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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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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귀순 이전3. 으로 귀순 (227년 ~ 228년)
3.1. 정사 삼국지의 기록3.2. 위략의 기록3.3. 강유의 귀순 과정 재구성
4. 촉 귀순 & 제갈량 시대 (228년 ~ 234년)5. 장완 시대 (234년 ~ 246년)6. 비의 시대 (246년 ~ 253년)7. 진지 & 강유 시대 (253년 ~ 258년)
7.1. 적도와 도수7.2. 단곡 전투
8. 유선 시대 (258년 ~ 263년)9. 촉한의 멸망(263년 ~ 264년)10. 최후: 성도의 난 (264년)

1. 개요

강유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2. 귀순 이전

어린 시절에 강인(羌人)과의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강경은 강인의 침입 때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하였고, 이에 강유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 받아 군에서 중랑으로 임명되었다. 강유의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 중(대략 206년 - 217년 무렵) 이 정도로 강인들이 침입했던 사건은 213년, 마초가 강인들과 연합, 조조를 공격했을 때 외에는 기록된 사건이 없다. 만약 이 당시 강경이 천수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했다면, 마초 연합군에 의해 강유의 부친이 죽은 셈이다.[1] 다만 이 외에도 다른 기현 침입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기에 정확한 사건은 알 수 없다.

이때 정사 삼국지 강유전은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라 기록하고 있는데, 대강 "강유는 입신 양명에 관심이 있어, 은밀히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우고, 평범한 일에 관심이 없다" 는 의미다. 강유가 나이는 어려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냥 용맹한 병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 이런 "사사" 들이 목숨을 거는 일은 단순히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가 아니다. 특별히 훈련받아 충성 대상을 향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 한국식으로 하면 결사대, 주군의 명을 받고 주군과 반대하는 자들을 암살하는 자객 쯤으로 볼 수 있다. 또 사사가 중국어로 협객과 뜻이 통하는데 이는 강유가 어떤 유협집단의 지도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린 나이부터 강유는 출세하기 위한 야심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주의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계연으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종사는 주에 새로운 자사 등이 임명되었을 때 각 군현의 인물들을 현지 정보 입수 차원에서 채용할 때 주어지는 자리였으며, 상계연은 중앙 정부에 해당 지역의 인구 및 특산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직책이다. 이 일은 문관 계통이니 중랑, 즉 무관 계통이었던 강유가 문관 계통으로 일을 바뀌었거나 능력이 뛰어나 양쪽을 겸업했을 수도 있다. 또 강유는 정현[2]의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니[3] 문관직에도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옹주자사 대리는 곽회로, 강유는 기간은 알 수 없지만 한 때 그는 곽회의 부하였다. 이후 강유의 북벌 당시 강유와 곽회가 지겹도록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둘의 운명도 꽤나 얄궂은 듯. 더불어 촉의 제갈량의 위나라 1차 침입 당시 곽회는 기현에서 상규로의 후퇴를 감행하여 강유가 촉에 투항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3. 으로 귀순 (227년 ~ 228년)

3.1. 정사 삼국지의 기록

정사 <강유전>에서는 천수 주변 고을들이 촉군에게 호응한다는 소식을 접한 천수태수 마준이 강유를 의심하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강유의 고향인 기현에서도 강유를 받아주지 않아 강유는 갈 곳이 없어 항복했다고 적고 있다. 자세히는 227년제갈량천수를 공격했을 때 천수태수 마준은 마침 밖으로 나와 순찰하고 있었고 강유, 양서, 윤상, 양건 등이 함께 수행했다. 그런데 여러 현이 제갈량에게 호응하니 마준은 이들도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여 이들을 버리고 상규성으로 도주한다. 이들은 다 같이 상규성으로 가서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고향인 기현으로도 가 봤지만 그 쪽에서도 받기를 거부하여 제갈량에게 나아갔고 마침 마속이 장합에게 패해 제갈량이 서현(西縣)의 일천여 가를 뽑아 철수할 때 강유를 같이 데리고 가서 강유는 모친과 헤어졌다고 되어 있다.

3.2. 위략의 기록

그러나 배송지 주석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정사 강유전의 내용과 좀 다르다. 일단 강유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마준과 곽회를 수행하다가 의심을 받아 버려져 고향인 기현으로 간 것까지는 일치하는데, 강유의 고향인 기현에서는 강유와 그를 따라온 군리(郡吏) 상관자수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제갈량에게 보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다가 장합과 비요에게 촉군의 선봉이 격파당하자 기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강유는 결국 촉으로 들어갔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는 이 내용을 그냥 짧게 '강유가 항복했다'고만 서술했다. 어쨌든 강유가 위에 버림받고 촉한에 투항한 것은 확실한 듯 하다.

강유가 귀순한 이후 위에 남은 강유의 가족은 조정으로부터 강유를 다시 귀순시키라는 압력을 받은 듯하다. 위나라 법은 투항자의 가족에게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다.[4] 강유의 어머니당귀를 강유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당귀는 한약재의 일종으로 當歸라고 쓰며, '마땅히 돌아오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적국에 투항한 아들에게 당귀를 보낸 것은 우회적으로 귀국을 권유하는 의미였다.

이에 강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5]를 써서 답장으로 보냈다고 한다.
[ruby(良田百頃, ruby=양 전 백 경)][6] 좋은 밭이 백경이 있으나
[ruby(不在一畝, ruby=부 재 일 무)][7] 일 무도 남은 바 없으니
[ruby(但有遠志, ruby=단 유 원 지)][8] 다만 원지만 있을 뿐
[ruby(不在當歸, ruby=부 재 당 귀)][9] 당귀는 없나이다.

원지는 당귀와 마찬가지로 한약재의 일종이며 遠志라고 쓴다. '원대한 뜻'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이 답장은 '나의 원대한 뜻(遠志)은 촉에 있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마땅히 돌아갈(當歸) 수 없다'며 귀국을 거부하는 의미. 강유가 끝내 귀국을 거부하고 촉에 남았으므로, 그의 가족들은 그가 죽기 전까지 사면받지 못했다.

한편, 코에이는 이 일화에 영감을 받고 삼국지 13에서 당귀와 원지를 보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강유는 선호도에서 보물에 관심이 없는지라, 당귀고 원지고 간에 강유와 친분을 쌓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일화를 살짝 비틀어서 반영한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강유가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검소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를 고증한 것 같기도 하다.

3.3. 강유의 귀순 과정 재구성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사 강유전과 위략에서 각각 다르게 강유의 촉 귀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정사 강유전에 쓰인 강유의 귀순 과정은 너무 간결할 뿐 아니라, 기현이 소속된 천수군에서 제갈량의 촉군에게 호응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작 마준에게 버림받은 강유는 안 받아줬고, 제갈량이 퇴각할 당시 강유만 데려가고 (연좌제가 당연시되는 당대의 상황에서) 강유의 가족들은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략을 참고했을 시 투항 과정이 강유전보다 자세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정사 강유전을 다시 짜맞추면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말 그대로 사방이 제갈량에게 호응하는 상황에서 천수태수와 옹주자사마저 치소인 기현 주민들을 믿지 않아 내버리고 상규로 도망가 고립을 자처했고 기현 주민들 역시 대세에 동참했는데, 장합에게 마속이 격파되자 기현 대표로 촉 진영에서 항복 협상을 진행 중이던 강유를 기현 사람들이 먼저 사실 은폐를 위해 내버렸다는 것이다.

장합에게 마속이 지키던 가정이 격파당해 너무 다급하게 퇴각하느라 가족을 챙기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은 정사 제갈량전에서 주둔하고 있던 기산 근처 천수군 서현의 1천여 가구를 뽑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에 비춰볼 때 신빙성이 없다. 따라서 자치통감에서 '강유가 투항했다.'는 기록과 정사 강유전과 위략의 모든 기록들이 다 사실에 부합한다는 가정을 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1. 강유가 마준에게 당신들은 제갈량한테 항복할 셈이 분명하니 모두 적이라며 버림받고 고향인 기현으로 갔다.
2. 기현 사람들은 (위략에서 묘사한 대로) 강유를 제갈량에게 대표로 보내 항복했다. (기현은 천수군 소속이므로 마준의 '천수의 여러 현들이 제갈량에게 호응하려 한다' 는 말이 있다고 한 강유전의 기록에도 부합한다.)
3. 그런데 장합이 마속을 가정에서 격파하고 전세가 급격히 위로 기울게 된다.
4. (정사 삼국지의 기록대로) 강유는 기현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기현의 주민들은 촉에게 항복하려던 사실 은폐를 위해 강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들도 기현 안에 있지만 당연히 혼자서는 못 데리고 나온다.)
5. 조위라는 국가에서도, 고향인 기현에서도 버림받아 갈 곳 없어진 강유는 결국 촉에 투항한다.

추가적으로 2번에서 강유는 비록 기현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제갈량에게 가 봤지만 마준에게 버림받아 섭섭했더라도 촉에 투항할 마음은 없었다고 봐야 4번에서 기현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과 위략에서 '강유에게 본래 떠날 마음은 없었으므로 ...' 라는 기록이 성립한다.

4. 촉 귀순 & 제갈량 시대 (228년 ~ 234년)

촉으로 귀순한 강유는 봉의장군 당양후 창조연에 임명된다.[10]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창조연이라는 관직은 태부 소속의 관직으로 창조연이 양곡 창고 관리인 점을 고려한다면, 북벌군의 군량 보급 쪽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촉에 귀순한 직후 강유는 문관 쪽에서도 일한 듯한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창조연의 경우 강유가 위나라에서 하던 일인 상계연과 비슷한 위치로 역시 중앙 정부에 인구 및 특산물을 통계하여 보고하는 자리다. 즉, 창조연이나 상계연이나 군량 보급 못지 않게 통계 처리가 필요한 직책이니 창조연은 촉에 적응해야 하는 강유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제갈량이 위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역할을 주어 촉에 적응하기 쉽도록 배려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촉이 익주 하나라고는 하나 국가이고 양주는 한 주이니 수행하는 업무는 비슷하다 해도 위상과 지위는 촉의 창조연이 위의 양주 상계연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또 봉의장군은 과거 이엄이 맡았던 자리라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엄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서 후방과 보급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였던 인물이니만큼 이엄의 옛 관직과 업무를 맡긴 것으로 보아 강유를 상당히 신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강유에 대한 제갈량의 신임은 상술했듯이 제갈량이 막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강유를 칭찬한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촉서 강유전에 제갈량이 유부장사 장예와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유를 칭찬한 내용이 쓰여있다.
"강백약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이소의 자) 및 계상(마량의 자)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의 상사(上士,뛰어난 선비)입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 5, 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의 뜻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장예와 장완은 승상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장완은 제갈량 다음 후계자로서 제갈량에게 지명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들에게 강유의 재능을 칭찬하는 서신을 따로 쓴 것이다. 거기다가 중호보병은 중호군으로서 조운이 맡았던 황실 경호군를 뜻하는 것인데[11] 한 나라를 총괄하는 재상이 일개 항장의 재능을 보고 자신의 군주와 만나게 하고 중앙군을 맡겨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일화들은 제갈량이 강유를 자신의 사후 바로 국정을 책임질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아니라도 차세대 촉한을 이끌 주요 유망주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또한 항장 출신이라는 다소 거북한 꼬리표가 달려 있음에도 이러한 파격적인 제갈량의 기대와 대우를 받은 것은 강유가 장완이나 비의처럼 제갈량에게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어 국정을 맡을 후계자로 지명된 것이 아님에도 실제 역사에서나 연의에서나 장완과 비의의 뒤를 잇는 제갈량의 후계자로 받아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촉 귀순 후 한동안 문관 업무를 하던 강유는 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무관임무를 맡게 된다. 230년 봄, 이 해에 촉 장군직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강유는 정서장군으로 임명되고 중감군(中監軍) 혹은 호군(護軍)을 맡았다.[12] 강유가 정서장군으로 임명 된 이후 이 무렵 위연이 오계에서 곽회비요를 격파하고 정서대장군에 임명된다. 제갈량 사후 정서장군, 혹은 정서대장군이 대위 전선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무렵부터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직속 부대를 이끌고 단독 작전에 임하는 것보다는 고정된 보직 없이 제갈량의 명에 따라 이리저리 투입되면서 이 임무 저 임무 다 맡던 기동대장 정도로 다른 장수들을 지원하는 역할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사실 한중공방전 당시 하후연을 참살한 황충이 직후 받은 관직이 정서장군이었던 만큼 촉한의 건국시에서부터 정서장군직은 한중, 북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후일 장익이 북벌에 나설 시기의 관직도 정서대장군이었다.[13] 이런 중요한 직책, 그것도 황충이나 진도 같은 숙장들이나 맡던 직책을 제갈량은 이제 막 29살 청년인 강유에게 맡겼던 것으로 다시 한 번 제갈량이 강유를 차세대 무장 가운데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기대를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위군이 퇴각한 직후 위연곽회비요를 대파하고 정서대장군직에 오르자 강유는 4차 북벌 때 정남장군으로 전봉된 것으로 보이는데 231년 이평(이엄)의 탄핵 때 연판상소에서 '행호군 정남장군 당양정후 신 강유'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것 역시 눈여겨볼 내용인데 제갈량과 함께 밀접하게 연관된 조운이 바로 남정때 정남장군이었고 후일 241년에 편찬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을 정남장군이라고 칭하는 등 정남장군을 조운의 주요 관직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후계자인 장완에게 강유의 군사적인 능력을 어필하고, 조운이 유선을 구한 바로 그 장소인 당양의 정후로 삼았으며, 사방장군인 관장마황 다음 격인 조운과 그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았던 진도가 맡았던 관직을 차례로 역임케 하여 북벌에 참여시키고, 조운이 주도하던 중호보병을 통솔하게 했다는 사실은 자신의 사후 장완을 자신의 자리를 맡으면 제갈량 자신이 조운의 보좌를 받았듯 강유를 조운의 관직 코스를 걷게 하여 장완의 군사적 역량을 보좌하게 하고 조운의 뒤를 이어 북벌을 진행하는 주요 인재로 키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장완 시대에 대사마 장완의 사마를 강유가 맡게 되니 제갈량의 안배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강유전, 화양국지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 '정남장군'은 '정서장군'의 오기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앞서 말한 정남장군설은 틀린 것이 된다.

