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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

장마당 세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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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청진시수남시장[1]

1. 개요2. 명칭3. 기능4. 특징
4.1. 거래품의 주요 생산지
5. 역사
5.1. 1990년대 고난의 행군과 장마당의 활성화5.2. 2010년대5.3. 2020년대 코로나19와 장마당의 위기
6. 장마당 세대7. 영향8. 관련 문서9.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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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에서 북한에 있는 시장 중 민간에 의하여 운영되는 민영 시장을 총칭하는 말이다.

2. 명칭

장마당이란 단어는 북한에서는 실제로 쓰이지 않는다.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되는 바람에[2] 이북지역이 완전히 공산화되어 삼팔선[3] 북부의 지역에서 기존의 관습과 제도가 망가지기 전에는 북한 지역도 겨례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간에 의하여 형성된 민간 시장이라는 장소/시설이 존재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시장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으며 공산화가 완료되어 배급제가 표준이 된 후에도 국영 시장[4]이나 농민 시장[5]이 존재했으므로 시장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일이 없었다. 오히려 북한에서도 시장보다 장마당이 생소한 표현이다. 북한에서도 물건을 재화를 주고 사는 곳을 상점이라고 부르고 상점들이 모인 곳을 시장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주성하 기자의 말에 따르면 장마당이란 단어도 북한 사람들에게도 구전으로만 알음알음 통용되는 말로만 남아있고 실제 북한 내의 도, 시, 군에서는 시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다.

단지 북한의 시장이 대한민국 사회에 알려질 당시 북한에 시장이 없을 것이란 편견을 기반으로 시장이란 단어 외에 시장의 역할을 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를 찾다가 남한 언론에 의하여 북한인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장마당이라고 처음 소개한 뒤에 남한에서 북한의 시장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6] 그래서 한국에선 장마당이라는 명칭이 북한에서 실제로 쓰이는 단어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3. 기능

북한의 배급제를 대체해서 나온 제도다. 배급제가 제대로 돌아갔을 시기에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처럼 물건 교환소나 다름없는 '국영 상점'에서 교환권이나 국내 통용 화폐[7]로 필요한 물건을 입수하거나 대여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민간 시장은 형성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으나 로동당 정부가 북한 경제 3대 실책[8]으로 경제를 말아먹고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의 몰락으로 공산주의 특유의 상호호혜적 교역이 사라짐으로 인한 원자재 수입차단[9] 등으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적 비극이 시작되자 북한 주민들의 목숨줄이었던 배급제가 붕괴되었고, 이 와중에 배급제에서 오는 통제의 권력을 잊지 못하여 다른 방안을 모르고 살던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일이 경제에서 손을 못 쓰는 바람에 북한 국민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 사라져가던 구시대의 농민시장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낸 것이 현재 장마당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민간 시장이다.

장마당은 북한의 자본가돈주를 키워내는 등 북한의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북한 정부에서는 국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틈만 나면 장마당을 폐쇄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으나 장마당의 유일한 대체제가 될 수 있는 배급제를 부활시킬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폐쇄를 시도할 때마다 큰 반대에 부딛혀서 폐쇄하지 못했다.

이 덕분에 돈주를 북한의 3대 권력세력 중 하나로 만들어 돈주, 군부, 로동당 3각 체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한 때 북한의 개혁개방의 기회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전대에 비하여 돈주와 장마당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김정은코로나 사태를 빌미로 국경 봉쇄장마당 탄압을 시작하여 북한의 걸음마 단계였던 초기적 자본주의는 거의 사라졌다. 북한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군수품을 수출한 덕에 넉넉한 외화를 확보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기반으로 다시 배급제를 시도하려는지 고의적으로 밀수를 차단하고 장마당을 폐쇄하려고 하고 있다. 2020년부터 3년간 돈주의 70% 이상이 몰락했다고 하며 2023년에는 상당수의 장마당에서 곡물거래가 중단되었다. 시장 자체를 체제의 최악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만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일도 현실화하려고 한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북한 당국이 원하는 자원 독점을 위해서는 몇 가지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이미 시장 활동 제한과 국가 통제 강화는 주민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서 정부에 대한 충성심에 손상이 갔다. 타국가와 달리 수요와 공급의 신호를 무시한 계획경제고난의 행군 직전까지 누적된 것과 같은 패턴의 자원 낭비와 경제 침체로 귀결되어 외부와의 격차를 더 벌릴 수가 있다. 어떤 물건을 당에서 싸게 내놓을 때마다 늘 그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문제가 생긴다. 굉장히 완벽한 통제를 하더라도 반대급부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어 무언가를 못 만들어내는 상황[10]에서 경제적 수준의 격차가 커지는 터라 외부에 대한 동경에 대한 여지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특수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것도 전쟁이 영원하지 못하여 미지수이고 가상화폐 해킹도 북한 외부의 대처 압력이 더 커지고 있다. 내각이 워낙 비효율적이라 2023년 하반기에도 건설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주와 결탁하는 일이 벌어졌다. #

주성하가 2018년에 쓴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에 따르면 2018년 2월 기준으로 북한에는 공인된 종합 시장만 480여 개에 이르며 이외에도 골목시장, 야시장 등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생활 수요의 80~90%를 해결하고 있으며 장마당을 위시하여 다양한 거래 공간에 종사하는 주민은 100만 명(북한 주민의 약 5%)을 넘고 장마당 관련 종사자와 그 가족을 포함하면 북한 주민의 1/3 이상이 수입의 2/3 이상을 장마당에서 얻는다.

