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fbe673"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be673>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
<rowcolor=#fbe673>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
<rowcolor=#fbe673>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
<rowcolor=#fbe673>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
<rowcolor=#fbe673>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
<rowcolor=#fbe673>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선덕왕 | 열조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
<rowcolor=#fbe673>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
<rowcolor=#fbe673>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
<rowcolor=#fbe673>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
<rowcolor=#fbe673>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제56대 |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
}}}}}}}}}}}} |
신라의 왕자 [[틀:신라의 왕자/혁거세 거서간 ~ 문흥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be673;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14대 국왕 유례 이사금 | 儒禮 尼師今 | |||
출생 (음력) | 연대 미상 | ||
사로국 서라벌 | |||
사망 (음력) | 298년 12월 |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신라 제14대 국왕 | ||
284년 10월 ~ 298년 12월 (14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 경주 석씨 | |
휘 | 유리(儒理) / 유례(儒禮) | ||
부모 | 부왕 조분 이사금 모후 박씨 | ||
왕호 | 유례 이사금(儒禮 尼師今) | ||
별호 | 세리지왕(世里智王) | }}}}}}}}} |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14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제11대 조분 이사금의 아들로 어머니는 나음(나리음, 날음)갈문왕(奈音葛文王)[1]의 딸 박씨라 한다.
《삼국사기》에
"옛 기록(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두 임금의 이름을 같이하여 유리(儒理)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고, 같은 발음을 다르게 음차했을 뿐이다.2. 생애
2.1. 출생 설화 - 가공의 군주?
출생이 기이하다. 《삼국사기》에서는 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것만 놓고 보자면 아버지가 없는 셈이다. 신라의 왕위는 장자 계승으로 이어진 게 아니기는 했지만 왕비가 있었는지 아닌지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없고,[2]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식의 기록까지 있다는 건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전근대 왕국의 군주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셈이다. 더욱이 제3대 왕과 이름마저 '유리'로 똑같은데다가 이 부분은 야사인《삼국유사》가 아니라 관찬사서인《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이로 인해 출생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걸 염두에 두고 미추 이사금(제13대)을 한 번 살펴보자. 이러한 탄생 설화를 통틀어 감생설화라고 한다. 게다가 아래에 나오는 이서국의 침공 사건도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 이사금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선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 박씨가 '◯召夫人'[3]으로 적혀 있는데 신라에서 보통 왕비나 왕과 가까운 친족 여성이 가졌던 부인의 칭호를 갖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므로 일반적으로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 박씨는 조분 이사금(제11대)의 둘째 왕비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경우에는 유례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거나 아예 혈연 관계가 없다고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무엇보다도 미추 이사금 사후, 석씨로 왕위가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가운데서 석씨 왕들의 계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유례 이사금의 가계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2.2. 이서고국과의 전쟁
14년(297) 봄 정월. 옛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측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문득 이상한 군사들이 왔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대나무 잎을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격파하였는데, 후에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삼국사기》<유례 이사금 본기>
297년에는 경상도 지역 안쪽,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일대의 소국으로 비정되는 이서고국과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신라가 승리하면서 이서고국은 멸망했는데 그 과정이 묘하다. 이서고국은 서라벌 근처의 작은 나라였는데 이런 나라의 공격도 신라가 제대로 방어를 못해서 서라벌까지 위협받다가 정체 불명의 병사들이 나타나서 이서고국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 불명의 병사들은 모두 머리에 대나무를 꽂고 있었고 전투가 끝난 뒤 홀연히 사라지길래 뒤를 따라가보니 미추 이사금의 능인 '죽장릉'에 대나무들이 수두룩하게 놓여져 있어서 무덤 속에 누워있는 미추 이사금이 보낸 귀신 병사들이었다라는 게 기록의 내용이다.《삼국사기》<유례 이사금 본기>
