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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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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은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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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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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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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종의 현손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완순군 | 完順君
파일:완순군.jpg
출생 1856년 1월 12일
조선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
(現 남양주시 와부읍)
사망 1922년 8월 11일 (향년 66세)
조선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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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경창군
전주 이씨 연령군
을경(乙經) → 재완(載完)[1]
부모 부친 이신응[2]
모친 전주 최씨
양부 흥완군
양모 정경부인 순천 박씨
배우자 정경부인 대구 서씨
자녀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달용(李達鎔, 1883 ~ 1948)
차남 - 이규용(李逵鎔, 1888 ~ ?)
장녀 - 김병협(金炳協)의 처
종교 유교 (성리학)
순칠(舜七)
석호(石湖)
작호 완순군(完順君)
비고 한성은행 은행장
조선귀족 후작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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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조선왕조 시절2.2. 대한제국 시절2.3. 생애 후반2.4. 일제강점기의 행적
3. 사후4. 여담5.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및 관료. 고종의 4촌으로,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이자 조선 장조의 현손이다.

일제강점기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 다만, '일본에 유리한 조약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으며, 생애 동안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2. 생애

2.1. 조선왕조 시절

1856년(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에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인 현령 이신오(李愼五)[3]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이을경(李乙經)'이었다.

본래 그의 가계는 왕실 직계에서 200~300년 전에 분리되어, 단순한 왕실의 후손에 불과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선조 이연 - 경창군 이주 - 창원군 이준 - 청평군 이천 - 서천군 이황 - 이정욱 - 이게 - 이유병 - 이술초[4] - 이도본 - 이신응(이신오) - 완순군 이재완
그러나 1864년(고종 1년) 8월, 그는 21촌 숙부인 흥완군 이정응양자가 되며,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었다. 그는 원래 경창군파의 차기 종손이 될 예정이었으나, 출계로 인해 경창군 종가는 그의 유일한 남동생인 이재곤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뻘인 먼 친척 고종과는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5] 이때 '이재완(李載完)'으로 개명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1873년(고종 10년) 7월, 동몽교관으로 임명되면서[6]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75년(고종 12년) 4월에는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었다[7].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며 관직을 이어갔다. 그 외에도 승정원 동부승지, 곡산부사, 춘천부사, 승정원 도승지, 의약청 부제조,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이재완이 역사적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기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 내각에서 병조판서를 맡았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개화당원이 아니었으며, 종실이었기에, 정변이 실패한 후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관직을 유지했다. 이후에도 형조·이조·예조 판서, 지경연사, 사헌부 대사헌, 예문관·홍문관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이재원과 함께[8] 경기도 부평(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경기도 부천시)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894년(고종 31년) 6월, 의정부 좌참찬으로 임명되었으며, 1895년(고종 32년) 5월에는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에 임명되었으며,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재직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는 명성황후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국장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2.2. 대한제국 시절

1897년(건양 2년) 2월,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한성은행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광무 2년)에는 홍문관 학사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했으며, 1899년(광무 3년)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종정원경을 겸직했다. 같은 해 9월, 족보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장조추존되면서, 그는 황제의 4대손에 해당하게 되었다.[9] 이에 따라 '완순군(完順君)'으로 봉군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10]

1902년(광무 6년) 7월, 평식원(平式院)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1903년(광무 7년) 2월에는 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하면서 은행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3월,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아 철도 부설이 외세가 아닌 자국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4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 그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을 방문했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는 육군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11] 8월에는 승녕부 총관[12]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을 방문한 요시히토 황태자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파일:Sunjong_&_Yoshihito_in_Korea_1907.jpg
<colbgcolor=#29176e>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 이준용.
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1909년(융희 3년) 7월 28일에는 한성은행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나 고문이 되었다.

