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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먼드 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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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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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의 정부(내각), 관보(런던 가제트), 왕실 등 공공기관 웹사이트에서 약칭 Companion of Honour로 표기,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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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1b4d><colcolor=#fff> 제2대 성공회 레소토교구장
제6대 성공회 요하네스버그교구장
제11대 성공회 케이프타운교구장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Desmond Mpilo Tutu
OMSG[1] CH[2] GCStJ[3] FKC[4]
파일:Archbishop Desmond Tutu.jpg
출생 <colcolor=#000,#ddd>1931년 10월 7일
남아프리카 연방 클레르크스도르프
사망 2021년 12월 26일 (향년 90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재임기간 제2대 레소토교구장
1976년 8월 ~ 1978년
제6대 요하네스버그교구장
1985년 2월 ~ 1986년 9월 7일
제11대 케이프타운교구장[겸직]
1986년 9월 7일 ~ 1996년 6월 23일
수상 노벨평화상 (1984년)
템플턴상 (2013년)
서명 파일:데즈먼드 투투 서명.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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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1b4d><colcolor=#fff> 학력[6] <colcolor=#000,#ddd>남아프리카 대학교 (교육학 / B.A.)
킹스 칼리지 런던 (신학 / B.D.)
킹스 칼리지 런던 대학원 (신학 / M.Th.)
가족
부제서품 1960년
사제서품 1960년 12월
요하네스버그 성모 마리아 대성당
에드워드 파젯 주교 주례
주교서품[7] 1976년 7월
성모 마리아 대성당
빌 버넷 주교 주례
레소토교구장 승좌 1976년 8월
마세루 성모 마리아와 성 야고보 대성당
요하네스버그교구장 승좌 1985년 2월
요하네스버그 성모 마리아와 대성당
케이프타운교구장 승좌 1986년 9월 7일
성 조지 대성당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성직자가 되다2.3. 투쟁에 나서다2.4.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2.5. 거듭되는 시련2.6. 노벨상2.7. 충돌2.8. 대주교가 되다2.9. 아파르트헤이트의 최후의 저항2.10. 그 후2.11. 사망
3. 어록 및 유명한 연설4. 여담5. 관련 영상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성공회의 제2대 레소토교구장, 6대 요하네스버그교구장, 11대 케이프타운교구장 겸 10대 남아프리카관구장 대주교.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남아공의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철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 운동가이며, 노벨평화상도 만델라보다 먼저 받았다. 만델라가 1980년대 말까지 감옥에 갇혀있던 동안에는 투투 대주교가 공개적 활동의 측면에서 보다 큰 역할을 했다.[8]

2. 생애

2.1. 유년 시절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는 1931년 10월 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빈민촌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인 재커라이아 투투는 교사로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백인들 눈에는 이 사람도 어디까지나 유색인종에 불과했다. 백인 경찰들은 수시로 그가 누구이건 상관도 안 하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붙잡고 신분증을 요구하곤 했다. 이는 어린 투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 아레타 투투는 백인 가정의 하인 출신으로 후덕한 인품으로 역시 평판이 좋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위안자'라는 뜻인 코모초라는 애칭으로 더욱 널리 불렸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이 다 그렇듯이 그들의 가정형편은 매우 불우했고 투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테니스 공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진 잡동사니 정도였다. 투투는 훗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맨발의 장난꾸러기'라고 표현했다.

1945년 투투 일가는 클레르크스도프 인근의 문시빌로 다시 이주했고 그곳에서 투투는 20km나 떨어진 소피아타운의 마디베인 학교에 기차로 통학하게 된다. 이때 투투는 카드를 배워 탁월한 타짜로 소문이 나게 되었고(...) 그의 총명함에 감탄한 친구들에게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와중에 투투는 1936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제시 오언스나 가수 루이 암스트롱같이 유명한 흑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웠다.

그해 투투는 결핵으로 앓아눕게 되었는데 영국의 평등운동가인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와 인연을 맺게 된다.[9] 그는 투투가 투병한 2년간 매일 찾아오면서 말벗이 되어 주었고 훗날 투투가 종교에 귀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10]

2.2. 성직자가 되다

1950년 투투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극히 얼마 되지 않은 대학과정을 수료한 흑인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았고 결국 교사가 되기로 하였는데 이때 레아 쉔세인 여사를 만나 1955년에 결혼하게 되는데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공부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11].

