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9:32:01

만주 전략 공세 작전

8월 폭풍 작전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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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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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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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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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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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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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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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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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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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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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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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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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滿洲戰略攻勢作戰
мань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ソビエト連邦による満州侵攻
소련-일본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viet_invasion_of_Manchuria_(1945).gif
시기 1945년 8월 9일 ~ 20일
장소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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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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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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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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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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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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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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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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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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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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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치스차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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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치스차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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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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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러깅 처이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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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러깅 처이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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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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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문서명
]] 야마다 오토조(관동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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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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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후이|
파일:만주국 국기.svg
장징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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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므치그돈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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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므치그돈로브
]]
결과 소련-몽골 연합군의 승리
영향 일본 제국의 항복[1][2]
한반도의 분단
만주국, 몽강국의 멸망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의 소련군정
일본의 다롄 조차지 상실
전력 군인 150만 명
전차/자주포 5,556대
항공기 3,721대
포 27,000여 문
관동군 71만 3,000명, 만주군 17만 명, 몽강군 44,000명[3]
전차 1,155대
항공기 1,800여 대
대포 5,360여 문
피해 9,726명 전사
24,425명 부상
21,389~83,737명 전사
약 20,000명 부상
640,276명 포로
1. 개요2. 배경3. 폭풍 직전의 외교상황4. 관동군의 전력
4.1. 진주만 공습 전까지 관동군 작전계획4.2. 개전 당시 관동군의 전력과 작전 계획 변화
4.2.1. 실상
5. 소련군의 딜레마6. 붉은 군대의 공격 준비
6.1. 소련군 종심전투교리의 완성
7. 작전 경과8. 만주 전역의 종결9. 분석
9.1. 애와 어른의 싸움9.2. 전략적 차원의 승리 요인9.3. 작전적 차원의 승리 요인9.4. 전술적 차원의 승리 요인9.5. 보급적 차원의 승리 요인9.6. 관동군의 실책들
9.6.1. 관동군 포로
10. 만주 작전의 의의

[clearfix]

1. 개요

파일:만주 공략 작전 소련군 진격.png
<rowcolor=white> 일본군 방어선으로 진격하는 소련군 ZiS-3 대전차 포병반과 T-34-76 전차.
1945년 8월 9일부터 시작된 소련-일본 전쟁의 주요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이다. 간단하게 "만주 작전(Маньчжурск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약칭으로도 부른다.[4]

이미 만주 작전 이전부터 관동군은 약체가 된지 오래였다. 대일전 참전 이전까지는 소련이 대일 중립 노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중일전쟁에서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을 상대하면서 부족한 전력은 만주에서 다 빼내고 빼내, 소련이 만주를 침공할 1945년 8월 당시의 관동군은 중일전쟁 초기의 관동군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를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과거 할힌골 전투에서 부족한 중장비로도 교환비 1:1 이상을 찍으며 소련군에 더한 인명 손실을 강요했던 초기의 관동군이 더 이상 아니었다. 정예사단들은 전부 남방으로 빠지고 남아있던 부대는 2선급이다. 거기다가 일본 자체적으로도 조사에서 관동군 전체 전력은 미군 4개 사단도 안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지면 병사들도 부상입고 지치기 마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최후 국면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함께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 제국일본군의 최후의 저항의지와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은 사건이다. 만주사변 이래 괴뢰국 만주국을 15년간 점령하고 있던 이미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은 이로써 해체되었다.

2. 배경



일본은 중일전쟁 도중이던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기에 육군 내 대소 강경파의 존재와 별개로 매우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련에 있어서도 일본은 과거 러일전쟁부터 근래의 노몬한 전투까지 잦은 충돌을 벌인 잠재적 적국이었기에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지만 단연 전유럽을 휩쓸던 나치 독일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이었던 폰 리벤트로프는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중동 지역을 미끼로 영국에 대항하는 반영동맹에 소련을 참가시키려 하였지만 몰로토프는 소련의 주 관심사는 중동의 이권이 아닌 발트해와 흑해의 이권임을 강조하였다. 몰로토프가 내건 반영 동맹 참여 조건은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우위 확립, 핀란드에서의 독일군 철수,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권익 보호, 그리고 북사할린에서 일본의 경제적 이권 포기였다. 즉, 당시 소련은 아시아 방면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만주나 사할린 정도일 뿐 당장 나치 독일을 뛰어넘는 최우선 경계순위가 아니었다. 일본 또한 필리핀을 제외한 베트남 등 '남방자원지대'라 부르던 동남아 지역이 중요했기에 소련 방면은 안중에도 없었다.[5]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해서 1941년 4월 소-일 불가침조약과 강철수입 유지가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은 수도가 넘어가기 직전이라 일본은 안중에 없었고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미국의 석유제재를 받고나서 브루나이를 비롯한 석유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필리핀과 진주만을 공격하는 대미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소련은 안중에 없었다. 독일은 먼저 불가침조약을 깨고 초기에 소련군을 밀어붙여서 어느 정도 점령하면 정반대에 있는 일본이 연해주 등을 공격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의 대소전 참전을 요구했다. 독소전쟁 개전 당시 독일이 소련을 과소평가했다지만 혹독한 시베리아에서 단련된 소련 정예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독소전쟁을 조기에 독일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일본이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 시베리아 방면 정예군을 묶어둘 양면전선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소련에 눈을 돌리던 1941년 5월 만주의 관동군은 중일전쟁을 통해 경험이 엄청 쌓여서 시가전 일본 최정예 육군으로 이름을 날렸고 일본 연합함대 역시 막강한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일본군이 충분히 소련군을 상대로 선전해 줄 수 있을 정도라고 과대평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제대로 된 전쟁을 안 겪은 것이 독이 되었고 전쟁이 나자마자 일부 일본군 장성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돌격전술을 고집해서 정예 병력과 징집병력들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의 공업기술은 독일의 공업기술보다 질이 떨어졌다. 일본 대본영 내부에도 이전부터 뒤통수 쳐달란 메시지를 보내오던 독일에 호응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북방작전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긴 했으나 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관동군 특종연습'이란 명목으로 병력을 100만 명까지 증강하고 대대적인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이 독일과 호응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공격할 것을 우려했지만 도쿄에 파견된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의 보고에 따라 관동군이 침공해 올 일이 없다고 파악하여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에 있는 병력 중 다수[6]를 유럽 전선으로 차출했다. 그리고 그 결과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나치의 진격을 막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통해 승기를 잡은 후 베를린에 입성하여 나치를 패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일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년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눈 앞의 최대 주적을 제거한 소련은 이제 미국에 의해 패전 직전인 일본 제국의 만주에서 정예사단은 다 빠진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참전을 기획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테헤란 회담얄타 회담을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몰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100만 명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적 손실이 예상된 마당이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다만 친소적이었던 루스벨트가 죽고 강경한 반공주의자 트루먼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계 내에도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동부전선의 피해가 워낙 컸던지라 소련 정부는 처음에 크게 내켜하진 않았으나 미국의 요구와 유럽전선의 종결, 공산주의 위성국가 확장을 원하던 스탈린의 야심이 서로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결국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침공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프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실시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소련의 공세계획을 앞당겼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이미 소련의 공세는 8월 9일에 시작하기로 3달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으며, 소련측은 종전 전인 얄타 회담에서 독소전쟁이 끝난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는 미국에게 약속을 했고, 독소전쟁이 5월 9일에 끝났으므로 8월 9일은 정확히 이로부터 3달 후였다.

3. 폭풍 직전의 외교상황

붉은 군대가 폭풍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일본 정계와 군부는 본토결전을 외치며 광적으로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한편, 뒤에서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명예로운 조건'은 진주만 공습 이래 미국이 요구해온 무조건 항복까지는 이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했다.[7]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44년 여름부터 일본의 외교관들은 일본이 아직 대사관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스웨덴, 스위스,[8] 그리고 소련에서 서방 연합국들과 접촉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강화 탐색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문서에 따르면 소련 내 일본 영사관 직원이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이 조만간 일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보고를 했으나 대본영에서 이를 무시했다. 소련이 이런 식의 간접적인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히자 일본 정부는 경악했다. 소련의 통보에 당황한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사임해 버리자 78세의 스즈키 간타로 남작이 총리로 취임했다. 스즈키 총리는 "우리에게는 싸우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라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보냈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에게 어떻게든 강화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이런저런 이유로 손발이 계속 맞지 않고 있었다.

