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분열하는 제국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 |
<nopad> | |
원제 | American Nations: A History of the Eleven Rival Regional Cultures of North America |
작가 | 콜린 우다드 (Colin Woodard) |
발행 | 2012년 |
주제 | 역사, 문화 |
출판사 | Penguin Group USA |
한국어번역 | 정유진 (2017), 글항아리 |
[clearfix]
1. 개요
『분열하는 제국: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은 미국이 11개의 다른 국민 정체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해서 미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는 서적이다. 저자는 현대 미국의 분열상을 한탄하며 통합된 미국의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실 미국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된 적이 없다고 꼬집는다. 그리고 흔히 이용되는 남부와 북부, 민주당과 공화당, 주 경계와 같은 경계선은 일정부분 영향은 있지만 정확하진 않고 이보다는 독립 전 식민지 정착사에 기원한 문화집단 분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1개의 구분되는 국민 정체성을 제시한다.2. 11개의 국민 정체성들
본 서적은 미국을 11개의 구분되는 정체성의 연합으로 정의내리며 미국 정치사의 본질은 정체성들간의 이합집산과 주도권 싸움이라고 주장한다. 각 정체성은 식민지 개척의 역사에서 비롯되었거나(양키덤, 미들랜드, 타이드워터, 딥사우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뉴네덜란드, 뉴프랑스, 엘 노르테)[1], 서부 개척과정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거나(레프트 코스트, 파 웨스트), 식민시절 이전의 원주민 문화를 간직하며(퍼스트 네이션) 생겨났다. 식민지 사회를 만들어낸 최초 정착민들의 문화는 이후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동화시키며 시간이 지날수록 소멸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힘을 키웠으며 교통의 발달 또한 문화들을 섞어서 융화시키기는 커녕 각자 자기 성향에 맞는 지역으로의 이주를 촉진하여 정체성의 차이를 더 강화시켰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만 11개 정체성은 문화 권역이니만큼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지도상에 여러 중첩지역이 나타날 것임은 자명하고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시카고(양키덤과 미들랜드), 세인트루이스(미들랜드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뉴올리언스(뉴프랑스와 딥사우스)와 같이 여러 정체성이 섞인 경계선 도시 또한 고려해야 한다. 또 각 문화 권역 안에서도 더 세분화하거나 이질적인 타 정체성 집단을 조사할 수도 있고 미국 밖 북미에도 멕시코의 대 마야계 문화와 스페인어권 카리브해 정체성 같이 영향이 큰 문화 집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본서는 미국을 분석하기 위해선 너무 세세하게 따지기보단 11개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거라 주장한다.
2.1. 엘 노르테(El Norte)
엘 노르테는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병합한 서남부지역의 북멕시코계 히스패닉 문화를 말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중남미를 석권한 스페인 제국은 유럽 열강중 가장 먼저 북미로의 진출을 시도했고 최초의 북미 영국계 식민지 제임스타운이 건설될 무렵이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탐험가들은 북미대륙의 상당 부분을 탐험하고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소속의 식민 정착지를 세운지 오래였다.스페인 정복자들은 극심한 남초 인구구조를 보였고 이로인해 원주민 여성들을 아내로 삼으며 엘 노르테 문화권은 메스티소 위주의 사회가 된다. 스페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원주민을 인종 차별하기보다는 교화시키고 가톨릭 개종을 추진했으며 원주민들을 가톨릭 선교사들 주도하에 격리하고 관리하며 개종시키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화 과정 중 체벌을 통한 훈육과 강제 노동이 용인되었다는 점을 악용한 성직자들과 군인들이 원주민을 사실상 노예로 부리며 개종 완료 선언을 질질 끄는 행태를 보였다.
스페인 제국은 식민지 영토를 유지시킬 역량을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 등 유럽의 개신교와의 성전에 허비하였으며 식민지의 중심지 멕시코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지대 위주의 엘 노르테 지역은 이로인해 본국과 부왕의 관심에서 멀어져 사실상 방치 상태에 빠졌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세력을 구성하게 되는 영국계와 네덜란드계 개신교 신자들의 머릿속에 박힌 악의 제국 스페인의 이미지가 엘 노르테의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이미지를 악화시켰고 뒤이은 히스패닉 차별의 큰 원인이 되었다. 혼혈을 야만적으로 여기는 관념이 이러한 차별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엘 노르테 지역은 다른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보이는 문화와 닮은 면모를 많이 보인다. 주민 자치조직이 부재한 모습(총독의 행정력이 잘 닿지 않았던 북멕시코는 주로 현지 성직자와 군인들의 독재로 운영되었다.)이나 혼혈 정도에 따른 카르텔 사회, 정부에 의한 비효율적인 경제 통제(생산물을 부왕령에서 걷어가고 다시 중앙의 배급을 받았으나 척박한 변방인 엘 노르테는 교통망의 부족으로 배급을 받기 힘들었다. 이외에도 가까운 항구 놔두고 베라크루스 항 사용이 강제되었다.), 고대 로마를 떠올리게 하는 귀족과 평민의 후견주의 등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엘 노르테는 열악하고 고립되어있던 만큼 멕시코 중남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기도 했다. 정착민 도시의 통제에서 벗어나 야지에서 원주민들과 섞여사는 평민들도 꽤 많았고 원주민들과 메스티소는 자신을 백인이라고 우기며 피부색 카스트제를 비껴나갔다. 카우보이와 광대한 목장의 분위기가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를 받아들인 엘 노르테에서 유래했으며 사람들은 억압과 폭정에 반발하는 의식을 키워나갔다. 미국 내에선 엘 노르테의 히스패닉 문화를 라틴아메리카적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정작 멕시코 내에선 소노라, 치와와 등 북부와 미국 국경지대의 엘 노르테 문화를 미국적이라고 여긴다.
진취적이고 용맹한 엘 노르테 사람들은 멕시코가 독립하자 부채에 허덕이고 혼란스러운 멕시코 중앙정부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아 스페인 식민정부로부터 받아온 보급품마저 끊겨버린다. 엘 노르테는 살아남기 위해 중앙정부 몰래 미국과의 밀무역을 시도했고 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딥사우스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이주민들은 이를 틈타 미국에서 가까운 텍사스 등지로 많이 몰려들었고, 해당 지역들에서 엘 노르테 문화는 소수로 전락했다. 멕시코 정부는 미국계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토를 잃는 사태를 우려했으나 정작 엘 노르테인들 자신들 마저 반란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동참했다. 산타 안나가 멕시코 중앙정부를 장악해 독재자로 군림하자 억압을 거부하는 엘 노르테인들은 이에 저항했고 뒤이은 텍사스 공화국 성립 운동과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 편을 들며 산타 안나의 독재정부와 싸웠다. 미국은 승전이후 노예 허용 지역 확장과 제국주의의 정당성 문제 등으로 갈등하다가 엘 노르테의 북부만을 미국령으로 병합했다. 한편 멕시코에 남은 소노라, 치와와, 바하칼리포르니아등의 엘 노르테 문화권은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유지하며 멕시코 혁명과 반 제도혁명당 움직임등을 주도해 멕시코의 역사적 변화를 이끌었고 문화적으론 인접한 미국의 영향을 짙게 받아왔다.
하지만 미국으로 병합된 이후 딥사우스와 애팔래치아인들 손에 엘 노르테는 차별당하며 2등국민 대우를 받아왔고 같은 문화권인 멕시코 북부와 국경선으로 분리되었다. 차별받아오던 엘 노르테는 제2차 세계 대전시기 군사기지 및 군수산업 단지가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전시에 부족해진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제정된 브라세로 프로그램이라는 외국인 노동자 유치 법안은 엘 노르테에 히스패닉 이민자들을 불러모았고 68혁명시기 진보적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은 엘 노르테 치카노들은 소수 앵글로계가 독점하던 지역 정치 권력을 빼앗아 와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현재는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와 로스앤젤레스, 텍사스의 샌안토니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지를 중심으로 분포하며 히스패닉 이민자들 또한 넓은 의미의 엘 노르테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엘 노르테는 기본적으로 히스패닉을 무시하는 딕시연합에 대항해 민주당의 우군으로 남아있지만 보수적 가톨릭 윤리를 지지하거나 환경운동에 회의적인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이따금 의견이 갈리는 스윙보터 성향도 보인다. 같은 문화권이고 자국 중앙정부에 불만이 많은 멕시코 북부와 함께 독립하자는 떡밥도 존재하나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
2.2. 뉴 프랑스(New France)
프랑스어로는 누벨프랑스로 프랑스 북미 식민지에서 비롯된 프랑스계 미국인 문화를 일컫는다. 앙리 4세 시기, 피에르 뒤과 드 몽스와 사뮈엘 드 샹플랭이 이끄는 원정대는 현 미국 메인 주 세인트크로이강 하구 하중도 일대에 식민지를 세운다. 관용과 다양성으로 유명한 라로셸 인근 생통 지역 출신인 두사람은 참혹한 위그노 전쟁을 겪고나서 새로 세우는 식민지에 톨레랑스의 정신을 살리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뉴잉글랜드의 추위에 전멸할 뻔 하고 이후 식민지의 수도를 펀디 만 건너 현 노바스코샤의 포트로열 지역으로 이전해 아카디아 식민지를 건설해낸다. 이후 누벨프랑스는 퀘벡과 루이지애나로 확장해나간다.몽스와 샹플랭은 당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봉건사회를 기반으로 식민지 사회를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아카디아에서는 프랑스 본토와는 달리 개신교도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평민들도 귀족처럼 사냥을 즐길 수 있었다. 샹플랭의 이상에 따라 현지 원주민들과는 우호적이고 동등한 관계를 맺었고 프랑스인 귀족들은 원주민들과 서로 잔치에 초대를 주고받으며 프랑스인 평민보다 원주민이 더 대접받는 현상도 일어났다. 프랑스인들은 원주민들을 프랑스식으로 온건하게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역으로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원주민 문화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였다. 정책적인 장려하에 원주민과의 혼혈도 늘어 누벨프랑스는 원래의 목표였던 봉건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원주민화되어갔다.