같은해 투투는 문시빌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의 첫 학생들은 60명 정도였는데 그의 강의는 크게 인기를 끌어 곧 흑인 사회에 전체에 투투는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의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 헨드릭 페르부르트 총리의 주도로 남아공 정부는 1958년 반투 교육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는 흑인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는 권리를 사실상 박탈했다.

그해 총리가 된 페르부르트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반투 아이들에게 실제로는 하나도 써먹을 수 없는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현재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 아래에서 그의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도 남겼다.

격분한 투투는 교사직을 때려치고 신학대학인 성 베드로 대학에 입학하여 신부가 된다. 그 와중에 1956년 남아공 정부는 자유헌장을 발표하여 전국민에게 선거권과 부의 재분배를 요구한 연합 의회 의원 156명을 체포하여 반역죄로 기소했고 이중에는 유명한 넬슨 만델라도 있었다. 이들은 변호사 베르논 베레제의 열렬한 투쟁으로 1961년 전원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0년 3월 21일 새 인종차별 법안에 반대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백인 경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69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부상당한 샤프빌 학살사건이 터졌다.

투투는 같은 해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1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1962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 런던으로 신학공부를 하게 떠나게 된다. 투투는 런던에서 경찰관을 만날 때마다 신분증을 미리 준비하며 떨었고 백인들이 자기를 밀치고 새치기를 할때마다 순순히 물러섰으나 경찰들이 자신을 백인과 똑같이 대우하고 직원들이 새치기한 백인을 줄에서 쫓아내는 것을 보며 매우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투투는 자신이 얻은 권리가 믿기지 않아 일부러 한밤중에 길거리를 혼자 활보하고 경찰관들에게 일부러 아는 길을 물어보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곤 했다.[12] 또한 런던 하이드 공원의 연설자 코너를 자주 방문하여 영국인들이 거리낌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투투는 5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며 그곳에서도 재치와 유머를 발휘하고 성실함과 훌륭한 인품으로 그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67년 그가 남아공으로 귀국할 때 런던 사람들은 성대한 송별 파티를 열어 주었다.

한편 남아공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시궁창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페르부르트 총리는 틀렸어. 이제 꿈도 없고 희망도 없어. 남아공의 일부 지역에서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심히 불쾌해해서 악명높은 고향법을 통과시켰다. 더러운 흑인들이 신성한 백인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는데, 백인종이 흑인들의 위협에 지대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남아공 전체에 8개의 '고향'을 설정하여 전체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을 국토의 13%로 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강제로 내몰고 흑인들에게 공공장소, 대중교통 등 국토 대부분을 활용할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페르부르트가 고향이랍시고 내몬 곳은 흑인들이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반투스탄 항목 참조.

흑인들의 처지는 시궁창까지 몰렸고, 남아공 정부는 반투스탄을 외국으로 취급해 흑인들을 "외국 국민"으로 분류하여 시민권을 박탈하여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투투가 학교를 다닌 소피아타운이라고 무사할 순 없어 소피아타운의 흑인 6만 명과 허드레스턴 신부는 소피아타운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2,000명의 경찰들이 투입되어 모든 집과 시설을 파괴했고 주민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정신"승리"라는 이름의 백인 마을이 들어섰다.[13]

하지만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페르부르트는 황당한 정책들로 인해 같은 백인들에게도 원한을 샀다.[14] 철저한 엄숙주의 정책으로 동성애 금지는 기본에 나라를 망치는 악마의 바보상자라고 텔레비전을 금지해서 그가 죽고 난 뒤 10년도 더 지나서야 TV 방송국이 생겼을 정도였다. 인종 가릴것 없이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주요 지지층이던 네덜란드계 아프리칸스인들의 종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15] 또한 부유층을 위한 노골적인 농업 개혁정책으로 백인 농민들의 원성도 많이 받았으며 1960년에 백인 농부였던 데이비드 프래트가 총으로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16] 프래트는 페르부르트의 농업 정책 때문에 그에게 원한을 가졌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남아공 정부는 당황하면서 프래트(61년에 자살)는 정신이상자라서 같은 백인 수상을 암살기도했다고 어물쩍 공개발표했다. 그러나 결국 페르부르트는 1966년 디미트리 차펜다스라는 그리스계 백인[17]에게 칼에 맞아 암살당했다. 역시 남아공 백인 정부는 차펜다스도 정신이상자라고 발표했지만 세계적으로 뭔 짓하기에 백인 정신이상자들만 죽이려 하냐며 비아냥거렸고 당시 이집트에선 인종차별주의자로서 같은 백인에게 죽어서 행복했을 것이라고 비웃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도 역시 백인이 권력을 잡던 로디지아를 빼고 죄다 그의 죽음을 고소해했다.