4. 특징

고난의 행군이 북한 체제 특유의 강력한 관료제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물품의 생산 및 분배체계를 완벽하게 망가뜨렸을 때 국가와 인민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준 재난이라면 장마당은 공산주의 국가가 조성한 인위적인 생산 및 분배체계를 국가/사회가 완벽히 상실했을 때 인민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여준 사건이다. 즉, 인간은 국가라는 초월적 권력집단이 없는 자연상태에서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시장을 설립하고 운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국가라면 상행위의 규모가 커져 시장이 생기면 쌍수들고 환영하지만 북한의 장마당은 제도권으로 어느 정도 편입되기 전까지 정부의 탄압을 받아 왔다는 특징이 있으며 지금도 북한 정부는 조금이라도 기회를 잡으면 장마당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단지 배급제 부활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해 왔냐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시장이라는 것이 배급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북한이 자신들의 전성기에 세금을 폐지해서 시장이 있어도 재정 확보에 아무짝에 쓸모없기 때문이다.[11]

이렇게 북한 정부의 재정에는 아무짝에 쓸모없으면서 고난의 행군에 의하여 인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부의 입김을 받지 않았고, 북한사람들의 북한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을 뿐만이 아니라 밀수한 외국의 제품과 그로 인하여 들어오는 외국 문물이 북한 내부에 유통되는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 정권 내내 탄압[12]받다가 선군정치로 사실상 경제를 포기한 상황에서 배급제로의 회귀가 어려운 상태가 되자 김정일 정권 말에 제도권으로 차츰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정일 정권의 말기부터 장마당이 조금씩 늘어났고 2018년까지 북한 정권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장마당의 개수는 436개에 달했다. 여기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장마당들을 합하면 실제 시장의 수는 이것보다 많을 것이다.[13] 이렇게 늘어난 장마당은 1990년대 이후 북한 경제를 견인하고 있으며 사실상 북한인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 제도권에 편입시키기 시작한 후 세금을 공식적으로 부활시키지는 않았지만 임대료 같은 것을 걷는 방식으로 돈을 걷어서 북한의 재정을 채우는 것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북한의 시장인 장마당은 돈은 중앙에서 걷어가지만 각 장마당의 운영은 지방정부가 만든 규칙에 따라 운영된다. 보통 장마당의 개장시간은 14시이며 폐장은 18시에서 19시 무렵이다. 추수철에는 이용시간이 짧아지는데 북한의 농업이 기계화가 잘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 특유의 자원부족으로 기계유지비를 낼 수 없어서 수작업을 할 대규모 노동력(인력)을 사용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적인 장마당외에 노점도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돈이 오가 만큼 큰 이권이 오가는 곳이고, 북한이란 나라 자체가 매우 부패했기 때문에 북한의 부정부패 문제에서도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영세상인부터 돈주들 혹은 말단관료부터 최고위급 인사들까지 장마당 부패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당에도 당국의 이런저런 통제가 가해질때가 있는데 이때 뇌물을 주고 단속을 피한다거나 하는 일은 특별한 일도 아니며 돈이 많은 돈주들이 죄를 저지른다해도 살인이나 사기 같은 수준의 중범죄가 아니라면 돈을 관료에게 주고 빠져나온다거나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조선로동당도 돈만 있으면 우상화사업에 자금을 쾌척하는 식으로 입당이 쉬워졌고 적대계급잔여분자라고 해도 돈주라면 이전보다 평양에 주거하기 쉬워졌을 정도다. 하지만 과거에 있던 '병아리도 평양(피양) 가고 싶어서 피양피양 운다'는 말과는 달리 현재는 귀찮아서 평양을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늘었는데 관광객이나 외국 정상 등 보는 눈이 많은 평양의 특성상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말버릇 등을 엄격하게 단속하기 때문에 그런 거 없는 지방에서 사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마당에서 주로 통용되는 화폐는 주로 중국 위안이다. 중국은 북한의 제1 교역국이기에 중국 위안화가 가장 많이 유통되기 때문이다. 유로미국 달러의 인기도 높지만 화폐가치가 높기 때문에 일상적인 물품 구매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경제력이 높은 평양 내 장마당에 한정되어 사용된다. 북한 원은 사용할 수는 있긴 하지만 외화상점에서 잘 안 받고 국제무역에서도 쓸 수 없어 상인들도 선호하지 않는다.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으로 인해 화폐 발행 주체인 북한 정권의 신뢰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이다. 이전에는 북한 원도 거래에 잘 쓰였으나 화폐개혁 이후 재산을 북한 원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쫄딱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 원은 고작해야 소액 구매나 거스름돈으로 주로 쓰이는 정도이다.

모두 종합해 보면 북한 주민들이 장마당에서 주수입을 얻고 배급체계의 완전한 몰락으로 배급도 드문 점을 따져서 종합적으로 분석 해보면 1960년대 전, 공산주의 체제가 완성되기 전의 생활상으로까지 변화한 것이 나타난다. 현재 북한 주민들 사이에 '당에 충성'이란 말이 나도는데 여기서 '당'은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을 뜻한다. 암암리에 북한의 대표적 선전가 세상에 부럼없어라의 후렴구 중 "우리의 집은 당의 품"을 "우리의 집은 장마당"으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장마당으로 생활이 나아진 주민들은 보안원을 상당히 경멸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배금주의가 만연해 돈이 최고라는 사상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결과로 뇌물이 정착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상적인 각종 경영기법, 투자기법이 시장경쟁 상황에서 북한에서도 자생적으로 발생해 자리잡게 되었다. 실제로 장마당에서 길거리 음식으로 판매되는 두부밥은 초창기에는 이름에 정직한 두부+밥 수준이었으나 이후 두부밥 상인들이 이윤 증대를 목적으로 연구를 거듭하여 두부를 튀겨서 유부초밥처럼 만들거나 전용 양념장을 개발하는 등 남한의 시장처럼 상품 개량 등의 시도도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1990년대의 심각한 경제난을 거치면서 북한의 웬만한 기업들이나 군부, 당원들까지도 장마당에 물건을 거래하고 상당수 공무원들조차도 장마당에서 거래하며 뇌물을 받아 연명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장마당은 말 그대로 없는 거 빼고 다 파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현지인들은 장마당에 대해 '고양이 뿔만 빼고 다 판다'라고 할 정도다. 당연하지만 고양이 뿔이란건 실존하지 않으니, 반대로 실존하는건 다 판다는 뜻이다. 거기에 조선족들이나 재일동포들을 통해 중국산 영상물은 물론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정기적으로 유입되다 보니까 북한에서도 한류가 유행하게 되었다. 실제로 북한 내에서 일부 장마당 주인 가운데는 중국과의 밀수를 통해 대한민국의 상품을 반입, 비밀리에 판매하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이를 김정은은 '악성 종양'이라며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다만 2010년대 이후로 북한 주요 백화점들이 수익을 증대시킬려는 목적으로 중국의 백화점과 대형쇼핑몰, 대형마트의 운영방식을 참고해서 리모델링을 하고 신규출점을 하기 시작해 고급품은 백화점이 장마당의 영역을 다시금 잠식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다만 시장이 쇠퇴하고 있는 남한과 달리 장마당이 크게 쇠퇴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는 있는데 백화점들의 물가가 비싸서 일반인들이 아무 때나 이용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14]

