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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역사/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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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56~1980: 흑백의 시대
2.1. HLKZ-TV - 초라한 시작2.2. VD-191, 우리 손으로 만든 첫 텔레비전2.3. 당시 한국 TV 산업의 명과 암, 극복2.4. 흑백 TV 보급률 변화
3. 1974~1984: 컬러 TV 도입
3.1. 정부가 막은 컬러 방송3.2. 대형 브라운관 TV 개발3.3. 기술력 변화3.4. 컬러 TV 가격 변화3.5. 컬러 TV 보급률 변화
4. 1980년대 중반 ~ 1990년대
4.1. CRT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다4.2. 일본도 위협하는 기술력, 상대적으로 낮아진 가격4.3. 브랜드 이미지 변화4.4. 크기별 TV 판매량 변화4.5. 크기별 TV 보급률 변화
5. 2000년대 초중반6.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7. 2020년대 ~
7.1. 프리미엄 TV
8. 참고 자료

1. 개요

대한민국의 TV 역사에 대해 다룬 문서.

2. 1956~1980: 흑백의 시대

2.1. HLKZ-TV - 초라한 시작

파일:2015121301231_1.jpg
도입 시기는 1950년대 초, 중반 외국에서 수입으로 들어온 흑백 텔레비전이 시초이고, 경성방송국의 기술자였던 황태영(黃泰永, 1915~2000?)의 주도로 1956년 5월 12일 대한방송에서 첫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미군 PX를 통해서 흑백 텔레비전이 도입되었다. 다만 HLKZ-TV 문서에서 나오듯 당시 TV 가격이 대통령 월급(약 66달러)의 3~7배인 197달러 ~ 487달러에 달해 제대로 보급도 되지 않았으며, 1959년 2월 2일 의문의 화재로 방송국이 전소되며 사실상 폐국했으며[1], 1961년 10월 15일 방송이 중단된 후 기능과 채널 번호(9번)는 동년 12월 31일 개국한 KBS TV로 옮겨지게 된다.

1964년 12월 7일에는 수도권과 부산 한정으로 송출되던 TBC가 개국했고, 1969년 8월 8일에는 라디오 방송국 MBC가 TV 방송국으로 확장되며 수도권과 부산이 아닌 지역에서도 2채널 시대가 열렸다.

2.2. VD-191, 우리 손으로 만든 첫 텔레비전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tv.jpg
국내 최초의 국산 TV인 VD-191

최초의 국산 TV 수상기는 금성사 VD-191이다.[2] 19인치짜리 진공관 흑백 TV로 1966년 8월 1일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1968년까지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3] VD-191의 자초지종

이 VD-191은 히타치 스타디움 19(N7900형) 흑백 TV를 토대로 만들었으며, 금성사에서 자체적으로 디자인을 일부 고치기는 하였지만, 당대 히타치 TV의 특유의 패밀리룩이 고스란히 반영된 디자인이었다. 브라운관, 진공관, 튜너 같은 주요 부품은 히타치의 것을 공급받아서 사용했지만,[4] 그렇다고 히타치의 모델을 고스란히 도입했다고 보기에는 곤란한 것이, TV 내부 회로의 경우는 놀랍게도 금성사의 기술자들이 독자적으로 설계한 것으로[5], 최초 국산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와 내구성이 뛰어나서 출시된 지 12년이 지난 1978년 8월 기준으로도 절반 가까이[6]가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7] #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에는 텔레비전을 서울수도권 등 일부 지역만 시청할 수 있었던 데다[8], 전부 수입품 밖에 없었고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관세도 높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부유층의 전유물으로 취급되어서 TV 보급률은 대단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국산 TV 수상기 생산이 시작되어 상대 가격이 내려간 1960년대에도 일본산이 10만 원, 미국산이 13만 원, 위 금성TV가 7만 원[9] 정도였는데, 1967년 기준 월평균 임금이 정확히 8,324원,[10] 쌀 한 가마니(80kg)의 값은 3,590원[11], 서울 집값이 평당 50,000원 ~ 100,000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전술한 월평균 봉급과 비교하면 8개월치 봉급은 거뜬히 뛰어넘는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전력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기껏 TV를 얻는다해도 보지 못해서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며 1960년대에는 수신료가 월 100원(1963년) ~ 300원(1970년) 정도였는데, 당시 한 달 급여를 감안하면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12]

그래서 텔레비전은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몇 집에만 있었고, 서민층들에게 말 그대로 그림의 떡같은 존재였다. 물론 비싸다보니 도둑맞기 쉬운 물품이었던 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한일전이나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 인기 드라마[13] 같은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한두 군데 있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몰려들어서 방송을 보기도 했고, 당대 대다수 만화방이나 다방, 일부 구멍가게에서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한 다음에 만화책을 단골로 보는 애들이나 푼돈을 낸 청소년, 커피를 단골로 마시는 고객들을 상대로 TV를 볼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영업했다고 하며 수입도 제법 짭짤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레슬링이나 권투 세계타이틀전, 한일전 같이 인기 스포츠 중계라도 있는 날은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원성도 자자했고, 간혹가다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TV가 있으면 엄청나게 떵떵거릴 수 있었다.[14] TV 있는 집안 아이에게 각종 아부를 떨면서 TV를 보려고 애썼던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도 TV를 보기 위해서 TV 있는 집 주인에게 성격이 어떻건 간에 아부떨기 바빴다는 후문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화방이나 다방, 구멍가게나 전파상 같은 곳에서 돈내고 봐야 했으니까.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TV가 있는 집들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시골 같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풍경은 1970년대 들어 가정으로의 TV 보급과 '아동도서 정화대책'을 계기로 없어지는 듯하다가 1980년대 VTR 보급으로 인해 비디오 상영 목적으로 만화방에 재등장한 바 있었다.

이후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초반까지 서서히 보급된다. 당시 정부에서 뉴스 시사 전달 목적으로 TV 물품세를 면제해 주고 일명 새마을 TV[15]라고 불린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게 공급하는 방식으로 TV 보급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TBC의 전국 방송화가 진행되지 않아서 수도권과 PK지역만 방송되거나 DBS의 TV 방송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디자인에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과 달리 목재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TV가 늘어났고 기존에 있던 자물쇠와 미닫이문도 점점 사라져 갔다.

여담이지만 1974년 금성에서 출시된 VT-87S(19인치)[16]의 사용설명서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한국 흑백 텔레비전의 유일한 설명서이다. #

2.3. 당시 한국 TV 산업의 명과 암, 극복

파일:삼성 이코노텔리비젼-삼성 이코노로 절전합시다.jpg
1975년 발매 당시 첨단 기술이 들어간 삼성 이코노 TV[17]

1971년 이전까진 진공관/트랜지스터 방식이라 TV 한 번 켤 때마다 전자총이 예열되기까지 20~30초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전기세만 먹으며 수명도 줄어들기도 했다. 게다가 튜너 접점부분이 은으로 되어 있어 일정 횟수를 돌리면 닳고, 연탄가스(일산화 탄소)와 먼지에도 취약했다. 이를 해결코자 1972년 금성사가 먼저 진공관을 버리고 트랜지스터로 채워 수상시간을 1초로 단축시켰고, 1974년 IC와 트랜지스터를 결합한 'IC-TR 회로'와 함께 '소프트화면 브라운관'을 개발해내 종전의 자극적인 화면을 부드럽고 선명하게 바꾸어 시력을 보호하게끔 만들었으며, 1975년에는 튜너 접점부분을 순금 99.99%로 바꾸어 마모율을 줄인 '황금회로'를 개발했다.

1975년 삼성전관은 예열 없는 퀵스타트(순간수상) 방식 '이코노 브라운관'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18] 삼성전자가 만든 '이코노TV'에 적용시켰고, 이코노TV는 절찬리에 수출되어 1978년 마쓰시타를 제치고 세계 1위 흑백 TV 제조 업체가 되었다. 1977년 광고 1978년 광고 1979년 광고 1979년까지 500만 대를 생산해 300만 대를 수출했으며, 1980년에는 전 세계 흑백 TV 수출량 2,448만 5,000대 중 514만 4,000대(전체의 21%)를 한국 기업이 대당 50달러로 수출하여[19] 한국은 세계 최대 흑백 TV 수출국이 되었는데, 1968년 생산분 3만 대 중 600대를 첫 수출한 지 고작 12년 만에 거둔 쾌거인 셈이다. #

1976년 대한전선[20]은 스네이크 현상[21], 스팟 현상[22], 에미션 현상[23] 등을 배제해 '무결점'을 강조한 '디제로 TV'를 개발했고, 금성은 녹색 형광막을 검정 글래스로 감싸 시력을 보호하는 '블랙그린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뒤이어 1977년에 금성은 브라운관 핀트적중률을 높여 화질을 선명하게 하는 'GG전자총'도 개발했다. 이렇듯 1970년대 TV 경쟁은 가히 기술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1971년경 금성사는 23인치 TV를 개발햇다. #1 #2 1971년 당시 가격은 85,200원으로 14인치(46,100원), 17인치(53,000원), 19인치(약 67,000원)보다도 비쌌던 것은 물론 1971년 한국인 평균 월급(약 21,000원)의 4배를 넘겼다. 1971년 전기연감 396페이지[24] 23인치도 만들었으니 21인치 TV도 만들 수 있었는데, 1975년 쌍용해운이 전임 직원들이 모은 성금 30만 원으로 해군본부와 해역사령부(현 함대)에 금성사 21인치 TV를 각각 1대씩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21인치 TV도 초대형 취급받았다.[25]

덤으로 1975년 시점 이미 국산 TV 메이커들은 일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자 모델 개발[26]을 성공, 수출까지 했다. #

하지만 국산화에서 어두운 면도 있었다. 1970년 삼성NEC에서 브라운관과 TV용 진공관을 생산하며 한국 최초로 국산 브라운관을 만들었으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일본 회사(NEC)와의 합작회사였으며,(#)[27] 1975년에도 도시바랑 재일교포 기업가 곽태석이 설립한 합작회사 '한국테레비'에서 일본 기술을 바탕으로 브라운관을 만들기도 했다. # 그나마 TV 4대 부품 중 브라운관을 제외한 TV 튜너와 편향 요크, FBT는 1974년 KIST 정선호 박사 팀과 제너럴 산업사 연구진이 공동 개발하고(#1 #2), 같은 해 금성알프스에서 해당 부품들 가공 공장을 세우면서 국산화를 이뤄냈다.[28]

한국 최초의 브라운관 융착 공장은 삼성코닝과 미국 글라스워크 사의 합작으로 1974년 세워지고 1975년부터 가공을 시작했는데,(#1 #2) 달리 말하자면 1974~1975년 이전 한국 TV 업계는 사실상 일본에서 수입한 브라운관을 조립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후 1977년 5월에는 전술한 두 회사의 합작으로 벨팅 공장이 완공되어 '모래에서 세트까지' 흑백 TV 100% 국산화를 달성했다. #1 #2 '100% 국산 브라운관'이라는 것에 매료당한[29] 삼성전자와 금성사 모두 1977년 이후 삼성멜팅 브라운관만 애용했으나 일본 계열 TV 공장들[30]이 국산 사용을 기피했기에 벨팅 공장 완공 5개월 만에 재고 60만 개[31]가 남아 미국 측의 압력으로 가동을 중단할 뻔했다.[32] #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가마우지 경제였던 셈이다. 게다가 전술한 흑백 TV 수출 1위도 사실 당시 한국산 전자제품의 외국 지명도가 낮아 (적어도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골드스타, 이코노 같은 자국 내 상표가 뭍는 대신 외국의 수입상, 백화점 상호[33]를 붙이는 OEM 방식으로 헐값에 수출한 거였고[34][35], 일본이 흑백 TV 산업을 후발국에게 넘겨준 게 컸다.[36]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컬러 방송 시작 시점에서는 IC회로와 웨이프[37]을 제외한 흑백 TV 국산화가 사실상 100% 완료되어 오히려 태국, 인도네시아 등 후발국에 기술을 제공하고[38] 회로당 2,000달러씩 로열티를 받게 되며 입지가 역전됐다. # 또 어떻게든 부족한 기술 수준과 미진한 생산 자동화[39]를 높은 인적 수준으로 만회하고자 인적 수준을 기계 이상의 정확도로 키우고자 했고, 때문에 70년대 이후 한국은 일본과 서독 같은 기술대국들을 제치고 기능올림픽 종합 1위를 연속으로 따내게 된다.[40][41] 게다가 핵심 부품을 일본에 의존한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어도 상술한 것처럼 설계[42]와 디자인[43]은 다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한국 고유모델, 우리 손으로 만든 텔레비전이라 불러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44] 결정적으로, 지금도 자체적으로 TV랑 가전제품을 (단순 외제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체적으로 설계, 생산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은 매우 적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45]

2.4. 흑백 TV 보급률 변화

1956년 기준 한국에 있는 흑백 TV는 겨우 300대였고[46], 1959년 7,000대, 1961년 13,000대(0.03%)를 기록했다. 1963년 ~ 1965년 30,000대 이상을 맴돌다 1968년 약 12만 대로 처음으로 10만 대를 돌파했다. 가구당 보급률(이하 보급률)은 1963년 ~ 1966년 0.7% 내외, 1967년 1.3%이던[47] 것에서 급속도로 올라[48] 1968년 2.1%[49], 1969년 3.9%, 1970년 6.4%, 1971년 10.2%[50], 1972년 14.7%를 기록했고, 1973년에는 보급률 20.7%, 1974년에는 100만 대(26.0%)를 돌파했다. 1975년에는 보급률 30%(30.4%)/200만 대를 돌파했고, 1976년에는 41.4%, 1977년 380만 대를 넘기며 보급률 50%를 돌파했다.(55.7%) 그리고 1978년에는 70.7%를 찍었고, 1979년에는 보급 대수 576만 대, 보급률 78.5%였다. 1980년에 흑백 TV 보급률 80%를 돌파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고자료(1956~1979년 한국의 흑백 TV 수)

1970년 기준 한국 TV 대수는 41만 8000대로 세계 185개국[51] 중 36위, 보급률은 1000명당 13대(80명에 1대)로 84위였다.[52] # 1972년 9월[53] 기준 라디오는 2가구당 1대, TV는 7가구당 1대 보급되었다. 서울은 가구 43%가 TV를 가져 한국 전국의 TV 중 무려 58%를 독점했고, 부산은 24.6%, 경기는 11.9%, 경북(대구 포함)은 7.5%, 강원은 4.4%, 충남은 4.6%, 제주는 3.8%, 전북은 3.6%, 경남(부산 제외)은 3.4%, 전남은 3.2%, 충북은 3.1%였다. # 같은 해 도시 TV 보급률은 가구당 31.2%였으나 농촌은 7.2%였다. #

1976년 12월 말 당시 한국 내 TV 수는 280만 9,131대로, 전국 평균은 2.4가구당 1가구 수준 보급률이었으며, 가장 높은 곳은 1.5가구당 1대인 부산과 1.4가구당 1대인 서울이었고, 가장 낮은 곳은 4.2가구당 1대인 전북과 4.8가구당 1대인 전남이었다. #

3. 1974~1984: 컬러 TV 도입

3.1. 정부가 막은 컬러 방송

파일:한국 최초의 컬러 TV.png
국내 최초의 국산 컬러 TV인 SW-C3761 유튜브

컬러 TV 도입과 관련해서 우여곡절이 있는데 1974년 한국나쇼날전기(현 아남전자)가 처음 생산하기 시작하고, 1975년에 삼성전자가 토종 기업 중 최초로 생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교육개발원이 2개 UHF 채널을 이용해 충북 제천 봉양송신소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구 송신방식인 'T-COM' 기술로 교육용 컬러 TV 시험 방송을 실시했는데, 최초로 시도한 곳은 안양서국민학교(현 안양서초등학교)였다. 그러나 T-COM 기술을 이용한 기구가 눈과 강풍 등으로 인한 한국 기후특성 탓에 유실되어 정규 편성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1977년 2월 해당 방식이 국내 기후 조건에 적합치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12월 27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송출방식을 지상으로 바꾸도록 결정되었다.[54](동아일보 기사) 1976년 6월 삼성전자에서 한국 최초 토종 컬러TV SW-C3761(컬러 이코노 TV)를 개발했고[55], 1977년에는 금성사도 최초의 컬러TV CT-808(19인치)을 만들었다.

