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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추존 황제 장조 의황제 | 莊祖 懿皇帝 | }}}}}}}}} | ||
서울 은평구 구파발 사신당 봉안 영정 | |||
출생 | 1735년 2월 13일 (음력 영조 11년 1월 21일) | ||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책봉 | 1736년 4월 25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 ||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사망 | 1762년 7월 12일 (향년 27세) (음력 영조 38년 윤5월 21일) | ||
한성부 창경궁 휘령전[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현륭원(顯隆園) → 융릉(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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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736년 4월 2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12년 3월 15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 |||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 |||
1749년 3월 15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영조 25년 1월 27일 ~ 영조 38년 윤5월 1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훤(愃)[2] | ||
부모 | 부왕 영조 모후 정성왕후, 생모 소유영빈 | ||
형제자매 | 2남 7녀 중 차남 | ||
배우자 |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헌경의황후) | ||
후궁 | 숙빈 임씨, 경빈 박씨, 수칙 이씨 | ||
자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윤관(允寬) | ||
호 | 의재(毅齋) | ||
전호 | 경모궁(景慕宮) → 경모전(景慕殿) | ||
묘호 | 장종(莊宗) → 장조(莊祖)[3] | ||
존호 |
| ||
시호 | 조선: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헌세자(莊獻世子) →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대한제국: 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 (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 }}}}}}}}} |
친필 글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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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세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영조의 차남으로 모친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이다. 정실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부친 영조의 아동 학대와 함께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정신질환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주변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등 수많은 비행을 저지르다 이를 보다 못한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 후에 사망했는데 이를 임오화변이라고 한다.2. 이름과 시호
휘는 '훤(愃)'으로, '너그럽다'는 뜻이다.[5] '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愃'에 '선'이란 음도 있기 때문이다.[6] 그런데 고종 때 지은 《열성어휘(列聖御諱)》에는 독음이 '훤'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煊(마를 훤)'을 써 두었다. 자(字)가 너그럽다는 뜻인 '윤관(允寬)'인데 이름과 자는 뜻이 연관되게 짓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이름도 '잊는다'는 뜻인 '선'보단 '너그럽다'는 뜻인 '훤'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7]원래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2글자였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장헌(莊獻)'을 존호로 올려 '사도장헌세자'가 되었고 정조 7년(1783)에는 존호가 추가되어 '사도수덕돈경장헌세자'가 되었으며 정조 8년(1784) '홍인경지(弘仁景祉)', 다시 정조 18년(1794)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를 올렸고 한참 뒤인 철종[8] 5년(1854)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를 더함으로써 최종적인 정식 시호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로 길어졌다.
간혹 "장헌세자가 죽어서 '사도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말이 돌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죽은 뒤에 붙은 시호인 데다 '사도(思悼)'는 영조, '장헌(莊獻)'은 정조가 붙인 시호라 오히려 장헌이 나중에 붙었다. 어차피 장헌세자가 되고 나서도 사도도 여전히 시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두 칭호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세자로 있는 동안 공식 칭호는 '세자' 단 두 글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자는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냥 세자라고만 불러도 헷갈릴 일이 없다.[9]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한자의 뜻이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라 영조가 아들을 죽음을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의미로 여기는 의견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시호에 쓰인 두글자를 시법상에 따르면 사(思)는 이전의 잘못을 후회했다는 뜻이고 도(悼)는 중년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일찍 죽은 세자'라는 뜻으로 사실상 고인드립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싫어했으며,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조정관료들 역시 '사도라는 시호가 좋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 정조의 의견을 존중했는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가한 이후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시호를 두글자로 호칭할 때는 장헌세자로만 호칭하였다.
영어권에서는 Prince Sado라고 한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사도세자/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추숭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10] 이후 순조, 헌종, 철종 대까지 사도세자를 추숭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지만,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하던 벽파가 숙청된 다음에도 사도세자 추숭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순조 말엽에는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면 "철 지난 얘기를 왜 꺼내냐"고 면박을 듣는 수준이었다.훗날 왕실 족보상 현손이었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1899년 10월경[11] 장종(莊宗)으로 추존하였다가[12] 1899년 12월 태조 및 4대조 추존에 포함돼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로 재추존하면서 정조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진다. 이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費願)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1명의 자손이었던 서상조(徐相祖)가 고종을 모시게 된 1899년 8월에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모두 장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조의 핏줄이다. 고종은 인조에서 갈라져나온 줄기로 전 왕인 철종과는 무려 핏줄로 17촌(거의 남남)이다. 정리하자면 철종 - 전계대원군 - 은언군 - 장조 - 영조 - 숙종 - 현종 - 효종 - 인조(공통 조상) - 인평대군 - 복녕군 - 의원군 - 안흥군 - 진사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13] - 흥선대원군 - 고종이다.
