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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8년 6월 24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인 물자공급 봉쇄조치. 봉쇄조치가 시행된 직후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이 대규모 항공 물자 수송 작전인 '베를린 공수작전(Berlin Airlift / Berliner Luftbrücke)'을 시행했다. 따라서 베를린 봉쇄와 베를린 공수작전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므로 보통 함께 언급된다.서방의 대규모 공수작전으로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조치는 1년이 되지 못해 해제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 배경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이래 승전국인 미국·소련·영국·프랑스에 의해 쪼개져서 분할점령 및 통치되고 있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다.2차 대전 말기부터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갈등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서방에도 공산주의에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그들을 위협적으로 보지 않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고 서유럽에서도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 크게 득세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전쟁 말기에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처칠을 무너뜨리고 총리가 된 노동당의 애틀리는 공산주의와 소련에 제법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미국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에서조차 친공산주의, 친소 정책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요직에 있었다. 물론 친소, 친공산주의 세력은 민주당에서 소수 계파였고 민주당 주류는 소련을 경계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역시 소련과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인물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스탈린과 직접 만나서 전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에 대한 불신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렇게 전쟁 직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정치적으로 변화가 요동치던 상황에서 서방의 정치인들은 소련의 노골적인 팽창에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면서 갑론을박을 벌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반적으로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좌시, 관망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1946년을 전후로 동유럽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동과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자 서유럽도 비로소 소련의 위협을 현실로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전후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당시 독일, 그 중에서도 양분된 베를린은 자연스레 자본 진영과 공산 진영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패전국이었던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연합국에 의해 국토는 4분할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념별, 지역별로 정치세력들이 이합집산하고 있었다.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동독 점령 지역에 재빠르게 꼭두각시 사회주의 정당(SED)을 세운 후 언론을 통제하고 자유주의 정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6년 소련은 동독 지역에서 독자적인 총선을 실시했고 언론 및 정치 탄압과 농촌 지역에서 선거 참여를 억압하는 상황 속에서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근소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 승리 직후 모든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가 되었고 이로서 동독은 공산화되었다.
이에 서방 3개국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과 영국은 1947년 1월 1일부로 미군과 영국군 점령 지역을 하나로 통합했고 미군과 영국군 주둔 부대가 통합하여 서독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동안 소련의 팽창을 좌시하던 미국에서는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이 그리스 지원을 골자로 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고 마셜 플랜이라는 유럽 재건, 부흥 계획을 실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재건에 여념이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국의 마셜 플랜을 반겼고 처음 우왕좌왕하던 서유럽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점차 소련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1947년 4월 독일의 전후 처리를 두고 4개국간 모스크바에서 외무상 회담이 열렸으나 냉랑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48년 하반기에 서독 지역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던 총선을 앞두고 미, 영, 불, 소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소련은 서독까지 차지할 요량으로 서독의 사회주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미, 영, 불 3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서독 지역에 마셜 플랜을 시행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은 자신의 관할이었던 동독과 달리 서독은 관할이 아니었으므로 동독에서 실시한 정치적 탄압 및 언론통제를 서독에서 실시할 수는 없었지만 서독에서도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 등 사회주의 계열 정당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서독의 공산화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지하 조직이 건재했던 사민당은 전쟁이 끝나자 우파 정치인들이 지리멸렬하던 동안 순식간에 당을 재건하고 세력을 키웠지만 서독의 사민당은 동독의 사민당이 소련에 의해 강압적으로 와해되는 모습을 본 후 소련이 결국 자신들을 토사구팽할 게 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회주의를 기치를 삼으면서도 반소련, 반스탈린을 내세우게 되었다. 소련에 의해 동독이 공산화되는 모습을 지켜본 서독 시민 사이에서 반스탈린, 반소련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유재산 국유화 등 소련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하던 사회민주당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되었다. 한편 전쟁 직후 이전투구하던 서독의 우파 정치인들은 동독이 공산화되자 싸움을 멈추고 결집하여 극적인 통합을 이루면서 기독교민주연합이라는 통합 거대 우파 정당이 탄생했다. 이렇게 1948년 총선에서 서독이 공산화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하지만 서독을 공산화시키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상황을 극적으로 타파할 방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947년 당시 소련의 GDP는 미국의 1/4에 불과했고 아직 독소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재건하지 못했으며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면전은 당연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스탈린은 전쟁을 대신해 본보기로서 서독과 서방에 충격을 줄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옮겼는데 그것이 동독 한복판에 있던 베를린의 포위 봉쇄였다.
