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세기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배경과 그 원인을 분석, 탐구한 문서.2. 산업 혁명의 원인과 조건
산업 혁명이 갑작스럽게 촉발된 직접적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외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이나 학문 교류 없이 혁명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은 오직 영국 뿐이며, 이를 설명하려는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었다. 특히 "어째서 혁명이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대륙 유럽이 아닌)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또 18세기에 일어났는가?", "어째서 18세기 이후 유럽이 고도 발전하여 아시아를 앞서고, 또 세계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는가?"를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크게 두 가지의 이론이 정립되었다. 이것이 장기 고착(long-term lock-in)이론과 단기 우연(short-term accident) 이론이다.각 이론의 이름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장기 고착'과 '단기 우연'은 이안 모리스(Ian Morris),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등이 명명하였다.
2.1. 장기 고착 이론
장기 고착 이론의 뒤에 놓인 공통적인 관념은 태곳적부터 어떤 결정적 요인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대단히 크고 변경 불가능한 차이를 만들어 내 산업 혁명이 서양에서 일어나도록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최파일 역, 글항아리 2013.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최파일 역, 글항아리 2013.
장기 고착 이론은 "산업 혁명은 어떤 시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며, 서양의 경제 제도와 생산 양식이 산업 혁명을 낳을 만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고, 이들이 학문의 발전과 체계화에 힘입어 결과적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 견해이다. 이 이론은 산업 혁명은 예정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며, 전통적으로 산업 혁명의 원인은 물론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된 원인'의 해답으로 제기되어 왔다.
2.2. 단기 우연 이론
단기 우연 이론은 "산업 혁명은 인류 문명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영국이라는 절묘한 조건하에서 복수의 우연적 사건이 겹쳐 일어난 것이며, 당시 영국에서 이러한 '우연'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에 산업 혁명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단기 우연 이론은 장기 고착 이론보다 후대에 제시된 견해이며, 20세기 이후의 통섭 연구로 확장되었다.특히 이 이론은 산업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기술 혁신이 개별적 발명의 독창성과 실용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크림프턴과 뮬 방적기 등이 그러한데, 이들은 발명가 개인의 창조적 능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사용에 있어서도 당시 영국의 경제적 상황과 풍부한 석탄 매장 등의 조건이 아니었다면 실용성이 없어 도태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3. 배경
산업 혁명의 원인을 추정하는 양 이론에 따라,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꼽힌다.3.1. 사회적 배경
3.1.1. 정치적 안정과 근대적 정부 수립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로 이어지던 시절의 잉글랜드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독점권을 얻은 수도 없이 많은 집단이 자원의 고른 분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점권을 부여할 수 있는 왕실의 권한은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고 왕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주기 위해 사용되기 일수였다. 신규 참여자의 진입을 막고 시장 기능을 저해하는 이런 착취적인 독점 제도는 시장경제 발전에 큰 해를 끼쳤고 의회에 몸담은 귀족 계층에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혔다.독점이 얼마나 심했던지 1601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한 의원이 독점 품목을 낭독하자 다른 의원이 "거기에 빵은 없소?"라며 비꼬는 일이 있기도 했다.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당시 잉글랜드 인민의 삶을 다음처럼 서술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풍자했다.
누구나 독점 벽돌로 지은 집에 산다. 창문 역시 독점 유리로 만든다. 난방은 독점 무쇠로 만든 난로에 독점 석탄(아일랜드에서는 독점 땔감)을 태워 해결한다. 독점 비누로 몸을 씻고 독점 전분으로 옷에 풀을 먹인다. 독점 레이스, 독점 섬유, 독점 가죽, 독점 금실로 지은 옷을 입는다. 독점 혁대와 독점 단추, 독점 옷핀으로 옷을 여민다. 옷감 염색도 독점 염료로 한다. 독점 버터와 독점 포도, 독점 청어, 독점 연어, 독점 가재로 배를 채운다. 양념도 독점 소금, 독점 후추, 독점 식초를 사용한다. 글을 쓸 때도 독점 종이 위에 독점 펜을 사용한다. 독서를 할 때도(독점 촛불 아래 독점 안경을 쓰고) 독점 책을 읽는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 하에서는 산업 혁명의 맹아가 되는 기술적 혁신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윌리엄 리(William Lee)라는 성직자가 양말 짜는 편직기를 발명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양말 제조업자 길드와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의 특허 신청을 파기하면서 이 발명품이 얼마나 많은 실업자와 거지를 낳을 것인지 생각해보라며 되려 윌리엄 리를 꾸지람했다.