보통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지만 농번기에는 문을 여는 시간을 늦추기도 하며 옷이나 신발과 같은 공업품(생필품)을 파는 장사꾼들은 하루 장세로 (북한 돈) 1,500원(미화 0.15달러), 빗자루나 잡화를 파는 장사꾼들은 하루 장세로 500원(미화 0.05달러)씩 내야 한다고 한다. #

4.1. 거래품의 주요 생산지

김정일 시대에는 대한민국 상품이 많이 유통되기도 했는데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북관계도 매우 좋았을 뿐만 아니라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서 남한제품에 대한 인기도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됨에 따라서, 그리고 남한 물품과 함께 남한 문물이 함께 들어오자 이를 경계한 북한 정권이 남한 물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남한 물건유통은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남한 물건의 질이 매우 좋았기도 하고 한국어가 지원되는 등 북한 사람들에게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아래의 일반 인민들로부터 당간부에게까지 사랑받았다. 그래서 한때는 대한민국산 고급제품이 상류층의 혼수에 들어가야만 하는 인기 품목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니라 혼수에 한국 제품을 댈 여력이 재력과 권력의 척도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중요해 혼수 품목 가운데 한국산이 없을 경우 파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하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한국산이란 표지를 떼어내고 유통하고 그것을 당간부들이 눈감아 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특히 쿠쿠밥솥은 북한 중산층에서 상류층, 그리고 당 간부들에게 까지 인기상품이었다.

물론, 남한 제품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는 중에도 대한민국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산 제품의 탄압이 공급을 줄여서 한국산 제품의 가격을 높여 그렇게 줄어든 공급만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 중국산 제품이다. 중국산 제품은 쉽게 들여 올 수도 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산 제품의 질이 크게 향상됨에 따라서 한국산 제품의 수요를 상당수 대체할 수 있었지만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한산 제품의 품질이 상당히 개선되면서 기성품 중 상당수가 북한산으로 대체됨에 따라 중국산 비중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북한의 생산력은 김정은 정권이 2020년대 초반처럼 폐쇄정책을 고수한다면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들여오지 못하여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북한산 제품이 중국산 제품을 밀어내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5. 역사

장마당의 어원은 조선의 '농민시장'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농본주의 국가였던 터라서 상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고 지금의 재래시장인 상설시장은 어느정도 인구규모가 되는 도시에 조성되었을 뿐 그것이 조선 촌락의 농민들에게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심지어 조선의 영토 중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이 그나마 상업이 발전한 곳이라고 하고 평양은 아예 거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조선에서 가장 많았고 북한에서 분단 전 '기형적인 상업도시'라고 폄하하는 지경인데도 조선 자체의 도시화율이 낮았다. 이런 농민들에게 물품을 유통한 것은 보통 보부상이었지만 농민들에게도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자신의 농사물을 팔 곳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자의에 따라서 3일장이나 5일장이 세워졌는데 이를 장마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편의상 아래는 모두 장마당으로 단어를 통일한다.)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 이후인 일제강점기에도 장마당은 존재했다. 일본 제국은 조선 곳곳에 조선인을 위한 상설시장을 인위적으로 형성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정권에 위협이 되지않는 장마당을 없애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마당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처럼 조선 농부들의 장으로서 계속 작용했다. 도시화도 진행되었고 특히 북부 지역은 그 정도가 병참기지화 정책의 부수적인 여파로 교통의 발전과 유통의 발전이 있어서, 그 규모와 권위는 커져갔다. #

북한 정부가 설립된 시기부터 6.25 전쟁 직후에도 장마당은 존재했다. 토지개혁으로 지주를 진압하고 뒤이은 화폐개혁으로 상인을 진압하면서 김일성은 상인들을 '모리간상배' 등으로 비하하며 '국유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과거에 비교하면 장마당이 심하게 파괴되었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관료를 보충하여 관료제의 여력이 생긴 1958년 8월에 개인 상업을 폐지하고 국영유통과 협동상업의 형태로 과도적 배급제를 실행하면서 장마당을 폐쇄했다. 그러나 국영 및 협동상업이 주민들의 필요를 모두 충족하지 못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1964년에 장마당이 부활했었다. 이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월 3회 10일장 형태(1일. 11일, 21일)로 장이 열려왔다.

장마당의 일시적인 부활로 인민들의 수요를 만족하기는 했지만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는 장마당이 자본주의를 낳고 이기주의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장마당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김일성이 1969년에 농민시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폐지위기는 잠시 해소되었다. 이때까지는 농민시장은 국가가 모든 소비물품들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게 되어 공산주의화가 완료되면 없어진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장마당은 유지될 수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북한의 전성기가 끝나는 1980년대까지 늘 북한에 모자라는 농축산물이나 중국제나 소련제 물품이 밀수되어 거래되었다. 이 때는 한국의 벼룩시장마냥 간단한 잡동사니나 중고제품, 군것질거리 등이 거래되어 소비되고 있다. 1984년부터는 더욱 발전하여 공장, 기업소에서 나오는 부산물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보급하는 ‘8.3 인민소비품’이 거래되면서 농민시장이 시·군별로 1~2개소씩 생기는 등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한 것도 자본주의 국가는 커녕 일반적인 공산주의 국가에서 암암리에 허가한 시장보다 못한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1984년 8월 3일의 조치로 이전보다는 활성화되었지만 그래도 배급제가 제대로 돌아가던 시절이었기에 북한 전체의 유통과 거래에서 장마당이 차지하는 거래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시절 장마당은 고난의 행군 이후의 장마당과는 다르게 생존을 위한 거래가 아닌 자신이 국가에서 배급받고도 모자란 부분을 매꾸기위한 변통에 불과했기 때문에 발전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듯 김일성 시대에는 북한 정부도 장마당이 확대되는 것을 꺼렸고 인민들도 장마당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이 고난의 행군 이후에 진정한 시장의 모습을 가진 인민들만의 장마당으로 출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일성 말기에 개혁개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부에서도 장마당을 진짜 시장으로 출범시켜서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를 시험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김정일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대 초부터 중국의 덩샤오핑은 북한에 자신들처럼 개혁개방에 나서라는 권고를 계속하고 있었고 실제로 북한의 경제관료들이 중국에 건너가서 견학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전세계적으로 탈냉전의 바람의 불고, 남북대화가 진척되자 김달현 부총리를 중심으로 일군의 경제관료들이 과감한 경제개혁을 주장했지만 결국 김정일에 의해서 모두 무산되었다. 이후 김달현은 중앙정계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한직을 떠돌게 된다.

