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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 부분}}}}}}1.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용어
- 프랑스어: élan vital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적 용어로 '삶의 약동', '생의 비약'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는 생명이 가진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철학계에서 문제없이 사용하는 철학용어이다.
2. 근대 프랑스 육군의 공격적 군사교리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공격정신 / Offensive à outrance, Attaque à outrance1번 문단에서 유래한 프랑스군의 군사교리이자 사상.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가 전상자의 수나 영토의 획득/손실 여부가 아니라 야전지휘관이나 국가지도부의 전쟁 지속 의사에 따라 있다는 일종의 정신론으로, 좀 더 정확히는 전쟁이란 지도부가 졌다고(=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 내리기 전까지는 결코 패전한 게 아니며, 이러한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군의 높은 사기가 밑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대에서는 최초 주창할 때의 의의처럼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소'라기보다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를 결정짓는 요소'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드러내는 유명한 사례가 다름 아닌 제2차 세계 대전 말미의 일본제국이라고 볼 수 있다.[1]
프랑스의 이런 엘랑 비탈은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보어 전쟁, 러일전쟁에서 기관총, 야포 등의 진보된 화력 장비의 위험성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 채 보병돌격을 고집하게 한, 시대착오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이론이었다.[2]
그렇기에 심지어 '모든 화기의 진보와 발달은 공세의 강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 시점에도 이미 '기관총'이 개발된 상태였기에,[3] 기관총이란 존재 단 하나로 저 논리의 부적절함을 반박할 수 있었으나, 당연히도 프랑스 상층부는 이런 점 따위는 무관심이었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은 루이 그랑메종 소장이다. 그랑메종이 사관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장이 그 유명한 제1차 세계 대전의 프랑스 육군 소속 명장 페르디낭 포슈 육군 원수라서 엘랑 비탈을 포슈가 정립했다고 알고있는데, 포슈의 주장과 교리를 따져보면 엘랑 비탈과 포슈의 군사교리는 궤가 매우 다르다.
애초에 생전 포슈 원수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엘랑이란 단어 자체를 쓴 적이 없고, 당시 프랑스군 내부에서도 엘랑 비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교집합이 있긴 하나, 상세하게 하나하나 뜯어보면 실제로는 전쟁시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아예 다른 길을 걷는 수준이다.
오히려 엘랑 비탈과 겹치는 부분보다는 군중심리학 쪽이 더 유사성이 많고 관련성에 관한 증거도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이 또한 어디까지나 언급이 안되다시피한 엘랑 비탈보다야 낫다는 수준이지, 그게 핵심이란 의미는 결코 아니다.
포슈 원수의 주요 교리는 지나치게 공격에 집중한 면모가 있긴 했으나,[4] 단순히 공세만 우선한 것이 아니라 분견대 운용을 통한 경계 및 정보 수집, 이를 기반으로 적군 동향 예측, 적에 비해 우월한 병력과 화력을 갖출 필요성, 포병과 보병의 합공, 기동부대의 전투를 위한 여건 조성 작전, 예비대 운용법, 행동의 자유, 임무형 지휘체계, 병력의 절용 및 노력의 집중, 한 방법만 고집하지 않은 유연한 대응의 중요성 등 나폴레옹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접목시키고 현대전에 맞춰 다듬은 것이었다.[5]
이런 부분을 다 떼고 포슈의 교리와 엘랑 비탈을 동일선상에 둔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에서 앞을 다 떼버리고 "용감하게 공격하라."는 문구만 남긴 것이다.[6]
애초에 가장 대표적인 엘랑 비탈의 교리로 언급되는, 후술할 그랑메종의 1913년 교리는 화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포슈의 이론과 달리 화력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포슈의 군사이론을 직접 반박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7]
이런 그랑메종의 교리에 대해 포슈는 '당나귀가 쓴 안내서'라는 혹평을 남겼고 페탱, 드브네, 모뒤이, 에밀 파욜 같은 에콜 드 게르 출신의 교수, 장교들도 그랑메종의 교리가 화력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중세 후기에서 근세, 근대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프랑스 왕국은 생산력과 인구, 그리고 이에 기반한 육군 전력에서 서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다른 경쟁국가들을 압도하는 '대육군'을 갖추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기관총, 폭탄, 고성능 야포 등이 나오기 전이라 방어군이 공격군한테 병력 수에서 밀린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3~18세기 서유럽의 프랑스에선 지휘부가 전의를 잃지 않고 장병들이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계속 공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종국적으로 승리가 가능하다는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대량살상병기가 없고 기동력으로 변수를 주기도 힘든 시절이라 분당 수 발의 연사력 밖에 없는 머스킷, 폭발하지 않아서 직접 명중당하지만 않으면 안 죽는 질량탄을 가지고 싸우면 아군이 일일이 다 죽기 전에 느린속도로 죽어나가는 아군을 계속 보면서 전투의지가 무너지는 게 더 빠른 시대에는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의지드립이 아니라 전술적인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던 것.
제1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만 해도 비단 프랑스 제3공화국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독일 제국과 영국의 많은 장교들도 엘랑비탈의 바탕이 되는 정신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는 전열보병 시대의 영향이었다.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는 포탄과 총알 세례를 견디며 와해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였다. 대오를 유지한 채 전진하는 부대에게 적의 일제 사격으로 발생하는 피해 규모는 몇 번 맞아주고 돌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반면, 대열이 무너져 패주하는 부대는 안 맞았을 총알을 더 많이 맞고 추격까지 당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 본토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군 장교단은 나름대로 유럽의 최신 교리를 따랐던 셈이다. 심지어 이는 후미장전식 연발소총이 등장하여 보병 소총수의 화력이 더 강화되자 전열이 밀집대형에서 산병선의 묶음으로 바뀌었을 뿐 더 강화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의 기관총과 야포가 등장하면서 우월한 화력에 기반해서 방어자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즉 공격자와 방어자간의 병력 손실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8] 게다가 19세기말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제 프랑스는 서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도 아니게 되었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전투의 양상도 달라졌고, 프랑스의 최대 강점이었던 인구 우위도 상실한 상황. 공업화 이전 육군 강국 프랑스의 전성기를 기준으로 보면 합리적인 교리 체계이지만 20세기 이후의 프랑스를 기준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과거의 추억에 지나치게 집착한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교리였다.
다만 이러한 이해는 통상적인 엘랑 비탈에 대한 상당한 오해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포슈의 교리나 그랑메종의 교리나,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비해 인구나 국력이 이미 처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리였지 보불전쟁 이전의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교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장교진은 보불전쟁에서 교훈을 얻는 데 집중했다. 포슈는 당시 프랑스의 지나치게 방어적인 교리가 보불전쟁의 패배의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는데, 이는 포슈 개인의 의견만이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학교 교수였던 콜마르도 프랑스군의 약점으로 화력과 방어전을 지나치게 강조한 방어적 교리와 정신론의 부재를 지적했다.
포슈를 비롯하여 흔히 '엘랑 비탈'로 이해되는 프랑스의 군사교리는 이러한 프로이센의 군사교리에 내재된 공세주의와 정신론을 채용한 것이었다. 또한 포슈의 정신론은 장래에 산병전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포슈는 화력의 증가가 산병전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고, 산병전에서는 병사 개개인의 정신적 역량이 중요시될 것이라고 보았다.
포병이 쏘는 철환이나 기병이 휘두르는 도검류 정도를 제외하면 화력이라고는 머스킷이나 약간 후대의 후장식 연발소총 정도였던 전열보병 시절에는 전투원 개개인이나 정신력을 강조할 이유가 없었다. 화력의 증가에 따라 보병전술이 발전해 보병 간 간격이 멀어지는 변화가 일자 병사 개개인의 역량이 중요해져 정신력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포슈의 이론은 물질적 요소와 함께 정신적 요소가 함께 화력의 우열을 가른다는 것이었지 물질에 비한 정신론의 우위를 강조하거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적 공세'만을 강조하는 이론은 아니었다.