후임 군주들인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왕실이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처럼 절대적인 제도를 확립해 더 확실하게 경제를 틀어쥘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과 지방 엘리트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일찌감치 형성된 의회를 이용해 왕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의회는 1623년 '왕도 국내 무역을 통제할 수 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독점법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의회의 힘이 날로 강해지자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억누르려 했다. 왕실과 의회의 첨예한 갈등은 군사적 갈등으로 이어진 끝에 잉글랜드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 불리는 일련의 대사건으로 이어지고 명예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뒤, 잉글랜드의 정치는 매우 안정되었다. 의회활동과 투표권이 법적으로 보장됐고, 의회 동의 없이는 국왕도 세금을 물릴 수 없게 됐다. 즉, 명예혁명 이후엔 궁정이 아닌 의회가 경제제도를 결정하는 새로운 장이 되었다. 의회 귀족 중에는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의회는 확고한 사유재산권 집행과 더불어 경제제도 및 정부 정책을 잇따라 개혁해 궁극적으로 산업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결과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근대적인' 수준까지 환골탈태하게 된다. 예를 들면 소비세의 징세같은 부분이 그렇다. 소비세 제도는 대단히 정교한 장부 기록이 필요하기에 현대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가 있을 정도이니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 정부의 역량 강화는 정말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직전 정부인 스튜어트 왕조는 고작 징세청부업자에게 하청을 주거나 '아궁이세', '창문세' 등 손쉽게 평가 가능한 품목에나 세금을 매기는 등 중세스러운 행태를 보인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명예혁명 이후의 잉글랜드 정부는 전국에 소비세 조사원을 배치했고, 이들을 관장하는 징수 감독관은 빵과 맥주 등 소비세 부과 품목의 양을 측정하고 확인하는 정기 시찰에 나섰다. 세수가 늘어나자 정부는 국민소득의 10%에 달하는 공공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예산을 손에 넣게 되는데, 이는 콜롬비아가 1980년대에나 도달할 수 있는 규모였다.
금융 개혁 역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694년 업계에 자금줄이 되어줄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이 발족하면서 금융시장과 은행업이 크게 확대되는 '‘금융혁명'을 일으켰다. 18세기 초에 이르자 담보를 댈 수 있다면 누구나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702년에서 1724년까지 건재했던 런던 소재 C. 호어스 앤 컴퍼니(C. Hoare’s & Co.)라는 비교적 작은 은행의 기록만 살펴보아도 이런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귀족에게도 돈을 빌려주긴 했지만 존립 기간에 이 은행에서 가장 큰 규모로 대출을 받은 고객 셋 중 둘은 사회 엘리트층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인과 사업가가 많았다.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다른 서유럽 국가에도 기존과 다른 경제제도를 요구하는 새로운 상인과 사업가 계층은 존재했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무역과 이윤을 통제하는 국왕의 권한이 한층 강했으며, 잉글랜드에 비해 대단히 수가 적었고 힘도 미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 본토는 당장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란 다른 의미의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3.1.2. 자유롭고 포용적인 제도적 풍토
산업 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제도 덕분이었다. 포용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가 소득과 부 그리고 정치권력을 재분배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기술 혁신을 촉진시킨다. 창조적 파괴를 허용하지 않는 비포용적 경제 제도가 어떻게 기술 발전을 저해하는지는 독일의 일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의 수학교수였던 디오니시우스 파팽(Dionysius Papin)은 1705년 세계 최초의 증기선을 만들었고 풀다 강에서 베저 강까지 배를 운행하려 했다. 당시 풀다와 베저 강의 운항은 뱃사공 길드의 독점사업이었기에, 그는 말썽을 예방하기 위해서 친구이자 스승인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를 통해 카셀 선제후에게 파팽이 "방해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어야"한다고 청원서를 먼저 제출했지만 기각당했다.파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운항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의 증기선이 뮌덴에 도착하자 뱃사공 길드는 먼저 현지 판사에게 배를 압류해달라고 성화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뱃사공들은 파팽의 배에 올라가 난동을 부렸고 증기기관을 산산조각 냈다. 파팽은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혔다. 만약 파팽이 명예혁명 이후의 잉글랜드에 살았다면 사정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팽은 배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증기선을 타고 런던으로 항해하려던 참이었다.
