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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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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중세
2.1. 중세 동유럽 국가들의 성립2.2. 중세국가들
2.2.1. 동슬라브계
2.2.1.1. 동슬라브 3국의 분화
2.2.2. 서슬라브계2.2.3. 남슬라브계2.2.4. 라틴계2.2.5. 그 외
3. 근세4. 근대
4.1. 세계 대전, 냉전
5. 현대

1. 개요

동유럽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중세

서유럽과 남유럽이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명이 이식된 것에 비해 해당 지역에는 로마 제국의 문물의 전파가 늦었고, 이러한 이유로 해당 지역은 북유럽과 함께 후발 주자로 시작했다. 로마 제국 역시 흑해 방향으로의 확장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1]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카르파티아 동부 해안 지대는 사르마티아 같은 유목 세력의 침공을 저지하기 어려웠다.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는 아시아 방향으로 자연적인 방벽이 부재했고 이는 사르마티아인의 침공 이후 고트족훈족(370 ~ 453). 아바르족들의 침공 루트로도 활용되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동유럽의 로마인 후예로 여겨지는 블라흐인이다. 로마 제국이 다키아 속주에서 철수한 이후 해당 지역에 잔류를 결정한 로마인들의 후손들은 로망스어군 언어는 보존하였으나 대신 외부인들의 침입에 신속하게 대비할 수 있도록 반농반목 생활을 영위하며, 유사 시 대피가 편한 반지하로 된 움집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동유럽에 해당하는 지역이 아시아 방향에서의 유목민 침입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는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1. 중세 동유럽 국가들의 성립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키예프 대공국, 그리고 폴란드 영지대 모라비아 왕국, 보헤미아 공국은 모두 노예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군사력과 상업을 결합함으로서 국가가 되었다. 바이킹의 일파인 바랑인들은 흑해 노예 무역을 통해 압바스 칼리파조에 노예와 모피를 수출하여 키예프 대공국의 기틀을 다졌으며,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무역 루트는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남쪽으로 흑해와 카스피해로 이어지는 루트였다. 보헤미아 공국의 시발점 역시 후우마이야 왕조에 노예를 수출하던 거점에서 시작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서기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해당 지역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던 슬라브, 발트어파 민족들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들이 노예 무역의 주 희생양이었다. 바이킹들은 동로마 제국이나 키예프 대공국에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바르샤바 북쪽에서 10세기 말~11세기 초 조성된 전사 집단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해당 무덤의 양식은 토속 신앙을 믿던 슬라브인들이 선호하던 화장 혹은 기독교식 매장 방식과 다소 다른 바이킹 식의 매장 방식이었으며, 부장품으로는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에서 가공된 귀금속들이 출토되었다. 유골에 대한 하플로그룹 조사에 결과 이들 상당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왔고 일부는 이탈리아 북부나 오늘날의 러시아 중부에서 온 것이 확인되었다. 보헤미아와 폴란드 측에서 활용했던 루트는 프라하와 베르됭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루트였다.

한 편 헝가리인과 불가리아인들의 기원은 서슬라브 국가들이나 동슬라브 국가들과는 사뭇 달랐다. 중세 마자르족들과 불가르족들은 유럽에 유입된 초기 조직적인 노예 무역 네트워크에 의존하기보다는 약탈 경제를 유지하였다. 마자르족들과 불가르족들은 각각 독일 왕국동로마 제국에 막혀 팽창이 저지된 것을 계기로 이웃 유럽 국가들과 동화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상술한 중세 초 슬라브 국가들만이 중세 초 노예 무역에 열심히였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독일인들과 덴마크인들은 엘베 강 너머 동쪽으로 꾸준히 팽창해나갔고 이 과정에서 독일과 폴란드 사이 폴라비아인처럼 슬라브 토속 신앙을 유지했던 민족들은 독일인들에게 완전히 흡수당했다. 덴마크 및 독일 십자군 오늘날의 발트 3국에 해당하는 방향으로 팽창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프루스족 역시 독일인들에게 완전 흡수 동화하였으나, 노브고로드 공화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막혀 동진이 저지당한다. 즉 중세 독일계 국가들의 동진이 저지당했던 지역이 20세기 동유럽으로 지칭되었던 국가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 중세국가들