루이 14세는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는 식민지에 봉건제 위계질서가 바로 잡힌 굳건한 프랑스풍 사회를 세우길 원했고 이를 통해 북미 대륙에 급증하는 영국계들을 견제하길 바랐다. 따라서 본국에서 왕의 딸들과 계약제 하인들을 대거 보내 프랑스계 인구를 대폭 늘리고 소작농 역할을 할 하층민 계층을 탄탄하게 만들려 했다. 이러한 조치는 소정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계약제 하인들의 대다수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북미에 남는 이들은 귀족들의 영지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길을 택했다. 원주민 문화와 프랑스의 융합은 더욱 강화되어 메티스(메스티소의 프랑스식 표현)이 늘어났고 귀족들은 인력 부족으로 점차 가난해졌다. 그만큼 평등과 구체제 청산에 대한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아카디아 지방이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고 7년 전쟁 시기 프랑스계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염려한 영국은 아카디아인들을 대거 추방시킨다.[2] 이후 프랑스는 7년 전쟁 패전의 대가로 나머지 누벨 프랑스 전역을 빼앗기고 퀘벡과 루이지애나는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3] 영국은 이미 인구밀도가 높았던 퀘벡의 프랑스계까지 쫓아내지는 못했고 뉴프랑스 사회문화가 유지된다.
한편 7년 전쟁 승전 이후 한껏 오만해진 영국의 강압적인 원주민 통치는 누벨프랑스의 관용에 익숙해져있던 원주민들에게 불만족스러웠고 폰티악 전쟁(Pontiac's Rebellion)이라 부르는 반란이 발생했다. 폰티악 전쟁의 결과 영국은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의 내륙 지역을 인디언 구역으로 지정했고 팽창을 원하던 13개 식민지와 갈등하는 요인이 된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양키덤, 타이드워터, 딥사우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로 구성된 반란군은 영국령 퀘벡의 뉴프랑스 세력에게 연대를 제안했고 뉴프랑스는 이를 받아들여 대륙군이 퀘벡에 당도하나 영국군의 반격에 반란군은 금방 후퇴했다. 퇴각하는 대륙군의 약탈을 경험한 뉴프랑스는 독립에 대한 미련을 끊고 영국령 캐나다에 남는 길을 택했다. 이후 퀘벡은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캐나다와 역사를 함께하게 된다.
한편, 쫓겨난 아카디아인들은 주로 퀘벡이나 프랑스 본국, 생피에르 미클롱 등지로 도망쳤다. 일부는 누벨프랑스의 중심지중 하나였던 루이지애나의 미시시피 강 하구로 이주했고 해당 지역 역시 프랑스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뉴프랑스 문화는 현재는 퀘벡과 루이지애나 케이준 문화를 중심으로 남았고 프랑스계 인구가 너무 적었던 나머지 누벨프랑스 지역은 타 문화에 동화되었다.
68혁명 시기 여러 진보운동이 퀘벡에도 영향을 끼쳐 퀘벡 독립운동과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라고 부르는 사회 변혁을 일으켰다. 이후 퀘벡의 뉴프랑스는 북부의 퍼스트네이션이 반대표를 던져 독립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영국계와 가톨릭 주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지역내 프랑스어 사용을 강제하고 캐나다 정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샹플랭과 몽스로부터 시작한 관용적이고 온화한 분위기는 퀘벡을 북미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친사회주의적인 지역으로 만들었고 이는 (역으로 보수적인 딕시연합과 공존하는) 미국과 차별화되는 캐나다의 진보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에 일조했다. 친 원주민적인 뉴프랑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퍼스트 네이션이 정치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2.3. 타이드워터(Tidewater)
타이드워터[4]는 버지니아 회사의 제임스타운에서 유래하여 버지니아,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해안가 일대에 지배적인 정체성을 말한다.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의 러브스토리로 대중적으로 유명한 제임스타운 개척사이지만 실상은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애초에 정착 지점도 좋지 못한 곳이었던데다 지도자들은 무능했고 식민지는 보급 부족과 기근으로 전멸할 뻔도 했다. 버지니아의 영국계 이민자들은 뉴프랑스의 프랑스계와는 달리 원주민들의 식자재를 먹느니 차라리 인육을 먹고 버티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원주민들을 적대했다. 버지니아인들의 목표는 스페인처럼 원주민을 지배해 노예로 삼는 것이었지만 인근 포우하탄 족의 추장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버지니아를 속국화해 금속 무기와 도구를 얻어내려 들었다. 제임스타운은 민영 기업 소속의 군사기지화되어 민주적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던 중 포카혼타스의 남편으로 유명한 존 롤프가 이 지역에서 담배를 성공적으로 재배해내면서 버지니아는 군사기지에서 담배 플랜테이션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담배 농사는 고되었기 때문에 타이드워터에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던 담배 농장주들은 영국 빈민가에서 계약제 하인을 대거 들이기 시작했다. 소유한 계약제 하인이 많은 농장주에게 땅을 더 지급하는 법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버지니아에서의 계약제 하인 생활은 열악한 생활수준을 자랑했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이 되어 농장주가 될 여지도 있었고 자비로 이주 비용을 마련할 여력이 있다면 계약제 하인 생활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편, 잉글랜드 내전에서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한 이후 왕당파 귀족들이 찰스 1세와 친밀했던 윌리엄 버클리가 총독으로 있던 버지니아로 대거 피난온다. 영국 시골의 소영주들 위주였던 이들은 버지니아의 명문가로 자리잡으며 지역에 영국 본토의 젠트리를 모방한 문화를 퍼트린다. 버지니아의 지주들은 자기 영지 안에서 사실상 왕처럼 군림하며 주의 정치 권력도 독점하였다. 지주들의 기분이 곧 법이었고 그들은 조그마한 모욕에도 가혹한 벌을 가하려 들었다. 그들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도시를 필요로 하지도 않아했고 자기 농장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버지니아 해안 전역이 리아스식 해안이라 배를 대기에 적당하다는 점이 이를 가능하게 해줬다. 성공회를 믿는 지주들은 영국 농촌 사회의 이식을 지향하며 자신들을 노르만인의 후손이라 자부하고 천박한 앵글로색슨 평민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한편 가톨릭 귀족인 볼티모어 경의 영지로 개발된 가톨릭 식민지 메릴랜드는 인근 버지니아인들의 농장 확산으로 원래 목표와는 달리 타이드워터와 유사한 문화로 변해갔다.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는 북미 식민지의 자율성을 약화시켜 중앙 통제를 강화하려 했는데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서는 볼티모어 경과 누벨프랑스, 제임스 2세가 손잡고 개신교도들을 학살해 가톨릭 세상을 만들려 한다는 공포가 퍼져나갔다. 결국 명예혁명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반란에서 개신교 반군이 볼티모어 경을 쫓아내고 메릴랜드에서 가톨릭 세력을 축출, 새로 즉위한 윌리엄 3세에게 이를 인정받았다. 이로써 메릴랜드 역시 완전히 전형적인 타이드워터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약제 하인을 구하기가 힘들어져갔다. 계약제 하인으로 올 빈민의 수가 줄어든 것도 있었고 고달픈 담배 농사를 기피하는 경향도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타이드워터의 귀족적 사회는 이미 하층민 역할을 할 자들이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는 사회였고 타이드워터의 지주들은 방법을 물색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노예상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흑인 노예를 구매해 대대손손 부려먹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타이드워터는 노예제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가 되어갔다. 하지만 비슷한 노예사회인 딥사우스와의 차이점으로, 이미 흑인 자유민과 계약제 하인을 소수나마 받은 바가 있어 흑인이라고 전부 노예는 아니었고 딥사우스에 비해 노예들이 생존하고 가족을 이루어 대를 이어나가는 경우도 훨씬 많았다. 타이드워터에서는 흑인 노예 도입 이후로도 한동안 인종보다는 계급이 사회 구분의 척도였다.
하지만 이런 귀족적이고 반민주적인 타이드워터에서도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같이 걸출한 공화주의 사상가가 나오는데 이들의 사상은 기본권적 자유가 아닌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고전적 공화정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민주정과 공화정은 소수 자유민, 시민권자의 정치참여로 이루어져 노예제랑도 공존했고 영국식 젠트리들이 정치권을 독점하는 타이드워터의 구미에 맞았다.
영국적이고 귀족적인 타이드워터였지만 영국이 부여한 세금이 플랜테이션 농산물 수출에 타격을 입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버지니아 성공회에 주교를 직접 파견해 통제하려 들자 불만 분위기가 일어난다. 특히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조지 워싱턴 등은 영국이 농장주들의 자유를 침해하려 드는데다가 독립한 후 영국이 인디언 구역으로 지정한 애팔래치아 너머로 확장을 해야 한다면서 미국 독립전쟁 참여를 지지한다. 하지만 타이드워터의 젠트리들은 의견이 갈려 사분오열되었고 이 지역은 독립 반란에 참여는 하나 양키덤처럼 적극적으로 독립을 주장하기보단 대륙군 지휘관, 저격수 연대 등의 소수의 참여 형태로 영국에 대항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는 영국과 버지니아 총독이 반란 진압을 위해 노예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반전되어 독립에 적극적으로 변해 독립전쟁 후반부를 이끌게 된다. 독립 후 미국 헌법 제정시 선거인단 제도와 미국 상원의 간선제는 민중의 무분별한 정치참여 제한이라는 타이드워터 엘리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타이드워터는 남부의 중심 역할을 하며 초기에 대통령도 여럿 배출하지만 곧 담배 산업이 침체되고 지역 내 애팔래치아인 인구가 유출되며 부유한 딥사우스에게 문화적으로 추월당한다. 또한 지리적으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막혀 내륙으로의 확장에 실패한다. 남부의 이러한 문화 헤게모니 변화는 노예제에 관한 남부의 주류 의견이 영국 시골사회를 지향한 타이드워터의 점진적 노예 해방론에서 딥사우스의 노예제 신성화론으로 이동하는 모습에서 확연하게 관측할 수 있다. 자연히 타이드워터의 젠트리 문화도 퇴조되어 노예들을 딥사우스에 팔아버리던가 아예 사업장을 멕시코만 일대로 옮기는 경우도 나왔다.