3.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소련을 곰에 비유해 베를린 봉쇄를 표현한 만평 |
T-34 전차와 함께 베를린 시를 완전히 둘러싸 포위하던 소련군은 1948년 1월부터 독일의 미영불 점령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열차를 멈춰 세우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발생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도 서방의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더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달리 독일, 오스트리아와 같은 경제권에 있었고 19세기부터 산업화, 공업화가 진행된 상태였는데 2차 대전이 끝나자 체코 망명정부의 대통령인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귀국하여 갓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스탈린은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친소 공산주의자로 여겨 그를 지원하여 체코를 소련 영향력 안에 두려고 하였다. 실제로 베네시는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소련의 영향력하에 나라를 이끌었으나 체코 국민들은 소련이 아닌 서방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고 이에 베네시 정권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결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베네시는 소련과 거리를 두고 친서방으로 돌아설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1948년 2월 스탈린은 체코 공산당, 체코 사회민주당, 노조를 사주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들은 곧 체코 정부군을 제압한 후 정권을 전복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위기감을 느낀 미, 영, 불 3개국은 1948년 3월 7일 서독 경제를 통합하기로 결정하자 소련은 3월 20일 베를린 소재 연합국 통제 이사회에서 탈퇴했다. 3월 25일 소련은 베를린과 서방 연합국의 점령지 사이를 오가는 열차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4월 1일 서베를린과 서독을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를 완전히 봉쇄했다. 이에 미군과 영국군은 이틀 동안 서베를린 주둔군에 대한 군수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다. 결국 소련은 이틀만에 봉쇄를 풀었다. 이는 석 달 후 벌어진 베를린 봉쇄와 공수작전의 축소판이자 예행 연습이 되었다.
독일 전역에서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 영, 불의 주장은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총선은 서독 지역에만 실시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이 독일의 화폐인 라이히스마르크를 평가절하하자 서방 3개국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6월 20일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새로 서독 마르크가 도입되었으며 서베를린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했고 이어 서방 3개국이 화폐개혁 및 서베를린을 포함한 마르크화 통용을 발표한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엄금했다. 21일에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용 기차마저 회선시켰으며 22일 소련 점령지역에서 쓰일 새 화폐 오스트마르크화를 발표했다.
6월 24일 한밤중에 소련은 동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송전선을 일제히 차단하여 서베를린으로의 모든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이어 새벽 6시를 기해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연결되는 모든 도로, 철도, 수로를 차단하여 최소한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마저 완전히 차단했고 날이 밝자 소련 점령지(동독)나 동베를린으로부터 서베를린에 대한 어떠한 물자 공급도 중단한다고 공표했으며 6월 25일에는 상수도마저 차단했다. 서베를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스탈린이 보기에는 봉쇄는 매우 합리적이며 온건한 정책이었다.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도 없고 아직 핵개발을 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지난 독소전쟁으로 2천만이 넘는 국민이 죽고 서부 국토가 초토화된 소련 입장에서 종전 3년 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선택하기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향후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기 때문에 서베를린을 봉쇄해 생필품과 전기의 공급을 차단하여 사람들을 서서히 굶겨 죽이는 대안으로 이를 관철하려고 했다.
물론 소련 측이 작정하고 220만 명의 사람들을 실제로 굶겨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의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한 실제 목적은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 서베를린을 넘겨받는 것이었다. 소련의 예상은 미영불 3국이 고작 베를린 반쪽을 사수하기 위해 소련과 전면전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2차대전의 여파가 남은 것은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으며 미국도 전쟁으로 상당한 물적 자원을 소모한 상황이었다.[1] 따라서 사태가 길어지기 전에 서방 국가들은 소련에 백기를 들 것이며 소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베를린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스탈린의 계산이었다.