반면 잉글랜드의 신흥 공장주와 중산층은 파뱅처럼 높으신 분들의 선처만을 기다리지 않고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했다. 정부는 1819년에 '곡물법 폐지', '보통 선거권', '투표용지 사용' 등의 현수막을 든 6만명의 노동자를 탄압해 사상자를 내는 일도 벌였지만(피털루 학살), 이미 정치와 경제 제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터라 잉글랜드에서 장기적인 탄압은 해법이 될 수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의 정치제도는 압력에 굴복하여 1차 선거법 개정안을 받아들이게 되며, 집중적인 증오를 사던 곡물법도 결국 1846년 폐지하면서 창조적 파괴가 단순히 소득만이 아닌 정치권력마저 재분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반면에 거의 동시대인 1830년,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무너진 절대왕정을 복고하려다 또다시 나라를 7월 혁명 혁명에 휘말리게 하는 등 정치적 상황이 안정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렇든 타국과 다른 잉글랜드의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다원주의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사유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준 것도 명예혁명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국민들은 이제 의회는 물론 의회가 만든 정책과 경제제도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가장 효과적으로 입김을 행사하는 방법은 '청원'을 통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의회와 정치제도는 투표권의 제한과 부패 선거구의 존재 등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투표보다는 청원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투표와 달리 청원은 누구든지 의회에 제기할 수 있었기에 실제로 청원자가 밀려들었다. 인민이 청원하면 의회가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1688년 이후 잉글랜드에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대단히 폭넓은 사회계층까지 권한이 확대되었으며, 다원주의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증거일 것이다. 이처럼 대단히 치열했던 청원 활동만 봐도 단순히 의원들이나 그들이 대변하는 이들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폭넓은 사회집단이 정부의 운영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고 해서 어디서나 무조건 다원적인 정치 체계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며, 세계적으로는 다른 형태의 착취적 제도가 재수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 다원적인 정치 체계가 태동하는데 필요한 여러 차례의 고비를 영국만이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산업 혁명의 요인들와 마찬가지로) 영국만의 특수성과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스튜어드 왕조의 군주제를 지지하는 세력과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에서 힘의 균형을 흔들어놓은 요인을 꼽자면 농업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하급 귀족 계층인 젠트리의 등장,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따른 무역 기회의 확대, 해외무역 및 식민지 경제 발달 과정에서 잉글랜드 신흥 상인 세력의 대규모 참여, 그에 따른 막대한 부의 축적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영국만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다. 이러한 연합세력의 범위가 넓고 성격이 다양했기에 다원주의적 정치제도가 태동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원주의가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나머지를 물리치고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1.3. 재산법의 발달
개인의 권리 인정과 보호, 주식과 채권 등 금융업의 발달, 자연과학의 학문으로서의 독립(과학혁명)과 체계화, 특허권 같은 지적 재산권 인정 등 사상의 발전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데, 아시아는 이 점이 매우 미비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유럽은 중세부터 도시 및 농촌이 자치적으로 재판관을 뽑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리[2]가 마련되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 규모는 잘해야 10만을 좀 넘어서 동시대 중국, 아랍의 대도시보다 작아보이지만,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시의 규모가 거대해진 타 문명과 달리 유럽의 도시는 상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규모는 작아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이런 자치도시들은 상업적 이유로 설립되었다보니 상업적 권리의 충돌에 관한 판결이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공증과 회사, 길드 등 경제적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와 조직이 특히 발전했다.
