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3:02:03

왕표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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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王彪之
(305 ~ 377)

동진의 인물. 자는 숙호(叔虎).[1] 서주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출신. 위장군 왕빈의 차남으로, 동진의 명문가인 낭야 왕씨 집안의 일원이다. 사안, 왕탄지 등 반환온파와 대신들과 연합해 호시탐탐 황제 자리를 노리던 권신 환온의 야망을 저지했다.

2. 생애

조정에서 처음에 왕표지를 좌저작랑, 동해왕 문학으로 삼으려 했다. 종백부인 승상 왕도가 왕표지에게 이르길,
"관리를 선발할 때 너를 상서랑으로 삼으려 했는데, 너는 다행히 운이 좋아 제왕의 보좌관이 되었구나!"
라 하자, 왕표지 답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은 개의치 않고, 적당한 시기가 오면 스스로 맡을 것입니다. 지나친 승진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고는 상서랑에 임관하기를 희망하니, 왕도가 그 뜻을 존중해 상서랑으로 삼았다. 이후 진동장군 무릉왕 사마희(司馬晞)의 사마로 옮겨졌고, 누차 승진해 상서좌승, 사도좌장사, 어사중승, 시중, 정위를 역임했다.

영가태수 사의가 황제의 사면령이 내려졌음에도 영가군 사람 주교(周矯)를 처형했다. 이에 주교의 사촌형 주구(周球)가 양주(揚州) 치소로 찾아와 원통한 일을 당했음을 호소했다. 양주자사 은호는 관리를 파견해 사의를 체포하고 해당 사건의 처리를 정위 왕표지에게 맡겼다. 그러나 왕표지는 사의에게 작위가 없음으로 정위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라며 사건을 맡지 않으려 했다. 조정에서 이번만 예외적으로 정위가 해당 사건을 처리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왕표지는 여전히 이치에 근거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전한의 장석지(張釋之)에 비유했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회계왕 사마욱이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어 정권을 잡자, 왕표지는 상소하여 사면을 너무 행하면 백성들의 범죄율이 높아진다는 것을 근거로 사면을 자주 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하니, 사마욱이 이에 따랐다. 이후 왕표지는 이부상서로 옮겨져 사마욱의 곁에서 정사를 보좌했다.

영화 7년(351년) 12월, 서정대장군 환온은 여러 번 북벌을 구했으나, 그럴 때마다 조정에서는 매번 조서로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환온이 표문을 올리고 군사를 일으켜 무창(武昌)에 주둔하니, 조정에서 이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사마욱은 왕표지의 조언에 따라 사마 고숭이 대필한 조서로 환온을 달래주자, 환온은 그제서야 조정에 사죄하고 강릉(江陵)으로 복귀했다.

영화 9년(353년) 10월, 중군장군 은호가 3차 북벌을 계획하면서 전진의 우장사 양안(梁安), 대사마 뇌약아에게 사람을 보내 그들이 경명제 부건을 죽여주면 관우(關右)의 통치를 책임져 주겠다며 회유했다. 뇌약아 등이 이를 승낙하자 은호는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수춘(壽春)에 주둔했다. 그 소식을 들은 왕표지가 사마욱에게 상소해, 뇌약아 등은 반드시 속임수를 쓸 것이라 경고했다. 과연 뇌약아와 양안은 은호에게 낙양을 지키던 부황미는 도망치고 장우의 반란은 성공했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고[2], 은호는 그것을 믿고 진군했다가 산상(山桑)에서 요양의 기습을 받고 대패해 초성(譙城)으로 달아났다. 은호가 북벌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들은 사마욱은 웃으면서 왕표지에게 말했다.
"과연 그대의 말대로 되었구려. 요즘 들어 그대의 책략을 보면 장량, 진평이라도 그대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오!"
이후 조정에서 영군장군, 상서복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왕표지는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영화 11년(355년), 태상, 영숭덕위위(領崇德衛尉)에 임명되었다. 어떤 이가 사마욱을 찾아와 무릉왕 사마희가 비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 간하니, 사마욱은 왕표지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왕표지가 무릉왕은 그저 사냥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 하자, 사마욱은 왕표지의 말을 신뢰해 의심을 거두었다.

승평 원년(357년) 12월, 상서좌복야로 옮겨졌다.

승평 2년(358년) 8월, 예주자사 사혁이 사망하자, 사마욱은 환운을 차기 예주자사로 삼으려 했는데 그 전에 일단 왕표지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왕표지는 동진의 영토 절반에 가까운 형주를 끼고 있는 환온의 존재를 생각하면 그 동생인 환운에게 예주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간했다. 사마욱 또한 그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환운 대신 진군 사씨 집안의 사만을 예주자사로 삼았다. 또, 사마욱은 왕표지를 진군장군, 회계내사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하였다. 왕표지가 8년간 회계군을 다스리면서 지역 호족들의 발호를 억압하니, 군을 이탈한 백성 30,000여 호가 다시 돌아와 정착했다.