5월 초 베를린 전투가 임박하자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인 후지마라 요시지로 중좌는 스위스로 잠행하여, 베른 주재 OSS 책임자인 앨런 덜레스와 강화 협상을 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후지마라가 그의 계획을 도쿄에 보고하자, "적의 계략에 빠지지 말라." 는 경고를 받았고, 후지마라는 그의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5월 12일, 강화 안건이 전쟁지도최고회의에서 공개리에 제출되었다. 그 협의외에서는 속칭 '6인 의원'으로 알려진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참모총장, 군령부총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의 중반에 이르러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대장은 소련에게 일본과 서방 사이의 교섭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하자고 무뚝뚝하게 제안함으로서, 그의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요나이의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며, 오히려 곧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해올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은 소련이 미국과 아시아 영토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강력한 일본을 선택할 것이기 대문에 쉽게 소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육군대신은 환상 속에 빠져서 제안을 했지만, 스즈키 총리는 도고에게 소련에 접근할 정책수립을 위한 메모를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스즈키는 만약 자기가 반대한다면 아나미와 육군이 독자적으로 스탈린과 접촉할 것을 두려워했고, 도고도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5월 14일, 도고는 그의 메모를 최고협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었다.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이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이다.[9] 미국은 장차 소련의 적이 될 것이며, 따라서 소련은 일본이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메모 내용은 결과적으로 한심한 전망이었지만 도고는 뒤에 제법 현실적인 경고를 덧붙였다.
"만약 스탈린이 평화 중개 역할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소련을 통해 강화를 추진하시겠습니까?"

도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인 위원'들은 전원 일치로 그의 진술을 승인했고, 즉시 협상을 개시하도록 그에게 지시했다 .

같은 시기 소련은 일본 전국에 B-29의 폭격이 계속되자 도쿄 주재 소련 대사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 대사관이 위험해지자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는 도쿄에서 110km나 떨어진 한적한 온천지 고라에 머물면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첫 접촉을 지연했다.

6월 3일 전쟁 전 내각총리대신이자 전직 소련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는 고라에서 여행하는 도중 우연히 들른 것처럼 꾸며 말리크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만찬을 함께 하면서 히로타는 말리크 대사에게 독일에 대한 소련의 승리를 축하하며, "일본과 소련이 이번 전쟁에서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고키는 계속하여 일본은 진정으로 일-소 불가침조약의 갱신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타는 또한 말리크에게 소련이 일본의 대미 평화 협상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타진했다. 하지만 말리크는 고키와의 만찬부터 그 3주일 후까지 계속된 회합에서, 정중하지만 대단히 애매한 태도로 소련의 중재에 관해 어떤 언질도 주지를 않았다. 이미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일본이 어떤 애원이나 간청을 하든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리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10]

8월 6일, 히로시마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전문을 발송했고, 전문에는 "상황 심히 심각함. 신속한 소련의 태도 표명이 요구됨.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한 한층 더한 노력 요망."이라고 써 있었다. 그러나 받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토는 이전부터 소련은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나, 소-일 중립조약의 갱신에 관심이 없다는 암울한 보고만을 보내던 상황이었다. 사토는 이제 더 이상 행운이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도고의 전문에 회신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8월 8일에,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저녁 8시에 사토 대사와 만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건 놀랄만한 일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몰로토프를 비롯한 소련 외무인민위원부는 스탈린의 지시하에 일본에서 오는 면담 요청을 무시하거나 또는 여러 구실을 내세워 그것을 회피해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날 오후 약속시간을 오후 5시로 앞당기자는 소련 외무인민위원부의 요청까지 있었다.

결국 모스크바 시간으로 8월 8일 17시 (일본은 23시) 사토 나오타케가 크렘린에 나타나자 몰로토프는 지체없이 그를 들어오게 했다. 사토 대사가 러시아식으로 격식 차린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몰로토프는 이를 거부하고 무뚝뚝하게 일본 정부에 대한 소련 국가 명의의 통고문을 전해주기 위해 사토를 불렀다고 했다. 사토가 외상이 권하는 의자에 앉자, 몰로토프는 긴 테이블 위에 앉아서 문서를 읽어나갔다.
"독일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은 아직도 계속하여 전쟁을 주장하는 유일한 강국으로 남아 있다. (이하 동맹국들에 대한 소련의 신성한 의무에 관해 4개 항목에 걸친 설명은 생략)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소련 정부는 내일, 즉 8월 9일(모스크바 기준)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 통고문을 듣고 사토 나오타케는 항의는 이미 아무 소용 없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그의 개인적 위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다. 몰로토프는 자신이 사토 대사에게 개인적으로 정중한 배려를 해주겠다는 것과, 대사가 원하는 어떤 무전 송신도 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암호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보장은 해주었다. 하지만 사토가 대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전화가 끊겼고, 무선 통신 장비도 압수당한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상업 통신을 이용하여 보내려 했던 전문도 어찌 된 셈인지, 혹은 오히려 당연하게도 전신국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토가 몰로토프의 사무실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시베리아에서는 자바이칼 전선군의 선봉인 제6근위전차군이 모든 전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본 관동군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이다.

4. 관동군의 전력

4.1. 진주만 공습 전까지 관동군 작전계획

아래의 내용은 대미개전 전까지 소만국경상의 국경요새와 관동군 작전계획으로 원문은 여기에 있다.아카이브 링크 소실을 대비해서 개략적인 내용을 본문에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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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0년(1935년)이후 관동군 작전계획과 소만국경상의 일본군 국경요새
1933년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구 일본 육군 관동군의 XX년도 작전계획은 대소 작전계획으로, XX는 매년 갱신되는 년도다. 당연하게도 전장을 소련 영내로 상정, 우선 동부 만소국경, 그러니까 동가강이나 목단강 방면부터 소련령 연해주를 급속 침공해 보로실로프나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극동 소련군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을 격멸한 후, 개전 이후는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던 서부국경, 그러니까 지도의 다싱안링 산맥 이서나 외몽고 방면에서 2차 공세를 발동해 소련군에 연속적인 결전을 강요, 이것으로 잔존 극동 소련군을 격파한 후 최종적으로는 바이칼호 방면으로 진격한다라는 것이었다.

연해주를 먼저 침공하는 동부 국경 정면의 공세 발동은 동원 개시로부터 약 2개월 후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정되어 있었는데, 관동군의 작전계획에서는 통상 2개월 이내에 완료하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이 동부 소만국경에서의 제1기 회전과 서부 정면에서의 제2기 회전(호롬바일 평원에서 결전), 바이칼 호수 방면으로 진격이라는 패턴은 1936년도 작전계획까지 주욱 인계된다.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은 기동전과 우회, 포위, 연속적인 결전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인데 메이지 이후 일본 육군 대륙작전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좋은 작전계획이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우선 개전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동부 국경쪽에서부터(보로실로프-블라디보스토크-이만 등 연해주지역의 주요 도시 공략과 우수리 강 도하작전) 항공 격멸전을 먼저 실시해 제공권을 확보, 이후 지상군 주력(약 10~11개 사단)이 동부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세를 걸어 연해주 소재의 소련 극동군을 격파한다는게 최초의 상정 목표였다.

이 동부국경에서의 공세 발동과 동시에 일본군이 북정면이라고 호칭한 흑하방면의 북부 만소국경에서도 양동작전(4개 사단 투입)을 실시해 소만국경 인근 시베리아 철도를 분단시켜 소련군의 보급과 신속증원을 저지한다. 해당 작전은 1935년도 작전계획부터 반영된다. 이와 함께 동쪽 정면의 작전 성공 후에는 여기서 6개 사단 정도를 병력을 서정면으로, 대흥안령 산맥 이서의 서부 소만국경, 즉 하이라얼 방면 전용, 조선군(일본제국)과 내지에서 증파된 병력이 만주에 전개하면 최종적으로 약 18개 사단의 전력으로 호롬바일 평원에서 소련군 주력에 결전을 시도, 이것을 격파한 후 바이칼 호수 부근까지 진격한다라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관동군의 정세 판단에 의하면 소련군의 진짜 주력은 개전과 동시에 서부정면에서, 그러니까 하일라얼 방면에서 역공세를 발동할 확률이 대단히 높기에 만약 서전에서 동정면의 공세가 실패한다면 관동군의 이 시나리오는 파탄,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또한 동정면의 공세가 성공할 때까지 서정면, 대흥안령 이서 일본군의 최대 전략거점인 하일라얼 요새에서 일본군 제8 국경수비대가 전선을 지탱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작전계획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소만국경상의 요새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요새화한 곳이 바로 호롬바일 평원 인근의 하일라얼 요새였다. 이곳의 별명은 호롬바일 평원을 지키는 오망성으로, 하일라얼 요새는 반지하 매립식의 거대 성형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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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6년(1941년) 이후 관동군 작전계획과 국경요새
하지만 이후 동서 2정면에서의 공세 패턴이 전면 재검토된 것은 1937년도 대소 작전계획이었다. 이후에는 서정면 결전은 단념, 동정면 결전만이 주로 지향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해주를 노리는 동정면의 작전발동에서는 대공세 전의 초동 작전이 설정되었다. 이것의 요점은 미리 국경지대에 전개해 둔 기습 병력에 의해 송곳으로 후벼파듯 동부 국경, 극동소련군 연해주 방면군의 소련군 거점의 취약지점을 돌파, 극동 소련군을 교란해 소련군의 대규모 역공세 발동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을 노렸다. 그리고 이 초동작전이 성공하면, 즉각 주력 공세[11]를 실시해 한꺼번에 연해주 방면의 소련군을 격멸한다라는 작전으로 바뀌었다.

