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0:48

두산 베어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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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1983 1984 1985 1986
1위
[[1982년 한국시리즈|
]]
5위 3위 4위 3위
제1대 김영덕 제2대 김성근
1987 1988 1989 1990 1991
3위
5위 5위 7위 8위
제2대 김성근 제3대 이광환 제4대 이재우
1992 1993 1994 1995 1996
5위 3위
7위 1위
[[1995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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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윤동균 제6대 김인식
1997 1998 1999 2000 2001
5위 4위
드림 2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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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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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김인식 제6대 김인식
2002 2003 2004 2005 2006
5위 7위 3위
2위
5위
제6대 김인식 제7대 김경문
2007 2008 2009 2010 2011
2위
2위
3위
3위
5위
제7대 김경문 7대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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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6위 1위
[[2015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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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김진욱 제9대 송일수 제10대 김태형
2017 2018 2019 20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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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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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2위

제10대 김태형
2022 2023 2024 2025 2026
9위 5위
4위
제10대 김태형 제11대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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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B 베어스 시절2. 두산 베어스 시절
2.1. 김인식 체제(1999년 ~ 2003년)2.2. 김경문 체제(2004년 ~ 2011년)2.3. 김진욱 체제(2012년 ~ 2013년)2.4. 송일수 체제(2014년)2.5. 김태형 체제(2015년 ~ 2022년)2.6. 이승엽 체제(20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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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B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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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산 베어스 시절

2.1. 김인식 체제(1999년 ~ 2003년)

김인식 감독 체제(1995 ~ 1999 ~ 2003)
1999년 시즌 2000년 시즌 2001년 시즌 2002년 시즌 2003년 시즌
새로워졌습니다-두산 베어스 승리의 두산
감동의 베어스
승리의 두산 베어스!
팬과 함께 V3!
우리 두산! 멋진 베어스!
감동의 V4!
승리-감동의 두산 베어스!
팬과 함께 V4

1999년 1월 5일 구단 명칭을 OB 베어스에서 두산 베어스로 바꾼다. 그동안 두산 구단은 1982년 원년부터 두산 프로야구단 OB 베어스란 정식 명칭으로[1] 리그에 참가했었지만 두산그룹의 인지도보다 소비재인 맥주를 취급하는 그룹 자회사 OB맥주의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OB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었다.[2]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3] 두산그룹은 중공업 위주의 기업구조 개편을 시도했고 그에 따라 소비재 계열 철수를 추진했다. 실제 두산그룹은 1996년 한국네슬레와 한국3M 매각을 시작으로 1997년 코카콜라의 사업권을 매각했고, 곧이어 OB맥주, 두산주류, 버거킹, KFC 등 소비재 계열사 매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때부터 두산이란 이름을 전면으로 내세우게 되었다.[4] 물론 원년 이후 무려 17년간 쓰면서 귀와 입에 익어온 OB라는 정든 이름 대신 두산이라는 낯선 명칭을 새로 써야 했기에 팬들의 반발도 꽤 있었다. 팀명을 바꾸면서 반달가슴곰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유니폼과 로고를[5] 새롭게 공개했다.

1999년 시즌, 지난 시즌 엄청난 데뷔를 했었던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는 건재했고 여기에 더하여 3할 20홈런의 김동주, 3할3푼5리의 타율에 31홈런을 친 심정수(일명 우동수)의 활약을 펼쳤다. 시즌 초중반만 해도 압도적인 기세인 롯데에 크게 뒤쳐졌으나 후반기 시작과 함게 롯데가 9연패를 하고 처지자, 결국 마지막날 롯데와의 단두대매치를 이기고 드림리그 / 전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그에 따라 역시 마지막날 삼성에 져서 리그 매직리그 2위로 밀린 한화 이글스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삼성보다는 한화가 더 약한 상대로 여겨졌지만 웬걸, 한화를 상대로 무기력하게 4연패로 탈락하며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다. 사실 이 시즌은 전체 승률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최하위 쌍방울에게 무려 16승 1무 1패의 성적을 거뒀고, 하위권인 LG에게도 13승 5패[6]를 하는 등 하위권에게는 굉장히 강했지만 상위권인 삼성과 롯데에게는 상대 전적이 열세였다. 그에 따라 포스트 시즌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데 이러한 우려는 플레이오프에서 정민철-송진우-이상목-구대성 네 명으로 투수진을 굴리던 한화에게 스윕당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파일:external/www.donga.com/200410140265.jpg
V3
2000년 시즌, 우동수 트리오는 99홈런 308타점을 기록했고 마무리 진필중이 구원왕 2연패에 성공했으나 현대의 91승에 밀려 드림리그 성적은 2위. 전반기에는 10연승을 거두는 등 현대와 나란히 6할대 승률로 잘 나갔지만 선발진의 한계로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7][8] 삼성에 잠시 2위자리를 빼앗겨 매직리그 2위 팀과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를 위기였으나 9월초 8연승으로 반등하여 플레이오프 직행에는 성공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매직리그 1위 옆집 양반 LG에게 4승 2패로 승리하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고, 한국 시리즈에서는 1~3차전을 통틀어 3점 밖에 내지 못했으나 4~6차전을 모두 쓸어 담는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한국시리즈 리버스 스윕이 일어날 뻔 했으나 결국 7차전에서 톰 퀸란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고 패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당시 두산의 준우승에 대한 반향은 상당해서 많은 야구팬들이 베어스의 플레이를 일컬어 미라클 두산으로 불리웠고, 팀컬러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9]