다만 이러한 제품들은 정부 방침상 전량 수출했고[56][57], 민간 내수판매가 규제되었다. 1978년부터 상공부가 교통부 요청에 따라 1급 관광호텔에 한해 공급을 했다. 그래서인지 방송사들(그래봐야 KBS, MBC, TBC 뿐이었지만)도 이미 1960년대 말 즈음부터 컬러방송 실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초반 와서는 한국교육개발원의 예처럼 컬러방송 송출용 장비를 전부 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계만 컬러이지 방송국에서 컬러 송출을 하지 않아서 흑백만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로 흑백이건 뭐건 삼색 셀로판지를 브라운관에 이어붙여 컬러처럼 보이려고 용을 썼다. 대신 1976년부터 AFKN은 컬러로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AFKN이 컬러 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한국 온 지 얼마 안 된 주한미군 장병들이 아직도 TV 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후진국에 왔다며 문화 충격을 느껴서라고 하며, 한국에 관광을 온 외국인들도 AFKN을 많이 시청하는 터라 사유는 매한가지였다.

당시 케이블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방송을 통해 컬러 TV를 맛볼 수 있었다. 부산시울산시 등 영남 해안가 지방 정도에서만은 일본방송 전파가 잡혀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컬러로 나오고 있는 일본 TV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단, 양국 TV 채널이 겹쳤기 때문에 일부 채널만 볼 수 있었다.[58] 이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컬러 화면을 즐기기 위해 해외여행 선물로 직접 들여오든지 주한미군 PX를 통해 밀수된 일제 컬러 TV 수상기를 사거나(참고 기사), 일제 VCR(U-MATIC이나 베타맥스 등)을 같이 들여놓기도 했다. 1971년에는 싯가 35만 원이던 컬러 TV가 부산으로의 수입 과정에서 과세로 인해 60만 8000원이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59] #

1970년대에 준비가 된 상황에서도 컬러 TV 수상기 시판을 확대하지 않은 이유는 신문사들의 반발도 컸었지만 결정적으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반발이 제일 컸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수출과 관련된 기업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 부족 문제"와 "계층 간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내수판매 자체를 하지 않은 정책 탓. 실제로 이 시기 농촌도 흑백 TV가 집집마다 보급된 터라 이때 컬러 TV를 보급하면 도농격차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프로스포츠는 프로복싱이었는데 대부분 국가에서 컬러방영을 할 시기라서 국제대회 같은 경우 당연히 양 선수가 파란 트렁크, 빨간 트렁크를 입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걸 흑백TV로 중계하면 둘 다 같거나 비슷한 색으로 보여서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아나운서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물론 한국 선수가 경기하는 경우는 흑백TV 사용자를 배려, 트렁크에 흰색 띠를 부착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흑백에서도 트렁크 색상이 구분되도록 했다. 특히 1975년 10월 8일 박정희는 한국전자박람회 개막식에서 가전업체 사장들 앞에서 "컬러 TV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못을 박았으며[60] 신문사들 역시 광고를 컬러 TV에 빼앗긴다는 우려를 내세워 내수 판매 자체를 거세게 반발하였다.

실제로는 유신정권의 여느 정책들이 그렇듯 풍기문란과 '퇴폐문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서구권과 일본에서 컬러 TV가 막 보급되던 당시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문화가 같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61] 1960년대 당시 미국 내 민권운동도 이 컬러 TV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인해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였다.[62]

1977년 9월 김성진 당시 문공부장관은 컬러 TV 방영을 앞당긴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 하는 한편, 방송 실시에 대해선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발전했긴 하나 국민소득은 아직 700불 선이며, 컬러방송은 국민소득 2,000불 이상이 되어야 가능할 것"[63]이라고 밝혔다. 1978년 2월 김 장관은 비슷한 이유로 컬러방송 자체를 허용할 뜻이 없다고 재확인했고, 1979년 5월 22일에 관세청은 6월 1일부로 상공부 요청에 따라 외제 컬러 TV 및 VCR 반입까지 금지시켰다. 단, 해외 근무자가 이삿짐으로 옮겨올 경우 제외되었다. 이로 인해 외산 컬러 TV 가격이 30%나 폭등했다.[64] 8월 정부 측은 제2차 오일쇼크 상황을 이유로 컬러 TV 방송/시판 불허 방침을 밝힌 후, 다음 해에 실시할 TV 교육방송도 흑백으로 한다고 밝혔다.

관제 뉴스영화 대한뉴스는 1973년부터 컬러 필름으로 상영되었다.[65] 당시 방송 쪽은 전부 흑백으로 송출하고 있었는데, 제작은 이미 컬러방송 중인 외국에도 중계되는 국제적 이벤트에 국한되었다. 예를 들면 1974년 11월 22일 당시 국내에 있던 1천여 대의 컬러 TV를 통해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김포국제공항 도착 광경과 한국을 떠나는 모습이 컬러로 방영된 바 있었다. 또 1975년 9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축구 정기전 중계방송 당시 KBS가 일본 NHK로부터 요청받아 컬러로 중계했는데, 당시 국내에 있던 컬러 TV 수상기로도 방영된 바 있었다. 그리고 사실 1972년 6개 전자회사에서 컬러 TV 시제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첫 시작이었던 만큼 국산화율이 20%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


1977년 9월 3일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 MBC 대학가요제. 제작 단계에서는 흑백과 컬러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79년 9월 3일 방영된 KBS의 방송의 날 특집인 방송 1979도 컬러로 제작되었다. # 참고로 KBS는 1978년경부터 컬러 방송 제작을 시작했다.[66] 물론 두 방송국 다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했어도 송출은 흑백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하순 미국 백악관 특별통상대표부가 한국 정부에 국내에서 팔지 않는 컬러 TV를 남에게 수출한다는 것이 국제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당시 컬러 TV 수출 물량은 1977년 12만 대, 1978년 50만 대였는데, 대다수가 미국 시장에 팔렸던 것이다. 미국 측의 시비는 1979년부터 노골화되어 미국 측은 한국산 컬러 TV 수상기 수입물량을 연 30만 대로 규제해 버리면서 수출길이 가로막히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 4월 8일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수출을 하지 못한 컬러 TV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화를 낸 나머지 대만 방문 후 삼보전자를 찾아가 15일 저녁 수행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귀국시 컬러 송출 전면화를 허락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시도한다고 선언하여 다음 날 국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지만, 박정희의 컬러 TV 불가론을 이어받은 최규하 대통령 고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전두환국보위가 정권을 잡은 뒤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1927~2017)는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금진호로부터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컬러방송을 건의해 보겠다는 언질을 받아내면서 "꼭 되게 해 주소. 지금 전자산업은 앞이 꽉 막혀 있소. 수출도 한계에 이르렀는데, 국내시장이 막혀 있으니 큰 야단났소. 국민여론을 조사해 보면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요!"라고 하소연한 뒤, 국보위는 삼성전자와 금성사 양대 업체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8월 2일부터 컬러 TV 시판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방송사들의 컬러 TV 설비가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국내 컬러방송을 전제로 시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수출 규제로 턱턱 막힌 국내 가전업계 숨통을 트이기 위한 정부의 임시 조치였다.

11월 30일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의 발표에 따라 12월 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KBS가 제17회 수출의 날 기념식 생방송을 시작으로[67]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었다. 첫 방송 당시 정부의 큰 관심사는 전두환의 정장 색이었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과 비서진들이 협조한 결과 회색 바탕에 가는 청색 줄무늬 옷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68] 또 행사 당일 상공부 공무원들은 가전 3사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컬러방영 색상에 대한 반응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첫 컬러 방송 시작 3주 뒤인 1980년 12월 22일에 MBCTBC를 흡수한 KBS 2TV가 컬러방송을 전격적으로 시행하면서 컬러 방송 송출 비중이 100%로 전환되었지만, TV 수상기 문제가 일어난다. 당시 전국에 깔린 흑백 TV 수상기는 전국에 7백만 대나 있기에 하루 아침에 수상기 전체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흑백과 컬러 모두를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조명료만 해도 흑백의 네 배나 되는 컬러방송에 쓰는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에 자연광선을 많이 쓰는 뉴스와 스포츠 중계부터 컬러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는 정권홍보에 TV를 적극 활용하는 전두환 정권의 책략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결국 컬러 텔레비전은 땡전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송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론통폐합 다음날인 1980년 12월 1일 방영된 'KBS 새가족'. KBS가 본격적으로 컬러로 제작하고 송출한 첫 방송이다.

한편 컬러 TV 방송 개시 바로 전날은 언론통폐합이 시작된 일자로, TBC는 컬러 시험방송은커녕 본방조차 못 해보고 신방겸영 금지로 폐국되어 KBS 2TV로 흡수되었다. 그래도 TBC에서 제작된 쇼쇼쇼 700회 특집이라던가 몇몇 드라마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는데, 공연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며 고별방송 프로그램도 컬러로 제작되긴 했었다. 다만 흑백으로 송출되어 모든 사람들이 흑백으로 봐서 그렇지.

이듬해인 1981년 1월 1일부터는 컬러 TV 방송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부터는 광고도 전면 컬러화되었다. 또 TV 컬러화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의 '바보상자'나 '판도라의 상자'외에 유해색소까지 첨가된 격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안부인사로 "컬러 TV를 구입했느냐"는 말까지 나온 데다가 심지어는 컬러 TV 때문에 극장이 망할 거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극장은 망하지 않았지만 당시 침체기를 겪던 영화산업이 또 타격을 입었다. 1981년 당시 영화관 관람객 수는 전년도 5,300만 명에서 4,400만 명으로 줄었고, 전국 영화관 수는 전년도 447개에서 423개로 줄어 영화제작 편수 역시 87편으로 나와 저조하였다.

이에 영화계는 컬러 TV에 대항해 영화의 대형화란 대안을 모색하여 당대 1억 원 단위로만 제작되었던 통례를 깨고 평균 3~4억 원에서 최고 10억 원까지 투입된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배우들 역시 컬러 TV와 동시녹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연기훈련을 기획했고, 영화진흥공사 역시 조감독 20명을 선발해 영화 이론과 기법을 교육시켰다.[69] 이런저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컬러 TV는 방영 1년 뒤인 1981년에 37억 9,100만 달러를 기록해 전년도 대비 33%를 올려 수출길을 터 주었으며, 당시 주류이던 볼록화면 형식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은 198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1980년대 중후반 당시 연령대가 대략 만 5~6세 이상이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텔레비전으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 경기 중계 방송을 시청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방영했던 각종 TV 프로나 광고들도 해당한다. 이후로 텔레비전은 크기는 더 커지면서 성능 및 기능은 더욱 향상되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사실 한국의 컬러 TV 방송은 아시아 내 공산주의 국가들은커녕 아프리카 극빈국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늦은 편이었다. 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중국(1973년)이나 북한(1974년), 베트남(1978년)[70], 에티오피아(1979년)처럼 남한보다 더 빠른 나라가 있었고, 비공산권 극빈국 중에서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74), 부룬디(1975)가 한국보다 더 빨리 컬러 방송을 시작했으며[71], 심지어 미얀마(당시 버마)[72]는 한국의 컬러 TV 방송 시작으로부터 정확히 1개월 전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다만 우루과이, 방글라데시[73]는 한국과 같은 해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고, 튀르키예, 알바니아[74]는 한국보다 1년 늦은 1981년에, 이스라엘[75], 루마니아[76]는 한국보다도 3년 늦은 1983년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77]

여담이지만 1987년 4.13 호헌조치 당시 대한뉴스 1:39~1:48에 나온 한 버스터미널에 전시된 삼성전자 TV는 엑설런트 V2[78]로 추정된다. #

3.2. 대형 브라운관 TV 개발

1980년 10월 금성사에서 20인치 컬러 TV와 5인치 소형 흑백 TV를 동시에 볼 수 있는 TV인 CNB-205를 개발하고[79] 1981년 2월 출시하기도 했다. 가격은 62만 5,000원. 당시 근로자 평균 월급이 18만 837원이던 걸 감안하면 무려 3.46개월치 봉급으로 사야 했던 셈이다. 자기들도 안 팔릴 걸 예상했는지 1980년 (예약주문 기준) 목표 판매 수치가 고작 500대[80]였다. #1 #2 #3 #4 이 TV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80년대 인테리어를 한 서초삼호아파트[81] 33평형 안방(#)과 다른 개체(#) 이렇게 2대가 남아 있다.

1982년에는 삼성전자가 당시 국내 최대 모델이던 26인치 (컬러) TV 시판을 시작했다.[82] 당시 가격은 대당 100만 원. # 당시 평균 월급이 20만 원이던 사정을 감안하면 거의 5개월치 봉급 수준이던 셈이며, 당연히 가격이 가격이라 제작 당시부터 호텔 로비, 병원 대기실, 휴게소 등을 겨냥했다고 한다. # 사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면 삼성전자는 이미 1979년경 26인치 TV를 개발했고, 컬러 TV가 시판된 1980년 판매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981년 시점에도 발매 예정일 정도로 발매가 늦어졌으며, 그렇게 1982년까지 2년이나 발매가 늦춰졌다.