이로서 인구 22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었다. 당장 서베를린에 있었던 물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치의 석탄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봉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4. 미국의 결정
봉쇄 사실을 통보받은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다. 서베를린을 포함한 서독의 화폐 개혁에 소련이 대응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200만 도시 전체를 완전 봉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2] 당시 프랑스와 영국 역시 본토에서 전쟁을 치른지라 모두 독자적으로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연합국 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결단만을 기다려야 했다.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현지에 주둔하던 주독일 미군정 총사령관 루셔스 D. 클레이(Lucius D. Clay) 장군은 무반동포와 전투공병을 수반하는 무장수송대를 베를린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후방의 생각은 달랐다. 백악관의 각료회의에서는 대부분의 각료, 심지어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과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마저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심지어 주독일 영국군정 총사령관 브라이언 로버트슨(Brian Hubert Robertson, 1st Baron Robertson of Oakridge)은 서방 연합군이 베를린에서 철군하고 독일 전역에서 선거를 치르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베를린 주둔 영국 공군 총사령관 레지널드 와이트(Reginald Newham Waite) 정도가 베를린을 사수하자는 클레이의 의견에 동조했다.
미국과 서방도 소련과의 전쟁은 가급적 피하고 싶어했다. 일단 무대인 베를린 자체가 이미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이 된 동독 한복판에 있고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나 되었으며 동독 전체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련 본토에서 대규모 병력을 육상으로 보낼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 동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구권 위성국들의 군대도 바로 동원할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소련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서 무력으로 봉쇄를 풀기 힘들었고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문제로 전쟁 중이었다. 그래서 서방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고자 했다.
루셔스 클레이 등에 의해 대규모 공수작전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3]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다들 좌절했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의 방해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작전 강행을 지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자 독일 미군정 총사령관 클레이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5. 베를린 공수작전 개시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시행한 당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각료들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지원을 승인, 지시하자 주독일 미군정 총사령관 루셔스 클레이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날은 클레이 장군의 일생에서 가장 바쁜 날이 되었다. 그는 미군을 비롯하여 주독일 영국군, 주독일 프랑스군, 특히 베를린 주둔 각국 연합국 사령관들과 신속하게 연락하여 공수작전이 가능한지 얼마나 많은 물자를 어떻게 수송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아울러 클레이는 서베를린 민선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와 빌리 브란트 등 정치지도자들과 연락하여 베를린 현지의 독일인들의 지원 가능 범위를 타진했다. 로이터 시장은 공수작전 시행 시 모든 서베를린시의 통제를 책임질 수 있으며 베를린의 자유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말했다. 하지만 로이터는 공수작전의 성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공수작전과 관련된 각 지역 사령관 및 책임자들과 연락을 통해 공수작전의 가능 범위를 확인한 클레이는 유럽주둔 미 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에게 공수작전 시작을 지시했다.르메이 장군은 명령을 받아 위와 같은 말을 남기면서 현장에서의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르메이가 유럽공군사령관에 임명되었던 것은 베를린 시민들에게나 미국에게나 천운이었다. 우선 커티스 르메이는 이전에 미군의 폭격 교리를 한번 수정한 전적이 있는 전략적인 면에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인재였다. 둘째로 당시 미군도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에서 공군이 분리되어 나온 참이었던 데다 미 공군 장성 중에 실제로 폭격을 해 본 장성이 적었다.[4] 새로 분리된 군종의 서투름과 2차 대전 전후의 혼란 속에서 미국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이자 미국 최고의 전략가가 유럽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5] 마지막으로 비행기로 무언가를 왕창 퍼붓는 데는 이만한 인재가 없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여유가 있는 모든 수송기들의 증원요청과 함께 본국에 대형 수송기 C-54의 대규모 투입을 요청했다. 아울러 자기는 이런 대규모 수송작전에 소질이 없다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같이 종군하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의 항공수송작전을[6] 총괄 지휘했던 윌리엄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을 적임자로 천거했다.