또한 그랑메종의 교리도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독일에 비해 국력이 쳐지는 프랑스가 독일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강점을 활용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즉 위의 전통적인 프랑스의 공세이론과 달리 프랑스 장교들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열세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젊은 장교들은 이러한 국력의 열세를 프랑스 특유의 강점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민족주의의 열풍과 생물학이 결합하여, '민족'마다 생물학적 특징이 다르다는 이론이 유행했고 프랑스 장교들은 이 이론을 채용했다. 이들이 파악한 프랑스인의 강점은 (규율에 복종하는 독일인과 대비되는) 용기와 적극성, 사나움, 주도성 등이었고 이러한 프랑스인의 기질은 공세에 적합하다는 이론과 이어졌다.
문제는 포슈의 이론에서 정신론과 사기론이 워낙 매력적인 탓에 포슈의 제자들이 포슈의 군사사상에서 정신론을 제외한 대부분은 빼먹고 형이상학적인 부분과 공세만을 강조하게 되면서 벌어졌다. 초공세교리의 창안자인 그랑메종이 대대 이상의 지휘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부대 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경험이 없으니 추상적인 정신론으로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포슈가 육군대학 교장이던 시기 프랑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루이 그랑메종(Louis Grandmaison) 육군 대령은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의 교육총감에 취임하자마자 '엘랑 비탈'에 기반한 신 전투교령을 공포, 이것에 반대 의견을 보낸 장교들은 가차없이 퇴역시켰다. 그리곤 1913년에 개전된 야전교범에서 "향후는 공격 이외의 어떠한 전술법칙도 배제한다."라고 선언해버렸다.
프랑스 육군은 대육군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복귀해야 하며, 오직 정면 공세 이외의 어떠한 작전 행동도 인정해서는 안된다. … (중략) … 모든 공세행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 관철 할 수 있도록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는 종국적으로는 총검 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전과는 오직 피를 흘려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육군은 향후 이 외의 어떠한 구상도 전쟁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으로 판단, 배제해야 한다.
그랑메종 육군 대령
그랑메종 육군 대령
엘랑 비탈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명문으로는 마른강의 기적이라 칭하는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포슈 장군이 말했다고 알려진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 중이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가 있다. 그러나 포슈가 실제로 이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당시 포슈를 보좌하던 막심 베이강 장군부터 이를 부정했으며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도 미묘하게 부정한 적이 있다. 포슈가 남긴 또 다른 명언 중 엘랑 비탈과 관련된 것으로 "승리, 그것은 곧 의지다.(Victoire c'est la volonte.)"가 있다.
왕성한 공격정신의 강조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실책을 반성하고자 '위대한 군대' 나폴레옹 시절의 전통으로[9] 돌아가자고 주장한 셈인데 사실 보불전쟁에서의 패전은 정치권의 외교적 실패와 군 지도부의 무뇌스런 전술전략 때문에 말아먹었지 의지나 정신력이 부족한 탓으로 진 건 아니었다.
포슈의 군사사상의 맥락을 안다면 포슈의 발언은 와전된 것을 알 수 있는데, 포슈는 지도부의 무능한 전술전략을 탓했으며 아예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는 프로이센군이나 헬무트 폰 몰트케의 유능함이 아닌 프랑스군의 무능함 하나만으로 결판난 것이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포슈가 분석하는 보불전쟁의 패배는 절대방어주의에 사로잡혀서 몰트케의 삽질로 인해 빈틈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지 않은 것과 느린 기동 때문에 방어를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증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의지는 졌다고 생각할 때까진 진 게 아니다는 오래 전부터 있는 군사 격언이고 딱히 그 시절 프랑스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전투의 물리적 요소보다 정신적 요소가 3배나 중요하다. 끝까지 싸우는 자가 승리한다." 승리란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 것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전쟁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했다. 나폴레옹 이전 18세기 최고의 군인으로 불리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뻔뻔한 자만이 전쟁을 승리한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나폴레옹 시절은 100년 이전이고 화력 수준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독일의 군사 전략자인 클라우제비츠가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나[10] 이러한 교리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으로는 클라우제비츠를 맹렬히 비판한 리델 하트 경조차 "클라우제비츠를 잘못 읽은 거다" 평할 정도다.[11][12]
1차 대전 당시 BEF(영국 대륙 원정군) 육군에서 복무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평가도 "개인적으로 지휘관이 졌다고 할 때까지 진 게 아니다"라는 말에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지휘관은 의지보다 사리판단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군의 공적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면서 한 때 같이 싸웠던 프랑스군 수뇌부를 디스했다.
몽고메리는 한 술 더 떠 1차대전 초기 프랑스 육군 사령관 조프르 장군에 대하여 "그 사람은 전술의 기본을 모른다."라며 아주 대놓고 깠다.[13][14]
이처럼 엘랑 비탈은 명백히 무모하고 무의미한 피해를 조장하는 전술교리였다. 총포와 철조망 대신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짜인 교리는 엄밀하게 교리라고 하기도 미안한 소리고, 구체적으로 전술상 이론으론 결함이 크며 초반 프랑스 육군의 졸전과 큰 피해를 준 교리였다는 점을 어느 면을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렵다.
초기 전역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하여 수도의 코앞까지 적군이 진격해오던 상황에서 마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도 공격정신이라기보단 독일 제국 육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역습받게 생기니까 자진해서 후퇴한 면이 컸고 애초에 파리 코앞까지 적이 들어온 것도 400만에 달하는 독일 육군의 예비군 동원 병력을 잘못 예측한 조프르 장군의 삽질 탓이 컸다.
물론 전쟁의 향방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포슈 장군이 엘랑 비탈의 정신 그대로 왕성한 공격 정신을 유지하여 독일 육군에게 역습을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주어 공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옹호론도 있겠으나, 개전 초기 3달 이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 육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1차대전 당시 수비가 공격보다 극단적으로 유리하다고 감안할 때 명백하게 실패한 전술이다.
개전 초반 최대 공업지대인 북프랑스에 영토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 것도 감안해야겠고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 지도부의 엘랑 비탈 정신이 기여한 점도 일부 있긴 하겠지만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특히 인명피해는 너무 극심했다. 독일군이 200만 명 전사, 프랑스가 140만 명 전사로 전사자 수는 독일이 더 컸다지만, 독일군은 동부전선,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아프리카 식민지, 대 이탈리아 전선까지 포함한데다 인구는 더 많았다. 프랑스도 서부전선에서만 싸운 게 아니라 발칸전선의 프랑셰 데스페레장군과 군대를 파견한 것, 갈리폴리 전투에 6만명의 병사를 파견한 일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이고 그저 덤일 뿐인데다가 거의 전 전력이 본토 내에서 있었다는 건 변함이 없다.[15]
1913년 기준 독일 인구는 6500만 명, 프랑스 인구는 3900만 명으로 거의 독일이 5/3배였다. 반면 프랑스는 전선의 몇몇 부분[16]은 영국군과 벨기에군, 후반에는 미군까지 담당한 걸 감안하면 인명 피해가 엄청났다. 더구나 프랑스는 공격이 아닌 자국 영토에서 수비하는 입장이었다.[17]
무엇보다 19세기부터 비롯된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다 날아가버렸다는 건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18]
정신나간 공격정신 탓에 140만의 전사자 가운데 60만 명은 첫해 1914년의 5개월 간 발생했다. 수비가 더 유리한 걸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를 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에는 '공격정신에 대한 오해다'같은 변명이라도 시도되었으나, 프랑스군의 피해가 저런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선을 넘어가면서는 변명조차 불가능했다.
전장에서 큰 피해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공격 교리 일변도의 경직된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공격 시엔 영국군과 합동작전은 미약했지만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한 포격 뒤에 공세를 취했고 방어 시에도 긴밀한 종심방어를 취하기도 했다.