한편 같은 1982년 금성사에서는 삼성전자에 뒤쳐지면 안 된다고 느꼈는지 한국 최초 프로젝션 TV로 45인치 프로젝션 TV를 만들었는데, 당시 가격이 무려 284만 7,000원(1983년 기준)이었다.[83] 당시 광고 1 2 1983년 평균 월급이 26만 원도 되지 않았으니 가히 11개월치 봉급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이던 셈이며, 심지어 이조차 1983년 1월 1일 금성 프로젝션 TV와 금성 비디오 카메라(54만 8,000원)의 특별소비세가 40%에서 4%로 폭락하며 가격이 폭락한 거라고 한다. 사실 1982년 첫 발매 당시 가격은 무려 350만 원으로, 당시 한국인의 평균 월급이 20만 원 남짓이던 걸 감안하면 무려 당시 평균 한국인의 1년 5개월치라는 개막장 가격이었다고 한다.[84] # 당연히 1년 후에야 겨우 컬러 브라운관 밸브 유리공장이나 세우던 기술 실태를 감안하면 사실상 일본 부품을 조립해 만든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85] 1984년 대우전자에서도 45인치 프로젝션 TV를 출시했다.[86] # 때문에 당시 45인치 프로젝션 TV는 대중들에겐 전혀 보급되지 않고 업소용으로만 쓰였다.[87]

1984년 평면 4각 브라운관 TV가 한국에 상륙했는데, 그 일본에서도 그 1년 전인 1983년에야 나온 신기술이었고 한국은 1983년에야 컬러 브라운관 유리를 자체생산하기 시작한 수준이던만큼 해당 TV는 전부 브라운관을 일본[88]에서 수입해 조립한 거였다.[89] 가격은 금성사, 대우전자 통틀어 5인치 31만 원, 14인치 42만 원, 19~20인치 50만 원이었는데, 당시 한국 평균 월급이 27만 원이던 걸 감안하면 5인치조차 한 달 월급 이상에 19~20인치는 2달치 월급에 준하는 수준이던 셈이다. # 1985년 삼성전자도 평면 브라운관 TV를 발매했다.[90] #

한편 같은 1984년 금성사도 26인치 TV를 개발했고(#1 #2)[91], 대우전자에서도 26인치 TV를 개발했다.(#1 #2[92])

삼성전자는 1985년 당시 국내 최대 브라운관 TV였던 28인치 TV[93]를 개발한 후(#)[94] 삼성전자는 1985년 9월 음성다중 TV를 시판하고 동시에 국가별로 다른 방송시스템[95]도 상관없는 올인원 TV(세계 3번째 개발)와 한 대의 TV 화면으로 브라운관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픽처 인 픽처(P.I.P.) TV를 개발하고[96] 1986년 4월경 출시했다. #1 #2

1986년 금성사에서 음성다중 기능을 넣은 45인치 프로젝션 TV를 개발했다.[97] 가격은 298만 원.[98] #[99]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때 직접 만든 28인치 컬러 TV를 제공했다는 기사로 보아 금성사도 1985~1986년 무렵 28인치 컬러 TV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100][101] # 삼성전자도 같은 해에 뒤늦게 45인치 프로젝션 TV를 개발하고 국산 프로젝션 TV 최초로 해외(정확히는 북미)로 수출했다.[102] #

1987년 금성사에서 TV와 VTR을 한 데 섞은 비디오 TV를 출시했다.[103] 크기는 20인치, 가격은 59만 9,000원. 평균 월급 35만 8,000원이던 시절 5/3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 # 비슷한 시기 프리미엄 브랜드 금성 미라클 가격은 14인치 43만 2,000원, 16인치 47만 9,000원, 20인치 56만 8,000원으로 1.2~1.6개월치 봉급에 맞먹는 가격을 자랑했다.[104] #

1988년부터 28~33인치 이상 대형TV가 본격화됐는데, 일례로 금성사는 1987년 크리스마스 28인치 TV[105] 개발을 발표한 후(#)[106] 1988년 금성 미라클 중에서도 프리미엄이던 '수퍼미라클'을 당시 국내 최대이던 33인치[107]로 출시했다. 가격은 242만 5,000원. 당시 한국 평균 월급이 44만 6,370원이었으니 무려 5.4개월치 봉급을 줘야 살 수 있던 셈이다. # 동년도 금성사 45인치 프로젝션 TV는 335만 원으로 무려 7.5개월치 봉급을 줘야 살 수 있었다.[108] # 게다가 28인치도 3개월치 봉급 수준이던 대당 130만 원이었다.

같은 1988년 금성사에 이어 삼성전자[109], 대우전자, 아남전자, 한국전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1988년 8월 시점 이미 28인치와 33인치 TV를 주구장창 쏟아내기 시작했다.[110] # 그런데도 1989년 삼성과 금성에서 내놓은 33인치 TV는 매달 300대 이상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111]

1989년 금성사에서는 최신식 TV와 최신식 VTR을 한 데 내장한 '금성 비디오 TV'를 출시했다.[112] # 연이어 1990년에는 텔레텍스트 TV도 출시했다.[113] #

3.3. 기술력 변화

컬러 브라운관도 초기에는 전량 일본 수입에 의존했으나 1979년 4월 삼성전관에서 150억 원을 들여 컬러 브라운관 공장을 지은 후 최초로 국산 컬러 브라운관 개발에 성공했고(#), 1983년 삼성코닝이 미국 코닝글라스와 합작으로 세운 컬러TV 브라운관용 밸브 유리공장이 문을 열었다.[114] #

1985년에는 삼성전관에서 세계 5번째[115]로 형광체[116]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시점이면 이미 가공약품과 전자총 일부[117]를 제외한 컬러 TV 브라운관 요소는 전부 국산화된 셈이다.[118] #1 #2 #3

결국 국내 기업들의 피나는 국산화 노력 끝에 1986년 시점 컬러 TV는 일부 IC류를 제외하면 국산화율 90%를 기록했고, 브라운관 역시 화공약품 정도만 빼면 국산화율 80%를 기록했다.[119] #

1990년 시점 금성사는 22인치 이하 컬러 브라운관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삼성전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늦어도 1989년 이전에도 25인치 이하 컬러 브라운관은 다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

하지만 80년대 후반까지는 상술한 대형 TV들은 모두 일본에서 만든 브라운관을 수입해 조립한 거였다. 삼성은 NEC의 기술지원으로 1989년 26인치, 29인치 브라운관 자체개발에 성공했으며, 금성은 명목상으로는 1984년 26인치[120], 1988년 28인치/33인치, 1989년 29인치 TV를 개발했지만(#) 이 역시 히타치의 기술제휴를 통한 것이었다.[121] #

물론 1990년 히타치의 기술제휴가 끊긴 바로 그 해에 독자적으로 29인치 브라운관을 개발하고 비슷한 시기 25인치 브라운관 자체 개발에도 성공하며 이제 일본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자 개발력을 갖추는 데에 성공했음을 보여주었다. # 그리고 32인치 브라운관은 1994년 삼성이 일본에 이어 세계 2번째로 자체개발하는 데에 성공, 이제 한국 가전제품 기업도 일본 가전제품 기업 못지않은 기술력을 가졌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

1989년 한국 TV 품질 비교

3.4. 컬러 TV 가격 변화

1980년 8월 2일 컬러 TV 시판 시작 당시 국내에서 컬러 TV 판매 가격은 (대표 모델이던) 14인치는 32만 6370원, 20인치는 42만 4000원이었다. # 1980년 말 기준 근로자 평균 월급이 15만 747원(#)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각각 2개월/3개월치 월급을 주고서야 살 수 있던 셈이다.[122] 수출 가격도 보면 1981년 8월 기준 흑백 TV는 50달러 안팎, 컬러 TV는 로터리형 기준 14인치가 평균 200달러, 19인치가 250달러였다. 미국인 평균 소득에 대입하면 흑백 TV는 고작 4/3일, 컬러 TV는 5~6일 남짓만 일하면 살 수 있던 셈이다. 덤으로 국산화율은 흑백이 100%, 컬러는 85%[123]였다. 보너스로 기사 내용을 보면 흑백 TV 가격은 14인치는 약 10만 원, 20인치는 약 13만 원으로 추정되는데, 1975년경부터 거의 고정되어 온 가격이라고 한다.[124] #

1981년 8월 기준 가격은 13인치 28.6만 원, 14인치 30.6만 원, 20인치 로터리 39.8만 원, 20인치 리모컨 46.9만 원이었다. 당시 평균 월급이 18.1만 원 미만이던 걸 감안하면 14인치도 월급의 1.7배, 20인치 로터리는 2.2배, 20인치 리모컨은 2.6배에 달했던 셈이다. #

1984년 당시 컬러 TV 가격은 (로터리 기준) 14인치 약 28만 원, 16인치 약 31만 3000원, 20인치 약 34만 8000원이었는데[125], 당시 근로자 평균 월급이 29만 7,000원 가량이던 걸 감안하면 한달치 월급 남짓으로도 살 만해진 셈이다. # 1985년 전국 평균 TV 크기는 14.9인치였다. #

1986년 삼성 컬러 TV 가격은 14인치 로터리 19만 9800원, 20인치 리모컨 36만 6000원이었다. 1986년 8월 9일 삼성전자는 컬러 TV 생산 1,000만 대 돌파, 710만 대를 100개국에 수출, 12억 달러 수출고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

3.5. 컬러 TV 보급률 변화

한국에서 컬러 TV 보급률이 흑백 TV 보급률은 앞선 것은 컬러 방송 시작으로부터 고작 4년 후인 1984년에 들어와서였다. 1984년 7월 한국갤럽 통계[126] 상공부 통계에 따르면 컬러 TV 보급률은 1980년 12월 1.4%, 1981년 14.7%, 1982년 27.3%, 1983년 46%, 1984년 62%를 찍었으며[127], 덤으로 1985년에는 80%를 넘겼고[128] 1986년 89%에 달해 사실상 90%에 이르렀다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1987년 90%대 보급률을 기록해 사실상 전 가정 컬러 TV가 보급되었다. #1 #2 #3

1987년 기준 한국의 TV 보급률은 98.1%로 거의 전 가정 보급되었으며, 컬러 TV만 가진 가정은 57.4%에 흑백과 컬러를 같이 가진 가정은 19.9%, 흑백만 가진 가정은 20.9%로 한국의 TV 보급 대수는 1.2%였다.[129] #

1989년 1월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 컬러 TV 보급률은 83.1%[130], 흑백 TV 보급률은 26.4%[131]였으며, 가구당 TV 보급 대수는 1.2대였다. 참고로 동년도 VCR 보급률은 18.1%[132]였다. #

4. 1980년대 중반 ~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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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당시 판매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1985년 10월 1일 수도권을 시작으로 음성다중방송이 시작되었다.[133][134] 최초의 음성다중 TV는 1985년 1월 15일 대우전자에서 '대우수퍼비젼'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135] #[136]

1980년대 초반(대략 1981년경) 고급형 기종을 시작으로 # 채널을 이동할 때 버튼 및 리모컨[137]으로 바뀌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다이얼 방식은 RF단자와 컴포넌트가 없어 유선방송과 VCR, 게임기 등의 연결이 불편한 문제로 인해 자취를 감추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컴포지트 단자가 기본으로 탑재되었으며 싸구려가 아닌 이상 S-Video컴포넌트[138] 단자가 다 있었다.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가 주류였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25인치/볼록화면, 1990년대 이후 32인치/평면화면이 대세였다. 1987년 대우전자가 국내 최초로 PiP 기능 TV(TCX-2181FW)를 상품화하고 1992년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일반 평면사각(FST) 브라운관보다 2.5배 평면화된 '수퍼플랫 브라운관'을 탑재한 '슈퍼미라클 블랙(CNR-2999S)'을 시판했다. 1993년[139] 삼성전관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140]로 원적외선 원리를 브라운관에 적용시킨 '바이오TV(CT-2971B/2571B)'를 개발했으며[141], 1994년 '금성 와이드 비전'을 시초로 16:9 비율인 와이드 TV도 판매되기 시작했다.[142]

한편 CRT 수상기가 주력이던 시절 일부 회사는 다양한 스피커를 내장한 수상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저음을 보강해 줄 서브우퍼가 가장 많았으며 상단에 5.1채널의 센터 스피커 같은 스피커를 달기도 했고 기본 스피커도 고급화해서 출시했다. 물론 아무리 고급화를 해도 결국은 TV 스피커였기 때문에 음질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TV 소리를 RCA 단자로 출력 가능한 모델이라면 RCA 케이블로 별도의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 게 더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6:9 모델과 4:3 모델이 동시에 팔렸다. 프로젝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작되어서 DLP, 3색관 방식 등이 사용되었다.

4.1. CRT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다

한편 한국 회사들은 발전하는 TV 화면 기술에 맞춰서 브라운관 의존에서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금성사는 일제 액정 브라운관을 수입해 1986년부터 2.2인치 소형 TV를 생산했으며, 1988년부터 삼성전자는 액정 TV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정황상 LCD TV로 추정. #

국산 브라운관 TV 최대치가 37인치[143]였던 것처럼 기존 CRT로는 38인치 이상이 될 경우 브라운관 무게 때문에 더 이상 대형으로 제작을 할 수 없었으므로[144] 기기 아래쪽에서 상을 비스듬히 쏴올리면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화면에 비춰지는 방식인 '프로젝션 TV'가 고가의 대형 화면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이러한 프로젝션 TV는 CRT에 비해 두께는 같고 대신 아래에서 쏴올릴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높이가 약간 높다. 크기도 크기지만 제법 보급됐던 DLP 방식은 램프 수명 문제가 심각했다. 램프 수명이 다해 밝기가 떨어질수록 화면도 어두워지기에 보통 2년에 1번씩 교체해 줘야 하는데 램프값으로 10만이 기본으로 깨지는 환상적인 유지비용을 보여줬다. 정 중앙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화면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게 심했다.

프로젝션 TV는 1982년 첫 개발됐음에도 10년 넘게 보급이 잘 되지 않다가[145] 1993년 금성사삼성전자에서 전량수입에 의존해 온 프로젝션 TV용 렌즈를 자체개발 하는 데에 성공하며 제작 단가를 하락시킨 후(#1 #2) 삼성전자가 200인치 프로젝션 TV(#)[146]와 HD 프로젝션 TV(#), 1994년 금성사 HD 프로젝션 TV(#)[147], 1995년 삼성전자 입체 프로젝션 TV(#)와 와이드 프로젝션 TV(#1 #2) 그리고 LG전자(1995년 금성사에서 사명 변경) 46인치 와이드 프로젝션 TV[148](#), 1996년 LG전자 디지털 와이드 프로젝션 TV(#)를 앞다투어 만들며 일본도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자체 개발력을 보여주었고, 1997년 7월 교육부가 교단 선진화사업으로 교육용 보급이 본격화된 데다가 LG제 60인치 프로젝션 TV[149]를 3.1개월치 봉급 수준인 442만 원으로 가격을 낮추면서[150] 1998~1999년부터 점차 보급되었다. #1 #2

1990년대 후반부터는 PDP/LCD TV도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프로젝션 TV보다 고가의 대형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1996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 22인치 LCD TV를 출시했다. #

PDP TV를 국내 처음으로 개발한 곳은 의외로 기술력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대우전자[151], 오리온전자와 공동개발해 1996년 21인치 PDP TV를 개발했다. # 1998년에는 LG전자에서 40인치 PDP TV를 개발했고(#[152]),얼마 안 가 50인치 PDP TV도 개발했으며,[153] # 그 직후 대우전자도 (오리온전자와 함께) 42인치 PDP TV를 개발했다. # 1999년에는 대우전자가 42인치 PDP TV 양산에 성공했으며(#1 #2[154]), 같은 해에는 LG전자도 60인치 PDP TV 개발에 성공했다.[155] #

4.2. 일본도 위협하는 기술력, 상대적으로 낮아진 가격

1990년 시점에도 금성, 삼성 대형 TV 가격은 20인치(대우전자) 약 40만 원, 26인치 69만 원, 29인치 109만 원, 33인치 199만 원, 37인치 399만 원이었다.[156] 당시 한국인 평균 월급이 64만 2,000원이던 시절에 이 정도 가격이었다. 20인치는 18일치, 26인치는 한달치 수준으로 가격 포지션이 대폭 낮아졌으나 29인치는 1.7개월, 33인치는 3.1개월, 37인치는 무려 6.2개월 포지션이었다![157] # 기사에 따르면 3년 전(1987년)까지는 16인치 TV가 가장 많이 팔렸지만 1989년부터는 20인치 TV 수요층이 가장 두꺼워졌다고 한다.