커티스 르메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워싱턴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를 투입해 줄 것을 약속했다. 미 국방부는 공군 수송기는 물론이고 해군 항공대의 수송기까지 동원하였고 종전 후 제309항공우주정비및재생전대에 보관 중이던 수송기들까지 싹싹 긁어모아 독일로 보냈고 독일 현지의 수송기들도 보냈으며 퇴역한 예비역 미군 조종사들을 재소집한 데 이어 독일 현지에서도 루프트바페 출신 정비병들과 조종사까지 급히 특채했다.
베를린 봉쇄 2일만인 6월 26일 마침내 첫 인도적 공수작전(Operation Vittles)이 실시되었다. 수송기 편대가 하늘에서 굉음을 지르며 나타나자 베를린 시민들은 공격으로 오인하여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내 연합군의 지원물자 수송이라는 사실을 알자 환호했다. 작전 첫 날 실적은 C-47 수송기 32기를 동원해 고작 82톤을 옮기는 데 그쳤다. 다음날에는 영국 공군 소속 수송기도 투입되었다. 당시 유럽 주둔 미군이 보유한 수송기는 C-47 100여대에 불과했고 영국 공군도 비슷했다. 이 정도의 수송기로는 베를린 시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의 10%도 수송하기 어려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미 국방부는 본토에 있는 C-54 수송기를 긴급히 독일에 전개시켰다. 7월 1일 C-54가 처음 투입되기 시작했다. 10톤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는 대형 수송기인 C-54의 투입되면서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7월 초가 된 시점에서는 이미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500톤, 며칠 후에는 750톤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서베를린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물자는 매일 4,500톤 가량에 달했고 아직 연합국의 수송능력은 이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었다.
공수작전이 시작되었지만 공수작전이 개시된 지 며칠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공수작전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이 높았다. 7월 초 연합국은 하루 750톤을 수송하였는데 이 정도의 수송량은 서베를린의 물자 부족을 해소하는 데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7월 서방 연합국이 서베를린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서베를린 시민들은 결국 소련에게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토 주어(Otto Suhr) 당시 서베를린 시의회 의장은 서베를린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고 물자, 난방, 인력 자원 대비 계획을 지시했다.
어쨌거나 미군은 계속해서 가용할 수 있는 대형 수송기들을 모두 독일로 보냈고 7월 말에는 800대가 넘는 수송기들이 독일에 배치되었다. 이 수송기들을 모두 제대로 활용한다면 서베를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충분히 수송할 수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7월 말에도 연합국의 수송량은 2,000여톤으로 서베를린이 필요로 하는 하루 수송량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수송기들은 충분해졌지만 이를 원활하게 운용할 시스템과 지원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 수송기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물류 및 관제 시스템 등 수송 시스템 전반을 새롭게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공수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송 물량을 대폭적으로 증가할 필요가 있었지만 현 수송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편 없이는 대폭적인 물량 증가는 불가능했다. 7월 후반 주유럽 미공군사령관 윌리엄 H. 터너(William H. Tunner)[7]가 통합공수사령관에 취임하여 이후 베를린 공수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이 방면의 전문가였던 터너는 공수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송 시스템의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취임하자마자 인적 체계, 물자, 수송 방법 등의 시스템 통합부터 실시했다. 터너는 일단 3개국으로 분산된 인적, 물적, 행정적 통제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7월 23일 미군과 영국군을 총괄 지휘하는 통합항공수송사령부(Combined Airlift Task Force, CALTF)를 설립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작전에 투입하는 수송기의 기종 통합이었다. 급작스러운 공수작전 동원을 위해 미국, 영국에서 다양한 기종을 징발했는데 이들 비행기는 구동 방식, 이착륙 방식, 연료, 부품 조달 등이 상이하여 관리가 매우 복잡했다. 이에 터너는 차차 기종을 최대한 단일화했다.
수송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화물 물류 및 수송기 정비를 위한 정비 인력이 필요했다. 특히 수송기 정비를 위한 전문 인력들이 크게 부족했고 이를 위해 전 독일 공군의 지상 요원들이 동원되었다.