강유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무렵으로 사마의의 건벽거수에 대하여 제갈량과 문답한 내용이 정사 제갈량전에 남아있다. 또한 제갈량 사후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자 제갈량의 유지에 따라 양의와 더불어 전군 후퇴를 지휘하고 위나라의 추격을 저지한 기록이 있다. 이때 급작스러운 반격 태세를 통해 사마의를 물러나게 만든 것도 강유의 지휘였다. 여기서도 최고 선봉격인 위연 다음으로 강유의 부대가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강유가 제갈량의 북벌에 알게 모르게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주요 공격진으로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장완 시대 (234년 ~ 246년)

234년, 제갈량 사후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의 대장군 겸 녹상서사가 된다.[14] 강유는 성도(成都)로 돌아와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將軍)에 임명되어 제군(諸軍)을 통할하고 평양후(平襄侯)로 올려 봉해졌다.[15]

연희 원년(238년), 대장군(大將軍)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였다. 239년 장완이 대사마(大司馬)로 오른 뒤에 강유는 그 사마가 되어 239년 이후부터, 편군(偏軍)으로 양주 서쪽을 침입, 강족의 영토 내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다만 247년 이후, 강유와 강족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나름 협력관계였던 듯하다. 이 무렵 위나라 옹주자사[16] 곽회 역시 강족과의 회유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정사 곽회전), 강유의 작업은 촉 편을 드는 강족의 숫자를 늘리는 동시에 위나라 쪽 강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239년 무렵부터 강유는 본격적으로 사령관 역할을 맡는다. 대표적인 예가 240년에 강유가 농서에 진군하고 곽회가 강중으로 추격한 것.[17]

연희 5년(242년) 봄 정월, 강유가 편군(偏軍, 한 무리의 군대)을 인솔해 한중에서 부현(涪縣)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하여간 비슷한 시기에 장완은 한중이 아닌 부현으로 이동, 북벌을 준비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상용급습작전이다. <장완전>에는 상용급습작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완은 예전에 제갈량(諸葛亮)이 여러 차례 진천(秦川)을 노렸으나 길이 험하고 군량운반이 어려워 끝내 성공할 수 없었으니 강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주선(舟船,배)을 많이 만들고는 한수(漢水), 면수(沔水)를 따라 위흥(魏興), 상용(上庸)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작전 자체는 장완의 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조정에서 논의하는 관리들은 모두 만약 승리하지 못한다면 군사들의 퇴로가 매우 곤란하므로,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그는 상서령 비의 등과 상의한 후 후주에게 표를 올려 양주를 우선 공략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양주로 파견하여 이 지역을 도모하게 한 다음, 자신이 부에서 호응한다면, 반드시 양주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더불어 이 와중에 강유는 243년, 진서대장군(鎭西―)으로 승진하고 양주자사로 임명되어 겸직한다. 실제로 이러한 책략은 장완의 의지에 따라 추진 직전까지 갔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243년 즈음 장완이 올린 조서에는 촉한의 편군(偏軍)이 강족을 침범했을때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이 등장한다.
(중략)게다가 강(羌), 호(胡)는 한나라를 그리워하기를 목마른 사람처럼 하며 또한 예전에 (우리의) 편군(偏軍)이 강(羌)으로 들어갔을 때 곽회(郭淮)가 파주(破走,격파되어 달아남)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단(長短)을 헤아려볼 때 (량주 점령은) 사수(事首,우선되어야 할 일)라 여겨지니 의당 강유(姜維)를 량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해야 합니다. 만약 강유가 정행(征行,출정)하여 하우(河右=하서河西)에서 함지(銜持,대치)한다면 신은 군을 통수하여 강유를 위하여 (뒤에서) 진수하며 뒷받침하겠습니다.(후략)
장완전

즉 장완이 편군으로 보낸 성과가 있어 강유가 량주자사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견이 있어 강유 말고도 곽회를 이긴 다른 장수의 전투가 있었을 수도 있다.[18] 다만 촉에서 강유가 강족과 가장 연관이 깊고 <강유전>[19]과 <후주전>[20], <장완전>에서 언급된 편군(偏軍)을 강유가 이끌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올수 있는 추측이다. 표의 문맥상으로도 강으로 들어가는 편군의 장단을 논해 강유를 임명하자 하고 있다.

이후 244년, 위의 조상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침입했을 때 왕평이 흥세산에서 조상을 발라버리는 동안 장완 대신 비의가 총사령관에 임명, 본대를 이끌고 조상에게 대승을 거둔다(정사 왕평전).

그러나 다른 제장들의 활약은 기록되어 있으나 강유의 기록은 빠져있다. <왕평전>에서 촉군 수뇌부들은 적극적으로 위군을 저지하자는 의견과 끌여들여 싸우자는 의견으로 나뉘는데 이때 강유는 본진을 사수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위가 전면적으로 공격해온 이 전투에서 군부에 적지 않은 비중을 갖게 된 강유만 불참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도 하다.

어쨌거나 246년, 장완이 사망하고 비의가 장완의 대장군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녹상서사이자 익주자사로서 재상의 위치에 오른다. 비의가 상대적으로 장완보다 북벌(위나라 침공)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장완이 계획한 상용급습작전과 강유를 내세운 북벌은 거의 흐지부지가 되었고[21], 더불어 북벌은 사실상 강유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되었다.

6. 비의 시대 (246년 ~ 253년)

246년, 장완이 병사한 이후 그의 권한은 제갈량이 생전 안배해 둔 후계자인 비의에게로 옮겨졌다. 강유는 위장군(衞將軍)으로 승진했다. 한편 정사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는 연희 10년(247년), 위장군으로 올라 대장군 비의와 함께 상서의 사무를 총괄하였다.[22]

한편 시중수상서령이었던 비의의 자리는 동윤이 맡았으나 1년 뒤 사망, 진지가 물려받는다. 정확히는 비의는 대장군으로서 한중에 주둔하며 성도를 오갔고, 성도에는 진지가 머물게 된다. 덕택에 강유 역시 녹상서사였지만 자연스레 내정에서 멀어진다. 더불어 이 시기는 황제 유선이 친정을 선언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제갈량과 장완 시대보다는 재상의 역할이 약해지기도 했다. 장완 사후 비의가 대장군의 직을 받으며 장완을 이어 집정에 올랐고 강유가 '위장군으로 올라 대장군 비의와 함께 상서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라는 기록을 보면 비의와 강유가 공동집정에 오른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강유는 대장군 벼슬을 갖고 있고 제갈량이 생전에 지명한 후계자였던 비의에 비해 그 위상이나 권한이 낮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 시기 강유는 문산군(汶山郡) 평강현(平康縣)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을 평정하는 한편 위장군이 된 직후 247년부터 약 249년까지 요화 등과 함께 양주와 옹주 지방으로 공격해 들어가 위나라 군을 타겟으로 하여 농서(隴西), 남안(南安), 금성(金城)의 경계에서 위나라에 반항하는 강족들과 더불어 도서(洮西,도수洮水의 서쪽지역)에서 싸웠는데, 이 시도는 곽회 외에도 하후패, 진태, 등애에게 막힌다.

247년에 옹주와 양주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위를 배신하고 촉한에게 항복했다. 이 당시 양주와 옹주 지역에서 강인들의 발호가 심해지고 옹주자사였던 곽회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자주 출병했다. 농서, 남안, 금성, 서평 일대의 강족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촉나라에 연락을 취하였다. 양주의 유명 호인(胡人)인 치무대도 이에 가담하였다. 강유는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는데 하후패는 옹주자사 곽회와 함께 도서에서 이들을 맞서 싸웠다. 「곽회전」에 따르면 당시 하후패는 군사를 인솔하여 위시(為翅)에 주둔했는데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할 것임을 예측했다고 한다. 실제로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하자 곽회는 하후패를 증원해서 강유를 함께 맞섰다. 점차 퇴각하던 강유군(곽회전)과 위군은 도서(洮西)에서 겨뤘다.(강유전, 자치통감)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정시 8년, 247년), 옹, 량의 강족호인들이 배반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한의 강유는 장병들을 농우에 출병시켜 이에 응했고 또한 옹주자사 곽회, 토촉호군 하후패와 도수의 서쪽에서 싸웠다. (이 싸움의 결과로) 호왕 백호문, 치무대등이 부락을 이끌고 강유에게 항복했으며 강유가 이들을 옮겨서 촉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촉으로 들어간 후에야) 곽회가 진격하여 강족 호인들의 잔당(餘黨)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강유는 이들을 촉한 내지인 번현에 안처시켰다.(강유전, 후주전) 비록 아하와 소과가 죽고 1만여 부락이 항복했어도 강유는 위나라에 반란한 강족 우두머리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했고 그들을 내지로 이끌어 촉한의 백성으로 만들었으며 아차새 등 위나라 경내에 남은 강족들도 강유를 따르게 만들었다. 정황상 《화양국지》의 곽회-하후패를 이긴 기록과 정사 강유전의 곽회-하후패를 상대로 싸우고 치무대를 항복시킨것은 같은 기록으로 보이므로 이를 종합하면 강유가 곽회와 하후패와 싸워 이기지는 못했으나 강족의 수령인 치무대 등을 대량으로 귀순시킨 덕에 저들을 이겼다고 칭할 정도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양국지의 교감기에서는 화양국지의 246년 기록을 247년으로 본다.

한편 「곽회전」에 의하면 곽회는 아하소과를 참살하는데 성공하고 1만여 부락이 항복하는 결실을 보였다고 한다. 이게 위에 나온 자치통감의 '곽회가 진격하여 강족 호인들의 잔당들을 모두 평정하였다'일 것이다. 즉 우두머리를 잡고 1만여 부락을 항복시킨 전과가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가 이끌고 간 강족들의 '잔당'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강유가 이끌고 간 강족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때 강족 반란의 규모가 얼마만큼인지 짐작이 가능하게 한다.[23]

248년, 아차새 등은 하과와 백토의 옛 성에 주둔하면서 황하를 거점으로 하여 위나라 군대에 항거했다. 곽회는 상류의 형세를 보고 비밀리에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백토성을 점거하고,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치무대의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었다. 곽회는 군대를 서해로 전진시켜 그들의 물자와 귀중품을 약탈하려 했는데 마침 돌아오는 치무대와 마주치게 된다. 곽회와 치무대는 용이의 북쪽에서 교전했고 격파당한 치무대는 달아난다. 그러나 강족의 반란과 강유의 호응은 248년까지 이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강족들이 전투에서 패했어도 그와 연계된 강유의 본대는 대부분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유는 패주한 치무대를 강천(彊川)으로 나가 영접하고, 음평태수 요화는 성중산(成重山)에 요새를 쌓으면서 패배한 강족들을 거둬들였다.

정사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에 의하면 당시 강유는 본인의 재능과 무력, 풍속의 익숙함, 주변 호족과의 친분관계 등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므로[24] 대의를 가지고 항상 대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대장군인 비의는 "승상도 하지 못한 일(북벌)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승상급의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정사 강유전)라며 강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출진하는 것을 저지하고 만 명 안팎의 병력만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걸 단순히 강유 혼자만의 자부심으로 보기도 뭣한게 이 당시 곽회전에 기술된 강유와 강인들과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면 곽회는 "내부의 흉악한 강인을 평정할 수 있고, 외부의 적의 음모를 꺾을 수 있다고 했다."라 하며 강인들의 배후를 우려하고 있다. 강유의 출병 및 강인들의 반란 시기가 대충 맞아 떨어지는 것과, 저 당시 강인들을 제외하고는 위에 위협을 줄만한 세력이 강유 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강인들의 반란 배후에는 강유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강유는 이 당시 제갈량의 현지 위무책을 계승하여 대놓고 농서의 이민족들과의 친분에 자부심을 표하고 있을 정도로 대 이민족 관련 군정 레벨에서 상당한 성과를 본 것으로 보인다. 강유의 이민족 정책에 대해선 그의 측근인 왕사의 행동방식을 참고해도 좋다. 어쨌거나 결국 위장군 강유는 상관인 대장군 비의의 명령에 따라야 했으니, 그의 총 병력은 최대로 잡아야 1만 명 정도다.

한편 249년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대촉방위체제는 크게 바뀐다. 249년 이전, 조상 정권 시절에는 옹주자사 곽회와 토촉호군 하후패가 독자적으로 촉한과 강족을 막아내지만 사마의는 곽회를 아예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를 임명하고 옹주자사와 토촉호군을 그의 휘하로 두면서 본격적으로 촉한의 침공을 대처한다.

점점 거세지는 촉한의 북벌을 경계해서 실권이 강화된 것인지는 불명이지만 244년의 흥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 만만찮은 병력과 수많은 물자를 잃은데다가 247~248년에 지속된 대규모 강족 반란과 강유의 끈질긴 호응을 겪고 고평릉 사변으로 인한 불안정과 중신 하후패의 배신 등 안보불안까지 고려하면 하나의 총사령관에 의한 조직적 대처를 지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행보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옹주자사 진태, 남안태수 등애, 토촉호군 서질 등이 그를 보좌했고 이전까지 곽회가 독자적으로 전략을 꾸미며 강유를 대적했던 것에 비해 정서장군으로써의 곽회는 옹주자사 진태와 등애 등의 계책을 받아들이고 시행하는 등 총사령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강유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곽회는 옹주자사 시절부터 이 지역의 행정력 확장에 적극적이었다. 즉, 건벽거수(벽을 쌓고 수비를 튼튼하게. 한마디로 우주방어)로 일관하던 사마의와는 달리 곽회는 적극적으로 위나라의 행정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토벌한다. 위나라에 있어서 촉도 토벌 대상이니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249년, 강유는 구안에게 명하여 국산성 부근에 성을 쌓으라 명하였으나 곽회, 진태 등에 의하여 토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상세히 설명하면 강유는 국산(麴山)에 의거해 성 두개를 축조하고 구안과 이흠(李歆)을 주둔시켰다. 위나라의 신임 옹주자사 진태는 그 보급로를 끊어 말려 죽이려 하였다. 구안 등은 진태를 도발하는 한편 눈을 녹여가며 어렵사리 버텼다. 강유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오자 정서장군 곽회가 조수(洮水)로 이동하며 강유의 퇴로까지 끊으려 하였다. 강유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철수하였고 고립무원에 빠진 구안 등은 저항을 포기하였다.(진태전) 강유는 철수하다 말고 다시 방향을 돌렸는데 남안태수 등애사마의의 명을 받고 백수(白水)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요화로 하여금 맞은편에 진영을 설치해 그 시선을 붙잡아두고 자신은 동쪽으로 60리 거리에 있던 조성(洮城)을 습격했는데 등애는 혹시라도 강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먼저 와있어 허사가 되었다.(정사 등애전) 한편 조정에서는 249년(연희 12년) 강유에게 부절(節)을 내렸다(가절(假節)이다.)[25], 그리고 강유는 250년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기서 서평은 곧 서평군으로 금성군의 서북쪽[26](현재의 칭하이성 시닝시(青海省 西宁市)일대)으로 강유의 북벌에서 가장 북쪽까지 돌파한 사례가 된다. 어쨌거나 이런 공방전은 과거 사마의 식의 건벽거수를 위나라에서 정책으로 삼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즉, 이 시기 강유는 적극적으로 북벌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유로서는 강인들과 연합하여 북벌을 하려고 했으나, 북벌에 소극적인 비의의 제재로 충분한 병력을 이끌 수 없어서 북벌은커녕 오히려 곽회의 적극적 공세에 수성하기에도 바빴던 시절이었다. 양주 서부를 두고 위나라의 행정력을 양주 서부까지 넓히려던 옹주자사 곽회와, 역시 한중으로부터 양주 서부로 북벌 전진기지를 옮기려던 강유가 국지전을 벌이던 시절이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렇듯 위와 촉이 티격태격하던 시절, 253년, 작년에 유선으로부터 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받았던 대장군 비의는 신년연회에서 강유가 포로로 잡았던 곽순에 의해 암살당한다.[27][28] 비의의 죽음으로 인해 촉은 다시 한번 정치, 군사적 변화를 겪는다.