투투가 귀국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투투는 3개의 학위를 가지고 케이프 주의 앨리스에서 그리스어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투투는 정치적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남아공의 상황은 그를 괴롭혔고 1968년 포트 헤어 대학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550명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점거하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농성했다. 오후 2시, 경찰이 투입됐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정부에 의해 완전히 낙인이 찍혀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며 투투는 "내 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소"라고 1998년에 회고했다.

2.3. 투쟁에 나서다

3년간의 앨리스 생활 이후 1970년 투투는 레소토에서 대학강사로 일하게 된다. 이미 그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학계와 교회에서 그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972년 투투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부의장이 되어 다시 3년간 런던에서 살게 되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했는데 이때 그의 리더십이 극도로 향상되기 시작했다.

1975년 투투는 요하네스버그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는데,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리고 이는 흑인으로서 가장 높은 성직에 오른 경우였다. 남아공의 흑인들은 흑인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에 열광했고 투투는 주임사제에게 주어지는 백인 지역의 호화 저택을 거부하고 흑인 빈민가 소웨토(Soweto)) 에서 살기를 고집하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백인들 중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아공 정부는 반투지역의 흑인 학교에서 백인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강요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편 투투는 새 대통령인 존 보스터에게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는 정의의 확립과 인종 박해의 종식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투투는 편지 말미에 인종차별정책이 지속되면 머지않아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하너스 포르스터(Johannes Vorster) 대통령은 투투의 편지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투가 흑인들을 선동하여 소요사태를 일으키려 한다고 비난을 할 뿐이었다.

2.4.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1976년 6월, 투투가 포르스터 대통령에게 경고한지 두달만에 사건이 터졌다. 남아공 정부는 반투 교육부에서 제의되었던 아프리칸스어 강요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신들이 백인들과 뒤질 것이 없다면서 세력을 불리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이 격분하여 이에 맞서게 된 것이다. 1976년 6월 16일 소웨토에서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강요에 맞선 평화시위를 벌였다. 급격히 수가 불어난 그들은 올랜도 중학교에 모여 농성을 벌였는데 경찰들이 경고없이 발포하여 헥토르 페터슨이라는 12세의 소년이 사망했다.[18]

흑인 사회 전체가 뒤집혔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흑인들은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수백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봉기는 몇달간 지속되었고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비록 인종 차별 정책 철폐에는 실패했지만 백인정권은 크게 놀라 흑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강경정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비무장 시위대와 학생들에게 총을 쏘고 개를 풀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세계의 여론은 크게 나빠졌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투투는 레소토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남아공을 떠나야만 했다. 그때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흑인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스티브 비코가 30살의 나이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사망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흑인 사회는 다시 한번 들끓었다.

그 소식을 들은 투투 역시 크게 상심하였는데, 투투는 인종차별이 흑인 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주장을 했다. 흑인 차별은 장기적으로 백인들의 인간성에게 손상을 주고 백인들에게 손해라는, 흑인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19]

법무장관 지미 크루거가 "그까짓 검둥이 하나 죽어봐야 그것은 내가 걸린 감기 이상의 고통도 주지 못한다."라는 막말을 함에 따라 투투의 발언은 더욱 부각되었다. 투투는 크루거를 "한 인간의 죽음을 보고 감기 말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크루거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라고 불렀다.