철종은 장조의 서증손자이며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은 장조의 친아들이었던 은신군[14]의 양자다. 고종은 즉위하기 전에는 법적(족보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이 아니었지만 즉위할 때 익종(효명세자)의 양자가 되면서 족보상으로 정조의 양증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양현손자가 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왕에 이어 황제로 추존된 것은 그가 고종의 법적 고조부였기 때문이다.[15][16] 때문에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은 촌수로 따지면 상당히 멀지만 법적으로는 장조의 후손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세자여서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비슷하게 단종을 영험한 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5. 초상화(어진)
상상어진[17] | 우승우 화백의 상상 어진 | 사도세자상(思悼世子像) / 19세기 / 작자미상[18] |
6. 가계
6.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장조 (莊祖) | <colbgcolor=#fff3e4,#331c00> 영조 (英祖) | <colbgcolor=#ffffe4,#323300> 숙종 (肅宗) | |
현종 (顯宗) | |||
명성왕후 (明聖王后) | |||
화경숙빈 최씨 (和敬淑嬪 崔氏) | |||
증 영의정 최효원 (贈 領議政 崔孝元) | |||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 (贈 貞敬夫人 南陽 洪氏) | |||
소유영빈 이씨 (昭裕暎嬪 李氏) | |||
증 좌찬성 이유번 (贈 左贊成 李楡蕃) | |||
이영임 (李英任) | |||
미상 | |||
증 정경부인 한양 김씨 (贈 貞敬夫人 漢陽 金氏) | |||
김우종 (金佑宗) | |||
전주 이씨 (全州 李氏) |
6.2. 배우자/자녀
- 왕비: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19]
- 장남: 의소세손 이정(懿昭世子 李琔, 1750 ~ 1752) - 요절
- 차남: 정조선황제 이산(正祖宣皇帝 李祘, 1752 ~ 1800)
- 장녀: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 차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 후궁: 숙빈 임씨(肅嬪 林氏, ? ~ 1773)
- 후궁: 경빈 박씨(景嬪 朴氏, ? ~ 1761)
- 후궁: 수칙 이씨(守則 李氏) - 정조 때 30년 수절 사실이 알려져 '정렬(貞烈)'의 칭호를 받았다.
- 후궁: 가선(假仙) - 사도세자가 평안도에 갔다가 데려온 여자로, 본래 여승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후 사도세자를 모시던 내시 박필수(朴弼秀) 및 기녀 5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흥미롭게도 효종 이래 아들이 귀한 조선왕실에서 무려 아들을 5명이나 보았지만 일찍 죽은 의소세손을 제외하더라도 각종 역모사건 등에 얽혀서 실질적으로 후손을 남긴 자식은 정조와 은언군뿐이며 그나마도 정조 계열은 순조-효명세자-헌종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다가 헌종 대에서 대가 끊기고 은언군 계열도 상계군은 전계대원군만 제외하곤 아들 없이 죽었으며 전계대원군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아들 없이 죽어서 경은군 빼고는 직계 자손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경은군의 손자들이 만약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면 현재 장조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끊긴 것이 된다.
7. 대중매체
영화와 드라마 매체 속 사도세자아버지 영조에 의해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충격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보니 사극에 자주 등장한다. 아버지 및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비슷한 생애와 결말을 보여준 왕자들인 호동왕자나 소현세자보다도 인지도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노론 음모론과 이덕일 사관의 영향으로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모함당해 죽었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나아가 "노론의 음모로 죽은 실패한 개혁군주"의 이미지를 그리기도 한다. 이후 음모론에 여러 반론이 제기되고 또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더 알려지면서 이러한 작품들은 줄어들었다.