7. 진지 & 강유 시대 (253년 ~ 258년)

본격적으로 강유가 군권을 잡고 북벌을 할 수 있던 시절이다.

7.1. 적도와 도수[29]

대장군 비의가 죽었으나 내정 파트 진지와 군사 파트 강유 중 그 누구도 비의의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지 못한다. 녹상서사는 강유도 비의가 죽기 전 비의와 함께 맡고 있었으나, 강유 자체가 원정 중이었으니 달리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비의의 자리였던 대장군과 익주자사는 그대로 공석이 되었다. 덕택에 내정의 진지와 군정의 강유라는 이원체제로 촉이 운영된다. 황호가 황제의 뜻을 받드는 환관임을 감안해보면 이전에 제갈량이 세운 한중막부에 쏠려있던 촉의 권력이 성도의 황권으로 점차 이동하는 과정이라 보아도 좋을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중패부의 권력을 이어받은 강유는 북벌에 뜻을 두고 이 흐름에 저항했고 이는 강유의 이후 10여년간의 북벌로 이어진다.

비의가 정월에 사망한 직후 오나라의 대권을 잡은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조카인 제갈각이 신성으로 출병한다. 비의 사후 강유는 곧 출병하여, 수만 명을 동원해서는 석영(石營)과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곽회에 이어 옹주자사가 된 진태가 낙문(천수군 기현)으로 와 상대하다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고 군량마저 떨어져 곧바로 퇴각한다.[30]

강유가 북벌 전문으로서 확실하게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 때는 254년 출병부터다. 254년, 그는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를 더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해 6월부터 10월까지 강유는 적도로 출병하여 대승을 거둔다. 4월 적도현의 장 적도 현장 이간의 밀서를 신뢰해서 북진한 강유는 6월에 군사를 움직여 농서를 공격해 이간의 항복을 받고 적도를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공적으로 기습해서 그런지 강유가 양무마저 포위하는 상황에서 곽회와 진태의 동향이 기록되지 않은 채로 이에 오로지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정촉호군[31]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는 데 성공한다. 강유는 승세를 틈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적도현, 하관현[32], 임도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이 무렵 옹주자사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하며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로 인해 촉군의 선봉이었던 탕구장군 장억이 서질과의 교전 중 전사한다. 이후 강유는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여겼는지 항복한 적도, 하관, 임도 세 현의 주민들을 데려왔다. 이후 광한군 면죽(綿竹)현, 촉군 번현(繁縣)에 거처하게 했다.(후주전) 그리고 1년간 병사를 쉬게해서 차후의 북벌을 준비한다.

토촉호군을 전멸시킨[33] 강유는 255년, 다시 한 번 적도로 출병한다. 이 시기 출병에 앞서 강유는 북벌에 대한 반대 여론에 부딪힌다. 반대파의 대표 주자는 장익으로 <장익전>에 따르면 강유는 이들과 설전을 벌여 모두 굴복시키고 더불어 반대했던 장익을 강유의 북벌에 종군시켰다.

파일:도수 전투도.png

255년 8월, 강유는 장익까지 끌고 수만명으로 다시 한 번 적도로 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단 기산, 석영, 금성(金城) 세 군데로 진군한다며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수만 명을 통솔해 부한현(枹罕縣)으로 갔다가 적도로 내달렸다. 곽회 사후 정서장군을 이은 진태는 여기에 속지 않고 옹주자사 왕경더러 일단 적도로 나아가 자신을 기다리라 명하였다. 그러나 강유는 기다릴 시간도 주지 않고 도수 서쪽에서 야전을 통해 왕경을 격파하여 적군 수만 명을 죽여 사람 잡은 수로만 계산을 하자면 제갈량의 북벌을 능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실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 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군사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농우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군대가 공격하지 않는 적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곳이 있다' 고 했습니다. 대체로 작은 손실로써 큰 것을 보존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농우의 재난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심하고, 적도 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강유의 군대는 그의 예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적의 쇠함을 기다린 연후에 진군하여 구조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위서 진태전中, 조수전투 이후 등애의 의견

당시 위나라의 패배는 정사 <등애전>에 따르면 "옹주 전체가 함락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며 등애는 아예 적도에서 철수하고 기회를 봐서 다시 싸우자고 했을 정도이다. 대패를 당한 왕경은 만여 명을 수습해 적도성으로 물러났다. 한편 장익이 지금의 크나큰 공적도 훼손될 수 있다며 작전을 더 지속하는 것은 사족(蛇足)이라고 말렸지만 강유는 그대로 적도를 에워쌌다.[34]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제갈각동흥 전투의 대승의 경우에는 오 입장에서 매우 유리한 지형에서 전개된데다가 위군이 공격측에 오군이 방어측에 그것도 승리를 거둔 결정적 요인이 불리한 지형에서 퇴로가 끊기자 위군이 혼돈에 빠지면서 붕괴한 전투였다. 그에 비해 조수전투는 촉한이 원정을 나간 상태인데다가, 병력차도 거의 동일하고, 강유가 왕경을 공격하는 입장임에 불구하고 학살에 가까운 교전비로 이런 대승을 거뒀다. 거기에 당시 진태의 표현에 따르면 강유의 병사들은 가볍게 무장한 경장병사이고 왕경의 군대는 잘 무장된 정예병사였으니 강유의 전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전술적인 성패에만 국한한다면 촉한이 위를 상대로 치른 북벌 중 가장 성공적인 북벌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8월 22일에 장수교위 등애에게 조서를 내려 행(行)안서장군으로 삼아 진태와 함께 힘을 합쳐 강유에 대항하도록 했고 이후 태위 사마부가 뒤를 잇도록 했다. 진태는 상규에서 주둔했다가 등애, 호분, 왕비와 삼군으로 나누어 농서에 진을 쳤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등애뿐만 아니라) 제장들이 모두 왕경이 패전해서 강유의 무리가 대단히 왕성한데 오합지졸을 가지고 공격하면 안된다면서 땅을 조금 잃어버리긴 하지만 크게 보면 전체를 지키는 것이라며 험한 곳을 지키다가 적들이 지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는데 진태가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위나라에서 옹주를 포기하자는 의견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태가 강유가 경무장한 병력을 가지고 깊히 들어온 것은 바로 위나라 군대와 들판에서 한번 싸워 이기자는 것이고 왕경이 격파되어 도망쳤는데 강유가 만약 전투에서 승리한 위세를 가지고 병사를 진격시켜 동쪽으로 가서 가득찬 곡식을 가지고 병사를 풀어 항복한 자를 받아들이고 강족, 호족을 받고 관중과 농서를 다투면서 주위의 네군[35]에 격문을 보내면 우리가 싫어하는 일이라면서 강유군이 보급이 없고 공성 장비도 없어서 공성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진군을 감행하여 강유군의 적도 포위를 푸는 데 성공한다. 이때 진태는 신속하게 부풍군 진창현(陳倉縣)과 천수군 상규현을 경과하고 몰래 고성령(高城嶺)도 넘어 밤중에 적도의 동남쪽 산에 당도하였다. 매복한 병사들이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하자[36] 강유는 일부 군사를 인솔하여 산을 타고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이어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강유군은 즉시 퇴각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가 물러난 것은 9월 25일이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이 열흘 분도 안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감사했다니(진태전) 자칫하면 강유에게 옹주 전체를 빼앗길 뻔할 정도로 위나라의 피해가 정말 막대했던 것이다.

<강유전>에 따르면 전사자가 물경 수만 명이고 <진태전>에 따르면 왕경이 만여 명이나 남은 병력을 통솔하여 돌아와서 위나라 영토 깊숙한 곳의 적도성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상황이 매우 위급했으며, 그 나머지 병력은 그냥 격파되어 흩어진 정도가 아니라 (통제를 벗어나)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보면 전사자 수만에 모두 도주한 나머지 병력을 빼고도 패잔병으로만 만여 명이 남았을 정도라면 가히 수만~5만명 이상[37]의 대 병력이 강유에게 뼛속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당시 격파된 옹주군은 중요물자인 식량이 열흘 분도 못 남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물자가 털렸고 진태는 강유가 종제로 후퇴한 이후 상규에 주둔해 남은 병력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시킨 다음 따로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하였으며(=기존 병력을 전력으로서 쓸 수 없어 새 병력을 투입해야 했으며), (망가지고 부숴진) 성채와 보루를 수리하는 등 이 지역 수습에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던 것으로 봐서 남은 만여 명도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상했고 방어시설도 많이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두 말할 필요 없는 강유의 북벌 최대 전과. 토촉호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옹주 역시 거의 궤멸에 가까운 전과를 올려 옹주 전체를 함락 직전에 이르렀다는 점은 제갈량 시절의 북벌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굵직한 전과임은 물론이요, 토벌한 적군의 수급만 보면 오히려 제갈량 대의 북벌 전체보다 많을 수도 있다.

7.2. 단곡 전투

파일:자작 단곡 전투도-4.png

256년 1월, 대장군으로 승진한 강유는 당시 보리 수확기였던 여름에[38] 재차 원정에 나서며 한중도독 호제에게 상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종제에서 출병한다. 당시 위나라는 강유 역시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재침하리라 생각을 못했고, 적도에서 강유의 포위망을 푼 진태[39]가 승진해 중앙으로 올라간 상황에서 강유의 공격이 위나라의 허를 찌르는 절호의 기습이 될 수도 있었으나, 진태 이후 옹양주를 맡은 등애는 강유가 다시 올것이라고 생각해 방비를 준비했다.

255년에 진태가 옹양주 전선을 떠난 직후 대촉방위체제는 등애가 승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등애는 안서장군 대리로 임명되었다가 진태와 같이 왕경을 구한 공으로 안서장군이 된 상태였다. 등애는 ‘적은 강하고 아군은 허약하며 적은 배를 타고 올 것인데 우리는 걸어가야 하며 우리는 적도, 농서, 남안 및 기산으로 병력을 나누지만 저들은 하나이니 공격할 것’이라 주장했다. 등애는 강유가 기산의 잘 익은 1천 경 보리를 노릴것이라 생각했고 강유는 등애의 예측대로 기산으로 향했다.

<왕기전>에 따르면 강유는 조수의 서쪽에서 승리한 것 때문에 경무장으로 깊이 들어왔다가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는 상규에서 엎어졌다고 한다. 다만 깊숙히 들어간 종제에서는 거의 9개월 가까히 주둔했으며 등애의 말 따라 강을 통해 군사가 움직이고 또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테니[40] 이때 얘기는 아니다. 그래도 상규에서 미리 호제의 지원군을 받을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면 왕기 말대로 싸움중에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식량이나 병기, 군사의 재충전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등애전>에서 단곡 전투에 직전에 대한 설명을 보면 등애의 주요 목적은 촉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통한 대승이 아니라 왕경의 대패 이후 위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저하되어 있고 반면 촉군의 기세는 날카로우며 농서, 남안에서는 강족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기산에는 잘 익은 보리가 있으며 이것이 촉군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이니 각 지역을 중점적으로 수비하고 요충지 방비를 강화하여 수비의 이점으로 저하된 군사력을 대신하며 촉군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는 것이었다. 등애는 호수비로 강유군의 사기를 꺾고 강유가 퇴각하면 이를 추격한다는 전략을 세웠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등애전 내용을 본다면 등애는 강유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훌륭히 대처했으며 강유는 등애의 대처에 막혀 초반의 날카로운 기세를 잃고 되려 수비에 성공하여 사기를 회복한 등애군에게 쫓기던 것으로 보인다.

<강유전>을 보면 강유는 등애의 이런 기민한 방어에 여기저기 찔러보며 틈을 찾는듯한 행동을 보인다.[41] 강유는 잘 여문 보리가 있는 기산으로 진격하던 강유는 등애가 기산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산을 포기하고 남안 쪽으로 진군한다. 그 다음에 목적지는 상규임에도 바로 직진하지 않고 등애군이 수비하는 지역들을 공격해 본 다음 상규로 이동하였다. 남안에 이르기 전 강유는 무성산에서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접전을 벌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고 이기지 못하게 되자 밤중에 무성산을 우회, 위수를 건너 상규로 향한다. 적도, 농서, 무성산, 기산에서 군사를 나누어 방어 중이던 등애는 군사를 거두어 강유를 쫓았다.

당초 강유는 기산과 남안의 곡식들을 먼저 선점해 군대를 유지하고, 방어하러 온 등애의 군사가 상규를 비운 사이 호제가 상규를 점령하면, 그 역시 그곳으로 이동해 합류하여 군대와 양식을 재공급 받을 계획이 있었던 듯 하다. 왕기전 주석 사마표 전략에는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오니,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기산과 남안에서 곡식을 얻는데 차질을 빚어 등애에게 쫒길 당시에도 어쨌거나 등애의 군사는 상규를 비우고 한군데 모여서 자신을 쫒고 있으니 상규로 가면 먼저 기다리고 있을 호제와 협공도 가능하고 호제가 군량을 보급하면 군량이 이어지지 않을리가 없으니 등애군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강유는 상규에 도착했다.

