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현재 대한민국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으나, 사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고 2016년 2월까지는 사형 확정 판결이 드물게나마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꽤 많은 사형수가 존재하며[1], 1997년까지는 실제로 교수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집행된 사형수도 상당하다.2. 과거 집행된 사형수
2009년 10월 11일 법무부가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에게 낸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1949년 7월 14일 살인범을 사형에 처한 것을 시작으로 1997년 12월 30일까지 모두 920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아래의 목록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그리고 나무위키에서 언급되는 수준의 사형수들 위주로 일부만 작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저 시절에 은폐·축소된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920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법무부도 정확한 사형집행 건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일단, 1948년 8월 31일 기준으로 해방 후 39명이 사형되었다는 기사가 남아 있으며 기사를 통해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사형 집행은 1948년 8월 27일로 추정할 수 있다.
2.1. 1940년대
||<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이름 || 집행 날짜 || 범죄 내용 || 비고 ||
김태수 | 1946년 8월 2일 | 강도살인, 사기[2] | |
김길동 | 1946년 12월 6일 | 강도살인, 살인미수 | |
강대엽 | 1948년 8월 26일 | 살인, 강도살인 | |
김덕선 | |||
서병선 | |||
송득용 | |||
송칠성 | |||
임수룡 | |||
전광석 | |||
황한주 | |||
김덕규 | 1947년 10월 23일 | 강도살인 | |
박길주 | |||
신종완 | |||
유복 | |||
임춘식 | |||
문상길 | 1948년 9월 23일 | 제주 4.3 사건 도중 토벌대인 박경진 대령을 살해 | 해방 이후 군사재판으로 총살형 집행[총살형] |
손선호 | |||
김영례 | 1949년 7월 14일 | 미성년자 유괴 및 살인, 사체훼손(식인) | 한센병 환자인 범인이 소문을 믿고 실제로 행한 사건.[4] |
2.2. 1950년대
||<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이름 || 집행 날짜 || 범죄 내용 || 비고 ||
최창식 | 1950년 9월 21일 | 한강인도교 폭파 | [총살형][재심] |
강석한 | 1951년 8월 13일 | 국민방위군 사건 | [총살형]주범 5명 전원 공개처형 |
김윤근 | |||
박기환 | |||
박창원 | |||
윤익헌 | |||
정국은 | 1954년 2월 18일 | 간첩 | - |
이유회 | 1957년 9월 24일 | 김창룡 암살 | [총살형] |
허태영 | |||
송용고 | 1958년 5월 20일 | ||
신초식 | |||
최정일 | 1958년 11월 7일 | 살인, 공군 수송기 납북 미수 | - |
정구헌 | 1959년 5월 20일 |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 [총살형] |
조봉암 | 1959년 7월 31일 | 진보당 사건 | [재심] |
2.3. 1960년대
||<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이름 || 집행 날짜 || 범죄 내용 || 비고 ||
조동신 | 1960년 12월 6일 | 간첩죄 | - |
김재곤 | |||
정덕수 | 강도살인 | ||
김정제 | 1961년 7월 11일 | 김정제 간첩 사건 | |
한영창 | |||
오영근 | |||
이정재 | 1961년 10월 19일 | 폭력범죄단체 구성 외 다수 | |
신정식 | 데모하던 학생을 각목으로 때려 죽임 | ||
최인규 | 1961년 12월 21일 | 3.15 부정선거 총지휘 | |
조용수 | 반공법 위반 | [재심] | |
곽영주 |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 시위대에 발포명령[12] | - | |
최백근 | 사회당 반국가행위사건 | ||
임화수 | 고대생 습격 사건 외 | ||
한필국 | 1962년 4월 26일 | 밀수 | |
최영오 | 1963년 3월 18일 | 최영오 일병 살인 사건 | [총살형] |
이방우 | 1963년 11월 7일 | 20여 건의 강도 및 1명 강도살인 | |
안태분 | 강도살인 | - | |
이기형 | 존속살해 | ||
원용섭 | 강도, 살인 | ||
황태성 | 1963년 12월 14일 | 황태성 사건 | 민간인 최초 총살형[총살형2] |
고재봉 | 1964년 3월 10일 | 고재봉 살인 사건 | [총살형] |
조명국 | 1965년 1월 29일 | 강도살인 | |
김영선 | |||
채용춘 | 1966년 6월 20일 | 원주 일가족 3명 살해 | |
조일용 | 1967년 1월 13일 | 연인들 중 남성을 몽둥이로 마구 폭행하고 여성을 강간한 후 금품을 갈취하여 남성 2명 살해, 여성 5명 강간, 30명에게 중상해를 입힘 | [총살형2] |
임동익 | 1968년 4월 23일 | 춘천호 여인 토막 살인사건 | |
김완선 | 1969년 2월 26일 | 시흥 일가족 살인사건 | |
이수근 | 1969년 7월 3일 | 간첩 | [재심] |
김종태 | 1969년 7월 10일 | 통일혁명당 사건 | |
신영식 | 1969년 7월 31일 | 육군 하사 수류탄 투척 사건 | [총살형] |
권재혁 | 1969년 11월 4일 |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 [재심] |
이문규 | 1969년 11월 6일 | 통일혁명당 사건 | |
이관학 | |||
윤상수 | 1969년 11월 28일 | 임자도 간첩사건 |
2.4. 1970년대
||<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이름 || 집행 날짜 || 범죄 내용 || 비고 ||
김병엽 | 1972년 3월 20일 | 실미도 사건 | [총살형] |
김창구 | |||
임성빈 | |||
이서천 | |||
김규남 | 1972년 7월 13일 |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 | [재심] |
김질락 | 1972년 7월 15일 | 통일혁명당 사건 | - |
정태묵 | 1972년 7월 28일 | 임자도 간첩사건 | |
박노수 |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 | [재심] | |
정외준 | 1972년 8월 14일 | 걸인 부부를 낫으로 살인 | - |
문세광 | 1974년 12월 20일 |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 |
박순일 | 1975년 4월 8일 | 재단용 가위를 들고 장터에서 난동을 피워 2명 살인, 12명 중상해 | [총살형] |
김순금 | 1975년 | 양주 두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 | 시기불명 |
서도원 | 1975년 4월 9일 | 인민혁명당 사건 | [재심] |
도예종 | |||
송상진 | |||
우홍선 | |||
하재완 | |||
김용원 | |||
이수병 | |||
여정남 | |||
이원모 | 1975년 8월 2일 | 유네스코 지하다방 인질사건 | [총살형] |
최성환 | [총살형2] | ||
윤찬재 | |||
임병석 | 1976년 12월 28일 | 임병석 법정증인 살인사건 | - |
김대두 | 17명 연쇄살인 | ||
최정관 | 돈을 훔치기 위해 가정부와 3남매 살해 | ||
방영근 | 강도살인 | ||
채수정 | 국가보안법 위반 | ||
이홍길 | 1977년 3월 12일 | 대구에서 인질극 중 수류탄 터트려 1명 살해하고 2명에 중상 입힘 | [총살형] |
전세규 | 신당동 부성사 전당포 살인 | ||
이팔국 | 1977년 11월[28] | 이팔국 아내 살인 사건 | - |
오휘웅 | 1979년 9월 13일 |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 | 진술증거만으로 사형선고된 최초의 사례[29] |
2.5. 1980년대
||<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이름 || 집행 날짜 || 범죄 내용 || 비고 ||
박흥주 | 1980년 3월 7일 | 10.26 사건 | [총살형][재심중] |
김재규 | 1980년 5월 24일 | ||
박선호 | |||
이기주 | |||
유성옥 | |||
김태원 | |||
박흥숙 | 1980년 12월 24일 | 살인, 살인미수 | - |
서덕기 | 1980년 12월 26일 | 돈을 뺏기 위해 가정집에 침입하여 노부부 중 남편 살인, 아내 살인미수 | |
김한수 | 1980년 12월 27일 | 영동에서 자매 살해 | |
이헌삼 | 강도살인 | ||
박철웅 | 1982년 7월 22일 | 금당 골동품상 부부 납치 살해사건 | |
주영형 | 1983년 7월 9일 |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 | |
박분례 | 박분례 보험 살인사건 | ||
진항식 |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 [재심] | |
김상회 | |||
한상인 | 1985년 10월 31일 | 잠원동 한신아파트 살인 | - |
황인규 | 일당 7명과 함께 유흥비 마련을 위해 18차례에 걸쳐 강도 및 강도강간 | [33] | |
최윤성 | |||
최성훈 | |||
이정수 | 특수강도, 강도강간, 살인미수 | - | |
이양길 | 이양길 토막 살인 사건 | ||
최을호 |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 [재심] | |
김정인 |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 | ||
이동식 | 1986년 5월 27일 | 사진작가 이동식 살인사건 | 대한민국 최초 프로파일링 수사 |
이용이 | 1987년 5월 18일 | 장모와 아내 살해, 처제 강간 | - |
최양호 | 강도살인 | ||
진광룡 | 강도살인 | ||
김구환 | 유괴, 살인 | ||
길완기 | 국교생 3명 강간살인 | ||
고금석 | 1989년 8월 4일 |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 |
김동술 | |||
함효식 | 원혜준 유괴 살인 사건 | ||
김성철 | 이우동 사건 | 미성년자 최초의 사형판결 | |
이우동 | 대한민국 최연소 사형 (21세) | ||
시석기 | 복면강도를 하며 2명 살인, 4명 강간 | - | |
강상원 | 동거 여인의 남동생 2명 살해 |
2.6. 1990년대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0년 4월 17일 ||
<rowcolor=#fff> 이름 | 범죄 내용 |
강창구 | 공주 연쇄살인 사건(6명 성폭행, 살인) |
권현집 | 어린이대공원내의 점포를 임대해 주겠다고 박모씨를 속여 450만원을 가로챈 후 박씨가 고발하려고 하자 1982년 8월 31일 밤 충남 연기군 동면 산으로 유인, 나일론끈으로 목졸라 살해 |
