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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 이래 말레이시아에서 행해지고 있는 말레이인 우대 정책.2. 역사
왜 이 정책이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배경을 봐야 알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가 주를 이루는 나라인데, 일단 원주민은 말레이계이며 원래 이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이미 과거부터 동남아시아엔 중국계 상인들이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말레이시아에도 정착해 있었다. 게다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말레이시아를 점하고 있던 영국은 자신들의 또다른 식민지였던 인도와 홍콩에서 노동자(쿨리)들을 같이 대규모로 데리고 오면서, 말레이시아에서 이들의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1]
문제는 이 노동자들이 돌아가지 않고 말레이시아에 눌러앉으면서 생겼다. 물론 처음에 이들은 돈이나 벌러온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인도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갈등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나고, 중국은 좌우대립으로 잘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2] 결국 어쩔 수 없이 자기들 나라가 좋아질 때까지는 여기서 살자고 했던 것이 오랜 세월 살아오다보니 기반이 말레이시아에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이 주류가 되어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말레이인들은 자기들이 오랫동안 터를 잡아왔었고 명실공히 이 땅의 자손인데 이방인들이 와서 우리나라를 빼앗는다는 인식이 생겨 반발이 일어났고
이런 와중에 1948년 신설된 말라야 연방이 부미푸트라 정책과 비스무리한 것을 시행한다. 물론 상술되어있듯 '부미푸트라 정책'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다만 전후적 차이는 전에는 "말레이인을 우대하되 외국인은 받는다"지만, 후에는 "말레이인을 보호하고자 외국인을 막는다"가 되었다.
하여튼 1957년 말라야 연방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바로 영역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말레이인의 비율이 막 과반을 넘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말레이인이 50%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수준이라, 말레이인을 우대하는 법을 밀어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레이인을 비롯한 원주민의 수를 늘릴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그렇다고 애를 강제로 낳으라는 뻘짓을 하기도 좀 그랬다. 애초에 이 당시에는 종족 가릴 거 없이 자녀를 다섯, 여섯 명 정도는 기본적으로 두던 시절이라서 출산장려정책을 펼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3] 막상 그렇다고 산아제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말레이시아 면적이 꽤 널널하기도 했다.[4] 그래서 차선책으로 원주민 수를 늘려보고자 한 것이다. 사바와 사라왁, 브루나이에는 말레이인 민족도 꽤 있고, 말레이계 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 우대 정책을 내세워 사바, 사라왁의 원주민들[5]과 본토의 말레이인에게 동족 의식을 갖게 함으로서 중국계를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3년 말레이시아가 신설되었지만, 싱가포르 주가 큰 문제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는 중국계가 압도적 다수인 도시였기 때문.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장하며, 이러한 정책을 비판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연방정부가 원하는 것은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였다. 결국 대립하다가, 2년 뒤 정부는 싱가포르를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이 때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중국계들이 꽤 많이 싱가포르로 넘어갔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원하던 대로 되었다.
1964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일 당시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폭동이 있었고, 이것은 말레이시아의 인종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좀 달래봤지만...결국 1969년 5.13 사건[6]이 발생했고, 그 결과 당시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사퇴하고 부총리였던 압둘 라작이 새 총리가 된다.
그렇게 집권한 압둘 라작 정부는 1970년 지금의 부미푸트라 정책을 내놓았다.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얻은 만큼 말레이계를 중산층으로 끌여올려서 말레이시아 사회를 안정시킴으로써 장기집권을 도모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교와 인도계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말레이인들의 빈곤을 방치했다가는 19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나 이다 아민 시절의 우간다처럼 화교와 인교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될까 봐 걱정되었고, 또한 부미푸트라 정책은 국영기업 우선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 이권이라도 챙길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3. 특징
3.1. 교육
부미푸트라 정책은 교육분야에 적용되었다. 당시 말레이인들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를 다녔지만, 중국인들은 중국계 사립학교에 다녔고, 교육열도 높았던지라 사교육도 일찍부터 활성화되어서 중국계 학생들의 평균성적은 말레이계를 늘 앞섰다. 이러다보니 말레이인들은 좋은기업에 취작하기 쉽지 않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중국계 사립학교를 공립화해서 공립학교로 전환하는 것. 1970년 전후로 많은 중화 사립학교들이 공립학교로 전환했는데, 코타키나발루의 코타키나발루 고등학교가 대표적인 예.당연히 교육열이 높은 중국인과 인도인들의 반발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레이인들은 대학 포함 각종 교육기관을 싼 학비에 쉽게 다녔지만, 화교와 인도인은 학비폭탄을 매기고 대학 문턱도 높였다. 백인과 흑인이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는 달리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계와 중국계가 같은 학교를 다니는 건 가능했지만, 사실상 타 민족이 입학 조건(Entry Requirement)을 충족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해놓은 것.