윌리엄 터너의 이러한 적극적인 조치들로 인해 수송 효율성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그의 취임 후 일일 수송량은 1,000톤을 넘어섰고 7월 말에는 2,000톤을 넘어섰다. 8월 말에는 생필품, 연료, 의약품의 일일 최소 필요량 이상을 수송하는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효율적인 공수작전의 전개를 위해 서베를린에 신공항 건설을 진행했다. 미군과 영국군은 220만 명의 시민에게 공급하기 위한 충분한 물자와 충분히 많은 수송기를 확보했고, 수송기들을 띄울 서독의 여러 공항을 확보했지만 이를 수용할 서베를린의 공항이 부족했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미군 점령지의 템펠호프(Tempelhof) 공항과 영국 점령지의 가토(Gatow) 비행장이 있었는데 가토 비행장은 대형 수송기의 이착륙이 어려웠고 대부분의 수송량은 템펠호프 공항에 몰려 있었다. 서베를린의 관문인 템펠호프 공항은 1940년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공항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수송기와 물자를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서독의 3개 공항에서 이륙한 수송기들은 피크 때는 수십초에 한 대꼴로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해야 하는데 악천후가 발생하거나 지상에서 고장, 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는 뒤따르는 수송기들이 착륙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극심한 정체를 빚어야 했으며 그러다가 결국 다시 서독으로 회항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수송기들이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공항의 수용 능력을 늘리기 위해 템펠호프 공항에 추가 활주로 신설 및 가토 비행장의 활주로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이것으로는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에 부족했고 연합국은 베를린 북서쪽의 프랑스 점령지에 위치한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독일 육군이 사용하던 넓은 부지에 신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 베를린 테겔 공항의 시작이었다. 봉쇄가 시작된 지 40여일 후인 8월 5일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점령지에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투입되었던 터라 공항 건설은 주로 미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공항 확장 공사에는 서베를린 시민들이 동원되었다. 테겔 공항에만 연인원 19,000명에 달하는 서베를린 시민이 근로자로 공사에 참여했는데 그 중 태반은 여성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한 결과 공사 개시로부터 불과 90일만에 당시 유럽 최대인 2,400m 활주로와 부속건물이 완성되어 11월 5일부터 운영을 시작했고 12월부터 공항이 완전 정상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테겔 공항이 신축, 운영되면서 연합군의 수송량은 급증했다.
새해가 되면서 연합국의 충격적인 물량 공세는 소련을 당황시켰다. 베를린의 하늘을 통해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공수되었다. 이 수치는 3달 동안의 평균 일일 수송량으로 약 5,800톤으로 베를린 시민들이 생활하고도 남아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의 양이었다. 터너 장군은 4월 15일과 16일 부활절 이벤트로 24시간 동안 수송기 1,398 소티로 13,000톤의 물자를 때려박는 쇼맨십까지 보여주었다.[8]
공수 물자는 초기엔 식량과 석탄 등의 필수품으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몇몇 조종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간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손수건으로 싸서 공중에서 베를린에 떨어뜨렸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조종사들이 사탕과 초콜릿을 낙하산으로 베를린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공수작전의 후반기에는 아예 어린이들의 간식류를 포함해 담배, 커피 등의 기호품까지 수송기 소티를 할당해서 수송하기 시작했다.