5.1. 1990년대 고난의 행군과 장마당의 활성화

김정일이 실세가 된 후 장마당은 대놓고 탄압받았다. 1974년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우던 김평일을 완전히 제치고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76년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김정일이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벌인 짓이다. 1980년대 중반에 김일성의 권력을 대부분 이양받아서 국정을 운영했다.

그래도 인민의 생업을 신경쓰는 것 같은 시늉이라도 했던 김일성과 다르게 김정일은 인민들의 생업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권위와 체제를 위해서라면 국비를 낭비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사람이라 민생에는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류경호텔을 짓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같은 과시성 퍼포먼스를 벌여서 외화를 상당히 낭비했다. 서해갑문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김정일이 나름 경제를 살려 보겠다고 구상한 사업이지만 그 결과가 파국이었을 따름이다. 즉, 의도는 좋았다에 해당한다. 다만 경제성이 없다는 내부의 수많은 반대의견을 김정일이 깔아뭉개면서 강행한 사업들이긴 하다. 즉 1980년대에 김정일은 국가를 통치할만한 식견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1989년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유럽 혁명이 퍼지자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정부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소련까지 1991년에 붕괴하자 구 소련이 헐값에 공급하는 에너지와 식량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공산권의 독자적인 경제시스템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고 북한의 경제는 자본주의 국제시장질서라는 정글에 던져졌다. 당장 소련이 국제 시세의 반의 반값에 공급하던 석유가 끊기자 북한의 경제는 극심한 에너지난에 시달리면서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여기에 김정일이 1980년에 자신의 권위를 위한 삽질로 외화를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비축한 외화를 사용하여 버텨 봤겠지만 외화비축은 커녕 국채를 남발하고 무책임하게 던지는 등의 삽질로 신용으로라도 외화를 빌릴 여지까지 없애버린 북한의 정부는 공산주의 진영 붕괴에 의한 경제위기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정일은 인민들을 돌볼 생각은커녕 인민들을 희생하여 군사력을 확충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생각뿐이었다.[15] 소련에서 공급해 줬던 천연자원(석유, 석탄 등)들이 막히자 발전소가 멈췄고 발전소가 멈추자 공장이 멈춰서 공업이 정지되었고[16] 전기화되었던 철도가 정지되어 유통이 정지되었다. 이렇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철도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던 북한은 철도가 멈춰 유통체계가 붕괴하자 경제가 붕괴하기도 전에 배급제가 붕괴했다. 물론 유통이 무너진 직후 얼마 안 가서 경제도 파탄났다. 배급제가 유지되던 시절에는 기본 식료품과 생필품을 부족할지 언정 값싼 국정가격에 살수있고,[17] 월급수준이 낮았음에도 저축이 가능할 정도의 생활이 가능했지만 배급이 끊어지자 비싼 시장가격에 살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마저도 암시장 환율이 매년 폭등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극빈층으로 추락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1990년대 초반에는 100원 한 장이 번듯한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끝나던 시기에는 100원 한장으로는 쌀 2kg도 못 사먹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현물의 여유가 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물들을 외화로 바꾸기 위하여 장마당에 내놓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를 통해서 대한민국과 서방국가들이 보낸 원조식량이 들어왔지만 그것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북한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는데 군부가 일부를 가로챘고 심각한 부정부패로 인해서 당/정/군의 고위 간부들이 빼돌려서 자신들의 주머니를 배불린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심각한 전력난, 유류난으로 북한의 모든 교통체계가 붕괴하면서 항구에 하역한 식량을 썩기전에 내륙지대로 운송하는게 힘들었다. 이 현상은 북한뿐 아니라 기아에 시달리는 후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1980년대 동아프리카 대기근으로 수십만이 굶어죽어 갈 때도 현지 항구에는 라이브 에이드 운동 등으로 서방에서 보낸 원조식량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3~40%는 운송 도중에 썩어 버렸고 4~50%는 부정부패로 도중에 사라졌다. 실제 현지인들에게 전달된 식량은 잘해봐야 10% 정도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북중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중국에서 식료품을 밀수해 왔는데 이들은 장마당을 기반으로 훗날 북한의 신흥자본가인 돈주로 성장한다.

고난의 행군으로 더 이상 배급에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달은 북한 주민들에 의해 시장인 장마당이 발전하고 초보적인 자본주의가 북한에서 싹튼 것이다. 결국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3월에 종합시장 상설화를 담은 「내각조치 제24호」가 발표되면서 시장은 공식적인 국가경제 일부로 편입되어 합법화되었다. # 장마당은 조선로동당으로서는 눈엣가시겠지만 북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북한은 장마당을 축소하고 인민경제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하여 2009년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경제적 피해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이반시켰는데 경제에 대한 장악력은 오히려 떨어졌다.

5.2. 2010년대

평안남도 순천시의 장마당 (갈렙선교회 영상)

김정일이 2011년 12월에 사망하고 김정은이 집권한다.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파로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 적대감이 상대적으로 적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애초에 2000년대가 넘어가면 북한 상류층 내부에서도 장마당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의가 없었으며, 북한 상류층의 젊은이들은 장마당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 문물로 인하여 장마당에 상당히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특히 고난의 행군이란 비극 속에서 북한의 신흥자본가로 성장한 돈주들의 권력이 장마당에서 나오므로 이들, 돈주들의 비호 속에서 장마당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돈주들을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북한 상류층에 뇌물을 먹여서 노력영웅 등의 칭호를 사고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다. 김정은 시대에 경제특구도 17곳까지 늘어났다.