2001년 시즌, 심정수선수협 사태로 심재학과 트레이드 되었으나 심재학은 그해 3할4푼4리에 24홈런 88타점, WAR로 봐도 약물의 힘을 빌린 펠릭스 호세 바로 다음인 2위로 대폭발하면서 심정수의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팀의 투수진은 처참할 정도로 무너졌다.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10승 투수가 한 명도 없었고 에이스 박명환과 외인 용병들도 부진했다. 그래서 페넌트레이스 3위를 일찌감치 확정짓게 된다. 그러나 이게 약이 되어 두산은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대비 체제로 돌입할 수 있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1차전에는 4:1로 뒤지다가 5회말 우즈의 동점 쓰리런과 홍원기의 친정팀 비수로 1승, 천적인 리스를 상대로 1회초 8득점으로 2승으로 가볍게 제치면서 1999년의 설욕을 한다. 플레이오프에서 전년도 우승컵을 내준 현대 유니콘스를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꺾게 된다. 그리고 두산은 내친김에 원년 상대인 삼성 라이온즈까지 4승 2패로 무너뜨리고 팀의 세번째 우승을 이룩해냈다. 92년 롯데 자이언츠와 함께 정규시즌 3위 팀이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를 전부 승리하고 우승한 두번째 사례이며 .508[10]의 승률은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팀 가운데 최저 승률 기록이기도 하다.[11] 덤으로 10승 이상의 투수가 한 명도 없는 팀의 유일한 우승이기도 하다.[12] 한편 이 해 극적인 우승으로 김인식 감독이 한때 두산의 종신 감독 보장설까지 돌기도 했다. 이 시즌의 상대전적을 보면 최하위 롯데에게 득실마진 -11로 밀리기도 했다.

2002년 시즌, 전년도와 달리 부진했던 외인 빅터 콜이 PS의 활약을 바탕으로 재계약을 했고 정규시즌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리고 2년간 개점 휴업한 박명환도 다시 돌아와 에이스 역할을 해 주었다. 그 덕에 전년도의 막장 선발진은 온데간데 없었고 10승 투수를 세 명 배출하여 전반기 2위로 순항 중이었으나 전년도 주포였던 우즈와 심재학이 영 시원찮은 성적을 거뒀고, 월드컵 이후 팀도 후반기 시작부터 9연패를 기록하고 특히 SK를 상대로 막판 6연패가 결정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와의 문학 2연전에서 모두 지면서 결국 전반기 2위에서 후반기 추락으로 LG에 정규시즌 4위를 내주고 5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다. 구단의 자금난으로 인해 선수단의 분위기가 크게 다운되며 시즌 후에는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마저 구단의 섭섭한 대우에 계약을 거부하고 일본에 진출하였고, 외인 원투펀치도 팀을 떠나고 마무리 진필중마저 KIA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13]

2003년 시즌, 전년도 주축 선수들의 대량 이탈과 더불어 홍성흔 등의 주전선수들도 부상으로 초반에 팀을 이탈하자 개막 8연패로 비극의 서막이 열린다. 결국 시즌 극초반에 사장과 단장이 전부 교체되고 팬들은 ‘성적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플랜카드를 걸기에 이른다. 그래도 부진은 계속되어 KBO 역사상 가장 늦은 43경기만에야 10승째를 신고했고, 첫 50경기에서 백골퍼의 롯데한테도 무려 8경기차로 뒤진 11승 39패라는 충격과 공포성적을 거둔다.[14] 후반기에 그나마 살아나서 한화한테 결정적인 고추가루를 뿌리고 정상적인 승률로 시즌을 마치기는 했지만 전반기에 워낙 까먹어서 7위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당시 지도자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선동열에 대한 각 구단의 영입 전쟁에 말려들어 김인식 감독은 9년간 이끈 두산 베어스 감독을 사임했다. 하지만 두산은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는데 실패했고[15] 내부 승격으로 배터리 코치였던 김경문을 새 감독으로 맞이했다.[16]

2.2. 김경문 체제(2004년 ~ 2011년)

김경문 감독 체제(2004 ~ 2011 시즌 중)
2004년 시즌 2005년 시즌 2006년 시즌 2007년 시즌 2008년 시즌 2009년 시즌 2010년 시즌 2011년 시즌
투혼!
승리!
감동!
아자!
허슬두!
파일:2006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스피두!
파워두!
허슬두!
파일:2008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09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0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1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2003년 시즌 7위에 그친 뒤, 무려 9년 동안 지휘봉을 잡았던 김인식 감독이 물러났고, 두산은 원래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받던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영입에 실패하면서 그 대안으로 1군 배터리코치였던 김경문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17] 김경문의 경우 딱히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 코치였는데다가 거기에 정수근의 이적 등으로 인해 2004년 시즌 시작 전만 해도 약체로 분류받았으나 이런 평가를 뒤엎고 두산은 정규 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 KIA에 2연승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의 삼성에게 1승 뒤 3연패로 탈락한다.

