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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태우 정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서술한 문서.2. 정치에 대한 평가
2.1.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 행보
노태우는 군사 정권이 완전히 종식된 제6공화국 체제의 첫 대통령이다.[1] 노태우는 자신이 전두환과 달리 체육관 선거가 아닌 국민 직선을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덕분에 군사 정권에서 문민 정권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과도기의 대통령으로서, 비록 노태우가 군사 정권과의 연관성이 짙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덕분에 민주화가 급격히 역행하는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군부 내에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거부 세력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1987년 민주화 직후 곧바로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면 태국처럼 기껏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다시 반란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같은 군부 출신이던 노태우조차도 5공 청문회 등으로 전두환 정부 청산 작업을 하자 전두환이 나한테 싸대기 맞는다 운운하던 시절이었다. 무려 현직 대통령에게 말이다. 후임인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문민 정치인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이 희석되었기에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
특히 1988년에 이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이 대승을 거두어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되는 정치적 위기가 있었지만, 야당 총재들과 자주 회담을 열어 의견을 경청하였다. 덕분에 노태우 정부는 이전과는 달리 온건-통합 행보를 펼치는 정부라는 대중적인 인식을 확보하고, 군부 독재와의 연관성이나 3당 합당을 두고 반발하는 반대파들을 포용할 정치적 자산을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날 정의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 정당인 민중당과도 영수회담[2]을 했다. 당시 민중당은 원내에 진입하지조차 못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김영삼과 김대중은 노태우의 협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 민주화 이후 정국에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감정적인 적대를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지금도 대한민국의 정치가 여전히 좌우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기는 하지만, 바로 직전 시대까지 정치 투쟁의 패배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살벌한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 민주화 직후에도 서로 죽고 죽이는 수준의 숙청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오늘날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여야를 막론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대 진영의 업적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둘 모두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며, 단지 주안점을 어디에 더 두냐는 정도의 차이만 나타낼 뿐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사회가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 없이 무난히 이어진 데는 노태우의 협치 정신과 김대중의 전두환·노태우 사면이 큰 역할을 했다.
국회가 행정부를 필두로 한 국가기관에 대한 감사와 감찰을 진행하고 사회적인 문제 등에 대해서 비판, 감시하는 공개 청문회인 국정감사 제도를 부활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행정부의 폭주를 막고 삼권의 상호 견제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유명한 별명은 물태우이다. 본래 재임 시기에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 생긴 별명이지만, 이 표현은 곧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노조, 운동권의 시위가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는데, 분신 자살 시위, 쇠파이프 시위 등 과격 시위도 잇따랐다. 하지만 이에 대해 노태우 정부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고 상당히 소극적이고 온건한 대처를 했으며, 노동 운동의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하여 노동임금을 대폭 인상해나가도록 해갔다. 과거 군부 정권에서 수십 년간 지내온 국민들에게 노태우의 행보는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이는 여소야대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노태우 본인 스스로 민주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이를 거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본인은 물태우라는 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 내용에서 그의 가치관의 단면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매우 좋은 별명이며, 나는 물 같은 지도자로 보이는 게 좋다. 노태우는 소크라테스의 지도자론을 인용하면서 물과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또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라고 부르는 것은 약하다는 뜻인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대통령 심중에 강한 의지만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1989년 6월 9일 기사
또한 노태우는 민주자유당 내의 권력 구조가 김영삼으로 넘어갈 시점에 측근을 동원해 김영삼을 축출하거나 방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무난하게 권력을 이양했다. 사실 이건 민정계에서 김영삼에 맞설 만한 강력한 후계자가 없었던 탓도 컸으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당내 의석 수에서도 민정계가 민주계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민정계에 그럴 듯한 대권 주자가 있었다면, 혹은 노태우가 김영삼만은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보수표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술 더 떠 노태우가 특정 인물을 미는 방식으로 대권 주자를 만들려고 했다면 김영삼의 대권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세계 수많은 국가들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민주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군사 쿠데타 등의 반격으로 정권이 뒤집히거나 내전 상황이 벌어지는 국가는 적지 않다. 가깝게는 미얀마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상술한 태국 또한 정치가 안정된 듯하나 꾸준한 쿠데타로 민주화 세력이 퇴출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의 국가에서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며, 쿠데타까진 아니지만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같이 군부의 지지를 근거로 정권을 장악하는 독재자들은 전세계적으로 출몰해왔으며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노태우 또한 하나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만큼 전두환만큼은 아니더라도 군부의 지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충분히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민주화로 나아가는 대세적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민주적인 절차인 직선제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가 아닌 강경파 누군가였다면, 지금과 같은 민주화로의 성공적인 이양이 실패했거나 훨씬 늦어질 수 있었던 것. 당연히 그에 따라 흘려야 할 피도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간 이어진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군부 세력과 "민주화" 이데올로기의 민주 세력이 더이상의 내전 없이 손을 잡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남북 전쟁 이후 양 극단에 있던 남북의 분열을 막아낸 링컨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군부 시절의 과오나 정부 시기의 부패 등이 그 업적을 상당 부분 깎아먹었지만.