1993년 1월 금성사에서 한국 최초로 36인치 와이드 TV를 출시했다.[158] 가격은 420만 원. 당시 한국 평균 연봉이 97만 5,000원이었으니 당시 근로자의 4.3개월치 봉급이라는 엄청난 가격이던 셈이다. #[159]

1995년 5월[160] 아남전자에서 한국 최초로 37인치 (슈퍼 플랫) 브라운관 TV '화왕'을 자체 제작해 출시했다.[161] 가격은 348만 원. 당시 한국 평균 월급이 129만 원도 되지 않았으니 당시 근로자의 2.7개월치 봉급만으로도 저 한국 최대 브라운관 TV를 살 수 있게 된 셈이다. 당시 광고 워낙 크기가 커서 하루에 고작 40대밖에 만들지 못할 정도였으며, 공략 대상은 대졸 이상 대도시 거주 40대 남성, 월소득 300~400만 원[162] 상류층 이상이었다.[163] 참고로 당시 37인치 브라운관 TV를 만들던 곳은 일본 미쓰비시, 미국 RCA, 그리고 한국 아남이 전부였다. #

1995년 명품 브랜드, 32인치 와이드 더블스크린 TV(#)를 출시한 삼성전자는 1996년 세계 최초로 독자규격인 12.8:9 TV를 만들었다. 이는 TV 화면 폭을 1인치[164] 늘리는 거라고 한다. 1996년 광고 1997년 광고 1998년에는 29인치 완전평면 TV를 출시했다. #

1998년, LG전자가 평면 CRT 플라톤을 개발했다. 당시 광고[165] 같은 해 10월 삼성전자도 PDP TV 브랜드 파브를 출시, 보통 400만 원 대에 최고 558만 원이라는 엄청난 고가에도 불구하고 출시 20일 만에 1천 대를 팔고 1천 대의 추가 예약을 받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 #2 당시 광고

4.3. 브랜드 이미지 변화

이 무렵부터 사반세기 동안 일본을 추격하고 기능올림픽 9연패를 달성하면서 쌓아온 기술력과 인적 수준이 드디어 제 결실을 맞이하기 시작, 1990년 공업진흥청 평가 기준 "국산 TV가 소니 TV보다 더 품질도 좋고 전기소모량도 적으며 가격도 절반 가량 싸다"는 평가가 나왔다. #1 #2 1992년에도(#), 1994년에도(#) 이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국산 TV는 오늘날로 치면 중국 TCL, 하이센스 같은 가성비 고품질 포지션을 누리게 된 셈이다.

기성 선진국에서의 브랜드 이미지 역시 1992년경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최초로 타임스퀘어에 광고판을 걸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보증이 사실상 공식화됐고, 그 직후인 1993년 이건희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166] 삼성전자의 오벌 로고 변경과 1995년 금성사(골드스타)의 LG전자로의 사명 변경으로 둘 다 빨간색 중심의 다소 촌티나던 로고에서 선진국 트렌드에 맞는 세련된 로고로 바꾸면서[167][168] 과거 서양에 잔존하던 싸구려 가성비 브랜드 이미지도 일소되기 시작한다. 결국, 1995년 미국 소비자협회에서도 삼성 TV의 퀄리티가 소니, 도시바, 미쓰비시보다 낫다는 평가가 나오게 된다.[169][170] # 이는 삼성이 11년 후인 2006년 TV계 절대강자이던 소니를 제치고 세계 TV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될 첫 발판이었다.

그리고 냉전 종결을 틈타서 세계경영을 표방한 대우전자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같은 진정한 글로벌 시장에서 국민 브랜드로 자리잡게 된다.

4.4. 크기별 TV 판매량 변화

1987년까지 전체 TV 판매량 대비 20인치[171] 이상 대형 브라운관 TV 판매량은 고작 연간 5%에 그쳤으나[172], 1988년에는 소득 증가[173]1988 서울 올림픽 특수를 맞아 금성 15%(26인치 이상 0.7%[174]), 삼성 13%, 대우 5.5%로 폭등한 후 1989년에는 금성 20%(26인치 이상 1.5%), 삼성 20%, 대우 17%로 도합 20%에 육박하게 되었고, 사무실 및 회의용으로나 팔리던 28인치, 33인치, 45인치 프로젝션 TV의 일반 가정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1987년까지는 16인치 TV가 가장 많이 팔렸지만 1989년부터는 20인치 TV 수요층이 가장 두꺼워졌다고 한다. # 1991년 기준 20인치와 21인치 TV 판매량의 합이 전체 TV 판매량의 과반을 처음으로 넘겼다. #[175]

25인치 이상 대형 TV 판매 비중도 1987년까지 1% 미만[176], 1989년 3% 안팎, 1990년 5%였던 게(#)[177] 1991년 12%, 1992년 21%로 매년 2배 이상 늘었고, 1992년 기준 저 21% 중 25인치가 전체의 70% 가량, 29인치는 25%, 33인치는 4%, 그 이상은 1%에 그쳤다.[178] # 1993년 초까지 TV 구매 최고 인기 상품은 21인치였고 1994년 25인치 이상 대형 TV 판매비중은 15% 미만이었으나, 1995년에는 30% 이상이 되었고[179], 1996년 시점엔 이미 주류는 25인치(판매 비중 28%)에 29인치(26%)도 떠오르게 되었다.[180] #1 #2 #3

IMF 외환위기에서 회복세를 맞이하기 시작한 1998년 10월 기준 29인치 이상 대형 TV 판매비중이 1998년 상반기까지 월간 판매량의 30%였던 게 1998년 이후 월간 판매량의 45%를 넘기게 되었다. #

4.5. 크기별 TV 보급률 변화

1992년 6월 한국갤럽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TV 보유율은 99.2%이며 보유 가구 중 29.3%가 2대 이상[181], 4.0%가 3대 이상의 TV를 가지고 있었다.[182] 또한 컬러 TV 보유율은 94.9%, 흑백 TV 보유율은 5.1%였고, 크기별 TV 보유율은 14인치 이하 44.0%, 15~19인치 31.0%, 20인치 이상 24.9%였으며(평균 TV 크기 16~17인치로 추정)[183][184], 리모컨 방식 50.3%, 손조작[185] 방식 49.7%로 나타났다.[186]

심지어 이조차 예전보다 보급률이 대폭 오른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그 1년 전인 1991년 한국에서 20인치 이상 TV 보유율은 고작 18.6%였고, 그조차 대다수가 1989~1990년 새로 장만한 경우라고 한다.[187] # 그 1년 후인 1993년에는 삼성경제연구소 조사 기준 20인치 이상 보유 가구 비율이 35.7%로 올랐다. #

1995년 전국 평균 TV 크기는 20.5인치였다. 10년 전인 1985년 14.9인치, 고작 3년 전인 1992년 16~17인치 가량이던 걸 감안하면 집에서 보는 화면 크기가 급속도로 커진 셈이다. # 참고로 서울 한정으로는 1996년 기준 23.5인치. # 전술한 것처럼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생활 수준을 감안하면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변화다. 때문에 1990년경까지는 20인치 이상도 대형 취급이었고 25인치 이상은 아예 초대형 취급이었지만[188] 1992년부터 25인치 이상이여야 대형으로 취급이 바뀌었고, 1996년 시점에는 21인치 이하도 중형 또는 소형으로 취급받게 된다. #

이걸 보면 체감 가격이 싸졌는데도 20인치 이상 TV 보급률이 생각보다 낮았던 셈인데, 기존에 집에 사 놓은 비교적 작은 TV를 큰 거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잠깐만 쓰고 버릴 이유도 없으니 이런 수치가 나온 것이다. 실제로 1990년 기준 한국인들은 TV 하나를 사면 평균 7.1년을 썼다고 하는데, 1979년 6년이던 것에서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즉 1983~1984년쯤 산 14인치 TV(설령 로터리식이라 할지언정)를 1990년에도 그대로 쓰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던 것. #1 #2 실제로 1991년 기준 소형 TV(20인치 미만)는 1988년 이전 산 것의 비중이 많았고 대형 TV(20인치 이상)은 1988년 이후 산 것의 비중이 많았다. # 그러나 1994년에는 TV를 5년 이상 쓰는[189] 사용자 비율도 46.9%로 대폭 줄었다. #

5. 2000년대 초중반

파일:LCD와 CRT의 비중.jpg
2004년 ~ 2010년 세계 TV 시장 비중[190]
대략 1990년대 후반만 해도 볼록한 CRT 출시, 판매가 여전했으나 2000년대 초반 이후 삼성전자LG전자에서 평면 CRT, CCFL 백라이트 LCD, PDP를 본격 생산하면서 평면화면 시장이 활발해졌다. ## LG전자는 2006년 6월 울트라슬림 브라운관을 개발해내고# 8월 출시하면서# 그동안 브라운관 주력제품이었던 볼록형 브라운관 TV와 슈퍼슬림 브라운관 TV의 생산량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

2003년 들어서 가전제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볼록화면 CRT TV는 5대도 채 안 됐으며, 그마저도 인기가 없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191]

프로젝션 TV는 2000년 정점을 찍고 2001년부터 PDP, CCFL LCD 패널 보급과 함께 금방 사장되어버린 과도기 제품이 되었다. 국내기업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2006년을 끝으로 CRT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고#, 일본기업으로는 소니가 2008년을 끝으로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다. # 대략 2007년 정도만 해도 크고 저렴하다는 점 때문인지 학교에서 많이 쓰였지만, 지나치게 짧은 램프 수명 문제와 시야각 문제로 2000년대 말부터는 전부 LCD, PDP, 빔프로젝터로 교체되는 추세였다. 다른 종류의 대형 TV가 많이 싸진 마당에 유지비가 지나치게 비싼 프로젝션 TV를 굳이 수리하지 않고 내다 버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프로젝터는 작아서 설치하기도 쉽다. 때문에 비싸디 비쌌던 프로젝션 TV가 가끔 무료나눔으로 풀릴 정도였다.

하나 시장이 LCD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8년 2월까지는 LCD TV의 BLU(back light unit)로 CCFL(Cold Cathode Flourscent Lamp)이나 EEFL(External Electrode Flourscent Lanm)에 LCD 패널은 TN을 많이 사용했는데, 문제는 이런 조합의 LCD TV는 반응 속도와 가격 문제, PDP보다 가격 대비 작은 화면, TN 패널 특유의 저급한 시야각, 짧은 CCFL 백라이트 수명[192], 잦은 고장 때문에 보급이 더뎠다. 특히 2006년 소비자보호원[193]에 접수된 디지털 TV 불만 상담건수가 1년전인 2005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급증해 정점에 달했는데, 짧은 무상수리 보증기간에다 고장까지 자주 일어나니 몇 백만원을 주고 LCD TV를 구매한 소비자들의 속만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당시 브라운관 TV는 무상수리 보증기간이 4년이었지만, LCD와 PDP는 보증기간이 1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짧은 보증기간 때문에 TV를 몇 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거액의 수리비를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때문에 LCD TV를 구매했다가 이러한 낭패들을 직면하고 구매 이전 사용하던 브라운관 TV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CCFL을 썼더라도 LCD TV는 당시 시판하던 다른 종류의 TV보다는 전력소모를 덜 먹었고, TV라는 제품의 특성상 (가정주부 등이) 하루 종일 백색소음 용도로 켜 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제법 팔려나갔다. 2006년 3분기 들어서 금액 기준에서 LCD TV 시장규모(490억 달러)가 CRT TV 시장규모(265억 달러)를 크게 앞질렀으며, 이듬해인 2007년 4분기는 LCD 출하량이 브라운관 출하량을 사상 처음으로 뛰어넘었다.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2007년 4분기 LCD TV 출하량이 2,850만대로 전체 TV 중 47%의 점유율을 보인 반면 CRT TV는 46%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추월하였다고 보도했다. # 2007년 12월 20일 삼성SDI 브라운관 공장 최후의 2개 생산 라인인 8,9 라인의 가동을 모두 중단, 폐쇄하면서 삼성의 브라운관 TV 사업은 이 날로 끝이 났다. #[194]

이 시기에는 PDP가 대형 TV 시장 주류로 자리잡았다. 비록 전기를 많이 먹는 단점은 있었지만, 당시 CCFL LCD보다 저렴하고, 색감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많은 TV 제품들이 DVI/HDMI 입력과 DTV 디코딩으로 HD 해상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2006년 LG 엑스캔버스처럼 특정 장면을 돌려보는 '타임머신 기능'이 탑재되는가 하면 2007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특수 안경으로 보는 3D DLP TV를 만들었다.

디지털 TV 보급률이 더디기도 했다. 2006년 기준으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도입된 지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고, 무엇보다 당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은 전국 90% 지역에서 송출 중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여러 문제들로 인해 디지털TV가 잘 보급되지 않아 2006년 2월 말 디지털 TV 보급률은 전 가구의 18%에 불과하였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 지지부진 아날로그 TV에 비해 고가라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아날로그 CRT TV는 30만 원 대였으며, 디지털 CRT TV는 70만 원이 넘었다. 거기다가 대부분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대형으로 가는 추세였다. 또한 디지털 TV를 구입해도 2001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공시청 시설이 노후화 되어 디지털 방송 수신이 잘 안 되는 것도 전환이 더딘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로썬 모든 방송들이 디지털 방송으로 변하는 6~7년 후에 디지털 TV를 구매하는 게 적합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

결국 2006년 9월 14일, 방송위원회정보통신부 산하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당일 1차 회의를 거쳐#, 동년 12월 28일 방송위원회에서 개최된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의가 이견 끝에 무산되면서 이듬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무산된 사유는 지상파 방송사업자와 문화관광부, 산업자원부 등 일부 유관부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까닭이었다. #

6.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LCD의 패널의 종류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TN 패널보다 색감과 시야각과 명암비가 훨씬 좋은 VA 패널과 IPS 패널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말부터 VA 패널 + LED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한 LCD TV가 등장하기 시작했다.[195] LED 백라이트 LCD TV는 기존 CCFL 백라이트 TV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밝았고, 전력 소모도 적고, 광원의 크기도 작으니 더 얇게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 광원의 수명이 금강불괴 수준이었다. 때문에 등장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순식간에 CCFL LCD TV를 구형으로 만들어 도태시키고 시장을 독식하게 된다. 2010년대 초반부터는 더욱 색감이 선명한 IPS 패널도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여기에 LCD 패널 자체의 가격하락까지 가세하면서 싸고 선명하고 고장 안나는 LED 백라이트 LCD TV는 2020년대인 지금까지도 TV 시장의 절대적인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 최초LED TV는 2009년 3월 삼성전자가 개발했다. 정확히는 'LED 백라이트 LCD TV'였지만. 가격은 최소 310만(40인치)~650만 원(55인치)로 같은 크기의 LCD TV보다 25~30%나 비쌌다.[196] #

반면 2000년대를 호가했던 PDP TV는 하락세를 맞았다. 아무리 개선을 해도 LED 백라이트 LCD보다 전력을 많이 먹었고, 밝기에서 많이 뒤쳐졌으며, 무엇보다 이 시절부터 1080p 해상도가 대중화되던 시기였는데 PDP 자체가 고해상도를 구현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50인치 미만 제품은 1080p 제품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 결국 인기가 시들해지고 삼성과 LG는 2014년을 끝으로 PDP TV 패널 생산을 종료했다.

LCD TV의 가격이 저렴해졌기 때문에 극소수의 남아 있던 CRT TV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삼성은 2007년 이후, LG는 2010년 이후에 국내에서 볼록/평면 브라운관 생산을 전면 중단하였다. 2010년 이전만 해도 CRT를 소지하는데가 다소 있었고 심지어 일부 판매했고 2010년대 초반에는 CRT를 소지하긴 해도 LCD TV를 대부분 구입했을 것이다. 아날로그 방송 종료 후에는 2010년대 중반에는 (디지털 셋탑을 연결한) 시골과 도서지역, 빈곤층 집[197], 일부 오래된 곳을 제외하면 소멸되었고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골집이나 도서지역도 TV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2020년 이후로는 드물게 소지하는 곳 외에는 대부분 소멸되었다.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 56년간 이어진 아날로그 방송이 정파되었다. 종료 순간

2012년 하반기 WOLED 방식 OLED TV와 OLED와 LED 백라이트 기반 4K UHD TV, 2013년 커브드(곡면) TV, 2015년 양자점을 백라이트로 이용한 SUHD[198] LCD TV와 HDR을 지원하는 TV가 등장했다. 하지만 초기형 OLED TV[199]는 그야말로 시제품 수준이었고 가격도 많이 비싼것은 물론, 내구성, 특히 번인 문제가 심각해서 인기는 별로 없었다.

