼는다. 그러나 남경 일대에서 징집되어 올라온 수십만의 물량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타이순 칸이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후퇴한다. 이후 혈통은 있으되 실적이 없는 타이순 칸을 압박하며 칸의 자리를 노리지만, 타이순 칸과 협력한 조선에 의해 패배한다. 이후 몽골은 에센 타이시 파와 타이순 칸 파로 나뉘어 내전에 들어서며, 에센 타이시가 사망한 이후 오이라트 계열은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타이순 칸 토크토아부카
현재 몽골의 대칸. 황금 씨족 출신으로 에센 타이시가 명을 공격하는 동안 그 또한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조선군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오히려 박살난다. 불공정한 조건이나마 화친을 맺고 세력을 어느 정도 보전하지만, 정작 본인은 근육 괴물에게 조리돌림당해 뇌진탕에 걸린 악몽[3]과 트라우마 때문에 알콜 중독에 걸려버린다. 하지만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고 수양대군을 보고 불쾌해할지언정 적극적으로 조선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에센이 죽고 권력이 안정화되자 장남한테 대칸 직위를 물려준 뒤 다른 아들인 바얀 뭉케[4]를 데리고 투메트부로 내려가 조용히 말년을 보내게 된다. 알콜 중독도 고치고 수양대군에 대한 트라우마도 털어버려 악우 비슷한 관계가 된 것은 덤. 후대에는 근육요괴에게 지혜를 받아 투메트부를 부흥시킨 위대한 칸으로 묘하게 미화된 평가를 받게 된다.[5]
- 방길주 ★
정화의 7차 대원정 때 보선 제작에 참여했던 선박 기술자. 이후 명이 해금령을 내리고 선박 산업이 쇠퇴하자, 의욕을 잃고 작은 고깃배나 만들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가축과 작물의 종자를 구하고 다니던 수양대군을 만나 다른 기술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한다.
- 여국강 ★
방길주가 만들었던 함선을 운용했던 선원 출신의 노인. 은퇴 후 장인으로 전직했는데, 정통제와 서유정의 실정 때문에 요동으로 끌려와 농사를 짓게 되었다. 생전 농사 한 번 지어본 적 없는지라 제대로 개척도 되지 않은 요동에서 개고생하다 항구에서 노역을 하던 도중 기력이 떨어져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상황에 근처에 있던 한명회가 구해주고 잠깐 쉬라는 배려까지 해 준 덕에 선창에서 쉬다가 조선의 배를 제작한 사람이 자신이 잘 알던 방길주라는 걸 알게 되고, 함선 자체의 성능은 우수하지만 조선의 항해술이 부족해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채고 같이 끌려온 장인/상인들을 불러 모아 조선으로 가서 자신의 항해술을 조선의 군주에게 보여주어 고용되자는 계획을 세우고 겨울동안 몰래 배를 만들어 탈출한다. 뛰어난 선원으로서[6] 조선에 항해 기술을 전수하고, 덕분에 조선은 본격적으로 바다로 뻗어나갈 기회를 얻게 된다. 또한 방길주가 데려온 사람들은 나름 실력있는 장인들이라 조선의 물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자신과 인연이 닿았고 나중에 항해에도 함께한 한명회와 매우 친하여 사돈 관계를 맺는다.
- 아구지 ★
여진의 족장 중 하나로, 충샨의 아버지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7촌이다. 경태제의 이주정책으로 원래 근거지를 떠나게 되어 활로를 찾던 중 조선땅을 밟게 된다. 조선은 먼터무가 배신당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명분삼아 여진족을 흡수할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아구지는 애매하더라도 나름의 친척 관계[7]인지라 조선에서 이를 이용해 여진을 복속시킨다. 이 공로로 문종에게 정충렬이라는 이름을 받고 경원부의 만호가 된다. 이후 수양대군의 일본행에 따라가고 대양도(대만) 개척에도 참여하는 등 여진족의 대표 역할을 한다. 사후에도 정충렬의 회령 정씨 가문은 계속 번창해, 5위 중 하나인 족친위를 대대로 담당하는 여진족의 대표 가문으로 자리잡는다.
- 정진영 ★
정충렬의 아들. 배재당에 들어간 여진족장들의 아이 중 하나로써 당당히 빈공과에 합격하여 금의환향한다. 이후 큐슈 정벌 당시 여진족 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작가는 아닌 척하지만 부하 중 하나로 조상해가 있고 일본 장수중 진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모티브는 이 정진영인 듯.
2부 시점에서는 북인들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정진영의 후손 정지운이 조선 기병의 주력이 되어 활약을 펼친다.
2.3. 일본
- 야마나 소젠
정계에서 은퇴하여 스님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은퇴 후 배후에서 호소카와 가문을 통제하던 음흉한 권력가. 저명한 고승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숙하게 활용하는 연륜있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줬으나 수양대군은 미래의 역사지식으로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신미 대사를 데려와 고승 행세를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8] 그리고는 무식한 장군이라는 컨셉도 지킬 겸 잔치상이 맘에 안 든다고 온 산을 휘저으면서 사냥하고, 익숙하지도 않은 고기 요리를 먹이는 등 거침없는 행동으로 그에게 빅엿을 먹인다. 그야말로 조선식, 혹은 근육식 미치광이 전략을 시전한 셈. 결국 수양대군의 파천황적인 행보 때문에 여기저기 사죄하며 당한 치욕 때문인지, 화병을 얻어 본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사망한다. 그를 골로 보낸 수양대군은 후일 소식을 듣자 "처음부터 본래 신분으로 솔직하게 오지 그랬느냐"며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죽기 전 "인삼으로 인해 이 나라가 분열될 것이다." 라고 한 마디를 남기는데, 인삼에 미친 주변에서는 이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으나 이는 결국 사실이 되어버렸다.
- 호소카와 카츠모토
원 역사에서 오닌의 난을 주도했던 호소카와 가문의 수장이자 쇼군 바로 아래의 지위를 가진 다이묘. 한없이 무능한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겉으로만 쇼군 취급하고 뒤에서는 철저히 무시하며 본인과 가문의 이득을 추구하는 당시의 음습한 막후 정치의 민낯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가에 귀의했으나 아직도 실권을 가지고 사직(四職) 가문[9] 중 하나인 야마나 가문을 이끄는 막부의 양대 권력자 야마나 소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며, 세력이 강하다 해도 엄연히 쇼군 휘하 다이묘이기 때문에 요시마사가 명령을 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굽히고 들어가기도 한다.
조선에서 인삼 씨앗이 들여오자 카츠모토 또한 인삼에 눈이 멀어, 인삼 씨앗의 5할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한 쿠니의 가신을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타국의 왕족이 보는 앞에서 참살시키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린다. 시간이 흘러 야마나 소젠이 홧병으로 눈을 감은 뒤에는 아예 쇼군 요시마사를 폐위, 동생 요시미는 독살시키고 요시마사의 어린 아들 요시히사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정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때 국내 여론을 휘어잡기 위해 조선을 비방하고 조선과 명을 이간질하는 수작을 부리고, 이에 분노한 조선이 명 황실의 승인을 받아 일본 본토 공략에 나서며 몰락한다. 결국 그 동안의 위세를 모두 상실하고 조선과 명을 달랠 제물로 찍혀, 본인은 술을 마시다 죽었다는 명목으로 암살당하고 양자인 카츠유키는 수급이 명에 바쳐지면서 가문이 아예 물리적으로 결딴나고 만다. 수양대군의 빙의로 인한 역사개변의 가장 큰 피해자중 하나.
- 아시카가 요시마사
이 시기에는 나이 17세의 청년이고, 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술에만 관심이 있다. 수양대군의 힘과 안평대군의 예술 실력을 보고 홀딱 반해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낸다. 특히 안평대군의 실패작 중 하나인 낙양시전도[10]를 보고 좋아하며, 이 그림이 금과 같으니 그에 걸맞은 절인 은각사를 지어 모셔놓겠다고 한다. 이후 조선이 뿌린 인삼 씨앗에 대한 대가로 일본서기 등 고문서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주고, 조선에선 이야기도 꺼내지도 않은 탐광자,[11] 대장장이, 어부 등 기술자들도 보낸다. 그러나 인삼은 씨앗만 보내고 정작 중요한 키우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고[12] 일본의 기후나 지질도 인삼에 전혀 맞지않아서 기껏 키워낸 인삼은 더덕만 못한 삼이 되었고, 일본은 인삼에 대한 탐욕 때문에 혼란을 맞이하고 갈라지게 된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조선쇼군. 결국 원 역사대로 시바 가문의 후계자를 본인 맘대로 정하는 실책을 저지르며 모든 다이묘들에게 버림받아 카츠모토가 이끄는 호소카와 가문의 정변에 의해 쇼군자리에 퇴출 당하게 된다.
- 아시카가 요시미
적장자가 없던 요시마사의 뒤를 잇기 위해 그의 양자로 입적한 요시마사의 동생. 하지만 호시카와 카츠모토의 정변으로 요시마사가 폐위당하고 본인은 독살당한다. 이 때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조선에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이 불타는 금각사에서 조선의 대군이 남긴 그림을 꺼내려다 그림의 안료로 쓴 비상[13]이 타들어간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죽었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 아사쿠라 타카카게
에치젠 지역의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 부하들에게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조선의 외교전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던 다이묘들 중 몇 안 되게 예리하게 향후 정세를 파악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에 극심한 기근과 태풍이 겹치는 재해가 지속되자 값싸게 나도는 감합무역 증서를 이용해 그동안 재배한 인삼을 팔아 곡물을 사서 기근을 이겨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만, 그가 믿은 인삼은 일본의 토질과 기후로 인해 약효가 떨어지는 죽절삼, 만주삼 따위가 되어버려 예상과 다르게 엄청난 손해를 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극심한 기근에 인삼 재배로 인한 지력소모가 겹치니 각지에 민란이 일어날 것이고, 무능한 막부가 상황을 통제할 리 만무하니 얼마 가지않아 일본 땅 전국에서 대대적인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왜구가 준동하며 그로 인한 대혼란도 올 것이니, 인삼을 포기하고 곡물을 최대한 아껴서 조용히 버틴다"라는 예측을 하고, 이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후 시간이 흘러 경인왜변 당시 히가시 히로시마 공방전에 조선에 맞서기 위해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규합한 다이묘 중 하나로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일본군을 뛰어넘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조선군을 상대로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다른 다이묘들의 작태를 보고 기가 막혀 한탄을 하고 만다. 이래저래 어리석거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물 속 개구리들이 넘쳐났던 1부 시점의 일본측 인물 중, 몇 없는 상식인 포지션이다.
- 시부카와 노리나오
시부카와 가문의 수장. 경인년에 벌어진 전쟁에서 책임소재를 지고 명나라로 압송될 처지에 놓이자 곧바로 모든 가족과 부하들을 이끌고 선박을 타고 야반도주한다.[14] 이후 호소카와 가문과 명 황실에서 현상금이 걸리자 오만 고생 끝에 거지꼴이 되어가며[15] 가까스로 홍길동이 개척중인 율도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서 홍길동과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와중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본래 이름을 뒤섞은 노리카와(敎川)라는 가명을 대는데, 머리 잘 돌아가는 홍길동은 이 가명을 보고 대충 정체를 짐작했지만, 출세에 관심없는 홍길동은 괜히 보고했다가 귀찮아지는 게 싫기도 하고, 율도는 폭설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사고가 빈번한 곳이었던 지라 폭설을 견디는 건축법[16]을 알고있는 시부카와 가문을 받아들여 정체를 감추기로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율도에 정착한 시부카와 가문은 율도 교씨의 시초가 된다.
- 오우치 노리히로
대마도 일대의 쿠니를 다스리는 다이묘. 대마도는 지력이 떨어지는 토지 특성상 조선의 지원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호소카와 가문의 정변으로 인해 남경의 왜구가 명나라와 조선에서 날뛰는 중에도 조선과 호소카와 가문 사이에서 방관하며 눈치만 보는 모습을 고수하며 조선의 분노를 산다. 결국 조선에서 강수를 둬서 호소카와 가문을 비롯해 다른 가문에게 정치적으로 시달리자 그제서야 아들을 보내서 비굴하게 도움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래 역사보다 장수하지만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많은 탓에 호소카와군의 침략을 대비할 군 병력 훈련 중, 돌연사 하고 만다.
- 오우치 마사히로
대마도를 다스리는 오우치 가문의 다이묘 노리히로의 아들. 경인왜변이 임박해오던 당시 조선의 지원을 애걸하기 위해 아버지 대신 조선에 방문하여 수양대군에게 애걸복걸하지만 오우치 가문이 완전히 굴복하기 위해 완급조절을 하던 왕실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양대군이 일부러 대답을 미적거리자 분을 못이기고 밖에서 일본말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후 경인왜변이 발발하며 돌연 급사한 아버지 노리히로의 뒤를 잇지만 조선의 지원은 확실치 않고 가신들은 언제 배신할 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차, 조선에 적극 협력하면서 완전 조선측 세력으로 전향하게 된다.
- 진스케 ★
시마즈 가문을 모시는 사무라이로, 수십 척의 선박을 이끌고 조선의 진주 지역을 습격한다. 그러나 조선 본토에 상륙하자 도감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신체 스펙에 관광당한다. 이후 패잔병들과 함께 어떻게든 인질을 잡아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우지만, 그가 알고 있던 정보가 하나하나 다 틀린 것[17]이어서 엉뚱하게도 입신체비장에 들어갔다가 유생과 아녀자들에게 근육당한다. 부하들은 유생들에게 내수린 기술로 근육당해서 사망 혹은 중상을 입고, 진스케 본인은 쇳덩이인 소역기를 나무 제기로 착각하고 막아보려다 코뼈가 부러져 기절, 하포의 부인을 인질로 잡으려고 하다 입신체비를 익힌 부인에게 얻어맞고는 때마침 돌아온 하포에게 질식투로 KO당한다.
이후 구속된 뒤 명나라로 압송되어 영락제에게 무시무시한 국문을 당하며 있는 정보 없는 정보를 모조리 불어버린다. 솔직하게 대답하면 사약을 내려 편하게 죽게 하겠다고 해서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영덕제가 그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아[18] 백각형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 진에이 ★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결전에서 정진영이 이끄는 여진 출신 기병부대의 돌격으로 전열이 붕괴하는 와중에, 정진영의 부하 조상해가 날린 화살에 고간을 정통으로 맞는다."야 이, 왜놈 새끼야!"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은 채 다른 포로들과 함께 조선으로 압송되는데, 포로를 확인하던 수양대군은 그 비참한 몰골을 보고 심영이란 이름엔 저주라도 새겨진 건가 하며 몸서리치고 바로 의원에게 보낸다.
2.4. 유럽/중동
- 메흐메트 2세
오스만의 술탄. 약간 살집이 있는 젊은 나이지만 술탄으로서의 위엄이 충분하고, 냉혹하고 독선적이며 교활하지만 언제나 나라의 이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명군. 수양대군의 탄탄한 육체와 자신의 친위대인 예니체리와 호각인 조선의 호위병들을 보더니 이들을 영입하거나 기술을 빼내려 한다. 그러나 수양대군도 이를 예상하고 있어 기존 조선에서 사용하던 최신식 보총은 베트남에 넘겨 주고 구형 화포를 받아 온 상태였으며, 군사 전술 대신 참호격투 정도만을 가르쳐 준다. 메흐메트는 수양대군의 행동을 보고 답례로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데, 수양대군은 단순한 금은보화 대신 학자와 작물의 종자들을 요청해 메흐메트를 감탄시킨다.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인도에서 몰래 빼돌린 후추 종자를 수양대군이 귀국할 때 제공해주었다.[19]
이후 조선과 유럽을 잇는 홍삼 중개무역으로 큰 이득을 얻으며 유럽 전체에 위협을 가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는데, 자신의 행적을 숨기느라 피렌체 등에서 보내 온 편지를 위조하고 주변국에 홍삼 광고를 대대적으로 해 조선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키지만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한 한명회가 스페인 관리를 통해 이를 알고 편지도 위조임이 들통나 조선에 의해 견제와 보복을 당한다.[20] 조선의 함대에 의해 항구가 작살나자 메흐메트는 화병을 얻어 사망하고, 아들 바예지드 2세가 예상보다 빨리 술탄이 된다.
- 카심 ★
수양대군의 요청으로 조선에 파견된 오스만 제국의 학자 중 하나. 조선에서는 가심이라 불린다. 그 외에도 자파(자배), 핫산(하산) 등이 언급된다. 이 학자들은 과학 전담 기관인 이현전에서 3대 강산, 현미경, 유리 등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력을 자랑하던 이슬람의 기술을 그대로 도입해 조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 메흐메드 2세가 피렌체 인들은 물론 자신들에게까지 위조된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신성한 코란의 문자를 더럽혔다 하며 격분하여 오스만으로 귀국할 생각을 접고 조선에 눌러앉기로 결심한다.
동류 중 화학자인 자배는 수은 중독으로 45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류성룡의 세대에는 그 증손자가 이현전에서 일하고 있다.
- 비오 2세
안평대군이 유럽을 방문할 당시 교황. 안평대군을 만나고는 조선을 대 오스만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적극적으로 나선다. 물론 조선과 안평대군 입장에서 응할 이유는 없었지만 덕분에 구텐베르크를 만나고 서양 예술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게 된다.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발명자. 푸스트에게 채무를 쓰고 인쇄기를 저당잡혀 곤궁하게 살고 있었던 것을 안평대군이 도와주고 조선으로 스카웃해간다. 세종대왕한테 구단배(具端培)라는 조선식 이름을 받고 한자와 한글을 병행하는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인쇄기를 개발하게 된다.
- 도나텔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상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안평대군의 몸을 보고 감탄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몸을 스케치한다. 이때 수양대군에 대해 듣자마자 그건 이상적인 몸이 아니라 근육 덩어리라고 기겁한다.[21] 또한 안평대군의 몸을 본 피렌체 학파의 일원들이 배움을 주고받아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조선으로 향한다. 이들은 나중에 피렌체로 돌아오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입신체비를 하는 건 그들뿐이다보니 입신체비의 전통은 서서히 사라져 입신체비 비슷한 어설픈 단련법만 남는다. 대신 이 예술가들이 나중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까지 이어져, 다비드 상과 피에타가 각각 근육빵빵한 다윗과 극한의 커팅을 거친 예수로 바뀌어 버린다.
2.5. 아프리카
- 레무아니 ★
한명회를 따라온 30명[22]의 마사이족 청년 중 하나. 작중에서는 이 레무아니가 마사이 청년들의 리더 내지는 대표격으로 묘사된다. 조선말로 내모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조선에서 입신체비와 각종 교육을 받으며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고향에 돌아가 부족을 이끌고 나라를 건국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는다. 허나 역사교육을 받던 도중 중원과 한반도를 주기적으로 침공해온 만주의 유목민족과 자신들의 뿌리인 마사이 족의 역사가 서로 하등 다를바 없음을 깨닫고 돌아가서 나라를 세운다면 유목민족들이 그랬듯 제대로 나라를 세우기도 전에 과거의 원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해서 멸망하리란 사실을 깨닫고 고뇌하게 된다.
이 고민을 수양대군에게 털어놓으며 도움을 구하는데, 빙의전 사학도 시절의 지식을 떠올린 수양대군에게 과거의 에티오피아 왕국과 그 후손들인 솔로몬 왕조에 대한 정보를 귀뜸받는다. 그리고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솔로몬 왕조를 우대하여 대외적 간판으로 내세우고 마사이 부족이 군사력을 맡아서 실권을 거머쥐라는, 중원 역사에 기반한 세심한 조언을 받는다.
이 충고를 잊지 않은 레무아니는 훗날 부족 청년들과 아프리카로 돌아간 뒤, 부족들을 통합해 에티오피아 왕국의 마사이국을 세우고는 북상하여 솔로몬 왕조와 접촉, 동맹을 맺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솔로몬 제국, 먼 훗날의 솔로몬 연방국은 동부 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고, 당연히 조선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레무아니의 출신 부족인 마사이는 이 연방의 핵심 세력. 솔로몬 제국은 삼한석이라 이름붙은 탄자나이트 채굴, 그리고 조선/유럽 양측과 사이가 좋지 않은 오스만을 대신해 동서방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는다.
- 안양조
원래 도도는 무식 그 자체였던 17세기의 유럽 선원들이 재미로 사냥한 끝에 멸종했으나, 근육조선에서는 왕손이 직접 항해를 나선데다 선원들의 성향도 온건한 편이라 멸종을 피할 수 있었다. 한 번 사냥해서 맛을 본 조선인들이 맛이 끔찍하다고 진상용으로나 몇 마리 데려갔는데, 선원들의 평에 따르면 걸레를 빤 물에 담가둔 고기도 이것보단 맛있을 거다. 데려간 도도는 구성군이 이홍위에게 엿을 먹이려고 진상했지만 이홍위가 '좋은 건 너희들이 먹어야지' 라며 돌려주고 요리해줄 숙수들을 붙여준 바람에 오히려 구성군이 빅엿을 먹는다. 사람을 겁내지 않고 다가오는 경계심 없는 모습과 극락도(모리셔스)에서 유유자적 사는 새라고 하여 이름도 안양(安養)조로 바뀐다.