최정호 | 1987년 3월 29일 공범 4명과 함께 데이트 중이던 남녀 납치, 금품 갈취 후 남자는 산채로 수장해 살해하고 여자는 집단 성폭행 및 감금[35] |
박영국 | 1983년 10월 26일 0시 30분쯤 서울 영등포 식당에 침입 주인 박모(52)씨, 김모(45)씨 부부를 살해한 후 사망한 김씨를 강간 |
어성갑 | 중곡동 세 모자 살인 사건 |
육근성 | 1987년 3월 9일 서울 중화2동 김모씨(52·여)집에 침입해 혼자 집을 보던 김씨의 딸 한모양(23)을 전선으로 목졸라 살해하고 때마침 외출했다가 귀가한 김씨도 살해 |
유자환 | 1986년 3월 20일 천안시 김모씨(33·여)집에 침입, 현금을 빼앗고 반항하는 김씨를 살해한후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집에 돌아온 김씨의 딸 최모양(6)도 살해 |
이배진 | 김기현 변호사(74)의 처 조모씨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쳐 7년간 복역한 것에 앙심을 품고 1982년 8월 24일 서울 순화동 김씨의 사무실에 찾아가 돈을 요구, 거절당하자 등산용칼로 김 변호사를 살해, 사무장은 중상 |
천영훈 | 1987년 8월 17일 자신을 정신요양원에 입원시킨 것에 앙심을 품고 부산 동대신동 이모집에 찾아가 이모부 내외를 살해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333> 1990년 12월 4일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1년 12월 18일 ||
<rowcolor=#fff> 이름 | 범죄 내용 |
강영리 | 서지우와 공모해 강영리의 남편을 운전연습을 시켜주겠다고 유인해 뒤에서 승용차로 들이받아 살해, 시어머니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침 |
서지우 | |
김태화 | 연쇄살인 · 구로동 샛별룸살롱 살인 사건 광주 양동 백양주점 접대부 살해 그 외 미용실 등에 침입해 수십차례 강도, 강간, 강도상해 등 |
조경수 | |
서병원 | 12세 여학생을 산으로 데리고가 강간살해 |
심재화 | 동거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집에 침입하여 두 사람 살해 |
윤도영 | 1984년 5월에 동거녀의 오빠가 빌려간 돈 2천만원을 갚으라고 하자 갚겠다며 승용차로 유인, 살해 후 암매장.[37] |
전재복 | 친구의 부인을 강간한 뒤 두살배기 딸과 함께 살해 |
홍순영 |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2년 12월 29일 ||
<rowcolor=#fff> 이름 | 범죄 내용 |
권갑석 | 1984년 9월 부산에서 내연녀 김진자와 짜고 내연의 남편과 자신의 아내 살해 |
김삼중 | 1990년 6월 60대의 부녀자에게 밥을 달라고 해 없다고 하자 살해 이외에도 69차례 부녀자 강간 |
김영호 | 1989년 자신의 의붓아버지 둔기로 살해, 한 달 후 자신을 고아원에 맡기고 재가한 친모 강간 후 살아있는 친모에게 석유뿌리고 방화 및 존속살해 |
문경한 | 이완희 유괴 살인 사건 |
심영구 | 1989년 5월부터 12월까지 6차례에 걸쳐 연쇄살인, 강도살인 |
유충남 | 1984년 9월 보험금을 타낼 목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교통사고 가장하여 살해 |
윤용필 |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의 주범 |
장효상 | 자신이 과거 7년형 복역 이유를 고종형수 때문이라 생각하고 1984년 9월 고종형수 살해 외 같은 마을 주민 2명 살인미수 |
전용운 | 전용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1987년 귀갓길의 여성 3명 미행 후 성폭행 살해, 1명 성폭행 살인미수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4년 10월 7일 ||
<rowcolor=#fff> 이름 | 범죄 내용 |
김대흥 | 방화살인 |
김만수 | 살인, 사체유기 |
김무경 | 김희성 유괴 살인 사건 |
문승도 | 이득화 유괴 살인 사건 |
박기태 | 석관동 일가족 살인 |
이필완 | |
박현룡 | 1990년 3월 서울에서 가정집에 침입, 금품을 강취한 후 임신 3개월의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강도강간 16회, 상습강도 8회 |
서채택[38] | 강도살인 |
오태환 |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의 주범[39] |
이덕재 | 살인 |
임남형 | 강도살인 |
전기철 | 이완희 유괴 살인 사건 |
조현철 | 가정집에 침입해 부녀자 성폭행하고 살인 등 |
차순석 | 처남자녀 2명 살해 |
최오림 | 도끼로 부인, 장인, 장모, 친딸 살해하고 친아들 살인미수.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5년 11월 2일 ||
<rowcolor=#fff> 이름 | 범죄 내용 |
김동식 | 살인 등 2범 |
박성규 | 살인 및 강도 |
배진순 | 둔촌동 모녀 강도강간 사건 |
김철우 | |
서혁빈 | 제주도 고교생 살해 후 암매장 |
송정호 | 성내동 내연녀 가족 살해 |
신민철 | 할아버지 살해 |
온보현 | 부녀자 납치, 성폭행하고 2명 살해 |
이근호 | 존속살해 |
이두견 | 초등학생 유괴살해 |
이호성[40] | 일가족 5명 살해 후 암매장 |
강동은 | 지존파 |
강문섭 | |
김기환 | |
김현양 | |
문상록 | |
백병옥 | |
지춘길 | 노인 6명 연쇄살인 |
최명복 | 부산 새마을금고 강도 살인 사건 |
||<-2><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000,#555> 1997년 12월 30일 ||
이름 | 범죄 내용 |
강순철 (남, 29세) |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2명에게 강간을 시도하다 방화하여 1명 사망, 1명 중상 |
곽도화 (여, 36세) | 곽도화의 남편을 목졸라 살해 후 강도로 위장 |
오숭관 (남, 36세) | |
김선자 (여, 58세) |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5명 살해) |
김승도 (남, 39세) | 잔혹 살인[41] |
김영환 (남, 38세) | 재산 문제로 가족 3명 살해 |
김용제 (남, 27세) |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
김정석 (남, 27세) | 충무 일가족 방화사건 |
김준영 (남, 33세) | 총기를 이용해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일가족 4명 살해 |
변운연 (남, 31세) | 법정증인에 앙심 품고 살해 |
신정우 (남, 41세) | 집주인 살해 후 암매장 |
유영택 (남, 29세) | 홍성 가정집에 침입해 모녀 성폭행 후 어머니를 클러치페달로 내리쳐 살해 |
이상수 (남, 28세) | 70여 차례 가정 침입 강도, 신고를 막기 위해 윤간 |
전장호 (남, 26세) | |
이영길 (남, 36세) | 마포구에서 모친, 남동생 살해 후 암매장 |
임상철 (남, 28세) | 10대 여성 강간 살인, 방화하여 시신 훼손 |
임영자 (여, 48세) | 임영자의 남편에게 극약을 탄 초콜릿을 먹여 살해, 사체 화장 |
한춘도 (남, 46세) | |
임풍식 (남, 38세) | 9살 여아 강간 후 살해, 유기 |
장정근 (남, 48세) | 다방 여주인에게 돈 빌리는 것을 거부당하자 망치와 칼을 이용해 잔인하게 살해 |
정은희 (남, 27세)[42] | 친구가 후배를 자꾸 괴롭힌다는 이유로 친구 살해 후 암매장, 동네 남성에게서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살인 청부 |
태규식 (남, 29세) | 공범 2명[43]과 함께 150차례 퍽치기 및 강도, 2명 강도살인 |
한재숙 (여, 51세) | 내연남[44]과 짜고 남편 독살 |
3. 미집행 사형수 명단
현재 대한민국에 생존해 있는 사형수는 모두가 살인범이며, 이전과 같이 정치범은 없이 대부분 연쇄살인 또는 대량살인과 같이 2명 이상의 사람을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토막살인, 조직범죄 등 살인범 중에서도 특히나 흉악범들이다.원래 미집행 사형확정자는 총 71명이지만 5명이 자살, 9명이 지병으로 사망하며 57명만 남았다. #[45] 또한 1999년 8월 15일 이루어진 특별사면으로 2명의 여성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며 대한민국에는 여자 사형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현재 미집행 사형수는 모두 남성이다.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 집행 이후 현재까지 나온 사형 확정 판결은 51건이다. 제1심 공판사건 죄명별 사형인원수 통계를 보면 2002년을 기점으로 한 해 10명 미만으로 줄었고, 2011년부터 5명 이하로 감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들어선 2007년부터는 법관들이 사형 선고에 더욱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2008년 이후 사형 판결이 확정된 사형수는 단 8명 뿐이다. 이들은 모두 살인범으로 피해자가 두 명 이상이며, 중대범죄(강도, 강간)와 결합된 살인 범행이거나 동종 강력범죄 전력이 있다. 범행 과정이 특히 잔혹한 경우도 있고, 범행 이후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이후 사형이 확정된 사건 8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량 살인의 경우,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의 범인인 김민찬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임도빈은 군대에서 총기를 이용하여 동료나 상관들을 살해했는데, 사망한 피해자가 4명 이상이다. 논현동 묻지마 방화 살인사건의 정상진은 치밀한 계획 하에 고시원에 방화하고, 흉기를 사용하는 등 잔혹한 수법으로 총 6명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범행 과정에서 여러 명의 부상자를 만들었고,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중대범죄 결합 살인의 경우, 보성 어부 살인사건의 범인 오종근은 젊은이 4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했고, 그 중 3명은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인 범행(강간살인)이며, 그는 범행을 부인하며 진지하게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영암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이향열은 특수강간 등으로 징역 15년을 복역한 전력이 있으며, 자신의 처, 조카, 친딸 등 친족을 강간하고, 이 중 3명을 살해하는 등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인 강간살인 범행을 두 건 저질렀다.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정성현은 초등학생 여아 2명을 강간 목적으로 유인해 강제추행하고 살해하였으며, 사체를 훼손하여 유기하기까지 하는 등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인 살인 범행을 두 건 저질렀고, 이외에도 다른 40대 여성을 사망하게 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범행을 저질렀다.