학자들은 이를 미추 이사금의 세력, 즉 김씨들의 사병으로 추측한다. 이서고국과의 전투는 본래 석씨 왕인 유례 이사금의 주도하에 석씨 세력들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신라 전체가 아닌 석씨 세력의 전력으로만 상대하다보니까 의외로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되려 위기에 빠지자 유례 이사금이 결국 김씨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김씨 세력의 사병들이 출동해 이서고국을 멸망시켰다는 해석. 이는 역으로 보면 이 때부터는 비록 석씨 세력이 왕위에 있어도 군사력이나 여타 권한이 상당히 약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와 관련된 전승으로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금관국의 왕 거질미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거질미왕이 "너네 신라 땅에서 안 꺼지면 내가 너네 공격한다?"라고 이서고국을 협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아 정식 사료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더 이상의 이서국과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후 신라의 반격으로 결국 이서국은 멸망하고,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2.3. 왜국 원정 시도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고하십시오.유례 이사금의 재위 연간에 왜국의 신라 공격이 많아졌는데 287년에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 1,000여 명을 잡아서 도망갔고,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쯤되니 유례 이사금도 왜에 대한 원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즉위 12년(295년)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
그런데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년 후 조선 시대의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측 사서인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삼국사기》에서는 하려다 말았다는 기록과 달리 신라가 실제로 왜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을 적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明石浦)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00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한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신해(辛亥)(AD 291년)가 바로 유례왕 8년(AD 291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원강(元康) 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 이사금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5]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원강(元康) 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 이사금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지도 출처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면 신라는 어떻게 일본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를 다다르는 방법, 두 번째는 주고쿠 지방을 통해 육지를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 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규슈 남부를 지나 시코쿠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한 방법이지만 신라는 3개 중 1개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신라 유례왕 왜국 정벌 당시 추정 지도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신라는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 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하다노) [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카시하데)로서 (천황)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하토리베)를 형원(兄媛;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웅신 22년) 291년 9월 10일 원문
《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사는 없지만 응신(應神) 22년(서기 291년) 조에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왜왕이 여섯 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하다노) [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카시하데)로서 (천황)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하토리베)를 형원(兄媛;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웅신 22년) 291년 9월 10일 원문
3. 실제 기년 문제
고고학적인 신라의 건국 연대가 2세기 후반이고, 신라 초기 왕계의 계보를 상고하면 박씨-석씨, 석씨-김씨 왕조가 동시기에 병행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유례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후대로 추정된다. 신라의 왕은 6세기 초(지증왕 즉위)까지도 '6부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보상 동세대 왕들이 여럿 출몰하며, 6부 간(干)의 재위기간과 6부 대표의 재위기간이 다른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유례가 조분의 아들이든 아니든 조분의 아들뻘로 비정하면 걸숙(조분의 아들)-우로(조분의 사위)-미추(조분의 사위)와 동세대가 되는데, 연대가 정상화되는 미추의 사위 내물 마립간의 즉위년도가 356년이므로 유례 이사금은 4세기 초반 재위했음을 유추 가능하다. 여기에 신빙성을 보태는 것이 우로의 사망 년도가 일본서기 이주갑인상대로라면 320년이다. 4세기 6부는 파사계 박씨, 일성계 박씨, 구도계 김씨, 골정계 석씨, 이매계 석씨, 한기부 김씨로 나뉘어 있었는데 골정계는 골정-조분-첨해(동생)-걸숙(조분 아들)-기림으로 이어지고 이매계는 이매-내해-날음-우로(동생)-흘해로 이어진다.[6]
그런데 우로가 죽었을 당시 흘해는 갓난아기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록대로 미성년에 즉위했다 하더라도 당시 사서의 정황상 갓난아기 때 즉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재위기간 14년인 유례가 우로와 흘해의 사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우로의 사망년도를 기준으로 유례의 재위기간을 인하하면 유례는 320~334년에 재위한 것이 된다. 우로가 사망했을 당시 첨해 7년이므로[7] 14년을 재위한 첨해는 314~328년 재위한 것이 된다.
흘해는 미성년에 즉위하여 45년 10개월을 재위했고 재위 9~28년까지 기록이 21년 벽골제 외에는 하나도 없으며, 왜와의 충돌은 35~37년에 벌어졌다. 흘해 3년 왜와 사기 결혼을 하거나 28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한 걸 제외하면 흘해의 대외 활동은 재위 35~37년밖에 없다. 흘해의 즉위년을 334년으로 잡을 경우 벽골제는 354년, 백제에 사신을 보낸 건 361년, 왜와의 분쟁은 368~370년에 벌어진 사건이 된다. 또 내물이 대외 활동을 본격화한 건 377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화북 전진(前秦)과 국교를 수립한 게 처음이다.