2.3. 생애 후반

2.4. 일제강점기의 행적

파일:2017-12-08 06-26-49.jpg
<colbgcolor=#29176e>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ffd800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같은 해 10월 2일,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이 공포되면서,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 336,000엔을 수여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찬의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3. 사후

1922년 8월 11일 오전,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후작 작위는 장남 이달용이 상속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안골[13]에 있으며, 인근에 양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묘소가 위치한다. 묘비 없이 상석과 석물만 남아 있으며, 이는 생전 〈한일합방조약〉을 수치로 여겨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4. 여담

  •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1904년(광무 8년) 덕수궁(당시 경운궁)이 대화재로 거의 소실되자, 완순군은 고종에게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인 고종은 이 제안을 듣고 격하게 반응하며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재완(李載完, 완순군)이 황제에게 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4월 23일, 흐림.#

  • 1908년(융희 2년) 4월에 집을 고쳐 지을 때 양숙부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건물 30칸과 종정부 석재 전체를 사가서 비판받았다.
파일:완순군운현궁30칸사(대한매일신보1908.4.28).jpg}}} ||
<colbgcolor=#29176e>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 1912년 9월, 4촌 형인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피하려던 당조카 영선군 이준용을 설득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준용은 평생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면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이로 인해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깊었으므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완순군은 그에게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라며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 그가 거주했던 집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맹현댁'으로 불리며, 총 5,943.80㎡(1,798평)에 달하는 넓은 규모를 자랑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9년 7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열린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 특별전을 통해 완순군 가문의 의례와 생활상을 조명했다. 증손녀 이남주와 증손자 이길주가 전시 준비에 참여하여 당시 생활문화를 증언하고, 전시 구성에 기여했다.
  • 의친왕은 완순군의 문상에 가지 않았다. 당시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문상을 하지 않으면, 절교하는 것이 관례였다. 결국, 의친왕이 끝까지 오지 않자, 완순군의 가족들은 그와 연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친왕비설날마다 딸 이해경을 몰래 보내 세배를 드리게 했다고 한다.[14]

5. 가족과 후손

파일:완순군 가족사진.png
<colbgcolor=#29176e> 완순군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완순군 차남), 이규용 부인 홍씨, 완순군 부인 서씨, 완순군의 딸,
완순군 이재완, 이해선(완순군 장손), 이달용(완순군 장남) 부인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15]
정경부인 달성 서씨(1854 ~ 1923)[16] 사이에서 2남 1녀를 얻었다. 장남은 이달용(李達鎔), 차남은 이규용(李逵鎔)이다. 이달용의 가계는 이달용 문서 참조.

이규용은 1888년(고종 25년) 7월 21일[17] 생으로[18], 비서원승을 지낸 풍산 홍씨 홍순구의 딸과 혼인했다.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2]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3]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4] 이유병의 양자. 이게의 동생 이재의 손자로 이유병과 실제로는 당숙 - 당조카 사이이다.[5]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어 본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이다.[6] 童蒙敎官. 조선시대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7]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8]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9]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로, 기존에는 영조의 5대손으로서 종친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추존으로 황족 지위를 얻게 되었다.[10] 봉호의 '완(完)'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에서, '순(順)'은 양어머니 박씨의 본관인 순천에서 따왔다.[11] 고종의 강제 퇴위 후 순종이 즉위하며, 8월 초에 연호융희로 변경되었다.[12] 承寧府: 황실의 의복, 거마(車馬), 용품 조달 및 회계 사무를 담당한 궁내부 산하 관청.[13] 구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97-1.[14]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58.[15] 반찬만 담당하던 고용인이었지만,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했다. 이 사진에서도 고용인 중 유일하게 완순군 가족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그 위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희경할머니는 뛰어난 음식 솜씨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은 완순군가에서 익힌 실력으로 1960~1970년대 워커힐 호텔 한식부 주방장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16]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에는 1854년(갑인년)생으로 나와있는데, 1923년 6월 6일자 《매일신보》에는 사망 당시 나이가 65세로 적혀있다. 당시에는 나이를 세는나이로 계산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1859년 생이 된다.[17] 음력 6월 13일.[18]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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