2부 시점에서는 사람을 잘 따르는 특성 덕분에 궁궐과 일부 권세가에서 애완동물 삼아 기르고 있다고 언급되었지만, 극락도에 남은 도도들은 극락도를 점거한 해적들의 멀리걷어차기 내기용으로 학살당하는 등 원 역사의 도도와 같은 이유로 몰살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이후 극락도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바람에 멸종에 가깝게 절멸하기는 했지만, 현대에는 일부가 박물관에서 살고 있다.
- 이주가시거북
이주(아프리카) 지역을 탐사하던 유응부가 발견한 설카타거북, 이주 지역의 가시달린 거북이라 하여 이주가시거북이라 명명되었다.[23] 유응부가 작은 새끼를 데려온 것을 본 노년의 한명회가 예의 탐욕기질이 도져서[24] 조선에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지라모 웹툰 작가 말마따나다 자라면 고질라가 되는 탓에 현대에도 키우기 힘든 이 괴물거북들을 당시 조선에서도 어찌 다뤄야 할지 곤란해했고, 결국 수백마리의 거북이 탈출해 왕실 직할령 멜론밭을 망치는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근대시기의 대한 공화국에서 제법 인기있는 애완동물로 각광받는데, 그 이유는 조선시대보다 평균신장이 늘어나고 입신체비를 일상적으로 단련한 대한인들은 다 자란 설카타거북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기 때문.
현대 시점의 외전에서는 박물관에 한명회가 데려온 거북들의 후손이 안양조 무리와 느긋하게 노니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3. 2부
3.1. 조선
자세한 내용은 근육조선/등장인물/조선/2부 문서 참고하십시오.3.2. 명
- 가정제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도 변함없이 도교에 심취하여 수은으로 만든 백분과 단약을 하루가 멀다하고 사용하고 있다.[25] 50대임에도 백분을 바른 피부에 기미가 비쳐보이고 피부가 뻣뻣한게 다 보일 정도. 그럼에도 백분의 위험성을 논하는 조선 사신단에게 몸을 키우는 너희에게는 몸을 쇠하게 하는 독일지 몰라도 군살이 빠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좋은 약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답없는 모습을 보인다.[26] 그나마 조선의 요구대로 백분의 수출 금지와 조제법 공개 요구를 들어주는 걸로 퇴장한다.
- 융경제
간접 언급만 된다.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다 명을 다한 것은 똑같다. 다만 원역사에선 그나마 6년 재위했는데 여기선 고작 3년이라고...
- 만력제
본래 역사에서도 암군으로 평가받았지만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는 후대에 대놓고 고려천자라 놀림당하고 묘비명조차 쓰이지 않는 초라한 묘만을 남긴다. 다만 여기에는 만력제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만력제 본인은 충분히 능력도 있었고[27] 황제로서 책임감과 의욕도 넘쳐났기에 어린 나이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28] 나라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은 물론 믿었던 스승인 장거정마저도 부패해 있었고, 이런 현실을 깨닫자 극심한 배신감과 좌절감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작중 만력제가 개혁안을 내놓자, 신하들이 만력제를 반 협박해서 철회시켜버리는 살벌한 장면도 있을 정도다.
결정적인 계기는 스페인 원정대와 해적이 쳐들어온 경진만란이다. 당시 남경을 지킬 책임이 있는 관료나 세도가, 군대는 모조리 도망가고, 우연히 휘말린 조선의 신하와[29] 순수하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남은 전직 군인들, 그리고 농부들이 모인 민병들만이 남아 남경을 방어한 것을 알게 되자 더욱 완벽하게 비뚤어졌다. 그래서 썩어빠진 명 관료들을 믿고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느니 일 잘하는 조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기는 놀겠다고 마음먹고, 별궁에서 애완 카카포에게 먹이를 주거나 리옥크로 귀뚜라미 싸움 따위를 하며 시간을 축내며 기분좋을 때가 아니면 일 얘기만 꺼내도 신하들을 처벌할 정도로 본래 역사보다 더한 태업생활을 시작한다.[30]
반면 속내는 어찌됐든 겉으로는 속방으로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조선에는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경진만란이나 일본과의 전쟁 당시 내탕금 수백만 냥을 조선에 지원해 전쟁 비용과 무역 중단으로 인한 손해를 모조리 채워 주었고,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하는 김에 진린을 포함한 친조선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는 것은 물론, 유성룡에게 직접 벼슬을 내려서 제한적으로나마 일부 지역의 국방까지 맡긴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공 당시에는 은자 300만냥과 식량 700만냥어치를 조선에 제공해 전후에 혼란해진 조선 경제를 단숨에 복구해 버려, 명나라를 덩치만 큰 돼지 정도로 여기던 조선의 임금과 신료들의 없던 충성심을 끌어올려 명나라 방향으로 절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 왕실은 물론 유성룡 본인도 진짜 고려천자 맞는 건가? 생각할 정도다. 그렇기에 조선에서는 소입록이나 사막여우 등 만력제가 좋아하는 전 세계의 희귀동물들을 조공으로 바쳐서 비위를 맞춰주곤 한다.
반대로 명의 신하와 관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요동 지역의 수상한 정황에 대한 보고를 듣고 요동에서 반드시 쳐들어올것이라 판단하고, 이참에 마음에 안 들었던 황태자와 부패한 관료들을 북경에 남겨놓아 그들이 쓸려나가길 기대하기까지 한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북경이 점령당해도 좀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지만, 요동군을 지휘하던 이여송은 명에 대해 지독한 복수심을 품고 있어 북경을 통째로 태워버린다. 이를 보고 이성을 잃은 만력제는 한밤중에 대군을 무리하게 도하시키는 무리수를 두고, 결국 황군 전체가 붕괴 직전에 처했다가 조선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한다. 북경이 불타버린 모습을 보자 충격받아 오열했고, 삽시간에 20년은 늙은데다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세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일만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31]
1부 에필로그에서 춘천의 명나라[32] 묘역에 그의 묘소가 있는데, 석물은 대충 세워도 봉분만은 키운 다른 황제들의 묘소와 달리 일반 무덤 수준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명이 조선으로 천도한 것은 만력제 사후의 일이니 만력제가 특히 푸대접받을 이유는 없는데, 아무래도 자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묘소에 대한 유언 같은 것을 남겨 놓은 모양이다.
- 장거정
유성룡이 첫 명 사신단으로 임무를 나섰을 때, 시장에서 수은이 들어간 단약을 잔뜩 사제끼는 청년으로 등장한다. 본래 역사와 같이 능력있는 대신이자 스승으로서 만력제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지만, 동시에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로 부정축재를 일삼은 간신으로 부패하기 그지없는 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본래 그의 비리는 사후에나 드러났지만,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는 지나치게 큰 부정축재를 저질러 조선측에게 너무나 일찍 발각되어버렸다. 이 비리를 수습하기도 전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33] 그러다가 잠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수은과 카카오와 커피가루가 들어간, 정력제의 탈을 쓴 골로 가기 딱 좋은 극약을 먹고 첩과 거사를 치르다가 복상사 해버리면서 단순 비리의혹에 더해 부친상 기간에 예를 다하지 않은 것까지 문제가 되고, 척계광에게 무고를 씌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만력제가 가장 믿었던 중신인 만큼 그의 비리와 추한 사망은 만력제의 흑화를 더더욱 가속시킨다. 여담으로 저런 추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수은 단약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 소삼진팔 ★
1부에서 요동에 잡혀온 일본인 포로의 후손, 그의 선조가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었기에 성을 받으면 코스기(小杉)으로 지을 예정이었기에 성이 소삼이고 이름이 진팔이다.[34] 요동의 경략 중 한명으로, 홍수가 쓸어버린 지역에서 소를 길렀더니 우역이 없어진 일을 계기로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우역이 소의 분변을 통해 전염된다는 역사적인 발견을 해낸다.[35] 자기 부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서 소를 길러 점차 세력을 성장시켜 언젠가는 도적 생활을 청산하고 명나라에 제대로 된 관직을 받아 일본으로 금의환향할 꿈을 꾸고 있었으나. 그의 부하들이 소 값을 올린답시고 이 발견을 악용해 조선과 북원에 우역을 퍼뜨리는 미친짓을 저지른다. 결국 이 생물학 테러로 수십만 마리 단위로 소가 죽어나간 조선과 북원은 진실이 밝혀지자 극대노해 요동으로 쳐들어와 요동은 완전히 쓸려나간다. 뒤늦게 자기 부하들이 한 짓을 알게 되고[36] 나는 좋은 의도로 그랬던 거라고 항변하지만, 그런 말로 조선과 북원의 분노를 잠재울 순 없었기에[37] 결국 거대한 기둥에 묶여 말라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8]
이여송 못지않게 나라 잘못 만나서 인생 쫑난 케이스. 도적질만 해와서 배운 것도 제대로 없을텐데 우역이 소의 분변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밝혀낼 정도면 머리도 꽤 잘 돌아가고 능력도 출중하며, 이렇게 열심히 소를 기른 이유도 도적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보면 인성도 꽤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나 하다못해 일본 하주도 정도에서만 태어났어도 본인 능력으로 충분히 자수성가 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썩을대로 썩은 요동에서 도적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본인 잘못은 하나도 없음에도 억울하게 원한을 사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 척계광
명 최후의 명장. 일본의 명 영토인 하주도에서 왜구의 공격을 막아내며 두각을 드러낸다. 조선의 군대를 보고 감명받아 조선에서 군사 훈련에 대해 몸소 배우고, 산해관에서 계속해서 병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개량하였다. 본래 역사에서 조선군에게 명의 발달된 군사체계를 전해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다. 요동 도적이 저지른 우역 사태로 인한 나비효과로 북원 세력이 요동을 공격할 때 요동과 자국의 부패한 실정을 모르던 만력제의 황명으로 싸우러 나가는데, 장거리를 행군해 지친 소수의 장병으로 북원의 대군을 회전을 강요받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다. 장거정의 세력에 소속되어 있어서 장거정이 퇴각 후 거점을 지키면 자신이 무마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명령을 지키고 최전선에서 앞장서서 지휘하다 전사한 진정한 충신. 척계광의 처절한 분전 끝에 그의 군대는 두배나 되는 북원 기병들을 상대로 기적적인 무승부를 기록해 북원 세력이 남하할 생각을 버리게 되었으니[39]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지만, 장거정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런 충신이자 자신의 일파를 패배한 졸장으로 몰고 가 토사구팽하려 한다. 장거정 사후에는 충신의 상징으로 복권하며 그가 양성했던 척가군도 정예로 남아 활약한다.
- 이여송
요동의 총병관. 요동은 곳곳에서 끌려온 한족, 여진족, 일본인 등이 섞여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거대한 도적 소굴로 변해 있고, 명 조정에서는 백년 이상 끌어온 사기극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으니 요동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요동 총병관들은 대대로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미심쩍은 이유로 사망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이 몽골에 침략당하자, 군사 지휘관인 경략 중 하나인 독고율과 언쟁을 벌인다. 그 와중에 독고율이 전대 총병관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말을 실수로 내뱉자 격노하여 독고율을 살해, 명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는 시체와 본인의 얼굴을 훼손한 뒤 옷을 바꿔 입어 독고율로 가장해서 탈출한다. 이 때문이 이여송은 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여송이 변장한 독고율은 요동지역을 잘 다스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시작하는 등 '도적 우두머리라기에는 사람됨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었으나, 그런 요동의 수상함을 느끼고 찾아온 유성룡이 자신이 독고율로 변장한 군관임을 눈치채자 정체를 밝히며, 명나라에 반기를 든 이유를 말하는데 자신의 친인척들은 달자들을 달래려는 도적들에게 살해당해 전리품으로 넘겨졌고, 머나먼 친척들은 북경의 부패한 관료들에게 역적 누명이 씌워져 심문을 방자한 장살(매를 쳐서 죽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파멸이 기다릴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복수를 위해[40][41] 전쟁을 준비, 대연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며 북경을 점령하였다. 만력제의 군대를 상대로 맹공을 가하던 중 임차손이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대연군은 패배하고 이여송 본인은 임차손과의 대결 끝에 사망한다. 하지만 전투 직전 명을 무너뜨리기 위한 안배로 부하들에게 북경을 약탈해 얻어낸 금은보화를 나눠주고, 자신이 죽으면 흩어져 대연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측근들도 척박한 요동에서 도적질로 생계를 이어오다 단기간에 대승을 거두고 큰 재산을 모았으니 충성도가 높아, 이여송이 죽은 후에도 그의 유지를 잇고 있다. 1부 에필로그에서 건국의 시조가 되었다고 언급되었는데, 많은 수의 반란세력들이 대연을 자청하며 거병한 걸로 보인다.
작중에서 독고율이 변장한 이여송임을 눈치챈 것은 유성룡뿐이다.[42] 하지만 "명 약화"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유성룡도 이를 함구하고 있다. 이여송은 유성룡에게 "자신이 죽을 것을 아니 나를 알아보더라도 함구하고 조용히 화장해달라"라고 부탁하며, 이에 유성룡은 나중에 이여송의 시체를 알아봤을 때 "독고율의 시체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하며 약속대로 이여송을 조용히 떠나보내 준다. 작가 댓글에 따르면 후세 학자들의 연구 또는 유성룡의 간접 언급으로 '독고율은 사실 군관 출신으로 보인다'까지는 추측되었다고 한다.
- 진린
능력은 좋지만 꽤나 부패해 돈을 밝히는 인물. 하지만 아예 썩어빠진 것은 아니고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을 만큼의 상식은 있다. 유성룡이 세스페데스 신부를 앞세워 자신이 설계한 보선에 잠입하려 할 때 트집을 잡다가 뇌물을 2번씩이나 받고 통과시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부패한 공직자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으며 부패했으니 매수할 수 있고, 게다가 수틀리면 부패를 수단으로 압박할 수도 있어서 적합한 인사로 평가받아 장거정의 실각 이후 조선에서 진행 중인 친조선파 관료 육성 계획의 대상자 중 하나가 된다. 다른 인물로는 전사한 척계광의 부장 둘이 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도 참여하는데, 규슈 주둔 명군의 처참한 상태에 경악하여 부하들을 어떻게든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굴리고, 조선의 지원을 받거나 사비를 털어서라도 군량을 확보하는 개념찬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원체 부패한 명의 행정체계 때문에 뭘 하려해도 발목을 잡힌데다[43] 지나치게 엄정한 처벌과 훈련으로 병사들을 몰아붙여 원성을 사고 말았고, 이들 중 일부가 히데요시와 내통하여 방어체계가 무너져 육주성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때 일로 아무리 돈이 좋다 해도 돈보다는 돈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만력제에게 조선을 지원할 물자를 관리 감독할 권한을 받자 부패한 관료들을 척결하였으며,[44] 산해관의 수비를 위해 사비를 털어 화포와 화약을 양산하여 변란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의 사례를 참조하여 산해관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응용없이 그냥 그대로 답습하여 근거리용 화포를 많이 배치한 바람에 원거리 화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고,[45]철저하게 원거리 포격전을 벌인 이여송의 대연군에게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46] 장수로서 개념있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여송도 그를 죽이지 않고 포로로 가둬두었고 나중에 조선군에게 구출되었다.
- 마귀
척계광 휘하의 명나라의 장수. 장거정의 수작으로 척계광이 격하당하면서 몰락할 뻔 하였으나 조선의 계책으로 장거정이 몰락하고 척계광이 명장으로 추대받으면서 친조선 관료로서 조선의 지원을 받아 요직에 올랐다. 덕분에 조선에게 매우 우호적인 관료가 되었지만 만력제의 사실상의 남경지역 자체 수비 포기 및 조선에게 국방업무 외주의 뜻을 담은 칙명을 전달하면서 조선의 임금 및 신료들과 같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 등자룡
원 역사에서 노량해전 때 전사한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이 죽은 명에서 그나마 쓸만한 장수로, 친조선파지만 조선의 밀어주기 정책에서는 후순위로 밀렸던 인물이다. 남경이 다면으로 침공받고 수뇌부가 도망치자 죽음을 각오하며 남경을 사수하러 달려오며, 유성룡과 합을 맞춰 꿋꿋이 사수해낸다. 만력제의 친정 때에도 종군하며 뒤처리를 맡는다.
- 태창제
태자로서 등장한다. 역사대로 동생 주상순에게 입지가 밀리지만 효심을 다하는 인물. 만력제의 음모로 텅 빈 거나 마찬가지인 북경에 남아 이여송에게 얻어맞아 불구가 된다. 위신이 땅에 떨어진 명과 만력제인지라 원 역사처럼 업신여김 당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 천계제
1부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만력제의 손자이자 명의 황제. 원 역사에서도 정치는 뒷전이고 건축과 목공에 몰두하던 암군이였고[47]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유성룡의 만천서원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만들겠다고 원 역사보다 더 심하게 몰두한 듯하다.
3.3. 일본
- 오다 노부나가
패기로운 행보를 걷던 본래 역사와 달리 신흥 가문 세력을 철저히 짓밞는 다케다 신겐에게 집요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다케다 가문과의 분쟁 중 위기에 몰리자 특유의 기행적인 면모가 좀 다른 방향으로 발동되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과 조선 왕실의 딸을 결혼시키는 국혼을 제의해 버린다. 심지어 한번도 아니고 연달아서 제의하자 당연히 조선에서는 격노하여 노부나가를 규탄하는 격문을 보냈지만, 그 시점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세력이 완전히 무너져버린지 오래라 결국 이걸 받지도 못하고 사망한다. 이후 그의 6남인 오다 노부히데[48]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데리고 조선에 망명한 뒤 조선에서 자라던 중 조선을 배신한 자식이 사망하여 대가 끊긴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자로 들어가 오우치 노부히데가 되었으며, 오우치 영지를 차지하고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된 은의 9할을 조선과 명에 조공으로 바치고 있는 상황이다.
- 아케치 미츠히데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배신의 상징이 된 본래 역사와 달리, 배신할 마음을 품기도 전에 다케다 가문의 공격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몰락하여 끝까지 오다 가의 충신으로 남게 된다.
다케다에게 몰락당한 오다가의 생존자를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하는데, 당시 조선은 노부나가의 정신나간 국혼 요구에 꼭지가 돌아가 있던 탓에 오다 가의 망명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아케치는 기지를 발휘, 본인의 대머리를 십분 활용하여 승려로 위장한 뒤, 오다 가의 생존자를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피난민과 고아들이라고 속여 무사히 조선으로 피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결국 후일 속았다는 것이 들켜서 극대노한 상이경에게 내수린으로 처절히 근육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이경이 힘조절은 해줬는지 이후 유성룡이 하주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일종의 보좌관으로써 동행하는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알고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려주는 등 적극적으로 조선에 협력한다. 이후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도주중인 히데요시의 함대를 철저히 박살내던 이순신의 기함에 동승한 상태에서 히데요시의 얼굴을 알아보고 건져올리게 하는데 한때 같은 주군을 섬긴 사이였기에 잠시나마 착잡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머리숱이 얼마 안 남은 모양인지 지독한 스트레스로 탈모가 가속화중이던 히데요시에게 달이 두 개가 떴다고 놀림받는 장면이 나온다.[49]
- 고니시 유키나가
상인 집안의 아들로, 어렸을 적 류성룡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고 카톨릭 신앙을 가진 덕에 세스페데스의 복사 역할을 하며 조선에 입국한다.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가 한때 입신체비를 어깨너머로 배운 적 있어 아들에게 고기를 먹이면서 키웠고,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세스페데스와 함께 유성룡에게 집중적으로 단련받고 좋은 음식도 많이 먹어서 당시 일본인치고는 체구가 매우 큰 편이다.[50] 본래 역사대로라면 태합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조선을 침략하는 명을 받겠지만, 근육조선의 역사에서 일본은 전국시대를 평정하지 못하고 어줍잖은 과두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평범한 상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가 점점 험악해지는 와중에 살아남을 길을 찾던 히데요시가 고니시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문제는 다케다 가문에서 붙여준 감시역인 시종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아는 지인의 사정이라고 에둘러서 말한 것. 이 때문에 고니시는 히데요시 본인이 처한 상황이라고까지는 짐작하지 못해 그저 "무상의 행복은 없습니다." 라는 아리송한 말만을 남긴다. 히데요시는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조선 침공 후 능력을 인정받아 항복'을 계획하게 된다.
후일 다케다 가문이 간자 색출을 빌미로 부농들과 상인들의 재산을 무차별적으로 강탈하자 죽기 일보 직전의 고생 끝에 조선으로 망명한다. 과거 그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던 히데요시가 감옥에서 풀어준 뒤 통행증을 내주고 비상식량도 쥐어주는 배려를 해 준 덕분에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으며, 처음에는 빈털터리 신세였으나 소식을 알게 되어 찾아온 유성룡의 보증으로 신용을 얻어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율도상회에서 상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유성룡의 미주 개척을 돕고 아메리카 원주민 천주교 신자들을 지원하는 등 조선에서 알아주는 거상이 된 듯하다.