그러나 문제는 약속한 호제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자치통감은 '濟失期,不至'(호제가 기한을 놓쳐서 이르지 못했다) 라고 적어 그냥 보면 기일을 못 맞췄다는 뉘앙스로 적었으나, 강유전에서는 호제가 '濟失誓不至'(호제가 약속을 어겨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호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쨌거나 양측 모두 호제가 안 와서 강유가 패했다고 서술하는 건 동일하다.

왜 호제가 협공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는 여러 가설들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호제가 연공서열상 위인 강유를 일부러 엿먹이려 했다는 가설이다. 강유는 당시 군부 1인자인 대장군이었고 나이도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어리지 않지만 촉한 군부 내에서는 제갈첨을 제외하고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다.[42]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매우 낮다. 단곡 전투는 가정 전투와 더불어 촉한 북벌 역사상 최고의 패배인데 이런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십중팔구 참형에 처해져야 되는데 그러한 기록도 없고 훗날 강유가 한중 방어 전략을 바꿀 때도 호제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계속 벼슬살이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감으로 수천 명의 군사와 열 명의 아군 장수를 잃은 패배를 자초했다면 아마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비록 강유의 정치적 입지나 위상을 마속을 벨 때의 제갈량처럼 확고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잘못을 했다면 강유가 선참후보를 했어도 조정에서 딱히 반대할 만한 인사가 없을 만큼 명분이 확고하고, 설사 강유가 호제를 용서했어도 조정에서 최소한 호제에 대한 탄핵이라도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두 번째 가설은 호제가 상규 진입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강유의 작전 성공을 위해서라면 상당한 규모의 병력과 치중을 이끌고 와야 하고 등애의 군사들까지 온다면 최적의 타이밍에 지원군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들어가면 위군에게 존재가 노출되어 오히려 지원군에 막히거나 등애가 호제가 오는 걸 눈치채고 그 전에 상규로 돌아가 방어할 가능성이 있다.[43] 그래서 최적의 타이밍을 찾다가 오히려 너무 늦어서 강유의 부대가 집결한 옹주군에게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강유가 이걸 사전에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의문점이 있다. 또한 호제가 약속을 어겼다는 강유전의 기록은 분명 합류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고, 후술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패전에서 강유의 부대 소속으로 전사한 장수가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은 강유의 부대의 전력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다만 고대 군사작전의 한계를 고려하면 이와 같은 문제는 아무리 명장이 지휘하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무전도 없는 시대에 수백 km의 간격을 둔 독립적인 두 군세가 타이밍을 맞춰 연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제아무리 명장이 세밀한 타임 테이블을 짜뒀다 하더라도 사소한 일로 계획이 헝클어지기 시작하면 일단 두 군대 사이의 의사소통 자체가 어렵다보니 수습하기 매우 힘들게 된다. 강유는 600여리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호제와 연계를 하려고 했으니 이는 매우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일이다. 서양 고대사 최고 명장이라는 한니발 바르카마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동일한 문제로 손놓고 동생의 죽음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분산기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작전술이란 개념의 시초를 마련했다고 찬사를 받는 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조차도 마렝고 전투에서 군대를 분산시켰다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대패할뻔 했다가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로부터 천운급 도움을 받고서야 역전할 수 있었고,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에마뉘엘 그루시가 독립 군세를 이끌고 삽질하는걸 통제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이러한 제2설은 아래 제3설과도 절충될 수 있는데, 연계 문제와 등애의 방어군이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만약 강유의 목적이 이러한 합격술을 통해 등애군을 격멸하는 것이었다면 그 계획이 지나치게 모험적이었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진수는 강유전에서 강유의 군사 능력을 평가하기를 "강유는 대체로 문무(文武)를 갖추고 공명(功名)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망하기에 이르렀다."라고 냉담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군사운용이 이런 정교한 계획을 실행할만큼 치밀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멀리갈 것 없이 촉한멸망전에서 강유가 세운 작계만 보더라도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작전이었다. 한중 주둔군은 충실한 청야를 해야했고 한성과 낙성, 그 밖의 요새들의 성공적인 농성을 해야했다. 성도에서 출발한 지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여 한중을 지원하여 시간을 끌어야 했고, 강유가 이끈 답중군은 위군이 약화된 시기(동시에 약화된 위군이 철수하기 전)에 적절히 맞춰 등장하여 협공을 하는, 모든 조건이 맞아들어야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한성, 낙성의 농성을 제외하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한중 주둔군의 규모는 청야를 하기엔 너무 적었고, 강유 자신의 군대는 한중에서 너무 멀리 주둔해 있던데다 등애와 제갈서의 집요한 견제를 받아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성도의 지원군은 쫓기는 강유를 지원하느라 한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한중에서 익주로 들어오는 공세를 1차로 저지해야 할 양안관구는 배신으로 함락당했고 위군은 한중을 대부분 석권한 뒤 검각까지 밀어 닥쳤다. 강유가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제갈서의 견제를 뿌리치고 검각에 주둔함으로써 당장의 멸망만 막을 수 있었다. 즉 촉한멸망전 당시 강유의 작계는 여러 독립된 군세가 톱니바퀴처럼 연계를 해야하는, 실전에서(즉 위군이 방해만 해주어도) 촉군이 소화하기 어려운 난이도를 요구하는 작전이었는데, 심지어 단곡 전투에서 호제는 한중에서 적진으로 기동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호제가 단곡 전투에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은 점까지 더해서 고려하면, 그 당시 강유가 호제에게 요구한 작계도 실전에서 소화하기에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가설은 호제의 한중군을 갑자기 위의 지원군이 와서 가로막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위의 군부는 강유 역시 지난 번 전쟁으로 지쳤으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봤으나, 등애는 강유의 공격을 예측했고, 이는 적중했다. 따라서 강유가 등애의 방어 지점들을 공격하자 위 조정에서 등애의 말을 기억해 지원군을 편성해 보냈고, 호제가 이 지원군들과 예정에 없던 전투를 벌이느라 약속한 날짜에 상규에 도착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호제의 상규 도착 계획이 위 정부에서 급파한 지원군이라는 너무 큰 변수가 나타나는 바람에 강유가 예상한 오차 범위를 넘어갈 정도로 어그러진 것이다. 전술했듯이 호제가 협공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단곡 전투 패배의 주요 원인임에도 중벌을 받은 기록도 없고, 계속 벼슬살이를 이어나간 것으로 봐서 호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쨌거나 강유는 상규에 이르렀어도 호제가 없어서 단곡까지 간 듯 하고, 여기서 뒤쫒아온 등애와 붙은 전투로 인해 패했다. 촉한은 병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강유전) 촉장 10명에 천여 급의 목을 참수했으며(등애전) 만여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났다.(위서 제왕기) 이에 촉한 사람들은 강유를 원망했다고 하는데 비슷하게 20만 대군을 동원했다가 오나라 역사상 최대의 대패를 당한 제갈각의 경우 패배 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폭주하다가 패배의 여파로 살해당했지만 강유의 경우에는 스스로 강등을 요청해 위장군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제갈각과 달리 강유는 그래도 책임을 스스로 져서 화를 면하고 나중에 다시 대장군이 되어 군권을 유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구국론을 지은 초주처럼 그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세의 모범이다'라고 평한 극정 같은 사례도 있는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렸을 것이다.

강유에 대한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으로, 적도 전투만 해도 수만명의 위나라 군세를 대파하고 옹주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이번엔 역으로 장수 10명을 잃고 만여명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다. 일정대로 호제가 왔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으나,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44] 이러한 패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위와 촉은 국력 차이가 심하게 나기 때문인데, 두 나라는 인구 수 차이부터가 거의 5배였다. 정말 단순하게 계산해서 촉의 인구수 1만의 가치=위의 인구수 5만의 가치라는 뜻이다. 그러니 촉의 입장에선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과 자원을 긁어 모아 가는 상황에서 대패는 당연히 용납할 수 없고, 최소한 손실이 적게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큰 패배를 한 것 부터가 민심이 흔들릴 만한 이유로는 충분했다.

8. 유선 시대 (258년 ~ 263년)

단곡 전투의 성공으로 등애는 진서장군[45]으로 승진했으며 도독농우제군사로 임명되고 양주 서쪽 지역의 방어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강유와의 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검증된 등애의 방어시스템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 시스템은 이후 진나라까지 계승돼 서북방에서 준동하는 강인들을 막는 데 활용될 정도(등애전)였다고 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강유 개인의 경험과 흥세 전투 등으로 확보되어 온 관서지역에서의 강유의 영향력이 단곡전투 이후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단곡전투의 결과 농서 지역에 이민족의 소동이 있었다는 정사 기록으로 볼 때, 255년까지 강유의 북벌에 큰 부분을 차지했고, 본인도 북벌의 유리한 요소라 판단했던 이 지역 이민족과 주민들과의 강고한 연결고리가 상당 부분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257년에 강유는 제갈탄이 봉기한 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지만 사마망등애는 방어만 하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회남의 제갈탄을 막고자 관중의 병력이 동쪽으로 차출됐다고 하는데, 강유는 이 틈을 노려 진천(秦川) 지방을 목표로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을 나서 침령에 다다랐다. 이 때 진천의 관문격인 성채 장성(長城)에는 비축된 양곡만 많을 뿐 수비병이 적어 관원 대다수가 몹시 두려워했지만, 진태의 후임 정서장군 사마망이 투입되고 진서장군으로 옮긴 등애도 농서로부터 적시에 지원을 오는 바람에 강유는 또 막히고 만다. 강유는 망수(芒水)에 군영을 설치하고 연거푸 싸움을 걸었으나, 회전을 벌이기에는 다소 병력이 적다고 판단한 사마망과 등애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방어로만 일관[46]한다.[47]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 연이은 출병으로 촉한 사람들이 근심하고 고뇌해 초주진지의 협조하에 《구국론》을 짓는다. 요약하자면 조위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백성들도 전쟁에 피곤을 느끼니 조위에 변란이 생길 때까지 촉한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작 《화양국지》에 따르면 초주의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라고 적었다. 당대의 촉한 내정의 1인자인 진지의 협조를 받아 지은 논문이었는데도 왜 사람들의 호응이 없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초주는 툭하면 부정적인 도참을 내뱉는 사람인데다가 <양희전> 기록엔 대놓고 사람들이 그를 낮게 평가해 존중하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시 위나라가 천하를 잡을 것이라는 당도고 도참이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촉인들이 강유를 원망하는 마음이 깊었다는 일련의 서술을 보면 당대 강유의 무리한 북벌이 상당한 내부 불만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초주로써는 폭주하는 강유에 맞서 진지 정권과 협력해 당도고로 대표되는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대표하여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려 했으나 본인의 겉도는 성향으로 인해 실패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이것이 강유 북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아무튼 강유는 북진했다. 257년의 북벌은 253년 북벌의 재림이라고 할 만한데 위나라는 제갈탄봉기로 인해 관서지역의 병력까지 차출하면서 양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강유 입장에서는 나름 호기였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강유 역시 이전처럼 전쟁을 진행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48]은 아니었다.

결국 258년이 밝았고 제갈탄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강유는 퇴각한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시 대장군에 오른다. 이 때 강유가 대장군직에 다시 오른것은 촉한 군부의 체제 변경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장익, 요화 같은 군부 원로 인물들에게 거기장군을 나누어 좌거기, 우거기 고위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촉한에서 가장 뛰어난 상장인 강유가 후장군으로 남아 있으면 그것도 모양새가 보기 안 좋으므로 강등 이후 단곡 전투의 패배를 만회할 만한 전공이 없음에도 다시 대장군으로 복직했다는 설이다. 확실히 촉한 군부의 명령 체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선 강유의 위치를 다시 바로 잡을 필요성은 있었다고 보여진다.

문제는 258년,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할 무렵 진지와 거기장군 하후패가 같이 죽는다.[49]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하기 전의 직책으로만 본다면 진지가 내정 1인자, 하후패가 명목상으로나마 군정 1인자라 내정과 군정에 모두 공백이 생긴 셈으로 이전의 전례로 따지면 강유가 맡는 것이 촉의 권력구조상 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유의 연이은 북벌은 결국 마땅히 유의미한 땅을 늘리는데 실패했고 병사와 물자의 소모만 가중시켜 촉한에선 강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상태였으며 그가 그것을 뒤집을 만한 기반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강유는 점차 성도 조정에서 고립되어 자신의 군권만 믿는 신세가 된다.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단하라고 건의까지 했으나 유선이 거절하면서[50], 내정을 확고히 틀어쥐기는커녕 성도에 머물기도 어렵게 된다(강유전). 즉, 강유는 대장군에 녹상서사를 겸직하고 있어서 형식상으론 조위의 사마사/사마소 형제와 같은 절대권력의 지위였지만, 이미 황실에서나 조정에서나 신뢰를 다수 잃어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촉의 군권을 틀어쥔 위치에 있었고 이는 촉 조정에서 강유를 탄핵해서 그의 군대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시작이 일치하고 있었음에도 강유를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애초에 무관이자 제갈량 시절부터 북벌에 참여했던 강유는 귀순 직후를 제외하면 필연적으로 변방에 나가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촉한 내외의 강족들 같은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그들과 친선을 다져 북벌에 유리한 여지를 만들면서 군권을 쥐었을뿐이지 정치적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북벌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몇몇 전술적 성과 덕분에 그는 대장군까지 권력을 틀어 쥘수 있었다. 그러나 역대급 패배인 단곡 전투 패전까지 뒤집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우지 못한 강유는 중앙 정계에서 큰 발언권을 얻지 못했으며 황호 세력과 형주 사인계층의 우두머리격인 제갈첨 세력 등은 이제 촉에서 그의 소용은 다했다고 보고 그를 탄핵하려 했다. 결국 이 당시 강유가 믿을 것은 군권 뿐인데 요화, 장익 등 군부 내에서의 원로들조차도 강유를 반대할 정도로 그의 지위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운 정치적 기반과 불리한 정세 하에서도 녹상서사 겸 대장군 벼슬을 유지한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다만 240년대에 장완과 비의는 각각 개부의 명령을 받고 북벌을 준비했었고 강유는 비의와 진지의 태클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진하면서 북벌을 진행하는데 내민의 아들 내충(來忠)이 참군이 되고 상서 상충(尙充) 등과 함께 대장군이 된 강유를 보좌했는데 이걸 유선이 강유에게 개부치사를 허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적어도 유선이 강유를 대장군 직에서 물러나게 하기엔 강유가 군권을 지닌 시간이 너무 길었고, 당시 촉군의 중추인 촉 북벌군은 오랜 기간 강유가 장악한 상황이었다. 즉 강유가 지나치게 오래 군권을 잡고 그 독선적인 행보로 인해 조정과 한중막부의 군부 원로들에게 경시되면서 오히려 이 무렵의 강유는 조정이나 한중 막부와 유리되어 독자적인 준군벌이나 다름없는 좀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51] 그가 군권을 홀로 이끌던 시기에 원래 제갈량이 머물던 한중이 아니라 무도, 음평 지역에서 머물던 것만해도 이는 분명해지고 황호와의 갈등 이후 답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촉 조정에서 강유 탄핵의 여론이 불고 있었음에도 그를 어쩌지 못한 것에서도 이는 분명해진다.