영·정조시대가 18세기 조선의 부흥기였다고 평가되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호감을 사고 있다 보니 대중매체에서 영조-장조-정조 3대의 치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적다는 의견이 있다. 영조의 아동 학대에 가까운 잔인한 자식교육, 사도세자의 광증과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 정조가 승정원일기나 사초까지 지우면서 부친의 심각한 행위를 숨기고 미화하기 급급했던 사실 등이 묘사되면 이들의 이미지 하락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묘사 자체가 대중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7.1. 소설
- 몇몇 역사소설에서는 어린 계모 정순왕후가 사도세자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거절당하자 사도세자를 모해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당시 정순왕후는 궁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차로는 사도세자 쪽이 더 가까웠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다.
- 사도세자가 되었다
역사학을 전공한 평범한 공시생 김진욱이 뒤주에 갇혀죽기 직전의 사도세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쓴 대체역사소설이다.
- 감자세자와 뒤주대왕
밑에서도 소개되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흔적을 지났던 덕에 이들의 영혼이 바뀐다면이란 설정의 대체역사소설이다. 요새에 감금되어 있던 프리드리히 2세와 영혼이 바뀌어 첫 대변부터 얻어맞는데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사과문을 써서 올리고 무골 기질을 뽐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거인연대도 붙여줄 정도의 환심을 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후반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는데 자신과 동류였다며 공부만 하는 샌님 밑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서로 안 맞았을 거라는 반응을 받았다.
-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아버지 영조의 혐성과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비행을 저지르는 세자로 나온다. 다만 아직 시간 배경상 극단적인 살인행각은 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김운행의 도움을 받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아버지 영조의 폭주를 역이용해 아버지를 상왕으로 밀어내고 보위에 오른다.
- 나는 사도세자의 딸이다
공시생이었던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딸이 되면서 아빠인 사도세자를 지키며 성장하는 대체역사소설이다.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
- 사도세자는 편하게 살고 싶다
사도세자가 막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인 조모와 적모 국상 기간에 산신령들이 만든 영약이 잘못 전달되어 그 약을 먹고 15일간 혼수상태에 있으면서 15년간의 현대 대한민국 체험을 하고 돌아오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꾸짖다가 실족사하면서 사도세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바꿔나간다. 이훤 문서 참조.
7.2. 노래
- 가수 도미가 1956년에 사도세자를 바탕으로 동명의 노래를 발매하기도 하였다. 아래 언급된 1956년판 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는데, 꽤 히트한 곡이라 여러 번 재녹음도 이루어졌을 정도.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소
궁성은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 밤
뒤주 안이 웬 말이요 야속한 사도세자
황금의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 때엔 가야금도 울었소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소
궁성은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 밤
뒤주 안이 웬 말이요 야속한 사도세자
황금의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 때엔 가야금도 울었소
7.3. 드라마
- 2007년 CGV 드라마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 조한준
노론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사도세자를 악의 축 노론에 맞서는 개혁가로 그렸으며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죽음으로 몰어넣는 악녀'로 묘사하였다. 정사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광증은 '노론 사관이 현실을 왜곡하여 서술한 것'이고 심지어 '사도세자에게 죽은 내관도 노론이라서 죽인 것'이라는 말이 정조의 입을 통해 나온다. 뒤주 속에 들어갈 때도 "아버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따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당당하게 뒤주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재미를 위해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하고 사도세자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2011년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 오만석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영조가 뒤주를 내온 것은 퍼포먼스였고 세자를 빼돌려 살려주려고 하지만 결국 목숨을 잃었다.
- 2015년 KBS 드라마스페셜 《붉은 달》 - 김대명
노론 음모론이 아닌 기록에 남은 사도세자의 광기를 잘 소화해내 호평받았다. 다만 임오화변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정통 사극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광기에 대한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각색한 호러 드라마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자 원한을 품은 장희빈의 귀신이 사도세자를 미치게 만드는데 이 귀신은 세손까지 해하려 했으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은 선희궁(영빈 이씨)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가며 저지한다.
- 2015년 MBC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의 시대적 배경이 영조 시대이며 세손으로 출연한 이윤(심창민 분)의 아버지 사동세자(장승조 분)가 사도세자를 모티브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 작중 최종 보스인 귀(이수혁 분)가 권력의 정점을 찍은 현조(이순재 분)와 손잡고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2024년 KBS 드라마 스페셜 《사관은 논한다》 배우: 이순원 |
7.4. 영화
- 1956년 안종화 감독의 영화 <사도세자>에서는 배우 황해남이 연기했다.