흥녕 3년(365년) 정월, 자기(赭圻)에 주둔하고 있던 대사마 환온이 진을 고숙(姑孰)으로 옮기자, 그 위세가 진동해 사방의 지방관들이 환온에게 예물을 상납했다. 하지만 회계의 왕표지만은 황제도 아닌 환온에게 공물을 바칠 수 없다며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환온은 회계군 산음현(山陰)에서 조세가 제때 납부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왕표지를 탄핵해 회계내사 직에서 면직하고 상서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그 해 12월, 환온이 표문을 올려 왕표지를 다시 상서복야에 삼았다.

태화 6년(371년) 11월, 환온이 백관들을 조당에 모아놓고 황제 사마혁의 폐립(廢立)에 관해 의논했는데, 이 상황에 알맞는 전례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 백관들은 벌벌 떨었고, 환온 또한 낯빛이 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표지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마혁의 폐위는 확정이라 생각하고 환온에게 〈곽광전〉을 가져와 참고하라 조언했다. 결국 사마혁은 예의가 모두 갖춰진 상황에서 폐위되어 회계왕 사마욱이 황제에 즉위하였고 조정 또한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뜻을 이룬 환온은 이번엔 무릉왕 사마희를 폐출하려 했다. 이에 왕표지가 반대하며 말했다.
"무릉왕께선 황실의 어르신으로, 아직 그 죄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순히 싫어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폐출시킬 수는 없습니다. 공께서 성명(聖明)을 세우시고 멀고 가까운 곳의 인심을 얻었으면, 마땅히 왕실을 받들어 이윤주공 단의 아름다움에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큰 일은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함이 옳습니다."
환온이 말했다.
"이미 일은 성사되었으니 그대는 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릉왕 사마희는 태재에서 면직되고 자신의 번국으로 돌아갔다. 아울러 무릉왕 세자 사마종(司馬綜), 양왕 사마진(司馬㻱)도 모두 환온에 의해 면직되어 사마희의 뒤를 따랐다.

함안 2년(372년) 7월, 간문제 사마욱이 태자 사마요를 후계로 지목하고 붕어했지만, 환온에게 양위할 줄 알았던 군신들은 의심하여 감히 후사를 세우지 못했다. 그때 조정에서 누군가가 대사마 환온에게 일처리를 맡겨야 한다 말하자, 왕표지는 정색하며 반박했다.
"임금께서 붕어하시면서 태자를 대신 세우셨는데, 어찌 대사마를 불러 일을 망치려 하는가! 만약 대사마가 직접 나와 일이 어긋나게 되면 반드시 그대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오."
결국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사마요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효무제 사마요는 아직 11세로 어렸기에 환충의 건의에 따라 태황태후 저산자를 다시 불러 섭정을 부탁했다. 벌써 섭정만 3번째라 더이상 정사를 맡고 싶지 않았던 저산자는 환온을 조정에 불러 주공 단의 거섭 고사에 의거하게 하려 했으나, 왕표지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하였다.

영강 원년(373년) 7월, 병에 걸린 환온이 조정에 구석을 내려줄 것을 구하고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해 재촉했다. 왕표지와 사안 등은 일부로 일을 늦추고 원굉이 쓴 조서의 초안에 대해 각종 트집을 잡아 계속 고치게 하였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나도록 조서는 완성되지 않았고 환온은 구석도 받지 못한 채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환온 사후 왕표지는 상서령에 임명되어 사안, 왕탄지와 함께 조정을 이끌어나갔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정사를 처리하기 힘들다 느낀 왕표지는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은퇴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불허하였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그를 호군장군에 옮기고 산기상시를 더하였다. 그 뒤로도 광록대부, 의동삼사가 더해졌지만 왕표지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원 2년(377년) 10월, 왕표지의 병이 위독해지니, 효무제는 황문시랑을 보내 그 고통을 헤아리게 하고, 30만 전에 달하는 금전을 하사해 그것으로 병을 치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표지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향년 73세. 조정에서 그를 광록대부로 추증하고 시호를 '간(間)'이라 하였다.

왕표지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왕월지(王越之)는 관직이 무군참군에 이르렀고, 차남 왕임지(王臨之)는 동양태수를 지냈다.

3. 기타

  • 왕표지는 나이가 20세에 달했을 때부터 수염과 머리카락이 매우 희어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백수(王白鬚)"라 불렀다고 한다.


[1] 진서에서는 당고조 이연의 부친 이호(李虎)의 이름과 겹쳐 숙무(叔武)로 피휘당했다.[2] 부황미가 도망친 것까지는 맞으나 장우의 반란은 공모자인 황문 유황의 배신으로 처참히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