돈주들의 이러한 행보는 고난의 행군으로 무너진 유통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비록 목탄이나 석탄차량이 다수지만 트럭을 이용한 승객 및 화물 수송 서비스가 북한 곳곳에 탄생하기 시작했다. 비록 이러한 발전이 제도적 한계로 인하여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인해 이러한 발전의 해택이 촌동네까지 두루 미치지는 못했지만 도(道)내의 도시간이나 도(道)간의 도시간의 이송은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유통의 발전의 (중국/러시아로부터의) 밀수로 인한 북한내의 식량공급이 북한 전역으로 뻗어나가게 되는 데 일조했고 이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버티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및 서방의 학계에서는 장마당의 발전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효과를 줄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 중국이 대북제재와 밀수 단속에 소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정은 정부의 장마당에 대한 혜택과 정책적 지원은 북한의 경제를 북한의 1970년대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고 중국을 통해 태양열, 태양광 전지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력난도 어느 정도는 완화되었다.[18] 한국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를 보면 2010년대에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고, 먹는 것도 쌀밥 위주로 먹게 되었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RFP나 아시아프레스같은 매체를 보면 아직 굶는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김정일시대의 경제난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2010년대에는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인 성장도 두드러져서 경제제재만 풀리면 곧 한국의 재래시장만큼 거대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북한에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남북경협이 대모규로 시행되어 자본이 대량으로 북한에 들어가면 자본주의 국가처럼 대형마트가 들어설 수준이 되기 전까지 장마당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실제로 돈주들이 형성한 유통망이 시장과 도시간을 연결한지 오래라서 북한내의 자본이 장마당에 모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즉 이미 북한 내부에서는 시장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소리다. 더이상 북한정권이 장마당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특히 탈북자들의 생각이 그렇다. 탈북자들은 "북한주민들이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 장마당이며 장마당은 북한인민들의 최후의 보루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북한 정부가 장마당을 엎으려고 한다면 북한인민들은 나라를 뒤엎게 될것이라고 탈북하는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한 탈북민의 목격담에 따르면 2014년경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던 한 할머니가 당국의 단속에 걸렸는데 할머니가 보안원의 단속에 불응하고 자리를 계속 지켜서 보안원이 경고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보안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나라에서 쌀을 줬느냐, 배급도 안 주는 마당에 할머니가 자기 돈 벌어 먹고 살겠다는데 왜 단속을 하느냐, 할머니가 못 팔 물건을 파느냐"라고 할머니 편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단속하던 보안원이 쫓겨난 일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백주대낮에 벌어진 일이다. 옛날에는 보안원 하면 죄 없는 사람도 발발 떨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장마당에 태클걸면 보안원이고 뭐고 국물도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

5.3. 2020년대 코로나19와 장마당의 위기

당의 힘을 근간으로 하는 기존 기득권인 핵심계층과 장마당을 기반으로 한 신흥 기득권인 돈주의 권력경쟁이 심화되고 있었다. 2010년대 후반까지의 조치와 달리 2020년대 들어 김정은의 명령으로 통제강화를 주장한다는 것이 북한 매체에서 언급된다. 북한 체제의 대표적인 특징이 '수령' 중심의 체제로, 원칙적으로 정부가 '수령'의 뜻에 반기를 들 수 없다. 이 수령은 김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김정은에게도 2020년대 들어 수령으로 칭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 즉, 북한 정부의 뜻은 김정은의 뜻이다. 북한 2인자인 조용원 조차 김정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고하고, 금연법을 제정해도 김정은이 담배를 피는 모습이 관영매체에 등장한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체제에 대한 자신을 김정은이 잃고, 아버지의 금강산 관광 업적 부정,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제정 등 과격한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반동사상문화배격법부터 그 내용이 한류만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을 규제하고, 당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경제활동을 처벌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와중에 2020년에 코로나 위기가 시작되자 김정은을 위시한 기존 권력층을 중심으로 장마당을 다시 축소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코로나19를 빌미로 시장 운영을 제한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계획경제로의 회귀를 준비하는 건지 계획경제체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 특히 '탄원'이라고 하여 직장에 자원시키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2022년에는 장마당에서 곡물과 같은 식량 판매조차 금지하고 국가가 운영하는 식량공급소를 통해서만 살 수 있게 하는 등 식량 유통을 국가가 장악하여 경제권을 김정은 중심의 당에게 가져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배급제의 부활은 어려울 수 있어도 끈질기게 어떻게든 그와 비슷한 시도를 하려고 하여 국가가 가져가는 몫은 어떻게든 늘리고, 2022년 12월 들어서는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의 정책을 꾀하고 있다. 2014년에 실패한 정책을 부활시키려는 모양이다. ### 배급제가 폐지되자 주민의 영양상태 등이 좋아지는 등의 장점은 있어도 충성도가 떨어지는 모습이 더 싫은 나머지 김일성 시대의 양정 정치를 부활시키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양정 정치는 노동 착취와 생계 방해와 같은 행태로 이어져 일반 주민들도 매우 싫어한다. 굶어죽을 지경으로 식량을 적게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간부조차도 시장을 통해 '뇌물'로 받아가는 것이 양정 정치로 사라지기 때문에 반기지 않는다. ##

