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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고등학교(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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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동성학원
고등학교 <colbgcolor=#ffffff,#191919> 보성고등학교
중학교 보성중학교
파일:보성고등학교 전경.jpg
교내 일주문
보성고등학교
普成髙等學校
Posung High School
파일:보성고등학교 교표.png
교훈 스스로 배우고 몸소 행하며 힘차게 앞서자
<colbgcolor=gray> 개교 1906년 9월 5일 사립 보성학교
유형 일반계 고등학교
성별 남학교
형태 사립학교
설립자 이용익
학교법인 동성학원
교장 김진식
교감 이철영[1]
교화 목련
교목 소나무
학생 수 769명
(2023.03.01)
교직원 수 69명
(2023.03.01)
관할 교육청 서울특별시강동송파교육지원청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양재대로 1278(오륜동)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학교 연혁3. 학교 상징4. 학교 특징5. 학교 시설6. 학교 생활
6.1. 주요 행사
7. 운동부8. 출신 인물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10. 사건·사고
10.1. 3학년 학생 단체 휴학 사건10.2. 학생의 교사 불법촬영 사건10.3. 아이스하키팀 감독 상습폭행 및 금품수수 사건10.4. 보성고등학교 교사 페미니즘 사상 강요 및 갑질 사건
11. 기타

[clearfix]

1. 개요

보성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에 위치한 일반계 사립 고등학교이다. 재단법인 동성학원 산하이며 같은 재단 보성중학교와 교정을 공유한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설립한 충숙공 이용익에 의해 설립되어 1906년 개교하였다. 보성전문학교와 같이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2], 한자 그대로 '(민족의 인재들을)널리 이룬다(=키워낸다)'는 뜻이다. 이는 건학 이념인 '興學校 以扶國家(흥학교 이부국가)[3]'와도 일맥상통. 학교의 재단은 바뀌었지만 이름과 건학이념만은 100년 이상 내려오고 있다.

2. 학교 연혁

1906년 이용익 선생 창립. 교명을 '사립 보성중학교'라 칭하고, 동년 9월 5일 학부에서 설립인가를 받아 신해영 선생을 교장에 임명하고, 신입생 246명을 모집하여 동월 21일 한성부 중서 박동 10통 1호에서 개교
1910년 천도교 총본부가 본교 설립자가 됨
1913년 교명을 사립 보성학교라 개칭
1917년 교명을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
1924년 1월 5일 재단법인 조선 불교 중앙교무원[4]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27년 5월10일 경성부 혜화동 1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로 교사(교지 3,851평 건평 연와 2층 505평 목조 부속건물 114평)를 신축 이전
193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재단분리[5]
1935년 재단법인 고계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교명을 보성중학교로 개칭
1940년 재단법인 동성학원이 본교 설립자가 됨
1945년 동성학원 설립자 간송 전형필 선생 제12대 교장에 취임
1946년 6년제 고급중학교로 학제변경 인가.[6]
1950년 5월 1일 신 교육령에 의하여 중, 고 분리
1950년 6월 25일 석조건물 62평 도서관 신축 낙성 개관 준비중 한국 전쟁 발발
1951년 4월1일 부산 영주동에 임시연락사무소를 정하여 피란학생 등록 개시
1954년 6월 18일 혜화동 교사로 복귀
1971년 3월 전성우 선생 제20대 교장에 취임
1973년 보성고등학교로부터 보성중학교 분리
1976년 9월 5일 창립 70주년 기념식 거행(과학관을 완공하고 설립자 이용익 선생 동상과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을 제막)
1989년 교정을 종로구 혜화동에서 송파구 방이동(현 교정)으로 이전[7]
1989년 5월 20일 방이동 신축교사 준공식
1996년 3월 2일 김장화 선생 제21대 교장에 취임
1999년 9월 2일 류보일 선생 제22대 교장에 취임
2002년 9월 2일 김갑철 선생 제23대 교장에 취임
2006년 100주년 기념식 및 보성 100년사 발간
2007년 박재현 선생 제24대 교장에 취임
2008년 5월 15일 100주년 기념관 준공
2010년 2월 28일 식당동 준공식
2010년 9월 1일 봉호근 선생 제25대 교장에 취임
2014년 9월 1일 구선일 선생 제26대 교장에 취임
2016년 9월 5일 개교 11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교지를 간행함
2017년 3월 1일 박형송 선생 제27대 교장에 취임
2020년 9월 1일 이상현 선생 제28대 교장에 취임
2021년 제111회 졸업식
2023년 9월 1일 김진식 선생 제29대 교장에 취임