종심방어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건 아니고 독일군 프랑스군 모두 전선을 형성한 채 서로 돌파하고 돌파당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선형방어의 취약함을 보강하기 위해 1차 2차 3차에 달하는 방어선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병력의 손실에 실제로 충격을 받는 일선 지휘관과 아직 정신 못 차린 높으신 어른이 다른 인물이었고, 둘 중 후자가 전자에게 명령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의지력 높은 졸장들은 전선에서 애들이 이상한 걸 한다며 독전대와 총살형을 무기로 애꿎은 아군병사들만 죽을 고비로 몰아넣기 바빴다.
이런 불협화음은 완벽한 승리를 보장했던 니벨 공세의 실패로 폭발, 병사도 아니고 사단장들까지 무의미한 공격에 항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이 사태의 책임자인 로베르 니벨은 북아프리카로 좌천당해 다시는 서부전선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베르됭의 영웅 필리프 페탱 원수가 전면에 나서면서 겨우 군심을 추스릴 수 있었다. 페탱은 엘랑 비탈 교리를 반대하고 화력 중심 교리를 설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부조리하거나 무능하게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변명은 할 수 있는 교리였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법 외에는 참호전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19] 또한 이런 참호전은 프랑스 구로우 장군이 개발한 종심 방어 교리나, 포슈가 개발한 이동탄막사격 등으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냈다.
사실 1차대전 독일군도 이 엘랑 비탈에 대항하여 비슷하게 참호전을 한 적도 많으며, 러시아군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건 당시 군사계에서 유행하던 '선제공격이 최고, 수비는 불리함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개념의 영향과 전쟁 초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의 실패와 전선 고착화로 자기들이 하던 게 안되고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최선의 행동을 하다보니 그런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것조차 엘랑 비탈과 비슷하다고 보고 싶은 관점으로 봐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독일이나 러시아나 처음부터 엘랑 비탈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일본군은 근대 초기에는 화력집중을 기반으로 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부족한 생산력을 통감하고 정신력을 강조하는 교리로 후퇴하고 만다. 이때 참고한 것 중 하나가 이 엘랑 비탈이다. 시간이 지나 이에 경도된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보병돌격을 감행하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만다.
독일군은 양면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슐리펜 계획과 지헬슈니트 작전, 유연한 사고와 높은 자율권을 가진 정예 장교단과 정예 부사관단, 적극적인 선봉대와 전투단 운용, 육군 중심의 제병합동을 망라한 독일식 기동전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고 러시아군은 엘랑 비탈에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어레인지 했다.
즉 닥치고 소총만 든 알보병이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 장교들이 본부에서 통제하는 가운데 짠 작전과 기관총부대, 전차, 항공대 등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화력지원을 받아가면서 체계적인 돌격을 했다. 우라돌격 과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 참고.
2.1. 프랑스군의 무모한 돌격 편견에 대한 반박
하지만 엘랑 비탈을 반자이 돌격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 한국에는 "엘랑 비탈"로 알려진 공격 정신(Attaque à outrance)이 위에서는 무모한 돌격으로 묘사 되지만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었을 뿐이라면 프랑스군은 1918년까지 버티기도 전에 몰살 당하고 파리가 함락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승전을 한 이후 독일의 전투력을 점점 따라잡다가 마지막에 가선 협상국 중 유일하게 독일군을 대등 이상의 교환비로[20]로 박살냈다. 정말로 프랑스군이 그런 닥돌 바보 집단이었다면 거기에 당한 독일군은 그 이상의 바보 집단이며 프랑스군보다 못 싸웠던 다른 협상국 군대는 생각 없이 닥돌하는 것도 못 해서 프랑스군보다 1.5~2배씩 죽어나간 희대의 머저리 집단이 된다. 오히려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닥돌 전술을 신봉했던 것은 영국군 그리고 미군이었다. 초기 영국군은 참호전의 대표적 상징인 기관총을 경멸했다. 더글라스 헤이그는 기관총에 대해 1915년 과대평가되었으며 대대당 두정이면 충분하다고 발언했다가 그 해 벌어진 솜 전투에서 전투 당일에만 6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서야 뒤늦게 기관총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또한 수류탄도 없어서 1915년 밀스 수류탄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안자크군은 잼 핀 수류탄이라고 불린 수류탄을 급조해야했다. 또한 헤이그는 프랑스군과 달리 포병의 위력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때때로는 날씨와 지형, 그리고 포병의 사격 가능 범위를 넘어서 공격할 것을 명령하며 오히려 일반적인 닥돌에 가까운 명령을 남발했다며 도살자 헤이그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윈스턴 처칠을 위시로한 영국 중동 사령부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안자크 군단을 밀어넣었다가 보급부족과 오스만군의 참호 방어선에 25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해 죽을 때까지 처칠의 오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1980년 기점으로 파스샹달 전투와 솜 전투의 도살자라고 욕먹었던 헤이그에 대해 당대 영국군의 전술, 전략적 상황상 불가피했다 라는 입장을 가진 역사학자들도 나오는 만큼 프랑스에게 닥돌하다가 독일군 기관총에 쓰러져갔다는 묘사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 미군은 한술 더 떠서 전면전 교리가 반세기도 더 지난 남북전쟁시대에 머물러 있었으며 당시 미군의 군수산업은 전투기나 전차, 중포는 커녕 7~8mm 구경대 중기관총조차 스스로 자급하지도 못할정도로 처참했고[21] 무려 1917년까지 남북전쟁 시기 경험을 기반으로 한 포병 경시와 보병 우월주의 그리고 정신력으로 화력과 장애물을 돌파하는것을 강조하다 훨씬 진보한 화력체계들 앞에서 무참하게 갈려나간 뒤 프랑스군에게 군장싸는법부터 다시 배워야했다. 왜 미국 단위계가 기본값인 미군에서 155mm, 105mm, 75mm, 120mm, 81mm, 60mm 같은 미터법기반 구경들이 뿌리내렸을까? 그것은 1차대전~전간기 시기 화력체계 운영법을 모조리 프랑스에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군이 정말로 화력체계 운영법을 경시하고 닥돌만 하는 집단이었다면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펼친건 기존 낭설처럼 무슨 똥별들이 무지성 공격정신에만 미쳐서도, 지휘관들이 사람 목숨을 껌값으로 봐서도 아니다. 프랑스가 무리해서라도 지속적인 공세를 펼친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공자는 방자보다 무조건 불리하고 피해가 클 것이라는 전제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배틀필드 1같이 역사물을 가장한 엔터테인먼트 판타지물들에서 묘사되는 공자는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삑 불면 단체로 적의 참호로 우와아아아 함성을 외치며 정면돌격하고 방자는 기다렸다는 듯 편하게 기관총으로 보병들을 수확하는 장면들이 수많은 대중들에게 방자가 공자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었고, 당연히 실제 1차대전 전장과는 몇광년이나 떨어져있는 묘사들이다. 하다못해 흔히 참호전의 프리퀄이자 러시아의 요새화 된 기관총 앞으로 반자이를 하다 쓸려나간 일본군의 이미지로 유명한 뤼순 공방전도 정작 일본군 전사자는 15000명 근처인데 반해 러시아군 전사자는 최대 16000명 이상까지 추산되는, 역설적으로 방자가 공자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편견을 재대로 깨버린 또 다른 사례에 불과했다. [22]
1차대전 참호전의 만능 최종병기마냥 묘사되는 기관총이라는 물건 자체가 실제론 문제점들도 대단히 많았을 뿐더러 게임 체인저는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기관총들은 본체만 해도 평균적으로 무게가 25kg는 우습게 넘어가는데다 삼각대와 냉각수를 합치면 최소 60kg가 넘어가는 흉악한 무게를 자랑해 기동력이 최악이었고, 따라서 상황이 약간이라도 불리하게 돌아가면 도수운반도 못하고 그냥 버리고 후퇴해 적들에게 노획당하는 일들도 빈번했다. 21세기의 기관총들도 고성능 사통장치와 반동 억제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는 자동사격 정확도를 기대하면 안 되는 마당에 19세기 말 기술 기반인 당시 기관총들의 자동사격 정확도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평균적으로 최소 수천발은 쏴야 어쩌다 한명이 얻어맞는 식의 극심한 탄약소모와 처참한 명중률을 자랑했다. 거기다 두꺼운 공랭식 총열을 채택한 호치키스 기관총 정도를 제외하면 수랭식 냉각을 채택한 기관총들은 물탱크에 손상이 나거나 냉각수가 떨어지면 곧바로 무력화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강철 보탄판을 쓴 호치키스 기관총 정도를 제외하곤 당시 켄버스 소재로 된 탄띠를 쓰던 맥심기관총 파생형들은 탄띠가 수분을 먹으면 기능고장이 빈번하게 일어나던게 1차대전 당시 기관총들의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75mm니 105mm니 155mm니 194mm니 210mm니 420mm니 원래 사람 살던 마을들이나 숲이었던 지역들을 성경 구절에서나 나올법한 지옥같은 폐허로 뒤엎어버리고 고작 한방에 수영장급 구덩이를 만드는 위력을 내던 포병들이 판치던 판이었고 실제로 당시 사상자 75% 가량은 포병에서 비롯되었다. 즉, 당시에도 7-8mm 구경대 중기관총은 그저 중대/대대급 특정 거점 접근방지 견제용 전술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신세였다.
