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8:06:14

소련 점령하 만주

소련 통치기 만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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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점령하 만주
Маньчжурия под оккупацией СССР
苏联占领下的满洲
소련의 군정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국기
파일:1024px-Manchuria_Operation_map-zh.svg.png
1945년 8월 18일 ~ 1946년 5월 3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만주국 중국공산당
몽강연합자치정부 내몽골 인민 공화국
관동주 소련령 뤼순[1]
위치 <colbgcolor=#fff,#191919>만주
수도 선양
정치체제 군정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언어 러시아어, 중국어
문자 키릴 문자, 한자
민족 러시아인, 한족, 몽골족, 만주족, 한민족
통화 소련군 사령부 위안

1. 개요2. 역사3. 소련의 전쟁범죄

[clearfix]

1. 개요

1945년 8월에 시작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의하여, 만주국[2]관동군이 소멸[3]하고 그들이 통치 혹은 통제하던 만주소련군이 인수하여, 1945년 8월 18일부터 1946년 5월 3일까지 만주를 통치했다.

2.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소련-일본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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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의 전쟁에 직면한 소비에트 연방중일전쟁 중이었던 일본 제국은 1941년 4월에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이것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붕괴하기 전까지 계속 유효했다. 독일이 1945년 5월 9일에 무조건항복을 하고 전선에서 이탈하자 소련에는 새로운 전선을 감당할 여유가 생겼고, 태평양 전쟁에서 소모를 줄이고 싶었던 미국이 소련에게 지속적으로 참전을 요구했기에, 소련은 대일전참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미 1945년 2월, 서방미국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의 이름으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허용한 상태였다. 스탈린소련군의 역량과 일본군의 역량을 비교하여 대일전 참전으로 인한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확대와 대일전 참전으로 인한 소모를 저울질한 결과, 능력을 초과한 국력소모로 관동군이 약화된지 오래되어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대일전 개전을 작심했다.[4]

8월 9일,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조약을 깨고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곧이어 대대적으로 만주를 침공했다. 당시 일본군은 후방의 정예병력을 차출하여 전방으로 보냈는데, 관동군도 마찬가지로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력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차출된 상태였고, 만주의 본부에 주둔중이던 관동군 병력은 머릿수만 유지하고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덕분에 소련군은 고작 11일만에 약 74만 대군의 관동군과 약 20만 대군의 만주군을 무너뜨리고 만주를 장악했으며, 만주의 일본군을 무너뜨리고 일본령 조선에 진입하여 일본령 조선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이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할 당시, 소련군은 이미 함흥을 점령한 상태였고 조선내 일본군 병력은 소련군에 대한 지연전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5] 이런 상태에서 만주의 일본군 병력과 민간인들이 남쪽으로 후퇴/피난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고, 만주가 접수될 당시 만주의 생존 일본인들은 거의 모두 소련군에 생포되었다.

소련은 만주한반도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시설과 장비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설치한 시설이든 만주국이 설치한 시설이든 한국인이 어렵사리 세운 시설이든 구별없이 자국의 전후 피해복구에 필요하다면 뜯어서 가져갔다.[6] 때문에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의 공업이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만주 지역의 경제는 한동안 계속해서 퇴보하고 침체되었다. 또한 항복 혹은 제압된 일본군의 무기를 압수하여 중국의 홍군에게 주어서 홍군의 군대를 증강시켰다. 제압된 관동군만해도 74만 명이 넘어갔기 때문에 소련이 홍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제공한 무기 규모는 약 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무장시킬 수 있는 소총과 350대가 넘는 전차들 그리고 소규모 항공기들로 일반 중소규모 국가의 국군을 조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 무기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고, 훗날 6.25전쟁 때 사용되기도 했다.

중화민국국민정부의 요청으로 1946년 5월 3일에 명목상으로 중화민국에 반환처리되었으나, 소련이 국민당의 만주인수를 방해한 결과 중국공산당의 홍군이 국민군의 방해없이 만주를 장악할 수 있었다. 홍군은 이를 기반[7]으로 국민당을 중국대륙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결국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래, 만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

3. 소련의 전쟁범죄

소련군만주에 들어오자 마자 재만 일본인(히키아게샤)들을 전범으로 분류하고 일본인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일본인들은 전쟁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위를 잃고 탄압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조선인과 중국인들도 같이 탄압을 받았다. 그나마 평균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처우보다는 조금 나았다.