1905년, 탁지부 대신이었던 이용익고종으로부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과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교표로 하사 받아 사립보성소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먼저 개교하였고, 1906년 9월 사립보성중학교를 개교하였다.[8] 참고로 보성 시리즈의 시작은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의 3개 학교였으나, 소학교는 사라졌고 중학교[9]는 고등학교[10]가 된 뒤 중학교[11]가 분리되었으며 전문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와 재단이 분리된 뒤 아예 이름까지 갈렸다.[12]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당시 황실군악대를 앞세워 수송동 교사 (현 조계사)에서 경희궁까지 졸업생, 교사들이 행진을 했다고 한다. 을사조약 이후 이용익 선생이 러시아로 망명하였고 그에 따라 보성학교는 손자인 이종호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그는 곧 항일인사로 지목되어 1909년 구금 당했다. 그 후 경영난에 빠진 보성학교를 천도교주인 손병희가 인수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학교 내부의 인쇄실인 보성사(普成社)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3.1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에 속해있던 교주 손병희와 교장 최린이 잡혀가 학교가 다시 경영난에 빠졌다. 그 이후에도 거듭된 경영난에 빠지다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학교를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때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보성고를 포함한 다른 학교들과의 친목서클이 주도하여 서울시내 고등학교들 간 연합을 구축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보성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학교법인이 자주 바뀐데서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계속된 경영난에 시달리던 보성은 보성학원-천도교 총본부-조선불교 중앙교무원-고계학원을 거쳐 현재 재단인 동성학원이 5번째 재단이다.

학교의 교사들은 흔히 보성학교가 선교사의 도움 없이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한국 최초의 민립사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틀린 말이다.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사학은 양정고등학교로, 보성학교 개교 2년 전인 1904년에 세워졌다. 다만 같은 재단이었다가 분리된 보성전문학교는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성중고등학교는 해당되지 않는다.

3. 학교 상징

3.1. 교표

파일:bosunghighlogoclear.png 파일:external/www.ojic.co.kr/1173424559.jpg
보성고등학교 普成髙等學校 Posung High School

왼쪽이 정식교표, 오른쪽은 간소화한 휘장. 학교 깃발에는 간소화한 휘장이 들어가 있다.

3.2. 교목교화

교목은 소나무로 소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모든 학교가 그렇듯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푸른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교화는 목련이다. 목련이 교정에 많이 심어져 있어 봄에는 교정이 하얀 목련잎으로 물들어 보기가 좋다. 또 목련이 완전하게 개화하면 목련제라는 축제를 한다.

3.3. 교가



작곡은 당시 오산학교 등의 여러 민족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던 이상준[13] 작사는 춘원 이광수가 맡았다. 춘원의 이후 행적을 생각하면 좀 흑역사. 특이하게 박자가 4분의 5박자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의 교가는 개교 이후 2번째 교가다. 원래 작사가는 춘원이 아닌 김인식 선생. '자유', '자치국민', '대한' 등의 가사가 들어가 있어 1917년 보성고보 인가 때 총독부가 강제로 바꾸었다 한다.

마침내 초대 교가를 찾아냈고 2016년 있었던 개교 110주년 기념 음악회(KBS홀)에서 재학생과 동문 합동으로 교가 합창이 있었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4. 학교 특징

오륜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부지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로변 사거리에 위치[14]하고 있는데다 정면에 올림픽공원[15]을, 후방에 서울 외곽 그린벨트 지역을 마주하고 있어 주변 경관은 상당히 쾌적하다. 사거리의 대각선 건너편에 성내동이 있는데, 고등학생들은 느끼기 어렵지만 여기도 나름 한국체육대학교의 배후 상권지역이다.

5. 학교 시설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800_1161003451083.jpg
운동장에서 본 교정의 모습(2006년)[16]

89년 방이동(현 오륜동) 교정으로 이전할 당시에는 면적이나 시설 면에서 꽤 좋은 학교에 속했다.[17] 학교 부지가 고등학교 치곤 상당히 넓고, 학교 건물과 교정의 여러 군데가 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킨다. 물론 1990년대 기준으로는 최신이었어도, 세월이 많이 지난 2020년대 현재에는 노후화가 진행되어서 보수의 필요성이 크지만, 여전히 같은 지역 내 고등학교들에 비하면 외관이나 내부시설 면에서 좋은 편이다. 내부시설이 좋다고? 교사들 마저 밖에서는 베르사유, 안에서는 바스티유라고 하는데?