2005년에는 최종전에서 SK를 제치고 극적으로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해 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3연승하여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또 선동열의 삼성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문다. 6월까지 6할대 승률을 넘나들며 삼성을 제치고 1위에 올랐으나 7월 들어 8연패 부진에 빠진 뒤 8월에 SK에 2위를 빼앗기고 4위 한화에 턱밑까지 추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중순 KIA와의 전병두-리오스 트레이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오스는 기아에서 전반기 6승에 ERA 5점대였으나 두산으로 오자마자 후반기에만 9승을 거둬 ERA를 3점대로 낮추며 에이스로 등극했다. 이재우와 정재훈이 각각 홀드왕과 세이브왕에 올랐다.

2006년 시즌에는 간판 타자 김동주가 시즌 시작 직전 WBC에 참가했다가 어깨 부상을 입어 8월 중순에야 1군에 복귀했고,[18] 그나마 투수진에서 외국인 원투펀치 다니엘 리오스맷 랜들, 마무리 정재훈이 활약했으나 팀은 시즌 막판까지 KIA 타이거즈와 4위 싸움을 벌이다가 KIA가 후반기에 신용운-한기주를 엄청나게 굴리는, 이른바 '신한카드 카드깡' 을 마구 긁어서 4위를 기록, 두산은 5위로 밀려나버리면서 결국 우승했던 2001년보다 높은 페넌트레이스 승률(.512)을 기록하고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972680_STD.jpg
2008년 플레이오프 1차전 승리 후
2007년 시즌 두산은 22승을 거둔 다니엘 리오스와 12승을 거둔 맷 랜들의 원투펀치의 활약으로 정규 시즌 2위로 한화와의 플레이오프를 3연승으로 가볍게 이기고 2007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SK 와이번스에게 2연승 뒤 4연패로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전해 신한카드 카드깡을 마구 긁은 KIA는 결국 꼴지로 추락해, 엘롯기로 묶이는 대치욕을 겪게 된다. KIA 타이거즈/2007년 참고.

2008년 시즌 두산은 일본으로 리오스를 떠나 보내고 선발진에 약점을 드러냈고 정규 시즌 2위로 2008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1승 뒤 4연패로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물면서, 한때 콩산 베어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경문의 시대에 두산은 가을야구는 단골로 나가는 꾸준함을 보여줬지만[19][20], 정작 가을야구에서 우승은 단 한번도 하지 못했고, 그 기간 동안 자행된 KILL라인의 혹사는 팀에 큰 후유증을 남겨서, 김경문이 런한지 5년이 지난 2016년 시점에도 두산의 불펜은 리그에서 손에 꼽히게 약한 편이다. 거기다가 김경문은 마지막에 팀의 뒤통수를 치고 NC로 이적했기에, 그가 두산에서 쌓은 공적 또한 같이 버리고 떠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총평하자면, 과거 롤러코스터 팀의 이미지가 강했던 팀을 꾸준하게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팀으로 쇄신하는데 성공했지만 끝내 우승은 이뤄내지 못했고, 자신의 혹사 후유증이 리바운딩 되기 전에 팀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감독이었다. 그 혹사 후유증은 후임 김진욱 감독이 고스란히 떠안아서 선발진 정상화까진 성공했지만, 불펜진은 김진욱, 송일수, 김태형 3감독을 거치는 동안에도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다. 다른 팀들이라면 불펜의 주축이 되어줘야 할 30대 초반의 불펜 에이스급 투수가 두산에서는 김경문이 다 갈아버려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불펜진 리빌딩이 상당히 더디게 오래 걸리고 있는 현실이다.

이 기간 서울 라이벌 LG 트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도권 인기 구단으로 급성장했고 전체적인 시장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관중수에서도 앞서는 등 두 팀의 상황이 슬슬 역전되는 분위기. 이제 두 팀의 인기는 적어도 동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진 편이다. 이웃 팀인 LG가 6668587667를 찍을 당시에 두산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강팀으로 도약함에 따라 팬의 신규 유입이 LG보다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여성팬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2.3. 김진욱 체제(2012년 ~ 2013년)

김진욱 감독 체제(2012 ~ 2013)
2012년 시즌 2013년 시즌
파일:2012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3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김진욱 호는 출범부터 산적한 과제가 한가득이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혹사 끝에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 KILL 라인을 대신할 불펜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김경문은 재임 기간 내내 단 한명의 토종 선발 투수도 키워내지 못했기에, 김진욱은 불펜진, 선발진이 모두 답이 없는 최악의 투수진을 받아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파일:혼열일체두산.png
2013년 포스트시즌 하얀 물결 응원의 순간[21]
2012년 시즌, 일단 불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용병 투수 하나를 마무리 투수인 스캇 프록터로 영입해서 뒷문을 메웠고, 그 앞에 김경문은 선발로 정착시키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던 홍상삼을 기용해서 1점대 철벽 셋업맨으로 만들어내는 성공을 거두었다. 선발진은 재계약한 용병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와, 11년 시점까지는 토종 에이스였지만 12년부터 노쇠화가 시작된 김선우를 주축으로, 역시 김경문은 끝내 키워내지 못했던 노경은, 김승회를 선발 투수로 투입, 마찬가지로 김경문이 마무리로 쓰던 이용찬을 선발 투수로 투입해서 10승 투수로 만들어내면서, 두산도 5선발 체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에 힘입었는지 2012년은 두산 역대 최다관중 기록을 갈아치운 해로 기록되었다.[22] 그러나 정반대로 이 해 두산의 타격력이 역대 최악을 찍으면서, 두점 베어스라는 달갑지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고 이는 괜찮은 투수진을 가지고도 3위에 그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됐다.[23] 2012 시즌을 앞두고 팬들이 만들어준 영상이 있다. 두산 베어스 - 기적을 믿으시나요?[24]