후술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히키아게샤의 회고에서 나온 것이다. 요코 이야기와 같은 우익의 이야기도 있지만, 한국에서 반일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도 지지하기도 하던 내용[8]이다. 갈근묘 사건은 중국에서도 긍정하고 있다. 특히 소련군의 38선 이북 한반도에서의 범죄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40년대의 기사를 검색해도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을 떠나며와 함께 읽으면 좋다.
"갈근묘 사건"=1945년 8월 14일 오전 11시경 싱안에서 갈근묘로 달아나는 무장하지 않은 부녀자와 노인들 1천 수백명에게 소련군 전차대가 1시간 반 동안 포격, 총격을 계속해 학살했다.

(쓰치야 다카유키"스톱, 편향평화기원관") 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 "두 아이를 업고, 낮에는 저격을 피하고 밤새도록 계속 걸어갔습니다. 늙은 사람들은 걸리적거리면 스스로 탁류에 몸을 던졌고, 어린 아이를 목을 졸라 죽인 부인도 적지 않았습니다"(5세와 3세 아이를 둔 주부)

* 고립되고 늑대의 먹이가 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죽는 아이가 속출했다.

*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만주인 친구도 비적이 되어 찾아왔다"

* "일본인은 소멸이란 소리를 듣고, 아기까지 중국어로 말하라고 강요당했다"

* "어느새 만주 농민에게 둘러싸였다. 잦은 약탈로 짐은 모조리 털린 우리에게 아이를 팔라고 요구했다. 남자가 300엔, 여자가 500엔이라고 한다.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 부탁합니다, 이아이는 내 목숨과도 같아요, 제 목숨과도 같다고요. 』라고 (중국어로) 외쳤다"(배우, 아시다 신스케)

* "호박 1개와 아이를 교환한 어머니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배우·다카라다 아키라)

《요네다 겐조, 정론 2005/11월호)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소련군에 만주인과 중공군까지 일본 여자를 요구했다.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희생한 딸도 있었다. 자식을 기르기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도 있었다. 한 딸은 이런 더럽혀진 몸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부모의 권고조차 거절하고 만주 땅에 남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미부테루 준"진리" 제11권 제5호 쇼와 21년 12월)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대낮에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범하고, 울부짖는 여학생은 트럭으로 집단으로 납치해 갔다. 반항하는 자, 폭행을 제지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사살됐다"(와카쓰키 야스오"한국과 일본인")만주도 북선(조선(한반도)의 동북부(함경남도·함경북도)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 "북만주의 어느 개척촌에서는 패전 소식 전달과 동시에 인근 촌락에서 수백의 폭도가 봉기해, 남김없이 약탈당하고 남녀 모두 알몸이 되었다.

...산 속을 행군(부상 후 군복을 벗고 피난해온 병사)하면 곳곳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의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길에는 알몸이 된 일본 여성의 시체가 굴러다녔다. 처음에는 일일이 길가에 멈춰 차로 데려갔지만 너무나 수가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는 불가피하게 버리고 갔다. 나무에 묶어 참살된 부인도 적잖게 있었다고 한다"(와카바야시 마쓰타로"세계국가"창간호 쇼와 22년 1월)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 그래 일본은 만주 땅에서 아시아의 공산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 일선을 돌파당하고 만주가 적화되었을 때, 비극이 일본인에게 일어났다.

《가쓰오카 간지〃)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소련군 점령지에서 소련 병사가 행하는 무법행위에 대해서 소련군의 헌병은 전혀 단속하려 하지 않았고 장교도 앞장서서 악행을 거듭했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소련 점령군 당국도 일본인에게 현금·귀금속 등 금품의 공출을 강요했고, 일본인 회사 건물·개인 주택을 접수했다.

* 점령군은 또 필요에 따라선 일본인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시설 철거, 토목 공사에 혹사시켰다. 시설 철거는 공장의 기계는 물론 사무실 책상·의자, 공업 원료나 저장한 식량을 소련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자고 있는 환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서 담요까지 뺏어갔다.

* 체류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만주의 한촌으로 이주했던 개척단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소집되었고, 노인과 여자, 아이들은 짐을 메고 오로지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소련군과 폭도들은 이에 달려들어 또 약탈 폭행, 강간 살육을 자행했다. 일시에 200명 이상이 살해당한 개척단만 21개고, 거의 전멸한 개척단도 7개나 있었다.