“적이 방어선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적이 오면 우리는 적을 편하게 갈아엎는다” 라는 말이 현장에서 침투니 공세니 하면서 쉴새없이 전장을 뛰어다니던 병력들이나 사상자를 줄이고 싶은 고위급 장성들과 정치인들에겐 달콤하게 들려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전쟁에선 적이 무지성으로 단단한 방어선에다 자기 병력들 꼴아박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때가 훨씬 많았다. 방어선에 발이 묶인채로 냅두고 기동전을 걸어 포위전으로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방어선에 병력을 직접 투입시키기 전에 포탄의 비를 뿌려 방어선에 충분한 데미지를 입힌 뒤 투입시키거나, 둘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방어선 만능주의에 빠져서 공세와 기동에 극도록 소극적으로 나서고 방어선에만 짱박히다 독일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역으로 쌈싸먹힌 아주 교과서적인 사례가 얼치기 밀덕들이 엘랑 했다며 놀려먹느라 우려먹는 보불전쟁과 프랑스 침공이다.
실제론 1914년 10월을 넘어가면 공자측도 보병을 투입시키기 전에 정찰기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공격준비사격[23], 이동탄막사격[24]등으로 방자에게 포탄과 화학무기를 잔뜩 뿌려주었고,이미 1914년부터 공세를 위해 포를 너무 쏴댄 나머지 포탄 소모량이 감당이 안 될 수준까지 가버리니 1915년 1월 조제프 조프르가 총사령관 명령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일시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1916년쯤 되면 진격 과정에서 보병 뿐만 아니라 전투기와 전차까지 앞세우는 제병합동 전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니벨 공세, 루덴도르프 공세, 백일 공세 등 각종 네임드급 전투들만 보더라도 방자측도 공자 못지않게, 심지어는 공자 이상으로 갈려나가는 일들도 부지기수였으며, 서부전선의 가장 정석적인 공세로 평가받는 말메종 전투같은 경우는 방자측이 최대 3:1 교환비로 밀리고 3중 방어선을 고작 며칠만에 무력하게 뺏기는 일이 벌어졌다.
두번째는 정치외교적인 이유였다.
먼저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인구가 4000만 남짓한 국가였고 독일 제국은 6800만에 가까운 국가였다. 즉 1:1로 붙기엔 체급이 딸려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하기 위해서라면 영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러나, 각자의 이해관계가 떨어져서 맺는 군사동맹에선 “나는 짱박혀서 방어만 할테니까 너네들이 대신 고기방패 해줘~” 라는 외교적 시그널을 보내는건 그냥 동맹을 깨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동맹국을 잃는것이 곧 전선 부담의 급증을 의미하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우린 절대 짱박혀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는것”을 동맹국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에겐 지속적인 공세가 사실상 반강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 제국은 이에 보답해 내부에서 혁명이 터져 전선에서 이탈하기 전까지는 동쪽에서 독일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줬다.
이게 결코 기우가 아니었던것이, 후에 나치 독일의 팽창을 막고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를 모스크바로 초대한 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라는 자신의 최측근을 회담에 보내면서까지 과거처럼 다시 하나로 뭉치자는 집단안보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군부 내 서열 40위 단위 대장을 파견했고, 영국은 더 나아가 소장을 파견하여 유사시 4개 사단 파병 운운하며 안보협력 의지 자체를 보여주질 않는걸 넘어 대놓고 소련군에게 고기방패 해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자 재대로 열받은 스탈린이 그냥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버려 서방연합군은 나치독일의 침공에도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서부유럽에 전쟁이 개시된지 2달도 안 된 1940년 7월쯤 되면 소련은 뒷짐지고 수수방관했고, 프랑스는 수도가 털렸으며, 영국군은 무기까지 다 내팽겨치고 몸만 간신히 건져서 탈출했다. 연합국들은 각자도생식으로 방어로만 일관하며 “너가 먼저 희생해라“ 식으로 서로 등 떠밀다 깔끔하게 각개격파 당하고, 겉잡을 수 없이 커진 나치독일을 상대로 흘릴 필요가 없었던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렸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세주의가 무모하고 어리석으며 방어만이 최선이라는 담론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는 2차대전 초기 서부전선이 증명해주었다. 특히 1939년 까지만 했어도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상대로도 공세종말점이 왔을 정도로 취약했던 당시 독일군의 실상을 상기해보면, 공세주의를 포기하고 방어로만 일관하기로 선택한 전간기의 프랑스의 선택이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보불전쟁 시기 프랑스군은 종래의 공격 대열인 '퓌리 드 프랑세즈'를 폐기 하고 무기의 카탈로그 스펙에 의존하여 다가오는 적에게 화력을 쏟아붓자는 '푸 드 바타용'이 주류가 되었지만 '고속으로 기동하여 전선을 분단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직접접근-섬멸론의 프로이센군에게 대패 하였다. 이후 화력론파가 틀렸다는 군부 자아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고속기동과 전선 돌파를 위한 보병의 정신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프로이센 육군의 정신론을 그대로 직수입. 능동 기동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큰 틀에서 프로이센과 비슷해진다. 여기서 흔히 포슈를 돌격 바보로 왜곡하게 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정작 포슈를 포함하여 조제프 조프르, 조제프 갈리에니, 에밀 파욜 등은 보불전쟁 당시 상대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방어에 급급하려 한 결과 몰트케의 기동에서 뻔히 약점을 드러낸 상황에서도 그것을 구경만 하다가 주도권을 넘기고 오히려 돌파 당해 버렸던 경험에 의거하여 공격 정신을 주장 했고 포슈의 유명한 말[25] 역시 적들의 움직임을 구경만 하며 짱박혀 있지 않고 아군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이다. 그 말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에게 밀리는 상황이지만 겁먹지 않고 용감히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전부 잘라내고 포슈와 프랑스군을 비하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사실 1913년 교리를 창안안 그랑메종은 1915년 전사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상당한 공훈을 올리고 대령에서 소장으로 급속 승진한걸 보면,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의 실전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1913년 초 프랑스군의 실전 기동훈련을 본 독일군은 '결단력 부족, 겁에 질려있음, 안전해지려는 과도한 욕구, 병사와 부사관의 무기력함, 대담성이 없음, 극도의 조심성'이라는 혹평을 남겼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3년 교리는 분명히 여러 측면에서 극단적이고, 한계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에는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작전술적 영역에 관한 것이었는데, 작전술과 전술의 교리가 분화되기 전 시점의 프랑스 장교들 다수는 작전술적 초공세를 전술적 측면의 초공세로 인지하는 오류를 범했다. 정말로 이들은 적극성을 강조한 그랑메종의 교리를 전술적 닥돌로 착각해버리고, 정작 그랑메종조차도 평지에서의 보병 정면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했음에도 평지에서 보병들만 데리고 정면 돌격을 감행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면 닥돌도 원래 프랑스군은 행진 간 사격(feu de marche)이라 하여 전진간 기관총 사격으로 방어측을 압도한다는 개념을 1903년 도입해 경기관총 쇼샤를 개발해 전쟁 내내 26만정을 보급했다. 비록 쇼샤는 초창기 물량분에는 품질관리 문제가 있었지만 최소한 프랑스군은 돌격간 엄호를 위해 방자를 압박한다라는 개념이 분명히 잡혀있었고 이를 위해 무기 개발도 나섰던 것이다. [26]
그리고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 프랑스군 교리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크게 식민지에서 실전을 거친 식민지 학파, 포슈, 페탱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기성 장교, 그리고 그랑메종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소장파(청년 투르크당)으로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식민지 학파와 에콜 드 게르의 기성 장교들은 초공세 교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1차 대전 초기 프랑스의 졸전은 여러 분열상 때문에 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통합된 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 이러한 여러 문제를 '엘랑 비탈'이라는 교리 문제로 퉁쳐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돌아와서, 프로이센의 보병 기동 전술을 직수입 해와 발전 시킨 프랑스군은 17계획으로 독일 서부에 비해 프랑스 동부는 철도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차량을 동원해 독일군과 비슷한 속도로 전선에 병력을 전개 시키는 업적을 달성 했다. 이후 1914년 여름의 전투는 프랑스와 독일이 양측 모두 보병 돌격을 통한 고속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초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반격해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섬멸 시켰다. 하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1871년에 비교해 진지구축능력과 화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양측 모두 상대방의 전선을 돌파하는 것에 실패 하여 고착 되었다. 이 와중에도 니벨 등의 장군들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수준으로는 적군의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여 적을 분단 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다.