동아시아의 중국 관료제와 비교하면, 동아시아는 개인과 개인간의 충돌을 다루는 민법의 발전 자체가 매우 미약했다. 더 정확히는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만 극히 발전해있고,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는 재판도 거의 형사 재판이었다. 유럽에서는 10세기부터 발달한 공증제도 조차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업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 하위 관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중앙에서 달랑 하나 파견한 관료가 혼자서 사법,행정,군사를 전부 도맡아하다보니[3] 만성적으로 업무가 지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청조에는 앙쯔강 하류에 상업 발전으로 자체적으로 발달한 중소도시가 무수히 들어섰으나, 행정구역으로 새로 개편하지 않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관료 파견조차 안 되는 경우[4]가 허다했다. 또한 유교 특유의 상업 멸시 때문에, 중국 명청 시대에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큰 재산을 가져 관료와 결탁한게 아닌 이상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일례로 대운하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물건을 빼돌리거나 사기를 치거나 태업하는 등 잦은 문제를 일으켜도 관료들은 아무 대응조차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권력의 견제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유럽에서조차,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파토가 나거나 상인들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는 징세청부업자에게 온 나라의 수조권을 맡겼다가 왕이 파산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왕이 돈을 떼먹어서 은행이 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업 자본 발전에 핵심적인 신용이 발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의회의 견제로 인해 왕이 징세권을 남발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오라녜 공작이 간섭할 수 없는 은행이 설립되었다. 영국 의회는 조세 법정 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네덜란드 은행은 네덜란드를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특허 제도는 산업 혁명 뿐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일찍이 유럽과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전근대에는 혁신이나 발명이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여겨졌지 개인의 성과로 여겨지지 않아, 혁신과 발명에 대해서 개인의 이윤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혁신을 일으킨 개인이 나타났다면 타인보다 앞서기 위해 그 혁신을 비밀로 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면 도제식으로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던가. 레벤후크의 현미경, 갈릴레이의 망원경, 티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자료 등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아 유실될뻔했다. 이렇게 기술 중 많은 것이 기술의 개발자가 비결을 죽을때까지 숨기는 바람에 유실되었는데, 영국은 특허 제도 덕분에 발명가들이 자신의 이득을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 비법을 국가를 통해 공개했고 많은 기술이 보전될 수 있었다. 특히 국가를 통해 공개한 것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원본이 보전될 수 있단 점에서 자연적인 전파 이상으로 혁신에 기여했다.
다만, 실제로는 특허 제도는 '발명가의 이윤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상을 별로 잘 실현하지는 못했다. 상기했듯 사람들이 특허를 어떻게든 우회하거나 표절하고, 심지어 새 발명품 때문에 자기들이 망했다고 발명가를 습격해서 발명가가 쫄딱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5] 어쨌건 발명가들에겐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줬고 그 덕에 기술이 유실되지 않고 공개된 것은 사회 전체의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그 외에도 초기 산혁 시대는 전화기 같이 역사적인 발명을 하고도 그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사례가 여럿 발생했다. 반대로 토머스 에디슨은 남의 발명 특허를 온갖 꼼수를 써서 뺏는데에 이골이 난 사업가였다.
그러나 발명가의 권리가 보호받는 느낌이 전부는 절대 아니었다. 맥심 기관총을 만든 맥심은 돈방석에 앉았고,[6] 심지어 미국이 스프링필드 M1903과 .30-06 스프링필드 탄을 적국인 독일의 게베어 1898과 7.92×57mm 마우저 탄의 스핏저형 총알[7]을 만들면서 배꼈다고 전후 특허료를 보상하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특허자료를 통해 현대시대까지 발명가의 이름이 정확히 남아있는 등 특허법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전화기의 케이스도 발명가가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을지언정 누가 언제 어떻게 발명을 했는지 정확히 재구할 수 있는 것은 특허 제도의 공로며, 1차 산업 혁명을 이끈 것은 과학자 보다 발명가들이라는 것이 현재의 평가이다.
