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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보수주의/분파 | }}}}}}}}} |
도쿄에서 혐한시위하는 일본인들 |
대표적인 우요쿠단타이인 가선 우익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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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右翼団体일본의 극우, 일본 민족주의(특히 국수주의) 단체들을 지칭하는 표현.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 한자음 그대로 우익단체라고도 하지만 이는 일본 외의 우익 성향 정치단체들과 혼동을 빚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의 우익단체라고 구별해서 지칭하기도 한다.
2. 번역
右翼団体는 직역하면 우익단체이지만 단순히 건전한 우익 보수주의라기보다는 국수주의에 가까운 과격한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주류이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아예 우요쿠단타이(Uyoku dantai)라고 고유명사 취급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실제로 일본의 보수 범우파 성향 단체라고 해서 다 우요쿠단타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게이단렌이나 덴츠 같이 일본 기준으로 극우단체가 아님에도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영어권 언론과 달리 한국에서 "우익단체"라고 검색하면 십중팔구 일본의 극우단체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익이나 극우 성향의 단체가 일본에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이나 타국의 보수우익성향 단체도 '우익단체'라고 지칭하면서 혼돈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중앙시사매거진 등 일부 언론에서는 '우요쿠단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3. 성향
차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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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전반, 즉 한민족이나 대한민국/북한 국적자 등에 대한 차별은 anti-Korean sentiment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혐한'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인]에 대한 혐오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북한[인]에 대한 혐오는 anti-Korean sentiment에 속하지만 보통 '혐한'과는 별개로 본다. 또한 ethnic Korean (한민족) 뿐 아니라 비한민족 계열 대한민국/북한 국적자도 넓은 의미의 Korean에 포함된다. | }}}}}}}}} |
일본의 우익단체들은 혐한, 혐중, 혐러 성향을 보이며 단체 성향에 따라 친미적인 경우도 있고 반미 내지 혐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확실한건 이들은 일본의 우수성과 자긍심에 대한 사고방식이 강하며, 이에 따라 과거 일본 제국이 자행했던 전쟁범죄에 대해 역사수정주의나 부정주의적 견해를 보인다.
3.1. 일본 우익단체들의 파벌구조
일본의 우익 운동 자체는 180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상화가 진행되었지만, 현존하는 우익단체들의 파벌들은 전후부터 시작되었다.일본의 주요 우익 파벌들은 크게 5가지로, 주로 정치권에 기반을 두며 사상적으로는 전쟁전 사상가들에 기반을 두는 본류-전통우익, 전후 야쿠자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행동파-임협계우익, 60년대 반공운동 속에서 성장한 반공우익, 반공에 집중하는 우익단체들에 반발하며 등장한 민족파-신우익, 종교단체들에 기반을 둔 종교우익, 그리고 오늘날 가장 어그로를 많이 끌고 있는 넷 우익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과는 별개로 실제 우익단체들의 내부인사들은 서로 밀접하게 각 파벌을 오가면서 활동하기도 하며,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협력하곤 한다. 예컨데 주로 정치권에 기반을 둔 본류-전통우익단체들은 마찬가지로 사회 고위층에 위치한 종교 우익단체들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 단체들은 주로 폭력단에 기반을 둔 임협계 우익들을 자신들의 손발로 활용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특수한 케이스가 넷 우익 단체들인데, 최근에는 기존 우익단체들의 과격행동파 인사들이 유입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넷 우익 단체들은 인터넷을 통해 혐한사상에 기반해 자연발생한 단체들이고, 이들 조직의 활동은 본류-전통우익들의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이미지를 망친다며 불쾌하게 여겨진다고 알려져 있다.