세계 최초 대형 OLED TV는 2013년 1월 LG전자에서 개발했으며, 55인치, 두께 4mm, 10kg짜리 가격이 1000만 원이었다. 당시 평균 월급이 261만 7,000원이었으니 3.8개월치 봉급을 줘야 살 수 있던 셈이며, 때문에 발매 초 OLED TV는 예약 판매로 팔았다. # 백라이트 없이 픽셀이 스스로 빛나서 완전한 검정과 얇은 두께를 동시에 만든 거라고 한다.

입력단자가 HDMI로 통일되기 시작하더니 2010년 S-Video를 시작으로 중반부터는 D-Sub와 D-Sub/DVI 음성 출력 단자가 제외되었으며, 후반부터는 컴포지트와 컴포넌트 단자마저도 점차 빠지고 있다.

인터넷을 연결해서 스마트폰과 비슷하게 쓸 수 있는 스마트 TV가 등장했다.

2010년 극초반에 3D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3D TV가 보급되었으나, 안경이 따로 있어야 했고, 콘텐츠도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 시청시 멀미를 유발한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서 막상 사놓고도 3D 기능은 안 쓰기 부지기수였다. 결국 이 기능은 시간이 지나며 나오는 신제품일수록 하나 둘 자취를 감추더니, 4K(UHD) 해상도의 TV가 출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UHD로 몰리면서 잊혀졌다.

HD 비율의 TV가 대중화되어 방송, 영상콘텐츠도 죄다 16:9 비율 위주로 제작, 보급되면서 이전의 4:3 비율의 TV가 가정집에서 조금씩 퇴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부터 서울과 경기도권 지역, 인천을 마지막으로 1956년 이후 56년간 지속되던 전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전면 종료되면서 이때까지도 현역으로 작동되던 CRT 아날로그 TV들이 대거 폐기되었다. 물론 기존 아날로그 TV 이용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 임대 방식으로 디지털 → 아날로그 변환 셋탑박스를 제공해 주는 선택지를 제공해 주기는 했다.[200] 하지만, 방송 자체가 16:9 전용으로만 제작하게 되어 아날로그 TV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4:3 비율의 TV에서는 화면이 잘린다던가, 아니면 억지로 우겨넣어서 표시되는 정보가 심하게 홀쭉해진다던가 등의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내다버렸다. 결국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까지 연명하던 극소수의 아날로그 TV는 점차 16:9 비율의 저가형, 혹은 중고 LCD TV로 대체되며 사라졌다.

다만 아직 아날로그 케이블에 남아 있는 가구와 디지털 수신기 보급이 미비한 북한 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부는 전방 지역 및 케이블TV의 아날로그 송출을 유지하기로 했다. 기사 1, 기사 2 전파라는 특성상 파주, 동두천, 연천, 포천 등 최전방 지역은 수신이 가능했다. 가령 송신소가 근처에 있는 동두천시, 연천군이라든가. 단, 북한과 중국의 아날로그 TV 방식은 PAL이라서 한국용 NTSC TV는 수신 불가능하다.[201] 북한을 향해 송신되는 KBS 1TV 아날로그 전파는 PAL 방식 10번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송출될 것으로 전해졌다. 멀티 시스템 수상기[202] 또는 TV 수신 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수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북한지역에서는 따라서 PAL 방식으로 계속해서 시청중일 것으로 추정된다. 접경지역과 평양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약한 전파로도 멀리까지 신호 전달이 가능한 DTV 특성상 ATSC 방식으로 DTV 수신을 직접 하는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북한 내부의 태블릿과 노트북 보급도 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이트박스 태블릿 가운데 TV 수신 기능을 가진 모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들이 흘러들어간 듯하다.링크[203] 다만 평양 거주 상류계층을 제외하고 남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PAL 방식으로 시청하는지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통계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탈북자들이 많이 발생한 곳은 평안북도나 량강도, 함경북도 같은 북중 접경지대다.

KBS1의 PAL 송출 영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연변라지오TV방송국 등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채널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자체제작하는 프로그램들은 2010년대 들어 진행자의 말씨, 무대 디자인, 방송 연출 기법 등이 영락없는 KBS1의 레귤러 프로다. 다만 이는 한때 인기 있던 위성방송 수신기의 불법 수입도 영향이 있다.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모니터에 텔레비전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 출시되어 컴퓨터와 같이 쓰는 사람들 때문에 대형 TV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증강현실 장비를 착용할 경우 어디서나 가상으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증강현실 기술 발전 또한 TV의 도태에 한몫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홀로렌즈로 TV를 시청하는 모습 TV를 아예 보유하지 않는 가구도 1인 가구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극소수 잔존하던 프로젝션 TV는 2010년대를 못 넘기고 거의 전멸했는데 램프 수명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CRT TV보다도 더욱 희귀할 정도다.

7. 2020년대 ~

LED 백라이트 LCD TV는 기술적 특성상 여전히 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고, 특히 중국 업체들이 대형 LCD 패널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생산하면서 LCD TV의 가격도 하락하였다. 삼성전자는 LCD에 양자점 필름을 입혀 명암비와 색 재현률이 일반적인 컬러 필터를 사용하는 LCD에 비해 우수한 QD-LCD를 양산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기술이면서 더 저렴한 LG 나노셀이 있으며, 삼성전자가 이를 QLED라 하며 마케팅하고 있는데 딱 봐도 OLED에 편승한 마케팅 용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 OLED 패널의 기술 수준이 개선되었다. 번인 수명이 조금 더 개선되었으며 가격도 이전보다는 저렴해졌으나, 아직 LCD의 위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OLED는 암부 표현능력이 LCD인 QLED에 비해 크게 우수하고 얇으며 다양한 폼팩터를 구현하기에 좋다.

기존의 방송 수신장치로서의 기능은 도태되고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컴퓨터에 물려쓰는 대형 모니터, 또는 화면만 큰 스마트 기기의 일종으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테면 드라마 같은 경우 넷플릭스를 쓰는 용도로 바뀌고, 현재는 화면 잘 나오는 TV에 스마트 셋톱박스를 연결한 뒤에 넷플릭스, 왓챠 등을 구독하여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을 본다. 아니면 아예 스마트 TV로 자체 앱을 깔든지 스마트폰과 연동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TV 프로그램 방송을 굳이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리모콘 딸깍거리며 채널을 돌리는 방식의' 기존 형태와는 달라지는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TV 방송은 그 기능 중 상당 부분을 유튜브 등에 빼앗겼고 1990년대 ~ 2010년대 초반에 비해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시청률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이젠 지상파 프로그램도 0~1% 대가 나오는 편이며, 10% 이상 받기도 힘들어진 상태다. 그나마 일부 잘 나가는 지상파나 종편, 케이블 프로그램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으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중장년층이나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인 관계[204]로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TV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고지식한 사람들을 위한 미디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205]

과거에 한국 전역을 휩쓸었던 예능, 개그 프로 등이 종영 및 컨셉트 변화 등으로 인해 추억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단, TV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기존 TV 프로그램들을 보는 방식이 바뀐다고 보면 된다. 즉, 유튜브 같은 데서 라이브를 보듯이 본방은 본방대로 보고 놓치면 다시보기로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방송사들도 TV만 의존하지 않고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206] TV는 TV 프로그램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영상 콘텐츠들을 보는 기기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대형 모니터나 프로젝터같은 포지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하여도 가정에 TV를 두지 않는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으며 모니터로의 사용처 변화 또한 'TV'라는 분류가 의미가 없어지고 흡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텔레비전'의 범위는 아주 넓다. 유튜브, 인터넷 방송 등도 텔레비전의 정의에는 전부 포함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등 수많은 디스플레이들이 텔레비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한 프로그램이 특정 시간대만 방영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따로 맞춰 고정된 화면을 바라봐야 하는 기존 시스템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위시로 한 스마트폰이나 PC에 비해 굉장히 불리하다.[207] 즉, 1980년대에 주류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전화기와 지금 스마트폰이 모양, 기능이 같은 물건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판이해졌듯이, TV도 같은 절차를 밟게 될 전망이다.[208]

한편 이렇게 TV가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시대에서 도태되면서 일부 방송사들은 새로운 수요층으로 노년층과 중산층들을 찾게 되는데, TV 방송사들은 노년 시청자층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TV조선미스트롯 시리즈, KBS나훈아 콘서트를 방영하여 노년층들의 수요를 모으고 있는 한편, 예능 프로그램들도 중산층들의 돈벌이를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방송들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각종 OTT 등에 구작과 신작을 판매하면서 사업 모델을 기존의 플랫폼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앞다투어 전환하고 있다.#1 #2 #3 뉴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주요 방송사의 경우 이들 장르의 프로그램의 편성 비중을 늘려서 다른 장르의 방송 편성을 줄이거나, 재방송 비율을 늘리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는 TV 방송국의 시청률 파이가 줄어들었고, 장수 프로그램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으며 예전에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을 부활하는 경우도 늘기 시작했다. 신생 예능들은 2~3개월도 못 가고 종영되는 일이 빈번하며[209], 그나마 성공한 건 일부 드라마나 정신적 후속작, 신선한 포맷을 차용한 예능이나 부활한 프로그램 정도고 대중매체 발달로 성공작을 딱히 찾기 힘든 실정이다. 또한 아침부터 저녁 6시까지는 방송사의 경영 악화로 교양이나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드라마 시간대 역시 예능으로 대체되는 데다가 본방 프로그램도 줄어드는 실태다. 아울러 2021년 7월 1일부터 지상파도 중간광고가 가능해지면서 사실상 지상파, 케이블 구분이 없어진 상황이다.[210]

또한 2012년부터 24시간 방송을 하던 지상파는 케이블 방송의 막강한 위세와 OTT(특히 넷플릭스)의 태동으로 인한 재정 문제로 인해 2017년 12월 30일 MBC를 시작으로 하여 스스로 방송시간 제한을 걸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28일 JTV, 2021년 5월 1일 CJB, 2022년 4월 16일 kbc, 2023년 1월 7일 G1방송, 2024년 1월 20일 ubc, 2024년 8월 17일 JIBS, 2024년 9월 21일 SBS, KNN, TJB, 2024년 9월 28일 TBC가 다시 종일방송 체제를 종료하고 방송종료영상과 애국가 영상을 송출하는 정기 정파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211] 반면 재정 문제로 시달리는 지상파와 달리 재정이 풍부한 종합편성채널에서는 종편 예능과 종편 드라마가 흥행으로 재정이 많이 좋아지면서 2020년대부로 정파 방송이 사라졌다.

CCFL 백라이트를 쓰던 시절의 LCD TV가 수명 종료 등의 문제로, PDP TV는 전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가정집에서 퇴출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PDP는 우수한 색감 때문에 간혹 중고시장에 헐값에 팔리기도 하지만, CCFL LCD TV는 현행 LED 백라이트 LCD TV 대비 장점이 전혀 없어서 그냥 버려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LED 백라이트 LCD TV가 그저 필요없다는 이유로 중고시장에 나오기도 하는데, 고장이 나는 경우가 적어서 중고시장에서 인기가 좋다. 해외로 수출되기도 한다.

CRT TV는 이제 먼 과거의 유물이 되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212] 2020년대에 CRT TV를 여전히 쓰는 경우는 NES~N64 시절 고전게임기에 꼽아 사용하는 정도 외에는 잘 없다.[213] 오히려 서든어택 등 고전 PC게임에 쓰이는 CRT 모니터가 더 흔할 정도. 그렇다고 또 수요가 없는 게 아니라 심히 애매한 위치.

2022년 미국 TV 시장 점유율, 정확히는 소비자 점유율[214]은 삼성 33%, LG 19%로, 한국 양대 브랜드가 미국 소비자 점유율의 과반이다. 3위인 비지오[215]도 11%, 일본 브랜드는 도합 12%며[216], 중국 브랜드는 도합 10%,[217] 필립스[218]는 3%다. # 링크에 따르면 LG는 2023년부터 삼성에 OLED TV 패널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7.1. 프리미엄 TV

LG에서 2020년 10월 TV 자체가 돌돌 말려 들어가는 롤러블 TV를 출시했다. 크기는 65인치, 당시 가격은 1억 6,667만 원.[219] #1 #2 때문에 출시 당시 대통령이던 문재인은 2019년 시제품을 처음 본 후 이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공식 행사에 6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한국 기술력 쇼케이스로 써먹었다. #1 #2 그러나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과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때문에 잘 안 팔려 2024년 단종되었다. #

삼성도 이에 질세랴 2020년 12월 마이크로 LED TV를 출시했다. 크기는 110인치, 당시 가격은 당시 한국인의 4.45년치 봉급인 1억 7,000만 원. # 그로부터 2년 전인 2018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146인치 모듈형 마이크로 LED TV인 '더 월(The Wall)'을 공개한 바가 있다. # 2024년에는 114인치 버전을 1억 8,000만 원[220] 때문에 삼성 마이크로 LED TV는 지금도 핵심 삼성스토어나 유명 백화점 내 매장에서만 볼 수 있고, 구매 역시 사전예약으로만 가능히다. #

2026년 1월 삼성전자는 마이크로 RGB TV를 공개했다. #

8. 참고 자료

일본인이 쓴 한국 방송의 역사[221]