위에서 볼 경우 구조가 상당히 특이하다. 대략 'Λ__⌒' 비슷한 모양이긴 한데...그래도 괴악한 수준은 아니다. 교사들은 다른 학교들에 비해 일자로 긴 구간이 없어 학생들이 폭주할 수 없어서 좋다고 한다.
  • 교사 구조
예전에 식당으로 쓰였지만 식당동 완공 이후부터 매점으로 쓰이는 곳이 강당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생물실, 화학실과 많은 동아리실이 지하 1층에 있고 맨 끝에 Wee 클래스와 야외 테니스코트로 통하는 문이 있다. 점심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식당과 가까운 중앙계단으로 몰리기 때문에 일부 학생들은 이 문을 통해 나가서 식당으로 향하는데 오히려 중앙계단을 통해 가는 것보다 빠를 수 있다.

1학년동 지하 1층 맨 끝에 있는 화장실은 학생들이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폐쇄되었다.
  • 100주년 기념관
정문에서 중학교로 올라오는 길목에 중고등학교로써는 드물게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농구코트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종종 동문회와 결혼식이 열리며 외부인의 강연이나 영어 발표 대회 같은 큰 행사가 열릴 때 학생들이 쓰기도 한다. 사실 100주년 기념관보다는 강당을 더 많이 써서 학생들은 사실상 거의 안 쓴다. 영어 말하기 대회 강당인데?
  • 도서관 및 독서실
독서실의 경우 1, 2, 3 열람실이 있으며 1 열람실은 신청자와 1학년 보아반[18] , 2 열람실은 2학년 보아반, 3 열람실은 3학년 보아반이 사용한다. 2, 3 열람실의 경우 칸마다 2단계 기능상실한지 오래로 밝기조정이 가능한 조명과 콘센트가 달려있다. 일반 독서실의 경우 신청제로 운영이 되는데 이용시간을 많이 기재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므로, 자리를 배정받기 위해 가짜로 사용시간을 부풀려 신청하고 찍튀 및 대리출석[19]을 하는 일이 성행하였다만 현재는 신청하면 자리가 나는대로 배정해준다. 보아반 소속 학생의 경우 예전에는 특별히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 한 무조건 자리를 배정해 주었지만, 2014년에는 신청제로 바뀌었다. 2015년에는 교장이 바뀌면서 대격변이 일어나, 전체적인 시스템이 엄격하게 바뀌었다. 게다가 지문인식 시스템까지 도입이 되었다.
  • 체육시설
학교 운동장이 묘하게 사다리꼴 비스무리해서 축구할 때 경계를 잡기가 애매하다. 현재 육상트랙이 발암물질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없어졌기 때문에, 그전보다 그리기는 쉬워졌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만큼 운동장은 항상 비좁다. 옆에 있는 세륜초등학교 부지를 사면 안되냐는 말이 나올 정도. 100주년 기념관이 지어지면서 농구코트가 운동장으로 옮겨가며 더 좁아졌다. 한 번에 4학급씩 나오는 중학교 스포츠클럽 시간이랑 고등학교 1,2,3학년 체육시간이 겹치는 시간에는 한 운동장에 7학급이 있는 장관이 연출된다.