후일 전해진 얘기로, 기호품 투하를 처음 시작했던 사람은 게일 할보르센이라는 조종사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베를린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파일럿이었는데 아이들이 그에게 작은 껌 하나를 받아가서 30여 조각으로 나누어 수십 명이 함께 나눠먹는 것도 모자라 포장지를 잘게 찢어 냄새까지 맡는 것을 보고 식량 부족을 실감하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 아이들에게 "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비행기가 있을 텐데, 그 비행기는 내가 탄 비행기니까 그쪽으로 달려와라. 내가 선물을 더 주겠다"고 밝히고 사비를 털어 초콜릿과 사탕을 잔뜩 구매해 손수건과 낙하산을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사탕 낙하산을 제작해 공수작전 중 떨어뜨렸다. 아이들은 이것을 '사탕 폭격기(Candy Bomber)'라고 부르며 비행기가 날개를 흔들면서 지나갈 때마다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게일 할보르센은 사탕 투하를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개인 재량으로 시작한 것이라 오히려 윗대가리들에게 한소리 듣지 않겠나 하고 긴장했지만 미군은 언제나 부식에 진심인 집단이었고[9]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C-레이션 부식과 허쉬 초콜릿이 민간에 간식으로 흘러가서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현상을 체감한 바 있었기 때문에 상부에서는 선전전에 딱 맞는 소재인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오히려 독려하는 분위기로 흘러갔고 언론에도 인터뷰를 쫙 돌리면서 '정의로운 연합군'의 얼굴로 써먹었다. 윌리엄 터너는 '아주 좋은 선전전 거리다.'고 판단하고 1948년 9월 22일에 사탕 투하를 정식 작전으로 허가하고 홍보 겸 미디어 투어도 보냈다고 하며 이후 다른 파일럿들도 여기 동참하기 시작했다. 게일 핼버슨은 베를린에 총 23톤의 사탕을 투하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에 서독 정부에게 훈장을 받았으며 우주 발사체 연구 개발에 참여하다가 1990년대 이후 다시 직접 조종간을 잡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괌, 이라크 등지에서도 사탕을 투하했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91회에도 나왔다. 게일 핼버슨은 2022년 2월 16일에 향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 공수작전은 서방에서 서베를린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베를린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서방으로 실어 날랐으며 서베를린과 서독 간 민간인 승객도 수송했는데 기차 운임 정도의 요금만 받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자신이 서유럽의 급소를 찌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국력을 선전할 쇼케이스를 열어준 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마 수송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스탈린은 결국 8개월만인 5월 12일 자정을 기해 봉쇄령을 해제하고 송전, 수도 공급을 재개했지만 이후에도 소련은 몇 차례 통행 제한을 가했고 연합국이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은 소련의 진의를 확실히 알지 못했으므로 공수작전을 5달 정도 추가로 진행하다가 10월 1일에 공식적으로 종료하였다.
물론 정말 르메이가 아무 생각 없이 동독 영토에 수송기에 물자만 실어 보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공격 목적이 없는 물자공급을 위한 수송기라고 하여도 적 영공에 수송기만 보내는 것은 당연히 위험한 일이다. 호위기 없이 수송기만 보낸다면 수송기는 그저 적 파일럿들의 격추수만 올려주는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더구나 상대는 막 냉전을 시작한 소련이었다. 이에 르메이는 수송기만 보내는 대신 르메이스러운 플랜 B를 짜 놓았다. 그것은 바로 대공포나 전투기가 깔짝거리면 물자와 함께 실은 소량의 폭탄으로 동베를린 등지에 폭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스탈린도 물자 공급을 위한 수송기를 공격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자살 행위라는 것을 인지해서인지 제3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될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10] 본인이 먼저 봉쇄를 걸어 어그로를 끈 것도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물론 소련이 넋 놓고 연합국의 공수작전을 바라만 본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수백 차례 연합국의 공수작전을 방해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켜 연합국 수송기의 비행을 방해하였으며 연합국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6. 결과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과 서방의 단합력과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하고 말았다. 미국의 공수작전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선전현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제대로 체면을 구겼고 이후 핵무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회피하였다.[11] 게다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의 충실한 신봉자였던 스탈린은 조금만 기다리면 1차 대전 종결 이후처럼 또 다른 대공황이 도래할 것이며 영국과 미국이 독점 자본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전쟁할 것이라고 믿었고 소련은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스탈린 살아생전인 1953년에는 물론이고 1991년에 소련이 망할 때까지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12]베를린 봉쇄 작전과 베를린 공수 작전에서 초기에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각국이 제각각인 군사 시스템으로 인해 작전 수행에 많은 혼란을 겪었고 이후 지속적인 체제 및 조직 통합 및 통일화 작업을 거치면서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갑작스런 무력 도발이 있을시 신속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통합된 군사 체계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49년 4월 NATO가 창설되었다.
NATO는 최초에는 연합국 중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북미와 중서유럽 국가들로 결성하려고 했지만 베를린 봉쇄로 소련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에 위기감을 느끼는 나라들이 늘어나면서 북유럽과 남유럽에서도 참여 희망 국가들이 생겨나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도 NATO 창설에 참여를 희망했고 결국 공산진영 및 중립국을 제외한 사실상 전유럽 국가들이 NATO 창설국으로 참여했다.