강호순은 연쇄살인범으로 무려 10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했는데 일부 피해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등 중대범죄가 결합된 살인을 저질렀고, 보험금 목적으로 집에 방화하여 처와 장모를 살해하는 등 잔혹한 범행 수법을 사용했다. 시신을 암매장하거나 훼손한 경우도 있다.
대구 중년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인 장재진은 위 유형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 경우인데도 죄질이 너무나 극악무도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여친의 부모를 망치와 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들이 있는 곳에서 전여친을 기다리다가 귀가한 전여친에게 그녀의 부모가 살해된 시신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준강간하고, 이후에도 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감금하다가 결국 전여친이 탈출 과정에서 중상을 입게 했다.
2010년대에는 김길태, 오원춘, 김홍일, 이영학, 안인득, 권재찬 등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특이하게도 공주교도소 살인 사건처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으로 판결이 무기징역으로 되돌아간 사례도 있다. 이들의 감형 사유로는 위와 같이 실제로 사형이 확정된 사건과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사망한 피해자가 한 명이거나, 잔혹한 범행 수법을 사용하지 않은 점, 심각한 범죄 전력은 없는 점, 사전 계획된 범행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 심신미약 상태였거나 정신에 다소 문제가 있는 점 등이 언급되었다.
2020년대 이후로는 사형 판결이 확정된 사형수가 단 한 명도 없다. 과거에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보다 더욱 무도한 살인 행각을 저지른 이들도 대부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있는 상황이니 사형은 사실상 폐지된 셈이다. 대신에 2010년대 후반부터는 한강 몸통시신 사건,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 등 흉악범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에 '가석방이 적절하지 않다'고 언급하거나,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으로 선고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2014.7.24. 선고 2014노68 판결에서 사형 선고에 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천 모자 살인사건의 항소심 판결문인데, 당시 서울고법은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원심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근 10여 년 동안 사형이 선고 확정된 경우, 이 사건과 동종의 존속살해 사건의 양형,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된 경우 등을 사실조회를 통해 비교 분석하여 (1) 2003년 이후 사형이 확정된 사건들은 이 사건 범행보다 죄질이 더 중한 경우가 16건 중 13건으로서 대부분이고, 죄질이 더 가벼운 사건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점 (2) 이 사건 범행과 같은 존속살해 사건 중 2005년 이후 무기징역이 확정된 사건은 13건인데, 이 사건에 비해 죄질이 더 경한 사건이 3건 정도 있으나 대부분은 이 사건 범행과 죄질이 유사하거나(5건) 더 중한 경우(5건)인 점 (3) 2005년 이후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확정된 사건(7건) 중 이 사건에 비해 죄질이 더 경한 사건이 1건 있으나, 대부분은 이 사건 범행과 죄질이 유사하거나(2건) 더 중한 경우(4건)라고 판단되는 점을 토대로 위와 같은 판결을 내렸다.
한편 상대적으로 죄질이 덜 불량한[46] 사형수들은 이미 상당수가 감형을 받았다. 1998년 2명, 1999년 여성 2명을 포함하여 5명, 2000년 2명, 2002년 4명, 2008년 6명의 감형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19명의 사형수 중에서 가석방된 사람은 2025년 기준 1명도 없다.
2025년 현재 최고령 사형수는 라경옥(1942년생)이고, 최연소 사형수는 장재진(1990년생)[47]이다. 이들은 평균 3.5명을 살해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수는 총 182명이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만든 사형수는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이다.[48] 사형수들은 전반적으로 1990년대 중반~2000년대에 범행을 저질렀기에 당시 청년인 사람들이 현재 중장년이 되었다.
||<-3><rowbgcolor=#333><rowcolor=#fff><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555><tablebgcolor=#fff,#191919> 대한민국의 미집행 사형수 ||
<rowcolor=#fff> 연도 | 이름 | 범죄 내용 |
1993년 | 원언식 (1957년생, 당시 35세) | 원주 왕국회관 화재 사고의 범인이다.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 가정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을 찾아가 '아내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불이다가 방화해 총 15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한민국 최장기 사형수. |
1995년 | 박한상 (1971년생, 당시 24세) |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 도박과 유흥으로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빚까지 진 그는 한약업을 하던 부모의 100억원대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흉기로 수십차례 찔러 살해, 범행 은폐를 위해 집에 방화했다. |
성낙주 (1951년생, 당시 43세) | 황금장 여관 모녀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동거녀에게 얹혀 살다 동거녀의 14살 여중생 딸이 "그만 나가달라"는 요구를 하자 밤에 자고 있는 틈을 타 목을 졸라 살해한 후 토막내 정화조에 유기, 가짜 편지를 써서 가출한 것으로 속였다. 이후 동거녀와 싸우게 되면서 동거녀를 살해하고 똑같이 토막을 내 정화조에 유기했다. | |
성태수 (1960년생, 당시 36세) | 순천 초등생 납치 살인 사건의 주범. 인신매매로 돈을 벌기 위해 공범 서동원과 함께 중학교 1학년 여중생과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을 납치,[49] 남학생은 살해한 뒤 댐에 유기하고 여학생은 13일간 끌고 다니며 수차례 성폭행했다.[50] | |
전석재 (1965년생, 당시 29세) | 울산 유곡동 초등생 유괴살인범. 미성년자 성추행 전과 2범으로, 3만원을 쥐고 가던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11세)을 보고 돈을 빼앗을 겸 납치해 자신의 자취방에서 사흘동안 9차례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그 뒤 자신의 아버지에게 "여자애를 죽여서 장롱에 넣어놨다"고 털어놓았고, 아버지가 경찰에 알리면서 붙잡혔다. | |
전용재 (1968년생, 당시 26세) | 강태민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동을 유괴해 돈을 얻어내기로 결심, 경기도 안산시에서 8세 남자 초등생을 승용차로 납치해 참나무에 묶어놓고 재갈을 물린 뒤 도주했다. 초등생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서서히 질식해 당일 사망했다. 이후 부모에게 3천만 원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다 붙잡혔다. | |
1996년 | ||
이우철 | 안양 AP파 조직원 살인사건의 범인들. 청부 폭력 사실을 폭로하려는 조직원 및 그의 여자친구를 살해 후 암매장했다. 당시 뉴스 영상 | |
정병근 (당시 29세) | ||
정병옥 | ||
1997년 | 김용식 (상등병, 당시 21세) | 강원도 철원 육군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군 범죄자로 강원도 철원군 모 육군 부대에서 자신의 신변을 비관해 K2 소총으로 총기를 난사하여 병사 3명을 살해하고 상병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 뒤 병사 1명을 인질로 붙잡았다가 자수했다.[51] |
박광 (당시 34세) | 대구 온달주점 살인사건의 범인. 강도살인죄로 15년형을 복역하다가 가석방된지 불과 2개월도 안돼 대구의 온달주점에서 술값 지불을 요구하는 주점 주인과 종업원 등 총 3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에도 공범과 고등학교 교사를 납치하고 1억 5000만원을 요구하는 범행을 저지르다가 붙잡혔다.[52] | |
이승수 (당시 21세) | 대구 동구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대구시 한 가정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다 들키자 주부를 흉기로 살해하고, 아들에게 중상을 입힌 뒤 도주했다. 10일 후에는 우연히 만난 20대 동성애자 남성과 술을 마시다가 남성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흉기로 살해하고 현금을 빼앗았다. 20분 후에는 한 분식집에 들어가 그곳에서 일하던 여고생의 말투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흉기로 살해하고, 40분 후 새벽기도를 가던 할머니의 가방을 빼앗다가 반항하자 흉기로 살해하는 등 1시간만에 3명의 사람을 살해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용돈을 떨어져 돈을 훔치려 했는데 피해자에게 들키자 순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고, 처음 사건 이후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 |