다싱안링 이서 서정면에서의 결전은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고 이쪽은 시종 지구전으로 돌아서 그 후의 진격도 단념되었다. 그래서 하이라얼 요새의 대규모 증강/개축도 37년 이후가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이 이렇게 최초 시안에 비해 소극적으로 돌아선 것은 바로 병력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1937년도 작전계획은 그 후 북쪽 정면에 대한, 그러니까 흑하 방면, 브라고베시첸스크 공략으로 시베리아 철도 절단 공세안이 좀 더 비중있게 바뀌는 등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40년도 작전계획까지 인계되었다.

허나, 이러한 작전안의 소극적 수정에도 불구하고 1935년 이후 극동 소련군 강화에 수반하는 기성 대소 작전계획의 붕괴를 두려워한 일본 육군도 1937년 이후부터는 관동군의 증강에 나서게 된다. 1937년부터 관동군은 그때까지의 4개 사단(+독립수비대 5개 대대) 편제에서 6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이듬해인 38년에는 2배인 8개 사단, 40년에는 12개 사단으로 계속 증강되었다. 그리고, 부대의 전개양상도 대폭 변화되었다. 1937년까지는 사단급 이상의 전략군단은 도시 주변에 전개하고 있었지만 1938년 이후는 소만국경 부근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실례로 1937년까지는 국경 인접지구에 대한 사단 배치는 불과 2개 사단 뿐이었지만 1938년부터는 무려 5개 사단으로 증강되고 있었다.

이것은 관동군이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이후부터는 기본적으로 독립수비대나 만주국군, 만주국 경찰 등에 맡긴 것을 의미했고 관동군 자신은 철저히 대소전 준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1938년 말에는 8개의 대규모 국경 요새가 새로이 완성, 관동군에 배속된 사단과는 별도로 약 2만 명의 병력이 국경지대의 거점에 항시 전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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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후터우(虎頭) 요새의 41센티(16인치) 열차포
서정면의 하일라얼 요새와 동정면의 동녕 요새, 후터우 요새, 그리고 북정면의 아이훈 요새는 특히나 견고한 요새로 평가되었는데 평시에도 3,000~6,000명 이상의 국경수비대를 수용하는 대규모였으며 최대 3m의 콘크리트로 방어된 영구 축성진지였다. 또한 동정면과(후터우 요새) 북정면의(아이훈 요새) 국경요새는 방어만이 아니고 공세작전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왜냐면 이 요새들에는 24cm 유탄포나 30cm 유탄포, 그리고 41cm 열차포 등 일본 육군으로서는 예외적인 대형의 장거리 중포를 다수 장비하고 있어 대소전의 초두에 아웃레인지 포격으로 소련측 군사시설, 철도, 철교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노구교 사건과 제2차 상해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1937년 이후), 전선의 확대로 본격적인 동원이 개시되어 일본군은 가파른 병력 증가 추세로 돌아서게 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에서 여전히 골치를 썩이고 있었건만 관동군으로부터의 대규모 병력 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은 관동군에는 정예부대라고 평가되던 전통있는 상설사단을 우선 배치, 중국전선에는 급조한 특설 사단만을 보냈다. 이것은 육군이 얼마나 대소전 준비를 중시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예시였다. 또한 항공전력도 동정면으로 집중 배치되었지만 전력 부족으로부터 만약 실제로 대소전을 실시할 때는 해군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시 기준으로, 그러니까 41년 말 기준으로 일본 육군의 동원병력은 총 60개 사단 약 210만 명이었다. 이중 남방작전 전체에 투입된 부대는 불과 13개 사단 30만 명, 나머지는 만주에 24개 사단 110만 명과 중국에 30개 사단 65만 명에 전개중이었다.

4.2. 개전 당시 관동군의 전력과 작전 계획 변화

일본 관동군의 1945년 8월 당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만주의 관동군(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제1방면군(만주동부)과 제3방면군(만주서부), 제17방면군(한반도남부+제주도), 제4군(만주북부), 제34군(한반도북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외 1개 항공군과 쑹화 해군 전단이 있었다. 관동군 직할이 아닌 제5방면군 등은 후술한다. 또한 관동군에 17방면군, 5방군, 만주군까지 몽땅 다 합치면 1,271,000명이나 개전 직전의 관동군만 따지면 713,000명이다. 방면군 사령관은 대장이나 조선남부에 설치된 17방면군 사령관만 중장이다. 예하의 군사령관과 사단장의 계급은 중장, 여단장은 소장이다(일부는 중장). '제121사단', '독립혼성제132여단'은 일본어 정식 명칭이며, '제121보병사단', '제131독립혼성여단'이라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영어식 표현이다. 문서 전체에 두가지 표현이 혼재되어 있다.

만주 동부의 수비를 책임지는 키타 세이이치 대장의 제1 방면군은 제3, 제5군을 두고 각각 3개 사단과 1개 독립혼성여단을 휘하에 두었다. 병력은 휘하에 222,157명이었다.
제1방면군 직할대 - 제122보병사단, 제134보병사단, 제139보병사단
제3군 - 제79보병사단, 제112보병사단, 제127보병사단, 제128보병사단, 제132독립혼성여단
제5군 - 제124보병사단, 제126보병사단, 제135보병사단​

만주 서부의 수비를 책임지는 우시지로 준 중장의 제3방면군은 휘하에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30군과 3개 사단과 1개 독립혼성여단으로 구성된 제44군을 두었다. 병력은 180,971명.
제3방면군 직할대 - 제108보병사단, 제136보병사단
제30군 - 제39보병사단, 제125보병사단, 제138보병사단, 제148보병사단
제44군 - 제63보병사단, 제107보병사단, 제117보병사단, 제9독립전차여단

만주 북부에는 우에무라 미키오 중장의 제4군을 배치했으며, 병력은 95,464명이다.
제4군 - 제119보병사단, 제123보병사단, 제149보병사단, 제131독립혼성여단, 제135독립혼성여단, 제136독립혼성여단

한반도 북부에는 쿠시부치 센이치(櫛淵鍹一)중장의 제34군 50,104명이 있었다. 1944년에 6방면군 산하로 동시에 창설되어, 1945년 3월 관동군으로 소속 변경 되었고 압록강 일대에 주둔 한다. 38선 이북은 소련 담당이어서 소련은 함흥에 대규모 상륙작전까지 감행하며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제34군(함경북도 경흥) - 제59보병사단(함경남도 함흥), 제137보병사단(함경남도 정평), 제133독립혼성여단

한반도 남부 및 제주도를 담당하는 제 17방면군은 코즈키 요시오 중장하에 260,000명이 있었다. 원래는 수십년간 조선에 주둔하던 조선군 이었으나 한반도 북쪽을 관동군 소관으로 넘기고 한반도 남부만 담당하다가, 8월 10일 06:00 부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최후를 맞이 한다. 조선군 시절 내내 조선을 담당하는 명문 사단인 19사단, 20사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 졌고, 날림으로 급조한 사단들만 존재 하였다. 산하의 제58군은 제주도만을 담당하여 병력 밀도가 매우 높았다.
제17방면군 - 제120사단(경성, 제150사단(군산), 제160사단(광주), 제320사단(부산), 제127독립혼성여단(부산)
제58군 -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제108독립혼성여단

홋카이도,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담당하는 제5방면군(히구찌 키찌로 樋口季一郎 중장)도 소련군의 공격 예정 범위 내에 있었다. 이들은 관동군 소속이 아닌 별개의 부대이며 예하 쿠릴 열도의 91사단(츠츠미 후사키 중장)의 경우 2차 대전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슘슈 섬 전투를 벌인 부대로, 8월 18일에 개전하여 무려 9월 5일에야 쿠릴 전역이 점령 되었다.
제5방면군(홋카이도 삿포로) - 제88사단(남사할린), 제91사단(쿠릴 열도), 제7사단, 제42사단, 제89사단, 제101여단, 제129여단

만주군은 중국인, 몽강자치군은 몽골인으로 구성된 괴뢰부대였다. 만주군의 경우 명목상 만주국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경우 만주군 제5군관구 소속으로 러허성의 항일독립군 토벌을 담당하며, 제5군관구는 관동군 제3방면군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관동군은 시베리아로 끌려가 고초를 치렀지만, 대부분 중국인으로 구성된 만주군은 무장해제 후 각자 집으로 갔다. 덕분에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 등은 신생 한국군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만주군 - 170,000명, 1사단, 2사단, 보병 9개 여단, 혼성 2개 여단, 기병 1개 여단
몽강자치군 - 44,000명

편제상으로는 괜찮은 전력 같아 보이지만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부대가 껍데기만 남은 채 병력과 장비가 본토 방위를 위해 꾸준히 차출당하고, 신규편성 부대 등으로 그 공백을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관동군의 기본적인 구성 제대는 보병 사단이었는데 사단 당 구성 인력은 소련군 소총병사단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무기는 소련군보다 빈약한 편이었다. 일본군 사단 편제는 2종류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단 편제는 3각 편제였다. 규정상 사단 정원은 20,000명이었지만 45년에는 12,000명에서 16,000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게다가 어떤 사단은 9,000명까지 병력이 줄었다. 3각 편제 보병 사단은 각각 3개 대대로 구성된 3개 연대와 기병대대, 포병 연대, 수송 연대, 공병 연대, 통신 중대와 기타 지원 제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당시 관동군은 31개 사단, 12개 독립혼성여단, 2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19, 107, 117, 63, 39사단만이 1945년 1월 이전부터 만주에 있던 사단들이었다. 나머지 25개 사단의 훈련은 충분하지 못했고 모든 장비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대본영에서는 관동군 전체의 15퍼센트만이 전시에 즉시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관동군에는 1,115대의 전차와 전투 차량이 있었지만 개별 전차의 성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관동군의 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자 대본영은 결국 관동군의 대소전 전략을 바꾸고 말았다. 1944년까지 유지했던 소련군과의 충돌시 소련군에 대한 공세 계획은 전부 취소되었고 전부 방어 계획으로 전환되었다. 관동군은 소련군과 충돌시 국경 지대에서 시간을 끌면서 소련군의 예상 공격 방향으로 종심 방어망을 구축할 계획을 세웠다. 관동군의 새로운 방어 계획은 1945년 5월에 시행되었다.