흘해의 재위기간을 334~380년 정도로 잡으면 360년대 6부 대표라 추정할 수 있고, 356년 내물은 즉위 당시 10대 후반~20대 초반밖에 안 되는 젊은 나이였고(330년대 후반~340년대 초반생) 당시 36세였던 흘해보다 흘해의 외사촌 기림이 먼저 6부 대표가 된 것으로 보아 기림은 흘해보다 연상으로 보이므로 (걸숙이 6부 대표가 아니라서 정확한 재위기간은 상고할 수 없지만) 350년대 6부 대표라 추정 가능한데, 미추의 대외 활동을 계산하면 주로 340년대~350년대 중반에 쏠려 있고 기림이 12년 재위했음에도 3년에 쏠린 걸 감안하면 350년대 후반에만 기림이 6부 대표였다 360년대 흘해에게 6부 대표가 넘어갔을 수도 있다.
내물의 즉위 년도도 356년이 아니라 다소 인상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364년 왜 대규모 침공, 366년 백제 사신 내방, 368년 백제에게 말 2필 하사, 369년 백제-왜 연합군의 마한-가야-신라 정벌,[8] 373년 내물이 백제 왕을 욕함, 375년 고구려에게 수곡성 뺏김, 377-381-382년 화북 전진(前秦)과 외교관계 수립, 382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고자 왜군을 불렀지만 왜군 장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신라가 매수해 소츠히코가 반파국을 공격하게 만들고 백제가 반파국을 복권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377, 382년 중국 통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았고 390년대부터 백제-가야-왜 연합의 공격에 맞서 실성을 인질로 보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다.
내물 초기 신라가 백제, 왜의 눈치를 볼 만한 시기라면 360년대보다는 369년 근초고왕 정복 직후인 370년대가 더 현실적이고, <내물 마립간 본기>에서는 내물이 욕한 '백제 왕'이 근초고왕이라 명확히 적시하지 않기 때문에 꼭 근초고왕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따라서 375년 수곡성 사건과 377-381-382년 중국 통교는 몰라도 364년 왜, 366, 368년 백제, 373년 백제 왕 사건은 374, 376, 378, 383년으로 내리는 게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383년이면 382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중국과 통교하고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사건을 벌인 뒤이기 때문에 내물이 대놓고 백제 왕을 까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9] 이 경우 내물이 356년이 아니라 366년에 즉위했고 370년대 사건의 일부를 360년대로 인상했을 수도 있다.[10] 이 경우 내물의 전대 구도계 김씨 간(干)인 미추의 재위기간은 334~356년이 아니라 344~366년으로 더 내려간다. 다만 유례 14년 미추왕 기사가 있다는 점과 356년 당시 내물의 나이가 10대 후반~20대 초반밖에 안 되는 걸로 추정됨을 고려하면(330년대 후반~340년대 초반생 추정) 356년 즉위한 게 맞는데 360년대까지 너무 젊어서 6부 대표가 아니었고(20~30대밖에 안 된다) 370년대 6부 대표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11]
미추의 대외 활동은 5년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성주 직선이 물리침, 11년 백제 변경 침략, 17년 백제가 괴곡성을 포위해 파진찬 정원이 막음, 20년 양산 서쪽 사열, 22년 백제 변경 공격으로 괴곡성이 포위되어 일길찬 양질이 막음, 23년 2월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돌아다니다 10월 사망이다. 미추는 내물의 장인이며 구도계 김씨 간의 내물 바로 선대로 유력시되기 때문에 내물이 356년 즉위했을 경우 338, 344, 350, 353, 355, 356년이고 10년 인하하면 348, 354, 360, 363, 365, 366년이 된다. 유례 14년 미추왕 기사를 고려하면 333~355년으로 1년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는 10월 사망했지만 내물은 356년 4월에 즉위했기 때문에 몇 달간 상(喪)이네 뭐네 해서 간(干) 공위기가 있었다면 유례 사망 전년에 미추가 '왕'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이 경우 미추의 대외 활동은 1년 인상해 337, 343, 349, 352, 354, 355년이 된다.
기림의 대외 활동은 3년 왜와 강화, 비열홀 순행, 태백산에 망제 지내고 낙랑과 대방 항복[12], 10년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한 정도다. 12년 재위했지만 정작 대외 활동은 초반에 쏠려 있다. 미추의 재위기간을 330년대~350년대로 잡고 대외 활동이 후반에 쏠린 것, 흘해의 대외 활동이 주로 360년대 이루어진 걸 고려하면 기림이 350년대~360년대 간(干)이었지만 350년대 후반에 몇 년만 6부 대표를 하다 360년대 외사촌인 흘해에게 6부 대표가 넘어간 게 아닌가 싶다.