2.1.1. 알자스-로렌을 향해 돌격한 프랑스군?
일반적으로 프랑스군의 제17계획을 군인을 강제로 돌격시켜서 기관총 앞에 갈아버린 무능의 극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9년 5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패배의 원인 분석과 지휘관 질책을 위해 주요 장군들을 소환해서 청문회를 열었다. 여기서 제17계획을 세운 중심인물이었던 노엘 드 카스텔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프랑스군 작전참모들이 17계획에 작전계획(Operation Plan)을 포함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동원계획(Concentration Plan)에 대해서만 의논했다."
여기에 대해 의원들이 동원계획과 작전계획의 차이점에 묻자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가 작전계획은 군사작전의 세부사항까지 정의한 것이며 동원계획은 병력을 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전투를 준비하는 성격의 계획이라며 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17계획이 병력 동원계획이며 아르덴 공세를 포함한 작전은 17계획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세작전은 적군의 군사 배치에 관란 첩보를 입수한 후 참모총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따라서 초기 프랑스군의 공세와 그에 따른 피해는 17작전 때문이 아니라 조제프 조프르 개인의 무능함 탓이며 엘랑 비탈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수백만의 육군을 전쟁 직전에 국경에 배치한 동원 계획으로 봤을 때 17작전에 한해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7작전이 군사작전으로 알려진 것은 전간기 프랑스의 좌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로 17계획 = 공세주의 무능작전이라고 선동하고 영국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탓이다.
2.1.2. 프랑스군은 돌격만 했다?
1915년 중부에 출간된 "총공세를 위한 목표와 조건"(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Goals and Conditions for a General Offensive Action) 혹은 노트 5779이다. 1914년말과 1915년초에 프랑스군이 참호전과 화력전을 치르면서 쌓은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참호전을 휘어잡는 과정에서 출간된 첫번째 걸작이라 할 수 있다.이 문서는 후일 독일군의 발명물로 취급받는 침투 전술(혹은 '후티어' 전술)을 사실상 최초로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군은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담당하며 1916년의 베르됭 전투까지 방어에 일관한 독일군보다 더욱 공세 전술을 발전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인해 궁극의 공세 전술인 침투 전술을 개발해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게 조나단 크라우스(Jonathan Krause) 교수의 설명이다.
- 보병돌격의 목표는 1차 참호선의 탈취로 멈추지 않고 더 후방의 목표를 노릴 수 있는 요충지를 탈취해야 한다.
- 보병 소대는 경보병과 같이 산개하여 움직이며, 적을 향해 근접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엄폐물을 향해 움직여서 총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 공세에 있어서 1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강습부대로써 적의 방위거점을 위해 최대한 깊숙히 돌파해야 한다. 2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참호 청소병(nettoyeurs de tranchée)으로써 리볼버, 트랜치 나이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참호에 돌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참호 청소병들을 엄호하기 위해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추가적인 기관총, 가시철사, 폭파용 폭약, 모래주머니,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고 엄호한다.
- 포병은 공세에 있어서 체계적인 공격으로 적을 압박하고 아군을 엄호한다.
이 전술교리는 보병 돌격의 목표가 적군의 1차 참호선의 탈취뿐만 아니라 후방의 목표를 공략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목적-적방어선의 돌파-을 달성시킬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한다.” 따라서 이 문서의 본문은 ‘무한 전투’(continuous battle)를 강조하고, 포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체계적인 전투’(methodical)를 중시한다. 그리고 보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다시 돌파를 중심으로 한 무한 전투를 강조한다. 이 부록의 설명에 따르면, 보병은 마치 척후병처럼 산개형 대형(dispersed formation)을 유지하면서 여러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이는 전전(戰前-pre-war)의 이론과 맥락이 닿는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nettoyeurs de tranchée, 혹은 ‘참호 청소병’(trench clearers)에 대한 언급이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정립된 교리 내에서 수 차례 반복되는 첨투전술에 대한 서술 중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로서, 특별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은 병사들이다. 부록에 의하면, 1차로 파견된 보병들은 적 방위거점을 피해 최대한 깊숙이 돌파해야 한다. 또한 2차로 파견된 참호 청소병들은 앞서 강습 부대(assault troop-앞서 언급된 1차로 파견된 보병)가 회피한 적 방위거점을 제거해야 한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리볼버(revolver-회전식 연발 권총), 참호검(trench knives), 수류탄이 지급되어 근접전을 대비하고 이를 위한 특별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기관총, 폭발물(petard), 가시철사(barbed wires), 모래 주머니, 박격포(trench mortar)를 지급받는다. 침투 전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세작전을 기획하면서 가장 필수적인 전술로 사용된다. 이는 ‘후티어’ 전술로도 불리며, 독일군의 발명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은 프랑스가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티어 전술 등 침투 전술을 개발할 당시에는 프랑스군은 여전히 "돌파"라는 구시대의 개념이 아직 가능한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에밀 파욜 등의 지휘관들은 "체계적인 공세", 즉 포격으로 확실히 짓밟고 보병은 잔해 처리 및 깃발 꽂이역으로 활용하는 그러한 방식의 공세로 기울었지만 빅토르 위르발같은 지휘관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인력을 목표를 향해 공격하는 "무한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하는 노트 5779는 프랑스군의 참호전에 대한 해답이 아닌 과도기를 넘어가는 순간의 이정표라고 봐도 무방하다.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은 오인된 측면이 많고 포슈의 최대 비판자이자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에 대해 여러 서술을 보인 리델 하트조차도 주장하지 않은 것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군은 1915년의 과도기를 거쳐서 1916년에 이르면 상당한 전술능력을 갖춘 덕분에 영국군이 공세 첫날에 5만의 사상자를 낼 때 프랑스는 겨우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는 대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지 않고 1차대전의 프랑스군에 대한 항목은 전초의 군복이나 초반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비웃기 바쁘고 1차대전을 승리했다는 점, 또한 2차대전의 패배나 입은 피해로 인해 무마하고 조롱으로 일관하기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이라 할 수 있는 페르디낭 포슈조차도 제대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의 츠지 마사노부인양 까인 것은 이러한 풍조의 일환이라 보인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프랑스군의 전술/전략의 발전은 상당히 복잡한 분야지만 로버트 다우티 교수의 "The Pyrrhic Victory"나 "The Seeds of Disaster"을 참고하는게 좋으리라 보인다. 조금 더 첨언하지면, 프랑스군이 1918년에 개발해낸 해답은 결국에는 돌파라는 개념을 버려서 이뤄낸 것이다. 포격으로 적진을 박살내고, 포병의 사거리까지 보병을 진격시키고, 포병 또한 앞으로 들이밀고, 다시 포격으로 적진을 격파한다는 것을 전술적인 국면에서 반복했다. 전략적인 국면의 경우에는 한 전장에 집중하는 개념을 버리고 여러 전선을 서로 다른 타이밍에 공격해서 적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독일군이 방어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묻매를 맞도록 강요했다. 결국에는 2차 마른 전투에서부터 독일군은 거의 120일간 제대로된 반격을 못하고 완전히 완패하며 벨기에와 프랑스에 장악한 영토를 죄다 토해낸 다음에 11월 11일에 사실상 항복하는 결과를 낸다. 이는 "The Pyrrhic Victory"에서 다루는 1918년의 성과이다.