임동수 (당시 26세) | 봉천동 일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로, 막노동을 전전하며 사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현관문이 열려있던 집에 침입해 주부와 두 아들(6세, 4세) 등 3명을 칼로 수십차례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치정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피해자의 바지를 가위로 자르고, 시신들이 널부러진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자다 검거되었다. "사형당하고 싶어서 도망가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재판에서는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감형을 요구하는 행태를 보였다. | |
최정수 (1976년생, 당시 21세) | 막가파 두목. 폭력 등 전과 8범으로, 동료 조직원들과 함께 외제차를 몰던 40대 주점 여주인을 차량에 납치, 금품을 빼앗고 옷을 모두 벗긴 뒤 소금 창고에 생매장했다. 이외에도 조직 자금 마련을 위해 조직원들과 수십건의 소매치기, 퍽치기 범행을 저질렀다. 나머지 조직원들 중 두 명은 무기징역, 7명은 징역 1년6월~7년형을 선고받았다. 2006년 SBS <그것에 알고 싶다>에 출연해 "피해자 가족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당시 자신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 |
홍대복 (당시 44세) | 제천 내연녀 수장사건의 범인. 제천에서 내연녀에게 금전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약물을 주사한 뒤 의식을 잃은 내연녀를 마대자루에 넣고 바다에 던져 수장했다. 4일 후에는 채무관계에 있던 지인의 집에 침입해 지인의 아내를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 |
1998년 | 이원수 (당시 43세) | 경북 안동 초등생 살인범. 안동시에서 여자 초등생 2명을 외딴 빈집으로 유인, 1명을 목졸라 살해하고 나머지 한명은 성폭행하다가 살해했다. 이후 도주하다가 여관에서 만난 16살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목졸라 살해했다. 나중에 경북 안동경찰서에 제보자랍시고 수사 진척 상황만 따져 묻다가 의심만 잔뜩 사서 결국 붙잡혔다. |
정근호 (당시 26세) | 대구 수성구 제과점 부부 피살사건의 범인. 자신에게 "남편의 간통 현장을 잡아달라"는 여인의 부탁으로 그의 남편을 뒷조사 하던 도중, 이들 부부가 상당한 재력을 가졌단 걸 알게 되자 강도 살해했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가 여인을 결박하고 그의 남편을 칼로 마구 찔러 살해했고, 여자도 목졸라 살해했다. 살해한 부부 집에서 잠을 자고 샤워까지 하는 엽기적인 행태를 보였고, 날이 밝자 현금과 수표 등 1억원어치를 훔쳐 달아났다가 검거되었다.[53] | |
1999년 | 고종원 (당시 33세) | 안양 사채업자 부부 강도살인사건의 범인. 금품을 빼앗으려 공범과 공모해 경찰을 사칭하여 사채업자와 그 부인을 납치 후 살해했다.[54] |
2000년 | 강종갑 (당시 48세) | 전남 순천 모녀 살인사건의 범인. 살인죄로 20년을 복역하다 만기출소한지 4개월만에 이복 형수와 그의 어머니 쇠망치로 내리쳐 살해했다. 살인 전과자인 자신과 살기를 거부하고, 돈을 빌려주지 않은 것에 격분해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
고흥수 (당시 24세) | 충남 모자 살인사건의 범인. 1997년 처가 이혼을 요구하자 격분해 목을 졸라 살해해 하천에 암매장했으며, 1999년에는 내연녀로부터 사업자금으로 빌린 2천만원을 갚지 않을 목적으로 내연녀와 그녀의 7세 아들을 살해했다. 이어 이 범행을 숨기기 위해 내연녀 모자 살해에 가담한 공범까지 살해하는 등 총 4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다.[55] | |
노경락 (당시 30세) | 예천 50대 농민 부부 피살 사건의 범인. 자신의 집에서 동거하던 외사촌 여동생(24세)을 수년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폭력을 휘두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외삼촌 부부에게 경고를 받고 강제로 헤어지게 되자, "사실 외사촌은 나를 좋아하지만 외삼촌 부부가 반대해서 그런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외삼촌 부부를 손도끼로 살해했다. 이틀 뒤에는 외사촌 여동생마저 살해, 암매장했다. 2013년에 언론에서 또 거론된 적이 있는데, 자해 난동을 부린 탓이다. | |
박경수 (당시 24세) | 대구 평리동 모녀 강도강간 살인사건의 범인. 유일한 조선족 사형수로, 대구에서 출국 경비[56]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가정집에 침입, 모녀를 결박하고 돈을 빼앗은 후 딸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모녀가 격렬하게 반항하자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후 당시 화장실에 숨어있던 딸의 친구(여, 15세)를 발견하고 강간했다. 판결문 | |
박진봉 (당시 42세) | 김해 유괴 살인범. 양정규(11세)군을 납치해 목졸라 살해하고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며 도피, 도중에 한 노숙자를 공범으로 끌어들이고, 머리를 깎고 승려 행세도 했다. 나중에 공범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살해할 목적으로 수면제도 가지고 있었다. | |
이규상 (당시 30세) | 평택 지인 폭행 살인사건의 범인. 도박자금을 마련하려고 공범의 부인이 접대부로 일할 때 알게 된 40대 남성을 유인해 살인했고, 검거 당시 이미 다른 살인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불교에 귀의했고, 이후 그림에 소질을 보여 화가가 되었다. | |
이순철 (당시 32세) | 영웅파 두목. 살인죄로 12년을 선고받고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공범들과 함께 동료 조직원을 집단 폭행해 살해하고 시신을 수백개로 토막낸 뒤 암매장했다. 범행의 비밀을 지키고 결속을 다진다며 시신의 간을 꺼내 공범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는 과거 전과를 볼 때 교화 가능성이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 |
정형구 (당시 36세) | 삼척 신혼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 고속도로에서 신혼부부가 탄 차가 자신들을 추월했다는 이유로 운전자 부부에게 엽총을 발사해 살해하고, 이를 목격한 사람에게도 총을 쏴 중상을 입혔다. 공범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
황호진 (당시 23세) | 황호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옥탑방에 들어가 절도를 하고, 보름 뒤에 다시 찾아가 옥탑방에 살고 있던 자매 중 언니를 그녀의 동생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 목졸라 살해했다. 8개월 뒤 나이트에서 알게 된 여성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강간하려다 목을 졸라 살해하고, 옆방에서 자던 여성도 강간, 살해했다. 그 뒤 집에 불을 지르고 알리바이를 만든다고 피해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 증거가 되어 검거되었다. | |
2001년 | 강영민 (당시 29세) | 옥천 내연녀 부부 보험금 살인사건의 범인. 보험금을 목적으로 내연녀를 거래처 직원과 결혼시킨 뒤 남자를 살해하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내연녀도 살해했다. 수사 과정에서 그가 과거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의 인쇄소에 방화하거나 공범을 시켜 고의로 교통사고로 내 아내를 살해하려 한 사실[57]이 밝혀졌다. |
김해선 (1969년생, 당시 31세) | 고창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11살 초등학생을 강간하려다 피해자가 목이 졸려 사망하자 사체를 방치한 뒤 도주했다. 두 달 후, 길가던 남매 중 12살 남동생을 목졸라 살해하고 17살 누나는 산으로 끌고가 강간하고 칼로 마구 찌르며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이후 허벅지 살을 도려내는 엽기적인 행위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하거나 현장검증에서 "불편하니 수갑을 풀어달라"는 등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 |
백문기 (당시 33세) | 전주와 익산 연쇄 강도 살인사건의 범인. 전과 16범으로,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공범과 함께 강도짓을 하다가 전주에서 낚시를 하던 모 방송국 부장을 흉기로 살해, 4시간 뒤 근방의 호프집에 들어가 여사장을 흉기로 살해했다. 이후 교도소 동기를 찾아가 1주일만 숨겨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택시를 타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택시기사를 살해했다. | |
왕리웨이 (당시 24세) | 안산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유일한 중국인 한족 사형수이다. 2000년 4월부터 6월까지 경기 안산 일대에서 심야에 혼자 돌아다니는 여성들을 노려 돌멩이와 망치 등으로 공격하고 금품을 훔쳤다. 이 중 여성 2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해를 입었다. 피해자들의 성기에 나뭇가지를 삽입하는 등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추행도 가했다.[58] | |
이명호 (당시 33세) | 가평 장의사 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 병원 영안실 계약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속여 1억 1000여만 원을 갈취 후 공범과 같이 친구 누나 부부인 장의사 부부를 유인해 살해 후 암매장했다. 공범은 2016년 필리핀서 검거돼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 |
