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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모빌리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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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하동환자동차/동아자동차 시절 (1954. 1.~1988. 3.) 3. 쌍용자동차 시절 (1988. 3.~2023. 3.)
3.1. 쌍용그룹 시절 (1986. 11.~1998. 3.)3.2. 대우그룹 시절 (1998. 1.~1999. 8.)3.3. 워크아웃 시절 (1999. 8.~2005. 1.)3.4. 상하이자동차그룹 시절 (2004. 10.~2009. 1.)
3.4.1. 쌍용차 기술유출 사태 (무죄)
3.5. 법정관리, 쌍용차 사태 (2009. 2.~2011. 1.)3.6. 마힌드라그룹 시절 (2011. 1.~2020. 12.)
3.6.1. 일시적인 부활3.6.2. 위기3.6.3. 부진의 이유
3.7. 법정관리 (2020. 12.~2022. 8.)
3.7.1. 에디슨모터스의 인수 시도 (무산)3.7.2. KG모빌리티홀딩스의 인수
3.8. KG그룹 인수 이후 (2022. 9.~2023. 3. 21.)
4. KG모빌리티 (2023. 3. 22.~현재)

[clearfix]

1. 개요

1954년 한원그룹, 한원미술관의 설립자인 하동환 명예회장에 의해 국내 최초로 설립[1]과 자동차 해외 수출[2]을 한 자동차 기업이었으며, 현존하는 국내 자동차 기업 중 최장수 기업[3]이다. 쌍용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 쌍용그룹의 계열사였던 순간은 그 긴 역사 내에서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4]

창업 이래 하동환자동차제작소(하동환 회장, 1954 ~ 1967), 신진지프자동차(1967 ~ 1975), 동아자동차(하동환 회장, 1975 ~ 1986), 쌍용그룹(1986 ~ 1997), 대우그룹(1998 ~ 1999), 채권단(1999 ~ 2004), 중국 상해기차, 인도 마힌드라, KG그룹으로 최대주주가 변경되어 왔다. 2023년 3월 22일 주주총회에서 상호를 KG모빌리티로 변경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촉발된 구조조정, 여러번의 매각[5] 이후에도 꾸준히 살아남아 현재는 KG모빌리티의 옛 쌍용차 시절 특유의 투박함과 터프함, 오프로더를 원하는 소비자들을 공략하며 SUV 전문 브랜드를 목표로 차량 개발에 힘쓰고 있다.

2. 하동환자동차/동아자동차 시절 (1954. 1.~198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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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fac><colcolor=#fff> 법인명 정식: 동아자동차공업주식회사
영문: Donga Car Company.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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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1954년 1월 ~ 1988년 3월
후신 쌍용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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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한원 하동환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 자택 앞마당에 천막 공장을 지어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설립했다.[6] 설립 당시 하동환은 23세 청년이었는데, 10대 시절부터 신촌의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일하며 자동차에 대해 배웠다. 1955년 폐차된 미군 트럭 엔진과 변속기를 활용하고 드럼통을 펴 차체를 제작하여 국내 최초의 버스를 출시했다.

1962년 동방자동차공업에 역합병되어 하동환자동차공업(주)로 출발함과 동시에 구로동으로 공장을 옮겼다.[7] 하동환버스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으며 60년대 대한민국 버스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했는데, 60년대 서울 시내에서 굴러다니는 버스의 70%가 하동환자동차 버스였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남베트남보르네오 섬에 버스를 수출했다.

그러나 1967년 아시아자동차의 버스 등이 잇달아 출시되어 하동환 자동차는 부실 위기에 처했다. 상공부의 자동차 산업 계열화 정책으로 신진자동차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신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토요타 버스들 (FB100LK, DB102LC,[8] 라이트 버스)를 위탁 생산했고, 이에 따라 자체 모델 버스 생산은 중단됐다.[9][10] 1974년 4월 기간산업체로 지정됐다.

1975년 3월 신진자동차에서 독립하고, 5월 기업을 공개한 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7년 동아자동차공업(주)로 사명을 변경하고 자회사 동아정기를 설립했다. 경기도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부평 공장도 세웠다.[11] 1979년 평택군 송탄읍 칠원리 목장 부지 일부에 공장을 세웠다.

하동환버스는 60년대 시내버스 시장의 최강자 였지만, 1967년 신진자동차에 합병된 후 토요타 버스를 리이센스 생산하면서 자체 버스 모델 생산이 11년 동안 증단되었다 . 그 사이 1977년 새한자동차에서 대한민국 버스사에서 길이 남을 미스터피스인 BF101를 출시하여 시장을 석권했고, 비슷한 현대자동차 시내버스 모델의 본격적인 시초인 HD170도 출시되었다. 동아자동차는 11년만인 1979년 다시 일반버스(시내버스) 독자 모델을 출시했지만 BF101과 HD170의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12]

하지만 대신 1977년부터 닛산디젤(현 UD트럭)과 기술 제휴로 생산한 동아자동차의 HA/HR 고속버스 시리즈가 UD엔진의 믿음직한 성능과 내구성에 힘입어 고속버스 시장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그리고 1978년부터 닛산디젤과 기술제휴로 생산한 국내 최초의 트레일러 차량인 DA10 트랙터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고 DA트럭 시리즈로 한동안 국내 트레일러 시장을 석권했다.

1980년엔 방위산업체로 지정됐다.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1981년 특장차 전문 업체로 지정됐다가 이듬해에 해제됐다. 참고로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때 기아산업과 가칭 한국자동차로 합병을 시도했으나 흐지부지됐었다.

1984년 (주)거화[13]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4WD 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5년 거화 부산 공장 부지를 럭키개발에 매각하고[14] 생산 라인을 평택공장[15]으로 통합시키고 1986년 거화와 거화서비스, 거화개발 3사를 합병하고 서울 중구 저동2가 24-1에 신축된 쌍용빌딩[16]에 본사를 이전했다.

하동환 회장은 창업 이래 '무차입 경영' 을 선호해욌으나,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신차 개발에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부담을 느꼈다. 거기다 모기업을 거느린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 신차 개발에 투자했지만 동아자동차는 자금력에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거화 시절부터 개발한 코란도 훼미리가 5공 정부의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에 의해서 출시가 불허됐다. 이미 거화 인수에 많은 자금을 쏟았고, 거화 때 개발하기 시작한 코란도 훼미리를 마저 개발하는 데 350억을 투자했지만 정부의 불허로 코란도 훼미리를 출시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하동환 회장은 동아자동차를 쌍용그룹에 매각하기로 결심했고, 1986년 11월 쌍용그룹에 동아자동차 지분을 매각하면서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뗐다.[17] 이후 88년 11월까지 동아자동차라는 이름이었고 이후 쌍용자동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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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쌍용자동차 시절 (1988. 3.~202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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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SSANGYONG MOTOR COMPANY
한문: 雙龍自動車 株式會社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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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1988년 3월 ~ 2023년 3월 21일
업종명 승용차 및 기타 여객용 자동차 제조업
본사 경기도 평택시 동삭로 455-12 (칠괴동)
직원 수 4,517명 (2021년 12월 31일 기준)
자본금 7,492억 10,000원 (2021년 기준)
매출액 연결: 2조 4,293억 2,770만 801원 (2021)
별도: 2조 4,172억 3,098만 8,886원 (2021)
영업이익 연결: -2,612억 6,079만 6,567원 (2021)
별도: -2,606억 9,156만 8,697원 (2021)
순이익 연결: -2,579억 4,441만 4,695원 (2021)
별도: -2,578억 1,874만 7,159원 (2021)
자산총액 연결: 1조 8,629억 6,992만 4,462원 (2021)
별도: 1조 8,577억 6,196만 6,770원 (2021)
부채총액 연결: 1조 9,435억 6,658만 1,588원 (2021)
별도: 1조 9,343억 75만 2,314원 (2021)
[clearfix]

3.1. 쌍용그룹 시절 (1986. 11.~1998. 3.)

파일:쌍용자동차 로고(1986-1989).svg
쌍용그룹 산하 시절 초기 CI (1986~1989)
파일:쌍용자동차 로고(1989-1998).svg
쌍용그룹 산하 시절 후기 CI (1989~1998)[20]
파일:쌍용자동차 내수용 로고.svg
대우그룹 인수 직전 CI (1998, 1999~2023)[21]

1986년 11월, 쌍용그룹이 하동환 회장의 동아자동차 지분 19.8%를 전량 인수하여 경영권을 장악했다.

쌍용그룹의 젊은 회장 김석원자동차광으로 유명했다.[22] 그는 이미 13세 때부터 불법적으로 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레이싱스쿨을 수료했고, 스스로 "레이서들과 겨룰 자신이 있다" 고 공언하곤 했다. 또 자동차를 직접 분해·조립할 수 있을 만큼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소문에 따르면 직접 집에 공작실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차나 기계를 분해했다가 조립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각종 자동차를 수집하여 보유 자동차만 60여 대[23]에 이르렀고,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을 이용해 자신이 수집하는 자동차를 수리, 정비, 튜닝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보유 자동차로 자동차 박물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쌍용그룹이 망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86년 하동환 회장이 동아차를 매물로 내놓자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곧바로 동아차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쌍용그룹과 동아자동차는 같은 건물에 본사가 입주했던 데다 쌍용그룹에서 동아차의 믹서 트럭을 대량 구매해오던 터라 평소부터 하동환 회장과 김석원 회장은 친분이 깊었다. 당시 자동차 사업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삼성도 인수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를 운영할 꿈에 부풀었던 김석원 회장은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제시했고, 1조 원에 가까운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하동환 회장의 지분 19.8%를 전량 인수하여 경영권을 장악, 1986년 11월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에 나온 동아 시세는 약 150억 원을 넘는 수준이었으나 김석원 회장이 프리미엄을 얹어 215억 원에 인수했다고 보도됐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무려 296억 원에 인수했다고 한다. 김석원 회장이 이렇게 시세에 두 배 가까운 가격을 배팅한 이유는 삼성그룹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아를 인수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개발 명목으로 포르쉐 959를 수입한 것이었다. 국내에 단 한 대뿐인 차로 유명한데, 1986년 12월 인천 항에 도착해 연구소 직원들이 차를 인수받자마자, 그는 인천으로 달려와 차를 타고 서울로 유유히 사라졌다. 언론에 그는 코란도와 무쏘를 타고 다니는 회장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포르쉐 959와 벤츠 S 클래스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동아자동차는 덤프트럭, 믹서트럭, 트랙터 트럭, 소방차 등 특장차와 버스를 만들던 회사였고, 쌍용그룹에 인수되기 2년전에 거화를 인수해서 처음으로 지프 (SUV)를 생산했다. 하지만 자동차 광이었던 김석원 회장의 관심사는 특장차나 버스가 아니라 세단, 그것도 평범한 대중 세단이 아니라 스포츠카와 럭셔리 고급 세단이었다. 하지만 그 간극은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너무나 컸다.

김석원 회장은 동아를 인수한지 반년만인 1987년 6월 영국의 소규모 스포츠카 회사인 팬더 웨스트윈즈의 지분 80%를 인수했다. 팬더는 이미 1970년대 말 부도가 났고, 이를 진도모피그룹 회장 김영철이 인수했다가 1987년 김석원 회장이 다시 인수한 것이었다. 1988년 3월 팬더의 경영권을 최종 확보한 김 회장은 영국산 칼리스타를 통째로 한국 평택공장에서 생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영국에 있던 생산 설비를 평택공장으로 가져왔다.[24]

1987년에 기술 연구소를 세웠다.

1988년 3월 상호를 '동아자동차'에서 공식적으로 쌍용자동차(주)로 변경했다.

1988년 11월 21일, 거화 시절인 1982년부터 개발이 시작돼 동아자동차 시절 출시하려다가 5공 정권의 불승인으로 출시하지 못했던 코란도 훼미리가 드디어 출시됐다.

동아차를 인수한 김석원 회장은 "국가의 3대 기간산업인 자동차 산업까지 일본의 기술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일본 회사와는 기술 제휴를 맺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시 국내의 자동차 회사들은 대부분 일본 자동차 회사들과 기술 제휴를 맺어 일본 차량을 라이센스 생산하거나 엔진과 변속기 등 핵심 부품들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기술력이 가장 딸렸던 동아자동차는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서 일본 트럭과 버스들을 사실상 그대로 들여오거나 일본 버스 차체와 엔진의 조합을 약간 바꾼 모델이 대부분이었다. 김석원 회장은 당시 동아자동차가 기술 제휴를 맺고 있던 후지 중공업, 이스즈, 닛산 디젤[25] 등 일본 자동차 업계와의 기술 제휴를 전부 일방적으로 끊어버렸고, 이로 인해 쌍용자동차는 기존 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사실 쌍용자동차는 이전 하동환 회장 시절 버스, 트레일러 전문 회사였고, 쌍용이 인수하여 SUV와 승용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봤자 전체 자가용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미미했다. 반면 동아자동차 시절부터 나오던 트럭, 버스 모델들은 시장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버스, 트럭, 트레일러들은 모두 일본 자동차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석원 회장이 일방적으로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단절하고 이들 모델을 차차 단산시키면서 쌍용차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동아자동차 시절 트럭과 버스들은 쌍용 마크를 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기는 했다. 하지만 쌍용이 인수한 후 일본과 더이상 기술 제휴를 하지 않았기에 버스, 트럭 모델들은 시장에서 빠르게 뒤쳐지기 시작했고 곧 도로나 현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 되고 말았다.

사실 하동환 회장 시절 말기에 동아자동차는 스바루와 기술 제휴로 준중형 세단인 레오네 3세대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스바루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자동차공업 합리화정책 폐지가 예고된 시점에 이를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김석원 회장에 의해 취소됐다. 표면적으로는 일본 업체와 기술제휴를 하기 싫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김석원 회장이 추구하던 최고급 럭셔리 승용차와는 영 딴판인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26] 당시 일본 자동차는 주로 저렴한 대중차를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스바루는 특히 주력 모델 레오네와 렉스, 삼바같은 경차 라인업을 비롯한 저가형 소형차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김석원 회장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27].

만약 김석원 그룹회장이 고급 승용차에 대한 집착을 뒤로 미루고, 레오네를 출시했다면 쌍용차의 운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제 막 마이카 시대에 들어서고 있던 국내에서는 소형차와 중형차가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SUV와 고급 승용차의 판매량은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현대 엑셀/프레스토, 대우 르망, 기아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들이 폭발적인 판매량을 보이며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의 매출 상승을 견인하고 있었으며, 199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소득수준 향상과 함께 현대 쏘나타, 대우 에스페로, 기아 콩코드, 기아 캐피탈 등 중형차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국내 자동차에는 준중형급 승용차 세그먼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소형차인 프레스토, 르망과 중형차인 프린스, 쏘나타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했는데, 스바루 레오네는 준중형급이면서 준중형치고 긴 차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차에 대한 선호가 분명한 한국시장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이후 스바루 레오네와 같은 급 차량인 현대 엘란트라/아반떼가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김석원 회장의 쌍용차는 당시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량이 매우 낮았던 SUV에만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역시 판매량이 매우 낮은 고급 승용차로 진출하려 했다.[28]

어쨌든 당시 독자적인 기술력이 부족했던 쌍용차는 해외 자동차 회사와의 기술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고, 김석원 회장은 유럽 자동차 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때도 김석원 회장은 대중적인 브랜드들 대신 독일의 벤츠, 스웨덴의 볼보, 프랑스의 르노 (르노 25) 등 고급차 브랜드와 기술제휴를 시도했다.