미국에선 베를린 봉쇄를 계기로 대소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공수 기간 중 벌어진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이 듀이에 대역전승을 거둔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반면 미국의 친소 세력 및 공산주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베를린 봉쇄로 인해 서방 연합국 점령지구의 정치인들이 소련에 맞서 단결하면서 서독이 탄생했다. 동시에 서독의 사회주의 정당은 소련의 물밑 지원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서독에서 급진 사회주의 정당은 완전히 몰락했고 일부 온건 사회주의 정당만 살아남았으나 세력을 회복하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베를린 봉쇄 자체가 스탈린의 연막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베를린 봉쇄 개시 4일 후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코민포름에서 추방했는데 베를린 봉쇄는 서구 열강의 관심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베를린으로 옮기려는 수작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를린을 두고 서방과 대결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애초에 민간인용 식량 수송기를 격추해서 전 세계의 공공의 적이 되겠다고 선포하는 행위 따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지형과 상황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소련의 악수는 오히려 독일이 자유주의 진영으로 찰싹 붙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당시 독일은 완벽히 파괴되어 경제가 파탄나 있었고 경제기반이 다 박살난 독일 일반 국민은 원조에 기대 입에 풀칠해야 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어 실질 화폐수단은 미국 담배였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벌어진 베를린 봉쇄는 민간인들마저 굶겨죽이려는 소련이라는 이미지와 적대감으로 돌아갔다.
그때 서방 연합국의 식량공세 및 아이들에게까지 뻗친 사탕공세는 경계심으로 얼어붙었던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체제경쟁이든 뭐든 굶주린 시민들, 그리고 어른들의 죄로 그 고통을 분담하는 아이들에게 뿌려지는 식량과 간식거리는 연합국이 적어도 인도적 차원에서 호의를 베푼다고 느끼기 충분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독일은 저 사건을 계기로 그 전까지는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자유주의 진영 연합국을 "우리 편"이라는 개념에 가깝게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사탕 봄버도 분명히 시작은 개인적 차원의 호의였지만 그림상 '소련의 압제로부터 굶주린 아이들을 지켜내는 선량한 자유주의 히어로'라는 이미지로 내세우기 딱 좋았고 그것을 언론에 쫙 돌리면서 독일뿐 아니라 독일 외부 자유주의 진영 선전으로도 쏠쏠히 써먹었다. 그 결과 베를린에서는 반소를 기치로 내세운 시장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독일 외부 서유럽 국가들도 '공산화를 위해서라면 민간인조차 굶길 수 있다'는 소련을 나치와 다를 바 없는 놈들로 보며 경계심 및 적대감이 커지면서 잔존하던 반독 감정보다 반공주의, 반소 감정이 더욱 대두되었다.[13] 한마디로 수싸움 및 선전전에서 소련이 완벽히 패한 셈이다.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연합국 공군은 총 27만 8228회의 비행을 통해 물자 232만 6406톤(미국 공군 178만 3573톤, 영국 공군 54만 1937톤)을 공수했다. 공수 작전의 절정기에는 서베를린의 공항에 30초마다 수송기가 1대씩 착륙했고 여기에 투입된 수송기 C-47, C-54들의 총 비행 거리는 1억 4800만km에 달하는데 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거리에 해당한다. 이때의 경험이 현대적인 항공교통관제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전 기간 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7기를 잃고 31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국은 8대의 수송기와 39명의 파일럿들을 잃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공수작전의 무대였던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있는 사망자 위령비다.
Sie gaben ihr Leben für die Freiheit Berlins im Dienste der Luftbrücke 1948/49
그들은 베를린의 자유를 위한 1948~49년의 항공수송작전에서 목숨을 바쳤다.
작전무대였던 템펠호프 공항은 독일 재통일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2008년 폐쇄되었고 철거를 시작했지만 공항 철거에 있어서도 베를린 공수 당시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현장이라며 반대해 시민투표를 할 정도였고 공항이 폐쇄되는 날 마지막으로 공항을 이륙한 이벤트 기체는 공수작전 당시 투입된 기체 중 하나였던 DC-3 수송기였다. 결국 철거는 취소되었고 공항 전체가 공원화되어 독일의 관광지로 거듭났다.그들은 베를린의 자유를 위한 1948~49년의 항공수송작전에서 목숨을 바쳤다.