2013년 시즌에는 김승회가 FA 홍성흔의 보상선수로 롯데로 가게 되었지만, 그 자리에 갑툭튀한 유희관[25]이 좌완 선발 자리를 꿰차면서 또하나의 솔리드한 선발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니퍼트-유희관 라인은 13년부터 17년까지 두산의 선발 라인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주었다. 타격에서는 경찰청에서 제대한 민병헌이 각성하고 기존 타자들이 작년의 부진을 떨처내며 1년만에 환골탈태, 잠실을 쓰면서도 팀 타율과 OPS 1위를 찍었다.[26] 이를 바탕으로 시즌 내내 상위권을 마크했으나, 스캇 프록터이용찬이 빠진 투수진, 특히 불펜이 전체적으로 헐거워져 압도적인 타격 성적에도 불구하고 치고나가지 못했고, 게다가 이 해는 4위까지 상위권 경쟁이 역대급으로 치열했기에 최종전에서 분패하면서 4위로 시즌을 마치며 작년과 마찬가지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넥센을 상대로 또 한번 리버스 스윕을 보여주며 준플레이오프의 진출 LG를 3승 1패로 꺾으며 5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3승 1패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내리 3연패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게 되었다. 선수들의 누적된 피로와 프록터가 빠져나간 불펜진은 두산의 아킬레스건이 되었고 준우승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김진욱 감독은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질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최악의 실책이 되어 버렸다.

2.4. 송일수 체제(2014년)

송일수 감독 체제(2014)
2014년 시즌
파일:2014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김진욱 감독이 전격적으로 경질되면서 2군 감독이자 1군 감독 경험이 전혀 없었던 송일수 감독이 1군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는 팀이 프런트 야구와 일본식 세밀한 야구를 지향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고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최악의 한수가 되고 말았다.
파일:2014 개막전 두산.jpg
2014년 개막전 칸투의 역전 스리런 후
2014년 시즌에 앞서 손시헌, 이종욱, 최준석이 FA로 팀을 떠났고 미래 4번타자 역할을 수행 할 것으로 기대됐던 윤석민도 넥센으로 트레이드 됐다. 김선우와 임재철은 LG로 떠났고 이혜천은 NC로 떠났다. 대대적인 선수단 정리와 바뀐 감독, 많은 걱정 속에 시즌이 시작되었다.

두산의 초반은 의외로 산뜻했다. 새롭게 영입한 타자 용병 칸투와 김현수, 홍성흔 등의 중심 타선이 폭발하면서 5월까지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노경은[27] 등 선발진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오현택, 윤명준 등 불펜이 혹사당하기 시작하며 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급해진 초보 감독이 택한 수는 번트였다. 주자가 출루하기만 하면 번트를 댔는데, 이게 결과론적으로는 선수들의 타격감을 망쳐놓은 꼴이 됐다. 더군다나 2014 시즌은 역대급 타고투저로, 번트로 악착같이 쥐어짜낸 1점은 상대의 장타에 뒤집히기 일수였다. 이걸 잘 지키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망가진 선발진과 혹사당한 불펜진은 짜내고 짜내서 얻어낸 1점을 지킬 수 없었다.[28]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6위까지 추락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마운드를 강력한 타선과 빠른 발, 견고한 수비로 지켰던 두산의 팀 컬러는 어느새 사라졌다.

위와 같은 2014년의 난맥상을 두산팬들은 흔히 일수강점기로 부른다. ‘강점기’라는 문구대로 두산 베어스와 두산팬에게 2014 시즌은 없는 시즌이라고 간주된다. 심지어 잠실 라이벌 LG보다 최종 순위가 뒤쳐졌는데 이는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29] 결국 송일수 감독은 취임 1년 만에 전격적으로 경질됐는데, 경질 당일날까지 마무리캠프를 구상 중이었다는 게 유머. 팬들은 전년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을 이 지경으로 망쳐놓고 계속 연임할 생각이었냐며 조소했다. 이듬해 고작 감독 하나 바뀐 두산 베어스가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그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졸장으로 남게 됐다.

2.5. 김태형 체제(2015년 ~ 2022년)

김태형 감독 체제(2015 ~ 2022)
2015년 시즌 2016년 시즌 2017년 시즌 2018년 시즌
파일:2015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6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7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18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2019년 시즌 2020년 시즌 2021년 시즌 2022년 시즌
파일:2019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teamdoosan2020.jpg 파일:2021 두산 캐치프레이즈.jpg 파일:2022 두산 캐치프레이즈.png