[1] AFKN의 도움을 받아 오후 7시부터 30분 동안만 임시 편성하는 수준이었다.[2] 진공관식을 뜻하는 영어 "Vacuum Desk Type"에서 앞글자 VD를, 19인치라는 의미에서 19를, 첫 텔레비전이라는 의미에서 1을 더해 만든 모델명이다.[3] 체급을 감않면 2019년 르완다의 마라폰 못지않은 무모한 도전이었던 게, 당시 한국은 1인당 GDP 134.4달러, 2026년 기준으로도 1,381달러에 불과했던 최빈국으로, 가나(267달러), 필리핀(214달러), 이집트(168달러), 태국(165달러)은커녕 마다가스카르(151달러), 아프가니스탄(136달러)보다도 가난하고 차드(126달러), 나이지리아(124달러), 파키스탄(122달러), 케냐(120달러)과 동급이었다.[4] VD-191 개발 3년 후인 1969년 시점에서도 TV 국산화율은 고작 8%라는 참담한 수치였다는 점에서 히타치의 잔향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5] 그러니까 역으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직접 한 설계에 맞춰서 일본 부품을 조립했다는 말이다.[6] 35,000대 중 16,854대가 잔존했는데, 전국 TV 수가 500만 대이던 시절에 이 정도였다.[7] 물론 당시 기준 나름 대형 크기, 흑백 TV 시절 신기한 기능을 넣는 경우가 적었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텔레비전'이라는 국뽕 섞인 자긍심도 높은 잔존율에 한몫했지만.[8] 애초에 서울과 부산 지역을 제외하면 볼 수 있는 채널은 중앙방송국(KBS)이 유일했다.[9] 1967년 기준으로는 63,500원이었다. 참고자료 2025년 가치로는 229만 원이다.[10] 참고자료 2025년 가치로는 약 300,000원이다. 사족으로 이 통계는 한국 최초의 산업별 임금 실태 조사였다.[11] 참고자료 2023년 가치로는 약 124,400원이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가정의 3개월치 식량 수준이었다. 금성사 TV 가격에 자주 대입되는 '쌀 스무 가마니(1.6t)'는 일반 가정의 5년치 식량 수준이던 셈이다.[12] 1963년 TV 수신료는 당시 평균적 한국인의 하루치 일당 수준이었고 1970년에도 하루치 일당의 절반 남짓 수준이었다. 현재 TV 수신료가 월 2,500원인 것과 비교해보자.[13] 아씨(1970~1971), 여로(1972) 등[14] 당장 검정 고무신이기영 집안이 당시 한국에서는 중산층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15] 1973년 개발해 1974년 초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가격은 한 대에 4만 8천 원으로 일반 TV 가격의 절반, 월급(3만 6천 원)의 4/3배였다. 새마을TV 실물 사진은 여기서 볼 수 있다.[16] 당시 가격 104,900원(당시 3개월치 봉급 수준). 한국 최초 대형 트랜지스터 TV다. # 같이 출시된 금성사 최초 트랜지스터 TV인 VT-66S(17인치, 92,300원, 역시 당시 3개월치 봉급 수준)는 1978년 이 TV로 박정희의 제9대 대통령 취임식을 보는 가족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다. #[17] 기존 TV보다 전력소비량 30% 감소, 수명 2배, 선명도 10% 증가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광고이다. 프리미엄급 TV에 속했다.[18] 상단의 광고에서 나오듯이 네덜란드 필립스, 일본 NEC에 이어 세 번째이다.[19] 참고로 1980년 전체 생산량 583만 대 중 무려 88.2%가 수출된 거라고 한다. 1979년 국내 판매량 160만 대에서 1980년 57만 대로 대폭 줄어서(원인은 오일쇼크로 인한 내수 불황) 그 남은 게 다 해외로 수출된 것이다. 수출 실적을 보면 25%가 미국, 20%가 유럽, 나머지는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 같은 방대한 틈새 시장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한국산 흑백 TV에 대한 평가는 "일본 것보다 디자인은 떨어지지만 싸고 성능은 조금도 손색이 없다." 실제로 1980년 3월호 Consumer Reportwl 206페이지에 최우수 14개 제품이 나열되었는데 미제 10개, 일제 3개(파나소닉, 히타치, 산요), 국산 1개(삼성 이코노 칼라 TV)였다. #[20] 1983년 대우전자로 가전사업부문 흡수.[21] 화면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일그러지는 현상이다.[22] 전원을 끌 때 브라운관 형광막이 타 들어가 점 모양 불빛이 3~4초간 뜨는 현상. 이럴 경우 수상기 수명이 줄어든다.[23] 화면이 쉽게 흐려지거나 얼룩지는 현상이다.[24] 당연히 시기상 브라운관 등 핵심 부품은 죄다 히타치제를 수입했을 것이고, 현재 한국에 단 2대만 남아있다고 한다.[25] 하지만 1987년 시점까지 20인치 연간 판매량이 5% 미만이던 걸 감안하면 그보다 더 가난했던 70년대 한국에서 20인치 TV 보급률은 그보다도 더 낮았을 것이다.[26] 설계, 디자인을 한국 회사에서 직접 했다는 거다.[27] 상술한 이코노 브라운관도 NEC 기술제휴를 통해 일본 기술을 도입해 생산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상기한 광고에서도 'NEC에 이은 개발'이라 나와 빼도 박도 못한 수준이다.[28] 하지만 적어도 튜너는 수입원자재 사용으로 UHF 타입 50%, VHF 타입 30%이라는 처참한 국산화율을 보여줬다. # 게다가 금성알프스조차 일본 알프스전기와의 합작회사였다.[29] 당시 정부도 이에 기뻐해 준공 기념연을 영빈관(오늘날 신라호텔 자리) 후연에서 열 정도였다고 한다. #[30] 화신소니, 한국내쇼날, 한국테레비[31]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거냐면 해당 공장 연 생산량이 500만 개였다. 5개월로 치환하면 약 210만 개를 생산했는데 전체의 30% 가량이나 재고였다는 것.[32] 당연히 어찌어찌 공장 가동 중단은 막아내고 1981년 컬러 TV 브라운관 공장(연간 500만 개)을 열었다. #[33] 예: 시어즈(Sears, 1892년 개업한 미국의 백화점 브랜드. 2011년 2,705개 매장이 있던 것이 2018년 파산 신청을 하며 2025년 12월 현재 단 5개 매장만 남았다), 워드(Montgomery Ward & Co., 1872년 개업하고 2001년 폐업한 미국의 백화점 체인) 등[34] 오늘날 코스트코트레이더스에서 파는 수십만 원짜리 중국산 TV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상술했듯 당시 수출가가 대당 50달러였는데, 이는 1979년 당시 미국인의 고작 1.5일치 봉급도 되지 않는 똥값 수준이었다.[35] 삼성과 금성의 OEM 수출이 어느 정도였냐면 명색이 흑백 TV 수출 세계 1위라면서 1981년 기준 미국 내 24개 TV 제조사의 TV 시장 점유율에서 흑백은 도합 2%(금성 1.5%(15위), 삼성 0.5%(20위))였고 컬러는 더 처참해 도합 1.2%(금성 0.7%(19위), 삼성 0.5%(21위))였을 정도였다. 참고로 1982년 기준 일본은 3대 회사이던 소니, 히타치, 미쓰비시를 합하면 컬러 약 12%, 흑백 약 12.5%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미국 내 회사는 RCA제니스가 각각 흑백 16%, 컬러 20% 가량을 기록했으나 RCA 쪽이 미묘하게 제니스를 앞선 점유율 1위였다. #1 #2[36] 기사에서도 이를 짚고 있다. 쉽게 말해 가전 선진국들(일본, 미국, 서독, 네덜란드)이 흑백 TV 생산을 포기한 것을 빈집털이한 수준이라는 것이다.[37] 제품의 금형[38] 사실 태국 콘솔리데이티드사는 1980년 9월 16일부터 금성사가 제공한 기술로 (흑백) TV를 국내 생산하고 냉장고, 세탁기 등 다른 가전제품도 단계적으로 국산화할 계획이었다. VD-191 개발로부터 14년 뒤에 이룩한 성과다. 참고로 일본이 1953년 첫 흑백 TV 생산후부터 한국에 TV 기술을 제공해주기 시작한 시기가 그로부터 13년 후인 1966년이니, 한국 회사들의 기술 발전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다. # 당시 광고 이후 1983년 12월 삼성도 인도네시아 텔레소닉 사랑 연간 16만 대 규모(컬러 6만 대, 흑백 10만 대)의 플랜트 수출 계약과 기술지도 인력 6명 파견, 부품 수출을 달성했다. #[39] 1985년 시점 한국의 컬러 TV 생산 자동화율은 50%였는데, 이는 30%대였던 오디오, 냉장고, 에어컨, 25~41%이던 전자레인지, 20%였던 VTR보다는 높았지만, 1981년 공장 자동화 보급률 사실상 100%(#)로 당대 선진국 중에서도 생산 자동화를 선도하는 수준이던 일본보다 훨씬 뒤쳐졌다고 한다. 참고로 1985년 시점 중소기업의 간이 자동화율은 일본은 90%대였지만 한국은 고작 15% 내외였다. #1 #2 1987년 말 한국에 있던 로봇 수는 고작 982대, 1988년 말에도 1,800대였는데(1년 만에 2배나 늘었다), 이는 1986년 3월 10만 대를 돌파해 '세계 최대 로봇 교육국'이라 불렸던 일본과 대비된다. 참고로 1988년 한국 공장 자동화율은 34.3%였다. #1 #2 때문에 1987년경 일본의 한 원로경영자 말로는 "한국 기업의 경영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지만 공장자동화는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이 뒤진다"고 했다. #[40] 1973년, 1975년(기능올림픽은 2년 간격으로 치러진다) 2연속으로 2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77년부터 1991년까지 기능올림픽 9연패를 기록했는데(1993년 대만에 밀려 2위를 기록하며 10연패는 무산), 일본이 1969, 1970, 1971 3연패에 그쳤던 것,(그 전에도 3번 더 우승한 적이 있다) 유럽의 기술 강국이라는 스위스조차 2번, 서독조차 1번만 우승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경이로운 성과인 셈이다. 사실 기능올림픽은 원래 국가단위 우승이란 개념이 없었지만 1969 일본이 금메달을 가장 많이 따자 '금메달을 딴 우수한 기능공들이 만든 일본 제품'이라고 홍보하기 위해 자국 PR 목적으로 해당 개념을 만들었다고 한다. # 여담이지만 한국은 1993년 대만에 2위를 내준 후에도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05년(스위스 우승) 사이로 2번이나 기능올림픽 5연패를 차지했다. 하지만 2017년에는 중국의 약진으로 2위에 그쳤고, 2019년에는 중국, 러시아에 밀려 3위를 기록해 1973년 이래 독보적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41] 당시 기능올림픽 금메달 보유자에게는 병역특례도 주고 카퍼레이드까지 해주며(카퍼레이드는 1983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하계올림픽 금메달을 딴 스포츠 영웅 못지않게 대우했다. 한국과 기능올림픽 관련 참고자료[42] 전술했듯 금성사 첫 TV도 회로는 한국 측에서 독자 설계했다.[43] 물론 동시기 일본 TV 대비 디자인이 촌스러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84년 금성사 브로셔(#1 #2)와 삼성전자 광고(#)만 봐도, 같은 해 나온 소니 TV는커녕(#) 그 2년 전 1982년 미쓰비시 TV보다도 더 촌스러운 편이다. # 덤으로 같은 해 대우전자에서 만든 45인치 프로젝션 TV(#) 디자인도 같은 해 소니에서 출시한 46인치 프로젝션 TV(#1 #2)와 비교하면 미묘하게 촌스럽다.(이는 그로부터 4년 전인 1980년 마쓰시타에서 출시한 45인치 프로젝션 TV 디자인(#)을 참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니가 당시 서양에서도 디자인으로 찬사받던 회사라는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TV 상당수가 로터리식이던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한국 쪽 디자인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국산 TV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나온 기사들만 봐도 금성사와 삼성전자 모두 1984년(금성사 삼성전자)까지 로터리식 TV를 주 디자인으로 밀었다.[44] 현대 포니가 핵심 부품은 일본, 영국 등 기성 선진국 것을 가져다 썼어도 디자인을 (이탈리아 디자이너를 통해) 독자적으로 했기에 '한국 최초 고유모델 자동차'로 불리는 것,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국 제품의 대일 소부장 의존도가 높은 편이었어도 설계와 디자인은 다 우리 손으로 했으니 국산 제품이 맞다(그리고 품질도 실적도 다 세계 최고다)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다.[45] 비슷한 시기 대만삼포라는 TV 제조사가 TV를 적극적으로 외국에 수출하긴 했으며(그러나 삼성, LG처럼 세계 최강급 브랜드는 되지 못했다), 지금도 중국(이쪽은 이제 논외급이 되었다)의 TCL, 하이센스 TV는 가성비 TV로 유명하다. 허나 대부분의 개도국산 가전제품들은 부품 조립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데, 북한이 만들었다는 가전제품, 스마트폰이 죄다 중국 부품 조립 수준이란 것은 유명하고, 르완다의 마라 폰(Mara Phone)도 2019년 (알제리 다음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초 스마트폰을 만들었으나 중국 부품 조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흥미거리 취급만 받으며 2021년 문을 닫았고, 이란도 2005년 이스파한에 설립된 스노와(Snowa)라는 가전제품 회사(스마트 TV는 물론 냉장고, 세탁기 등도 만든다)가 있긴 하나 대이란 경제제재로 삼성, LG 등이 철수하고 2021년 9월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이들 제품의 수입을 금지함에 따라 반강제 독점이 되면서 사실상 해외 수출은 꿈도 못 꾼 채 내수 소비에 머무르고 있다.[46] 이 정도면 TV 방송 전시를 위해 공공장소에서만 사 간 수준.[47] 하술하듯 국산 TV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며 보급률이 대폭 늘었다.[48] 이때까지 한국에서 TV는 확실히 금수저의 전유물이었다.[49] 동시에 10만 대를 돌파했다.[50] 동시에 50만 대를 돌파했다[51] 당시는 소련유고슬라비아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저 185개국은 속령까지 포함한 기준이었다고 기사에 명기되었다.[52] 왜 경제사정 대비 보급률이 은근 높았냐면, 당시 TV 방송 자체를 하지 못했던 나라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덤으로 한국은 당시 최빈국을 탈출한 직후(당시 한국은 태국, 필리핀, 이집트보다도 잘 살았다)이기도 했고.[53] 10월 유신 1개월 전인 동시에 여로가 한창 방영 중이던 시점이다.[54] 출처: <현장기록, 방송노조 민주화 운동 20년> -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55] 첫 수출은 1977년 4월 파나마였다. 1978년 광고 유튜브에 리뷰가 올라와 있다.[56] 때문에 CT-808 실물을 가진 한국인은 금성사 임직원밖에 없었고, 때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모형으로 전시되었다. 그러나 2025년 4월 5일 서울에서 (1979년 11월 만들어진) 실물이 발견되었다! 발견자가 쓴 글 복원 영상[57] 삼성 이코노 칼라는 1980년까지 100만 대가 생산, 90만 대가 수출되었다. 당시 한국 컬러 TV 수출실적 40~50% 가량을 이코노 칼라가 차지했다. 흑백까지 합하면 1980년 12월 29일까지 1,000만 대를 생산, 그 중 72%를 수출해 1980년까지 미국시장의 17%, 세계시장의 10%를 차지하는 (덤핑) 수출공세를 이어나가 1980년 12월 국산 가전업계 최초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덕분에 1979, 1980년 한국 23개 관광호텔(롯데호텔 서울, 서울신라호텔 등) 컬러TV 3/4가 이코노 칼라였고 미군 PX에도 납품되었다. #[58] 당시의 TV 채널에선 CATV 대역이 없어 유선 95, 96, 97, 22, 33번에 해당하는 1, 2, 3, 4, 12번을 직접 수신할 수 없었고, 채널을 6, 7, 13번에 맞추고 미세조정 다이얼을 돌려서 해당 주파수를 맞춰야 했다.[59] 1년 후인 1972년 6월 기준 근로자 평균 임금이 22,650원이었다. 이 정도면 2년치 연봉 이상인 셈. 심지어 비교 대상인 냉장고조차 싯가 7만 원, 수입가 기준 8만 6천 원이으로 (수입가 기준) 4개월치 봉급 수준 초고가였으며, 당시 금성사 20인치 흑백TV 가격이 89,910원으로 역시 4개월치 봉급 수준 초고가였다. #1 #2[60] 이때 개막식에 같이 참석한 박승찬 당시 금성사 사장이 박정희에게 컬러 TV 방영문제에 대하여 한국의 농촌은 빈곤하며 컬러 TV를 보급하면 도농격차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일 것이고, 이에 흑백TV를 대량생산해서 농촌에도 공급하고 수출에 매진하겠다고 주장한 것도 한몫했다. 출처 -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3권[61]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다른 독재 국가들에도 이러한 이유로 악마의 산물이라면서 컬러 TV 보급을 막았다.[62] 이스라엘골다 메이어가 이와 같은 이유로 컬러 TV 보급을 막았다.