김석원 회장은 볼보, 르노 등에게 기술 제휴 및 합작 생산 (라이센스 생산)을 타진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쌍용자동차는 르노의 고급 플래그십 세단 르노 25 라이센스 생산을 르노에게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당한 후 대신 수입 판매 협약을 맺어 1988년 정식으로 국내에 출시했다. 르노 25는 당시 가격이 무려 5,200만원이나 했는데, 이는 현대 자동차의 1세대 그랜저 풀옵션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1세대 그랜저의 위상이 현재의 에쿠스, G90과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르노 25는 엄청난 고가였고, 당시 강남 아파트 30평 아파트 1채 가격과 맞먹는 것이었다. 르노 25는 2년간 고작 13대가 팔리며 처참하게 실패했다.[29]

이후 김석원 회장은 스웨덴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볼보와 고급 승용차 생산 기술 제휴를 시도했다. 1989년 4월 김석원 회장은 볼보사의 플래그십 고급 세단 모델인 볼보 240[30]의 한국 라이센스 생산을 제안했다. 그해 7월 쌍용측은 볼보와 가계약이 맺어졌다고 발표했고, 1989년 8월에는 1991년부터 볼보 240 2,000cc, 2,300cc 모델을 국내 생산한다고 밝혔다. 쌍용그룹에 따르면 처음에는 주요부품을 스웨덴에서 수입하여 생산하지만 1994년까지 부품 국산화율을 98%로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1991년 7,000대, 1992년 1만5,000대, 1994년 4만대를 판매할 예정이며, 1993년부터는 수출에도 나설 것이라 했다. 아울러 1994년 이후 볼보와 합작 연구개발 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89년 12월 쌍용그룹은 볼보와 기술도입 계약이 마무리 단계이며 1990년초에 정식계약할 것이라 밝혔다. # 하지만 1990년 3월 볼보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

르노, 볼보에 연거푸 퇴짜를 맞은 후 김석원 회장은 다급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고급 럭셔리 세단을 생산하기 위해 유럽 자동차사와 기술 제휴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 쌍용은 뷰익, 폭스바겐, 피아트 등 유럽과 미국 자동차회사들을 닥치는대로 접촉하여 기술제휴를 모색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

승용차 기술도입이 번번히 좌절되자, 김석원 회장는 전략을 바꾸어 상용차 기술도입을 위해 벤츠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독일메르세데스 벤츠와 상용차 및 디젤 엔진 기술제휴가 성사됐다. 하지만 처음에 벤츠와 맺은 기술 제휴는 승용차와는 무관했고, 트럭, 버스, 승합차 등 상용차 부문이었다.

어쨌든 김석원 회장은 벤츠와 상용차 기술 제휴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일본차 기반의 동아자동차의 트럭, 버스 모델들을 단산시킬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1993년부터 1995년에 걸쳐 기존 동아자동차 시절부터 주력 모델이었던 일본차 기반의 DA 트럭에어로 버스를 차례로 단종시킨 후 벤츠 기반의 SY트럭 (메르세데스 벤츠 SK 기반), 트랜스타 (메르세데스 벤츠 0404 기반), 이스타나 등이 잇달아 출시됐다. 물론 벤츠와 최초로 성사된 것은 트럭 상용차 기술 제휴였지만 많은 트럭 회사를 두고 굳이 벤츠와 제휴한 것은 결국 벤츠와 승용차 부분까지 기술제휴를 맺으려는 복안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고, 얼마 후 실제로 현실화됐다.

쌍용자동차의 정점은 1991~1992년경이다. 1992년 당시 언론 인터뷰를 보면 김석원 회장은 쌍용자동차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시점부터 이미 쌍용자동차에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1992년 쌍용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은 1.6%에 불과했다. 특히 1991년 현대정공이 코란도와 매우 유사한 갤로퍼를 출시, 크게 성공하면서 코란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코란도는 당시 쌍용자동차의 사실상 유일한 생산 차종이었지만, 이미 개발된지 6년 가량 지난 모델로, 갤로퍼는 모든 면에서 코란도와 넘사벽이었다.

현대 갤로퍼 출시로 쌍용자동차가 큰 위험에 처한 1991년~1992년에도 김석원 회장의 관심은 계속해서 고급 승용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쌍용을 인수한 직후부터 김석원 회장의 대부분의 관심과 노력은 럭셔리 세단을 출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석원 회장이 기술 제휴를 추진했던 볼보, 르노, 벤츠 모두 럭셔리 세단을 생산하던 회사들이었다. 르노의 경우 현재는 대중차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김석원 회장이 르노에서 관심을 가진 모델은 오직 르노 25 뿐이었는데, 르노 25는 당시 벤츠, BMW, 아우디, 볼보 못지 않은 고가의 플래그십 세단이었다.[31]

현대 자동차의 갤로퍼로 타격을 입은 김석원 회장은 이제 SUV가 아닌 승용차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보통 판매량이 높고 대중적인 세그먼트부터 시작하여 고급차로 급을 올리며 확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쌍용은 정반대로 최고급 대형 세단부터 출시하고 이후 중형차, 소형차로 내려오며 라인업을 확장한다는 신박한 전략을 세웠다. 쌍용차는 승용차 개발 경험이 없었다. 가지고 있던 30여대의 차 중에서 벤츠 S600을 주로 탔던 김석원 회장은 벤츠에게 끈질기게 기술제휴 러브콜을 보냈다. 처음에 벤츠 측에서 거절했으나 김석원 회장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벤츠도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1992년 벤츠와 가솔린 엔진 기술 제휴를 맺었다.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은 직후인 1992년 '월드카 프로젝트(W)', 즉 체어맨 개발을 시작했다. 이어 1993년 초 '이노베이션 원년'을 선포하며 벤츠랑 승용차 생산에 합의했다. 김석원 회장은 수시로 체어맨 개발 현장을 드나들며 엔지니어들을 독려하며, 최고급 제품의 기본 특질을 설파했다고 한다.[32]

1993년 8월 SUV 무쏘를 출시했다. 코란도가 사실상 거화-동아자동차가 완성해 놓은 차라면, 무쏘는 김석원 회장이 처음부터 관여해서 만든 차였다. 쌍용은 무쏘를 출시하며 벤츠와 기술 제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무쏘의 출시로 다시 갤로퍼와의 경쟁에 불을 지피게 되었고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 해 11월 벤츠와 대형 디젤 엔진 조립생산 계약을 맺었다.

1994년 6월 창원에 엔진공장을 준공하여 여기서 엔진을 생산하였다.[33]

쌍용 김석원 회장은 1991년 2월 벤츠와 기술제휴 계약을 맺은데 이어, 1992년 11월 벤츠와 자본합작 계약을 체결하는 등 벤츠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이때 김석원 회장은 "경영권이 침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벤츠사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고 지시했다. # 세간에서는 쌍용이 자발적으로 벤츠와 불평등 계약을 맺었다는 평을 들었고, 불평등 계약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김석원 회장도 이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석원 회장은 "그랜저와 경쟁할 고급승용차 W카 프로젝를 위해서는 (벤츠의) 완벽한 기술이 필요하다."면서 체어맨의 출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벤츠와 불평등 계약을 맺은 이유를 에둘러 밝혔다.

그러나 유럽형 최고급 승용차를 출시하겠다는 열망과 함께 일본상용차와 기술제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벤츠와 기술제휴에 집착했던 김석원 회장의 경영 방침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원래 쌍용차는 버스, 트레일러 등 상용차 시장에서 매출을 가져오던 회사였다. 하지만 김석원 회장 취임 이후 일본과 기술제휴를 파기하면서 쌍용자동차의 버스와 트레일러는 급격히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판매량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사이 김석원 회장은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모든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벤츠와 불평등 계약을 맺었지만 그렇게 일본과 기술제휴를 끊은지 약 10년만에 벤츠 기술로 탄생된 트레일러와 버스 신모델은 시장에서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신뢰성과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상용차 시장에서 벤츠와 기술제휴로 생산된 쌍용의 고급 상용차들은 가격만 비쌌고 이를 구입하려는 법인은 거의 없었다. 이미 이전에 상용차 시장에서 쌍용차는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반면 김석원 회장에 그렇게 신경을 썼던 최고급 럭셔리 세단 체어맨의 출시는 아직 요원한 상태였다. 1992년 이후 쌍용차의 적자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80년대말 당시 한국 자동차 시장의 거의 유일한 SUV였던 코란도로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곧 현대 갤로퍼에 완전히 존재감을 잃었다. 이후 쌍용자동차는 사실상 무쏘 모델 하나로 버티는 실정이지만, 무쏘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나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벤츠의 핵심 부품과 기술로 만들어진 무쏘는 혹독할 정도로 높은 벤츠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나면 남는게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김석원 회장은 적은 투자비로 확실한 큰 판매량을 가져올 수 있는 큰 시장을 외면한 채, 벤츠와 불평등 계약을 맺어 엄청난 로열티를 지출하면서 고급차에 집착했고, 그렇게 상용차와 고급 승용차라는 전혀 상반된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넣었지만, 쌍용이 망할 때까지 거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경쟁사들의 눈부신 기술성장은 벤츠 기술을 자랑하던 무쏘를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반면 무쏘는 자금이 어려운 회사 사정으로 모델 체인지 없이 버텨야 했고 계속 노후화되어갔다.

1995년 독일에 첫 해외 판매법인 '쌍용 오토모빌 도이칠란트' 를 세우고 1996년에는 중국 베이징에 첫 해외 A/S 지사를 세웠고, 뉴 코란도를 출시했다. 쌍용자동차는 4WD 차량을 대표하는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또한 기술제휴를 Ra맺으며 동남아시아 등 일부 지역에 벤츠 대신 저가 라인업을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이어진 적자에 체어맨의 막대한 개발비[34]까지 더해지면서 3조 4,000억원(!)이라는 엄청난 빚이 쌍용차 앞에 놓였다.[35] 사실 쌍용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은 시멘트[36], 제지[37], 정유[38] 등 경기 부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업종이어서 쌍용자동차를 제외하면 대부분 꾸준히 흑자 상태였고, 일부 적자 상태의 계열사도 크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채무와 적자가 누적되지만 이미 시작된 신차 개발로 인해 천문학적인 투자가 계속되어야 했고 신차를 판매하기 위해 라인을 새로 까는 일에도 엄청난 투자금이 계속적으로 들어가야 했다. 또 벤츠와 파격적인 조건으로 기술제휴를 맺은 대가로 벤츠에 지불해야 하는 기술료도 엄청났다. 이러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쌍용 김석원 회장은 계속해서 그룹의 자산을 담보로 잡으며 투자비를 마련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그룹 임원들 사이에서는 자동차를 접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1994년 무렵 다수의 그룹 임원들이 자동차 산업을 접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일부 임원들은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오히려 김석원 회장에게 자동차산업에 대한 장래빛 미래만 제시하며 회장의 눈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김석원 회장 또한 이런 간신들을 중용하여 그룹 핵심에 두루 포진시켰고, 자동차 산업을 접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임원들은 내쳤다. 이들의 다수는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됐다.[39]

90년대 중반 쌍용그룹의 대부분의 자산이 은행 담보로 들어가게 되었고 더이상 자금을 끌어모을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신차 개발을 마무리하고 생산 라인을 까는 등 들어가야할 돈이 태산이었다. 기존 채무는 이자의 이자가 붙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결국 1995년경 김석원 회장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너무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1995년 김석원 회장은 비밀리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자동차 매각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1996년 말 쌍용자동차 매각설이 본격적으로 나왔다. 실제로는 1995년부터 이미 매각을 추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쌍용차가 인수를 제의하기 직전에 이미 삼성자동차가 출범한 상황이었고, 삼성차에 엄청난 시설 투자가 들어간 상황에서 추가로 쌍용차를 인수하는 것에 상당히 신중했다. 1996년 말 삼성그룹쌍용그룹이 쌍용자동차 인수에 합의했으며, 1997년 1월 삼성그룹은 쌍용자동차 인수를 위해 정부의 금융/세제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삼성의 인수는 사실상 결렬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한편 김석원 회장은 삼성과 매각을 협상하는 와중에 대우그룹에도 인수를 타진했는데,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이 경쟁이 붙으면 인수가가 뛸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후 김석원 회장의 이중플레이 사실을 알고 격노한 삼성 이건희 회장이 매각 협상을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삼성이 여론의 눈치를 보고 쌍용 인수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기도 했다. 삼성의 공식 입장은 쌍용자동차의 엄청난 부채로 인해 인수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대우 김우중 회장은 처음에는 높은 값을 쳐주다가 삼성이 발을 빼자 인수가격을 후려쳤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김석원 회장은 대우와의 매각협상을 중단하고 벤츠와 협상에 목을 걸었다.

이렇게 김석원 회장이 쌍용차 매각을 두고 왔다갔다 하는 동안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자에 이자가 더해지며 부채는 천문학적 규모로 늘어났다. 게다가 국제수지 악화로 1996년 금리가 폭등하면서 쌍용의 부담은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쌍용그룹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쌍용차를 팔아 돈을 갚으라고 재촉했다.

삼성, 대우와 인수 협상이 꼬여갈 무렵 김석원 회장은 독일의 벤츠에도 인수를 타진했다. 삼성 및 대우와 인수 논의가 결렬된 후 김석원 회장은 벤츠 쪽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당시 쌍용그룹은 벤츠가 쌍용차 인수에 긍정적인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1997년 7월말 벤츠가 쌍용이 실시하는 증자에 1천6백억원을 투자하여 지분이 45%로 늘어나 2대 주주로 등극하기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어 9월 벤츠의 인수 내지는 자금 지원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체어맨이 출시되기 며칠 전인 10월 7일과 9일 사이 벤츠가 쌍용차의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보도가 주요 언론사를 통해 일제히 보도되었다. 하지만 벤츠는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높아지자 발을 뺐고, 위와 같은 보도가 나온 바로 다음날인 10월 10일, 벤츠사는 대변인을 통해 "다임러 벤츠사가 쌍용차의 지분을 추가 매입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현재 이와 관련하여 쌍용차와 전혀 아무런 협상이 없는 상태"라면서 강력 부인했다.

벤츠 인수 루머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997년 10월 14일 드디어 염원의 체어맨이 출시됐다.

체어맨이 출시된지 50일만인 1997년 12월 3일 외환 위기가 터졌고, 재계 6위였던 쌍용그룹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우그룹과 긴급하게 협상을 진행한 끝에 IMF가 터진지 일주일만인 12월 9일 대우로 쌍용차를 매각하는 것이 결정됐다. 당시 양측 모두 너무나 긴박하게 협상을 진행하는 바람에 실사조차 건너뛰었다.

언론에 따르면 이미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기 전 쌍용그룹의 부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쌍용차 매각 협상의 실무 권한은 쌍용그룹에서 채권단으로 넘어간 상태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우그룹과의 매각 협상의 주채도 채권단이었다고 한다. 김석원 회장보다 훨씬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채권단은 쌍용차 매각을 위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 협상하기 위한 노력을 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나 늦은 상황이었고 대안이 대우 밖에 없다는 현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김우중 회장의 조건을 상당부분 수용하며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1998년 1월 인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됐다. 쌍용차를 매각하면서 부채는 쌍용과 대우가 각각 반씩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쌍용그룹은 쌍용차가 남기고 간 1조 8천억원의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공중 분해되어 사라졌다.

3.2. 대우그룹 시절 (1998. 1.~199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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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쌍용자동차 로고(1998-1999).svg
대우그룹 산하 시절 CI (1998~1999)[40]

1998년 1월 대우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다. 사실 외환위기 시기 대우그룹도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기존의 대우자동차가 있는데도 굳이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것에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특히 대우그룹이 쌍용그룹의 빚 가운데 절반인 2조원 가까이 떠안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인수는 김우중 회장과 김석원 회장의 비밀 협상으로 진행된 까닭에 고위 임원들도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쌍용그룹은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삼성과 대우 등에 자동차 사업 매각을 타진하고 있었다. 대우그룹은 처음부터 쌍용자동차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미 대우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해도, 안해도 좋다는 식으로 배짱을 튀기며 협상을 하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쌍용 채권단은 하루가 다르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에 쌍용차를 필사적으로 매각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외환위기가 터지자 대우그룹과 삼성자동차 역시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대우자동차 역시 외환위기가 터지자 발을 빼려 했었다. 그러나 쌍용 채권단은 어떻게 해서든 쌍용자동차를 매각하려 했고, 이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대신 그걸 담보로 대출을 해준다면 쌍용차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41] 쌍용 채권단이 김우중 회장의 요구를 수용하며 외환위기가 터진지 일주일 후에 인수가 전격 합의된 것이다. 김우중 회장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면 벤츠로부터도 자금을 끌어올 수 있다고 보았다. 대우자동차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후 쌍용자동차의 모든 설비를 담보로 대출을 했다. 하지만 그 돈들은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베트남으로 도주할 당시 전부 들고 가 버렸다.

대우자동차에 인수된 이후 내수판매부문은 대우자동차판매로, 수출부문은 (주)대우 무역부문, 연구 및 A/S부문은 대우자동차로 각각 넘겼다.