정두영 (1968년생, 당시 31세) | 10대 때 불심검문하는 방범대원을 칼로 찔러 살해하여 12년을 복역했다. 출소한 뒤 한 여성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10억 원을 벌기로 결심,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강절도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부유층 주택에 침입해 사람이 없으면 절도 범행을 저지르고, 사람이 있다면 강도로 돌변해 둔기로 잔혹하게 살해하는 등 10개월간 5차례의 강도 범행을 하여 총 9명의 사람을 살해,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검거 당시 그의 통장에 범행으로 모은 돈 1억 3천만 원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유영철이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한 인물이기도 하다. 문서 참고. | |
천병선 (1948년생, 당시 52세) | 화투를 치던 중 사소한 시비 끝에 한 명을 개 도살용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도망가는 다른 사람을 쫓아가 살해했다. 도피하던 중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결심, 자신이 노점상을 하던 중 영업을 방해했다며 주점 주인을 찾아가 살해했다. 이틀 뒤 충북의 사찰을 찾아가 자신이 그곳에서 살 때 학대했다며 여성 스님 두 명을 살해했다. 또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던 과정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교도소 내에서도 교도관을 폭행해 징역 10개월이 추가되었으며, 유튜브 채널 과자형TV에 의하면 배식을 맡은 죄수들이 천병선에게 배식을 가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영상 참조 | |
2002년 | 김종근 (당시 29세) | 부천에서 귀가하던 20대 직장인 여성을 자신의 차량에 납치하여 금품을 빼앗고 강간한 뒤 목졸라 살해, 시신을 평택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 3개월 후에는 누나 집으로 가는데 기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성북구 한 아파트에 침입하여 금품을 빼앗고 그곳에 세들어 살던 여성과 집주인 여성을 노끈으로 살해했다.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갔지만, 빼앗은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이 CCTV에 잡혔고 부천 건으로 붙잡히면서 검거되었다.[59] |
조용훈 (당시 31세) | 전주 노파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강·절도등 전과 5범으로, 교도소 출소 후 생활비와 유흥비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가정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고 그곳에 살던 70대 할머니를 목졸라 살해했다. 보름 뒤 같은 방식으로 80대 할머니를 살해하고 불까지 질렀다. 검거 이후 그가 10여 년전인 1991년 전주에서 50대 여성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할머니들이 힘이 없고 연약해 범행 대상으로 선택했고, 평소 할머니들의 늙은 모습이 추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나홀로 노인 연쇄살인 '충격' | |
김중호 (당시 44세) | 잠실 아파트 일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의붓딸을 상습 성추행하고, 이로 인해 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자 자신을 고소한 가족들에기 앙심을 품어 아내와 의붓딸, 친딸, 친아들 등 일가족 4명을 망치와 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 |
2003년 | 도경일 (당시 31세) | 안성 일가족 강도살인사건의 범인. 경기 안성에서 이웃 노부부와 처형 등 노인 3명을 야구방망이와 망치로 마구 내리쳐 살해하고 현금 3억 원을 훔쳤으며, 같은 날 피해자들의 교교생 손자를 승용차로 유인한 뒤 돌과 쇠망치로 내리쳐 중태에 빠뜨렸다. 사채빚을 갚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와 40년 친구인 피해자에게 '달러로 환전해줄테니 현찰 3억 원을 마련하라'고 해놓고 범행을 저질렀다. 공개수배되어 언론에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다. |
박종규 (당시 27세) | 공범들과 함께 3억 원의 빚을 독촉하던 사돈을 납치, 감금한 후 살해하고 사체를 암매장했다.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암매장한 사체를 꺼내 드럼통에 넣고 소각했다. 1억원을 빌려준 또 다른 피해자도 납치해 살해하고 시신을 드럼통에 넣어 소각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피해자 휴대폰으로 피해자들의 가족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으며, 사체를 드럼통에 넣고 태울 때는 삼겹살과 소주를 먹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기사 참조[60] | |
정운하 (당시 45세) | 테니스장에서 만난 부부에게 ‘서울대 명예교수’라며 접근한 뒤[61] 투자금 명목으로 1억 8천만 원을 챙겼다. 이후 사기행각이 탄로나며 부부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부부와 그 자녀까지 일가족 4명을 양평군의 한 통나무 산장으로 유인, 흉기로 살해한 뒤 방화했다.[62] | |
허재필 (1978년생, 당시 24세) | 용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공범이 알고 지내던 여성을 납치한 후 돈을 빼앗고 살해, 암매장했다. 이후 택시기사로 위장해 승객들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취할 계획을 세워 20대 여성 승객 두 명을 차례로 납치, 금품 강취 후 살해했다. 8시간 후에는 번화가에서 만난 20대 여성 세 명에게 놀러가자며 유혹해 차량에 탑승시키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피해자들을 차례로 성폭행, 금품 강취 후 목졸라 살해했다. 단 사흘만에 피해자 6명을 살해하고, 피해자들의 시신을 차량에 그대로 싣고 다니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으나 훔친 돈은 520여 만원에 불과했다. 공범은 체포 직후 자살했다. | |
2004년 | 김근우 (1981년생, 당시 22세) | 부천 원미동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 대학생 신분으로 여자친구와 유흥비 등에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사용해 7천만 원의 빚을 지고, 카드빚을 안 갚아준다는 이유로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다가 가출했다. 사건 당일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이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게 역할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던 중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베개로 질식시켜 살해하고 옆방에 있던 할머니도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어서 귀가한 형을 부엌칼로 15차례 찔러 중태에 빠뜨리고 거실에 방치한 뒤 아버지를 기다렸다. 한시간쯤 뒤 귀가하던 아버지가 현관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머뭇거리자 아버지에게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형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범행 직후 PC방을 전전하며 여자친구에게 “식구들 작업했다가 실패했다, 엄마랑 할머니까지 성공했고 형도 거의 성공해서 아빠만 남았는데 아빠가 현관에서 도망갔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태연히 보내고, 재판 과정에서도 반성하지 않으며 빚을 갚아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했다. |
라경옥 (1942년생, 당시 62세) | 1990~1992년 하나님의성회승리재단(영생교)를 이탈하거나 신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신도 지모씨 등 6명을 살해했다. 공범들에게 범행을 제의하고 실행을 주도한 주범이며, 피해자들 모두를 암매장했다. 다른 공범들은 무기징역, 징역 12~15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 1942년생으로 현재 최고령 사형수이다. | |
2005년 | 유영철 (1970년생, 당시 34세) |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0개월간 서울 일대에서 노인과 부녀자 총 2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살인을 위해 자신이 직접 제작한 둔기를 사용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하거나 시신을 토막내기도 했다.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문서 참고. |
이종헌 (당시 36세) | 카드빚과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공범들과 함께 평소 알고 지내던 보험설계사를 납치, 강도, 강간 후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했다. 이후 택시기사에게 피해자의 카드를 인출해달라고 부탁하고 범행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택시기사마저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판결문 | |