성인 고니시가 조선식 이름과 발음이 흡사하다 보니 조선인들에게는 주로 고 서방으로 불린다. 그때마다 고니시는 성이고 이름이 유키나가라고 정정해 주지만, 나중가면 그냥 포기했는지 그냥 고 씨로 성을 갈아버릴까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여기에서는 고니시의 지인인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다가 이후 후지와라 토키치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51] 다케다 가문에서 난데없이 조선의 영토인 규슈에 히데요시를 도독으로 임명해 조선에 어그로를 끄는데, 히데요시는 물론 후지와라 가문의 꼭두각시이자 버림패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다가 먹고살기 위해 다케다 정권 밑에 들어간 것이니, 다케다 가문 입장에서는 히데요시가 적의 가신 중 하나고 히데요시 입장에서 다케다는 원수다. 그렇다보니 가족[52]은 모조리 인질로 잡히고 자신 주변에는 첩자와 감시자만 그득한 신세라 유성룡에게 바둑을 두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리려 한다. 그러나 유성룡은 원 역사의 간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만을 생각해, 그를 극도로 경계하다가 '이미 정권을 꼭두각시처럼 거머쥔 상태이며 조선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버린다.[53]
결국 히데요시는 우연히 만난 고니시의 조언을 듣고 일단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뒤 조선에 항복해서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54] 하지만 조선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보겠다고 제 딴엔 민간인을 안전하게 살려준다는 것이 조선 입장에선 피난민 폭탄을 끼얹는 비열한 책략으로 받아들여져 시작부터 틀어져버린지 오래였고 규슈에서는 수성 성애자 유성룡과[55] 전장포로 조준사격을 하는 이순신에게 박살나버린다. 그 다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입과 머리를 최대한 놀려서 조선 본토를 강습하는 임무를 받으나[56] 이번에도 이미 조선에선 일본군 전체의 책략이 간파된지 오래였고 역시나 유성룡의 우주방어에 걸리자[57]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야반도주를 시도한다.철수하는 군대를 통솔하여 일본으로 귀환, 기존 다이묘 가문을 제압하여 자신이 일본 권력의 정점에 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귀환하는 중 이순신에게 걸려 사망한다.[58] 히데요시 본인 딴에는 이순신을 두려워해 평범한 세키부네에 타고 본인도 문관으로 위장하지만, 이순신은 배의 움직임을 관찰해 히데요시가 있다는 걸 간파한 지 오래였다. 결국 추격전 끝에 배가 충돌해 바다에 빠지고 갑주에 비단옷이 얽혀서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익사한다. 사후 시신은 이순신의 선박에 있던 미츠히데가 알아봐 건져냈지만 여러 장수의 수급과 함께 조정으로 진상되었고, 효수된 일본 장수들의 목과 함께 저잣거리에 걸리고 이후 부관참시가 기다리는 비참한 처지가 된다.
본래 역사에선 밑바닥 신분에서 태합 자리까지 날아오른 입지전적인 일생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걸물이자 동북아를 전란으로 몰고 간 원흉이라면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는 권력을 쥐기는커녕 다른 이의 끄나풀 신세가 되어 생존과 야망을 위해 발버둥 치지만 본인의 오판과 불행이 겹쳐 매 순간마다 최악의 결과를 내다가 결국 무엇 하나 이뤄내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거기에 본래 역사의 업보인지 원래 본인이 시전했던 억지스러운 요구를 혼자 다 당하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초록색 변을 보거나 성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버둥거리는 모습이 한 마리 구더기에 비유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고니시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무상의 행복은 없다"는 요지의 말을 듣는 등, 실장석 개그의 희생양이 되었다.[59]적당히 놀다가 세게 맞았다
- 오우치 요시시게
현 오우치 가문의 가주, 오우치 가문은 1부에서 조선에게 구원받은 이후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되는 은의 3할을 조선과 명나라에 바치고 있었는데, 그 보호비가 아까웠는지 히데요시와 손잡고 조선을 배신한다.[60] 그러나 조선의 압도적인 힘 앞에 일본이 처참하게 패배하고 본인은 조선을 배신한 죄로 사망, 오우치 가문은 유전적으로 멸종하고, 오다 노부히데가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오우치 가문의 가주를 잇게 된다.
- 다케다 신겐
일본의 옛 질서를 되돌리겠다며 세력을 모으는 세력가.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이상향으로 여기고 있어, 유서 깊은 가문들은 대접하고 신흥 세력을 억압한다. 이 때문에 신흥 세력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원래 전국시대의 승자들은 모조리 공격당하거나 암살당하거나 억압받고 있다. 이후 카츠요리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사망한다.
- 다케다 카츠요리
신겐의 아들이자 다케다 가문의 후계자. 아버지만큼의 능력이 없어 다른 명문가들과 함께 과두정에 가까운,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의 통치를 하고 있다. 거기에 유성룡의 활약으로 점차 안정되어가는 조선의 내부사정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전국시대 무장의 편협한 시선[61]을 가지고 있어 히데요시의 혈압을 한창 올려 놓는다. 결국 야욕을 드러내 조선을 침공했다가 이연이 친정한 1만 기병의 돌격에 그대로 짓밟혀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사나다 마사유키
다케다 24장의 일원. 주군인 카츠요리의 명을 따라 히데요시를 도와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선의 포로로 잡힌다. 이후 조선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있던 중 카츠요리가 자신의 석방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푸념한 뒤 조선측에 일본 본토의 정치상황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주군인 카츠요리에게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다케다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은 그대로인지라 조선의 임금 이연이 방계를 통한 다케다 가문의 존속을 약속해주기도 하였다.[62] 전후에는 옛 다케다 가문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본인보다 더 유명한 아들인 사나다 노부시게도 살짝 등장하는데 구금된 시마즈 가문과 유성룡의 열두 제자를 감시하고 있다가 소동으로 놓치고 마는 것으로 나온다. 마사노리 말로는 성실한 게 장점인 놈이라고.
- 후루타 오리베
일본의 하주도 침공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지휘관으로 등장하였지만 군략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문신(文臣)이였던지라 명목상의 지휘관이고 실제 지휘는 가토 기요마사가 담당하였다. 하주도 침공에 실패하고 히데요시가 두고 가버리는 바람에 조선에 포로로 잡혔는데 원 역사에서도 이름있는 다인(茶人)이였던지라 유성룡에게 솔잎차를 타주겠다고 나서기도 하였다.유성룡 : 얜 또 뭐라는 거냐, 아무튼 지휘관이니 가둬놓고 주상전하께 올려보내.이후 조선에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고 어디 써먹을 구석도 없었기에 고령으로 보내 도자기 장인 밑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이름난 다인이였던만큼 도자기 만드는 재능도 뛰어났는지 다른 도자기 장인들이 20년에 걸쳐 배우는 것을 5년만에 이수하고 스스로 유약을 개발해낼 정도로 대성하여 다테 마사무네가 새로운 수입원 창출수단으로 잠깐이나마 주목할 정도였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래 역사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최후의 승리자로 남은 것과 달리 다케다 가문의 집요한 견제를 받고 있다가 암살당한다. 주먹만한 떡이 목에 걸려 질식사했다고 언급으로만 등장했는데, 그 정도 크기의 떡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한 입에 먹을 이유가 없으므로 사실상 암살당한 후 질식사로 위장당한 것.
- 유성룡의 열두 제자
유성룡이 규슈 지방의 일본 가문을 복속시키기 위해 꾀를 내어 영입한, 각 가문의 12명. 이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63]가 대표격이며, 그 외에 타치바나 무네시게, 아리마 하루노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유성룡에게 집중적으로 교육받았으며, 최종 목표는 명의 지방 향시 합격이다. 나름 첩자 임무도 부여받은 듯하지만 입신체비로 구르느라 바쁜데다 조선이 오히려 이중간첩 작전으로 잘 써먹어버리고[64], 성장기에 잘 먹고 잘 운동한 덕분에 육체와 정신 모두 완벽하게 조선식으로 근육질이 된 인물들. 평균 키가 170cm에 달할 정도로 일본 기준으로 엄청난 거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문의 뜻에 따라 히데요시를 돕지만, 스승(유성룡)과 나라(조선)를 배신하는 일에 회의를 느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반정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화약고에서 자폭해 사망하고, 다른 제자들은 유폐되었던 시마즈 요시히사를 구해 조선으로 도주하지만 후쿠시마를 포함한 6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다. 이들은 이후 사육신과 생육신이라 불리며, 삼남 지방에 정착하여 생육신들이 사육신들의 사당을 관리하게 된다. 다만 이들의 사상 자체가 전국시대 일본의 삭막한 상무정신과 효율주의자 유성룡의 유학이 합쳐져 과격한 면이 있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유학자치고는 좀 심하다는 평가를 듣는 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자신의 사촌인 마사노리가 자폭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학은 흉악한 사상이라고 평하는 등 일본에서는 이들의 행동 때문에 유학자들을 보고 자폭도 불사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처럼 여기게 된 듯하다.
제자 중 한 명인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고란과 함께 조선의 북인기병을 이끌며 쇼군으로 임명된 다테 마사무네를 보좌하고 있는 중.
-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이순신에 의해 대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무인도에서 미역을 먹으며 버티다 부하들이 식량을 구하러 간 것을 배신했다고 착각하여 탈출한다.[65] 그렇게 흘러흘러 제주도까지 표류하고, 귤을 훔쳐먹다가 분노한 주민들에게 두들겨맞고 포로로 잡힌다.[66] 마침 수령관으로 있던 유운룡이 나름 호의랍시고 미역을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여줬는데, 와키자카 입장에서는 신물나게 먹었던 미역인지라 발광하다가 유운룡에게 철저히 근육당한다. 그리고는 보름 내내 미역국에 꽁보리밥만 먹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고. 포로 생활 끝에 풀려났는데 가문이 풍비박산 나 있어서, 먹고살기 위해 미역 장수가 되어 버렸다.[67] 그런데 납품을 위해 안동에 들렀다가 하필이면 유운룡과 만나고, 유운룡이 와키자카의 미역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는 바람에[68] 결국 대대손손 미역장수를 하게 될 운명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아예 이름이 아니라 미역이라고 부른다.
- 가토 기요마사
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올라가던 중, 서산대사를 만나 회유를 시도하지만 승병들의 함정이였고 기습적인 산탄 공격으로 한쪽 뺨이 날아가는 수난을 겪은 뒤 산 주변의 지리에 빠삭한 승병들의 게릴라 전술에 농락당한다. 이후 임차손과의 일기토 중 멀리서 화살을 날리며 견제하고 근접해서는 노획한 총을 사용하지만 튼튼한 갑옷 때문에 통하지 않자 도망치다 편곤 투척에 빈사상태에 빠지고 장승 부수기로 마무리당했다.
- 도도 다카토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진주성을 공략하고 있었으나, 히데요시가 야반도주한 후 조선군에 항복한다. 입신체비의 개념도 없을 당시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180cm에 달하는, 옛날에 죽었던 원균과 비교될 만큼 커다란 거한으로 살아남기 위해 거리낌없이 조선에 항복하고 어떻게든 공적을 세우려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다소 기회주의적인 성격이다.[69] 유성룡도 히데요시에게 이미 이야기는 들었지만 차라리 히데요시가 더 믿음직할 것이라 평했다. 승전 후 수많은 일본군 포로를 통제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써먹힐 계획이였지만, 이후 구키 요시타카와 마찬가지로 다테 마사무네 막부의 유력자로 등장하여 일본 내 주요 항구의 사용권을 획득해 부를 쌓고 있는 걸 보면 어찌어찌 잘 넘어가서 잘 살고 있는 듯하다.
- 구키 요시타카
원 역사에서처럼 해적 두령이였다가 일본 수군 지휘관으로 발탁된 장수. 원 역사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중용했던 노부나가의 밑에서 세력을 키워 다이묘들도 무시못할 세력을 구축했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노부나가가 일찍 사망하여 세력을 키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고, 일본 수군 지휘관이 된 이후에도 자신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언행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조선 수군과의 전투에서 배신하여 이순신에게 항복한 뒤 이 사실을 숨긴 채 일본군 진영으로 돌아갔으며, 히데요시의 탈출계획을 이순신에게 알려주어 히데요시를 수장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에 협력한 보상으로 다테 마사무네 막부의 유력자가 되었으며, 일본 내 주요 항구의 사용권을 획득하고 조선에서 양도받은 선박과 축적된 기술을 토대로 원양항해용 선박을 건조하여 대양도(대만)와의 직접 무역을 시작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상태.[70]
- 야마가타 마사카게
원래 키가 작은 일본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작은 키인지라 난쟁이라 불리는 일본의 장수. 동래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고 주군인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공을 세우지 못하면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전긍긍해했다.[71] 전형적인 일본 지배층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구키 요시타카와 그의 수하들을 죽는 게 당연한 소모품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구키 요시타카의 반감을 사서 배신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임해도감의 함정에 제대로 낚여 사전에 설치된 시한식 폭탄에 건물째 날아가 사망하였다.
- 우에스기 겐신
1부 무렵 우에스기 가문과 조선 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것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에게 있어 나름 중요한 동맹이니만큼 허준이 파견되어 그의 건강관리를 했는데, 짠 음식이나 술 먹지 말고 고기 섭취 좀 하라는 조언을 하나도 안 듣다가 뒷간에서 힘주던 중에 고혈압으로 죽고 만다. 허준 탓이 아닌 말 안 들은 겐신의 탓이라는 게 입증되었기에[72] 그의 사후에도 조선-우에스기 우호관계는 깨지지 않고 계속 유지 중이다.
조선이 일본 정벌에 나서면서 우에스기 가문을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지만 사실상 조선의 앞잡이인 우에스기 가문이 쇼군이 되면 일본 내에서 반발이 엄청날 것을 우려해 쇼군이 되지 못하였고, 그 대신 다테 마사무네를 쇼군에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우에스기 가문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때문에 우에스기 가문에게 있어 다테 마사무네는 허수아비 그 자체인지라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조차도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하지만 무늬만 쇼군인 다테 마사무네는 속만 끓이고 있는 상태이다.
- 다테 마사무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내정 능력은 일품이지만 군사적 능력은 잼병인 다이묘. 이 때문에 유성룡의 제자들에게 머저리 취급을 받는 걸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후일 조선의 일본 정벌로 아시카가 가문이 쇼군에서 물러난 뒤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게 은자 1천만 냥의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되어[73] 이를 변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친조선파 다이묘는 물론 북인 기병들보다 못한 사실상 바지사장 취급으로,[74] 이와미 은광을 포함한 알짜배기 수입원은 조선이나 친조선파 다이묘에게 빼앗기고, 홋카이도의 항구 이용권을 판매하지만[75] 이 항구는 해류를 타고 미주로 가기만 하는 일방통행 항구라 수익이 나지 않는 등 9백만 냥이나 되는 채무를 갚을 길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는 내정 능력에 있어서 전국시대 최고로 꼽히는 인물로, 유성룡의 제자들은 전쟁을 못 한다고 머저리 취급을 했지만 유성룡의 평에 따르면 전쟁 말고는 다 잘하는 놈이 다테 마사무네다. 심지어 전쟁 못 한다는 것도 마냥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게, 무재가 없어서 쓸데없이 조선에 반항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런 뛰어난 내정 재능을 십분 살려 원 역사보다 10년 빠른 도쿄 간척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고 있다.[76] 사실 일본 특산품인 구리나 도자기 수출 등을 진행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조선에서 갑자기 거대한 구리광산을 개발한다던가 도자기 양산 기술을 개발한다던가 하면 허사가 될 테니[77] 조선인이라면 안 먹는 사람이 없는 쌀을 주력 상품으로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간척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북경 재건을 위해 식량을 지원해달라는 명나라의 요청에 매년 1백만석(약 13만톤)의 쌀을 바치겠다고 나서기도 하였으며,[78] 경신대기근 당시에는 다테의 후손 쇼군이 조선과의 협약으로 매년 1천만 석의 쌀을 제공하는 여력을 보이기도 하였다.[79]
원 역사에서처럼 음식에 관심이 많아서 1부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틀초밥을 만들기도 쉽고 먹기도 편한 음식으로 개량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였다.[80]
3.4. 유럽
- 펠리페 2세
당대 스페인의 국왕. 다혈질적인 가톨릭 신자이자 지독한 일 중독자로, 원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절단의 숙소 배정까지 자기가 직접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서 유성룡에게 일먼지진드기라는 말을 듣는다. 원래 펠리페 2세 자체가 일을 열심히 하고 능력도 있지만 너무 사소한 것까지 자신이 직접 나서는 바람에 신하들이 불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 왕이었다. 동방 선교에 큰 공이 있다지만 고작 초임 신부에 불과한 세스페데스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조선의 문화를 파악하고,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제사 등 유교적 예식을 포용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다음에 만난 유럽의 군주인 앙리 3세가 여러 모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확실히 대조적인 모습.
원 역사대로 무적함대가 영국 사략선단의 화공에 몰살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전에 조선 사절단들에게 구입한 신형 비격진천뢰 덕분에 졌지만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싸움으로 본래 당한 피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줄어들었다. 이후 작이 진행되는 중에 노환으로 사망하고 펠리페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 펠리페 3세
선왕의 사망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인간. 대표적인 암군으로 불리는 무능한 인물로, 그가 처음 언급되는 화의 제목부터가 '호부견자'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친과 함께 정치를 행한 대신들을 모조리 리스본으로 쫓아내서 분조를 만들고, 새파란 애송이들로 내각을 구성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협정 조항의 모호함을 이용해 예상보다 넓은 지역에 진출한 조선측에 항의하기도 하였지만,[81] 다른 유럽 국가들과 연합해 조선을 압박하는 선택지 대신 조선이 차지한 휴스턴을 기점으로 영토를 다시 정하는 협정을 맺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유성룡이 평하기를 펠리페 2세였다면 잠시 자존심을 거두고 전자를 택했을 것이라고 한다.[82]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직접 등장은 하지 않고 언급만 된다. 예전에 선교를 위해 조선에 왔었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사대부들한테 불교보단 낫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 우상 숭배라 비난하다 분노한 유생들에 의해 대역기봉에 묶여 역기 대용으로 쓰이다가 추방되었고, 조정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가톨릭 선교를 금지하게 된다.
-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성로마제국 사절단과 함께 조선에 방문한 젊은 신부. 조선에 선교를 할 방법을 찾지만, 기존의 선교 방법은 문화적, 사회적으로 발달된 조선에 소용이 없어[83] 종교적 교리보다 학술적인 접근으로 선교를 시도해 보려 한다. 그리고 성경조차도 입신체비로 해석하는 조선의 근육적 풍토 때문에 입신체비를 배우며 죽을 고생을 한다. 육체적 자질 자체는 충분히 뛰어난 편으로, 더 노력하면 진양근(3대 1000근)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평가받는다. 게다가 그의 스승은 입신체비 마스터가 되어가는 류성룡에, 분절 개념의 창시자인 이이, 상체의 거장인 이황의 제자, 하체의 거장인 조식의 사위[84]다. 뛰어난 자질에 스승도 완벽해 입신체비의 성과가 매우 뛰어난 편. 보선의 비리를 밝혀내려던 유성룡의 계획에 휘말려 명에서 단련된 몸을 십분 살려 몸소 선원들의 일을 돕는 식으로 카톨릭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이게 성공적으로 먹혀 예상수치의 몇 배나 되는 200명 가량의 신자를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돌아와 성균관에서 유학하던 중 스페인의 남경 공격으로 서역인에 대한 편견이 심해진 유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성경 내용을 거짓이라 매도하는 유생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5시간동안 십자버티기를 하다 기절했는데도 몸에 치명적인 무리가 없는 기적을 행하고 만다.예수님이 봉 무게 들어준다는 본 작품 독자스러운 리플이 해당 에피소드에 달렸다본인은 고작 몇십 분 가량 매달리다 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기겁하였고 이후 그에게 시비를 거는 유생이 없어졌다고 한다.