1918년의 교전은 4년만에 부활한 기동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긴 허나 화력전 및 소모전으로 말 그대로 독일군의 마지막 전력을 빨아먹어서 군 자체의 붕괴를 이끄는데 주력했지 우월한 기동력으로 적군을 돌파하고 유린하는 방식(가령 1940년의 프랑스 침공이라던가)은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실현했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영불 모두 허덕이던 시점에 미군은 애송이에 불과한다는 점에서 1918년에 연합군이 보인 분투는 놀라운 수준이고 그만큼 독일군 또한 그간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연합군은 4년동안 버틴 대가를 받아간 것이다.
2.1.3. 왜 이렇게 비하적인 이미지가 박혔는가?
결론적으로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모든 군대 중 가장 현대적인 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미지가 실추된 가장 큰 이유론 이후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프랑스가 6주 만에 파리까지 정복당해 정부가 그대로 항복했고 그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적 업적 전체가 완전히 비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던 점에 있다.
이는 단순히 1차 대전의 승전국 이미지가 망가진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수백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며 쌓아올린 강군의 이미지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대참사였다. 물론 프랑스 침공 문서에 나오듯이 프랑스군 입장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분명 나름대로 싸울 만큼 싸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6주 만에 항복했다는 대참사를 완전히 무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엘랑 비탈은 1918년까지 포슈의 손을 거치면서 도태된 전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를 패배로 몰아넣은 구시대적 전술로서 비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엘랑 비탈로 알려진 총력 공격 전술 'Offensive à toutrance'은 사용되었던 1차 대전 국경 전투 당시 패배의 원인으로 꼽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 피에르 미겔은 '공세적이며 신중하며 사려 깊은 개념'이며 방어, 화력, 기동의 균형을 제시한다고 분석했고[27] 해당 교리가 작성되었던 것이 1911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프랑스군 전군에 대해 미친 영향이 극도로 미미했다라는 주장조차 있다.
이는 전술한 국경 전투 당시 독일군에게 돌격하다가 쓸려나간 프랑스군 행적에 대한 설명으로 살펴보았듯 오히려 조프르의 군사적 실책이라는 논의도 있을 정도로 총력 공격 전술에 의한 실패 논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국경 전투 당시 독일 제국군 좌익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아 영토를 조금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우익의 주공이 포위하려 올때까지 버티는 것이었지 프랑스 주력군을 격퇴해버리는 것이 아니었고 이는 타넨베르크 전투(1914)와 함께 독일 제국군이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더 나아가 비하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사건의 근원인 2차 대전까지 확대를 해보자면 2차 대전기 프랑스군의 전술은 포슈의 교리를 나름대로 현대적인 면으로 발전시키는 과정 중에 있었지 총력 공격 전술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하지만 이러한 엘랑 비탈 전술이 2차 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의 패배를 비하하는 것으로 쓰인 것은 전후 생존했던 독일 국방군 장성들과 2차 대전 승전에 있어서 큰 지분을 차지했던 영국과 미국의 오해와 자신들의 전공을 추켜새우면서 1940년 서부 전역 당시 프랑스군이 구시대적인 전술을 사용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1940년 5월 프랑스군의 전술이 구시대적이었던 것은 독일군의 전격전이라는 환상을 깨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칼 하인츠의 전격전의 전설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지적받은 프랑스군의 구시대적인 전술은 문제의 엘랑 비탈이 아니라 보병 선형 전술과 기갑부대를 보병의 보조적 역할로 보고 보병 부대에 분산배치 한 것, 공군 운영의 오류, 무전기의 부재, 첩보의 무시였다.[28]
돌격과 총검을 활용한 백병전을 주장한 총력 전술대로라면 영불 최고전쟁평의회가 1939년 9월 자르 침공 당시 프랑스군 내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 중포를 이유로 지크프리트 라인 앞에서 물러나 마지노선에 틀어박힌 것, 그리고 1940년 5월과 6월 당시 가믈랭의 딜 라인과 베이강의 베이강 선이 갖추고 있던 중대전술기지나 강력한 방어력으로 유명했던 마지노선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엘랑 비탈때문에 프랑스군이 2차 대전에서 패했다는 것은 프랑스군 입장에선 억울해 팔딱 뛸 말이다.
이러한 오류는 구데리안와 프란츠 할더를 비롯한 독일군 생존 장성들은 전후 이들을 높이 평가했던 영미 연합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던 '눈부신 성과를 거둔 독일군이 패배한 이유'를 자신들의 부족한 전략적 식견에 대해선 입 닫고 오로지 히틀러에게 전과하거나 리델 하트와 같은 자신들이 상대한 영미 장교들을 기동전의 스승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워주기도 했다.[29]
프랑스의 조기 패전으로 인해 2차 대전 당시 활약할 수 있던 자유 프랑스군의 병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전의 스포트라이트는 수천만명을 갈아마시면서 나치를 밀어낸 소련, 연합군의 든든한 무기고이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끌며 프랑스를 해방시킨 미국, 프랑스가 항복한 상황에서 홀로 나치에 맞서 싸웠던 영국에게 향했다.
반대로 이로 인해 나치의 찬란한 군사적 영광의 한 페이지를 내주었던 프랑스에겐 우리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라는 식으로 조롱이 쏟아지게 되었다.2025년 사례 이 과정에 이른바 프랑스의 구시대적인 전술로 패배했다는 독일군 장성들의 입장에 따라 갑자기 1차대전때부터 이미 프랑스군 내부에서 비판이었던 엘랑 비탈이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오게 되었다.[30]
즉 2차 대전에서의 엘랑 비탈에 대한 비하적 이미지는 각자의 전공을 치켜새우기 위한 과정과 냉전, 그리고 동맹이라고 하기엔 다소 복잡한 영불관계와 미국-프랑스 관계에 따른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독일의 전격전, 라스푸티차와 렌드리스빨로 이긴 소련, 독일을 통해 배워온 미군의 놀라운 공지 기동전이라는 2차 대전에 대한 오해가 쌓이게 된다.