3.1.1. 전체적인 현황
오늘날 흔히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접하는 과격한 우익활동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넷 우익 단체들에 집중되어있다. 이들 넷 우익 단체들은 일본 내 대부분의 우익단체들도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집단들인데, 특히 재특회같은 또라이들의 행동들은 매우 유치한데다가 불필요한 어그로를 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다만 유독 재특회같은 넷 우익 단체들이 어그로를 끌어서 그렇지 우익단체들도 내부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혐한사상을 거진 공유하는 편이다. 애초에 재특회의 혐한 활동은 이런 기존 우익단체들이 만들어낸 혐한 사상과 주장에 기반하고있으며[1], 이들의 활동자금은 기존에 탄탄한 기반을 둔 여러 우익단체들로부터 일부 흘러나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오늘날 재특회를 비롯한 넷 우익 단체들의 수뇌부가 과거 우익단체들 안에서도 너무 과격해서 써먹기 힘들었던 인사들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기존 우익단체들의 손발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지리멸렬하게 분산되어 활동하고있던 넷 우익 단체들이 어느 정도 느슨한 연합체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관서권의 넷 우익 단체들을 중심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외에도 최근 넷 우익 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너무 과격한 행동을 한다 싶은 구성원을 솎아내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2], 이러한 작업들도 사실은 본격적으로 기존 우익단체들이 넷 우익 단체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3]
3.1.2. 본류-전통 우익 (보수방류)
본류-전통 우익은 일본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사상적 기반을 둔 우익집단이다.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사상적 기반을 잃은 일본 우익단체들은 이후 미 점령군과 GHQ에 의해 대부분이 강제해산되었고, 동시에 공직에 참여했던 중심 인사들이 추방되거나 전범으로 잡혀가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그러나 동북아시아 정세변화로 인해 미점령군은 점차 민주화보다는 반공정책을 우선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에 전범으로 지정되었던 우익 지도자들과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우익인사들을 다시 기용하면서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 발효를 전후로 신규단체를 형성하거나 과거의 단체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이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각종 정치테러와 시위에 집중하였다. 이들 조직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이 있는데,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암살한 사건으로 유명한 도쿄 찌르기 사건의 주범인 야마구치 오토야가 바로 이 대일본애국당 소속이었다.
이들 본류우익은 우익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창립인사 및 지원자들에 2차 대전 이전부터 계보가 이어져 내려오는 기성정치권의 정치권 인사들이 많을뿐만 아니라, 미 점령군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난 후 전후 복구사업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일본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엘리트 집단들에 이들이 많이 침투되어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있고, 투표와 정권 획득 등 실질적으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보니, 가두에서 시위하는 찌질이들에게 관심을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하시모토 토오루의 정치적 약진 등에서 보이듯이 이러한 "구태의연한 보수 정치인"의 틈새시장을 공략한 새로운 우익 경향의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단단한 세력이 점차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존재한다.
3.1.3. 가선 우익
극우 중에는 가선 우익이 유명하다. 대체로 최상단의 두 번째 사진처럼 트럭이나 버스 개조한 것[4]들을 타고 다니면서 방송하거나 군가를 틀고 다니는 우익단체 야쿠자들의 지원도 받는 편이고[5] 일본은 투표율이 낮은 편이라 가두 우익 등의 동원력 있는 우익들이 강세를 누린다.3.1.4. 임협계 우익
임협계 우익은 일본 내 우익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우익단체들이자, 동시에 규모가 가장 컸던 단체들이다. 야쿠자와 같은 폭력 조직들과 연계되어 있었기에 임협계 우익이라 불린 이들 단체들은 경술국치 당시의 우치다 료헤의 현양사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긴 역사를 자랑하는 어용 정치깡패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사실 일본 외에도 장제스의 남의사 등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조직들이기도 하다.임협계 우익들은 대부분 1960~70년대 노동운동의 탄압과정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당시 일본정부와 정치권은 노동 및 학생운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고, 이들 조직들은 일본 정부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대사관, 언론단체, 일본 공산당, 일본교사노조 등의 건물이나 시위현장을 습격하여 방해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대부분의 임협계 우익단체들은 우익단체의 탈을 쓴 폭력단이거나, 폭력단의 자금을 받아 활동하는 단체들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일본 내 야쿠자 보스들 중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우익단체들에 비하면 혐한 활동의 비중이 적은 편에 속한다.[6] 물론 이들도 혐한 사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야쿠자계 극우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들도 재일인데 정치가에 기생하려고 동족인 재일교포들 괴롭히는 웃기는 놈들이라서라고 할 정도다.