김진욱 감독 선임 당시 감독 후보 하마평에 올랐던 전 두산 배터리 코치이자 SK 배터리 코치인 김태형 코치가 송일수 감독의 후임으로 베어스 제10대 감독으로 선임 되었다. 김태형 감독은 팀 컬러를 되살리겠다고 선언했고 이기는 야구가 베어스의 야구라고 밝혔다.
파일:2015 한국시리즈 우승기.jpg
V4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61102_1478093002_99_20161102222405.jpg
V5
파일:두산베어스2019한국시리즈우승.jpg
V6
2015년 시즌 송일수 감독 이후 두산 베어스가 다시 예전의 전력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보았으나, 불과 한 시즌만에 이전보다 한층 발전된 전력과 팀 컬러를 보여주며 14년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 선수 니퍼트, 마야, 루츠 모두 하나같이 좋지 못했는데, 니퍼트는 부상으로 시즌 반 이상을 못 나왔으며, 노히트 노런을 보여준 마야는 대기록 이후 부진 끝에 결국 스와잭으로 교체되었으며, 스와잭 역시 인상적인 모습은 아니었고 포스트시즌에선 태업까지 했다. 루츠는 최악의 타격으로 시즌 1호로 퇴출당했고, 대체 선수 로메로도 그냥저냥 애매한 활약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외국인 선수도 없이 시즌을 치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내 선수들도 사정들은 마찬가지였는데, 시즌 초 낙점된 마무리 윤명준은 불안했고, 홍성흔의 타격감은 최악이었으며, 노경은은 부상과 개인사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 영입한 장원준은 18승을 거둔 유희관과 함께 투수진의 주축이 되었고, 포스트시즌에 부활한 니퍼트의 완벽투, 새 마무리 이현승의 폭발, 가을남자 허경민의 활약, 새로 취임한 김태형 감독의 뚝심으로 3위부터 치고 올라왔다. 이어서 팀 상태가 말이 아니던 정규시즌 1위 삼성을 4승 1패로 격파하며 업셋 우승, 14년 동안 염원했던 V4 달성에 성공했다.

2016년 시즌은 가히 구단 역사상 최고의 시즌으로 불릴 만한 완벽한 시즌이었다. 볼티모어로 떠난 김현수의 공백을 박건우김재환이 완벽하게 매웠고, 2015 시즌 후반기부터 조짐이 보이던 오재일이 기어코 폭발했으며, 민병헌, 양의지도 연이어 정상급 활약을 펼치면서 매서운 타선을 보여줬다. 니퍼트, 장원준, 보우덴, 유희관으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판타스틱 4로 명명되어 KBO 역사상 최초로 한 구단에서 15승 투수가 4명 배출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또한 93승으로 현대가 가지고 있던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며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 당해 한국시리즈에서도 NC를 상대로 4연승으로 스윕하며 21년 만의 통합 우승이자 V5를 달성했다.

2017년 시즌은 시즌 전 WBC 국가대표로 8명이나 차출되면서 시즌 출발이 매우 안 좋았다. 특히 대체 선수로 유독 두산 선수들이 많이 차출되면서 국가대표팀에서도 스프링 캠프에서도 질 좋은 훈련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두산은 지난해 압도적인 성적에 못 미치는 초라한 전반기 성적을 보여줬다.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두산의 순위는 1위 KIA에 13게임차 뒤진 5위. 하지만 두산은 후반기 들어 완벽한 반전을 이끌어낸다. 올스타 브레이크를 전후로 반등을 시작하더니 후반기에만 무려 7할 승률(42승 2무 18패)을 기록하며 1위 KIA를 맹렬히 추격했다. 두산의 약진과 KIA의 부진이 겹치면서 9월 한 때[30] 공동 1위로 올라서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전에서 KIA가 승리하고 두산은 패하면서 정규시즌 우승에 실패한다. 이후 플레이오프에 직행, 오재일의 홈런쇼로 NC를 3승 1패로 꺾고 3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한국시리즈서 KIA에 1승 뒤 4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한국시리즈 3연패도 좌절.

2018년 시즌은 출발부터 좋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고 시작하자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는 정규시즌이였다. 용병 전원 교체와 맞물려 걱정이 앞섰지만, 그 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린드블럼니퍼트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팀의 1선발로 우뚝 솟았으며, 파트너인 후랭코프는 데뷔 첫 해 다승왕과 승률왕을 거머쥐며 리그 최고의 외인 원투펀치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국내 토종 선발 중에는 장원준유희관이 예년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보직전환이 신의 한 수가 된 이용찬과 영건 이영하가 토종 선발진을 책임졌고, 불펜에서도 베테랑과 영건들의 신구 조화가 남달랐다. 베테랑 김승회, 이현승, 그리고 영건 곽빈, 박신지, 박치국, 함덕주 등이 허리를 단단히 지켜냈다. 타선 부분에서는 용병타자 2명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활약을 하였지만, 두산 베어스는 정규시즌 역대 최고 팀타율 0.309를 세우며 KBO 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다. 외국인 타자 없이 7명의 3할 타자를 배출했다.[31] 정규시즌 거의 모든 타자가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며 KBO 한시즌 최고 팀 타율, 팀 최다 안타, 팀 최다 득점, 팀 최다 타점을 경신했다. 시종일관 정규시즌을 압도한 두산은 최다 승 타이기록인 93승을 거두며 2위 SK와 14.5경기차의 압도적인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통합 우승 달성의 기대 속에 맞이한 2018년 한국시리즈. 하지만 우승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정규시즌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두산의 모습과 좀처럼 이해를 할 수 없는 감독의 선수 운용으로 SK에게 역대 최다 경기차 업셋을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박건우·김재호 등 부진+김재환 부상+집중력 부족, 두산베어스 '불운의 끝'