- 2014년작 영화 《역린》에서는 등장은 없으나 억울하게 죽었다고 언급된다. 줄거리에 '정순왕후 김씨가 노론들을 지휘해서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노론 음모론의 사관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2015년작 영화 《사도》 - 유아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지간의 참극을 주로 부각시킨 영화이다. 극중에서 짧은 시간대를 다루고 있다 보니 사실(事實)과 그나마 비슷하게 묘사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 2018년작 영화 《궁합》에서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메인 악역으로 나온다. 아들 이선(사도세자)을 위해 이선의 이복누나 주인공 송화옹주를 음해하며 갖은 음모를 꾸미지만 결국 실패하여 영조에게 펑펑 울면서 사죄한다. 아직 이때까지는 세자를 사랑한 영조는 세자를 꼭 안아준다. 훗날의 역사를 생각하면 관객들에게는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7.5. 만화
- 《밤을 걷는 선비》에서는 귀의 연인으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야뇌 백동수》에서는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죽은 줄 알았으나 김광택에 의해 발견되어 그와 함께 있는데,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8. 기타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어제장헌대왕지문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어제장헌대왕지문
-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무예를 익혀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할 만큼 건강했다고 기록한다. 효종이 가지고 있던 청룡언월도를 15세에 들어 놀랍다는 기록이 아들인 정조 시절에 남아 있고 대리청정 시절 무예도보통지의 기초가 된 무예신보를 편찬할 정도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실망감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잡학과 무예에 능하다는 이유였지만 신체는 강건했을지라도 정신은 병약했다.[23] 유년기부터 성인 때까지 두려운 아버지의 극심한 질책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살면서도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의 사이에서 일찍이 2남 2녀를 터울로 두었으며 아버지의 핍박과 본인의 정신병적 행각 속에서도 여러 궁녀들을 취하여 무사히 성장해 봉작된 기록이 남은 서손들만 또 3남 1녀를 두었다. 일각에서는 역설적으로 이 아들들의 탄생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보기도 하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대체할 또 다른 적법한 후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는 것인데 조선 중후기에 들면 선대의 삼대왕인 '삼종'의 혈맥을 모두 이은 후손이 정말 드물었던 관계로 영조도 생모의 출신이 한미함에도 불구하고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을 이어받았다는 논리로 즉위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도 유일한 형 효장세자가 본인이 태어나기 수 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삼종 혈맥은 더욱 귀했다. 그런데 귀했던 삼종 혈맥이 사도세자가 일찌감치 정실과 후궁들에게서 여러 아들을 낳아 대체재를 충분히 갖추게 되면서 더 이상 귀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그대로 세자의 희소성에 의한 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24]
- 비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체심비풍(體心肥豊, 뚱뚱하단 말)', '비대'하다며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몸이 무거워 다치기 쉬우니 걱정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궁에선 특히 인원왕후전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했다는데 "인원왕후께서 어린 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 저리 되었다"고도 탓하고 승정원일기의 영조 19년(1743년) 5월 3일 기록에는 "세자가 숨을 쉴 때 들리는 소리가 마치 바람소리 같더라.[25]"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 물론 이때는 그나마 걱정이라도 할 정도로 사도세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애정은 보였지만 사도세자가 좀 더 자라자 미워하게 되면서 아들의 용모에 대한 얘기도 더더욱 신랄해진다. 대신들 앞에서 "이 아이의 배 좀 보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난번 가마 탈 때 보니 가마가 좁아서 세자가 탈 수 없었다. 그 가마는 내가 동궁 시절에 타던 것이다."라고 했는데 영조가 30살 어른이 되어 탔던 가마가 12살 어린 사도세자에게 좁았다는 것이다.다만 어진 등으로 볼 때 영조는 체격이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사도세자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무술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면 단순한 비만이라기보다 살집과 근육량이 동시에 많은 장사 체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26] 또한 영조가 사도세자의 식단조절이나 약처방을 어의와 상의하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있다. 꽤 살이 쪘던 것은 맞는 걸로 보인다.