전용술 (1955년생, 당시 48세) | 마산 대학교수 살인사건의 범인. 1974년, 18세였던 전용술은 여자친구가 변심했다고 생각해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도주하면서 강도행각을 벌이고 여자 종업원을 인질로 잡아 칼로 찌르는 등의 범죄를 저질러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이후 그는 고향 선배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근 교수 덕분에 징역 20년으로 감형받았고 19년을 복역한 뒤 1993년에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하지만 출소 후 교수에게 생활비를 타가는 한편, 사업 자금 5,000만원을 내놓으라며 살해 협박을 가해오다가 호프집에서 교수를 살해했으며 도피 과정에서 택시기사의 돈을 뺏고 회칼로 찔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판결문 | |
2006년 | 김용원 (1967년생, 당시 39세) | 청주 내연녀, 초등생 연쇄살인 암매장 사건의 범인.[63] 2005년 3월 동거하던 내연녀와 술을 마시며 사소한 말다툼을 하던 중 내연녀가 자신의 뺨을 때리자 격분해 목을 졸라 살해하고 야산에 시신을 유기했다. 동년 6월 두번째 내연녀가 운영하던 호프집에서 그녀가 잔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격분해 가스버너로 내리쳐 살해하고 수표를 훔쳐 강도살인으로 위장했다. 이틀 뒤 친구의 11세 딸을 2차례 성폭행 후 살해하고 야산에 암매장했다. 이전에도 폭행, 특수절도 등으로 11년 이상 복역한 전과가 있었다. |
장기수 (1970년생, 당시 35세) | 대전 문화동 일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보험금을 타기 위해 물통에 청산가리를 풀어 아내, 장남, 차남을 독살하고, 물을 마시지 않은 막내 아들은 목을 졸라 살해했다. 범행 이후 태연하게 직장에 출근하고 낮 동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살아있는 것처럼 가장하였으며 퇴근 이후 집에 불을 지르고 자연적 화재처럼 위장하려 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항소로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판결문 | |
2007년 | 김동민 (일등병, 1984년생, 당시 20세) | 530GP 사건의 범인. '선임들의 가혹행위와 언어폭력에 불만을 품은 김동민은 내무반에 핀이 해제된 슈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상관과 선임병 등 8명을 살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
조경민 (1977년생, 당시 30세) | 춘천,광주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2006년 7월~8월 불과 보름간 춘천과 광주광역시 등지에서 공범과 함께 부녀자들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고 얼굴을 봤다는 이유로 3명을 살해, 암매장했다. 특히 세 번째 여성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강간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피해자 성기에 철근을 10여 차례 넣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전주에서 20대 여성을 납치했다가 해당 여성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경찰에 신고해 검거되었다. 두 범인 모두 이전에 강도, 강간 등 다수의 전과가 있었다. 공범 김종빈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009년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 |
2009년 | 강호순 (1969년생, 당시 39세) | 보험금을 노려 부인과 장모를 방화 살해하고, 부녀자 8명을 납치 후 강간 살해했다. 문서 참조. |
정상진 (1978년생, 당시 30세) | 논현동 묻지마 방화 살인사건의 범인. 고시원에 방화하고 대피하는 고시원 거주자들을 회칼로 찔러 총 6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중상해를 입혔다. | |
정성현 (1969년생, 당시 39세) |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10세, 8세 여아를 강간 목적으로 집으로 유인하고, 살해한 뒤 사체를 토막내어 은닉했다. 이전에 성매매 여성과 말다툼을 벌이다 여성을 폭행하여 숨지게 한 뒤 사체를 토막내어 암매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 |
2010년 | 이향열 (1966년생, 당시 43세) | 영암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여중생을 납치, 강간한 혐의로 15년을 복역한 이향열은 출소한 후 둘째 처조카(16세)를 보고 욕정을 느껴 강간,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한 후 여행용 가방에 시신을 넣어 암매장했다. 첫번째 범행 약 일주일 후 의붓딸(19세)이 집안일을 안했다는 이유로 격분하여 자신의 집에서 강간, 살해하고 같은 날 동거녀(41세)를 찾아가 차에 태워 성관계를 가지고 '사랑하니까 죽인다'며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후 첫째 처조카(18세)에게 용돈을 주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테이프로 결박해 강간하고 옷장에 감금하다가 귀가한 친딸(21세)마저 강간했다. 친딸이 탈출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붙잡혔다. 판결문 |
2013년 | 김민찬 (상등병, 1992년생, 당시 19세) |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의 주범.[64] 총기를 훔쳐 앙심이 있던 동료 해병대원을 조준사격해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
2015년 | 장재진 (1990년생, 당시 24세) | 대구 중년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65] 여자친구 권 씨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이에 권 씨가 이별을 통보하였음에도 행패를 부렸으며, 폭행 사실을 알게 된 권 씨의 부모가 자신의 부모에게 항의하여 결국 다니던 대학교를 강제로 휴학하고 활동하던 동아리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권 씨의 부모에게 앙심을 품은 그는 배관수리공으로 위장하여 권 씨의 집에 침입, 권 씨의 부모를 망치와 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후 귀가한 권 씨에게 살해된 부모의 시신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자신에게 잘못을 빌 것을 강요하고, 부모의 시신 앞에서 준강간까지 하였으며 권 씨가 아파트 4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탈출[66]할 때까지 약 8시간 동안 집 안에 감금했다. |
2016년 | 임도빈 (병장, 1992년생, 당시 24세) |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67] 초소 근처에 대기 중이던 상관 및 동료 병사들을 향하여 수류탄을 던져 폭발시키고, 실탄을 발사했다. 총 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
양원보의 <한국의 연쇄살인범 X파일>에서 소수의 사형수들과 무기수들[68]의 범죄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69]
사형수가 현재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소개한 조선일보 기사가 있다. 링크 혹은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의 인터뷰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사형 확정자의 생활 실태와 특성’ 보고서 참고.
공범과 함께 여성 3명을 살해해 사형을 확정받은 사형수 조경민이 열악한 교도소 환경으로 인해 심신의 피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당했다. "교도소 좁아 우울증"…소송 낸 '女 3명 살인' 사형수
3.1. 사형 집행 대기 중 사망한 사형수
다음은 1997년 이후 사형 집행 대기 중 자살 또는 자연사 등으로 숨진 사형수 목록이다.||<colkeepall><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black> 이름 || 범죄 내용 ||<rowbgcolor=#333><rowcolor=#fff> 집행 대기 기간 ||
장세명 (당시 42세) | 1998년, 부산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7세 남아와 5세 여아를 민락 선착장의 소형 어선으로 유인해 추행 및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뒤 밧줄에 묶어 바다에 수장시켰다. 기사 | 1999년~2006년 (폐암) |
전용하 (당시 40세) | 자신의 돈 3천만원을 빌려 달아난 내연녀에 앙심을 품고 내연녀의 어머니, 아들, 딸 등 모두 3명의 사람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다.기사 | 1998년~2007년 (자살)[70] |
심인상 (당시 58세) | 빚 2900만원을 갚지않는다는 이유로 채무자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침입하여 안방에서 자고 있던 채무자의 딸 2명(당시 10세, 11세)을 둔기로 살해하고, 불을 질러 자고 있던 아들 2명(당시 6세, 2세)마저 살해했다. 기사 | 2000년~?[71] |
김철표 (당시 38세) | 1992년, 내연녀가 헤어지자고 하자 앙심을 품고 부산의 한 아파트에 침입해 내연녀의 20대 딸 두 명과 고등학생 아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기사 | 1993년~2009년 |
김종빈 (1967년생, 당시 40세) | 교도소에서 만난 공범과 함께 부녀자 3명을 강도 살해했다. 공범 또한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사 | 2007년~2009년 (자살) |
정남규 (1969년생, 당시 37세) | 2004~2006년 사이 서울 서남부 지역 노상에서 부녀자들을 흉기와 둔기로 살해하거나 집에 침입해 세남매를 모두 살해한 뒤 방화하는 등 총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해를 입혔다. 검거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살인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하는 등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 2007년~2009년 (자살) |