좌파 쪽에서는 여전히 노태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고, 보수파나 중도좌파 쪽에서조차 노태우가 어찌 됐든 군부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하나회 관련된 일이 많다 보니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조차 '대통령 임기 동안의 행보' 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본다. 적어도 민주 공화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그걸 뒤집지 않았고, 집권 후에도 막후 실세로서 군부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내쫓고 전두환에 대한 과거사 청문회까지 용인하는 등 공사 관리도 철저했으며 상당 부분의 선을 지켰다. 군부 출신이지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뽑힌 대통령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본인도 평생동안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2.2. 용인술
역대 정부마다 인사 문제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 데 반해, 노태우 정부에서는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대통령 본인과 정권의 구성원들이 군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인맥이나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인재들을 등용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출신으로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 회담을 성사시켰고, 3차례에 걸친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때문에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총리로 평가 받기도 했다[3].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는 대한민국의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긴 조순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임명했고, 이후에도 한국은행 총재로 기용했다[4].
한편 국방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김종휘 수석의 경우 노태우에게 최초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태우 정부 5년 임기 내내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북방 외교 및 남북 대화를 주도하였다. 이외에도 훗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김중권 전 정무수석이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남북회담 관련 일을 했던 임동원이 전 통일부장관과 국가정보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노태우의 인사가 정치적 반대편에 서 있던 김대중에게조차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승, 문희갑, 김종인, 이진설은 모두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고도 경제성장 및 세계적인 거품 경제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여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부동산 시장을 안정 시키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고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당선되자마자 금융을 전공하고 한국은행과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었던 박승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했다. 노태우는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지시했고, 박승은 일산신도시에 신도시 부지를 선정하고[5], 이후 건설교통부장관으로 기용되어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였다. 문희갑 역시 분당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였고 토지공개념 3개 법안을 도입하였다. 훗날 초대 민선 대구광역시장을 지낸 문희갑은 정치권, 보수단체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 제도 도입을 실현하겠다”며 밀어붙였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반대가 거세어 실패하고 말았다.
문희갑의 뒤를 이은 사람이 김종인이었다. 김종인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의 손자로, 등용 이전에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여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가 경제수석이 되었는데, 1987년 개헌 당시 헌법 119조 2항, 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주인공이다. 김종인은 재벌을 견제했고, 이 때문에 전경련에게서 가장 껄끄러운 인사로 꼽혔다. 또한 북방 외교에도 관여하여, 적성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제2세계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경제 협력 및 통상 협상에 관여하였다.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기용된 김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노태우에게 권위주의 청산,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철,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기 청와대 의전수석 등은 조용한 보좌로 노태우 정부의 숨은 공신으로 꼽혔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서 남북 대화를 주도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도 노태우 정부 시절 통일부차관으로 임명된 바 있다.