5~6월 동안에 관동군은 소련군의 예상 침공로마다 나름 효과적으로 배치되었고 퉁화 지역의 방어 상황과 응전태세 재정비를 마쳤다.

파비우스 전략을 채택한 이 계획에 따르면 제1방면군은 국경 지대에 배치된 소대에서 대대 수준의 병력들이 최대한 지연전을 벌이고 후속한 사단과 여단 본대가 국경 지대 4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팡쳉, 치흐싱, 타치엔창, 롯조커우, 투멘에 방어 거점을 구축하게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배치된 모든 사단의 완전 편제가 끝날 때까지 시행이 미루어졌다.

제3 방면군은 소대와 중대 규모의 제대를 사용해 한다가이에서 우차커우에 이르는 서부 국경 지대를 요새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고 본대는 설정된 주 방어선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어선은 신경에서 장춘이고 최후 방어선은 후안젠에서 흐신핀, 장춘을 잇는 요새 지대였다. 제4독립군은 만주 북서쪽 국경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며 다싱안링 산맥을 지나는 철도를 통해 폭토우, 넨쳉, 페이안 라인을 지키며 후퇴하면서 치치하얼에 도착해 관동군 본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전 제대의 3분의 1이 국경에, 3분의 2가 종심을 갖추고 배치되어야 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만주의 험한 지형, 깊은 종심, 일본군의 지연전으로 인해 만주 중부까지 진격한 소련군의 공세 지속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보급선 유지가 힘들 때에 맞춰서 소련군을 저지시키고 잘 하면 역습도 가해 소련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낼 것도 기대했다.

4.2.1. 실상

위의 작전배치도를 보면 정말로 관동군이 소련군을 어느 정도 지연할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했으리라고 여겨지지만 실상은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1945년 5월 이미 일본 자체적으로 사찰한 결과 관동군 75만 명 전체의 전력은 미국 4개 사단(약 12만 명)만도 못한 전력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이건 놀라운 수치가 아닌데, 태평양 전쟁에서의 양측 육군 교환비는 1:6에 가까웠음을 생각한다면 관동군은 의외로 전력을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군의 자체 조사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태평양 전쟁 이후 주 전장이 바다 및 섬이다보니 해군에 몰빵하던 도중[12]이었고 관동군의 정예사단이나 장비들이 전부 태평양 섬에서 산화한지라 이미 관동군은 중국군이나 중국전선의 일본군보다도 약한 상태였다.[13][14]

이미 초창기의 강력함을 상실하고 허수아비만도 못한 수준이 된 관동군은, 똘똘 뭉쳐서 대전력을 구성한 다음 기동방어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중일전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육상전 교리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소련군에게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게 산산조각을 내어 포진한 꼴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소련군, 특히 자바이칼전선군이 사막을 횡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내몽골 지역을 통해 진군할 때 자신들도 그보다 더한 사막을 거쳐 진군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간과한 부분이었다.

적어도 1943년 말에서부터 1945년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제국 관동군은 소련이 일본에게 중립으로 일관했고 중화민국과 중국 공산군에게 전선을 돌파하여 전황을 역전할 정도의 기동추진력이 없었기 때문에 온존되고 있었던 것 뿐이었고, 특히 1945년 들어서는 보급, 인사, 작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신랄하게 평가하자면 이 때의 관동군은 외부 세력과의 격돌 없이도 머지않아 자체적으로 붕괴할 요건이 완비된 상태였고, 독일을 상대로 메인탱커 역할을 하며 동유럽 최강의 괴물로 거듭난 소련군 앞에 저항할 능력은 더더욱 가지고 있지 못했다.

5. 소련군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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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1945년 대일전 승리 후 러일전쟁의 격전장이었던 뤼순을 방문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약체라도 일본 제국의 속국이자 괴뢰국인 만주군까지 합하면 100만에 이르는 머릿수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소련군은 45년의 관동군이 1,115대의 전차와 5,360문의 화포, 1,8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만주국군까지 합쳐 8개 사단, 7개 기병사단이 추가되었다고 추산했다. 이에 따라 만주 국경 전체의 소련군과 관동군 비율은 병력은 1.2:1, 일본군만 따지면 2.2:1이 되고 전차와 포의 경우 4.8:1, 항공기는 2:1의 비율이 된다. 소련군이 숫적 우위에 있긴 하지만 기갑 전력을 제외하고는 그렇게까지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는 아니었다.

게다가 소련군 만큼은 아니지만 관동군 또한 야전군 직할로 무시 못할 만한 포병 전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창설된 30년대부터 소련과의 충돌 상황을 상정하고 위에서 썼다시피 대대적인 국경 지대 방어선과 요새 건축이 소만 국경에 이루어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독소전쟁에서 3,000만 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피해가 발생한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 벌판이란 말에 익숙해 만주가 그저 거대한 평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 곳이다. 특히 서쪽의 다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오면 더 심해져서 습도, 늪,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는다.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노르망디에서 민스크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6. 붉은 군대의 공격 준비

이오시프 스탈린은 만주 침공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이자 자타공인 소련군 최고의 두뇌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극동의 스타프카 대리에 임명해 만주 침공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15]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7월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만주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프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잔뼈가 굵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자바이칼 전선군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2근위군을 지휘해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고,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카르파티아 산맥을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전선군에는 전 칼리닌전선군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이반 유마셰프 해군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험지에서 오랫동안 싸워 와서 험지 기동의 전문가가 된 메레츠코프와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기동전을 벌인 말리놉스키의 경험은 무척 중요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했다.

말리놉스키가 독소전에서 지휘했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부와 메레츠코프가 지휘했던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부는 그대로 극동으로 이동했으며 제6근위전차군, 제39군, 제5군, 제53군은 동유럽의 점령지에서 대 이동을 시작했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국가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련군 편제

6.1. 소련군 종심전투교리의 완성

한편 소련군의 조직은 스타프카의 주도 하에 대대적인 개편이 시작되었다. 독소전 초반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전차 전력에 마주해야 했던 소련군은 이에 맞설 만한 전차의 생산과 전차 부대의 양성에 급급하느라 본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계획하고 1935년에 완성된 소련식 기계화 제병협동전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 종심전투교리의 제파식 전술에서 적 전선 돌파를 맡을 제1제대는 투하쳅스키가 생각한 재빨리 움직이고 장갑으로 보병의 기동을 보호할 수 있는 제병협동부대가 아닌 소총병사단들, 즉 알보병이 전선 돌파를 맡아야 했다. 이 알보병은 각 군단 및 야전군 직할 전차부대와 포병, 공군의 지원이 있었지만, 이런 작전은 항상 소련군에게 출혈을 강요했다.

돌파구 형성 이후에도 문제가 일어났다. 돌파구로 투입되는 전차 부대를 후속해야 하는 기계화, 차량화 부대는 충격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갑차를 비롯한 장갑 운송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대개 전차 위에 기계화보병이 탑승하는 탱크 데산트를 운용해야 했다. 제대로 된 방호를 받지 못하고 기계화전을 치러야 했던 탱크 데산트들은 소련군의 인력 손실에서 단연 최고를 차지했다.[16]

하지만 독소전쟁이 끝나고 3개월이란 여유가 생기자 소련군은 다시 제대로 되고 투하쳅스키를 뛰어넘은 더 발전된 종심전투교리를 완성하기 위한 무기, 장비, 그리고 인력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군은 만주를 완성된 종심전투교리의 실험장으로 삼기 위해 부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많은 경우 소총병사단에는 독립전차여단[17], 돌격포연대와 1~2개 포병연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그 결과 소련의 소총병사단들은 사실상 더 막강한 돌파력을 갖춘 제병협동사단으로 재탄생했다.

만주 서부에서 작전적-전략적 침투를 하도록 되어 있던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완전히 편제가 바뀌었다. 2개 전차군단 중 하나는 기계화군단으로 교체되고 2개의 차량화소총병사단이 배속되었다. 이외에도 2개 돌격포여단, 2개 경포병여단 1개 모터사이클 보병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부대가 배속되면서 제6근위전차군은 독소전쟁 때의 어느 전차군보다 훨씬 막강하고 균형잡힌 부대가 되었다.