노예제 논쟁이 격화되고 서부 주들의 노예제 승격을 둘러싼 갈등이 강해지자 타이드워터는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많아진 자유주들에게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딥사우스의 편에 서 노예제를 수호하려 든다. 그들은 양키덤의 노예제 폐지 주장을 천박한 앵글로색슨 군중의 폭주로 규정하며 고귀한 노르만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며 노예제의 도덕성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시도했다. 딥사우스가 독립을 선언하자 타이드워터도 남부연합에 참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지역내 애팔래치아인들과 미들랜드인들의 의견 등 복잡한 정치 문제로 참여하지 못한다. 딥사우스가 섬터요새를 기습하며 남북 전쟁이 시작하고 나서야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가 남부연합에 가입하지만 애팔래치아인들의 웨스트버지니아는 미연방에 남아 독립하고 미들랜드인들이 많았던 델라웨어와 메릴랜드도 연방내 경계주로 남는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북군의 군정이 시행되고 노예제가 폐지되지만 양키덤의 남부 개조 시도는 10여년의 세월로는 역부족이었고 군정 철수 이후 짐 크로법을 비롯한 흑백분리를 시행하며 딥사우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와 함께 딕시 연맹을 이룬다. 남북전쟁 후 이민자들이 몰려올 때 이미 계층사회가 깊게 박힌 타이드워터와 딥사우스, 가난하고 도시와 일자리가 부족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이민자들이 기피했고 딕시연맹은 이민자를 받아들여 성장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현대에 이르러서 타이드워터는 점점 세력을 잃어가는 추세이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막혀 세력확장에 실패한 것이 물론 근본 원인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이미 크게 줄어든 영향도 있다. 현재는 워싱턴 D.C.와 샬럿등의 도시권 성장과 함께 미들랜드에게 영토를 서서히 빼앗기고 있다.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민주당 세력 강화가 좋은 증거이다.
2.4. 양키덤(Yankeedom)
양키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을 기원으로 하는 정체성 집단이다.[5] 청교도들은 구대륙의 어떤 사회를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에 없던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그들이 꿈꾼 세상은 평등했으며 도덕적으로 엄숙했고 신이 부여해준 각자의 천직에 최선을 다하는 사회였다. 평등 사회 건설을 위해 주 총독의 권한보다는 각 정착지의 자치적 타운미팅을 중시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자유롭지는 못했다. 뉴잉글랜드에 이주하려면 종교 성향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양키덤 사회 내부에서도 청교도의 기준에서 이단이거나 타락한 이들은 가혹한 처분을 받았고 심지어 고문이나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세일럼 마녀 재판이나 소설 주홍 글자가 청교도 사회의 비관용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양키덤은 남초사회였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가족단위 이주가 많아 인구증가세가 안정적이었고 집단 내에 능력있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을 대거 가지고 있었다. 주로 이스트 앵글리아 출신인 그들은 경제적 유인을 찾아오기보단 박해를 피해 오거나 오히려 구대륙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이상을 위해 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북미 식민지 중 인구 규모가 가장 크고, 같은 신념으로 똘똘 뭉쳐 단합력도 가장 강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라고 여겼고 이는 미국 예외주의와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념으로 이어졌다.
뉴잉글랜드의 WASP들은 자기 자신들의 엄숙함 뿐만이 아니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주님의 뜻을 퍼트리길' 원했고 이는 노예제 폐지에 적극 관여한 것과 현대의 진보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다른 정체성들로부터 독선적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청교도 이념에 사회보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면모가 여럿 드러나는 점이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 국가에 반감을 가지고 작은 정부를 지지하는 애팔래치아와 미들랜드와는 다르게 양키들은 세상을 더욱 낫게 할 수단으로 국가를 지지하고 거부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에의 헌신을 강조했으며 민주와 평등을 추구했지만 한번 정해진 지도자와 결정에는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타이드워터랑은 대조적으로, 양키덤은 자신을 노르만 봉건귀족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온 앵글로색슨으로 정체화했다. 잉글랜드 내전에서도 타이드워터와 정 반대로 청교도인 의회파를 지지했고 일부는 영국으로 건너가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에 종군하기도 했다. 양키덤과 타이드워터는 서로를 압제자와 반란군으로 봤고 이러한 대립이 독립 후로도 이어진다.
청교도들은 교육을 중시했고 특히 성경을 읽기 위한 문자 교육을 중요시했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식민지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문해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였고 지역을 이끄는 엘리트들 또한 구대륙식 귀족적 엘리트가 아닌 학문적 엘리트에 가까웠다. 보스턴은 북미 식민지에서 가장 고등교육이 활성화된 지역이었다. 청교도 윤리는 사치와 지주놀음을 배격해 양키 지도층들은 땅을 얻으면 지주가 되기보단 주변인들에게 팔아치우려고 했다.
제임스 2세가 북미 식민지 통제 강화를 시도하며 가장 와해시키고 싶어했던 곳이 뉴잉글랜드 청교도 지역이었고 양키덤은 명예혁명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격렬하게 저항해 윌리엄 3세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개신교도였던 윌리엄 역시 제임스 2세보다는 유화적이었지만 뉴잉글랜드를 통제하길 원했다. 청교도들은 자치를 꿈꾸며 불만을 쌓아간다.
조지 3세 시기에 7년 전쟁 승전으로 한껏 오만해진 영국이 세금 인상, 식민지인 공직진출 제한, 중앙집권화 시도등을 하자 폭발한 양키덤 청교도들은 반사치 금욕주의 교리에 의거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켜 미국 독립전쟁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독립전쟁을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혁명의 연장선으로 보아 '가톨릭의 아류' 성공회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취급해 대륙회의를 주도적으로 소집했다. 그들은 반란에 참여한 세력들 중 가장 똘똘 뭉쳐서 영국에 저항했고 렉싱턴-콩코드 전투와 보스턴 포위전 등을 승리로 이끌어 1776년에 실질적인 독립을 얻어낸다. 뉴잉글랜드는 가장 먼저 자유를 쟁취한 이후 대륙군에게 막대한 후원을 뿌린다.
양키덤은 독립 전에나 후에나, 주변 세력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인근 원주민들이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기며 잔혹하게 학살하려 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의 타 유럽계 식민지로도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려 들었다. 코네티컷은 펜실베이니아 북서부를 문화적으로 장악한 후 펜실베이니아 주정부와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결국 주권은 펜실베이니아에 있지만 양키 정착민들은 인정하기로 하고 보스턴 부동산 투자자들이 일대를 사들였다. 메사추세츠는 뉴욕주 북부를 비슷한 식으로 장악해 양키덤 문화권으로 만들어낸다. 모피 교역상으로 서부에 진출한 양키들은 서부개척시대에도 서부 해안가 지역에 청교도 윤리를 설파하려고 했다. 청교도화는 서부가 애팔래치아 개척민들의 영향도 짙게 받으며 실패했으나 양키식 이상주의와 진보주의는 살아남아 레프트 코스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카디아인들이 추방당한 북쪽의 영국령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등지로도 진출하여 양키 문화를 퍼트렸고 독립전쟁 후 망명온 왕당파들을 역으로 동화시켜 현재도 캐나다 연해주 영어권 지역은 양키덤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캐나다 양키들은 영국 식민당국의 중앙집권적 통치로 인해 타운미팅과 같은 자치 전통이 약하다.
자치권 확보와 문화색 유지를 위해 독립한만큼 대륙의회는 초기에는 기존에 영국 본국 정부가 영역만 관장하며 주의 권한을 최대한 보존하는 현재의 유럽연합같은 시스템을 유지했다. 하지만 양키덤 도덕주의자들과 애팔래치아 민중들을 중심으로 보통선거, 직접선거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주장과 봉기가 거세지자 미국 각지의 엘리트들은 이를 통제할 강력한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체감했고 미국 헌법을 제정해 민주주의와 민중의 정치참여 제한을 조화시킨 연방국가를 만들어낸다. 뉴잉글랜드 6개 주로 잘게 쪼개진 양키덤은 작은 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상원 의석 배분을 주당 2명으로 하자 주장했고 관철되었다.
하지만 양키덤 내부에선 탐욕스러운 부자들을 대변하는 연방정부와 그 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특히 뉴욕의 투기꾼들에 대항해 연방 참여를 꺼린 버몬트 공화국이 대표적이었다. 버몬트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뉴욕의 부자들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한 후에야 연방에 참여했다. 양키덤 출신 존 애덤스가 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가를 뉴잉글랜드화 시키려 하자 양키덤의 불만은 가라앉았다. 애덤스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추진하며 고유의 문화를 해칠 이민자들의 유입을 차단하는 법과 국가반역자들을 처벌하는 명목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법을 제정했다. 한번 뽑힌 대표에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청교도 문화가 순수하게 유지하길 바랐던 양키덤과 전쟁을 바랐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제외한 나머지 정체성들이 이에 반발했고 알렉산더 해밀턴과 연결된 연방군이 너무 비대해짐을 느낀 애덤스가 전쟁을 철회하자 실망한 애팔래치아인들이 지지를 철회하며 재선에 실패했고 이후 한동안 버지니아 중심의 반 양키 연합이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토마스 제퍼슨 재임기에 루이지애나 구입, 플로리다 확보, 텍사스로의 이주 허용 등의 서부 확장 정책이 이루어지고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자 양키덤은 아열대 지방 위주로 이루어진 확장에도 소외되고 대영 교역에도 타격을 입으며 이에 분노하게 된다. 뒤이어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이 영국에 선전포고하며 미영전쟁을 일으키자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전쟁은 프랑스의 폭도들과 제국주의자 나폴레옹에 동조해 선량한 영국을 공격하는 행위라 여기며 전쟁에 미온적으로 굴고 특히 같은 양키문화가 퍼진 캐나다 연해주 공격을 껄끄러워했다. 심지어 영국의 편을 들어 노바스코샤 총독의 지원을 받아 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이외에도 연방주의자들의 하트퍼드 회의에 열광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트퍼드 회의에서 일단 노예선거권 폐지, 대영 무역 재시행, 확장 저지등을 연방정부에 요구해보기로 결론났지만 곧 앤드루 잭슨이 뉴올리언스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고 미영전쟁이 끝나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흐지부지되었다.
뉴잉글랜드의 개척이 거의 다 끝나자 양키덤은 중서부 방향으로 확장을 시작했다. 앞선 펜실베이니아와 업스테이트 뉴욕으로의 확장에 이어 오하이오의 서부 보류지(Western Reserve), 미시간, 위스콘신, 미네소타, 일리노이와 아이오와의 북부지역 등은 양키덤 문화권이 되었다. 하지만 오대호 연안의 최대도시 시카고는 양키들이 세웠으나 교통 중심지로 성장하며 미들랜드 문화가 곧 들어와 경계지대가 되었고 양키들은 변해버린 시카고를 떠나 교외에 에번스턴[6]이라는 청교도 도시를 지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선조가 메이플라워호에서 했던 것처럼 정착촌을 짓기 전에 교회에서 의식을 치르고 공동체 단위로 이주해 계획적이로 체계적으로 식민 개척을 했다. 그들은 마을마다 교회를 세우고 청교도 사회질서를 가르칠 학교를 개척지에도 곳곳에 세웠다. 여전히 종교적으론 비관용적이라 청교도와 죽이 잘 맞는 스칸디나비아계 루터교도를 제외하면 남북전쟁 이전 초기 이민자들은 미들랜드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선호했다. 당대 기록을 보면 오하이오를 가르는 내셔널 로드(현 미국 40번 국도)를 기준으로 북쪽의 양키덤-미들랜드와 남쪽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의 마을 정비 수준이 확연히 차이난다는 내용이 있다.