교정 옆에 실내 체육관이 있다. 이 역시 초창기 송파구 이전 때에는 몇 없던 훌륭한 시설이었으나 이제는 낡기도 낡았고 대부분 체육관이 있는터라. 체육관에서는 농구나 배구 수업, 그리고 지하에서는 유도 수업이 이뤄진다. 운동부를 위한 체력단련실과 샤워실도 있다. 공사비 절감을 위해 환기시설을 전혀 만들지 않고 천장을 아크릴로 덮은 바람에 공기질이 최악이다. 체육 교사들 마저 들어가지 않는 걸 권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2017년부터 챔피언반 체육활동실에 탁구대가 설치되고 탁구채와 공을 비치해 놨는데, 개방이 되어있어서 점심시간마다 일반 학생들이 와서 탁구를 치기도 한다. 다만, 이를 아는 학생은 극히 드물다. 누가 담배피다 걸리는 바람에 출입금지 되면서 방과 후 시간 교사들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체육관 뒤편에는 테니스 코트도 있다. 중학교와 같이 쓰는데, 그래서 월요일 7교시에 중학생들이 방과후 레슨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기타 시설 및 조형물
파일:external/weekly.donga.com/200510260500021_1.jpg
  •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일주문이 있는데, 개교 때부터 함께해온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원래는 교사에 딸린 작은 건물로 수송동에서 지어졌고 이후 혜화동으로 옮겨져 양호실로 쓰다가 오륜동으로 이전할 때 벽을 헐어내고 일주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잘 모르고 지나친다. 이 문 앞에는 전통관이라고 일종의 학교 박물관이 있는데 특별한 날 빼고는 개방을 하지 않아서 학생들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졸업하는 경우가 많다고.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800_1161003452419.jpg
  • 운동장 위에 종각도 있다. 개교 80주년에 혜화동 교정에 지었는데 1989년 오륜동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종에는 3.1운동 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개교기념식이나 3.1절 기념식에 이 종을 친다.
  • 중학교 쪽에는 설립자인 충숙공 이용익 선생의 흉상이, 고등학교 쪽에는 현 재단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선생의 전신상이 있다.[20]
  • 교정에 시비(詩碑)가 4개 있는데,[21]김광균 시인의 와사등을 제외하고 모두 이 학교 출신 시인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학교에서 캐치프레이즈 같은 걸 내세운 건 아니고 그냥 교사들이 이야기해 주는 정도일 텐데, 송파구 내에 존재하는 시비들은 이 학교에 있는 것들 뿐이라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6. 학교 생활

6.1. 주요 행사

  • POSUNG FESTIVAL
    다른 학교들처럼 딱히 이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1990년까지 보성제, 2000년까지 보성 개교 ○○주년 기념축제라고 하다가 2000년대에는 보성 개교 ○○주년 기념축제, 보성축제, POSUNG FESTIVAL이 혼용되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POSUNG FESTIVAL로 부르는 걸로 굳혀진듯 하다. 학생들도 사실 어떤 명칭을 쓸지 몰라서 그냥 축제라고만 한다. 오전에 개교기념식이 끝나고 바로 본교생들은 보성의 낮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동아리별 부스활동을 하다가 해질녘에 강당에서 보성의 밤 공연을 진행한다. 보성의 밤 공연을 보기 위해 타 학교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강당 앞에서 운동장까지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한다. 공연이 시작하고도 못 들어간[23] 수많은 사람들이 강당 앞에서 월드워Z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예전에는 연예인이나 가수가 왔지만 이제는 오지 않는다.
  • 보휘전/휘보전
    배양전, 양배전처럼 휘문고와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갖는 친선 축구경기가 있는데 보휘전, 휘보전으로 불린다.[24] 나름 정식적인 심판진을 갖추고 하는 아마추어 경기치고는 수준 높은 경기로 전반전 30분은 1학년끼리, 후반전 30분은 2학년끼리 맞붙으며 전후반 동안 나온 골의 총 합계로 승패가 결정된다. 상대 전적은 2017년 상반기 기준으로 보성고가 5승 3무 4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번외경기로 교사들간의 경기가 있다.
  • 삼일절 행사
    100년 역사를 자랑하고 만세 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학교다 보니 삼일절을 상당히 잘 챙기는 편이다. 실제로는 삼일절이 공휴일이므로 다른 날 하기는 하지만. 삼일절 행사 때는 교장 교감 이사장 연설과 타종을 포함하는 행사와, 학기 초 선후배 간 상견례를 진행한다. 운동장에 세워놓고 진행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매우 귀찮아한다.

7. 운동부

  • 야구부
구한말 보성중학시절부터 창단되었던 유서깊은 야구부였다. 학교 위치를 현재로 옮겨온 1989년에 해체되었다.
  • 축구부
1909년 기독청년부와 경기를 시작으로축구熱風(열풍) 몰고올 大統領金盃(대통령금배) (2) 高校蹴球(고교축구) 어제 오늘 1921년 제1회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등에 참가하는 등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축구(1) 초창기 한국 축구를 이끌었으나 1945년 이후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유도부
1926년 창단. 1984년부터 14년 연속 우승과 4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는 등 수많은 전국대회를 우승하였다. 또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하였다.
  • 아이스하키부
1971년 창단. 창단후 7년간 우승 26회, 준우승 9회 등 수많은 전국대회를 우승하였다. 1979년 한 해에만 국가대표 7명 배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 아이스하키부인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주장을 9명 배출한 명문팀이다.