유례 본인의 대외 활동은 3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 청함, 4년 왜인 일례부 습격, 6년 왜병에 대비해 무기 손질, 9년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줌, 10년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 이주, 11년 왜병이 장봉성 공격했다 실패, 11년 다사군이 상서로운 벼이삭 내림, 12년 왜 공격하려다 포기, 14년 옛 이서국이 금성 공격하자 미추왕이 저지, 15년 사망으로 꽤 꾸준히 대외 활동이 나타난다.
유례는 10월 즉위 2월 사망, 흘해는 6월 즉위하고 4월 사망했다. 우로는 <석우로 열전>에는 첨해 7년 사망, <첨해 이사금 본기>에는 3년 4월 사망했다. 우로의 사망은 7년이 더 유력시되지만, 4월 사망이 사실일 경우 320년 4월 우로 사망-320년 10월~334년 2월 유례 재위-334년 6월~380년 4월 흘해 재위가 된다. 유례 14년 1월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자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쳤다는 기사를 333년 1월 미추가 부간(部干) 신분으로 직접 막았다고 해석할 경우, 미추는 1월 즉위하고 10월 사망, 내물은 4월에 즉위하기 때문에 333년 1월 미추가 간(干)위 신분인 것은 개연성이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4세기 재위한 신라 왕(6부 대표)인 조분-첨해-미추-유례-기림-흘해-내물 중 미추와 유례의 6부 대표 시기가 서로 뒤바뀌었다는 뜻이 된다. 우로와 미추가 서로 동서지간이긴 하지만 유례도 조분의 아들로도 전해지는 걸 고려하면 동세대일 가능성이 높고, 흘해, 내물의 실제 재위기간 문제와 유례 14년 1월 미추왕 기사 때문에 6부 대표 기간을 유례와 미추가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후대 김씨 왕조가 역사서를 편찬할 때 기년 인상을 하는 과정에서 미추와 유례의 재위기간을 바꿀 필요성을 느껴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실제로는 조분-첨해-유례-미추-기림-흘해-내물이 된다.
4. 기타
중국의 역사서 진서에 따르면 286년 진한왕이 삼국시대(중국)를 끝내고 중국을 이제 막 통일한 서진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오는데 이 진한왕은 진한을 주도하던 사로국 즉 신라의 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상 이 시기의 신라왕은 유례 이사금이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년 문제로 인해 서진으로 사신을 보낸 왕이 유례인지는 불명이다.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word-break: keep-all; min-height:(25/18*1em +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4a2d5b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 2권 「신라 2권 (新羅 二)」 | |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 ||
3권 「신라 3권 (新羅 三)」 | 4권 「신라 4권 (新羅 四)」 | 5권 「신라 5권 (新羅 五)」 | |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 소지 | 지대로 · 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 |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 8권 「신라 8권 (新羅 八)」 | 9권 「신라 9권 (新羅 九)」 | |
김법민 |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 |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 ||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 ||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 |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 고주몽 · 고유리 |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 |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 |
고궁 · 고수성 |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 |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 |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 고원 · 고건무 | |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 ||
고장 |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 ||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 |||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 |||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 |||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 |||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 |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 부여의자 | |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유례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月 유례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이찬 홍권을 서불한으로 삼다
三年春一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다