2.2.1. 동슬라브계

2.2.1.1. 동슬라브 3국의 분화
1240년 몽골 제국이 키예프 루스의 명목상 중심지였던 키예프 공국을 멸망시킨 것은 러시아 민족과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민족이 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2] 몽골 제국과 비교적 거리가 있었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는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남쪽 방향으로 팽창하면서 몽골 세력이 비교적 일찍 축출되었으나, 블라디미르-수즈달과 그 후신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타타르의 멍에라 불리는 예속 상태가 좀 더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 이렇게 몽골에 일방적으로 당한 역사는 다소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연대기 상으로는 러시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에 승리한 이야기도 서술되어 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킵차크 칸국의 권신 마마이를 정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마마이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러시아측 연대기 이외의 기록에서 교차검증이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킵차크 칸국티무르 제국의 침략으로 붕괴된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칸국들을 차례차례 흡수했다는 것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방제 통일, 1569년 루블린 조약에서 확정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국경선은 벨라루스 민족우크라이나 민족이 분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3] 한 편 장기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통치를 거치며 키예프 루스 이래 내려오던 중세 유력가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완전히 폴란드화하는데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역사 분쟁에서 우크라이나 측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키예프 루스 멸망 이전 키이우에 소재하던 전(全)루스 대주교좌는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로 이전 이후 다시금 모스크바 공국으로 이전되었는데, 루테니아 왕국의 갈리치아에 추가로 이른바 대주교좌가 설치되었고, 이는 소(小)루스 대주교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대러시아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를 일컫는 명칭 중 하나인 소러시아(말로로씨야)의 어원이 된다.

2.2.2. 서슬라브계


서슬라브 민족의 역사가 동유럽과 분리된 계기는 판노니아 평원에서 비롯된 지정학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판노니아 평원은 아시아 방향에서 유목민들이 유럽으로 침투하는 주요 루트로 기능하였으나, 판노니아 평원만으로는 대규모의 기병 전력을 운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4] 아바르 칸국이나 마자르족 같은 유목 세력은 판노니아 평원을 넘지 못하고 저지당하곤 했다. 판노니아 평원의 마자르족이 정착한 것은 남슬라브 민족들과 동슬라브-서슬라브 민족들이 분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동시에 서슬라브 민족들이 동로마 제국 대신 인접한 독일 문화권에서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은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며 정교회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결국 지리적으로 인접한 독일의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대 모라비아 왕국이 마자르족의 침략으로 몰락한 이후 보헤미아의 영향으로 폴란드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가톨릭으로 슬라브족들은 서슬라브족, 정교회를 고수한 슬라브족들은 동슬라브족으로 분화되었다.

2.2.3. 남슬라브계


해당 민족과 국가들의 역사는 남유럽으로도 분류되는(동유럽 역사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키릴 문자, 정교회라는 문화적 공통점과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범슬라브주의 관련하여 동유럽사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일단 제1차 냉전 시대 당시 해당국들의 역사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연계하는 연구도 적지 않게 이루어졌는데,[6] 공통분모는 슬라브 민족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영향 관련한 부분이다.

2.2.4. 라틴계


루마니아 민족의 역사는 동유럽 역사 관련하여 오늘날의 몰도바의 기원이 되는 베사라비아 관련하여 주로 언급되는 편이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아닌 봉신국이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튀르키예를 거쳐 루마니아에 정착한 세파르드 유대인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동유럽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연계되어 서로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한 편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상업망을 장악하다시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이외에도 트란실바니아에서까지 상업망을 확장하며 현지 독일인 상인들과 경쟁하였다.