* 다행히 일본 거류민이 많은 대도시에 온 집단은 수하물이 없는 것은 물론 문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깡마른 몸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 맨발로 마대에 구멍을 뚫고 목과 손만 벌리고 신문지에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부인, 그것은 흡사 "망령의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 이들 난민수용소에서는 매일같이 수십명의 사람이 죽어, 결국은 시체를 치울 힘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수용소 주변에는 중국인이 떼로 몰려들었다. 일본인의 아이를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모를 어떻게 탓하겠는가? 만약 아이를 주지 않으면 며칠 내로 그 아이가 굶어죽는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만주에서는 20만여 명, 북한에서는 26,000명이 살해·자살·아사와 동사·등으로 죽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일본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군은 이미 항복하고 무장해제당했다. 이 책임은 점령군인 소련군에 있다. 헤이그 조약에는 점령군은 "공공의 질서 유지", "점령지 주민의 보호", "그 명예, 권리의 존중", "약탈의 금지" 등을 상세히 정했다.
《와카츠키 야스오"매문업자들의 전후 책임")
(같은 인물의 저서"『 주중2세 』가 본 중일전쟁")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미군이 점령한 국내(일본 본토)는 좋았지만[9][10], 소련이 점령했던 만주는 비참했다.

그들은 다투듯 일본인에게 달려들어 살인, 강간, 약탈, 폭행을 행했다. 일본인의 집만 노리고 소총을 겨누고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조만간 다시 데리러 오겠다"라고 해서 아이를 맡기는 부모가 많았다. 그들이 아이를 죽이는 것보다 맡기는 편이 나았다.

* 만주에서는 개척단 단위로 집단자결한 곳이 수두룩했다.(음독자살·권총을 서로 쏘는 것 등)

《한도 가즈토시"소련이 만주에 침공한 여름")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 1945년 8월 15일 2시경, 지인이 "힘들어, 힘들어"라고 하니 개척단 본부(사무소)에 갔는데,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고 졌다". 그 가운데 밖에서 총성이 들렸다."저것은 동신경(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의 일부, 현 창춘 시)의 만주 철도농장 근처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 같다, 그 총소리다"라고 했다.

* 개척단은 모두"휴대한 물건을 들고 사무실에 집합하라"고 연락이 왔다. 모이면 "여기는 위험하니까, 노숙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마을 남동쪽 1km쯤 떨어진 큰 봉우리, 도야마라는 조그만 산기슭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 하룻밤이 지나 텅 빈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수백 명의 원주민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권총을 찬 만주군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는 소리를 들자마자 함성이 오르고 폭동이 일어났다.

* 가장 먼저 축사의 말을 방생하고, 집안에 밀려들었는데, 그들은 다투어 옷, 의류가 가장 고귀한 것인 마냥 그것들은 모아서 꺼냈다. 몽둥이로 우리의 엉덩이를 때렸다. 참지 못할 굴욕을 당하고 그대로 쫓겨났다. 토야마 기슭으로 다시 달아났지만 곤봉을 가진 원주민이 쫓아왔고, 겉옷이나 신발 등을 뺐겼다. 당시 68세던 단장은 심하게 맞아, 하반신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 단장이 죽고 난 뒤에는 여자와 어린이만 남았다. 교장 선생의 부인, 부단장 사모님들이 결의해, 자결하기로 했다."여기서 우리가 중국인의 장난감이 되면 일본 여성의 수치다. 그보다는 깨끗하게 목숨을 끊자"라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먼저 아기를 비롯한 아이들의 목을 졸라 죽이기 시작했다. 다른 개척단에서는 청년이 총으로 아이들을 죽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총이 없어서 아줌마들의 몸뻬 끈으로 목을 조르는 수밖에 없었다.

* 남은 아줌마들끼리 졸라 죽이고, 마지막에 남은 자들이 독신 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친구인 나카가와가 남았다. 주위는 옥수수 밭이어서 목을 매달 나무가 없었다. 미간을 때리면 죽는다고 들었으므로, 돌을 발견하고 서로 미간을 때렸다. 그러면 뜨뜻미지근한 피가 걸쭉하게 나오고 의식을 잃었다. 오키나와 같은 군의 강요는 없었다.

* 결국 8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개척단원과 가족 73명이 집단으로 자결했다. 기절한 나와 나카가와는 해가 밝아 오면서 의식을 되찾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녀와 부인의 시신은 대부분 알몸이 됐다. 현지 주민이 입고 있던 옷을 약탈한 것 같았다.

