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52:14

미추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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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부마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13대 국왕
미추 이사금 | 味鄒 尼師今
파일:경주_미추왕릉_봉분_(촬영년도___2015년) 문화재청.jpg
미추왕릉 전경.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284년 10월
사로국 서라벌
능묘 대릉(大陵) / 죽장릉(竹長陵)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13대 국왕
262년 1월 ~ 284년 10월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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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미추(味鄒) / 미조(未照) / 미소(未召)
부모 부왕 구도갈문왕
모후 술례부인 박씨
왕후 광명부인 석씨
왕녀 성국공주[1], 보반부인, 아류부인
묘호 태조(太祖)(?)[2]
왕호 미추 이사금(味鄒 尼師今) }}}}}}}}}

1. 개요2. 생애3. 전(傳) 미추왕릉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같이 보기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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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13대 군주.

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김씨 이사금.[3]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대손[4]이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김구도(仇道)의 아들이었다. 미추 외에도 다른 한자 표기로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伊柒 葛文王)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 왕비는 조분 이사금(제11대)의 둘째딸인 광명부인 석씨인데 아무래도 박씨 시대에 석씨인 탈해 이사금(제4대)이 남해 차차웅(제2대)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처럼 석씨 왕실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라 초기는 전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고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라지는 부분들은 대부분 사위 계승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5]

물론 첨해 이사금(제12대)이 정상적인 즉위 과정을 밟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혼란상을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원년에 의 출현과 금성에 큰 이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통은 신라에서 왕이 즉위하자마자 먼저 하는 국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재위 2년째에야 했기도 하고, 아버지 김구도를 대원군 격인 갈문왕에 봉한 것도 2년차에 했던 점 등이 바로 그것이라 볼 수 있다.

기록에서 미추 이사금의 딸이 두 명 나온다. 즉, 내물 마립간(제17대)의 왕비 보반부인실성 마립간(제18대)의 왕비 아류부인이다. 《삼국사기》기록상 연대를 실제로 믿으면 미추 이사금의 딸로 도저히 볼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 연대를 고구려보다 앞당기려고 의도적으로 당긴 의도가 역력함이 분명하되 계보도 자체는 실제로 개연성이 맞음이 상당부분 확인되고 있으므로 실제로 딸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바꿔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각각 따로 재위했다고 알려진 신라 초창기 임금들이 실제로는 재위기가 겹칠 가능성이다. 일반적으로 보반부인장녀, 아류부인차녀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금석문에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6] 훗날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식 5묘제를 실시하면서 김씨 왕계의 시조격으로서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7]

2. 생애

백성들을 돕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는데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신하들이 궁전을 고치자고 했으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생계의 근본인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농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일들을 일체 없애버렸으며 지방 영토를 순방하며 백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대내적으로 선왕인 첨해 이사금 대에 설치한 남당[8]에서 정무를 보았고 아버지 김구도를 갈문왕에 봉했으며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전왕들이 그래왔듯 백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 대체로 백제가 먼저 공격을 하는 구도였는데 공격이 들어오는 족족 막아냈다고 한다. 《삼국사기》기록상 연대만으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불가능했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직 신라계 유물경상도 전역으로 퍼지지 못했고 미추 이사금 재위 기간과 동시대인 3세기 후반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신라(사로국)는 여전히 진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제도 고고학적으로만 본다면 3세기 후반은 목지국을 막 제압은 했으되 여전히 목지국이 간접적으로나마 저항하면서 4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의 충청도 북부 일대 침투를 어렵게 했기에 3세기 후반 백제VS신라 간 전투는 어려운 상황이다. 《삼국사기》 서술을 믿는다면 미추 이사금이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로 재위했던 기간이 실제 연대보다는 후대에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석우로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선왕인 첨해 이사금 때 왜인들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 남겨진 석우로의 아내와 아들들이 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었고, 미추 이사금 시기에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던 어느 날, 대사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죽여버림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외교관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석우로 시기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있었고, 석우로가 대전, 대가야전과는 달리 유독 대고구려전에서 자주 패배해서 명망이 실추되었던 정황으로 보면 고구려 또한 3세기 후반에 신라와 전투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또다시 미추 이사금 대 사건이 3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에 무게가 실린다.

중국의 역사서 진서에 따르면 280년과 281년 진한왕삼국시대(중국)를 끝내고 중국을 이제 막 통일한 서진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오는데 이 진한왕은 진한을 주도하던 사로국 즉 신라의 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상 이 시기의 신라왕은 미추 이사금이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년 문제로 인해 서진으로 사신을 보낸 왕이 미추인지는 불명이다.

3. 전(傳) 미추왕릉


파일:경주_미추왕릉_봉분_(촬영년도___2015년) 문화재청.jpg

미추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현재 경주시 대릉원에 소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미추왕의 무덤인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논란이 있는 상태.