이외에도 현홍주 주미대사는 북방 외교와 남북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게 조정하고 미국과 소통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미국 역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와 남북 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고, 고립된 북한이 미국에게 대화를 요구할 때도 미국은 한국을 통해서 대화하라고 나올 만큼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노태우는 이러한 참모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또 대통령 본인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참모들이 회의를 통해서 국정 현안들을 결정하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상술된 바처럼 물태우, 유약한 리더십, 소극적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는 적절한 리더십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3. 제5공화국과 차별화
제5공화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어서, 퇴임 후에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만일 노태우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중국의 장쩌민 → 후진타오 집권 초반부나,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과 같은 사실상 전두환의 2기 집권도 가능했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 블라디미르 푸틴의 캐슬링 같은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졌을수도 있었다.그러나 노태우는 자신이 그래도 국민들의 선택으로 당선되었다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었기에 전두환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하지는 않았고, 당선 이후부터 제5공화국과 거리두기에 들어갔다. 물론 제5공화국 청문회는 졸속에 가까운 처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전두환은 백담사에 2년 간 칩거했고,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이는 이후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는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대통령을 보고 "물태우"라 부르며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풍자할 수 있었던것도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권위주의의 시대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의료보험 제도 확대
의료보험조합법은 1963년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으로 제정되었지만, 당시에는 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적용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1968년 장기려 박사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복지제도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을 넓히면서 어느 정도 보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성장한 경제적 수준에 맞추려면 근본적인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이를 확대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확장시켰다. 특히 집권 여당이 민간 보험 회사들의 입김이 커지기 전에 주도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야권에서는 의료보험제도의 확대는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좌파의 정치적 지향점과 일치하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여권 역시 자당에서 주도하여 추진한 정책인데다 국민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는 상황에서 굳이 축소나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공공영역에서 비용을 분담해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되었다.[6]
3.2. 사회간접자본 건설
인천공항과 경부고속철도(KTX)를 건설을 1992년에 시작하였다. 1989년에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2대 국책 사업으로 지정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차량 및 제반 시스템은 국제 입찰 끝에 프랑스의 TGV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92년 6월 30일, 경부 고속 철도 최초 계획이 발의 되었다.아울러 서해안고속도로와 새만금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분당신도시, 일산신도시 등 1기 신도시 건설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3.3. 범죄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사범, 조폭 수가 줄어들었다. 밀수품 거래와 범죄가 많았던 연안 인근 항만 도시들의 치안도 개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다만, 후술할 청명계획이 들통나 들끓는 여론을 타개하기 위한 쇼가 아니었냐는 목소리도 있었고, 경찰이 혹사 당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공적에만 집중하여 범죄자들을 잡아 들여서 크게 선전한 뒤 나중에 재판에서 죄를 입증하기 어려워 무죄로 방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조직폭력배와 인신매매 조직 만큼은 확실하게 때려잡아서 야쿠자나 한구레 같은 범죄 조직들이 날뛰었거나 현재 진행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이나 브라질이나 온두라스 같은 중남미에서 각종 갱단들이 우글거리는 것과는 대조되게 대한민국에서는 갱단이 발을 붙이기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으며, 노약자도 안심하고 길거리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점 역시 노태우 정부의 확실한 치적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들 중 하나로 꼽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세력들도 이것만큼은 잘했다고 인정을 할 정도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3.4. 지역인재 의무채용 도입