특허 성문법 제정 년도를 보면 왕권 몰락 및 개인 인권(소유권) 보장의 변화를 볼 수 있다.[8]
- 1624 영국 전매조례
- 1790 미국 특허법 제정 (83미국독립, 87헌법제정)
- 1791 프랑스 왕국 특허법 (프랑스 혁명 91헌법,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1877 독일 제국 특허법 (제국 초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입헌군주제)
- 1883 파리조약 체결 (국가간 특허 우선권 인정)
- 1756 영국산업박람회
- 1798 프랑스 국영 산업박람회 (엑스포)
- 1851 런던엑스포 (수정궁)
- 1937 파리 엑스포 (에펠탑)
3.2. 경제적 배경
3.2.1.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
대항해시대 중반인 17세기 무렵부터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 진출과 동인도 회사 설립을 통한 인도, 동남아, 청나라 등 아시아와의 동방무역 활성화를 통해 착실히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18세기가 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식민지 개척과 제국 운영도 어느정도 안정권에 들어섰는데, 당시 영국이 밀고 있던 산업은 모직 산업이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특성을 갖춘 직물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었고, 무역에도 적합해 넓은 잠재 시장[9]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시작되려니까 인도에서 수출하는 저렴한 캘리코(Calico) 면직물이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이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시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쓰기 편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갔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수 등을 통해 들어온 캘리코의 인기는 높았다. 즉, 일단 면직물 시장이라는 시장이 생기니, 수요를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영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면직물 산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원면을 마구 거둬들였고, 가격이 저렴해진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여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 발달도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또, 영국은 당시 이미 산업화의 포텐이 터질 만한 큰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곧 산업화라는 새로운 기조에 대해 흥미로워하던 사업가들이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그 성장의 수요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커지게 되었다.[10]
영국의 해외 식민지는 원료 공급처 뿐 아니라 상품 시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최소한의 채산성을 맞추어 산업 혁명이 발생하는데 성공하면 그 뒤로는 자유시장적 경쟁으로 인해 생산지 주민들이 다 소비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으로 상품 생산량이 증가하는 공급 오버슈팅이 발생한다. 만약 이 타이밍에 생산량을 모두 받아내 줄 추가적인 시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수요가 공급을 따라 잡지 못하는 제품 가격이 폭락하고 시장이 와해될지도 모른다.[11] 영국은 폭발적으로 생산되는 상품을 대영제국의 식민지들을 포함해서 물길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대량으로 팔아 치우면서 해결했다. 따라서 영국의 해외 식민지들은 산업 혁명 이전에는 식량과 상품을 해외에서 수탈하는 원료 공급처였다가, 나중에는 영국에서 만든 상품을 강매하는 판매 시장으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3.2.2. 농업 혁명과 인클로저 운동
16세기부터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에서 중세시대의 농경법인 삼포제를 대체하는 4윤작법이 개발된다. 밭을 3분해서 3년마다 한 번씩 밭을 묵히는 삼포제와 달리 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으로, 클로버와 순무가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사료로 사용되어 밭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없는 삼포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농법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찰스 타운센드 자작[12]이 노퍽 지방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보급되며, 이 농업은 노퍽 농업이라고 불리게 된다.당시의 영국은 이렇게 급격한 농업생산력의 증가에 힘입어 인구가 1700년~1800년 사이에 550만에서 900만으로 증가했다. 1830년 기준 브리튼섬의 곡물 생산량은 당시 인구의 2배가 소비할 분량에 해당했으며, 급속한 도시화로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8세기 중반에는 곡물 생산량이 너무 늘어서 곡물가가 떨어지자 지주들이 곡물을 진을 생산하는데 투입하는 바람에 알코올 중독자가 급증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윤작을 통해 연속경작이 가능하자, 농민들은 밭을 묵혀둘 동안 생계를 위해서 영주의 땅에서 부역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경작지에서 독립적으로 농사짓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는 장원 제도의 최종적인 붕괴를 가져왔다. 한편 대경작지를 가진 지주는 그 넓은 땅을 지주 본인이 직접 경영할 수 없게 되어 경영 전문가인 차지농에게 임대해주는 소작제도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래저래 자기 토지를 가지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므로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장원제 시절에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쓰는 들이나 숲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토지로 두었는데, 이런 땅들에 대해서 냉정하게 소유권을 확립하여 사유재산화 하는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었다. 분할된 공유지는 모직을 만들기 위해 목축지로 전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농경지로 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공유지의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나자 식량생산량이 증가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농민층은 농업 혁명 초기에는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균일화되었으나, 경작지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선택적 육종이다. 영국은 18세기에 이미 농업경진대회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전국 각지의 농업인들이 경쟁적으로 우량 품종을 내놓았는데, 그 경쟁의 결과로 1700년에 평균 무게 170kg 이던 식육용 황소가 1786년에는 386kg으로 증가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닭, 양 등도 육종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아는 유명 품종 가축 중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 영국이 가진 막대한 해외 시장 덕에 해외에서 다양한 품종의 가축을 수입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형질을 들여와 실험할 수 있었던 것에 힘입은 것이었다.
