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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과 프랑스의 관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양국 모두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며 교류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초기에 프랑스 지역에는 켈트 계통의 갈리아인 + 라틴족이, 스페인 지역에는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이 혼혈된 켈트이베리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켈트이베리아인들은 어찌보면 유럽 최초의 혼혈 민족이라 볼 수 있다.프랑스 지역과 스페인 북부 지방에서 남하한 금발 내지는 빨간머리를 가진 흰 피부의 켈트인들과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온 검은머리와 다소 꺼무잡잡한 피부의 이베리아인들이 혼혈된 것이 켈트이베리아인들이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금의 프랑스 지역과 스페인은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고 로마화되면서 로마인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분열 때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이 서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2.2. 중세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는 스페인과 프랑스지역에 서고트 왕국이 세워졌으나 서고트족들이 프랑크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에 밀려 이베리아 반도로 중심지를 옮겼고 프랑스 지역에는 프랑크 왕국이 세워졌다.이후 서고트 왕국은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다시 독립적으로 영향력을 키워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이 때에는 로마 문화와 로마법도 많이 보존하면서 동시에 혈통, 문화, 언어에서 완전히 로마화되었고 프랑크 왕국도 혈통, 언어, 문화에서 완전히 로마화되었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은 계속된 분열 속에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고 서고트 왕국은 이슬람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스페인을 정복한 뒤 우마이야 왕조는 프랑크 왕국과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물러나고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아랍의 지배하에서 알안달루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에서 서고트왕국 멸망 직후 남은 기독교 세력+게르만족들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워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다.
언어적으로도 같은 라틴어에서 나뉘게 되는데 프랑스는 게르만어파와 켈트어(갈리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스페인은 아랍어, 베르베르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2.3. 대항해시대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레콩키스타 이후 최종적으로 나스르 왕조가 정복된 이후, 스페인은 아랍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세력을 키워 미국 북부, 동부 지방, 브라질을 제외한 전 지역 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 필리핀, 서태평양의 일부 섬들, 심지어 유럽 내부에서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지방도 차지했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일부 영토, 플랑드르까지 모조리 스페인의 영토였다.스페인이 유일하게 프랑스를 매우 큰 차이로 압도하던 시기다. 포르투갈과 함께 대항해시대를 열은 초기 국가로서 외부 식민지는 물론이고 유럽 권역 내에서도 이 시기의 스페인은 단독으로 프랑스를 포함한 타 유럽 국가들을 전부 압도할 정도의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이 당시 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대부분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다.
2.4. 17~19세기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를 격파하며 이탈리아, 나아가 서유럽 육상 패권을 확실시한 1559년 카토 캉브레시스 조약부터 스페인 역사상 최후의 피레네산맥 이북의 영토였던 세르다냐, 로세요 (현대 프랑스어로는 세르다뉴, 루시용) 일대를 프랑스가 할양 받으며 대륙의 스페인 패권을 끝낸 1659년 피레네 조약까지 16-17세기는 양국 관계사상 스페인이 거의 유일하게 주도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대립이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이 이전이나 이후에나 유럽사의 일관적인 패턴에 따라 프랑스 격파 없이는 스페인의 서유럽 패권도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이 와중에 스페인에 맞서 이탈리아와 저지대에서 세력 사수하겠다고 비공식 간접 지원도 아니고 나머지 유럽이 전부 타락한 기독교 세계를 징벌하기 위해 땅으로 올라온 사탄의 이교도 군대쯤으로 인식하던 오스만 제국과 대규모 군사 동맹까지 맺은 프랑스의 행보에 스페인과 동맹 세력들은 질색했다.[1]프랑스는 프랑스 나름대로 중세 내내 '교회의 장녀'란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장했던 것과는 영 대조적으로 스페인을 꺾고 서유럽 패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종교니 전통적인 동맹 관계니 다 필요없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밀어붙히며 결국 30년 전쟁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역사도 깊은 가톨릭 국가가 개신교 동맹 측에 붙는 모습까지 보였다. 