미추왕릉 문서 참조.

4. 기타

  • 최초로 왕위에 오른 김씨였기 때문인지 뒤따르는 설화들이 여럿 있다. 미추 이사금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석씨인 유례 이사금(제14대)이 즉위했다.[9] 유례 이사금 재위 14년에 이서국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이 포위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투구에 대나무 잎을 단 군사들이 이서국 군대를 물리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대나무 잎 군사들의 뒤를 밟다가 미추왕릉에 이르렀는데 앞에 대나무 이 잔뜩 떨어져 있었기에 모두들 "선왕의 은덕이다."라고 칭송했다는 것.[10] 훗날 통일신라 혜공왕(제36대) 시대에 김유신의 묘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김유신과 무장한 40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미추왕릉으로 향했다고 한다.[11] 미추왕릉에 도착한 김유신은 "제가 삼국통일에 힘 쓰고 죽어서도 이 나라를 지켜가며 나라에 한 일이 얼만데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후손들을 죽였습니다.[12] 저는 더이상 이 나라를 지키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라고 미추 이사금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자 미추 이사금이 "나랑 장군이 아니면 누가 저 놈들을 지켜주겠어? 좀 참고 돌아가서 하던 일 계속해줘"라고 달랬다. 김유신이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미추 이사금은 계속 "니가 생각을 바꿔라"로 일관했고 결국 김유신이 돌아갔다는 것. 나중에 혜공왕이 얘기를 전해듣고는 두려워서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흥무대왕릉)에 사과하고 살아남은 후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추 이사금에게도 감사의 의미로 미추왕릉을 대묘(大墓)라고 부르며, 오릉보다도 위에 두었다고 한다.[13] 두 설화를 통해 신라에서 미추 이사금을 동해이 됐다는 문무왕(제30대)과 비슷하게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 미추 이사금을 후대에 김씨가 신라 왕위를 완전히 차지한 뒤에 만들어낸 가공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대의 김씨 왕들인 내물 마립간(제17대)과 법흥왕(제23대)의 행적들을 투영시켜 만들어냈다는 것이 요지로 경북대학교 명예 교수인 문경현 선생의 주장이다.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론 정확한 증거에 기한 판단이 아니라 기록 정황에 근거한 추측이므로 판단은 각자 알아서다.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으로 가서 미추 이사금의 혼령에게 한탄하고, 미추 이사금이 그를 달래고 어르는 설화는 정황상 어색하다. 이 상황에서는 미추 이사금보다는 오히려 김유신의 조상들인 옛 금관국의 왕족(구형왕 등)들을 신라로 받아들인 법흥왕이 더 적절하다. 또한 아도비를 인용한 《삼국유사》 <흥법> -아도기라-조에는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고 최초로 절을 창건한 것이 미추 이사금의 시대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아도가 신라에서 활동한 것은 법흥왕(제23대) 치세이다. 한편 미추 이사금이 보낸 대나무 잎 군사들이 이서국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한 설화는 내물 마립간(제17대) 시대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가야와 왜, 백제의 공격을 물리친 사건을 투영시킨 것이다. 즉, 위와 같은 사항들로 미루어보아 미추 이사금은 법흥왕과 내물 마립간을 투영시켜 만들어낸 가공의 시조가 아닐까 한다.[14]
  • 손위 동서인 석우로 열전에 따르면 우로가 실언으로 왜에게 불타 죽은 이후 미추가 이사금이었을 당시, 처형인 명원부인이 남편을 불태워 죽인 왜에게 복수하고 싶다며 왜국 사신을 죽일 수 있게 해달라 청하자 이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명원부인은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해 만취하게 만들고 사신을 죽여 복수하였으며, 이에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사신을 외척이 개인적인 이유로 주살하는 건 전쟁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며 실제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처형의 부탁을 들어준 걸 보면 손위 동서인 석우로가 아무리 실언했다지만 신라의 간(干)이나 되는 인물이 예전부터 사이가 나빴던 왜에게 불타 죽었다는 것에 우로도 상당한 불쾌함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작 <미추 이사금 본기>에서는 왜와 관련된 기사가 아예 없어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1년 7월 금성 서문의 화재로 민가가 불탔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금성 서문의 화재가 왜의 침공 때문이라면 미추 1년 7월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15]