그래서인지 유선은 황호를 강유에게 보내 사과시키고 대충 끝내려고 했고, 유선의 복심인 황호는 강유에게 사과하는 형태를 취하며 강유는 답중으로 가서 둔전을 하겠다고 하는데 아마 서로를 위협하지 말자는 협상, 혹은 강유에 대한 촉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2] 다시 말해서 촉 조정은 강유를 제거하여 국정을 안정시키는 최선책이 실현 불가능하자, 타협을 통해 강유를 방치하고 둔전을 통해 촉 북부에서 위군을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하게 하는 차선책, 혹은 강유의 답중 주둔을 실질적으로 막을 방도가 없어 방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무렵 강유는 후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일을 하게 되는데... 바로 한중의 방어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원래의 한중의 방어 시스템은 유비가 과거 한중을 조조에게서 빼앗은 후 위연왕평이 확립했던 우주방어 시스템인데, 이 제도에 강유가 손을 댄 것이다. 기존 한중 방어체계는 한중 천혜의 험요지를 이용한 것으로, 매우 견고해 방어가 쉬우며 들어가기조차 힘들어 위군이 함부로 침입할 수가 없었다. 조진과 조상이 각각 쳐들어왔으나 모두 막히고 적지 않은 피해만 입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강유는 이 시스템으로는 적의 포위섬멸을 노릴 수 없어 조위에게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힐 수 없으니 북벌의 활로를 찾으려면 기존 시스템을 변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단 정사 강유전에 나온 강유 자신의 설명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은 《주역》의 중문격탁(重門擊柝)에는 부합하지만(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53]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진영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고[54],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해 빈틈을 노립니다……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독한중 호제는 물러나 한수에 주둔하게 하고, 감군 왕함은 낙성을 수비하고 호군 장빈은 한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에도 수비 거점을 마련하였다.

즉, 외부의 요충지에서 적을 격파하는 대신 한중 내부 주요 거점[55],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광범위한 청야작전을 실행하여 적을 끌어들이게 한 다음 굶주리게 하고 적이 군량을 소진하면 후방으로 빠진 기존 주둔군과 별동대가 전후에서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강유는 점차 조정에서 군권외에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할 기반이 사라지자 이같이 촉의 강역을 열어 위군을 섬멸한다는 도박적 계획에 심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비, 위연, 왕평이 촉의 객관적인 약세를 냉정히 판단해 수립했던 상식적인 작계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 호삼성 등 여러 사람들이 고래로부터 현대까지 험요지를 내준 강유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잘 내세우는 이야기가 흥세 전투다. 조상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유비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했던 243년 당시 한중에는 주둔 병력이 3만 내외로 매우 적었으므로 대부분의 장수들은 한중 기존 방어 시스템을 포기하고 낙곡까지 후퇴하여 적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평이 분연히 요격을 주장하며 한중 내부 요새들의 방어 병력 및 자신 직속의 3,000명으로 유격전을 벌여 7만 대군의 조상군 본대를 지체시키고 그 사이에 비의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아예 박살낸 것이다.

강유는 흥세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곽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운 좋게 보존된 3만 여의 옹주군을 10여년 후, 후임 옹주자사인 왕경과의 전투를 통해 대파하였다. 흥세 전투에서 조수전투까지 대략 10여 년이란 기간이 있기에 어느 정도 교체가 이루어졌겠지만, 그래도 조수전투 당시 왕경이 이끄는 옹주방위군은 흥세 전투에서 조상 본대가 위험에 처하자 독자적으로 철군을 감행한 곽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운 좋게 보존된 옹주군과 대략적으로 일치할 것이다. 오히려 등애가 옹주를 포기하자고 할 정도로 대패를 당했음에도 만여 명이나 위군이 남은 것으로 봐서 강유가 격파한 왕경의 군대는 곽회가 보존한 3만 명의 군대를 훨씬 상회하는 병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그 정도까지 강유가 조위의 관서 방어군을 대차게 갉아먹어도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삼국시대 기준으로 넘사벽 물량을 자랑하는 조위의 특성상 그 피해를 조위가 회복해버린다는 것이었다. 적도 전투에서 숙장 장억을 희생시켜가며 서질의 정촉호군을 대파했지만 위의 지원병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라 퇴각, 왕경과의 전투에서 수만 명을 때려잡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음에도 또 진태가 지원 와서 퇴각, 왕경의 패배가 너무나 심각해서 등애가 단곡 전투 당시 '거의 망할 지경이고 병력지원이나 병기 상태도 부족한 허약한 상태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등애 휘하엔 네 곳의 요충지에 분산시켜 수비시킬 병력이 또 있었다. 257년에도 제갈탄의 난 진압을 위해 대촉 전선의 병력이 많이 차출되어 '수비병이 적어 사람들이 근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진서장군 등애와 정서장군 사마망이 어떻게 또 꾸역꾸역 지원을 와서 촉군과의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비는 가능한 상황을 만든다.

2년 간 종횡무진하며 옹주를 피로 물들인 강유였다. 강유의 군재에 대해 이래저래 논란이 있지만 삼국의 정립 이래 조위가 국력 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구도가 확립된 상황에서 조위에 수만에 달하는 인적 손실을 안겨 준 인물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만 명의 수급을 취했다는 석정전투의 육손, 수만 명을 전사시켰다는 동흥제 전투의 제갈각, 흥세 전투에서의 왕평과 비의 정도이며 조위가 아직 건국되진 않았으나 그 세력은 형성되어 있던 조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적벽대전에서의 유비와 주유, 때마침 일어난 수해를 철저히 이용해 포로로만 3만 명을 사로잡은 관우, 동관전투에서 조조 군에게 만 단위의 피해를 입혔다는 리즈시절의 군벌 마초 정도이다. 이 중 대부분은 수비의 입장이었고, 강유 같은 공세 입장이었던 경우는 마초와 관우이나 최종적으로 위에 의해 패해 그 세력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강유의 전과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6]

그러나 그럼에도 위의 국력은 크고, 요화가 지적했듯이 강유가 그를 기반으로 한 대촉 방어선의 위장들을 이길 정도로 전술적, 전략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유는 단곡 전투, 257년 북벌을 통해 뼈져리게 깨달았어야 했다. 이미 강유가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린 시절부터 비의가 은근히 제갈량과 비교하면서 강유가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우회적으로 얘기했는데도 해당 기록에 나오듯이 강유는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과 더불어 촉한 군부를 지탱하는 숙장들인 요화, 장익도 북벌에 부정적이고 황호와 타협을 통해서 군권 1인자도 겨우 사수할 정도로 냉랭한 촉한의 정계 등 모든 것이 강유에게 불리하였다. 강유의 비판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촉은 태생부터 한중을 내주지 말고 단단히 수비해야 했다고 이를 비판한다. 이미 정면에서 강유 자신의 능력으로든 촉의 국력으로든 위를 뚫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상황이라면 좀 더 단단한 수비를 구축해야 마땅하지 촉한의 목숨줄이라고 할 수 있는 한중을 내주는거 자체가 도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유는 이런 상황에서 촉이라는 칩을 걸고 단곡 이상의 더 위험한 도박에 발을 디뎠다.

따라서 강유의 한중 방어체계 변경 의도는
1.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공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반 강유파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2. 대규모 위군이 쳐들어오면 이를 퇴각할 수 없게 만들고 섬멸하여 위의 대촉 전선 공백을 초래하게 해 북벌의 활로를 찾고

3. 설령 북벌의 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위가 당분간 촉을 공격하지 못할 상황을 만드는 큰 전공으로 군부에서 실추된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며 여차하면 안전해진 전방을 잠시 비우고 중앙 정계로 들어와 발언권을 확실히 세운다

라는 발작적 도박의 의도였던 것이다.

이에 강유는 실제로 촉한 멸망까지 소규모 접전으로 추정되는 후화 전투를 제외하면 적극적 공세로 나서지 않는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던 강유였는데 정작 방어체계 변경에 대한 반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찬성하여 무난하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바뀐 방어 시스템의 개념과 이전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해보면...

지도를 보면 왕평이 만든 방어선(정군산 부근이다)보다 강유의 방어선(한중 남쪽이다)이 남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57] 이는 위군의 공격 시 각 촉군의 배치 및 맡았던 임무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왕평이 한중독을 맡고 있을 때 일어났던 낙곡전투 당시 한중군은 험요지를 점거해 외곽 방어선을 유지하며 후방 교란을, 비의가 이끌고 올라온 중앙군은 위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강유의 전략은 유사 시 한중군은 험요지를 버리고 주요 거점의 수비를 맡고, 강유가 직접 이끄는 답중군, 혹은 중앙군이 적의 교란과 포위섬멸을 맡았으며 중앙군은 여기에 더해 각 요충지 지원과 점거, 필요 시 한중의 주요 거점 지원의 역할을 맡고, 만약 강유가 중앙군이 아닌 답중군을 이끌 경우 기동로 확보의 역할도 맡는다.

이러한 방어선 재배치와 역할 변화는 위의 대군을 한중 내지로 깊숙히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강유가 이끄는 답중군의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한중군과 중앙군의 전력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평 시절까지만 해도 한중은 최전방 사령부에 가까웠지만 강유 시절에는 한중에서 서쪽으로 음평을 지나야 있는 답중이 최전방 사령부이며 북벌부대 본진의 성격을 띄었다. 한정된 촉군의 규모(9~12만)를 생각하면 답중으로 전력이 집중될수록 한중지역 전력은 감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 강유는 한중 내부 각 요충지에 여러 수비거점을 많이 만들고 강화시켜 한중분지 내부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한중의 방어가 무너지면 자신이 이끄는 자신이 이끄는 답중군은 물론 촉한 내지도 큰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단곡에서의 실수(?)로 인해 작전 하나를 화끈하게 말아먹은 인물인 호제를 일치감치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다만 이 당시 한중에 세웠던 수많은 방어기지는 사마소 촉정에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장서의 배신으로 양안관구도 무너짐으로써 강유가 제대로 된 인선을 했다고 볼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한중은 촉정 당시 주요 방어거점 가운데 한성, 낙성, 황금성만 간신히 함락되지 않고 버티는 수준이었다. 종회는 양안관구의 식량을 획득했음에도 강유가 예상한 대로 보급에 난항을 겪었으나 만약 종회가 한중으로 돌아가 한중에 남은 촉의 거점을 함락시키고 한중을 완전히 장악했을 경우 강유로썬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실제로 강유가 계획했던 청야는 사실상 실패했고 위군은 한중 분지 대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당초 강유의 계획은 완전히 뒤틀려버렸기 때문이다.

258년, 수비 시스템을 바꾼 강유는 262년까지 답중에서 둔전하며 지낸다. 261년 자신의 옛 정치적 후원자 중 하나였던 조운의 시호를 건의하거나 황호를 죽이라고 건의한 것을 보면 잠시 성도에 간적은 있었는데, 황호 제거를 거절하는 유선 덕택에 이후로는 본인이 성도에서는 세력이 없고 황제조차 기꺼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감히 성도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강유는 본래 항장으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는데다가 황호가 국정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가 황호와 더불어 결탁하니 대장군 교체 시도가 있었다.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하여 다시 성도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유전) 설상가상으로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공적이 없다하여 그를 소환하여 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표를 올렸다. 그러나 유선은 제갈첨, 동궐의 주장과 황호의 찬성에도 강유를 여전히 대장군으로 놔두었다. 자리를 보전한 강유는 262년, 적도를 향해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요화의 디스만 듣고 등애에게 또 다시 대패한다. 강유의 주요 패배에 '단곡', '후화'가 함께 언급될 정도이니(종회전) 단곡의 패배 규모를 감안한다면 후화 전투에서의 강유군 패배 규모 역시 작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9. 촉한의 멸망(263년 ~ 264년)

262~3년 무렵, 사마소는 강유의 병력이 지나치게 오랜기간 답중 서쪽 변경지대에 머무는 것을 보고, 이것을 일종의 기회로 보아 사마 씨 왕조 건립의 제물로 삼기 위해 본격적으로 촉을 치기로 결심한다. 사마소는 강유가 변방지역에 오래 머물며 자주 소란하게 하자, 촉나라의 국토는 작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 있으며, 자원과 재력은 매우 적어 다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병사를 대거 출동시켜 촉나라를 취하려고 했다. 사마소는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로지 종회하고만 정촉을 논했으며(종회전) 결국 무려 16만(정사 삼국지, 자치통감)~18만의 대군(진서 문제기)을 편성하고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촉을 억지로 단행했는데 심지어 촉정의 불가함을 아뢴 장군 하나를 죽여버리고 그 목을 사방에 보여 경고의 의미로 삼기까지 했다. 정촉 기간 중 사마소는 진공이 되었고 촉한 정벌 직후엔 곧바로 진왕이 되어 제위 찬탈로 가는 길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촉한 정벌의 공을 진나라 개국의 반석으로 세울 생각이 확실했던 듯 싶다.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를 치러가는 척 하며, 종회를 도독, 등애와 제갈서로 하여금 촉 정벌 군단을 편성한다. 종회는 이 시기부터 배를 만들어 오를 친다는 소문을 내고, 이 때 즈음에 강유가 후화 전투를 벌인다. 물론 오를 친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본디 위의 방침 자체는 내부적으로 막장 테크를 신나게 타고 있던 오를 먼저 치고, 촉 전선은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사마소는 유선이 어리석기 때문에 강유를 잡아두고 검각만 돌파하면 촉을 정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시 오의 사신 설후손휴에게 '촉의 중신들은 자기 보신에 바빠 바른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백성들의 얼굴빛이 채소빛이다'[58]라고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오나라의 장제는 '촉한은 환관이 전횡하여 나라에서는 정령을 내리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즐겨 백성들은 고단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는데 밖에 있는 이익을 다투어 지킬 준비를 못하였소'라고 평가하고 있어서 환관의 전횡과 강유의 북벌로 인해 백성들은 힘들이고 병사들은 지쳤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같은 오나라의 육개는 비록 군주는 사치스럽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까긴하나 촉한의 멸망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고 촉군의 강함을 증언하고 있으며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을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으며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원자에서 원준도 당시 위나라도 앞에 수춘전투가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고 했으며. 오나라 인물들도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지경이니 위나라 역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촉한도 나라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꾸준이 요지에 기대어 위를 방비하면서 촉한이 이기면 오히려 역전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당시엔 촉이 굳이 나라의 강역을 열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이 무렵 사마소의 정촉 계획을 파악한 강유는 유선에게 요화장익을 각각 음평교두와 양안관구(연의에서는 양평관)[59]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다. 강유의 한중 방어 전략의 두 가지 핵심은 한중의 방어 거점들이 잘 버텨주는 것과 중앙군이 제 때 답중군과 유사 시 한중의 거점들 지원에 투입되는 것이었으며 특히 한중과 답중을 잇는 통로인 음평교두의 확보는 강유군의 기동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유선과 황호는 황호가 잘 아는 무녀가 위가 절대 안 처들어온다는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무시한다.