양키덤의 청교도 문화는 확장과 함께 약해졌다.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열정은 개척지역의 느슨한 분위기에서 복음주의적 신흥 종교라는 형태로 발산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모르몬교 등이 양키 문화권에서 생겨났고 이로인해 한번 종교적 통일성이 무너지자 감리교, 침례회, 유니테리언 등으로 개종하는 양키들도 늘어 역내 종교 균질성과 청교도적 독선은 많이 약해진다.
제임스 포크 정권기, 전체적인 정치적 상황들로 신생 텍사스 공화국이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하고 이에 반발한 멕시코와 미국-멕시코 전쟁을 벌이게 되자 양키덤은 이를 비도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여겨 크게 반발했다. 또한 딥사우스의 야심찬 중남미 침공 계획에 가장 저항한 것도 양키덤의 도덕주의자들과 미들랜드의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지역간 알력싸움으로 미국은 결국 멕시코의 북부 절반만 합병하고 쿠바는 독립국으로 만드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북부의 문화를 주도해온 양키덤은 노예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계몽주의 의제를 주도했으며 존 브라운, 해리엇 비처 스토를 비롯한 가장 활동적이고 격렬한 노예제 폐지운동가들도 양키덤 출신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곳도 뉴잉글랜드였다. 이들은 타이드워터, 딥사우스 노예주들과 캔자스를 비롯한 서부주 노예제 허용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격한 갈등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결국 폭발해 남북 전쟁이 일어난다. 처음엔 양키덤을 제외한 다른 문화들이 딥사우스의 독립을 지지하고 양키덤의 딥사우스 점령 및 재합병 주장에 반발했지만 곧이어 딥사우스가 섬터 요새 기습이라는 오판을 벌이자 북부는 단합, 양키덤은 연방군을 이끌고 승리를 얻어낸다.
남북전쟁 승전 이후 양키들이 주도한 공화당 급진파는 남부 군정을 주도하며 남부연합 지도층의 정치참여 제한, 주지사 임명, 남부에 양키식 학교 설립, 북부 기업들의 남부 진출 등으로 남부의 노예사회를 무너뜨리려 했다. 하지만 몇십년의 군정으로 남부의 정체성을 뒤바꾸는 건 역부족이었고 군정 철수 이후 짐 크로법과 선거법 개정을 통해 남부의 카스트제는 부활한다. 한편 1830년 경부터 유럽에서 이주민 물결이 몰려오자 산업이 발달한 양키덤에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를 비롯한 이민자들이 몰려왔는데 당시까지만해도 사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했던 양키들은 이민자 문화에 관용적이었던 미들랜드와 뉴네덜란드, 여러 이민자 집단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쓴 레프트코스트와는 달리 양키식 학교와 성인 야학을 통해 '미국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양키덤 문화는 이민자들로 인해 문화가 어느정도 변하고 종교에 대한 관점도 바뀌긴 했지만 현대에도 사라지지진 않았다.
러더퍼드 헤이스가 남부 군정을 해제하고 재건시대를 끝낸 이후로도 북부의 표 분산으로 어부지리를 취한 우드로 윌슨 정권을 제외하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선 전까지 북부의 양키덤과 레프트코스트가 주도한 공화당은 미들랜드와 파웨스트의 지원을 받아 장기집권했다. 당시의 공화당은 친자본주의 보수에 가까웠지만 남부가 장악한 현재의 공화당이 보기엔 친연방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여럿 폈다. FDR의 주도로 공화당과 민주당의 성향이 뒤바뀐 후에도 북부 연합은 항상 당이나 출신을 불문하고 좀 더 진보적인 후보를 뽑아왔다. 그렇기때문에 현재는 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다.
청교도 근본주의에서 시작한 이들의 사회운동은 역설적으로 종교의 자유와 자유주의 신학으로 이어졌다. 양키덤은 종교적 통일성의 붕괴와 이민자 유입 등을 겪고 강압의 무용을 깨달았고 북중부 유럽처럼 종교가 이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의 세력이 커졌다. 모두가 청교도 신앙을 믿는 이상을 꿈꾸던 이들은 어느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게 되었고 친과학, 탈종교 분위기가 양키덤을 포함한 북부동맹 전역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주욱 이어진 북중부 유럽과는 달리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북부의 탈종교를 파고들어 세력을 확장한 딕시들의 성서무오설 근본주의 공격으로 퇴조하였다.
한편 양키덤의 사회 정화 의지는 노동운동, 아동운동, 여성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1세대 페미니즘 운동가 상당수가 양키덤 출신이었고 최저임금제 등이 양키덤의 주장으로 도입되었다. 외교 의제에선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로도 항상 남부에 대항해 반제국주의, 반전주의적 기조를 주장했다. 양키덤과 미들랜드의 기독교 여성 운동가들은 금주법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960년대 남부에서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해지자 연방정부의 이름으로 개입해 남부의 인종 카스트제를 깨트리는 데에 기여했다. 68혁명과 히피의 발흥을 거치며 생태주의나 정치적 올바름 역시 북부연합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미국의 진보운동들은 사람들을 가르쳐 세상을 바꾸려는 양키덤 도덕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현재에도 양키덤과 레프트코스트를 비롯한 북부연합은 어퍼머티브 액션, 오바마 케어 등의 국가 개입을 통한 사회 진보 정책을 지지한다.
2.5.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뉴욕시 광역권의 전신은 뉴암스테르담을 수도로 한 뉴네덜란드 식민지였다. 본국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종교적 자유와 관용을 통한 상업의 번영을 꾀하게 되었고 당시 차별받던 유대인, 무슬림, 퀘이커 또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7] 뉴네덜란드 역시 이 영향을 받아 인구가 적었음에도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가 되었다. 뉴네덜란드는 어떠한 사회적 이상을 위해 생긴 도시가 아니라 그저 무역을 통한 발전만을 추구했다.뉴네덜란드의 지배층들은 가난한 이민자에서 시작해 상업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많았다. 미국과 뉴욕을 대표하는 다양성, 관용, 민간기업 등의 이미지가 뉴네덜란드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뉴네덜란드의 관용은 그저 상업을 위해 참는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 또한 존재했다. 뉴네덜란드는 원주민들과 동등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토지 소유권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자 원주민을 공격해 학살한 사례도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나 이권 문제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 현대의 뉴욕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뉴네덜란드는 돈이 된다면 도덕성을 내팽겨치기도 하는 어두운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북미에서 본격적으로 노예제를 소개하고 도입한 것은 타이드워터나 딥사우스의 지주들이 아니라 맨해튼의 상인들이었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정치적 자유의 부재가 있었다. 모든 것이 가장 자유로운 뉴네덜란드였지만 정치참여권은 한번도 부여된 적이 없었다. 네덜란드 본국은 북미 식민지의 관리를 서인도회사에 맡겼고 서인도회사가 임명한 총독이 뉴네덜란드를 지배했다. 서인도회사는 특유의 상업적 마인드로 인해 개척 비용을 부담하길 싫어했고 허드슨 강 상류쪽 땅 제공 약속으로 민간인을 유치하는 식으로 개척을 민간에 떠맡겼다. 이로인해 뉴네덜란드의 영토확장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영란전쟁의 영향으로 영국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뉴네덜란드는 재빠르게 항복하고 네덜란드와의 무역권을 유지했다. 요크 공작 제임스의 영지가 되어 뉴욕으로 이름이 바뀐 이 도시는 영국과 네덜란드 모두와 교역하게 돼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다. 영란전쟁의 행방으로 인해 잠시 네덜란드가 다시 지배했다가 영국령으로 돌아오며 뉴욕의 영주 제임스는 네덜란드인 관료들을 모두 해임하고 자기 마음대로 뉴욕을 통지하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즉위하여 제임스 2세가 된 이후 그는 북미 식민지 전역을 뉴욕처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시도했다.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오라녜 공인 윌리엄 3세가 즉위한다는 소문에 힘입어 뉴욕의 네덜란드계들은 네덜란드 복귀를 기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윌리엄 3세의 사후처리는 새로운 백성 영국인들의 동요를 의식해 뜨뜻미지근했고 뉴네덜란드는 영국령 뉴욕으로 남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는 애초에 뉴욕 지역이 정치적 자유를 겪어본 적 없는것도 있고 영국과의 교역 유지, 양키덤 견제를 위해 독립 반대를 주장하는 왕당파의 거점이 되었다. 극소수 독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뉴욕 총독을 감금하는 데에 성공하나 영국군이 뉴욕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시를 수복, 이후 각지에서 망명온 왕당파들이 뉴욕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뉴욕 북쪽에서의 새러토가 전투 패전 이후 영국이 밀리기 시작하고 열강들이 대륙군을 지원하기 시작하자 왕당파들의 꿈은 점차 멀어져만 갔고 주변의 식민지들이 빠짐없이 독립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연방에 참여하게 된다. 독립 후 헌법 제정 과정에서 뉴네덜란드는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다양성 존중과 같은 네덜란드 지배기 존중받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헌법에 찬성하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이렇게 들어간 권리장전은 이후 미국에 큰 영향을 끼친다.
뉴네덜란드 문화는 내륙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양키덤과 미들랜드에게 영토를 잠식당하나 뉴욕의 개방적이고 상업적인 분위기는 이 도시를 이민자들의 관문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미국 최고의 인구밀도와 최대의 경제규모를 가진 도시로 떠올랐다. 한편, 뉴욕은 노예상들의 본거지였던 만큼 본래 노예제에 호의적이었고 딥사우스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업스테이트 뉴욕에 정착한 양키들 때문에 노예제를 폐지하긴 했으나 여전히 뉴욕시는 노예 사냥꾼과 추노꾼들이 활개치는 곳이었다. 딥사우스의 독립선언에도 오히려 독선적인 양키덤을 비난하며 지지의사를 보냈으나 딥사우스가 섬터 요새를 기습하며 남북 전쟁을 일으키자 선을 넘었다 여겨 반발했고 북부편에 선다.