  • 현대 고고학계 연구와 일본서기 대조를 통해 4세기 박씨-석씨-김씨 왕조가 모두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신라 왕'이라는 지위는 6세기까지도 '신라에 속한 여러 간(干)=왕(王)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6부의 수장뿐만 아니라 간이라 불린 여러 호족들도 마찬가지이다. 6세기 중반 금석문에 따르면 법흥왕-입종갈문왕의 시대로 가면 6부와 그 외 왕(간)들보다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한 것이 확인되지만, 동시에 국내 분쟁 해결을 위해 '법흥왕, 입종이 7명의 왕과 함께 논의하여 해결하였다'라고 명시하며 당대 신라에서 왕이라 불린 인물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기년이 정상화된 시기는 내물의 재위 중기부터로 간주되며, 356년 내물이 즉위했다는 기사와 달리 내물의 대외 활동은 360년대~370년대부터 시작되기에[16] 엄밀히 말하면 370년대부터 완전히 신용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미추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은 4세기 중반으로 추정한다. 미추의 22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이 꼭 356년 이전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데, 신라에서는 6부 수장들 외에도 여러 간들이 왕이라 불렸다. 따라서 미추가 4세기 중반에 신라에 속한 여러 왕들의 일원으로서 존재했음은 확실하지만, 356년 전에 죽었다 장담할 수 없다. 356년은 330년대~340년대생인 내물이 막 성년이 되었을 시기라서, 내물이 성년이 되어 간의 칭호를 갖게 된 시점부터일 수도 있으며 내물의 재위기간을 연대 인상의 기점 중 하나인 흘해의 재위 간격과 똑같이 맞춘 걸 보면(46년 10개월) 내물의 실제 재위기간이 훨씬 짧았을 가능성을 배제 못한다. 거기다 보반부인의 나이 문제를 고려하면 미추의 활동 기간은 350~370년대까지 내릴 수 있다.
    미추의 사위인 내물은 330~350년대생, 실성은 350년대생인데, 내물은 미추의 동생 말구(末仇)의 아들로 조카이며, 실성은 미추의 조카 대서지(大西知)의 아들로 미추의 종손이다. 여러 정황을 보아 구도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옥모부인과 대서지의 아버지를, 이칠 갈문왕의 딸 술례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미추와 말구를 가졌고 옥모부인&대서지와 미추&말구는 1대 이상 차이가 나며, 구도-미추&말구는 구도의 손자뻘로 내지 증손자뻘로 여겨진다. 미추가 조카 내물과 종손 실성을 둘 다 사위로 삼은 건 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옥모부인의 손녀가 광명부인이라는 기사를 고려하면 구도-옥모부인-대서지-미추&말구 나이대일 수도 있다.
    단 옥모부인이 골정의 부인이라는 건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사서에 따르면 흘해의 모계는 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로 무려 4대나 차이가 나는데, 흘해가 태어난 시기는 320년이 유력시된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김씨 족단이 사로국에 출몰한 시기는 4세기 초반이며, 석씨 족단은 모든 족보가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2세기 후반 혁거세부터 4세기 초반 흘해의 탄생까지 9대가 걸렸기 때문에 1대에 20년 정도 걸리던 고대의 특성상 대수는 3성 족보 중에서 제일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모계를 기준으로 골정의 대수를 추적하면 3세기 중후반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때는 김씨 족단이 출몰하기 수십 년 전이다.
    따라서 4세기 초반에 옥모부인이 혼인한 사람은 골정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다 광명부인이 정말로 명원부인의 여동생이 맞는지 미심쩍은 정황도 있어, '옥모부인의 손녀'와 미추가 결혼한 것이 맞다면 골정이 아니라 조분과 아이혜부인(5촌/3촌 조카)의 아들 걸숙일 가능성이 높다. 골정과 걸숙이 어감이 비슷하기도 하고, 조분-걸숙-기림의 사이에서 기림의 어머니는 아예 기록이 없어 대신 끼워맞춰도 모순이 없다.
  • 미추 이사금의 처 광명부인석우로의 처 명원부인의 여동생이라고 하는데, 다소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광명부인의 딸 보반부인의 나이 문제다. 보반부인의 장남 눌지는 402년 실성이 즉위할 때 '어리다'는 명분을 든 점, 410년대에 실성의 사위가 되었지만 실성의 경계를 사서 417년에 살해당할 뻔했음을 고려하면 3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3남 미사흔은 삼국사기에서 393년생이라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광명부인의 언니 명원부인이 6촌/3촌인 우로와의 사이에서 흘해를 낳은 해는 320년(일본서기)이며, 학계에서도 우로는 4세기 초반 인물이 맞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명원부인이 흘해를 낳은 건 320년, 광명부인의 딸 보반부인이 눌지-복호-미사흔을 낳기까지 50년 이상~62년의 차이가 난다. 부계도 아니고 모계에서 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은 비정상이다. 그리고 보반부인의 여동생 아류부인은 실성의 처로 내물의 손아래 동서인데, 실성은 410년대에 눌지를 사위로 삼았다. 어떻게 봐도 세대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따라서 광명부인은 조분의 딸이 아니라 조분보다 몇 세대 뒤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조분은 5촌/3촌 조카인 아이혜부인과 혼인했기 때문에 조분과 아이혜부인의 자식들은 고대 기준으로 2대 정도의 차이가 난다. 아이혜부인의 딸 명원부인은 6촌/3촌과의 사이에서 320년에 흘해를 낳았으며, 4세기 초반 김씨 족단이 처음 사로국에 출몰한 점과 4세기 중반에 재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추는 '누나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광명부인이 조분의 딸이라 기록된 점을 보아 조분의 직계 후손임은 확실하며, '누나의 손녀'와 결혼한 것이 사실일 경우, 4세기 초반에 누나 옥모부인이 혼인한 건 부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숙이고, 광명부인은 처자식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는 조분의 손자 기림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광명부인은 걸숙의 손녀가 되어 '누나의 손녀'와 미추가 결혼했다는 것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며, 4세기 중반에 미추가 재위하고, 4세기 후반에 미추의 딸 보반부인이 480년대~490년대 초에 세 아들을 낳고, 보반부인의 여동생 아류부인의 딸이 410년대 눌지와 결혼한 것이 모두 맞아떨어진다.