- 다만 외모 자체는 미인이었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남이었다고도 한다.영조도 젊었을 적엔 꽃미남과였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부모 양쪽에서 미모를 물려받은 셈이다. 사도세자가 14세의 나이로 처음 대리청정을 하던 날 대신들이 사도세자의 위엄 있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라는 기록도 있다.큰 체격에서 풍기는 압도감, 예비 왕의 첫 등장에 대한 립서비스도 있겠으나 바로 위의 동복누나 화협옹주도 어머니를 닮아 미색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화협옹주도 남동생과 비슷하게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중대한 이유 중 하나가 영조의 건강 때문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영조는 나이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건강했는데 사도세자가 30살을 넘길 경우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만 했지만 영조가 워낙 건강하고 팔팔하다 보니 자신이 계속 왕을 해야 했고 그 걸림돌이 사도세자였던 탓에 사도세자를 죽게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마디로 사도세자가 살아있으면 왕권이 약화되기 때문에 죽였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 중 하나가 영조에서 사도세자를 건너 뛰고 바로 정조로 넘어갈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 생전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평양에 갔을 때 당시에도 유명한 화가인 변상벽[27]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다. 이 그림은 사도세자 생전에는 받지 못했다가 그림을 그린 지 10년 후에야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받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초상화는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
- 생전의 세자시강원에서 활동하며 사도세자를 교육했던 이천보(李天輔), 이후, 민백상(閔百祥)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의 행적이 수상하다. 당대의 기록인 영조실록에서는 이들이 단순 병사, 자연사했다고만 나온다. 이천보의 졸기 그런데 후대의 고종실록에선 이들에게 시호를 추증하면서 세 사람이 임오화변에 죄책감을 가지고 신사년(1761년)에 동반자살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28][29]
- 대한제국 추존황제 중 유일하게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인물이다. 나머지 추존황제들은 모두 대한제국 수립 이전에 왕으로 재위하거나 추존되어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는데 장조는 대한제국 수립 후에야 비로소 추존이 이루어져서 추존 후에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학대당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어느 왕국의 태자가 비슷하게 부왕에게 학대당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프리드리히 2세 모두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한 나라의 왕위계승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나[30] 각자의 부왕이 너무나 가혹한 조건을 내걸면서 이들을 학대했다. 아버지가 명군인 점도 덤이다.[31]
다만 프리드리히 2세는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폭주를 말려줄 사람들이 많았던 데다 부왕이 일찍 죽어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말려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진 상태에서 부왕 영조의 학대를 그대로 감당하다가 미쳐서 비행을 저지르고 결국 죽게 되었다. 가족들 사이에서의 인망은 영조 쪽이 더 나은데 영조는 자식들을 편애했다. 그 말은 좋아하는 자식은 좋아했고 다른 가족도 그래서 어찌야 되었든 영조가 죽었다는 말이 좋아했다는 가족은 없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가족들을 나쁜 의미로 평등하게 대해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유독 독하게 다뤘을 뿐이지[32] 자기 자식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종, 시녀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33]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에 묻혀서 알기 어렵겠지만 그 앞에 2명의 자식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문에 죽었다.[34] 자식을 대하는 수준은 어떻게 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쪽이 한 수 더 악질이다.
-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궁녀 임씨(사후 숙빈 임씨)가 은언군을 임신하자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그녀를 낙태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이 때 세자가 얼마나 안면몰수로 대했는지 사도세자의 정궁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불쌍하여 출산 때까지 돌봐주었다. 혜경궁 입장에서는 남편의 첩인 임씨가 질투는 고사하고 피해자로 보일 지경이었던 모양이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1달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혜경궁까지 "너무 투기를 안 해도[35] 여자가 아니다"라며 꾸중했다. 며느리를 아껴서 사도세자 사후에도 궁에서 살게 했던 영조가 혜경궁 홍씨를 혼냈던 것은 이 때가 유일하다고 한다.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궁녀에게서 자식이나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다.