7. 작전 경과

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참조

8. 만주 전역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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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8월 22일, 러일전쟁의 격전지였던 뤼순 203고지에 오른 소련 해군 해군보병대.
1945년 8월 16일, 전날 쇼와 덴노의 어음방송을 통해 종전 선언이 발표된지 불과 하루 뒤 관동군 사령부에도 항복 선언이 전달되었다.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전 관동군에 항복을 명령했으나, 통신 불안과 소련군의 통신 차단으로 항복 사실이 전달되지 못한 사단도 있었으며 몇몇 사단은 적의 심리전이라며 현실부정 끝에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헛된 것이 그 동안 제1적기군과 제5군은 무단장을 손에 넣었고 제6근위전차군은 신경과 봉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후터우 요새 공방전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Russians-send-emperor-Puyi-to-USSR-1945.jpg
<rowcolor=white> 비행장에서 체포되어 압송되는 만주국 황제 푸이
한편 만주국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강덕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신경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만주국의 해체를 선언하고 일본으로 도피하기 위해 신경 외곽의 비행장으로 향했다. 그때 소련군 공수부대가 강하했고 푸이는 탈출하지 못한 채 그대로 소련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몽강국의 주석인 데므치그돈로브는 탈출하는 데 성공해 장제스의 중경 정부로 가서 장제스와 결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승리함에 따라 데므치그돈로브도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틀 후인 8월 18일, 본토 결전을 위해 새로 조직된 부대 중 하나인 제2총군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마침 관동군 시찰차 만주에 왔다가 제15군과 제2적기군의 공세로 하얼빈에서 옴싹달짝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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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항복 후 처리를 논의하는 소련군과 관동군 수뇌부들.
한편 소련군은 야마다 대장보다 계급이 높은 하타 원수가 관동군을 실질적으로 통수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에서는 원수는 대장에게 주는 명예직이라 일반적인 원수와는 거리가 약간 있지만 어찌되었든 대장보다는 높은 것이 사실이므로 극동군 총사령부의 참모인 게오르기 쉴라호프 대장의 이름으로 하타 원수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하타는 항복 요구에 응하여 8월 19일에 바실렙스키와 회동했다. 하타는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면서 다른 관동군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바실렙스키는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이리하여 만주 작전은 겨우 11일 만에 끝을 맺었고 만주는 소련 치하에 들어갔으며 관동군 포로 대다수는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끌려가 소련의 국가 재건을 위한 고역에 동원되었다.

9.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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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하얼빈에 입성한 소련군.
만주 작전은 역사에 유례가 없는 기동전이었다. 2차 대전에서 세계 전사에 한 획을 그은 기동전들인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은 작전 목표 달성까지 한달에서 석달까지의 기간이 걸렸다. 하지만 만주 작전은 민스크에서 노르망디까지의 거리를 고작 2주도 안되는 기간에 전부 석권이 가능했던 엄청난 속도의 기동전이었다.

소련 제병협동군들은 평균 300~400km를 작전 기간 동안 진격했으며 제6근위전차군은 총 800km 이상을 진격했다. 이 전광석화 같은 진격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9.1. 애와 어른의 싸움

이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서 관동군 최정예 사단들이 전부 빠진데다가 미국과의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관동군은 완전히 잡병으로 전락했다. 일본 자체적으로도 관동군 전체가 미군 4개 사단도 안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소련군이 침공했다.

만주 전역의 승패는 모두가 예측할 수 있었다. 수적으로 소련군은 보병이 1:2, 전차와 야포가 1:4.2[18], 항공기가 1:2의 우위를 이루었으며 무기의 기술력이나 병력의 질적 격차도 너무나 컸다.[19]

일본의 대전차 수단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악명높았으며 IS-2는 커녕 T-34를 저지할 수단은 오직 대전차 자폭조 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소전쟁에서 수 차례의 고비를 넘긴 소련 베테랑 병사들과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겪어본 관동군의 전투는 어떻게 될 지는 불보듯 뻔했다. 최후방 극동에서 전투 한번 겪어보지 못한 병사들도 소련에 많았지만, 이들은 열차를 타고 온 유럽 전선 베테랑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음으로써 경험 부족의 한계를 많이 상쇄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Kwantung-army-surrenders-to-Soviet-union-chang-chun-1945.jpg
<rowcolor=white> 소련군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야마다 관동군 사령관
고위 지휘관들의 실력 또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배출한 최강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인 바실렙스키 원수[20]가 작전을 총지휘했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베테랑인 메레츠코프와 말리놉스키가 전선군 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지휘하는데다가 류드니코프, 루친스키, 치스차코프, 벨로보로도프, 크릴로프 등 독소전쟁에서 몇 년 간 구른 경험 많고 유능한 지휘관들이 소련군에 배치된 반면, 관동군은 총사령관인 야마다 오토조부터가 실전 경험이라고는 중일전쟁에서 고작 1년 남짓 참전해 놓고서는 기병학교 교관 노릇 하다가 대본영에 배치되어 태평양전쟁 내내 대본영 참모로 일하다가 관동군 사령관이 된 인물이었다.

만주군 사령부는 물론 병사들도 경험이 부실했지만 소련군은 사령부부터 훌륭한 역량을 가진 사령관들로 채워졌고, 병사들 역시 유럽 전선에서 싸웠던 베테랑들을 중심으로 빈약했던 극동군을 재편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작전의 중요한 지점들은 소련군이 '어떻게 이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겼는가'이다.

9.2. 전략적 차원의 승리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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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다롄에 입성하는 소련군
소련군의 만주 침공은 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전략적 기습이었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를 비롯한 소련 정부 인사들은 소-일 불가침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과는 충돌할 의사가 없는 척 하며 일본 정부를 안심시켰고 일본의 소련을 통한 서방과의 강화라는 떡밥을 심심하면 던져 주었다.

그렇게 일본을 안심시키는 사이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한창일 때부터 대일전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독소전쟁이 끝나갈 때 제5군, 제39군, 제6근위전차군, 제53군을 통째로 시베리아로 수송했고 또한 극동군 부대들에 증원할 베테랑 지휘관들과 병력들, 물자들을 철저한 보안 속에 수송했다. 이 오랜 노력 끝에 소련군은 작전 개시일인 8월까지 극동에서 전원 공격 준비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관동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작전을 개시했다.

또한 소련의 선전포고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는 걸 끊어버리기 위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을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예상 못한 소련의 전면적 침공을 받게 되었고 이는 완벽한 전략적 기습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알았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관동군을 제외하더라도 중국 본토인 관내에 배치한 병력은 중국군에 발이 묶여있었고, 한때 위세를 자랑하던 관동군도 전쟁 말기에 이를 때 쯤에는 본토결전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정예부대는 죄다 차출되어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유와 미국과의 결전을 위해 일본은 해군에 많이 투자한 상태였고[21]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에서 나름 전과를 올렸으나 노몬한에서도 입증되었듯이 육군 강국인 소련군과 전투를 할만한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정예사단이 이탈하고 분산 배치되었던 대전 말기는 말할 것도 없다.

9.3. 작전적 차원의 승리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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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노획한 일장기를 펼쳐보이는 소련군 병사들
만주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여준 소련군 작전술의 완성이었다. 41년~43년 초까지의 무수한 실패와 43년 후반기~44년 초까지의 실험과 성공, 44년 후반 바그라티온 작전의 실행과 베를린 함락까지의 작전적 성공들은 소련군에게 어마어마한 전훈을 남겨 주었고 어떻게 해야 종심작전 이론에 따라 광속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지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독소전쟁 내내 소련군은 작전술 차원에서 쉴새 없이 독일군을 몰아붙이는데 치중해 안 입어도 되는 손실을 지나치게 많이 입은 감이 있었다.[22],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이후에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였다. 만주 작전은 이와 같은 작전적 조급함을 떨쳐버리고 철저한 준비와 오랜 검토 끝에 탄생했다.

소련군은 만주 작전에서 투하쳅스키가 남겨준 선물인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을 제대로 활용했다. 작전적 주공인 제6근위전차군의 진격을 방해하려는 일본군의 기동 차단 기도는 애시당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소련 제36군, 제1적기군, 제5군, 제25군, 제15군, 제17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 등은 소만 국경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일본군의 발을 죄다 묶어버리는 데 성공해 제6근위전차군이 종심작전 교리에 따라 뒤 돌아보지 않고 3일 동안 450킬로미터를 진격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적의 정치적, 산업적 기반인 신경과 봉천으로 급기동하며 관동군과 만주국군 전체의 전쟁 지속 능력 제거와 대대적인 심리적 마비 효과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제6근위전차군의 기동은 관동군의 군수, 보급, 손실 인력 충원, 손실 인력 후방 수송과 회복을 철저히 제거했다. 섬멸되지 않은 관동군 60만여 명이 계속 저항해 작전이 길어지긴 했으나 관동군의 대대적인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그런데 광정면 동시접촉과 함께 수반되는 충격군의 적 방어선에 대한 돌파구 형성은 이뤄지지 않았다. 애시당초 주공이 적 주 방어선으로 돌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의 방어선이 허술한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 버리는 것이었다. 험지를 통한 기동부대의 진격은 험지의 상대적으로 허술한 적 방어를 무너트리고 적의 심장부로 곧장 향할 수 있다는 강한 장점을 가지게 됐으며 바실렙스키는 이를 적극 이용하려 했다.