투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비코의 장례식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백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흑인도 인간임을 알게 하자고 주장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렇게 투투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는 흑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는 남아공의 백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이는 남아공 백인들에게도 상당한 반향을 남겼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는데 흑인들이 백인 구역에 못가듯이 백인들도 흑인 구역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모든 언론과 미디어는 정권의 검열을 받았으며 흑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모함하는 온갖 찌라시 선전물들이 판을 쳤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투투가 연설을 하면서 "흑백 차별이 철폐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발언하면, TV나 라디오 방송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만 나오는 식이었다. 간디?[20]
1978년 투투는 레소토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왔다. 그는 7년간 일하며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이무렵 흑인 중산층들은 대대적으로 성장했고 정권의 차별정책에 맞서 격렬히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로서 작지만 값진 성과들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흑인이 백인 전용 공원이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법안이 사라졌으며 흑인과 백인의 시합도 허가되었으며 흑인들이 도시의 호텔을 이용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새 대통령 P. W. 보타는 "인종 차별은 영구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등 변화의 기미가 보였으나 사실 이것은 포르투갈 독재정권 붕괴와 로디지아 정부 교체, 국제제재로 어려움에 처한 남아공 정부가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연막작전이었다. 보타 정부의 목적은 약간의 빵을 하사하여 흑인 중산층을 만족시키고 국외의 여론을 개선하면서 차별이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 정체성 유지로, 통행법과 집단영역법은 손도 대지 않았으며 이는 흑인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되었다.[21]

2.5. 거듭되는 시련

이 무렵 투투는 세계적인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그의 목숨도 위험해졌다. 그는 끝없이 백인과의 화합을 요구하며 흑백인종이 모두 공존하는 사회를 추구했지만 백인 정권의 눈에는 그는 백인들을 멸종시키려는 불순하고도 위험한 야심가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적인 사람에게도 이 정도인데 진짜로 백인들은 적이라고 선동하고 다녔으면 어떻게 됐을지 남아공 정부의 사주를 받은 언론들은 맹비난을 쏟아냈고 공공연히 그를 "안경을 쓴 검은 벌레"라고 조롱하였으며 협박전화, 공갈들이 쏟아져 그의 신변을 위협했다.

투투는 자신이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혔으나, 1979년 투투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서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 일환으로 덴마크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남아공산 석탄을 보이콧 할 것을 촉구하면서 남아공 정부는 그를 빌미로 최초로 투투의 여권을 압수하였다.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한 거물급 종교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곧 마지못해서 돌려주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0년 투투는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지문을 채취당하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투투가 남아공 정권을 '나치 이래 최악의 체제'라 비판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인종 차별 철폐에 관해 논의한 후 귀국하자 남아공 정부는 그의 여권을 다시 압수하여 1년 이상 돌려주지 않았다.

투투에 대해 잘 모르던 대다수 백인들도 투투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흑인들도 그의 투쟁 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투투는 지속적으로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청하여 영국, 미국, 서독 등에서 약간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투투를 공개적으로 매국노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백인 정권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흔들수 있는 이러한 행동에 여론이 악화된 것을 등에 업은 남아공 정부는 투투가 소속된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를 깎아내리기 위해 조사회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흠집도 잡지 못했다.

이런 시련은 한순간에 노벨상 수상으로 뒤바뀌게 된다.

2.6. 노벨상

1984년 10월 15일 투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인간의 존엄과 우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남아프리카의 모든 개인과 단체에게 보내는 세계의 격려"라는 취지와 함께 수상된 노벨 평화상의 여파는 엄청났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의 테리 웨이터,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22] 등에게서 축하가 쇄도했고 남아공의 흑인 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거기에 기쁨이 겹쳐 투투가 요하네스버그의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흑인들은 열광 그 자체가 되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던 노벨평화상 시상식 직전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와 소동이 벌어졌으나 그냥 공갈이었고 칼을 쟁기로 만들자는 구약 성서의 구절을 인용한 투투의 연설로 수상식은 감동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투투의 노벨상 수상은 단순히 남아공 흑인들의 투쟁에 힘을 실어준 것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세계적인 문제로 급부상되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2.7. 충돌

1983년 보타 대통령은 1948년 남아공 국민당이 집권한 이래로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한해 투표권을 컬러드(혼혈인)와 인도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에게까지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획기적인 발표였으나, 여전히 인구의 80%에 달하는 흑인들은 배제했다. 이는 흑인들을 남아공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고수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당연하게도 흑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집회가 잇달았고 기세는 몇개월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5년 3월 샤프빌 학살 25주년 집회에서 폭발했다. 남아공의 최남단 우이텐 하지에서 경찰이 또다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 스무 명이 숨지고 그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다.

남아공은 그야말로 뒤집혔다.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흑인들은 일손을 놓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정부도 경찰과 군대를 투입해 잔혹하게 진압함에 따라 남아공 전체가 최루가스와 총성에 뒤덮혔다. 유혈사태는 날이 갈수록 악회되어 무장 경찰들이 차량을 타고 돌아다니며 의심가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11살짜리 아이들도 있었고 그 수가 3만 명을 넘었다.