당연히 스페인을 주축으로 한 범가톨릭 세력은 가짜 가톨릭, 위그노 이단의 소굴, 권력에 미쳐서 신앙도 도덕도 다 팔아먹는 막장 국가 프레임을 프랑스에 씌우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이 시기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선 많은 이들이 이름만 가톨릭이지 칼뱅주의 이단으로 보던 얀센주의 신학이나 장 보댕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세속 권력의 안정성을 종교적 순수성보다 우위로 둔 정치적 현실주의적 사상가들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약한건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서유럽 패권과 가톨릭 세계의 맹주 자리를 두고 충돌한 양국간의 험악한 대결은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반란군 같은 개신교 세력과도 거리낌 없이 동맹 맺으며 대스페인 전선의 주축에 있었던 프랑스가 결국 30년 전쟁이 끝나고도 스페인과는 따로 전쟁을 10년이나 더 치르며 결국 피레네 협약을 맺고 스페인 패권을 분쇄하면서야 끝났다. 아직도 프랑스를 겉과 속이 다르고 탐욕을 위해선 뭐든지 다 팔아 먹는 위선적인 족속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스페인의 민간적 반불감정은 여전히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의 장녀' 운운하던 이웃 열강이 패권 사수하겠다고 무슬림, 개신교도들과 확확 손잡으며 스페인과 싸우던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영원할 것 같았던 스페인 제국의 영광도 17세기에 들어서며 급격히 저물어갔다. 16세기 100년간은 스페인이 프랑스를 압도했지만 스페인의 연이은 국제전 패배와 프랑스의 팽창으로 둘의 관계는 바뀌어갔다.[2] 특히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혈연적으로도 긴밀한 관계가 되어갔다. 이러한 이유는 더이상 스페인이 독자적으로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져 프랑스와 연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이후 1701년 카를로스 2세의 서거 후에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에 스페인 왕위를 다투고 전쟁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스페인 측과의 협상도 없이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프랑스는 카를로스 2세 본인의 뜻을 따라 앙주 공작인 부르봉의 필리프를 왕위에 올리려 했다. 14년 간의 전쟁 끝에 결과적으로 앙주 공 필리프가 펠리페 5세로써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면서, 스페인은 같은 부르봉 가문이라는 이유로 한세기 가량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사실상 프랑스의 하위 파트너) 이후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제국의 등장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폐지되면서 잠시 양국은 적대했으나 곧 스페인이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동맹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다 양국 관계가 순식간에 파탄나는 결정적 사건이 생겼는데, 바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었다. 스페인의 왕위를 보나파르트 가문이 차지하고자 하는 나폴레옹의 통수로 보르본 왕조가 잠시 폐지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호세 1세로 옹립되면서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나폴레옹의 침략을 무찌르기는 했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마지막으로 남은 쿠바, 푸에르토 리코, 필리핀, 서태평양의 일부 작은 섬들도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스페인은 외교적으론 프랑스의 제2중대 쯤의 위치로 떨어졌고 내정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강력한 간섭과 영향을 받았다.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는 이웃나라에서 자유주의, 입헌주의 세력이 사촌들을 약화시키고 집권하는 꼴을 볼 수 없다고 1823년 대규모의 절대왕정 복고 간섭군을 보내 라파엘 리에고를 비롯한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가들의 목을 처버렸고, 이 사건은 나폴레옹 점령기 동안 나름 큰 세력을 성장한 스페인내 친프랑스 성향 자유주의, 계몽주의 세력들이 (afrancesados) 프랑스와 손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주로 대외 식민지 정책에서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더 심해지면 본인들의 이권도 위험하겠다 싶은 인도차이나, 북아프리카 일대에선 오히려 프랑스가 억지로 자국군을 파견하며 스페인 세력 유지에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2.5. 20세기
19세기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20세기에도 지속됐다. 프랑스는 공화국 성립 이후 스페인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라거나 피레네 이남의 저질 족속들이라고 칭한 것은 프랑스인들이 전통적으로 스페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스페인이 모로코를 식민지배하려고 침입했는데 프랑스가 개입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모로코가 북아프리카에서 대서양으로 빠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개입으로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모로코 북부는 스페인이 나머지 지역은 프랑스가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불쾌한 협상이었다. 특히 모로코의 상업적 중심지는 모두 프랑스가 점령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영 찝찝한 결과였다.