263년 여름, 사마소는 정촉(征蜀)을 개시한다. 당시 정서장군 등애가 대촉방어체제의 마지막 실무자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이나 263년에 단행한 촉정벌에서 총사령관은 서열상 정서장군 등애보다 낮고, 실무적인 경험도 등애에 비해 부족하며, 대촉전선에서의 공헌도 자체가 없는 종회가 역임하게 된다. 이는 종회가 사마소와 함께 직접 촉정을 기획한 최고 기획자이기 때문일듯 싶다. 이 정벌에 옹주자사 제갈서 또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참전한다.[60] 유선등애가 답중으로, 제갈서가 음평교두에서 강유의 뒤를 차단하기 위해 기산에서 무가로, 종회가 낙곡으로 진격한 이후 요화를 답중의 강유를 지원을 위해, 장익동궐을 한중 지원을 위해 출발시킨다. 일단 요화는 답중에서 등애를 상대중인 강유를 돕도록 하였으나 이미 애초부터 답중에 지나치게 고립된지 오래인 강유군은 강천구[61]에서 등애군에게 쫓겨 퇴각하고 있었다. 이 당시를 기술한 《자치통감》의 내용을 보면 '음평(陰平)에 당도할 무렵 위의 장수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며 기다렸다.'는 기술이 있는데 상황을 봤을 때 이는 답중에서부터 부리나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퇴각하던 강유에 대한 설명일 수도 없고, 후술할 것이지만 장익과 동궐은 아직 한수현도 못 다다른 상태이므로 장익과 동궐일 가능성도 없다. 또한 음평은 답중으로 향하는 길목이므로 당시 답중으로 가다가 등애에게 쫓기고 제갈서에게 퇴로를 저지당하려 하는 강유군의 상황을 보고 강유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음평에서 요화가 벌인 군사 행동에 대한 서술로 보인다. 촉한멸망전 문서 참고.

그러나 제갈서가 음평교두를 점령해 강유의 길을 막았다는 <등애전>의 내용으로 봐서 요화군은 제갈서군에게 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강유는 답중에선 등애의 3만, 뒤에선 제갈서의 3만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촉의 주력이었던 강유군이 그렇게 포위된 상태로 섬멸당한다면 검각이고 뭐고 곧바로 게임오버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유는 그 길로 공함곡, 즉 답중과 옹주가 연결된 곳으로 북진한다. 당시 옹주 자사였던 제갈서는 강유의 움직임 그를 좆아 음평교두에서 공함곡으로 향한다. 30리가량 이동했던 강유는 곧바로 회군해서, 제갈서군을 기만하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뒤를 쫓았으나, 약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치고 만다. 등애와 제갈서의 협공으로 전멸당할 뻔한 위기에서 적의 심리를 이용하여 기동전을 펼치며 포위망을 벗어나 주력 부대를 보존한 강유의 전술적 기지 자체는 한때 위나라 농서를 함몰시킬 뻔하기도 했던 전술가로써의 강유를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겨우 하루 차이로 제갈서의 포위망을 돌파해 요화와 합류한 강유는 기뻐할 순간도 없이 양안관구가 이미 내부의 배신으로 종회의 대군에 의해 돌파된 사실[62]을 알고는 백수에서 장익과 합류하여 검각으로 간다.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가 요화와 함께 음평에서 퇴각할때, 장익, 동궐이 이제 막 한수(가맹관)에 이르렀는데[63] 이들은 군사를 합쳐 익주의 검각에서 농성한다.[64] 검각에서 강유와 종회는 약 1개월에 걸쳐 지리한 공방을 벌이는데, 공방 끝에 불리해진 종회는 잠시 퇴각한다. 종회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강유를 회유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후(公侯)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상을 초월한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과 정교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강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검각을 수비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종회는 곧 이전부터 정촉을 시도할때 가장 큰 문제였고 강유 역시 예측했던 정촉군의 문제인 한중으로부터 이어지는 험한 길을 통한 군량보급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종회와 사마소의 이런 전략은 역사에서 자주 나오는데 성공한 예는 백제 멸망전과 병자호란 등이 있고 실패한 예는 살수 대첩귀주 대첩 등이 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하면 굉장히 인적, 물적 손실이 적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그대로 대첩이 일어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올인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적군을 등 뒤에 두므로 안정적인 보급선을 포기하는 대신 한 국가의 머리, 다시 말해서 적국의 군주와 조정을 제압한다는 것인데 글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으로 아군이 보유한 군수물자가 다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하며 적국이 완벽한 청야 전술과 방어를 해 내면 당연히 꼼짝없이 대패를 당하게 된다.[65]

그러나 종회의 경우엔 군사가 거처하고 보급을 받을 근거가 없어서 망한 이런 참수작전의 예와는 달리 한중을 거의 석권한 입장에 있었다. 당초 강유가 예상했던 제대로 된 청야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한성, 낙성, 황금성 외에는 한중은 거의 위나라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고 종회는 자신의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줄 한중의 사인들과 백성들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한성의 장빈은 서쪽을 평정하면 당신 아버지의 묘를 찾아보겠다는 종회에 말에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라고 호기롭게 답장을 하긴 했지만 불과 5천의 군사로 수십만 위군을 언제까지고 당해낼 순 없었다. 어쨌거나 검각에서 종회는 제장들과 함께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종회는 본국에 제갈서를 모함하는 글을 보내 제갈서를 본국으로 끌려가게 하고 자신은 제갈서의 군사들도 모두 장악하였다. 이후 종회의 행보를 통해 종회의 속마음을 추측하자면 이후 그의 야심을 보건대 촉을 완전히 정벌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갈서의 군대까지 장악하여 한중을 완전히 함락하고 한중을 자신만의 영지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을 보인다. 안 그래도 이미 한중에서 할거한 장로의 예도 있고, 촉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하더라도 하후연의 예를 본받아 한중을 수비한다는 핑계로 힘을 기르다가 여차하면 사마소가 방심한 사이 한중에서 장안으로 기습을 걸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종회 본인의 반란 계획도 비슷했고.

각설하고, 한편 등애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검각을 죽 둘러 산을 넘어서 강유(江由, 강유관)와 면죽관을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한다. 이렇게 해서 강유 - 면죽을 통해 성도로 진격하면 강유는 황제와 조정을 방치하는 경우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방치하지 않고 검각에서 철수하면 종회가 이끄는 위군의 주력이 익주 내지로 들어올 수 있으므로 촉 멸망은 기정사실화된다는 것이 등애의 계산이었다. 퇴각을 논의하던 종회 역시 이 계획을 듣고 동의했는지 등애과 접촉하도록 증원군을 그쪽으로 보냈다. 이렇게 절벽 오르고 모포 두른 채로 절벽을 구르는 개고생을 한 달 정도 한 끝에 등애군은 강유에 도착한다. 산악 돌파로 엄청난 사상자가 있었고, 공성 무기도 못 챙겨온 등애군 앞에는 강유성이라는 성채가 있었던 데다, 등애의 부하 전속이 등애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했으나 등애군은 자잘한 전투를 통해 강유성의 수장인 마막을 항복시켰다. 이 곳에서 일시적으로 군을 정비한 등애는 면죽으로 진격하여 제갈랑의 아들 제갈첨이 이끄는 촉의 성도 방어군을 사력을 다해 패퇴시키고 낙현에 이른다.

촉 내부의 최후방어선이 모조리 붕괴하자 강유는 검각 방어를 포기하고 성도를 지원하기 위해 4~5만의 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여기서 강유는 당장 위급에 처한 성도 방향인 부현으로 향하지 않고 파로 향했다. 삼국지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 등이 처음 제갈첨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성도를 굳게 수비하려 한다고 듣거나 혹 동쪽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듣거나 혹 남쪽으로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으니 무엇이 정확한 소식인지 몰라 이에 군을 이끌고 광한의 처도를 거치며 그 허실을 파악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제갈첨은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부현을 버리고 면죽관에서 등애군을 맞아 싸우다 패배했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부현은 이미 위군의 영역이었을 것이고, 제갈첨도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포기했을 것이므로 해당 지역으로 가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화양국지》에서는 이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강유는 후주(유선)가 항복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우선 성을 단단히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는 본래 집정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들을 하여금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의 어려움을 깨닫게 하고 싶어하여, 이때부터 멋대로 행동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파서의 처와 오성으로 출병하였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화양국지의 기록에 의지한다면, 허실을 파악한다는 것은 명분이었을 뿐이고 강유가 일부러 성도의 어려움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강유의 행동이 비상식적이라고 여겨 서술한 것인데, 어느정도 앞뒤가 맞아보이기는 하나 촉한 멸망전으로부터 80년이 지난 후에 강유의 속마음을 서술한 것이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따라서 완전히 믿기엔 어려운 내용이며, 당대의 기록인 삼국지 강유전에 비할 바는 못되기에 후대의 화양국지 교정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강유전을 우선시했다. 다만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가 강유를 부정적으로 여겼다[66]고 생각할 근거로서는 충분할 것이다.

좌우간, 종회는 군을 후퇴시키는 강유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그를 추격했다. <종회전>에 나온 종회의 언급에 따르면 "강유 등이 통솔하는 보병과 기병 4, 5만 명은 갑옷을 두르고 예리한 칼을 들고 산천을 막고 계곡을 막아 수백 리에 걸쳐 앞과 뒤가 서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많은 병력에 기대에 궤도를 따라 서쪽으로 행군했습니다."라고 한다. 강유는 각지의 요충지를 점거하며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종회의 남진을 막고 서둘러 서쪽으로 진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있었던 염우나헌에게 수비를 맡기고 서쪽으로 진군했고 남쪽에는 곽익이 이끄는 촉군이 건재했는데 곽익은 이민족의 반란을 손수 제압하고 그 수괴의 목을 벨 만큼 상당한 군재를 가지고 있었다.[67] 동오도 세 갈래로 군사를 일으켜 두 갈래는 위를 공격하여 더 이상의 위군이 촉으로 몰려가지 못하게 막고 정봉이 이끄는 한 갈래의 동오군은 촉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등애군은 약 1만으로 사천 평야에 진입하여 현지에서 보급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종회의 군도 검각을 내주면서 10만여에 달하는 인력이 사천 분지로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이 시점에서 촉의 전망이 썩 좋은건 아니었다. 게다가 종회는 부현으로 나아가지 못한 강유를 앞서 성도 일대를 먼저 선점하는데 성공하였다. 영안에서 달려오는 염우의 경우 이후 기록이 없어지며 이전부터 증원을 가겠다고 나선 곽익은 추가 명령을 받지 못하고 남중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설령 유선이 동쪽이나 남쪽으로 도망가더라도 이미 촉에 위의 대군이 진입한 마당에 미래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물론 종회와 등애가 성도에 들이닥친다 해도 성도 중앙정부가 방어군이 있는 곳이나 동오 지원군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면 얼마 안 가서 강유의 중앙군과 건녕의 곽익과 동오의 원군을 규합해서 소수의 땅이나마 보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여전히 위군이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촉이 청야 전술과 성도 방어나 피난을 통해 시간 끌기를 통한 군세 규합, 자국의 영토이므로 지리에 더 밝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는 것. 따라서 많은 촉의 대신들은 남쪽으로 피신하거나 동오의 지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 파군으로 파천할 것을 주장했고, 유선의 아들 유심은 성도를 사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유선은 항복을 주장한 초주의 말을 듣고 등애에게 항복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이 항복에 통탄해했던 촉한 사람들의 기록이나 위군도 보급이 위험하긴 했으니 상당히 위험할 수 있었다는 위나라 측 기록이 남아있는 것 등, 촉한 내외적으로 유선이 성급하게 항복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강유가 멀리 파군 오성현으로 왔는데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더라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고, 지치고 고립된 등애를 치고 종회를 막았다면 강유의 역량은 종회를 충분히 넘어서니 방어 할 수 있었다. 적이 이르지 못했는데도 강유가 함락되었는데 아깝도다!' 라고 탄식한 촉군태수 왕숭[68]의 평가가 화양국지에 기록되어 있고, 원준의 원자(袁子)에선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성의 험지로 들어갈때 종회가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만일 유선이 며칠 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종회군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오의 종속국이 될 수 있다는 초주의 의견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조정에서 이런 의견이 오로지 초주에게서만 나왔을 뿐이라는 점과 조정 여론이 파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건데, 만약 강유의 구원군이 서둘러 성도에 도착했다면 초주의 의견이 묵살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69]고 보면 강유의 행동을 실책으로 평가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어쨌든, 강유는 파를 경유해 성도를 향해 이동, 동광한군 오성(五城)현에 도착했다. 이곳은 현재의 사천성 덕양시 중장현(中江县)으로 현재의 사천성 광한시이자 당시 등애가 주둔하고 있던 광한군 낙현(낙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현재의 광한시와 중장현의 위치 그는 이곳에서 유선의 명을 받고 종회에게 항복했다. 강유는 직접 진영을 돌며 촉군에게 항복을 명하는데 이 명령을 받은 촉장들과 촉병들은 모두 격분하면서 자신의 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고 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은 실제 역사상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10. 최후: 성도의 난 (264년)

여기서 이미 어느정도 딴 생각이 있었던 종회는 촉 멸망 이후 강유를 열렬히 환영하며 강유의 수레와 깃발 등을 돌려주고 항상 함께 다니며 강유에게 의견을 물었다.[70] 앞서 검각에서 보낸 편지도 그렇고,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에게 항복을 받을때 "왜 이리 늦은 거요?”라고 말하자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는 기록을 보면 종회는 강유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정사 삼국지》나 정사에 배송지 주석으로 적힌 《한진춘추》, 《화양국지》와 소설인 《삼국지연의》 둘 다 끝내는 종회를 이용하여 촉한을 부흥시키려 했고 종회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우선 《한진춘추》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딴 마음이 있음을 알아채고 촉나라 부흥에 이용할 목적으로 종회를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에 바람을 더 넣었다.
"듣건대 군께서는 회남에서부터 그 계책에 허점이 없었다고 합니다. 진나라가 창대해진 것은 모두 그 덕택입니다. 이렇게 촉나라까지 정복하여 그 위엄과 덕망이 세상에 진동하니 백성들은 그 공을 존경하고 군주도 그 지모를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한신한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어도 천하가 평정되자 의심을 받았으며 문종범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그런 겁니다. 군께선 이미 엄청난 공과 덕을 이루셨으니 도주공(陶朱公=범려)이 를 띄워 구천을 떠난 것을 본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공훈과 몸을 보전하려면 아미산(峨嵋山)에 올라 장량처럼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야지 않겠습니까?"