스페인에 돌아가서는 동방에서 효과를 본 '입신체비를 받아들이고 신도들과 함께 활동하는 선교 방식'을 제안하지만, 입신체비와 제사 등을 받아들이는 동방 선교 방식을 제안하지만, 중간에 모스구즈만을 근육해 버리는 바람에 스캔들에 휩싸이고 결국 자신의 선교 방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플로리다로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자신이 제안한 선교 방식으로 큰 효과를 보지만[85] 원주민을 노예 취급하고 병을 옮기는 스페인 개척단의 진출을 보고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의 땅인 서쪽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기적[86]을 행하고 6년의 여정 끝에 유성룡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그 후에는 유성룡에게 그들을 위한 성당을 건립해줄 것을 부탁했고, 유성룡은 이를 받아들여 유럽에서 받아온 성 베드로 성당의 도면을 바탕으로 아예 유교와 불교, 천주교를 모두 포용하는 만천서원을 설계했다. 다만 세스페데스를 따라 천주교에 귀의한 신도들은 그를 보고 3대 1천근을 신부의 기본소양으로 여겨서, 세스페데스를 돕기 위해 미주로 건너온 신부들은 입신체비로 구르며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보내달라며주님을 찾는다.[87] 하지만 세스페데스의 성과 덕에 교황조차도 입신체비를 수용하여 동방선교의 기본지침으로 육체단련을 지시한 만큼, 조선에 온 이상 빠져나갈 곳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이 때 교황청에서는 스페인의 교권침탈을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연관이 적은 조선에 2개 주교구를 신설하는데, 이 중 미주를 관리하는 후성 주교구의 주교가 된다. 주교는 신부 중에서도 상위 1~2%만 올라갈 수 있는 고위직으로, 세스페데스가 7년만에 1만 명의 신도를 만든 공로를 인정한 것.[88]
후에 김성원이 현대로 돌아온 이후 조사해본 결과, 이후 장수하면서 말년에는 추기경까지 올라갔으며 교황청에서는 선교자의 수호성인으로 시성했다.[89] 그러나 그의 선교로 개종한 조선교구와 미주교구의 신자들이 반대하고 이후 다른근육적기적 사례가 계속 올라오자[90], 결국 교황청이 항복하고 1960년에 '근육과 입신체비사 그리고 선교자의 수호성인'으로 인정하였다. 수양대군에서 돌아오기 전의 근육꼰대 상태였던 1부 주인공 최영직도 입신체비장에 수양팔근도 옆에 세스페데스의 성화를 모셔놓은 걸 봐선 바뀐 역사의 대한 공화국에서 존경받는 성인이 된 듯 하다. 입신체비가 나라 그 자체인 조선의 풍속을 보면 거의 조선의 수호성인 수준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 티코 브라헤
조선에 방문한 유럽 사절단의 일원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원 역사보다 아득히 발전된 천리경과 오스만의 학문과 융합되어 세계 최고 수준인 조선의 천문학을 접하고 몇날며칠을 화장실도 안 가고 천체 관측에만 매달리는 기행을 선보여 보다 못한 조선 관원들이 이러다 병 난다며 강제로 화장실로 보내기도 하였다.[91] 귀국할 때 고배율 천리경을 선물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유성룡의 독백은 덤. 조선 사절단이 신성로마제국을 방문하였을 때 브라헤가 유럽의 천문학과 점성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 마테오 리치
세스페데스 신부의 후임으로 명에 파견된 신부. 유성룡의 입신체비적 감상으로는 육체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세스페데스에 비교하면 아주 평범한 수준이다. 문제는 세스페데스가 입신체비로 단련된 몸을 불살라 선원들과 함께 일하는 선교방식을 취했고, 이 때문에 명 선원들에게 '서양 도사는 몸소 일을 돕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남성인 마테오 리치가 선원들의 일을 도울 리가 만무하니 크게 고생을 하게 된다. 후일 로베르트와 베르나르가 이끄는 선단이 남경을 침공하자 유성룡과 함께 이를 저지하고 퇴각하는 로베르트, 베르나르 선단에 합류해 고생만 하다가 성과 없이 귀국하게 된다.
- 로베르토 우리엘 레예스, 베르나르 루이 발레타 ★
모로족 해적에 의해 선단이 피해를 입자 분노한 펠리페 2세에 의해 파견된 원정대의 사령관과 부사령관. 로베르토는 세스페데스가 매우 싫어하는 이단심문관 모스구즈만 레예스의 친척이며, 베르나르는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조카다. 둘 다 몰타 기사단 출신으로, 갑옷을 입은 상태로 헤엄을 치고 적 함선에 올라타 무쌍을 벌이며 어지간한 도감군 장교를 상대로도 우세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스펙에 굳건하면서도 광신적인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스페인산 인간 백정이다. 이슬람에겐 일체 자비가 없으나 조선에 대해서는 잘못 전해져 온 소식만 듣고 카톨릭에 귀의한 형제의 나라라 멋대로 착각 중. 조선군이 거점을 공격한 모로족 호족들의 잔당을 추적하던 중 돌연 난입해 명령대로 충실하게 모로 잔당의 뚝배기를 부쉈으나 몇 가지 오해가 겹치는 바람에 해적과 연합하여 유정 도독이 지휘하는 보선을 탈취, 남경을 공격하는 대형 사고를 저지르고 만다.
세스페데스가 입신체비 덕분에 선원들의 일을 도우며 마음을 휘어잡았는데 후임인 마테오 리치는 그렇지 못했고, 선원들은 이걸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원정대는 이걸 천주교 박해라고 생각하고, 명나라도 조국인 스페인같이 당연히 봉건제일 것이라 멋대로 추측한 뒤, 남중국의 영주를 응징하고 북중국의 황제와 협상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 하지만 남경에 있던 마테오 리치와 유성룡에 의해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자[92]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마테오 리치와 가톨릭에 귀의한 명나라 수부를 데리고 도망친다. 약탈한 은이나 무거운 대포도 내버릴 정도로 황급히 퇴각했으나, 돌아가는 길에 조선 수군에게 걸리는 바람에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며 분전하지만 허벅지 근육을 내준 고란의 도끼에 팔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고,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으려는 조선 수군의 화력투사를 버틴 끝에 돛을 태워 발을 묶고 나서 겨우 도주에 성공한다. 결국 함선은 20척이 출발해서 3척만 돌아오고, 지휘관인 로베르토는 한 팔이 잘리고, 명을 공격하면서 동방 선교 가능성이 낮아지고, 지역 강대국인 조선과의 홍삼 거래도 한동안 중지되었으니 스페인은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노한 펠리페 2세는 이 둘과 더불어 모스구즈만 레예타까지 모조리 파면해버리고, 베르나르는 후일 병사,포로로 잡혔던 위하 병사들은 대부분 북원 지역으로 노예로 팔려가는식으로 간접적으로 끔살당한다.
로베르토가 고란에게 잘린 팔은 고란이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는데, 조선에서 우호의 뜻으로 이 팔을 금은보화로 장식해 인피니티 건틀릿처럼 만들어 스페인으로 돌려보낸다. 로베르토도 동방에서는 자신이 오해해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고, 팔이 잘린 후 느낀 점이 많았는지 조선에 딱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숙부 모스구즈만의 만행에 골치를 앓는 중이다.
- 모스구즈만 레예스 ★
베르세르크의 모즈구스를 패러디한 인물. 대주교이자 이단심문관으로 사람을 땔감 취급하기를 즐겨하여, 정상적인 사제인 세스페데스와 사이가 좋지 않다. 조카인 로베르토가 조선 외교에서 큰 실례를 저지르자 함께 대주교 직에서 파면되고 성무 집행이 정지되어 이름만 성직자로 남는다. 뒤룩뒤룩 살찌고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조선에서의 사건 때문에 좌천되자 원한을 품고 대조선 선교의 첨병인 세스페데스를 납치하고 고문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3대 900근을 달성한 세스페데스가 고문틀을 스스로 풀고[93] 탈출해 버린다. 세스페데스는 '지금이라도 그냥 보내주면 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며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음에도 모즈구스만은 도저히 말을 들어먹으려 하질 않았고, 결국 세스페데스는 밖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증원이 오고 있다고 생각해[94] 역차 던지기로 모즈구스만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져 넘어뜨리고 그 틈에 탈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조준이 빗나가 나무기둥에 금이 갈 정도로 세차게 얼굴을 박은 모스구즈만은 이빨이 9개나 나가고 얼굴이 뭉개진 폐인이 된다.
- 제로니모
스페인의 소드마스터 '제로니모 산체스 데 까란사'. 스페인이 경진만란의 일을 사과하고 전쟁에서 이득을 거두고자 조선의 대 일본 전쟁에 함대를 보내 참여할 때 사신단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검술이나 전략 대신 압도적인 힘으로 짓눌러버리는 조선의 능력을 보고, 조선에서 동방의 검술을 배우겠다고 다짐한다. 사실상 조선의 무인들을 꺾기 전까진 조선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며 조선의 임금 이연은 그를 통해 서양의 무술을 습득할 기회로 여겨 기꺼이 환영하였다.
이후 칼에 맞은 상처를 치료해본 경험과 입신체비의 근육에 대한 지식을 접목하여 자상치료 등 외과분야에도 매진중인 것으로 언급되었다. 자상에 관련해서는 허준이 그가 있었으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 거라며 아쉬워했을 정도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듯하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2부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이지만 조선의 유럽 사절단이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그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1부 시점에서 유럽에 전해진 조선의 입신체비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로 원 역사의 작품보다 좀 더 근육의 묘사가 세밀해졌다고 한다.[95] 원 역사에서는 설계만 해놓고 실제로 만들지 않았던 다 빈치의 전차가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실제 제작까지 되었지만 수동펌프 등의 장치를 달아놔도 근육질의 조선인이 아니면 움직일 엄두조차 못내는 물건인지라 메디치 가문에서 보관만 하고 있었던 상태. 조선 사절단이 이 물건을 실제로 움직이는데 성공했지만 구조적 결함[96]때문에 움직였다는데에 의의를 두고 잊혀진 물건이 되었다.
- 앙리 3세, 앙리 4세
앙리 3세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으로,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자신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조선의 사절단을 초청한다. 현대의 파리도 관광객들에게 충격을 준다고는 하지만, 씻으면 병균이 들어온다며 절대 씻지 않고, 정상적인 식재료인 토마토나 감자 등을 독이 있다며 먹지 않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에는 현대보다 비교적 비위생적인 환경인 조선인들마저 충격을 느낀다. 게다가 앙리 3세는 내전 중인 나라에서 위신을 세우겠다며 사치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냥은 별다른 목적 없이 육식동물은 쫒아내고 순한 초식동물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식이라 육식동물들이 먹이가 없어 민가를 습격할 게 뻔하고, 심지어 백성의 소와 말을 징발해 사냥한다. 또한 강가에 별장을 짓고, 주변 사람들을 뱃놀이에 동원하기까지 한다. 보다못한 유운룡이 평소에 먹지 않던 식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먹여서 마음을 바꿔보기 위해 센 강의 잡어를 재료로 부야베스를 만들어 대접했지만 맛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기름이 부족하다고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도 인정한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유운룡에게 프랑스의 요리를 배워 가라고 명했는데, 기름에 절은 레시피를 강요하고 담백한 조선식 레시피는 한사코 인정하질 않는다. 결국 유성룡이 아예 작정하고 엄청난 기름을 넣은 요리를 대접하자 이것이 진미라고 걸신들린 듯 흡입하는 추태를 보인다.[97]
그런데 이때 본인의 군대가 대패를 하고[98] 귀족과 민초가 손을 잡고 몰려온다는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한 반응을 보인다. 이미 앙리 3세의 추태를 보고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던 조선 사신단은 유성룡이 미리 준비한 재료들로 지게를 급조해 짐을 챙겨 신속하게 파리에서 탈출하는데, 어느샌가 은근슬쩍 조선 사신단 사이에 끼어들어서 같이 도망치고 있었다. 왕이면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것도 모자라 반란군 수장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에 어처구니를 잃은 유성룡이 쌍욕만 안 했을 뿐이지 제정신이냐며 극언을 퍼붓기까지 한다.[99] 게다가 중간에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푸대접하는 꼴을 보인다. 조선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걸주만도 못한 혼군이라는, 한자문화권에서 군주에게 내릴 수 있는 최악의 악평을 남긴다. 심지어 걸주도 이놈이랑 비교하면 성군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결국 폐위뒤에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독살당한다.
후대 왕인 앙리 4세는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는 성군으로, 그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조선 사절단이 프랑스에서 도망쳐야 했다는 외교상의 실책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이고, 그 실책마저도 사절단에 새로운 가축을 선물하며 만회한다.
- 마뉘엘 ★
프랑스의 귀족으로 앙리 3세와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어 유성룡과 유운룡이 독한 마음을 먹고 만든 혈관파괴 칼로리폭탄 요리의 시식 담당으로 등장한다. 최초의 츄러스와 마요네즈를 입에 대는 순간 눈이 돌아가 모조리 흡입히고 마요네즈를 그릇까지 핥아먹는 격한 반응을 보이고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특히 마요네즈의 맛에 홀린 듯한 반응을 보이며 이 소스의 이름에 최초로 맛본 자신의 이름을 넣어달라고 애원하는데 유성룡은 최초의 마요네즈를 맛본 사람의 이름이 마로 시작한다는 운명의 장난에 그의 이름 중 마를 넣어 마요네즈라 이름을 붙여준다.
- 식스토 5세
조선 사절단이 유럽을 방문할 당시의 교황. 유성룡이 현대인이던 시절에 들은 평가는 심시티를 쥐어주면 평생 매달릴 정도의 건축 덕후로 재위기간 중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한 각종 건축물의 건설사업에 매진하였으며, 유성룡에게 옛 베드로 성당의 설계도를 제공하여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미주 후성 지역에 만천서원 건설이 시작되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정당방위라고는 해도 모스구즈만을 근육해서 불구로 만드는 사고를 치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 세스페데스가 주장한 육체적 단련을 통한 선교방식을 입증하라며 처벌 겸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 프랜시스 드레이크
칼레 해전 당시 영국 해군의 지휘관. 원 역사대로 화공을 이용해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약탈을 위해 스페인 함대에 접근하다 스페인이 조선 사절단에게서 구입한 신형 비격진천뢰 때문에 오히려 함대 절반을 날려먹는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부하를 먼저 보내 살 수 있었지만, 동료 제독인 존 호킨스는 먼저 접근하다 비격진천뢰에 폭사하고 만다.
이후 프랜시스 드레이크 혼자 해적질을 하는데, 백병전을 봉쇄하는 비격진천뢰 탓에 스페인을 대상으로 하는 해적질에서 수익이 나지 않자[100] 차라리 폴리네시아인들을 약탈하기 위해 대서양에서 남미를 지나 태평양으로 건너가려 한다. 그런데 이 무모한 여정에서 살아남은 선단에 이질이 퍼지고,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호주 근처에서 폴리네시아와 조선 관리들에게 발견되어[101] 구출된다. 응급처치로 소금물을 됫박으로 입에다 퍼붓는 경구수액 요법으로 호되게 고생하지만 일단 탈수에서 벗어나며 목숨을 건지고는,[102] 마사이 호주 개척단의 의뢰를 받아 바르바리 해적을 사냥해 호주에 팔아넘기는 노예사냥꾼 일을 맡게 된다. 이후 첫 전투로 스페인 선단을 구해주게 되는데 구해준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면 경쟁자가 생겨 이익이 줄어들 우려가 있어 사실을 숨기고, 우리 모두 같은 주님의 종이니 구해주었다고 하자 스페인 선단에서는 지랄한다!라는 반응이 나왔고 이후 유럽에선 드레이크가 미쳤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103] 그리고 호주에서 목화가 말 그대로 지천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운송비를 포함해도 호주의 면직물이 영국의 고작 1/8, 운송비를 감안해도 3할도 되지 않을 정도로 헐값이라는 계산이 서자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고해 동인도회사의 면직물 무역을 본래 역사보다 100년 빠르게 시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면직물 무역의 나비효과로 유럽 각 국의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104] 이 때 바르바리 해적들을 털기 위한 선원들을 모집하려고 모집한 계약서 내용이 "바르바리 해적을 죽이고 사로잡는 위험한 여정, 성과급 제도의 적은 임금, 몇 달간 지속되는 혹서, 끊임없는 전투,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 성공 시 영예와 부를 얻을 수 있음"이다.
2년의 기간동안 면직물 무역에 심혈을 기울여 호주 무역의 총책임자로 영전하였고 바르바리 해적의 포획은 후임에게 맡겼으나 후임들이 메카를 공격해 무굴 제국인을 포함한 순례자들을 납치하는 대형사고를 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이순신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생존본능이 경보를 울려패왕색 패기를 알아채다니 제법이군반항은 꿈도 못 꾸고 순순히 협조하며 반발하는 부하들을 제어하는 모습을 보였다.[105]
달빛 하나 없는 한밤중에 등화관제를 내려 횃불 하나만 보이는 캐번디시 함대를 정교한 포격과 일사불란한 기동으로 처바른 이순신의 함대를 보고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본국에서 해군 지휘관들과 토론을 나눴지만 소득이 없어 조선수군의 훈련을 견학하기 위한 군관을 보내는 걸로 결론 내었다.
여담으로 목화 무역을 하면서 마사이족과 자주 일하다보니 많이 친해져서 농담을 나누기도 하였고, 현대 시점에서는 마사이족의 후손이 15대째 호주에서 운영하는 면직물 가게의 이름이 드레이크와 사고뭉치들이였다.
-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의 여왕이자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고용주 겸 주군, 원 역사와는 달리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비격진천뢰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공멸에 가까운 결과가 나와 국운이 서서히 기울어 걱정하는 와중에, 드레이크의 선단이 바르바리 해적을 털면서 스페인 무역선단을 구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드레이크가 정말로 미친거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드레이크 본인으로부터 호주와의 무역에 관한 보고를 듣자마자 골칫거리였던 가톨릭교도들을 영국 밖으로 보낼 겸 외교적[106]+경제적 이익[107]을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지금 당장 국새 가져와하는 모습을 보면 원 역사에서처럼 유능한 군주인 듯 하다.
이후 조선-스페인 동맹 10주년 기념 승자기 세트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 토머스 캐번디시
드레이크의 후배 제독 중 하나. 막나가는 성격으로 드레이크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까댈 정도로 생각이 없는 놈인 듯 하다. 솔로몬은 원래 바르바리 해적만을 노예로 요구했으나 캐번디시는 메카 순례객들을 습격하여 노예로 팔아치운다.[108] 그리고 이렇게 팔린 노예들 중에는 당대 강국 중 하나인 무굴 제국의 인물도 있었고, 심지어 당시 순례객들은 먼 여행을 감당할 재력이 있는 중요 인물들이 많아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메카 습격과 사기극으로 번 돈을 가지고 유럽으로 도망치기 위해 모리셔스에 기항한다. 캐번디시 본인도 당연히 어느 정도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최대한의 경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 초승달만 뜬 어두운 밤에 횃불 불빛을 표적으로 기습 정밀 사격을 가하는 이순신이다. 결국 비슷한 수의 함대 대전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붙잡혀 교수척장분지형[109]을 받은 다음 목은 무굴 제국으로 보내진다. 여담으로 이때 같이 생포된 해적들은 교수형에 쳐하려고 했는데 저항하다가 정 안 되면 무굴제국을 통해 메카에 팔아버리면 그만 이라는 말에 다들 앞 다투어 교수형을 받아들인다.[110]
- 클레멘스 8세
식스토 5세가 사망한 뒤 선출된 교황. 스페인의 교권침해에 대비하여 조선에 2개의 주교구를 설립하고, 미주의 후성 주교구 주교로 세르페데스를 임명한다. 또한 최소한 조선과 그 속령에 근무하는 성직자들은 육체단련을 필수로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며 주교구를 보좌할 젊고 체격좋은 신임 사제들을 서품하여 조선으로 보내 5년여 간의 육체단련을 받고 한양 주교구와 후성 주교구를 보좌하기로 선포한다. 이게 계기로 교황청에도 입신체비가 퍼지고 이를 바탕으로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압박에 저항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유성룡의 승자기 명품화 전략에 따라 조선-스페인 동맹 10주년 기념 승자기 세트를 증정받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드레이크로부터 전해 들은 캐번디시를 토벌한 이순신의 일화를 동방의 해룡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쓰던 중 승자기의 아름다움에 감복해 대규모 연극으로 고쳐쓰고 있다고 한다.
3.5. 중동/남아시아/아프리카
- 아론 ★
솔로몬 제국의 주요 등장인물.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연회에 사절로 등장한 것을 시초로 솔로몬 제국의 실태를 조선에 알리며, 이는 조선이 본격적으로 호주를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로는 호주 개척 사업의 솔로몬 제국 대표로 활동한다.
-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황제로, 조선과는 과거부터 꾸준히 교류하고 있었다. 정신나간 영국 해적 캐번디시가 메카를 습격하자 격노, 조선에 그 실태를 알리고 해적들을 토벌할 것을 요구한다.
3.6. 폴리네시아
- 노이네
폴리네시아 출신 조선의 관료. 첫 등장은 진주에 출장 가는 유성룡의 보좌직이었으며, 그후 한동안 언급이 없다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조선의 승전연에서 신농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신농도 선단의 지휘관으로서 활동하던 중 드레이크의 선단이 이질에 걸려 태평양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경구수액 요법 비슷하게 소금물을 왕창 먹여서 살려내기도 하였다.
- 강덕만
조선에 복속한 하와이 출신의 폴리네시아인, 본래 이름은 카웨라이지만 조선에 복속하면서 조선식 이름인 강덕만을 칭하고 있다. 유성룡의 사막배[111] 설계 보완에 기여하였으며, 적대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습격에 아무런 방어구도 갖추지 않은 근육빨+지방빨의 맨몸으로 토마호크 투척을 살짝 아픈 정도로 받아내고 작살 투척으로 습격자들을 학살할 정도의 무력을 갖추었다.