2.2.5. 그 외


중세 헝가리인들은 동유럽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자카르파탸 일대를 병합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갈리치아 방향으로의 진출은 루테니아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막혀 실패하였고,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구성한 폴란드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동유럽의 상당부분을 석권하면서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방향으로의 진출을 단념하게 되었다.

한 편 폴란드 분할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일대를 병합할 당시 해당 지역을 영유할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세 헝가리 왕국에서 갈리치아의 영유권을 주장했었다는 바에 착안하여 해당 지역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명명하였다.[7]

3. 근세

근세 동유럽의 지도는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그리고 루스 차르국 이렇게 세 국가간의 전쟁으로 뒤바뀌기를 반복하였다. 먼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경우 오늘날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이외에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서부 절반을 포함하는 거대한 나라였다. 해당 국가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귀족들이 지배했으며 신민 중에는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 이외에도 상당한 양의 유대인, 립카 타타르, 아르메니아인, 독일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세임(Sejm)에 의한 지방분권화 때문에 세금 징수와 군대 동원, 다리나 도로 같은 인프라 건설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 측은 모든 지역과 모든 도시가 제각기 다른 행정을 하는 공화국이고 왕에게 복종도 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동쪽으로 접경한 국가로 러시아가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1283 ~ 1547)은 몽골 제국의 후신인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한 이후 루스 차르국(1547년 ~ 1721)으로 거듭난다. 물론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1721 ~ 1917)은 시대적인 구분이다.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영토 분쟁에서 승패를 번복하였으나, 대신 유럽 반대 아시아 방향으로는 팽창을 거듭하였다. 1580년 일단의 카자크들이 우랄 산맥을 넘었고 1639년에는 태평양오호츠크 해에 도달하였다. 아직 당장은 기술의 한계로 시베리아 일대의 자원을 개발할 수는 없었으나 새로 개척한 무역로와 모피 등으로 얻은 수익은 후일 루스 차르국이 동유럽 일대에서 패권을 다지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폴란드 분할로 멸망시키고 오스만 제국과 총 12번이나 러시아-튀르크 전쟁(1568 ~ 1878)을 치르면서 동유럽의 패권을 상당부분 장악한 이후 오스트리아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4. 근대

열강으로 등극한 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동유럽은 국력 측면에서 근세 이후로는 서유럽에 뒤쳐지기 시작하고 점점 쇠락하여 결국 근대에 이르면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전부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이 4개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베를린 회의 이후, 알바니아는 제1차 발칸 전쟁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서슬라브 국가들과 헝가리는 1차대전 이후에 가서야 다시 독자적인 국가들로 독립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와 통합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동유럽에서 북아시아까지 점령하면서 거대해졌고 근대가 되자, 거대해진 그 힘을 두려워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1813 ~ 1907)을 벌이게 되지만, 이는 표트르 대제근세를 거치며 힘겹게 얻은 서유럽의 발전된 결과만을 배껴옴으로써 얻은 힘이었다. 즉, 영국의 명예혁명(1688), 프랑스의 프랑스 혁명(1789) 등의 시민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산업 혁명 등을 통해 내부적으로 단련되고, 변화되면서 얻은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쌓여가던 러시아 제국이 갖고 있던 구시대적 문제점들은, 제1차 세계 대전(1914 ~ 1918)중에 공산주의 혁명(1917)이란 형태로 터져나왔고, 그해 러시아 제국은 멸망, 소련이 등장하게 된다.

4.1. 세계 대전,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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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 1980년대 말 : 철의 장막, 붉은색이 냉전 시기의 동유럽. 참고로 회색 지역은 당시의 중립국이다.[8] 그후 동유럽 국가들은 독립해서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곧이어 터진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소련의 전쟁터가 되어 제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고 쑥대밭이 돼버리고 결국 독소전쟁에서 나치 독일에 승리한 소련이 동유럽을 전부 점령하여 동유럽 국가들에는 전부 공산당 정권이 들어섰고 그렇게 공산당 치하에서 냉전기를 보냈다.