1999년형부터 무쏘, 체어맨, 이스타나, 뉴 코란도가 기존의 쌍용 자동차의 로고 대신 대우자동차의 로고로 출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무쏘와 체어맨에 당시 대우자동차 특유의 삼분할 그릴이 적용되어 고급차였던 무쏘와 체어맨의 디자인이 한 순간에 살찐 레간자(...)와 바퀴 큰 누비라 스패건(...)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이스타나와 뉴 코란도는 쌍용자동차의 로고를 떼고 그릴만 남기긴 해도 이런 마수에서 피해 갔다.[42]

그러나 쌍용자동차를 인수한지 1년만인 1999년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로 역시 공중분해 수순에 들어갔다. 1999년 8월 대우그룹이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지정되면서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3.3. 워크아웃 시절 (1999. 8.~2005. 1.)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이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되었고,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쌍용차도 워크아웃을 맞으며 채권단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9년 11월 1일 1차 쌍용차 워크아웃 계획이 부결되는 등 진통 끝에 1999년 12월 14일, 쌍용차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약정을 맺으면서, 공식적으로 기업개선작업 및 경영정상화 과정에 들어갔다. 조흥은행을 주 채권은행으로 하고 있는 채권단은 2000년 1월 15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대우에서 계열분리되어 완전히 독립했으며, 소진관 대표이사, 조흥은행 출신 사외이사 등을 선임하면서 본격적인 채권단 주도의 독자 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아울러 대우차로부터 연구부문도 반환받았다. 이와 함께 대우그룹 시절에 바뀌었던 쌍용자동차 주요 차종들의 디자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쌍용차는 독자 판매망을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어 2006년까지 대우자판에 위탁 판매를 하는 등 2004년까지 대우 영업망을 주로 이용했으며, 이에 따라 대우 측을 통해 판매되는 차량에는 대우 엠블럼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카탈로그에도 2004년까지 쌍용자동차 로고와 대우자동차판매 로고가 같이 들어가 있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정부는 대우차와 쌍용차를 각각 분리하여 해외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채권단은 대우차와 쌍용차의 동시 매각을 희망하여 이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쌍용차와 대우차의 독자 매각을 추진하였다. 이후 대우차 인수전에는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폭스바겐, 현대자동차 등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결국 GM이 인수전에서 승리했다. 반면 쌍용차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워크아웃이 시작될 무렵인 1999년 11월 채권단은 1년 후인 2000년말까지 쌍용차의 매각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밝혔지만 실제로 쌍용차가 매각되고 워크아웃을 졸업한 것은 무려 5년 후에야 이루어졌다.

쌍용차가 대우에서 분리된 이후 2001년 3월 1일자로 대우차 지정정비사업소에서 해오던 쌍용차 위탁 정비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쌍용차는 독자 정비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쌍용차 차주들은 한동안 무상보증수리 및 AS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대우자판과 다시 협상에 들어가 위탁 AS 서비스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과거 쌍용과 대우 시절을 거쳐 개발해오던 '렉스턴' 을 2001년 출시하여 대박을 치면서 2002년 겨우 위기를 벗어나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고, 2003년에 내놓은 체어맨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뉴 체어맨'도 큰 인기를 얻으며 경쟁사인 현대 자동차의 '에쿠스' 에 필적하는 판매량을 보였다. 여기에 기존에 판매하던 주력 모델들인 무쏘와 뉴 코란도가 각각 7인승과 밴 모델을 앞세워 당시 RV 열풍에 편승하여 저렴한 유지비를 앞세워 탄탄한 판매량을 계속 유지해주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후 161,000대 생산으로 정점을 찍으며 어느 정도 흑자로 꾸려가게 됐다.

쌍용자동차 역사에서 워크아웃 시절은 잘 언급되지 않는데, 사실 5년이 넘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워크아웃 시절을 거쳤다. 이는 대우그룹 산하 기간의 네 배에 달하며, 상하이자동차 산하 때보다도 더 긴, 쌍용차 역사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차지하고 있는 기간이다. 또한 90년대 이후 쌍용차 역사에 흔치 않은 흑자를 기록한 시기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경시되는 시기이지만, 오히려 쌍용자동차 역사에서 진정한 전성기에 해당하던 시기였다. 쌍용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둔 모델로 평가받는 렉스턴과 뉴 체어맨이 바로 이 시절의 모델이다. 이 두 고급 모델의 성공으로 쌍용은 승용차, SUV 양쪽에서 대한민국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 이미지를 굳혀가게 됐다.

그러나 워크아웃 시절 쌍용차의 성공을 일궈낸 체어맨, 렉스턴 모두 워크아웃 이전인 쌍용, 대우 시절에 주로 개발이 이루어진 차들이었다. 반면 워크아웃 시절 채권단 경영진이 주도해서 만든 차들은 악명높은 '로디우스', '카이런', '액티언'이다. 이 차들은 주로 상하이자동차 시절 판매됐기에 상하이차가 욕을 먹고 있지만, 실제로 이 차들은 워크아웃 시절에 상당부분 개발이 이루어졌다. 당시 쌍용을 경영하던 채권단의 무성의함을 잘 보여주는 모델들이다. 원래 채권단은 쌍용자동차를 1년 내로 정상화시켜 매각시킬 계획이었지만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아 매년 1년씩 워크아웃을 연장하던 게 2005년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채권단은 장기적인 경영 전략이 부재했고 단기적인 실적 개선에 집중했었다. 로디우스, 카이런, 액티언은 디자인이 구려서 그렇지 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채권단은 디자인 개발에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길 원치 않았고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 빨리 개발을 완료해 신차를 출시하길 원했다. 채권단은 개발하던 로디우스, 카이런, 액티언 등의 신차가 향후 많이 팔리는 것보다 저렴한 개발비로 빨리 신차를 출시해 판매 라인업을 늘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에 쌍용차를 빨리 매각해 버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워크아웃 실시 후 채권단에 의한 워크아웃이 계속 연장되는 상황이지만 렉스턴, 뉴체어맨, 코란도의 성공에 힘입어 흑자가 이어지자 노무현 정권과 채권단은 서둘러 매각을 추진했다. #

2003년말 드디어 중국 화학그룹 란싱이 쌍용자동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란싱인 인수 절차가 진행되면서 정부는 2004년 1월 1일 쌍용차를 '워크아웃 자율추진기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쌍용차 노조가 결렬히 반대하여 란싱그룹 측의 실사 등 매각 절차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매각이 무산될 경우 쌍용차는 워크아웃 중단 후 법정관리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상황이 되었다. 란싱그룹은 "노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수가 지연될 수 있다."고 밝혔고, 채권단도 노조가 실사를 방해할 경우 업무방해 등 혐의로 형사 고소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겠다는 방침을 밝히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3월말 협상이 결렬되면서 란싱그룹의 인수는 무산되었다.

이후 2004년 7월말 상하이자동차와 매각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노조는 고용안정 보장과 기술유출 우려를 이유로 매각을 강력 반대했다. 이후 노조에 대한 합병위로금 문제가 막판까지 협상 쟁점이 되어 왔으나, 결국 상하이자동차 측이 위로금의 일부를 지급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2004년 10월 26일 상하이자동차로 매각이 결정되었다. 2005년 1월 워크아웃을 공식 졸업했다.

3.4. 상하이자동차그룹 시절 (2004. 10.~2009. 1.)

2004년 10월 24일, 채권단과 중국상하이 자동차의 매각합의가 최종 결정되었다. 다만 쌍용차 노동자에 대한 '매각 위로금' 지급 문제로 본계약이 미루어졌으나, 결국 10월 28일 본계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자동차의 인수 이후 출시한 로디우스, 카이런, 액티언 등이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성능은 별 문제 없었으나 디자인 문제로 심하게 까였다. 결국 2007년 이후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하며 쌍용자동차는 다시 자금난에 빠지게 됐다.

허송세월하는 사이에 쌍용자동차의 주력인 SUV마저 현대자동차에게 추월당한다. 결국 상하이 자동차 경영진은 전형적인 먹튀 행각을 본격적으로 보이면서 자력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에 팔린 이후 짱룡자동차, 쌍놈자동차, 쌍욕자동차라고 불리며 조롱을 받았으며, 고기만 뜯긴 채 팔리는 게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매각 당시 경제계와 시민들이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부에서 국가핵심산업 해외매각을 용인한 결과로 십수년 만에 중국 자동차 생산이 한국을 앞지르고 압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는 선진국 자동차 회사 합작공장은 존재했지만 하청 조립 수준일 뿐 핵심기술은 절대로 전수하지 않는 시절이었는데 수십년간 발전시킨 국내 기술을 한 번에 통째로 넘겨준 것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쌍용자동차도 벤츠의 의존도가 그때까지도 너무 높아 파워트레인 기술은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이었고 이마저도 오래 된 구형 기술력이라 직분사 터보 등 최신 기술을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는 점이다.

3.4.1. 쌍용차 기술유출 사태 (무죄)

우려했던 대로 기술 유출이 발생하며 인수 시 약속했던 재투자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기술 유출 관련, 국가에서 지원한 연구 개발 자금을 사용해 쌍용차가 개발하게 한 디젤 하이브리드 기술이 유출됐음이 2006년 11월 국가정보원에 의해 적발되어 문제시됐다.

2009년 11월 11일, 기술유출 의혹이 검찰로 넘겨졌다. # 하지만 2012년 임직원들은 1심 무죄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 # 상고심 이야기는 없는데, 상고 기각 된 듯하다.

해당 재판을 맡았던 법무법인 측에서 무죄 판결의 요지를 요약한 자료가 있다.
  • 유출된 자료는 2009년 11월 시점으로도 기술 가치가 크지 않았다.
  • 유출된 자료는 자회사와 모회사 간의 통상적인 기술교류의 범위를 넘지 않았음이 이른바 '경영판단의 원칙'[43]에 의해 인정됐다.
  • 유출된 기술은 해외 자료나 인터넷 등에 동일한 수준의 자료가 유통되고 있었다.
  • 유출된 기술은 현대자동차에서는 비밀로 관리하지 않는 내용이다.

결국 거창하게 '기술 유출'을 적발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크게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던 것. 2010년대 후반 들어 세계 자동차 시장이 급격하게 내연기관에서 전기자동차 및 하이브리드로 넘어가게 됐다. 그 와중에 쌍용차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44]

3.5. 법정관리, 쌍용차 사태 (2009. 2.~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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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발 세계금융위기가 오면서 유동성 위기를 맞아 2009년 1월 9일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고, 2월 6일부터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됐다.

쌍용차가 다시 위기에 빠지자 참여정부 당시 2004년 정부와 채권단이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매각한 것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당시에도 상하이차가 기술만 빼먹고 먹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가액의 절반가량 밖에 안되는 헐값으로 상하이차에 매각이 강행됐다. 당시 주채권은행인 조흥은행신한금융지주로 매각된 후 조흥은행이 채권을 헐값에 매각했었다. 이러한 책임론이 불거지자 당시 쌍용차 매각에 관여했던 관계자들은 당시 조흥은행이 부실자산을 빨리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상하이차를 제외하고 마땅한 매수 희망자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

한편 진보신당 심상정 의원이 2009년 1월에 공개한 외교부 대외비 문서에 따르면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를 털고 가기로 결정한 이유로 기술 유출에 예민한 노동자들의 비협조, 검찰의 미흡한 조사, 정부의 비협조, 금융기관의 무관심이었음이 밝혀졌다. 또 상하이차가 4년 동안 기술력을 모두 흡수한 다음 먹튀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이명박 정부가 쌍용자동차 고의부도를 야기했다는 의혹[45]이 제기됐다. 강경한 노조를 정리해[46] 다른 기업에 매각하는 방향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후, 노동자 옥쇄파업 등이 잇달았으며 2010년까지 노동자 23명이 자살한 상태였다.

2009년 5월부터 약 두 달 반 동안 노동자 옥쇄파업으로 차량 생산이 중단됐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당시 그나마 팔리고 있는 차량은 각 영업소에서 보유 중이던 차량들 뿐이었고, 생산이 완전히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쌍용차 위기에 기름을 끼얹고 있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옥쇄 파업으로 인해 공장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잔류가 확정된 직원들을 모아서 사측이 노조와 충돌시키고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섣불리 진압을 시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도장 공장 때문. 여기에서 사고가 터진다면 그냥 망하는 길밖에 없다. 도장 공장이 폭발한다면 평택 상당부분이 지도에서 지워지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결국 노사간 합의가 이뤄져서 파업은 중단됐지만 장기간 파업으로 인해 차량만 3천억 원 이상 손실이 났고, 여기에 서비스, 판매망, 품질 관리, 이미지 붕괴가 심각하여 이전의 쌍용그룹 시절로의 회생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석박사급 연구원 연봉 및 처우가 생산직보다 떨어지는 사례가 많은 데다가[47][48] 회사의 비전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는지 연구진들의 대규모 이직까지 발생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메르세데스-벤츠제 파워트레인과 체어맨 플랫폼은 수출과 원가에 장벽[49]이 되어 기술은 사오면 된다 식 기술관[50]공돌이 홀대의 결과를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렉스턴이 너무 우려먹는다고 탑기어 잡지 기자 한 명이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쌍용 법정관리 측은 M&A를 추진했고, 2010년 5월 M&A 공고를 냈다. 마힌드라, 르노-닛산 컨소시엄 등이 입찰에 참여했다. 때문에 2010년 5월 당시에 르노-닛산 얼라이언스가 인수한다는 떡밥이 돌았다. 그러나 인도 마힌드라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3.6. 마힌드라그룹 시절 (2011. 1.~2020. 12.)

3.6.1. 일시적인 부활

2010년 8월, 인수 최고가액을 제시한 인도 마힌드라 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MOU가 체결됐다. 이후 2010년 11월 인수 본계약이 체결됐다. 2011년 1월 법원은 M&A 및 회생절차를 승인하여 M&A가 사실상 마무리됐으며, 이후 법에 명시된 일정에 따라 회생채무 변제가 완료, 2011년 3월 회생절차가 공식 종료됐다.

이런 난관을 겪고 있어서인지, 부품 수급 상태가 매우 나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가장 많이 팔리는 주력 모델인 액티언 스포츠의 테일램프가 깨졌는데, 단순히 교체만 하면 될 문제를 부품이 없어서 수리를 못 할 정도였다.

이미 2010년 들어 생산이 거의 안정화되어 부품수급 문제는 거의 해결된 상태라고 하나, 2009년 파업 이후에도 한동안 대다수 노조원은 복귀하지 못했고, 무수한 희망퇴직과 강제해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실직했다. 그 이후 이듬해까지 해고 노동자 자살이 계속 발생한 바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회사와 보험사 등지로부터 손배가압류 압력에 시달리고 블랙리스트로 인해 타 기업에 재취업마저 못했다. 다만 주류 언론에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해고된 노동자들이 아직 복직되지 못한 상황에서 신규채용을 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2013년 1월 10일에 노사가 무급휴직자 455명 복직에 합의했다. 3월 1일 455명이 일괄 복직하며 회사가 좋아진다면 희망퇴직자 1,900여 명과 해고자 200여 명 등 나머지 퇴직자들도 단계적 복직 가능하다고 한다. 모기업인 마힌드라 그룹에서 4~5년 이내로 9억달러의 기술 개발 투자를 밝혔다.

2013년 14만 5,649대를 판매해서 매출 3조 4,849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올렸다. 다만 영업손실은 89억 적자이지만 2011년 1,412억 원 적자, 2012년 990억 적자를 보던 상황에서 매년 적자를 축소하여 2014년은 흑자 전환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북미시장 진출을 고려해 회사명과 로고를 바꿀 예정이었다. [51]

2014년 2심 재판에서 법원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11월에 대법원은 5년 전 정리해고에 대해 적법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4년여 후 양승태 사법농단 사건으로 KTX 여승무원 해직사건 판결 등과 함께 해당 판례가 재조명됐다.

노사 협상이 타결되어 2017년부터 해고자들을 단계적으로 복직한다고 하지만, 2018년 3월에 와서 사측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복직을 정상적으로 해주지 않고 있다. 해고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은 매주 문화제 등을 열거나 회사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등 계속해서 항의했다.