이수일 (당시 29세) | 삼덕동 모자살인 사건의 범인. 월셋방을 얻으러 온 것처럼 위장해 집주인 50대 여성과 20대 아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현금 12만 원을 훔쳐 달아났다. 동년 3월에는 20대 경리 여직원이 자신을 무시하고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흉기로 18차례 난자해 살해하고 현금과 수표 등 105만원을 빼앗았다. | 1995년~2011년 (자살) |
이동진 (당시 34세) | 6촌 형인 30대 남성 서 씨에게 1992년 380만원의 빚을 지고 50만 원밖에 갚지 못해 서 씨로부터 빚독촉을 받자 앙심을 품었다. 1998년, 경기도 성남시의 서 씨 집을 찾아가 “친척끼리 돈문제로 너무 괴롭힌다”며 말다툼을 하던 중 미리 준비해간 비닐을 서 씨의 얼굴에 씌워 질식사시키고 이 장면을 목격한 서 씨의 부인과 10살 딸도 칼로 찔러 살해했다. 이후 서 씨 부인의 전화를 받고 천 만 원을 가지고 온 서 씨의 처남도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났으며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자신의 과일가게에서 외상값을 갚는 등 천 만원을 모두 쓰고 태연히 장사를 계속했다. 기사 | 1999년~2015년 (자살) |
오수현 (당시 34세) | 전과 3범으로, 출소 두달 만에 인천 등지에서 가정집에 침입해 남편을 벽돌로 때리고 남편과 자녀가 보는 앞에서 유부녀를 성폭행하는 등 6차례의 강도강간 행각을 벌이며 2명을 살해, 4명에게 중상해를 입혔다. 기사, 판결문 | 1996년~2015년 |
이재복 (당시 49세) | 자신이 변호사법 위반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내가 다른 남성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며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불륜대상으로 의심하던 30대 남성을 집으로 불러 다투다가 살해, 시신을 토막낸 후 토막낸 사체를 차에 실어 방화했다. 기사 | 1999년~2019년 (당뇨병) |
임명기 (당시 41세) | 대전에서 지나가던 여성을 배신한 동거녀라고 착각해 따라가 살해하고, 충남 공주로 도피하여 암자에 숨어지내다 자신을 무시한단 이유로 임시로 의탁하던 절간 주인과 신도 1명을 살해했다. 기사 감옥에서는 자신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떠들어 대기도 했지만 진범은 따로 있었으니 허풍이였다. | 1996년~2021년 (직장암) |
오종근 (1938년생, 당시 70세) | 보성 어부 살인 사건의 범인. 대학생 커플을 자신의 배에 태운 뒤 남성을 배에서 밀어 익사, 여성을 추행하려다 반항하자 배에서 밀어 익사시켰다. 약 3주 후 2명의 여성을 배에 태운 뒤 추행하려다 반항하자 모두 밀어 익사시켰다. | 2010년~2024년[72] |
강영성 (당시 29세) | 밀양 단란주점 살인 사건의 주범. 전과 10범의 폭력배로, 조직원 8명과 밀양시 한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대접이 소홀하다며 쇠파이프 등으로 난동을 부려 주점 종업원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조직원들을 이끌고 피해자들이 입원한 병원까지 몰려가 사건 경위를 조사하던 경찰관 3명을 흉기로 찌르고 각목으로 마구 때리는 등 중상을 입히고, 이 틈을 타 피해 종업원이 입원해 있던 병실에 침입해 종업원과 종업원의 친구 등 2명을 흉기로 살해했다. 판결문 | 1996년~2024년 |
4. 사형수였으나 감형·사면된 경우
사형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된 사례들이 존재하며, 혼란했던 한국 정치사로 인해 정치적 이유로 감형되거나, 반대로 정치적 이유로 사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에 이후에 감형·사면된 사례도 상당하다.이승만 정부 이후 현재까지 대법원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1100여 명 가운데 무기수로 감형된 경우는 총 44명이다. 이 중 마지막 사형 집행 년도인 1997년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형수는 1998년 2명, 1999년 여성 2명을 포함하여 5명, 2000년 2명, 2002년 4명, 2008년 6명으로 총 19명이다. 2008년 1월 1일 6명의 사형수를 감형한 후 더 이상의 감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width=18%><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333><rowcolor=#fff><tablebordercolor=gray> 이름 ||<width=20%> 파기·사면 날짜 || 비고 ||
송지영 | 1961년 12월 21일 | 혁명재판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
안신규 | ||
한희석 | ||
이갑영 | ||
유지광 | ||
원충연 | 1967년 6월 27일 | 원충연 반혁명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이후 1981년 형집행정지로 석방. 별도로 2020년의 재심으로 원충연의 사형/무기징역은 파기되고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
박인도 | ||
김대중 | 1981년 1월 23일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대한 재판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전 세계의 구명운동과 미국의 압박으로 정부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이후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만기 퇴임한 이후 재심을 청구해 해당 혐의에 대해 무죄 및 면소판결을 받았다. |
김현장 | 1983년 3월 15일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이후 1988년 석방. |
문부식 | ||
김현희 | 1990년 4월 12일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10일 만에 정부에 의해 특별사면. |
김광년 | 1999년 8월 15일[73] | 대구 삼남매 살인 암매장 사건의 범인. 가출한 처와 닮았다는 이유로 친자식 3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
최필승 | 1993년 7월 13일 이모씨가 운영하는 석궁사격장에 침입, 잠자던 이씨의 눈에 석궁을 발사하고 흉기로 살해한 뒤 7백60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아 달아나면서 가스렌지를 틀어 불을 붙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 |
김수연 | 1994년 6월 25일, 불륜관계에 있던 남성과 짜고 서울 은평구 수색동공터로 남편을 유인, 불륜남이 건넨 청산나트륨 캡슐 2개를 피로회복제라고 속이고 먹여 살해해 사형을 선고받았다.[74] | |
이○○ | 1994년 11월 4일 집에서 잠자다 물을 찾던 남편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마시게 한 뒤 정부를 끌어들여 남편을 전깃줄로 목졸라 살해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 |
정영복 | 1992년 불륜관계이던 여성과 짜고 여성의 남편을 경북 고령읍 국도변으로 유인, 가스총을 쏴 실신시킨 뒤 각목으로 때려 숨지게 한 데 이어 사체에 볏단을 쌓고 불태워 사형을 선고받았다.[75] | |
채○○ | 2000년 8월 15일[76] | 이모로부터 이모와 내연관계를 가진 정부의 애인을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피해자를 살해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
정남진 | 1994년에 처가 가출한 후 처가댁에 여러차례 처의 행방을 물어보았으나 알려주지 않자 술김에 처가를 불질러 2명을 살해해 사형을 선고받았다.[77] | |
김진태 | 2002년 12월 31일[78] | 1992년 10월 술을 마시고 걸핏하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공기총으로 살해하고 유기한 혐의로 1993년 사형 확정. 이후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되었다.[79] |
김인제 | 1994년 친구 김명호와 함께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자친구를 납치해 살해한 뒤 암매장하고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공범인 김명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무기징역수로 복역중이던 김명호가 김인제가 만취 상태에서 여자친구와 다투다 곯아떨어진 사이 자신이 여자친구를 숨지게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80] | |
김장근 | 유흥비 마련을 위해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1998년 4월 사형이 확정되었다.[81] | |
김동운 |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에 침입했다가 경비원을 살해 및 경비원의 딸을 강간해 사형을 선고받았다.[82] | |
전재천 | 2008년 1월 1일[83][84] |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특별사면으로 감형받았다. |
인인수[85] | 조흥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범인들. 고향 선배의 변호사 선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범 4명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후 은행 직원 2명을 살해, 1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약 1억 3천여만원이 들어있는 현금자루를 탈취하였다.[86] | |
한상인 | ||
이호범[87] | ||
정효조 |
5.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상급심에서 감형된 경우
사형 선고를 받었으나 상급심에서 감형된 경우. 90년대까지만 해도 사형은 현재의 무기징역만큼 흔하게 내려졌고 사형 선고가 그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기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이후의 사례만 작성한다.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는 사형을 선고받은 적이 없으므로 이 목록에 해당하지 않는다.