그러한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31]
게다가 엘랑 비탈을 더 이상하게 베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군이다. 프랑스군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키는 모습을 본 일본군 수뇌부는 "독일처럼 비싼 돈 들여서 기동전 펼쳐도 프랑스처럼 돌격하면 다 소용없구나!"라는 이상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엘랑 비탈 교리에서 백병전 교리만 따와서, 일본군사연구소 중 하나였던 토야마학교에서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라는 이름으로 백병전 교리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완성된 일본군의 백병전 교리는 장교가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할 것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장교들에게는 군도가 기본적으로 지급되었다.
1916년에 이런 짓거리를 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건 없지만 1944년이 되어서도 "군도의 사용법 및 시참요령" "단기속성 일격필살 훈련요령" 같은 교본을 일선에 배포하며 반자이 돌격을 했다.[32] 일본군의 이 정신나간 행적은 엘랑 비탈 교리 자체마저 일본군식 정신력 우월주의, 의지 드립으로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2.2. 인터넷 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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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밈이 탄생된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 등에서는 프랑스를 '엘랑스'라고 부르고, '항복'이란 뜻으로 '엘랑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33][34] 대표적인 표현이 2차 대전에서 독일에 6주 만에 항복한 걸 비꼬는 "6주 엘랑".
게임 Hearts of Iron IV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분열된 정부'라는 국민정신을 달고 시작하는데, 매일 정치력을 0.8 소모하고, 안정도가 10% 감소하며, 항복 한계치가 무려 50%나 감소한다. 이 수치는 협력정부로 깎이는 것(항복 한계치 -30%)보다도 높은 페널티로, 다시 말해 항복도가 2배로 올라 파리 같은 주요 승점 지역이 고작 몇 개 점령되는 것으로 항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35] 이는 게임 밸런스적으로 프랑스를 독일이 공략하지 못하면 독소전쟁 발발시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순식간에 망하기 때문에 주어진 페널티로, 해당 페널티를 땐 프랑스는 국토 전역을 점령해야 항복할 수준으로 끈질기게 버티며 육군메타를 가는 순간 1차대전 당시의 불굴의 프랑스로 단숨에 체급이 떡상한다. 독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위시로 한 몇몇 국가들 역시 프랑스를 먼저 점령하고 시작할 수 있으며, 이 "선엘랑"은 아무리 약한 나라여도 파시로 정부를 바꿔주고 10공수만 준비해주면 열강 하나가 1937년에 사라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게임의 가장 쉬운 날빌 빌드로 통한다.[36] 그래서 멀티플레이에서는 분열된 정부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공산주의나 국민 부흥(파시즘) 루트를 간다.
[1] 제2차 세계 대전 후반부, 미국까지 적극적으로 이에 끼어들면서 승기는 이미 연합국 쪽에 넘어가 있었다. 일본 또한 연합함대 괴멸과 본토 해상봉쇄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사실상 패배가 확정된 상황이었으나 국가지도부는 전쟁 지속 의사가 투철했기 때문에 가이텐 등의 전쟁 물자를 개발해내며 내부로는 아직 일본의 전의가 꺾이지 않았다는 프로파간다를 이어나가며 총옥쇄를 각오했는데, 당연하게도 전황에는 1의 영향도 주지 못했고 결국 핵폭탄 투하를 기점으로 대본영도 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을 주창하며 태평양 전쟁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2] 사실 이러한 공격 중심의 사고, 특히 보병의 착검돌격에 대한 로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가지고 있던 통념이었다. 문제는 프랑스의 경우 이를 단지 로망이나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보편적인 전술교리로서 각 부대에 세뇌교육 수준으로 주입시켜 실행토록 한 점이다.[3] 당시엔 아직 경기관총이 개발되기 전이라 '기관총'은 시설에 배치되는 수성용 병기라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4] 좀 더 정확히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군대가 운용할 수 있는 병기의 화력이 증대하면 자연스레 공세 측이 방어 측보다 우세해질 수밖에 없을 거라 여겼다. 이는 상술한 기관총과 더 나아가 핵폭탄 개발 이후 나타나거나 본격적으로 대두된 핵우산, 상호확증파괴 등의 개념에 의해 화력의 증대는 공세보다는 방어 측에 더 유리하다라는 것이 증명되어 예측이 거하게 틀렸다.[5] 이는 포슈 자신부터가 포병 장교를 거쳐온 경험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6] 고대 명언으로 빗대자면 필사즉생행생즉사를 본래의 의도는 쏙 빼놓고 "죽으려 들면(그 정도로 열정적이기만 하면) 살아남는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정신론으로 비약시켜 해석한 것과 다름 없다.[7] 대표적으로 포슈의 이론 실천의 핵심은 아방가르드(전위의 경계 분견대) 편성이었는데, 그랑메종은 아방가르드라는 개념 자체를 직접 비판했다.[8] 이 점을 정확하게 보여준 게 바로 1차대전 초반의 국경 전투와 이후 이어진 참호전이다. 고작 3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서 몇만 명이 하루만에 죽어나가는 대참사는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보호되는 방어군의 참호를 아무리 보병을 밀어넣어 봐야 뚫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통적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지만, 아직 그 역할을 맡을만한 병과 및 장비(전차와 차량, 항공기)는 미약했던 탓에 방어자가 공격자에 대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9] 나폴레옹은 체스를 할 때도 이 전통을 지켰는데 나폴레옹의 체스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오직 공격만이 미덕이던 낭만주의 시대의 체스를 잘 나타낸다.[10] 전쟁은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과 전투의지를 강조하는 문구가 있긴 한데 역시 독일어 원본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프랑스어판 번역의 오역에 독자들이 '의지'에 너무 심취한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영문판으로 1970년대 이후 번역은 전투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라고 쓴 것도 있다. 또한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전쟁론 이펙트 (Clausewitz's on war) -휴 스트레이천-.[12] 그러나 리델 하트가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에서 볼 수 있듯이 포슈를 맹렬하게 비판하고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나름대로 백일 전투는 인정해준 것 같지만, 포슈를 삼류 공세주의자인양 묘사하게 된 계기가 바로 리델 하트의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다. 그리고 포슈를 비롯한 유명한 군사사상가들을 분석한 <군사사상론>의 경우에는 포슈를 당대 군사사상가 중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꼽았다.[13] 조프르는 마른의 기적의 공과 고착화된 서부전선의 과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1차대전 초기에 조프르의 뚝심이 없었다면 패배가 확실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14] 몽고메리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군-영국군의 불화와 상호불신은 큰 편이었다. 전쟁 말기 1918년 4월에야 통합사령부를 구성할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군의 평가가 박한 것도 주류인 영미 쪽의 평가가 박하기 때문인 점도 어느 정도 있다. 물론 그보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광탈과 전후 알제리와 베트남 등의 식민지에서 벌인 허접한 추태들로 서방과 공산권 양쪽에서 조롱을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15] 이는 다소 편향이다. 오히려 독일이야말로 동부전선을 빼면 일시적인 일이고, 프랑스야말로 비주류 전선에 대한 상시 파견 비율이 더 컸다. 독일군 전력 상당수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서부/동부전선에 주둔해 있었고,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수십만을 동원했으나 공격전 한번 할 때 일시적으로 동원했으며, 그리고 다른 전선에서는 병력이 적은 편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1915년부터 종전까지 발칸 반도에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켰으며, 독일처럼 아프리카나 이탈리아 전선에도 병력 일부와 물자를 보내주었다. 