2015년 1월 티볼리 가솔린을, 7월에는 디젤 및 4WD를 출시했다. 이후 티볼리는 렉스턴 이상 대박을 터뜨리며 효자모델로 불리고 재정을 어느정도 살리는데 한 몫했다. 디자인, 실내공간, 편의사양 등이 동급 대비 괜찮은 수준이기 때문인 듯 하다. 특히 실내는 탈 쌍용급. 가솔린과 디젤 모델 간 출시기간에 텀을 두어서 그런지 신차효과를 꽤 오래 본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전체로 보면 여전히 영업 적자지만, 2015년 4분기에 무려 8분기 만에 218억 흑자 전환했다. 2015년 전체로는 내수 99,664대, 수출 45,100대(CKD 포함) 등 총 14만 4,764대를 판매해 매출 3조 3,901억원, 영업손실 358억원, 당기순손실 619억원의 경영실적을 기록했다. 분기별 실적은 꾸준한 상승세를 나타냈다. 지난해 1분기 342억원, 2분기 199억원, 3분기 36억원 등으로 점차 영업손실이 줄어들다 4분기에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영업손실 358억원은 전년(769억원)에 비해 53.45% 감소한 것이다. 부채비율도 2015년 3분기 177%로 낮은 등 전망이 나쁘지 않다.
<colbgcolor=#344763><colcolor=#fff><rowcolor=#fff> 십억 매출액 영업이익 순이익 부채비율
<rowcolor=#fff> 2012 2013 2014 2012 2013 2014 2012 2013 2014 2014
쌍용자동차 2,863 3,475 3,314 -99 -10 -77 -106 -3.8 -50 152%

2016년에는 티볼리의 대활약으로[52] 흑자전환을 맞이했던 적이 있다.

2017년 9월 판매량에서는 쉐보레와 르노코리아를 제치고 내수시장 3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한국GM이 철수 논란으로 시끄러운 데다가 르노삼성도 주춤하면서 다시 내수시장 3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2019년 8월까지는 내수시장 3위를 굳히고 있다가, 9월과 10월에 르노삼성에게 3위 자리를 내주었고, 벤츠가 쌍용차보다 잘 팔렸다!

9월 14일에 사측과 노조 양측이 해고노동자 119명 전원 원상복직에 합의했다.

그런데...

3.6.2. 위기

2011년 이후 매출이 증가하여 영업손실을 대폭 축소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2017년부터 17분기 연속으로 꾸준히 적자를 지속한 끝에 2019년 8월에 임원 감축에 들어갔다. 이후 2019~2020년에 적자 폭이 더 늘어나는 바람에 결국 기업회생절차를 받고 있다.

2019년 10월 자동차 판매량 순위를 보면 셀토스가 7위, 코나가 12위, 베뉴가 20위이며 쌍용의 효자 역할을 해준 티볼리는 24위로, 코란도는 27위로 내려갔다. 이는 현대기아가 소형 SUV 시장을 아주 잘 공략하고 있는 셈. 더군다나 2020년에는 르노삼성XM3를, 한국GM에서 트레일블레이저를 생산해 2010년 이후[53] 최초로 국내 완성차 5대 메이커가 같은 라인업에서 겨루는 판이 왔다. 변혁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2020년 1월 마힌드라 임원이 직접 내한하여 시찰하고,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산업통상자원부 국장과 면담했다. 이 면담 자리에서 마힌드라가 2,300억원 가량을 순투자할테니 은행과 정부에서 금전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선 밑 빠진 독에 세금 붓기란 비판이 많으며, 결국 한국GM 수순을 밟을 것이란 우려가 많다.

2020년 4월 3일, 마힌드라는 쌍용차에 추가 투자를 하지 않는 대신 3개월간 400억원 긴급경영지원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2019년을 거치며 인도 자동차 시장은 급속도로 위축됐고, 마힌드라는 2019년 한 해에만 엄청난 판매 부진을 겪으며 구조조정을 시행중에 있다. 안방인 인도에서도 일본, 한국을 비롯한 해외 자동차 회사에 밀려 나가는 상황에서 해외 계열사에 추가 자금을 지원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산업은행 역시 단독으로 추가 대출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쟁력이 충분하다면야 추가 대출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쌍용차는 현재도 제대로 된 신차 포트폴리오[54]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2020년 4월 8일 예병태 사장은 평택시 지역 정치인들과 간담회에서 "유동성 경색으로 실질적으로 회전시킬 수 있는 현금이 0원에 가깝다"며, "4월 급여 지급을 못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정부와 금융권 지원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며 지역 정치인 조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노조도 비슷한 성명을 내고 경기도평택시가 나설 것을 촉구했다. 결국 4월 급여는 일부만 지급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2020년 4월 13일 육군에 따르면 차세대 군용차 납품 사업에서 기아가 전 차종 계약을 따냈다. 쌍용자동차에선 자사 픽업 트럭을 내세우며 상용차 부문에 납품하고, 그 판매대금을 경영 정상화에 사용하려 했으나, 이 기회 역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2020년 5월 4일 이코노미스트 기사에서는 4월 20일부터 명동 사채시장에 6월 중 만기인 쌍용차 발행 전자어음이 들어왔지만, 단 한 건의 전자어음 할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2020년 5월 15일 공시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감사인인 삼정회계법인은 존속능력 의문을 이유로 감사의견 거절을 표명했다. 사업보고서가 아닌 분기보고서에 대한 의견거절이므로 당장 상장폐지 절차에 들어가지는 않으나 상당한 위기상황으로 보인다. 산업은행 등 정부 지원 없이는 경영 정상화가 어렵다는 전망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급여조정 및 복지 삭감으로 1천억원 가량을 충당하고, 직원 연수원, 직영 정비 사업소, 직영 영업점 등 생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동산을 매각해 1,000억원 가량을 추가로 마련해 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020년 3, 4분기부터 본격적인 부채 만기가 도래하기 때문에 결국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란 의견이 많다.

결국 서울서비스센터 부지와 건물을 1,800억원에 매각했고[55][56] 부산 물류센터도 263억원에 매각했다. 연내에 안성 연수원, 대전서비스센터도 매각할 예정이다.

하지만 현재 자본대비 부채비율은 755%인데, 일반적으로 건전한 기업으로 보는 비율이 200%이내, 아무리 개막장이라 해도 500%를 초과하지 않아야 기업 활동을 위한 자금 순환이 가능하다고 본다.[57] 건전한 200%까지 부채비율을 낮추려면 1조원, 개막장인 500%까지 낮춘다 해도 6천억원이 필요하다. 즉, 외부로부터 상환이 필요 없는 순수 지원이나 아무리 못해도 초장기 저리 융자를 통해 현금을 확보해야 기업 정상화가 가능하단 이야기다. 당장 7월 말일로 700억원 산업은행 차입금 만기가 도래하고, 이외에도 연말까지 산업은행에 상환해야 하는 금액은 2,000억원이 넘는다.

동아일보와 정일권 노조위원장 일문일답에 따르면 자체적으로 근로자들 연봉을 깎아 확보한 금액이 1,240억, 서울 서비스센터 매각 대금으로 1,800억을 확보했다고 밝혔으며, 그 와중에도 코란도의 문제를[58] 정확하게 알고 J100은 이를 모두 고치고 나올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하면서 과거 명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 하다.[59]

2020년 6월 4일 렉스턴 스포츠 국군지휘차량 600여 대를 육군에 납품하기로 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는데...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차량판매 대수 확대가 급선무다.

2020년 6월 13일 마힌드라가 결국 경영권 포기를 선언했다. 2020년 6월 19일 매각 주관사로 삼성증권과 삼성증권을 통해 IB로스차일드를 선정하고 매각 절차를 개시했다. 이 두 회사는 10년 전 마힌드라 인수 당시도 매각 주관사로 선정됐던 바 있다. 중국 지리자동차[60], 중국 BYD[61], 포드[62], 베트남 빈패스트 등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리자동차는 공식적으로 인수설을 부인했다.

2020년 6월 23일 은성수 금융위원장 또한 추가 지원은 부적절하다고 밝혀 정부 지원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0년 8월 14일 삼정회계법인은 쌍용자동차 회계 감사에 대해 의견 거절을 했다. 이에 쌍용자동차 주식 거래는 19일 9시까지 정지됐다. 코스피 상장사는 최근 사업연도 개별재무제표 또는 연결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이 부적정이거나 의견 거절인 경우 상장폐지되게 된다. 남은 하반기에 재무구조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면 내년 상장폐지 대상이 되는 것이다.

2020년 12월 15일 경영악화로 대출 상환자금이 부족해 대출원리금 상황을 연체했다고 공시했다. 대출원금은 600억 6,100만원, 이자는 6,177만원으로 대출원리금을 막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3.6.3. 부진의 이유

일단 가장 큰 이유는 자금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족한 재정 때문에 한 차종이 새롭게 풀체인지되는 주기가 길다. 렉스턴은 무려 16년 만에 풀체인지됐고 코란도는 8년이 걸렸다.[63] 티볼리 후속은 날이 갈수록 암울해지는 회사 사정으로 인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경쟁사인 현대자동차그룹을 비롯한 대다수의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풀체인지 주기가 유니바디 차량은 5~6년 선이기 때문에 경쟁력이 매우 떨어질 수 밖에 없다.[64] 또한 현대기아는 매년 평균 4~5대 완전 신차를 내놓고 있지만 쌍용차는 신차를 한대 만들고 그 차를 판매해서 벌어들인 수익과 마힌드라 투자를 유치해서 또 다른 신차를 개발하는 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새로 출시한 신차가 부진하면 그 다음 출시를 기다리는 신차 개발에 차질을 빚거나 아예 중단되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코란도 부진으로 코란도 투리스모 후속은 현재 개발이 중단된 상태.

2010년 마힌드라에 인수된 이후 그동안 자금 문제로 인해 출시가 계속 미뤄졌던 C200을 끝내 완성시켜 '코란도 C'라는 이름을 다시 달아서 시장에 내놓았고, 액티언을 국내에서 단종시켰다. 액티언 스포츠는 단종시키지 않고 2012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쳐서 코란도 스포츠로, 희대의 못생긴 차인 로디우스는 2013년 코란도 투리스모로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놓으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던 차종을 코란도 시리즈로 묶어버렸다. 또한 라인업 재정비와 배기가스 규제 미달을 이유로 2011년 중형 SUV 카이런과 렉스턴 2.7L도 같은 이유로 단종됐다. 그리고 렉스턴은 2번째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파워트레인은 다운사이징된 2.0L 엔진으로 단일화하고 몇몇 옵션을 조정해서[65] 판매 가격을 낮춘 렉스턴 W를 시장에 내놓는다.

당시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더 이상 신차를 개발할 여력이 없던 쌍용차로선 최후의 수단이나 마찬가지인 결정이었지만 매우 다행스럽게도 갑자기 레저붐이 터지면서 프레임 바디와 4륜구동을 갖춘 쌍용차가 인기를 끌게 됐다.[66] 특히 액티언 스포츠를 매우 잘 다듬어 호평을 받은 디자인과 좋아진 상품성 덕에 코란도 스포츠가 미친듯이 팔려나가면서 회사 재정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그 수익으로 티볼리를 개발할 수 있었다.

3년간의 개발을 거쳐 2015년 출시된 티볼리가 기대 이상 대박을 터뜨리고 꾸준히 성공적인 행보를 착실히 걸어나가며 당시 경쟁 차종이었던 QM3트랙스를 완전히 압도하고 수년 동안 국내 소형 SUV 1인자로 군림했다. 비록 주행감각은 QM3나 트랙스보다 못했지만 그 둘에는 없었던 넓은 실내공간과 넉넉한 트렁크 공간, 그리고 결정적으로 뛰어난 가성비라는 장점 덕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후 현대는 코나를, 기아는 스토닉을 뒤늦게 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볼리는 코나와 1, 2위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할 뿐 여전히 국내 소형 SUV 강자로 남았고 스토닉은 트랙스, QM3와 함께 말 그대로 압살당해서 존재감 자체가 없어졌다.[67]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임원진은 티볼리 성공에 고무된 나머지 자사 전 차량에 적용할 패밀리룩을 티볼리에서 착안한다스탈린그라드급 오판을 한다.

2017년에는 무려 16년 만에 풀체인지된 G4 렉스턴이 출시됐다. 1세대가 워낙 사골을 우려내듯 푹 우려먹었다 보니[68] G4 렉스턴은 오래 기다려온 소비자들에게 실망스럽게도 렉스턴 W에 들어갔던 2.2L LET 엔진 출력을 아주 살짝만 올린 채 그대로 얹었다. 사실 대부분은 2.2 엔진에서 나오는 출력이 일상 주행시 부족하지는 않지만 '새 플래그십'이라는 기대감을 갖던 사람들과 카라반이나 트레일러를 견인하기 위해 프레임 바디인 렉스턴 구매를 고민하는 일부 소비자들에게는 부족하지만은 않은 출력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69] 경쟁 차종인 모하비의 매니아층이 공고히 형성된 이유가 프레임바디와 V6 3.0L 디젤 엔진의 여유로운 출력 덕분인 것을 생각하면 차체가 가진 능력을 무리없이 받아주지 못하는 출력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4세대 코란도(C300)를 내놓으면서 쌍용차의 위기가 다시 시작됐다.
  • 신형 코란도가 작살난 첫번째이자 가장 큰 문제는 애매한 크기였다. 티볼리가 코나나 트레일블레이저 등 쟁쟁한 경쟁모델들이 나와도 오랫동안 선방했고, 렉스턴이 나름대로 고무적인 성과를 냈던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티볼리는 경쟁모델보다 넓은 공간활용성이라는 장점이 있고, 렉스턴은 준대형 SUV임에도 가격을 낮춰 나름대로 가성비를 만들어내며 모하비의 경쟁상대로서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란도는 당시 끝물이었던 투싼, 스포티지보다 아주 약간 컸다. 머지않아 투싼과 스포티지가 풀체인지되면서 코란도보다 크기가 커지는 바람에 차라리 QM6 크기만 됐어도 훨씬 고무적인 성과를 냈을 것이라는 게 중평이다.[70] 어차피 정면승부로는 통하지 않을 게 자명한 이상 가성비 전략을 내세우면 충분히 틈새를 노릴 수 있었다. 게다가 QM6를 포함한 대다수의 준중형~중형 SUV들이 각자의 메이커에서 효자노릇을 하는 것을 감안하면 수익성도 더 나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이 애매한 크기로 인해 티볼리 에어와 포지셔닝이 겹치게 됐다. 티볼리 에어와 전장이 불과 10mm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티볼리 에어가 무엇보다 트렁크 용량이 월등하게 더 크다. 이러한 포지셔닝으로 인해 티볼리 에어와 판매 간섭이 생기자, 쌍용자동차는 나름대로 쏠쏠한 판매고를 올리던 티볼리 에어를 단종시키는 자충수를 저질러버렸다.[71] 그와중에 경쟁차량으로 이쿼녹스, 투싼, 스포티지가 출시됐고 아랫급인 XM3도 맞먹는 크기와 가성비를 무기로 엄청난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코란도는 경쟁차들은 물론이고 셀토스와 XM3에도 있는 뒷좌석 송풍구가 없다!
파워트레인은 기존 2.2L 디젤 엔진이 사라지고 1.6L 디젤 엔진[72]과 1.5L 가솔린 터보 엔진을 사용하는데 디젤 엔진은 이전 2.2L에 비해 배기량과 출력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출력이 매우 아쉬워졌고[73] 디젤과 가솔린 가릴 것 없이 잘못된 변속기 세팅 탓에 가속력이 매우 더디다는 평가가 많다.[74] 때문에 높은 출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부족한 출력을 지녀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75]
  • 두 번째로 모순적인 마케팅과 옵션 구성 그리고 애매한 포지셔닝도 한 몫 했다. "요즘 가족, 요즘 SUV"라는 슬로건을 들고 가정적인 차로 홍보했지만 정작 2열 에어벤트가 없어 뒷좌석은 에어컨을 쐬지 못하는 웃픈 상황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주 구매층이라 볼 수 있는 준중형 SUV는 소형 SUV보다 3~40대 남성 고객 비중이 더 많은 편인데, 이들을 자극(?)시킬법한 내용과 문구를 섞은 광고 한 편이 판매량을 떡실신시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반자율주행을 강조하기 위해 "오빠는 운전 말고는 하는게 뭘까?"라는 질문은 거의 킬링포인트 수준. 이 때문에 죄없는 소이현-인교진 부부만 애먼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나마 2020년에 나온 광고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세 번째로 티볼리와 별 다를 게 없는 디자인이다. 역사가 오래된 제조사들뿐만 아니라 2010년대 이후로는 세계에서 이름 좀 날리는 메이저 제조사라면 패밀리룩을 정착시켜 하나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밀리룩은 전/후면 정도에서 유사성을 키우고 측면은 급에 따라 확실한 차이를 두도록 디자인해야 하지만, 쌍용은 아예 '티란도' 혹은 '티볼리 中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후좌우를 베끼다시피 디자인해서, 그것도 상위 세그먼트 차량의 디자인을 하위 세그먼트 차량에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 세그먼트 차량의 디자인을 상위 세그먼트 차량에 '복붙'해서 욕을 먹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코란도"라는 이름의 이미지 관련한 문제다. 그랜저가 각 그랜저 시절에 성공의 이미지가 정착되어 차급이 바뀌어도 인식이 변하지 않았듯이[76] 코란도는 이미 뉴 코란도의 돌풍 덕에 뉴 코란도가 단종되고 한참 지난 시점에서도 코란도의 인식은 여전히 뉴 코란도이다. 그럼에도 쌍용은 이미 액티언 시절부터 이어진 중구난방한 디자인 정체성을 티볼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대로 잡지 않았고, 티볼리의 등장 이후로는 지나치게 티볼리 디자인에 안주하는 방향으로 밀고 가면서, 코란도를 세대교체하여 부진을 만회할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코란도라는 이름과 그 인식을 버리다시피했다.[77]