임협계 우익은 극우단체들 중에서도 종교계 우익단체들과 함께 외부적으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장하는 데에 집중하는 단체들이기도 한데, 오늘날 많은 신우익단체들이 대놓고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을 괴롭히는 식의 혐오활동을 하는데에 반해 보다 정제된 가두활동에 집중하는 편이다.[7] 실제로 임협계 우익의 인사들은 재특회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나, 길가는 할머니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얘네들이 무슨 우익이냐, 친피라(양아치) 수준도 안 된다"라며 비교 자체를 불쾌해하기도 한다. 다만 폭력단이 관계된만큼 이들의 경우 전성기인 1960~70년대의 경우 노동운동이나 시위현장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차를 몰고 돌진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활동을 마구 벌이기도 했다.[8]
3.1.5. 신우익(민족파)
민족파-신우익 파벌은 반공이라는 틀 속에서 기존에 정치권을 장악한채 현상유지에만 몰두하는 전통우익을 비판하면서 형성된 집단이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좌익학생운동에 반발하여, 학원 정상화를 주장하면서 결성되었다.1960년대의 안보 투쟁[9] 이후, 일본은 세계에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가 된다. 일본의 사회 운동은 좌우 양쪽에서 거세게 일어났는데, 신좌파가 기존 일본공산당을 위시한 경직된 구조를 혁파하기 위해 급진성을 띄고 일어났다면, 이들은 "반공, 친미를 넘어서 일본의 본연의 모습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기존 우파에 대한 불만족에서 터져나온 집단으로, 스스로를 우익이라기 보다는 "민족파" 내지는 "민족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 때문에 신우익은 민족주의와 반체제성을 동시에 띄고 있었는데, 반공주의에 매몰되지 않을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들은 민족주의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특히 이들은 포츠담 체제 타도, 자주헌법 제정, 자주 방위체제 확립 등을 주장하며 반체제, 국가혁신을 주장하였고, 천황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과거의 우익 지도자 일부와 미시마 유키오 등을 중심인물로 삼아 활동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사상적 기반을 준 몇몇 인물들과 별개로 실상 대부분의 구성원 다수는 이러한 전쟁전의 세대들과는 거리가 먼 전후 세대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패전 후 서구의 자유주의를 흡수하고 "품위있는 우익"을 강조하기 때문에, 재특회의 양아치같은 발언에는 강하게 반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이들이 얌전한 것만은 아닌데,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적 혁명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일본 공안당국으로부터 신좌파 과격집단과 비슷한, 아니 거의 동급의 과격단체로 찍혀서 추적을 당했다. 실제로 이 당시 신우익 집단들 중에는 경단련[10][11]을 습격하여 인질극을 벌인 사건도 있었다. 이 쯤 되면 사실상 국가사회주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들은 주로 1960년대까지 좌익학생운동과 대립하며 그 규모를 키웠지만, 좌익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대립항을 잃고 마찬가지로 급속히 쇠퇴하였고[12], 결국 이후에는 많은 수가 전통 우익단체에 잠시 몸을 담다가 넷 우익 단체들의 활동에도 일부 참여하는 등 여러 우익단체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오늘날에는 주로 언론사 등에 많이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신우익 단체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단체는 일수회(一水会)인데, 이 단체의 고문이자 유명 논객인 스즈키 쿠니오는 아예 재특회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우익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와(和)의 민족인데, 레이시즘과 헤이트 스피치는 일본의 기본정신에 어긋난다"라는것이 주요 이유이다.