이후 입신체비에 정진, 하와이에 화산이 터져 지반이 흔들리고 마우이의 거석이 기울자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원래대로라면 마우이 거석을 옮긴 자가 하와이의 왕이 될 것이었으나, 동료들과 함께했기에 타협해 본인 및 함께 거석을 움직인 동료 4인, 그 이후 도전한 6명, 일곱 섬의 추장들이 함께하는 18인의 의회를 설립한다.[112]
3.7. 아메리카
- 구름 낀 산
아파치-코만치 부족 연합에서 추대된 대전사. 단독으로 큰 곰을 사냥할 무력을 갖추고 있어 대전사로 추대되었으며 유성룡의 개척단에 대항하기 위해 나섰으나 개척단의 정당한 명분[113]과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시하여[114] 명분적으로는 만족하였으나 얼핏 보면 자신보다 왜소한 유성룡을 못 미더워하던 참에 팔씨름을 제안받았고, 50을 넘은 나이에도 엄청난 근력을 발휘하는 유성룡에게 패배하여 대전사의 직책을 유성룡에게 넘기고 복속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넘겨받은 대전사의 직책은 인근 부족에게도 아주 유명한 덕에 대전사의 상징[115]을 본 부족들이 충돌없이 순순히 복속을 청하는 등 개척단에게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덤. 이후 조선에 와서 원래 이름에서 딴 운성산(雲盛山)이란 이름을 받고 율곡 이이 밑에서 입신체비를 배우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3.8. 호주
- 녹타조
호주 개척단이 만난 짐승들. 건기로 강이 마르자 개척단이 일궈놓은 농작물을 탐내어 대규모 무리를 이뤄 등장했다. 강인한 털과 내장을 파열시키는 무시무시한 발톱, 그리고 빠른 속도와 교활함에 더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아서[116] 떼로 몰려들어 농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조선 개척단은 이 짐승들을 막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처음에는 수렵에 이골이 난 몽골 출신 기병 탐험대가 나섰지만 에뮤의 기관총도 버텨내는 강인한 털과, 노리고 쏘기에는 너무 작은 머리 때문에 제대로 사냥하지 못했고 오히려 별동대에 의해 마을이 털리는 굴욕을 맞는다. 그 이후 유성룡의 아들 유여가 판금 갑옷을 입고 에뮤를 근육해버린다는 아이디어를 내는데, 이것이 성공해 에뮤들도 비로소 인간 마을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에뮤는 맛도 좋고, 껍질에 지방이 좀 많은 걸 빼면 입신체비적으로도 충분하며, 가슴팍의 기름샘은 선크림 대용으로 쓰이는 등 여러 효능이 입증되어 조선에서까지 사육되는 인기 가축이 되었다.
하지만 유성룡은 자신의 아들이 에뮤를 무식하게 근육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는 친구 수양대군 최영직에 대한 분노 게이지를 쌓아 버렸다.
4. 외전(근현대+일부 조선 후기)
1부에서의 최영직과 2부에서의 김성원의 활약으로 인해 변해버린 근현대사의 인물들과 조선 후기 인물4.1. 조선 후기
4.1.1. 조선
- 송시열 : 태량붕탁(太梁崩坼)큰(太) 대들보(梁)를 무너트리고(崩) 터트린다(坼) 송시열. 첫 언급은 1부 외전에서 전설적인 내수린꾼으로 언급되었으나, 자세한 내용이 2부 외전에서 드러났다. 부모님은 원 역사와 동일한 두가지 태몽을 겪는데, 근육으로 물들어버린 이 조선에서 그 태몽의 해석이 치명적으로 어긋나버리게 된다. 거대한 체격의 노인이 비슷한 체격의 여러 제자들과 같이 나타나서 아이를 맡기는 꿈과, 순백의 달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이었으나, 이를 각각 "수양자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귀한 아이를 맡겨주시는구나"와 "순백의 구슬이라니, 이는 최고의 육질이로다!"라며 입신체비에서 큰 뜻을 이룰 아이가 태어날 꿈이라고 완전히 엉뚱한 해석을 해 버린 것.[117] 아이가 자라며 힘이 강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옹헌의 동료인 허균에게 조언을 청하는데, 허균은 송시열의 체격(+친구를 내수린 기술로 하늘 높이 날려보내는 장면)을 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유성룡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면서도 호주로 떠나기 전 소개장을 써서 백사 이항복에게 맡긴다. 농담을 좋아하는 이항복 밑에서 배운만큼 성격이 많이 유해졌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의로움을 품고 있었고, 관례를 올릴 나이가 되자 한양으로 돌아오려 할 때 우연히 근육만 키우고 바른 심성을 기르지 못한 유학자들을 마주치면서 이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고 여기고 부모님에게 허가를 받아 25세까지 내수린꾼 태량으로 내수린 극단에 들어가 전국의 근적(筋敵)[118]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내수린 극단에 들어가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119]
일생은 상술한 어린 시절과 근적응징행 시기를 비롯해 서쪽의 국가에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는 시기, 말년 시기로 나뉜다.
말년에 벌어진 대기근으로 운동을 끊으면서까지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 높은 명망을 얻고 임금 서안대군에게 간언했다가 좌천될 위기에 처하자 과거 동료들에게 연락을 때리고 근적응징행 시기때 쓴 편복(박쥐) 가면을 써 자신이 붕탁임을 드러내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태량붕탁을 연호했고, 지력상소와 백성들의 시위로 서안대군은 상왕으로 물러난다.[120] 그후 송시열은 서안대군의 명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정치에서 손을 놨지만 뒤이어 왕이 된 성림대군의 스승이자 조언가로 활동했으며, 사약으로 죽은 원역사와는 달리 을병대기근 때 사망했는데 이미 노쇠한 자신이 먹는 곡식을 아껴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뜻으로 곡기를 끊어 자진했다.
- 현종(顯宗) ★ : 휘는 이준. 2부에서 세자로서 처음 등장한 뒤, 1606년 왕위에 올라 서애 유성룡의 사례[121]를 만회하려고 젊은 관료를 대거 파견하여 내실을 다졌다.[122] 1642년에 이면에게 왕위를 넘기고 송당과 예당의 대립 중에 사망했으며 중국 대륙의 분열이 조선의 활로라는 유언을 남겼다.
- 이면 ★ : 이준이 상왕이 되자 왕위에 올랐다. 경신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순에 식량을 사들였지만 대부분이 화식된 불량들이라 분노를 참지 못하다가 쓰러졌다. 거기다 세자는 경기도까지 가서 백성들을 위문하던 중 폐렴으로 급사하는 비극을 겪는다.
- 목종(穆宗) ★ : 송시열이 정치생활 말년에 모신 임금. 군호는 서연(西沿)대군이며 휘는 이휴. 첫 등장은 1부 외전으로 암군으로 언급되는데, 어떤 암군인지가 2부 외전에서 드러났다. 상술했듯 이면이 쓰러지고 세자가 폐렴으로 급사하자 예법에 어긋나기는 해도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다, 이면이 죽기 직전 세자로 책봉하려다가 사망한 나머지 제대로 세자로 책봉받아 양위받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근적들이 주가 된 예당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채우고, 반대로 시시콜콜 선정을 베풀기를 청하는 송당을 고사시키려고 했다. 송시열이 예당을 지적하자 정치적 생명줄을 건드린 것으로 보고 송시열을 사실상 유배형을 보내려고 했는데[123] 비루먹은 소 두마리의 수레를 타고 가라고 내준 것에 송시열이 제대로 빡 돌게 된다. 결국 송시열의 한수에 전국의 민심이 들끓고, 전국 각지의 유생 2000여명의 지력상소와 일만여명의 백성들의 시위 끝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끝장나게 되고, 깔끔하게 죽기 위해서 상왕으로 올라가는 결말을 맞이한다. 시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목종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암군에게 붙여주는 시호다.
- 성림대군 ★ : 목종 다음의 왕. 목종의 조카로 목종과는 다르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 효종으로 추정된다.
4.1.2. 유럽
- 피에르 드 페르마 : 송시열이 젊었을 때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만난 프랑스의 변호사 겸 수학자. 변호사라는 직업답게 송시열에게 유럽의 법률에 대해 가르쳐주는 입장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덤으로 막 개발한 미분을 가르쳐 준다.[124] 반대로 페르마는 입신체비를 배우게 되는데, 자신만 당할 수 없다는 물귀신 심보로 유럽의 다른 명사들을 불러모으게 된다.
- 르네 데카르트 : 페르마의 물귀신 심보로 입신체비를 배우게 된 프랑스 철학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철학의 원리를 송시열에게 보여주고, 송시열은 그 인식도 결국 사회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지 않은가라고 반론한다. 그 후 다른 철학자들과 토론의 장을 열어서 원 역사보다 빠르게 계몽주의를 완성하게 된다. 물론 입신체비를 배우게 되면서 원 역사보다 44년이나 더 장수(향년 97세)하였으며, 동시에 근육 철학자가 되었다.[125]
4.2. 근대
- 김구
대한 공화국의 대학 중 최고봉인 한양 국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원 역사랑 달리 조선-대한이 훨씬 부강한 나라가 되면서 정치랑 별 상관이 없는 길을 걷게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스트레스 받고 피 볼 일도 없었던 덕에 좀 더 온유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졌다. 다만 근본적으로 타고난 성깔 자체는 여전했는지 황실 폐지 선언 방송 도중에 궁궐로 난입해 황실 폐지 반대를 주장한다거나[126] 주변 사건이나 인물들한테 쓴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부에서는 대한 공화국의 전차 시연회에 다자이 오사무를 데리고 한양 국립대학교 총장으로서 참석하기도 하였다.
- 여운형
김구의 제자. 고려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제적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시행한 무리한 산업화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잠입했는데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낸 탓에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심각한 근손실이 찾아와 김구의 분노를 산다. 하지만 김구가 타준 유청을 먹고 운동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한 뒤, 자신이 보고 겪은 일본의 참상을 알린다.
- 사카모토 료마
직접 등장은 하지 않고 언급으로만 등장. 오미야에서 살해당한 원 역사와는 달리 평소 입신체비를 즐긴 덕분에 오미야에서 팔 하나를 내주고 암살자를 후려갈겨 제압함으로써 죽지 않았고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등극한다.[127] 세상 사람들은 모두 친구라는 사해동도(四海同道) 사상을 주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대한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으로 일본을 1차 대전에 참전시켜 전공을 세우고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대한한테 큐슈를 반환받기도 하였다. 1919년 시점에서는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고인이며, 1916년에 김구와 만났다.
- 이토 히로부미
료마의 후임 총리대신. 가격경쟁을 위해 임금을 동결하고 자원을 바닥까지 긁어대는 등 강력하고 무자비한 개발독재 정책을 강행하여 훗날 일본이 갈라지게 되는 계기를 초래한다. 일본과 조선 간 맺었던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128] 하주도(큐슈) 반환을 요청했고, 대한제국에서는 주민 이민 비용을 300억원으로 잡는 어려운 조건을 내세워 반환을 거부하려 했으나[129], 순나라가 지원하여 300억을 5년에 걸처 분납하여 317억을 현물로[130] 지급하는 것으로 성사되어버린다. 하지만 하주도는 이미 자원은 싹싹 긁어내고, 제반시설은 노후화되었으며, 주민들도 대부분 대한 공화국으로 이주해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빈 깡통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이 독박을 쓰게 된다.[131]
1923년에 82세로 타계했다. 원 역사와 비교하면 천수를 누리다 간 셈. 하지만 죽기 전에 관동 대지진을 틈타 사회주의자 학살 명령을 지시하고 만다.
- 건양제[132]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매일같이 업무에 시달리며 입신체비도 제대로 못해 3대 500근이라는 대한제국 기준으로 빈약한(?) 체형이다. 그나마 작가 언급으로는 입신체비를 해놔서 버티는 거라고. 하루 12시간 넘는 업무로 매일 수면시간이 6시간 밖에 안 될 정도로 시달리자,[133] 이렇게 노예처럼 일만 하다 죽을 바에는 차라리 황실을 폐지하고 일반인으로 사는 게 낫겠다며 황제 자리에서 실각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며 막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익을 최대한 챙기며 막나갔기에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존경받았고, 결국 1차대전 미참전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명분으로 황실 폐지 및 공화정 전환을 선언하며 이 과정에서 반대를 위해 궁궐에 뛰쳐들어온 김구를 이형을 시켜 내수린으로 제압하였다. 재산을 정리하면서 건양제가 웃는 모습을 본 김구는 아마 은퇴 후에는 마음껏 입신체비를 할 수 있어서 좋아 그랬으리라 추정했는데, 이후 은퇴 십여년 만에 원래 빈약했던 건양제의 체형이 두툼해졌다는 걸로 보아 사실이었던 듯. 황실 폐지 과정은 모든 종친이 한 마음으로 찬성했다고 하는데, 전원이 노동자들처럼 하루 8시간 자고 8시간 쉬고 8시간만 일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 성림왕 이형
원 역사의 고종황제. 키는 변함없이 작지만[134] 입신체비의 종주 수양대군의 후손답게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근육으로 가득 찬 근육맨으로써, 황실 폐지를 반대하고자 궁궐에 뛰쳐들어온 김구를 20년이 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내수린으로 제압하거나[135] 리볼버 권총을 손으로 비틀어 박살내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계에서 대한의 라이벌이 될 만한 나라가 없어 업계의 쇠퇴를 우려하여 타국의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라이벌을 만드는 계획의 일환으로 베이브 루스의 잠재성을 보고는 그를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인다.
- 영친왕 이은
이형의 5남. 베이브 루스를 스카웃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따라 북미로 왔다. 이형의 자식들은 각자 전문분야가 있는데 이은의 그중에서도 택견을 비롯한 각종 무술을 연마한 무술의 달인, 이를 모르고 까불던 카포네가 느닷없이 턱에 주먹을 날리며 공격하자 아버지께서 칭찬한 아름다운 몸에 상처를 입혔다고 진노해그아아아아앗!우람한 상체 근육을 드러내며 "지금부터 너를 근육해주겠다!"라고 선언, 상황파악 못한 카포네를 태클로 붙잡고 돌진해 상자와 벽을 뚫는 것을 시작으로 손날치기[136], 테이블 들고 내려치기,훌륭한 대화수단인강철제 접이식 의자로 두들기기의 순서로 제대로 근육해준다.
- 베이브 루스
아메리카[137]의 야구선수. 1920년 시점에서는 대한제국 vs 아메리카 전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겪은 뒤 실의에 빠져 술만 먹는 폐인 상태로 지내고 있었지만, 그를 눈여겨 본 이형한테 스카웃된다. 근 6개월을 폐인으로 지냈는데 조금만 재활훈련을 하면 다시 실전에서 뛸 수 있을 정도의 축복받은 신체의 소유자[138]로, 이형에게 스카웃되어 3년간 체계적인 입신체비를 전수받고는 원 역사 이상의 전설을 찍게 된다. 이후 그가 세운 기록은 1928년 71홈런, 1925~1937년까지 13회 홈런왕, 7회 타점왕, 아메리카 리그 9회 우승, 출루율 1위, 삼진 1,100, 방어율 2.3. 심지어 이것이 3년을 쉬었음에도 세운 기록으로 투타 모두에서 레전드를 찍었다.
- 알폰즈 가브리엘 카포네
루스가 술을 마시던 불법 술집을 관리하던 마피아 간부. 나름 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실제로 대한인을 여럿 이겨 본 경험이 있다. 이형과 이은 부자를 평범한 대한인이라 생각하여 싸움을 걸고, 황족이라는 것을 알자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투에서 이겨서 서로 없던 일로 하려고 하지만, 이은은 단순히 근육만 많은 게 아니라 온갖 격투기를 연마한 격투의 달인이었기에 벽을 부술 정도로 위력적인 태클[139]과 이어지는 손날치기 연타에 신나게 얻어맞고, 술병을 깨뜨려 흉기로도 사용해 보지만 오히려 그걸 보고 수십kg짜리 가구를 흉기삼아 집어 던지는 이은에게 더 처맞는다. 결국 이은에게 처절하게 근육당한 것도 모자라 (전)대한 황실가[140]를 건드린 대형 사고를 친 책임을 물어 조직에서도 파문된다.
-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전투파쇼당 당수. 원 역사보다 일찍 정권을 잡아 1919년에 한때 동맹관계였던 솔로몬 연방을 침공하지만 마사이족의 활약으로 패배하게 된다. 전세역전을 위해 협정으로 금지된 겨자가스 포탄을 6천 발이나 썼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든 이후 정권을 유지했던 모양이지만,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끝내 살아남지 못하고 전범으로 체포된 뒤 총살당했다.
- 아돌프 히틀러
원 역사처럼 나치 독일의 총통. 대한인들을 위대한 육체를 가진 위버멘쉬라 띄워주면서 대한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미국이나 소련이 원 역사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 탓에 소련과 영국을 가볍게 압도하면서[141] 2차 대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T4 작전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들을 원 역사 그대로 저질러버리는 바람에 대한 공화국이 분노해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142] 대한 공화국의 참전 사유를 뒤늦게 알게 되자 부랴부랴 학살 작전들을 중단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결국 패색이 짙어지고슈타이너는 이 타임라인에서도 충분한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1946년 대한 공화국으로부터 너를 근육하겠다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뒤 벙커에서 수류탄으로 자살한다.[143] 유해는 그의 무덤이 나치 잔당들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연합군에 의해 화장되어 포인트 니모에 뿌려졌다.
- 이오시프 스탈린
원 역사에서처럼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소련의 서기장. 러시아 제국을 후원하는 대한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쪽에도 상당수의 군대를 배치해놓았고, 원 역사보다 축소된 국력과 미국(美國)이 없어 랜드리스 지원을 못 받는 상태였던지라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가 함락당하는 등 나치 독일에게 탈탈 털리던 중 대한 공화국의 참전으로 간신히 승전국이 될 수 있었다. 작중 언급으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카틴 학살이 폭로되면서 강제 점령중이던 동독 지역을 내뱉은 뒤 사실상 은둔한 모양.
- 운일준 ★
41식 전차가 개발될 무렵의 미국 대통령. 운성산(구름 낀 산)의 머나먼 후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특징이 드러나는 외모로 묘사된다.
- 다자이 오사무
2부 에필로그에서 대한 공화국의 전차 시연회에 김구의 동행[144]으로 등장하였다.전차로 인간실격과 달려라 메로스 드립을 치는 건 덤부끄럼 많은 전차를 보았습니다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근육에 물든 작품 속 세계관 등장인물답게이거 완전 중년기의 미시마 유키오 아닌가[145] 원 역사에서 쓴 허구의 방황 대신 근육의 방황을 쓰기도 하였다.
일본 출신이지만 대한 공화국에서 글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입신체비에 매진하여 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 페르디난트 포르셰
1부 에필로그에서 하이브리드 기관식 보행기를 제작한 한양 국립대학교 교수로 언급되었으며 현대로 돌아온 1부 주인공이 도로에 있는 전기차 상당수가 포르셰의 차량이라고 언급된 걸 봐선 대한 공화국에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듯 하다.
이후에는 완전히 귀화해서 대한 공화국군의 중전차 설계에 참여하였는데 하필 원 역사에서의 초기형 티거마냥 결함덩어리 하이브리드 엔진을 써버리는 바람에 시연회 자리에서 전차들이 줄줄이 퍼지면서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체면을 처절히 말아먹고 말았다. 너무 성대하게 사고를 친 탓에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고 엄정한 처분을 기다리던 차, 그의 집에서 생쥐 전차의 설계도가 발견되자 대한 공화국에서는 맨 정신으로 이딴 설계가 나올 리 없다 판단해 포르쉐를 심신미약으로 판정하고 집행유예 및 가택연금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내린다.
- 발터 모델
2부 에필로그에서 히틀러에게 모스크바 공세를 독촉받는 것으로 첫 등장. 소련군을 상대로 선전하는 듯 했으나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대한 공화국이 참전하자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혀 3개월여간의 지연전을 펼친 끝에[146] 대한 공화국에 항복하였으며, 지휘관으로서 휘하 부대에 학살행위를 금지할 것을 지시한 점도 참작되어 대장으로서 정중히 모셔졌다. 자신을 감시하는 대한 공화국 병사의 우람한 체격을 보며 저러니 기관총을 들고 뛰어다닌 거라며 한탄한 것은 덤.[147] 대한 공화국군이 휴대용 구급세트를 들고 다니는 것을 포로 신분이 된 후에 확인하고는 페니실린을 포함한 세트를 전 군인에게 제공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어이없어 했다.[148] 하지만 장기간의 부상으로 근손실 당하면 그게 더 불효라는 공화국군의 반응에 순간 정줄을 놨으며, 그제서야 근육을 국가에서 지원한다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깨닫고는 이래서야 독일이 진다고 확신한다. 후에 독일 전범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149] 인정해 징역 10년에 처해졌다. 발터 모델을 제외하고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면한 독일의 중요인물은 무죄처분 받은 히틀러의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을 포함하여 극소수밖에 없다. 그나마 인륜을 저버리지 않은 괴링도 전쟁을 일으킨 독일 정부의 책임자중 한 명으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 김상옥: 1939년 무렵 육군참모총장 진급을 코앞에 둔 대한 공화국군 중장. 원 역사의 어쌔신 크리드 뺨치는 쌍권총 무쌍은 전장에서 발휘되었다. 포르쉐가 성대하게 시제형 전차를 말아먹자 홍범도에게 사태를 수습하고 신형 전차 개발을 담당할 것을 명 받는다. 훗날에는 원수까지 진급한다.