정리하자면 앞서 언급했듯이 티볼리는 코나, 스토닉, 트랙스, QM3 등 경쟁모델보다 처음 출시됐을 때는 옵션 선택폭이 더 넓었고 공간활용성이 좋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코란도는 경쟁모델보다 딱히 크거나 넓지도 않으면서 다른 부분에서 단점이 두드러지다보니 부진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QM6급으로 키우고 가격은 비교적 준중형에 맞춰 가성비 전략으로 팔았다면, 지금처럼 부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쟁차종인 투싼과 스포티지의 대대적인 풀체인지로 중형 SUV에 맞먹는 크기로 나오는데 이러면 소비자 생각 속에서 영영 잊혀질 것이다. G4 렉스턴이 중형 SUV들보다 많이 비싸지는 않은 가격이 나름대로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요인이 됐는데 이걸 제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쌍용차는 티볼리를 페이스리프트했다.[78] 그러나 문제는 티볼리보다 좋은 승차감과 적당한 스포티성을 갖고 있으며 세련되고 첨단 안전기능은 더 많은 코나[79], 셀토스[80], 트레일블레이저[81], XM3[82]같은 동급 차량뿐만 아니라, 절치부심하고 출시한 아반떼 CN7같은 가격대가 겹치는 막강한 경쟁차량들이 시장에 많아졌다.[83] 니로베뉴가 나름 팔리고 있는 시장파이를 갖고 가면서 더 심해졌다. 더군다나 코란도와 더욱 비슷해지고 1.5 T-GDI 엔진이나 블레이즈 콕핏 등 코란도만 적용되고 있었던 사양이 대거 적용되는 바람에 차별성이 더 적어지게 되면서 판매 간섭은 더욱 심해지게 됐다.

쌍용자동차의 기함이었던 G4 렉스턴 역시 같은 프레임바디에 급에 맞는 6기통 디젤 엔진을 장착하며 천지개벽 수준으로 2차 페이스리프트를 한 모하비, 급에 맞는 파워트레인, 승차감과 만약을 대비한 저배기량 파워트레인까지 모두 갖춘 팰리세이드, 급에 맞는 파워트레인과 부드러운 승차감과 동급 중에서 가장 크기가 크고 다부진 체격까지 갖춘 트래버스, 말할 것도 없이 완전 프리미엄 SUV인 GV80까지 더해져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결국 현재 국내시장에서 유일한 국산 픽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렉스턴 스포츠를 제외하고는 하위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84] 하지만 그나마 있는 렉스턴 스포츠도 그레이 임포터들이 수입하는 램, F-150 등이나 GM 한국사업장이 야심차게 수입중인 콜로라도, FCA 코리아[85]에서 야심차게 들여온 지프 글래디에이터라는 픽업트럭의 본고장에서 온 강력한 경쟁자에게 미세하게라도 손실을 입고 있다.[86][87] 여기에 몇몇 수입차 업체들이 비슷한 급을 출시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앞날은 점점 암울해져만 가고 있다. 특히 포드는 레저시장 성장 덕분에 익스플로러가 5세대부터 현재까지 많이 팔리고 있고, 콜로라도가 인기있는 것을 보고 레인저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다가 현재 들여와서 판매하고 있다. GM 한국사업장도 규격외 외래종을 마찬가지로 경쟁종인 외래종을 들여오는 방식으로 돌려막은 것이고 이게 굉장히 성공해서 숨을 틔운 케이스다. 레인저를 상대로 과연 어디까지 경쟁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어려운 길이라는 점은 이견이 없다. 2020년 하반기에는 FCA 코리아에서 지프 글래디에이터 수입까지 확정된 상황이라 경쟁자들의 위협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88]

부진은 과거 포드에 인수됐던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 산하의 재규어 랜드로버, 볼보, 애스턴 마틴 등, 크라이슬러에 인수됐던 마세라티, 피아트에 인수된 크라이슬러와 해당 계열이던 란치아 등, 2000년대 초중반 독일 3사 암흑기 때처럼 캐릭터를 잃고,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기술개발에 어려움을 겪어[89] 큰 위기를 맞았거나 지금까지도 고생하는 이유와 완전히 같다. 자동차 시장이 이만큼 급변한다. 모델들 중 코란도를 제외하면 모두 동급에서 정상을 한번씩 찍었는데 가만둘 수 없는 경쟁사 도전이 이만큼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상대적으로 상품성이 떨어지게 됐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마세라티나 재규어 랜드로버 등의 회사들은 대중 브랜드 중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쌍용차와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프리미엄과 헤리티지를 쌓은, 고급 브랜드라는 점, 크라이슬러 자체는 여전히 회사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스텔란티스(구. FCA)계열 식구들 중에서는 보장된 팬층이 존재하는 고성능 라인업과 탄탄한 브랜드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본진인 미국에서는 판매실적까지도 준수하며(대표적으로 지프[90], 닷지[91], 램 트럭스[92]) 2020년에는 코로나19라는 크나큰 악재가 닥쳤음에도 당해에는 무려 한화로 조 단위의 흑자를 냈던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93]

2020년 위기 속에서 쌍용이 내놓은 신차 대책은 티볼리 에어 부활과 상품성이 개선된 G4 렉스턴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올 뉴 렉스턴과 렉스턴 스포츠 페이스리프트 모델 더 뉴 렉스턴 스포츠 & 칸인데 이 셋의 성공으로 판매량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히도 올 뉴 렉스턴이 공개되면서 소비자가 약간 긍정적으로 변화했다. 디자인이 준대형 SUV에 맞게 잘 나왔고, 매우 인기를 끌고 있는 임영웅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며 중장년층을 공략했다. 특히 동급보다 크게 뒤떨어져 있던 ADAS 기능이 대폭 추가되어 2020년 최신 플래그십 차량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항목들은 갖추게 됐다.[94] 여기에 언급됐던 뷰티풀 코란도의 광고처럼 사람들을 열받게(?) 만들었던 광고가 아닌, 영화 신세계의 명장면과 대사를 패러디하는 전략을 택했다. 배우 박성웅의 뛰어난 연기력과 제품의 장점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많은 화제와 호평을 끌어내었다. 출시 전 이렇게 호평받으니 더욱 기대된다는 평가가 많고, 패밀리룩 버려도 좋으니 이대로만 해달라는 평가도 많다. 다만 단순히 호평만 받았을 뿐이고 절반 이상 쪼그라든 판매량에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는 모른다. 쌍용이 항상 지적받던 변속기 세팅과 부족한 제동력, 제동편차 그리고 야심차게 준비한 주행보조장치들이 얼마나 잘 작동되고 다듬어졌는지 트림구성이 초기 코란도처럼 소비자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아닌지[95] 평가받아야 쌍용자동차가 렉스턴을 새 신호탄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 판가름나기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

쌍용차의 위기가 철저히 내부적인 문제인 기술과 감각의 한계, 감각 자체 개발 욕심 등으로 심화됐다는 의견도 적지않다. 쌍용자동차 자체의 환골탈태 없이는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3.7. 법정관리 (2020. 12.~2022. 8.)

결국 2020년 12월 21일, 11년 만에 법정관리를 다시 신청했다. 21일 쌍용자동차 주가는 19% 가량 폭락한 이후 주식거래가 정지됐다.

2020년 12월 24일, 산업은행은 현 부채 대출 기한 연장은 가능하지만 추가 대출과 같은 자금 지원은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산업은행은 이에 대해, 이미 수년 동안 수 차례 지원이 이뤄졌지만 정상상환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일, 법정관리 기간 자율구조조정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2월 27일, 자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부품 납품사들이 납품대금 지급을 월간 어음 정산이 아닌 즉납 현금 결제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기업인 현대모비스, SNT모티브, LX하우시스, 보그워너, 콘티넨탈오토모티브는 기존 잔금을 완납하고, 결제 방식 변경을 할 때까지 납품을 중단한다고 밝혔다.[96] 이에 29일부터 공장은 생산 중단 상태에 빠졌고, 쌍용차는 위 5개 대기업에 임원진을 파견해 제발 부품을 보내달라고 애원을 했다. 현대모비스, SNT모티브, LG하우시스[97]는 잔금 일부를 현금으로 받고, 결제 방식을 2021년 1월부터 변경하는 조건으로 납품을 재개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인 보그워너, 콘티넨탈오토모티브는 두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대 납품을 재개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위 문제로 공장은 2020년 12월 26일부터 2021년 1월 5일까지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6일부터는 위 두 업체에서 생산에 필요한 양 만큼만 현금을 주고 구입해와 겨우 가동하고 있다. 현재, 스스로도 1월 중으로 신규 투자자가 정해져 경영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존속이 쉽지 않다고 자인할 정도로, 경영난이 심각하다. 특히, 1월부터는 월 단위로 정산해 현금 지급을 해야 하므로, 현금 유동성이 급격히 경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21년 1월 12일, 산은 이동걸 회장은 2가지 조건을 지킨다면 신규 투자 유치 전 마지막으로 대출하겠다고 조건을 달았다. 한가지는 단체협약기간을 3년 단위로 늘리고 나머지 하나는 흑자를 볼 때까지 쟁의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달라는 것인데 이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산은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한국GM의 선례가 있기 때문.[98] 하지만 노조는 이동걸이 내건 조건에 대해 (1)2009년 이후 단 한 차례도 쟁의를 벌이지 않아 이미 충족되어 실효성 없고, (2)1년 단위 단체협약은 노동 관계 법령에 보장된 노조 권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

2021년 1월 25일, 1월 급여를 50%만 지급했다. 2월 급여도 50%만 지급하고, 차후 경영 상황이 개선되면 나머지를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1년 1월 28일, 협력사 대표진과 협의회를 갖고, HAAH오토모티브와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P플랜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협력사 대표진은 29일 만기인 어음 연장을 수용했다. 대신, 2월부터는 어음 잔금과 납품 대금을 1주일 단위로 정산해 현금으로 결제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였다. 현재 어음 규모는 2천억원 내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2020년 12월 기준 부채 비율이 1,627%로 알려졌는데, 이는 반년만에 900%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2021년 2월 2일, 공장이 부품 문제로 수일째 가동 중단 상태라는 것이 알려졌다. 앞서 1월 28일, 협력사 대표진이 어음 만기를 연장하고 부품 공급을 정상화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부 부품 업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며 부품 공급을 끊어버린 것이다. 반발 업체 상당수가 1차 벤더급 대규모 업체라서 가동 중단 상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날 오후, 산업은행은 선투자 없는 쌍용자동차 P플랜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거의 한달간 생산이 중단됐다.

2021년 3월 25일, 삼정회계법인은 쌍용자동차의 회계 감사에 대해 의견 거부를 표명했다. 이에 쌍용자동차의 상장폐지 요건이 충족됐으며, 26일 한국거래소가 비정기 회의를 열어 쌍용자동차의 상장 폐지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26일, 한국거래소는 쌍용자동차의 상장 폐지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쌍용자동차 측에 4월 13일까지 이의 의견서 제출 기간을 부여했다.

2021년 4월 1일, HAAH 오토모티브가 정해진 기한인 3월 31일까지 인수 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최종확인 됐다. 쌍용자동차 측은 한국 시간뿐 아니라 미국 시간 3월 31일 23시 59분까지 기다렸으나 인수 의향서를 접수하지 못했다고 한다.

2021년 4월 2일, 서울회생법원이 쌍용자동차 측에 법정관리 구상의 개략적인 사항을 구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원은 법정관리를 통해 쌍용자동차의 기업 규모를 대폭 줄여 국내 업체가 외부 자금 도입 없이 인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인수 의향을 지닌 국내 기업은 3~4곳 정도로 추려진다.

한편, 직원들의 퇴사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2019년 말에는 5,300명의 직원이 있었으나, 2021년 2월 기준으로는 4,4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특히, 연구소의 인력 유출이 심각하여, 연구개발 업무가 사실상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으며, 특히 인포테인먼트 파트에는 단 1명만이 남은 것으로 확인됐다.

2021년 4월 15일, 법원이 기업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하면서 결국 10년 만에 다시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하게 됐다. 이와 동시에 2022년 4월 14일까지 주식거래 매매가 정지된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1년의 개선기간을 받아 당장의 상장폐지는 면했다.

2021년 5월, 부품 공급 사정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품사들이 선대금결제 이후 출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정비용 개별 부품 수급이 파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한 렉스턴 동호회 카페에 의하면, 겉벨트세트가 전국의 정비사업소에 1개도 없으며, 공조기 기판은 예상 납기가 2개월이라 사설 수리 업체에서 고쳐서 사용하는 상황이다. 웨더스트립도 2개월 이상 납기가 지켜지지 않아, 현대기아의 웨더스트립을 구입해 잘라서 사용하는 지경이다. 법적으로 제조사 혹은 관리사는 일반부품 7년, 동력계통부품 9.5년동안 공급하도록 되어 있으나, 회사가 막장경영 상태에 들어가거나 공중분해되면 이런 법률 규정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에디슨모터스, 케이팝모터스, 박석전컴퍼니가 쌍용자동차 인수 의향을 밝혔다. 특히 전기버스로 유명세를 탄 에디슨모터스가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데, 에디슨모터스는 인수에 성공만 한다면 전기차 기술을 접목해 체어맨을 전기 세단으로 재생산하겠다는 거창한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에디슨모터스나 케이팝모터스는 일반 메이저 자동차 회사가 아닌 중견 전기차 제조업체 또는 상용차 제조업체이기에 제대로 인수를 하려면 자금조달이나 여력 등에서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또한 인수전에서 여러번 거론되는 에디슨모터스는 버스나 전기자동차 이외에는 만들어본 경험이 전무한 회사이기 때문에 쌍용자동차의 승용 제조 경험과 설비가 필요해서 인수에 손을 대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2021년 6월 30일, 법원 조사위원으로 선임된 한영회계법인은 쌍용자동차의 존속가치는 6,200억원, 청산가치는 1조 4,35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즉, 쌍용자동차는 매각이나 추가 투자를 통한 경영 정상화보다, 파산 선고를 통한 자산 청산이 더 효용이 크다는 의미이다. 쌍용자동차 측은 인수합병을 통한 회사의 존속을 꾀한다고 발표했으나, 직원 임금 지급, 부품대 지급 등이 미뤄지고 있고, 이러한 대금 지급 지연은 인수합병 주체 측이 떠안아야 하는 부채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인수합병이 정상적으로 이뤄질지는 미지수이다. 참고로, 쌍용자동차의 공익채권 규모는 알려진 것만 7천억원 이상으로, 이 채권은 인수합병자가 반드시 상환해야 하는 성격의 것이다. 즉, 인수합병자는 인수합병자금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7,000억원의 현금을 공익채권 상환에 투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쌍용자동차 인수를 위한 최소의 비용은 존속가치인 6,200억에 7,000억을 더한 1조 3,200억원에 이르게 된다. 이 정도의 비용을 투자해 쌍용자동차를 인수할 투자자가 나타날지는 과연 의문이다.