8. 출신 인물

역사가 매우 오래된 학교답게 다방면에서 많은 동문들을 배출했다. 특히 문화예술계가 두드러지며 염상섭, 이상, 현진건, 조정래, 김기림, 조세희 같은 한국 문단을 이끈 기라성 같은 동문들을 많이 배출했다.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9.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교통편 정문 후문
지하철 5호선 9호선
올림픽공원역 둔촌오륜역
버스상행[45]올림픽공원역[46]보성중고등학교서문교회
3220 3319 3214 3412 3413 3323 30-5 35 1 감북-01 8 3316
하행[47]
보성중고등학교동북중고등학교

교통도 지하철 5호선 올림픽공원역과 도보로 7~8분 거리에 있어서 그렇게 나쁘진 않은 편. 그간 잠실이나 석촌, 송파동[48]에 사는 학생들은 버스로 20~30분 걸려 통학해야 했으나 2018년 12월에 정문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 올림픽공원역이, 후문에는 둔촌오륜역이 개통되어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10. 사건·사고

10.1. 3학년 학생 단체 휴학 사건

파일:보성고등보통학교옛날기사.jpg
普成校의 不祥事(1920.05.12)

일제강점기 시절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영어 교사의 발음이 너무 불량해서 그 발음대로 배워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가서 활용할 수 없으니 다른 조선 사람으로 교사를 바꿔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학교측으로부터 거부당하자 단체로 등교를 거부한 사건이다.

10.2. 학생의 교사 불법촬영 사건

2019년 보성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한 학생이 교사를 불법촬영한 사건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퇴학 처분을 내렸지만, 퇴학 처분을 내리는 시간을 끌어 다른 학교로 전학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피해교사는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에 휩쌓였지만, 학교측에서는 한 번의 잘못으로 학생의 인생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드는 것은 가혹하다며 피해 학생을 감쌌다. 사실상 학교 이미지가 좋지 않아질것을 우려하여 덮은 것. 정작 피해자인 선생님만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
'불법촬영' 학생 감싼 학교…피해 교사는 퇴직·악소문

10.3. 아이스하키팀 감독 상습폭행 및 금품수수 사건

학생선수들을 하키채로 때리거나 뺨을 치는 등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학부모들을 상대로 2년간 6천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아이스하키팀 감독이 경찰에 입건되었다. 감독인 신 모 감독은 수년 동안 평소 훈련, 전지훈련 때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하키채로 구타하거나 뺨을 때리는 등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밝혀졌고, 청소년대표 선발 추천을 빌미로, 부모들에게 금품을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교육청은 당시 보성고가 이 문제를 조사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않았고, 상황극이라는 진술을 의심없이 믿었다며 교장과 교감에게도 견책 처분을 내렸다. 서울시교육청은 신 모 감독에 대해 상습폭행과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근데 여기서 문제될만한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21년 2학년 담임선생님중에 한명인 국어선생님 정 모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코치를 옹호한것이다.
[단독] 공포의 '풀스윙'…아이스하키채로 상습 폭행
'풀스윙' 폭행 감독, 대표 선발 미끼로 6천만 원 '꿀꺽'

10.4. 보성고등학교 교사 페미니즘 사상 강요 및 갑질 사건

2021년 6월 서울 보성고등학교 학생의 폭로글이 에펨코리아에 업로드되며 페미니즘 사상의 강요 및 선생의 지위를 이용한 갑질 정황이 밝혀진 사건.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송파구 A사립고서 "교사가 페미니즘 강요" 호소글에...시민단체 "기본권 침해" 강력 반발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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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 보이는 곳은 대부분 보성중학교가 쓰고 있으며 정작 이 사진 속 보성고등학교에서 쓰는 곳은 둥그런 모양의 건물과 앞쪽으로 돌출된 ㄷ자 모양 건물의 절반이고 나머지 보성고 교실들이 있는 곳은 이 사진에서 잘린 교사 동편에 있다.

국보급 문화재들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의 설립자 간송 전형필의 인수 이후로 지금까지 전형필의 후손들이 재단을 운영해오고 있는데 전 이사장인 전성우 박사(1934~2018)의 경우 1971~1991년까지 직접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49] 전성우 본인이 예술가 출신이기도 해서인지 일명 까까머리가 기본규정이던 다른 고등학교에 비해 상당히 널널한 분위기의 학풍이었던 걸로 유명했다. 물론 당시 사회분위기상 고등학생이 머리를 성인처럼 기르는건 불가능했지만.[50] 1970년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중 머리를 기를 수 있고, 명찰을 달지 않는 학교는 보성고가 유일했다고 한다. 2공화국 시절에는 두발자유화 시위가 있었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로는 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전국 대부분의 중·고교가 학생들의 머리를 남학생은 반삭, 여학생은 단발 및 양갈레로 짧게 잘랐고, 교복에 명찰을 다는것도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당시 보성고 교장이 이에 맞서 두발단속을 하지 않았고, 보성고 학생들은 일반 사회인스러운 머리를 했었기 때문에, 타 학교 학생들이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또한 경복고등학교[51], 휘문고등학교[52]와 함께 재벌들이 주로 나온 학교로 유명하다.[53]