[63] 그 1년 전인 1976년 한국 1인당 GDP가 847달러였는데 세계 평균 1인당 GDP는 1586달러였다. 해당 발언은 20세기에 많이 쓰인 GNP 기준이다.[64] 내셔널 TV는 70만 원, RCA TV는 75만 원, 심지어 (1978년 출시된) 소니 최신모델(KV-1542R. 15인치)은 87만 원을 기록했다. 기존에는 개당 50~70만 원애 거래되던 게 이렇게나 올랐다. 1979년 기준 노동자 평균 월급이 142,095원이던 걸 감안하면 근로자의 5~6개월치 월급 수준이던 셈. 심지어 소니 19인치 컬러TV는 무려 95만 원(약 7개월치 월급)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준을 기록했다. #[65] 극장 영화들은 이미 컬러필름으로 1960년대부터 컬러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다.[66] 당시 컬러로 시범 제작된 프로그램들은 KBS 아카이브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KBS 컬러 녹화분은 1978년 2월 7일 방영된 전설의 고향 '느티고개' 에피소드였다.[67] 방송분 자체는 MBC Archive에 영상소재 형식으로 남아 있으며 대한뉴스 보도서도 간접적으로 당시 방송을 유추할 수 있다.[68] 그럼에도 당시 전두환은 회색 옷과 회색 넥타이, 흰 옷을 입고 나왔다.[69] 이하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272~279.[70] 다만 베트남의 컬러 TV 시청은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대도시권에 국한되어 있었고, 이 때문인지 전면 컬러화는 1987년에야 이루어졌다.[71]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독재정권의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 때문에 1976년에야 TV 방송을(당연히 컬러로) 시작했다.[72] 심지어 당시 미얀마는 1인당 GDP가 고작 31달러에 불과한 독보적인 지구 최악의 극빈국이었다.[73] 방글라데시 역시 1984년 에티오피아 대기근이 악명을 얻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극빈국과 기근, 인구 과밀의 대명사로 통하던 나라였다.[74] 심지어 알바니아는 북한 저리가라 수준으로 쇄국 정치를 펼치던 나라였다.[75] 심지어 이쪽은 선진국인데도 한국보다 컬러 방송이 늦었다! 다만 애초에 이쪽은 (흑백) TV 방송 시작 자체도 1966년으로 선진국치고는 이례적으로 늦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76] 원래 1970년대 후반에 하려고 했는데 1977년 루마니아 지진과 무리한 긴축정책으로 늦어진 거다.[77] 즉, (AFKN이 컬러 방송을 시작한) 1976년 이전 주한미군 병사들이 "아직도 흑백만 나오는 후진국이 있어?"라고 컬처쇼크를 먹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던 셈.[78] 1987년 3월 막 출시되었다. 당시 광고[79] 이는 1978년 일본 마쓰시타가 개발한 기술이다.[80] 2개월 동안 이 정도만 받는다는 말이다.[81] 재건축 후 서초 푸르지오 써밋[82] 원래는 1981년 11월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출시가 반년이나 늦춰졌다. 1981년 당시 제품번호는 CT-2699C였으나 1982년 출시 후에는 CT-2674라고 나온다. 사진을 보면 둘의 디자인이 완전히 다른데, 전자가 시제품만 나온 채 발매 취소되고 후자가 발매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 한국 언론에서 한국 최초급 가전제품이 진짜로 시판됐을 때 언론에서 짧게나마 보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 최초의 26인치 TV'인 CT-2699C 발매 기사가 전무하다는 것은 CT-2699C가 발매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1 #2[83] 위의 기사에서도 나오듯 월 생산분이 삼성전자, 금성사 두 회사를 합쳐서 1,000대 수준이었으며, 그것도 예상 국내 수요인 월 200~300대를 제외하면 모두 해외로 수출할 계획이었다.[84] 350만 원이 어느 수준이냐면, 1982년 당시 포니 1 가격이 330만 원, 같은 해 출시된 포니 2 가격이 347만 원이었다. 문자 그대로 자동차보다 더 비싼 가전제품,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 수준이었다.#[85] 참고로 일본 소니에서 출시한 프로젝션 TV는 1979년 출시된 50인치/72인치가 각각 82.8만 엔/99.8만 엔이었는데, 행간을 읽으면 프로젝션 TV 기술은 1982년 금성사(최대 45인치)보다 1979년 소니(최대 72인치, 50인치도 있음)가 더 앞섰던 셈이다. 체감 가격도 일본의 더 큰 쪽이 한국의 더 작은 쪽보다 더 쌌다 #[86] 가격은 295만 원. 역시 당시 평균 월급(29만 7,000원) 대비 10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 참고로 이는 국산 프로젝션 TV 중 최초의 일체형(내부 부품과 거대 스크린 사이 뚫린 부분(이렇게 생겼다)이 전혀 없이(1982년 금성사 프로젝션 TV가 딱 이런 형태였다) 하나로 이어진 거)이었으며, 기존 프로젝션 TV 화면이 휘어졌던 것과 달리 일체형은 화면이 곧은 평면이었다. 일본에서는 1980년 마쓰시타에서 출시한 45인치 프로젝션 TV 디자인에 처음 쓰였다. #[87] 1983년 국립과학관(#), 1988년 어린이회관(#)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8] 정확히는 도시바, 마츠시타, 히타치 등.[89] 때문에 당시 평면 브라운관 TV가 외화 낭비라고 까이기도 했다. # 평면 브라운관 국산화는 1987년에야 성사되었다. #[90] 참고로 이 TV는 한국 최초로 마이컴을 내장한 TV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2000년대까지 브라운관 TV에서 채널을 바꿀 때마다 흔히 보던 초록색 채널번호와 현재시간을 화면에 나타나게 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이 기능은 일제 TV에는 1972년(샤프제 TV #)에 채널 한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1979년(도시바제 TV #)에는 현재시간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상술한 CT-2699C에도 들어갔다고 하나 해당 TV가 행방불명되면서 상세히는 알 수 없다.[91] 둘 다 금성사 카탈로그다. 당시 가격은 (근로자 봉급이 평균 30만 원 미만이던 시절) 84만 원으로 대폭 낮아졌다.[92] 가격은 78만 원. 당시 30만 원도 안 되던 한국인 평균 월급과 비교하면 2.6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 둘째 기사에 따르면 1985년 한국 컬러 TV 가격은 14인치 35~42만 원, 16인치 35~45만 원, 18인치 48만 원, 20인치 43~52만 원, 25인치 70만 원, 26인치 78만 원이었다. 1985년 한국 월급이 32.4만 원이던 걸 감안하면 당시 가격 체감 포지션을 그릴 수 있다. 때문에 1985년 기준 26인치 TV(여기서 언급된 건 미국 제니스제)는 모 섬유회사(1984년 섬유 1천만 달러를 수출하고 재산 200억 원을 모았다) 회장이 거주하는 평창동 시가 10억 원(같은 해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80평형 가격이 2억 4,300만 원이었다) 짜리 대저택에서 매킨토시 오디오 시스템,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함께 놓인 갑부들의 전유물처럼 언급된다. #[93] (일본에서 수입한) 평면 브라운관을 썼고, 음성다중까지 넣었다.[94] 다만 신문 광고는 2년 후인 1987년부터야 했는데, 가격은 1987년 기준 98만 원. 당시 한국 평균 월급이 35만 8,120원이던 걸 감안하면 2.9개월치 가격이던 셈이다. 보너스로 45인치 프로젝션 TV 가격(역시 일체형)은 9.5개월치 월급 이상이던 342만 원. #[95] NTSC, PAL, SECAM[96] 1982년 개발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기술력 테스트 용이었는지 출시됐다는 기록은 없다. #(기사 오른쪽에 보잉 757 롤아웃이 보인다) 이는 1978년 일본 샤프가 발명한 기술이다. 참고로 같은 1985년 샤프는 9개 화면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TV를 개발했다. 1989년에는 삼성 P.I.P.도 첨단기술을 넣었다.(다만 서브 화면은 흑백이다. 사실 1978년 샤프가 만든 것도 저랬다) #[97] 이 역시 일체형을 택했다.[98] 1년 후인 1987년에도 평균 월급이 36만 원 미만이던 시절이었다. 8.3개월치 월급 수준이던 셈.[99] 이 프로젝션 TV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동아일보사가,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경향신문사가 본사 사옥 근처에 설치해 개표/경기를 중계해주는 데에도 쓰였다. #1 #2 서울올림픽 당시 기자촌과 선수촌에도 설치되었다. #[100] 개발 소식을 알리는 기사는 남아 있지 않다.[101] 하지만 김주연 아남전자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1986년 기준 '대형 TV(정황상 28인치 한정으로 추정)' 월평균 판매대수는 고작 50~60대에 그칠 정도로 아무도 사가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시 가전3사(삼성, 금성, 대우) 다 합쳤을 시 기준이다. 그나마 1988년 이후 29인치 TV 수요만 월평균 150대 이상으로 예측되었다. #[102] 안타깝게도 (실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은 전해지지 않는데, 시기상 일체형일 가능성이 더 높다.[103] 정확히는 1986년 미국에 먼저 출시한 걸 1987년 국내에서 출시했다. 참고로 원조는 1973년 소니가 출시한 것.[104] 1987년 출시 버전은 세계 최초 비밀번호로 잠글 수 있는 TV + 리모컨에 계산기가 달린 TV를 표방했으며, 서정희둘리가 나온 TV 광고가 유명하다.[105] 평면 브라운관을 사용했다고 한다.[106] 위의 아시안 게임에서 제공한 건 시판하지 않은 프로토타입 격이었던 것으로 추정.[107] 대놓고 '초대형'이라고 명기됐다.[108] 당연히 기사에서도 '업소용'으로 명기했다.[109] 삼성 33인치 TV 출시 광고 역시 가격은 260만 원으로 당시 근로자의 5.8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110] 기사 작성 시점 28~33인치 대형 TV 판매량은 월간 500대에 그쳤다.[111] 다만 대형 가전제품 구매를 과소비라 비난한다는 것은 감안하고 읽을 것.[112] 가격은 16인치 기준 59만 8,000원으로 당시 월급(약 54만 1,000원) 대비 한 달 월급 남짓이었다.[113] 같은 해에 국내 텔레텍스트 방송이 시작되어서 이를 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격은 16인치 기준 55만 원, 20인치 기준 72만 8,000원. 당시 월급(64만 2,000원) 대비 한 달 안팎 수준이었다.[114] 2년간 공장 공사비만 750억 원(1983년 환율 기준 약 9,430만 달러), 예상 수입 대체 효과만 연간 1억 달러였다.(말이 1억 달러지 이는 당시 한국 수출액(244억 4,500만 달러)의 0.41%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준공식에는 이병철 삼성 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김동휘 상공부장관도 참여했다. 밸브 유리공장이 1983년 문을 연 거면 1979년 문을 연 브라운관 공장은 일본에서 수입한 유리를 융착하는 공장이던 것으로 추정.[115] 미국, 일본, 서독, 네덜란드 다음[116]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을 받아 각각 적, 청, 녹색의 가시광선을 방출, 화면을 재생하는 물질이며, 컬러 TV 화면 재생 시 최종 역할을 했으며, 벌브유리, 섀도마스크와 함께 컬러 TV 브라운관의 3대 재료로 꼽힌다.[117] 1985년 금성부품에서 컬러 국산총 국산화에 성공하긴 했다. #[118] 다만 금성사는 1989년까지 형광체를 국산화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19] 당연히 한국에서 못 만드는 부품들은 모두 일본에서 수입했다.[120] 전술했듯 한국 최초 26인치는 1983년 삼성이다.[121] 그 전에는 브라운관 기술력이 일본보다 확연히 뒤쳐졌던 게, 일본에선 1975년 27인치 TV가 나왔으나 한국에선 1983년 26인치, 1985년 28인치 TV가 나왔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1985년 (브라운관의 한계로 알려진) 37인치, 1986년 40인치 TV가 나왔다. 반면 한국은 1988년 33인치 TV가 나왔지만 같은 해 일본에선 43인치 TV가 나왔고, 정점은 일본 1989년 45인치, 한국 1995년 37인치(1989년 미국 역수입분을 논외로 하면)였다.[122] 컬러 TV가 당시 한국에서는 신문물이었는데도 그렇게까지 초고가는 아니었는데, 이는 한국의 경제 수준이 중진국에 진입한 후 컬러 방송을 시작했기에 체감 가격이 가난했던 시절이던 1966년의 흑백 TV 대비 대폭 낮아졌기 때문이다.[123] 이는 컬러 TV 부품 수가 흑백의 3배나 달할 정도로 구조도 복잡했을뿐더러 브라운관 유리(1983년 국산화되었다)와 전자총, 특수 반도체 일부를 일본, 미국 등에서의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124] 참고로 1978년 수입자유화 당시 일제 소니 흑백 TV는 14인치 13만 원, 19인치 17~18만 원이었다고 한다. #[125] 참고로 리모컨 기종은 로터리 기종보다 20~25% 가량 더 비쌌다. 심지어 이조차 컬러 방송 초반인 1982년까지는 14인치 로터리 기준 30만 원 남짓이었으나 국산화율 증가와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가격을 인하한 거라고 한다. #1 #2[126] 컬러 TV는 55.2%, 흑백 TV는 54.5%로 고작 0.7%p 격차였다.(참고로 서울은 컬러 67.4%, 흑백 50.1%였다.) 또 가구당 TV 보급률은 94.8%였는데, 2대 이상 가진 경우는 고작 7.4%였다.[127] 즉, 한국은 1982년까지 국민 절대다수가 흑백 세상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128] 1985년 말 기준 서울 82%, 대도시 74%, 중소도시 67%, 농촌 32%가 컬러 TV를 가졌다. #[129] 다른 가전제품을 보면 냉장고는 87.8%, 가스레인지 68.0%, 세탁기 48.1%, 목욕탕 33.6%, 수세식화장실(화변기와 양변기 다 포함했는지, 화변기를 뺐는지는 불명) 33.3%, VTR 15.0%, 전자레인지 10.4%, 진공청소기 7.9%, 자가용승용차 7.8%, 에어컨 4.6%였다.[130] 경기도는 92.9%로 최고치, 전라도는 70.9%로 최저치였다.[131] 전라도는 40.0%로 최고치, 서울은 13.9%로 최저치[132] 서울은 27.2%로 최고치[133] 츠바이카날톤(Zweikanalton) 방식. A2 스테레오, 투캐리어 방식으로도 불린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PAL-B/G 국가인 독일에서 만든 방식이다[134] 이때 가전3사는 음성다중방송 1년전인 1984년부터 음성다중 스테레오 전용 TV를 출시하기 시작하였다.[135] 가격은 14인치 34만 8,000원, 16인치 38만 5,000원. 1985년 한국 평균 월급이 32만 4,283원이던 것을 감아하면 한 달치 월급 남짓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136] 광고를 잘 보면 사진이 아니라 펜으로 일일이 TV를 그렸다.[137] 링크에 나오듯 한국에 처음으로 리모컨 TV가 도입된 게 1981년 금성사에 의해서였다. 사실 이는 1980년까지 컬러 방송을 하지 않던 시대의 영향도 컸다.[138] DVB(당시 위성방송용 규격인 DVB-S)와 DVD의 등장으로 가전에서도 채택되기 시작했으나 MUSE 또한 디코더 연결용으로 쓰기도 했다.[139] 삼성이 로고를 현용으로 변경한 바로 그 해다.[140] 다시 말해 일본 회사들도 만들지 못했던 기술이라는 뜻이다![141] 브라운관의 특정 부분에 바이오세라믹을 코팅해 작동 시 원적외선을 대량 방출하는 방식이었다. # 당시 광고 로고 변경 직후에 만든 거라 오벌 로고가 대놓고 붙었다.[142] 1996년에 발사될 무궁화 위성을 위해 생산되었으며 그 결과는 망했다. 애초에 DVB-S의 특성상 720*480i59.94(60), MPEG-2/H.262로 송출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4:3이었고 와이드 프로그램을 곁다리로 그것도 섞어서 편성했기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화질은 지금도 체험하는 게 가능한데 다름 아닌 아나모픽 16:9 DVD를 집어다가 플레이어 또는 PC나 PC에 연결된 외장형 ODD에 넣고 틀면된다.[143] 자세한 사항은 후술.[144] 앨본 TV 제조사도 고작 셋(소니(최대 45인치), 마쓰시타, 미쓰비시)만 40인치 이상 브라운관 TV를 만들 수 있었다.[145] 1995년 삼성제 46인치 프로젝션 와이드 TV가 당시 근로자 4개월치 월급이던 520만 원이었다. 심지어 1982년 첫 출시 당시 현대 포니보다도 비쌌던 게 대폭 낮아진 게 저 정도이며, 때문에 1995년까지도 프로젝션 TV 연간 판매량 수준은 2천~3천 대에 그쳤다. #1 #2[146] 일본에서는 늦어도 1990년 만들어졌다. #[147] 여기 넣은 HD 모니터는 금성사가 직접 개발한 거였다. 