2021년 7월 10일, 쌍용자동차가 1979년부터 쓰고 있는 평택 공장 부지와 자산을 매각하고, 평택 시내의 다른 곳으로 규모를 대폭 축소한 공장을 신축하여 이전할 계획을 밝혔다. 새로운 공장이 완공되면 기존 공장 부지는 철거되고 주택단지를 건설할 것으로 보이고 있지만, 쌍용차의 경영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021년 7월 19일, 한때 쌍용차의 유력 인수자로 부상했던 미국의 HAAH가 파산했다. 전후 사정을 보면, HAAH에서는 쌍용자동차 인수자가 되어 한국의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자신들의 파산 위기를 넘기려 했던 것이 유력해 보인다. 만일 이 수순으로 갔으면 쌍용자동차는 제대로된 인수합병을 통한 기업 회생이 아닌 또 하나의 먹튀 제물이 될 뻔했던 것이다.

2021년 7월 30일, 쌍용자동차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투자자는 9곳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SM그룹, 에디슨모터스, 케이팝모터스, 박석전앤컴퍼니 등이 투자 의사를 밝혔고, 중국 사업용인 HAAH를 파산 신청하고 새로 신설한 법인인 카디널원모터스도 투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9월 15일, 인수 입찰이 마감됐다. 쌍용자동차의 인수는 가격 입찰제가 아닌 심사 입찰제도로, 인수 의향자의 재무여건, 쌍용자동차사 회생 의지, 향후 사업 계획 등 정성적인 요소도 많은 비중을 두어 평가한다. 입찰 결과, 인수에 의욕적이었던 SM그룹이 입찰에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카디널원모터스도 인수를 포기하고 입찰하지 않았다. 입찰 금액은 이엘비앤티가 5,00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인수에 의욕적이언던 에디슨모터스는 2,800억원선, 인디EV는 1,000억원선으로 확인됐다.

입찰 결과만 놓고 보면, 쌍용자동차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은 쌍용자동차의 거대한 부채 규모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우선, 인수 직후 현금 상환해야 하는 부채 규모가 7,000억원에 이르고, 장기적으론 산업은행 차입금의 이자와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엘비앤티가 5,000억원에 인수한다 하더라도, 즉시상환성 부채 7,000억원을 더하면 실제로는 1조 2,000억원에 인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부채 리스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인수 의향자가 자체 자금을 부어 넣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이다. 즉, SM그룹처럼 보유 현금을 동원했다가 회사가 회생하지 못하고 남은 부채를 뒤집어 쓰면 모기업이 망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여러 재무적 투자자를 위시한 사모펀드가 중심이 되어 부채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컨소시엄 형태의 인수 의향자가 난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99]

3.7.1. 에디슨모터스의 인수 시도 (무산)

2021년 10월 20일, 2번째로 큰 인수 금액을 제시했던 에디슨모터스가 쌍용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서울회생법원은 "우선협상대상자로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을 선정했다"며 "이엘비엔티 컨소시엄은 자금조달증빙 부족으로 평가에서 제외됐다"고 밝혔다. 입찰제안서를 바탕으로 총 입찰금액 규모, 유상증자 금액, 회사채 인수금액 및 발행조건, 자금조달증빙의 확실성, 회사를 실제로 직접 경영해 발전시킬 의사와 능력, 인수 후 경영계획의 적정성, 종업원 고용보장 및 단체협약 승계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평가한 결과 이같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위와 같이 에디슨모터스가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언론이나 사내에서는 강영권 에디슨모터스 회장의 연매출 10조원 발언이나, 연평균 30만대 생산계획, 나스닥 상장으로 인수 대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이 모두 허무맹랑하다며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싸늘한 반응이다. 비슷한 시기 대우건설이 비교적 작은 기업인 중흥건설에 인수된 뒤에도 허탈감이 컸는데, 쌍용차는 한술 더 떠서 의욕만 많고 허세투성이인 에디슨모터스에 인수됐으니 오죽하겠냐는 것. 일각에서는 회사의 자본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자금력 의구심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또 기술력과 경영 역시 문제다. 에디슨모터스와 함께 인수에 나서는 곳은 "쎄미시스코"라는 업체인데, 에디슨모터스의 최대주주인 에너지솔루션즈가 인수한 전기경차 생산기업으로 결국 에디슨모터스와 관련된 회사인 셈이다. 에디슨모터스는 인수한 업체인 "쎄미시스코"에 대출을 받게 하여 자본을 조달하기로 했고, 에디슨모터스의 나스닥 상장과 해외 기관 유상증자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현재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도 반도체를 구하기 힘들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쌍용차가 순수 전기차로 전환한다고 하면 더 많은 반도체 부품을 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수년은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산업은행이 이미 돈을 빌려줄 것이 확실하다는 식의 강영권 회장의 발언도 문제다. 추가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 에디슨모터스 측은 KDB산업은행 등을 포함한 시중은행에서 자금을 빌릴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산은이 인수 관련 자금 지원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오는 12월부터 시행되는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쎄미시스코의 자금조달 계획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정안은 사모발행시 전환가액이 주가 하락으로 조정 이후 주가가 다시 상승하면 최초 전환가액 수준으로 상향 조정이 의무화된다. 최대주주에게 부여된 CB 매수선택권(콜옵션)의 발행한도도 지분율 이내로 제한된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산업은행에 8,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요구한 것. 10월 22일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서 강영권 회장은 "2조원 규모의 쌍용차 자산을 담보로 7,000억~8,000억원을 대출받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산은이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산은의 지원을 확신하면서도 설령 지원이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회생 계획안을 제대로 듣고 기술력을 알면 당연히 산은이 지원해줄 것"이라며 "신용 지원도 아니고 자산 담보 대출을 해달라는 것이기에 안 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산은이 지원을 안할 경우)이자는 높아지겠지만 자산이 있기 때문에 일본, 미국 등 시중은행에서 얼마든지 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산업은행은 황당함을 표하며 꽤나 불쾌해 했다. 이 상황은 돈은 산업은행이 전부 가져다 바치고 경영권은 에디슨모터스가 집어가는 격이기에 더더욱 그런 것이다. 산업은행 역시 같은 날 "인수 관련 협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에디슨모터스가 언론을 통해 산은 지원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2021년 11월 2일 쌍용차는 에디슨모터스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서울회생법원에 허가신청을 했다. 11월 10일부터 인수를 위한 정밀 실사에 들어갔는데 당초 11월 23일 끝낼 예정이었으나 추가적인 점검을 위해 서울회생법원에 요청하여 1주 연장했다.

2021년 12월 19일 인수가격이 3,048억원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강영권 회장이 평택공장 부지에 부동산 개발을 하겠다고 말을 바꾸고, 평택시와 산업은행이 이에 제동을 걸면서 인수는 더욱 난항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월 3일, 컨소시엄을 구성해 약 1,05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재무적 투자자(FI) 키스톤프라이빗에쿼티(키스톤PE)가 투자를 유보했다. 요약하자면, 인수자금 확보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에 에디슨모터스 측에서는 같은 재무적 투자자인 KCGI와 해외 투자자들이 빈자리를 채워주길 기대하며 KCGI와 관련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22년 1월 9일, 강영권 대표가 김한용의 MOCAR에 출연하여 쌍용차 인수 관련에 대한 입장을 해명했다.

2022년 1월 10일, 에디슨모터스와 쌍용자동차가 인수합병 본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날 서울회생법원이 본계약을 승인했다.

이데일리의 보도에 따르면 쌍용과 에디슨모터스가 서로간의 회생계획에서 의견차이를 보이는데다 쌍용자동차의 주주로서 에디슨모터스가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맺는 CKD 계약을 수익성 문제로 연기하고 재협상할 것을 주장하고,[100] 중국 비야디 자동차와의 인산철배터리 관련 조인트벤처도 대외의존도를 이유로 비관적으로 평하며 차량의 옵션구성에 대해서도 "전동식 파워 사이드 스텝, 플로팅 우드 스피커 등 차량의 성능이나 품질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옵션을 강제"한다고 혹평했다는 것.

여기에 쌍용자동차가 에디슨모터스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약속한 지원금도 에디슨의 허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제3자 관리하의 계좌인 에스크로(escrow)계좌에 입금할 가능성도 고려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결국 에디슨모터스가 에스크로 계좌 활용과 관리인 교체를 법원에 요구했다. 쌍용자동차 내부 이외에도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법정관리인, 채권단도 에디슨모터스의 대 쌍용자동차 움직임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2022년 2월 13일,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중재에 나섰다. 여기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이 에디슨모터스 강영권 CEO를 찾아 브랜드 및 사명유지, 지역경제, 장기적 투자 및 판매, 고용 및 노동조건 등을 골자로 특별협약을 제시했다.

2022년 3월 들어 다시 인수에 빨간불이 켜졌다. 쌍용차 상거래 채권단이 1.75%에 불과한 회생채권 변제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으며, 노조는 에디슨모터스의 인수를 반대하는 의견서를 서울회생법원에 제출했다.

에디슨모터스는 200억의 2차 대여금을 입금하지 못했으며, 결국 2022년 3월 25일까지 납입해야 했던 잔금 2,743억원도 납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인수합병 계약은 해제됐고, 에디슨모터스가 납입한 계약금 304억원은 몰취됐다. 제공한 대출자금은 그대로 대출이 되어 에디슨모터스는 쌍용차의 채권자 지위가 됐다. 2022년 4월 1일 열릴 예정이었던 관계인 집회도 취소됐다. 이에 대해 에디슨모터스는 쌍용차의 회생계획안 배제 결정에 반발하여 대법원에 특별항고를 제기하고 있으며, M&A 투자계약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지급된 계약금 304억원 몰취를 막기 위해 출금 금지도 함께 청구했다. 컨소시엄에 금호HT 등을 추가로 참여시킬 계획이었으나 결국 기각됐다.

3.7.2. KG모빌리티홀딩스의 인수


에디슨모터스의 인수가 무산된 이후, 삼정회계법인으로부터 다시 감사의견 거절을 받아 상장폐지 위기에 처했다.

KG그룹, 쌍방울그룹, 파빌리온PE, 이엘비앤티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2022년 5월 13일 서울회생법원에서 조건부 인수 협상자로 KG컨소시엄을 선정했다.[101] 동시에 상장폐지는 면해서 오는 12월 31일까지 개선기간이 부여됐다.

2022년 6월 KG그룹이 최종 인수예정자로 확정됐다.(사건번호 : 서울회생법원 2020회합100189) 법률신문

변제율에 대한 채권단의 반발이 있었으나 KG그룹이 재빠르게 인수 금액을 증자하여 변제율을 끌어올렸으며, 2022년 8월 26일 법원에서 쌍용차의 회생 계획안을 인가하여 인수가 최종 확정됐다. 서울회생법원 회생1부(재판장 서경환 법원장, 주심 이동식 부장판사)는 8월 26일 쌍용자동차 관리인이 제출한 회생계획안에 대해 인가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쌍용자동차는 18년만에 다시 외국계에서 한국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3.8. KG그룹 인수 이후 (2022. 9.~2023. 3. 21.)

2022년 9월 1일 KG그룹 곽재선 회장이 새 쌍용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했다. 사명은 KG쌍용모빌리티로 변경하되, 쓰리서클윙 엠블럼은 그대로 사용한다고 한다.

2022년 11월 11일 회생절차가 종결됐다. (서울회생법원 2020회합100189) 법률신문

이름을 KG모빌리티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2023년 3월 주주총회를 개최하여 사명 변경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쌍용자동차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아 바꾸는게 옳다는 의견과, 그동안 쌓아온 인지도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이유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특히 쌍용자동차의 전기 자동차 전용 플랫폼 개발과 전동화 전환을 위한 신 공장 이전 등 다른 데 집중해야할 부분이 훨씬 많은 만큼, 지나치게 큰 비용[102]이 들 사명 변경은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평이 많다. 게다가 GM 한국사업장도 국내에서는 대우차의 헤리티지 때문에 이미지를 여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103], KG그룹이 쌍용자동차의 이름을 바꾼다 한들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거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2023년 2월 21일, 김한용의 모카에서 사명 변경과 관련된 입장을 추가적으로 밝혔는데 쌍용이나 KG 등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 차량의 고유한 해리티지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2022년 4분기 토레스의 흥행으로 영업이익 41억을 기록하며 2016년 이후 약 6년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4. KG모빌리티 (2023. 3. 22.~현재)

2022년 12월 22일 회사명 변경을 추진하고 3년 만에 53명을 신규 채용했으며, 2023년 3월 22일 주주총회를 개최해 'KG모빌리티' 라는 사명으로 변경을 정식 확정함에 따라 이제 쌍용자동차의 이름은 중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35년 만에 역사로 남게 됐다. 하지만 아직은 블로그와 중국과 대만을 포함한 해외에서 쌍용자동차로 유지되고 있다. 심볼 마크 변경 여부는 아직 미정이라 한동안은 수출용 윙로고를 내수용에서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023년 4월 10일부터 6월 16일까지 2030년을 상정할 미래 모델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전 대주주(상하이자동차, 마힌드라)와는 달리 사명까지 새롭게 바꾼것을 보면 회사 자체를 새롭게 바꾸면서 오래 지속될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Go Different. KG MOBILITY" 라는 브랜드 슬로건도 새롭게 소개했으며, 5년 10만km 주행한 쌍용차를 매입해 성능 검사와 정비를 거쳐 품질을 보증하는 인증 중고차 및 전동 사이드스텝, 픽업 데크탑 등의 커스텀마이징 용품 사업 강화와 함께 특수목적 특장차 사업을 위한 별도의 사업을 위해 별도 법인을 설립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사명변경 이후 3월 31일 개최된 제14회 서울모빌리티쇼 에서 새로운 기업 비전 등을 발표하며, 신차 '토레스 EVX' 를 비롯해 'KR10', 'O100', 'F100' 등의 다양한 콘셉트 카를 선보였다.

글로벌 인스타그램 계정에서도 'kg_mobilty_global'로 변경했으나[104] 해외 팬들 역시 대다수 'KG모빌리티'보다 '쌍용' 이라는 이름이 훨씬 낫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국내 외 딜러들의 입장을 인용하며 사명 변경을 염려하는 입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

2023년 4월 28일 2년 5개월 만에 주식시장 거래가 재개됐다.

2023년 11월부터 KGM 브랜드 론칭과 함께 대리점 및 사업소의 간판 교체작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105]

2023년 11월 1일 BYD와 하이브리드 기술 개발 협약식을 진행했다.# KG모빌리티와 BYD는 창원시와 KG스틸과 함께 2024년 말까지 KG모빌리티 창원 공장 유후 부지에 700억을 투자해 배터리팩 공장 설립하고 2025년 부터는 토레스를 시작으로 다른 KGM 모델들의 하이브리드 차량을 양산 하게 될 예정이다. 많은 기업들 중에 BY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이미 BYD에 전기차 기술과 배터리를 공급 받고 있는데 타사와 다른 기술 협약을 맺기도 껄끄러웠을것이며 하이브리드 차량도 배터리 기술을 어느 정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BYD 제품 및 기술에 대한 안정성, 호환성, 생산 비용 등을 고려한것으로 보인다. 항간에서는 이에 대해 과거 쌍용차의 대주주가 상하이자동차였던 시절처럼 기술만 다 뜯기고 팽 당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도 있지만, 이 협약의 주체가 BYD가 아니라 KG스틸인 점과 현재 KG모빌리티와 BYD의 협력은 아예 없던 기술을 공동으로 만들고, 장차 자체 기술력으로 독립하여 발전하려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2023년 12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동차 기업 ‘사우디 내셔널 오토모빌스’(SNAM) 토레스 EVX 조립 생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2024년 5월 부터는 코란도 EV토레스 EVX를 시작으로 택시 모델을 출시했으며, 이는 1954년 하동환자동차 창사 이래 최초로 내놓는 택시 모델이다.#

2024년 8월 출시된 액티언 2세대 부터는 윙로고를 제외한채 KGM 워드마크만 사용하기로 했으며,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으로 "Enjoy with Confidence"를 선정했다.

2024년 3분기에 400억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다시 적자를 기록했다.