[36]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숙빈 임씨는 낙태를 당할 뻔하고 이후로도 직첩을 내려주지 않아 매우 어렵게 지내고 경빈 박씨는 처음엔 총애를 받았지만 나중에 광증(狂症)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를 말리려다가 (혹은 의대증을 보이던 그에게 옷을 갈아입히려다) 사도세자에게 살해당했다. 이전에도 후궁과 나인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 후 겁탈하고 어린 은전군을 연못에 던져 죽이려 한 걸 나인들과 신하들이 간신히 구한 바가 있다. 결론을 내리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과 그 자식들을 전혀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37] 영조까지 사도세자의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싫어하니 사도세자의 정비인 혜경궁 홍씨조차 남편의 여인들을 동정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혜경궁 본인도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실명할 뻔했다고 하며 남편의 비행을 영빈 이씨에게만 상의하며 매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도세자의 이복매형 김한신도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를 맞고 앓다 죽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런식으로 선대의 대표적인 폐세자 양녕대군 뺨치는 행각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비행과 살인행각을 아는 이들은 사도의 정신병과 비행이 영조의 학대로부터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폐세자는 당연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만약 영조가 이때 사도세자보다 조금만 더 일찍 죽어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연산군 뺨치는 조선 최악의 폭군이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38]
- 동복동생인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을 땐 좋고 나쁠 땐 굉장히 나빴던 것 같으며 오히려 그만큼 사도세자가 감정적으로 온기를 기대하며 의지했기 때문에 한 번씩 섭섭하게 굴 때마다 가감없이 솔직한 화를 터트리던 상대라고 볼 수도 있다. 한 예로 한중록을 보면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두 사람이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미 출가까지 한 여동생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는 모습은 당대 왕실에선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이다. 아예 냉랭한 사이였다면 이럴 가능성은 없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고 하기엔 복잡한 형태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화완옹주에게 칼을 겨누고 "내 말대로 안하면 널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 전통문화 체험에 사도세자 뒤주체험이 있다.#
[1] 사도세자가 사망할 때 문정전(文政殿)은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2] 이 한자는 '상쾌할 선', '너그러울 훤'이라는 2가지 훈음이 있는데, 윤관(允寬)이라는 자와 연관지어볼 때 '훤'이라 불렸음이 더 타당하다.[3] 양자로 입적되어 종법과 혈통상 현손이 되는 고종이 1899년 9월에 장종(莊宗)으로 추존하고 12월에 황제로 재추존함에 따라 장조로 재격상되었다.[4]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친서).[5] 작은아버지 연령군의 이름과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연령군의 이름은 '밝을 훤(昍)'이다.[6] '선'으로 읽을 때는 글자 뜻도 '잊다'로 바뀐다.[7] 張裕昇, 2021, 〈조선 왕실의 작명 연구〉, 《東方漢文學》 86집, 동방한문학회.[8] 사도세자의 서출 증손자[9] 양녕대군 역시 폐세자되어 대군이 된 뒤 동생들처럼 '녕'자를 돌림자처럼 쓰고 사양할 양(讓)을 붙인 것으로, 세자였던 때는 단순히 세자로만 불렸다.[10] 실록의 기록을 찾으면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찾는 것보다 경모궁으로 높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경모궁으로 일반적으로 칭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사실이다.[11] 9월 1일에 묘호를 의논하여 정하고, 11월 12일(음력 10월 10일)에 추숭의 예식을 거행하였다.[12] 이미 제국을 선포한 후에 추숭했음에도 처음에는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때는 4대조 및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기 2개월 전이었으니, 황제 추존 전에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명분을 확실히 하는 차원이었다.[13] 군으로 봉작 후 이채중에서 개명[14] 숙종의 6남 연령군 이훤에게 출계하여 대를 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연령군의 봉사손이라고만 했고 양자 입적이 명확하게 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은신군도 사도세자의 아들로 인식되었다.[15]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않았지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여서 특별히 황제로 추존되었다.[16] 사실 정조는 요절한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즉위했기에 고종에게 장조는 법적 고조부가 아닌 법적 증조부(정조)의 친부이다. 실제 법적 고조부인 효장세자 역시 진종 소황제로 추존되었다.[17] 이 모습이 실제와 비교적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엔 사도세자를 체격이 '석대하다'고 표현해 체격이 건장한 무골 스타일인 것처럼 묘사해 놨지만 그건 좋은 해석이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체심비풍(몸이 아주 뚱지다)', 즉 그냥 뚱보(…)라고 표현해 놨기 때문이다.