2019년 시즌은 2년 연속 준우승+양의지의 FA 이적으로 암울하게 출발하였다. 하지만 양의지의 보상 선수였던 이형범이 불펜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지난 한 해 도움을 받지 못했던 외국인 타자 쪽에서도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가 지난해 악몽을 잊게 할 만한 뛰어난 활약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3월과 4월 초중반까지는 SK와 1위 싸움을 하였다. 그러나 SK가 승승장구했던 거와 대조적으로 두산은 부진하기 시작하며, 그 결과 1위에서 멀어져 나갔고, 결국 키움에게 2위까지 빼앗기며 1위 SK와 9게임차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키움과 치열한 2위 쟁탈전으로 결국 2위를 탈환하고, SK와의 경기차를 좁히며 9월에 들어섰다. 9월에 두산은 SK와의 더블헤더를 다 잡는 등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며 부진에 빠져 있던 SK와 끝내 0게임차 공동 1위를 만들어냈지만, SK가 한화전을 싹쓸이하며[32] 결국 두산이 NC를 꺾어야 했다. 10월 1일, NC가 와일드카드를 위해 주전을 빼고 1.5군으로 플레이 할 것이다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NC는 불펜을 총동원시키며 두산을 강하게 압도하였고, 8회에 2:2 동점 상황에서 3득점을 하며 5:2로 스코어를 만들었다. 그렇게 2위로 끝날것 같았으나 미라클 두산이 기적을 만들었다. 두산은 허경민 등의 주축타자로 끝내 5:5를 만들었고, 9회에 박세혁의 끝내기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더니, 당해 한국시리즈에서도 1,2차전을 모두 끝내기로 승리하고 4차전에서는 5점차를 뒤집고 4연승을 거두며 V6을 이루어냈다! 그야말로 미라클 두산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2010년대의 마지막 해를 찬란하게 마무리지었다.

김태형 감독이 지휘하는 현재, 두산은 전력만 향상된 것이 아니라 구단과 팬 사이의 의사소통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즉, 성적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구단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대세이자 필수가 된 마케팅으로써의 SNS와 유튜브 활용이 시작됐는데, 가히 전 구단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33]특히 구단 자체 채널인 베어스포티비의 컨텐츠는 다른 구단 유튜브 채널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다.

2020년 시즌 들어 모기업인 두산중공업의 자금난으로 인해 팀을 매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때 야빠들, 정확히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판치는 썰쟁이들을 중심으로 카카오를 많이 거론하기도 했지만, 정작 카카오는 야구단 운영에 관심이 아예 없고[34] 인수 자체를 부정하면서 단단히 못을 박았다. 카카오 '베어스 인수' 야구팬들 기대…카카오 "검토 안해" 2020년 7월 9일에는 OB맥주의 인수 제안을 두산이 거절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OB맥주 측에서 즉각 '검토‧논의조차 없었다'며 반박했다. 그리고 훗날 이때 실제로 접근한 기업이 있었다는 사실이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실제로 신세계그룹SK 와이번스 인수 전에 키움 히어로즈두산 베어스에 먼저 접근 했으며, 후속 기사로 신세계 외 2개 그룹이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두산빠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두산베어스 매각설이 나돌자 신세계뿐만 아니라 2개의 그룹사가 더 인수를 타진했다는 사실이 27일 밝혀졌다. 2개 그룹사는 D사와 H사였다. D사는 현금 동원력에다 탄탄한 재무구조로 업계 신용도가 있었고, H사는 최근 수년 동안 활발한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해 왔다.
조선일보. 2021년 1월 28일. 두산베어스 매각설 돌때, 신세계 외 2개 그룹도 원했다

그러나 두산과 채권단이 결국 2023년까지 경영 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핵심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을 제외하고 밥캣, HD현대인프라코어 등과 같이 매각하겠다는 특별약정체결을 진행해 매각 가능성은 점점 현실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도 전술했듯이 야구단 인수를 할 만한 기업이 현실적으로 없기에, 만일 인수 기업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키움 히어로즈처럼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없어서 자체적인 야구단 운영으로 연명하는 중소기업'으로 전락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그마저도 유지하지 못한 채 구단 자체가 해체되고 선수들은 해체 드래프트를 통해 9개 구단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모기업은 두산 중공업을 제외한 모든 자산권을 매각한 상태이며, 2군 구장 베어스 파크를 매각 후 재임대하였다.

한편 비시즌 중이던 2021년 1월 25일, SK 와이번스신세계그룹에 매각된다는 소식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두산 베어스를 샀으면 좋았다는 말도 있었는데, 사실 신세계는 원래 와이번스가 아닌 베어스를 사려고 했었다. 가장 큰 서울이라는 시장과 강한 구단 전력, 그리고 대형 팬층이 있어서 메리트가 있었고, 위에 나와있듯이 모기업이 자금난에 빠졌는지라 말 그대로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박정원 회장이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 구단만큼은 못 판다." 태세인지라 두산이 매각을 거절했다.

