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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Warsaw Pact invasion of Czechoslovakia | |||
냉전의 일부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1968년 8월 20일 ~ 8월 21일 | ||
장소 | 체코슬로바키아 | ||
결과 | 바르샤바 조약군의 승리 | ||
영향 | 1991년 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 소련군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 과정 탄압 알바니아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 - 중국의 관계 극도로 악화 모스크바 보충 협약 체결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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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지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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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지원국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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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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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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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침공한 사건이다.체코슬로바키아에 입성한 폴란드군 전차 |
2. 배경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이였지만, 체코슬로바키아가 차근차근 자유화를 이뤄나가는 프라하의 봄을 추진하여 개혁하고 있었는데,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주변 동유럽 국가들까지 공산주의 세력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소련은 동유럽의 안정화를 위해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3. 전개
침공 후 얼마 되지 않아 8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20만 명의 바르샤바 조약군과 2천 대의 전차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성했고, 입성한 바르샤바 조약군들은 공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군부대를 완전히 장악했고, 이 과정에서 70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침공 사실을 알게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피해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하여 자국 시민들에게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탱크에 불을 지르거나 바리게이트를 치거나 길을 잘못 알려주는 등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에게 자발적으로 저항했다.21일 새벽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바르샤바 조약군에 의해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이 사건으로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소련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여졌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모스크바에서 모든 조치를 철회한다는 프로토콜에 서명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갔다.
4. 영향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돌아간 후 바로 구스타우 후사크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난다. 둡체크가 쫓겨나고 새 서기장 구스타우 후사크는 둡체크가 추진했던 개혁들을 모두 돌려놓게 된다.5. 반응
5.1. 중국
침공 전 중국은 소련과 계속 갈등을 빚어오고 있었다. 소련이 중국의 경제지원 약속을 지키지도 않고 중국과 인도가 국경분쟁을 벌일때도 소련은 중국을 지원하지 않고 중립을 취하자 중국은 소련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관계는 악화된다. 그런데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중국은 제3세계 및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친중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소련을 제국주의, 팽창주의 국가라고 대대적으로 비난했으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극도로 악화되었다.5.2. 북베트남
앞서 말했던 중국과 소련이 분쟁을 겪고 있을때 중국은 북베트남에게 자국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가진 전쟁을 한참 치르는 도중이였기 때문에 중국, 소련의 군사지원 모두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이였고, 결국 북베트남은 소련을 지지했고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때도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소련을 지원했다.5.3. 동구권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 중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참여하거나 가담한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주의가 포함된 개혁정책을 규탄했으며, 헝가리 혁명처럼 번질 것을 우려했다.5.4. 북대서양 조약기구
서방의 여러 나라들은 소련에게 군대를 즉시 철수할 것을 요청했으며 명백한 전쟁 도발 행위임을 경고했다.5.5. 미국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대부분 무시했다. 그런데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유엔에 안보 회의를 긴급 요청하고 서방과 함께 소련의 행위를 규탄했다. 그러나 미국 또한 한참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도중이라 제대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미국과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했기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사소한 분쟁으로 다시 한번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가는건 원하지 않았다.5.6. 대한민국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동독의 만행을 규탄했다.5.7. 루마니아
루마니아는 침공에 참여하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서기장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소련의 영향력의 강력한 반대자였고, 알렉산데르 둡체크 편에 섰다고 선언한 바도 있으며, 소련의 정책을 가혹한 말로 묘사한 대중 연설을 한 바도 있다.5.8. 핀란드
핀란드는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중립국이였던 핀란드는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위협을 느낀 바 있다.[1] 군인 및 민간인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