혜화동의 옛 보성고등학교 자리의 반은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반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차지하고 있다. 88년 올림픽 직후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모서리에 부지가 남았는데, 원래 혜화동의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현재 오륜동 교정 부지에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림픽선수촌아파트의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 자리에 학교를 짓기로 했고 때마침 도심 공동화로 인해 학생수가 줄어들던 보성고와 부지를 맞교환하기로 한 것.[54] 이전할 때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통학거리가 갑자기 늘어나버렸다. 이 때 유명한 동문 중 피 본게 신해철. 정확히 이야기하면 당시 고3으로 올라가던 71년생부터 이전된 방이동 학교로 다니게 되었다. 신해철 동문은 68년생이므로 혜화동에서 졸업. 이전 당시 고2였던 72년생들은 졸업할때까지 학교에서 제공하는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고1(73년생)부터는 인근 지역 학생들로 모집. 여담으로 88년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후 신해철 동문은 무한궤도 멤버와 함께 방이동 학교로 교사들에게 인사 차 방문했다.

유명한 한글학자 주시경이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다.

운동부는 역사가 오래된 사립학교치고는 짧은 편이나 유도부와 아이스하키부는 전국 톱 클래스의 성적을 자랑하며, 특히 유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도부 중 하나라고 봐도 될 정도. 2000년대 이후 올림픽아시안 게임에서 동문들이 잇달아 금메달을 가져오며 위상을 높이고 있다. 과거 야구부도 운영한 적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성적은 내지 못하고 1989년 해체. 과거 OB 베어스에서 활약했던 교타자 김종석이 이곳 출신.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 김현수[55]가 정문고[56]로 전학가기전에 다녔던 학교가 바로 이곳이다.

보성중학교와 같은 건물이기 때문에 다른 특목고를 가거나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보성중학교 학생들은 대부분의 경우 보성고등학교로 배정받게 되는데, 보성중학교에도 유도부, 아이스하키부가 있어 아래 성적을 깔아주기 때문에 보통 학생들은 성적 미달로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아래 성적을 깔아준 운동부들은 보성고에서 스카우트 형식으로 입학을 시켜버려서 고등학교 못가는 일은 없다고

전통적으로 야자가 없다. 가끔 대학 가면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자기 야자할 때 얘기하다가 강제 야자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열폭하기도 한다. 물론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게 돌려보낸다거나 하는건 아니고, 공부하고 싶으면 도서관 옆 독서실에서 자리를 배정받아 공부하면 된다. 상술했듯이 2015년 부터는 돈을 꽤 들여서 지문인식 시스템을 도입하고 졸업생 선배들이 멘토로 찾오게 하여 학생들의 공부를 돕게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이때 180석 가량의 자리를 고정석으로 만들어 신청을 하지 않은 학생은 이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보아반 학생들에게 야자를 강제했는데, 이에 반발한 많은 학생들이 보아반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을 기점으로 일부 교사의 급진 정책으로 수천 만원을 들여 지하철 개찰구를 빙자한 지문 인식기 2대를 야심차게 설치했으나, 학생들의 찰진 발길질로 고장이 나고 현재 지문 인식기 회사가 망해 고치지도 못하고 있다.

보아반만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럿 있다. 학부모들이 일반 학생들에게도 그런 몇몇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주자고 몇 번 건의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현 대입 실정에 알맞다 볼 수 없는 활동이 대다수이다.

2010년 정도에 간송미술관의 일부를 식당이 이전하면서 빈 학교 지하에 이전하는 계획안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 기획안은 취소되었다.

언덕을 깎아 만든 학교로,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봄, 가을에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산에서 내려오는 쥐, 벌 등으로 인해 수업시간을 날려먹는건 덤.

교사들 중에 보성고를 졸업하고 사범대에 진학하거나 일반과에서 교직이수를 한 뒤 다시 보성고에서 교편을 잡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심지어는 제자가 위의 루트를 거쳐 후배 교사로 오는 경우까지 있다. 보성고가 전통있는 사학이라 가능한 일.