다싱안링 산맥 넘기는 작전 입안자인 바실렙스키와 작전을 실행해야 하는 말리놉스키 입장에서도 큰 도박이었다. 만약 일본군이 다싱안링 산맥의 험지에 완전 편제된 1개 연대라도 제대로 배치해 놨다면 제6근위전차군이 우격다짐으로 산맥을 넘어도 이미 일본군은 신경과 봉천 주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을 것이며 산악지대라는 특성 상 제6근위전차군 또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동군은 기계화부대가 다싱안링 산맥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이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바실렙스키는 여러 번의 검토를 거쳐 제6근위전차군과 제39군에게 다싱안링 산맥을 넘을 것을 명령했다. 제6근위전차군은 산맥을 넘었고 만주국의 심장부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으며 바실렙스키가 원했던 광경을 보게 만들었다.

제1극동 전선군 지역에서도 상황은 똑같았다. 메레츠코프의 병력들은 만주 동부의 구릉과 숲에서의 기동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의 예상을 철저히 짓밟고 관동군의 마지노 선이라 자랑하던 동부 만주의 요새 라인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리고 무단장을 점령함으로서 만주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갈 발판도 마련했다. 바실렙스키, 말리놉스키, 메레츠코프는 험지 기동을 작전의 주 요소로 택했으며 이것들은 전부 성공적으로 돌아가 전 관동군을 압도했다.

9.4. 전술적 차원의 승리 요인

파일:external/cdn.theatlantic.com/s_w36_0songhua.jpg
<rowcolor=white>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아시아계(몽골 계열이라 추정) 병사도 눈에 띈다.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은 숲, 산, 구릉, 습지 등의 다양하고 생소하며 통행을 방해하는 지형에서 빠른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공격 시의 충격력을 보존하며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지형이 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무난하게 통과하는 전술적 능력을 보이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기여했다. 또한 일부러 험지만을 택한 기동은 험한 지형만 믿고 경계나 증강을 소홀히 한 그 지역의 일본군을 무너트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투 공병의 운용은 필수적이었다. 소련군은 이 전역에서 대량의 전투공병을 군단급, 사단급 제대에 배치하고 얼마든지 본부에서 지원이 가능하도록 편제하여 어떤 지형적 난점이든 간에 기동로를 개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소련 공병들의 엄청난 노고들은 작전의 성공을 이끄는 전술적 열쇠였다.

소련군은 전술적 수준의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많은 경우 독소전에서 소련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대대적인 준비 포격을 삭제하거나 최소화하고 독소전에서 얻은 요새 침투술 경험을 통해 조직한 강습 집단을 편성해 일본군 초소, 특화점, 요새 등을 하나하나 걷어 내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를 통한 일본군 요새 지역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리면, 전차여단급 선견대가 돌격포, 자주포 연대를 수반하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 우회, 포위 기동을 통한 일본군의 기동 차단과 포위를 수행했다. 선견대가 고정 요새들을 우회하고 포위함에 따라 일본군이 공들여 만든 요새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하나 하나 점령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소련 기동 선견대들의 종심 깊은 공격은 2차대전의 모든 기동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혼란과 공포를 가져왔다.

전술 수준에서 운용되는 여단급 선견대들은 대개 군단 당 하나씩 배치되었으며 공세 목표가 작전에서 부차적 목표일 때는 야전군 직할로만 1개 배치되었고 선견대가 더 많이 필요한 경우는 사단 당 한 개씩 배치되었다. 제6근위전차군과 함께 주공을 형성한 제39군의 경우 유일하게 전차사단 1개와, 전차여단 3개를 죄다 선견대로 두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전술적 제대에 기동 제대가 배속된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소련군은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독립전차여단과 독립돌격포연대를 편제해 필요하면 얼마 든지 각 사단, 군단에 임시로 배속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만약 기동 전력의 투입이 힘들 정도로 일본군의 요새망이 빽빽한 경우에는 무지막지한 화력투사로 요새들을 가루로 만들고 보았다.

이런 방식을 사용한 소련 기계화 전력의 엄청난 진격 속도는 일본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그들의 방어 계획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또한 파고든 선견대들은 보급선이 허용하는 한에서 어떤 기동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고 여단장, 연대장 재량에 따라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기동과 돌파를 시행하며 일본군 방어선을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또한 모든 공격시간이 죄다 한밤중이라는 것도 성공을 도왔다. 소련군의 야간침투능력은 새벽 1시에 공세를 시작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고, 스스로 야간전이 장기라고 믿고 있던 일본군이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다. 일본 국경지대 초소들은 밤 사이 정리되어 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만들었다. 여기에다가 날씨가 장마철이란 것까지 기습을 숨겨주는 요인이 되었으니 기후까지 소련군을 돕는 격이 되었다.

보병들의 공격 대형 또한 이전보다 훨씬 유연해졌다. 소련 소총병연대의 공격 대형은 모든 전선에서 각각 차이점이 있는 대형으로 진행되어 일본군으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결과 만주 작전은 패턴화된 것처럼 진행되었다.

1. 소련군 강습 집단과 전투공병들이 침투해 일본군 요새망을 한겹 걷어낸다.
2. 소련군 소총병부대들이 무력화된 요새를 접수하거나 온전한 요새에 견제행동을 한다.
3. 그 동안 전차여단, 돌격포연대 등이 열어 놓은 구멍으로 급속 침투한다.
4. 기동부대들이 우회, 포위, 추격을 통해 관동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는 종심 깊숙히 침투한다.
5. 의미 없이 버티던 요새들이 방어력과 수비병력을 감안한다면 매우 간단하게 소련군 손에 넘어온다. 일부 요새는 끝까지 버티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냥 포위해놓았다가 하나씩 천천히 정리하면 끝이다.
6.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 중부로 진격한다.

결국 소련군은 4년간의 싸움에서 막강한 고수가 되었고, 종합적으로 일본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9.5. 보급적 차원의 승리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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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과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의 모습.
사실 독소전쟁 이전의 소련군은 보급, 수송 같은 비전투분야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군대였다. 하지만 만주 작전에서는 거대한 기동전을 위한 자칫 넘어가 버릴 수도 있는 사소한 수준으로 보일 수도 있는 보급적 문제들까지 전부 해결하려 노력했다.

험지 기동과 깊은 종심을 돌파하는 작전 목표 달성을 위한 연료의 지상, 항공 보급이 체계적으로 계획되었으며 특히 긴 거리를 주파해야 하는 병력을 위해서 급수중대까지 조직하는 등 소련군의 보급적 준비도 엄청났다.

소련군이 유류 트러블 상황에 대해 크게 대비를 해오긴 했지만 작전에서는 제6근위전차군과 제39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기긴 했다. 차량으로 보급을 수송하기에는 너무 깊은 종심이었다. 그럼에도 항공기를 통한 유류 보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제6근위전차군의 여단급 선견대들은 지속적인 진격이 가능했다.

반면에 일본은 이미 본토도 다 미국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소련을 신경 쓰지도 못했고. 관동군은 말 그대로 잡부대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9.6. 관동군의 실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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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항복 후 무장해제 당하는 관동군.
압도적인 전력의 소련군을 상대하는 관동군은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소련군의 전략적 기습의 성공에는 관동군 사령부와 대본영이 세운 오판이 한 몫 했다. 대본영과 관동군 사령부 모두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감안할 때, 1945년 가을까지는 대규모 군사행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으며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그럴 것이라는 심한 낙관론까지 나왔다.[23]

사실 다 망해가는 상황에서 소련의 군사적 상황까지 신경쓰기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변호해 줄 수는 있다. 문제는 전략적 기습이 작전적 기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작전을 시작했을 때 관동군은 그들의 대소전 시나리오 상황이 아니라며 소련군의 공세를 그저 사소한 국경지대 충돌이나 도발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세 시작날에 야마다 대장은 다롄에 내려가 있었고 제5군은 예흐호에서 회의를 여느라 전방 사령관들을 죄다 불러들인 상태였다. 이에 떨어진 작전적 기습효과는 막중했다.

한편 관동군이 45년에 변경한 대소전 요강은 소련군의 험지 돌파와 종심 기동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1942년까지 핀란드와 독일을 통해 얻은 정보만으로 소련군을 정면공격과 인해전술 이외에는 모르는 3류 군대로 파악했다. 그들이 할힌골에서 주코프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 결과 관동군은 30년대에 상정했던 방어병력배치를 바꾸지 않았으며[24] 험지 방어는 소련군이 험지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최소화했고 결국 아예 험지만 노린 소련군에게 아무 힘도 못쓰고 돌파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대장과 제3방면군 사령관 우시지로 대장의 관할권 다툼이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으니 관동군이 폭삭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관동군은 소련군을 삼류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삼류는 그들 자신이었다.[25] 불과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하였으며,[26] 나머지 관동군 병력 60만여 명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 소련에서 고생해야 했다.