거기에 흑인들끼리의 유혈사태도 속출했다. "동지들"이라 불리는 과격 흑인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백인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흑인들을 체포하여 목걸이형(necklacing)을 선고하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이렇게 사망한 사람이 수십 명을 넘었다.[23] 투투는 흑인들에게 평화를 촉구하며 유혈사태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말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985년 7월 투투는 두두자라는 마을을 찾아 경찰에 살해된 4명의 흑인들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두두자는 최악의 국면에 치닫는 곳이었는데 경찰들이 열명의 흑인들을 살해하고 흑인 지도자들을 체포하자 분노한 흑인들이 경찰과 백인 지도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워버리는 등 보복이 맞물리고 있었다. 투투는 그곳에서 폭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흥분한 군중들에게 그는 실망을 줄 뿐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을 몰아낼 강력하고도 전투적인 지도자를 원했고 투투는 백인들에게 굴복하는 비겁한 작자로 매도되었다.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투투가 두두자를 떠난지 며칠만에 어느 여자가 경찰의 끄나풀로 몰려 드잡이를 당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같은 시각 콰테마 스타디움에서 또다른 14명의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주관하던 투투는 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로서는 백인에게서 자유를 찾아야 하는 명목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계속된다면 나는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보따리를 꾸려서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유를 찾겠다는 동기는 지극히 정당하고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승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적들이 악용할 수도 있는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안됩니다."

흑인들은 "누가 탄압을 하고 있는데!"라면서 격렬하게 반발했고 투투가 보타 대통령과 회동하자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

2.8. 대주교가 되다

1986년에 투투는 케이프타운교구장 겸 남아프라카관구장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는 어떤 흑인도 올라보지 못한 높은 자리였고 웬만한 나라의 국가원수에 맞먹는 자리였다. 투투의 교구장 승좌미사는 2년전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투표권도 없는 사람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라이어널 리치, 스티비 원더, 아서 애시시, 마틴 루터 킹의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등이 초청되었고 성 조지 성당[24]에서 승좌미사가 거행되었다. 투투는 이곳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다.
"내가 우리 주님에게 매일같이 드리는 기도는 유색인(colored), 흑인, 백인으로 피부색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형제 자매로서 진정한 일체감을 발견하고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투투가 워낙 엄청난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명사가 되자, 남아공 언론들은 더 이상 투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어려워졌고 주로 '투투가 어디서 어떤 불온한 발언을 하였더라!'라는 식으로 보도하던 신문들에는 '대주교님이 오늘은 외국 손님을 만나셨다', '대주교님께서는 매일 아침 30분씩 조깅을 하신다.' 등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또 투투가 대주교가 된 직후에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워너 브라더스로 이적한 뒤 발표한 첫 앨범의 제목과 타이틀 곡을 'Tutu'로 이름지었고, 여기에 넬슨 만델라에게 헌정하는 'Full Nelson'을 추가해 남아공의 흑인 민권 운동에 지지를 표했다.

한편 그의 케이프타운교구장 임명이 정치적인 의도로 이루어졌고 사실 투투는 케이프타운교구장이 될 자격이 없다면서 투투의 케이프타운교구장 임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관구 고위층과 투투의 지인들은 투투가 만약 흑인 인권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올랐을 자리이며, 이번 케이프타운교구장 선출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반응이었다.

2.9. 아파르트헤이트의 최후의 저항

투투의 케이프타운교구장 선출에 맞추어 잠시 비상사태를 해제했던 남아공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안정국을 열었고 이는 지난번 비상사태보다도 훨씬 지독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불심검문, 투옥할 권리는 물론 구타, 고문, 사살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백인들 사이에서 AWB(Afrikaner Weerstandsbeweging, 아프리카너 저항운동)이라는 극우 정당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하켄크로이츠를 걸고 다니고 나치정치깡패였던 돌격대식 집회를 열면서 흑인들을 위협했다.