안그래도 문화, 역사적으로 가까워서 불편한 양국관계는 20세기 들어서 한동안 스텝이 더 꼬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공화국은 프랑스에 이미 똑같은 자매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음고 레옹 블룸 내각은 처음엔 스페인의 동지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프랑스 국내 정계 우파의 반발과 영미의 견제로 인해 블룸 내각의 내부 사정은 어쨌든간에 결국은 프랑스의 언니 인민전선 정권이 스페인의 동생이 파쇼 쿠데타군에게 따먹히는 동안 방관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차대전이 발발하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될 때 스페인은 나치와 같이 프랑코 정부가 있었으니 가만히 프랑스가 점령되는 걸 방관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나치에 협조했다. 이러다보니 스페인 좌익은 프랑스가 도와준다 했으면서 통수쳤으니 밉고, 스페인 우익은 빨갱이들 도와주려고 했으니 밉고, 카탈루냐인들은 뒤에서 자유주의 바람 불어넣으면서 막상 도와주는 건 없으니 밉고, 카스티야 중앙정부 입장에선 카탈루냐놈들 뒤에서 부추기니깐 밉고, 어쨌든 프랑스는 뭘 해도 입장 불문하고 스페인 사람들 눈에는 고까운 상황에 처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 프랑스 정부는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나라이나 정치적으로는 멀고도 험한 관계였다. 대전 후 프랑스는 유럽과 국제 정계에서 냉전기에 지정학적, 역사적 이유로 백안시하는 게 당연했던 소련 중심 동구권과 더불어 스페인 왕따를 주도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해방 때 소속은 프랑스 국내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공화파 망명객들 중심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활동 건도 있고, 내전 이전에 프랑스에 좌파 레옹 블룸 내각이 집권했을 때 프랑스 국내 문제로 제대로 못 도와주고 이념적 동지들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책임 등등으로 프랑코 정권과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코 생전에 전후 유럽에서 프랑코 스페인 왕따도 동쪽에선 소련, 서방에선 프랑스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막상 경력이나 사상은 비슷한 반공 우파 군인 출신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드골과 후임 정권들은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 CNT나 UGT 등 망명 정치세력, 훗날에는 ETA까지 자국을 기반으로 삼아 국경을 넘으며 반체제 활동을 하는 걸 묵인해 줬고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프랑스가 자국 치안 안정을 방해한다!"며 적극 항의했지만 워낙 전반적으로 프랑코 왕따시키는 국제 분위기에 묵살당했다. 하지만 프랑코 사후 스페인에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프랑스 정부도 스페인을 파트너로 인정했다.
2.6. 21세기
스페인과 프랑스는 현재는 나토,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이자 문화교류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가 많이 활발한 상태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라틴 연합에도 속해 있다. 스페인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중 하나가 프랑스이고 반대로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 중 하나가 스페인이다.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교구인 우르헬의 주교는 안도라의 군주(공동 영주)로 두고 있다.상술한 역사가 말해주듯 스페인은 그나마 프랑스와 육상으로 접한 나라 중에서 근대 이전 부터 통일 국가로서 틈이 보이면 패권 경쟁할 만한 체급이 되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깊은 문화적, 역사적 공유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로 투닥거리는 관계였다. 16-17세기 스페인이 세계 제국으로서 최고 잘나갈 시절 프랑스는 중세의 패권 국가 시절과 부르봉 왕조 아래 패권을 다시 차지할 때까지 내부 혼란, 왕조 교체, 귀족간 분쟁 등으로 대항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고 반대로 근세 프랑스의 유럽 패권 재탈환 과정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을 마구 견제하고 결국 왕가마저 프랑스 출신 왕가를 심어두면서 완성되었다.