5. 현대

그러다 동유럽 혁명소련 해체로 인해 공산당 일당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너무나 급격한 체제 변화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 경제적으로 극심한 혼란기를 겪어야 했고 현재까지도 경제적인 부분이 서유럽이나 북유럽과 비교해서 많이 낙후된 까닭에 유럽에서도 상당한 변두리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외지고 후진 곳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무언가 신비롭고 판타지스러운 설화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흡혈귀.

하지만 프라하로 대표되는 체코[9]부다페스트헝가리, 중세에 발칸이나 러시아에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불가리아[10]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그 역사적인 화려함도 만만치 않은 편이고, 현대에도 빠르게 성장해나가고 있다.

다만 위의 1번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은 지리적 위치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동유럽보다는 중부유럽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으며 체제 변화의 후유증 때문에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발트 3국 같은 일부[11]를 제외하곤 경제적 상황이 영 좋지 않은 편이다. 특히 발칸 반도 쪽 국가들과 구소련에 속해있었던 국가들 중 몰도바, 우크라이나 등의 상황이 심각한 편이다. 폴란드 같이 독일어권에 인접한 나라들의 경우 독일어권의 문화가 많이 흡수되어 있으며, 또한 헝가리, 루마니아 등지에도 소수 독일인들이 살고 있다.

현재 러시아가 과거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동유럽에 간섭을 하려고 들어 중부유럽발칸반도 국가, 발트 3국 등은 여기에 반발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대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과 유럽연합에 대거 가입했으며 아직 가입 못한 국가들도 가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처럼 러시아와 상대적으로 관계가 좋은 예외도 있는데, 공통적으로 러시아와 같은 정교회 문화권으로 역사종교적 동질감이 있기도 하고 특히 세르비아의 경우 이 나라는 코소보 문제 때문에 미국, 서유럽과의 관계와 서방에 대한 국민감정이 나쁜 편이고 따라서 이 문제에서 자신을 적극 지지해주는 러시아와 굉장히 친한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건 EU가입과 미국, 서유럽 등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세르비아 정권도 마찬가지이며 이 정권조차도 나토와 세르비아의 나토 가입 여부 등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본다. 근데 왠지 헐리우드 영화에서 묘사되는 동유럽을 보면 죄다 마피아(테이큰) 아니면 여행자를 등처먹고 죽이는 무시무시한 사람(호스텔)만 사는 땅으로 묘사된다. 물론 치안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저렇게 과장된 수준은 아니다. 으슥한 곳이나 소매치기만 조심하면 될 수준. 동유럽 국가들도 나름대로 치안 유지에 많은 애를 쓰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동아시아와 더불어 가장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지역이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동유럽의 출산율은 대체적으로 서유럽보다 높았지만 공산권 붕괴 이후 체제전환 과정에서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출산율이 급감해버렸고, 서방으로의 인구유출현상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이후에 출산율이 회복한 나라들이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 등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이민이나 높은 사망률등의 문제는 여전하여 상승추세로 전환하지 못했다. 특히 발칸 반도와 구 소련 지역의 인구 감소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여기에 한국, 일본, 대만, 남유럽처럼 출산율만 낮은 것이 아니라 인구가 서유럽, 북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 영미권으로 유출되고 있다. 그나마 2010년대까지는 1970-80년대생들의 숫자가 뒷받침해주기에 버티는 게 가능하겠지만[12] 2020년대 이후에 노동력이 본격적으로 부족해질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느 정도 출산율을 반전시킨 국가들은 존재한다.[13] 러시아나 폴란드[14], 체코 등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이민을 받아들일 정도로 부유하지 않고 이민에 포용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백인외 타민족에 대한 적응감이 인근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많이 약해서 인종차별사건도 끊이지 않은 지역이다보니 이민국으로서의 매력이 적은 데다가 실업률도 높은 국가들도 상당히 존재하기에 앞으로도 인구 구조는 암울하다고 전망된다.