4.1. 에디슨모터스 인수

한편 2023년 4월 26일, 에디슨모터스의 인수를 추진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에디슨모터스가 한때 쌍용자동차의 인수 후보자였던만큼 상황이 전세 역전된 셈. 만약 성사된다면 '트랜스타' 의 단종 이후 25년 만에 버스 시장에 재진출하게 되며, HA20이 단종된 1983년 이후 무려 40년만에 시내 버스 시장에 재진출하게 되며 전기차 기술을 확보해 보다 더 나은 전기차 제조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3년 7월 3일, KG모빌리티에디슨모터스의 최종 인수예정자로 선정되었으며 인수대금은 550억원이다. 이리하여 KG모빌리티는 쌍용 트랜스타가 단종된 1998년 이후 25년만에 버스 시장, 동아 HA20이 단종된 1983년 이후 무려 40년만에 시내버스 시장에 재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에디슨모터스의 새로운 사명을 KGM커머셜로 변경하고 KG모빌리티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


[1] 이보다 더 오래된 조선국산자동차라는 기업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였고 이스즈가 일본군의 군용차량을 생산 및 납품할 목적으로 설립된 차량 제조사였다. 그러나 조선국산자동차는 실제로 자동차를 만든 적은 없고 일본에서 만든 자동차를 수입판매한 것 밖에 없기 때문에 국내 최초 자동차 기업이란 타이틀로 보기에는 많이 애매하다.[2] 아쉽게도 이는 비공식 기록이며 공식 기록은 1976년 6월 에콰도르에 수출한 현대 포니 6대이다.[3] 현대자동차1967년, 지금은 해체되어 세 회사(GM 한국사업장, 자일대우버스, 타타대우상용차)로 갈라진 대우자동차1972년에 설립됐으며 그들의 전신인 신진공업사는 1955년에 설립됐다. 기아 역시 회사 자체는 1944년에 세워졌으나 당시에는 자전거 제조업을 했으며 기아의 자동차 사업은 1962년부터 진출했기에 1954년 대한민국에서 처음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던 KG모빌리티보다 역사가 적다. 다만 현대자동차에서 공식 연혁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대자동차의 전신인 아도서비스는 1940년부터 시작했으므로 아도서비스까지 현대자동차의 역사로 포함한다면 KG모빌리티보다 역사가 길다고 볼 수 있다.[4]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에 인수된 이후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쌍용이라는 이름은 2023년까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5] 자동차는 고용 창출 효과가 크고 높은 기술을 요하는 국가의 핵심 산업이지만 경쟁사들에 비해 작은 규모로 인해 정부로부터 별 다른 지원도 받지 못 했지만 결국 버텼다.[6] 역대 한국 자동차 기업 중에선 하동환자동차제작소가 2번째로 설립된 자동차 회사였다. 1번째이자 국내 최초 자동차 회사는 국제차량제작이다. 하지만 국제차량제작은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면서 현존하는 국내 자동차 기업 중에서는 KG모빌리티가 최장수 기업의 타이틀을 갖게되었다.[7] 당시 행정구역상 영등포구 관할로 지금 구로역 근처에 있는 KG모빌리티의 서울A/S사업소 자리였다. 평택공장 준공 이후에도 구로공장은 바로 폐쇄되지 않고 단계적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해 1985년에 이르러서야 평택공장 이전이 완료됐다. 현재는 군포로 A/S 사업소를 이전했다.[8] 이 두 차종은 본래는 보닛형 프론트 엔진 버스 새시로 개발됐으나 이후 캡 오버 형태로도 나왔다. # 토요타 이름을 달고 나온 마지막 중형급 이상의 버스 섀시 중에 하나로 1967년 토요타가 히노를 인수하면서 그 이후로 중형급 이상 버스는 일본의 히노자동차로 일원화했다.[9] 당시 신진 버스는 일본의 토요타에서 부품을 공급받았고, 하동환 버스는 일본의 닛산디젤에서 부품을 공급받았다. 그런데 효율성을 위해 버스 생산 모델을 통일하려 할 때 토요타 측에서 닛산디젤보다 부품 공급 가격을 저렴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하동환 버스는 단종되고, 신진 버스를 위탁 생산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신진 버스는 토요타제 4행정 가솔린 엔진이나 디젤 엔진을 썼으나, 하동환버스는 닛산디젤제 2행정 디젤 엔진을 썼는데, 2행정 디젤 엔진 특성상 매연이 심해서 도시의 대기 오염이 상당했던 것도 신진자동차의 버스 모델로 통일하는데 한 몫 했다.[10] 이후 신진의 버스 부문은 대우로 넘어가 자일대우버스가 되었다.[11] 현재 부평정비사업소.[12] 이 외 아시아자동차는 비슷한 시기에 AB185 시내버스를 출시했는데 판매량은 저조한 편이었다. 다만, 고속버스 차종인 B909S/L은 후술할 동아 HA/HR버스보다 점유율이 더 높았다.[13] 과거의 사명은 '신진지프자동차' 였다. 현재 한국GM의 모태인 신진자동차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AMC와 합작해 설립한 신진지프가 실적 부진으로 AMC가 지분을 철수하고, 철수 지분을 계기로 리비아에 디젤 지프를 수출하는 바람에 남겨놓은 '지프' 브랜드 까지도 철수를 시작하면서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이후 '거화'로 사명을 변경했다. 참고로 그동안 쌍용그룹의 거화 인수 시기가 1980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86년이다. 거화는 1984년 연말 시기에 흑자도산했는데, 그 뒷 배경에는 부자 간의 경영권 다툼이 있어서 당시 상당히 씁쓸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 '신진지프자동차' 가 '신진자동차' 를 거쳐 '거화'로 사명을 변경했다. 당시 거화는 신진그룹의 마지막 후신인데, 하동환자동차가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자회사로 편입됐던 시절을 생각하면 11년만에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14] 이에 따라서 주례럭키이파트가 들어섰다.[15] 당시의 명칭은 평택-송탄 통합 이전인 송탄시 지역이라 '송탄공장' 이였다.[16] 1968년 완공한 쌍용양회의 본사 건물, 즉, 쌍용그룹의 헤드쿼터인 건물로, 빌딩의 이름도 '쌍용빌딩' 이였다. 즉, 쌍용 인수 이전에 이미 쌍용 소유 부동산에 입주한 것. 이후 쌍용그룹이 자금난으로 건물을 매각했지만 아직도 쌍용양회는 그 빌딩에 입주해 있다.[17] 당시 자회사였던 동성개발(현 심팩)도 함께 인수됐다. 반면 전 사주 하동환은 동아정기만 지켜 '한원그룹' 을 출범했다.[18] 1992년부터 2023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통칭 쓰리 서클 로고 라고 부른다. 로고의 뜻은 무한한 우주공간 속에 쌍용자동차의 경영 철학인 선도경영, 열린경영, 정도경영을 3개의 원으로 나타냈다. 전체적으로는 무한 도전과 개척 정신으로 인간과 자연, 기술이 조화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인류 사회가 추구하는 미래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로고타입의 경우 대우그룹에서 분리된 이후에도 쌍용그룹 시절 로고체로 돌아가지 않고 대우그룹 시절 로고의 폰트체를 그대로 사용했다.[19] 수출용 로고는 체어맨 초기형의 후드 오너먼트 형상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폰트는 쌍용그룹 영문폰트이다. 국내용 로고가 오펠의 마크와 비슷하게 생겨서 혼동될 소지를 막기 위해 외국용 로고를 따로 만들었다. 실제로 오펠에게 소송 걸려서 패소하여 사용금지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 대한민국에서도 60주년 기념 모델에 이 엠블럼으로 잠시 판매했었다. 통칭 윙 로고 라고 부르는데 윙 로고를 수출용 로고로 사용하게 되면서 체어맨은 별도의 전용 로고를 만들었으며, 체어맨 단종 이후 G4 렉스턴과 렉스턴 스포츠에 사용되다가 두 차종 모두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내수용의 사용이 중단되었다.[20] 로고타입 부분은 2002년 체어맨 광고에서 잠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21] 대우에 인수되기 이전인 1998년부터는 BI로 사용되던 쓰리 써클 로고를 본격적으로 CI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대우 인수 직후에도 임시로 해당 로고를 사용했다. 그 뒤 잠시 동안 대우 심볼을 단 CI를 사용하다가 채권단에 넘어간 이후 다시 이 CI로 돌아왔다.[22] 김석원 회장 재임기에 쌍용자동차의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던 켄 그린리는 무쏘를 소개하는 왓카? (What Car?) 지의 지면을 빌어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 (a car nut) 고 언급하기도 했다.#[23]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던 시기에는 30여 대를 보유했었고, 나중에 쌍용자동차를 매각할 무렵에는 보유 자동차가 60~70대에 이르게 됐다. 포르쉐, 벤츠 같은 고가의 자동차도 있었지만 1960년대에 생산된 구형 올드카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24] 당시 무쏘의 디자이너로 참여한 켄 그린리가 쌍용자동차와 일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켄 그린리는 원래 팬더에서 일하면서 진도그룹과 연이 있었으나 쌍용그룹이 팬더를 인수하며 쌍용차 차종의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1987년 10월에 "차기 소형 4륜차를 제안해 달라"는 김 회장의 요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의 스즈키에스쿠도같은 작은 차를 예상했으나 결국에는 무쏘를 개발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 회고가 나온 1990년대 기준으로 켄 그린리의 디자인 팀원 12명과 비교하여 쌍용자동차의 인하우스 디자인 팀이 10배 규모까지 커졌으며 서울에 현대적인 설비까지 갖추었다고 "왓카?" 지의 홍보기사에서 밝혔다.#[25] 동아자동차 시절 닛산 디젤에서 들여온 RD8 엔진은 무보링 200만km로 명성이 자자한 내구성이 좋은 엔진이었으나,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닛산 디젤과 더 이상 추가로 제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동안 대우중공업의 엔진을 받아 쓰다가, 이후 무보링 250만km라고 마케팅 하던 벤츠의 OM442A 엔진을 도입했다. 대신 닛산디젤은 한참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려던 삼성그룹삼성 상용차와 기술 제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벤츠의 OM442A 엔진은 닛산 디젤의 엔진 내구성보다 한수 위였으나 단가나 로열티 면에서 더욱 비쌌던게 흠이었다.[26] 특히 쌍용그룹이 훗날 1994년 일본 유니참 합작법인을 만든 것을 보면 정말로 반일감정 때문인지 의문일 정도.[27] 물론 렉서스라는 고급 브랜드도 있긴 했으나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한 것은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28] 당시 쌍용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회사가 기아였는데,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기아는 승용차 생산이 중단되고, 승합차, 화물차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기아는 쌍용과 같은 시기에 쌍용과 정반대로 가장 작은 승용차 차급인 소형차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하여 프라이드를 출시했고, 프라이드가 성공을 거두며 이후 중형 콩코드도 연이어 출시하며 승용차 사업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이후 기아도 고급차, 스포츠카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으면서 엘란의 생산에 무리하게 자금을 쏟는 등 방만한 경영을 하다가 결국 외환위기 시기 쌍용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29] 이 실패에 크게 데인 르노는 냉정하게 한국에서 르노의 브랜드 파워가 없다고 판단했고, 훗날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후 삼성에 로열티를 지불해가면서까지 르노삼성이라는 사명을 만들어 이를 20년 넘게 고수했다.[30] 벤츠 e클래스, BMW 5시리즈와 경쟁하던 모델이다. 이 모델은 당시 볼보의 플래그십 모델이었다. 볼보가 벤츠 s클래스에 해당하는 대형 플래그십 세단을 내놓은 것은 이후의 일이다.[31] 1988년 쌍용이 르노 25를 국내에 수입, 출시했을 때 판매가가 무려 5,200만원이었는데, 당시 현대 자동차의 1세대 그랜저 최상위 트림의 2배에 달하는 가격이었다.[32] 체어맨 이전 출시된 차종인 무쏘를 디자인했던 켄 그린리가 무쏘를 소개하는 영국 왓카?(What Car?)지의 기사에서도 무쏘가 한국의 부유층들을 목표하여 개발한 고급 차종임을 엿볼 수 있다. 켄 그린리는 한국의 고위 인사들을 4륜차 고객으로 유치하려면 경쟁력 있는 4륜차 패키징에 일반 승용차의 장점들을 결합해야 했다고 밝혔으며, "한국의 도로 환경에서 무쏘를 보면 운전자가 고급 세단을 탄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디자인을 자평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부유층들이 매우 보수적이고 한국에서 운행되는 차들도 거의 무채색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등, 오히려 쌍용자동차 입장에서 너무 미래지향적인 컨셉트일 수 있다는 염려까지 내비쳤다.#[33] 원래 쌍용자동차는 이스즈 라이선스로 만들어진 대우중공업의 엔진을 공급받다 대우 중공업의 노사분규로 이스즈와 프랑스의 푸조 엔진을 수입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게 되면서 벤츠의 엔진을 수입해서 무쏘에 장착했는데, 수입 단가 문제로 인해 이스타나를 생산하게 되면서 창원공장을 만들고 여기서 생산하게 된다. 다만 상용차와 체어맨 W 5000 모델은 엔진을 수입해서 장착했다.[34] 체어맨 개발에 무려 4,500억을 사용했다. 최근 출시된 신형 코란도의 개발비가 3,500억이라는 점을 볼 때 20년 전과 지금의 물가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어마어마한 돈임을 알 수 있다.[35] 이 금액이 충공깽인 것은, 두산의 핵심 계열사들이 사분 오열하고 그룹 자체를 휘청이게 만든 원흉 쌍두마차 중 하나인 두산건설이, 그것도 2010년대에 빨아먹은 그룹 자금이 2조가 조금 안됐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면, 무려 20년도 전에 그 두배를 빨아먹은 쌍용자동차가 그룹에 얼마나 큰 위기를 만들어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 때는 몰랐겠지만, 머지않아 한국 경제 사상 최대의 칼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36] 현 쌍용C&E. 유동성 위기로 최대 주주가 김석원에서 일본 태평양시멘트로 변경됐다가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매각됐다. 시멘트 분야에서 아직도 국내 1위다.[37] 현 쌍용 제지. 한국 P&G에 인수되고 화장지 부문을 2005년에 주식회사 모나리자로 매각, 나머지는 후에 DK코리아(50%)와 소프크뱅크벤처스(49.9%)가 인수한다. 현재는 원래의 본업이었던 지류 제조 및 판매를 중단하고 원목 수출입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38] 자세한 내용안 S-OIL 문서를 참조하자.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아람코의 자회사이다.[39]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는 자동차 기업을 비싼 돈에 팔기 좋은 시기였다. 똑같이 자동차광이 총수로 있던 삼성은 199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려 했으나 정부가 허가를 하지 않는 관계로 하지 못했다. 기존 자동차 회사가 매물로 나온다면 얼씨구 좋다하고 좋은 값에 매입할게 뻔한 상황.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삼성의 쌍용, 기아 인수설이 꾸준히 나왔고 삼성이 기아 주식을 매집하네 마네하고 말들이 나왔다.[40] 매체에서는 '대우자동차·쌍용자동차' 형태의 로고타입을 사용했으며, 해당 로고타입은 대우그룹 해체 이후에도 심볼 로고만 바꾼 채 KG모빌리티로 사명을 바꾸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41] 여담으로 1년여 뒤 삼성자동차 부도가 나서 또 한번의 빅딜이 시도됐는데, 이 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고 한다.[42] 이스타나의 경우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의 MB100/140의 위탁생산 체제였기 때문에 대우가 맘대로 디자인을 손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뉴 코란도는 그릴의 형상 때문에 삼분할 그릴을 적용하기 어려웠는지 삼분할 그릴이 적용되지 못하고 엠블럼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끝났다. 오히려 코란도의 경우 엠블럼 없는 그릴이 지프를 닮았다고 대우자동차 시절 그릴로 교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3] 대한민국 형법배임죄에 대해 작동하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례법리이다. 