이후 노예들이 전부 해방된 이후의 정국에서도 뉴욕시는 민주당 소속 정치집단인 태머니 홀(Tammany Hall)의 반민주적 지배 하에 무역 이익을 문제로 양키덤이 주도한 고관세에 반발하는 등 19세기 내내 양키덤과 레프트코스트의 주장과 이따금 엇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고 뉴욕이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하자 뉴네덜란드에 공공 인프라와 효율적 과세, 강력한 연방정부가 절실해졌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양키덤 중심의 북부동맹에 참여해 지금까지 북부동맹의 우군으로 남아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아웃사이더를 포용하는 뉴네덜란드의 문화는 뉴욕 한복판에 괴짜 예술가들과 사회 비판가들이 모이는 그리니치 빌리지를 만들어냈고 북부가 주도하는 진보적 운동에 스톤월 항쟁을 비롯한 큰 영향을 끼쳤다.
2.6. 딥 사우스(Deep South)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주,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아칸소 동남부 지역과 인근의 넓은 전체적인 문화권과 지역들이 서로 이어지는 딥사우스[8]는 영국계 이민자들이 개척했으나 다른 영국계 식민지들과는 달리 유럽에서 바로 이주한 이들이 세운 곳이 아니다. 딥 사우스를 설립한 이들은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의 노예농장주들이었다. 영국 식민지중에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잔인하기도 했던 바베이도스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바베이도스의 개간이 거의 다 끝나 남은 땅이 거의 없어지자 농장의 확장과 자식들에게 물려줄 땅을 위해 북미 대륙의 드넓은 아열대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카리브해에 근원을 둔 딥사우스 문화는 제국주의와 노예제가 일반적이었던 당시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폭압성을 보였다.이미 바베이도스에서 계약제 하인을 잔인하게 다루다가 흑인 노예제로 넘어간 후 채찍과 고문, 낙인 등의 기술을 개발해낸 바베이도스인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 상륙해 미국에서 가장 비민주적이고 과두정적인 딥사우스 문화를 퍼트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예농장주들의 공격적인 확장은 빈민들의 유토피아를 목표로 시작된 조지아주를 노예 플랜테이션으로 개조시키고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를 넘어 더 넓은 지역의 동부까지 확장되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가로막혀 농장 확대가 끝나자 골든 서클 기사단 (Knights of the Golden Circle) 같은 제국주의 조직을 만들어 열대지역 중남미 합병을 선동했다. 그들은 멕시코 합병을 주장했고, 윌리엄 워커의 니카라과 정복을 후원했으며,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빼앗아오길 갈망했다. 이러한 지역들의 노예주 연방 가입과 그에 따른 미국-멕시코 전쟁 역시 딥사우스의 로비로 이루어졌고 남북전쟁 이전까지 딥사우스의 언론들은 중남미 정복을 부르짖었다.
바베이도스에서 비롯된 딥사우스 지배층들은 영국 본토의 성공회를 받아들이고 자식을 본토 기숙학교에 보내 영국 상류층과 어울리려 했고 경쟁적으로 사치품을 사들이며 과시했다. 그들은 타이드워터처럼 노르만 귀족을 자처했고 마땅한 도시가 없는 시골사회를 발달시킨 타이드워터와는 달리 도시를 화려하게 꾸며 노예 착취로 쌓아올린 재산을 소비하는 문화 중심지로 삼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문학, 미디어 작품 등에서 당시 딥사우스 노예주들의 귀족적인 생활상이 묘사된다.
같은 남부로 분류되는 타이드워터 또한 노예제 사회였지만 딥사우스와 타이드워터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노예를 유독 잔인하게 다루는 딥사우스는 노예 인구가 자연증가한 타이드워터와는 달리 매년 노예를 수입해와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꾸준히 노예가 유입되면서 딥사우스 노예숙소는 미국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흑인 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또, 인종보단 계급이 중요했던 타이드워터와 대조적으로 딥사우스는 인종에 기반한 강고한 카스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인종 카스트제는 남북 전쟁 이후로도 지속되어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일단락되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끝난다.
딥사우스의 노예주들은 항상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했고 자연히 노예 반란을 예방하는 민병대와 군사적인 문화가 강해졌다. 조면기의 발명 이후 목화 수요가 폭발하며 딥사우스의 플랜테이션은 마침 기후적으로도 적당했던 목화 위주로 넘어갔고 농장주들은 막대한 부를 획득해 강력해진 경제력을 기반으로 남부의 문화적 주도권도 타이드워터에서 뺏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딥사우스 노예농장이 루이지애나까지 진출하며 그들은 진정한 노르만의 후예[9]인 뉴프랑스 케이준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엔 영국의 추방조치에 쫓겨온 아카디아인도 있었지만 아이티 혁명으로 생도맹그에서 쫓겨와 누벨프랑스의 관용과는 거리가 멀었던 카리브해 노예농장주들도 있었다. 딥사우스인들은 북방에서 쫓겨온 아카디아인들을 산에서 사는 원주민이나 다를 바 없는 족속이라 여기며 혐오했다. 한편 아이티 출신 농장주들은 딥사우스인들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딥사우스만큼 폭압적인 카스트제를 유지하진 않았고 노예들을 맘껏 해방시켜주거나 적은 거부감으로 혼혈하며 크리올들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딥사우스는 이로 인해 뉴프랑스인들과 반목했고 루이지애나 정치는 프랑스식 제도를 지키려는 뉴프랑스인들과 딥사우스식으로 제도를 개조하려는 딥사우스의 전쟁터가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노예 반란 우려, 카리브해와의 친연성, 귀족 엘리트주의적 요소 등 왕당파로 남을만한 요소들이 많았으나 영국의 세금 정책과 식민지 엘리트 차별 정책은 딥사우스에도 타격이었고 렉싱턴-콩코드 전투의 승전 소식이 전해져오자 독립파의 세력이 강해져 반란에 참여했다. 하지만 독립에 미온적인 농장주들이 많았고 영국군에 재점령당하자 영국에 순응한다. 영국은 딥사우스가 반란에 미적지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딥사우스와 뉴욕을 확보해 버지니아를 포위하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영국이 노예반란을 시도한다는 소문이 돌자 노예주들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독립 행렬에 가담하게 된다.
태생적으로 양키덤과 정반대에 가까웠던 딥사우스는 독립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양키덤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헌법 제정시에도 타이드워터와 함께 엘리트주의적 요소를 주장했다.
타이드워터의 담배 재배가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졌던 반면, 딥사우스 아열대 지대의 목화와 설탕 농업은 영국과 북부의 산업 발전 바람을 타고 시간이 지날수록 번창해나갔다. 이에 따라 남부의 정치적 주도권도 타이드워터에서 딥사우스로 넘어갔으며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 같은 타이드워터 지도자들은 줄어들고 존 칼훈을 비롯한 딥사우스 출신 정치인들이 두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딥사우스의 적극적 노예제 옹호는 타이드워터의 점진적 노예제 폐지 논리를 이겼고 딥사우스의 사상가들과 교회들은 노예제 정당화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들에 따르면 남부의 고결한 귀족들은 안정적인 계층구조 하에서 교양과 문화를 쌓아올리기 때문에 전복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를 지낸 제임스 해먼드는 후일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자본론을 통해 인용하는 산업사회의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남부 농촌에서 가족적인 공동체 질서 하에 보호받는 노예라는 구도를 주창하였다. 또한 농장주들의 여성 노예 강간 문제 제기를 이상성욕자들의 변태적 망상일 뿐이라 폄하하며 딥사우스의 카스트 질서는 혼혈을 죄악시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정작 제임스 해먼드 본인이 여자 노예와 관계를 맺고 이렇게 태어난 사생아들을 몰래 교육시켜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노아의 아들 함을 명분으로 흑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이때 만들어졌다.
딥사우스는 양키덤이 이끄는 노예제 폐지 논쟁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민자를 받아들여 인구가 폭증한 자유주들에게 점차 포위되어갔다. 이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딥사우스는 노예제 폐지론자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부의 비토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자 분리독립을 선언한다. 비록 타이드워터를 포함한 다른 지역이 즉시 남부연합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독립선언한 딥사우스를 점령해 노예들을 해방시키자는 양키덤의 주장에 동조하는 문화권이 없었기 때문에 독립에 성공할 뻔 했다. 하지만 남부의 새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전쟁이 일어나면 타이드워터 뿐만 아니라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뉴네덜란드, 미들랜드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거라 오판해 섬터 요새를 선제기습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남북 전쟁에서 뉴네덜란드와 미들랜드, 그리고 상당수의 애팔래치아는 선을 넘은 딥사우스에 분노해 북부 편을 들었고 이로인해 전쟁에서 패배하며 딥사우스는 양키덤이 주도하는 군정 통치를 받게 된다.
북부의 군정이 끝난 후 딥사우스의 인종차별은 다시 시작되었다. 딥사우스 엘리트들은 남북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마지막 남은 권력인 교회를 활용했고 짐 크로법을 비롯한 인종분리법, 흑인과 하층민 백인의 투표권을 억압하는 법률 등을 추진하며 인종 카스트제를 부활시켰다. 남부의 교회들은 양키덤 교회의 사회 개혁 성향에 반해 내면적 복음주의를 제창했다. 사회의 변혁보단 개개인의 내면에서 구원을 찾고 전통의 순응하기를 가르치는 복음주의 교단들은 남북전쟁의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 프로파간다를 뿌려 타이드워터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포괄하는 딕시연맹을 만들었다. 남부 교회들은 성서무오설, 창조론 같은 근본주의 성향을 지역에 널리 뿌리내리게 했다.
딕시연맹의 정치인들은 딥사우스 기득권들의 이권만을 위한 정책을 펴왔다. 그들은 투표권 제한이 없으면 깜둥이들에게 모든 것을 빼았긴다고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비롯한 지역내 백인 하층민들을 선동해 흑인과 백인 하층민 자신들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백인 폭동의 온상인 딥사우스에서는 '서열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깜둥이'들을 린치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는 딥사우스에 집중되어 있던 흑인들이 생존을 위해 북부와 서부로 흑인 대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 전역 흑인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줬다.
노예 농장주였던 딥사우스의 지배층들은 노예제를 대신할 소작제를 개발했고 외국인 노동자를 유치해 자신들을 위한 카스트 사회를 지속시켜나갔다. 남부 정치인들은 인프라 투자는 뒷전으로 하고 감세와 규제 해제, 임금 동결 등 딥사우스 엘리트들만을 위한 정책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로 인해 이 지역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문화권이 되었다. 흑인 민권 운동이 인종 카스트를 깨트린 지 오래고 낮은 임금과 친기업 정책을 기반으로 선 벨트 공업지대가 된 현재도 딥사우스는 중산층, 하층민, 흑인들이 '정당한 주인'들의 노예 역할을 하는 사회이다.