근대 들어와서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정직하게 스페인 쪽에서는 자기들끼린 그렇게 사이 안 좋은 좌우파, 카스티야 카탈루냐 전부 한 입으로 조국 해방 전쟁으로 칭송하고 이후에도 스페인 좌파 쪽에서는 보르본 왕가를 싸고 돈다, 우익 쪽에서는 불순한 사상을 계속 퍼뜨린다며 이유는 전혀 달라도 반불 감정 자체는 공유했다.[3]
17세기 중반 카탈루냐 반란 때 에피소드가 참으로 볼만한 게 카탈루냐 쪽에서 자치권을 제한하고 전비로 세금 더 걷어가려는 올리바레스 재상의 정권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게 군사적으로 진압당할 위기에 처하기 부르봉 왕조 프랑스군을 지원군으로 불러왔다. 프랑스는 안그래도 한창 스페인과 전쟁 와중 얼씨구 신났다고 쳐들어와서 당연히 카스티야 중심으로 한 나머지 스페인에선 저저 우리나라 반란군 도와주는 저저 나쁜놈들 보소 하면서 부르르 이를 가는데 막상 지원군이라고 불러온 카탈루냐 내에서도 점령군처럼 오만하게 굴고 양민들에게 피해 끼친다고 미움받다가 결국 별 소득 못 건지고 후퇴했다. 이후 카탈루냐는 반란이 진압당해 자치권이 짓밟히고 카스티야 중심 스페인 제국은 이 과중에서 국력은 다 낭비하며 급격하게 위상이 약해졌으며 사이좋게 나란히 망하고 남은 건 어쨌든 프랑스는 밉다는 사실만 재확인한 참으로 스페인스런 결말이었다. 양국 모두 유럽 연합 소속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인 지금에야 당연히 여러 방면에서 밀접하게 협력하는 관계지만 민간 차원의 사회적 국민 감정으로는 프랑스 쪽은 별로 생각이 없는 반면 스페인 쪽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인들을 가바쵸[4]라는 멸칭을 붙이며 은근히 질시하는 경향이 있다.
요약하자면 현대 들어와서는 일반인들끼리 서로 가끔 가다 욕하는 정도지만 어쨌든 스페인 내에서는 적어도 역사적으로 반불감정이 상당히 오래 존재해 왔으며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력을 패권주의적 시각으로 경계하는 조류도 여전하니 혹시나 해당 나라로 여행하거나 현지 출신 사람들과 연관된 주제로 대화할 일이 있으면 알아두어서 손해 볼 건 없다. 국제 정치적 대국관계에서야 같은 유럽연합 소속 밀접한 이웃나라지만 민간 감정 차원에서 스페인인들은 여전히 프랑스를 아니꼽게 보고 "프랑스 못지않게 스페인도 위대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식으로 문화적 경쟁감이 강한 편이다. [5] 기본적으로 반왕실 감정이 강한 대도시의 공화주의적 좌파 성향 시민들도 그렇고, 근왕주의적 우파도 민족가톨릭주의(nacionalcatolicismo) 국가관의 주체로서 스페인 왕실이란 기관을 추앙하는 거지 막상 거기 앉아 있는 게 정치적 전통도 확연하게 다르고 전성기 스페인 제국에게서 유럽 대륙의 패권을 강탈해온 프랑스 출신 부르봉 왕가라는 사실 자체는 껄끄럽게 보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6]
2018년 9월 26일,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바르셀로나 시장직에 출마를 선언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꿩 섬에 대해 스페인측과 프랑스측은 공동소유를 합의하면서 1년에 6개월씩 영토소유국가가 바뀌고 있다.#
스페인이 프랑스 국영철도의 저가형 초고속 열차 브랜드 위고를 도입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는 노선의 첫 운행을 시작했다.#
독일의 숄츠 총리, 스페인의 산체스 총리, 포르투갈의 코스타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의 연임을 지지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양국을 잇는 파이프라인 구축 사업을 실시했다.#
2022년 10월 21일, 스페인과 프랑스, 포르투갈 3국이 해저가스관 '바르마르' 건설을 합의했다.#
3. 문화 교류