이제 소부장 자체 개발 능력도 일본 못지않은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 #[148] 가격은 498만 원으로 근로자의 3.9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 LG는 이 TV의 1년 판매량을 1만 대로 예상했다.[149] 당시 국내 최대 TV였다.[150] 물론 3개월치 봉급 이상이란 점에서는 명백한 초고가에 해당되지만, 1995년 46인치 프로젝션이 (와이드 버전이란 걸 감안해도) 4개월치 월급이었단 것과 비교하면 불과 2년 만에 (이보다 약 1.8배(4/3 * 4/3)나 더 큰) 60인치 프로젝션이 3개월치 월급이 된 건 프로젝션 TV의 체감 가격이 대폭 낮아졌다는 증거다.[151] 사실 김우중은 "기술은 사서 써도 된다"고 할 정도로 신기술 개발에 관심이 적던 대신 '세계경영'을 위해 중점을 기울이던 동남아, 중앙아, 중동, 동유럽, 아프리카 같은 틈새시장(이자 진정한 글로벌 시장)에 특화된 낮은 기술의 적정기술과 소위 '탱크주의'로 승부했다.[152] 가격은 1,000만 원. 1999년에는 1,600만 원으로 더 늘었다. 당시 기준 비정상적 가격이라 주문생산으로만 팔았다고 한다. 1999년 월급(155.4만 원)과 비교하면 10개월치 봉급을 훌쩍 넘는 정신 나간 가격이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153] NEC, 파이오니어(둘 다 1997년 개발)에 이은 세계 3번째였다.[154] 가격은 850만 원. 심지어 대중화 가격조차 5.5개월치 봉급이었다. 사실 대중화 운운할 수밖에 없던 게 당시 일제 PDP TV 가격은 이의 2배인 1,700만 원(11개월치 봉급)이었다.[155] 64인치 한국형 디지털 TV 첫 개발, 56인치 디지털 TV 양산 성공, 40인치 PDP TV도 언급된다.[156] 덤으로 45인치 프로젝션 TV는 395만 원이었다.[157]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26인치, 29인치, 37인치 모두 미국에 있는 헌츠빌 공장에서 생산한 것을 1989년부터 국내에 역수입한 것. 대놓고 "국내 생산이 안 되는 대형과 고급형 제품은 미국과 EC(현 EU) 지역의 현지공장에서 들여오고"라고 언급된다. 다만 기술력이 없어서만은 아니었고 원화절상과 국내 대형 TV 수요가 적어(당시 금성은 25인치 이상 TV의 연 판매량을 8,000~10,000대로 예상했다) 대량생산체제 갖추기에 경제성이 없다는 판단도 한몫했다. 비슷하게 일본도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고로 1986~1987년부터 공장을 동남아 등 해외로 옮긴 후 역수입하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했다. #1 #2 때문에 당시 국회에서 금성사의 26인치 이상 대형 TV 판매는 사치성 소비재 수입, 과소비 풍조 조장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참고로 1989년 금성사가 수입관매한 26인치, 29인치, 37인치 등의 TV는 도합 9,821대였다. #[158] 개발 자체는 1992년 10월 했다. #1 #2 최초의 브라운관 와이드 TV는 고작 1년 전인 1991년 9월 일본 Victor·JVC에서 선보였던 걸 감안하면 꽤나 빨리 일본 기술력을 따라잡은 편. 물론 삼성이 32인치 브라운관을 자체 개발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 그로부터 1년 후인 1994년이란 것을 감안하면 금성사 와이드 TV 브라운관은 일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본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기술을 고작 1년 만에 따라잡은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고 소부장 일본 의존 구조는 2010년대 후반까지도 만성적이었으니 딱히 금성사 와이드 TV만의 문제는 아니고.[159] 때문에 1994년에는 고작 4,500대만 팔렸지만(#) 1995년에는 4만 대로 9배 가까이 늘었다. #[160] 1994년 9월 초부터 8개월간 개발했다.[161] 상기한 1989년 금성사 37인치 TV는 미국 생산분을 역수입한 것이므로 논외. 따라서 "한국제" 37인치 브라운관 TV는 아남전자 화왕이 최초가 맞다.[162] 겨냥 직업은 대기업 임원, 자영업 사장, 전문직 종사자(변호사, 의사 등)가 언급되었다.[163] 아무리 소득 신장으로 크기 대비 가격이 과거 대비 싸졌다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3달치 월급에 맞먹는 돈을 줘야 살 수 있는 초고가였기에 상류층 이상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164] 29인치 -> 30인치[165] 원래 플라톤은 LG가 1995년 인수한 미국의 TV 제조사 제니스의 기술이었다.[166] 1993년 3월 22일[167] 저 로고 변경의 이미지 변화가 생각보다 큰 게, 로고 변경 직전인 1993년 2월 이건희가 미국 LA의 가정 양판점 베스트 바이에 갔다가 삼성 제품이 매장 구석 먼지 쌓인 창고 근처에 방치된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1993년 3월 삼성 로고를 변경했다.[168] 자동차 업계에서도 현대자동차도 1992년(시범 도입은 1990년), 기아자동차도 1994년 로고를 변경했다.(다만 대우전자만큼은 1974년 도입 후 1978년 다듬은 로고를 파산할 때까지 그대로 썼다.) 기묘하게도 삼성과 금성(LG) 양사가 로고를 변경한 사이의 해인 1994년은 전술한 것처럼 한국이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해이기도 하다.[169] 이런 평가 급변환은 경제력 자체도 나름대로 풍족한 수준으로 성장했고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니 한국산 제품을 '가난한 군사독재정권이 노동자들 착취해서 만든, 싼 맛에 사는 일제 기술 카피캣'(오늘날 중국산 제품이 품질이 좋아졌다고 해도 '가난한(여전히 세계 평균 미만) 공산당 일당독재 정권이 소수민족들 착취해서 만든, 싼 맛에 사는 한국&미국 기술 카피캣'이라는 심리적 거부감과 불신이 강하다는 거랑 판박이다)으로 취급할 서양인들의 심리적 거부감과 불신 자체가 사라진 것도 한몫했다.[170] 덤으로 같은 1995년 삼성은 애니콜 화형식을 열었고 LG는 미국의 TV 명가 제니스를 인수했으며 아남전자도 국내 최대인 37인치 브라운관 TV를 출시했다. 방송계에서도 이 해에 케이블 TV 방송이 시작되었고 수도권에서만 방송하던 SBS가 전국 방송을 시작했으며, 전국 평균 TV 크기도 20인치를 웃돌게 되었다.[171] 절대 25인치 이상이 아니다![172] 소득 증가 후 "판매량"이 저 정도였으니 "전체 보급률"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73] 마침 한국의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긴 게 1987년이다. 덤으로 이 해 19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있었다.[174] 심지어 저 0.7%도 1988년 한 해 "전체 판매량 대비 오직 금성사만의 26인치 이상 판매량"이니 "한국에 있는 전체 TV 중 26인치 이상 TV" 자체의 비율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삼성전자, 대우전자, 아남전자까지 합쳐도 1% 안팎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75] 25인치 이상 판매량은 전체(금성&삼성 각각 100만 대, 대우 40만 대, 아남 18만 대, 도합 약 260만 대) 중 17%(도합 44만 대)였다. 심지어 1990년에는 25인치 이상 판매량이 15만 대(약 5%)도 되지 않았다. 물론 3년 전 (25인치도 아닌) 20인치 이상 판매량이 전체 대비 5%이었단 것과 비교하면 노태우 정부 시기 한국인의 삶의 질이 얼마나 급격히 올라갔는지 알 수 있다.[176] 당시까지만 해도 25인치 이상 초대형TV는 사무실 및 회의용 위주로 판매되었다. 25인치조차 저 정도니 26인치, 28인치, 45인치 프로젝션 TV 판매량은 사실상 전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기사에는 45인치 외에도 28인치, 33인치가 언급된다. # 상술한 것처럼 1985년에는 26인치 TV를 집에 들여놓는 것도 (미제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평창동 대저택 거주자(가격이 당시 압구정 현대아파트 80평형의 4배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정도나 할 법한 일이라고 취급받았다.[177] 동시기 일본에서 25인치 이상 대형 TV "보급률"은 30% 이상이였다.[178] 1992년 당시 전체의 14~15% 가량이 25인치, 5% 가량이 29인치, 0.8% 가량이 33인치, 0.2% 가량이 그 이상을 사간 셈이다.[179] 1995년 기준 판매 TV 108만 대 중 31%인 30만 대가 25인치에 20%(19만 대)는 29인치였다.[180] 애초에 그 2년 후인 1994년 한국 경제가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으니(1인당 GDP 세계 평균의 2배, 1만 달러, 포르투갈 모두 돌파)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181] 서울은 2대 이상 TV 보유율이 37.7%였다.[182] 심지어 당시는 1인 가구가 고작 10% 남짓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183] 서울은 20인치 이상 TV 보유율이 37.3%였다.[184] 즉, 1992년까지만 해도 20인치 미만 TV 비중이 전체의 3/4나 됐다. 다시 말해, 서태지와 아이들, 하수빈, 김건모이 데뷔 무대를 국민 절대다수가 10인치대의 소형 TV로 봐야 했다는 말이다.[185] 버튼식, 로터리식 포함. 시대가 시대라 버튼식이 로터리식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186] 사족으로 월평균 소득 기준이 70만 원 미만(전체의 25%) / 70~100만 원 (전체의 39%) / 101만 원 이상(전체의 34%. 나머지 2%는 무응답)을 기준으로 잡았는데, 1992년 한국 평균 월급이 81만 3,000원이었다.[187] 쉽게 말해 국민의 80% 이상이 10인치대 소형 TV로 김완선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강수지의 향기 시리즈(보라빛 향기, 시간속의 향기)를 봐야 했다는 말이다.[188] 당시 외국에서 27인치 TV가 어느 정도 취급이었냐면 1988년 소련의 전설적인 장대높이뛰기 선수 세르게이 부브카가 국가적으로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얻은 것 중 하나로 모스크바 중심가의 투베드룸 아파트(소련 기준으로는 호화아파트였다), 서독제 냉장고, 1만 달러 짜리 소련제 승용차와 함께 언급된 게 일제 27인치 TV였다. #[189] 당시 기준 1989년산[190] 2007년까지는 CRT가 세계 시장에서 1위였으나, 2008년 LCD가 CRT를 역전하게 된다.[191] 영업장마다 케바케다.[192] LCD 패널 자체의 수명은 깨지지 않는 이상 반영구적이다.[193]한국소비자원.[194]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TV 프로그램이 LCD 및 HD 해상도를 지원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네모난 화면에서 좌우 기다란 화면이 된 셈이다.[195] 참고로 보편 LED 백라이트 LCD TV를 LED TV라고 많이 표현하나 LED는 단지 백라이트 유닛 발광만 담당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196] 2009년 한국인 평균 월급이 227만 7,000원이었으니, 1.36~2.85개월치 봉급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197] 2014년 송파구 세 모녀 사망 사건 당시 집도 브라운관 TV였다.[198] 삼성전자 측 마케팅 용어이다. 이후 LG전자도 같은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리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최초로 사용한 삼성은 2017년 들어서 플래그십 TV 라인업에 사용하던 SUHD를 QLED로 변경한다.[199] 2007년 소니에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200] 일반 안테나를 이용하여 TV 시청을 하는 가정에만 해당하며 유선방송(케이블TV 및 중계유선), IPTV,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시청 가정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어차피 유선방송의 경우는 알아서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해서 2022년까지 송출해 주기도 했고.[201] 다만 KBS 통일방송연구소에 기고된 글에 따르면 흑백TV로 수신하는 경우에는 상관없다는 듯하다,북한에서도 KBS 드라마를 본다?, KBS 통일방송연구소 2006-03-18 NTSC/PAL은 어디까지나 컬러 인코딩 표준일 뿐, 베이스는 해상도나 초당 주기, 대역폭을 제외하면 대부분 동일하기 때문이다.[202] 중소기업 TV들은 대다수가 멀티시스템을 지원하지만 입/출력만 지원하며 유럽에서 PAL 방식 VCR을 직구하여 연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203] 이런 제품들은 타 국가로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경우로 인해 멀티 시스템 튜너를 내장하고 있다.[204]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했던 TV 프로그램들마저 2020년을 전후하여 중산층들이나 중장년층으로 목표 대상을 옮겨가는 추세다.[205] 2021년 하반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어쩔티비라는 유행어도 이런 인식에서 기원했다는 가설도 있다.[206] 음악 방송처럼 10~20대를 모으기 위한 프로그램은 주로 유튜브 등으로 조회수를 모아서 홍보하며 그 때문에 시청률 무용론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207] 당연히 TV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지만, 검색 시 리모컨으로 한글자 한글자 눌러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현재의 TV는 큰 화면 외에는 휴대폰과 컴퓨터보다 뛰어난 점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아예 리모콘 뒷면에 키보드가 달린 제품들도 나왔다.[208] 라디오의 기능이 TV 등으로 계승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209] 사실 2010년 대 중반부터 드라마처럼 횟수를 정하는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진 영향도 존재하지만, 시즌제 중에서도 성공한 건 거의 없는 상황이다.[210] 그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장수 프로그램들이 살아남는 확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장수 프로그램을 대체할 만한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것도 있다.[211] 다만 어디까지나 스스로 제한을 걸었으므로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2012년 이전과는 달리 방송사의 재량으로 종일방송을 다시 송출할 수 있다. 한편 라디오에서는 KNN 러브FM의 종일방송 체제가 폐지되었으나, 역시 방송사의 재량이므로 다시 종일방송을 송출할 수 있다.[212] TV 자체의 수명이 서서히 다 된 탓도 있다. 2022년을 기점으로 케이블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된 탓도 있고.[213] Retrotink 같은 하드웨어 스케일러의 등장으로 브라운관TV가 없어도 고전게임기를 연결하고 지연을 줄이고 스크린 필터를 적용해 없던 주사선을 그려 깔끔하게 고화질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214] '주로 사용하는 TV 브랜드가 무엇이냐'는 내용이다.[215] Vizio, 2002년 설립된 미국의 TV 제조사. 정작 본사만 미국에 있지 생산은 대만에서 한다.[216] 그 중 소니가 7%다.[217] 하이센스, TCL 각각 5%[218] 현재 필립스 TV도 홍콩에서 제작한다.[219] 당시 한국인의 평균 연봉이 3,816만 원이었으니, 무려 4.37년치 봉급을 줘야 살 수 있었다.[220] 이 역시 당시 한국인의 4년치 연봉(4484만 원) 수준이다.[221] 일본인인데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인용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한데, 블로그 운영자는 메이지가쿠인대학의 명예교수인 아키즈키 노조(秋月望)다. 다만 블로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HLKZ-TV를 빼먹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아니면 비공식적 방송 취급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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