그동안 서울특별시 명문대 출신 졸업자 위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온 주요 대기업들에게 거점국립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가시적으로 채용할 것을 권고해 기업인력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9년 정부투자기관경영평가위원회는 지방대 졸업생들의 취업 촉진을 위해 정부투자기관의 지방대생 채용 할당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본사가 지방에 있는 정부투자기관과 지방사무소 정원이 서울 본사보다 많은 투자기관은 대졸 신규 채용 인력의 60% 이상을 지방대 졸업자로 뽑도록 했으며 나머지 투자기관과 4대 국책은행은 50% 이상 채용토록 했다. 채용 결과는 정부투자기관 평가 때 반영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의무화했다.처음에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정부 권고를 수용해 해당 대학 교수들이 추천해준 인재들을 뽑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 무렵 채용된 이들이 뛰어난 실력을 선보인 덕분에 점점 공채의 문호를 지방대 졸업자들에게도 넓혀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출생의 기업 임원 중 지방거점국립대 출신이 있다면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와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반면 의무적으로 뽑은 TO만큼 실력이나 스펙상 우위에 있는 수도권 명문대 졸업자의 기회를 뺏었다는 점에서 기회의 평등을 훼손시키는 역차별 및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방대생 맞춤 포퓰리즘성 정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3.5. 해저 광 케이블 개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한국은 "꿈의 전송로"라는 모토로 전화, 인터넷 회선을 위한 신규 광케이블 부설공사에 나서 전라남도 고흥과 제주도 간의 해저 광 케이블 공사를 착공하고, 한국―일본―미국을 잇는 태평양 해저케이블 건설에 참여했다. 완전히 깔린 1986년에도 아직까지 대용량 파일은 직접 플로피디스크나 자기테이프에 저장해서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세계화로 대변되는 김영삼 문민정부의 광케이블공사로 이어지게된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에는 아시아와 유럽 92개 사업자가 참여한 세계 최장의 해저 광케이블인 ‘제7 국제 해저케이블(SEA-ME-WE3)’이 개통되어 미국을 경유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와 중동, 유럽 국가들의 인터넷을 초고속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4. 외교·국방에 대한 평가
4.1. 북방 외교 정책
1990년 한소 수교를 앞두고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함께 |
1992년 한중 수교 장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
그 당시 중국과 소련 측은 북한의 주장인 '한반도에 코리아는 우리밖에 없다! 남쪽은 괴뢰국이다.'를 외면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한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당시 정부는 중국, 소련과 시대적 흐름(탈냉전)에 맞춰 자주, 진취적으로 외교를 펼쳐 재임 기간 동안 남한과 미수교 상태에 있었던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비롯해 남한과의 수교를 꺼린 채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알제리, 말리, 앙골라, 부룬디, 잠비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과 국교관계를 수립하여 북한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등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이 과거 적대관계였던 공산국들과 친교를 맺고 북한의 우방국들을 자신의 우방국으로 만들자, 이 때문에 북한은 엄청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고 궁지에 몰리게 된다. 사할린 동포들의 모국 방문도 이 무렵에 이루어진다.
북한과의 관계도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체결, 유엔 동시 가입 등의 내세울만한 치적이 있다. 북한을 지지하는 몇몇 제2, 3세계 국가들(쿠바, 시리아 등)과는 수교를 맺지 못했지만 임기 5년 동안, 과거 전쟁을 벌이거나 대치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소련과 수교를 맺었고 이외에도 냉전 시절 내내 대한민국과 미수교 상태에 있었던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옛 공산주의 진영이었던 동유럽의 국가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북한도 이 즈음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소련과는 불곰사업을 진행하면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며 교류가 이루어졌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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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의 핵심적인 인물은 김종휘와 박철언이 있다. 노태우 본인도 이 두 사람이 북방 외교의 투톱이라고 평가하였다. 북방 정책의 실질적으로 설계한 인물로는 김종휘가 있다. 그의 역할은 미국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나 이후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노무현 정부의 이종석 등에 비견될 수 있었다.
박철언은 체육청소년부장관을 역임하면서, 북방 외교를 실질적으로 실행하였다. 소련 및 구 공산권 국가에 신분을 위장하여 비밀 특사로 파견되어서, 공산권 국가 내부의 학계, 정계, 기업인들과 접촉하여 수교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북한에 수차례 방문하고 김일성과도 만나서 대화를 만들어갔다.