3.1.6. 종교우익
종교우익은 종교집단들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들을 말한다. 신사본청을 중심으로하는 신도 종교세력과 함께[13] 불교단체 및 수양종교, 생장의 집과 같은 사이비 종교 단체들의 느슨한 연합형태로 구성되어 있다.종교우익은 종교법인이라는 방패 뒤에서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확보하여 1970년대 원호법제화 운동으로부터 세력을 크게 확대시켜나갔다. 이들의 조직력과 자금력은 그 자체로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보니 많은 정치인들이 이들의 행보에 동조하였고, 종교우익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건국기념일의 공식행사화나 원호법제화, 스모 등의 국기화와 같은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14]
특히 이들은 학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교과서 검정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 후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종교우익은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 조직은 종교우익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한 신사본청의 메이지 신궁과 생장의 집 인사들이 중심이다.
한국, 서양권과 정반대로 일본의 종교 우익들은 반기독교 성향이 강하다.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소수자로써 대개 좌익정당(입헌민주당, 일본공산당 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3.1.7. 넷우익(행동하는 보수) 계열
근래에는 넷 우익들이 거리로 갑툭튀하는 편인데, 거리에서[15] 극우 시위나 행동을 하는 것만 빼면 위에서 설명한 가두 우익과는 상당히 다르다. 가두 우익이나 정통 우익들은 보통 재계나 정계의 입장을 내세우며 반공주의 등에 입각하는 편이지만 넷 우익들은 인종차별 성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16] 사실 넷 우익은 인종차별을 제외하면 이론적인 기반이 거의 없고 죄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으거나 몇 안 되는 칼럼니스트들을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정도이다. 일본의 국력이 많이 약해졌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일본의 장기불황과 한국과 중국의 부흥으로 상실감에 빠지게 된 중노년층들이나 청년층들이 극우주의 또는 배타적인 국뽕,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 이런 넷 우익 출신들은 꽤 인기가 있다. 물론 사회적 주류는 아니다.[17] 특히 사회 진출 시기에 불황의 직격타를 맞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대표적인 넷우익 계열 우요쿠단타이 중에는 소위 재특회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 있다. 이들도 우요쿠단타이라고 분류되지만 전통적 보수주의보다는 혐한 그 자체가 주된 목적인 이들이라 우익 단체들에게도 쓰레기 찌질이집단 취급 당한다.
재특회 외에도 팀 간사이와 주권회복을 목표로 하는 모임, 일본국민당, 일본을 지키는 시민 모임, 배해사(排害社) 등도 넷 우익으로 분류된다.
3.1.8. 그 외
단순한 극우를 넘어 국제적으로 매우 위험한 이들도 있다. 호국지사의 모임(護国志士の会)이란 무리인데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고노 담화 재검증은 물론 나치 독일도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나치를 찬양하는 행위는 지금 범세계적 국제기구가 된 UN 회원국 전부를 대적하는 망동이다.[18]4. 한국과의 관계
우요쿠단타이 성향상 혐한 성향이 짙으나, 뉴라이트 계열 보수 인사들의 경우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반일 종족주의 저자인 이우연이 일본 극우단체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우연은 일본 국가기본문제연구소(国家基本問題研究所)가 지정한 제8회 일본연구상 특별상의 공동 수상자이다. 문제는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일본회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
윤석열 정부하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석동현이 과거 문재인정부의 대일 정책,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대법원의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판결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며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존중을 요구하는 한·일 법률가 공동성명"를 냈는데 문제는 여기에 새역모를 포함한 일본의 우익단체 계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고 한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야당 위원들은 성명서를 내어 석 사무처장의 파면을 요구했다.#
5. 같이 보기