2007년에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강연을 하러 왔었으며[57], 2009년에는 '마시멜로 이야기'의 저자인 호아킴 데 포사다가 강연을 왔었다.[58]

2016년, 별을 단 동문이 강연을 왔었는데, 강연 대상이 하필 수능 끝난 고3이었다.[59]

군대의 수양록에 맞먹는 정신교육 교재가 있다. 1학년은 보성인, 2학년은 한국인, 3학년은 세계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받는다. 내용과 형식은 모두 수양록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의도는 좋지만 학생들을 괴롭히는 교재였다. HR 시간에 할 게 없으면 이걸 쓰라고 하니. 교재는 학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수거했다가 돌려주는데, 독후감을 잘 쓰면 상을 주었다. 요즘은 한 반에서 5명 이상 내면 많이 내는 거다이제는 그런거 없다

보성고 교복하면 그냥 넘어갈수 없는 체크무늬바지가 대표적이다. 고등학생 동복은 남색 체크무늬, 중학생 동복은 보라색 체크무늬이다.

2019년 5월 20일부터 113년 역사 최초로 생활복이 배부되었다. 상의는 하늘색, 하의는 검정과 회색빛이 나는 반바지이다

바로 앞에 위치한 동북고등학교와는 뗄레야 뗄 수없는 라이벌 관계다. 교사들까지도 라이벌 관계를 의식하고있다. 물론 의미없는 라이벌 관계는 아니고 둘 다 강동송파를 대표하는 명문고이기에 선의의 신경전이 있는것은 당연하다.[60][61]