6. 장마당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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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Liberty in North Korea의 2019년 다큐 '장마당 세대'.
(영어판, 독일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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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2030 세대. 장마당 세대란 배급제가 완전히 무너진 후에 태어나 제대로된 배급을 경험한 바가 없고 자신과 가정의 경제를 오로지 장마당에만 의존하여 생활을 유지하는 세대를 일컫는다. 즉, 명목상으로나마 공산주의가 유지되는 꼴조차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하고 자신들의 후견국이자 물주였던 소련이 사라진 후 경제난이 심각해져 여유물자가 부족해지자 조선로동당 정부가 배급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결국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배급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래서 북한 인민들은 당과 정부에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장마당을 주 수입원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마당 세대가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이다. 이 세대의 탈북민들에게 배급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질문을 하면 일반적으로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고난의 행군과 장마당에 대한 정보와 영상이 남쪽의 대한민국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한국 국민들은 꾀죄죄하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북한 국민들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장마당 세대 이전의 탈북민들은 군복 입은 사람들이 장마당에서 돈을 주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북한은 선군정치를 내세워서 배급제가 무너질 때도 군인들에게 식량은 열악하게나마 보급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즉, 평양시민 다음으로 로동당 정권의 최우선 관리대상인 군대마저도 배급(보급)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북한의 공산주의식 국가 경제가 완벽하게 무너젔다는 방증이었다. 사실상 국가경제가 곧 북한의 모든 경제역량인 상황이므로 이는 북한 경제가 무너졌다는 증거였다. 탈북민들은 처참한 참극 그 자체인 북한 경제 상황에 '내가 탈북할 당시까지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저렇게....'하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장마당 세대는 2022년 기준으로 북한 인구의 약 50% 가까이 되는 상황이다. 거의 완벽하게 통제를 받는 자강도나 궁벽한 시골, 아주 높은 고위 당간부 자제 등을 제외하고 이 세대에 해당되는 북한 주민들의 조선로동당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못해 이제는 악의만 남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평양이 경제가 발전한 탓에 자본주의적 생활방식도 퍼져 젊은 세대는 나라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시골 사람보다 잘 아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밀수 혐의보위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주민이 밤중에 야외에서 놀고 있던 보위부 지도원의 5살 난 아들을 발견하고 그 아이의 귀를 잘라 버리는 엽기적인 보복을 한 일이 있었다. 또 다른 증언으로는 주민들이 자신들을 괴롭힌 당 간부나 지도원의 집에 방화를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봉쇄할 매우 억압적인 통제를 전 인민들에게 시행하지만, 부정부패와 비리 등으로 정부 치안 역량이 매우 떨어져서 수사력이 부족해 폭력범죄와 사적제재를 막거나 제약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 경제가 양호했다면 중국처럼 CCTV블랙박스 같은 감시장비를 도입하거나 전산망 전체에 전국민 감시체계를 만들어서 해결했겠지만 북한은 경제난으로 인하여 재정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지방의 인민들의 일탈을 막기 위해 지출할 돈이 없다. 설령 CCTV가 있다고 해도 24시간 작동시킬 전기가 없다. 이 때문에 북한의 지역 주민들이 모두 입을 맞춰서 모른다고 잡아떼면 범인을 색출할 방법이 없어서 피해를 입은 간부나 지도원들의 속만 타들어가는 실정이다.

북한은 표준 에너지자원을 전력으로 통일하면서 공장도, 철도 및 기반시설을 전반적으로 전기동력화했다. 그럼에도 경제가 붕괴하자 전력이 항상 부족하여[19] 가장 전기가 필요한 대낮부터 초저녁까지도 제대로 전기 공급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야밤에 등불을 켤 수 있을 전기도 없다. 물론 보위부원이나 로동당 간부의 집에 쓸 전기도 없는 것이다. 북한의 온 천지가 어두우니 범죄의 성공 확률이 매우 높은 편이고 북한의 저녁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평양 외부, 인민들의 미움을 받는 보위부원과 로동당 간부들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장마당 세대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과거의 짝짓기 풍습이었던 요바이가 현대에 소멸한 이유가 196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기로 인해 시골 지역에도 전력 공급이 넉넉해지면서 전구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 봐도 좋다. 과거와는 달리 야간에도 사람들이 야외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게 가능해진 데다 과거에는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공간에도 불빛이 들어오자 요바이의 핵심인 '은밀하게 거사를 치르고 빠져나가기'가 불가능에 가깝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21세기에도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 있는 지역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한국도 경제 발전의 여파로 인하여 전력 생산이 크게 늘어난 덕분에 전 지역이 24시간 내내 전력 소모를 해도 걱정 없는 사회가 당연시되자 과거처럼 야간에 은밀하게 범행을 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설령 시도한다고 해도 다수의 인공 불빛이 범행 시도자의 모습을 CCTV에 잘 드러내게 하는 덕분에 공권력이 범행 흔적을 빨리 추적해서 잡아내기가 쉬워졌다. 1990년대 초 북한을 발칵 뒤집었던 박명식 장기적출 연쇄 살인사건이 한동안 미제사건 취급되다가 간신히 해결된 것도 그가 한밤중에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잡은 게 아니라 살인범 때문에 이골이 나 있던 주민들이 합심해서 박명식을 붙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국가가 나서도 잡지 못하던 범인을 먹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이 잡았다는 것부터가 이미 대단한 일인 셈이다.

김정은 정권이 장마당 세대를 무시하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다. 로동당의 착취를 받았으면 받았지 배급제의 혜택을 받은 바가 없기에, 김일성-김정일의 치적 홍보가 통하지 않고 딱히 김씨 가문의 은혜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나마 폐지의 길을 걷게 되었고, 평양 집중 정책이 명목상 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려행증 제도가 완화 혹은 폐지된 이유는 그것이 도(道)간 무역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다만 코로나 사태를 명목으로 다시 강화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장마당 세대야말로 김정은 정권에 가장 저항적인 세대라고 평가받는 것이 부족한 표현이 아니다.

다만 북한 당국의 정보 통제는 필사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깨어있지는 못하다는 견해가 있다. 드라마나 노래 같은 건 많이 북한에 반입된 바 있지만 정치적인 자료가 북한에 많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일단 '국가'보다 가족을 먼저 챙기기는 하지만, 김정은이 국제 사회와 비교하여 무슨 잘못을 하는지는 잘은 모른다는 것이다. # 아직도 북한 안에서는 '유튜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핵개발 같은 것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가 존재하며, 총칼로 인해 복종하는 척 하는 등 '충성심'은 없지만 '반발심'도 없는 상태라고 표현된다. 탈북민인 나민희가 이런 예에 해당되는데, 몰래 한국 문물을 접하며 사고가 좀 유연하게 바뀌고, 평양에서조차 당국의 뜻에 반하는 자료를 접한 바 있지만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된 계기는 '김정은'을 인터넷에 검색하게 된 것부터였다. 이런 자료 한 번에 세뇌가 풀릴 정도지만 그런 자료조차 들여오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통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상태로 가면 북한은 지금보다는 깨끗하게는 될 것이라는 견해는 있지만, 당장 당에 반발을 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2019년 이후 체제 유지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김정은 스스로 위협을 느낄 때마다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이런 반동적인 사람들을 두고 북한의 청년은 모두 청년동맹에 가입하게 되어있는 배경 하에서 '뒤떨어진 동맹원'이라느니 인간 개조와 같은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며[20] 이들을 견제하고 있다.# 2021년 청년동맹 서한에서는 '그런데 지금의 청년세대는 나라가 시련을 겪던 고난의 시기에 나서자라다보니 우리 식 사회주의의 참다운 우월성에 대한 실체험과 표상이 부족하며 지어 일부 잘못된 인식까지 가지고있습니다.'라고 언급할 정도다.