||<table width=900><table 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rowbgcolor=#333><rowcolor=#fff><width=20%><tablebordercolor=gray> 이름 ||<width=25%> 감형 날짜 || 비고 ||
이은석 | 2001년 4월 18일 | 이은석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 부모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
손상헌 | 2002년 2월 8일 | 부천 탈영장교 살인사건의 범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기다리던 중 탈옥하여 1명을 강도살인했다.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었고, 파기환송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대법원 판결문 |
최종근 | 2003년 10월 23일 | 강간살인 및 살인 미수 3건, 특수 강도 및 강도상해 각각 6건, 절도 11건 등 부녀자들을 상대로 특수강도강간 범행을 저질러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었고, 파기환송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대법원 판결문[88] |
이학만 | 2005년 2월 18일 | 이학만 경찰 살해 사건의 범인. 경찰관 2명을 살해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
김원식 | 2006년 4월 28일 | 대전교도소 교도관 피살 사건의 범인. 상해치사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도중, 평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교도관을 쇠파이프로 내려쳐 살해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판결문 이후 2014년경 지병으로 사망했다. |
조영국 | 2008년 8월 12일 | 강화도 해병대 총기 탈취 사건의 범인. 해병대원의 총을 탈취하여 1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피해자를 초병으로 인식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초병살해죄는 파기되어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
하영민 | 2009년 4월 23일 | 강화도 모녀 납치 살해 사건의 주범. 공범 4명과 함께 모녀를 납치하여 돈을 빼앗고 성폭행한 후 살해했으며, 자신의 이복 여동생도 살해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김종무 | 2009년 9월 17일 | 2006년 재산을 뺏을 목적으로 집에 불을 질러 부모를 살해하고, 2008년 낭비벽이 심하다는 이유로 아내를 살해한 뒤 이를 목격한 딸까지 살해하였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심 판결문 |
김길태 | 2010년 12월 15일 | 김길태 살인사건의 범인. 초등생을 납치해 성폭행, 살해 후 사체를 유기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심 판결문, 2심 판결문 |
허준 | 2011년 2월 9일 | 전국을 돌며 24차례에 걸쳐 가정주부를 성폭행하거나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89] 1심 판결문, 2심 판결문 |
이○○ | 2011년 3월 24일 | 보령 청산가리 살인사건의 범인. 내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옆짚 부부에게 청산가리를 먹여 살해했다. 2009년,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했고, 2011년에 무기징역을 확정받았다. 판결문 |
신대용 | 2011년 5월 13일 | 진주 빌라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살인죄로 복역한 후 10여년간 총 3명을 살해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
안남기 | 2011년 3월 15일 | 청주 택시 연쇄강도 살인 사건의 범인.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2명을 강간살해, 1명을 살해해 1심에서 사형을 선고[90]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오원춘 | 2012년 10월 18일 |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길가던 여성을 납치해 살해, 사체를 훼손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임○○ | 2012년 12월 17일 | 70대 부모님과 10대 친아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을 시도해 1심에서 사형을 선고[91]받았지만 2심에서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김홍일 | 2013년 5월 15일 | 울산 자매 살인사건의 범인. 이별을 요구한 여자친구와 그녀의 동생을 살해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정영석 | 2014년 7월 24일 | 인천 모자 살인사건의 범인. 아내와 함께 재산을 노리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이를 형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형도 살해, 이후 어머니와 형의 사체를 훼손 후 유기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이영학 | 2018년 9월 6일 | 어금니 아빠 살인사건의 범인. 자신의 딸을 이용해 여중생을 집으로 유인한 뒤 성추행하고 살해, 시신을 유기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안인득 | 2020년 6월 24일 | 진주 아파트 방화·흉기난동 살인 사건의 범인. 고의로 방화를 저지른 뒤 대피하는 사람들을 흉기로 찔러 총 5명을 살해하고 22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권재찬 | 2023년 6월 23일 | 인천 미추홀구 강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강도살인으로 1심 무기징역, 항소심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또 다시 2명을 살해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이○○ | 2023년 7월 13일 | 공주교도소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계룡 금 중고거래 강도살인 사건으로 무기징역으로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같은 방 재소자를 공범들과 무차별 폭행, 고문하다가 살해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했고 파기환송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무기징역을 2번 선고받은 셈이다. 대법원 판결문[92] |
정두호 | 2024년 2월 7일 | 살인 혐의로 복역 후 출소한지 1년만에 자신의 동거녀를 살해했고 동거녀의 딸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93] 재판 도중 사형을 선고해달라며 조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2심 판결문 |
[1] 현재 71명 중 57명 생존[2] 대구일보는 해방 후 최초 사형 집행이라고 보도했고 그 이전의 사형 집행 보도가 없는 점, 해방 직후의 기사들에서도 '1946년 8월부터 XX년 XX월까지 사형집행된 사람은...' 식의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사형집행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총살형] 군인 신분으로 총살형으로 집행[4] ”아이의 간을 빼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라는 소문.[총살형] [재심]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됨[총살형] [총살형] [총살형] [재심] [재심] [12] 서울 도심 쪽 발포 명령으로 기소된 홍진기에 대해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다. 곽영주와 최인규가 홍진기의 책임도 모두 떠안고 처형당했다는 의견이 많은 건 그 때문.[총살형] [총살형2] 민간인 신분이지만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 총살형으로 집행[총살형] [총살형2] [재심] [총살형] [재심] [총살형] [재심] [재심] [총살형] [재심] [총살형] [총살형2] [총살형] [28] 정확한 일자는 알려지지 않았다.[29] 집행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고 실제로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은 많지만 아직 재심이 진행된 적은 없다.[총살형] [재심중] 김재규의 경우 재심이 진행 중[재심] [33] 일당 중 3명 사형, 2명 무기징역, 1명 징역 7년, 1명 징역 5년[재심] [35] 1심에서 공범 중 3명은 사형, 1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공범 4명 모두 무기징역으로 감형[36] 만 19세에 범행을 저지른 미성년자 사형수. 1990년 한국에서 2번째로 사형제에 대해 위헌법률 심판을 벌였다.[37] 다만 재판 당시 검찰 측이 살해도구라고 주장하는 삽을 증거로 제시하지 못해 논란이 있었다. 1심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나 1985년 2심 재판 당시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면서 검찰측 증인의 증언을 위증이라고 하며 수갑을 던지거나 판사와 언쟁을 벌이는 등의 난동을 부려 '법정 소란죄'가 가중돼 사형선고까지 간 것이며, 대법원도 이를 되풀이했다.[38] 1989년 한국 최초로 사형제도에 대해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39] 본인은 여론에 떠밀려 과하게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주장했다.[40] 1967년생 야구선수 출신 살인마 이호성과는 동명이인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호성은 李昊星이고 이 이호성은 李浩成이며 1960년생이다.[41] 이외의 정보는 찾을 수 없다.[42] 여성스러운 이름으로 인해 여성 사형수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남성이다. 관련 기사 참조. 사형 집행 이듬해인 1998년 쯤에 방영한 사형 관련 다큐에서도 그의 생전 사진 및 맏아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남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3] 2명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받음[44] 내연남이었던 박걸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음.[45] 해당 법무부 문서는 사형수 중 군 사형수 4명을 제외한 것임을 감안해야한다.[46] 예외적으로 감형된 사형수 중에는 잔혹하기로 유명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의 사형수, 엽총 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사형수가 포함되어 있다. 감형 대상 선정에는 죄의 무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47] 군 사형수를 포함하면 김민찬과 임도빈이 각 1992년생으로 최연소이다.[48] 군 사형수 4명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207명으로 늘어난다.[49] 사실 남학생을 납치한 것은 여자애로 착각했기 때문이다.[50] 특이하게도 성태수는 1991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글래디스로 살던 집이 무너지면서 머리를 다쳐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1] 여담으로 국군교도소 내 최고참이며, 집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고 한다.[52] 초졸 학력이었지만 복역 중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학사 학위도 취득했다. 2012년에는 재생에너지 관련 특허를 등록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DNA 검사를 통해 가족관계를 확인받은 생모와 가족접견을 하였다.[53] 여담으로 피해자가 운영하던 제과점은 대구에서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54] MBC 경찰청 사람들 226화에서 공개수배 된 적이 있다.[55] 표창원이 진행한 K STAR의 프로그램인 살인자는 말한다 9화 편에서 장용식이라는 가명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56] 1998년 9월 부산의 모 의류공장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뒤, 근무지를 이탈해 광주 등지에서 생활해 오다 체류기한이 다가오자 범행을 계획했다.[57] 아내는 전치 16주의 중상을 입고 살아남았다.[58] 만약 자기네 나라에서 붙잡였으면 얄짤없이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59] KNN 현장추적 싸이렌 403회 방영되었다.[60] 공범 박창훈과 백철학은 각 무기징역, 1건의 살인에만 가담한 남상일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61] 실제 학력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한 것이 전부였다.[62] 하지만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63] 청주판 유영철 사건으로 불렸던 사건이다.[64] 공범 정준혁은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2021년에 출소했다.[65] 현재 민간인 사형수 중 가장 최근에 사형이 확정되었다.[66] 전치 12주 이상의 중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67] 현재 최연소이자 마지막으로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이며, 2010년대 후반 이후 사법부의 사형 판결 기피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 확정자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68] 구형은 사형이지만 사형을 피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경우. 김윤철 같은 살인자에 관한 사례가 있다.[69] 다만 일부 범죄자들의 이름을 잘못 적거나 (이향열을 이'항'열로 표기, 전용술 사건을 전석재라고 혼동) 몇몇 사건의 날짜가 잘못 표기되었다.[70] 기사에는 복자 처리 되었다.[71] 2007년 혹은 2009년 추정.[72] 기사[73] 광복절 특사로 5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74] 기사[75] 기사[76] 광복절 특사로 2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77] 기사[78] 특별사면으로 4명의 사형수가 감형되었다.[79] 기사[80] 기사[81] 기사[82] 기사[83] 특별사면으로 6명이 감형되었다.[84] 이 날 석방된 사형수가 누군지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85]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사형 확정자의 사형 집행 대기기간을 무기징역의 가석방 요건(20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헌법소원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 판결문[86] 검찰이 4명의 범인들에게 모두 사형을 구형했다는 보도 이후 언론에 판결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기타 판결문의 내용, 2005년도 사형수 특종취재 기사(사형수 23~27)에 이들이 사형 집행 대기자로 포함되어 있는 점 등을 참고하면 이들 모두 사형을 확정받아 10년 이상을 집행 대기자 신분으로 있다가 2008년에 감형받은 것을 알 수 있다.[87] #[88] 대법원은 "사형 선고는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사정이 분명히 있는 경우에만 허용돼야 한다"며 "법원은 양형조건들을 평면적으로만 참작하는 데서 나아가 피고인의 주관적인 양형요소인 성행과 환경, 지능, 재범의 위험성, 개선 교화 가능성 등을 심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해 사형 선택 여부를 심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훗날 많은 판례에 인용되며 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사형선고 요건을 엄격히 해석한 판결로 평가받았다.[89] 기사[90] 2010년 10월 28일 대전지방법원[91] 기사[92] 이 대법원 판결문은 남양주 가석방 무기수 살인사건,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등 여러 사건 판결문에서 인용되기도 했다.[93] 이전에도 살인, 살인미수 등으로 15번의 징역형과 8번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합계 30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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