이들은 수만 명의 흑인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있는 보타 정권을 '검둥이들을 너무 풀어준다'면서 지나친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과거 페르부르트 정권의 정책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는데 1987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123석(임명 12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고 보수당이 진보연방당을 제치고 제 1야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보타 대통령은 모든 인종차별 반대 집단을 금지함으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고 만족한 백인들은 진정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나 싶었던 순간 1989년 보타가 권력투쟁에서 밀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F. W. 더클레르크가 대통령이 되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25]

1990년 2월,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를 조건없이 석방했고 만델라는 27년 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992년 재보선에서 국민당이 보수당에게 패배하자 바로 국민투표를 시행하며 아파르트 헤이트폐지를 백인에게 공인받았고, 1994년 4월 처음으로 전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역사적인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압승하면서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었다. 투투가 말하던 승리의 날이 온 것이다.

2.10. 그 후

인종차별 정책은 사라졌지만 그 앙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풀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만델라 정권은 진실, 화해 위원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당시에 저질러진 모든 종류의 범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위원장으로는 투투가 임명되었다.

당연하게도 투투가 위원장이니 만큼 위원회는 흑인들의 피비린내나는 복수판이 되지 않았고 흑인들까지 공정하게 밝혀내며 공정성을 유지했으며 과거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느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를 제시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그 후로는 투투는 공식적인 행동을 대체로 삼가고 있으나 미국의 FLAN 게릴라 석방을 호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남아공의 중요 인물로서 남아공의 경기들에 참관했다. 아무래도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때 가장 저명한 인사로 넬슨 만델라 가 있었지만 2010년 당시에 92세의 고령이었고 더군다나 6월10일에 있던 전야제가 끝나고 귀가하던 만델라의 손녀가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해 6월11일 개막식에 참석 할 수 없어 투투 대주교가 대신 나왔다.[26]

2010년 7월 22일 그는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투투 대주교의 신학적 성향은 성공회 내에서 광교회적 성향 내지는 자유주의-고교회적 성향인 것으로 보인다. 복음주의적 성향(저교회적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이후엔 해외의 좌파인사와 민주세력과 교류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고, 2013년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2015년 자신의 딸인 음포 앤드리아 투투(Mpho Andrea Tutu)가 네덜란드에서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고 강복을 내려주었다.[27]
템플턴상 시상식에서 연설하는 투투 대주교

2.11. 사망

2021년 12월 26일, 케이프타운의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0세. 1개월 전 F. W. 더클레르크[28]가 사망한 후 또 한 명의 남아공 민주화의 주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조문 글을 보내기도 했다.

케이프타운 성 조오지 대성당에 안치됐다. 화장 대신 수분해장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3. 어록 및 유명한 연설