노태우가 전임과 후임 때문에 그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고, 군사 반란과 독재 정권에 가담했던 자라는 전적 때문에 노태우의 이 공적은 평가 받지 못했지만, 북방 외교와 남북 관계에 관련해서는 대한민국이 수십 년간 이어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결국 우위를 점하고 승리했다는 걸 세계에 보여준 공이 크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강력한 반공을 표방했던 대한민국이기에 공산권과 오랫동안 적성국으로 지냈는데도 결국 국교 정상화를 맺었으니.[8] 이처럼 당시 북방 정책은 미국 일변도의 반공주의를 벗어난 다각화 시대에 적합했던 정책으로, 사실상 이후 한국 외교의 노선을 결정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국제 정세(탈냉전)의 도움도 있었다. # 1989년 미국 부시 전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몰타 정상회담' 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몰타회담에서 미국은 동구권(동유럽 혁명)에 대해 소련의 불간섭을 요구했고 소련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1991년에는 상호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체결하는 등의 국제 정세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정세가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이를 적극 활용해 성과로 이끌어 내는지 여부는 결국 정부와 그 리더인 대통령의 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태우가 단지 시절을 잘 만나 치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 부분 만큼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물 흐를 때 노 젓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공산권이 붕괴되는 당시 정세를 잘 읽고 발 빠르게 대처해서 임기 내에 눈에 띄는 외교 실적을 올렸다는 점 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에서 제기되었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그러나 반중, 반러, 반공주의 감정이 심한 우파들의 경우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수교를 오히려 과오로 보는 경우도 있다. 특히 실리보다 이념을 더 우선시하는 극단적인 우파들에게 이런 성향이 나타난다.[9]
4.1.1. 소련의 대북 군사 지원 삭감 및 중단
노태우 정부가 진행한 북방 정책의 성과로, 소련이 북한에 대한 전투기, 미사일, 무기 부품, 석유 공급 등 대북 군사 지원을 삭감했다.# 북한에 제공되던 유류와 식량 지원도 거의 중단되었다. 1992년 11월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대통령으로 방한한 옐친은 노태우에게 "대북 군사 지원을 중단했다"는 말을 거듭했다. "소련과 북한간 상호 원조 조약 제1조인 '군사자동개입' 조항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서 소련과 한국과의 관계가 큰 폭으로[10] 개선되고, 북소관계는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다만 이 과정에서 소련에게 경협자금 30억 달러를 특히 91년 당시 14억 7천만 달러는 무기한 차관으로 제공해 야권은 물론, 민주자유당 내 민주계(김영삼계) 의원들 조차도 "‘러시아 수교를 돈 주고 샀다"는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러시아 경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만큼 어려워지자, 일부 채무를 무기로 상환받으면서, 1998년 당시 이스라엘 회사와 기술협력중이던 "순항미사일 기술까지 완전한 걸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1990년대 ~ 현재까지 북한문제에 관해 러시아가 한국의 대북행보에 관해 직접 강력한 제동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000만달러가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이를 비난한 적이 있지만,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북방 외교 자체는 좋은 정책이었다. 소련과의 수교도 의미가 큰 업적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미안했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4.2. 대북 관계
4.2.1. 남북기본합의서 타결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딱히 공로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긴 하나,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88년 7.7 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북한 및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의사를 표명했으며,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은 1989년 2월 방한하여 국회 연설에서 우리는 북한 쪽으로 다리를 놓으려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평화적인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과 긴밀히 협조해 북한을 실질적·평화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로 유도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1991년 12월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기본 합의서를 타결한 것은 노태우 정부 임기 말의 두드러진 성과 가운데 하나다.
이 남북 기본 합의서는 평화통일 지향 원칙을 양측의 국무총리 서명이 날인된 문서로 확인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후 출범한 모든 후속 정부 대북 정책의 중요한 가이드 라인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11],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12] 역시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반으로 점차 확대해나간 것.
4.2.2.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1년 12월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세 차례의 남북 고위급회담을 가지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자’는 내용의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이때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가 모두 철수되었는데, 배경을 보면 1991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타결했고, 그 연장선에서 미국은 1991년 9월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된 전술핵무기 철수를 발표했으며,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12월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하였다. #
1992년 1월 한-미 당국은 북한이 요구하던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으며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핵시설 사찰을 받게 되었다.