《구보타 간"쇼와의 기억을 파내다")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붉은 군대의 약탈로 만주의 도시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했던 것이다. 소련에 점령된 뒤로 처음 선양에 들어간 사업가 중 한명인 제임스 맥휴의 증언에 따르면 붉은군대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3일 내내 강간과 약탈을 저질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훔쳤고, 망치로 욕조와 변기를 부수었으며, 회반죽 벽에 매립된 전선을 파헤쳤고, 마룻바닥에 불을 질러 집 전체를 태우거나 적어도 바닥에 큰 구멍을 남겼다. 여성들은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선양에서는 기계가 모조리 사라진 공장들이 앙상한 해골같은 모습으로 방치되었다.한 기자의 글에 따르면 묵던은 이전의 거대한 산업도시에서 다롄으로 가는 러시아 소유의 철도 노선에 포함된 비참하고 혼잡한 중간역 신세로 전락했다. 만주의 산업기반 시설에 행해진 이 조직적인 약탈의 규모는 나중에 20억 달러에 상당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해방의 비극, 프랭크 디쾨터, 43~44쪽


[1] 뤼순 지역은 소련이 1955년까지 해군기지로 사용하다가 1955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한다.[2] 만주군의 총 병력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변변치않은 전투력으로 사실상 머릿수만 채운 어중이떠중이 군대였다. 소련의 만주 공세를 방어할 당시 별다른 전과를 내지 못했다.[3] 관동군의 전성기 당시 관동군의 숫자는 약 74만 명이었으며, 만주 공세 당시에 일본군의 관동군은 약 71만 명이었는데, 이 대군이 소련군에 의해 11일만에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했다.[4] 당시 루즈벨트 당시의 미국과 소련은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에, 대일전에서 공적을 세운다면 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발언권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5] 애초에 조선의 일본군은 소련이 아니라 미군을 방어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기에 주력군은 남한에 있었다. 소련군이 남한지역에 들어오지 않았던 고로 조선총독부는 이 병력을 온존하는데 성공했고, 이 병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조선인민공화국건국을 방해하는데 사용된다. 조선주차군 내에 조선인 병력이 약 1만 명 이상있었으나, 조선인 병력은 무조건항복 직후 빠르게 무장해제처리되어 무력화되었다.[6] 모든 설비를 가져간 것은 아니었고, 또한 만주와 한반도 북부가 공산화되는 것이 확정된 이후 소련은 두 지역의 공산당 정권을 지원했다.[7] 당시 만주는 중국대륙 최대의 공업지대 중 하나였으며, 중국 최대의 군수공업지역이었다.[8] 일제에게서 해방이 되어 기뻐하였지만 새로운 점령자가 왔다며 낙심하는 증언이 있는 편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 박정희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이다.[9] 그러나 일본 본토에서도 일본인 여성들을 상대로한 미군 병사들의 강간 문제는 꽤나 심각했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미군 병사들이 일본인 여자를 보면, 즉시 달려들어 트럭 위로 끌고 가서 마구 강간을 하다가 다 끝나면 트럭 아래로 내려놓고 그대로 달아나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본인 여자 한 명을 상대로 미군 병사 27명이 달려들어 집단 강간을 한 사건조차 있었으며, 미군들이 아예 일본인 소학교에 쳐들어가서까지 강간을 저지른 사건조차 있었다. 다만 당시 일본은 미군한테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라서 미군이 자국민들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든 간에, 전혀 항의할 형편이 못되었고 심지어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미군들을 상대로 일본인 여자들을 매춘부로 내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참고로 이런 사정은 미군이 2차 대전 말엽에 점령했던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미군의 프랑스 여성들 강간 2차 대전 독일 진주 미군의 현지 여성 19만 명 강간[10] 그래서 일본이 패망한 직후인 1945년부터 1950년대를 다룬 일본 소설, 만화, 영화 등에서는 일본인 주인공들이 주일미군들과 맞서 싸우거나 길거리에 세워진 미국산 자동차를 두들겨 부수는 식의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했다. 한 예로 일본 만화 인간흉기에서 주인공 강의천(미카게 요시토)이 처음 소년원에 들어간 동기도 바로 주일미군 병사를 두들겨 팬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주일미군들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부리는 횡포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