우린 불복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있으니까요.
- 악법도 법이라면 (현 남아공 체제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법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답하길
당신은 요하네스버그의 거대한 저택에서 그 곳에 사는 단 2명의 백인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집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에 당신은 이른 새벽에 당신의 집을 나서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당신의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어서 당신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당신의 집은 당신이 조금 전에 일을 마치고 온 그 저택의 거실 하나보다도 작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 까요? 인종 차별은 언제나 이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땅바닥에 떨어져 무참하게 짓밟히게 됩니다.
- 어릴 적에 자신의 아버지를 경찰들이 'boy(이 녀석,이 새끼)'라고 부르면서 막 대하는 것을 회고하면서
어느 정부 관료는 늙어서 아무 일을 못하는 흑인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입니다.
백인들도 웃고 사랑하고 아이를 키우고 울고 먹고 잠을 잡니다. 그들 역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인간이라면 그들은 왜 흑인들도 웃고 사랑하고 아기를 키우고 울고 먹고 잠을 자는 똑같은 인간이란 생각을 하지 못할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런 일(인종차별)이 앞으로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까요?
백인은 흑인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르더라도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건 간에 백인 소년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8세의 백인 소년은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억압과 착취의 묵인으로 세뇌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백인들이 여러분들을 자학하게 만들고 자기 증오로 가득 채우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백인만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일과 역할을 지시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여러분의 그러한 자기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커다란 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모두 흑인들이 '백인들은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흑인들이 '우리는 백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인종차별을 싫어하고 불의와 억압을 미워할 뿐이다. 우리는 위대한 미래를 향해,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피부 색깔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규정되는 그런 나라로 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 남아프리카의 상황은 폭력 천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폭력은 바로 인종차별이란 폭력입니다. 그것은 이주를 강요하고 재판도 없는 구금과 경찰에서의 의문사, 또한 아이들에게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강요하는 것을 불러 일으킬 겁니다.
왜 그들은 나를 두려워 하는 것일까요? 나는 남아공에서 선거권도 없는데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흑인 한 사람의 말 한 마디, 그것도 사실이 아닌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 흑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들이 나를 공격함으로써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나의 인격을 모독함으로써 내가 비난하고 있는 사악한 체제를 바꾸기라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상(노벨평화상)은 역 앞에 앉아 감자옥수수, 돼지고기를 파는 우리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1년 가운데 11개월을 자녀들과 떨어져 독신 숙박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우리 아버지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보금자리를 산산히 파괴당한 채 수용소에서 비에 젖은 매트에 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며 지은 죄라고는 남편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마치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이 땅의 350만 흑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상은 우리들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준 것입니다.
-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
11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나라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란 말인가?
- 11세의 소년들까지도 경찰들에 의해 닥치는대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한 연설
하느님이 나에게 부여한 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부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 처럼 나는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하느님의 말씀이 내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타올고 있는 이상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죽음은 최악의 것이 아니다.
-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를 조사하기 위한 감사위원회에서의 증언
백인들이 우리에게 와서 성서를 주고 기도하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성서를 받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백인들은 아프리카를 차지했더군요. 하느님이, 예수님이 참으로 분노할 짓을 하고 그걸 성서로 덮어버렸죠.
만일 당신이 부당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당신은 박해자의 편을 택한 것이다. 코끼리가 생쥐의 꼬리 위에 자기 발을 올려 놓고 있는데 당신은 '나는 중립을 지킨다'라고 하면, 그 생쥐는 당신의 중립에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4. 여담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강경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을 만나러 갔을 때에도, 그의 면전 앞에서 온갖 비판을 쏟아냈다고 한다. 한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투투와의 만남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투투(TuTu)'라는 성의 운율에 맞추어, "So-so(그저 그랬어요.)"라는 답변을 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이 유머는 레이건의 장례식 때도 낭독되어 조문객들을 웃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길을 걷던 중 어느 백인 남성과 마주쳤는데, 해당 남성은 "저리 꺼져! 난 고릴라들을 위해 길을 비켜주지 않아!(Stand aside, I don't make way for gorillas!)"라고 폭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투투 대주교는 길을 비켜주면서 "아,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고릴라들을 위해 길을 비켜 준답니다."라고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5. 관련 영상

마이클 잭슨 팬이라면 Man in the Mirror 뮤직비디오에서 눈물을 흘리는 투투 대주교를 볼 수 있다.

6. 둘러보기

파일:Archbishop Desmond Tutu.jpg
제2대 레소토교구장
제6대 요하네스버그교구장
제11대 케이프타운교구장 제10대 남아프리카관구장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대주교 예하
2nd Bishop of Lesotho
6th Bishop of Johannesburg
11th Bishop of Cape Town & 10th ArchBishop of South Africa
His Excellency Desmond mpillo Tutu
OMSG[29] CH[30] GCStJ[31] FKC[32]
파일:Archbishop Desmond Tutu.jpg
역대 성공회 레소토교구장
초대 2대 3대
존 아서 애로우스미스 마운드 주교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주교 필립 스탠리 모쿠쿠 주교
역대 성공회 요하네스버그교구장
5대 6대 7대
티모시 존 바빈 주교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주교 조오지 던컨 뷰캐넌 주교
역대 성공회 케이프타운교구장
10대 11대 12대
필립 윌스포드 리치몬드 러셀 대주교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대주교 은곤쿨루 윈스턴 휴 은던게인 대주교
역대 성공회 남아프리카관구장
9대 10대 11대
필립 윌스포드 리치몬드 러셀 대주교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대주교 은곤쿨루 윈스턴 휴 은던게인 대주교