9.6.1. 관동군 포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모든 일본군은 소련군에 항복하여 소련의 전후복구 과정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수는 무려 60만여 명에 달했다. 시베리아에 끌려간 관동군의 처우가 어땠는지는 아직 객관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에 소일 협상을 통해 관동군 포로들이 일본으로 귀환했을 때의 증언만이 당시를 짐작하게 해 주는 증거 자료일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엇갈리는 상황이라 죽기 직전의 대우를 받았다고 증언하며 일본 극우쪽의 반공, 반소 선전에 동원되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었다.[27] 이렇게 포로를 10년간 잡아둔 이유는 포로를 박해하려는 사디즘적인 이유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엄청난 사망자 때문에 소련의 노동력이 부족한지라, 추축국 포로를 이용해 전후복구 사업 및 경제개발을 하기 위함이었다.[28] 그리하여 일본군 포로 중에서도 일부는 독소전쟁이 벌어졌던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까지 끌려가서 전후복구 사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북극권의 건설현장이나 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했는데, 이렇게 북극이나 우크라이나의 환경이 극과 극이다 보니 포로 대우 역시 극과 극이었다.[29]

그래서 포로 생활 경험자들의 증언도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다. 당장 타키가와 세이호우의 중편 우크라이나 혼성여단에서 중간 중간 나오는 일본인 정치운동 이야기가 바로 이런 고민을 잘 나타낸다. 작가조차도 이런 민주운동 관련 서술 때문에 항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일본군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국군이나 유엔군 병사들의 처우에 대해서도 말이 서로 다른게 많다.

사실 일본군을 비롯한 구 추축군 포로 문제가 조명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추축국이 워낙 많은 악행을 저지른지라 대부분의 피해국에서 추축국 시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련이 구 추축국 포로들을 전후 10년이 지난 시점까지 수감한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자 전쟁범죄이다.

이러한 연유로 관동군 포로에 대한 소련의 처우 문제는 쿠릴 열도 문제와 더불어 현재 러일 관계의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 정부가 아직까지도 관동군 포로 문제에 대한 기밀 문서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김국후 교수가 <평양의 소련군정>을 쓸 때 당시 제25군 정치장교인 레베데프 소장과의 인터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자 레베데프는 손사레를 치고 "그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라 말하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러시아는 관동군 및 구 추축군 포로 문제를 금기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나 다른 연구자들의 기밀 해제 요청에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10. 만주 작전의 의의

비록 소련, 현 러시아 내에서도 유럽 전선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 하고 일본에서는 아예 이를 부당한 소련의 급습으로 여기는 면이 있지만 만주 작전은 현대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작전술과 전략 공세의 완성이었다.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으로도 국가멸망 및 민족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의지를 완전히 박살내기에 충분했다. 당시의 관동군은 사실상 정예사단이 다 빠져나간 상황에다가 도쿄 대공습으로 이미 항복논의도 하는 상황이었다.[30] 당시 일본은 소련을 통해 연합국과의 평화를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했으며, 소련은 그런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외교 채널이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비록 약체화됐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60만에 달하던 군대였다. 그 둘을 동시에 소련이 갈아버렸으니 심리적 타격이 막심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 UC 산타바바라의 일본계 미국인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저서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에서 기존의 통설을 뒤집고, 일본이 항복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관동군의 붕괴였다고 서술했다. 일본으로서는 소련군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득불 미국에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미국학계에서는 큰 반론을 받았지만, 하세가와 교수는 그동안 미국학계가 손대지 못했던 당시 일본 지도층 사이의 의견교환을 나타낸 일본어 자료를 광범위하게 이용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승리하는걸 부정하는 말이 아니며 일본이 패배한 이유는 미군에게 말 그대로 모든게 박살났기 때문인건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 폭주 중이었던 일본의 전쟁 의지 세력들의 정신세계를 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전장에서의 결과와는 다른 최종적인 종전 과정에서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31]

소련은 8월 9일~15일간의 전역에서 사실상 항복을 기다리고 정예가 다 빠진 관동군을 무력화시켰고 몽강자치연합과 만주국을 멸망시켰다. 소련군은 만주의 공업 기반시설을 죄다 뜯어가 시베리아 개발에 사용했다. 이후 내몽골과 만주는 결국 새롭게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주게 되지만,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서방 연합국과의 협정에 따라 완벽히 손에 넣는데 성공했으며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내려오고 있다.

소련군 입장에서 만주 전역은 단순한 '소풍'이 아니었다. 만주의 험지를 급속도로 통과하는 것은 인적 비전투손실을 강요했으며 무단장, 후터우, 하일라얼 등에서 비록 잡병이 되었다지만 관동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출혈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만주 곳곳의 진창, 산맥들도 골 때리는 것이었다. 장비로는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다. 소련군의 전차 손실은 대부분이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키(Смертники)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소련군은 스스로 이 전역을 연구하면서 3가지 전훈을 도출해 냈다.

1.공세에 필요한 적 주요 방어선을 공격하는 부대의 편제는 항상 상상력 있게(유연성 있게) 편제하라.
2.진격 제대는 항상 시간차를 두고 진격하여 연속적인 공격을 하라.
3.모든 부대에 기동 선견대를 편제하라.

이를 통해 소련군독소전쟁과 마찬가지로 전 부대의 철저한 기동화, 차량화가 얼마나 유용한지 만주 작전에서 한번 더 확인했다. 이는 항상 소련의 모든 소총병 군단과 사단에 여단~사단급 기동 선견대를 배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주코프가 국방상이 된 후 소련의 모든 소총병 사단을 차량화소총병 사단으로 바꾸며 모든 제대에 화력, 기동력, 작전지속력을 증강하는 데 큰 전훈이 되었다. 만주 전역은 결국 현대 소련군과 러시아군을 완성한 전역이라 볼 수 있겠다.