7. 매체에서의 등장
- 코드네임 팬저스: 콜드워라는 RTS 게임의 주 배경이다. 게임의 줄거리는 물자 수송 중에 소련군과 충돌이 일어나 전쟁으로 번진다는 대체역사물이다.
[1] 물론 이후 벌어진 공수 작전과 더불어 소련이 공격하는 그 즉시 반격을 위해 포탄들을 구비해두고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이 당시에는 미국의 핵무기에 소련이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소련에서는 단순히 미국이 전쟁 기간 내내 사용한 물자의 양만 보고 미국도 많이 지쳤을 거란 오판을 내린 것에 불과했다. 공수 작전을 떠올려 내지 못했다면 미국은 정말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에 핵폭탄을 투하했을 것이다.[2] 공산권과 서방권의 차이인데, 서방권 입장에서는 이런 짓은 200만 표나 되는 표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정권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표가 의미없는 일당독재 공산당, 그리고 대숙청을 벌인 스탈린이었다.[3] 봉쇄 전에 도로와 철도를 통해 공급되는 물자의 양은 8,000톤이었으므로 이는 정말 최소한의 양이다.[4] 르메이는 일본 본토를 시험삼아 두들겨 패기 시작하던 주중국 제20폭격사령부에 있을 때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선두기체에 탑승하여 폭격을 진두지휘한 전적이 있다.[5] 미군도 50~60은 넘겨야 장성을 다는 반면 르메이는 고작 37살에 별을 단 초엘리트였다.[6] 이름하여 '험프 넘기'라고 해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물자를 수송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이 나왔지만 육로가 차단당한 중국에 그럭저럭 물자를 공급한 작전이었다.[7] 르메이는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영전했다.[8] 실제로 작전기간 동안 템펠호프 공항 관제사들은 극악의 업무 강도에 시달렸다. 저 부활절 당일 기록만 봐도 단순 계산으로 한 시간에 57소티, 즉, 수송기가 1분에 한 대 꼴로, 24시간 내내 착륙했다는 결과가 나온다.[9] 2차대전 당시 미 해군이 아이스크림 확보에 6천억 원을 써 가면서 환장한 일화는 유명하며 현대에도 전투식량 MRE는 맛이 없기로 악명 높지만 부식은 싸제와 동급의 레시피로 만들거나 아예 싸제 엠앤엠즈, 스키틀즈 봉지를 넣어 준다. 그래서 이동 혹은 전투 도중 급하게 칼로리를 보충해야 할 때는 건조한 탄소화물인 부식을 먼저 먹도록 권장한다.[10] 애당초 소련은 독소전쟁에서 2천만이라는 상식 밖의 인명 손실을 겪은 데다 공업지대와 곡창지대 모두 초토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토가 공격받지 않아 국력에 별 손실이 없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진짜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가 불바다가 되고 자기 목이 진짜 잘린다는 것을 스탈린도 직시하고 있었다. 소련이 미국 다음가는 초강대국이었지만 당시에는 미국이 소련보다 훨씬 강했다. 당시 핵보유국은 미국뿐이었으며 경제력 역시 미국이 소련의 4배에 달했다.[11] 6.25 전쟁은 김일성이 48번의 거절에도 끈질기게 들이댄 결과 승인했고 군사고문단과 항공기 파일럿, 전차 등 물자 지원을 제외하면 붉은 군대의 전면적 개입은 한사코 피했다. 그마저도 중공군 개입전까지는 UN군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극대노했다는 여담도 있다. 이때부터 소련에 감정이 상했던 북한은 이후 중소분쟁이 시작되자 등거리 외교라는 명목 하에 소련과의 거리두기를 시작했다.[12] 여담으로 북한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수용했지만 자본주의 세력이 미국을 수괴로 결집한 신형 제국주의로 발전했다고 이론의 수정을 가했다.[13] 사실 이때 소련이 서베를린에 한 짓은 교전 유무 여부만 빼면 불과 몇 년 전 나치가 레닌그라드에 했던 짓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