지금도 러시아는 미국중남미를 자신의 안마당화하려는 것처럼 동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안마당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캅카스나 중앙아시아에도 적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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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로마인들 역시 이아손의 황금양 모험 이야기를 통해 체르노젬 일대의 비옥함에 대해서는 잘 알고는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갈리아 총독 직에 임명될 때 일리리쿰 총독 직까지 겸직하여 갈리아 평정이 2 ~3년 내로 끝나면 일리리쿰에서 출격하여 흑해 지역을 정복하려고 계획했었다.[2] 몽골 제국은 루스의 두 곳의 공후통치 중심을 인정했다. 하나는 블라디미르-수즈달, 또 다른 하나는 갈리치아-볼히니아였다. 두 공국은 '루스'라는 명칭을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지정학적 궤적을 밟게 되었다.[3] 벨라루스어우크라이나어의 경계는 루블린 조약으로 인해 당시 새로 조정된 국경 경계선과 일치한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4] 말의 품종 등 요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푸스타 초원 전체를 말 방목 목초지로 활용한다고 해도 말을 십만 마리 이상 키울 수 없다.[5] 크로아티아 왕국의 토미슬라브(Tomislav)왕 재위기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6]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북마케도니아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으면서 전통적인 지주 엘리트 계급이 이슬람으로 개종/튀르크화하거나 혹은 이웃 기독교 국가로 망명하였고, 이는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토착 지주 계급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완전히 폴란드화한 상황과도 유사했다.[7] 갈리치아-로도메리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를 라틴어로 읽은 것인데, 폴란드 분할 당시 당대 헝가리인 귀족들은 헝가리어가 아닌 라틴어를 즐겨 사용하였던 이유도 있고 해서 헝가리어가 아닌 라틴어로 명명되었다.[8] 유고 연방과 알바니아는 둘 다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소련이 주축이 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도 않은 나라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의 갈등 끝에 티토주의를 주창하며 독자노선을 걸었고,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의 지도 아래 극도의 쇄국정책을 펼쳤다.[9] 참고로 체코는 19세기에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손꼽히는 공업 지역이었고, 20세기 초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나라였다. 문제는 이후 나치 독일에 합병당하고 전쟁 속에 착취당하다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는 점. 이런 역사적 불운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 이미 북서유럽 못지 않은 경제력을 자랑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현재는 동유럽의 부국으로 다시 올라서긴 했다.[10] 불가리아에서 쓰인 문학작품이 러시아로 넘어가 영향을 주기도 했고, 불가리아의 지배로 세르비아에 키릴문자가 전파되기도 했다. 루마니아도 불가리아의 영향으로 슬라브계 어휘가 많이 유입되었다.[11]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는 비셰그라드 그룹이라고 해서 체제 변화의 후유증을 제일 빨리 벗어나 빠른 성장을 기록한 국가들로 불리기도 한다.[12] 그마저도 감소 중이다.[13]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출산율은 1.25였으며, 그외 체코는 1.4, 슬로바키아는 1.3, 헝가리는 1.2,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1.1~1.3대를 웃돌았지만 현 2020년 기준으로 러시아는 1.7, 체코는 1.6, 슬로바키아, 헝가리는 1.5, 발트해 연한 3국은 모두 1.7대로 올라섰다. 저때나 지금이나 1.0대 초반에서 머문 폴란드,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불가리아와는 달리 EU 평균인 1.5를 뛰어넘은 국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고질적인 백인우월주의적인 국가 분위기 때문에 끝내 이민자를 포용하지 못하거나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놓지 못하면 출산율의 감소가 다시 진행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14] 폴란드는 출산율이 높지는 않지만 우크라이나보다는 잘 살고 언어도 가까운 편이기에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이기는 한다. 그러나 폴란드 내의 노동자들은 돈을 더 벌겠다고 독일이나 영국, 미국 등으로 빠져나가는 추세라서 실업률이 상당함에도 저임금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기업들이 아우성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