- 김일옥: 대한 공화국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 쇠지렛대를 이용해 티거 전차의 해치를 따고 수류탄을 까넣어 격파하는 무용을 보인다. 이후 대한 공화국의 군사 박물관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대걸레 자루로 맨홀 뚜껑을 들어올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하게 된다. 시기나 역할을 보면 이 분을 모티브로 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어째선지 근대 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이 바뀌었다.
- 박상진: 작가 답변에 따르면 해군 참모총장.
- 홍범도: 대한제국 시절의 사관학교 교장. 후에 언급에 따르면 육군 원수까지 진급한 모양이다. 원 역사에서도 거구를 자랑했기에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근육화된 이 세계에서는 당연히 독보적인 몸을 갖고 있으며, 선봉에 서서 진격한 후 사단 하나를 통째로 박살내버렸다고 한다. 모렴야의 면접에서 채점을 거부하고 도주했으며, 후에 모렴야가 음식점을 세우자 음식점 이름을 직접 붙여줬다. 은퇴 후에는 종로에 있는 내수린장 수위로 일했다고 한다.
- 커티스 르메이: 은퇴 후에는 스테이크 전문점을 차렸다고 작가의 답글에 짤막하게 언급된다.
-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러시아 제국의 외무장관. 2차대전 후 카틴 학살을 들먹이며 소련을 봉으로 만들었다(...)
너희(소련)가 우리 철도 복선화해줘. 뭐? 못 해줘? 시베리아 원주민 학살은……[151]
-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러시아 왕국의 여왕. 신형 전차에 쓰기 위해 강구트급의 부포인 B-7 포를 달라는 김상옥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다. 이때 그녀 말로는 지금 강구트는 자기 동생이자 한때 대한제국의 세자비였던 타티아나의 건의에 따라 게잡이 어선으로 현대화 개장되었다고.
- 이승만: 천주교 신부. 입신체비에 물든 역사답게 근육이 넘실거리는 몸매가 되었다. 원 역사처럼 김일성과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지만 나치 독일을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김일성과 손을 잡았다.
- 김일성: 기독교 목사. 이승만과는 철천지 원수지간. 하지만 나치 독일의 장애인 및 인종청소 사태에서 이승만과 손잡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입대를 독려했다. 말년에 금수산 입신체비궁전을 만들다가 불법 입신체비 약품 사용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의 평가는 미친놈.
- 이탄(李坦)★: 대한제국 황태자. 건양제의 아들. 황실이 폐지된 후에도 대한 공화국에서 황실의 권위는 여전하였기에 전쟁을 바라던 국민들을 진정시켰다. 그가 16세때 로마노프 황가의 당시 11세였던 타티아나와 혼담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결혼을 했으나 건양제가 순나라의 도발에 아주 막나가겠다는 듯[152] 이곳저곳에 관여하다가 러시아 제국에 큰 도움을 주지 않자 아버지를 고생시키는 데다 아직 사이에 자녀도 없다며 이혼하게 되었다. 이탄 본인은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서 건양제와 이혼장을 찍어주기는 했지만 부부관계는 원만했던 모양.[153] 기록영화에선 김일성과 이승만이 나치를 규탄할 때 고령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들끓는 여론을 진정 시킨다.
- 안중근 : 한양대학교 고고학과 학과장. 이승만과 함께 공령(플레이트) 모으기 운동을 벌여 약 5천만톤의 철을 모아 정부에 기증하였다.
- 시라소니 :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육군 대위로 독일전에 참전하였다. 독일군 진지에 처들어가 독일군 장성을 두들겨패서 끌고왔다고 한다.
- 에리히 레더 : 연합 해군과의 결전에서 패배해 티르피츠와 운명을 함께한다.
- 오토 카리우스 : 독일의 전차병으로 나치 독일이 원 역사보다 여력이 넘처나 개발에 성공한 E-75를 타고 방어전에 나섰지만, 분전 끝에 운전수가 사망하는 등 대한 공화국의 화력에 밀려 항복하였다. 포로 수용소에서 무장친위대 소속인 미하엘 비트만이 격살당한 걸 보고[154] 히틀러의 최후가 절대 곱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은 덤.
- 얄마르 샤흐트 : 본문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2부 외전 8화(565화)에서 댓글에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본래 역사에서 받은 형량의 1.5배 정도를 받았다.
- 삼대영걸
원 역사라면 일본군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어둠의 독립유공자라는 비웃음을 받는 그 셋 맞다. 역사가 바뀐 이 세계선에서는 하주도 출신의 대한제국 사관학교의 졸업시험에서 영웅적인(?) 성적으로 탈락한 역대 최저점 3인방을 의미한다. 다만 원 역사에서 일본군이 포로 학대와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로 미쳐가는 와중에도 휘하 부하들에게 이런 행위를 금지시키는 등[155] 군사적으로 무능함과 팀킬 외에는 의외로 정상인이였던만큼 여기서도 성격과 인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으로 나오며, 명망높은 가문임에도 큐슈 반환 시기에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한 덕도 있다. 덕분에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이자 근육조선의 장성들인 홍범도 같은 장군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적성에도 안 맞는 군사업무 대신 각자 적성에 맞는 직업을 구하여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게다가 역사의 장난인건지, 현재 부공차와 모렴야는 대한공화국에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거나(모렴야) 하게 될 예정(부공차)이다. - 삼산원(杉山元): 1차 필기시험 사상 최저점(4과목 합계 117점)으로 탈락. 다른 둘에 비해 별다른 비중은 없다.
- 부공차(富永恭次→富恭次):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비웃는 소시민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터라 3차 지휘시험에서 술에 취해서 충성심보다 월급을 우선시하라라는 망언과 함께 탈락. 이후 만주로 이주해 기자로 일하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 모렴야와 함께 독일에 방문해 독일 거리를 돌아다니던 도중 병자와 선천적 장애인 절멸을 선전하는 독일의 민족청소 및 홀로코스트 포스터를 보고 경악, 그대로 토악질을 하다가 한술 더 떠 사시인 아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다. 안 그래도 본래 성정 탓에 나치가 기승을 부리는 독일이 영 맘에 들지도 않았는데 노약자와 선천적, 후천적 장애인의 인권이 드높던 조선의 상식에 기반해 천륜을 거스르는 참상을 보고 눈이 확 돌아버려서 그자리에서 무장친위대 병사 일곱을 홀로 근육해버리는 괴력을 자랑했으나 결국 친위대에게 둘러싸여 흠씬 두들겨 맞는다. 나치당에서는 친위대가 7명이나 일개 기자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이 쪽팔렸는지 부공차를 협박하고 공산당의 테러라는 허위보도로 적당히 덮어버렸지만 부공차는 자신이 본 것을 본국에 알리기로 작심하고야 만다. 기록영화인 동부전선에 따르면 그 후 본인이 결심한 대로 대한공화국 총리 관저에서 자신이 모아온 정보를 털어놓으며 대한공화국 전체를 뒤집어버렸다.
- 모렴야(牟田口廉也→牟廉也): 2차 면접시험에서 보급이 없어도 근육이 많으니 풀만 먹고 근육을 불태우며 진군하자라는 망언을 하여[156] 당시 교장이었던 홍범도가 채점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결국 2차 면접시험에서 사상 최저점인 100점 만점에 6점을 받고 탈락. 그 후에는 재능을 살려(?) 채식 전문 식당인 채식구락부를 설립하여[157] 현재는 하르빈의 구주거리[158]에서 채식요리 전문 요리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신형 전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대충 던진 말이 지금 상황의 전차 개발에 딱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본의치 않게(?) 신형 전차의 아이디어 제공자가 되었다.[159] 이후 부공차와 함께 독일에 방문하는데 요리 실력이 해외에서도 퍼졌는지 히틀러에게[160] 직접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모렴야의 요리실력을 극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히틀러를 영 껄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 비오 11세, 비오 12세
원 역사에서는 무솔리니에 협력한 의혹이 있는 교황청이었으나, 이 세계선에서는 입신체비로 인해 육체와 정신이 교정된 영향이 상당히 커서, 비오 12세는 바티칸은 전쟁에 반대하며 악은 몰락한다고 선언한 뒤 구금당했다. 댓글에 따르면 비오 11세는 당시 너무 늙은 나이라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했다고 한다. 또한 이탈리아 전역의 신부와 수녀들이 저항군에 합류하면서 원 역사와 반대로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양심을 지킨 케이스가 되었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
원 역사처럼 러시아의 요승. 황화론… 비슷하게 동양의 문물이 러시아 제정을 무너트릴거라는 망언과 함께 서양의 문물을 조선에 밀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한제국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비용을 다 떠넘기려고 하였으나, 반대로 대한제국에서 타티아냐를 이탄과 혼약시키기로 결심하고[161] 이탄을 러시아로 보낸다. 그 후, 이탄 전용으로 러시아에 마련된 입신체비장에서 시녀를 겁탈하려다가 이탄에게 걸려 근육당해 두골척추부수기로 척추가 부러지고 사흘 뒤에 사망했다. 다만 이탄은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아직 힘 조절이 미숙한 탓에 라스푸틴의 척추가 부러졌던 것.
- 쑨원
1부 외전에서 천명대전이후의 상황을 설명할 때 임시대총통으로 있다가 과로사했다고 한다.
4.3. 현대
거의 대부분의 국내 대체역사소설들이 그러하듯이 근대 이전 인물들과는 달리 현대인들 중 실존 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약간씩 바뀌어 있다. 참고로 두 주인공들의 가족들이 역사 변동 이후에도 그대로인 이유는 작가피셜 주인공 보정 때문이라고.- 이수길 ★
최영직의 외조부. 원 역사에서는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꽤나 험난한 삶을 살았으며, 고엽제 후유증으로 암에 걸려 전이 시점에선 이미 고인인 상태였지만 역사가 변하면서 살아나게 된다.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다 무릎을 다쳤지만 자신의 실수로 국세를 낭비할 수 없다며 인공관절 수술을 거부하는[162] 것만 빼면 여전히 정정하다.
- 최영직의 외조모 ★
원 역사에서는 남편을 잃고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쇠약하게 살고 있었지만 역사가 변하면서 번듯한 단독주택에서 남편과 함께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최근 새로 들인 취미는 서클 피트.
- 최영직의 조카들 ★
최영직의 외조카들. 원 역사에서는 3명밖에 없었지만 역사가 변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7명으로 늘어났다. 삼촌한테 이두박근을 보여달라는 등 훌륭한 대한 공화국 어린이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 최영직의 남동생 ★
원 역사에서는 안경 여드름 멸치라는 전형적인 오타쿠 외모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는 오타쿠였다. 역사가 변하며 정어리급으로 약간 건장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타쿠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도 이 회사로 추정되는 일본 회사랑 계약을 맺어 진양옥의 일러스트를 작업하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근육 넘치게 그리는 바람에 계속 퇴짜당하다 보다못한 최영직의 조언[163]으로 근육을 상당히 빼고 나서야 간신히 사측으로부터 OK 사인을 받아낸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랑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대한 공화국 내에 3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생활체육이 활성화된 대한 공화국의 특성상 방구석에서 덕질하는 사람이 극히 드문데다가[164] 대한 공화국의 미적 기준 자체가 근육녀인만큼[165] 오타쿠 문화는 정착되지 않은 듯.
- 조왕(趙王) 주상진 ★
춘천에 이름만 남은 명나라의 막내 친왕으로, 최영직의 사촌 여동생이랑 약혼 관계에 있다.[166] 대명국 박물관의 관장으로 근무 중이지만 반쯤 명예직인지라 평소에는 농어촌 같은 곳에 봉사활동을 다니는 듯 하다. 최영직의 수양대군 시절 익혀놓은 유창한 명대 중국어를 듣고는 놀라 그에게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보여주며 춘천에 갇힌 조상들이 입신체비 하려다가 나라가 망한 마당에 효행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못했다는데 주인공은 주상진이 몸관리를 잘했다고 평했다.
- 주영잔 ★
춘천에서 이름만 남은 명나라의 현 황제. 본인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언급만 된다. 최영직은 주영잔이 아마 중국어도 제대로 못 하리라 생각하지만, 그의 아들 주상진이 유창한 명 시기 중국어를 구사하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가문의 전통 비슷하게 남아 명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가문의 의무가 된 듯하다.
- 마철석
한국 대표 떡대로 명성높던 배우. 수양대군에 빙의한 최영직이 마일용을 보고는 그를 연상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떡대의 기준이 상향평준화된 여파인지 원 역사의 야성미 넘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로맨스 전문 연기파 배우로써 살고 있었다. 얼마나 액션하고 담을 쌓고 살았는지 그가 일반 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 근육 장르 영화를 시도하니 대중들이 놀랄 정도.
- 드웨인 딕슨/두와인
이름은 바뀌었으나 누가봐도 더 락이 모티프인 캐릭터. 1부 외전에서 전통 내수린 포스터에서 양상도 출신 내수린꾼이자 궁예역을 맡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냈고 2부 외전에서는 아예 방송에서 궁예를 열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바뀐 역사에서 폴리네시아 문화권이 입신체비를 받아들인 영향으로 자연히 육체능력이 향상하여 양 손으로 하나씩 상대 레슬러 둘의 머리를 잡은 채로 초크슬램을 하는 무지막지한 괴력을 선보였다.
- 스티브 웍스
미주 최대의 입신체비장 Y헬스의 창립자이자 대표. 본래 역사에선 이미 고인이였지만 바뀐 역사에서 입신체비를 접한 영향인지 63세의 나이로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노년의 나이에 불구하고 3대 400은 충분할 정도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가 부작용이 없는 선에서 약물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 본인도 이를 적극 권장하기 때문에 기성세대나 전통 입신체비사에게선 백안시 되고 있다. 김성원은 다른 천성이 있지만 억지로 근육에 몰두했다. 라고 평가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가 입신체비에 빠져서 애플사가 탄생하지 않게 되면서 MS사가 계속 업계 정상을 유지한 결과, 본래 역사에서 그가 가져왔던 UI 기술의 혁신이 사라졌기 때문. 이로 인해 IT업계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은 본래 역사보다 2세대 정도 발전했지만 UI는 퇴보해버린 기묘한 기술체계를 유지하게 된다. 작가 후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2025년의 하드웨어에 95년의 소프트라는, 비유하자면 대략 인텔 13세대 정도의 CPU와 RTX 5000번대 하드웨어에 OS는 윈도우 95쯤 되는 기묘한 조합이 되었다. 그래도 컴퓨터의 성능은 좋아졌으니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에서의 스토리와 같다. 있으면 좋겠지만, 중요하진 않다(Story in a game is like a story in a porn movie. It's expected to be there, but it's not that important)." 사태는 면한 듯.
- 스티브 레스니악
스티브 웍스의 창업 파트너. 2부 외전 중, 방송에서 입신체비를 하는 웍스를 보조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본래 역사에서는 불화로 인해 갈라졌지만 입신체비의 순작용인지 현재 시점에서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 아르놀트 이슈테네거
1부 시점에서는 수양대군이 아놀드의 가호(?)를 바라며 중얼거리면서 언급된게 끝.[167]
2부 외전에서 원 역사대로 제1회 유럽 입신체비 대회에 출장하겠다는 일념으로 탈영하여 입상했다고 언급되었고, 그 직후 미주 입신체비장 체장의 친구로 등장한다. 복수자전의 아메리카 번안판 복수혈전(Revenge)에서 덕국대장을 연기한 배우로도 유명하다고. 여담으로 대한공화국의 영향권의 사람들이 아놀드라고 읽으면 발음 제대로 못하는 아메리카 놈들의 발음이라고 까인다는 듯. 작가 답변에 따르면 현 직업은 영화배우 + 입신체비 브랜드 사장 + 전차수집가 + 약간의 겜덕후의 조합이다. 원 역사와 다르게 불륜 스캔들이 없어서 근력이 지금이 더 강하다나. - 박예원★
김성원의 아내. 역사 변동 이후에 트립 후 복귀의 영향으로 뻗어있던 김성원을 입신체비하다 지쳐 뻗은 줄 알고 한소리 한다. 대한 공화국 사람답게 역시나 이쪽도 원역사보다 대폭 건장해져서 근돼가 되어있던 김성원을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의 완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원과의 사이에 아들 김진성이 있지만, 아들은 명이 망했다는 말에 반박하며 전에 황제에게 싸인 받았었다고 말하는 외에 작중 등장이 없었다.
- 마울리★
2부외전에 등장한 폴리네시아계 내수린꾼으로 1996년 생이며 한국식이름은 마영도. 김성원이 유허 이철의 공동저술이야기를 하자 내수린으로 붙게 되며 이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게 됐고 그 뒤 김성원에게 대게를 대접하면서 김성원과 대화에서 자기 조상 이야기를 해준다.