5.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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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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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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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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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年春一月 미추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용이 궁 동쪽 연못에서 나타나다
一年秋七月 금성 서문의 화재로 민가가 불타다
二年春一月 이찬 양부를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국조묘에 제사지내고 사면한 후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하다
三年春二月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를 보다
三年春三月 황산에 행차해 나이 많고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다
五年秋八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七年 남당에서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묻다
十一年春二月 농사짓는 일에 해가 없도록 영을 내리다
十一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十五年春二月 신료들이 궁실을 고쳐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다
十七年夏四月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七年冬十月 백제 군사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파진찬 정원이 이를 막다
十九年夏四月 가물고 죄수의 정상을 살피다
二十年春一月 홍권을 이찬으로, 양질을 일길찬으로, 광겸을 사찬으로 삼다
二十年春二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二十年秋九月 양산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다
二十二年秋九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二十二年冬十月 백제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이 막다
二十三年春二月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위로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6. 같이 보기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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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삼국유사》 <아도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묵호자 열전>에 있으며 눌지 마립간(제19대) 시기라고 전하고 있다.[2] 태조 성한왕과 미추 이사금이 동일인이라 보는 학설이 존재한다.#[3] 사실상 유일한 김씨 이사금이다. 미추 다음으로 김씨 군주가 된 내물(제17대) 때부터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다.[4] 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5] 다만 여기서 특이한 건 장인인 조분 이사금이 미추 이사금의 생질이기도 했다는 것. 즉 미추 이사금은 누나의 손녀와 혼인하게 된 것이다. 다만 조분 이사금의 어머니이자 미추 이사금의 누나인 석골정의 아내는 미추 이사금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고 김구도와 김미추 또한 부자 사이라고 해도 역시 나이차가 상당히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도 조카가 삼촌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는 왕왕 있기 때문.[6] 김알지나 그의 아들 김세한 등 여러가지 이설이 있다.[7] 진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성씨가 달라 유교식으로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5묘가 아니라 신라 고유의 종교 시설이었던 신궁에서 따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8] 남당의 존재는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고이왕(제8대) 대에 남당을 건설하고, 남당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보통 남당은 국가 정치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상징하는 정치기구이기도 하며, 신라와 백제가 각각 진한마한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9] 일단 미추 이사금은 석씨 왕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은 다시 석씨로 넘어갈 차례였던 것이다. 박씨 왕조 시절에 왕을 했던 석탈해와 마찬가지 사례이다.[10] 이 때부터 미추왕릉이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11] 하필 미추왕릉인 것은 어쩌면 당시 신라의 왕가인 김씨의 직계조상이 미추 이사금이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박씨, 석씨가 왕이던 때도 있었으나 그건 먼 옛날 일이고.[12] 제36대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후손인 대아찬 벼슬의 김융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김유신은 이 사건을 말하는 것.[13] 오릉이 건국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과 혁거세 거서간의 왕비 알영부인이 묻힌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다.[14] 출저는 문경현, 1983년, 《新羅史硏究》, 慶北大學校出版部[15] 정말로 미추 1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미추는 1월에 즉위했으므로 명원부인은 즉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매부(妹夫)에게 복수를 도와달라 청했고 미추가 이를 들어줬다는 뜻이 된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외교적 부담을 감수한 게 맞다면 미추도 손위 동서를 잔혹하게 죽인 왜에게 꽤나 원한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16] 360년대 백제, 왜와 외교적 분쟁을 겪는 시기가 369년 백제-왜 연합군이 마한과 가야를 정복하고 신라를 일시적으로 백제의 패권 아래에 넣은 370년대의 일을 10년 인상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외교적 우위는 382년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미인계 사건으로 양국이 분쟁에 돌입하면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