[1] Order for Meritorious Service 1등급(Class I, 골드)[2]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3] Order of Saint John 1등급(Grade I)[4] Fellow of King's College London (FKC)
킹스 칼리지 런던 평의원
[겸직] 제10대 남아프라카관구장 대주교(케이프타운교구장으로서 당연직)[6] UNISA - Desmond Tutu
King's People - Desmond Tutu
KCL InTouch - A heartfelt send-off for a King 참고
[7] 레소토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수품[8]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 대입해 보자면, 만델라가 김영삼, 김대중처럼 정치 지도자로서 반독재 투쟁을 주도하였고, 투투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종교계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에 정당성을 실어주는 역할을 해냈다.[9] 허들스턴 신부는 영국에서 출생한 신부로, 1960년에는 주교품을 받는다. 1910년대 출생의 영국인인지라 백인이었다.[10] 나중에 허들스턴 주교는 투투와 같이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11] 성공회 사제는 결혼이 허용된다.[12] 이미 저 시절에도 영국은 인종차별을 정부 차원에서 막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정부의 지시대로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흑백 분리를 주장하며 백인정권을 지속하려는 로디지아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13]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하고 있는 소위 정착촌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UN결의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무차별 공격해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한 다음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고 있다.[14] 애초에 남아공의 백인들 중 아파르트헤이트에 찬성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네덜란드계였고, 영국계를 비롯한 타 국가 출신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덜했다.[15] 칼뱅주의 개혁교회였는데, 네덜란드 본토 개혁교회와 다르게 근본주의 성향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개혁교회를 안 다니는 영국계나 독일계를 비롯한 타 백인들은 해당 정책에 의해 피해를 봤고, 당연히 네덜란드계 백인들과 관계가 파탄났다.[16]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계다. 당시 네덜란드계와 영국계의 대립을 보여준다.[17] 사실은 흑인 혈통이 약간 섞여서 컬러드로 분류되었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서류상 그를 백인으로 대접해줬다. 그렇지만 페르부르트를 비롯한 진짜배기 아프리카너들은 그를 사적으로 홀대했고 이는 암살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18] 이 사건은 보물찾기 시리즈 남아공편과 이현세의 세계사 넓게 보기 아프리카편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다.[19]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상당히 권위주의, 보수주의적인 정권이라 백인들도 정치적 자유가 없었고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크게 숨막히는 삶을 살아야 했다.[20] 예시라고 들었지만, 이는 드립이 아니라 실화이다. "유혈 사태"는 백인들이 미디어로 접한 투투의 유일한 육성이었고, 그로 인해 남아공 백인들은 투투를 평화운동가가 아닌 히틀러괴벨스와 같은 미친 선동가로 착각하곤 했다. 연설 중 주먹을 들어올리는 제스처를 담은 씬을 잘라서 앞서 언급한 육성에 합성하는 건 덤.[21] 다만 백인들에겐 효과는 있었는지 일부 연합당 출신 의원(남아프리카 당)들이 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하고 상당수 자유주의적 백인들의 지지표를 꽤 확보해서 극우파들이 보수당으로 떨어져나간 상황에서도 1987년 총선에서 52.3%라는 득표율을 확보했다.[22] 공교롭게도 그녀는 2주 남짓 후에 암살된다.[23] 목걸이형은 기름을 채운 타이어를 목에 걸고 불을 붙여 죽이는 잔인한 사형 방법이다. 법정 형벌로서의 사형(death penalty)도 되고 사적제재로서의 사형(lynch)도 된다. 아이러니한 건, 원래 목걸이형은 과거 반항적인 흑인이나 흑인에게 동정적인 백인을 살해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남아공의 백인들이 고안했던 형벌이란 것이다.[24] 영국 윈저 성에 있는 왕실 성당인 성 조지 성당과는 수호성인만 같은 다른 성당이다.[25]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유엔에 의해 무기금수 제재를 받고 있었으며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남아공을 압박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26] 나중에 만델라는 7월11일로 예정된 결승전 전날인 7월10일에 나오긴 했다. 고령으로 거동조차 불편했지만 외투를 껴 입고 (남아공은 남반구라 6월부터 8월까지가 겨울이다.) 폐막 전야제에 나와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27] 아프리카 성공회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이여서 동성애를 배격하지만 투투 본인은 자유주의에 기반해 동성애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8] 하지만 그래도 백인에 아파르트헤이트의 부역자(아파르트헤이트를 스스로 폐지하긴 했으나 어쨌든 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왔기 때문.)라는 인식이 흑인들 사이에 있어 고인드립은 물론이고 국장을 치러주는 것에 크나큰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장으로 치르고 차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주도하는 추도식을 가졌었다.[29] Order for Meritorious Service 1등급(Class I, 골드)[30]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31] Order of Saint John 1등급(Grade I)[32] Fellow of King's College London (FKC)
킹스 칼리지 런던 평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