[1] 다른 부족들은 조선에 귀부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인데다 수양대군의 근육에 혹해 일찌감찌 조선에 귀부해서 우대를 받았고, 이중 아구지는 정충렬이라는 이름을 받아 훗날 조선의 명문가로 성장하는 회령 정씨의 시조가 된다.[2] 세조 대에 이루어진 일로, 이시애의 난 진압 부대가 그대로 북방으로 올라가 이만주 토벌에 나섰지만 조선에서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만주는 그걸 예상을 못 했는지 본거지에 있다가 사망.[3] 타이순 칸을 생포하기 위해 김종서가 순수한 일대일 대결로 승부를 내는 것을 제안, 수양대군이 몽골 전통 스포츠인 부흐를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내수린을 도입해 결투를 벌인다. 그런데 타이순 칸은 근육이 좀 있는 90 kg 정도의 체구인데, 수양대군은 전형적인 보디빌더형 근육덩어리에 체중만 120 kg를 넘어가는 괴물이라 주먹질, 발길질도 허용되지 않는 레슬링 룰로는 이 체급차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신나게 던져지고 굴렀다. 현대의 레슬링이나 이종격투기도 체급차이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체급별로 나눠서 경기를 치르곤 한다. 웹툰에선 아예 F5, 쵸크슬램, 자이언트 스윙등 온갖 고급기술들을 다 맛보고 항복을 선언한다.[4] 에센의 조카로써, 원 역사에서 다얀 칸의 아버지. 원래 에센이 황금씨족이 아니라 칸이 될 수 없어서 자기 여동생을 타이순과 결혼시켜 조카를 칸으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에센이 패배하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아들은 아들인지라 정이 들어 내치지 못했다고.[5] 이 지헤는 350화의 댓글에서 밝혀졌는데, 바지사장 신세를 벗어나는 방법이라고한다.[6] 정화의 마지막 원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젊을 때는 천축에 가서 검은 돌을 본 적도 있고, 지금도 자신이 3년만 가르치면 조선도 천축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고 큰소리 칠 정도로 실력에 자신이 있는 듯.[7] 7촌이면 증조부의 형제의 손자다. 이쯤 되면 현대에서는 친척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과거에도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먼 친척 관계이다.[8] 당대의 지식 높은 고승들은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읽었어야 하므로 가톨릭 사제들이 라틴어를 하듯 산스크리트어를 구사 가능했으므로 신미대사가 산스크리트어로 인사하자 바로 고승 흉내가 파훼되어 버렸다.[9] 막부의 군사와 치안 담당기구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직에 임명될 수 있던 4개의 가문.[10] 이 시기 낙양은 이미 쇠퇴해가는 도시였기 때문에 쓸쓸함이 느껴져야 하는데, 괜히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실패작이라고 여긴다.[11] 광맥 찾는 사람[12]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엉터리로 가르쳐 주면 엿먹이려는 것이 티가 나므로 이미 사장된 고려시대 재배법을 알려줬다.[13] 애초에 궁궐에선 비상이 들어간 안료를 금지했으니 그야말로 택도 없는 거짓말이다.[14] 사실 도주 자체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아에 끝장을 보기 위한 조선의 계책이였다. 조선은 경인왜변에서 포로로 잡힌 노리나오의 아들을 몰래 풀어주면서 노리나오를 처벌할 것이라고 흘렸고, 이 때문에 노리나오는 호소카와가 부르기 전에 도주에 성공했다. 난감해진 호소카와는 조선에 시부카와 가문의 도주 사실을 통보하였지만, 조선은 호소카와가 핑계를 대며 명나라의 황명을 거역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계속해 호소카와 가문은 완전히 망해버린다.[15] 배는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홍길동이 난파선으로 착각할 정도였고, 율도에 도착하기 3일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서 조금만 늦었어도 죄다 아사할 뻔 했다.[16] 그 건축법이라는 게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만들어 눈이 쌓이지 못하고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인데 문제는 일본인의 신장에 맞춘 사이즈 였던지라,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낮고 비좁아서 율도 수령으로 부임한 아들 한보를 보러온 한명회가 보고 내 아들이 이런 비좁고 흉물스런 관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거냐며 경악했다.[17] 전주 이씨를 진주 이씨로 착각하고, 진주에 왕족이 산다고 생각해 이런 왕족들을 인질삼아서 탈출하려 한다.[18] 조선이 인삼 씨앗으로 수작을 부렸다고 이야기하자 '일본 영주들이 과하게 욕심을 부렸다'고 믿지 않았고, 아녀자에게 두들겨맞고 잡혔다는 말에는 '끝까지 거짓말한다'고 대노했다.[19] 인도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후추값을 떨어뜨려 무역 수익을 줄어들게 만드려는 수작이였다. 다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방식으로 엿을 먹는데, 오스만 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커피원두는 조선에 수출할 때 죄다 볶아서 종자로서의 기능을 없애고 수출하였지만 메흐메트 2세에게 악감정을 품은 피지배국 출신 농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할 때 커피 종자를 몰래 숨겨갖고 가는 바람에 조선에서도 대양도(대만)에서 커피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20] 오스만과 적대 관계인 티무르 제국의 백양 왕조에 군수품 지원, 맘루크 왕조에는 홍삼 판매로 상잔 유도, 그리고 오스만과 맘루크 항구에 대한 직접 공격 등.[21] 나중에 도나텔로의 제자들에게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괜히 안평대군을 갈군다.[22] 정확히는 올때는 32명이 왔는데 한명은 한반도의 극단적인 기후로 인한 폐렴으로 죽고 다른 한명은 고향에서 사자를 잡듯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사냥을 나섰다가 당해버렸다.[23] 설카타거북의 등껍질은 영양섭취상태 등의 차이로 매끈하게 자라거나 가시돋친듯이 울퉁불퉁하게 자라거나 한다.[24] 그 당시 거북이 등껍질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로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25] 실제로 수은복용 외에도 생리혈을 얻겠다고 궁녀들을 학대하기도 했다.[26] 참고로 수은 중독 증상에는 근손실과 기억 장애가 있다.[27] 일곱 살 때 조선 사신이 찾아오지 직접 조선말로 대화한다. 황제가 조선말을 배울 만큼 조선의 국력이 올랐다는 묘사이기도 하지만 만력제 본인의 능력이 출중했음을 무시할 수 없다.[28] 현재 만력제의 유해는 문혁시기에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당했지만 당시 남아있는 발굴기록에는 허리가 굽은 꼽추에 가까워서 일상에 지장이 있었던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한쪽 다리가 너무 짧아서 걸어다니는데도 큰 지장이 있었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29] 남경이 함락되면 남경과의 무역에서 큰 수익을 얻는 조선에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탈출하지 않고 남아 맞서 싸웠다. 심지어 왕족이라 먼저 탈출한 진해대군조차 그냥 도망간 게 아니라 해적들이 들끓는 장강에서 정보를 수집해서 넘겨줌으로써 공을 세웠다.[30] 원래 역사에서는 태업을 하면서도 동창을 통해 정보를 모았고 군 관계의 신료의 감시와 빈자리가 생기면 바로 바로 채웠었다.[31] 북경을 재건하는데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데 명의 행정체계는 부정부패로 제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재건비용 마련이 힘들고 놔두자니 명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광경이기에 어떻게든 재건해야 하는 상황. 거기다 도주에 성공한 2만여명의 대연군은 개개인이 막대한 재물을 가졌으며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비슷한 수준의 훈련을 받아 불만을 품은 자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군대로 훈련시킬 수 있는 정예화된 반란군이고, 신하국인 조선에게 구원받아 명의 위신이 추락했기 때문에 명나라 곳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날 것이 예정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다시 태업을 했다간 이여송에게 맞서다가 불구가 된 황태자 주상락이 황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32] 대륙의 패권싸움에서 패배한 뒤 조선의 권유로 명나라 조정이 통째로 춘천으로 천도하였고, 현대에도 명나라 고유 영토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 명나라일뿐 대한공화국의 보호를 받아 고유의 문화와 황위를 이어나가는 처지이다.[33] 삼년상을 치를 경우 본인의 세력이 흩어질 것이고, 치르지 않으면 유교 사상이 남아 있는 명에서 탄핵감이다.[34] 유성룡도 듣자마자 명나라 이름이 아닌데 혹시 일본인인가? 하고 여겼다. 사족으로 저 발음을 일본식으로 읽는다면 코스기 친파치 정도.[35] 만약 조선이었다면 형무소에 수십 년 간 처박혀 있어야 하는 중범죄자라도 당장 사면하고 관직을 내릴 정도의 대발견이라고.[36] 북원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걔들이 왜 쳐들어오는 거냐며 어리둥절하고 북원은 딱히 원한 없는 상대에겐 순순히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는다고 들었다며 항복할 생각이었던 걸 보면 본인은 부하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걸 아예 몰랐던 게 확실하다.[37] 특히 우역 피해를 직격으로 맞은 조선 북인 측의 분노가 매우 심했다. 북원의 칸은 그래도 좀 불쌍했는지 '조선 애들은 착하니까 얘들한테 맡기면 그래도 목숨만은 살려주겠지'하고 형벌에 쓰일 수레바퀴를 맡겼더니 손바닥만한 수레바퀴를 들고 온다(...)[38] 이때 칸은 그의 처분을 천신 텡그리에게 맡긴다며 살려줄 것이면 비가 내리겠지만 아니면 말라죽을 것이라고 했다.[39] 소빙하기가 다가와 점점 북원이 살기 힘든 땅이 되었음에도 두배나 되는 기병들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한 (북원 입장에서) 정체 불명의 정예군의 존재가 두려워 남하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때 남하하지 못한 세력들 중 일부는 조선의 호주 개척단에 참가해 호주로 건너갔고, 거기서 부를 쌓아 일가족을 전부 이주시켰으니 북원도 어느 정도 살 길이 열렸을 것이다.[40] 조선이 명의 신하국을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라 명에서 토벌을 명할 경우 조선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여송이 전쟁을 위해 경진만란 당시 사로잡혀 몽골에 노예로 팔린 스페인 선원들을 사들여 그들의 총포제작 기술과 군대 운용 노하우를 습득하였지만, 조선 기준으로는 지방군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기에 본격적으로 붙으면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 뻔했다.[41] 본인도 자신이 천명을 쥐고 대륙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승산이 없다고 말했다.[42] 유성룡이 요동에서 수상한 정황이 보이자 조사하러 왔을 때 날카로운 추리력으로 진상에 도달할 기미가 보이자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유성룡의 평판을 이미 알고 있던 이여송이 숨겨봤자 얼마 안가 들통날것 같아서 그냥 자기 입으로 순순히 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정과 계획을 전부 설명하고 여섯 달만 못 본척 해달라고 부탁한다.[43] 요청한 자금과 물자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떼먹혀서 자기 사비를 털어도 충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돈이 없으니 방어설비를 갖추려고 했던 일들은 죄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44] 물자를 착복하는 자들은 황제의 명을 어긴 죄를 적용하여 이들에 대한 즉결심판권을 부여받았다.[45] 유성룡이 이런 방어체계를 구축한 이유는 애초에 일본은 화약병기가 발달하지 않아 장거리 화포라고는 명나라에서 노획한 게 전부였던데다, 큐슈에 세운 성형 요새가 포탄에 한해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하였기에 여차하면 성벽 믿고 뻐긴다는 선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46] 그래도 이여송이 평하길 이틀만 더 버텼어도 자신들이 졌을 거라고 평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47] 건축과 목공 쪽의 재능이 엄청나서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되곤 한다. 문제는 황제로서의 일을 내팽겨치고 취미에만 몰두해 암군이 되었다는 것이다.[48]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와 이름이 같다.[49] 애초에 상이경이 아케치에게 속은 것도 '머리의 피부색을 보니 승려로 위장하려고 갑자기 머리를 깎은 게 아니라 원래 대머리인 게 확실하니 승려 맞겠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50] 작중에서 160cm 이상이라 언급되었는데 그 당시 육식문화 자체가 없었던 일본 기준으로는 엄청난 장신이다.[51] 주인공 유성룡은 토키치로라는 이름은 몰랐으나, 특유의 초상화를 본 일이 있어 신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쓰는 적 없는데도, 유성룡도 작가 서술도 모두 히데요시라고 지칭한다. 일단 이 문서에서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름인 히데요시를 사용한다.[52] 이때 병든 노모에게 귀한 산삼을 계속 구해 달여 마시며 극진히 간호한 일화가 나온다. 안타깝게도 끝내 노모는 병사하고 만다.[53] 줄로 인형극을 하듯이 대국 상황을 알려 여러 기사들에게 도움을 받는 사기 바둑인데, 그처럼 자신도 꼭두각시 신세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던 것. 하지만 유성룡이 바둑을 너무 잘 두는 바람에 이런 사기 바둑을 했음에도 일방적으로 발렸고, "내가 이렇게 줄로 명령받는 꼴이다"라는 의도는 "내가 이렇게 줄로 사람을 부린다"로 잘못 읽혀버렸다. 그가 했던 행동 자체는 그 처지에서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지만, 작가의 말마따나 현대인 김성원이 히데요시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안타깝게 기회를 얻지 못한 셈.[54] 계획을 세운 뒤 길거리에서 검은 서양식 복장을 입고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춤을 춘다.[55] 명군한테 노획한 화포는 성형 요새의 정신나간 방어력에 막혀서 별 피해도 못 줬고, 참호를 파서 접근하려 했더니 측량기로 참호를 관측해 좌표를 찍어서 날려대는 포격에 좌절, 땅굴을 팠더니 미리 주변에 땅굴 감지용으로 깔아놓은 나무를 보고 땅굴을 눈치챈 유성룡이 날린 포격에 땅굴이 무너지며 또 좌절, 아예 포격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게 깊게 땅굴을 팠더니 그것까지 예상하고 미리 깔아놓은 가짜 석축에 낚여서 힘들게 판 땅굴만 날려먹고 유성룡에게 흑룡세로 인성질까지 당한다(...). 흑룡세를 보고 저건 뭔 노루얼굴을 형상화했냐며 까긴 했지만. 이후 유성룡에 대한 히데요시의 평가는 밥 먹을 때도 전쟁계획서를 보며 입맛을 돋구며 머리를 까보면 전쟁이라는 단어만 가득할 전쟁에 미친놈이 되었다.[56] 카츠요리에게 조선국왕을 사로잡아 가신으로 삼게 하라는 억지스러운 요구도 당하는데, 이건 실제 역사에서 본인이 고니시에게 시전했던 억지다.[57] 원 역사의 임진왜란에서 산성들이 함락된 이유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아 물 등의 필수물자가 부족해서였는데 이걸 알고 있던 유성룡이 왜군이 처들어오기 전에 이를 보완해놓았던 데다, 진주성 공방전에서는 히데요시가 닌자를 파견해 진주 일대를 정찰한 뒤 이동하던 며칠 사이에 진주성 옆에 성을 2개나 더 쌓아놨고, 조선군의 방어상태를 확인하려 시도한 공격은 근육질의 유생들이 던지는 역기용 플레이트와 각종 쇳덩어리들에 짓뭉개지면서 좌절되었다. 이 때 나온 대사 중 하나가 "네놈들 봉 무게는 조상님도 못 들어준다!"[58] 애초에 살아났다고 해도 조선에 전쟁의 원흉으로 지목된 상태에서 그런이가 권력을 잡도록 방치할리가 없으니..... 애시당초 불가능한 꿈 아니 망상이었다.[59] 단편으로 대역갤에 연재되었던 초창기 근육조선에서도 히데요시는 참피 드립이 듬뿍 들어간 캐릭터였다.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셈.[60] 히데요시는 속으로 멍청한 짓거리라고 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그 조선이 무서워서 아무도 이와미 은광을 뺏을 생각을 안하는 건데 그 보호비 조금이 아깝다고 뒷배를 걷어차 버렸으니... 설령 히데요시가 이겼다고 해도 20년 안에 내분, 혹은 다른 다이묘의 침략으로 멸망했을 것이라고 한다.[61] 이는 조선&명나라와의 협상에서도 드러난다. 요컨대 "우리는 이렇게 사니까 저들도 이렇게 살 것이다." 라는 시선으로 타국의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건 서양인 뱃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결점으로 나온다.[62] 이연을 알현한 게 입신체비 시간이였던지라 운동 직후의 불끈불끈한 근육을 보고 겁에 질린 묘사가 나오기도 하였다.[63] 유성룡은 폭발적인 이름이라 평하였다. 후쿠시마가 충심을 갖고 장렬하게 폭사한 회차에서 이 세계관의 후쿠시마엔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건립되지 않았다고 한 작가의 말은 덤.(정말로 이 세계관에선 후쿠시마라는 이름이 폭발의 대명사가 되어버렸기에 원전의 터로는 불길하다 하여 짓지 않았을 것이다.)[64] 하주도에 성을 새로 쌓는 걸 유성룡이 일부러 설계를 뻥튀기해 더 큰 규모로 제자들에게 흘리는데, 덕분에 일본군은 출병 당시까지도 성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오판한다.[65] 참고로 부하들은 와키자카가 자결했다 생각하고 조선에 항복했고, 부하들이 희멀건 죽으로 속을 달래고 있을 때 와키자카는 굶주림과 파도에 휘말리고 있었다 한다.[66] 원 역사에서 제주도는 말, 표고버섯, 귤 등의 진상품을 바치느라 힘겹게 살았지만 여기서는 1부에서 수양대군이 역사를 뒤튼 덕분에 대부분의 공납은 폐지되었고 귤이 유일한 진상품이였다. 와키자카가 조정에 진상하고 남은 귤을 먹는 걸 보고 주민들이 열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두들겨 패고 난 뒤에 보니 왜인이라는 걸 깨닫고 "어이구 이 친구, 말이라도 하지." 라며 미안해하는 깨알같은 개그는 덤.[67] 전후 보상으로 배를 5척 받았기에 이걸로 어업활동을 하던 중 자신이 표류했던 섬의 미역을 떠올리고 미역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68] 몰래 건미역에 설탕을 타 불려서 미역에 단맛이 감돌게 되어버렸다.[69] 항복하면서 주군을 7번은 바꿔야 무사라며 말하며 비굴한 모습을 보였는데 원 역사에서는 그가 모신 주군이 10명에 가문으로 치면 4개 가문에 달했었다. 다만 불리해지면 바로 줄을 바꾼 건 아니고 나름 주종관계의 의리를 다하고 바꾼 거라 비웃음의 대상이 되긴 했어도 이 문제로 공격받진 않았다고 한다. 근육조선에서도 히데요시가 먼저 자기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거라 충분히 배신할 명분이 있기도 했고.[70] 구키 요시타카가 일본에 내는 세금은 세토 내해에서 나오는 항구의 수익에 대해서만 납부하고 대양도 무역에서 나오는 수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안내고 있기 때문에 안그래도 알짜배기 수입원을 빼앗긴 다테 마사무네는 속만 끓이고 있는 상태이다.[71] 이조차도 선발대를 너무 박살내놓으면 본대가 회군할 게 뻔했기에 왜군을 깊숙히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적당히 뭉개놓은 결과가 괴멸적이였던 것.[72] 사망 이후 흘러나온 토사물에서 술 냄새가 엄청나게 풍겼다고 하며 이 사실이 밝혀진 뒤 허준은 주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들의 뺨을 때렸다. 참고로 원 역사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사망하였다는 게 일본 역사학계의 정설이다.[73] 다테가 쇼군이 된 후 그를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북인 기병 2만 명을 빌려주었는데, 이들은 근육조선 세계관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대국인 조선에서도 함부로 운용하기 힘든 비싼 군대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치르는 거나 다름없는 유지비가 깨지고 있어서, 이 말을 들은 유성룡은 내가 마사무네의 입장이었다면 다 때려치우고 은거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다.[74] 작가의 말
나오에 카네츠쿠: 일본의 권력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조선왕 이연이 1위 조선의 세자저하가 2위 3위는 내 주군이며 다테는 대충 250위다.