"말레이인이 아니면 나가라"라는 식은 아니지만, 부미푸트라 정책이 적용되면서 생긴 대표적인 예. 말레이시아개방대학교의 입학 조건인데 "부미푸트라", 즉 "말레이인"을 직접적으로 명시했다. 뭐 외국인이란 말은 없다지만 실제로 사이트를 보니 된단다.[7]
상술했듯 대학에 입학할 때 말레이인은 학비가 매우 싸다. 그것도 나라에서 장학금을 주는데 그게 얼마나 큰 지, 사실상 말레이인은 대학도 공짜로 들어간다.
1999년 이래 정부에서 "대학입시과정"을 내놓았는데, 한국으로 따지면 고3에 해당되는 위치, 말레이시아는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는데, 그 후 대입 전 1년간의 기간이 있다. 중6, A-Level, 파운데이션 등 다양하게 부르기는 하지만 엄밀히는 좀 다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면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데, 문제는 말레이인에게 90%나 열려있으면서 말레이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겨우 10% 딱 잘라 얘기하자면 화교나 인도인들은 걍 사립대로 가라는 얘기이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공립대학교는 학생의 60% 이상이 말레이인이다.
또 이런 정책 때문인지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들은 의학계열 등 진짜 본인이 죽자사자 하지 않으면 쉽게 학위를 못받는 전문직 대학과목에 많이 들어가는 반면, 말레이계는 비교적 쉽게 학위취득이 가능한 신학계열 등의 과목에 몰리는 경향이 있는지라 총리가 직접 이 문제를 거론한 적도 있다. 그만큼 중국계들의 불만이 쌓여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이들은 부미푸트라 정책이 시행된지 어언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만큼 우대해줬음 됐지 도대체 언제까지 말레이계 우대정책을 계속할 거냐고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3.2. 노동
직업에서 채용 및 해고 문제를 말한다. 사실 업종별로 갈리는 경향은 있다. 말레이인이 공무원쪽에 많다면, 화교는 상공업, 인도인은 교통운수업 이런 식.대신 외국인을 향한 어머어마한 차별이 존재한다. 중국인과 인도인들도 처음에는 일하러 온 자들이다 보니, 외국인이 와서 일을 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꺼리게 되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외국인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별의별 제약을 두었는데, 회사가 외국인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내국인을 고용할 여건이 안 된다" 등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그리고 정리해고 시에는 무조건 외국인부터 해고한다. 사람들 말로는 금융분야 등에서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지만, 의외로 취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 알바하는 것조차도 외국인은 빠꾸먹기 일수.