三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六年夏五月 왜병에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다
七年夏五月 물난리로 월성이 무너지다
八年春一月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다
九年夏六月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다
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十一年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다
十一年秋七月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十二年 왕이 왜국을 정벌하려다 실행하지 않다
十四年春一月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치다
十五年春二月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이 죽다
6.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85em; letter-spacing: -1.5px" | ||||||||||||||||||||||||||
선도성모 | 은열왕 | 문열왕 | 감문왕 | 문의왕 | 장무왕 | 장렬왕 | ||||||||||||||||||||
| ||||||||||||||||||||||||||
朴1 시조 혁거세왕 | 알영 | |||||||||||||||||||||||||
| ||||||||||||||||||||||||||
| | |||||||||||||||||||||||||
朴2 남해왕 | 운제 | 청평군 | 박민 | 세조 알지왕 | 사요왕 | |||||||||||||||||||||
| | |||||||||||||||||||||||||
| | | ||||||||||||||||||||||||
朴3 유리왕 | 아효 | 昔4 시조 탈해왕 | 지소례왕 | 일지왕 | 태조 성한왕 | 사요왕의 딸 | ||||||||||||||||||||
| | |||||||||||||||||||||||||
| | | ||||||||||||||||||||||||
朴7 일성왕 | 朴5 파사왕 | 석구추 | 김아도 | 허루왕 | ||||||||||||||||||||||
| | | | |||||||||||||||||||||||
朴8 아달라왕 | 朴6 지마왕 | 昔9 벌휴왕 | 김수류 | 마제왕 | ||||||||||||||||||||||
| | | ||||||||||||||||||||||||
| | | ||||||||||||||||||||||||
아도왕 | 세신왕 | 이칠왕 | 김욱보 | |||||||||||||||||||||||
| | | ||||||||||||||||||||||||
| | | | |||||||||||||||||||||||
昔11 조분왕 | 昔12 첨해왕 | 昔10 내해왕 | 술례부인 | 구도왕 | ||||||||||||||||||||||
| | | | | | |||||||||||||||||||||
| | | | |||||||||||||||||||||||
| | | | | ||||||||||||||||||||||
昔14 유례왕 | 석걸숙 | 내음왕 | 석우로 | 광명부인 | 金13 미추왕 | 김말구 | ||||||||||||||||||||
| | | ||||||||||||||||||||||||
| | | ||||||||||||||||||||||||
昔15 기림왕 | 昔16 흘해왕 | 金17 내물왕 | 김대서지 | |||||||||||||||||||||||
| | |||||||||||||||||||||||||
| | | | |||||||||||||||||||||||
金19 눌지왕 | 파호왕 | | 김미사흔 | 金18 실성왕 | ||||||||||||||||||||||
| | | | |||||||||||||||||||||||
金20 자비왕 | 습보왕 | | 김내숙 | |||||||||||||||||||||||
| | | | |||||||||||||||||||||||
| | | | |||||||||||||||||||||||
金21 소지왕 | 金22 지증왕 | | 선혜부인 | 김물력 | ||||||||||||||||||||||
| | | ||||||||||||||||||||||||
| | | | |||||||||||||||||||||||
聖23 법흥왕 | 입종왕 | | 김거칠부 | |||||||||||||||||||||||
| | |||||||||||||||||||||||||
| | |||||||||||||||||||||||||
聖24 진흥왕 | 김숙흘종 | | ||||||||||||||||||||||||
| | | ||||||||||||||||||||||||
| | | ||||||||||||||||||||||||
복승왕 | 동륜왕 | 만천왕 | 聖25 진지왕 | | 김만명 | |||||||||||||||||||||
| 장인 | | | |||||||||||||||||||||||
| | | | | | | ||||||||||||||||||||
마야부인 김행의 | 聖26 진평왕 | 진정왕 | 진안왕 | 문흥왕 | 김마차 | | ||||||||||||||||||||
| ||||||||||||||||||||||||||
| | | | | ||||||||||||||||||||||
| | | | | | | ||||||||||||||||||||
聖27 선덕왕 | 김천명 | 비담 | 聖28 진덕왕 | 김알천 | 眞29 태종 무열왕 | 현성왕 | 흥무왕 | |||||||||||||||||||
| | |||||||||||||||||||||||||
| | | ||||||||||||||||||||||||
眞30 문무왕 | 김인문 | 무열왕의 딸 | 신영왕 | |||||||||||||||||||||||
| | | ||||||||||||||||||||||||
眞31 신문왕 | | 흥평왕 | ||||||||||||||||||||||||
| | | ||||||||||||||||||||||||
| | | ||||||||||||||||||||||||
眞32 효소왕 | 眞33 성덕왕 | | 명덕왕 | |||||||||||||||||||||||
| | | ||||||||||||||||||||||||
| | | | | ||||||||||||||||||||||
개성왕 | 김사소 | 효상태자 | 眞34 효성왕 | 眞35 경덕왕 | 김주원 | 眞38 열조 원성왕 | ||||||||||||||||||||
| | | | |||||||||||||||||||||||
| | | | | ||||||||||||||||||||||
眞37 선덕왕 | 眞36 혜공왕 | 김헌창 | 혜충왕 | 헌평태자 | 혜강왕 | |||||||||||||||||||||
| | |||||||||||||||||||||||||