구키 요시타카: 250위라 하시니 너무 높게 보신 것 아니오? 북인 기병들 아래에 있으니 3만위쯤 하겠는데?[75] 본래 조선은 임대만 할 계획이었지만, 다테는 한술 더 떠서 '항구 확장해 놓을 테니 더 비싼 값에 항구 이용권으로 사가세요'라는 제안을 해 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금액에 팔릴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공사 준비를 미리 마쳐 놓고 조선의 답이 오자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76] 북인 기병의 경쟁심을 자극해 스스로 간척 작업을 돕도록 하여, 유지비를 충당하고 자신의 권위도 살리는 등 사람 부리는 데 능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77] 실제로 조선이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뒤 현존하는 구리광산 중 매장량 끝판왕 격의 유타주의 빙햄 구리광산 지역 채굴에 착수했고, 도자기는 유성룡이 현대인의 지식을 이용해 본차이나를 연구하여 막 시제품을 내놓기 시작한 상황인지라 본인도 모르게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상황이 되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낸 백자를 본 유성룡의 평가는 개밥그릇이였으니 도자기를 밀어줬다면 거하게 말아먹었을 상황이였다.[78] 여기에는 상국인 명나라에 바치기 위한 쌀을 재배하는 농지라는 명분으로 다른 다이묘들의 침략을 방지하고 농지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이곳을 빼앗기게 된다면 식량 지원을 못 받게 되는 명나라의 직접적 압박과 명나라의 지시를 받은 조선군이 나설 게 뻔하기 때문에당장 북인 기병 2만에게 날뛰라는 연락만 해도 일본에 막을 힘이 없는 상황이다. 누구도 빼앗을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79] 이때 어쩔 수 없이 규슈의 판매 가능성을 열어 놓는 조약을 포함하는데. 이 조약은 시간이 지난 후 일본에서 끄집어 내고 조선 황실에서 하야하는 핑계로 이용된다.[80] 여기에는 음식에 대한 관심보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 다이묘 회의가 벌어질때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직접 주방을 지휘하기도 했었다.[81] 영토침탈 문제도 문제였지만 조선의 지원을 받아 화포를 다루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스페인 탐험대가 전멸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82] 여기에는 전권을 위임했던 측근이 무능해서 복잡한 외교적인 일을 할 능력이 없어서 편히 하려고 후자로 조언한 것도 크다.[83] 위에서부터 접근하자니 입신체비와 유교 사상이 강한 조선 조정에 먹힐 턱이 없으며, 당시 유럽처럼 지방 각 지역을 특정 가문이 세습하면서 다스리는방식이 아닌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형식이라 중간 관리에 포교하는 방식도 적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아래로부터 접근하자니 하층민들도 그럭저럭 잘 사는 조선 백성들에게 내세에 대한 약속은 매력적이지 않다.[84] 게다가 입신체비의 종가인 수양대군의 직계후손인 영흥부정이다.[85] 농사와 입신체비를 가르치는 등 일을 도우며, 압도적인 완력으로 힘 추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따로 선교는 하지 않았고, 자신을 도와주는 이방인의 신앙에 호기심을 가진 원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그래서 7년이라는 단기간에 1만 명의 신도를 모았다.[86] 식량이 부족해지자 메뚜기 떼가 나타나 식량을 대신해 주고, 40세가 넘고 입신체비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근손실은커녕 3대운동 1천근을 달성하는 등 신이 직접 돕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의 기적이 연달아 일어났다.[87] 근육조선 스토리 전개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물귀신 심보이다. 내가 고생하는 만큼 남들도 기필코 끌어들여 고생시키겠다는 모습이 곳곳에서 묘사되며, 2부 주인공인 유성룡도 초기에는 헬창이 되기 싫어 입신체비를 피하려 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입신체비를 회피하려는 천주교 신부들의 모습에 분개해 불교 승려들과 합심하여 신부들을 굴리는 등 남들을 고생시키는데 도가 튼 모습을 보이고 있다.[88] 선교사가 1천 명의 신도를 만들면 위대한 선교자로 추앙된다. 그런데 세스페데스는 고작 7년만에 1만의 신도를 늘렸으니 거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자 중 하나로 추앙받을 수 있을 수준이다.[89] 시성의 기적은 미주의 천주교 선교, 독사의 자식(악어)으로부터 신자들을 지켰다라는 2가지 항목.[90] 당장 위에 적혀있는 십자버티기 5시간도 수행할 때 30분만 버텨도 대단한 거고 5시간 버티면 어깨가 빠져서 불구가 될 거라며 말렸으며, 5시간을 버틴 이후 의원으로부터 진찰을 받을 때 이유를 들은 의원이 농담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유성룡은 후에 기적의 증거로 삼기 위해 버텼던 십자가를 강화도 성당 지하에 보관하였다.[91] 원 역사에서는 만찬회에서 오줌을 너무 참아 급성 방광염으로 11일만에 사망하였다.[92] 이런 유럽 중심적인 생각을 들은 유성룡은 분개하여, 명나라의 강대한 포텐셜과 함께 '동아시아에서는 각 지방을 영주가 아닌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한다. 이 말인즉 유럽 전체만큼이나 거대한 중국 대륙이 단일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것이라, 장수들은 크게 충격받았다.[93] 엄청난 근육 때문에 묶어서 조이고 뒤트는 류의 고문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 이걸 보고는 '고문 기술자들이 차마 성직자를 고문할 수 없어 봐 주는구나!'라는 오해를 한다. 뒤늦게 모즈구스를 막기 위해 온 로베르토가 세스페데스가 힘으로 고문틀을 푼 것을 보고 하느님이 도와서 풀어 준 것으로 오해했고, 고문 기술자들은 근육으로 이뤄낸 탈출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세스페데스가 무서워서(...) 그냥 기적이라고 증언한다.[94] 사실 세스페데스를 도우러 온 로베르토 일행의 발소리였다.[95] 근육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그의 공방에는 알몸 상태의 남성모델이 있었고 그 때문에 동성애자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고 한다.[96] 제동장치가 없어서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방법이 없었다는 것과, 상단에 포가 달려있는데 그 당시 화약병기에서 분출되는 매연이 엄청난지라 이걸 배출할 방법이 없어 실전에선 못 써먹는다고 한다.[97]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요리는 프랑스에서 조선식 요리라며 퍼진 모양이라, 당대인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물론 후대의 히틀러까지도 프랑스 요리를 디스한다. 아예 현대까지도 기름기 많은 요리가 대세여서 비만 등의 이유로 국민 평균수명이 저하되었을 정도다.[98] 심지어 이때 내전 중이었으나 동방의 사절단이 왔다고 해서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먼저 공격을 하고 그도 모자라서 아직 싸우기도 전에 승전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이 승전연 중간에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서 반란이 일어난다.[99] 수도를 버리고 도주한, 사실상 패배한 상황에서 수장만 암살한다고 권력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기 때문,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등 돌리게 만드는 악수다.[100] 접근하면 비격진천뢰를 맞고 유폭당할 수 있기에 상대방이 확실하게 항복의사를 밝힐 때까지 원거리 포격전을 벌여야 한다. 드레이크의 지시를 어기고 섣불리 접근하던 잭 선장이 지휘하던 스패로우 호는 아예 비격진천뢰를 맞고 침몰했다. 이렇게 원거리 포격전을 벌이다보니 포탄과 화약값이 많이 나와 해적질에 성공해도 이득이 안 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101] 이걸 본 폴리네시아 사람이 "저 거지 놈들은 뭔 생각으로 여기서 떠다님?" 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102] 원 역사에서는 스페인과의 전쟁으로부터 8년 뒤인 1596년에 이질로 사망했다.[103] 그동안 스페인 배를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아왔고 영국 해군 지휘관으로서 전쟁까지 벌인 작자가 느닷없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이니 당신들을 도와주고 이슬람 해적들을 소탕해주겠다고 하니 호주와의 거래를 모르는 스페인 입장에서는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개한 거 아니냐는 소수 의견도 있는 모양이지만 세스페데스 신부의 언급을 볼 땐 최소한 스페인 내에서는 그가 열병에 걸려 미친게 맞다는 결론을 낸 듯하다.[104] 카리브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영국 해적들이 면직물 무역을 위해 활동영역을 중동지역으로 옮겨버린 바람에 해적의 위협이 사라져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아메리카 대륙으로 스페인을 비롯한 온갖 국가에서 더 많은 개척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105] 부하들을 설득할 때 우리는 민간인이나 납치해 팔아넘길 정도로 겁쟁이가 아닌 진정한 바다사나이들이라는 로망적 이유와 캐번디시의 선단을 턴 뒤에 그들의 보화를 노획할 수 있다는 실리적 이유를 제시하였다.[106] 스페인의 우호국인 조선에 보낸다고 하면 침략의 고삐를 늦출 것으로 기대하였다. 실제로 이 소식을 접한 펠리페 2세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107] 당시 호주에서 판매하는 면직물 가격은 영국 시세의 8분의 1로 드레이크나 엘리자베스 1세가 눈이 돌아갈만한 저가였고, 면직물 무역이 궤도에 오른 이후에는 영국을 경유해 유럽 각국에도 수출되고 있는 상황이다.[108] 다만 이렇게 팔린 무고한 사람들은 목화농장으로 보내기 전에 솔로몬 제국에서 조사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109] 영국에서 실존했던 능지형과 맞먹는 잔인한 형벌로 피부를 벗겨낸 뒤 생식기를 자르고 내장을 파내서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만드는 사형법이다. 캐번디시를 사로잡은 뒤 영국의 법에 따라 처벌하라는 이순신의 말에 여왕의 명을 거역하였으니 반역죄를 적용하여 드레이크가 교수척장분지형을 선고하였다.[110] 무굴제국에 팔려가면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 이왕 죽을 거 때깔이라도 곱게 가자는 심정으로.[111] 마차에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게 설계된 마차. 바람만 제대로 타면 하루에 80km 이상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112] 거석을 탁자로 삼고 그 위에 집을 지어 18인이 당대에 걸쳐 의원을 구성하는 근력 내각제다.[113] 아파치 부족 일파 중 일부 부족이 개척단을 습격했다가 패배하고 도주하면서 무고한 부족의 집락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것처럼 위장하여 공격받게 만들었다. 사실을 전달받은 부족연합이 조선의 분노는 정당하며 속인 부족들의 잔당들을 두들겨패서 사죄하게 만들 정도로 비겁한 행동을 했다고 여겼다.[114]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족에게 조선산 황소 100마리를 선사하였다. 조선산 황소는 버팔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온순한 녀석이고 마릿수도 많아서 주변 부족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보상이였다. 나중에는 황소를 더 받고 싶다며 알아서 복속을 청할 정도.[115] 아메리카 원주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깃털로 장식된 모자이다.[116] 인간과 역사적으로 접촉을 자주 해 온 야생동물들은, 인간을 최상위 포식자로 인식하고 되도록 피하려 한다. 그러나 호주의 야생동물들은 인간을 접할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117] 작가의 답변을 보면 시열아, 네가 태어날 적에 수양자께서 근육이라 속삭이셨다라는 드립이 나온다.[118] 근력만 믿고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송시열이 처음 본 근적들은 내전을 피해 명나라에서 피난온 사람들을 괴롭히던 중이였다.[119] 이때 근적들을 응징해 붕탁이라는 이명이 붙었다. 내수린 단장도 송시열이 내심 근적들을 응징하는 걸 눈치채고 응원했기에 송시열이 탈퇴한 후 극단원이 돌아가면서 붕탁을 연기하며 근적들을 응징하기로 한다.[120] 향후 서안대군의 시호는 목종으로 정해졌는데 시법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암군을 의미하는 시호이다. 근육조선 시대에 총 2명의 암군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로, 어진이 상대적으로 마르게 그려져 근육을 중요시하는 근육조선에서의 그의 위상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121]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유성룡을 태국에 파견했으나, 유성룡이 태국에서 말라리아에 걸리면서 죽을 뻔 하면서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을 뻔 했다. 그나마 유성룡이 그걸 알아서 적당히 무마해 준 덕분에 치명적인 화는 면했다.[122] 이준의 말년에 송시열이 조정에 입사하게 되었다.[123] 좌찬성을 흑산도에 부임 시키려고 했다. 문제는 흑산도는 그렇게 큰 섬도 아니고, 무엇보다 저런 대기근에서 전라도 목포의 흑산도로 가라는 것은 사실상 가서 죽으라는 소리.[124] 일반적으로 미적분의 개발자는 라이프니치와 뉴턴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페르마가 그보다 먼저 미분을 개발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의 페르마 미분 참조.[125] 본래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철학 강의를 위해 스웨덴에 갔다가 허약한 체질이 스웨덴의 혹한 및 여왕이 요구한 빡빡한 스케줄을 못 버텨 폐렴에 걸리고, 이에 더해 그를 시기한 이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도록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그런데 근육조선 세계관에선 근육 철학자로 거듭나 튼튼해진 덕으로 폐렴에 걸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26] 이 과정에서 이형과 내수린을 벌여 패배한다. 김구는 180cm 정도 되는 거구였는데, 150cm 수준의 단신인데다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이형의 면직락(DDT)에 당해 눈을 까집고 기절한 채로 바닥을 뒹굴다가 실려나갔다고 한다.[127] 그의 누나는 일본인 여성 최초로 삼대 운동 일천 근을 달성하는 업적을 세웠다고. 아무래도 료마의 세번째 누나인 사카모토 오토메(坂本乙女)로 추정된다. 원역사에서 무려 키 174cm에 체중이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였는데 입신체비를 단련했다면 말이 필요없다.[128] 을병대기근 당시 맺은 협약에는 일본이 하주도를 되살 수 있는 대신 주민의 이주비용을 일본이 부담한다는 조항이 있고, 나중에 일본과 대한제국이 맺은 조약에서 '양국이 공증한 기타 외교문서는 50년마다 자동 갱신된다'는 문구가 있다. 즉 을병대기근 협약 또한 자동적으로 갱신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129] 이때 일본의 GDP는 대한제국의 화폐가치로 약 900억원이었으니 GDP의 1/3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대한제국이 좀 많이 잡기는 했지만, 최익현의 계산에 따르면 원래 아무리 적게 잡아도 약 200억원은 필요했다고 한다.[130] 순나라에서 건양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인두세를 매겨서 현물을 모았다.[131] 애초에 건양제가 거래 성사에 절망한 이유는 대한제국이 피해를 입어서가 아니라, 큐슈 반환으로 일 폭탄이 떨어져서 가뜩이나 적은 수면시간이 더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거래 자체는 전혀 손해볼 것 없다고 여겼다.[132] 원 역사에서 대한제국이 되기 직전 1~2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 건양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대 황제로 언급되는 광무제의 광무 역시 마찬가지[133] 그나마도 이건 평상시 기준이고, 전시상황이나 뭔가 커다란 업무가 터지면 업무시간은 더 늘어난다. 당연히 수면시간은 나락으로... 대전기에는 2시간으로까지 줄었다고 한다.[134] 작중 언급에 의하면 155cm의 단신으로, 입신체비에 매우 불리한 신체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삼대 천근에 성공했다는 언급이 있다.[135] 참고로 김구는 한양 국립대 사학과 교수인데, 사학과는 수양대군의 적장자인 도원군 이장이 시작을 끊은 학과이기 때문에 사학과 교수는 보통 3대 1000근, 아무리 못해도 3대 800근 이상을 들 수 있어야 한다. 즉 김구는 아무리 못해도 3대 500kg이상인 근육맨이며, 비록 당시 김구는 근위병을 뚫고 오느라 코피가 흐르는 등 만전이 아님을 감안해도 이런 김구를 내수린으로 제압한 이형이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것이지, 절대로 김구가 약한 게 아니다.[136] 의외로 펀치는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섬세한 손가락이 부서질 수 있기 때문. 손날은 그럴 걱정이 없어 카포네의 두개골을 부술 기세로 힘껏 내려쳤다.(...)[137] 원 역사에의 미합중국이 아닌 미국 동부지역에 세워진 유럽계 국가의 명칭이다. 서부지역은 조선계 국가인 미국(迷國)이 세워진 상태.[138] 실제로 현실의 베이브 루스는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가뜨리고 연습을 게을리 해서 성적이 베이브 루스치고는 망하기도 했었고, 이를 쇄신하려 다시 몸 관리를 하기도 하는 등 신체 기복이 심한 선수였다.[139] 실제 벽을 부쉈고 그걸 본 술집에 있던 신사는 누가 미친 황소를 술집에 풀어놨어라는 비명과 함께 달아났다.[140] 당시 황실은 하야했지만 그들이 관리하던 주요 사업들은 그대로 있어서 거대 기업이 된 상태였다. 당시 같이 있던 마피아들도 그걸 알고 우리가 포드 조카를 건드렸다고 평했다.[141] 근육조선 세계관에서 미국은 단일국가인 미국(美國)이 아닌 조선문화권의 서부지역 미국(迷國)과 유럽문화권의 동부지역 아메리카로 나뉘어있는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견제하고 있던 상황이고, 소련은 공산혁명 이후 건국된 서부지역 소련과 적백내전에서 도주에 성공한 로마노프 왕가가 다스리는 동부지역 러시아 왕국으로 나뉘어있는 데다 대한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 80여 개 사단을 극동 지역에 배치해둔 상태라 두 국가 모두 원 역사만큼의 저력은 없는 상태이다. 그렇잖아도 대한제국 -> 대한 공화국의 견제로 원 역사보다 축소된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지못하는 상태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패배하였고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가 함락당하는 등 나치 독일에게 처절하게 발린 상태였다고 한다.[142]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장애인부양자는 부역을 면제하고 잘 보살핀 가족에겐 포상을 줬으며 학대는 엄벌에 처했는데# 이들의 후손인 대한 공화국 국민들은 이에 분노를 느낄만 했다.[143] 원 역사에서처럼 권총으로 자살하려 하였는데 누군가가 탄창을 싹 비워둔 상태였고 숨겨둔 독약을 먹었더니 누군가가 수면제로 바꿔놓은 상태였다. 수면제의 약기운이 돌아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1차 세계대전 때 기념품으로 챙겨둔 수류탄을 사용해 자살했던 것. 헤르만 괴링이 전범재판에서 총통의 생포를 위해 노력했다고 증언한 걸 봐선 괴링의 지시로 권총탄과 독약을 빼돌린듯 하다.[144] 일본에서 내전이 격화되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 국립대학교 총장이 된 김구가 교수로 섭외하였다.[145] 원 역사의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을 두고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평을 남겼다.자기도 자살했으면서 미시마 유키오의 말이 맞다면 아마 이 세계관의 다자이 오사무는 천수를 누리다 갔을지도?[146] 그나마 모델이 능력있는 지휘관이라 3개월이었지 아니었다면 1개월 안에 끝났을 거라 한다.[147] 자동소총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인 44년에 최초의 돌격소총이 개발되었고 이 당시 보병의 기본화기는 볼트액션식 소총이 주류였었다. 기관총은 보병화기가 아닌 분대지원 화기취급이었는데 원 역사에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사용된 독일군의 MG42만 해도 탄약 무게까지 합쳐 10kg이 넘어가며 미군의 M1917 브라우닝까지 가면 탄약 무게까지 합쳐 20kg이 넘어가므로 사격시의 반동까지 감안했을 때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들고 다니며 쏘는 건 엄두도 못 내는 물건들이기에 보병화기로 사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근육조선 세계관의 대한 공화국 군인들은 105mm탄도 가벼워서 입신체비에 도움이 안 된다며 깔 정도로 근대는 물론이거니와 현대 시점에서도 타국은 엄두도 못 내는 고화력 고중량 병기를 마음껏 운용할 수 있는 군대이기에 가능했던 것. 그도 그럴 것이 입신체비로 단련된 장병들의 화력은 일반인 이상일 텐데, 엄폐물째로 사살하며 기동하는 군대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148] 페니실린은 상온에 보관할 경우 액상이라면 유통기간이 길어야 보름으로 매우 짧다. 길어도 보름마다 페니실린을 교체해야 한다는 소리가 되는데 아무리 대량생산을 했다고 해도 최전선을 포함한 전군에게 페니실린을 보름마다 교체한다면 들어갈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149] 휘하 장병들의 잔혹행위에 대한 방임과 다른 국방군 장성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방임죄[150]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독일군 포로들을 내수린을 빙자해 때려죽였다. 죽어도 싼 놈들이긴 했지만 포로 살해는 엄연한 범죄다.[151] 서술 자체는 개그이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겁먹을 수밖에 없는 협박이다. 대한 공화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이유가 나치 독일의 학살행위를 응징하기 위해서였고, 종전 이후 카틴 학살이 폭로되어 행여나 대한 공화국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강제 점령중인 동독 지역을 반환하고 스탈린이 은둔해버릴 정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였다. 더군다나 러시아 왕국은 한때 대한제국의 황족과 혈연관계를 맺은 나라였으므로 대한 공화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다 대한 공화국의 황족은 평화적으로 황실을 폐지하면서 여전히 공화국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가문으로 남아있었고 이러한 정세가 맞물린 소련 입장에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대이기에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52] 실제 목적은 황실 폐지를 통해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하루에 6시간만이라도 자고 싶어하는 종친 전원이 찬성했다.[153] 이후 시베리아와 공화국의 사이가 좋은 걸로 봐서도 원만했던 걸 부정할 건은 없다.[154] 다른 무장친위대 출신들도 중상이거나 의식불명 상태였다.[155] 부공차의 경우 마닐라에서의 민간인 학살 소식을 듣고 경악하며 우리 부대 관할구역에서 그 짓거리하면 아군이고 뭐고 공격하겠다며 엄포를 놓아 필리핀인을 보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156] 원 역사에서의 행적과 겹쳐보면 그냥 개그이지만 대한 공화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신체비 = 효도 → 고의적 근손실 = 불효 인 셈이므로 대놓고 불효하자는 문제 발언이 된다.[157] 위에도 언급되지만 홍범도가 이름을 붙여줬다.[158] 규슈 반환 당시 규슈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하르빈 인구의 3할을 차지하고 있어서 규슈 출신 거주민들이 사는 신도시가 구주거리라고 명명되었다.[159] 모렴야 본인은 각종 채소와 부가 재료들을 조합하여 최적의 맛을 이끌어낸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이를 들은 김상옥은 현존하는 각종 포와 엔진을 조합하여 최적의 전차를 찾아내라고 지시하였다. 이 결과 나온 것이 강구트급의 130mm 부포를 주포로 장착하고 960마력의 엔진을 달고 중장갑을 둘러 티거 2도 상대하기 버거운 괴물전차인 41식 전차였다. 원 역사로 치면 SU-100Y의 화력에 IS-2급의 방호력과 IS-7급의 기동성을 가진 괴물급 중전차인 셈이다.[160] 히틀러는 채식주의자로 유명했다.[161] 건양제의 몇가지 꼼수도 섞여있었다. 먼저 이탄이 타티아나와 알아가기 위해 러시아로 가게 되면 당연히 보좌관들이 따라서 갈 텐데, 이 보좌관들이 니콜라이 2세의 허영심을 마구 긁어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비용을 러시아에서 내게 될 테고, 동시에 황실에 쏟아지는 수많은 일감중에서 유럽 관련은 처가인 로마노프 황가에게 맡기면 된다며 부담시켜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양제처럼 업무에 치여 살던 황실의 종친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탄이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은근슬쩍 혼약이 성사되기만을 바란 것은 덤. 그 바쁜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이탄이 러시아에서 잘 지내기를 바란 건지 다크서클이 짙게 낀 종친 전원이 이탄이 떠나는 걸 배웅하러 나왔다.[162] 원래 웨이트 위주의 운동 자체가 관절에 무리가 많이 가는 까닭에 나이들어서 관절염에 많이 시달리는데 근육조선에서는 입신체비가 기본이므로 인공관절 등 관절손상에 대비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나라에서 무료로 수술해줄 정도로 인공관절시술은 흔해졌지만 이수길은 자신의 잘못으로 국가예산을 쓰게 할 순 없다고 거절했다.[163] 당시 입신체비가 명나라에 퍼지지 않았으니 입신체비사도 아니고 무인이니 근지구력을 위해 지방이 좀 있는 게 정상이고, 설령 창을 휘둘러도 훈영제식법이 있으니 근육이 많을 리도 없다며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수정된 그림을 보고 진짜 고증대로 하려면 지방을 좀 더 늘려야겠지만 차마 거기까진 못하겠다고 말한건 덤.[164] 작중 남동생의 언급으로는 일본은 인구가 적어 유저수의 20% 정도고 중화민국이 50%. 국내는 한 0.1% 될까 싶다고한다[165] 최영직의 남동생이 계속 퇴짜당한 지나치게 근육넘치는 진양옥의 일러스트를 가지고 대한 공화국의 동업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다들 별문제 없다고 말할 정도다.[166] 엄연히 명나라의 황족임에도 일반인인 최영직의 사촌 여동생과의 결혼에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이름만 남은 명나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황태자는 나름 명문가 여성이랑 결혼시킨다고 하지만 친왕들은 연애결혼을 해도 아무도 신경 안쓴다고. 최영직은 딱 '인기 없는 연예인' 수준의 대접이라고 평했다.[167] 다만 일종의 보정이 걸린 것인지 수양대군이 아놀드라고 말한 것을 수양대군의 부인은 아논두라고 듣고 어떤 분이냐며 물어보았었다.
나오에 카네츠쿠: 일본의 권력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조선왕 이연이 1위 조선의 세자저하가 2위 3위는 내 주군이며 다테는 대충 250위다.
구키 요시타카: 250위라 하시니 너무 높게 보신 것 아니오? 북인 기병들 아래에 있으니 3만위쯤 하겠는데?[75] 본래 조선은 임대만 할 계획이었지만, 다테는 한술 더 떠서 '항구 확장해 놓을 테니 더 비싼 값에 항구 이용권으로 사가세요'라는 제안을 해 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금액에 팔릴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공사 준비를 미리 마쳐 놓고 조선의 답이 오자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76] 북인 기병의 경쟁심을 자극해 스스로 간척 작업을 돕도록 하여, 유지비를 충당하고 자신의 권위도 살리는 등 사람 부리는 데 능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77] 실제로 조선이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뒤 현존하는 구리광산 중 매장량 끝판왕 격의 유타주의 빙햄 구리광산 지역 채굴에 착수했고, 도자기는 유성룡이 현대인의 지식을 이용해 본차이나를 연구하여 막 시제품을 내놓기 시작한 상황인지라 본인도 모르게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상황이 되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낸 백자를 본 유성룡의 평가는 개밥그릇이였으니 도자기를 밀어줬다면 거하게 말아먹었을 상황이였다.[78] 여기에는 상국인 명나라에 바치기 위한 쌀을 재배하는 농지라는 명분으로 다른 다이묘들의 침략을 방지하고 농지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이곳을 빼앗기게 된다면 식량 지원을 못 받게 되는 명나라의 직접적 압박과 명나라의 지시를 받은 조선군이 나설 게 뻔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