[1] 이 학교 졸업생인 방탄소년단의 멤버 의 1학년 당시 담임 교사를 담당했다고 한다.#[2] 역사 문단에도 나와 있지만,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다.[3] 학교를 세워 나라를 버틴다는 뜻으로 설립자 이용익 선생의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있다.[4] 이 재단은 1928년 훗날 동국대학교가 되는 불교전수학교를 개교하였고 보성중학교는 1935년까지 동국대학교와 같은 재단이었던 것이다.[5]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 인수했고 보성고보는 고계학원 산하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산하에 남고, 보성전문은 중앙학원(현 고려중앙학원) 소유로 바뀐다.[6] 학제 상으로는 이 때 보성중과 보성고가 분리되었다.[7] 관련기사[8] 그래서 고려대 교표에는 1905란 숫자가 쓰여져있고 보성고는 1906년을 개교년도로 하고 있다[9] 현재 학제 상의 중학교와는 당연히 다르다. 구제중학교의 의미이며, 오늘날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에 해당한다.[10] 현재의 보성고등학교[11] 현재의 보성중학교[12]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정작 보성이란 이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13] 휘문고의 교가도 이 사람이 작곡. 악보를 잘 보면 보성고와 휘문고의 교가가 표절 수준으로 비슷하다. 때문에 보성고에서는 교가가 휘문고 교가를 베껴서 그렇다는 썰도 돌았다. 보성고 교가의 멜로디를 좀 더 빨리 재생하면 휘문고 교가와 거의 똑같아진다.[14] 사거리의 한 직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15] 정확히 말하면 올림픽공원 부지 내 한국체육대학교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16] 개교 10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린 건물 부분은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이 없으며, 왼쪽에 있는 건물은 보성중학교 건물이다. 정작 짤린 오른쪽 부분에 고등학교 학급으로 사용되는 교실들이 있다.[17] 동문인 전 현대자동차 회장 정세영의 지원으로 현대건설이 준공을 맡았다. 당시에는 현대적 건축양식이라고 잡지에도 실렸다고 한다.[18] 후술할 문단 참조, 보성 아카데미반의 줄임말[19] 밤에는 교사들이 돌아가며 출석체크 및 관리감독을 한다.[20] 선생 동상의 다리가 너무 짧아보인다고 부인이 싫어했다고 한다.[21] 급식실에서 중학교 건물 쪽으로 올라오는 길에 이상(작가)한국 난해시의 최고봉 중 하나인 오감도 시제1호, 중학교 교정 쪽에 윤곤강의 잉경, 고등학교 교정 쪽에 김기림바다와 나비, 김광균의 와사등.[22] 2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열린다.[23] 강당이 타학교에 비해 매우 좁아 평상시에 본교생도 절반 밖에 못 들어가는데 외부인까지 몰려있으니. 게다가 강당이 계단식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 보다간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축제 시작하고도 2~3시간 기다렸다 들어가는건 예삿일[24] 개최 학교명의 앞글자를 뒤에 넣는다. 홀수 해에는 휘문고에서, 짝수 해에는 보성고에서 개최를 하기 때문에 홀수 해는 보휘전, 짝수 해는 휘보전이라고 불린다.[25] 수능 모의고사, 문제지에 자주 등장하여 익숙할 시 '바다와 나비'의 저자. '바다와 나비'는 이 학교 내에 시비가 세워져 있어 정문에서 등교하는 1학년들은 매일 아침 마주하게 된다.[26] '세시봉'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27] LA 발리언트 소속 프로게이머[28] 그 도올 맞다[29] 한세실업 대표이사[30] 매일유업 회장[31] 현 뉴데일리 고문, 내부자들(영화) 이강희 논설주간의 모티브로 추정[32]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차남[33] 두산그룹 박용성회장의 장남[34]한국석유공사 사장[35] 옛날엔 가수 하겠다고 했다가 교사들한테 엄청 까였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유명 가수가 된 후 교사들이 모교로 본인을 초청하였을 땐 "그땐 무지 깠으면서 이제 와서 부르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역시 마왕 당시 교사들의 평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학교와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듯. 근데 실제로 현재까지도 교사들이 신해철에 인성에 관해 수업시간에 논하는 걸 보면 신해철 또한 학교 다닐 때 그다지 예의바른 학생은 아닌 듯하다.[36] 삼영산업 회장[37] 참고로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38] 이병철의 차남[39] 정주영의 동생이자 정몽규의 아버지.[40] 정주영의 아들이자 현정은 현대 회장의 남편.[41] 조정래와 함께 사실상 가장 유명한 인물[42] 이 사람도 전라남도 보성에서 산 적이 있으며, 심지어 이 사람이 쓴 소설에도 보성군이 나온다.[43] 동기인 신해철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신해철이 대학 시절 결성한 밴드 무한궤도 멤버로도 활동했었다.[44] 쌍화점, 미녀는 괴로워의 그 주진모가 아니다[45] 풍납동, 둔촌동, 하남시, 3316의 경우 마천동 방면[46] 보성중고등학교 정류장 미경유[47] 잠실, 방이동, 마천동, 동북중고등학교 경유 버스의 경우 둔촌동역 방면[48] 방이동 바로 옆이라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보성고까지 바로 오는 버스가 없다. 서울 버스 3413롯데월드타워까지 올라갔다 오륜동으로 향하고, 서울 버스 3319은 보성고에 내려주지 않고 올림픽공원역에 내려준다.[49] 현 이사장은 전성우 박사의 부인인 김은영 이사장이다.[50] 물론 이 당시에는 학교밖 청소년이 많던 시대라서 청소년들이 성인들처럼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경우는 많이 있었다.[51] 개교 후 학교 이전 없이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몽구, 정몽근, 이재용, 정용진, 정지선 등 재벌가 경영인들을 많이 배출했다.[52] 정의선이 졸업했다.[53] 당시 부촌으로 통했던 성북동과 가까운 혜화동에 있었으며 혜화동 또한 1980년까지는 부촌으로 통했다. 장면박사 가옥이 거기 있다.[54] 서울 4대문 內 포함 강북에 있던 많은 사립학교들(휘문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 양정고등학교, 중동고등학교, 배명고등학교, 동북고등학교, 한영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등)이 도심공동화로 1980년대에 한강 이남으로 이전했다. 그 분위기를 따른 것. 공립학교들(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은 70년대에 먼저 이전한 상태였다.[55] 권상우 분[56] 이 학교의 모티브는 상문고이다.[57] 100년된 민족사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학교를 골랐다고 한다.[58] 앨빈 토플러가 강연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골랐다고 한다.[59] 즉 16년도 졸업생, 15년에 고3이었던 학생들이 청강한 것.[60] 여담으로 역사와 전통, 최근 기준 인문계 대입 실적을 고려하면 보성고가 우위고 예체능계 배출 실적이나 학교의 인기, 전성기를 고려하면 동북고가 우위다. 엄밀히 말해 동북고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 문제로 근 몇년간 침체기다.사실 2017년 이후로 보성도 입시가 박살나서 딱히 좋다고 말할수는 없다[61] 1972년생 동북고 졸업생이 증언하기를 동북고-보성고 학생들의 마찰이 잦자 동북고와 보성고에서는 각각 조회시간에 단상에서 동북고 학생-보성고 학생의 화해 세러모니를 연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보성중에서 동북고로, 동북중에서 보성고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