한편 정치/외교적으로 볼 때에, 치스차코프의 제25군은 8월 24일에 함흥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사정을 정탐한 뒤 평양으로 진군했다. 메레츠코프는 함흥이 한반도 북부의 중심지인 줄 잘못 알고[32] 함흥에 군정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나 치스챠코프의 설득으로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8월 26일, 치스차코프는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게 되고, 한반도 남부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어 오늘날 남북분단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1] 여기서 말하는 항복의 의미는 미국한테 원폭을 맞은 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만주 작전이 보다 큰 요인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한정하는 용어다. 즉 만주 작전으로 일본 제국이 패전했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항복을 결정했다는 것이 이 학설의 주장인데 쉽게 말해서 모랄빵을 만든게 원폭 때문이 아니라 만주 작전의 역할이 더 크다는 뜻이다. 정예가 아니지만 그래도 100만의 병력이 일본 본토 전역에서 오키나와, 이오지마 시즌2를 찍겠다며 항전의지를 불태운 것이 사실이다. 불과 20년 뒤 베트남 전쟁을 봐도 항공폭격은 한계가 있으며 일본의 전쟁수행 의지를 끊는 것 외에는 대일전선에서의 역할이 없다고 주장하기에는 지나친 폄훼다.[2] 일본 천황이 직접 연설에서 미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만주 침공을 항복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소련이 참전한 이상 전쟁은 제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이다. #[3] 한반도 남부/사할린/쿠릴 열도 주둔 28만 명 제외[4] 흔히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련군은 해당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8월의 폭풍' 이나 '8월 폭풍'은 소련군의 작전명도, 소련군의 작전 개시 암호명도 아니었다. 데이비드 글랜츠 대령이 '8월의 폭풍(장마철)의 시기에 작전이 개시되었다'라는 뜻에서 논문 제목을 '8월의 폭풍' <August Storm-Soviet invasion in Manchuria>이라고 붙이고 이를 1983년에 발간하였다. 이후 미국 등지에서 소련군의 만주 침공 작전은 8월의 폭풍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왔지만 이는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쓴 용어가 아니었다. 글랜츠가 2010년에 밝힌 비화에 따르면, 1983년 당시 10살이던 글랜츠의 딸 수지가 8월의 폭풍이라고 부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함에 따라 우연히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2018년 11월 길찾기에서 '8월의 폭풍'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출간했다.[5] 사할린 유전 개발은 기술적으로 수십 년은 더 지나야 가능해졌다.[6] 이미 소련은 모스크바가 위태한 상황에서도 우랄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를 통틀어 50개 이상의 사단을 새로 창설해 소만 국경 지대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당장 러시아 내전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가 시베리아 출병으로 군대를 소모한 이력이 있었다.[7] 당시 일본군은 패전이 확정된 상황임에도 천황제 유지 뿐 아니라 조선/대만 등 식민지 유지, 일본의 자체적인 무장해제 및 전범 처벌이라는 무리한 항복 조건을 내세웠다.[8] 두 나라 모두 2차 대전 당시 중립국들이었다.[9] 실제로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할 만한 여력도 능력도 전혀 없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이전부터 관동군이 다루던 주력전차들은 소련군이 다루던 전차에 비해 뒤떨어졌고 과거 할힌골 전투는 스탈린의 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를 많이 잃은 상태였고 2차 할힌골 전투를 하던 주코프마저 이게 첫 실전이였다. 일본은 해군 전력으러는 소련 해군을 압도했지만 분산된 육군 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대륙 절반을 장악하는 것도 4년이나 걸렸고 이마저 완전한 장악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소련의 시베리아는 이보다 더 광활하면서 더 척박한 지역이다.[10] 일본은 소련에 '소련이 조선의 해방에 반대한다면 남사할린과 우루프 이북의 쿠릴 열도 및 만주 내 이권을 무상으로 양도하겠다.'라고 제안했으나 대일전을 준비하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11] 15개 사단을 기간으로 동원한 병력[12] 전쟁 이전 중일전쟁때는 내륙지대가 주전장이고 해군은 그저 항저우와 같이 항구가 있는 도시 타격에만 동원되었다. 중일전쟁때는 육군이 예산을 상당수 타먹었고 공적도 계속 쌓아가고 있었다. 이에 불만이던 해군도 우리도 뭔가 해야한다며 강박관념을 지니던 도중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되자 해군이 제일 반기며 일을 벌인게 태평양 전쟁이다.[13] 여기서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전간기에 일본의 해군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계 3위의 전력을 자랑하였는데, (그 때문에 전함 숫자 규제에 계속 걸렸다) 일본의 정계는 대공황으로 인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되면서 군부 세력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정권을 잡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육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대표되는 조슈파의 후예들이였다. 우리에게 문화정치로 유명한 조선총독 출신의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당시 내대신부 내대신), 그리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 총리가 황도파의 일개 청년장교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렇게 전직 총리도 두 명이나 죽고 현직 총리였던 오카다 게이스케도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며 여러 고위인사들도 죽거나 다쳤다. 이후 태평양 전쟁기간 내내 육군의 계파들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도하고 있었다. 해군 출신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주만을 계획하고 지휘하였던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경우에는 육군의 반대로 해군대신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이 전쟁을 기획한 총리 도조 히데키는 당시 육군대신을 겸직하던 육군 출신이었다.[14] 일본 육군은 관동군의 실질적인 전력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판단은 미국에게도 대일전에서의 피해량이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는 두려움 및 오판을 가져다 주었다. 이 오판만 안했다면 미국은 소련에게 참전을 요구를 안 하였을거고 소련의 만주 작전이 안 벌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이오지마나 오키나와 등-에서 일본군의 처절한 방어전은 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는데, 자그마치 75만 명의 대군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포감이 들게 했다. 특히나 미드웨이 이후 해상을 장악하고, 본토에 엄청나게 폭격을 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이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었기에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이에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는데, 실상은 만주를 소련군에게 공짜로 넘겼고, 한반도 북부를 덤으로 주면서 한반도를 분단국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로 진격한 소련군은 거의 딸피나 다름없던 관동군을 상대로 특별한 전투 없이 만주벌판을 횡단하였다.[15] 다만 1945년 초 베를린을 향한 마지막 공세에서 보여준 주코프의 모습으로 판단할 때, 권력에 대한 견제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주코프가 공세 작전의 적임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16] 다만 탱크 데산트는 흔히 알려진 장갑차 등의 병력 운송수단 부족이 사용원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탱크 데산트 문서 참조. 탱크 데산트를 간단히 요약하면 병력 운송 수단이 아니라 보병과 전차가 합동전술을 하기 위한 단계 중 하나다.[17] 국군 보병사단 직할 전차부대는 1개 대대꼴이다.[18] 야포 전력의 경우, 군사기자 이세환역전다방에서 단순 숫자만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언급했으며, 화력과 연사력 등을 고려하면 1:10이 넘는다고 평가했다.[19]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해군에 사실상 소멸당했고 애초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20] 야전지휘관이 아니라서 주코프에 가려졌지만, 총참모장으로서 구체적인 작전을 짠 바실렙스키는 독소전쟁 기간 중 10여 명이 쏟아져 나온 소련군 원수들에서 가장 훌륭한 능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당시 소련에서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 2회 수여자였다.[21] 일본은 머릿수만 많지 열강에 비하면 교리도 뒤떨어지고 화력도 열세한 육군과 달리 해군만큼은 연합군의 일원인 영국과 비등할 만큼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대전 기간동안 항모전력은 아예 영국을 제끼고 미국과 함께 투톱이었으며, 특히 어뢰의 성능과 뇌격술만큼은 원톱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해군 전력만큼은 심혈을 기울여 증강을 꾀했다.[22] 특히 44년 후반부턴 소련군 뿐만 아니라 영미 연합군까지 서쪽에서 베를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독일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으로선 베를린만큼은 반드시 붉은 군대의 손으로 함락시켜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게다가 서방연합국과의 회담에서 소련군의 베를린 공략을 보장받은 뒤부턴 주코프, 로코솝스키, 바투틴 등등 일선 지휘관들이 스탈린으로부터 베를린 공략을 받아내기 위해 경쟁하듯이 전선을 몰아붙였던 것도 있었다.[23]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 정도의 피해를 입고도 견뎌낼 정도의 체급을 가진 나라였기에 소련의 기준에서 만주 공세는 중견규모 군사행동밖에 안 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24] 사실 진짜 소련군이 인해전술밖에 모르는 삼류 군대였다고 생각했더라면 더더욱 선방어를 피하고 종심에 병력을 두는 배치로 바꿨어야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관동군의 편제를 바꿀 생각 자체가 없어서 이유를 끼워맞췄다는 것이다.[25] 웃긴 건 소련군의 위력을 제대로 판단한 건 다름아닌 일본군 최악의 졸장 도미나가 교지였다. 만주 작전 당시 그는 관동군의 어느 사단장으로 재소집되었는데 소련군의 물량에 겁을 먹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항복했다.[26] 소련군은 1만 명 전사했다.[27] 아마도 보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포로의 대우가 많이 달랐을 확률이 높다. 어떤 일본군은 소련군들과도 나쁘지 않게 지내다가 애까지 만들고 돌아왔다.[28] 일본군뿐만 아니라 소련에 억류된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 구 추축국 포로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후 복구가 마무리된 1955년에야 석방되었다. 서독에서 가장 반공정서가 심한 집단이 이렇게 10년간 강제노역에 동원된 송환 포로 출신들이었다.[29]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혔는데, 그 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들려주었고 이 내용을 오구마 에이지가 자신의 책인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에 실었다. 오구마 겐지는 소련군 포로 생활에 대해서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출처[30] 어떤 조건으로 항복을 해야 하느냐 정도.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결사항전을 하여 그나마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31] 첫째, 2차 대전기 일본의 전쟁은 둘로 나뉘어진 일본 육군과 해군이 자기들의 국력과 타군의 상황따윈 일절 상관않고 자기들끼리 벌인 2개의 양면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중 일본 해군이 주도한 태평양전쟁은 미드웨이, 필리핀 해, 레이테 만 해전 이 3번으로 끝났음에도 GG안치고 버티면서 도쿄대공습으로 일본 국민들을 죽게 방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관동군이 주도한 중일전쟁, 만주전쟁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고 전선이 유지됐기 때문에 육군은 여전히 폭주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44~45년에는 해군이 힘을 잃고 육군이 사실상 일본 내각, 정부, 대본영까지 장악해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항복을 거부했다. 일본 육군은 미군과 싸우지 않았기에 해군에 비해 마지막까지 전쟁에 대해 낙관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과 달리 소련은 진짜로 일본 열도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몰락 작전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지 일본 열도를 빼앗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을 점령해 자신들의 영토 혹은 위성국으로 삼아 주요 부동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즉, 일본이 항복을 하더라도 소련은 쳐들어와 대본영에서 큰소리만 내던 일본군 실세들은 물론 현신으로 숭배하던 히로히토의 명줄, 나아가 천황제의 존립까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그러니 소련이 들어오기 전에 미국에 항복해야 최소한 패전국의 장수라고 주장해서 살아남아 자기 밥그릇을 지킬 시도라도 할 수 있었다. 셋째, 민주 진영이었던 미국과는 달리 권위주의 공산국가 소련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개전 시점에서부터 종전 때까지 미국은 인간성을 상실한 전투의 일련 중에도 항복한 병사들에 대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행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본군 장성들이 존재했고 비공식 외교채널이 그나마 있던 미국과는 약간이나마 말이 통했다. 하지만 소련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일본을 소련의 영향권 하에 두고 싶어하던 스탈린과 일본 열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탐내던 소련군, 독소전쟁에서 처참하게 흘린 피를 일본인들을 빨아먹어서라도 채워야하는 소련 시민들에게 패전 후 일본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었다.[32]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함흥 남단에는 흥남공업지대라는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최대의 화학공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흥남공업지대에는 수력발전소, 화력발전소, 도쿄의 이화학연구소 분실(分室), 아시아 최대의 질소비료공장, 야금제련소, 제철소, 조선소, 각종 군수 공장 등 중화학산업시설이 즐비했고 그만큼 노동자 층이 상당했다. 반면, 평양은 서비스업과 상업이 발달한 소비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