2023년,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김정은 일가와 당 정책에 대해 거침없는 불평과 집단 항의가 있음에 따라, 북한 당국이 지역 당 산하에 불평분자 색출을 전담하는 비상설 TF를 신설했다. #

7. 영향

고난의 행군 이후 평양의 유명한 대학 교수조차 장마당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역할이 커지자 반사작용으로 여성의 인권이 올라갔다. 북한에서 아무리 일이 없다고해도 직장에 의무적으로 근무하게끔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일하기 싫어도 일을 나가야 된다. 그나마 이런 경우에는 번듯한 생활이 가능하기라도 했다. 소련에서는 이렇게 대충 일을 때우거나 심하면 며칠씩 결근하는 경우가 잦은것이 브레즈네프 후기에 문제가 되었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재임한 이후로 한 동안 농땡이 치는 노동자들이나 고프닉들을 강제로 직장에 보내서 일을 시키기도 했다.

북한이 1990년대를 거치면서 물가가 폭등한 데 반해 임금 수준은 매우 형편 없어지면서 기존의 월급만으로는 생활비는 커녕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노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식 '공산주의'의 특성상 맘대로 그만둘 수가 없다. 원래 공산주의는 노동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레닌조차 자발적인 노동을 주장할 정도다. #

북한식 노동은 그 대신 연말이나 윗선에서 닦닦거리는 특정한 때를 빼면 일하기는 널널하다. 명목상으로 주 48시간 노동제지만 중간에 쉬는 시간이 꽤 길게 주어지고[21] 공장가동률이 낮다 보니 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체감되는 노동시간이 적다. 다만 아래에 설명하다시피 봉급이 너무 낮다보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문제다.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이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공식 급여가 암달러 시세로 1달러도 안 되기 때문에 끼니 몇 번 때우면 바닥인 것은 여전해서 북한의 직장인 대부분은 월급이 아니라 성과급으로 먹고살며 성과급이 적으면 따로 부업을 하기도 한다. 성과급은 공식 급여의 수 배에서 최대 수십 배 넘게 주는 등 각 기업체의 크기나 경영 상태에 따라 차이가 매우 커서 안정적이라 말할 수 없다.

너무나 낮은 기존 월급 대신에 노동의무에서 면제되는 결혼한 여자들이 장마당에서 벌어온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발언권이 크게 높아졌다. 이는 곧 남편의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이혼률이 급속도로 올라가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북한에서는 합의이혼 제도가 없고 재판이혼 제도만 있기 때문에 고부갈등이나 성격 차이 등의 이유로 이혼하기 힘들며 가정폭력이나 배우자가 알고 보니 사상범이라는 식의 어지간히 심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이혼이 힘들었고 사회에서도 이혼한 여성을 좋게 보는 정서가 아니었다.[22] 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그야말로 애들 용돈 수준에 그치면서 경제적 문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대대적으로 한류가 전세계를 휩쓸었는데 북한 역시 한류로부터 비껴나갈 순 없었다. 이에 따라 북한에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음악이 대대적으로 쏟아져 들어갔으며 장마당 세대들은 여기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북한의 고위간부는 물론이며 노예나 다를바 없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이는 DVD에서 USB를 통해 미디어가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빠르게 펴졌다고 하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DVD가 자주 쓰일 땐 단속반이 그 건물의 차단기를 내리고 급습하면 DVD 플레이어를 열 수 없어 증거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USB 드라이브는 전원이 차단되어도 뽑아서 숨기면 그만이다. 사랑의 불시착은 말할 것도 없고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도 유행했다. 북한에서는 그대라는 말 대신 그 동무라는 표현을 쓴다. 그대라는 말은 북한에서 김정은을 포함한 김씨일가를 칭하는 말이므로 북한에서 제목 그대로를 썼다간 별에서 온 김씨일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뿐 아니라 BTS나 트와이스의 노래가 흘러들어가 장마당과 장마당 세대에 상당히 큰 파급력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를 북한정권은 자기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세계사에 나오는 독재자들을 보면 외부와 단절한 폐쇄적인 외교는 물론이며 외부문물을 극도로 꺼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밀수입된 한국 및 외국 드라마, 영화,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남한말들이 퍼지자 김정은은 남한말을 하는 장마당 세대가 늘어났다며 해당 세대를 직접 지목하여 사상교육을 더 강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단속을 할 정도였다. 북한 관련 예능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평양 금성학원 출신이자 리설주의 후배였던 한 탈북민은 친구와 있을 때 '선배'라는 단어를 썼다가 보위부에게 적발당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친구가 보위부에게 선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고 있냐는 역공을 가해서 잡혀가진 않았다.