미국의 명예와 패권을 중시하는 딕시연맹은 전쟁이 있다면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이든간에 전쟁에 찬성해왔다. 하지만 남북전쟁 이후로는 재건시대 군정통치의 안좋은 기억와 타 인종과 타 문화권 지역이 연방으로 들어오면 인종 카스트제가 깨질 거라는 공포때문에 골든 서클 기사단 시절과는 달리 영토 합병과 식민지배에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종종 보였다. 남북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에 미서전쟁이 일어나자 남부는 언제 연방정부와 싸웠냐는 듯 적극적으로 참전했지만 필리핀과 하와이, 괌 등의 '열등민족' 지역 식민화에는 반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딕시연맹은 타이드워터 출신 우드로 윌슨의 참전 선동에 열광했다. 윌슨 또한 남부에 대한 보답으로 인종분리법을 강화시켜줬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사악한 나치들을 쳐부수러 가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그 나치가 자신들과 닮은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고 히틀러가 딥사우스 사회를 이상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는 당혹해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양키 반전주의자들에 대항해 빨갱이 베트콩들과 싸우자고 주장한 딕시연맹은 2000년대 초반에 자신들을 가장 잘 대변하는 조지 W.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 그가 추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성공하며 인종 카스트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마틴 루터 킹, 로자 파크스 같은 딥사우스 출신 흑인들이 민권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딥사우스 여론은 '열등한 깜둥이들'이 갑자기 뭘 잘못먹었는지 당혹스러워하며 주방위군을 투입해 리틀록 사건 등을 일으켜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북부와 연방정부는 연방군을 투입해 리틀록의 주방위군을 제압하는 한편, 흑백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교에 연방 지원금을 끊을 거라 협박하며 흑인들을 지원해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같은 시기, 북부에서는 68혁명과 히피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흑인 민권 법안 서명을 겪고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둬들인 남부는 공화당의 남부 전략에 응해 공화당 지지로 똘똘 뭉쳤다. 꾸준히 더 보수적인 후보를 지지한 딕시들은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을 뽑으며 북부에 역공을 가했다. 남부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통해 68혁명과 히피 이후 꾸준히 지속되던 북부의 진보적 사회운동들을 가로막는 데에 성공했다. 현재에도 진보적 북부와 보수적 남부의 문화 전쟁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 싸움의 명목을 걸고 진행중이다.
2.7. 미들랜드(The Midlands)
미들랜드[10]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시작해 미국 중서부로 뻗어나간 정체성으로 가장 표준적인 미국 문화와 표준 미국식 영어로 인정받는 문화이다. 이러한 미들랜드는 처음에는 양키덤과 비슷한 이상을 품고 시작되었다. 퀘이커 교도 윌리엄 펜이 찰스 2세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로 북미에 퀘이커교 유토피아 식민지를 만들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퀘이커교는 성선설을 기반으로 평화주의, 관용, 평등을 꿈꾸었고 윌리엄 펜은 자신의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에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식민지의 중심지로 '형재애의 도시' 필라델피아를 건설, 체계적인 개발 계획과 공격적인 홍보로 이민자들을 끌어모았다.뉴잉글랜드의 양키덤과는 달리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교도들은 다른 교파와 문화에도 관용을 보였고 곧 펜실베이니아는 독일계 미국인을 비롯한 다른 문화가 어우러져 사는 곳이 되었다. 아미시와 같이 이질적인 공동체 또한 포용했고 펜실베이니아 독일어와 같은 언어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개개인이 자기 주장을 하는것만 중시하는 퀘이커교의 분위기는 양키덤의 퓨리턴 이념과는 달리 정치에 어울리지 않았고 평화주의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 퀘이커 교도들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지배권을 잃는다.
특히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의 기원이 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접경지대 출신 이민자들의 전투적이고 과격한 성향은 관용적인 퀘이커교도들의 인내심마저 시험했다. 변방으로 떠난 애팔래치아인들은 기존 이민자들이 세워놓은 원주민과의 우호관계를 깨트리고 싸움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식민지 전체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퀘이커 신도 지배층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과 전쟁은 안된다며 무력 대응 없이 방관하려 들었다. 이로 인해 안그래도 정치에 소질이 없던 퀘이커는 큰 비판을 듣게 되었다. 거기다 더해 원주민과 영국간의 폰티악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변방의 애팔래치아인들이 펜실베이니아 내의 원주민을 분풀이로 학살하며 식민 정부의 보호를 받던 원주민을 공격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공격하는 팩스턴 보이즈 사태를 겪으며 퀘이커교도는 영향력을 완전히 잃는다.
퀘이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미들랜드는 이후 다양한 지역에서 온 종교적으로 독실한 서민들이 정부의 압제를 혐오하며 작은정부를 주장하는 곳으로 남았다. 미들랜드는 독일계가 영국계보다 더 많았고 이는 영국과는 구분되는 미국만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론 온건하다 못해 무관심한 경향까지 보이는 중립 지대로 지금도 미들랜드는 미국의 정치 향방을 결정하는 스윙보터 지역이다. 미들랜드 사람들은 양키덤의 잔소리도 혐오하지만 남부의 노예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정부의 개입을 혐오하지만 애팔래치아인들처럼 전투적이고 독립적이기보단 온순하고 평화적인 성향을 지닌다.
미들랜드의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인 분위기는 이민자들의 선호를 받았고 뉴네덜란드, 레프트코스트와 함께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을 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를 구성한 스코틀랜드-얼스터계 이민자들도 주로 필라델피아를 통해 유입된 이들이다. 성공회에도 관대했고 대영제국이 그들의 평화로운 사회를 지켜줄거라 기대한 미들랜드는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서부 내륙의 친독립 애팔래치아인들이 지지하는 극소수 독립파가 식민지 정부를 장악해 결국 억지로 반란에 동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영국군이 독립파를 쫓아내고 펜실베이니아에 입성하자 미들랜드 주민들은 평화로운 일상이 회복되었음을 환영했다. 하지만 새러토가 전투에서 영국이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하자 대륙회의는 펜실베이니아를 손봐주겠다고 결의, 대륙군의 손에 독립파가 재집권했고 친독립파 애팔래치아인들이 주도한 반독립파 숙청의 결과 관용적인 미들랜드 사회는 훼손되었다. 미들랜드는 헌법에 양키덤과 딥사우스의 간섭을 막기 위해 주별 자치권을 추가하는 것을 주도했다.
독립 이후 펜실베이니아의 정치권력은 서부 애팔래치아인들한테 넘어갔으나 미들랜드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꾸준히 대륙회의와 의회에서 스윙보터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미국 헌법 제정시 지역내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헌법 인준을 주도했다.
독립 이후 왕당파들은 영국령 캐나다로 떠나 왕당파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주로 각지의 이민자와 뉴네덜란드, 미들랜드 출신으로 구성된 왕당파들은 각양각색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퀘벡 동쪽 대서양 연안 영어권에 정착한 이들은 먼저 정착해있던 양키덤 문화에 동화당했다. 한편 퀘벡 서쪽 온타리오에 정착한 이들은 기존에 먼저 정착한 문화가 없었던 만큼 이러한 문제를 겪지는 않았지만 이들 역시 독자적인 왕당파 문화권을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 영국 정부의 이주 유인책으로 뒤늦게 이주해온 미들랜드 문화에 동화당한다. 온타리오에 정착한 미들랜드 사람들은 독립전쟁 이전 평화롭고 관용적이며 조화로웠던 펜실베이니아 사회의 부활을 꿈꾸었고 이러한 미들랜드 가치관은 이후 캐나다에 영향을 두고두고 끼쳤다. 한편 영국은 13개 식민지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캐나다에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중앙집권적 통치를 유지했는데 이 또한 캐나다의 뉴프랑스, 미들랜드, 양키덤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미들랜드 문화는 이민자들을 꾸준히 수용하며 펜실베이니아를 넘어 중서부로 확장하며 미국에서 가장 표준적인 중산층 문화로 꼽히는 중서부 사회를 만들어냈다. 주로 독일계로 구성된 미들랜드 이주자들은 내셔널 로드(현 미국 40번 국도)를 따라 오하이오와 인디애나, 일리노이 중북부와 아이오와 대다수, 미주리 북부 등지로 진출하며 평화주의적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나갔다. 그들은 권위주의 공동체인 양키덤과 개인주의 무법자인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특기할 점으로, 양키덤 한복판인 위스콘신의 밀워키는 독일계 이주민들이 세운 미들랜드 도시이다.
중서부 미들랜드 사회는 펜실베이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족별로 마을을 만드는 다민족 관용사회였다. 그들은 양키덤처럼 가족단위로 이주했고 필라델피아를 모델로 삼아 도시를 세웠다. 특히 1848 혁명 등의 정치 불안정으로 인해 미국으로 물밀듯이 이주해온 자유주의자 독일인들이 미들랜드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타 미국인들에 비해 높은 교양과 농업기술력, 손재주를 지니고 있어 미국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초기에는 미시시피 수운을 따라 세인트루이스로, 나중에는 철도로 중서부에 도착한 독일계들은 서부로 공격적으로 확장하기보다 튼튼한 석조 주택을 지어 가족이 대대손손 거주할 수 있는 토대를 세우려고 했다. 한편 사람들과 떨어져서 사는 것을 추구하던 퀘이커교도들도 인구밀도가 높아진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중서부에 정착하는 경우가 늘었다.
미들랜드는 노예제와 불관용을 모두 혐오했던 만큼 노예제에 대한 태도가 미묘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와 간섭하길 좋아하고 자기들 사상을 강요하려 드는 양키덤 모두 싫어했다. 다만 노예제에 관해선 양키덤과 보조를 맞추는 인권 지향 종파와 분쟁을 혐오하는 평화 지향 종파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미들랜드는 노예제 폐지 논란 전에는 양키의 폭주에 반발해 자유방임주의 반양키 연합인 민주당의 편을 들었으나 노예제를 용납 못했기 때문에 16대 대선에선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하기도 했다.
노예제 폐지 논쟁이 격화되자 미들랜드는 노예주 남부와 양키덤의 격렬한 노예해방주의 모두를 혐오해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와 함께 독립해 중부 연방을 만들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딥사우스가 독립선언을 하자 양키들의 군사적 징벌 주장을 거부하고 독립을 용인했다. 하지만 딥사우스가 섬터 요새를 선제공격하자 확실히 북부의 편으로 돌아서서 남북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로도 전쟁이 있을 때마다 미들랜드는 반전주의를 지지하지만 주전파와 싸우는 것도 내켜하지 않는 중도적 반응을 보인다. 남북전쟁 종전 후 미들랜드는 한동안 양키덤과 레프트코스트가 주도하는 북부연합의 편을 들어 공화당 장기집권에 기여했고 북부 사회운동에 영향을 끼쳐 금주법이나 반전운동 등에 자신들의 색채를 새겨넣었다. 북부연합의 장기집권이 깨진 현재, 미들랜드는 미국 정계의 스윙보터 역할을 하며 미국을 좌지우지 하고있다.