이후 북한의 핵개발이 지속됨에 따라 전술핵 재배치, 핵개발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4.2.3.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 소강
노태우 정부 시절 북한의 도발은 없었으며, 잠수함 침투 사건도, 서해상 무력 시위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무력 도발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고 1건 정도 있었는데, 후술될 이 사건은 북한의 기습 무력 침공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건과 비교했을 때는 약한 측면이 있으며, 국군의 인명피해는 없고 북한군 전원 전멸함으로써 북한군 피해가 훨씬 컸다.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 가운데 드물게도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거의 없었던 시기임은 분명하다. 제1공화국 때 6.25 전쟁, 박정희 정부 때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C-121 격추 사건,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 헨더슨 소령 사건, 육영수 피살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전두환 정부 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숱한 북한의 무력 도발로 인명 피해, 재산 피해가 있었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 등, 햇볕정책이 추진된 김대중 정부 때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북한의 1차 핵실험을 비롯해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은 2대, 3대 세습 체제가 진행되어 강성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가시적인 성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기습적이고 직접적인 타격을 감행하거나 간접적인 도발을 점점 더 자주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대남 도발에서 참고.
그런데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1992년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 외에는 별다른 북한의 대남도발이 없었다.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92년 5월 22일 새벽 북한군 3명이 야간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 분계선을 월경했는데, 국군 제3보병사단에 의해서 전원 사살되었다. 당시 국군의 인명피해는 없었고, 이 때 한국군 병장 한 명이 손바닥에 총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무공훈장을 받고 무사히 전역했다고 한다. 이 작전에 투입된 지휘관, 전투병에 대해서 대대적인 훈장, 포장이 내려졌다. 이 시기 북한의 대남도발이 이전, 이후와 비교해볼 때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고 소강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4.3. 사병 급여 대폭 인상
군인들의 급여를 대폭 인상해주었는데 특히 사병 급여를 대폭 인상시켰다. 대통령 취임 직전 1987년 병장 기준 월급 5,100원(2021년 화폐단위로 16,704원[물가상승률])이었는데 임기를 마친 1993년 11,300원(2021년 화폐단위로 24,748원[물가상승률])으로 인상되어 명목 기준 2배, 실질 기준 약 1.5배가량[물가상승률] 사병 월급이 인상되었다. 이등병 기준 월급은 1987년 3,600원(2021년 화폐단위로 11,791원[물가상승률]), 임기를 마친 1993년 8,100원(2021년 화폐단위로 17,739원[물가상승률])이었다. 출처4.4. 국제 사회
4.4.1. 1993 대전 엑스포 유치 성공
대한민국은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1988년 말에 박람회 준비를 시작했고, 1989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개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국제 박람회 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최 신청 기간(5년)이 촉박하고, 비용 문제 때문에 국제 사회의 여론도 부정적이어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는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다. 대한민국 법률 자문들의 의견도 비관적이었다.대한민국은 부유한 선진국 위주의 축제였던 세계 박람회에 이제는 개발도상국의 참여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고, 대한민국이 당시 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 가입하기 위해 교섭하고 있었던 점을 내세워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국제 박람회 기구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박람회의 주제로 채택된 ‘새로운 도약에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마침내 1989년 12월에 열린 제106차 국제 박람회 기구 총회에서 대한민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1990년 8월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대한민국은 전통 문화가 상당 부분 파괴되고 지역간·계층간의 불균형이 심화되었으며 환경이 오염되는 등 축차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는 대전 세계박람회는 자연스럽게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부제로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 채택되었다.