[18]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로 추정한다.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19] 헌경왕후와는 13촌 먼 숙질로 엮이는데 헌경왕후의 5대조, 즉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고조부인 홍주원이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장조는 원종의 6세손이고 헌경왕후는 정명공주의 5세손이니 13촌 지간이다.[20] 첫화에서 뒤주에 갇혀 어린 이산과 대화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회상 장면에서만 등장한다.[21] 특별출연으로 회상장면에서만 등장한다.[22] 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준다.[23] <한중록>에서도 "덕성(德性)이 거룩하나 과묵하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다"고 묘사되어 있다.[24] 삼종 혈맥은 정말 귀해서 효종(1남)-현종(1남)-숙종(3남) 식으로 이어졌고 숙종도 세 아들이 있었지만 자식을 본 아들은 하나뿐이라서 사도세자는 실질적으로 4대 독자나 다름없었다. 이러니 이인좌의 난 당시 이인좌와 그 무리는 무려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을 앉히려고 했을 정도였다. 허나 이렇게 왕가가 아슬하게 대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니라서 왕가의 대가 이렇게 이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운이 나빠 대가 완전히 끊겨 버리기 쉽다. 실제로 헌종이 죽어서 정조에서 이어지던 한쪽 대가 끊겨서 은언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고 그쪽도 끊겨서 이번엔 무려 인평대군 가계였다가 은신군 가계로 입양된 남연군 가계에서 왕을 모셔와야 했다. 족보상으로야 좀 가까운 사이였지 혈통상으로 보면 매우 먼 지간이었다.[25] 世子鼻息有聲, 意或以爲風也。[26] 사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함경도에서 말타고 활쏘던 군인 집안 출신이라서 신장이나 골격이 거대한 편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의 아들들인 정종이나 태종을 필두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종과 문종도 풍채가 상당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도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니 사도세자가 이런 체형인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27] 고양이나 닭 그림을 대단히 잘 그려서 당대엔 '변 고양이', '변 닭'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묘작도>란 그림이 유명하다.[28] 다만 사료를 확인하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사실이 아닌 걸로 보인다. 시기가 맞지 않는다.[29] 사도에서는 고종실록의 주장을 채택하여 이천보가 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30] 사도세자는 유학적 소양, 프리드리히 2세는 군재.[31] 영조는 재위 말엽에는 별다른 업적이 없지만 초중엽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타국에서 비웃을 정도의 극단적인 검약으로 재정을 마련해 이 재정으로 프로이센군을 양성했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와 2차례의 전쟁을 하여 프로이센을 키운 것도 아버지 대에 만든 기반이 한 몫을 했다.[32] 사실 사도세자가 당한 것은 가벼워 보일 정도로 독하게 다뤘는데 어느 정도냐면 사도세자는 자기가 관심 분야가 아버지가 기대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박을 심하게 당한 것이라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별 이유 없이 얻어맞았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버지로부터 어떻게든 안 맞으려고 아버지가 요구하는 군사 분야의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도 얻어맞았다.[33]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그의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도 걸핏하면 얻어맞았고 백성들도 조금만 빈둥대는 모습이 들키면 얻어맞았다. 이러다 보니 그가 죽자 가족들이 엄청나게 좋아했고 딸은 얼마 뒤 아버지가 죽은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으며 백성들과 신하들도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길 거부했을 정도였다.[34] 장남은 세례식에서 굳이 왕관을 씌우고 해야 한다고 아득바득 우겨서 억지로 왕관을 씌웠다가 그만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우려면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우겨서 갓난아기인 애 앞에서 대포를 쐈다가 애가 경기를 일으켜서 사망했다.[35] 조선은 유교 국가여서 질투가 심한 부인을 내치는게 당연시(칠거지악 중 하나)됐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하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불충한 부인'이라면서 나쁘게 보기도 했다. 중종의 서녀 효정옹주도 아버지에게 "부녀자로서의 투기가 없을 수가 없다"고 탄식에 가까운 질책을 듣기도 했다.[36] 공부 뿐 아니라 왕세자가 궁녀를 건든 것 자체가 문제다. 명목상이라 할 지라도 궁녀는 왕의 여인이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지 않는다.또한 보통 왕세자일 때는 후궁을 들이지 않는 게 관례였다.[37] 아버지의 핍박으로 오히려 후궁을 두었음을 들킬까 두려워했고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38] 사실 연산군도 세자 시절부터 제위 후 10년 때까지는 의외로 멀쩡한 편이었다. 갑자사화 후 2년 동안 역대급으로 말아먹었다. 세자 때부터 살인과 폭행을 일삼는 미치광이가 된 사도세자와 비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연산군에게 실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