원류는 미국 상법계.[44] 다만 2020년대 들어서는 전기자동차인 코란도 EV토레스 EVX를 선보였으며, 2025년 3월 중에는 토레스를 기반으로 한 첫 하이브리드 차량이 출시될 예정이다.[45] 이 과정에서 안진회계법인 등이 개입된 회계 조작 의혹 등이 제기됐다.[46] 모든 기업은 당연히 노조가 강경한 기업을 인수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매각하기 전에 정리해고를 시행하고 노조를 와해시키면 매각이 수월해지는 면이 있다.[47] 8시간 기본 작업에 잔업까지 하면서 임금 총액이 높기는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이공계 연구직에게 월화수목금금금과 철야 따위는 기본인 경우가 대다수인 데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나 능력의 희소성을 고려한다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처사라 할 수 있다.[48]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당시 쌍용자동차 현금 동원력이 2008년에는 680억 원으로 2006년 2600억의 1/5 가량으로 시작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다. 당시 상하이자동차는 3300억원을 이미 확보한지 오래인 상황. 게다가 저 680억원은 월 재료 구매비 40%에 불과하다. 상하이차의 투자 계획이 애시당초 없었다는 점이 더 크다. 게다가 조립 품질은 국내 완성차 중 최하 수준이었다.[49] 벤츠제 덕분에 벤츠와 경쟁할 수 있는 지역에는 수출하기 힘들며 엔진과 변속기를 구입할 때 벤츠에 이득을 붙여줘야 하니 당연히 자체 개발보다 원가가 비싸다. 거기다 벤츠가 최신형 엔진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미 타사와 기술격차가 줄어들어 구형 엔진이 타사 엔진보다 이점은 크지 않다.[50] 물론 기술개발을 할 자본이 없었고 소규모 회사 특성상 단가를 세게 칠 상품도 없었다.[51] 사명 변경의 경우 KG그룹으로 주인이 한번 더 바뀐 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52] 트랙스에 없는 4WD도 있어 4WD를 원하던 소비자 요구를 충족시켰다. 실질적인 경쟁차 코나는 2017년에서야 나왔다. 그나마도 코나 디젤은 2020년형 이전까지는 4WD 선택이 불가능했다.[53]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준중형 SUV 시장에서 투싼, 스포티지, 윈스톰 맥스, 액티언, QM5가 경쟁했다.[54] 경쟁력 있는 완성차 회사는 최소한 3년, 길면 7~10년 단위 플랫폼, 파워트레인, 신차 포트폴리오를 갖고 연구개발 사업을 벌인다.[55] 서비스 공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3년간 임대 보장 조건으로 매각했다.[56] 이 서울 서비스센터는 앞서 이야기했듯 극초창기 하동환자동차 시절 공장이 들어섰던 곳으로 쌍용차 발상지로 볼 수 있는,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57] 참고로 대우그룹이 망하기 직전 분식회계가 까발려졌을 때 부채비율이 360% 정도다. 다만, 대우는 거대한 기업집단이었기 때문에 부채 역시 거대한 규모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해도, 쌍용차가 막장이란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58] 가격 정책, 코란도 답지 않은 디자인, 마힌드라 투자가 제 때 이뤄지지 않음을 꼽았다.[59] 실제로 이후 토레스로 나온 J100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한 외관 디자인으로 인해 초기 판매량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코란도 5세대가 될 쌍용 KR10 프로젝트 등 앞으로 나올 신차들에서도 이러한 기조를 이어간다고 한다.[60] 볼보 모회사[61] 전기차 회사[62] 마힌드라와 인도 시장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제휴하고 있다.[63] 그래도 렉스턴은 세대 간 생산 중단 시기가 없었고 프레임바디 차량이라서 그렇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코란도는 단종되고 한참 지나서 모노코크로 체제전환까지 한 거라 빼도박도 못하는 막장이었다.[64] 원래 업계에서는 경쟁차가 출시된지 3~4년 정도 됐을 때 신차를 내놓아서 수요를 뺏어오는데 쌍용차는 한 차종을 워낙 오래 팔기 때문에 신차를 내놓아도 경쟁 차종이 풀체인지되기 딱 1년 전만 반짝하고 그 뒤로는 매우 밀린다. 물론 티볼리는 그런 악순환을 완전히 깨부수었기 때문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65] 렉스턴 2와 슈퍼 렉스턴에 들어가던 에어 서스펜션(EAS),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EPB), 연소식 히터 & 3열 에어컨 등등 고급 옵션이 빠졌다. 대신 스마트키 시스템, 아웃사이드미러 퍼들램프, HID 헤드램프 & LED 안개등, 1열 통풍시트 등등 시대에 맞는 최신 옵션들이 들어갔다.[66] 당시에는 현대기아와 옵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굳이 짚자면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같은 첨단 장비나 없었을 뿐(지금과 달리 선택율이 매우 저조했다) 상대적으로 체감이 큰 스마트키 시스템이라던가 내비게이션, 오토에어컨 등등 편의사양이 없거나 부족하지는 않았다. 물론 품질이 매우 떨어지는 수준이었지만 전 라인업에서 가격 조정을 거쳐서 가성비가 꽤 좋았는데 투싼ix 가격으로 넓은 짐칸을 가진 코란도 스포츠를 구매할 수 있었고 싼타페 DM 가격으로 한 체급 위의 렉스턴 W를 구매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국산 중에서 레저활동을 즐기기 위한 적재능력이나 험로주행에서 쌍용차를 능가하는 국산차라곤 가격대가 한참 위에 있는 모하비 뿐이었다.[67] 그나마 트랙스는 페이스리프트 이후 판매량이 늘었지만 스토닉과 QM3는 제자리 걸음이다. 결국 스토닉은 한국 시장에서 판매가 중단됐고, QM3는 2세대 풀체인지 모델을 캡처라는 이름 그대로 르노 브랜드를 달고 판매했다 판매 부진으로 한국에서 단종됐다.[68] 대우자동차에 인수됐을 때 개발된 차량이다. 렉스턴과 동시대에 개발된 차량이 바로 매그너스였다. 매그너스가 토스카와 말리부(V300), 그리고 올 뉴 말리부까지 총 세 차례 후속이 출시될 동안 2번의 페이스리프트와 자잘한 변화만 가지고 버텼던 것이다. 참고로 이후 순수 대우자동차 계열에서 나온 첫번째 SUV는 GM대우 윈스톰 이다.[69] 쌍용차가 침이 마르게 홍보하는 LET 엔진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rpm 영역인 1600~2600rpm 사이에서 최대토크가 나오도록 설계됐다는 것인데, 추월을 한다거나 견인력을 위해 rpm을 일상영역 이상으로 올리게 되면 가속력이 크게 떨어진다. 더군다나 렉스턴은 무거운 프레임 바디와 높은 차체까지 가세하니 가속력은 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다.[70] 이게 단순히 낭설이 아니었던 것이 이후에 코란도(C300)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유용해서 만든 토레스의 경우에는 차체 크기가 QM6와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시장에서의 반응도 코란도와는 대조되게 좋은 편이다. 물론 토레스의 경우는 디자인 면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이 어필하고 있는 점도 크다.[71] 그러나 티볼리마저도 판매량이 점점 밀리게 되면서 부활시켰고 자충수를 시인한다.[72] 티볼리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데 출력을 향상한 것이다.[73] 제로백은 코란도C 2.0L 149마력 버전과 비슷하지만 후반 가속이 매우 떨어진다.[74] 비슷한 출력을 뽑아내는 투싼과 스포티지 1.6/1.7L 디젤보다 더 안 나간다.[75] 렉스턴도 아쉬움을 사고있지만 상술했듯 장점도 있어서 아쉬움 정도에서만 그치고 있다.[76] 다만 그랜저도 7세대부터는 스타리아의 세단 버전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어, 사실상 뷰티풀 코란도와 궤를 같이 하게 됐다.[77] 투박한 프레임바디 SUV는 비주류로 밀려난 지 오래임은 사실이다. 당장 이 분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지프 랭글러도 동사의 더 비싼 모델들보다 안 팔릴 정도로 매니악한 차량이다. 워낙 수요가 제한적인 포지션이기 때문에 아무리 평가가 좋아도 판매량으로 이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프레임바디 SUV를 만들었던 랜드로버는 같은 이유로 프레임바디를 버리고 유선형 디자인이 적용된 모노코크로 체제변환을 했는데(디펜더, 디스커버리), 그럼에도 프레임바디 시절의 구세대 디자인을 일부나마 재해석해서 가져왔다. 지프 또한 랭글러와 왜고니어를 제외한 차종들이 죄다 모노코크 바디인데다가 가성비나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타사 동급 SUV 차종 대비 이렇다할 메리트가 크게 없긴 하나, 윌리스 MB 시절부터 만들어진 전면부 디자인을 확고히 유지하면서도 개성있는 생김새 덕분에 꾸준히 수요를 끌어모으고 있다. 당장 한 대라도 더 팔아 회사가 안정권에 들어가는 게 급급한 쌍용이라도 디자인 정체성과 헤리티지를 결코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전술한 바와 같이 토레스 이후로는 고유의 정체성과 헤리티지를 반영한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갔다.[78] 이런 결정 자체가 여간 힘든게 아님을 방증한다.[79] 상품성이 개선되면서 첨단 안전장치가 더 추가됐고 전기차와 하이브리드까지 나왔다.[80] 2세대 스포티지보다 더 큰 덩치를 활용해 티볼리부터 코란도까지 크게 위협하면서 순식간에 파이를 뺏었다.[81] 정통 SUV에 가까운 보수적이고 다부진 외모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잘 되어 2022년에는 9년만에 흑자로 전환할 정도로 GM 한국사업장을 먹여살리고 있다.[82] 동급은 물론 국산차 중 유일한 쿠페형 SUV라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투싼 TL을 능가하는 큰 덩치와 비교적 싼 가격으로 호평받으며, 또한 유럽에서의 평가도 좋아 수출도 잘된다.[83] 게다가 코나, 셀토스, 트레일블레이저, XM3는 전자식 EPB이지만 티볼리 페이스리프트는 아직도 기계식 파킹브레이크를 쓰고 있다.[84] 렉스턴은 싫어해도 렉스턴 스포츠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할 정도로 존재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았다.[85]스텔란티스 코리아[86] 이는 쌍용차가 오랜기간 픽업트럭을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허술하거나 쓰기 불편한 몇몇 인체공학적 디자인 문제, 픽업트럭의 주 목적인 적재와 견인에서 파워트레인 문제와 제동력 등의 안전 문제이다. 그나마 상용고객은 유지비 때문에 수입픽업이 꺼려지지만 레져, 특히 캐러밴 견인 목적 고객들은 그런 문제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레져 고객들은 강력한 돌파력과 견인력이 중요하다.[87] 다만 콜로라도는 지나칠 정도로 현지화를 등한시한 탓에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등장 초기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것에 비해 판매량은 한참 못 미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88] 만약에 글래디에이터가 성공하게 된다면 램이나 닷지 픽업들이 상륙할 수도 있다. 한국은 풀옵션, 고성능, 플래그십을 매우 선호하는 소비성향이 있는데 갖가지 경제지표로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구매시 자금여유도 증가해버렸다. 구매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크고 좋은 차를 고르는 성향은 여전히 변함없어서 현재 픽업트럭에 대한 긍정적으로 개선된 주 구매층들 반응, 실제로 크게 증가한 수요를 따졌을 때 망할만한 이유를 들기가 어려울정도로 전망 자체가 긍정적이다. 한국에선 닷지가 가진 픽업트럭으로서 최정상 이미지는 유명하기 때문에 글래디에이터급이 실제로 성공한다면 램과 닷지 입장에서는 한국시장을 진지하게 고려해볼만 하다.[89] 물론 이 외에도 제너럴 모터스 산하의 올즈모빌, 새턴 및 포드의 머큐리, 영국의 자동차 산업 등 사례는 많다.[90] 랭글러는 한정된 소비층을 보고 만드는데다가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아이코닉한 디자인과 더불어 정통오프로더 자체가 대체할 모델이 거의 없다는 장점 때문에 연간 판매량이 20만 대를 넘으며, 그 외에 체로키와 그랜드체로키 역시 2020년 기준으로 미국내 자동차 판매량 25위권 이내로서 어지간한 대중 브랜드 SUV들과도 경쟁이 가능한 수준이다.[91] 챌린저만 하더라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유명한 머슬카이며, 차저 역시 거의 유일한 세단형 머슬카라는 특성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대중 브랜드의 준대형차(토러스, 임팔라, 아제라 급)'임에도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데다가 경쟁모델들이 줄줄이 단종되는 와중에도 사측에서는 오히려 향후 차저의 파생모델을 추가할 것을 발표하더니 2024년 신형 모델을 공개했다.[92] 램 픽업은 포드 F-시리즈쉐보레 실버라도와 함께 미국내 자동차 판매량 TOP3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바로 다음 순위를 기록한 토요타 라브4와 비교시 램 픽업이 무려 10만대 이상의 차이로 압도한다.[93] 물론 북미시장이 규모가 워낙에 크고 특수성이 있는 시장인 것도 한 몫 하나, 이들 차종과 브랜드들이 나름의 개성도 없이 어설프게 대중 브랜드를 쫓아가려 했다면 도태됐을 것 또한 자명한 것이다. 미국시장에서도 도태될 기업은 도태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94] 아직 타사 준대형/대형 SUV들 같이 VIP 시트나 후석 디스플레이 등 고급차로서 갖추면 좋은 장비들은 없다.[95] 코란도는 희대의 에어백 옵션질을 했다. 다만, 이후 무릎에어백이 교통사고시 별 도움을 안 준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 결과가 나온 것은 출시 이후였고 '2010년대 후반에 안전갖고 장난질한 차'라는 평가가 내려진 뒤였다.[96] 현대모비스가 변속기와 전장류, SNT모티브(舊 통일중공업, S&T중공업)가 차대와 차체를 납품하기 때문에 이 두 회사가 거부하면 답이 없다. 보그워너는 구동계통, 콘티넨탈오토모티브는 공조계통을 납품하기 때문에 이 두 회사도 납품을 거부하면 답이 없다.[97] 현재 LX하우시스[98] 한국GM은 본사의 충실한 하인 역할을 하다가 버려질 뻔했고 노조가 물량 최소화에 대해 반대하며 한동안 사측과 실랑이를 했다는 정 반대였지만 무너지기 직전이었다는 점은 동일했다.[99] 재무적 투자자는 컨소시엄 회사를 내세워 인수한 후 회사의 구조조정, 회생 여부를 봐 가면서, 추가 자금을 투입한다. 만일 쌍용차의 회생이 불가능할 것 같으면 약정 위약금만 내고 컨소시엄에서 탈퇴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면 쌍용자동차는 자연 파산하고, 컨소시엄사 관계자 일부가 배임 혐의로 처벌 받겠지만, 컨소시엄사 자체는 페이퍼 컴퍼니 형태에 가깝기 때문에 실재무적 투자자는 실질적인 리스크로부터 자유롭다.[100] 이후 2022년 1월 27일에 채결됐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조립생산을 위한 연 3만대 규모의 현지공장이 세워지며 렉스턴, 렉스턴 스포츠를 2023년부터 현지조립하여 7년간 169,000대의 부품공급 계약을 맺었다.[101] 특수목적법인으로 KG그룹의 KG모빌리티, KG ETS, KG스틸, KG이니시스, KG모빌리언스 및 사모펀드 켁터스PE, 파빌리온 PE로 구성됐다. 컨소시엄 대표자는 KG모빌리티이다.[102] 본사 및 전시장과 서비스센터의 간판 및 인테리어 교체, 모든 내부 문서 및 웰컴 키트 등 각종 굿즈 상품에 찍히는 로고 수정, 실차에 부착될 로고 제작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공정 신설, 신 사명의 마케팅 비용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사안들은 국내 뿐 아니라 쌍용차가 수출되는 모든 국가에 동일 적용되므로 가히 막대한 비용이 드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103] 이쪽은 쉐보레로 사명 변경 이후 2019년 수입차협회에 가입하고 아예 대한민국 기준 수입차 전문 브랜드로 성격을 바꾸고 있으며 대우자동차가 뿌리인 스파크, 다마스, 라보, 크루즈, 올란도, 캡티바, 아베오(소닉)를 단종시키는 한편 대외명칭을 한국GM에서 GM 한국사업장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우자동차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기엔 힘들 것이다. 르노삼성자동차가 르노코리아자동차로 사명변경 후 한동안 국내 생산 및 판매 모델에 한해 태풍 로고를 유지했던 것을 보면 이런 문제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였으나, 결국 르노코리아도 2024년 4월부터 국내 생산 및 판매 모델에 적용되는 엠블럼을 로장주(다이아몬드) 마크로 통합했다.[104] KGM 브랜드 출범 후 @kgm.world.official로 한 차례 또 변경했다.[105] 2021년에 사명 및 로고 변경을 단행한 기아의 경우, 일부 판매대리점 및 정비사업소의 간판 교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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