3.3. 정치
당연히 이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만 봐도 정치는 말레이계나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총리들이나 부총리들 중 말레이계가 아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이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화교와 인도계의 안전은 담보하여 민족간의 갈등을 일부 해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전만 보호했을 뿐 차별은 상당했다. 말레이계는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지만, 화교가 비판하면 그날로 코렁탕 신세가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1990년대 냉전이 풀리고 시대에 맞춰 중국계들의 정계 진입이 급속도로 빨라졌지만, 여전히 말레이계가 적은 풀라우피낭, 사라왁, 사바 등지를 제외하고는 철저한 약세. 사실 마하티르가 이 정책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으니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훗날 마하티르가 뒤에서는 말레이인을 비난하라고 지시한 것이 밝혀지면서, 빼도 박도 못 하는 위선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4. 비판
한때 집권정당의 2인자였으나 숙청당하고 이후 야당 지도자가 된 안와르 이브라힘이 한때 이 정책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 정책 때문에 최종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말레이시아"라고.반대자들은 부미푸트라 정책을 21세기라는 국제화 시대에는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인종차별적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5. 여담
- 상당한 논란이 있음에도 이 정책이 유지되는 것은 말레이시아 주류 민족인 말레이계들의 화교 및 인도계에 대한 경계감이 아직 상당하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문화도 관습도 종교도 말레이인과 다른 이들이 말레이시아 경제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말레이계한테는 대학 쉽게 가고 집도 싸게 살 수 있고, 직장에서의 승진도 쉽게 할 수 있는 등 이득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에 대해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역설적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오랜 기간 인도네시아 같은 반화교 폭동도 없고, 여전히 잘나가는 경제를 생각해보면 말레이인 특혜정책을 무조건 나쁜 정책으로 볼 순 없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말레이인의 권위가 아직도 상대적으로 약하기도 하고, 중국계의 경제력이 무시무시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 중국계와 인도계가 정재계를 장악한 모습을 보면, 말레이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정책이 필요악이기도 하다.
- 외국인 입장에선 말레이계가 이런 정책을 시행하니 이로 인해 2등 국민으로 대우받던 화교들은 다소 개방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알고보면 오히려 화교들의 배타성이 더하다고.
통수오죽하면 화교가 다수인 풀라우피낭 주에서는 외국인들이 현지요리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유가 현지 고유의 풍토를 망친다고 했다나. 이에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국빈 요리사 레주아완 이스마일도 "그냥 가르쳐주면 될 것을 갖고 별 이상한 법을 만들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라고 비판했을 정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나라의 요리를 직접 해보고 요리사들을 직접 만나본 그는 외국인들이 말레이시아 음식을 요리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이러한 막장정책이 시행되니 부끄러워하는 건 당연지사.
6. 같이 보기
[1] 물론 이것도 사실은 원주민인 말레이인을 노예로 부려먹어서 감당하려고 했으나, 영국에서 이미 노예제가 폐지된 뒤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중국인 노동자(라고 쓰고 노예라고 읽는다)를 쓰게 되었다.[2]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중국, 남양군도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들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본국에 돌아가기 보다 현지에 남아 몇세대 동안 산 경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3] 한국 역시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애가 10명인 집이 있을 정도로 출산율이 높았다.[4] 사실 말레이시아 당국에서도 1960년대에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했는데, 당국에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산아제한 정책에 열의적이지 않았고, 마하타르가 총리직에 재직하던 1980년대에 출산율이 아직 상당한 편이었음에도 인구는 국력이라며 산아제한 정책을 백지화하고, 출산장려정책을 펼쳤다.(당시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21세기 와서는 선견지명이라는 평이다.) 물론 출산율의 감소세는 멈춘 것이 아니었지만, 인구고령화를 늦추는 데에는 효과적이라서 말레이시아의 출산율은 2010년대 전반기까지는 인구대체수준을 늘 넘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지면서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나 한국, 중국, 일본, 대만처럼 고령화되어가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5] 민족적 말레이인이 아닌 말레이계통 민족 포함[6] 1969년 5월 10일 선거에서 이긴 중국계가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 축하 행진을 하다가 5월 13일 말레이계 지역인 Kampong Baru를 지나갔고, 거기서 말레이계와 충돌이 일어났다. 혹자에 의하면 한 중국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서 KL에서 말레이계를 쓸어내는 어그로 시늉을 했다는 소리도 있다. 하여튼 여기에 빡친 말레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차와 상점을 불태우고 사망자도 났다. 공식적으론 2백 명, 언론에선 2천 명까지 사망자를 추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폭동은 오로지 슬랑오르 주에 국한됐고, 중국인이 많이 사는 페낭이나 이포 같은 지역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해서 시골 같은 지역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다고.[7] 다만 취업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