8. 관련 문서

9. 참고 문헌



[1]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만들고 운영하는, 그것도 체제 홍보 목적이 아닌 오로지 경제 활동만을 위해 만든 장소인 시장에서조차 상행위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국가의 체제 홍보물이 의무적으로 내걸려 있는 몹시 황당한 풍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시장을 때려잡던 국가에서 이 시장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증표라고도 볼 수 있는 북한 체제의 아이러니함이 단 한장으로 제대로 함축된 역설적인 사진이기도 하다.[2] 사실은 해방이 되자마자 시장을 못쓰게 하려고 했지만 큰 저항이 있었다. 토지개혁, 화폐개혁으로 결국 이에 성공한 것이다.[3] 지금의 휴전선은 1953년에 생겼고 북한 정부의 관할은 1950년 이전과 달랐다.[4] 일종의 기호품 거래소처럼 운영되고 유지되었다. 북한은 시장을 없애고 싶어 했으므로 계속해서 축소되었다.[5] 본래 농민시장의 어원이 장마당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정규 민간시장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소규모의 거래를 위해서 인민들이 비정규적으로 여는 장 자체를 탄압하지 않았다.[6] 남한의 노인들 중에도 고유의 전통시장이나 수산시장을 장마당이라고 구어체로 표현하는 사례가 존재하지만 아랫세대에게 장마당이라는 단어는 구어체로 재래시장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라 북한의 암시장을 칭하는 일이 다반사인지라 세대에 따라 오해를 겪곤 한다.[7]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내수용 화폐랑 외국인용 화폐를 따로 발행하기도 한다.[8] 보통 3대 실책이라고 하면 비날론 집중,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서해갑문을 꼽지만 서해갑문 대신에 무리한 군비증강이 들어가기도 한다.[9] 김일성이 북한의 동력을 전기로 일원화하려고 시도하면서 주요 공장들이 전기구동으로 바뀌었으며 북한 물류에서 약 80%를 차지하던 철도도 전철(전기로 구동하는 철도)화해 버렸는데 하필 소련 붕괴 당시 북한의 전력생산의 상당부분이 소련제 석유를 사용한 석유발전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석유수입을 얼마없는 달러로 유지하다가 달러가 동나자 석유 수입이 끊겨서 전기가 끊겨 모든 공장이 멈추고 모든 물류가 멈췄다. 동시에 전국의 모든 경제가 멈췄으며 북한의 국내 모든 경제부분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이렇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10] 콩쥐팥쥐 같은 잘 알려진 옛날 이야기에서도 콩쥐 같은 인물이 아무리 성실하고 뛰어나도 나무호미로 자갈밭을 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자본이 없으면 정신력이 제 아무리 뛰어난 노동자라도 어떤 좋은 물건 자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11] 북한 정권이 진짜로 세금을 한푼도 안 걷은 건 아니고 세금 딱지만 안 붙였을 뿐 온갖 명목으로 걷어갈건 다 걷어갔다. 물론 그렇게 걷어간 것들은 일단 명목상으로는 자진납부라는 이름으로 '받았을' 뿐이다. 사실 북한은 군대도 어디까지나 자진입대하는데 단지 주민들이 너무나 충실해서 입대율이 99.99%일 뿐이고 최고지도자인 김정은도 어디까지나 민주적인 선거를 거쳐서 당선되었는데 단지 주민들이 너무나 열성적이여서 투표율이 99.99%일 뿐인 퍽 민주적인 국가이다.[12]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가 2009년에 있었던 북한의 화폐개혁이다.[13] 실제로 전문가들은 북한의 실제 장마당 수는 500개를 넘을 거라고 보고 있다. 북한 정권에서 인정하지 않은 장 중에서는 소위 '메뚜기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주민들이 당국의 규제와 통제를 피해 허가 없이 장마당 인근 골목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불법 노점상이며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벌였다가 당국의 단속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철수하는 모습이 메뚜기 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장마당 매대를 얻지 못한 장사꾼들과 일반 주민들이 당국의 통제없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기 때문에 최근 북한내 여러 지역에서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14] 남한에서도 어떤 지역에 현대백화점 들어온다고 해서 그 동네 슈퍼나 편의점이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15] 사실 이렇게 된 것이 당시 북한에서 그나마 잘 굴러가던 곳이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입장에서는 경제를 살릴 비책이 없던 상황에서 군대에서 제대해 봐야 실업자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 뻔했고 급여 가치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폭락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실업자들이 넘쳐나서 사회불안이 확산될 게 뻔했다. 그래서 사회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군복무 연장을 시켜 군대의 규모를 키워나갔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군대를 13년씩이나 간다고 해도 반발이 적었던 것도 군대에 다녀오는 것이 궁핍했던 당시에는 밥벌어먹는 수단이 그것밖에 없어서라는 슬픈 사정 때문이었다(...).[16] 중화학 공업단지가 정지되어 비료생산이 정지되었다. 이는 농업생산이 무너지는데 일조한다.[17] 북한에서 배급제가 시행되던 시절에도 남한에서 흔히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100% 무상으로 물건을 나누는 방식은 아니었다. 남한에서 상품권, 쿠폰을 가지고 와서 물건값을 할인받듯이 상점에서 배급표를 가지고오면 물건을 할인받아 사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 시절에도 시장에서 따로 물건을 살수는 있었다. 1980년대 당시 북한의 월급이 70원이었지만 쌀의 국정가격이 8전에 불과한데다가 곡물배급량은 1인당 연 219KG으로 지정되어있었고, 기본적인 공공요금도 무척이나 쌌었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딱히 배곯고 사는 일은 없었다.(남한도 쌀 소비량이 한창 많았을때는 1인당 쌀 소비량이 134kg이었다.) 다만 시장가가 국정가격보다 몇 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상점에서 물건이 부족하면 곤란했을 뿐이었다.[18] 다만 태양열, 태양광 전지가 계절을 타기 때문에 날이 흐리거나 장마철에는 효율이 떨어지기도 하고 가격에 따른 성능 차이도 크기 때문에 비싼 전지판을 여러개 깔면 냉장고, 데스크탑 컴퓨터, 전기 많이 먹는 가전제품을 가동시키거나, 뜨끈하게 온수목욕을 하는 것도 가능하는 등 남한 중산층 못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싸구려 전지판을 깔 경우에는 전등과 선풍기. 소형TV를 키거나, 노트북 컴퓨터와 핸드폰을 충전하는 수준으로 쓰는 정도인데, 후자가 대부분이다.[19] 놀라운 사실은 북한의 대중(對中) 10대 수출품 중 하나가 전기다. # #2[20] 다만 북한 정권은 원래도 과격한 표현을 공식 석상에서 자주 쓰기로 악명높았다. 대놓고 '지주놈의 대가리를 돌로 까부수다' 같은 과격한 표현을 수령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당당하게 수록해서 교육하는 판국이다.[21] 점심과 낮잠시간을 합쳐서 2시간을 쉰다.[22] 남한도 1980년대까지는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