| | | | |||||||||||||||||||||||
眞39 소성왕 | 眞41 헌덕왕 | 眞42 흥덕왕 | 선강왕 | 익성왕 | 성덕왕 | |||||||||||||||||||||
| | | | | | |||||||||||||||||||||
| | | | | | |||||||||||||||||||||
眞40 애장왕 | 헌덕왕태자 | ? | 眞44 민애왕 | 眞43 희강왕 | 眞45 신무왕 | 眞47 헌안왕 | ||||||||||||||||||||
| | | | |||||||||||||||||||||||
| 의공왕 | 眞46 문성왕 | 궁예(?) | |||||||||||||||||||||||
| | | ||||||||||||||||||||||||
| | | | |||||||||||||||||||||||
성무왕 | ─ | ? | 眞48 경문왕 | 혜성왕 | 문성왕태자 | 문성왕의 딸 | ||||||||||||||||||||
| | | ||||||||||||||||||||||||
| | | | |||||||||||||||||||||||
선성왕 | 흥렴왕 | 박정화 | 眞49 헌강왕 | 眞50 정강왕 | 眞51 진성왕 | 의흥왕 | ||||||||||||||||||||
| 양부 | | | |||||||||||||||||||||||
| | | | | ||||||||||||||||||||||
朴53 신덕왕 | 김의성 | 김계아 | 眞52 효공왕 | 김억렴 | 신흥왕 | |||||||||||||||||||||
| | |||||||||||||||||||||||||
| | |||||||||||||||||||||||||
朴54 경명왕 | 朴55 경애왕 | 眞56 경순왕 | ||||||||||||||||||||||||
| | |||||||||||||||||||||||||
| | |||||||||||||||||||||||||
박언창 | 박언침 | 마의태자 | ||||||||||||||||||||||||
{{{#!wiki style="margin:-5px -10px" | [왕조 보기] | |||||||||||||||||||||||||
[朴] 밀양 박씨 왕조 |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 |||||||||||||||||||||||||
[昔] 경주 석씨 왕조 |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 |||||||||||||||||||||||||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 추존 국왕 및 왕족 | |||||||||||||||||||||||||
[범례] | ||||||||||||||||||||||||||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 }}}}}}}}}}}} |
[1] 내해 이사금(제10대)의 큰아들이다. 따라서 조분 이사금(제11대)의 다른 아내인 아이혜부인 석씨는 박씨의 고모다.[2] 벌휴 이사금(제9대)도 왕비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장남 석골정과 차남 석이매라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유례 이사금은 이마저도 없다.[3] ◯에 해당하는 글자가 무엇인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하는 것이다. 아마 순우리말 이름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뒤에 있는 '소'(召)는 아가씨를 이르던 고유어 명칭 '조이'(召史)를 표기하려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글자는 법흥왕(제23대)비 보도부인, 입종 갈문왕비 지소태후, 진흥왕(제24대)비 사도태후, 진지왕(제25대)비 지도부인, 태종 무열왕(제29대)의 딸 고타소와 지소부인, 성덕왕(제33대)의 딸 사소부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道), '도'(刀), '소'(炤)와 혼용이 가능하다. 유리 이사금의 어머니인 운제부인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4]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 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 답사까지 확인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 《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하였다.[5] 1688년(겐로쿠 원년) 에도 시대의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는데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6] 포상팔국의 난의 시간대가 워낙 개판이다 보니(사서에는 209년인데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반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날음이 내해에게 이매계 석씨 간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다른 부를 물려받아 우로가 내해에게 바로 간(干)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7] 첨해 3년이라고도 하는데 정황상 7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8] 정확히는 백제-왜 연합이 침미다례를 포함한 영산강 마한 세력을 궤멸시킨 뒤 신라를 포함한 가야 7개국을 모아 백제 중심의 패권을 구축했다.[9] 참고로 383년일 경우 백제 왕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근구수왕이다.[10] 내물과 미추의 딸 보반부인의 세 아들인 눌지 마립간-복호-미사흔도 380년대~393년(미사흔)에 가서야 태어난 걸 고려하면 356년보다는 366년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보반부인을 내물처럼 330~340년대생으로 잡으면 미사흔을 낳았을 당시 현대 기준으로도 너무 노산이다.[11] 이 경우 360년대 당시 내물의 행적이 너무 비어서 370년대 행적 일부를 360년대로 앞당겼을 가능성이 높다.[12] 정작 낙랑군은 313년, 대방군은 31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