종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심오하여 내가 능히 행할 수 없소. 또한 지금을 위한 방도로 혹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소."

강유가 말했다,

"그 나머지 방도야 그대의 지력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늙은이(老夫)가 번거로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

264년 정월, 종회는 강유의 본심도 모르고 등애를 참소하였고 강유의 계획에 방해가 될 등애는 체포되어 중앙으로 압송되었다. 이로인해 종회는 강유 등을 거느리고 성도(成都)로 가서 익주목(益州牧)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고는 강유에게 군사 5만 명을 주어 그를 선봉으로 삼으려 하였다.(강유전) 한편, 등애가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는 얘기를 듣고 종회도 믿을 인간이 못되는 걸 아는 사마소는 촉 지방의 정세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병사 10만을 장안으로 보내 대비하게 했다.

사서 기록들을 종합한 《자치통감》을 보면 강유를 비롯한 촉장들은 종회로부터 옛 촉한군의 인호절개(지휘권한)을 돌려받았고 마침내 264년 정월 15일에 종회가 곽태후의 유명을 날조해 사마소 토벌을 천명하고 위장들을 모조리 가둔후 자신이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여 촉을 장악하는 난을 일으킨다. 강유의 계획은 이후 '밖에 있던 병력들[71]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산장으로 삼은 다음 수천개의 곤[72]등의 무기로 차례대로 위장들을 살해해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로 던진다'는 종회가 짠 계획을 이용, 마침내는 종회도 죽이고 위나라 장수들과 병사들도 이런식으로 다 제거한 다음 유선을 복위시킬 계획이었던 걸로 보인다.
維教會誅北來諸將 旣死 徐欲(己因)殺會 盡坑魏兵 還復蜀(漢)祚 密書與後(漢)主曰

강유는 종회를 교사하여 북쪽에서 온 여러 장수들을 주살하도록 하고, 뒤이어(이로인해) 종회를 죽인 후 위나라 병사들을 죄다 파묻어 버려 촉(한)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다. 후(한)주에게 밀서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였다.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자치통감

자치통감》과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먼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도록 가르쳤고, 이를 통하여 종회를 죽인 후 위나라 병사들을 다 파묻어버리고 촉한을 부흥시킬 것을 계획했다고 한다. 강유가 외부의 병사들을 다 불러 동원하고 수천개의 많은 무기를 준비했다는것은 강유가 촉병 등을 동원하여 위나라 장수들 뿐만 아니라 종회의 측근들과 상관들을 잃고 혼란에 빠진 위나라 군졸들까지 한꺼번에 기습해 도모하려 했다는 증좌가 된다. 게다가 강유는 촉의 병력을 동원,지휘할 수 있는 인호절개를 종회로부터 되돌려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종회가 강유에게 줄 5만의 병력은 구 촉한군일 가능성이 높고 지휘관들이 다수 죽어 혼란에 빠진 위군을 공격해 섬멸하려 했을 공산이 크다. 이것이 배송지가 언급한 촉을 회복하는 계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채 종회는 위장들을 다 주살하라고 한 강유의 말을 따르고자 했지만 미적거리면서 결단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갇혀있던 호열이 종회의 신임을 받던 구건을 통해 이 계획이 담긴 밀서를 그의 아들 호연에게 몰래 전했고 이 사실이 하룻밤 사이에 위군 전체에 전달된다. 18일, 호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출진하자 남아 있던 위나라 장졸들이 지휘하는 자가 없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출진해 (자신들을 죽이려던 강유와 종회를 죽이러) 성도로 너나없이 몰려들었고 마침 무기를 배분하던 중인 종회와 강유를 습격하였다.[73]

당시 종회와 강유는 휘하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있었는데 위군이 몰려들자 강유는 종회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저항했다. 당시 62세[74]였던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종회의 말에 "오직 마땅히 공격할 뿐이오!"라 말한 뒤 몰려든 병사들을 상대하여 직접 대여섯 명을 죽이며 분전했고[75][76] 그 사이 종회는 병사를 파견하여 붙잡혀 있는 아문과 군수를 죽이도록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물을 들어 문을 부수고, 사병들은 대문을 부수었으므로 격파할 수 없었다. 곧 성문 밖에서는 사다리에 의지하여 성이 어지럽게 진입하였고, 쏘아대는 화살은 비오듯 했으며, 아문과 군수들은 각기 흩어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서 그들의 부하 병사들과 합류했다. 결국 강유는 병사들과 결투 끝에 살해되고 종회도 더불어 살해된다. 강유의 시신은 죽은 뒤 쓸개가 꺼내어져 그 크기가 되(升)[77]될 정도라는 기록이 남겨질 정도로 위군에 의해 참혹하게 훼손되었다.