경쟁의 승자로서 자본주의적 차지농인 부농이 대두되고, 많은 수의 영세농민들이 이 부농과의 시장경쟁에서 밀려나 농작을 포기하고 농촌의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생겨났고, 이들은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농촌의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등 농촌 지역의 직업분화를 촉진했다. 종전에는 카를 마르크스 이래로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촌 지역의 인구가 도시로 쫓겨나는 이농 현상이 일어나 임노동자로 일하면서 도시에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했으며, 그 농민들은 도시의 발전을 이끌고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식의 도식과 설명이 주류였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그런 도식이 부정된다.[13][14]
농업생산성의 증가로 또 이득을 본 계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농촌 지주 계층인 요먼과 젠트리 계층이다. 수완 좋은 몇몇 요먼들은 상품작물 재배 등으로 경영형 부농이 되어 젠트리로 승격하거나, 교육을 받아 군 장교, 고위성직자, 학자 등으로 출세하여 상류사회의 중심과 정계로 나아가며, 개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처럼 영국의 1인자 자리에까지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젠트리 계층도 빈농으로 떨어진 농민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의회에 진출했고, 마치 귀족같은 생활을 영위하며 사회의 지배층 세력으로 발돋움한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의 권한이 왕권보다 강력한 입헌군주정 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높아져만 갔다.
인클로저 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영국의 산업 혁명에 기여한 것으로 현대에 재평가된다. 토지의 사유재산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이 스페인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게 만들었다. 스페인령 식민지는 법적으로는 온 아메리카가 왕의 소유였고, 현지에서는 왕에게 권한을 부여받은 대지주 위주의 경제가 구성되었지만,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 위주의 경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13주 식민지민들이 자신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과 참정권에 대한 의식을 뚜렷히 가지게한 원인이기도 하다.
3.2.3. 경제주체의 유인 확보
산업 혁명의 지지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시기 영국에서는 각 경제 주체들이 산업 혁명에 참여하고 이를 지지하게 할 만한 유인(incentive)이 꾸준히 공급되었다는 것을 든다.중국은 14세기 왕정농서에 이미 축력,수력으로 돌아가는 방적기가 있다. 또 북송 때 이미 35,000톤의 원광과 42,000톤의 석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산업 혁명기의 영국과 비등한 수준이다.[15] 심지어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많은 영국산 기계제 면포가 들어왔으나 중국에서 손수 생산된 토포에 밀렸다. 당시 청나라 시대 농촌은 과잉인구 때문에 농업뿐 아니라 가내수공업도 겸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면직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영국산 기계제 면포를 압도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면포 생산량이 6억 필 정도. 그리고 영국이 이 물량을 따라잡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 이렇게 중국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일반적인 설명은 중국은 인력 공급이 너무 많아서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동인이 없었다는 것이 보통. 막말로 사람을 쓰는 게 비용이 더 싸서 기계를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럽 지역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는데, 특히 영국은 서유럽 지방에서 두 번째로 도시 임노동자 임금이 비쌌던 프랑스 북부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나 임금이 높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비교하면 런던의 임노동자 임금은 4배에 달했다. 영국이 전세계 곳곳에 만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으로 수많은 인구를 징집해갔다보니 인구 유출이 심했기 때문. 그래서 위에 서술했듯 광산의 물을 퍼내는 펌프가 적자가 날 지경으로 비싸도 임노동비보다 싸다는 이유로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그것은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량된다.