따라서 동부전선을 빼고 본다면 프랑스가 오히려 독일보다 더 전력이 분산된 상태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동부전선을 포함한다면 독일이 더 분산되었지만.[16] 영국군이 더욱 큰 비중을 자랑했다는 1917년 말에도 영국군은 겨우 150km의 전선을 담당한 반면 프랑스군은 무려 580km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전선거리 보다 영국쪽이 맡은 지역은 독일의 주침공로이고 프랑스군이 맡은 지역보다 병력 밀도도 높고 자연 지형이 없는 개활지라 병력 손실 비율은 영국군이 높았다. 또한 4차에 이은 이프르 전투중 가장 큰 규모인 3차 이프르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선 독일군과 영국군이 나란히 22~26만씩 손실을 냈다. 북해쪽과 프랑스 동북지역 전선은 영국쪽 부담이 컸다.한편 1차 솜 전투 또한 전통적인 시각으로 영국군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William Philpott 등 수정주의자들은 영불공동작전으로 평가한다. 사상자가 영국군이 42만, 프랑스가 19만 6천 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영국군이 주도한 건 맞다. 프랑스군이 베르됭에 집중하느라 솜 전투에서 역할은 없었다라는 말도 존재하는데 영미사관을 대변해 영문 위키백과 솜 전투 항목에서 포슈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솜 전투에 대해 "The main part of the offensive was to be made by the French Army, supported on the northern flank by the Fourth Army of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라고 적었다. 게다가 이 전쟁과 악명높은 베르됭 전투가 동행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17] 하지만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1914~1915.겨울 이후 1918년 공세까지 수세적 입장이었다는 비판도 있다.[18] 당시 프랑스의 젊은 인구층은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자 빠지고 다 빠지고 나면 140만의 전사자는 18 ~ 27세 남자인구의 27%에 달했다. 이러한 인구 타격은 전쟁 후에도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제약 조건이 되었고 2차대전의 패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19] 물론 몇몇 프랑스군 졸장들의 실책 때문에 피해가 커진 감이 있긴 하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여러 나라들이 비슷하게 참호전 타개책을 펼쳤음에도 프랑스가 더 주목받아 까인다고도 볼 수 있다.[20] 1:1~1.1:1, 러시아군 1:1.5 ~ 1:2.5 , 영국군 1:1.2 ~ 1:1.5[21] 라이트 형제가 미국에서 그렇다 할 관심을 못 받고 프랑스에다 첫 공장을 세운건 유명한 이야기이며, 마찬가지로 맥심 기관총, 루이스 경기관총, 호치키스 등 각종 영프산 자동화기들은 본래 원산지가 미국이었지만, 미국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개발자들이 각자 영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기업과 공장을 세웠다. 1차대전 당시 미군의 제식 경기관총은 호치키스 M1909, 쇼샤 였으며, 미군의 제식 중기관총은 호치키스 M1914, 미군의 제식전차은 르노 FT, 미군의 제식 포병은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 1897년식 75mm 야포, GPF 155mm 야포, 미군의 주력 전투기는 뉴포르, 스패드였다.[22] 사실 러일전쟁 시기 일본은 서구의 문물이라면 무조건 배끼고 보던 시기였기에 일본군 역시 서구식 화력주의를 바탕으로 싸우던 군대였다. 사실 그 유명한 반자이 돌격 자체가 기동전,공세는 해야겠는데 일본의 공업력으론 도저히 포탄 소모량이 감당이 안 되니 기합으로 화력을 극복한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도달한 결과물이다.[23] 보병 진입 전 대규모 포격을 적에게 날리는 개념[24] 포병이 적진을 때려부술동안 아군 보병을 진격시키고, 아군 보병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 쯤엔 포병은 다음 목표지점으로 재방렬하여 재포격하고 보병은 이미 포병이 뒤집고 간 적진을 정리한 뒤 다시 목표물로 진격하는것을 작전 종료까지 반복하는 개념[25]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포슈 본인의 항목에도 쓰여져 있듯 실제로 한 말은 아니고 당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는 포슈를 언론에서 부각시키면서 창작된 말이다.[26] 또한 타국군의 동급 병기들이 프랑스보다도 나앗다고 보긴 어려운데, 영국군에겐 루이스 경기관총, 독일군에겐 MG08/15가 있었으나 이들 역시 쇼사보다 생산량이 10만정 가까이 부족했고, 이동간 사격은 고려하지 않은 설계였던데다 MG08/15의 경우는 아예 거점방어용 수랭식 중기관총을 어거지로 뜯어고친 물건이라 독일군 내부에서도 노획한 루이스와 쇼샤보다도 덜 선호받던 물건이었다. 그나마 미군이 M1918 브라우닝이라는 쇼샤 대비 확실한 상위호환 무기를 만들어서 투입시켰지만, 종전 6주전에 투입된 물건이라 1차대전에서의 활약은 제한적이었다.[27] Pierre Miquel, Le gâchis des généraux : les erreurs de commandement pendant la guerre de 14-18, Paris, Plon, coll. « Pocket » (no 11640), 2003 (1re éd. 2001), 242 p.[28] 보병의 선형 전술의 경우 독일군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독일군은 그 형태가 애매했다고 하지만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라는 타협안으로 나왔고 히틀러를 비롯한 보수파 장교들의 방해을 받아야했지만 독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독일 공군의 운영 역시 스페인 내전과 전략 폭격론자였던 발터 베버의 죽음 속 도출된 결과였다. 즉 하인츠가 전격전 전설에 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작전술적 측면에서의 성과 확대에 몰빵한 군대가 바로 독일 국방군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전략적 사고방식은 독일 제국군 수준에서 발전한 것이 없는 구시대적이었다.[29] 가령 미군 공식 전사를 작성할 당시 미군은 독소전쟁에 대해 소련 장교를 불러다가 물어볼 수 없었으니 프란츠 할더를 불러다가 적었는데 프란츠 할더는 자신이 소련을 얕본건 쏙 빼고 히틀러가 다 했어, 소련 날씨가 추워, 렌드리스때문에 우리가 밀렸어로 서술했다.[30] 이것도 웃긴 것이 독일군 장성들이 프랑스의 구시대적 전술을 비웃었다고 하지만 엘랑 비탈이라고 불리는 총력 공격 전술을 언급하며 비웃은 적은 없었다. 독일군 장성들이 비웃은 것은 왜 전차로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참호전만 생각했는가?였다.[31] 독소전과 프랑스 침공에서의 오해를 넘어 여기에 적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서술 역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에 대해 에리히 만슈타인의 말을 무시하고 히틀러의 고집대로 버티다가 항복한 우유부단한 장군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단계부터 이미 파울루스의 6군은 누더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고[32] 이때 백병전 위주를 완성시켰던 토야마학교에서는 전후 일본검도 토야마 유파로 살아남아서 유명해졌다.[33] 다만 이렇게 밈으로서 조롱받는 것과는 별개로 유로파 내에선 엘랑은 10%만 올라도 감지덕지인 육군 사기를 20%나 늘려주는 덕에 그야말로 사기적인 종특으로 여겨지고 있다.[34] 사실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 1티어 급, 특히 육군 최강인 육각본능 왼쪽 파란 거에 비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선 열강이긴 하나 별 볼일 없고 어느 나라가 침공해도(심지어 베네룩스나 스위스에게도) 독일이 정석대로 안슐루스, 뮌헨협정 루트 타주고 기갑 뽑으면 낫질할 필요없이 마지노선에 무지성 웨이브로 돌격해도 뚫리는 등 패배하기 바쁜 국가로 나오는 영향이 크다. 특히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나라에 상관없이, 협력정부 없이도 수도인 파리만 함락시키면 분열된 정부 페널티를 떼지 못한 민주 프랑스는 그대로 항복하고 사막에서 개싸움을 해야 되기 때문에 멀티에서 프랑스는 십중팔구 파시즘으로 독일에 붙거나 공산주의(프랑스 코뮌), 비동맹으로 갈아탄다. 연합국에 남는다면, 워낙 악명이 높으니 미국, 영국에서 병력을 개때 같이 보내 프랑스에 몰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35] 해당 영상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협력정부를 박고 프랑스 남부에 공수 조금 한 것만으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36] 그래서 이러한 점이 개선된 The Road to 56 모드 같은 경우 프랑스가 뻐기면서 1차 대전의 재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뭐 그래도 십중팔구는 망하지만 바닐라에선 그것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