두산빠들은 이 소식에 대체로 부정적인데, 모기업도 구단도 힘든 상황에 자기만족을 위해[35] 구단을 붙잡고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 같은 이유로 그룹 관련인들도 좋게 보지 않는다.[36] 이번 와이번스의 인수액이 1,352억인데, 두산의 최근 성적, 인기, 연고지 등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금액이 책정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를 감수하고 투자를 보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기업이 나타났는데 그 기회를 걷어찬 것. 팀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면 몰라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고, SK라는 굴지의 대기업도 야구판에서 발을 빼는 마당에 탄탄한 대기업이 1,000억 이상을 들여 구단을 사는 일이 앞으로 얼마나 있겠는가? 만약 두산이 더는 팀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팀을 매각해야 하는데, 당장 현대도 인수가 안 돼서 화려한 역사를 포기해야 했고, 두산도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37]

그래도 2021년 1분기 두산두산중공업의 영업이익이 각각 403%, 558% 증가로 두산중공업은 11분기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으며#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탈원전 전면 폐기 공약이 포함되어 있어 두산중공업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매각 가능성이 점점 멀어질 가능성 또한 있다.

2022년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FA의 유출, 화수분의 바닥, 주전들의 부진 등이 한꺼번에 합쳐지면서 팀 창단 사상 최초로 9위를 달성하고 말았다.

2.6. 이승엽 체제(2023년 ~)