2.8. 그레이터 애팔래치아(Greater Appalachia)
웨스트버지니아 등 남부 애팔래치아 산맥 변방에서 시작하여 켄터키, 테네시, 미주리, 오클라호마, 아칸소 북서부와 인근 지역들의 중서부 등 미국 동남부 내륙의 넓은 지역[11]을 장악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문화는 긍정적으론 프런티어 정신으로 대표되나, 부정적으로는 레드넥, 힐빌리 등으로 희화화 되어왔다.[12] 이들은 수백년 동안 전란이 잦았던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북잉글랜드 접경지역 보더 리버(Border reiver) 출신으로 전쟁과 착취를 피해 이민왔으며 거칠고 호전적인 그들은 국가보단 가족을 믿고 성악설을 신봉했다.처음에는 이민자들에게 관용적인 미들랜드를 통해 많이 이주했으며 그들의 무법자적 성향이 기존 정착민들과는 맞지 않자 대거 변방의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이주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서부에 정착한 이들은 산맥을 따라 버지니아 서부를 넘어 조지아 서부까지 넘어갔고 원주민과 해안가 이주민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함과 동시에 타이드워터를 비롯한 해안가 이주민들의 확장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애팔래치아인들은 원주민들과 적대하며 싸우고 영토를 빼앗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영국 정부의 원주민 보호와 식민지 확장 금지를 무시하고 인디언 전쟁을 이끌었다. 한편 그들은 갱단을 만들어 해안가 식민지들을 위협하기도 했으며 갱단이 노예 반란을 조장할 것을 우려한 딥사우스 농장주들의 확장을 막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갱단이 가족과 혈연으로 이어진 애팔래치아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 같자 이들은 정부와 치안 조직을 만드는 대신에 자경단을 만들어 이에 대응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은 사적제재가 극심해 린치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의견이 갈렸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미들랜드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올 기회라 여겨 독립 찬성이 다수였지만 남부 애팔래치아에서는 산맥 너머로 확장을 못하게 막는 영국과 해안가의 노예 농장주들 중 어느쪽이 압제자에 가까운지를 두고 서로 내전을 벌였다. 남부 애팔래치아인들의 내전은 강간과 학살로 점철되었다. 어느쪽을 지지하건 애팔래치아 민병대는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후 펜실베이니아의 정치 권력을 어느정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애팔래치아인들은 민주주의 도입 논쟁이 붙자 자유를 위해 가장 격렬하게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항해 엘리트들이 강력한 연방정부와 헌법을 제정하려 하자 이들은 반연방주의를 지지하며 헌법 인준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에게 연방정부란 부자들과 엘리트들의 지배수단에 불과했고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미국 헌법 제정에 이들이 배제되며 영향을 끼치진 못했으나 전형적인 애팔래치아인인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 되며 잭슨 민주주의를 비롯한 영향을 미국 정치에 영원히 남긴다.
애팔래치아인들의 반연방정부 분위기는 연방 재정 책임자인 로버트 모리스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정책을 거치며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독립전쟁 중 발행한 국채를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서 화폐로 이용되던 위스키에 중과세를 부과했다. 이는 애팔래치아인들의 눈에는 모리스와 해밀턴의 극소수 부자 친구들이 국채 차용증을 그들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투기 놀음을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위스키에 때린 세금으로 차용증을 얻어낸 탐욕스러운 금융업자들에게 채권을 갚는 데에 이용해 정부와 금융업자들이 그들을 교묘하게 착취한다고 여긴것이다. 그들은 위스키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독립전쟁 이전에 이미 트란실바니아 식민지 설립을 시도했고 1784년에도 노스캐롤라이나 서부, 현 테네시 동부에서 지식인과 부자의 피선거권을 금지하는 프랭클린 주를 주창했다 진압당했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위스키 반란 초반에는 외부로 연결되는 길을 틀어막고 들어오는 징세원들과 연방 정부 요인들을 살해하며 고립을 시도해보았다. 반란이 격화되자 애팔래치아인들은 결국 헌법에 대항해 독립을 시도했으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직접 이끄는 연방군에 항복해야 했다. 그들은 독립전쟁 시기 쓰였던 자유를 의미하는 나무기둥을 적군의 진군로에 세우며 연방정부를 비난했다.
구대륙에서의 뼈져린 경험은 애팔래치아인들이 이동 가능한 자산을 선호하게 만들었고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내부에선 아메리칸 위스키가 화페로 통용되었다.[13] 스코틀랜드의 클랜 사회에서 영향을 받은 그들은 혈연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 사촌간 근친혼을 장려했다. 하지만 독립적이고 무법적, 개인주의적인 애팔래치아 문화는 도시 발달과 경제 성장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은 소위 깡촌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은 학교와 문화시설을 세우려 노력하지 않았고 가난보다 억압을 더욱 혐오하며 허름한 집에서 노동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문화권은 서부로의 확장을 시작한 4개 정체성 중 가장 신속하고 공격적인 영토 확장을 보였다. 그들은 연방군의 점령 이후에야 정착을 시도한 다른 문화권들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원주민들을 공격해 정착지를 확보해나갔다. 정부와 억압이 없는 지역을 원했기 때문에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 기존 정착지들은 애팔래치아인들의 인구유출로 규모를 빠르게 앓어갔다. 그들은 40번 국도 이남의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남부 지방을 빠르게 애팔래치아 문화권으로 만들었다. 특히 인디애나에 정착한 애팔래치아인들은 자신들을 후지어(Hoosier)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남부 내륙으로의 확장은 중서부보다 더뎠는데 이는 타이드워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기 시작한 체로키 원주민들과의 충돌 때문이었다. 유럽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체로키족은 자체 문자를 만들고 백인들처럼 노예를 부리며 남부 애팔래치아인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남부 애팔래치아 출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1차 목표가 이 체로키 족을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에서 영원히 쫓아내버리는 것이었고 헌법마저 무시하며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체로키족은 눈물의 길을 걸어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 했고 애팔래치아 문화는 이를 기반으로 켄터키, 테네시, 미주리 남부와 아칸소 북부, 오클라호마 동부를 넘어 인근 지역들을 포함한 서북부 지역까지 점령해나갔다.
애팔래치아인들이 믿는 칼뱅파 교회는 신과의 직접적, 감정적 교류를 강조했으며 부흥회가 그들이 믿는 교회의 큰 특징이었다. 양키덤은 선교사를 파견해 그들에게 청교도 윤리와 근면성실,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려 했으나 애팔래치아인들은 양키들의 지루한 설교를 싫어했고 방언이 달라 그나마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애팔래치아인들은 양키들을 못믿을 이라고 여겼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을 파괴하려 드는 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성가신 양키 선생들도, 잘난체하는 남부 지주들도 혐오하는 애팔래치아인들은 반양키 자유방임,백인우월주의 연합인 민주당을 지지해왔으나 노예주들의 차별의식이 소위 화이트 트래시라고 불리는 자신들에게도 향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데다가 타이드워터, 딥사우스와의 분쟁 또한 잦아 타 남부와 비교해서 노예제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남부 주들의 독립 움직임에 꾸준히 반대 의견을 표했고 양키덤과 남부 모두에서 독립해 미들랜드와 함께 중부 연맹을 구상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딥사우스의 섬터 요새 기습으로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북부 자유주 지역 애팔래치아인들은 선을 넘은 딥사우스에 반발해 웨스트버지니아의 독립을 선언한 후 북부 편을 들고 남부를 공격했다. 반면 노예주 애팔래치아 문화권 주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 남부연합 선전포고를 자신들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여 남부연합에 가입했다.
하지만 전쟁 후유증과 전쟁 후 북부의 군정통치로 인해 지역의 경제가 침체되었고 해방된 흑인들과 일자리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원래 백인우월주의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노예제와 연관이 적었던 이 문화에도 과격한 인종차별이 싹튼다. 또, 재건시대 북부 양키 자본이 지역을 침탈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이후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타이드워터, 딥사우스와 함께 딕시연맹을 이룬다. KKK단 역시 노예 플랜테이션이 성행했던 지역이 아닌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서 악명을 더욱 크게 떨친다. KKK는 1차 창설 당시 테네시에서 백인 하층민들의 주도로 창설되었고 화이트 트래시들의 역량 강화와 선거권 요구를 우려한 딥사우스와 타이드워터의 엘리트들이 해산시켰다. 2차, 3차 창설때는 애팔래치아 지역 밖 남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언제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악명높은 활동을 벌였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원래 딕시 연맹의 존속에 불안을 유발하는 요소였다. 상당수가 북군편에 참전했기 때문에 남부연합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지도 않았고 백인우월주의는 강했어도 백인들끼리는 평등을 지향했고 젠체하는 귀족들을 혐오하는 포퓰리즘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주의와 종교, 이 둘만으로 애팔래치아인들은 딕시 연합에 기꺼이 참여했다. 특히 딥사우스가 내건 내면적 복음주의 개신교는 사회의 간섭을 혐오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애팔래치아인들 성향에 잘 들어맞았고 남부 교단들이 내건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는 흑인 해방보단 연방의 존속을 지지해 북군편에 섰던 애팔래치아인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이후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은 딥사우스 복음주의 교단이 주장하는 창조론, 성서무오설 등을 깊이 믿게 되었고 반지성주의 분위기로 인해 지역은 기존보다 오히려 퇴화하였다. 스코프스 재판을 일으킨 버틀러 법이 테네시에서 제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딕시연합은 언제나 전쟁이 일어나면 상대가 누구든간에 이를 지지했고 특히 호전적인 분위기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이를 대표했다. 미서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애팔래치아인들은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연방군에 입대해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남북전쟁 후 재건시대의 안좋은 기억도 있고, 원래 폭압과 전제를 혐오하는 성향도 있어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 같이 명분없는 침략의 경우 딕시연합 내에서 가장 반대하는 의견을 내보이기도 해왔다.
현재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미국의 총기규제 논란이 일어날때마다 북부와 서부의 참견꾼에 맞서 규제에 가장 격렬히 저항하는 지역이고 복지정책이나 정부의 개입에도 가장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점점 블루스테이트화 되어가는 타이드워터와는 달리 이 지역들은 아직도 공화당을 굳건히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한편 이곳의 전사 문화는 앤드루 잭슨, 존 조지프 퍼싱, 더글러스 맥아더, 조지 패튼[14] 등 유명한 군인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어 미국의 군사 패권에 기여하고 있다. 부정적인 면으론 미국의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분위기를 이끄는 몸통이라는 점이 꼽힌다.