또한 중국의 막대한 면포 생산량은 그냥 단순히 중국의 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자급자족 하는 양도 많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데, 농가의 아낙네들이 식구들에게 입힐 면포를 길쌈하여 1년에 1~2필씩 생산한다 치면, 인구 1천만이면 1천만필의 면포가 생산되고 4억명이면 4억필의 면포가 생산되는 단지 그뿐인 것이다. 이럴 경우 당연히 실질적인 부국강병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는, 외부에 투사할 수 있는 '잉여 생산물'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데 산업혁명 없는 전근대적 가내수공업으로는 당연히 근대적인 소비시장을 열지 못한다. 지금까지 중국의 막대한 면포 생산량은 "중국은 인력이 남아돌아 산업혁명의 필요성이 적었다"라는 논리를 뒷받침 해왔는데, 실제로는 생산량의 대다수는 단순 자급자족, 최소한의 의식주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중국은 역사 내내 어떻게든 1인당 노동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지만 몇몇 고점의 시대에 생산성이 높아져도 그 시기를 제외하면 이게 다시 도루묵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도시 생산물과 농업 생산물의 상대 가치를 통한 설명도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을 설명한 도식 이래로,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농업 생산물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한다 → 잉여 인구는 도시로 몰려 도시의 공업 생산물이 증가한다 → 반복>의 과정을 거쳐 국가의 경제력이 증가하고 산업 혁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명/청대 중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마르크스 말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됐다. 증가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 도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존재했으나, 도시 노동자 수가 많아지면 임금이 내려가고 공업 생산물이 많아져 공업 생산물 가치는 내려가는 반면, 농업 생산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가 다시 해체되고 경제가 침체된다. 중국사에서 정권이 붕괴될 때 반란을 주도하는 민중들은 저런 과정에서 생긴 잉여인력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덤으로, 마르크스가 위 도식을 설명할 때 예로 든 인클로저 운동도 실제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하진 못했다는 것도 최근의 중론이다. 즉 멜서스 트랩은 생각 이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인 것이다. 이 역시 인구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설명이 된다.
이 인구론적 문제는 서구가 천연자원 및 식량 자원을 수입해올 막대한 해외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아메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막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던지라 공업 생산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과정이나, 식량가가 상대적으로 폭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도식화하면, 중국과 달리 영국은 면포를 비싸게 쳐주는 먼 곳,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팔 수 있었고, 식량 역시 싸게 사올 수 있었는데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러한 밑작업을 통해 산업 혁명 이전에 이미 프랑스 북부의 2배, 서유럽 평균의 6배가 넘는 1인당 소득 수준을 이루어냈다. 영국에서만 산업 혁명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을 보면, 다른 유럽 국가들은 산업 혁명을 맞이하기 위한 소득의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이미 달성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정작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 상술한 막대한 석탄 매장량과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영국만의 '우연적' 요인이 공장의 운영 비용을 낮추어 산업 혁명을 촉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16]
3.3. 자연적 배경
3.3.1. 풍부한 석탄 자원
영국에는 풍부한 노천 탄광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쉽게 석탄 채굴이 가능한 환경은 산업 혁명에 있어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다. 대부분의 공업도시는 풍부한 석탄 광산의 주변에 세워졌고, 1830년대에는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이동 속도도 한층 가속화되었다.다만 당시의 석탄이 목재보다 선호되는 연료였다는 것은 오해이다. 석탄은 발열량만큼은 우수하지만, 불완전연소 때문에 가스도 많이 생기고, 먼지가 묻고, 제련에 사용할 경우 황이 섞여 들어가 황화철이 포함된 질이 떨어지는 철이 만들어지는지라 가치가 떨어지는 자원이었다. 게다가 석탄은 나무와 달리 채굴을 해야 하므로 광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벌목보다 고비용의 작업이었다. 한술 더 떠서 브리튼 섬의 지질적 특성상 갱도에 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다보니 석탄을 계속 캐려면 그 물까지 퍼낼 방법이 필요했다.
한동안 석탄은 산지를 제외하면 런던에서나 쓰던 것인데, 영국이 해양제국 유지를 위해 수없이 배를 만들면서 국내의 목재를 싸그리 다 닦아 쓰고 노르웨이산 목재까지 수입해서 써야할 지경이 되자, 별 수 없이 석탄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갱도에 고인 물을 퍼낼 절박한 필요성이 생기자 비로소 증기기관이 발명되었고, 석탄의 불순물을 제거해야 할 문제가 생기자 코크스가 발명된 것으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 좋다.