4.4.2. 1988 서울 올림픽 성공적 개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1988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 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은 공산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주었고, 이것이 공산 국가들의 체제가 무너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된 북방 정책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올림픽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분명히 달라졌고, 이것은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단, 추진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 부정적 평가를 참고.4.4.3. 남북한 UN 가입
위에서 언급된 공산권과의 수교(북방정책)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끌어냈다.4.5. 평시작전권 환수 협의
임기 초인 1988년부터 협의를 시작하여 임기 말인 1992년 말 평시작전권을 환수하는 협의를 완료했다. 실제로 환수된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12월 1일로 원래 계획인 1995년보다 조금 빠른 것이었다. 이로서 평시작전권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게 돌아갔다.당시 정부는 한미연합사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시작전통제권은 1996년 이후에 다시 논의하여 2000년에 환수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으나, 논의는 노무현 정부까지 미뤄졌으며 현재 진행형이다.[18]
5. 경제에 대한 평가
5.1. 성장과 분배의 조화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끝자락에서 재임 기간에 경제 성장이 예전보다 침체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으나[19], 노태우 재임 기간은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는 효과도 있었으며 이 시기에 자가용이 대중화 되고, 해외여행객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연평균 7%~8%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민주화 초입 정부였기는 했어도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조는 탄압했지만 그래도 노동운동이 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임금을 꼬박꼬박 올려주도록 했기 때문에 지니계수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낮은 편이었고,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는 소득 분배가 선진국 수준이었다.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GYH2014061000010004401_P2.jpg
관련 그래프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쓰이는 지니계수는 낮을 수록 빈부격차가 낮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대한민국의 지니계수는 가장 낮았고, 이밖에 다른 계산 방법인 10분위 배율, 5분위 배율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상대적 빈곤율도 가장 낮았다.
또한 연평균 최저임금 증가율은 17%로 1987년 개헌 이후 들어선 5년 단임제 역대 정부 가운데 최대 수치다. 게다가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전체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고, 1992년에는 76.3%이 중산층으로 조사되어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출처
이 때문에 중도·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강의에서 역대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노 전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노 전 대통령은 노태우다.[20] 노태우는 조순 등 개혁적 인사들을 채용하고, 토지 공개념을 시행하려 애쓰기도 하였다. 또한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도 노태우였다. 요약하면 장기 호황을 바탕으로 분배 정의가 강화되고 낮은 실업률 유지와 구매력 증가가 지속되었던 시기로 최근 강조되는 분배를 통한 소위 '소득 주도 성장'이 우리 경제 역사상 유일하게 이뤄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21]
5.2. 부동산 정책과 재벌 견제
종합토지세,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세, 개발 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등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1990년대 중후반에 차례대로 헌재에게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 가장 진보적인 부동산, 토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50평 이상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22]또한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라고 명령(5.8. 조치)을 내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직접적 재벌 규제로 꼽혔다. 이 일로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약 4,000만 평을 처분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3저 호황의 여파로 투기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쏠리면서 이로인한 문제점이 커지자 토지과다보유세 부과와 8.10. 부동산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였고, 주택 보급 확대와 주택 가격 안정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여 분당신도시, 일산신도시 등 1기 신도시를 기획, 건설하였다. 공시지가제도(1989년)를 도입하였고, 노후 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처음으로 승인하는 등의 일련의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데 주력을 했고, 이 정책은 재임초중반기에는 큰 효과를 보지못했지만 본격적으로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꺽였고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 기조자체가 유지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국제 수지와 국가 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였다.