2.9.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레프트 코스트는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서 시작하여 오리건, 워싱턴주 해안가의 진보적 지역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까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 정체성은 식민지 시대가 아닌 서부개척시대에 기원을 둔다. 레프트 코스트의 초기 정착민들은 양키덤 출신이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모피 교역을 목적으로 오리건 지역에 처음으로 진출했고 거기서 엘 노르테와 뉴프랑스 가톨릭 세력의 영향이 차츰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부 연안에 '올바른 복음'을 전파한다는 사명을 띄고 오리건으로 선교사를 보내고 학교를 세우려 노력했다. 그렇게 오리건과 워싱턴주, 오리건에서 이주한 이들이 개척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의 초기 정치는 양키들이 주도했다.몬테레이 이남 남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양키들은 그곳에 이미 뿌리내린 엘 노르테 사회에 동화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스페인어를 익혔으나 히스패닉들이 거의 없던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정착한 이들은 활발하게 양키문화를 이식시켰다. 특히 골드러시로 무법자적 분위기가 북부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으려고 하자 이를 끔찍하게 여긴 청교도들은 이민자들을 교육시켜 '올바른' 신앙과 윤리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하지만 레프트 코스트 전역에서 양키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양키들의 이주와 비슷한 시기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과 이민자들이 동쪽에서 몰려왔고 아시아계 쿨리들도 바다를 건너와 서부에 자리를 잡으며 양키들은 지역에서 다수를 점유하는 데에 실패했다. 차별받는 유색인종을 제외한 각 이민자 정체성들은 레프트코스트에서 서로 경쟁하며 지역 내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웠고 양키들은 문화적 지배력을 확고히 유지하는 데에 실패했다. 골드 러시 등 자유 혹은 부를 찾아 이주해온 개척자들은 청교도 윤리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가톨릭계 이민자들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려 들었고 다른 이민자들도 획일적 종교관과 공동체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양키 도덕관을 싫어했다. 그 결과, 레프트 코스트는 양키덤과는 구분되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양키덤의 친정부 개입주의 성향, 진보적 성향, 이상주의 등이 레프트 코스트에 남아 큰 영향을 끼친다. 그 결과 레프트 코스트는 종교 윤리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운동과 복지를 지지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으로 변모했다. 히피 문화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었고 현재도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밴쿠버 등의 서해안 지역은 정치적 올바름과 생태주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 레프트 코스트는 탄생 이후로 줄곧 양키덤과 손을 잡고 북부 연합을 주도해왔으며 이웃하는 파 웨스트의 자유지상주의 성향, 엘 노르테의 순종적인 성향과 대립하고 있다.
2.10. 파 웨스트(The Far West)
서경 100도선을 기준으로 서쪽 지역은 서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강수량이 적고 토질도 척박해 농사를 짓기 힘든 지역이었다. 거기다 멕시코의 엘 노르테와의 접촉으로 기마술을 완벽히 익힌 원주민들은 정착촌을 귀신같이 찾아 약탈하며 백인들의 정착을 막았다. 자연히 서부개척민들도 파 웨스트를 넘어 레프트 코스트로 넘어가거나 외곽의 광산에만 몰렸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유타주의 모르몬교도 공동체를 제외하면 파 웨스트의 개척은 더뎠다.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철도, 광업시설, 댐과 같은 자본집약적 근대 기술이 동원된 이후였고 그렇기 때문에 파 웨스트의 개발은 타 지역의 자본 대기업들과 주권을 지닌 연방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자연히 이 지역은 대기업과 정부에 종속당했고 국가 발전과 자원 채취를 위한 내부 식민지로 착취당했다. 하지만 이곳의 척박한 환경에는 대안이 없었기에 지역 주민들은 정부와 대기업에 분노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골드 러시로 개발된 네바다 지역은 노천 금맥이 금방 고갈당하자 첨단 광업 기술이 필요해졌고 광산업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지역이 무너진다고 유권자들을 협박해 지역 정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이후 대기업들은 아예 정치인들을 돈으로 사버리며 공포 마케팅의 필요성도 잊어버린다. 곧 네바다는 뱅크 오브 캘리포니아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지배하게 된다. 몬태나주 지역의 경우 비슷한 방식으로 광업기업 아나콘다의 지배를 받았다.
이렇게 지역을 지배하게 된 대기업들은 세금 제도를 자기 입맛대로 바꾸고 노동력을 마음대로 착취하거나 환경을 파괴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파 웨스트 영토 상당부분을 국유지로 소유한 연방정부 또한 기업들의 지역 착취를 지원하는 포지션을 취해 반감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서부의 철도회사들은 연선 수익률을 높이고 땅을 팔아치우기 위해 허위 광고로 수용 가능 범위 이상의 이민자들을 유치하기도 했고 결국 정착민들과 지역의 환경은 큰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파 웨스트 지역민들은 전반적으로 지역의 생존권을 장악한 북부동맹과 정치적 의사를 같이하되 구좌파 노동운동을 지지하며 기업의 횡포에 저항했다. 이후 파웨스트는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격하게 환영했다. 실제로 뉴딜과 2차대전은 파웨스트에 대한 투자를 늘려 지역의 성장과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1960년대 본격적으로 북부 연합에 신좌파 분위기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기존의 계급투쟁 노동운동이 아닌 복지국가가 주 담론이 되자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너무 나간 주장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파웨스트 지역민들은 공화당 지지로 대거 이동했다. 이후 파 웨스트의 정치인들은 연방정부의 개입에 반대하면서도 지역을 개발하는 기업들의 이권을 대변하였고 친기업 자유지상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며 레프트 코스트의 진보주의자들과 대결하게 된다.
앨버타, 서스캐처원 등의 캐나다 내륙도 비슷한 자연 환경으로 석유 산업등에 의지하는 파웨스트 문화권에 속한다. 딕시연합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좌익적인 퀘벡 뉴프랑스 문화의 존재로 인해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분위기를 가진 캐나다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친기업적인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2.11.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
퍼스트 네이션[15] 또한 파 웨스트처럼 척박하고 정착이 힘든 지역이다. 하지만 퍼스트 네이션 지역은 파 웨스트와는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으로 북극권의 알래스카, 캐나다의 준주들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이 지역들은 원주민 차별 문제가 부각되고 본격적으로 대우를 높이게 되며 주목받기 시작해 마지막 정체성으로 불린다. 하지만 유럽계 이주민들이 오기 전부터 존재했던 첫번째 정체성이 옳지 않냐는 반론도 제기된다.퍼스트 네이션은 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등 공동체를 굉장히 중시하는 면모를 보이고 환경파괴를 혐오한다. 여성 권리가 높고 여성 상위 사회로 구성된 것도 퍼스트 네이션의 특징이다. 이들은 누나부트 준주 승격, 그린란드 독립 등으로 유럽인들의 식민 지배 이후 억눌렸던 자신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전통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조화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3. 비평
비평가 패트릭 리어든(Patrick T. Reardon)은 책의 초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힘이 떨어졌고 해당 구분이 21세기 초 미국의 정치문화적 지형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의구심을 표했다. 미국 흑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구분되지 않은 것, 미시간,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가 구분되지 않고 양키덤에 포함된 것 등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단 하나의 미국적 정체성을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4. 여담
2017년 번역출판된 한국판의 제목이 <분열하는 제국>이고 표지에 도널드 트럼프가 그려져 있는 등 트럼프로 인해 미국이 분열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지만 원서는 2012년 도서로 트럼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트럼프 당선 배경이 된 미국의 정체성 차이와 그들 사이의 다툼을 분석한 책에 가깝다.저자는 현재(저술 시점인 2012년)의 미국이 역사 속 제국들이 말기에 보이던 증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양키덤, 레프트코스트, 뉴네덜란드의 북부와 딥사우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의 남부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좌우 극한대립의 형식으로 피튀기는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며 미 연방 붕괴 가능성이 낮지는 않을거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인 타협과 공존의 가치를 무시하지 말고 무엇보다 여러 정체성들이 한 나라로 묶여있게 해준 미국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1] 영국계 이주민들이 6개의 정체성으로 갈라진 것은 개척 당시 여유가 없었던 영국 중앙 정부가 개척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후 국력을 추스르고 강대국이 된 영국은 식민지를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려 하나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길 원했던 식민지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에 성공했다.[2] 이 여파로 아카디아 식민지가 있던 캐나다 대서양 연안은 아직도 아카디아인이 많이 남아있는 뉴브런즈윅 북서부 퀘벡 접경지역을 제외하면 영어권 양키덤 문화 지역이 되었다.[3] 이후 스페인령 루이지애나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되찾아오지만 아이티 독립으로 유지가 어려워지자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치운다.[4] 버지니아 일대의 리아스식 해안과 일대의 강들이 조수간만(tide)의 영향을 깊게 받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남부 방언 중 하이 타이더 방언 사용 지역과 일치한다.[5] 저자는 뉴잉글랜드 방언 사용권 뿐만이 아니라 북부 방언 사용 지역까지 양키덤의 확장으로 정의내렸다.[6]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소재지이다.[7] 네덜란드를 본 청교도들은 네덜란드가 너무 방종하고 타락했다고 여겨 북미에 뉴잉글랜드를 개척하는 길을 택한다.[8] 블랙 벨트(Black belt)나 코튼 벨트(Cotton belt)라 일컫는 지역과 대강 일치한다. 딥 사우스라는 용어도 이 책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 언론이나 학계에서 사회문제를 논할 때 자주 사용된다.[9] 뉴프랑스 개척민 상당수는 노르망디 출신이었다.[10] 미들랜드 방언 사용 지역과 일치한다. 본서에서 미들랜드로 분류하는 펜실베이니아 역시 과거엔 미들랜드 방언권으로 분류되었고 독자적인 방언 지역(필라델피아 방언,서부 펜실베이니아 방언)으로 인정된 현재에도 미들랜드와의 친연성을 인정받는다.[11] 소위 어퍼 사우스(Upper south) 혹은 업랜드 사우스(Upland south)라 부르는 영역과 대강 일치한다.[12]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가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13] 위스키를 화폐로 이용하는 사회상이 위스키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14] 출신지는 캘리포니아지만 유서깊은 애팔래치아 스카치 아이리쉬 군사집안 출신이다.[15] 캐나다에서 인디언이나 네이티브 아메리칸 대신에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