그 밖에 역시 정사에 주석으로 달린 파촉 지방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화양국지》와 이를 인용한 《자치통감》에는 강유가 유선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도 전해지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강유는 그 난장판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촉한의 부흥을 꾀했던 걸로 보인다.
願陛下忍數日之辱,臣欲使社稷危而復安,日月幽而復明。
폐하께서는 며칠만 고생을 참아 주십시오.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세워서 어두워진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1] 최훈삼국전투기 중 '기 전투(2)' 에피소드가 이 설을 채택해 연출됐다. 당시 천수 태수 위강이 마초군에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초는 그를 죽이려고 하고, 이에 강경은 항장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저항하다가 방덕에게 살해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강유가 아버지를 부르며 울면서 뛰쳐나가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만류한다.[2] 촉한의 건국자 유비노식의 제자였고,정현과 노식은 마융에게 배워 동문이었다. 기묘한 인연으로 볼 수 있다.[3] 정현의 학문은 공자가 표방하던 것과 같은 대의를 내세운 이상적인 복고주의 또는 원칙주의에 가까웠다. 강유의 성격이나 태도, 촉한에서의 행적에도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4] 사실 뭐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적대 세력에 귀순한 사람의 연고자를 가만둘 리는 거의 없지만, 이때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시대도 아니었으니.[5] 손성의 잡기, 정사 강유전에 주석으로 재수록.[6] liáng tián bǎi qǐng[7] bú zài yì mǔ[8] dàn yǒu yuǎnzhì[9] bú zài dāngguī[10] 봉의장군에서 봉의(奉義)는 옳은 것을 받들었다는 뜻으로써 한 때 이엄이 맡았던 자리이다. 당양후에서의 당양은 유선조운 덕에 살아난 그 장판파가 있는 당양이다.[11] 그래서 제갈량의 이 중호보병 발언은 당시 중호군에 있었고 군부 인사 권한이 있던 조운의 의견이나 평가를 토대로 상의하여 반영되었다는 추측이 있다.[12]삼국지》<강유전>은 중감군, 상거의 《화양국지》 <유후주지>는 호군으로 기술한다. 그냥 둘 다 겸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13] 건흥(建興) 초, 영안도독(永安都督)ㆍ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된 강유의 전임인 진도가 백이병 정예를 이끌고 영안에 진수하던 시절이 있긴 한데 이 때 당시엔 그냥 이엄 휘하의 감군으로 동맹인 오나라가 위나라의 파상 공세를 받자 여차하면 동맹군으로 참전해 쳐들어오는 위군을 요격하고 동쪽 국경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진수시킨 것이다. 제갈근이 걱정하는 군사의 질 부분을 제갈량이 안심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즉 이 시기에도 정서장군은 북벌과 아예 상관없는 위치는 아니었다.[14] 승상 자리는 제갈량을 추모하는 의미로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영구결석이 된다.[15] 당시 촉한의 장군 품계상 보한장군은 사장군 바로 아래로 칭하는 계급이었다. 강유의 나이나 촉에 귀순 이후 흐른 시간을 생각해 보면 제갈량 사후에도 강유는 고위층의 굳건한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제갈량이 그렇게 극찬한 인물을 버려 두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16] 제갈량 사후 249년까지는 위나라 서부전선 방어는 옹주자사와 정촉호군 양두체제였다. 제갈량 사후 이 체제가 곧바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238년부터 다시 시작된 장완, 비의와 강유에 의한 산발적인 북벌과 진압이 247~248년에 이르는 대규모 강족반란 획책에 대응하는 체재이다. 옹주자사 곽회를 주축이며 정촉호군 하후패는 곽회의 명령에 휘둘리는 듯하게 묘사된다. 《위략》에 의하면 정촉호군은 정서장군 직속으로 당시 정서장군은 하후현이었으나 하후현은 당시 중앙정계에서 조상 일파와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하후현전에서도 촉한의 북벌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상 시대의 정서장군은 후일 대촉방위체제에 주축을 맡는 정서장군과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정촉호군은 옹주자사 직속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249년까지 지속된 곽회와 하후패의 방위체제는 "옹주자사-정촉호군 양두체제"라고 할 수 있다.[17] 여담으로 강유의 시조는 태공망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강상이고 이 강상은 강족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강유는 한족이었다.[18] 대표적인 예로 제갈량의 4차 북벌 때 위연이 곽회를 강중(羌中)에서 격파한 것을 든다. 또 238년 9월, 요화가 수선강후 석심(宕蕈)의 진영을 공격하자 옹주자사 곽회는 광위태수 왕윤(王贇), 남안태수 유혁(遊奕)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요화를 협공하게 했는데 요화가 이를 격파했다. 곽회 본인이 파주되었는지는 불명.[19] 연희(延熙) 원년(238년),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장완이 대사마(大司馬)로 오른 뒤에 강유를 사마(司馬)로 삼으니 수차례 편군(偏軍)을 인솔해 서쪽으로 침입하였다.[20] 연희 5년(242년) 봄 정월에 감군(監軍) 강유(姜維)가 편군(偏軍, 한 무리의 군대)을 인솔해 한중에서 부현(涪縣)으로 돌아와 주둔했다.[21] 사실 상용급습작전은 계획의 현실성과 성공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았기에 입안자인 장완이 죽은 이상 폐기될 수 밖에 없었다. 저 계획이 얼마나 뜬금없었냐면 오의 주연이 촉이 오를 기습하려는 걸로 오해했을 정도였고 손권이 오해를 풀었다.[22] 이는 녹상서사를 둘로 나누어 신권을 분산하려던 유선의 안배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로 강유가 선택된 것은 강유가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순수한 무인이라는 면도 작용했을 것이다.[23]자치통감》의 서술대로라면 곽회가 1만 부락을 잡고도 이전과 같이 승진하지 못한것은 그들이 잔당이기 때문이고, 진짜 대 부락은 놓쳐서일 수도 있는것이다. 아니면 1만 부락이나 잡았다는게 <곽회전>의 부풀림이라던지.[24] 당시 촉한 자체가 강족과 친분관계가 깊었다, 이 무렵 문산태수로 재직하던 왕사가 강족들과 후의가 깊었고 이 덕분에 강유가 강족들의 지원을 받고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왕사는 이후 강유의 북벌에 참가했다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어 순직한다.[25] 화양국지에 따르면 절을 내린 시기는 247년이다.[26] 213년 금성군에서 서평군으로 분리되었다.[27] 장완 시절에도 북벌을 위해 부가 설치되었고 비의가 암살당한 장소가 한중의 한수였으며 제갈각이 기획한 동흥 전투252년이니 오와 연계하여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28] 본디 유선을 암살하려다가 경호가 너무 삼엄해서 비의로 바꾼것이다.[29] 洮는 '조'로 읽을 수 있지만 호삼성의 주에 의하면 '토도(土刀)의 번(翻)'으로 되어 있어서 '도'로 읽는다.[30] 장억은 북벌론자면서도 제갈각의 출진이 실패할 것이라 예견하였는지 제갈첨에게 오에 편지를 쓰라고 해 제갈각의 출진을 막으려 하였으나, 제갈각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합비에서 대패한 뒤 손준에 삼족이 멸족당했다.[31] 혹은 토촉호군(討蜀護軍)으로 표기된다.[32] 강유전 원문의 하간(河間)은 오기이다.[33] 이 당시 토촉호군 서질은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이끌고 강유의 기습을 맞서는 모습을 보이는데 옹주자사-토촉호군 양두체제 시절에 비하면 약할지언정 그래도 나름의 독자지휘권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강유와의 전투에서 서질은 참살당하고 토촉호군은 격퇴당하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독자지휘권을 행사하는 모습은 다시는 보이지 않고 이후론 정서장군과 옹주자사에게 종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34] <장익전>에서는 장익이 말리자 강유가 노하면서 장익의 발언을 뱀에다가 사족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고 되어 있으나 일단 여기선 《화양국지》7권과 《자치통감》76권을 따른다.[35] 농서, 남안, 천수, 광위를 뜻한다.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노리던 지역과 대충 들어 맞는다.[36]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와 촉군이 이런 진태의 갑작스런 진격에 놀랐다는데 배송지는 강유가 복병을 미리 배치해 둘 정도라면 강유가 이 진격을 예상했다는 것이므로 놀랐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진태전 본전을 비판했다.[37] 5만을 넘으면 자칭 10만이라고 일컬수도 있는 대병력이다.[38]자치통감》에 따르면 6월에 등애가 군사를 배치할 계획을 논하고 7월에 강유가 기산으로 향했다.[39] 진태는 적도 전투 후 시기는 불명이지만 중앙으로 승진해 올라간다. 그는 강유에게 대패를 당한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새 지원군과 교체하였다. 아울러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군대를 돌려 상규에 주둔했다. 이후 진태는 승진하여 낙양으로 가 상서우복야가 되었고, 관리선발을 관장하며 시중관록대부의 관직을 더했다. 또 진태는 진남장군, 가절도독회북제군사가 되어, 서주의 감군 이하를 모두 지휘하다가 곧 좌복야로 전임되었다. 제갈탄이 수춘에서 모반을 하자, 사마소는 육군을 인솔하여 구두에 주둔시켰으며, 진태는 행대를 통솔했다.[40] 종제 부근에 흑룡하와 영녕하가 있어서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다.[41] 연의에서는 등애가 대놓은 계책에 강유가 비슷한 의견으로 대책을 마련한 듯이 묘사하지만 실제 사료엔 그런 묘사가 없다.[42] 심지어 강유의 최측근 유은이 강유보다 나이가 많다.[43] 물론 이렇게 되면 강유가 기산이나 남안의 곡식을 얻어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도 있고 등애와 호제가 대치하고 그 사이 강유가 상규로 와 오히려 등애를 상규에 몰아넣는 꼴이 되었긴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전자에 가능성이 실린다.[44] 애초에 호제 본인은 이런 병크를 내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문책 또한 당하지 않았으며 추후 독한중으로 잘만 강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면 뭔가 납득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는 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즉 처음부터 안 될 작전에 가까웠다는 것.[45] <등애전>에서 256년의 군공으로 등애가 도독농우제군사에 진서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서술된 것이 무색하게 《자치통감》에서는 굉장히 다른 내용을 서술한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257년에 이르어서는 사마망이 진태를 최종적으로 승계해서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를 맡았으며 안서장군에서 진서장군으로 승진했다던 등애는 도로 안서장군으로 강등당했다. 중요한 점은 사진장군과 사정장군은 직관지상 사정>사진으로 서열이 정해져있다 한들 서로 한 전선을 총괄한다는 역할은 동일해서 진서장군이 존재한다면 정서장군을 임명하지 않는게 관례였다. 요상하게도 250년대의 위나라는 이 관례를 어기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에 자치통감의 기록이 오기이며 257년의 등애가 안서장군이 아닌 진서장군이 맞다면 대촉전선에서도 정서장군 사마망과 진서장군 등애라는 괴상한 인사배치가 단행된 셈이다.[46] 사실 제갈탄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사마씨 정권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대촉 전선의 전력이 필연적으로 감소했을 것이므로 257년에 이뤄진 강유의 북벌에서 256년 단곡전투에서 확립된 등애의 방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257년 당시 관서지역 내에서 군세 자체는 이전 단곡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촉군의 우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257~258년 서북 전선의 대립은 전력이 부족했던 위군이 사마의식 견벽거수를 고수하고 강유가 이끄는 촉군은 계속 싸움을 거는 구도로 과거 제갈량의 북벌 시대의 고전적인(?) 조위과 촉한의 싸움 형태로 복귀한 것이다.[47] 257년에 강유를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은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도독옹양제군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48] 253년 북벌에서 제갈각의 요청으로 갑작스럽게 나선 것처럼, 257년도 조위의 갑작스러운 정세 변화에 기인한 북벌로, 당시 강유는 준비가 충분치 못함에도 상당한 위군이 대오 전선에 동원된 것을 알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해 무리해서 나선 면이 있다. 사실 강유가 단곡에서 이기거나 최소한 손해 없이 돌아왔더라면 257년 북벌에서 강유가 나쁘지 않은 사기와 촉한 중앙의 지원을 받아 훨씬 큰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촉한 조정과 군부에서도 강유와 북벌에 대한 비판 여론이 한창 고개를 들었었으며 단곡에서 중간 장수급들을 꽤 잃은 상황이었기에 상황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진지와 초주가 연계한 《구국론》이 북벌에 대한 촉한 사람들의 여론 설득에 실패해 강유가 북벌 자체는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49] 다만 하후패의 죽음은 약간 복잡한데 이는 하후패 문서 참조.[50] 이 때 사서에서 황호와 유선의 관계를 나뭇잎과 가지에 비유했다.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51] 다만 강유의 247~249년 강족 연계만 북벌만 해도 조정의 허락없이 북벌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고 강유가 북벌을 강행했다고 보긴 어렵다, 적어도 비의 생전에는 북벌을 무작정 강행할 수 없는 위치였다. 강유의 장기간 북벌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은것은 254~258년 북벌이었다.[52] 연의는 여기에 약간 살을 붙여서 강유를 존경했던 극정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극정이 강유를 매우 고평가한 것은 사실이다.[53] 흥세 전투는 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조상이 이미 진 싸움임에도 철수를 미루다가 비의군에게 궤멸당한 것이고 진태나 등애 같은 장수들이면 그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당장 그들의 선임 곽회가 '크게 패하지 않아 절을 수여받았다.'라고 기록이 남아 있다.[54] 자치통감 기준, 정사 삼국지엔 '적이 평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의 말 대로라면 이전 방어체계와 바뀐 것이 없으므로 자치통감의 기록이 더 개연성이 있다.[55] 특히 낙성과 한성. <종회전>에 따르면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과 낙 두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56] 강유의 스승격인 제갈량의 경우 북벌 기간 전체를 통틀어 마땅한 성과 없이 광회나 비요를 몇번 물리치고 위나라가 백성을 다 빼간 무도와 음평을 손에 넣는것외엔 성과가 없었다. 사마의와 야전에서 맞붙은 노성전투에서 수급 3천개, 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피해를 입히긴 했으나, 이후 퇴각과정에서 사마의에게 사로잡히고 참수당한 인원이 만으로 헤아리는 대패도 당했다. 즉 제갈량은 1차 북벌의 기습을 제외하고는 강유나 관우처럼 조위의 한 지역 자체를 완전히 뿌리채 흔들릴 만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57] 한성은 면양현, 낙성은 성고현에 세워진 성인데 이 두 성은 제갈량도 주둔했었고 특히 성고는 조진의 촉정때 제갈량이 주둔했었다. 게다가 황금성은 흥세 전투 당시 왕평이 주둔하던 곳인데 촉한멸망전 당시 이 성을 수비하던것은 강유의 오른팔 유은이다.[58] 다만 설후의 이 보고는 비록 유선의 촉한조정을 보고 말한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손휴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라는 권중달 교수의 평가가 있다.[59] 지도상에서 표시된 두 곳이 다르다. 양안관구는 한중을 지나서 남쪽 길목에 있는 관문이며, 양평관은 한중에 도달하기 전에 위치한 관문이다. 연의에서는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나오며, 자치통감도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 두 관문을 따로 표기하고 있다. 만일 이 두 곳을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조조가 장로를 칠 때와 종회가 부첨과 싸울 때의 설명이 모순된다. 조조는 한중으로 가는 상황이었고, 종회는 한중을 지나쳐서 진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60] 이는 대오전선에서의 사정장군/사진장군 남발도 그렇고 진서장군 종회에게 총사령관을 맡게 한 것도 결국에는 지휘체계를 꼬아놓아서 지방관의 반란획책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런 의도성을 갖고 출범된 체제인지는 불명이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결성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61] 호삼성(胡三省)은 ‘강천구(彊川口)는 강대산(嵹臺山) 남쪽에 있었다. 강대산(嵹臺山)은 곧 임조(臨洮)의 서경산(西傾山)이다. 감인(闞駰)은 강수(彊水)가 음평(陰平) 서북쪽의 강산(彊山)에서 나오며 (강수를) 강천(彊川)으로도 부르는데 강유(姜維)가 돌아갈 때 등애(鄧艾)가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여 강구(彊口)에서 패주시킨 곳이 바로 이 땅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중국역사지도집 및 삼국지사전에서 비정하는 바에 따르면 강천구는 답중(沓中), 감송(甘松)의 서북쪽 또는 북쪽에 해당하므로 등애전이나 강유전 등에 기술된 당시 상황과 딱 들어맞지가 않는다. (강유가 퇴환하다가 싸운 곳이 답중의 서북쪽?) 이 지명 비정들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거나, 아니면 강유가 답중에 쭉 머물며 등애군을 맞이한게 아니라 위군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포착한 뒤에 답중으로부터 북진해서 등애군을 요격하기 위해 조서 방면으로 출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기는 정면으로 강유군을 직공, 견홍은 강유군의 예상 진격로를 차단, 양흔은 감송 쪽으로 향하면서 강유군의 뒤를 끊으려는 움직임. 그러다 종회의 대군이 이미 한중지역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서둘러 남쪽 방면으로 퇴환하며, 선박을 이용해 조수-강수(강천)를 거쳐 백수를 타고 내려가려다 강천구에서 양흔 등과 조우해 전투)[62] 장서가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은 장서가 나간 것을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장서의 항복으로 예상 외로 빨리 들이닥쳐서 급히 저항하다 전사했다.[63] 사실 이 부분이 정사와 자치통감이 모순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인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익동궐은 음평에서 제갈서의 움직임을 보고 근처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정사 강유전은 이들이 이제서야 한수에 도착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통감의 오류로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촉한멸망전을 참고할 것[64] 당시 종회는 한중의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양안관구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낙성공략을 내버려두고 이를 통해 전진했다. 한 마디로 양안관구 함락 이후 강유가 먼저 도착하느냐, 종회가 먼저 도착하느냐의 싸움이 된 셈인데 여기선 강유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65] 실제로 이러한 문제로 제1차 고당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당나라군의 장수인 이도종이 평양으로 진격하자고 주장했는데, 장손무기가 '아직 신성과 건안성 등 고구려군이 건재한 곳이 많다. 황제의 원정은 다른 경우와 달리 안전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알듯 안시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하고 퇴각하였다.[66] 상거는 오호십육국시대 성한의 관리였으나, 동진의 공격을 받자 성한의 황제에게 항복을 권했던 인물이다. 성한의 황제 이세는 이를 받아들여 항복했고 평온한 여생을 보냈으며, 상거는 이후 동진의 관료가 되어 화양국지를 집필했다. 항복을 통해 군주 유선의 안위를 보전한 초주와 비슷한 행적이다. 이런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상거는 초주를 높게 평가하고 주전파인 강유를 나쁘게 보았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화양국지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67] 곽익은 대규모 위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성도로 지원을 갈지 유선에게 물었으나 유선이 방비가 튼튼해서 필요 없다며 거절한다. 아마 검각에서 종회가 발목을 잡혔을 때로 추정된다.[68] 이 사람은 심지어 반북벌론자 초주의 제자들인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이밀과도 친했다.[69] 비록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당도고 도참으로 촉은 이딴식이면 위에 필연적으로 망한다고 비판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한때는 제갈량이 죽었을때 누구보다 먼저 조문을 가기도 했고, 나라 살림을 생각해서 진지와 함께 구국론을 지으며 강유를 막으려 노력했던 인물 역시 초주다. 초주가 이런면에서 보면 촉 정권에 정말 애착이 없었다거나 최소 촉 정권에 협력할 의사까지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70] 재밌는 것은 이때 종회가 강유를 제갈탄, 하후현과 비교하며 강유를 띄워주는데 저 둘이 모두 사마씨에게 대적하다 사망한 걸 보면 종회가 애초에 반란의 뜻을 품고 의도적으로 저 둘을 언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부분이다. 다만 역으로 종회가 이들 둘보다 강유가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해, 위의 입장에서 이미 한 번 위를 배신한 강유가 위를 다시 배신하진 않을 거라는 식으로 쉴드를 쳐주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종회가 정말로 정촉(征蜀) 이전부터 반란의 의도를 품었다면 자신의 반란 의도를 비유로 쉽게 드러내리라고는 믿기 어렵다.[71] 아마도 촉병들이나 강유, 종회의 심복들.[72] 단단한 나무를 잘 다듬어 만든 타격무기를 말한다. 원문에서는 백부(白棓)라고 불리는데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무를 다듬기만 한 상태의 곤봉을 백부(白棓)라고 불렀다. 이는 백봉(白棒)과 동의어로 한글역 정사 삼국지에선 즉 '하얀몽둥이'로 번역하는데 백봉은 곤의 다른 이름이다.[73] 재미중국인 사학자 리둥팡 교수는 이 기록에 의문을 품고 호열이 자기가 살기 위해 위나라 장수를 다 죽이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으로 보았다. 즉, 종회는 강유에게 5만명의 병사를 줄 생각만 하고 있었지 위나라 병사들과 장군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강유가 병사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화양국지의 기록도 이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된 유언비어가 사서에 적힌것으로 보았으며 강유가 병사들을 다 파묻으려 했다고 해도 위나라 병사들이 저항했을 것인데 어떻게 가능했겠느냐 라며 이 기록에 의문을 품었다.[74] 종종 국내의 일부 연의 평역본에는 59세라고 되어 있는데, 62세가 맞다. 이 때는 264년이고, 강유는 202년 생이다.[75] 조운과의 일기토는 연의 창작이지만, 그걸 제하고 논하더라도 강유 개인의 무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60대 초중반의 나이에 적병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손수 썰어 넘겼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무력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라는 반증. 당장 평생 전쟁터를 전전하던 유비는 61세에 세상을 떠났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던 손권은 60대에 오락가락하며 이궁의 변이나 일으켰다. 그에 비해 강유의 이 일화는 그야말로 진삼국무쌍 시리즈 실사판을 방불케 하는 비장미 넘치는 일화인데, 오히려 연의에서 이 일화가 삭제돼서 강유가 단순히 자결하는 걸로 처리됐다. 다만 연의에서는 강유가 죽기 전에 두 차례 심병(심장 발작)이 일어났다는 묘사를 넣었다. 반란 계획을 논의하고 나오는데 첫 번째 발작이 일어나 실신하고(마치 실패를 암시하는 복선 같기도 하다), 이후 계획이 실패하고 위군을 상대하는데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나자 더 싸울 수가 없게 되어 자결한다는 묘사. 84부작 삼국지는 두 서술을 모두 혼합했는지, 강유가 위군에게 포위당한 채로 분전하다가 심장 발작이 일어나 더 싸우지 못하고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76]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 "강유는 종회의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싸웠는데 손으로 5~6명을 죽이니"라는 대목 중 '손으로' 부분이 오역되었다. 원문에서의 수살(手殺)이란 표현은 맨손으로 주먹질을 했다는 게 아니라, '직접' '손수'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관용적으로 쓰는 '이 손으로 ㅇㅇ했다'는 표현이 정말로 '맨손으로 그 행위를 하였다'는 의미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직접 그 행위를 하였다'는 의미를 담은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77] 이에 대해선 강유가 담낭수종을 앓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담낭수종이란 담낭이 맑은 액체와 점액으로 가득차는 것으로 크게는 사람 머리만한 것도 있다고 한다. 그 정도면 한 되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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