이승엽 감독 체제 (2023~)
2023년 시즌
파일:2023 두산 캐치프레이즈.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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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집 LG 트윈스도 1994년까지는 '럭키금성 프로야구단 LG 트윈스'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썼다.[2] 똑같은 원리로 구단 작명에 나선 사례가 빙그레 이글스였다. 그 당시 한국화약그룹은 방위 산업 중심의 기업으로서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고 방산기업 특성상 일반인에게 굳이 홍보하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식품 계열사 빙그레를 구단 명칭에 넣은 것이다. 물론 훗날 김승연-김호연 형제의 분쟁으로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계열분리되어 떨어져나가면서 야구단은 한화그룹에 남았고, 1993년 11월 팀명을 한화 이글스로 바꾼다.[3] 항간에는 IMF 사태 이후라고 많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안그래도 저수익 산업 매각하고 고수익 산업으로의 체질개선을 하려 했는데 1991년 경북 구미시에 있던 두산전자 공장에서 일으킨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으로 인해 그룹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을 계기로 진행 중이였던 체질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이미 1990년대 중반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먼저 시작해서, 그때까지도 입도선매 차원에서 사업 확장을 일삼던 타 재벌그룹과는 달랐다. 이랬던 탓에 정작 IMF 외환위기 시절에는 오히려 타격이 적었다.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진행된 이후이니. 당장 수익 안 나는 부동산을 제법 가지고 있던 타 재벌그룹이 생존을 위해 외환위기 당시 급하게 헐값에 부동산들을 매각하던 것과는 달리 두산은 적극적으로 움직여 OB맥주 영등포공장 같은 알짜 부동산도 미리미리 제값 받고 매각했다.[4] OB맥주는 90년대 후반 지분 50%를 벨기에 인터브루 사에 매각한 데 이어 2003년 나머지 지분마저 모두 정리하면서 OB맥주와 연을 끊었다. 두산주류는 2008년 롯데에 매각했고, 버거킹은 2012년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KFC마저 2014년에 매각하면서 두산그룹은 식품 사업에서 아예 손을 뗐다.[5] 이 유니폼과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손혜원이다. 여담이지만 손혜원은 비슷한 시기 두산주류에서 출시했던 소주 브랜드인 산소주의 로고 디자인도 담당하는 등 두산그룹과 인연이 꽤 있다.[6] LG는 롯데엔 사직에서 4연전을 모두 이기고 LG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또 롯데에 승리하는등 10승 8패로 앞서 두산이 드림리그 1위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줬다.[7] 데뷔 13년만에 처음으로 10승투수가 된 만 35세의 노장 이광우가 1선발이었다. 좌완 외국인 투수 마이크 파머는 전반기 9승을 했지만 후반기에 기나긴 아홉수 끝에 1승만 올려 간신히 10승에 그쳤다. 규정이닝과 10승을 채운 투수는 둘 뿐이었고 현대 쓰리펀치에 비해 이닝 소화력이나 내용이 떨어졌다. 현대는 정민태-임선동-김수경이 190이닝 이상+18승을 올렸다.[8] 이러한 문제로 인해 현대, 삼성, LG, 롯데 등 5할을 넘긴 상위권 팀들과의 상대전적에서 모두 열세를 기록했다. 대신 투수력이 약한 하위권팀인 해태와 한화, SK를 미친듯이 두들기며 승패마진을 메웠다. SK에 17승2패, 한화-해태에 13승6패를 했다.[9] 1995년 시즌 말미 두산의 전신인 OB가 잔여 경기 14경기중 8연승 및 12승 2패를 하며 당시 선두 LG를 반게임차로 꺾고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하면서 부터 기적의 OB라고 불리워지게 된다. 그리고 1998년 당시에도 5위였던 팀이 똑같이 8연승을 하면서 가을 야구에 진입하였었다.[10] 심지어는 포스트시즌을 탈락한 2006년의 승률(.512)보다 낮다! 우승한 이듬해 2002년 두산은 66승 65패 2무로 5위(승률 .504)에 그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는데 사실 승률은 우승한 전년도보다 고작 .004가 낮을 뿐이었다.[11] 다만 정규시즌 3위는 꽤 이른 시점에서 확정했는데 아래 5팀의 시즌 막판 페이스가 좋아서 경기차가 적어 보이는 것이다.[12] 이 해 두산의 최다승 투수는 마무리 투수인 진필중의 9승이었다. 거기에 한국시리즈에서도 선발승은 단 한 번도 없었다.[13] 진필중은 사실상 이 때부터 하락세가 시작되었다.[14] 무려 원년 삼미와 같은 전적이다. 참고로 18연패를 찍은 20한화의 첫 50경기 성적이 12승 38패이다. 두산은 11승 39패 직후 다음 세 경기 옆집 라이벌인 LG를 상대로 스윕승을 한다.[15] 선동열은 스승인 김응용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수석코치로 1년간 지내다가 이듬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된다.[16] 원래 베어스 창단 멤버였다. 말년에 잠시 태평양 돌핀스에서 뛴 것과 삼성 베터리 코치를 역임이 전부였고 97년 이 후 친정 팀으로 찾아온다.[17] 이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2003년 당시 선동열 KBO 홍보위원이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상태였고, 당연히 그 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잠실 라이벌 LG와 두산 역시 기존에 감독을 맡고 있던 이광환김인식 감독을 퇴진시키면서까지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준비를 해 두었으나, 정작 선동열은 스승인 김응용 감독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가버리고 만다. 결국 멀쩡한 감독을 내친 셈이 되었고, 이에 두산은 김경문을, LG는 주루코치였던 이순철을 감독으로 내부 승격시켜 급한 불을 껐다.[18] 원래 김동주는 2006년 시즌이 종료되고 FA가 될 예정이었는데 이해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날린 탓에 FA 취득일수가 1년 뒤로 밀리고 말았다. 당시 시즌 시작 전만 해도 일본 진출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는데, 이 정도로 2006년은 김동주에게 상당히 아까운 해였다.[19] 다만 김인식 감독 시절의 두산도 98~01까지 승률 1위 한번(99년)을 포함하여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이미 강팀 대우는 받는 팀이었다. 김경문 감독 시절에야 두산이 약팀에서 강팀으로 부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20] 하지만 당시 2002년의 부진과, 2003년 최악의 성적을 내면서 당시 두산은 분명 약팀으로 불릴 정도로 좋지 못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수분 야구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정착시켜서 다시 강팀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진 게 김경문 감독 체제였다.[21] 이 당시 포스트시즌 이벤트 캐치프레이즈가 혼연일체, 최강두산! 으로 방문하는 팬들에게 흰색 유니폼과 응원도구를 가져와 줄 것을 부탁했다. 감동의 흰색물결로 혼연일체되어 우승을 쟁취하자는 취지.[22] 리그 전체적인 흥행 요인으로는 박찬호, 김병현, 김태균 등 해외파의 대거 국내 복귀도 있었는데 박찬호가 잠실에서 등판했을 때 평일임에도 매진을 이루기도 했다.[23] 사실 2012년은 KBO에서 투고타저가 가장 심한 해였다. 그러나 그를 감안해도 이 해 두산은 OPS 0.673으로 팀 타격 꼴찌였다. 이 해 두자릿수 홈런 타자는 윤석민 딱 하나였으며 김현수가 각성한 2008년 이래 3할에 실패한 유일한 해이다.[24] 2019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그 당시 두산의 주축 멤버들이 많이 등장하는 팬의 헌정영상이다.[25] 원래는 잠시 부상으로 이탈한 니퍼트의 대체 선발이었지만 첫 경기부터 승리투수가 되며 로테이션을 꿰찼다.[26] 이 해부터 다시 다져진 강력한 타선은 이후 2018시즌까지 리그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으며 베어스 최강의 무기가 된다.[27] 100이닝을 넘기면서 이닝보다 자책점이 많은 최악의 시즌을 치렀다.[28] 드넓은 잠실이 피홈런을 줄여주었을 뿐, 2루타와 3루타가 매 경기마다 쏟아졌다.[29] 가을야구 탈락이 확정된 경기가 LG전이었다. 하지만 3년 뒤 LG를 상대로 승리해 LG의 가을야구 실패를 확정지으며 똑같이 설욕했다.[30] 9월 24일[31] 민병헌의 공백으로 인한 우익수 자리, 시즌 초 부진 오재일 제외.[32] SK는 한화한테 1경기만 패했어도 두산이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짓는다.[33] 단순히 KBO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프로야구 구단 유튜브 채널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구독자 수를 보유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말 다 한 셈이었다.[34] 창업주 김범수골프에 관심이 더 많다.[35] 알다시피 박회장은 야빠로 유명하고, 팀에 대한 애정도 깊다. 사정이 여유로우면 NC의 김택진처럼 최고의 구단주가 될 수 있었다.[36] 두산 이해관계자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본지는 한참 됐다. 장원준과 수십억 계약을 하고도 1년도 채 안 되어 20대 직원도 명퇴시킨 시점에서 이해관계자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나빠질대로 나빠진 상황이다.[37] 그러나 많은 팬들 및 매체들은 SK가 신세계에 야구단을 넘긴 것이 신세계니까 가능했다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는 돌려 말하면 신세계 말고는 마땅히 들어올 만한 대기업이 없다는 뜻이다. 상호출자제한 기업 집단에 속한 대기업들 중 현실적으로 두산 베어스를 인수할 기업은 없다. 썰쟁이들이 목놓아 부르짖는 네이버와 카카오는 당연히 말할 필요 없다. 금융권은 더욱 가능성이 없는 것이, 별도 법인을 만들어야 하는 프로 스포츠단을 보유할 수 없어서 키움증권처럼 스폰서 형식 말고는 방법이 없다. 대전 하나 시티즌은 뭔데?