[1] 재특회는 인터넷에서 형성된 극단적인 성향의 세력들이 집단화된 단체로, 다른 우익단체들과 비교해봤을 때 구체화된 단체의 철학이나 추구하는 이념을 찾아보기 힘들고, 단지 혐한, 극우와 같은 정치적 레토릭만을 추종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우익단체들은 이들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이들의 활동을 묵인한 채 일본의 우경화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써먹고 있다. 실제로 최근들어 아베 내각은 헤이트스피치와 같은 극단적 차별행위에 대해 제약을 거는 등 자신들이 원하는 선에서만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향을 보인다.[2] 재특회의 창립자인 사쿠라이 마코토가 의장자리에서 물러나고 개인활동을 하게 된 것도 넷 우익 단체 내부에서의 솎아내기라는 설이 있다. 본인은 재특회를 위해서 물러난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3] 넷 우익 단체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자연발생했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일거리도 없는 빈곤층이 많다보니 외부활동을 위한 자금에 매우 쪼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들 조직의 활동에 기존 우익단체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자신들 단체의 인사들을 파견하여 조종하고 있는 정황이 최근에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츠라다 사토시이다.[4] 데코토라로 개조해서 만들기도 한다.[5] 가두 우익 중에는 야쿠자가 있다.[6] 애초에 일본 내 혐한 여론과 극우사상의 결합은 주로 신 우익이 대두되기 시작한 1990~2000년대부터 크게 성장하였고, 이전까지 일본 내 극우사상은 반공과 노동운동 탄압 등이 중심이었다.[7] 흔히 차량을 동원한 가두연설 등이 이들의 주요 홍보 전략 중 하나이다.[8] 임협계 우익의 폭력 활동은 1990년대 이후 폭력단대책법 등 폭력단 자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면서 급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일본 정치권에서는 공공연하게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도구로 써먹었지만, 폭력단들이 위험할 정도로 사고를 많이 쳐대자 결국 손절하고 본격적으로 진압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고 그 영역을 재특회 등의 신우익이 차지하게 된다. 실제로 당시 임협계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폭력단의 지원이 끊기자 신우익단체들로 갈아탄 이들도 있다.[9]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관계를 규정한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을 둘러싼 사회적 충돌. 극좌부터 극우까지 일본 내의 모든 정치세력,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양쪽으로 쪼개져서 격돌했다.[10] 경제단체연합회. 일본 대기업들의 협력조직으로 일본판 전경련. 사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일본 경단련을 보고 본떠서 만든 게 현재 한국의 전경련이다.[11] 대기업들이 모금한 막대한 정치자금이 경단련을 통해서 자민당에 전달되고, 자민당은 반대급부로 철저하게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법안으로 만들고, 이런 법안을 고시 출신의 행정관료들이 안정적으로 집행하는 게 자민당 38년 일당통치, 이른바 55년 체제를 가능케 한 철의 삼각동맹(자민당-경단련-관료그룹)이었다. 즉 경단련은 일본 자민당의 핵심인 전통우익 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치기반이다.[12] 추가로 공안의 집중마크를 당한 것도 크다.[13] 다만 신사본청의 경우 실질적으로는 단체 자체가 힘을 가진게 아닌 메이지신궁이나 이세신궁같은 하위의 신사들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에 가깝다. 신사본청은 어디까지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 신사들이 서로 교류하기위한 연락단체의 성격이 강하다.[14] 이들은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으로 바꾸는 로비도 시도한 바 있다. 다만 이건 주변국가들의 반발이 워낙 심할 수 밖에 없는 문제로 정치인들도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이에 동조하기를 꺼렸고, 결국 실패했지만, 종교우익은 이 실패를 바탕으로 수상이나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야스쿠니에 참배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실제로 일본 정치권내에 있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의 사모임을 만든 것도 바로 종교우익 단체들이다.[15] 가선 우익은 차량을 많이 동원하지만 이들은 돈이 없어 대부분 도보로 움직인다.[16] 가두 우익이나 정통 우익들도 한국이나 중국 등을 싫어하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대놓고 그러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 손잡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역사인식 문제 때문에 번번이 기회를 놓치지만, 한국과 손잡지 않으면 절대로 중국을 상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한일 협력을 고수한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전통 우익들은 역사 문제만 제외하면 한국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고수해서 넷 우익들에게 재일이라고 욕먹기 일쑤이다.[17] 넷 우익 문서로 이동하면 알겠지만 현실의 넷 우익들은 그들 특유의 행동방식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우익 세력으로부터도 기피되는 대상이다.[18] 실제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2차 대전 관련 조항 중 하나는 추축국 출신의 국가가 조금이라도 다시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짐이 보이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적국조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