언어적인 것에서도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는 같은 로망스어군에 속해 있어서 둘 다 영향을 주고받았고 차용어도 서로 존재해있다. 그리고 프랑스어 어휘가 스페인어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고, 스페인어도 프랑스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종교적으로도 가톨릭 위주의 사회, 혈통적으로도 같은 라틴족 중심의 사회[7]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경제적으로 에어버스와 같이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 내에서도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고,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스페인도 문화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프랑스도 스페인과 교류를 하면서 스페인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4. 대사관
양국 모두 대사관이 존재한다. 마드리드에는 프랑스 대사관, 파리에는 스페인 대사관이 있다.5. 관련 문서
- 스페인/외교
- 프랑스/외교
- 유럽연합
- 라틴 연합
- 에어버스
- FCAS
- 스페인/역사
- 프랑스/역사
- 스페인/문화
- 프랑스/문화
- 스페인/경제
- 프랑스/경제
- 스페인인 / 프랑스인
- 스페인어 / 프랑스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1] 역사적으로 따지면 사실 십자군 시기를 필두로 동유럽, 근동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만 맞으면 크리스천 군주가 무슬림 영주와 동맹을 맺는 것쯤이야 흔했던 일이지만 1543년 겨울 하이르 앗 딘 지휘 아래 오스만 수병 3만명이 주둔하며 아예 프랑스의 지중해 거점항구였던 툴롱의 대성당을 임시로 모스크로 개조한 것 같은 중세의 일시적, 지역적 동맹을 넘어 프랑스 같은 서유럽 복판의 강대국이 아예 만단위 오스만 대군을 받아 들여 공동작전을 한 건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2] 게다가 서인도 제도의 대부분의 작은 섬들과 일부 섬들, 중남미의 일부 지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고 거기에다 스웨덴, 폴란드, 덴마크 등 신흥강국들도 서인도 제도의 일부 지역까지 잠시 차지했다.[3] 반대로 다른 라틴권 대국인 이탈리아 상대로는 우익은 반공 동맹국이었다고, 좌익은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성향 막론하고 호감이 주류인 걸 보면 대불관계는 구도나 역사적 배경은 비슷한데 결론은 정반대인 기묘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17세기 전후로 이탈리아는 현지 소국들 상대로 스페인이 갑질하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는 반대로 내부 통일 이후 부르봉 왕조 상대든, 나폴레옹 상대로든 주로 쥐어박히는 입장이라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4] gabacho, 카탈루냐어로는 가바츠(gavatx)라고 하며 똑같이 프랑스 까는 단어를 쓴다는 점에서 반불감정 하나만은 진짜 카스티야, 카탈루냐가 공유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원은 불어론 chevaux, 스페인어로는 caballo라는 '말박이'라는 의미의 비칭의 음운 변화란 설도 있고 프랑스어로 '얼라'인 Garçon의 음운변화란 설도 있고 피레네 산맥 건너면 바로 이웃한 프랑스의 지방이 가스코뉴이니 가스콩이란 지명에서 왔다는 설도 있는 등 하여튼 정확하지 않다.[5] 이건 이탈리아도 비슷한데, 프랑스의 우월의식과 은근한 주변국 폄하 때문에 "지들이 뭔데 저러냐 우리가 다 가르쳐 줬는데/우리도 잘 났다" 식으로 꼽게 보는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6] 한국으로 치면 대한제국 최후의 정통 황제위 요구자인 이구가 제정복고를 통해 대한제국 황제위에 오르고 더 나아가 아들도 얻어 이구의 직계 혈통이 재건된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대대로 계승하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구의 어머니인 이방자가 일본 황실 출신인데 일본 제국은 일제강점기로 대표되는 한민족 탄압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존재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7] 단 프랑스는 게르만족인 프랑크족과 켈트족인 갈리아족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8] 스페인 지역과 프랑스 지역은 과거에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