3.3.2. 영국의 지리적 이점
영국이 섬나라인데다가 운하도 많이 건설되어 어디에서나 바다에 접근하기가 쉬웠다는 점도 다른 나라와 비교되는 장점이었다. 영국은 그다지 크지 않은 본토에서 강과 수로를 십분 활용하여 원자재를 도시까지 손쉽게 운송하고 완제품을 국내외 시장으로 훨씬 쉽게 내보낼 수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스페인은 국토의 크기가 모두 브리튼 섬의 두 배나 되었으며, 모양도 정방형이라 영국에는 없는 깊은 내륙지방이 존재했다.[1] 이는 잉글랜드 스스로도 예외가 아니라서 마그나 카르타와 같은 확약을 얻어내고도 그 후로도 몇백년간 절대왕정을 겪어야만 했다.[2] 흔히 도시들만 그런 특권이 부여된 것처럼 말해지지만, 이런 '자유도시' 즉 Burgo Franco 에서 Burgo 는 원래 고대 게르만어로는 읍락이라는 뜻이며, 성벽을 두르지 않고 수백 명 정도가 사는 규모의 작은 마을들도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14세기까지도 90% 이상의 자유도시가 인구 1천조차 넘지 못했다.[3] 정말 혼자 한 건 아니고, 보통 수백~수천의 아전들이 있었으나 아전은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이 아니었다. 관료들은 중앙에서 내리는 박봉과 자체적으로 거둔 세금으로 아전들의 급료를 어떻게든 줘야했기 때문에 부패의 원인이 됐다.[4] 이런 상업 중소도시를 '진'이라고 하는데, 지방관료들은 진의 행정을 지방 유력 지식층인 신사에게 대강 일임했고 중앙에서 파견한 환관이 상세를 거두는 식의 느슨한 행정만 이뤄졌다. 치안의 공백이 커 일종의 마피아인 무뢰들이 장악한 경우가 허다해 사회 문제가 되었다.[5] 항목 내에서 언급된 발명가들 외에도, 퍼커션 캡과 같은 사례를 보면, 특허를 보장해야 할 국가에서 특허료 아끼겠다고 만료될 때까지 존버를 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6] 맥심 기관총의 탄띠 특허를 우회하기 위해 보탄판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7] 스핏저형 총알 자체는 프랑스에서 8×50mmR 르벨 탄에 적용한 것이 최초다.[8] 재미있는 것은 지적저작권의 시초가 왕권에 의한 미술작품 표절금지 였다는 점이다.[9] 라틴 아메리카 및 인도 등의 영국 식민지.[10] 이 당시에 영국은 명예혁명 이래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넓은 해외시장을 확보했고, 천연자원도 풍부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풍부한 노동력이 확보되었었다.[11] 참고로 20세기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현상이다.[12] 순무 재배를 너무 열심히 권장한 나머지 '순무 타운센드'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13] 이런 이농 현상은 정작 영국이 아닌 한국과 일본 등 후발 산업국가에서 두드러졌다.[14] 인구자료를 살펴보니 실제로 인구이동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주로 도시출신이나 도시에 인접한 지역출신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송병건,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해남, 2008 에서 소개하고 있다.[15]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그 양을 어떻게 썼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기 영국은 증기기관이라는 혁신적인 동력원의 연료로 사용한 반면, 북송의 석탄은 땔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참고로 한반도도 신라 시대에 석탄을 연료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양적으로 봐도 사실 영국이 앞선다. 상술했지만 영국의 제철산업이 산업화의 궤도에 든 것은 18세기 말로, 영국이 중국과 비슷한 제철 기술(도가니법, 반사로법)을 개발하여 산업화 궤도에 들기 시작한 1810년 영국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25만톤으로 추정된다. 즉 35,000톤 가지고 영국이랑 비교한건 제대로 산업화 되기 이전 영국의 생산량에 비교한 것이다.[16] 역사학에서의 우연이란 (우리 일상언어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는 개연에 가깝다. 즉, 구조적 원인 속에서 언제든 일어날만한 상황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언급되는 "알프스에서의 실족사" 예시를 참고하는 것을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