[1] 노태우 개인이 군사 정권 출신인 건 명백하지만, 민주국가의 기준은 '누가' 권력을 잡았냐가 아니라 어떤 체제(특히 헌법)냐에 있다. 즉 노태우는 군사 정권 출신의 민주국가 대통령이라 할 수 있고, 노태우 정권 자체를 군사 정권으로 볼 순 없다.[2] 이우재 전 민중당 상임 대표 및 당 간부들.[3]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 비평서를 내서 반향을 일으켰던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4] 조순은 육사 교관 시절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를 가르쳤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5] 자유로나 일산호수공원 등 상세 계획은 이상희 전 건설부장관, 한국토지공사 사장이 주도하였다.[6] 반면 미국만 봐도 전국민 대상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반대하는 주축이 거대 정당인 공화당으로, 정권 교체기마다 끊이지 않는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슈 중 하나이다.[7]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대로 먹튀 당할 위기에 처해지자 대북군사지원 철회를 하고 한국에 군사 기술 및 물자로 대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군사력 증강, 국방력 강화라는 엉뚱한 방향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8] 실제로 이 북방 외교 때문에 김일성이 펑펑 울었다느니, 냉전 종식 이후에 조선로동당이 1990년 한소 수교와 1992년 한중 수교, 한월 수교가 맺어질 당시 남한과 수교한 구 소련과 중국, 베트남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이성을 잃었다느니 여러 설이 많이 나올 정도였다.[9] 그러나 과거처럼 자유진영 국가들과 관계 맺고 살면 되던 냉전 시대가 아닌 냉전이 끝나고 공산진영이 붕괴 된 후 급격히 진행된 세계화의 물결에서 꿋꿋이 미수교했을 경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애초에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를 버리고 지금까지도 북한보다 한국과 훨씬 더 많이 교류하며(다만 여전히 인권보다 돈이 먼저인 권위주의 국가인건 맞다), 지금 중국이야 과도한 중화사상으로 비판을 많이 받지만 현재 국내외 경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국가이다. 그 미국과 일본도 21세기 이후로 자국 중심주의가 심해지는 판이라 예전처럼 진영 논리에 따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적어졌다.[10] 6.25 전쟁 당시 북한에 전투기를 지원해준 러시아였지만,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후 출범한 김영삼 정부에는, 6.25 당시 정황을 담은 기밀을 한국에 공개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구 소련시절 기밀문서를 담던 박스를 우리 정부 관계자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11] 남북기본합의서 + 공통점 찾기 노력 + 국가정상의 서명. 남북기본합의서에 차관급 실무자로 참여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여기서도 대부분의 합의 과정에 관여하였다.[12] 6.15 공동선언 내용의 구체적인 시행과정이 담김.[물가상승률] e-나라지표 공시 소비자물가상승률 적용.[물가상승률] [물가상승률] [물가상승률] e-나라지표 공시 소비자물가상승률 적용[물가상승률] e-나라지표 공시 소비자물가상승률 적용.[18] 2015년 이전에 전작권 이전/이양을 목표로 한 합의는 2005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2006년에는 2009년 즈음,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국방부장관 회의에는 2012년 4월 17일로 확정되는 분위기였으나, 2010년 한미정상회담에서 2015년 12월로 합의되었다. 2015년 이후 재연기는 없다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국방부 장관 회담에서 2020년대 중반으로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작권 회의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 중반 시기에 활발해 진 것은 각각 현역+예비역, 현역 만으로도 제2차 한국전쟁 발발 시 이길 수 있다는 각각 2004년과 2009년 국방부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19] 그 당시에 자주 거론되던 표현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시아의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하다", "소득 수준 5천 불에 소비 수준 2만 불의 과소비 망국" 등이 있었다.[20] 참여정부(노무현 정부)의 경우 진보적 이미지와는 달리 전반적인 경제정책은 삼성과 유착관계를 맺는 등 수구적이기 짝이 없으며(당시 진보 성향 유권자들로부터 '삼성 공화국'이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갈팡질팡하며 재벌들에게 불확실성, 지지자들에게 배신을 안겨주는 경우(예: 한미 FTA)가 많았다. 사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부터가 경제는 경제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서 경제정책을 사실상 김병준, 한덕수, 김진표 등 경제관료(이른바 '모피아')들에게 일임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21] 다만 이건 시기를 잘 만난 것도 있는게 이 당시가 공산권 붕괴와 급격한 세계화로 인해 수출시장이 워낙에 호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웃나라인 일본이 앤화 절삭으로 직격탄을 맞아서 반사이익을 본 것도 컸다.[22] 사실 이건 5공때부터 이어져온 기조이기도 한데 당장 주택임대차보호법 같은 법안들이 이미 5공 시절부터 시행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